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2008조계종포교원청소년설법자료집 에서

수선님 2020. 4. 5. 11:35

2008조계종포교원청소년설법자료집 에서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게 되고, 이것이 일어남으로 해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 이 없음으로 해서 저것도 없게 되고, 이것이 사라짐으로 해서 저것도 사라진다. 이러한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연기법은 부처 님이 세상에 출현하든지 안하든지 항상 존재하는 법칙이다. 나는 이 법을 깨달아 해탈을 성취 했고, 중생을 위해 여러 가지 문법으로 분별하여 설명하였느니라.” 잡아함경

“높은 벼슬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고관(高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그 것을 얻기 위한 행위를 닦아 가고, 재물을 구하는 사람은 재물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 켜 그것을 모으는 행위를 하게 마련이다. 무릇 욕구의 선악(善惡)을 막론하고 그 마 음에 먼저 목표를 세운 다음에야 그 뜻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깨달음을 구 하는 사람도 보리심을 일으켜서 보리행(菩리行)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발보리심론

“온갖 중생들의 마음을 남김없이 분별해 안다든가, 온 세상의 티끌들의 수효를 계산한다던 가, 허공 가운데서 터럭 하나를 찾아내기는 해도 보살의 초발심을 끝내 헤아리지는 못한다.” 화엄경

“선남자야, 보리심을 일으키고 나서 해야 할 다섯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좋은 벗을 가 까이 함이요, 둘째는 성내는 마음을 끊음이요, 셋째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름이요, 넷 째는 연민의 정을 일으킴이요, 다섯째는 부지런히 정진[노력]하는 일이니라.” 우바새계경

“게으르지 않음은 영원한 삶의 집이요, 게으름은 죽음의 집이다. 게으름을 모르는 사람은 죽음조차도 모를 것이고, 게으른 사람은 이미 죽음에 이르른 사람이다.” 법구경

“박학(博學)은 견고히 유지하는 힘이 있어서, 가르침을 받드는데 있어 담장 구실을 한다. 박학은 뜻을 명백히 해 주는데, 뜻이 명백해지면 지혜가 늘어난다. 박학은 근심을 제거하여 선정을 즐기게 해준다.” 법구경

“보살의 박학에는 열 가지의 공덕이 있다. 첫째는 번뇌의 양상을 아는 일이요, 둘 Ⅰ. 월별 주제 모음 23 째는 번뇌를 떠난 경지를 아는 일이요. 다섯째는 삿된 길을 벗어나는 길이요, 여섯째 는 바른 도리[正路]에 안주(安住)하는 일이요, 일곱째는 부처님의 법을 가르칠 수 있 게 되는 일이요, 여덟째는 부처님의 본성에 접근하는 일이요, 아홉째는 온갖 중생의 광명이 되는 일이요, 열째는 악도(지옥 · 아귀 · 축생 등)를 두려워하지 않는 일이다. 이것이 박학에서 오는 열 가지 공덕이다.” 월등삼매경

“사자가 코끼리를 잡을 때나 토끼를 잡을 때나 그 힘을 다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열반경

“게으름이란 모든 허물의 바탕이다. 집에 있는 이가 게으르면 의식(衣食)이 부족하고, 사업 이 쇠퇴할 것이요, 출가한 이가 게으르면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좋은 일 은 정진에 의하여 일어나나니, 집에 있는 이가 정진하면 의식이 풍족해지고 사업이 번창할 것 이요, 출가한 이가 정진하면, 법을 모두 성취하여 마침내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나니, 모두 가 정진에 의해 이루어지느니라.” 보살본행경

게으르지 않음은 감로(甘露)의 길, 게으름은 죽음의 길이다. 게으르지 않은 이는 죽지 않지만 게으른 사람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법구경

부처님 제자 중에는 우둔하기로 소문난 판타카라는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 이 기원정사를 나서려는데 그가 큰 소리로 울고 있어서 부처님께서 다가가 물으셨습니다. “판타카야, 너는 왜 울고 있니?” “부처님, 저는 사형이 가르쳐 주는 게송을 아무리 해도 외울 수가 없습니다. 형은 저더러 희망이 없으니 집에 돌아가라고 합니다. 부처님,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걱정하지 마라.” 부처님께서는 판타카의 손을 붙잡고 고요한 방으로 가서 빗자루를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부터 “쓸고 닦아라.” “이 귀절만 외우고 생각하여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판타카는 “쓸고”를 외우면 “닦아라.”를 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 나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기를 며칠 만에 “쓸고 닦아라.”를 외우게 되었고, 날이 가고 달이 지나 판타카는 드디어 이 말의 깊은 의미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쓸고 닦아라.”라는 말은 티끌을 없앤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슨 까닭 으로 이것으로 나를 가르치시는가. 지금 내 몸에도 티끌과 때가 있다. 나는 스스로 비유해 보 자. 무엇이 없애는 것이며, 무엇이 때인가. 그래. 번뇌는 때요, 지혜는 없애는 것이다. 나는 지 금 지혜의 비로써 이 결박을 쓸어버리자?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마음이 해탈하고 해탈의 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나아가 예배하고 기쁜 얼굴로 사뢰었습니다. “부처님, 이제는 지혜가 생겼나이다. 이제는 깨달았나이다.” “무엇을 깨달았는가?” “쓸고 닦는 것은 지혜로 번뇌의 티끌을 없앤다는 것입니다.” “착하다 비구야, 네 말과 같다. 네 말과 같다. 지혜로 번뇌의 티끌을 없애는 것이다.” 증일아함경

“마치 산과 강과 석벽과 온갖 풀과 다섯 가지 곡식은 다 땅을 의지해 있으며 자라고, 그리 고 땅은 가장 높고 최상인 것처럼 모든 착한 도는 다 방일하지 않는 땅에 머물러 거기서 자라 난다. 그래서 방일하지 않는 비구는 네 가지 끊기를 닦고 또 닦는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비구는 아직 생기지 않은 나쁜 법은 방편을 구해 생기지 않게 하 고, 마음은 항상 떠나지 않아 그것을 없애려 한다. 이미 생긴 나쁜 법은 방편을 구해 생기지 않게 하고, 마음은 항상 떠나지 않아 그것을 없애려 한다.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은 방편 을 구해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착한 법은 방편을 구해 더욱 많아지게 하여 잃지 않고 완전 히 갖추어 닦아 수행해 마음에 잊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는 네 가지 끊기를 닦는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방편을 구해 네 가지 끊기 를 닦도록 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증일아함경

“당신은 야위었고 안색이 나쁩니다. 당신은 죽음에 임박해 있습니다. 애써 정진하는 길은 가기 힘들고 행하기 힘들며 도달하기도 어렵습니다.” 부처님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내게는 믿음이 있고 노력이 있고 지혜가 있다. 이처럼 전념하는 나에게 너는 어찌하여 생 명의 보전을 묻는가. 힘써 정진하는 데서 일어나는 이 바람은 강물도 마르게 할 것이다. 오로 지 수도에만 정진하는 내 몸의 피가 어찌 마르지 않겠는가.” 숫타니파타

“일어나 앉으라. 잠자는 것이 그대에게 무슨 이익이 있으리. 화살에 맞아 고통 받는 자에게 무슨 잠이 있으랴? 일어나 앉으라. 평안을 얻기 위해 한결같이 배우라. 그대가 게을러 그 힘 에 굴복한 것을 죽음의 왕이 알고 그대를 해치지 못하게 하라. 신들과 인간은 집착에 사로잡혀 사물을 탐낸다. 이 집착을 벗어나라. 짧은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게으름은 먼지나 때와 같은 것. 먼지와 때는 게으름을 따라 생기는 것. 밝은 지 혜로 열심히 정진하여 자기에게 박힌 화살을 뽑으라.” 숫타니파타

아함경 이라는 불교 경전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악한 사람도 복을 만난다. 악의 열매가 익은 뒤에는 악한 사람은 죄를 받는다. 선의 열매가 이기 전에는 선한 사람도 화를 만난다. 선의 열매가 익은 뒤에는 선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자비관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안락하고 행복하며, 괴로움과 재난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해악(害惡)과 미워하는 마음, 근심과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이 진정한 행복과 마음의 평온을 즐기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분노와 기만, 남을 해치려는 마음에서 벗어나서, 남에서 해를 끼치는 일에는 티끌만큼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이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자애와 선행에 마음을 기울이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남을 속이는 일과 야비한 마음 씀을 삼가 하기를 기원합니다. 남을 헐뜯는 말, 거친 말, 위협하는 말, 화나게 하는 말, 빈 말, 쓸모없는 말을 하는 것을 삼가 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이 진실 되고 유익하며 의미 있고 사랑스러우며 자애로움을 표현하는 듣기 좋은 말을 하기를 기원합니다. Ⅰ. 월별 주제 모음 37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다른 이의 재산을 훔치는 일, 남의 행복을 파괴하는 일, 잘못된 생각을 지니는 일을 삼가 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이 잘못된 생각, 탐욕, 성내는 일에서 벗어나, 모두 함께 평화롭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풍요로우면서도 남에게 베푸는 일에 솔선하고, 재일(齊日)과 계율을 잘 지키며, 자신의 행위를 올바르게 제어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이 마음집중[定]과 지혜[慧]를 닦아, 마음이 평화롭고, 심신이 건강하며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기원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발원합니다.

부처님의 제자들 부처님께서는 6년 동안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으신 후 한동안 보리수 아래 머물며 삼 매에 들어 있었습니다. 무명(無明)의 어둠에 휩싸여 인생의 진리를 모르는 중생들에게 부 처님께서 깨달은 진리의 세계를 어떻게 알려줄 것인가, 이 심오하고 난해한 깨달음을 어 떻게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어떠한 방법으로 그들을 일깨울 것인가 하는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이때 범천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부처님께 귀의하고 중생을 위해 설법해주실 것을 간청하였다고 합니다. 마침내 전도를 결심한 부처님은, 예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명의 사문을 선택했습니 다. 아야교진여 등 다섯 명은 부처님께서 극단적인 고행의 방법을 포기하셨을 때, 부처님 께서 수행을 포기한 것으로 오해하고 비난했던 사문들이었습니다. 바라나시의 녹야원에 서 이 다섯 비구들에게 최초로 설한 법의 내용은 중도, 사성제, 팔정도의 가르침이었습니 다. 이것을 초전법륜, 곧 불법의 첫 펼침이라고 합니다. 이리하여 이 다섯 명의 비구와 함 께 최초로 삼보, 즉 부처님과 부처님 법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실천하는 교단이 성 립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부처님은 야사를 비롯한 60명의 젊은이들에게 법을 설하여 그들을 제자로 삼았 습니다. 그리고는 우루벨라로 가서 당시 가장 이름 있는 출가 수행자였던 가섭 삼형제를 교화하여 그들과 그들의 제자 1000명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가섭 삼형제를 모두 교화한 이 사건은 마가다국의 왕과 백성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마가다의 왕 빔비사라는 부처님 께서 머무르시며 가르침을 펴실 수 있도록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지어 기 증하였습니다. 십대제자의 중 사리불과 목련이 그 제자 250인과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 마하가 섭이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도 이 무렵입니다. 부처님은 성도하신 지 몇 년 후에 고향인 카필라국에 가서 부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고 십대제자 중 하나인 아난과 라훌 라, 아나율, 우팔리 등의 제자들을 출가시켰습니다. 부처님은 빈부나 귀천이 구별 없이 45년 동안 중인도 지방을 유랑하면서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리하여 80세로 쿠시나가라에서 반열반하실 때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제자를 거느렸습니다. 여러분들이 사찰에서 새벽이나 사시예불 때 올리는 ‘예불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같이 한번 예불을 드린다는 생각으로 따라해 봅시다. 지심귀명례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독수성 내지 천이백제대아라한 무량자비성중 (至心歸命禮 靈山當時 受佛附屬 十大弟子十六聖 五百聖獨修聖 乃至 千二百 諸大阿羅漢 無量慈悲聖衆 :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부촉 받은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독수성 천이백 아라한과 모든 성인들께 절하옵니다.) 그야말로 한량없이[無量]자비로운 성중(聖衆)이었습니다. 법화경 에는 “일만 이천인 과 함께 하시고”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 분들이 인도 전역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퍼뜨려 불교는 교세를 크게 떨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히 중요한 역할 을 맡아 불교교단의 확립과 중생교화에 큰 공헌을 한 제자 열 분을 일컬어 우리는 ‘십대제 자’라고 합니다. 자, 그러면 십대제자가 누구누구인지를 알아봅시다. ① 지혜제일 사리불 ② 신통제일 목련 ③ 두타제일 대가섭 ④ 해공제일 수보리 ⑤ 설법제일 부루나 ⑥ 논의제일 마하가전 연 ⑦ 천안제일 아나율 ⑧ 지계제일 우팔리 ⑨ 밀행제일 라훌라 ⑩ 다문제일 아난입니다. 위의 십대제자는 초기 대승경전의 하나인 유마경 의 제3 제자품 에서 ‘병상에 누운 유마 거사의 병문안을 위해 부처님께서 열 명의 제자를 보내셨다’는 내용에서 비롯되었 다고 합니다. 이들 한 분 한 분이 부처님의 독특한 능력을 하나씩 지니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분들 은 교훈이 가득 담긴 많은 행적들을 남겼습니다. 지금부터 부처님의 큰 제자 열 분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와 함께 우리들은 어떻게 생 활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은 먼저 부처님의 양 팔과 같은 분 인 사리불존자와 목련존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제자의 출가 두 사람은 중인도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에서 멀지 않은 마을에서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함께 어울리면서 자라나 서로 돈독한 우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리불과 목련은 1년에 한 번 있는 화려한 축제인 산정제(山頂祭)를 구경하러 갔습니다. 흥겨운 음악소리, 맛있는 음식들, 모든 사람들이 축제 분위기에 들떠 즐거워하 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함께 즐기던 두 사람 눈에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흥겹던 축제가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마침내 거기 있던 사람들이 늙고 죽어 해골로 변하였으며, 제단은 허물어져 흉물스럽게 변해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본 사리불이 말하였습니다. “즐겁게 춤추던 저 사람들이 점차 늙고 죽어가는 무상(無常)함이 이 세상의 모습이 아 니겠는가. 목련이여, 나는 이것을 계기로 출가하려 하네.” “실은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네.” 둘은 ‘영원한 즐거움을 찾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고, 당시 500명의 제자를 거느 리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던 회의론자인 산자야를 찾아가 출가하였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두 사람에게 그리 어렵지 않아서 열심히 공부하여 수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승의 가르 침을 모두 이해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제자들 중에서 뛰어나 다른 제자들을 가르치게 되 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즐거움은커녕 마음의 평안조차 얻을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상의하였습니다. “목련이여, 사실 나는 스승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겠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 세상에는 선생님의 가르침보다 더 높은 가르침을 설법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네. 나는 언젠가 그 훌륭한 가르침을 설법하는 분을 꼭 만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만약에 그러한 스승을 만나면 우리 둘이 함께 그 스승을 섬기고 배우세.” “그래, 약속하세.” 그리고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사리불은 길을 가다가 한 수행자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 다. 그는 부처님께 최초로 귀의한 다섯 비구 중 한 명인 마승(馬勝, 앗사지) 비구였습니 다. 마승 비구는 코끼리왕이 길을 가듯 앞만 보고 갈 뿐 이리저리 돌아보지 않았으며, 돌 아보더라도 사자처럼 온몸을 돌려서 보는 것이었습니다. 사리불은 마승 비구의 걷는 모습 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물었습니다. “스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어떠한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그분은 어떤 가르 침을 설법하십니까?” “나의 스승은 세존이십니다. 나는 수행 중이기 때문에 스승의 가르침에 대해 설법할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라도 괜찮습니다.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을 말해주십시오.” “모든 법은 인연을 따라서 생겼다가 인연이 다하면 없어진다[諸法從緣生 亦從因緣滅] 는 법을 배웠소. 우리 부처님 대사문께서는 항상 이러한 설법을 했습니다.” 마승 비구의 이 한마디에 반한 사리불은 그 길로 목련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제자 250명을 이끌고 왕사성 북쪽 죽림정사에 계시던 부처님을 찾아가 귀의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리불존자와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진리 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부처님을 만나게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참된 진리에 대 한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 두 존자는 점차 교단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제 바달다(提婆達多, 데바닷타)가 부처님에게 대항하여 교단이 분열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함 께 수행자들을 설득하여 혼란을 수습했습니다. 사리불존자와 목련존자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사리불 비구는 바른 도를 따르게 하는 능력을 지녔으며, 목련 비구는 바른 도를 성취시키는 능력을 갖췄으며, 사리불 비구는 자 식을 낳는 어머니와 같고, 목련 비구는 자식을 기르는 어머니와 같다. 마땅히 사리불과 목 련을 함께 섬기고 받들어야 하며, 가서 물어야 하리라. 사리불 비구와 목련 비구는 함께 배우는 이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대해주면서, 다른 생각을 내지 않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혜제일 사리불존자의 교화활동

사리불은 사리(事理)의 분별과 이해력이 뛰어나 불교의 진리를 한마디만 듣고도 크게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지혜제일이라고 합니다. 사리불은 대승불교 사상의 근간이 되는 반야사상의 핵심을 정리한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心經] 의 설법 대상인 사리자(舍利子) 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지혜제일 사리불존자의 활동에 대해 몇 가지 예화를 들려 드리겠 습니다.

◆ 예 화 1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증득하신 지 2~3년 뒤에 부친 숫도다나[정반]왕의 간청으로 고향인 카필라성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때 부처님의 아내였던 야소다라는 라훌라에게 “라 훌라야! 저분이 네 아버님이시다. 가서 너의 상속물을 달라고 하렴”하고 시켰다고 합니다. 라훌라는 부처님을 따라 가면서 말했습니다. “저에게 재산을 물려주세요.” 이때 부처님이 손가락을 펴자 라훌라는 부처님의 손가락을 잡고 따라갔습니다. 부처님은 라훌라를 데리 고 고요한 숲에 이르러 장로 사리불에게 말했다. “사리불이여, 라훌라를 출가시켜라.” 무 소유의 삶을 사시는 부처님이 아들에게 상속물로 줄 것은 출가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사리불존자는 처음 출가한 이들을 불법의 바른 길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하였 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12세의 어린 나이로 출가한 아들 라훌라까지도 사리불에 게 맡겨 지도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비구들이나 재가자들에게 부처님을 대 신하여 설법을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중아함경 제31 분별성제경 을 보면, 과거·미래· 현재의 모든 여래에게 있는 정행설법(正行說法)이 바로 사성제라는 말씀을 남기고 부처 님께서 자리를 뜨십니다. 그러자 사리불존자가 다른 비구들을 위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 신 사성제에 대하여 매우 자세히 설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는 경전 곳곳에 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예 화 2 하루는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마을에서 탁발을 하던 중 날이 저물어 머무르게 되었습니 다. 다른 제자들은 부처님 바로 옆에 따라다니면서 부지런히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러나 46 청소년 설법자료집 사리불존자는 뒤에 처진 사미승들을 돌보아주다가 늦게 숙소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리불존자가 주무실 자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리불존자는 가사자락을 펴서 나무에 걸고 거적을 깔아 텐트를 만들어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이처럼 다른 비구 들이나 재가자들에게 부처님을 대신하여 설법을 한 지혜제일의 사리불존자지만, 항상 대 중을 앞세우고 자기는 뒤에서 대중들을 시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 예 화 3 사리불존자는 매우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리불존자가 길을 빨리 걷다 보니 속가사가 겉가사 밑으로 빠져 나 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7살짜리 사미가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리불존자가 동자승에게 공손하게 합장하고 “참 고맙습니다. 동자시여, 저는 이런 고귀한 가르침을 어떤 분한테 듣 더라도 받들어서 행하겠습니다.” 하고 절을 합니다. 사실 우리 삶이 그렇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지혜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 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배우려고 하는 자세,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사리불은 교단에서 열심히 수행을 하면서 모든 스님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잘하더라도 단체 조직사회에는 항상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있 게 마련입니다. 하루는 몇몇 스님들이 사리불존자를 골탕을 먹이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리불존자 는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아 ‘정말 화를 내지 않는지’ 시험해 보기로 한 것입니다. 어 느 개구쟁이 스님이 뒤에서 나무로 사리불존자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그러나 사리불존자 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냥 터벅터벅 걸어갔습니다. 도리어 때린 사람들이 무안해졌고 그 들은 사리불존자에게 참회를 합니다. “존자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래요. 참회를 하면 모든 잘못은 다 없어지는 법입니다” 하고 참회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을성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잘 조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조절하는 힘은 바로 지혜[깨침]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부단한 노력[정진]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사리불존자의 삶을 보면 정말 욕망의 찌꺼기까지도 전부 다 없애 버린, 지혜를 완전히 성취하고 자비행을 행하신 훌륭한 분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 리들도 사리불존자와 같이 지혜를 갖추고 자비행을 많이 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러 면 우리 사회가 건전해지고 불국정토가 될 것입니다. 신통제일 목련존자의 교화활동 목련존자는 신통력이 뛰어난 분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효성이 지극했던 목련존자 는 도를 깨닫자마자 신통력으로 부모님이 죽어서 어디에 가셨는지를 살폈다고 합니다. 그 래서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음력 7월 보름에 천도재를 베풀어 우란분절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설법회장에 모 인 사람들 중 외도를 믿거나 설법을 방해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신통력으로 찾아내어 쫓아냈다고 합니다.

신통제일 목련존자의 활동에 대해 몇 가지 예화를 들려 드리겠습니 다.

◆ 예 화 1 깨달음을 얻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 최초의 법열(法悅)의 순간에는 가장 먼저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목련존자는 평소 효성이 지극했습니다. 그는 최초로 신통 자재한 경지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부모를 제도하여 길러주신 은혜에 보답하려 했 습니다. 도안(道眼)으로서 사방을 살펴보니 자신의 어머니가 죽어서 아귀도에 태어나 고통 받 고 있었습니다. 몸은 야위고 초췌해져서 피부가 간신히 온몸의 뼈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비통했던 목련존자는 발우에 밥을 담아서 어머니에게 달려갔습니다. 어머니가 발 우의 밥을 받았지만, 밥은 미처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뜨거운 숯불로 변했습니다. 목련은 슬픔에 겨워 부처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며 구제를 청했습니다. 이때 부처님은 목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어머니는 죄가 깊어서 너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제할 수 없다. … 다만 시방 승가(僧家)의 위신력을 빌리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 청정한 계를 지닌 성 중들의 덕은 넓은 바다보다 크다. … 자자일에 시방 승가에 공양하면 그 공덕은 광대하여 위로 7대(代)의 조상과 6종의 권속들이 모두 삼악도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목련존자는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먼저 시방의 승 가들에게 공양을 받기 전 목련존자의 부모님과 7대(代)의 조상들을 위해 선정을 닦는 뜻 을 설해주셨습니다. 그러자 대중은 환희에 넘쳤으며 목련의 비통한 눈물을 닦아주었습니 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1겁의 아귀세계에서의 고통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목련존자와 같은 방식으로 7월 보름에 청 정한 승가에 공양을 올리면 이들의 부모님과 조상들도 구제받아 일체의 고뇌에서 벗어나 게 될 것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지금도 불교에서는 큰 명절 중 하나로 우란분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목련존자를 생각하면서 부모님의 은혜 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합니다.

◆ 예 화 2 왕사성의 나형 외도는 자신의 교단이 흩어지고 불교가 번창해지자 불교라는 큰 나무를 쓰러뜨리기 전에 가지를 자를 욕심으로 그 대상을 목련존자로 정하였습니다. 그들은 금· 은·보화로 부랑자들을 꾀어 이시기리산에서 수행하고 있던 목련존자를 공격했습니다. 그 들은 몽동이로 때리고 돌을 던져서 목련존자의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떨어져나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런 목련존자를 숲 속에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아사세왕에게 붙잡혀서 모든 것을 자백하게 되었고, 이 일을 뒤에서 꾸민 자가 나형 외도였다는 것도 드러났습니다. 그 나형 외도들도 잇달아 붙잡혀서 불구 덩이에 던져졌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가장 절친한 친구인 사리불이 안타까워하며 물었 습니다. “그대는 신통제일이라고 여겨질 정도의 힘을 갖고 있소. 그런데 어찌하여 그들에게 당하고만 있었단 말이요?” 그러자 목련존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내 전생의 악업의 과보요. 내가 오늘 이 같은 고통을 받은 것은 결코 우 연이 아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여러 수행자들은 들어라. 목련존자는 정해진바 그대로 가장 훌륭하게 수행을 하였다. 그는 전생에 아내에게 속아서 앞 못 보는 부모를 산 속에 버려서 죽게 하였다. 그 과보로 긴 세월을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은 다음 이 세상에 태어나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 었다. 그러나 아직도 조금 남은 악업 때문에 이와 같이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아무리 뛰어난 신통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숙세의 업은 지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자기가 지은 업의 과보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 입니다. 이 세상이 인연의 사슬에 묶여 있는 한 자기가 뿌린 씨앗은 자기가 거두어야 합 니다. 자기가 지금 받고 있는 과보가 과거의 어떤 인연에 의한 것인지는 모를 수 있습니 다. 그러나 지금 자기가 받고 있는 고통이나 슬픔, 기쁨이나 즐거움은 틀림없이 과거에 자 기가 뿌린 씨앗으로부터 발생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통제일 목련존자도 그의 숙세의 업은 좌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모기나 쇠파리도 없고 소들은 늪에 우거진 풀을 뜯어먹으며 비가 내려도 견디어 낼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던 비를 뿌리소서.” 스승은 대답하셨다. “내 뗏목은 이미 잘 만들어졌다. 거센 물결에도 끄떡없이 건너 이미 저쪽 기슭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더 뗏목이 필요 없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시오.” 숫타니파타

“부처님 공덕을 관찰함에는 한번만 보아도 다 만족하나니 계율 선정 지혜 그 모든 것이 부처님과 같을 존재 없기 때문이라. 산으로서는 수미산이 으뜸이고 물로서는 바다가 제일인 것처럼 이 우주 공간에 부처님 따를 이 아무도 없네. 언제나 이 중생들을 위해 일체의 고뇌를 갖춰 받으면서도 끝까지 버려두는 일 없이 반드시 해탈케 하시느니라. 그 누가 부처님께 귀의하고서 이익을 얻지 못한 이 있으며 그 누가 부처님께 귀의하고서 해탈하지 못한 이 있으며 그 누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고서 번뇌를 끊지 못하랴.” 대장엄론경

“왜 저런 사람들을 부처님 제자라고 일컫지 못합니까? 그 사람들의 마음은 자꾸 망설이면 서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즉 어떤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어떤 때는 외도들의 다른 종교에 집착하기 때문이니 그들은 부처님의 제자라 말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진정한 성 현의 제자들은 믿음의 뿌리가 튼튼하여 한결 같이 부처님의 교훈을 받들고 삼보(三寶)를 공경 해 받들기 때문에 부처님 제자라 부를 수 있느니라.” 출요경 이양품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비구들이여 여기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이 네 명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한 남자가 찾아와 서 그들에게 장담을 했다. ‘당신들 네 사람이 동시에 동서남북 사방을 향해 활을 쏘면 나는 그 화살들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모두 거두어들여 보겠소.’라고 말했다면 어떻겠는가. 비구 들이여,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사람은 대단히 빠른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대덕이시여, 참으로 대단한 속도입니다. 한 방향으로 쏜 화살이라도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잡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대단히 빠른 사람일 것입니다. 하물며 그 남자는 네 명의 궁수가 사방 으로 쏘는 화살을 땅에 떨어지기 전에 모두 거두어들인다고 하므로 그 빠르기는 실로 놀라지 않 을 수 없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그 사람보다 훨씬 빠른 것이 있다. 해와 달이 하늘에서 뜨고 지는 것 은 더욱 빠르다. 그리고 해와 달이 하늘에서 뜨고 지는 것보다 더욱 빠른 것이 있다. 인간의 수명이 다해가는 것은 해와 달보다도 훨씬 빠른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렇 게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의 목숨은 해나 달이 하늘을 흘러가는 것보다도 훨씬 빠르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제 쉬지 말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그대들은 잘 익혀야 한다.” 상응부경전 궁술사

“비구들이여, 오늘 나는 이른바 일야현자의 노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잘 듣고 곰곰 이 생각해보아라. 흘러가는 것을 뒤쫓지 마라. / 오지도 않은 것을 바라지 마라. / 과거는 이미 흘러가 버린 것. / 미래는 아직 오지도 않은 것. / 그러므로 지금 존재하는 것만을 / 있는 바대로 정확히 보아야 한다. / 흔들림 없이 동요됨이 없이 / 정확히 보고 실천하여야 한다. / 다만 오늘 할 일을 열심히 하라. / 내일은 누가 죽을지 모른다. / 아무도 저 죽음의 군대와 마주치지 않을 수는 없다. / 이와 같이 잘 아는 사람은 / 한마음으로 게으름 없이 실천하려 한다. / 이와 같 은 이를 일야현자라 하고 / 마음을 평정한 자라 일컫는다.” 중부경 일야현자경

부처님께서 어느 날 제자들과 길을 나섰다가 비가 와서 빈집에 들어가 비를 피했 다. 비가 갠 뒤 다시 길로 나섰다. 그러다 길가에 헌 종이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부처님은 한 비구에게 그 종이를 주우라고 하셨다. 그는 분부대로 종이를 주웠다. 부 처님께서 물으셨다. “그 종이는 무엇에 쓰였던 종이인가.” 그는 대답했다. “향을 쌌던 종이인 모양입니다. 지금은 버려져 있지만 아직도 향내가 배어있군요.” 말이 없이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새끼도막이 길가에 놓여 있었다. 부처님은 그것을 주으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시 물으셨다. “그것은 무엇에 썼던 새끼도막인가.” “이 새끼에서는 비린내가 납니다. 아마도 생선을 묶었던 새끼도막인 모양입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든지 본래는 깨끗하지만 그 인연에 따라 죄와 복을 일으킨다. 어진 사람을 가 까이 하면 뜻이 높아지고, 어리석은 사람을 벗하면 재앙이 닥친다. 그것은 마치 종이가 향을 가까이 했기 때문에 향내가 나고, 새끼는 생선을 가까이 했기 때문에 비린내가 나는 것처럼 무엇인가 점점 물들어 가면서도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부처님은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악한 사람에게 물드는 것은 냄새가나는 물건을 가까이하듯 조금씩 허물을 익히다가 자신 도 모르게 악한 사람이 된다. 어진 사람에게 물드는 것은 향기를 쏘이며 가까이 하듯 지혜를 일깨우며 선을 쌓아 자신도 모르게 선한 사람이 된다.” 법구비유경 쌍요품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 어떤 친구가 나쁜 친구이면서 착한 벗인 양 겉모양 꾸미는가. 마음으론 진실로 싫어하면서 입으로는 그 마음 같다 떠들며 일을 같이 하기는 즐겨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착한 벗 아닌 줄 아느니라. 입으로는 은혜롭고 부드러운 말 하면서 그 마음은 완전히 거기에 맞지 않고 하는 일마다 서로 어긋나나니 지혜로운 사람은 깨달아 알라. 그런 친구는 실로 나쁜 친구이면서 착한 벗인 양 겉모양 꾸미거니. 어떤 친구가 착한 친구로 두 몸을 한 몸처럼 생각하는가. 두 몸이 한 몸 같은 착한 친구는 스스로 방일하여 억제하지 않거나 일을 방해하거나 의심을 품고 허물 꼬투리 잡으려 하지 않네. 착한 친구를 의지하는 편안함은 자식이 아비 품에 안긴 듯하여 아무도 그 사이를 뗄 수 없나니 그는 착한 벗일 줄 알아야 한다. 잡아함경

참된 벗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이익 되지 않는 것 덜어 주고 둘째는 남의 이익 만들어 주며 셋째는 어려울 때 버리지 않는 것 <법구경>

두타제일 마하가섭존자와 해공제일 수보리존자에 대하여

두타제일 마하가섭존자의 교화활동

마하가섭존자는 돈이 많은 바라문 출신 거부 장자의 외아들로 학덕과 인품이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속명이 핍발라였는데 그를 핍발라 나무 아래에서 낳았다하여 붙여진 이 름이라고 합니다. 그는 참인생의 의미를 깨닫고자 수행하는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모의 혼 인권유를 거부하다가 더는 거부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세상에는 있지도 않을 것 같 은 여인상을 금으로 만들어서 부모에게 그런 여자가 있으면 결혼하겠다는 조건을 내어 놓 았습니다. 그런데 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여성이 있어 결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침 그녀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까지 같은 방에서 살면서도 부부관계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큰 감정의 동요 없이 욕정을 다스려온 그들은 12년간 이러한 생활을 하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모든 재산을 고용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출가하였습니다.

부처님이 성불하실 즈음에 그들은 헤어져 각각 수행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가섭존 자는 부처님이 계시는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으로 향하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도 가섭존 자를 만나려 왕사성의 나라타촌이라는 곳에 있는 다자탑에서 기다리고 계셨다고 합니다. 가섭존자가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뵙자 이분이 자기가 찾던 분임을 알 아채고는 엎드려 이렇게 고백을 하였답니다.

“당신은 분명 내가 찾으려는 여래, 세존이시며 일체의 가르침을 성취하신 부처님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하여 마하가섭존자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가섭 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다섯 명이었는데, 우루빈나가섭 3형제와 십력가섭, 가섭존자가 그들입니다. 다른 가섭과 구분하기 위해 가섭존자에게만 ‘마하’, 즉 크다[大]란 형용사를 붙여 마하가섭 또는 대가섭이라 합니다. 마하가섭존자는 부처님이 법을 전하기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에 출가했습니다. 그의 나이 32세 무렵이며, 부처님보다 다섯 살 정도 아래 였습니다. 마하가섭존자는 부처님을 제외하고, 초기 인도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전과 율전을 집성한 제1차 결집을 주도하는 등 부처님 열반 이후 교단의 실 질적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선종에서 크게 존경받고 있는데, 그것은 가섭이 세 곳에서 부처님으로부터 마음을 전해 받았다는 삼처전심(三處傳心)에서 연유합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예화에서 다시 들려드리겠습니다.

◆ 예 화 1 가섭존자를 일러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합니다.

두타란 산스크리트 두타(dh ta)를 음역한 말로, 번뇌를 털어 내고 모든 집착을 버린다는 의미에서 수치(修治) 또는 기제(棄 除)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해 두타란 번뇌는 물론 의식주 등 일체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 리기 위한 수행을 말합니다. 경전에서는 두타행의 실천 항목으로 열두 가지[남전장경에서 는 열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그것을 ‘십이두타행’이라고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 다. 1. 마을과 떨어진 산림에서 산다 [재아란야처(在阿蘭若處)]. 2. 언제나 밥을 빌어서 생활한다 [상행걸식(常行乞食)]. 3. 걸식을 할 때 집의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차제걸식(次第乞食)]. 4. 하루 한 끼만 먹는다 [수일식법(受一食法)]. 5. 많이 먹지 않도록 양을 절제한다 [절량식(節量食)]. 6. 중식 이후에는 어떤 미음이나 음료[국물]도 마시지 않는다 [중후부득음장(中後不得 飮漿)]. 7. 헤지고 기운 누더기로 만든 옷을 입는다 [착폐납의(着弊衲依)]. Ⅰ. 월별 주제 모음 77 8. 중의, 상의, 내의의 세 개 옷밖에는 갖지 않는다 [단삼의(但三依)]. 9. 무덤 사이에서 산다 [총간주(塚間住)]. 10. 나무 아래에서 산다 [수하지(樹下止)]. 11.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좌선을 한다 [노지좌(露地坐)]. 12. 언제나 앉아 있고 드러눕지 않는다 [단좌불와(但坐不臥)]. 마하가섭존자는 부처님 버금가는 수행력을 가진 분입니다. 그런데도 평생 이러한 두타 행을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모습으로 살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또 그것은 오늘날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삶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비춰 보았으면 합니다. 두타행의 각 항목을 보며 스스로의 삶의 모습을 적어 봅시다.

◆ 예 화 2 마하가섭존자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분입니다. 대부분의 사찰에 가면 대웅전이나 영 산전 등 석가모니 부처님의 좌우에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옆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 니다. 여기서 가섭이 바로 마하가섭존자입니다. 이렇게 모신 이유는 그들이 부처님의 마 음인 선(禪)과 부처님의 말씀인 교(敎)를 이어받은 대표적인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가 섭존자가 선종에서 크게 존경받는 까닭은 세 곳에서 부처님으로부터 마음을 전해 받았다 는 삼처전심(三處傳心) 때문입니다. 삼처전심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영산회상이란 부처님께서 법을 펼치던 영축산의 법회 장면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자 모두들 무슨 뜻 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었습니다. 이 것을 흔히들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 합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바른 법, 열반의 묘한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② 다자탑전반분좌(多子塔前半分座):수행으로 겉모습이 몹시도 남루하게 된 가섭존 자는 기원정사로 부처님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대중들은 가섭을 업신여 겼습니다. 이때에 대중의 마음을 읽으신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자리를 내주시면서 앉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가섭이 얻은 깨달음은 부처님의 수승하고 광대한 깨달 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자신이 입멸(入滅) 후 모든 수행자의 의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에 모든 대중들은 비로소 가섭존자의 그릇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부처님께서 다자탑 앞에서 설법할 때 일어났으므로 다자탑전 분반좌라 합니다. ③ 사라쌍수하곽시쌍부(沙羅雙樹下槨示雙趺):부처님께서 북인도 쿠시나가라성 북서 쪽의 사라수 두 그루가 마주 서 있는 사이에 침대를 놓게 하고 열반(涅槃)에 들었습 니다. 그 소식을 듣고 가섭이 늦게 도착하여 부처님의 관 주위를 세 번 돌고 세 번 절하고는, 열반하시는 모습을 못 본 것을 안타까워하며 울자 부처님은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어 보이셨습니다.

이 예화는 부처님께서 언어를 통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언어를 떠난 가르침인 선법(禪 法)을 통해 부처님의 마음을 전했음을 알게 합니다. 이상으로 가섭존자가 선종에서 존경 받는 이유와 더불어 석가모니 부처님상 옆에 모시고 서있는 상으로 만들어진 유래를 알아 보았습니다.

해공제일 수보리의 교화활동

수보리는 산스크리트 수부티(Subh ti)의 한자 음역이며, 선현(善現) · 선업(善業) · 선 길(善吉) · 공생(空生)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 가장 훌륭하고 위대 하게 사신 분이며, 가장 청정한 업을 가지신 분이고, 이분을 만나기만 하면 좋은 일만 쏟 아진다는 뜻입니다. 이 말대로 오늘 법회시간에 수보리존자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으니 우 리 모두에게 이후부터 좋은 일이 쌓이고 쌓여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수보리는 공(空)의 도리, 곧 평등의 이치를 가장 잘 이해하였으므로 해공제일(解空第 一)이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차별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과 인간 사회의 평 등함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 해서 해공제일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우리에 게 익숙하지 않지만 무쟁제일(無諍第一)이라고도 합니다. 수보리존자는 널리 알려진 금 강경 에서는 부처님의 상대역으로도 유명합니다. 수보리는 브라만 가문이자 당시 대단한 부자였던 급고독(給孤獨) 장자의 동생인 수마 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급고독 장자는 금강경 이 설해지는 기수급고독원[기원정사] 의 대시주자(大施主者)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기원정사는 여러분들도 잘 알 듯이 부처님 재세시 자주 머물면서 설법한 곳으로 초기 불교의 정사 가운데 가장 유명하 며, 마가다국 왕사성(王舍城)의 죽림정사(竹林精舍)와 함께 불교 최초의 양대 사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급고독 장자의 동생 수마나의 집 곳간에도 많은 금은보화가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그 러나 수보리가 태어나던 날, 금은보화로 가득했던 그의 집 곳간에 금은보화가 모두 사라 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일이 되는 날, 사라졌던 금은보화가 모두 다시 나타 났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이름이 공생(空生)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는 공(空)은 유무(有無)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태어나면서부터 보여준 좋은 일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숙부인 급고독 장자가 업무차 마가다국에 갔다가 부처님을 만나 간청 해서 코살라국을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부처님의 일행을 묵게 할 장소를 마련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장소는 수행하기에 가장 알맞은 한적한 장소이면서도, 탁발에 의해 생활하는 불제자들의 생활을 고려해 인가에서 너무 떨어진 곳 이어서도 안 되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급고독 장자가 결정을 내린 곳이 기타 태자가 소유하고 있는 동산이었 습니다. 그래서 기타 태자에게 동산을 팔 것을 제안하였으나, 그곳 전체를 황금으로 깐다 면 주겠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급고독은 그의 말대로 황금을 실어 날라 깔자, 기타태자는 감동하여 그의 말에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기타태자의 동산에 정사가 세워졌습 니다. 이것이 바로 ‘기원정사’입니다. 마침내 기원정사가 마련되어 부처님을 맞아 설법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때 수보리도 그 자리에 참석하여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귀의하여 불제자가 되었습니다.

◆ 예 화 1 수보리는 급고독 장자가 건립한 기원정사에서 첫 법회를 여는 날 부처님의 법문을 듣 고 발심 출가하였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사실 수보리는 부처님께 귀의하기 전에는 성격이 모질고 포악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싸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뭐든지 눈에 부딪히면 싸움을 했습니다. 기울어진 나무가 있으면 “왜 이 나무는 반듯하지 않느냐”며 화를 내곤 했습니다. 이런 수보리에게 부처님은 ‘자애선정’ 공부 를 시킵니다. 수보리는 자비심을 닦아 아라한과를 얻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해서

부처님 십대 제자 가운데 가장 우수한 해공제일(解空第一) 제자가 됩니다. 수보리는 자애선정을 닦아서 시비가 뚝 끊어진 이후부터 모든 이로부터 존경을 받게 됩니다. 남방 팔리어 경전에 “공양을 받는 데는 수보리가 제일이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십대 제자들이 공양을 얻지 못할 때도 수보리존자가 가면 시주가 넘쳐났습니다. 자애선정 을 닦아 성취하고 나니 모든 사람들이 수보리존자에게 서로 공양을 바치려고 했기 때문입 니다. 이것은 수보리존자가 젊었을 때 일이고, 증일아함경 에서는 중년기 이후에 들어 선 수보리존자를 ‘무쟁삼매제일(無諍三昧第一)’이라고 했습니다.

금강경 제9장에서도 ‘무쟁삼매제일’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무쟁은 다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질이 못된 이가 부처님으로부터 자애선정의 가르침을 받아 선정에 들었기 때문에 초 기에는 자애선정제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애선정이 이루어지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시 주를 나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수보리에게만 시주를 하려고 하여 공양제일이라고 하였고, 그 뒤로부터 수보리에게는 마음속에 다툼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무쟁삼 매제일이라고 했습니다.

“아난다야, 우리들이 좋은 벗을 갖고 좋은 동료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절 반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부인 것이다.” 잡아함경

“일곱 가지 법이 있으므로 친한 벗이라 하나니 이롭게 하고 인자하게 보살피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주기 어려운 것을 주고, 하기 어려운 것을 하며,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비밀스런 일 이라도 서로 이야기하며, 서로 잘못을 드러내지 않고, 괴로움에 처했을 때 버리지 않으며, 가난 하고 보잘것없더라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것이니라. 아난아, 이러한 일곱 가지 법이 있어서 친한 벗이라 하며 이로움을 더하고 가엾이 여김으로 벗으로 하여금 기쁘게 하느니라.” 사분율

108배와 염불에 관한 일타(日陀) 큰스님 일화 우선 동곡당(東谷堂) 일타(日陀) 큰스님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은 재가불자들의 참선도량으로 바뀌었지만, 20 년 전의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海印寺) 원당암(願堂庵)에는 고시생이 많기로 유명하였답 니다. 그 이유는 원당암에서 공부한 사법고시생이 10여 년 동안 50명이 넘게 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원당암에서 공부하려는 고시생들로 방 얻기가 쉽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원당암 스님들께서는 규칙 네 가지를 반드시 준수하겠다는 서약을 받고 입방을 시켜 주었으며, 그 네 가지란 새벽 예불에 참석할 것, 술과 담배를 하지 않을 것, 여자 친 구의 방문 사절, 주지스님의 허락 없이는 바깥출입 금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시생 중에 3명이 공부도 안 되고 힘들었는지, 몰래 절에서 내려와 술 한 잔 하다가 그 만 주지스님에게 들키게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책 보따리를 움켜쥐고 암자 밖으로 쫓겨 나가게 된 세 사람은 집으로는 갈 수 없고 해서, 해인사의 다른 암자인 지족암을 찾아갔 습니다. 당시 지족암에 는 일타 큰 스님이 계셨는데, 자초지종을 아뢴 후 공부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였답니다. 그 당시 지족암에는 고시생을 받을 방이 없었답니다. 큰 스님은 3명의 고시생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 너희들, 사법시험에 꼭 합격하고 싶지?” “예!” “그런데 공부는 잘 되지 않고?” “예, 공부하기가 통 싫습니다.” “그럼 내가 공부하고 싶도록 해줄까? 공부가 아주 잘되는 방법이 있다. 너희 마음대 로 안 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부처님 법이 아닌가! 내가 시키는 방법 대로 해볼 테냐?” “예, 공부만 잘된다면 하겠습니다!” 94 청소년 설법자료집 “그러면 두 가지 방법이 있으니 잘 듣거라. 첫째, 너희들은 새벽예불 목탁소리가 나 거든 무조건 법당에 올라와 부처님께 108배를 하거라. 108배를 하면 아침에 국민체조 하 는 것보다 더 좋다. 몸이 아주 건강해진다. 손가락에서 발가락까지 목과 허리, 발목운동 등 그야말로 전신운동이 다 되는 것이므로, 절하는 것보다 더 좋은 운동이 없다. 그리고 이렇게 부처님께 108배를 드리면서 ‘부처님! 공부 재미있게 해 주십시오. 공부 재미있게 해주십시오. 시험에 꼭 붙게 해주십시오…….’ 하면서 간절히 기원해야 한다. 두 번째는 잠들기 전에 관세음보살님을 부르고 자는 것이다. 먼저 코로 심호흡을 크게 들이마시고서 숨을 내쉬면서 입으로는 관세음보살을 아주 빨리 108번을 불러라. 처음에는 30에서 40회 밖에 못 부를 것이지만, 일단 한숨 동안 부르고 나서는 ‘관세음보살님! 꼭 시험에 붙게 해주십시오. 공부 잘됩니다. 공부가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을 기원해라. 그렇게 한숨 염불을 세 차례 또는 일곱 차례 정도 하여야 한다.” “스님, 왜 관세음보살을 그렇게 빨리 불러야 합니까?” “관세음보살을 천천히 부르면 생각이 서울 갔다가 대전 갔다가 부산 갔다 하게 된다. 그럼 효과가 없어. 관세음보살을 아주 빨리 부르면, 부르기도 급한데 생각이 어디 갈 여 유가 있나? 생각이 도망칠 틈이 없게 되고, 마음이 하나로 모이니까, 틀림없이 힘이 모이 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하다가 정신이 흐릿해지거나 마음이 풀어질 때에도 이렇 게 관세음보살님을 불러 보아라.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학생들은 큰 스님의 말씀을 듣고 아주 좋아하면서 꼭 실천하기로 다짐하였고, 큰 스님 께서는 원당암에 그들을 다시 데리고 가서는 원당암 주지스님에게 선처를 부탁하였답니다. 원당암에서 다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세 명의 학생들은, 시험 치기 전까지 큰 스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약 백일 동안 108배와 염불을 부지런히 하였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고 합니다. 마침내 세 사람 모두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였고, 기쁨에 넘친 그들은 법관교육을 받기 위해 사법연수원으로 가기직전, 큰 스님을 찾아뵈었는데, 다음과 같은 무용담을 늘 어놓았다고 합니다. “스님, 시험장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백짓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얼굴을 가진 사람들은 저희들뿐인 듯 했습니다. 저희들은 시험지가 나오기까지 일심으 로 관세음보살님을 찾았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님, 막상 시험지를 받고 보니 거기에 기적이 있었습니다. 원당암 앞길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아 차! 그 문제 한 번 더 보아야겠다고 하여 꼼꼼히 다시 살펴본 문제, 부처님께 절하다가 생 각이 나서 한 번 더 찾아본 문제 등, 일부러 기억하고 거듭거듭 따져 봤던 문제들만 나와 있었습니다. 어찌 저희들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있겠습니까? 스님 감사합니다. 모두가 스님 덕분입니다.” “나도 너희들 덕에 법문할 이야깃거리가 하나 더 생겼구나. 너희들 에게 감사한다.” 이렇게 모두 웃음꽃을 피웠답니다.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은 무슨 인연으로 관세음이라 이름 하나이까?” 부처님이 무진의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만일 한량없는 백 천 만 억 중생이 모든 괴로움을 받을 적에,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관세음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은 곧 그 음성을 관(觀)하시고, 다 해탈하 게 하느니라.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지니는 이는 설사 큰 불에 들어가도, 불이 능히 태우지 못하나니, 이 보살의 위엄과 신력(神力)을 말미암음이니라. 그리고 큰물에 떠내려가더라도 그 이름을 일컬으면, 곧 얕은 곳에 이르게 되며, 만일 백 천 만 억 중생이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산호, 호박, 진주 등의 보배를 구하려고 바다에 들어갔다가 폭풍을 만나 그 배가 나찰들 의 나라에 표착하였을 때,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있으 면, 여러 사람들이 모두 나찰의 난을 벗어나게 되나니, 이런 인연으로 관세음보살이라 하느니 라. 무진의여, 관세음보살마하살의 위엄과 신력이 어마어마함이 이와 같으니라. 어떤 중생이 음욕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문득 음욕을 여의게 되느니라. 만일 성내는 마음이 많더라도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문득 성내는 마음을 여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어리석은 마음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문득 어리석 음을 여의게 되는 것이다. 무진의여, 관세음보살은 이와 같은 힘이 있으므로 만일 중생이 관 세음보살을 공경하고 예배하면 그 복이 헛되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중생들은 모두 관세음보 살의 이름을 받아 지닐 것이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보왕삼매론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공부하는 데 마음에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하셨느니라. 수행하는 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 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지를 바라지 마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 데 두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어려움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순결함으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 하셨느니라. 남이 내 뜻대로 되고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 지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원림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덕을 베풀면서 과보를 바라지 마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덕 베푼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 하셨느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마라 억울함을 당하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한 것으로써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너희들은 나를 좋은 친구로 삼았기 때문에 늙지 않을 수 없는 몸이면서 늙음에서 자유롭 게 될 수 있고, 죽지 않으면 안 될 몸이면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느냐. 이와 같 이 생각할 때 좋은 친구를 만나 함께 지내는 것은 이 길의 전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잡아함경 선지식

“어떤 친구가 나쁜 친구이면서 겉으로는 좋은 친구처럼 꾸미는가? 속으로는 싫어하고 미 워하면서 입으로는 네 마음과 같다고 말하고, 어려운 일에 부딪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좋은 친구가 아닌 줄 알게 되느니라. 입으로는 은혜와 사랑을 말하면서 마음은 은혜와 사랑을 멀리 떠나 하는 일마다 서로 마음이 맞지 않나니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친구를 겉 으로만 친한 친구인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친구가 착한 친구로서 남을 내 몸처럼 생각하는가. 게으름을 피울 때 깨우쳐주고 일 을 방해하거나 의심하지 않으며, 허물을 보아도 꼬투리를 잡으려 애쓰지 않는다. 착한 친구와 가까이 하는 것은 자식이 부모 품에 안긴 듯 하여 편안하고 즐거우니라.” 잡아함경

. “나쁜 친구를 가까이 하면 여섯 가지 손해가 있느니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속이고, 남이 보지 못하는 으슥한 곳을 좋아하며, 착한 사람들을 꾀임에 떨어뜨리고, 남의 재산을 엿보며, 항상 이익만 획책하고, 남의 허물을 자랑스럽게 떠든다.” 중아함경 선생경

“사람은 근기와 성품이 서로 같은 점이 있어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과 어울리고, 악한 사 람은 악한 사람과 어울린다. 그것은 마치 물과 기름이 각기 서로 어울리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근기와 행하는 법에 따라 서로 각각 어울리게 된다.” “나쁜 벗이나 어리석은 이들과 더불어 함께 어울리지 말고 착한 벗이나 지혜로운 이와 항 상 더불어 사귀어라. 사람이 본래 악한 것은 아니지만 악한 사람과 가까이 친하게 되면 뒷날 에 반드시 악행에 물들어 좋지 않은 이름이 세상에 퍼지리라.” 증일아함경

“나쁜 벗과 친하지 말고 법답지 못한 모임에는 가지를 말라. 착한 벗을 가까이 하고 정법 의 모임에는 항상 나가라. 스스로 악행을 쌓지 않아도 악에 물든 사람과 가까이 하면 비난과 비웃음이 뒤를 따르나니 좋지 않은 이름이 밤낮으로 퍼지리라. 국자가 국맛을 모르듯이 어리 석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을 가까이 해도 진정한 그의 뜻을 알지 못한다. 어리석은 사람이 스스로 어리석다 하면 그는 이미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야 하리.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말하는 사람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니라.” 법집요송경 선우품

파세나디 왕이 부처님께 귀의하고 때때로 부처님을 방문하여 자신의 생각을 이야 기하는 중에 “세존이시여, 나는 홀로 앉아 고요히 생각하다가 이 같은 것을 생각하였 습니다. 도대체 진실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또 자기를 사랑하지 않 은 것은 어떤 것일까? 그리하여 저는 이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사 람이 그 행위에 악한 짓을 하며, 그 말에서 악한 말을 하며, 또 그 마음에서 악한 생 각을 품고 있으면 그는 진실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는 짓거리를 자신에게 하고 있기 때 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반대로 그 행위에서 착한 행동을 하고 그 말에서 착한 말을 하고 또 그 마음에 있어서 착한 마음을 품는다면 그 사람은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그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은 왕의 이러한 견해를 듣고 깊이 수긍하면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정말로 그러합니다. 누구라도 신·구·의에 의해 악업을 짓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구·의에서 선업을 짓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 는 사람입니다.” 잡아함경

코살라국왕 파세나디에게 말리카라는 현명한 왕비가 있었다. 파세나디왕은 왕비와 함께 성 의 높은 누각에 올라갔다. 눈앞에는 코살라의 산과 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참으로 웅장한 경관 이었다. 그때 왕이 갑자기 왕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말리카여 이 넓은 세상 속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보다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소?” 왕비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말하였다. “왕이시여 저에게는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보다 사랑스럽다고 생각되는 것은 없습니다. 왕 께서는 어떠하십니까?” “말리카여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두 사람의 생각은 일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결론이 어딘가 틀린 곳이 있지 않나’ 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평소에 받들어 모시던 부처님의 가르침 중 어느 곳에도 그런 말씀은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세나디 왕은 누각을 내려와 제타 숲 정자로 가서 부처님 을 방문하고 이것에 관해 가르침을 청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왕과 왕비의 결 론을 듣고 깊이 수긍하였다. 그리고 게송을 설하여 가르치셨다. “사람은 어디라도 갈 수 있다. 하지만 어디를 향하더라도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사랑스러 운 것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자기 자신은 더 없이 사랑스럽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상응부경전

진정한 벗, 나쁜 벗 어떤 친구가 나쁜 친구이면서 착한 벗인 양 겉모양을 꾸미는가. 마음으론 진실로 싫어하면서 입으로는 그 마음 같다 떠들며 일을 같이 하기는 즐겨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착한 벗 아닌 줄 아니느라 입으로는 은혜롭고 부드러운 말 하면서 그 마음은 완전히 거기에 맞지 않고 하는 일마다 서로 어긋나나니 지혜로운 사람은 깨달아 알라. 그런 친구는 실로 나쁜 친구이면서 착한 벗인 양 겉모양 꾸미거나. 어떤 친구가 착한 친구로 두 몸을 한 몸처럼 생각하는가. 두 몸이 한 몸 같은 착한 친구는 스스로 방일하여 억제하지 않거나 일을 방해하거나 의심을 품고 허물 꼬투리 잡으려 하지 않네. 착한 친구를 의지하는 편안함은 자식이 아비 품에 안긴 듯하여 아무도 그 사이를 뗄 수 없나니 그는 착한 벗인 줄 알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끊기를 구하는가. 기쁘고 즐거운 곳 거기 태어나 맑고 시원한 것을 좋아라 감탄하고 복되고 이익된 결과를 닦아 번뇌 아주 사라져 맑고 시원하나니 그러므로 끊기를 구하는 것이니라. 불꽃같은 번뇌를 떠나면 어떠한가. 지극히 고요하고 편히 쉬는 맛 그것은 멀리 떠난 그 맛을 알고 불꽃같은 번뇌의 악을 여의고 참 법의 기쁜 맛을 한껏 마시고 탐욕의 불길 떠나 완전히 고요한 것 번뇌를 떠난 경계 이러하니라. 잡아함경 「상주경」

부처님이 제자와 대중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가노라니 어 느 무덤가에 이르렀지요. 무덤가에는 파헤쳐진 마른 뼈들이 여기 저기 널려져 있었습 니다. 부처님은 그 뼈 무더기를 향해 이마를 땅에 대고 예배했습니다. 이를 지켜 본 제자 ‘아난’이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스승이시온데 어찌하여 볼품없는 해골 더미에 절을 하시나이까?” 그러자 부처님은 제자의 어리석음을 꾸짖으면서 말했습니다. “이 뼈들은 지금 보기에는 볼품없지만 전생에 나의 조상이었을 지도 모르고, 또 나 의 부모이었을 지도 모르므로 예배한 것이니라.” 이 말을 들은 아난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이제는 부처님이 아난에 게 물었습니다. “아난아, 이 한 무더기의 뼈들을 남자의 뼈와 여자의 뼈로 나누어 보라.” 부처님의 엉뚱한 질문에 아난은 몹시 당황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아난이 부처님께 다시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남자와 여자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 옷과 생김새를 보고 남녀를 구별 할 수 있겠지만, 한번 죽은 뒤에는 똑같은 백골뿐인데 어찌 저로 하여금 남녀의 뼈를 분별하라 하시나이까?” “아난이여, 정령 모르겠느냐? 만일 남자라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절에 가서 불경 읽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불·법·승 삼보께 예배도 하고 염불도 하였을 것이므로 그 뼈가 희고 무거울 것이나, 만일 여자라면 아기를 한번 낳을 적에 서 말 서 되의 피를 흘리고, 여덟 섬 너 말의 젖을 먹여야 하므로 뼈가 검고 가벼울 것이니라.”

아난이 이 말씀을 다 듣고는 가슴을 저미는 듯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께 말했습니 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어머니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나이까?” 이에 부처님은 조용히 설법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세히 듣고 명심하라. 지금부터 어머니가 아기를 가져 출산하기까지 열 달 동안 겪어야 하는 고통을 말하리라. 어머니가 아기를 수태한 첫째 달에는 마치 풀끝에 맺힌 이슬방울이 아침에 있다가 도 낮이 되면 없어지듯이, 새벽에는 피가 모였다가 오후에는 흩어져 버리느니라. 둘째 달에는 잘 끓인 우유죽이 한 방울 떨어진 것 같으니라. 셋째 달에는 흡사 엉킨 피와 같고, 넷째 달에는 점점 사람의 모양을 이루며, 다섯째 달에는 다섯 부분인 오포가 생기나니 오포란 머리와 두 팔꿈치와 두 무릎이니라. 여섯째 달에는 여섯 정기가 열리나니 눈 · 귀 · 코 · 혀 · 몸 · 마음 등을 여섯 정기 라 한다. 일곱째 달에는 3백 6십 마디와 8만 4천 털구멍이 생기고, 여덟째 달에는 뜻과 지 혜가 생기고 아홉 구멍이 생기느니라. 아홉째 달에는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먹기를 시작하는데 복숭아와 배, 마늘이나 오곡은 먹지 않느니라.

어머니의 생장(심장 등 오장을 말함)은 아래로 향하고, 숙장 (소화기 계통의 6부를 말함)은 위로 향하여 한 더미의 산과 같으니 이것을 혈산(血 山)이라 하는데, 이것이 한번 무너지면 한줄기의 피가 되어서 아기의 입으로 들어가 느니라. "어머니가 아기를 수태한 지 열째 달에는 마침내 아기를 낳게 되는데, 그 아기가 만일 부모에게 효도하는 착한 자식이라면 두 손을 모으고 나오면서 어머니를 괴롭히 지 않지만, 만일 착하지 못한 자식이라면 어머니의 태를 깨뜨리거나 다리로 어머니의 골반 뼈를 다치기도 하여 어머니로 하여금 천 개의 칼로 찌르듯, 만 개의 창으로 가슴 을 쑤시는 듯 하느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과 대중들은 한결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 다.

열 가지 어머님의 은혜

부처님은 어머님의 은혜를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습니다. 첫째, 어머니 뱃속에 잉태하여 지켜주신 은혜 여러겁 내려오며 인연이 깊고 깊어 금생에 다시 와서 모태에 의탁했네. 달수가 차 면서 오장이 생기었고, 여섯 달 되어서는 산보다 더하였고, 거니는 그때마다 찬바람 겁이나니 고운 옷 생각 없어 입어도 보지 않고 머리맡 거울에는 먼지만 가득하네. 둘째, 해산에 임하여 큰 고통을 감수하신 은혜 뱃속에 아기 배어 열 달이 다가오니 순산이 언제일까 손꼽아 기다리네. 나날이 기 운 없어 큰 병 든 사람 같고 어제도 오늘에도 정신이 흐리도다. 두렵고 겁난 마음 무 엇에 비교할까. 근심의 눈물만이 가슴에 가득하네. 슬픔의 눈빛으로 친척에게 말하기 를 죽음이 닥쳐올까 두려울 뿐이라네. 셋째, 자식을 낳고서 모든 근심을 잊으신 은혜 어지신 어머님 나의 몸 낳으실 때, 오장과 육부까지 찢기고 에이는 듯 정신이 혼미 하고 몸까지 쓰러지니 흘린 피 너무 많아 그 모습 창백하다. 아기가 건강하다 좋은 말 들으시면 반갑고 기쁜 마음 견줄 데 없지만은 기쁨이 지난 뒤엔 슬픔 맘 다시 나며 아프고 괴로움이 온몸에 사무치네. 넷째,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자식 먹이신 은혜 어버이 깊은 은혜 바다에 비할 손가. 귀여워 사랑하심 영원히 변치 않네. 단것은 모 두 모아 아기에게 먹이시고 쓴 것만 잡수셔도 그 얼굴 밝으시네. 사랑이 깊으시니 아 기 위해 밤낮 없고 은혜가 높으시매 슬픔이 몇 곱일세. 어머니 일편단심 아기 배불리 고자 며칠을 굶은들 그 어찌 마다하랴. 다섯째, 마른자리는 자식에게 내어주고 진자리는 어머니가 누우신 은혜 어머니 당신 몸은 백 번이 젖더라도 아기는 어느 때나 마른 데 뉘이시며 두 젖을 먹이어서 아기 배불리시고 찬바람 쏘일세라 소매로 가리우네. 아기를 돌보느라 잠 한 번 편히 자랴. 두둥실 둥개둥개 안아서 놀리시니 아기만 편하다면 무엇인들 사양하며 어머니 그 몸이야 고된들 어떠하랴. 여섯째,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 어머님 크신 은혜 땅에다 견주리까. 아버님 높은 은덕 하늘에 비기리까. 높고 큰 부 모은공 천지와 같사오니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 뜻 다를 손가. 눈과 코 없더라도 조금 도 밉지 않거늘 손과 발 못쓴다고 싫은 맘 있을 손가 배 갈라 낳은 자식 병신이 더 귀 여워 온종일 사랑해도 정성은 끝없어라. 일곱째,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 주신 은혜

지난날 이내 얼굴 꽃보다 고왔었고 옥같이 아름답고 솜같이 부드러워 예쁘게 그린 눈썹 버들잎 부끄럽고 두 볼에 붉은빛은 연꽃도 수줍었네 은혜가 깊을수록 내 얼굴 . 여위었고 기저귀 빠느라고 손발이 거칠었네 아들딸 기르노라 고생도 극심하여 어머 . 님 꽃 얼굴에 주름살 잡히었네. 여덟째 먼 길 떠난 자식을 걱정해 주신 은혜 , 죽어서 영이별도 잊을 수 없지만은 살아서 이별함도 마음을 끓노매라 자식이 집을 . 떠나 먼 길을 가게 되면 어버이 그 마음은 자식을 따라가네 이 마음 밤낮으로 자식을 . 생각하여 두 눈에 흘린 눈물 천 줄기 만 줄기라 원숭이 자식사랑 창자를 끊듯이 어버 . 이 자식걱정 그보다 더하여라. 아홉째 자식을 위해서라면 나쁜 일도 마다 않으신 은혜 , 어버이 크신 은혜 바다에 비길손가 산보다 높으시니 어떻게 갚사오리 자식의 온 . . 갖 고생 대신 갚기 소원이요 아들이 괴로우면 부모 맘 편치 않네 아들딸 길을 떠나 . 먼 길을 가게 되면 밤이면 추울세라 낮이면 주릴세라 자식들 잠시라도 고통을 받게 되면 어버이 근심걱정 하루가 삼추로다. 열 번째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 , 아버님 어머님의 그 은혜 어떠한가 자식을 생각하심 잠신들 쉬오리까 서거나 앉 . . 았거나 마음은 따라가고 멀거나 가깝거나 사랑은 같을세라 늙으신 부모나이 백 살이 . 되었어도 여든 된 아들딸을 행여나 걱정하네 부모님 깊은 은공 언제나 끊일는지 이 . 목숨 다한 뒤나 다할까 하노매라.”

또 불설아속달경 에 보면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 ? “부모가 자식을 낳아 양육하고 젖을 먹이어 키우는 것은 해와 달빛을 보게 하려는 것이니 부모는 천하 만물로써 자식에게 보여서 선악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자식이 , . 한 어깨에 아버지를 지고 다시 한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서 수명이 다한 뒤에야 그치 , 며 다시 보물 명월주 옥구슬 유리 산호 금수에게서 자연히 나오는 흰 구슬을 , · · ··· 모두 몸에 달아 드리더라도 부모의 은혜는 갚을 수가 없다.”

육방예경 이라는 경전에 부처님이 한 젊은이를 교화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가르침 을 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선남자여, 친구인 척하면서 친구가 아닌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것은 첫째 탐욕 스러운 사람, 둘째 말이 교묘한 사람, 셋째 아첨하는 사람, 넷째 낭비하는 사람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조금 주고 많은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을 사귀기 때문에 진정 한 친구가 되지 못한다. 또 말이 교묘한 사람은 지나간 옛일을 끄집어내어 친한 정을 나타내고 당치도 않은 소리로 구변을 늘어놓아 도움을 주는 척 하지만 눈앞에 큰일이 닥치면 달아나 버린다. 그리고 아첨하는 사람은 악도 선도 권하지 않으며 면전에서는 칭찬하고 물러서서는 비방한다. 마지막으로 낭비하는 사람은 술친구가 되어 거리를 방황하는 짝이 되어 술과 도박 등으로 사람을 사귄다. 그러므로 이들은 참된 친구가 되지 못한다.”

부루나존자는 매우 총명한 분이셨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당시 인도의 종교 경전이었 던 베다와 세상의 학문을 이미 두루 통달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는 부귀와 명예를 한순간에 다 버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총명한 지혜에 성실 함과 덕까지 갖춘 부루나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정진한 결과, 몇 해 지나 지 않아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또한 부처님으로부터 “나의 제자 중 설법을 가장 잘 하는 이는 부루나이다”라는 칭찬을 받았고, 여러 수행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부루나존자는 교단 안에서의 명성과 지위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 을 진정한 행복으로 인도하기 위해 더 많은 이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리라는 큰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당시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지지 않았던 수로나 지방을 포교하리라 마음먹고 허락을 받기 위해 부처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인도 서쪽에 있던 수로 나 지방은 이교도들과 장사꾼들이 판을 치는 매우 위험한 지역이었습니다. 이를 걱정한 부처님께서 부루나존자에게 물으셨습니다. “수로나 사람들은 매우 거칠고 모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볍고 성급하고 못되고 사 나우며 비난하기를 좋아한다. 부루나야, 거칠고 사나우며 비난하기를 좋아하는 그들이 너 를 헐뜯고 욕하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부루나존자는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로나 사람들이 심한 말로 비난하고 헐뜯고 욕할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저는 ‘수로나 사람들은 참 착하구나. 거칠고 사나운 말로 나를 비난하고 욕하기는 하 지만 그래도 손이나 돌로 때리지는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겠습니다.” “수로나 사람들이 거칠고 사나운 말로 비난하고 욕하기만 한다면 다행이겠지만 손이 나 돌로 때린다면 또 어떻게 하겠느냐?”

“세존이시여, 수로나 사람들이 손이나 돌로 저를 때릴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저는 ‘수로나 사람들은 참 착하구나. 손이나 돌로 나를 때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칼이나 몽둥 이를 쓰지는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들이 혹 칼이나 몽둥이로 너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세존이시여, 그들이 칼이나 몽둥이로 저에게 상처를 입힐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저 는 ‘수로나 사람들은 참 착하구나. 칼이나 몽둥이로 내게 상처는 입혔지만 그래도 죽이 지는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겠습니다.” “만일 그들이 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세존이시여, 수로나 사람들이 저를 죽일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저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세존의 제자들은 몸을 더럽고 냄새나는 것으로 여기며, 온갖 악이 싹트는 씨 앗으로 여기며, 열반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여긴다. 수로나 사람들은 참 착하구 나. 썩어 무너질 나의 몸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다니.”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부루나의 확고한 마음을 안 부처님은 부루나의 마음가짐을 칭찬하고 포교여행을 허락하셨습니다.

“훌륭하구나. 부루나야, 너는 인욕(忍辱)을 잘 배웠구나. 너라면 수로나 사람들 틈에 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수로나로 떠나거라. 가서 고통의 바다를 건너지 못한 사람 들을 건네주고, 편안하지 못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며, 열반을 얻지 못한 자들에게 열반 을 얻게 하라.” 자비와 인욕으로 마음이 잘 다스려진 부루나존자는 그 후 불교의 불모지였던 수로나 지방을 두루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고 많은 사찰을 건립할 수 있었습 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평생을 현명한 사람과 사귀더라도 진리를 알지 못한다. 마치 숟가락이 국 맛을 알 수 없듯이 지혜 있는 사람은 잠깐 동안만 현명한 사람과 사귀더라도 곧 진리를 알게 된다. 마치 혀가 국 맛을 알듯이

법구경 바보의 장

비록 여기에 저 설산(雪山)만한 순금 덩어리가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그 금을 다 얻는다 해도 오히려 만족할 줄 모를 것이다. 그러므로 저 지혜로운 사람은 그 금을 돌과 같다고 보느니라. 잡아함경 작왕경

중국에 부처님의 명상법을 가르쳐 중국 선의 시 조가 된 달마 대사의 어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제자 혜가가 물었다. “불도를 얻고자 하면 어떤 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요긴하겠습니까?” 달마스님은 대답했다. “오진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이 법이 가장 간 결하고 요긴하다.” “어째서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거두어들인다 하십니까?” “마음이란 모든 것의 근본이므로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 므로 마음을 깨달으면 만 가지 행을 다 갖추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기 큰 나무가 있 다고 하자. 그 나무의 가지나 잎이나 열매는 모두가 뿌리가 근본이다. 나무를 가꾸는 사람은 뿌리를 북돋을 것이고, 나무를 베고자 하는 사람도 뿌리를 베어야 할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마음을 알고 도를 닦으면 많은 공을 들이지 않고도 쉽 게 이룰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수도한다면 부질없이 헛된 공만 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음 밖에 따 로 구할 도가 있다면 옳지 않은 말이다.”

마음이 모든 일의 근본이다. 마음이 주인이 되어 마음을 시키나니 마음속에 악한 일을 생각하면 말과 행동이 그러하리라. 마음이 모든 일의 근본이다. 마음이 주인이 되어 마음을 시키나니 마음속에 착한 일을 생각하면 말과 행동이 그러하리라.

법구경

부처님은 사십이장경 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비록 악도에 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시 태어날 때 사람의 몸을 받기 가 어렵고, 사람의 몸을 받았다 하더라도 남자로 태어나기 어렵고, 남자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건강한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건강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좋은 집안에 태어나기 어렵고, 좋은 집안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진리의 세계를 만나기는 더 어렵다.”

부처님은 좋은 업을 짓는 방편으로 ‘십선법(十善法)’을 가르쳤습니다. 열 가지 착하 게 사는 방법을 말합니다. 위에서 말한 ‘삼업’을 좋은 업으로 나누면 십선법이요, 나쁜 업으로 나누면 십악법이 됩니다. 이것은 동전의 앞뒤와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십선법의 가르침일까요? 몸으로 짓는 업에 세 가지, 입으로 짓는 업에 네 가지, 생각으로 짓는 업에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불살생(不殺生)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는 모든 생명을 내 몸처럼 생각하고, 억압받고 죽어 가는 생명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둘째, 불투도(不偸盜)입니다.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남이 땀 흘려서 이룩한 것을 탐내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스스로 노력하여 얻을 것이며, 또한 그 얻은 것에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불사음(不邪 )입니다.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인간 의 성을 도구화하지 말고 올바른 이성관에 입각하여 이성을 사귈 것이며 자신의 성을 소 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넷째, 불망어(不妄語)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거짓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고, 항상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함으로써 정직한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다섯째, 불양설(不兩舌)입니다. ‘이간질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말 그대로 한 입으로 두 혀를 놀리지 말하는 뜻이며, 남을 불신하고 모함하지 말고 이해와 신뢰로써 154 청소년 설법자료집 화해하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섯째, 불악구(不惡口)입니다. ‘상스럽고 악한 말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남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기보다는 부드러운 말로 설득하고 대화하라는 뜻입니다. 일곱째, 불기어(不綺語)입니다. ‘아첨하는 말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꾸며서 상대방을 현혹하여 자신의 이득만을 취하려하지 말고, 전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원력 있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원력(願力)이란 욕심과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욕심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것 이지만 원력은 이타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부를 하더라도 개인의 출세를 위해서 하 는 것이라면 그것은 욕심에 지나지 않지만, 인류와 사회의 복지에 공헌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면 그것은 원력인 것입니다. 여덟째, 불탐욕(不貪慾)입니다. ‘헛된 욕망을 갖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허황한 꿈이나 관념적인 환상에서 벗어나 매사 성실한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공부는 해 놓지 않고 남의 시험지를 커닝하여 점수를 올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헛된 욕망입니다. 아홉째, 불진에(不瞋 )입니다. ‘성내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한번 화를 내면 몸 의 세포가 탈락되고 피가 거꾸로 솟아올라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항상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자신이 잘못을 했으면 기꺼이 시인할 줄 알고 참회하는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열 번째, 불사견(不邪見)입니다. ‘삿된 소견을 갖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사로 운 생각이나 한편에 기울어진 생각, 미리 색안경을 끼고 보는 생각에서 벗어나 마음을 크 게 열어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뜻입니다. 이상 열 가지 선하게 사는 방법을 신․구․의 세 가지 업의 범주로 나누어 보면, 불살 생․불투도․불사음은 몸으로 짓는 업에 해당하고, 불망어․불양설․불악구․불기어는 입으로 짓는 업에 해당하며, 불탐욕․불진에․불사견은 뜻으로 짓는 업에 해당합니다

부처님은 능엄경 권 6에서 제자 아난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음란한 마음만 없다면 나고 죽는 괴로움에서 바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수행하는 것은 번뇌를 없애려 하는 것인데, 만약 음란한 마음을 끊 지 않는다면 절대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설사 근기가 뛰어나 항상 마음이 고요하고 지혜가 생겼다 할지라도, 음란한 행동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천길 나락에 떨어지고 말 것 이다. 내가 죽음에 든 후 말세에는 그러한 나쁜 무리들이 나타나 음행을 탐하면서도 선지 식[훌륭한 스승] 노릇을 하며, 어리석은 사람들을 애욕과 잘못된 길로 빠뜨릴 것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단호하게 음란한 생각과 행동을 경계했습니다. 네 가지 근본 계율 중 에 첫 번째로 ‘불사음계’를 설했습니다. 한마디로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이 수행하는데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음욕을 끊지 않고 수행한다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 모래를 가지고는 백 천겁을 찐다 해도 밥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음행하는 몸으로 불과(佛 果)를 얻으려 하면 아무리 미묘하게 깨닫는다 하여도 그것은 모두 음욕의 근본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지요.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한 분인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법문을 가장 많이 듣고 기억하기 로 유명합니다. 아난(阿難)은 아난다(阿難陀)의 줄임말로 ‘물들지 않는 이’ ‘기뻐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아난은 부처님의 사촌 동생으로 부처님이 성도하시던 날 밤 카필라성 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루신 후 8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인 카필라 성을 방문하셨습니다. 이때 카필라성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출가하였는데, 아난도 여덟 살 의 어린 나이로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아난은 머리가 영특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음성에 외모도 준수하였습니다. 얼마나 잘 생기고 멋있었는지 출가한 후에도 여러 차례 여인의 유혹을 받았다고 합니다. 20세에 부처님의 시자로 선출된 아난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까지 20여 년을 가장 가까이에 서 모셨던 제자입니다. 총명하고 부지런한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말씀을 한 마디, 단 한 자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마음을 기울이며 평생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배우고 외웠기에 부처님 열반 후 그 말씀을 모아 정리할 때, 아난존자가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긴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들 을 수 있는 것이 아난존자 덕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또한 아난존자는 누구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부처님뿐 아 니라 교단의 모든 이들이 반대했던 비구니의 출가를 이뤄낸 분이 아난존자였습니다. 부처 님의 생부인 정반왕이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입니다. 그 무렵 부처님께서는 카 필라 성 밖의 니그로다 정사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그때 정반왕의 왕비이자 당신을 몸소 길러주신 이모 파자파티왕비가 찾아왔습니다. 정반왕이 죽은 후 의지할 곳이 없어진 그는 부처님께 예배한 후 출가를 청하였습니다. 세 번이나 간절히 청했지만 부처님께서는 잘라 서 거절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부처님은 곧 카필라성을 떠나 베살리로 향하셨습니다. 그러나 파자파 티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파자파티를 따르는 석가족 여인들은 며칠 뒤 비단옷을 벗 고 누더기를 걸친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부처님이 가신 길을 좇았습니다. 부처님이 계신 베살리의 마하바나 정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행색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 습니다. 더위와 굶주림으로 지친 몸에 먼지와 때가 가득했고, 발등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 었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아난은 그들의 출가를 부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대답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아난은 고난을 무릅쓰고 먼 길을 걸어온 파자파티의 초 췌한 모습을 떠올리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아난은 파자파티왕비가 부처님을 애지중지 키웠던 과거를 회상시키며 다시 여성의 출가를 간청합니다. 이렇게 세 번을 간청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세 번 다 거절하십니다. 이때 아난이 지혜를 내어 부처님께 이렇게 여쭙니 다. “부처님, 여자일지라도 출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에 힘쓴다면 수행의 성스 러운 과보를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아난아. 여인도 이 법에 귀의하여 지극한 마음으로 수행하면 성스러운 과보 를 얻을 수 있다.” 이 말씀에 용기를 얻은 아난은 다시 한 번 파자파티의 출가를 간청합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부처님은 여인들의 출가를 허락하게 됩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심성에 총명한 머리까지 갖춘 아난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이 들에게 늘 모범이 되는 분입니다. 그런 부지런한 배움 덕분에 부처님 열반 후 가섭존자의 뒤를 이어 불법을 널리 펴는 소명을 전해 받게 됩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는 나병이나 나쁜 병의 고통, 백나병에 걸린 것이 있겠지만 은혜를 모르는 것 또한 이와 같다. 사분율

화엄경 보현행원품 에서는 회향한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두 다 회향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처음 예배하고 공경함으로부터 중생의 뜻을 수순 하기까지 그 모든 공덕을 온 누리에 있는 모든 중생에게 돌려, 중생들로 하여금 항상 편안하 고 즐겁고 병고가 없게 한다. 나쁜 일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착한 일은 모두 이루어지며, 온갖 나쁜 일의 문은 닫아버리고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은 활짝 열어 보인다. 중생들이 쌓아 온 나쁜 업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무거운 고통의 여러 가지 과보를 내가 대신 받으며, 그 중생들이 모두 다 해탈을 얻고 마침내는 더없이 훌륭한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힘쓴다.

경전 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길을 가던 도중, 길가에서 깊이 들어간 숲속 한 나무 아래서 좌선을 하 고 계셨습니다. 이때 한 떼의 젊은이들이 숲 속에서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찾아다니고 있었죠. 나무 아래 조용히 앉아있는 부처님을 보고 그들이 물었습니다. “한 여자가 도망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사연인 즉, 그들은 이 근처에 사는 지체 있는 집안의 자제들인데, 삼십 명이 저마다 자기 아내를 데리고 숲에 놀이를 왔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의 독신자만은 기생을 데리고 왔었는데, 다들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기생은 여러 사람의 옷과 값진 물건을 가지고 달아나 버렸고, 그래서 그 여인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 니다. 이와 같은 사정을 듣고 부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젊은이들, 달아난 여인을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 한가?” 180 청소년 설법자료집 놀이에만 팔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여인을 찾아 헤매던 그들은 부처님의 말씀 을 듣고 제정신으로 돌아왔죠.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럼, 다들 거기 앉거라.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찾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그들의 마음은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았으므로 이치에 맞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곧 이해했다고 합니다.

자기야말로 자신의 주인 어떤 주인이 따로 있을까 자기를 잘 다룰 때 얻기 힘든 주인을 얻은 것이다. 법구경

“물질[색]은 무상(無常)한가, 아닌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아닌가?” “괴로움입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요, 이것은 나요, 이것은 나의 실체 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없을까?” “말할 수 없습니다.” “정신작용[수·상·행·식]도 또한 그러하니라.” 잡아함경

나쁜 짓을 멀리하고 선행을 쌓으면 그 마음 항상 편안하리라.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자기 지키기를 나라를 잘 지키는 임금이 국경을 지키듯 자기를 잘 지켜야 하느니라. 잡아함경

거룩한 탄생 부처님은 기원전 624년, 지금의 네팔국 타라이 지방인 인도 북부, ‘카필라’국의 왕 자로 태어났습니다. 카필라국은 히말라야 남쪽 기슭의 초목 지대에 자리한 조그만 왕국으 로서 쌀을 주식으로 하는 농업 국가였습니다. 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슛도다나왕’이었고 왕비는 ‘마야’ 부인이었지요. 부처 님은 바로 이 정반왕과 마야 왕비 사이에서 탄생했습니다. 정반왕은 석가족의 후예로서 용감하고 지혜로운 왕이었습니다. 석가족은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강 한 종족이었습니다. 부처님을 ‘석가모니(釋迦牟尼, kyamuni)’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바 로 ‘석가족’이라는 종족 이름에서 나온 것입니다.

석가모니란 ‘석가족 출신의 성자’란 뜻입 니다. 부처님은 슛도다나왕의 나이 마흔에 얻은 아들입니다. 마야 부인이 아이를 낳을 날이 다가와 당시의 풍습에 따라 친정 국가인 코올리성을 향해 길을 떠났지요. ‘룸비니’라는 동산에 이르자 산기가 느껴졌어요. 어쩔 수 없이 동산 나무 아래에 산실을 차리고 아이를 낳으니 바로 이 분이 훗날 ‘붓다’가 되는 분입니다.

‘붓다(Buddha)’란 원래 인도 언어 즉 산스크리트어로 ‘진리를 깨달은 분’이란 뜻 인데, 이것이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한자음 ‘불타(佛陀)’가 되었고, 그것이 다시 우리말 로 옮겨져 ‘부처’가 된 것입니다. 다음 내용은 불전(佛典)에 전하는 부처님의 탄생 신화입니다. 갓 태어난 어린 왕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곱 걸음을 걷고 사방을 둘러보며 이렇게 외 쳤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 나 홀로 존귀하도다.” 이어서 다시 어린 왕자는 외쳤다.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온 세상이 고통 속에 묻혔구나. 내가 마땅히 모두를 편안하게 하리라.” 왕자가 태어나자 당시 유명한 수도자인 ‘아시타’라는 분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백 살이 넘은 아시타 선인은 백발에 흰 수염을 한 신선의 모습으로, 그의 눈은 지혜와 영 혼이 깃들어 빛나고 있었다. 아시타 선인은 어린 왕자의 얼굴을 살펴보고 난 후 눈물을 흘렸다. 이를 본 왕이 물었다. “선인은 어찌하여 한 마디 말씀은 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시오?” “예, 대왕마마. 왕자님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훌륭한 상호(相好, 거룩한 모습)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왕자님은 훗날 성장하셔서 전 인도를 통일하여 덕으로써 다스리는 이상적인 제왕인 전륜성왕이 될 것입니다. 만약 출가하여 수행자의 길을 걸으시 면, 인간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 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부처님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몸은 늙어서 왕자님의 그런 거룩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서러워서 눈물이 납니다.”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을 많이 쓰는 것을 봤어요. 알 고 봤더니, H.O.T의 노래 가사에 이 말이 있었던 거예요. 뜻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합창하듯이 ‘이 세상에서 내가 최고’란 뜻이랍니다. 글쎄요, 어느 정도는 맞지요. 그러 나 이 말 속에는 엄청난 뜻이 들어 있답니다. 우선 이 말은 하늘과 땅 위에서 인간이 가장 위대하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인간 존엄 성에 대한 인류 최초의 선언인 셈이지요. 그 당시 인도는 신본주의 사회였어요. 신에게 무엇이든 제물을 바쳐서 복을 구했지요. 부처님은 이를 단호히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 인 간은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는 품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삼계개고 아당안지’란 말에는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습니 다. 온 세상이 고통 속에 싸여 있음을 갈파하고, 자비의 손길을 뻗쳐 그들을 고통 속에서 구제하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인류를 향한 한없는 자비의 실천을 천명한 것입니다. 슛도다나반왕은 왕자의 이름을 ‘싯타르타(悉達多, iddh rtha)’라고 지었습니다. 이 말 은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졌다.’라는 뜻입니다. 왕자의 앞날이 마음먹은 대로 만사형통 하라는 축원이 깃들어 있는 이름이었지요. 어린 시절 싯타르타 왕자가 태어난 지 이레 만에 마야 왕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인도의 풍습에는 시집간 언니가 죽으면 그 아래 여동생 이 형부와 혼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싯타르타 왕자는 그의 이모인 ‘마하파자파 티’의 사랑을 받으며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랐지요. 슛도다나왕은 왕자에게 학문과 무예를 두루 익히게 하면서도 항상 마음에 걸린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옛날 아시타 선인의 예언이었습니다. 바로 “출가하여 부처를 이룰 수도 있다.”라는 말이 항상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왕자의 생활을 즐겁고 호화스럽게 보살펴서 출가의 길을 처음부터 막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삼시궁(三 時宮)’이라 하여 세 철에 맞는 궁전까지 지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자는 어릴 때 명상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불전에 전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싯타르타가 얼마나 철학적이었고 총명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싯타르타 왕자가 일곱 살 되던 해 봄, 부왕인 슛도다나왕은 많은 신하를 거느리고 들에 나가 ‘농민의 날’ 행사를 참관하게 되었다. 농업국인 ‘카필라’에서는 왕이 그 해 봄 에 첫 삽을 흙에 꽂음으로써 밭갈이가 시작되었다. 어린 태자 싯타르타도 그 행사를 보기 위해 부왕을 따라 농촌 마을로 갔다.

왕궁밖에 나가 구경해 보는 전원 풍경은 그지없이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농부들이 땀을 흘 리며 일하는 것을 보자 그들의 처지가 자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뜨거운 햇볕 아래 서 고된 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을 본 싯타르타의 어린 마음은 어두워졌다. 이렇게 조용히 지켜보고 있으려니까 쟁기 끝에 파헤쳐진 흙 속에서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 난데없이 새 한 마리가 날아들더니 그 벌레를 쪼아 물고 공중으로 날 아갔다. 그리고 그 새는 공중에서 독수리의 공격을 받아 먹히었다. 이 같은 광경을 보게 된 어린 싯타르타는 마음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곳을 떠 나 숲 속 깊숙이 들어가 큰 나무 아래 앉았다. 어린 태자의 가슴에는 형언할 수 없는 여러 갈래의 문제가 한꺼번에 뒤얽혔다.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먹고살기 위해 뙤약볕 아래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농부들, 흙 속에서 나와 꿈틀거리던 벌레, 그 벌레를 물고 사라진 날짐승….’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괴로움으로 비쳤다. 산다는 것 자체가 어쩐지 괴로움만 같았다. 무슨 일이든 한번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끝까지 파고드는 것이 소년 싯타르타의 성미였 다.

그는 깊이 생각에 잠긴 채 다른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행사가 끝나 왕을 모시고 궁중으로 돌아가려던 신하들은 그때서야 어린 태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사방으로 흩어져 여기저기 찾아 헤매던 끝에 큰 나 무 아래 앉아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태자를 보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거룩하고 평 화스러워 왕은 반가운 중에도 차마 불러서 일으킬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는 싯타르타가 훗날 부처님이 되는 씨앗이 됩니다. 농민의 날 행사에 우연히 목격하게 된 존재의 실상을 보고 폭발적인 의문을 품게 된 것입니다. 왜 서로 먹고 먹히 는가? 왜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힐 수밖에 없는가? 무엇이 우주의 질서인가? 끊임없 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던 것입니다. 청소년기의 충격 한편, 소년 싯타르타가 청소년기로 접어들면서 더 없는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 있습니 다. 바로 ‘사문유관’이라는 사건이지요. 이것은 네 개의 문을 통하여 바깥세상을 바라 본 것인데, 여기서 싯타르타는 생로병사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불전에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랫동안 궁전 속에서만 있던 싯타르타는 어느 날 문득 궁전밖에 나가 바람이나 쏘였 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 뜻을 부왕에게 말씀드리자 왕은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왕은 곧 화려한 수레를 마련하게 하는 한편, 신하들에게 분부하여 태자가 이르는 곳마다 값진 향 을 뿌리고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여 태자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도록 일렀다. 싯타르타를 태운 수레가 동쪽 성문을 막 벗어날 때였다. 머리는 마른 풀처럼 빛이 바래 고 몸은 야위어 바짝 마른 노인이 숨을 헐떡거리면서 저쪽에서 오고 있었다. 화려한 궁중 에서만 자란 태자는 일찍이 그런 참혹한 노인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시종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냐?” “노인입니다.” “노인이라…….” “사람이 늙으면 저렇게 됩니다. 점점 나이를 먹으면 기운이 빠지고 숨이 차 헐떡거리 게 되고, 눈이 어두워져 앞을 잘 못 보게 되며, 이가 빠져 딱딱한 것은 먹을 수도 없게 됩 니다.” 시종의 말을 듣고 난 태자는 한동안 멍하니 먼 하늘을 바라보다가 힘없는 소리로 외쳤다. “수레를 왕궁으로 돌려라.” 모처럼의 소풍 길에서 되돌아온 왕자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또 어느 날 태자는 남쪽 성문으로 나가 보았다.

얼마쯤 가다 보니, 길가에 누더기를 뒤 집어쓴 채 신음하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은 파리하고 팔다리는 뼈만 앙상했다. 싯타르타 는 수레를 멈추게 하고 시종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냐?” “예, 병든 자이옵니다.” “병든 자라?…….” “예, 육신을 가진 사람은 한평생을 사는 동안 전혀 앓지 않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앓 는다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입니다. 저 사람은 지금 아픔을 못 이겨 신음하고 있는 중입 니다.” 왕자는 그 자리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람은 왜 병에 걸려 고통을 받아야만 할까? 늙음의 고통이나 질병의 고통은 왜 생기 는 걸까?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을까?’ 또 어느 날 싯타르타는 서쪽 성문으로 나가 보았다. 왕자의 수레가 들길을 지나 인적이 드문 고요한 숲에 이르렀다. 바로 그 때, 죽은 시체를 앞세우고 슬피 울며 지나가는 행렬 과 마주치게 되었다. 깜짝 놀란 싯타르타는 시종에게 물었다. 192 청소년 설법자료집 “저건 무엇이냐?” 시체인 줄 뻔히 알고 있는 시종은 태자의 반응이 두려워 입을 열지 못했다. 태자가 성 급하게 다시 물었다. “도대체 무엇이기에 대답을 주저하느냐?” “예, 죽은 자이옵니다.” “죽은 자라. 죽음이 무엇이냐?” “예, 죽음이란 생명이 끊어지고 영혼이 육체에서 떠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을 가져다주는 가장 슬픈 일입니다.” “나도 저렇게 되느냐?” “예, 언젠가는….” “아! 죽는다는 말이냐, 왜? 왜? 왜?…” 싯타르타의 얼굴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본 것처럼 초췌해졌다. 지금 자기는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죽음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이날부터 왕자는 혼자 있는 시간이 더욱 잦게 되었다. 며칠 뒤, 싯타르타는 북쪽 문으로 나갔다. 북쪽 성문을 나서자 우람한 수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숲 속으로 난 오솔길로 텁수룩한 머리에 다 해진 누더기를 걸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옷은 비록 남루하지만 걸음걸이는 의젓했고 얼굴에는 거룩한 기품이 감 돌며 눈매가 빛났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도 의젓했으므로 왕자는 자신도 모르게 수레 에서 내려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당신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는 출가 사문입니다.” “출가 사문이라, 출가 사문에게는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나는 일찍이 세상에서 늙음과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자신과 이웃을 통해 맛보았소. 그리 고 모든 것이 덧없다는 것을 알았소. 그래서 부모 형제를 이별하고 집을 떠나 고요 한 곳에서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도를 했소. 내가 가는 길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평안의 길이오. 나는 이제 그 길에 이르러 영원한 평안을 얻었소.” 이 말을 들은 싯타르타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맺혔다.

멀어져 가는 사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왕자의 마음에 무엇인가 굳은 결심이 생겼다. 이 이야기를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생로병사의 장면을 자연스럽게 전개하면서 마지 막으로 싯타르타가 출가의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단초를 마련합니다. 바로 출가 사 문과의 만남이지요. 여기서 출가 사문이란, 그 당시 집을 떠나 고요한 숲 속에서 고행을 한다거나 선정에 들기를 좋아했던 바라문교의 승려들을 말합니다. 네 개의 문을 통하여 세상을 구경하고 궁궐로 돌아온 싯타르타 왕자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서광을 찾은 듯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출가하여 사문이 되는 길을 생각하였습니다. 그 후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았지만, 결국 29세에 왕궁을 박차고 나가 히말라야 산 기슭 에서 6년 동안 수행한 끝에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바로 부처님이 된 것입니다. 그 때 나 이 35세입니다.

위대한 인류의 스승, 붓다 사실, 우리 인류 역사에는 많은 훌륭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중국의 춘추시대에 어려운 시대를 구하겠다고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훌륭한 가르침을 편 공자가 있었고, 중동의 유대 땅에는 어려운 시대에 도탄에 빠져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진리를 설파한 예수와,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도 있었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아테네 시장을 누비며 많은 청년들에게 보편적인 진리가 있음을 설파 하면서 그들의 무지를 깨우친 그리스 시대의 소크라테스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붓다, 말 그대로 ‘진리를 깨달은 분’ 즉 ‘부처님’이란 뜻입니다. 이 분은 다른 인류의 스 승들과 좀 다릅니다. 오로지 인류를 구제하고야 말겠다는 그 일념은 다른 스승들과 다를 바가 없지만, 그 접근 방식에 있어서 매우 독특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서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과감히 버리고 출가라는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부처님의 이러한 출가 행위를 ‘위대한 포기’라고 표현했지요. 둘째, 부처님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깨달음’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지고한 수행 과정을 거쳐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제거함 으로써, 모든 번뇌와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이를 실천 하고 증명해 주었습니다. 셋째, 부처님은 대단히 인간적인 가르침을 폈습니다. 예수처럼 천국이 가까워졌음을 선포하지도 않았고, 공자처럼 완전한 상태인 하늘을 상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인 간의 생로병사의 괴로운 모습을 보고 고민하기 시작했으며, 그 원인과 해결 방안을 찾기 194 청소년 설법자료집 위해 마음 속 깊이 천착해 들어갔지요. 신이나 하늘을 내세우지 않고 그냥 홀로 스승이 되어 모든 것을 깨쳤습니다. 넷째, 부처님이 다른 인류의 스승과 다른 점은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온유하게 간 ‘성 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로마법의 극형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거나, 그리스 시대 의 악법으로 인해 독배를 마시고 죽은 것이 아니라, 천수를 다하고 아주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만의 독특한 점은 45년 동안 맨발로 탁발 걸식을 하면서 진리를 설 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중생을 제도했다는 것입니다. 탁발 걸식이란 수행자들이 발우[그 릇]를 가지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음식을 얻어먹는 일을 말합니다.

긴 세월 동안 탁발 걸식을 하며 인류사에 빛나는 가르침을 폈다는 것은 그 어느 누구와도 비길 바가 아니지 요.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번뜩이는 지혜와 한없는 자비가 배어 있습니다.

육도집경(六度集經) 이라는 경전에서 부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로서 자식의 효행이 하늘과 인간을 감동시키고 부모의 지극한 사랑이 죽은 자식을 살려낸 아름다운 이 야기입니다.

옛날에 섬( )이라는 이름의 보살이 있었는데, 노부모를 받들어 산 속에서 살고 있었습 니다. 그러던 중 부모가 늙어 실명(失明)하자 섬은 슬퍼해 울면서, 밤이면 늘 세 번이나 일어나 부모가 계신 방의 차고 더움을 알아보곤 하였답니다. 이러한 그의 지극한 효성은 사람과 신들을 감동시켰고, 또 그는 부처님의 십선의 계(戒)를 받들어 삼업(三業)이 청정 했으므로 그 인자함이 멀리까지 알려져서 금수마저도 따라와 의지하였다고 합니다. 한 번은 부모가 목말라 했으므로 섬이 나가서 물을 긷고 있었는데, 마침 그 나라 임금 이 산에 들어와 사냥하다가 활을 당겨 사슴을 쏜다고 쏜 것이, 빗나가 섬의 가슴을 맞추 고 말았습니다. 섬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화살의 독은 몸속에 번져 가서 그 고통은 말 할 수 없는 와중에서도 섬은 좌우를 돌아보며 울면서 외쳤습니다. “한 화살로 세 도사(道士)를 죽이는 것은 누구냐? 우리 부모는 나이 많으신 데다가 시 력까지 잃으셨으니, 하루아침에 내가 없어진다면 다 돌아가셔야 할 것이다. 코끼리는 그 어금니 탓으로, 물소는 그 뿔 탓으로, 물총새는 그 털 탓으로 죽음을 당한다지만, 나는 그 런 어금니나 뿔이나 광채가 나는 털도 없는 터에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것인가?” 그의 슬퍼하는 소리와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들은 왕은 목이 메여 눈물을 흘리면서 매 우 슬퍼하였고, 신하들도 다 목 메여 했습니다. 왕이 한 나라를 가지고 섬의 목숨을 구하 겠으니 부모가 계신 곳을 알려 달라고 해서 섬이 길을 가르쳐 주고는 말을 마친 뒤에 문 득 숨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왕과 군신들은 거듭 애통해 하면서 그 부모가 사는 집에 도착해서 전후 사정을 이야기 하니, 그 부모는 크게 놀라서 말했습니다. “아들이 이미 죽었으니 우리에게는 이제 죽음이 있을 따름입니다. 원컨대 우리 두 늙 은이를 이끄사 자식 놈의 시체 있는 곳에 이르게 하시면 그 죽은 것을 보고 그 애와 함께 흙이 되고자 하나이다.” 자식의 시체가 있는 곳에 이르자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어머니 는 그 다리를 껴안고 입으로 발을 빨아 댔고, 각기 한 손으로는 그 화살 맞은 상처를 어루 만지며 가슴을 치고 볼을 두드리며 하늘을 우러러 외치기를 “만약 제 자식이 부처님을 받들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정성이 하늘에까지 들릴 만하다면, 화살이 뽑아지고 무서운 독이 소멸하여 다시 살아나 그 효행을 마치게 하옵소서.”라고 하니, 천지의 신들 모두가 감동하여 제석천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천신(天神)의 약을 섬의 입에 흘러 넣자 섬은 흘연 히 되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온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십선(十善)의 계를 받들고 섬의 효성을 본받게 하여 태평한 세상이 이루어 졌습니다.

은덕에 감사하자. 뿌리 실한 나무는 그 싹이 실하고,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을 타지 않으며, 뿌리 성한 나무는 꽃과 과일이 무성하다. 오늘의 무성한 가지와 아름다운 꽃, 풍성한 과일은 뿌리에 근원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또한 그렇다. 형제는 나뭇가지, 부모님은 밑둥, 조상은 뿌리, 자손들은 꽃과 과일이다. 부모님을 소중히 하고 조상님을 섬기는 데서 인생의 나무가 무성해지고 과일이 풍성하게 맺는다. 그 은덕에 공경 감사하자

명상 언어집 광덕 스님

불교에서는 부모은중경 뿐만 아니라 효자경 , 대방편 불보은경 , 육방예경 , 불 설아속달경 , 중일아함경 등 많은 경전 속에서 크신 부모님 은혜에 대해 구체적으로 잘 밝혀 주고 있습니다.

부모은중경 의 전체 구성과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1장 이 경을 설한 인연 제2장 마른 뼈의 가르침 전생의 조상이거나 여러 생을 살아온 동안의 어머니이거나 아버지일 수도 있으므로 절 하신 것이다. 제3장 잉태했을 때의 고통 어머니의 열 가지 은혜를 열거하면서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어머니 뱃속에 잉태하여 지켜 주신 은혜 둘째, 해산에 임하여 큰 고통을 감수하신 은혜 셋째, 자식을 낳고서 모든 근심을 잊으신 은혜 넷째,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자식 먹이신 은혜 다섯째, 마른자리는 자식에게 내어 주고 진자리는 어머니가 누우신 은혜 여섯째, 젖을 먹여 길러 주신 은혜 일곱째,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 주신 은혜 여덟째, 먼 길 떠난 자식을 걱정해 주신 은혜 아홉째, 자식을 위해서라면 나쁜 일도 마다 않으신 은혜 열째,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 제4장 낳으시고 기르신 은혜 제5장 부모님 은혜를 잊어버리는 불효 제6장 부모님 은혜 갚기의 어려움 수미산을 몇 바퀴나 돌았다고 하여도 부모님의 은혜는 다 갚지 못할 것이다. 어떤 효성 스런 사람이 흉년이 든 해에 제 몸의 한 부분을 베어 내거나, 뼈를 부숴 가루로 만들어 헤 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봉안했다고 하더라도 부모님의 깊은 은혜는 다 갚지 못할 것이다.

가령 어떤 효성스런 사람이 부모를 위하여 부처님 앞에서 자신의 몸은 불로 태우 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한다 하더라도 부모님의 깊은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 제7장 불효에 대한 과보 아비규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전생 부모와 스승을 죽이는 등의 다섯 가지 극악한 죄 를 저지르고 부모님에게 불효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제8장 부처님께 맹세 미래 세상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혀를 쭉 뽑아내어 소모된 쟁기로 갈아서 강을 이룰 만큼 피를 흘릴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제9장 이 경의 명칭 “이 경의 이름은 대보부모은중경(大報父母恩重經) 이라고 하라! 너희들은 마땅히 이 이름에 맞게 부모의 깊은 은혜를 잘 갚는 것처럼 경전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이에 대중 과 천인, 아수라 등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서 크게 기뻐하면서 받들어 지니고 물러났다.” 이는 설법의 마지막이 아름답게 끝났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입니다.

라훌자존자는 카필라국의 왕인 정반왕의 손자이자 싯다르타 태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 다. 그러나 라훌라의 탄생이 모든 이에게 축복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기뻐해야할 사람인 아버지 싯다르타 태자가 전혀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활활 타오르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불꽃에 고통으로 시름하는 세상살이를 회의하고 있던 싯다르타 태자에게, 아 들의 탄생은 기쁨은커녕 출가하리라는 마음 속 다짐을 뿌리째 뒤흔드는 갈등과 근심거리 였습니다.

발걸음을 때지 못하게 붙잡는 단단한 애착의 사슬이었던 것입니다. 할아버지인 정반왕과 어머니 야수다라의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 모자람 없이 자랐 지만 늘 비어있는 아버지의 자리는 라훌라에게 큰 슬픔이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이 너무도 컸던 탓인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카필라성을 방문하셨을 때 라훌라는 부처님을 따라 출가를 결심합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품안에서 재롱과 투정으로 나날 을 보낼 그 어린 나이에 더위와 굶주림이 기다리고 있는 고행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아들에 이어 손자마저 출가하자 정반왕은 부처님을 찾아가 견디기 힘든 슬픔을 하소연 했습니다.

그 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부처님은 사미는 부모의 허락 없인 출가하지 못한다는 규율을 정합니다. 라훌라는 채우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을 기대했지만 이미 부처 님은 라훌라 한사람만의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비구와 비구니스님 그리고 뭇 중 생들의 다정한 벗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였습니다. 부처님은 라훌라를 직접 거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가장 신뢰하는 제자 사리불에게 그의 양육과 교육을 부탁합니다. 사리불의 자상한 보살핌과 가르침 속에 라훌라는 뛰어난 지혜 와 부드러운 심성을 갖춘 훌륭한 수행자로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라훌라는 부처님의 교단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결코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하나만 으로도 라훌라는 교단의 구성원들로부터 이목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거기에 부처님교 단의 어른이신 사리불의 제자이고 출신 또한 왕족이었으므로 작은 공덕과 수행으로도 쉽 게 존경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훌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가짐을 더욱 겸손히 하고 행동 거지를 조심하여 타인의 이목을 끄는 일이 없었습니다. 해가 뜨면 드러났다 해가 지면 사 라지는 그림자처럼 늘 대중과 행동을 함께하며 한사람의 진실한 수행자로 살아가려 애쓸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보배구슬은 깊이 감출수록 어둠 속에서 그 빛을 더하듯 라훌라의 훌륭한 덕행과 학식은 결코 감춰지지 않았습니다. 흉내 내기 힘든 인욕과 지혜로 라훌라 는 교단의 많은 수행자들에게 모범이 되었고 늘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부처님 으로부터 “나의 제자 가운데 남모르게 실천하는데 있어 가장 뛰어난 이는 라훌라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나운인욕경 에 다음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어느 날 사리불을 따라 기원정사를 나서 왕사성으로 탁발을 나갔을 때 일입니다. 어느 후미진 길목에 접어들었을 때쯤 아주 고약한 성미를 가진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험상궂은 얼굴을 한 그는 조롱하는 웃음을 던지며 모래를 쥐어 사리불의 발우에 뿌렸습니 다.

그리곤 성에 차지 않았는지 뒤따르던 아난의 머리를 주먹으로 세게 내리치고 도망쳤 습니다. 사리불이 뒤돌아보니, 이를 악물고 분노를 참고 있는 라훌라의 얼굴은 이미 피투 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리불은 라훌라를 데리고 물가로 가 얼굴을 씻게 했겠습니다. 조용히 물을 떠 얼굴을 씻은 라훌라가 사리불에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이런 아픔을 겪고 보니 오래토록 괴로움을 겪는 이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이란 좋지 않은 일들이 많은 곳입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화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을 알지 못하는 저 어리석은 사람들을 어떻게 교화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저에게 대자비를 가 르치십니다. 사문은 인욕을 지키고 훌륭한 덕을 쌓습니다.

하지만 난폭한 자들은 잔인한 짓거리를 즐기며 잔악한 인간을 존경합니다. 아무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얘기해 주어도 그 들은 썩은 시체처럼 반응이 없습니다. 하늘이 달콤한 이슬을 돼지에게 주어도 돼지는 썩 은 벌레를 더 좋아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 말씀해주시는 부처님의 가르침도 돼지와 같은 저 흉악한 사람들에겐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 같습니다.” 탁발을 마친 후 사리불은 라훌라를 데리고 부처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그리고 있었던 일을 소상히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의 인욕을 칭찬하시고 이어 이렇게 말씀하셨 습니다.

“탐욕스런 자는 욕심 없는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경우를 당하더라도 우 리는 참아야 한다. 바른 까닭에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 인욕은 온갖 역경을 해쳐나갈 수 있는 커다란 배와 같고, 인욕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좋은 약초와 같다. 지금 내가 부처가 되어 모든 천신들의 존경을 받고 홀로 삼계를 거닐면서도 마음이 늘 편안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인욕의 덕이니라. 그러니 너 또한 그런 모욕을 참아내야 하느니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잡아함경 연기법경

“보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대비심을 내고 일체지심(一切智心)을 낸다.” 자재왕보살경

“보살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해주며 삼보를 끊이지 않게 하여 법당을 세우고, 중생에게 청 하지 않아도 벗이 되어 준다.” 보사경

“사무량심이란 무엇인가. 인자함[慈]과 가엽이 여김[悲] 기쁘게 함[喜]과 평등하게 여김[捨] 이다. 인자함은 성냄과 서로 엇갈리는 착한 마음을 말한다. 마치 잘 아는 벗이 잘 아는 벗을 위하여 항상 이익과 안락을 구하듯이 수행하는 이도 그러하여 온갖 중생들을 위하여 항상 안 락하기를 구한다.” 성실론 사무량장품

“밧지국 사람들이 조상을 공경하고 제사를 지낸다고 들은 적이 있느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을 것이다.” 장아함 유행경

부처님의 제자 중에 눈이 안보여서 옷을 꿰매어 입을 수가 없게 된 아누룻다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누룻다는 “자신을 위해서 누군가가 옷을 꿰매어주고 공덕을 쌓을 사람 은 없는가?” 하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와서 “아누룻다야 내가 공덕을 쌓을 수 있게 해다오.” 라고 하면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아누룻다는 깜짝 놀라 펄쩍뛰었습니다. 그 목소리 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의 스승이신 부처님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제가 지금 중얼거린 것은 세상에 있는 구도자들 중에서 공덕을 쌓아 행복 을 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바늘에 실을 꿰어 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일을 하시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입니다.” 라고 말하자 부처님께서는 “아누룻다야. 이 세상에서 행복을 찾는 것에서도 나 이상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말을 아니룻다는 이해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은 이미 미혹의 바다를 건너고 애착의 늪을 벗어났으니 다시 또 무 엇을 구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또 무슨 이유로 행복을 구하시려고 하십니까?” 왜냐하면 자신의 스승이신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시고 더 이상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의아해하고 있는 아누룻다에게 궁극의 경지에 이른 사람도 무 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갖가지 힘 가운데 행복 의 힘이 가장 뛰어나다. 천상세계에도 인간세계에도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며, 부처님의 길 역시 행복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증일아함경

“악의 열매가 맺기 전에는 악한 자도 복을 만난다. 그러나 악의 열매가 익었을 때 악한 자 는 재앙을 입는다. 선의 열매가 맺기 전에는 선한 이도 이따금 화를 만난다. 그러나 선의 열매가 익었을 때 선한 사람은 복을 누린다. 내게는 업보가 오지 않으리라고 악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한 방울 물이 고여서 항아리를 채우나니 작은 악이 쌓여서 큰 악이 된다.” 법구경

화엄경 에서 부처님은 “마음은 그림 그리는 것과 같아서 여러 가지 세상일을 그려내 나니, 온갖 정신 작용이 이를 쫓아 나는 것이라서 마음이 만들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가르치고 있지요. 이는 우주의 온갖 존재는 마음이 빚어낸 산물이므로 마음을 여의고 존 재하는 것은 없으며, 마음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체로서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음의 구조 부처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따르고 학문적으로 주장하는 논리 체계가 ‘유심론(또는 유 식학파)’입니다. 이 유심론에서 마음의 작용에 대하여 면밀한 체계를 세워 놓고 있습니 다. 유심론에서 사람의 마음을 ‘식(識)’이라 하는데 이는 분별하고 판단하는 ‘인식 작 용’을 말합니다. 이 식은 모두 여덟 가지 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혹은 불성에 해당하는 제9식 ‘아마라식’까지 합하여 아홉 가지로 보기도 한다). 전5식과 제6식, 제7식, 그리고 제8식이 그것입니다. 우선 전5식이란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제6식 이전의 인식 작용을 말합니다. 눈으로 보아서 생기는 안식, 귀로 들어서 생기는 이식, 코로 냄새 맡아서 생기는 비식, 혀로 맛보 아서 생기는 설식, 피부로 접촉하여 생기는 신식 등이 전5식입니다. 우리 몸에는 바깥의 경계를 안으로 들여오는 다섯 개의 감각 뿌리가 있지요. 이를 ‘다 섯 가지 근(根)’이라고 하는데요, 눈․귀․코․혀․피부 등이 그것입니다. 이는 각각 눈 으로는 물질을 보고, 귀로는 소리를 들으며, 코로는 냄새를 맡으며, 혀로는 맛을 느끼며, 피부로는 촉감을 느낍니다. 여기서 물질․소리․냄새․맛․촉감 등 다섯 가지 바깥 경계 를 ‘다섯 가지 경(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전5식이란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이 바깥의 다섯 가지 경계를 만나 생기는 다섯 가지 인식 작용을 말하지요. 이 5식은 동물에게나 사람에게나 공통적으로 있는 초보적인 정신 능력입니다. 다음으로 제6식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뜻으로 분별하고 판단하는 ‘의식’을 말합니 다. 이 의식은 전5식이 받아들인 것을 종합적으로 분별 판단하는 ‘정신 작용’을 말하지 요. 이 의식은 ‘뇌’를 뿌리로 하여 ‘원리나 법칙’ 등의 바깥 경계를 받아들이는 작용 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고 해 봅시다. 우선 눈으로 보고 귀로 그녀 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머리에 무스를 발랐다면 그 냄새도 맡을 수 있습니다. 입 으로 이마에 키스해 볼 수도 있고요, 손으로 만져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전5식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 친구의 성격이나 개성은 전5식의 인식으로는 알 수 없다 는 것이지요. 전5식의 기초 위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때 성격이나 개성은 파악 된다는 겁니다. 이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뇌의 정신 작용으로서 바로 제6식

입니다. 이 6식부터는 동물에게는 없고 우리 사람에게만 있는 정신 능력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이를 일러 ‘이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6식은 우리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인식 작 용입니다. 제6식은 우리 몸의 뇌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온갖 정보 를 분별하고 판단하는 역할을 하니까요. 한마디로 총체적 교통정리 기관입니다. 보았거나 들었거나 냄새 맡았거나 맛보았거나 접촉하였을 때, 그 순간마다 적절한 판단을 내린 후 각각 해당 신경을 통해 반응을 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이 번쩍 뜨이고, 추한 것을 보면 눈을 피합니다. 좋은 음악이 들리면 귀를 곧추 세우고, 굉음 소리가 나면 귀를 막습니다. 이는 모두 제6식 의 작용 때문이지요. 제6식은 바깥 대상을 받아들이면서 마음에서 좋다, 싫다, 기쁘다, 슬 프다, 두렵다 하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바로 행동을 지휘 통제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7식은 무엇일까요? 이를 유심론에서 ‘말나식(末那識)’이라고 합니다. 말 나식은 제6식 밑에 자리 잡고 있지요. 우리는 흔히 마음이라고 하면 제6식이 전부라고 생 각할 수 있는데 그 밑에 또 다른 인식 작용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제7식입니다. 이것은 밑에서 제6식을 조정하고 통제합니다. 그럼 제7식은 어떻게 하여 생길까요? 여섯 가지 인식 기관, 즉 눈․귀․코․혀․피부 등 다섯 감각 기관[전5식]과 뇌라는 정신 작용 기관[제6식]이 각기 바깥 경계를 받아들 여 무언가 반응을 합니다. 이 때 어떤 식으로 반응하느냐 하면, 당연히 바깥 경계를 자기 중심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지요. 즉, ‘이것은 나에게 좋은 거야, 저것은 나에게 이롭지 않 아, 이것은 정말 싫은 거야’ 하면서 나름대로의 자기 잣대를 형성합니다. 다시 말해, 바깥 의 객관적 대상에 대하여 주관적 의식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를 “집착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부처님이 발견한 이 마음을 ‘자아의식’이라고 하는데, 이놈은 성 질이 고약하여 자신에게 아집과 편견을 만들고 본래 청정했던 마음을 더럽힙니다. 그래서 이 제7식을 ‘염오의(染汚意)’라고 부르기도 해요. 말 그대로 ‘오염된 의식’이라는 뜻 입니다. 이 마음은 제6식보다 잘 드러나지 않고 한번 굳어지면 오래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거대한 마음의 창고 마지막으로 제8식은 무엇일까요? 유심론에서 이를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인식 작용 가운데 제일 밑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를 서양 심리학자들은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이라고 불렀습니다. 제8식은 가장 심층에 자리 잡는 의식으로 서 제7식을 조정하고 통제합니다. 마음의 근본 뿌리는 바로 이 아뢰야식입니다. 부처님은 업과 윤회를 설하면서 이 아뢰야식이 바로 윤회의 씨앗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제7식에 의해 바깥 경계를 자기중심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일단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촉감을 느끼거나 뜻으로 판단하거나 하는 모든 외적․내적인 인식 경험은 어딘가에 저장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가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 이 있어 그것을 훔치려고 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그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는 생각이 들어 그만 두었습니다. 이럴 경우 그 마음은 아주 없어져 버릴까요? 그렇지 않 다는 겁니다. 그 마음의 흔적은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저장된다는 겁니다. 이 저장되는 곳이 바로 제8식 ‘아뢰야식’입니다. 아뢰야식은 마음의 거대한 창고로 서 온갖 것들이 저장되는 곳입니다. 제6식을 통과하고, 제7식을 통과한 모든 의식 작용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8식에 그대로 침전된다는 겁니다. 평상시에는 전혀 의식 하지 못하다가 꿈속에 온갖 잔상들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제8식 작용 때문이지요. 마치 바다에 온갖 것들이 떠 내려와 떠다니다가 물고기의 먹이도 되고 부식되어 없어 지는 것 같지만, 그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 밑으로 가라앉아 큰 침전물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 침전물은 바다의 큰 에너지로 작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제8식은 마음의 큰 에너지로 작용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씨앗이 되며 현실적으로는 개개인의 성격과 적성과 능력을 만들어 버립니다.

일체유심조

부처님은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고 했습니다. 즉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 습니다. 마음이 작동하지 않으면,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한 송이 꽃이 있습 니다. 사람이 꽃이라 하고 ‘아, 참 아름답구나.’라고 인식을 할 때 꽃은 꽃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화엄경 에서 말씀하시기를 “삼계유일심 심외무별법(三界唯一心 心外無 別法)”이라 했습니다. 풀이하면 ‘우주 삼라만상이 오로지 하나의 마음뿐이니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란 뜻입니다.

신라 시대 원효 대사가 의상 스님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가던 중 비를 피해 토굴에 들어갔다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마음을 깨쳤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와 관련이 있습니 다. 밤에 해골 물임을 모르고 마실 때는 물이 그렇게 맛있었는데, 그 이튿날 일어나서 그 물이 해골에 고인 물임을 알았을 때는 구역질이 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제8식 아 뢰야식이 발동했기 때문입니다. 해골 물은 ‘더러운 물’이라는 경험적 인식이 제8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조건을 만나 바로 튀어나온 겁니다. 부처님은 이 마음을 밝힌 것입니다.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심상이 달라진 다는 것이지요. 마음이 온통 지프차에 가 있으면 제8식 아뢰야식이 제7식을 조종하고, 제 7식은 제6식을 조종하여 눈으로 지프차만 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잠시 다른 기능을 정 지시키는 거지요. 참으로 명쾌하고도 쉬운 마음에 대한 설법이 아닙니까? 부처님이 만일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여러분에게 어떻게 말할까요? “ 공부하는 것을 고민하는가. 공부도 마찬가지다. 일체유심조 정신으로 하여 보아라.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으니 ‘나는 오로지 공부하리라’하고는 공부에 집중해 보라. 친구 생각도 나지 않고 컴퓨터 생각도 나지 않고 심지어는 밥 생각도 나지 않으며 잠도 오지 않는다. 그런 경지를 맛보았는가. 이를 나는 ‘삼매’라 부른다. 더할 수 없는 정신 집중이다. 온통 제8식에는 공부라는 놈이 들어 있어 모든 식을 지배한다. 가히 ‘공부 삼매’가 되나니 무엇인들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우팔리존자는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북인도 카필라성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인도 사 회는 출신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던 엄격한 계급사회였습니다. 그 계급은 크게 브라흐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네 가지로 분류되는데 우팔리존자는 그 중 가장 낮은 계급인 수드라 출신으로 태어났습니다. 수드라 계급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비천한 일을 담당하 는 비천한 계급이었습니다. 우팔리는 뛰어난 자질과 품성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역시 자 신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자기보다 높은 계급을 위해 봉사하고 시중드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뛰어난 재주에 성실한 자세까지 겸비한 우팔리는 그 재능을 인정받아 카필라성 궁중에 서 머리를 깎는 이발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반듯하고 성실한 이발사로 궁중에서 왕족들 로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비천한 수드라일 수밖에 없는 아나율은 늘 마음 한 구석이 허전 하고 슬프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일생일대의 사건 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부처님이 카필라성을 방문하신 겁니다. 수많은 제자들에게 에워싸인 거룩하신 부처님의 모습을 뵙자 우팔리는 솟아오르는 기 쁨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신분의 높고 낮음, 재물의 많고 적음, 남녀노소에 상관 없이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대하시는 부처님을 뵙자 마치 날개라도 달고 하늘로 솟아오를 것만 같았습니다. 모든 괴로움과 번뇌가 사라진 세계를 알려주시고 그 길을 제시하는 부 처님의 법문은 온 카필라국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곧 수많은 석가족 청년들이 부처님을 따라 수행자의 길로 나섰고 그 대열엔 자신이 정 성스럽게 머리를 다듬어 주던 아난과 아나율 등 왕자님들도 끼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자 들은 부처님 전에서 머리를 깎기 위해 이발사인 우팔리도 데리고 갔습니다. 부처님 전에 서 수행자의 삶을 살 것을 맹세한 왕자들의 머리를 깎으며 우팔리는 생각했습니다. ‘아, 부럽다. 나도 왕자님들처럼 부처님을 따라 수행자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당시 부처님을 따라 출가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왕족이나 훌륭한 가문 출 신의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예나 다름없는 자신의 신분을 생각할 때 그 바람은 이 루어질 수 없는 한낮 꿈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을 따라 진정한 자유의 길로 나설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자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우팔리에게 밀려들었습니다. 맑은 물속을 들여다보듯 사람의 마음을 아는 부처님은 곧 우팔리의 마음을 알고 아나율존자에 게 말씀하셨습니다.

“우팔리야, 너도 수행자가 되고 싶으냐?” “네 부처님, 눈앞에 부귀와 영화가 펼쳐져 있는 왕자님들도 모든 것을 쓸모없는 물건 처럼 버리고 출가하는데 저야 말할 것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전 비천한 계급입니다. 제가 감히 어떻게 출가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법에는 고귀한 종족과 비천한 종족이 없느니라. 온갖 강물이 바다에 들어오면 한 맛이 되듯 나의 법에 들어온 자는 모두 평등하니라.” 부처님은 많은 석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나율존자를 시켜 우팔리의 머리를 깎여 주고 손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당시의 사회상황으로 볼 때 이는 혁명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출신이 다른 사람이 같은 자리에 나란히 앉아 음식을 먹고 생활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일을 부처님께선 당신의 교단 안에서 구현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 아가 부처님 교단만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셨습니다.

우팔리가 출가한 뒤 얼마 있지 않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이복동생인 난타가 방황 끝에 출가를 결심하고 부처님을 찾아왔습니다. 출가 한 수행자들은 계를 받은 순서에 따라 앉는 것이 부처님 교단의 법률이었습니다. 부처님 께 출가를 허락받은 난타는 앉은 순서에 따라 수행자들에게 차례차례 절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우팔리 앞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난타는 절을 하지 않고 머뭇거렸습니다. ‘우팔리는 내 머리를 깎던 노예가 아닌가? 내가 어떻게 노예에게 절을 할 수 있단 말 인가? 난타의 마음을 안 부처님은 꾸짖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법은 바다와 같아 온갖 강물을 다 받아들인다. 수많은 강물이 바다에 들어오면 한 맛이 되듯 나의 법에 들어온 자들은 평등하니라. 나의 교단에선 출가한 순서에 따라 선배와 후배를 정할 뿐 출신의 귀하고 천함을 따지지 않는다.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몸에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나와 너를 가르고 귀하고 천함을 따지겠느냐? 난타야 거룩한 진리를 생각해야지 교만한 마음을 내서는 안 되느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난타는 곧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우팔리에게 공손히 절을 올 렸습니다. 태어난 집안의 내력이나 배경 등에 상관하지 않고 그의 행동과 능력에 따라 사람을 대 하는 부처님에게 큰 감명을 받은 우팔리는 평생 부처님이 정한 계율을 목숨처럼 지키며 살았습니다. 또한 왜곡된 사회의 제도와 편견에 구애되지 않고 진리에 입각해 모든 이들 을 공평하게 대하는 부처님의 사상을 널리 전하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런 우팔리의 모습을 지켜본 부처님은 “나의 제자 중 계율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지키는 이는 바로 우팔리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모든 수행자들부터 도 승단의 규율을 가장 잘 아는 분으로 존경받았습니다. 우팔리존자는 부처님의 평등사상 을 구현하는 교단의 법집행관으로서 갖가지 분규와 마찰을 공정히 처리하였고,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부처님의 계율을 후대에 전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내가 옛날 큰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았을 때는 여러 두려움이 있었다. 소위 생활할 수 없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명예가 손상될까 하는 두려움, 악도에 떨어질까 하는 두려움, 또는 대중의 위세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발심한 뒤로는 그것들이 다 멀리 떨어져나갔다. 그리하여 이제는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겁먹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으며, 온갖 마귀의 무리와 외도들이 깨뜨릴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화엄경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여래의 구족한 지혜가 그대들 몸속에 있건만, 어찌하여 보지 못하 는가. 내 마땅히 저들 중생을 가르쳐 성스러운 길을 깨달아서, 그들로 하여금 뒤바뀐 망상과 속박을 길이 여의게 하고, 여래의 지혜가 그 몸속에 있어서 부처와 더불어 다름이 없는 것을 두루 보게 하리라.” 화엄경 보왕여래성기품

“그대의 집에 숨은 보배가 있거늘 어찌하여 이렇게 빈궁하고, 곤고하며, 무상하고, 괴롭고, 당당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한가?” 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어느 날 해질녘이었습니다. 경허 스님이 제자인 만공 스님과 함께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죠. 그 날 도 탁발 성적이 매우 좋아서 스님들의 쌀자루에는 쌀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흐뭇한 마음과는 달리 짐은 몹시 무거웠고, 갈 길은 아직도 까마득했습니다. 바랑 끈은 어깨를 짓눌러 왔고, 게다가 절로 돌아가려면 가파른 고개마저 넘어야 했습니다. 만공 스님이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걷는 경허 스님께,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 되냐고, 좀 쉬었다 가면 안 되냐고 볼멘소리로 투정을 하자 경허스님이 한 마디 합니 다. “내가 빨리 가는 방법을 써 볼 테니, 자네 빨리 와보게나.” 마침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한 모퉁이를 돌아설 때 스무 살을 갓 넘겼을까 말 까 한 아주 예쁜 새댁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집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앞서 가던 경허 스님이 그 여인과 엇갈려 지난다고 생각되는 순간 경허 스님이 느 닷없이 달려들어 여인의 양 귀를 잡고 입술에 번개같이 키스를 해버렸습니다. “에구머니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물동이를 떨어뜨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도로 집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습니다. 집안에서 소동이 일어났고, 소동은 곧 이웃에 퍼지고, 급기야 동네 사람들은 낫이 며 작대기, 몽둥이를 닥치는 대로 짚어들고 뛰어 나왔다. “저 놈 잡아라!” “아니, 어디서 요망한 중놈이 나타나 가지고 아낙네를 겁탈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면서 쫓아오자 스님은 두 말할 것 없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쌀 을 지고 뒤따라가던 만공 스님 또한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함께 뛰지 않을 수 없었 죠. 만공 스님은 온 힘을 다하여 필사적으로 앞서 뛰어 가는 경허 스님을 따라 젖 먹 은 힘을 다해 달아났습니다. 뒤쫓던 사람들의 추격은 무서운 속력을 내어 달아나는 두 스님을 끝까지 쫓지는 못 했어요. 마을을 벗어나 절이 보이는 산길에 접어 든 후에야 경허 스님은 마침내 만공 스님 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어떻더냐? 고개를 넘는 것이 힘이 들든? 쌀자루가 무겁더냐?” “아이고 스님, 무거운지 어떤지, 그 먼 길을 어떻게 달려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네란자라 강 기슭에서 평안을 얻기 위해 힘써 닦고 명상하는 나에게, 악마 나무치는 위로 의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당신은 야위었고 안색이 나쁩니다. 당신은 죽음에 임박해 있습니다. 당신이 죽지 않고 살 가망은 천에 하나입니다.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생명이 있어야 모든 착한 일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애써 정진하는 길은 가기 힘들고 행하기 힘들며 도달하기도 어렵습니다.” 악마가 이렇게 말하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게으름뱅이의 친척이여, 악한자여, 그대는 세속의 선업을 구해서 여기에 왔지만, 내게는 세속의 선업을 찾아야 할 필요는 털끝만큼도 없다. 나에게는 믿음이 있고 노력이 있고 지혜가 있다. 이처럼 전념하는 나에게 너는 어찌하여 생명의 보전을 묻는가. 힘써 정진하는 데서 일 어나는 이 바람은 강물도 마르게 할 것이다. 오로지 수도에만 정진하는 내 몸의 피가 어찌 마 르지 않겠는가. 너의 첫째 군대는 욕망이고, 둘째 군대는 혐오이며, 셋째 군대는 기갈, 넷째 군대는 애착이 다.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겉치레 와 고집이다.

숫타니파타

“몸은 빈 병처럼 보고 마음은 성처럼 든든히 있게 하라. 지혜로써 악마와 싸워 승리를 지 키고 다시 잃는 일이 없게 하라.” 법구경

“너희들은 마땅히 생각을 거두어 집중하여야 한다. 만약 생사의 집중을 잃으면 온갖 공덕 을 잃으려니와, 만약 집중의 힘이 강하면 오욕의 도둑 가운데에 들어간대도 해를 입지 않으리 니, 갑옷을 입고 싸움터에 나가면 두려움이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을 생각의 집중을 잊지 않는 일이라 한다.” 유교경

“내가 열반한 뒤에는 마땅히 바라제목차를 존중하라. 이 바라제목차를 가지는 자는 어두운 곳에 등불과 같고 빈곤한 이가 보배를 얻는 것 같고 객지에 방황하는 사람이 고향에 돌아온 것 같나니 마땅히 알라. 계율은 곧 너희의 스승이니라, 만일 내가 이 세상에 더 오래 산다하 더라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법망경 보살계

“계는 후회될 일이 없는 여러 가지 공덕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좋은 계는 후회 없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후회 없는 공적으로 한다.” 청정도론

지혜로운 자는 대장장이가 은(銀)으로부터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처럼 하나 씩 하나 씩 점 차로 자기의 부정(不淨)을 제거해 나갑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의 악행은 쇠에서 생긴 녹이 쇠를 먹어들어 가듯이 자신을 지옥으로 데려갑니다. 법구경

마음은 모든 것을 만들고 다스린다. 나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끌고 가는 마소 뒤에 짐수레처럼 괴로움이 따르리라 그 마음 뒤에. 마음은 모든 것을 만들고 다스린다.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형체에 따르는 그림자처럼 즐거움이 따르리라 그 마음 뒤에. 법구경

“어떤 사람이 게으른데다가 걸핏하면 살생을 하고 남의 것을 제 것으로 만들며, 오입질을 하고 거짓말을 하며 요사스런 소견을 가지는 등, 온갖 나쁜 업을 지으면서 살았다. 그가 죽을 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죽은 후에는 천상에 태어나지이다’하고 축원한다고 해서 그가 과연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없다. 비유를 들자면, 연못 속에 무거운 돌을 던져두 고, ‘돌아 떠올라라, 돌아 떠올라라’하고 축원을 한다고 해서 그 무거운 돌이 떠오를 수 있겠는 가. 나쁜 업을 지은 그는 근 갚음으로 저절로 밑으로 내려가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중아함경 「가미니경」

불교의 비유 경전이라 할 백유경 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미련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어리석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가 다른 부잣집에 가서 3층 누각을 보았다. 높고 넓으며 웅장하고 화려하며 시원하고 밝 았다. 그는 무척 부러워하며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 재물은 저 사람보다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까지 이런 누각을 짓지 않았던가.’ 그리고는 곧 목수를 불러 물어 보았다. “저 집처럼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내가 지은 집입니다.” 목수는 대답하였다. “지금 나를 위해 저런 누각을 지어라.” 목수는 곧 땅을 고르고 벽돌을 쌓아 누각을 지었다. 그는 벽돌을 쌓아 집 짓는 것을 보고 의혹이 생겨 목수에게 물었다. “어떤 집을 지으려는가.” “3층집을 지으려 합니다.” 목수는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말하였다. “나는 아래 두 층은 가지고 싶지 않다. 먼저 제일 위층을 지어라.” 목수는 대답하였다. “아래층을 짓지 않고 어떻게 둘째 층을 지을 수 있으며, 둘째 층을 짓지 않고 어떻 게 셋째 층을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고집스럽게 대꾸하였다. “지금 내게는 아래 두 층은 필요 없다. 맨 위층을 먼저 지어라.” 그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비웃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맨 아래층을 짓지 않고 위층을 짓겠는가.”

백유경 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 머리에 털이 없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다른 사람이 배[梨]를 가지고 와서 그의 머리를 때렸다. 두세 번을 치니 상처가 났다. 그런데도 그는 가만히 참으면서 피할 줄을 몰랐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 말하였다. “왜 피하지 않고 가만히 맞기만 하여 머리를 상하게 하는가.” 그는 대답하였다. “저 사람은 힘을 믿어 교만하고 어리석어 지혜가 없다. 그는 내 머리에 털이 없는 것을 보 고 돌이라 생각하여, 배를 가지고 내 머리를 때려 상처를 낸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어리석은데 왜 그를 어리석다고 하느냐. 네가 어리석지 않다면 왜 남에게 얻어맞으 며 또 머리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왜 피할 줄 모르는가.” 백유경

“듣는 것만으로는 진리를 알 수 없다. 이것이 구도의 진실한 모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보기 만 하고 먹지 않아 굶어 죽는 사람이 있듯이, 듣기만 하고 실천이 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그와 같다. 백가지 약을 잘 알고 있는 의사도 병에 걸려 낫지 못하듯이 듣기만 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다. 가나한 사람이 밤낮으로 남의 돈을 세어도 자기는 반 푼도 차지할 수 없듯이 듣기만 하 는 사람들도 그와 같다. 장님이 그림을 그려 남들에게는 보일지라도 자기 자신은 볼 수 없듯 이 듣기만 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다.” 화엄경 보살난명품

“과거를 따르지 말라. 미래를 바라지 말라. 한번 지나가 버린 것은 이미 버려진 것. 그리 고 미래는 아직 도달되지 않았다. 당면한 일들을 자신의 처지에서 잘 살피어 흔들림 없이 바 르게 판단한 사람은 그 경지를 더욱 넓히라. 다만 오늘 해야 할 일에 부지런히 힘쓰라.” 중부경전

“숲 속에서 묶여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를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 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보통 사람들은 누구나 감각의 대상이 되는 것을 좋아하고, 이야기하고, 애착하고 있습니 다. 그들이 그런 흐름에 떠밀려감으로써, 생․노사․근심․슬픔․고통․번민으로부터 벗어 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감각의 대상을 기뻐하거나 슬퍼하면서 얽매이지 않습니다.” 밀린다팡하

“탐욕을 여의는 것을 마음의 해탈[心解脫]이라고 한다. 무명을 여의는 것을 지혜의 해탈[慧解脫]이라고 한다. 만약 탐욕을 초월하여 마음의 해탈을 스스로 체득하고 증 명하며 무명을 초월한 지혜의 해탈을 체득하면 바로 이름하여 애욕의 묶임과 번뇌의 매듭을 끊은 것이라고 하나니 마침내 고통의 끝을 볼 것이다.” 잡아함경

“이것이 집착이구나. 이곳에는 즐거움도 상쾌한 맛도 적고 괴로움뿐이다. 이것은 고기를 낚는 낙이구나.’ 이와 같이 깨닫고 현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눈을 아래로 두고 두리번거리거나 헤매지 말고 모든 감관을 억제하여 마음을 지키라. 번뇌 에 휩쓸리지 말고 번뇌의 불에 타지도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 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 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전등록 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스님이 석두 선사에게 찾아가 “어떻게 하면 해탈할 수 있습니까”하고 여쭈었 습니다. 그러자 선사가 대답하기를 “누가 너를 묶어 놓았느냐?”라고 했다고 합니다.

“오로지 입을 지켜라. 무서운 불기같이 입에서 나온 말이 내 몸을 태우고 만다. 일체 중생 의 불행은 그 입에서 생기나니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몸을 찌르는 칼이다.” 법구경

“추한 말을 멀리 여의라. 추한 말은 자기도 해롭고 남에게도 해를 입히므로 피차가 다 해로운 것이다. 그러나 착한 말을 닦아 익히면,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로워서 피차 가 다 이로운 것이다.” 무량수경

“어리석은 이들의 사랑 장난은 흙덩이를 서로 던지는 아이들 같다.” 굴하경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음은 욕심을 인연하고 욕심으로부터 생기며 욕심으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중아함 석문경

“남의 자식 된 사람은, 마땅히 다섯 가지 일을 가지고 부모를 존경하여 모셔야 한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의식을 받드는 데 있어서 부족이 없음이다. 둘째는 모든 하는 일을 먼저 부모에게 고함이다. 셋째는 부모의 하는 일에 공손히 따라 거스르지 않음이다. 넷째는 부모의 바른 생활 방법을 감히 어기지 않음이다. 다섯째는 부모가 하는 바른 행위를 끊지 않 음이다.” 장아함경

“늘 부모를 존중하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이렇게 해서 쉬는 일이 없거라.” 화엄경

“무릇 사람이 천지의 귀신을 섬긴다 해도 그 부모에 효도함만 못하다. 부모야말로 최고의 신이기 때문이다.” 사십이장경

“만약 부모를 해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무량아승기겁에 걸쳐 재앙을 받아야 한다.” 열반경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셨다. “불효자는 죽고 나서 아비지옥에 떨어진다.” 부모은중경

“밧지국 사람들이 조상을 공경하고 제사를 지낸다고 들은 적이 있느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을 것이다.” 장아함 유행경

아난다는 부처님 살아생전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장례를 어떻게 모셔야 할지를 물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여래의 장례를 걱정하지 말아라. 여래의 장례는 신도들이 알아서 치러 줄 것이다.” 열반경

부처님께서는 장래에 사람들이 포악해져 부모가 길러 준 은혜에 보답하지 않고 불효할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스스로 정반왕의 관을 메고 화장터로 가셨다. 그리고 가장 좋은 전단향의 나무를 모아 화장을 하고, 유골을 모아 황금함에 담아 탑묘에 안치 하셨다. 불설정반왕 열반경

『삼국유사』에 나오는 차례의 유래도 불교와 연이 닿아 있습니다.

신라 경덕왕 때 충담 스님이 매년 설과 한가위 때 경주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에게 차를 끓여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대는 누구인가?” “충담(忠談)이옵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삼화령(三花嶺)에서 오는 길입니다.” “무엇하고 오시었소?” “저는 매년 3월 삼짇날과 9월 중양절이면 차를 달여서 삼화령의 미륵세존(彌勒世尊) 님께 드립니다. 오늘도 차를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나에게도 한 잔 주겠소?” “물론이지요.” 스님이 차를 달여 왕께 드렸는데 맛이 신묘하고 그릇 속에 향기가 그윽하였다고 합니다. “내 듣건대 스님이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노래가 뜻이 깊다는데, 나에게도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살 노래를 지어줄 수 없겠소." 스님은 그 자리에서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바쳤습니다. “임금은 아버지이고 신하는 사랑을 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할지면 백성은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는 물생(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 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면 나라 안의 유지됨을 알리라.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 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라.” 그런데 여러 자료에서 충담스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는 있지만 모두들 ‘다도(茶道)’ 또 는 재주 예자를 써서 ‘다예(茶藝)의 효시’라고만 했지, 예도 예자를 쓴 ‘차례[茶禮]’에 주 목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 차와 향을 올리고 절하는 것을 예불(禮佛)이라 하는 것처럼 충담스님의 그것도 차례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충담스님이 중요하 고 좋은 날 부처님께 차를 올리고 나서 다른 일을 했듯이, 모든 후손들이 모여서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나서 다른 일을 하는 아주 중요한 행사가 차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발전하던 차례가 고려 말기 제사 때 차올리는 행사가 너무 번거롭고 사치스러 워지는 등 폐해가 커졌다고 합니다. 결국 조선 개국 후 정도전이 금지령을 내리게 되면서 차를 올리는 풍속은 민간에서 사라지고 차례라고 부르던 습속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아나율존자는 카필라성 출신으로 부처님의 숙부이신 곡반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부처님과는 사촌형제가 되는 분이십니다. 그 이름 아나율은 ‘욕심이 없는 이’ ‘좋은 마음씨를 가진 이’란 뜻입니다. 아나율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제자들을 데리고 카필라성을 방문하셨을 때, 난다 아 난다 제바달다 등 여러 석가족 왕자들과 함께 부처님을 따라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습니 다. 그러나 천성이 부드럽고 느긋하기만 했던 아나율은 매사에 다부진 마음을 먹지 않았 습니다. 그 느긋함은 출가한 후에도 이어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에 열성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귀 기울이는 가운데 설법을 하고 계셨습니다. 아나율 역시 그 틈에서 법문을 듣고 있었습니 다. 점심공양을 마친 오후의 나른함에 게으른 마음까지 더한 아나율은 법문을 듣다가 그 만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 모습을 발견한 부처님께서는 곧 하던 법문을 멈추셨습니다. 갑자기 끊어진 부처님의 음성과 심상치 않은 주위의 분위기를 느낀 아나율은 번뜩 잠 이 깼습니다. 그윽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부처님의 얼굴과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 어 찌할 바를 모르는 아나율에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받들어야 편히 잠들 수 있나니 그럴 때라야 그 마음에 어지러움 없다. 저 성현께서 말씀하신 법 지혜로운 이들이 즐기는 것이다. 마치 저 깊고 깊은 연못이 맑고 깨끗해 티끌 하나 없듯 그와 같이 법을 듣는 사람 청정한 마음으로 즐거이 받아들인다.

마치 저 크고 반듯한 돌이 바람에 조금도 움직이지 않듯 그와 같이 칭찬이나 비방을 듣더라도 그 마음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아나율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나라의 법이나 도적이 두려워서 도를 배우는 것이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너는 왜 출가하여 도를 배우느냐?” “이 늙음 · 병듦 · 죽음과 근심 · 걱정 · 괴로움 · 번민이 싫고, 갖가지 고통에서 벗어나 려고 출가해 도들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아나율아, 너는 도를 배우면 그런 갖가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는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출가를 했다. 그런데 지금의 너는 어떠냐? 세존이 직접 설법하 는 이런 자리에서 어떻게 잠이 들 수 있느냐?”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친족들의 눈물을 뿌리치고 부처님을 따라 수행자의 길 로 들어섰을 때, 아나율은 반드시 깨달음을 이루어 은혜에 보답하리라는 다짐을 했었습니 다. 그런데 그런 다짐이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가장 현명하고 존귀하신 부처님께서 설법 하시는데도 자신은 졸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자신의 게으름을 크게 뉘우친 아나율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전에 합장하고 맹세했습니다. “지금부터는 몸이 문드러지더라도 결코 여래 앞에서 졸지 않겠습니다.” 그날 이후 아나율존자는 부지런히 정진했습니다. 깊은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도록 잠을 자지 않고 수행했습니다. 아니, 부처님과 자신에게 한 맹세가 생각나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아나율이 잠도 자지 않고 밤낮으로 수행한다는 것을 아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게으르면 결코 번뇌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아나율아, 그렇다고 너무 열심 히 정진하면 조바심에 휩싸여 또한 번뇌를 벗어날 수 없느니라. 거문고 줄은 알맞게 조여 야 소리가 아름답듯, 너의 행동도 너의 능력에 맞춰 적절히 조절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게으른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깊이 뉘우친 아나율은 물러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여래 앞에 맹세하였습니다. 이제 와서 그 약속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밤낮으로 자지 않은 아나율은 결국 눈에 이상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부처님께선 재가제자인 의사 지바카에게 아나율의 눈을 치료해 달라고 부탁 하셨습니다. 아나율의 눈을 살핀 지바카가 부처님께 말했습니다. “아나율의 병은 잠의 부족에서 온 것입니다. 잠시라도 눈을 붙인다면 치료할 수 있지 만 잠을 자지 않는다면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게으름을 떨치기 위해 애쓰는 제자가 너무도 안쓰러웠던 부처님은 아나율을 달 래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나율아 잠을 자거라. 무엇이든 먹어야 유지될 수 있지 먹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없 다. 눈은 잠으로 음식을 삼고, 귀는 소리로 음식을 삼으며, 코는 냄새로 음식을 삼고, 혀 는 맛으로 음식을 삼으며, 몸은 감촉으로 음식을 삼고, 뜻은 법으로 음식을 삼는다.” 부처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아나율은 자신의 맹세에서 한걸음도 물러설 마음이 없었 습니다. 아나율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 그럼 열반에도 음식이 있습니까?” “있다” “열반은 무엇으로 음식을 삼습니까?” “열반은 부지런함으로 음식을 삼는다. 부지런해야 모든 번뇌를 극복한 평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느니라.” “부처님, 제가 눈물로 부여잡는 부모와 친지를 저버리고 부처님을 따라 수행자의 길 로 들어선 것은 오직 평안의 세계를 밟기 위해서입니다. 눈은 잠으로 음식을 삼는다고 말 씀하셨지만 저에게는 평안의 세계가 더욱 소중합니다. 제 자신과 부처님께 한 맹세를 차 마 저버릴 수 없습니다.” 결국 아나율은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부지런히 수행한 공덕으로 세상 사람들 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천안(天眼)을 얻었습니다. 아나율은 아무리 먼 곳에서 일 어나는 일도 손바닥을 살피듯 볼 수 있고, 보통사람은 보지 못하는 신들의 세계도 볼 수 있으며,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일을 미리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육 신의 눈은 멀었지만 부지런한 수행으로 천안을 얻은 아나율을 부처님께서는 항상 칭찬하 고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아나율이 낡은 옷을 깁고 있을 때였다. 이 때 육안은 허물어지고 티 없이 맑은 천안을 얻었다. 그 때 아나율은 보통의 방식대로 옷을 기우려 하였으나 실을 바늘구멍에 꿸 수가 없었다. 이 때 아나율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 세상에서 도를 얻은 나한은 나를 위해 바늘을 꿰어다오'. 세존께서는 깨끗한 천이 (天耳)로 '이 세상에서 도를 얻은 아라한은 나를 위해 바늘을 꿰어다오'라고 하는 이 소리 를 들으셨다. 세존께서는 아나율이 있는 곳으로 가 말씀하셨다. “너는 그 바늘을 가져 오라, 내가 꿰어 주리라.” 아나율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까 제가 말한 것은 세상에서 복을 구하려는 사람은 저를 위해 바늘을 꿰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복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다. 여래는 여섯 가지 법에 있 어서 만족할 줄을 모른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보시요, 둘째는 교훈이며, 셋째 는 인욕이요, 넷째는 법다운 설명과 이치에 맞는 설명이며, 다섯째는 중생을 보호하는 것 이요, 여섯째는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하는 것이다. 아나율아, 이것이 이른바 ‘여래는 이 여섯 가지 법에 있어서 만족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니라.” 아나율은 아뢰었다. “여래의 몸은 진실한 법의 몸이신데 다시 무슨 법을 구하려 하십니까? 여래께서는 이 미 생사의 바다를 건너고 또 애착을 벗어나셨는데, 지금 또 애써 복의 도를 구하시는군 요.”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렇다. 아나율아, 네 말과 같다. 여래도 이 여섯 가지 법에 있어서 만족할 줄 모른다 는 것을 안다. 만일 중생들이 죄악의 근본인 몸·입·뜻의 행을 안다면 끝내 세 갈래 나 쁜 곳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저 중생들은 죄악의 근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 갈래 나쁜 곳에 떨어지는 것이니라.” 그 때 세존께서는 곧 이런 게송을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힘 중에 천상과 인간에서 노닐게 하는 것 복의 힘이 가장 훌륭하나니 그 복으로 불도도 성취하네. “그러므로 아나율아, 방편을 구해 이 여섯 가지 법을 얻도록 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그 때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삶에서 절정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귀중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하루를 이 삶의 전부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 벽암록

지나간 일에 대해 근심하지 말고 미래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 현재에 얻어야 할 것만을 따라 바른 지혜로 최선을 다할 뿐 딴 생각하지 말라. 미래를 향해 마음을 치달리게 하고 과거를 돌아보아 근심 걱정하는 것은 마치 우박이 초목을 때리는 듯 어리석음의 불로 스스로를 태우는 것과 같다. 잡아함경

중생의 모습이 곧 부처의 모습이고, 중생의 말이 곧 부처의 말이고,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 의 마음이고, 나아가 생활하고 산업하며, 공작하고 기술 익히며 예술 하는 이 모든 것이 부처 의 넓은 광명의 지혜를 활용하는 모습일 뿐,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다.

진심직설

하루하루가 흘러 한 달이 되고 한 달 두 달이 흘러 일 년이 되고 한 해 두 해가 흘러 어느덧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 망가진 수레는 갈 수가 없고 늙어버리면 공부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누워서 갖가지 잡념과 게으름을 피운다. 쌓은 공덕이 얼마나 있길래 이토록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가? 이 몸은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다음 생은 어찌할 것인가. 서두를 지어다. 그대!

발심수행장

잡아함경 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소오나’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출가하여 공부한지 무수한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 도를 깨 치지 못하자 그는 부처님께 나아가 아뢰었다. “부처님, 저는 아무리 공부를 해도 도를 아직 알지 못하니 다시 환속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보통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할까 봅니다.” 이 말을 듣고 부처님이 말했다. “소오나, 자네는 출가하기 전에 거문고를 잘 탔다지? 그래, 거문고는 어떻게 해야 소리가 잘 나느냐?” 그러자 소오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거문고를 잘 타기 위해서는 줄을 잘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 오냐.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보자. 거문고 줄을 너무 팽팽히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줄이 끊어집니다.” “그러면, 너무 느슨하게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러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소리가 가장 잘 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줄을 알맞게 조율해야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사랑스런 나의 제자야, 바로 그것이다. 공부도 그렇게 해야 된다. 너무 서두르면 마음이 조급해져서 공부가 되지 않는 법이다. 그렇다고 너무 느슨하면 게을러져서 또한 공부가 되지 않는 법이다. 마치 거문고 줄을 다루듯이 그렇게 공부하여라. 이것이 내가 깨달은 법이이다.”

부처님은 잡보장경 에서 중도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 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삶이니라.” 잡보장경

중국 선종의 대표적인 저서인 벽암록 제16칙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수행자가 경청 화상[스승]에게 물었다. “저는 달걀의 껍데기를 깨고 세상에 나오려는 병아리와 같으니 부디 화상께서는 밖에서 껍 질을 깨뜨려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잘 나올 수 있겠느냐?” “제가 만약 밖으로 잘 나오지 못하면 스님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그러자 화상이 그를 질책했다. “에끼, 이 멍청한 놈이로구나.” 이 이야기는 선사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줄탁동시( 啄同時)’라는 화두입니다.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 비유로써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한 경전으로 백유경 이 있습 니다. 백유경 가운데 오직 좋은 결과만을 바라며 어리석은 행동을 한 다음과 같은 내용 의 우화가 있습니다. 옛날 두 사람이 사탕수수를 심으면서 서로 맹세하였다. “좋은 종자를 심어 많은 수확을 거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좋지 못한 종자를 심어 수확이 적은 사람에게는 무거운 벌을 주자.” 그 때 그 중 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아주 달다. 만일 즙을 짜서 그 나무에 다시 주면 그 맛도 뛰어나고 더욱 잘 자라 다 른 것보다 뛰어날 것이다.’ 그리하여 곧 사탕수수를 눌러 그 즙을 짜서 나무에 쏟고는 잘 자라고 맛이 좋아지 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그 종자만 못 쓰게 되고 많은 사탕수수를 잃어버리 고 말았다. 백유경

“사람의 행위는 좋은 땅에 잘 뿌린 종자와 같은 것이다. 비가 내려 날 때가 되면 성장하여 과실을 맺는다. 이와 똑같이 사람들이 탐욕과 악과 또는 이익으로 하는 행위도 반드시 성숙하 여 현세나 내세에서 그 과실을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증일아함경

근본설일체유부 비나야잡사경 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업을 피할 만한 곳은 산도 아니요, 바닷 속도 아니며, 땅에도 없고 하늘에도 있지 않다. 그림자가 사람을 따라가듯이, 선악의 업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근본설일체유부 비나야잡사

모든 선악의 주인은 마음이다. 선한 마음으로 한 행위에는 좋은 결과가 따르고, 악 한 마음으로 한 행위에는 나쁜 결과가 따르리라. 마치 수레바퀴가 말발굽을 따르고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이. 법구경

삼종외도설과 그 비판

옛 부터 사람들은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포함한 세상을 움직이는 근원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삼종외도설(三種外道說)이라는 것입니다. 첫 째는 존우화작인론(尊佑化作因論)으로 모든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고 관리하는 절대적인 존재인 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숙작인론(宿作因論)으로 전생에 지은 업이나 운명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무인무연론(無因無緣 論)으로 특별한 원인이 없이 물질적인 요소들의 우발적인 결합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입 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좋지 않은 상황이 자신에게 펼쳐졌을 때,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이런 시련을 나에게 주시나’, ‘어찌된 게 내 팔자는 이리도 뒤웅박 팔자냐?’라든가, ‘도대 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지?’ 라는 말을 하는 것이 그것입니 다. 과연 우리들 삶의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이 이와 같은 신의 뜻이나, 운명이나 우연일 까요? 우리가 아무 비판 없이 쓰고 있는 이와 같은 말들은 과연 진리로써 타당한 말들일 까요?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만일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 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해야 한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의욕도 일 어나지 않을 것이며, 또 노력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과거에 지은 바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노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아무런 원인 없이 일어난다 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렇게 일어난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노력도 일 어나지 않을 것이다.”

중아함경

부처님께서는 만일 모든 것이 신의 뜻이나 전생에 지은 업이나 아무런 원인 없이 일어 난다면 선이나 악에 대한 책임소재를 인간에게 물을 수 없다는 점과 인간의 의지와 노력 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비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만약 무단으로 학교에 지각이나 결석을 한다면 우리는 다음날 선생님으로부터 질책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절대자가 시켜서 혹은 운명적으로 그랬다면 어떨까요? 선생님이 우리에게 꾸중하는 것이 타당하고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가 하 는 행동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어떤 원리나 힘이 있다면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 원리나 힘에 있지 우리들에게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다면 우리가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다 해도,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그에 대한 책임이나 보상은 지금의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전세의 지은 바, 신의 뜻, 또는 우연으로 돌려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게 되 고, 결국은 무법천지가 되고 맙니다. 또한 우리에게 존재하는 의지라는 것도 굳이 있을 필요도 없고, 착하게 살고 열심히 노력해 봐야 모두 쓸 데 없는 짓이 되지 않을 수 없습 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죄악과 그 책임의 문제, 그리고 인간의 자유 의지의 존재성과 관련하 여 이러한 견해는 심각한 문제성을 안고 있고 피할 수 없는 자기모순을 노출시키고 있습 니다.

업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무엇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근원이라고 하셨을까요? 부처님께서 는 스스로 업론자(業論者)요, 행위론자(行爲論者)요, 정진론자(精進論者) 라고 하시며, 그 근원을 업으로 보셨습니다. 업이란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karma)라고 하는데 ‘행동’이나 ‘작용’이라는 뜻입 니다. 그렇다고 모든 행동이나 작용이 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의도에 따른 행 동이나 작용을 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려는 의지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 행동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즉 인간의 의지적 행동이 원인이 되어 대상의 필연적 반응으 로서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업인과보(業因果報)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줄여 서 업보라고도 부르죠. 업보는 ‘뿌린대로 거둔다’는 법칙입니다. 즉,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를 받고, 악 한 일을 하면 나쁜 결과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모두 스스로의 마음과 행동과 말로 지은 업으로 인해 돌아온 결과라는 것이죠.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 된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마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법구경

설사 저 허공을 땅으로 만들고 땅을 허공으로 만들 수 있다 해도 이미 뿌려놓은 인연의 씨앗은 썩어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나니 인연이 무르익는 날에는 그 결과를 반드시 받아야 하리.

증일아함경

“그 악이 익지 않을 때까지는 요사스런 사람도 복을 만난다. 그러나 그 악이 익음에 미쳐 서는 스스로 죄를 받아야 한다. 선행을 하는 사람도 그 선행이 익을 때까지는 재앙을 만난다. 그러나 그 선행이 익음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복을 받게 된다.”

법구경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에 의해 상인이 되고, 또한 행 위에 의해 고용인이 된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에 의해 제관이 되고, 행위에 의해 왕이 된다. 현자는 이와 같이 행위를 사실 그대로 본다. 그들은 ‘연 기(緣起)’를 보는 자이며, 행위와 그 과보를 잘 알고 있다.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존재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행위에 매어 있다. 마치 달리는 수레 가 쐐기에 의해 매어 있듯이.”

숫타니파타

비화경 에 보면 “삭발하는 것만으로 출가라 하지 않는다. 대정진을 일으켜 중생의 일체 번뇌를 제거하려 할 때 이를 출가라 한다.”고 했습니다. 외적인 변화만 일으킨 것 은 가출일 뿐입니다. 출가는 집을 뛰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롯한 모든 중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잘못된 것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바른 것으로 완전히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싫어서, 산이 좋아서 떠나는 것이 아닌, 세상과 중생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들의 괴로움과 부자유를 없애기 위해서 전력투구하려는 것이 출가입니다. 열반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반은 이 세상을 마치고 피안에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열 반은 종말이 아닙니다. 열반은 죽음이 아닙니다. 만약 죽음을 열반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설(魔說, 악마의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악마는, 중생을 교화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것을 열반이라 생각한다. 그 는 말하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고, 죽은 모양이 되는 것을 열반이라고 보아, 여래가 열반에 드 셨다는 것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의 차별상을 버리고, 침묵한 채 말하지 않는 것이 열반이 될 리 없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반경 고귀덕왕 보살품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재위 1206~1227)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 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었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 구도 없고 병사로는 10만, 백성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 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 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 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자.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지나간 일에 대해 근심하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대해 반겨 집착하지 말라. 현재에 얻어야 할 것만을 따라 바른 지혜로 최선을 다할 뿐 딴 생각하지 말라. 미래를 향해 생각을 치달리게 하고 과거를 돌아보아 근심 걱정하는 것은 마치 우박이 초목을 때리는 듯 어리석음의 불로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잡아함경

“백수의 왕인 사자는 때가 되면 그의 굴에서 나온다. 그는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 사방을 샅샅이 둘러본다. 그런 다음 세 번 포효를 하고 나서 먹이를 찾아 당당하게 출발한다.” 증지부

숲 속에 뱀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머리가 앞서고 꼬리가 뒤따르는 것이 불만 이었던 꼬리가 머리에게 말했습니다. “머리야, 오늘은 내가 앞서 갈 테니 선두를 양보할 수 없겠니?” 뱀의 머리가 말했습니다. “내가 언제나 앞서 갔는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는 늘 하던 대로 머리가 앞서서 갔습니다. 그러나 꼬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칭칭 감고는 가지 못하게 하 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머리가 꼬리에게 양보하였습니다. 꼬리는 칭칭 감았던 것을 풀고 앞 서 갔습니다. 그러나 꼬리에게는 눈이 없어서 뱀은 불구덩이에 떨어져 타죽고 말았습니다. 백유경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 에서 “사람들 중에는 마음에 더러움이 적은 자도 있거니와, 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도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 아닌가.”라 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을 가엾이 여기고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과 안 락을 위해 진리를 설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마음 을 내어 지금까지 쌓은 모든 선근 공덕을 중생들과 위없는 깨달음에 회향해야 합니다.

나는 모든 중생의 집이 되리라. 그들의 고뇌를 없애 주기 위해서 나는 모든 중생의 수호신이 되리라. 그들의 번뇌를 끊어 해탈케 하기 위해서 나는 모든 중생의 귀의처가 되리라. 그들이 공포를 벗어날 수 있도록 나는 모든 중생의 안락처가 되리라. 그들이 구경(究竟)의 편안한 곳을 얻을 수 있도록 나는 모든 중생의 광명이 되리라. 그들이 지혜의 빛을 얻어 무명(無明)의 어둠을 없앨 수 있도록 나는 모든 중생의 길잡이가 되리라. 그들에게 걸림 없는 큰 지혜를 주기 위해서

화엄경

“제자들이여, 나의 법을 이어 받아라. 내 재물을 이어받지 말아라. 나는 그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느니라. 나의 제자들은 법의 상속자가 되고 재물의 상속자가 되지 않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만일 그대들이 나의 재물의 상속자가 되고 법의 상속자가 되지 못한다면 그대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며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재물 때 문에 귀의했다. 법 때문이 아니다’ 라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대들은 명심하라 나의 법을 이어받되 재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대들이나 나나 사람들의 손 가락질을 받거나 재물의 상속자이지 법의 상속자는 아니라는 핀잔을 받지 않을 것이 다.”

잡아함경

“제자들이여, 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또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제자 들이여, 괴로움으로 가득 찬 모든 중생의 행복을 위해 세상에 나아가라. 둘이서 한 곳으로 가 지 마라. 처음에도 아름답게, 중간에도 아름답게, 마지막에도 아름답게 바른 뜻과 진리가 갖 추어진 법을 널리 전하라. 원만하고 청정한 바른 지혜를 설하라. 세상에는 지혜의 눈이 아직 어둡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 그들이 법을 듣지 못하면 멸망하리라. 법을 들으면 깨달으리라. 나도 설법을 위해 우루벨라의 마을로 가리라.”

장아함경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에 의지하라. 내가 너희를 위해 45년 동안 설했던 진 리에 의지하고, 진리를 스승으로 삼아라. 진리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리라. 이 밖의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변한다. 부지런히 정진하여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라.”

열반유훈(涅槃遺訓)

“나쁜 버릇이 조금도 없고, 악(惡)의 뿌리를 뽑아 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 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이.” 이 시는 숫타니파타 뱀의 장 14구절입니다.

조선시대 선승으로 유명한 경허스님은 「참선곡」에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남기셨습니 다. “…… 예전 사람 참선할 때 잠오는 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다리를) 찔렀거늘 나는 어이 방 일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 때 하루해가 지게 되면 다리 뻗고 울었거늘 나는 어이 방일한 고……

『백유경』[백가지 비유를 통한 가르침]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소젖을 짜는 사람이 있었는데, 마을잔치에 쓸 우유를 매일 매일 짜는 것이 귀찮아 잔치 하루 전날에 한꺼번에 짜기로 했습니다. 마침내 잔칫날이 되어 젖을 짜니 퉁 퉁 붓기만 해서 젖은 나오지 않고 소가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 비유담은 온갖 욕심에 젖어 사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은 보시를 잘 하라고 하면 돈을 충분히 번 다음에 한꺼번에 많이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재물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고, 많은 재물을 모으고도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 기 때문에 보시는 이뤄지지 않게 됩니다. 소젖을 매일 조금씩 짜주어야 하듯이 우리 삶에 있어서 매일 이루어지는 업의 행위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청소년들의 건강과 공부도 그렇습니다. 시험에 임박해서 벼락치기로 하는 공부라 든지, 한꺼번에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는 옳지 않습니다. 이제 이런 것을 안다면 우 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답이 나왔지요.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까마귀 같은 사람이 있고, 돼지 같은 사람이 있다. 까마귀는 배고픔에 쫓기다가 문득 더러 운 것을 먹고서는 곧 주둥이를 닦는다. 다른 새들이 더러운 것을 먹었다고 비난할까 두려워서 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은 한적한 곳에서 욕심으로 악행을 하다가 문득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뉘우쳐 제가 한 일을 남에게 말한다. 마치 까마귀가 더러운 것을 먹고 주둥이를 씻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한적한 곳에서 스 스로 악행을 하고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뉘우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뽐내고 자랑 하는 것이 마치 돼지가 항상 더러운 것을 먹고 더러운 곳에 누워 있으면서 다른 돼지 앞에서 뽐내 는 것과 같으니라.”

증일아함경

마하승기율 에 보면 독사를 잡아먹은 너구리[나구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 어느 곳에 바라문이 있었는데 그는 재산이 없어 타인의 음식을 구걸하면서 그날 그날을 보냈다. 그에게 처는 있었으나 자식은 없었다. 그의 집에는 ‘나구라’라는 짐승의 암컷이 있었다. 어느 날 이 나구라[너구리, 망구수]가 새끼를 낳았다. 바라문은 자식이 없 던 차라 이 나구라를 자기 자식처럼 사랑을 하였더니 나구라 역시 그를 친아버지 같이 생 각하고 따랐다. 바라문은 매일 우유며 떡이며 고기들을 얻어다가 나구라의 새끼에게 주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 얼마 뒤 바라문의 아내가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다. ‘이 나 구라가 새끼를 낳았으므로 나도 자식을 얻을 수 있었다.’ 바라문은 이같이 생각하고 그 후 로도 나구라와 새끼를 여전히 사랑했다. 그래서 바라문은 구걸하려고 집을 나갈 때는 항 상 자기 아내에게 “어린아이를 집에 두고 절대로 밖에 나가서는 안 된다.”고 엄하게 지시 를 했다. 어느 날 남편이 집을 나간 후 바라문의 아내는 아기에게 먹을 우유를 주고 그릇을 얻으 려고 잠깐 이웃집에 나가 집을 비웠다. 바라문의 아들이 우유를 마시고 있었으므로 우유 냄새를 맡은 독사 한 마리가 집안에 침입해서 큰 입을 벌리고 독을 토하며 아기를 잡아먹 으려 했다. 아기 곁에 있었던 나구라가 이를 보고 힘을 다하여 독사와 싸워 이를 죽이고 죽은 독사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독사를 죽이고 아기를 살렸다 하면 그 부모는 나를 얼마나 귀여워 할 것인가.’ 하고 나구라는 입 주위에 독사의 피를 묻힌 채 아기 부모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구걸에서 돌아온 바라문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집 앞에서 자기 아내를 만나 고 “어찌해서 어린애를 집에 두고 외출을 했는가.”하고 자기 아내를 나무라고 아내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방으로 막 들어가려고 하는 찰나 문 앞에서 입에 피투성이 가 된 나구라가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래서, 그들이 집에 없는 동안에 자기 아들을 잡아 먹은 줄 알고 노기가 충천해졌다. “이 나구라 새끼, 은혜도 몰라보다니” 하고는 지팡이 로 힘껏 내려쳐서 죽여 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자 거기에는 잡혀 먹힌 줄 알았던 아들이 손을 입에다 물 고 놀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곳에는 한 마리의 독사가 죽어서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 다. 이것을 본 바라문은 전후의 사정을 알고 자기의 경솔한 행위에 크게 놀라며 슬퍼하였 다. ‘저 나구라는 짐승답지 않게 인간보다 정이 있었구나. 그래서 내 아들의 목숨을 구 했다. 나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무참하게도 나구라를 때려 죽였다. 참으로 원통한 일이 다.’ 그는 땅에 엎드려 큰 소리로 울고 자기의 죄를 뉘우쳤다. 부처님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잘 관찰하고, 경솔하지 말라. 사랑하는 것을 잃고, 좋은 친구를 해치는 것은 바라문과 나 구라와 같다.”

마하승기율

“나는 마음보다 빠른 어떤 법도 보지 못하였다. 비유하려야 비유할 수도 없다. 마치 원숭이 가 가지를 타고 나무 사이를 다닐 때 하나를 놓자마자 다른 하나를 잡고 쉼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마음도 그와 같아서 앞생각 뒷생각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어떤 방편으로도 모색할 수 없다. 마음은 진실로 빠르게 돌아다닌다. 그러므로 범부로서는 마음을 관찰할 수 없다. 제자 들이여, 항상 마음을 다스려 착한 길로 나아가도록 공부하여야 한다.”

증일아함경 일자품

“수행자여, ‘마음’이 이 세상을 끌고 가고 ‘마음’이 탐욕에 물들어 집착하며 ‘마음’이 자재 를 일으킨다. 수행자여 그것이 세상을 끌고 가고 그것이 탐욕에 물들어 집착하며 그것이 자재 를 일으킨다. 수행자여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마음에 끌려가지 않으며, 마음이 탐욕에 물 들어 집착하지 않으며, 마음이 자재 하지 않는다. 수행자여,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가 마음의 자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를 따른다.”

중아함경 심경

“지금이 바로 자신을 돌아보아 참회할 때이니라. 때를 놓치지 말고 참회하라. 사람이 세상 을 살아감에 허물이 있을 지라도 곧 스스로 그것을 고치면 그는 훌륭한 사람이니라. 내 가르 침은 넓고 커서 큰 허물이라도 용서하나니 지금 참회하는 것이 좋다.”

증일아함경

잡보장경(雜寶藏經) 에서는 누구나 베풀 수 있는 일곱 종류의 보시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로, 밝고 깨끗하고 기쁨 어린 얼굴색으로 베푸는 것이다. 둘째, 자안시(慈眼施)로, 자비가 넘치는 눈길을 베푸는 것이다. 셋째, 언사시(言辭施)로, 부드럽고 고운 말로 베푸는 것이다. 넷째, 심시(心施)로, 넓고, 깊고, 포근한 마음씨를 나누고 베풂을 말한다. 다섯째, 신시(身施)로, 몸으로써 봉사함을 말한다. 여섯째, 상좌시(床坐施)로, 자리를 양보하는 보시이다. 일곱째, 방사시(房舍施)로, 방(房)은 자기가 사는 처소이고, 사(舍)는 자기 몸을 뜻한다. 잡보장경 에서 말씀하시는 재물과 물질이 없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곱 가지의 보 시야말로 우리들이 가장 먼저 쉽게 행할 수 있는 보시라 생각합니다.

옛날 가섭부처님이 어떤 인연으로 성불하게 되었는가? 가섭부처님은 전생에 바라 문의 집안에 태어나 어린 동자일 때, 사이최(思夷 )여래를 뵙고는 마음속으로 기쁜 마음에 자신이 입은 옷 가운데 보배로 만들어진 허리띠를 풀어 여래께 공양하고는 발 심하여 부지런히 보살의 행을 닦음으로써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모든 장애로부터 벗 어나게 되었다.

현겁경(賢劫經) 천불발의품(千佛發意品)

부처님께서 기사굴산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근처에 사는 부라가월이란 사람의 집으 로 가셨는데, 그에게는 서(逝)라는 이름의 열여섯 살 된 아들이 있었다. 서(逝)는 부처님을 뵙 고는 기쁜 마음으로 공손히 인사드리고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달려가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 는 게송을 읊고는 어머니에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자고 청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청 을 거절하였고, 신통력으로 큰 광명을 보이시니 서(逝)는 다시 어머니에게 찬탄의 게송을 읊 었고, 이에 어머니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좋은 옷과 밥그릇을 서(逝)에게 주었고, 서(逝)는 그 것을 받아 가지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서(逝)의 순수한 마음 을 칭찬하시면서 이 공덕으로 미래세에 수미겁 부처님이 되리라는 수기(授記)를 하 신다.

불설서동자경(佛說逝童子經)

올바르게 보시하는 마음의 자세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들 수 있습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법에도 마땅히 머무른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할 것이니, 이른 바 색[모양]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 할 것이며 성 · 향 · 미 · 촉 · 법에도 머무르지 말 고 보시해야 할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응당 이와 같이 베풀되 상에 머물지 않아야 되느니라. 왜냐 하면, 만일 보살이 상[형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 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라.”

금강경(金剛經)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널리 보시를 행하면 인간과 천상의 복을 받고 열반을 증득하게 되니 보시를 행하라. 증일아함경 오계품

선지식의 보시는 때에 맞는 보시, 제 손으로 하는 보시, 정결한 것만 주는 보시, 미묘한 보 시이니 모든 선남자 선여인은 이러한 보시를 행하라. 때에 맞는 보시란 상대의 필요를 살펴 그에 따라 적절하게 재물 또는 법을 보시하는 것이다.

증일아함경 등취사제품

법의 보시는 보시 중에 으뜸 법의 맛은 맛 중의 맛 법의 즐거움은 즐거움 중에 으뜸 욕망의 소멸은 모든 괴로움을 이긴다. 법구경

“여기 두 가지 보시가 있다. 어떤 것이 둘인가? 이른 바 법의 보시와 재물의 보시이니라. 비구들이여, 모든 보시 중에서 최상의 보시는 법의 보시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법의 보시를 힘써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증일아함경 유무품

숫타니파타 에서도 ‘베풀 줄 모르고 혼자만 부(富)를 즐기는 이는 자기 무덤을 파는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구제(救濟) 받을 수 없는 마음을 간직한 이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항상 외톨이 마음이어서 자신만을 위한 일에만 눈을 뜨고, 남을 위하는 일은 눈 을 감은 이기심에 절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지혜와 자비와 복덕으로 우리의 마음속에도 찬란한 부처님의 성품이 있음을 말씀하셨지만, 먹구름이 태양 빛을 가려 보지 못하게 하 듯이 삼독(三毒)이라는 세 가지 어두운 마음이 우리의 청정한 부처님의 마음을 가려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마름에 대한 갈증을 보시(布施)라는 부처님의 감로(甘露) 로 해결하는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 삼독의 구름을 제거할 수가 있는 것이며, 그러면 자연 스럽게 마음에서는 자비의 지혜광명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감로의 보시로 깨달음을 완성해야 합니다.

“잡초에 덮여 못 쓰게 된 밭처럼 사람은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 바람, 갈애(渴愛)로 어지럽 혀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점들을 없앤 이들에게 베푼 보시는 큰 공덕을 낸다.”

보시가 어떤 결실을 맺는가는 베풀어진 시물의 양이나 질보다도 받는 사람이 어떤 자질을 갖춘 복전인가 에 더 좌우된다.

법구경

한 번은 부처님께서 위사카 부인에게 큰 보시행을 함으로써 어떤 이로움을 얻었는가를 물으신 적이 있었다. 그때 위사카 부인은 자신은 다음과 같은 바람으로 아낌없이 보시한 다고 지혜롭게 대답했다. “어떤 비구 스님, 비구니 스님이 출가 수행자의 성위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성취했다는 소문 을 듣게 될 때 저는 그 분께서 사왓티에 머문 적이 있다면 제가 항상 올렸던 공양을 분명히 받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공양이 그 스님께서 성위를 성취하시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생각될 때 마음속에 큰 기쁨이 일고 기쁜 마음에서 다시 환희심이 솟아 납니다. 마음이 환희심으로 가득 찰 때 몸이 편안해지며 몸이 편안하면 행복한 느낌이 생기고 이 행복감은 선정에 들도록 도와줍니다. 이것은 다시 오근, 오력, 칠각지를 계발케 합니다. 제 가 아낌없이 보시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로움은 그런 것들입니다.” 부처님께 서는 위사카 부인의 훌륭한 대답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그녀가 승가에 올리고자 하는 여덟 가지 보시를 쾌히 허락하셨다.

「율장 대품」

재물이 없는 사람은 재물이 없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왜냐 하면 수초(水草) 따위는 누구에게나 다 있기 때문이다.

비록 국왕이라고 해서 반드시 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비록 빈궁하더라도 꼭 보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빈궁한 사람도 먹는 몫이 있으며 먹은 뒤에는 그릇을 씻어 남은 찌꺼기를 버리는데 그것을 받아먹을 자에게 보시해도 또한 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먼지만한 밀가루를 개미에게 주어도 무량 한 복덕의 과보를 받나니, 천하에 극빈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만한 밀가루가 없겠는가.

또 극빈자라 해서 누가 옷을 벗고 다니겠는가.

만일 옷이 있으면 어찌 남에게 줄 한 오라기 실이 나 바늘 하나가 없겠으며 부스럼을 싸맨 한 손가락만큼의 재물로 등불 심지를 만들 수 없겠 는가.

선남자야, 천하에 누가 빈궁하여 그 몸이 없는 자가 있던가. 만일 몸이 있다면 남이 복 을 짓는 것을 보고 거기 가서 도와야 할 것이니, 물을 뿌리고 소제하는 것도 또한 복의 과보 를 얻는 것이다.

중아함경 「우바새경」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 미륵보살은 부처님께 나아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몇 가지 법을 성취하여야 보시 바라밀을 행하고 육바라밀을 두루 갖추어 위없는 도를 빨리 성취하게 되나이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보살로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육바라밀을 두루 갖추어 무상정등각을 얻게 된다 고 대답하신다. 첫째, 보살이 보시할 때에는 상대의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를 평등히 보아 생명 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시한다. 둘째, 보살이 보시할 때에는 자신의 모든 소유물은 물 론 심지어 아내, 자식, 자신의 몸까지도 즐겁게 보시한다. 셋째, 보살이 보시할 때에는 그 보 시의 공덕이 모든 이 에게 미치도록 간구한다. 넷째, 보살이 보시할 때에는 ‘이 보시 의 공덕으로 인하여 육바라밀을 두루 갖추게 하여지이다.’라고 생각한다.

증일아함경 등취사제품

보살 마하살이 이와 같은 대자대비를 따라 깊고 소중한 마음으로 초지(初地 : 보살 의 첫 자리인 환희지)에 있을 때에 모든 물건을 아끼지 않고 부처님의 큰 지혜를 구 하며, 크게 버리는 일을 수행하여 가진 것을 모두 보시한다. 이른바 재물과 곡식이 가 득한 창고와 금, 은, 진주, 보석, 산호와 보물과 영락 등 몸을 치장하는 기구와 코끼 리, 말, 수레, 노비, 사환과 도시와 촌락과 동산과 누각과 처자 권속이며 그 밖의 귀한 물건과, 머리, 눈, 손, 발, 피, 살, 뼈 등의 온갖 몸붙이를 조금도 아끼지 않고 보시하 며, 부처님의 광대한 지혜를 구한다. 이것을 가리켜 보살이 초지에 크게 버리는 일을 성취함이라고 한다.

화엄경 십지품(十地品)

만약 어떤 사람이 법에 머물러서 보시를 행한다고 한다면 마치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일 법에 머물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한다고 한다면 밝은 눈을 갖고 밝은 태양 아래에서 보는 것과 같다.

금강경

마지막으로 문수동자게(文殊童子偈) 를 함께 읽으면서 법회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面上無瞋供養具 口裏無瞋吐妙香 心裏無瞋是珍寶 無染無垢是眞常)

잡아함경 에 보면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나옵니다. “넓은 들판에 호수가 있어 그 물이 맑고 깨끗해도 그것을 쓰는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말라 없어진다. 이처럼 아무리 귀한 재물일지라도, 어리석은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자기를 위해서 쓰지도 못하고 남을 위해 베풀지도 못하면서, 모으고 지키느라 걱정만 하다가 임종과 함께 잃 어버리고 만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을 위해 쓸 줄 알고 자기를 위해 쓸 줄도 알아, 그 목숨을 마친 뒤에는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

시비왕과 비둘기 :

경전 속의 예 부처님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부처님은 평생 보시를 실천한 분입니다. 특히 부처님은 철저히 무주상보시를 실천했다고 볼 수 있어요. 경전 어디를 보나 보시를 행하고 나서 상 (相)을 나타냈다, 즉 베풀었다는 생각을 냈다는 이야기가 없어요. 부처님은 오직 중생을 구제하려는 일념으로 그냥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다음은 부처님의 전생 설화인 본생경 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시비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비심이 많아 백성뿐만 아니라 목숨이 있는 모든 동물까지도 자식처럼 사랑하였습니다. 어느 날 행차를 하고 있는데, 비둘기 한 마리가 매 에게 쫓겨 비명을 지르면서 그의 품으로 날아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비둘기를 쫓던 매가 나뭇가지에 앉아 왕에게 말했어요. “그 비둘기를 내게 돌려주시오. 그것은 내 저녁거리입니다.” 왕은 단호히 거절했지요. “비둘기를 네게 돌려줄 수 없다. 나는 불도(佛道)를 닦으면서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하 겠다고 맹세하였느니라.” “그럼, 그 모든 중생 중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단 말인가요? 나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내 먹이를 빼앗겠다는 것입니까?” 이 말을 듣고 시비왕은 매우 난처해졌습니다.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못하는 상황 이 되었지요. “그럼, 다른 먹이로 바꾸어주면 안 되겠느냐?” “대신 반드시 살아있는 날고기여야 합니다.” 시비왕은 생각했습니다. ‘살아있는 날고기라면 산목숨을 죽이지 않고는 구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나를 구제 하기 위해 다른 목숨을 죽게 할 수는 없다. 내 몸은 오래지 않아 죽고 말 것이니 차라리 내 몸을 주도록 하자.’ 시비왕은 선뜻 자기 다리와 엉덩이 살을 베어 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비왕 은 매를 원망하거나 자신이 한 일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시비왕은 부처님의 전생이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전생에서 많은 보시 의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베풀며 사는 보시의 삶이 얼 마나 아름답습니까?

열반경 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보살이 보시하는 것은 명예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남을 속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 러므로 보시를 했다고 하여 교만한 마음을 내거나 은혜 갚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보시를 할 때는 자기를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받을 사람을 가려서도 안 된다.”

계율(戒律)의 뜻과 삼귀의(三歸依)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 계율은 그들의 길동무이니, 험하고 악독한 나쁜 길에서 그들을 위 하여 의지가 되리. 만일에 청정한 계를 따르면, 마치 큰 배를 탄 것 같나니, 능히 나와 남을 실어다가 삼계(三界)의 바다를 건너 주느니라.” 제법집요경 지계품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구명부대를 몸에 달고 바다를 건너려 할 때 바다 속에 있던 나찰 이 이 사람에게 구명부대를 달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듣고 생각하기를 ‘이것을 준다면 나는 반드시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다’ 하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네가 차라리 나를 죽일지언정 구명 부대는 줄 수 없다” 하였더니, 나찰이 또 말하기를 “그대가 만일 전부를 줄 수 없거든 반이라 도 갈라 달라” 한다. 그 사람이 그래도 주지 않으려 하였다. 나찰은 또 “그대가 반도 줄 수 없거든 3분의 1이라도 달라” 하였으나 그래도 주지 않았다. 나찰은 또 “그것도 할 수 없으면 손바닥만큼 달라” 하나 그것도 주지 않았다. 나찰은 다시 말한다. “그대가 만일 손바닥만큼 도 줄 수 없으면 내가 배가 고프고 고통이 심하니 티끌만큼이라도 달라”하였다. 그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네가 달라는 것은 얼마 되지는 않는다마는 내가 지금 바다를 건너가 려 하는데 앞길이 얼마나 먼지 모르는 터에 조금이라도 네게 준다면 거기에서 기운이 점점 새어 나올 것이니, 드넓은 바다를 어떻게 건너가며 물에 빠져 죽는 일을 면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계율을 수호하고 지니는 것도 그와 같아서 바다를 건너가는 사람이 구명부대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과 같으니라.”

대반열반경 성행품

계와 율의 의미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계(戒)라는 것은 범어로 시라( la) 라고 합니다. 그 동사원형 l은 ‘명상하다’, ‘봉사하다’, ‘실행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시라는 습관적 인 경향과 성격 등의 의미로 선(善)한 행위를 뜻합니다. 율(律)은 범어로 비나야(vinaya) 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이끌어 감’, ‘없애는 것’, ‘규칙과 훈련’ 등으로 단체에서의 규칙과 규범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계율이라고 말할 때는 한 단어로 쓰이지만, 엄밀히 보면 계와 율은 어원과 의미가 다릅니다. 계는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도덕적인 규범으로서 불자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것이며, 불자가 아니더라도 세상을 바르게 살아야겠다면 지키지 않을 수 없는 도리인 것 입니다. 그러나 차츰 부처님의 제자들이 많아지고 승가(僧家)를 이루는 공동체가 형성됨 에 따라 여러 가지 규칙이 필요하게 되었고, 문제가 되는 사건들이 발생되었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율(律)입니다. 다시 말해 계는 개인적, 주관적으로 어겨도 누가 처벌 하는 것이 아닌, 바로 양심에 근거하는 도덕적 자발성에 기초합니다. 그런 반면에 율은 집단적, 형식적으로 나라의 법제도와 같은 것으로 어기면 처벌이 행해집니다. 따라서 계 는 자신의 죄를 뉘우쳐 참회에 의해 깨끗해지며 여러 번 거듭 계를 받을 수 있으나, 율을 어겼을 때는 처벌 규정이 있어 심한 경우에는 집단에서 쫓겨나며,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학생들이 선생님께 인사하고 바른말과 질서를 잘 지키며 시간을 엄수하는 것들이 계라고 할 수 있으며, 무단결석과 시험 부정행위, 학교폭력 등은 교칙으로 다스리 는 율이라고 하겠습니다. 계와 율의 의미에 대해 이해하였을 줄 압니다.

그러면 다음으로는 삼귀의(三歸依)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오늘 법회 시간의 첫 부분 에서도 여러분은 다 함께 삼귀의를 하였습니다.

삼귀의는 부처님과 부처님 법과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수행 공동체인 승가(僧家)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보배라는 것을 믿고, 의지처로 삼아 진리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귀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어느 것도 삼보에는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부처님의 영원하고 무한하며 절대적인 마음 의 도리를 깨우치고 자성(自性)을 밝히기 위해서는, 삼보의 배를 타야지만 깨달음의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후, 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苑)에서 인연 깊은 다섯 수행자를 귀의시킨 후 불교는 삼보(三寶)를 구성하게 되었고, 불교가 종교의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삼보의 체제가 만들어지고 제도하신 첫 제자는 비사리성(毘舍離城)의 야사장자(耶舍長 者)입니다. 그의 부모는 집을 나간 외아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걱정하던 끝에 사방에 사람들을 놓아 아들을 찾게 했습니다. 아버지인 선각장자(善覺長者) 자신도 아들을 찾아 나섰으며, 강변에 이르러 야사가 벗어 놓은 듯한 황금빛 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강 건너 수 행자들이 사는 녹야원에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곧 강을 건넜고, 찾아간 곳은 부처님 이 계신 처소였습니다. 부처님은 그를 위해 여러 가지 방편으로 설법을 하셨습니다. 아무 리 부유하고 이생에서 모자랄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그였지만, 영원하고 무한하며 절 대적인 마음법문을 듣는 순간, 그 동안 느껴보지 못한 환희와 기쁨의 법열(法悅)이 넘치 게 되었고, 야사의 아버지는 부처님께 신도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부처님은 그를 위해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차례대로 말씀하시고, 수계(授戒) 를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삼귀의를 외게 한 다음 오계를 일러 주었습니다. 야사의 아 버지는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라고 맹세하였으며, 이렇게 해서 야사의 아버지는 부처님의 가르침 아래서 맨 처음으로 삼귀의와 오계를 받은 재가신도 (在家信徒)가 되었습니다. 불제자로서 시작과 끝은 바로 삼귀의에 있기 때문에 법회와 의 식에서는 항시 불자로서 그 근원을 일깨우게 하는 삼귀의를 하는 것입니다. 삼귀의는 첫째,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입니다. 윤회(輪廻)와 무명(無明)의 삶 속에서 부처님만이 구원자이시며, 부처님의 원력(願力)에 의해서 온갖 고통의 굴레로부 터 해방될 수 있음을 믿고, 부처님 세계는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삶의 최종 목적임을 굳게 믿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본래 본성(本 性)이 바로 부처님임을 가르쳐 주셨고, 편견(偏見)과 오류(誤謬)의 세상에서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의 노예가 되지 말고, 올바른 지혜를 가져 세상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쳐 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원력을 믿고 의지하여 정진하다 보면 어느새 나의 마 음속에 자성(自性)이 빛나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자성의 불빛을 다른 이에게도 나눠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영원한 진리임을 믿으며, 우리의 삶에 있어 최고 가치임을 확신하고, 부처님의 세계에 도달하는 최선의 방 법임을 굳게 믿겠다는 뜻으로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에 대한 굳은 믿음을 말합니 다. 금강산이 아무리 좋다고 말해도 가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러나 가보기 위해서는 반 드시 어떻게 가야 하는지, 경비는 얼마나 드는지 가본 이들의 상세한 이야기를 들어야 합 니다. ‘금강산에 가는 것은 부처가 되는 것이며, 금강산이 좋다’라고 소개해 주는 것은 바 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의 내용입니다. 그 경전을 토대로 해서 2,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불법을 배우고 살아있는 부처님 말씀을 전해 듣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거룩한 승가(僧家)에 귀의합니다.’입니다. 승가 공동체는 현세의 귀의처이 며, 중생을 구원할 원력을 가진 보살들이며, 부처님의 세계에 도달하는 최선의 공동체임 을 굳게 믿는다는 것입니다. 승가는 화합중(和合衆)이라고 하여 화합(和合)을 뜻합니다. 어떤 사회든 화합이 가장 필요합니다. 가족에서는 가족 간의 화합이 필요하고, 교실에서 는 반 친구들 간의 화합, 나라에서는 온 국민의 화합이 필요합니다. 그 화합이 이루어지면 바로 그곳이 불국토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삼귀의는 간단하지만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 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자 여러분들도 이제는 삼귀의를 하면서 그 근본 뜻을 잘 새겨 마음속에 담고 삼보를 수호하고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도달하는 원천으로 삼아야겠 습니다.

오계와 수계의 이해

“살생(殺生)을 떠나고 살생을 끊어 칼이나 작대기를 버리고, 스스로의 부끄러움과 남에 대 한 부끄러움이 있고, 자비심이 있어서 일체 내지 곤충까지를 요익(饒益)하게 하나니 그는 살 생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없애었다. 불여취(不與取)를 떠나고 불여취를 끊어 주어진 뒤에 받고 주어진 것 받기를 즐기며, 항상 보시(布施)를 좋아하고 기뻐하여 아낌이 없고 그 갚음을 바라지 않으며, 도둑질하는 마음에 덮이지 않고 항상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나니 그는 불여취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없애 었다. 사음(邪淫)을 떠나고 사음을 끊었다. 그는 혹은 아버지의 보호가 있거나 어머니의 보호, 혹 은 어머니 아버지의 보호가 있거나, 혹은 형제의 보호, 자매의 보호, 친족의 보호, 동성(同姓) 의 보호가 있거나 남의 아내는 범하지 않나니 그는 사음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없애 었다. 거짓말을 떠나고 거짓말을 끊어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즐기며 진실에 머물러 이동하지 않 으며, 일체를 믿을 만하여 세상을 속이지 않나니, 그는 거짓말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없 애었다. 술을 떠나고 술을 끊었으니 그는 술을 마시는 데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없애었다.”

중아함경 우바새경

백유경(百喩經) 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한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몹시 목이 말랐으며 물을 찾아 헤맨 끝 에 큰 강물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멍하니 물을 대하고 선 채 정작 마시려고 하 지 않았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대는 목이 마르다며 물을 찾더니 이 제 물 있는 곳에 왔는데도 마시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그대가 이 물을 다 마실 수 있다면 나도 마시겠다. 이 물이 너무 많아 그대나 나 나 다 마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시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여러 사람들은 다 크게 비웃었다고 합니다.

중국 선의 육조혜능 대사는 육조단 경(六祖壇經) 에서 삼귀의계를 매우 중요시하며 삼귀의계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대들을 위해 무상(無相)의 삼귀의계(三歸依戒)를 주리라. 나는 자각(自覺)이라는 복덕과 지혜를 두루 갖추신 분께 귀의한다. 나는 바름[正]이라는 욕심을 떠난 높은 분께 귀의한다. 나는 청정(淸淨)이라는 중생 가운데 높으신 분께 귀의한다. 이제부터 부처님을 스승이라 하며 다시는 사미(邪迷)란 외도(外道)에 귀의하지 않는다. 바라옵건대 내 자신의 삼보(三寶)가 자비로써 증명해 주시기를.

십송율(十誦律) 에서는 다음과 같이 오계를 설하고 있습니다.

첫째, 목숨이 다하도록 산목숨을 해치지 말라.[盡壽離殺生] 둘째, 목숨이 다하도록 주어지지 않는 것을 가지지 말라.[盡壽離不與取] 셋째, 목숨이 다하도록 사음(邪淫)을 행하지 말라.[盡壽離邪淫] 넷째, 목숨이 다하도록 망어(妄語)를 하지 말라.[盡壽離妄語] 다섯째, 목숨이 다하도록 술을 마시지 말라.[盡壽離飮酒]

부처님께서 입멸하시기 얼마 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열반한 뒤에는 마땅히 계율을 존중하라. 이 계율을 지니는 것은 어둠 속에서 등불을 만남과 같고, 가난한 이가 보배를 얻음과 같고, 병든 환자가 양약을 얻음과 같 고, 감옥에 갇힌 자가 풀려나옴과 같고, 객지에서 방황하던 나그네가 고향에 돌아온 것과 같나니, 마땅히 알아라. 이 계율은 곧 너희들의 스승이니라. 만일 내가 이 세상 에 더 오래 산다 하더라도 이와 다를 바가 없느니라.”

화엄경(華嚴經) 에서는 이렇게 설하셨습니다. “계는 위없는 깨달음의 근본이니 마땅히 정계(淨戒)를 구족하게 지니라. 그러면 여 래께서 찬탄하실 것이니라.”

또 사분율계찬서 에서는 말합니다. “여러 산 가운데서는 수미산이 으뜸이고, 여러 강 가운데서는 바다가 제일이며, 천경만론 가운데서는 계율이 으뜸이다. 그러므로 가장 훌륭한 진리를 구하려 하면 마땅히 이 계율을 잘 지켜 목숨이 다하도록 범하지 말라.”

『삼국유사』에는 염불에 의해 부처님이 된 설화가 많이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머슴이 있었는데 이 머슴은 신심이 아주 돈독하여 주인이 절에 불공을 가 면 꼭 따라가 절 마당에 서서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는 했답니다. 그런데 주인보다 더 절 절한 모습으로 부처님께 기도드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찬탄을 하기에 이르게 되었고 이 를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한 주인은 그만 질투의 화신이 되었던 것입니다. 남의 이목이 있 어 절에 따라 오지 말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고 절에 오지 못하게 할 심산으로 삼일 밤낮으로 해야 할 분량의 일거리를 주며 하루에다 마치면 절에 따라 와도 좋다는 명을 내 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절에 도착한 주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머슴이 그 많은 일거리를 밤을 꼬박 새워 일하고 주인 보다 먼저 절에 와 있었기 때문이었습 니다. 그런데 그 신심이 장한 머슴도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 염불을 하는데 너무 졸려 그만 고 개를 숙이게 되었습니다. 졸다가 깜짝하고 잠에서 깬 머슴은 절 밖으로 잠시 나갔다 왔는 데 사람들은 머슴의 손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졸음 때문에 염불하는 마음이 흐트러질까봐 합장한 손이 풀어지지 않도록 낫으로 양 손을 뚫어 새끼줄로 칭칭 묶고 들 어와 열심히 염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머슴의 몸에서는 황금색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곧 부처님이 되었다고 하는 설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음미해보면 염불 수행이란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 머슴을 ‘부처 님’이라는 ‘신’이 구원해준 것일까요? 그 머슴은 자신의 굳은 신심으로 염불하여 불, 보 살님의 가피력을 도움 받아 ‘부처님’이 된 것입니다. 순수한 자력문이 없듯이 순수한 타 력문도 있을 수 없습니다

“너희들은 마땅히 계를 지니고 선정을 생각하며 지혜를 깨달으라. 이 세 가지를 잘 지키는 사람은 덕망이 높고 명예가 드날리게 될 것이다. 음란한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 과 잡된 생각이 없어질 것이니, 이것을 일러 해탈이라 한다. 이 계행이 있으면 저절로 선정이 이루어지고, 선정이 이루어지면 지혜가 밝아지리니, 이를테면 흰 천에 물감을 들여야 그 빛이 더욱 선명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 세 가지 마음이 있으면 도를 어렵지 않게 얻을 것이고, 일 심으로 부지런히 닦으면 이생을 마친 후에는 청정한 데에 들어갈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하면 스스로 이 몸을 버리고 다시 나지 않은 줄을 알아라. 만약 계․정․혜의 행을 갖추지 못하면 윤회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갖추게 되면 마음이 저절로 열리어 문득 천상․인간․지옥․아귀․축 생들의 세상을 보게 되며 온갖 중생들의 생각하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시냇물 이 맑으면 그 밑에 모래와 돌 자갈의 모양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깨달은 사람은 마음이 밝으므로 보고자 하는 것이 다 나타난다. 도를 얻으려면 먼저 그 마 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마치 물을 흐리면 그 속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마음을 깨끗이 지 니지 못하면 세상에 나고 죽음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장아함경

“비구는 또 눈, 귀, 코, 혀, 몸, 생각 등 감관의 문을 잘 지켜야합니다. 마치 부자가 창고의 문을 단속하여 도둑의 침범을 막듯이. 비구가 눈으로 사물을 볼 때에는 어떤 현상이나 특수한 환경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생각을 다스리지 않고 계속 놓아둔다면 탐애와 애착과 비애 등의 부정법(不淨法)에 흘러 갈 것이오. 그러므로 눈을 잘 단속하여 감각 기관을 잘 조절 함으로써 보는 감각이 바른 길을 벗어나지 않고 항상 순결한 제 자리로 돌아가게 해야 하는 것이요. 소리를 듣는 귀와 냄새를 맡는 코, 맛을 보는 혀, 차고 덥고 거칠고 부드러움을 느끼 는 몸, 시비와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도 그와 같아서 어떤 현상이나 특수한 환경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의식하는 것이 모두 제 길을 벗어 나지 않고 항상 순결한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오. 이와 같이 모든 감관을 잘 다스려 그 공덕이 갖추어지면 마음속으로 티 없이 깨끗한 안락을 누리게 되는 것이오. 이것이 감관의 문을 보호한 공덕의 과보입니다.”

남전 장부 사문과경

“지혜의 성취란 선정에 의해 고요하고 맑고 밝아 아무 걸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이 세상의 ‘덧없음’과 ‘나’라고 내세울 것이 없음을 알며 다섯 가지 신통을 얻고 네 가지 진리를 알아 번뇌를 없애고 깨달음을 얻어 해탈했다는 분명한 자각을 가지는 것 이 오.”

장아함경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제법집요경 인욕품 에서“인욕에 잘 머무르면 제일의 장엄이 되 나니 이것은 가장 뛰어난 재물이어서 세간의 보배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 니다

부처님은 출요경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분노에 대해 경계했습니다. “분노가 왕성하면 한낮도 밤처럼 보이고 천지가 모두 깜깜하여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분 노란 이치답지 않은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분노의 힘이란 믿을 것이 못된다. 사람의 선한 성 질을 부수는 것이다. 분노란 원래 썩은 법이라, 좋은 소문나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다소 선행이 있더라도 분노에 덮여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저 악한 사람은 기쁨과 성냄이 발동하거나 분 노에 덮이게 되면 자신을 스스로 비추어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다만 스스로 손실일 뿐 아 니라 이 세상에도 아무 이익이 없다. 이른바 참는다는 것은 옳고 그름의 허물을 보지 않는 것 이니, 그래야 참음이라 할 수 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 에서는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장애되는 것에 대해 수없이 열거 하십니다. “불자여, 나는 어떤 법의 허물이라도 보살들이 다른 보살에게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 보다 큰 것을 보지 못하였노라.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다른 보살에게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백만의 장애되는 문을 이루게 되는 까닭이다. 무엇을 백만의 장애라 하는가. 이른바 보리를 보지 못하는 장애, 바른 법을 듣지 못하는 장애, 부정한 세계에 나는 장애, 나쁜 길에 나는 장애, 여러 어려운 곳에 나는 장애, 병이 많은 장애, 비방을 받는 장애, 우둔한 길에 나는 장 애, 바른 생각을 잃는 장애, 지혜가 모자라는 장애, 눈 장애, 귀 장애, 코 장애, 혀 장애, 몸 장애, 뜻 장애, 악지식 장애, 나쁜 동무 장애, 소승을 좋아하는 장애, 용렬한 이를 친근하는 장애, 큰 위력 있는 이를 믿지 않는 장애, 바른 소견 없는 사람과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 장애, 외도의 집에 나는 장애, 마의 경계에 머무는 장애, 부처의 가르침을 여의는 장애, 선지식을 보 지 못하는 장애니라. 그렇다면 성냄은 왜 생기는 걸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에게 이롭게 하고 칭찬을 하면 좋아서 기뻐하고 해를 끼치고 모욕을 주면 싫어서 화를 냅니다. 다시 말하 면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성냄을 부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만일 인욕을 닦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교만한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물리치고, 나라는 생 각이나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 만일 이렇게 관한다면 이 사람은 능히 인욕을 닦을 것 이며, 이와 같이 닦고 나면 마음에 기쁨을 얻으리라.”

「찬제바라밀품」라고 하여 나 혼자 잘났다는 마음이나 칭찬에 우쭐대는 마음까지 도 참고, '나' 와 '내 것'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돌려 다른 사람의 어려운 처지에 대해 자비를 일으키고, 남의 잘못 에 대해 용서할 줄 아는 적극적인 의미의 인욕을 수행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인욕은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노여움이나 질투를 제거함 으로써 자기와 남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며,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마음으로 참는 것입니다. 또한 잘못된 권력 앞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힘 있는 자가 약한 사람들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양보하고 물러서는 굴종 이 아니라 지혜에 근거한 진정한 용기이며, 힘없는 자를 위해 눈물 흘리며 감싸는 자 비의 외적인 표현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큰 힘을 가졌으면서 모자라는 이에게 참을 수 있다면 그것은 훌륭한 참음이 되지만 힘이 없이 어떻게 참을 수 있으랴. 남에게 몹시 꾸짖음을 받고도 힘 있는 사람은 능히 참는 다. 그것은 훌륭한 참음이 되지만 힘이 없이 어떻게 참을 수 있으랴. 나보다 센 이에게 굳이 참는 것 그것은 두려워서 참는 것이요 나와 같은 이에게 그저 참는 것 그것은 다투기 싫어서 참는 것이며 나보다 못한 이에게 즐겨 참는 것 그것은 훌륭한 참음이니라.” 잡아함경 박계경

인욕은 맹목적인 참을성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위한 자비심에서, 내가 믿고 있는 진리, 정법을 구현하기 위해 설사 박해를 받더라도 참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의 10대제자 중 설법을 잘하기로 유명한 부루나존자가 어느 날 부처님께 찾아가 수로나라는 나라로 포교를 떠나겠다고 작별인사를 할 때 부처님께서 여쭤보셨습니다. “부루나여, 수로나 사람들은 포악하다는데, 그들이 욕을 하고 창피를 주면 어떻게 하 려느냐?” “세존이시여, 그 정도라면 저는 저를 손으로 치지 않는 그들을 오히려 어질다고 생각 하겠습니다.” 만일 그들이 손으로 그대를 친다면?” “네, 그때는 그들이 저를 치는데 채찍이나 곤장을 쓰지 않으니 어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만일 채찍이나 곤장으로 친다면?” “네, 그때는 그들이 칼을 쓰지 않으니 어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부루나여, 만일 그들이 칼로써 너를 괴롭히고 생명을 앗아간다면?” “세존이시여, 당신의 제자 중에는 육체의 무게를 고민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한 자도 있었습니다. 수로나 사람들이 저를 칼로 치면 그때 저는 '내가 복이 있어 저들이 내 육체의 괴로움을 빨리 없애주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어질다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부루나의 그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칭찬하며 포교여행을 허락했습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부루나여. 그대가 이처럼 모욕과 고통을 참는 힘이 있으니 그대 는 아무 걱정 말고 수로나로 가라” 어떻습니까, 불자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이지요? 이런 투철한 인내 앞에는 마음의 문을 꼭 닫아걸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우리 청소년 불자들도 이 땅에 진리가 널 리 전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모욕하고, 악담을 퍼붓고, 저주하고, 때리고, 심지어 는 죽인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참아내는 제2, 제3의 부루나가 되어야 하겠습 니다.

인욕에 대한 경전자료

사람은 마땅히 성내지 말라. 내게 성내어도 그 성냄을 갚지 말라. 악에 대해서 악한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교만한 마음을 부셔야 한다. 성내지 않고 해치지도 않으면 그야말로 성현의 무리라 한다. 악하고 죄스러운 성을 내는 이는 돌산처럼 끄떡하지 않는다. 울화가 치밀어도 능히 참으면 달리는 마차를 제어하는 것 같다. 고삐만 잡았다고 좋은 마부가 아니다.

잡아함경 야차경

남에게 대해 해칠 마음 없으면 성냄도 또한 얽매이지 못하나니 원한을 품어 오래 두지도 말고 성내는 마음에도 머물지 말라. 또 비록 화가 치밀어도 그것으로서 추한 말을 하지 말라. 구태여 남의 흠을 애써 찾아서 그의 약점 단점을 들추어 내지 말고 항상 마땅히 스스로 단속하여 정의로써 안을 스스로 되살피라. 성내지 않고 해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성현들과 함께 하여라.

잡아함경 득안경

“더러운 말을 들어도 잘 참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패악한 사람은 제 몸을 아끼지 않을 뿐 아니라 또 남의 미움을 받으며, 그 성질이 사납고 조급하여 남과 잘 싸우기 때문에 남의 조소를 받는다.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을 헐고 욕되게 하기 때문에 벗들이 좋아하지 않고 또 남 의 책망을 듣는다. 어떻게 금 같은 보배로운 몸으로 저 기왓장이나 돌과 바꿀 수 있겠는가? 마음을 쉬면 무슨 분노가 또 있으랴란 무슨 뜻인가? 공부하는 사람이 그 마음을 쉬고 나쁜 뜻을 항복 받으면 마음은 죽은 재와 같고 몸은 마른 나무 같아서 기쁨이나 즐거움을 눈앞에 서 보아도 조금도 마음에 끼지 않고, 마음은 수미산과 같아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므 로 마음을 쉬면 무슨 분노가 또 있으랴라고 하는 것이다. 성내지 말고 해치지도 않으며 진실 하고 정성된 행을 늘 생각하라.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분노하여 원한을 맺고는 언제나 품고 있다.”

출요경

남을 때리기 때문에 남에게 맞고 남을 꾸짖기 때문에 남의 꾸짖음을 받는다. 그것은 다 참 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고통과 손실을 당하는 것이다. 대개 참음이란 싸움에 있어서 최상의 방법이요, 또 그것은 좋은 약이 되어 온갖 병을 잘 고친다. 만일 누가 꾸짖더라도 잠자코 거 기에 대항하지 말라. 출요경 “분노와 진심과 번뇌가 치성할 적에 스스로가 이를 억제할 줄 아는 자는 마치 저 채찍을 잡고 굴레를 씌워서 사나운 말을 억제함과 같으므로 잘 억제하는 이를 선승이라고 하고 억제 하지 못하는 이를 방일이라 하셨네. 진심이 바로 안의 원적이므로 너는 그 진심에 수순하거나 진심에 억제를 당하지 않아야 하리. 남의 음식이 뱃속에 있거늘 어찌 성내는 맘과 미워하는 맘을 내어 그 신심의 보시 음식을 그대로 소화시킬 수 있으랴. 네가 법을 수행하려면 성냄과 미워함을 일으키지 않아야 스스로 법을 수행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으며 나아가선 중생들 의 법칙이 되어서 그 성내고 미워하는 마음을 내는 자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게끔 말할 수도 있으리. 진심과 분노가 그 마음을 괴롭혀 입으로 나쁜 말을 내는 것은 슬기로운 이의 꾸지람 을 받으므로 그런 나쁜 말을 하지 말아야 하네. 인욕으로서 진심을 일으키지 않고 결정코 금 계를 굳게 지키고 참말만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음이 그것이다. 일체 세상이 다 남을 해치고 괴롭히거늘 어찌 너마저 중생을 괴롭히고 해치려 하는가……. 일체의 사는 것은 마침내 다 죽어가거늘 네가 해칠 필요가 무엇인가. 저 왕이 너를 구타했다 해서 네가 큰 진심을 낸다면 인과의 법에 비추어 현재에도 크게 괴롭고 미래세에 다시 그 고뇌의 과보를 받을 것인즉, 먼 저 상해를 당한 그 보복으로 다시 상대를 상해할 필요가 무엇인가?”

대장엄론경

“불자들이여, 보살 마하살은 친하거나 원수를 위해 온갖 선근을 회향하되 그것은 평등해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살 마하살은 평등한 관찰에 들어가 원수나 친한 이가 없기 때문에 항상 인자한 눈으로 중생을 보아 혹 어떤 중생이 나쁜 마음을 품고 그 보살에 대해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더라도, 그는 그 중생들의 선지식이 되어 깊고 묘한 모든 법을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비유하면 큰 바다는 어떤 독으로도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아서, 지각없고 어리석어 지혜 없으며, 은혜 갚을 줄 모르고 성 잘 내며 잘난 체하고, 계율 을 깨뜨리며 눈이 어두워 장님 같은 이 등, 이런 한량없이 나쁜 사람도 그 보살의 보리심은 어지럽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방광불화엄경 금강당보살품

“보살 마하살이 어떤 중생이 어리석고 미쳐서 나쁜 말로 헐뜯고 칼, 막대기, 돌로 해롭게 해도, 이런 경계로 해서 보살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다만 참고 부드럽고 화평하게 불법을 전 문으로 닦으며, 가장 좋은 도에 머물러 생사를 여의는 자리에 들어가나니, 이것이 둘째 인이 니라.”

화엄경 이세간품

“어떤 중생이 꾸짖고 욕설하고 훼방하며 방망이로 때리고 살을 오리며 몸을 괴롭게 하고 내지 목숨을 끊더라도 이런 일들을 모두 참고 견디며, 마침내 이런 것을 인하여 흔들리는 마 음을 내거나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며, 큰 자비와 큰 서원을 버리지 아니하고 다시 더 늘 게 하고 쉬지 아니하느니라. 왜냐하면 보살이 모든 법에서 참으로 벗어나서 버리는 일을 성취 하는 연고며, 모든 여래의 법을 증득하고 참고 부드러움에 이미 자유자재하는 연고니, 이것이 다섯째 산과 같은 더 올라가는 마음이니라.”

화엄경 이세간품

“어떤 것을 죽이면 안온한 잠을 자고 어떤 것을 죽이면 근심 두려움이 없으며 어떤 것을 죽이면 고타마께서 칭찬하나이까? 흉악한 성냄을 죽여 버리면 안온한 잠을 잘 수 있으며 흉악한 성냄을 죽여 버리면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이 없다. 성냄을 독한 뿌리로 만드는 그 괴로운 종자를 없애라. 그 괴로운 종자를 없애면 근심과 두려움 없게 되리니 괴로운 종자를 없애기 때문에 성현들은 그 이를 찬양하나니라.”

잡아함경 멸진경

사람이 성내거나 원한 없는데 그를 보고 욕하고 꾸짖더라도 청정해 앙심먹는 때가 없으면 그 허물 도리어 제게 돌아가나니 마치 흙을 그에게 끼얹더라도 거스림 바람 도로 그를 더럽히는 것 같네.

잡아함경 건매경

“지자는 일체 중생이 생사의 고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건지고자 하므로 슬픔을 일으킨 다. 사도에 헤매는데도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오욕의 진수렁에 빠 져 나올 수 없으면서도 방일하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재물과 처자에 얽매어 빠져 나 오지 못함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또 중생들이 악업을 짓고 고통의 과보를 받으면서도 탐착 을 하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오욕을 갈구함이 마치 목마른 자가 소금물을 마시는 것 과 같음을 보기에 슬픔을 일으키고, 행복을 구하면서도 그 원인을 닦지 않고, 괴로움을 싫어 하면서도 애써 그 원인을 닦으며, 천상에 나고자 하면서도 계를 지키지 않기에 슬픔 을 일으킨다. 또 중생들이 ‘나’가 없는 데에서 ‘나’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슬픔을 일으 키고, 생로병사를 두려워하면서도 오히려 그 업을 짓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무명의 어둠 속에 있으면서 지혜의 등불을 밝힐 줄 모르니 슬픔을 일으키고, 번뇌의 불길에 타면서도 삼매의 물을 구할 줄을 모르니 슬픔을 일으키고, 오욕의 즐거움 때 문에 무량한 악을 지음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오욕의 괴로움을 알면서도 이것을 구해 쉴 줄을 모름이 마치 배고픈 자가 독이 든 밥을 먹는 것과 같음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또 중생들이 부처님의 출세를 만나 감로의 법을 듣고도 수지할 줄 모르니 슬픔을 일으키고, 나쁜 법을 믿고 선지식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에 슬픔을 일으키 고, 많은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눠줄 줄 모름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장사를 하는 것을 볼 때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 슬픔을 일으키고, 부모, 형제, 처자, 노비, 권속, 종실들이 서로 사랑할 줄 모름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우바새계경

“세상 사람들이 즐기고 애착을 가지는 것은 뒷날에 반드시 고통을 받을 종자가 되거늘 어 째서 지긋지긋하게 탐을 내고 있는가.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한 번만 참으면 즐거움은 영원 할 것인데 어째서 이것을 닦지 않는가.”

발심수행장

그는 나를 욕해 꾸짖고 나를 때리고 나를 이겼다 이렇게 굳게 마음에 새기면 그 원한은 끝내 쉬지 않는다. 그는 나를 욕해 꾸짖고 나를 때리고 나를 이겼다. 이렇게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그 원한은 이내 고요해 진다. 원망으로써 원망을 갚으면 끝내 원망은 쉬지 않는다. 오직 참음으로써 원망은 쉬나니, 이 법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남의 허물만 꾸짖지 말고 힘써 내 몸을 되살펴보자. 사람이 만일 이렇게 깨달으면 그 때문에 다툼은 길이 쉬리라.

법구경

성내지 않을 일에 성을 내고 짓지 않아야 할 악을 행하면 그는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그 과보의 고통을 받으리라. 남을 해치면 나도 해침을 받고 남을 원망하면 나도 원망을 받으며 남을 헐뜯으면 나도 헐뜯음을 받고 남을 때리면 나도 맞는다.

출요경 분노품

내가 본래 만든 것이요 내가 본래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당한다.’

중아함 「아리타경」

옛날 어느 들판에 물소 떼가 살고 있었다. 그 물소들을 이끌고 있는 물소의 왕은 온화하고 어진 성품으로 무리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잘 이끌며 살고 있었다. 그 때 가까운 곳에는 큰 원숭이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원숭이는 포악하고 질투심이 강하 며 남을 미워하기를 일삼는 성격이었다. 하루는 물소왕이 무리들과 함께 물가에 가기 위해 길 을 가는데 그 원숭이와 마주쳤다. 원숭이는 무리들과 함께 한가로이 길을 가는 물소왕을 보자 괜히 화가 나고 질투심이 일어나 물소왕에게 흙과 자갈 등을 던지며 욕을 했다. 그러나 물소왕은 원숭이의 행동에 대응하지 않고 묵묵히 길을 갔다. 그 뒤를 따라가는 물 소들에게도 계속 원숭이는 욕설과 함께 흙과 돌을 던졌지만 물소들은 그들의 왕이 묵묵히 참 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참으며 갈길 만을 갔다. 그 뒤의 어린 새끼 물소들도 마찬가지였 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나무 한 그루가 물소왕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원숭이가 이유 없이 저렇게 비난하고 공격하는데도 참고 있는 것이요? 알 수가 없군요.” 물소왕은 말했다. “나를 가벼이 보고 욕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는 마땅히 그 행동에 대 한 과보를 받아 곧 근심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설수우경

정진이란 중도에 그만두지 않는 것

마부작침(磨斧作針) 이야기

먼저 이야기 하나를 꺼내 볼까요? 당서(唐書) 「문예전(文藝傳)」에 보면, 당나라 때 시선(詩仙)으로 불리던 이백(李白)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백이 학문을 하기 위해 상의산(象宜山)이라는 산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마음을 굳 게 먹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싫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도중에 포기 하고 짐 보따리를 싸서 산을 내려오는 중이었습니다. 어느 냇가에 이르렀을 때, 한 노파가 바위에 뭉뚝한 도끼를 갈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이백이 물었지요. “할머니, 지금 무엇을 하고 계세요?” “응, 보면 모르냐? 도끼를 갈고 있지.” “그 도끼를 갈아서 뭘 하시려고요?” “바늘을 만들려고 한단다.” 노파의 엉뚱한 대답에 이백이 기가 막혀서 픽 웃으며 다시 물었습니다. “예? 그 뭉뚝한 도끼를 갈아서 어느 세월에 바늘을 만든단 말씀입니까?” 이에 노파는 이백을 가만히 쳐다보며 꾸짖듯이 말하였습니다. “얘야, 비웃을 일이 아니다.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 도끼로 바늘을 만들 수 있단다.” 이 말을 들은 이백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그 후로는 한눈팔지 않고 글공부를 열심히 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유명한 고사입니다. 그대로 풀이하면,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즉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만일 이백이 어린 시절에 이런 경 험을 하지 않았다면 당나라의 내로라하는 큰 시인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바로 정진이란 이렇게 ‘중도에 그만두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뭉뚝한 도끼라도 갈고 또 갈면 언젠가는 가느다란 바늘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지 요.

부처님께서 가르친 정진의 자세는 바로 이와 같습니다. 수행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 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오랜 생에 걸쳐 자신이 쌓아온 업(Karma)이 있기 때문에 단번에 진리를 깨칠 수 없습니다.

끊임없는 정진만이 깨달음에 이르게 합니다. 정진은 첫걸음부터 3층 누각 이야기 또 하나 예를 들어 볼까요? 백유경 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마을에 시샘 많고 욕심 많기로 이름난 부자 영감이 살고 있었습니다. 누가 좋 은 옷을 입으면 어떻게 해서든 그보다 더 좋은 옷감을 구해 옷을 해 입었고, 쓸데없이 많은 하인들을 두고 거드름을 피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웃 마을에 사는 부 잣집에 갔다가 3층 누각을 구경하였습니다. 그것은 웅장하고 화려할 뿐 아니라 넓고 높아 시원스럽게 보였습니다. 부자 영감은 무척 부러워하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런 나쁜 놈 같으니라고. 재산도 적은 놈이 이런 훌륭한 누각을 지어 뽐내다니. 나도 어서 이것보다 훨씬 훌륭한 누각을 지어야지.’ 그래서 그 영감은 당장 목수를 불렀습니다. “저 누각보다 더 크고 웅장한 누각을 지을 수 있겠느냐?” “네, 저 집은 바로 제가 지었습니다.” 목수가 대답했습니다. “그럼 저것보다 더 웅장한 누각을 지어라.” 목수는 곧 땅을 고르고 목재를 깎아 누각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부 자는 의심이 나서 목수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집을 지으려는 것이냐?” “3층 누각을 짓는 중입니다.” 그러나 부자 영감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보다시피 아주 훌륭한 집이 있다. 그러니 나에겐 아래 두 층은 필요가 없다. 속히 3층 누각만 지어 다오.” “예? …….” 목수는 부자 영감의 말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떠나 버렸습니다.

정진은 스스로 노력하는 것

줄탁동시(卒啄同時) 이야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훌륭히 담고 있는 중국 선종의 대표적인 저서인 벽암록 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수행자가 경청 화상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달걀의 껍질을 깨고 세상에 나오려는 병아리와 같습니다. 그러니 부디 화상 께서는 밖에서 껍질을 깨뜨려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잘 나올 수 있겠느냐?” “제가 만약 밖으로 잘 나오지 못하면 스님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그러자 화상이 그를 질책했습니다. “에끼, 이 멍청한 놈

유교경 에 보면 ‘정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나옵니다. “부지런히 정진하면 모든 일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정진하라. 마치 작 은 물도 쉬지 않고 흐르면 큰 바위를 뚫을 수 있는 것과 같으니라.”

내가 악행을 하면 스스로 더러워지고 내가 선행을 하면 스스로 깨끗해진다. 그러니 깨끗하고 더러움은 내게 달린 것 아무도 나를 깨끗하게 해줄 수는 없다.

법구경 자기품

악의 열매가 맺기 전에는 악한 자도 복을 만난다. 그러나 악의 열매가 익었을 때 악한 자는 재앙을 입는다. 선의 열매가 맺기 전에는 선한 이도 이따금 화를 만난다. 그러나 선의 열매가 익었을 때 선한 사람은 복을 누린다. 내게는 업보(業報)가 오지 않으리라고 악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방울물이 고여 항아리를 채우나니 작은 악이 쌓여서 큰 죄악이 된다.

법구경 악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가미니여 나는 너에게 묻노니, 너는 아는 대로 대답하라. 만일 한 마을에 어떤 남녀가 게 을러서 정진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악한 법을 행하여 10악업을 지었다고 하자. 그럼에도 불구 하고 여러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합장하고 축원하였다고 해서 그들이 천상(天上)에 날 수 있 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가미니의 이 대답을 칭찬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비유로써 이해를 도우셨다. “이 마을에서 멀지 않는 곳에 깊은 못이 있는데 거기에 어떤 사람이 큰 무거운 돌을 던져 넣었다고 하자. 그런데 여러 사람이 와서 그것을 향해 합장하고 축원한다고 해서 그 돌이 물 속에서 솟아 오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미니여, 너의 뜻은 어떠하냐. 만일 한 마을에 어떤 남녀가 정진하여 부지런히 닦고 그러 면서도 선한 업도를 성취하여 10선업을 지었다고 하자. 그런데 여러 사람이 그들 앞에서 합 장하고 ‘지옥 가라’고 축원 했다고 해서 그들이 지옥엘 가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마치 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깊은 못이 있는데 거기서 어떤 이가 기름이 있 는 병을 물에 던져 부수면, 부서진 병 조각은 밑으로 가라앉고 기름은 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다.”

중아함경 업상응품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잡아함경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승림 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여러 비 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만일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반드시 그 갚음을 받되, 현세에서 받거나 후세에서 받는다 고 나는 말한다.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반드시 그 갚음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 다. 그 중에는 몸으로 일부러 짓는 3업이 있고 입으로 짓는 4업이 있으며, 뜻으로 짓는 3업이 있다.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갚음을 갖게 된다.”

중아함경 업상응품

허술하게 이은 지붕에 비가 새듯이 수양이 없는 마음에는 탐욕의 손길이 뻗치기 쉽다. 잘 덮인 지붕에는 비가 새지 않듯이 수양이 잘 된 마음에는 탐욕이 스며들 틈이 없다.

법구경 대구품

모든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며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이의 가르침이다.

법구경

부처품 쇠에서 생긴 녹이 쇠를 먹어 들어가듯 방종한 자는 자기의 행위로 인해 지옥으로 끌려간다.

법구경 더러움품

“선악(善惡)의 보(報)는 그 그림자가 형태를 따르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삼세(三世)의 인과 (因果)가 휘돌아 없어지는 일이 없으니, 이 생(生)을 헛되이 보낸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으리 라.”

열반경

게으름은 온갖 악의 근본이요, 게으르지 않음은 온갖 선의 근본이다.

열반경

백년을 장수하여도 게을러서 정진(精進)하지 않는다면, 하루 동안 정진하여 약한 마음이 없는 것만 못하다.

출요경

능히 과실을 스스로 고치는 사람은 과실이 없는 것과 같다.

채화위왕경

뉘우침도 선심(善心)이다.

존파수밀경

비록 잘못이 있어도 그 과실을 뉘우치면, 넘어진 말을 채찍으로 친 다음에 제어하는 셈이 된다.

출요경

백년이나 지난 때가 묻은 옷이라도 하루의 빨래로 깨끗해지는 것과 같다. 백천겁(百千劫) 동안에 모인 온갖 악행(惡行)이라 할지라도 불법(佛法)의 힘으로 겸손히 사유(思惟)하면, 일일 일시(一日一時)에 남김없이 소멸시킬 수 있다.

대집경

부처님은 인욕으로 투구를 삼고 정진으로 견고한 갑옷을 삼고 지계로 대마를 삼고 선정으 로 양궁(良弓)을 삼고, 지혜로 좋은 화살을 삼으시어, 밖으로 마왕의 군사를 깨고 안으로 번뇌 의 도둑을 멸하신다. 그래서 아라한이라 한다.

대지도론

잠깐 동안의 노여움은 능히 무량겁(無量劫)의 선근(善根)을 불사른다.

대일경

참지 못할 것을 참음은 만복(萬福)의 근본이다.

육바라밀경

몸은 마른나무요 노여움은 불이다. 남을 태우기 전에 먼저 제 몸을 태우리라

대장엄경론

사람이 제 마음도 이기지 못하면서, 도리어 남의 마음을 이기려 해서야 될 법이나 한 소리 인가? 제 마음을 이겨야 남의 마음을 이기게 될 것이다.

삼혜경

말룽카 이야기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있는 경전은 그 내용이 우선 방대하고 다양합니다. 고려대장경 만 보더라도 그 종류가 1,512부요, 책 권수로는 6,791권이요, 경판수가 81,258판이나 되 니 그 많은 경전을 다 읽고 통달하고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 러나 바닷물을 다 마셔보아야 바닷물 맛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숟갈만 떠 마셔 봐도 그 짭짤한 맛을 알 수 있듯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은 중생의 병에 따라 약을 주신 약 처방이니 그 어느 한 가지 말씀이라도 깊이 이해하고 깨닫는다면 그 어느 것에도 걸려 넘어지지 않는 무애 자재한 자유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결 같이 꾸밈이 없어 소박하고 거짓이 없어 진실합니다. 있는 그 대로의 세계를 말씀하신 것이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가르침이요 누구라도 와 서 보라고 내 보일 수 있는 가르침이요 현실에서 그대로 터득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부 처님 재세시 말룽카라는 한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늘 자리에 앉기만 하면 많은 생각 을 했다고 합니다.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한한 것인가 유한한 것인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 것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없는가? 아니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가? 부 처님은 이러한 말씀을 전혀 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태도가 못마땅하고 이제 는 더 참을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 나를 위해 세계를 영원하다고 말씀한다면 수행은 계속 하겠지만 영원하지 않다면 부처님을 비난한 뒤에 떠나야겠다.” 어느 날 말룽카는 해가 질 무렵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 럽게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해 여래는 세상을 영원하다고도 허망하 다고도 말한 적이 없음을 상기시키고 의심이 가시지 않은 말룽카와 그의 비구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그 친족들은 곧 의사를 부르려 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아니 되요.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성은 무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신분 인지를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로 되었는지 물푸레나무로 되었는지 화살은 보 통나무로 되었는지 대로 되었는지 알아야겠소. 또 화살 깃이 매의 털로 되었는지 아니면 닭의 털로 되었는지 알아야겠소.”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 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다. “세계는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는 이 소견 때문에 나를 따라 수행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생로병사의 근 심 걱정은 있다. 나는 또 세상에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 냐하면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길이 아니고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한결같이 말하는 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괴 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이다. 어째서 내가 이것을 말하는가 하면 이치에 맞고 법에 맞으며 수행인 동시에 깨달음의 길이며 열반의 길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렇게 알고 배워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말룽카를 비롯하여 여러 비구들은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했다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인도사회는 ‘영원불멸의 실체가 존재 하는가?’ 에 대한 많은 이론이 있었습니다. 본체란 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생멸(生滅)을 변화하는 이면에 존재하는 영원 불멸의 실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부처님은 이러한 본체를 문제 삼는 것 자체를 법에 맞지 않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금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각이나 감각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간의 인식경험은 현상계의 범주 안에서 존재하는 경험으로 이러한 현상계를 초월한 절대적 존체를 인간이 인식하고 판단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인간에게 참된 이해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므로 그러한 본체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던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설명하고 판단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니 진실로 우리가 지금 생사의 괴로 움을 벗어나 지혜와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찰나 생 찰나 멸을 거듭하는 이 무상한 세계! 우리에게 내일이라는 사람은 보장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있어 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무의미한 형이상학적 논의에 빠져 헛되이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이 허망한 생사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진실로 영원히 안온하고 평화로운 삶을 실현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무량심은 온갖 착한 일의 근본임을 열반경 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십니다. “보살이 청정한 행을 갖추려면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慈], 연민을 가지고[悲], 그 들을 축복해 주고[喜], 집착심을 버리는[捨]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닦아야 한다. 사랑하는 마음을 닦는 이는 탐욕을 끊게 되고, 연민으로 마음을 닦는 이는 성내는 일 을 끊게 되며, 축복의 마음을 닦는 이는 괴로움을 끊게 되고, 버리는 마음을 닦는 이 는 탐욕과 성냄, 차별하는 마음을 끊게 된다. 이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은 온갖 착한 일의 근본이 된다.

문수보살은 부처님 마음을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노래했습니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베푸는 도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변함없는 부처님 마음일세.

“수장자야, 너는 지금 많은 대중을 거느리고 있는데 어떤 법으로 이끌어 들이는 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일로 이끌어 들입니다. 은혜로써 베푸는 것[布施]이요, 부드러운 말로써 대하는 것[愛語]이요, 상대방을 이익 되게 하는 것[利行]이요, 행동을 같이 하는 것[同事]입니다” “착하다 장자여. 너는 법답게 대중을 이끌어 들이고, 문(門)답게 대중을 이끌어 들 이며 인연답게 대중을 이끌어 들이는구나.” 중아함경

“추한 말을 멀리 여의라. 추한 말은 자기도 해롭고 남도 해를 입히므로 피차가 다 해로운 것이다. 그러나 착한 말을 닦아 익히면,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로워서 피차가 다 이로울 것 이다.”

무량수경

별역잡아함경 에 보면 부처님께서도 “모든 중생들은 저마다 이익을 위해 각각 마음속 에 하고 싶은 것을 따른다.”라고 평가하고 있듯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분주합니다. 심지어는 남이야 어찌됐든 나만 이롭고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남의 생명 을 도둑질하고,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고, 남의 순결을 도둑질하고, 남의 지식과 지혜를 도 둑질하고, 남의 진실을 도둑질하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단호하게 남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이롭게 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모 든 존재는 서로 연기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서로 베풀지 않고서는 완전한 이익과 행복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사경 에는 “보살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해주며 삼 보를 끊어지지 않게 하여 법당을 세우고 중생에게 청하지 않아도 벗이 되어준다.”고 하여 보살이 가야 할 길, 즉 남을 이롭게 함으로써 보다 궁극적인 이익을 추구하는[自利利他] 삶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보살의 삶, 불자의 삶은 바로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길을 가 는 것입니다. 혼자만 가는 길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중생들과 더불어 이 괴로움의 사바세 계를 극복하고 평화와 행복의 니르바나로 가는 것입니다.

불본행집경 에는 “세간에 이로운 일이 있을 때 서로 왕래하면서 변함없이 일깨워주 는 것을 친구라 한다. 어려움 당한 것을 보고서 서로 버리고 떠나지 않고 뜻과 행동을 같 이 하는 것을 친구라 한다.”고 하여 친구로서 뜻과 행동을 함께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 다.

“보시란 사랑함을 일으켜 버림을 행함이요, 사랑하는 말씨란 기뻐하는 마음을 내버리지 않 음이며, 이익 되는 행이란 크게 슬퍼하는 마음을 장엄하여 중생을 이롭게 함이요, 이익을 같 이 함이란 높고 낮음을 버리고 온갖 지혜에 회향하기를 발심함이다. 또 보시란 법대로 재물을 구하여 깨끗하게 보시를 행함이요, 사랑하는 말씨란 사랑할 자를 인도하여 착한 법에 편히 머 물게 함이며, 이익 되는 행이란 자기 이익을 말하여 다른 사람을 이익 되게 함이요, 이익을 같이 함이란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지혜의 마음을 내게 함이다.”

대방등대집경 무진의보살품

불교경전 가운데 기세인본경 을 보면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에 갖가지 악담을 하기 때문에 혓바닥에 저절로 도끼가 생긴 다. 스스로 악한 말을 함으로써 그 말은 도끼가 되어 도리어 자신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또, 십선계경 에서는 말합니다.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은 입에 향료를 물고 있더라도 죽은 시체와 같이 악취를 풍긴다. 그 러므로 사람이 악담을 좋아하면 입에서 나오는 말이 가시 같고, 칼날 같고, 오물 같아진다. 향 기로는 아름다운 말 이상의 것이 없고, 악취로는 나쁜 말 이상의 것이 없다.”

묘법염처경 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진실한 말은 감로수 같아서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 그러나 거짓말은 독약과 같아서 자신을 해칠 뿐만 아니라 남도 해쳐서 편할 날이 없게 되느니라.”

또, 정법염처경 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약 중에서 말의 약이 으뜸이며, 친구 중에서도 진실한 말을 하는 친구가 으뜸이다. 만약 사람이 진실한 말을 지닌다면 세상에서 다시는 악한 일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가난에 빠지 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화엄경 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596 청소년 설법자료집 “남을 해치는 말이나 거친 말, 남을 괴롭히는 말이나 원한을 품게 하는 말, 저속하고 나쁜 말, 비열하고 천한 말, 이런 말들을 다 버리고 늘 정다운 말, 부드러운 말, 듣기 좋은 말, 착한 말, 도리에 맞는 말, 때에 맞는 말, 분명한 말, 진실한 말, 항상 아름다운 말을 하도록 노력해 야 한다.” 즉, ‘욕설하지 말라[不惡口]’는 가르침입니다.

다음으로 자경문 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함부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언젠가는 반드시 내게 되돌아와 나를 손상시킬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말을 듣거든 마치 내 부모를 헐뜯는 것처럼 여기라. 오늘 아침에는 비록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했지만 내일에는 반드시 나의 허물을 말할 것이다.”

또, 점수일체지덕경 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헛된 말을 하지 말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성실해야 하며, 진실해야 하며, 도리에 맞아야 하며, 시기에 적합해야 한다.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지 말며 저쪽의 나쁜 말 을 이쪽에 하지 말며 이쪽의 나쁜 말을 저쪽에 하지 전하지 말라.”

마지막으로 증일아함경 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허물이 있다. 남들이 그 사람의 말을 믿지 않고 그 사람 이 설하는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남의 미움을 사게 되고 거짓말을 많이 하게 되며 남들을 싸우게 한다.

또한, 숫타니파타 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깊은 물과 얕은 물은 그 흐름이 다르다. 바닥에 얕은 개울물은 소리 내어 흐르지만, 깊고 넓은 바다의 물은 소리 없이 흐르는 법이다. 모자라는 것은 소리를 내지만 가득찬 것은 소리 를 내는 법이 없이 아주 조용하다. 어리석은 사람은 반쯤 채운 항아리 같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이 가득찬 연못과 같다.

깨닫지 못한 부처님이 중생이고 깨달은 중생이 부처님입니다. 어리석은 부처님은 중생이지만 지혜로운 중생은 부처님입니다. 육조단경

부처님은 최초의 경전 숫타니파타 에서 제자 아지타의 질문에 응답하면서 지나친 욕 심을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습니다. 아지타가 물었습니다. “세상은 무엇으로 덮여 있습니까? 세상은 무엇 때문에 빛나지 않습니까? 세상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커다란 공포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지타여, 세상은 어둠에 덮여 있다. 세상은 탐욕과 게으름 때문에 빛나지 않는다. 욕심은 세상의 때이며, 고뇌는 세상의 커다란 공포이다.”

밀린다왕문경 의 내용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빅토리아계의 ‘밀린다’ 왕이 있었다. 기원전 2세기경, 한 때 인도의 서부 지방은 그리스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그 서인도를 통치하던 왕이 밀린다였다. 밀린다 왕 은 철학적 대화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그 때 당시 이름이 가장 높았던 수행자 ‘나가세나’ 존자를 만나 자신의 철학적 깊이를 뽐내고 싶었다. 그리고 나가세나가 얼마나 수행력이 있는 지 시험해 보려 했다. 614 청소년 설법자료집 “존자여,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가세나 존자는 대답했다. “저는‘나가세나’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나가세나라고 부릅니 다. 그러나 대왕이시여, 이 나가세나라는 것은 사실에 있어서는 명칭이며 속칭이요, 가짜 이 름이요, 통칭이어서 단순한 이름에 그칩니다. 이 이름에서 실체적 자아는 발견할 수 없습니 다. 사람의 이름은 상징에 불과합니다.” 밀린다 왕은 깜짝 놀란 듯이 물었다. “만약 실체적 자아가 없다면 행동의 주체가 없게 될 텐데, 그렇다면 대체‘나’라고 하는 존재는 무엇입니까? 존자여, 무엇을 나가세나라고 합니까? 두 발이 나가세나인가요, 몸에 난 털이 나가세나인가요, 손톱․이․피부․살․뼈․심장․간장․피․땀․두뇌 중의 어느 것이 나가세나인가요?” “아닙니다.” “그러면, 물질의 형태가 나가세나인가요, 감수 작용이 나가세나인가요? 아니면, 지각 작 용이 나가세나인가요, 습관의 축적이 나가세나인가요, 의식이 나가세나인가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존자여, 물질의 형태와 감수 작용과 지각 작용과 습관의 축적과 의식 따 위 모두를 일러 나가세나라 하는가요?” “아닙니다.” “존자여, 그렇다면 물질의 형태와 감수 작용과 지각 작용과 습관의 축적과 의식 외 에 따로 나가세나가 있는가요?” “없습니다.” “존자여, 나는 되풀이하여 당신에게 물어 보아도 나가세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존자여, 나가세나란 단순히 말에서 풍기는 인상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기 내 앞에 있는 이 나가세나는 누구인가요? 존자여, 당신 나가세나는 여기 분명히 있는 데 없다고 진실이 아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가세나는 밀린다 왕에게 물었다. “대왕이시여, 여기에 오실 때 수레를 타고 오셨지요? 수레에 대하여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그러지요.” “대왕이시여, 멍엣채․속바퀴․바퀴․차체(車體)․멍에․바퀴살․굴대빗장이 수레입니 까?” “아닙니다.”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합한 것이 수레입니까?” “아닙니다.” “대왕이시여, 그렇다면 이것 외에 따로 수레라는 것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대왕이시여, 저는 대왕께 여쭈어 보아도 수레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수레는 단 순한 말에서 풍기는 인상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 좀 어렵지요. 무엇이 ‘나’일까요? 누구든 자신의 실체에 대하여 고민해 보았을 것입니 다. 도대체 ‘나’란 무엇인가? 특히 청소년기에는 이러한 ‘자아 정체감(self-identity)’대한 고 민을 많이 합니다. ‘무엇’을 자기라고 정의할 것인가? 현실적으로 분명히 ‘나’는 존재하는데 그것이 곧 본질적인 ‘나’인가? 혹시 허상으로서의 그림자는 아닌가? 분명한 것은 ‘무아’라 는 사실입니다. 고정된 ‘나’는 없다는 것이지요. 이 가르침은 무엇을 하든 집착을 갖지 말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해가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그냥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욕심이 사라지고 마음의 평온이 온다는 것이지요.

금강경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일체 우리가 하는 일이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와 같으며, 아 침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볼 것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숫타니파타 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는 믿음이 으뜸가는 재산이다. 덕행이 두터우면 안락을 가져오고 진실이야말로 맛 중의 맛이며 지혜롭게 사는 것을 최상의 생활이라 할 수 있다

잡아함경 에서 부처님께서는 우리 불자들에게 네 가지 믿음을 권하고 계십니다. “여러 하늘로 가는 네 가지 하늘길이 있어, 깨끗하지 못한 중생은 깨끗하게 하고, 이미 깨 끗해진 중생은 더욱 깨끗하게 한다. 어떤 것이 넷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부처님에 대한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과, 법과 승가에 대한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과, 거룩한 계율 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여러 하늘로 가는 네 가지 하늘 길로서, 깨끗하지 못한 중생은 깨끗하게 하고, 이미 깨끗해진 중생은 더욱 깨끗하게 하느니라.”

숫타니파타 에 나오는 말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고타마시여. 놀라운 일입니다, 고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주듯이 혹은 ‘눈 있는 자는 와서 보리라’ 하여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주듯이, 고타마 당신은 여러 가지 방편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고타마 당신께 귀의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도를 닦는 스님들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저는 고타마 곁에 출가하여 완전한 계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범망경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비구들아, 내가 열반한 뒤에는 마땅히 바라제목차[계본, 계목]를 존중하라. 이 바라제목 차를 가지는 자는 어두운 곳에 등불과 같고, 빈곤한 이가 보배를 얻는 것 같고, 병든 환자가 좋은 의약을 만나 병이 낫는 것 같고, 감옥에 갇힌 사람이 풀려 나오는 것 같고, 객지에 방 황하는 사람이 고향에 돌아온 것 같나니, 마땅히 알라. 이 계율은 곧 너희들의 스승이니라. 만일 내가 이 세상에 더 오래 산다 하더라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범망경 보살계서

또 화엄경 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계는 무상보리의 근본이니 마땅히 구족히 정계(淨戒)를 가지라. 만일 능히 정계를 굳게 가지면 곧 여래께서 찬탄하실 것이다.

부처님은 원각경 에서 말씀하시기를 “탐욕[집착]이 윤회의 근본이다.”라고 하셨 습니다. 또한 “중생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명 즉 어리석음과 집착으 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일체 중생이 끝없는 예로부터 갖가지 은애(恩愛)와 탐욕으로 말미암아 윤회를 하 게 된다. (중략)……. 마땅히 알라. 윤회는 갈애(渴愛)가 근본이 된다는 것을, 온갖 탐욕으로 말미암아 갈애의 성질이 부추겨져 나타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생사가 끊 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탐욕은 갈애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목숨은 탐욕으로 말미암 아 있게 된 것이니. 목숨을 사랑하는 것은 탐욕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탐욕을 사랑하 는 것은 씨[因]요, 목숨을 사랑하는 것은 열매[果]이다. 탐욕의 경계에 대하여 중생 들은 마음에 든다느니 거슬린다느니 하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만일 경계가 강 해하는 마음을 거슬리면 증오와 질투, 드리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행동을 함으로써 다시 지옥이나 아귀에 태어나게 된다. (중략)……. 그러므로 중생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먼저 탐욕과 갈애를 없애야 한다.”

부처님은 가미경(迦靡經) 에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잡된 다섯 가지 빛깔, 그것은 애욕이라 할 것 아니다. 그것을 탐하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곧 사람의 욕심이니라. 온갖 빛깔 언제나 세상에 있으니 수행하는 사람은 욕심을 끊어 라.” 하셨습니다. 욕심을 버리라고 하는 말은 정상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우리 인간의 마음마저 버리라 는 것은 아닙니다

보조 스님은 진심직설(眞心直說) 에서 말씀하시기를 “빈 병은 병이 비어 있을 뿐, 병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때 묻은 거울을 닦을 때, 때는 없어지 지만 거울 그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는 것처럼 욕심을 버린다고 해서 인간이 지닌 그 마음 자체마저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