불교관련

조계종

수선님 2020. 4. 5. 11:44

현재 한국불교에는 조계종을 제외하더라도 많은 불교 종단이 있습니다. 각 종단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을 근본으로 삼지만, 각 종단마다 독특한 종지(宗旨)와 종풍(宗風)을 갖고 있습니다. 종단의 명칭은 종지와 종풍에 따른 경우가 많습니다.

조계종(曹溪宗)의 종지는 선(禪)을 그 본체로 한다는 것입니다. 조계종헌 제2조에 나와 있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말은 선종(禪宗)에서 근본으로 삼는 것입니다. 사실, 조계종에서 말하는 조계(曹溪)라는 단어는 중국 선종의 6대 조사(祖師)로 추앙받는 혜능선사가 설법을 하던 지명을 말합니다. 때문에 혜능대사를 일컬어 '조계(曹溪) 혜능(慧能)'이라고도 합니다. '조계'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 곳이 우리나라에도 있는데 순천 송광사를 일러 조계산(曹溪山) 송광사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즉, 명칭에서 유래하듯이 조계종은 선종의 초조(初祖)인 달마대사로부터 6조 혜능 대사에 이르러 구축된 선종(禪宗)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부터 출발된 선종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이라는 종단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1. 달마에서부터 혜능까지

선의 전통은 인도에서 비롯되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불교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전해지는 선불교는 중국 선종이 이룩한 성과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중국 선종은 불교의 근본사상을 바탕으로 중국 특유의 사유체계에 의해 완성된 또 다른 불교라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선종은 경전의 주석적 연구에 치중하는 교종(敎宗)과 달리 경전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오직 마음의 깨달음을 중시하면서 선종의 독자적인 조직과 수도규칙을 확립하고 토착 중국불교의 최대 종파로 발전하게 됩니다. 중국의 선을 말할 때면 의례 달마대사를 연상합니다. 중국의 선은 달마대사, 즉 보리달마(菩提達磨)로부터 비롯됩니다.

달마대사는 서역으로부터 520년경 중국에 도착하여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 동안 면벽수행을 하였으며, 선종 2조(祖)인 혜가(慧可)에게 법을 전수하고서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달마대사가 추구한 선(禪)은 완전한 지혜, 즉 반야(般若)로서의 공(空)을 근간으로 하는 대승선(大乘禪)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달마 대사의 선은 2조 혜가, 3조 승찬(僧瓚),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 6조 혜능(慧能)으로 이어집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선불교는 혜능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조계종(曹溪宗)은 달마대사에서 시작하여 혜능에 이르러 성립된 선종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것입니다.

2. 9산선문(九山禪門)의 개창

조계종헌 제1조에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중창을 거쳐 태고(太古) 보우국사(普愚國師)의 제종포섭(諸宗包攝)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나라에 전래된 선종은 도의국사가 개산(開山)하여 보조국사, 태고 보우국사에 의해 중창되어 현재의 조계종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많은 스님들이 선(禪)을 종지로 하여 불교를 이끌어 왔음은 물론입니다.

중국에서 발전된 선종(禪宗)은 신라시대 말기에 이르러 우리나라에 전래됩니다. 신라 말 혜공왕 이후로 국가가 혼란해졌습니다. 사회가 혼란해지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세력과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게 됩니다. 선종은 이 시기에 중국 당나라로부터 전래되어, 교학 위주였던 신라교단에 불교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면서 등장합니다.

이 때 부터 고려 초기에 이르기까지 선을 표방하는 9개의 선문(禪門)이 개창되었습니다. 이를 일컬어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 합니다. 이중에 해동(海東) 조계종조(曹溪宗祖)로 추대되는 도의국사는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산하였습니다.

도의국사는 중국 선종 6조의 법통인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법을 이어받아 신라에 선을 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의 불교계는 화엄·법상 등 교학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선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도의국사는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하면서 법을 이어가게 됩니다. 지금도 양양 지역에 도의국사가 머무르셨던 진전사 절터와 도의국사 부도 탑이 남아 있습니다.

도의국사에서 시작된 선종은 고려시대 보조지눌 스님에 이르러 그 종지(宗旨)를 명확히 하기 시작합니다. 지눌스님은 고려 의종 시대에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불교계는 왕권과 결합하여 교단이 혼란스러웠으며,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의 극심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보조지눌은 뿌리 깊은 선과 교의 갈등과 피폐한 교단의 상황을 직시하고 승가의 수행가풍을 되살리기 위해 스스로 선과 교를 폭넓게 수학하는 정혜결사(定慧結社)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보조지눌은 "세존께서 설하신 말씀은 곧 교(敎)이며 조사들에게 마음으로 전한 것이 곧 선(禪)이다"라는 확신을 갖고 화엄사상과 간화선(看話禪)을 회통(會通)하여 한국불교의 사상적 척도를 한층 높이는 초석을 마련하였습니다.

태고보우(1301-1382) 선사는 오늘날 한국 선종 법맥과 전통을 대표하는 대한불교 조계종 법맥의 원류에 위치하고 계십니다. 보우선사는 임제의현(臨濟義玄)의 선사상과 법맥을 수용하여 고려 시대에 접어들어 분열과 갈등을 보이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통합하였습니다. 당시 구산선문을 통합하여 하나의 선문으로 일치시킴으로서 선문을 중흥하고 선가(禪家)의 청규(淸規)인 「백장청규」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간화선 중심의 산문을 확립하였습니다.

혜능이후의 선법을 이어간 임제의현의 선사상과 법맥을 고려 선종에 도입하여 창조적인 발전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간화선(看話禪), 화두선(話頭禪)의 선 맥을 해동(海東)에 확립한 것입니다.

3. 근대 조계종의 성립

「도의선사 - 지눌국사 - 보우국사」로 이어진 선의 갈래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숭유억불정책으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서산대사, 사명대사를 필두로 하는 선사들이 있었으나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그 맥이 끊길 위기에까지 처하게 됩니다.

하지만, 선 맥을 다시 일으킨 분이 있으니 이분이 근대 선종의 중흥자로 추앙받는 경허성우(鏡虛惺牛)선사입니다. 경허 선사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에까지 조계종의 법맥이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허선사의 투철한 선 체험과 활동에 힘입어 시작된 한국 선가(禪家)의 선불교운동은 1년에 두 차례의 정기적인 수선(修禪) 안거(安居) 전통을 회복했으며 선풍을 확립하였습니다.

현대의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한불교 조계종」은 1950년대 '불교정화운동'의 과정을 거치면서 성립되었습니다. 식민지시절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불교를 친일 화·왜색 화시키기 위한 일련의 작업을 벌여 나갑니다. 한국불교를 일본 종파에 흡수하려하거나, 한국불교를 왜색 화시키려는 작업을 진행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항하여 한국불교는 '임제종 운동'과 '선학원 창건'을 통하여 전통을 이어나가는 운동을 벌여 나갑니다. 불교정화운동은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일제치하에서 친일 화·왜색 화된 불교를 청산하기 위한 운동에서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1962년 「대한불교 조계종」이라는 하나의 종단으로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조계종은 혼란과 이를 극복하려는 개혁이 이어지는 가운데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되어 현재에까지 이르러 선종의 맥을 이어가고, 역대 선지식들이 잡았던 화두를 부여잡아 깨달음을 향한 치열한 정진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4. 현재의 조계종

마지막으로 현재의 조계종 조직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위로는 종정(宗正)스님과 원로회의 의원 스님을 모시고, 행정체계로는 전국 25개 교구본사와 중앙종무기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종정(宗正)스님과 원로의원 스님

종정(宗正) 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을 대표하는 최고 수반으로서 조계종의 종통(宗統)을 계승하는 최고의 권위를 지닙니다. 조계종 종정스님은 종단 최고의 예우를 받을 뿐 아니라 국민적인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기에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는 스님은 모두 당대 최고의 선사들입니다

원로의원스님 역시 종단 내에서 후학들에게 모범이 되고 수행이 깊으신 분들로서 추대됩니다. 종정스님과 원로의원스님들은 엄격한 추대기준과 대한불교 조계종의 선풍을 대표하는 만큼 일생 동안 청정한 수행과 덕망을 쌓은 스님 중의 스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62년 조계종단 출범이후의 역대 종정 스님들입니다.

제1대 종정 : 효봉 대종사

제2대 종정 : 청담 대종사

제3대 종정 : 고암 대종사

제4대 종정 : 고암 대종사

제5대 종정 : 서옹 대종사

제6대 종정 : 성철 대종사

제7대 종정 : 성철 대종사

제8대 종정 : 서암 대종사

제9대 종정 : 월하 대종사

제10대 종정 : 혜암 대종사

제11대 종정 : 법전 대종사(현재)

◈ 25개 교구본사

전국에는 많은 사찰이 있습니다.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 법보사찰(法寶寺刹) 해인사,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 등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찰은 조계종 소속입니다. 조계종은 이들 사찰들을 25개 교구본사와 이에 소속된 말사로 구분하여 행정체계를 갖습니다. 즉, 말사는 본사에 소속되고 본사는 중앙종무기관으로 이어지는 행정 조직을 갖춘 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직할교구: 조계사.

제2교구 : 용주사 /제3교구 : 신흥사 /제4교구 : 월정사 /제5교구 : 법주사

제6교구 : 마곡사 /제7교구 : 수덕사 /제8교구 : 직지사 /제9교구 : 동화사

제10교구: 은해사 /제11교구: 불국사 /제12교구: 해인사 /제13교구: 쌍계사

제14교구: 범어사 /제15교구: 통도사 /제16교구: 고운사 /제17교구: 금산사

제18교구: 백양사 /제19교구: 화엄사 /제20교구: 선암사 /제21교구: 송광사

제22교구: 대흥사 /제23교구: 관음사 /제24교구: 선운사 /제25교구: 봉선사

◈ 중앙종무기관

조계종 중앙종무기관은 현재 조계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입법기구로서 중앙종회(中央宗會)가 있으며, 행정기구로서 총무원(總務院)·교육원(敎育院)·포교원(布敎院)이 있습니다. 총무원은 조계종의 대표적인 행정기관이며, 교육원은 스님들 교육을 담당하고 있고 포교원은 불교의 근간인 포교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기관입니다. 또한 사법기관으로 호계원(護戒院)이 있습니다.

<조계종의 소의경전>

대한불교조계종 종헌[宗憲]에 “본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의거하는 경전]은『금강경』과『전등법어』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소의[所衣]란 ‘의지할 바 대상’을 말하며, 소의경전은 개인이나 종파에서 신행[信行]·교의[敎義]상 의거하는 근본경전을 뜻합니다.

소의경전은 불교에만 있는 개념입니다. 다른 종교는 대부분 1개의 성전을 가지고 있으나 불교는 8만4천의 방대한 경전을 가지고 있고, 이 다양한 경전들은 다양한 근기[根機]의 중생들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다양한 길을 가르치고 있으므로, 자신들 근기에 맞는 경전을 중시하는 체계가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화엄종[華嚴宗]은「화엄경」,천태종[天台宗]은「법화삼부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조계종[曹溪宗]은『金剛經』을 소의경전 으로 삼고 있습니다.

조계종이「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까닭은,「금강경」은 존재의 실상인 공(空)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6조 조계 혜능조사께서 항상 곁에 두고 읽으셨으며, 제자들에게 금강경을 널리 의지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조계종이 소의(所衣)로 삼고 있는 것은『전등법어,傳燈法語』입니다.

전등(傳燈)이란 전법(傳法)과 같은 말로, 등이 차례로 켜져 꺼지지 않는 것처럼 법(法, 곧 敎)을 받아 전승하여 끊어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전등법어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가섭존자(迦葉尊者)를 비롯한 많은 역대조사(祖師)들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이어진 법맥(法脈)이 중국으로 건너와 보리달마 대사로부터 6조 조계혜능 대사로 이어지고, 이어 신라시대의 도의선사, 고려조 태고와 보우선사, 조선시대 청허휴정(서산대사),부휴 등의 양맥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법맥이 이어 내려오는 소의경전은 선종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조계종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편 조계종 종헌에서는 ‘「금강경」과「전등법어」이외에 기타경전의 연구와 염불, 지주(持呪)등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하여 화엄(華嚴), 법화(法華), 정토(淨土), 밀교(密敎)등 불교의 다양한 측면을 인정하고 통합하는 통불교적(通佛敎的)전통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소의경전:『금강경(金剛經)』,

*전등법어:『육조단경』,『마조록』,『임제록』,『벽암록』등

◈금강경(金剛經)

금강반야바라밀경·금강반야경이라고도 한다. 인도 사위국을 배경으로 제자 수보리를 위하여 설한 경전으로, 한곳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고 항상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일으키고, 모양으로 부처를 보지 말고 진리로서 존경하며, 모든 모습은 모양이 없으며 이렇게 본다면 곧 진리인 여래를 보게 된다고 하였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범 소 유 상 개 시 허 망 약 견 제 상 비 상 즉 견 여 래

■금강경 사구게(四句偈)

무릇 모양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불 응 주 색 생 심 불 응 성 향 미 촉 법 생 심 응 무 소 주 이 생 기 심

응당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 지니. 응당 모양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않고, 응당 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도 머물러 마음을 내지 않나니, 모름지기 머무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어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 이 색 견 아 이 음 성 구 아 시 인 행 사 도 불 능 견 여 래

만약 모양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 체 유 위 법 여 몽 환 포 영 여 로 역 여 전 응 작 여 시 관

일체 유의법은 꿈과 환상이며, 물거품이고 그림자와 같고, 또한 이슬과 같으며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觀)할 지어다.

◈육조단경(六祖壇經)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근본이 되는 선선(仙書) 달마(達磨)에 의해서 시작된 중국 선의 흐름은 6대째가 되는 혜능(慧能)에 오게 되면『금강경』의 반야사상에 근거한 새로운 경향을 띠게 되는데, 이 혜능을 등장인물로 하여 대상의 모양이나 불성의 근본에 집착하지 않은 활달, 자재로운 좌선을 강조하며, 견성(見性)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달마의 전통이 남종선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서술 되었다.

이 책은 불교 경전이 아니라 중국의 선사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가필(加筆),보충한 형태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나 돈황께서 출토된 것이 가장 오래되어 이를 기준으로 초기 선종의 흐름을 파악하였다. 한국의 선종도 중국의 남종선에서 유래한 까닭에, 일찍부터 이 책이 유행하여 이제까지 밝혀진 목판·판각(板刻)종류만도 20종이나 되며, 주로 덕이본(德異本)이 유통되어 왔다.

◈마조록(馬祖錄)

마조스님에 대한 기록은 『조당집(祖堂集),952)』을 비롯하여 『종경록(宗鏡錄,906)』『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1029)』『송고승전(宋高僧傳,988)』,그리고『사가어록(四家語錄)』과『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1267)』등에 전하지만, 스님의 어록이 독립적으로 전하는 것은 『사가어록(四家語錄)』뿐이다.

현존하는 『사가어록(四家語錄)』(6권)은 명말(明末)에 재편된 것인데, 그 첫째 권은 마조스님의 어록이고, 나머지는 백장(百丈),황벽(黃壁),임제(臨濟)스님의 어록이다. 『사가어록(四家語錄)』은 원래 송(宋)나라 초기(1066년경)황룡혜남(黃龍慧南,1002∼1069)스님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한다.

마조록을 비롯한 송대 이후 어록들은 경론을 자구 해석하던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선적인 안목으로 불법을 재해석한 선사들의 말씀을 정리한 것이다.

마조스님의 출생과 입적 연대에 대해서는 기록들이 일치하지 않는데, 연구에 의하면 탑명(塔銘)의 기록(706∼786)이 가장 믿을 만하다.

스님은 남악회양(南嶽懷讓,677∼744)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가장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법제자들은 139명, 혹은 84명이라고도 한다.

마조록에는 『능가경(楞伽經)』『유마경(維摩經)』을 비롯하여『금강경(金剛經)』『화엄경(華嚴經)』『불설법구경(佛說法句經)』『42장경(四十二章經)』등의 경전이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다. 또한 어록에 보이는 ‘즉심즉불(卽心卽佛)’, ‘평상심이 도이다’하는 말씀이 마조스님 법문의 특색이라 하겠다.

◈임제록(臨濟錄)

임제록은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인 임제의 법어를 수록한 책으로, 원명은 『진주임제혜조선사어록』이다. 인간의 절대자유를 선언한 자유인 임제의 사상적 자서전답게 영원한 자유인으로서의 자기 확신이 호방하게 펼쳐져 있다. 중국 선승의 대표적인 이 어록은 세계적인 선학자인 유전성산(柳田聖山)이 참신한 주해를 곁들인 것을 한글 번역으로 펴낸 임제록의 결정판이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것은 의현의 사후 154년째인 1120년 북송(北宋)의 종연(宗演)이 중각· 인본한 것이다. 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蘗)의 어록과 나란히 4가(家)어록의 하나이며, 선종(禪宗)어록의 대표적인 것이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는 곳마다 진리의 땅이 되게 하라. -임제-

◈벽암록(碧巖錄)

벽암록은 중국 임제종(臨濟宗)에서 최고의 지침서로 꼽혔던 책으로 우리나라 선가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책인데 설두중현(雪竇重顯)이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서 수선(修禪)에 참고 되는 공안 100칙을 뽑아 송(頌)을 달고 여기에 극근(克勤)이 수시(垂示), 단평(短評), 평창(評唱)을 달았던 것이다.

1125년 극근의 제자에 의해서 편집되어 간행되었으나 그 후 극근의 제자 대혜종고(大慧宗高)가 이 책이 선(禪)을 형식화하고 흉내만 내는 구두선(口頭禪)에 빠지는 것을 우려하여 간본(刊本)을 회수하여 불태웠는데, 그 뒤 장명원(張明遠)이란 사람에 의하여 중간(重刊)되었던 것이 유통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알 수 없으나 중간되자 바로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육당장(六堂藏)으로 고려 충숙왕 4년(1317)간본이 알려지고 있는데 이는 중간후서(重刊後序)의 연도(年度)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선종에서는 가장 중요한 전적으로 여긴다.

◈보조 지눌국사(普照 知訥國師)

지눌(1158~1210)은 고려 의종 12년(1158) 황해도 서흥군에서 아버지 정광우와 어머니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휘(諱)는 지눌이며 스스로를 목우자(牧牛子)라 불렀다. 우리가 보조국사라 하는 것은 희종이 내린 시호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에서 비롯되었다. 지눌은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부모는 부처님 전에 병이 나으면 출가시킬 것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기원대로 병이 회복되자 종휘선사(宗暉禪師)에게 귀의하여 득도케 하였다. 출가 후 지눌은 몇 차례의 계기로 인해 禪에 다다랐다.

지눌은 일정한 스승 없이 수행하다가 1182년 승과에 합격한다. 그러나 이에 집착하지 않고 보제사(普濟寺) (談禪法會)에서 뜻을 같이한 10여 명과 결사를 약속하였다. 전남 나주에 있던 청원사에서 《육조단경》을 보다가 ‘중생의 진성은 만상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함’을 깨닫게 되면서 큰 전기를 맞이하였다.

지눌의 나이 28세가 되던 1185년 예천 보문사에서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이통현(李通玄)의 화엄론을 읽고 부처님의 말씀이 선과 하나임을 깨닫고 선교불의 선교회통을 주창하게 된다. 이후 지눌은 본격적인 선의 수행을 주도하는 데 그것이 바로 수선결사(修禪結社)이다. 결사운동은 자신이 25세 때 마음에 두었던 것이다. 또 41세(1198)가 되던 해 지리산 상무주암에 은거하면서 선정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침은 지눌에게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지눌의 나이43세(1200)가 되면서 자리를 송광사로 옮겨 1210년 입적할 때까지 선을 닦으며 대중을 교화한다. 그 후 지눌은 정과 혜를 고루 닦아 선과 교를 함께 하는 수행으로 문란해진 교단의 수행풍토를 개혁하고자 노력한다.

그가 살다 간 12~13세기는 혼란한 시대였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있었는가 하면 상당기간의 무신통치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는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정치적 배후를 등에 업고 본연의 모습을 떠나 세속과 결탁되어 있었다. 이런 모습에 회의를 느낀 지눌은 불교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지눌이 해결책으로 생각한 것은 선풍의 회복과 선교의 회통인 결사운동이었다. 정혜결사(定慧結社)는 명종 20년(1190)에 팔공산 거조사에 있을 때 선객들의 청을 받고 머물게 되면서 법회를 열고 정혜사를 결성하고 결사문을 지으면서 비롯되었다. 그 후 1200년 정혜사를 길상사로 옮기고 그 이름을 수선사로 개명한다. 11년 동안 대중을 교화하여 많은 사람이 동참하였다. 선의 중흥뿐만 아니라 지눌은 당시 불교계가 지니고 있던 선과 교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부처의 입으로 말한 것은 교이고 조사의 마음에 전한 것이 선이므로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입이 결국엔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선·교 학자들은 그 근원을 알려하지 않고 각기 자신이 익힌 것에 안주하여 논쟁만을 일삼아 시간을 헛되이 보낸다는 것이다. 이 같은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로써 그 방향을 분명히 한 다음에 닦아야 올바른 수행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선교회통이야말로 수행자가 지녀야 할 본분이라는 것이다. 결사운동은 후대로 계승되어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자리하였다. 모든 교학과 선이 일치한다는 견해는 선을 중심으로 한 교학의 융합이라는 전통을 남겼다.

[출처] 조계종|작성자 임기영인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