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와 환경
데이비드 제이 칼루파하나
데이비드 제이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 교수는 세일론 대학교에서 문학사(B.A.)와 문학석사(M.A.) 학위를 받았고, 런던대학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세일론대학교의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미국의 하와이 대학교 철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의 중요한 저서는 <불교철학: 역사적 분석>, <용수: 중도의 철학>, <불교철학사: 연속성과 불연속성> 등이 있다.
이 글은 동국대학교 개교90주년 기념 세계불교학술회의준비위원회 편, <21세기 문명과 불교(Buddhism & Civilization in the 21st Century)> (서울: 한국언론자료간행회, 1997), pp.472-488에 게재된 것이다. 또한 이 글은 계간 <多寶> 통권 제20호 (1996년 겨울호), pp.142-152에도 게재되었다.
환경에 대한 논의는 지난 수년간 전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왔다. 그 이전에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서구 세계의 과학과 기술의 급속한 발전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과학은 그것이 연이은 법칙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을 때, 현상의 질서를 증명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기술은 인류가 갈망하는 것을 생산하기 위해 과학적 발견들을 활용하였다. 매스 커뮤니케이션과 대량수송 수단의 발견에 따른 소비재(消費財)의 대량생산은 확실히 산업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물질적인 복지를 개선시켰다. 물질적 복지를 인간의 안녕과 동의어로 사용하게 될 때, 특히 세계의 풍요한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인류 역사상 현재의 정황과 비교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러나 E. F. 슈마허와 같은 서구의 보다 지각있는 사상가들 몇몇은 그러한 과학적인 그리고 기술적인 발전의 장기적 결과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핵 아이(nuclear child)를 양육했고, 기술은 엄청난 양의 천연자원을 소비하여 지구상의 모든 형태의 생명을 위협하면서 유독성 쓰레기를 환경에 쏟아붓고 있다. 폴 데이비스(Paul Davies) 같은 최근의 몇몇 과학자들은 현대 과학이 유태-그리스도교적 전통의 일부분이며, 그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재정의하는 신의 개념처럼 상당히 그러한 전통의 종교적 교리임을 입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곧 과학자들은 신(神)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에 퍼져 있는 절대적 합리성에 대한 이해를 가져올 우주에 작용하는 모든 법칙을 발견할 것으로 추정된다. <신의 마음, 과학 그리고 의미의 탐색>이라는 제목의 저서를 끝맺으면서 데이비스는 이렇게 말한다.
"의식적인 존재를 통하여 우주는 자아인식을 발생시켰다. 이것은 하찮고 지엽적인 것일 수 없으며, 마음 없고 목적 없는 힘의 중요치 않은 부산물일 수도 없다. 우리는 진실로 여기에 있도록 되어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은 인류를 우월감을 느낄 수준에까지 끌어올린다. 사상적으로 지난 2천년 동안 서구 사고의 과정을 결정해 온 고대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마음의 활동에 의하여 예견할 수 있는 것은 본래 영주(領主)요 지배자이도록 예정되어 있고, 몸으로써 그러한 예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대상이며, 따라서 자연히 노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이비스 사이에는 지구의 천연자원은 물론 동물, 식물,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은 신의 특별한 창조물, 즉 인간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유태-그리스도교적 시각이 있다. 이것이 종국적인 지구 자체의 명망과 관계없이 탐욕은 물론 인간 욕망의 즉각적인 만족을 위해 제공된 과학과 기술의 기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과학이 이러한 길을 밟을 필요는 없으나, 서양이 어떠한 과학적인 기획을 알기 오래 전에 중국과 세계의 몇몇 다른 작은 나라들에서 발전한 과학에 의해 증명된 그 밖의 모든 것을 보존하면서 인류를 이 세상에서 행복하도록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과학적 기획의 관리자 격인 중국에 있어서 연기론(緣起論)에 대한 연구가 있었을 것이다. 중국 역사를 전공한 조셉 니담(Joseph Needham)은 한때 연기론과 중국에서의 법 연구와 관련하여 연기법의 개념은 업(業)의 법칙에 있어서 도덕적 영역에만 전일(專一)하는 불교도들에 의해 적용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불교 위상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아더 베리데일 케이드의 저술에도 보인다. 니담은 코이노스 노모스(koinos nomos), 즉 불교적 법의 개념에 영향을 받은 '보편적 법'의 스토아학파적 개념의 가능성은 생각하였지만, 불교적 법의 개념이 '비도덕적 비인간적 현상에는 결코 적용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사고(思考)를 불식시켰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빨리어로 씌어진 붓다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기원 후 2-3세기 동안 한자로 번역된 것에 바탕을 둔 불교사상에 관한 나 자신의 연구는 물리학적, 생물학적, 심리학적, 행동학적(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도덕적인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인과(因果) 원리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보여준다. 니담과 다른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중국에도 잘 발달된 과학적 기술적 전통이 있지만 서구의 과학과 기술이 남겨 놓은 것과 같은 불행한 유산들을 남기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불행한 결과가 없었던 이유는 인간의 삶과 자연에 대한 중국적 불교적 시각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들은 자연의 모든 것이 인간의 이익과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인간은 모든 다른 살아 있는 존재와 자연적 현상처럼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상호 연기한다는 중국적, 불교적 개념은 자연적 과정 자체를 파괴로 이끌 수도 있었을 어떠한 기획도 제거했다. 본 논문에서 우리는 불교철학 사상과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을 존중하고 보존하는 데 기여했는가를 관심있게 다룰 것이다. 그것은 고전 유가철학(儒家哲學)과 매우 유사할 것이다. 그 접근에 있어 훨씬 더 심리적이다.
붓다가 진실되고 현실적인 것을 찾아 가정생활을 떠났다는 일반적 견해와는 달리, 우리는 그가 선(kusala)과 평온함(santa)을 추구하여 떠났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말씀 가운데 하나인, 즉 '신성한 탐구에 대한 가르침(Ariyapariyesana-sutta)'6)에 기록된 절제에 관한 붓다 자신의 설에 근거하는데, 여기에서 그는 절제, 노력, 그리고 깨달음과 해탈의 달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추구의 궁극적 목표에 있어서의 이러한 차이는 실질적으로 초기불교(初期佛敎)에서의 세계관에 대한 광대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힌두교·도교와 같은 몇몇 아시아적 전통뿐만 아니라 서구 세계에서 제시된 세계관과도 완전히 다르다. 붓다는 위에서 언급된 전통에서처럼 짝지어진 정반대, 즉 부정과 긍정, 빛과 어둠, 남성과 여성, 양과 음, 또는 삶과 죽음과 같은 그러한 것들을 수반하는 이분법적 진리의 발견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에는 그러한 진리의 기반 위에서 철학을 형성해 가지는 않았다. 그 대신 오랜 기간의 시행착오 끝에 그는 선의 가장 좋은 형태, 즉 평온을 발견했던 것이다.
먼저, 깊은 사색의 결과로 그는 그 당시의 몇몇 사람들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실재한다고 주장했던 항상하고 영원한 아(我, atta)가 그 자신 속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한 발견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속에 번뇌를 만들어냈을지도 모르지만, 붓다는 그러한 깨달음의 결과로 열반에 도달했다. 이것은 그 자신 속에 영원한 아가 없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모든 경험된 현상의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인식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염오(染汚)의 경향(asavakkhaya)을 중지시키는 것을 통하여 지혜(panna)를 계발시킨 결과이다. 가르침 가운데서 종종 해탈과 열반에 대한 다섯 가지 장애를 말씀하는데, 그것들은 이러하다.
⑴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욕구(kammacchanda)
⑵ 나쁜 의지(vyapada)
⑶ 게으름과 무감각(thina-middha)
⑷ 동요와 근심(uddhacca-kukkucca)
⑸ 의심(vicikiccha)9)
붓다가 될 이가 가정생활을 포기하였을 때, 그는 왕위 계승과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 한 채 떠나고 있었음을 주목할 수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이미 처음의 두 가지 장애를 극복하였던 것이다. 거의 6년 동안 가장 극도의 고행을 수행한 태도로 보아 게으름과 무감각도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의심은 물론 동요와 근심이 엄습하여 그는 마음의 평온을 가지지 못했다. 보리수 아래에서의 그의 마지막 깨침은 이렇게 세계의 본질에 대한 의심을 극복한 결과였고, 그것은 또한 동요와 근심을 제거했다. 그가 어떻게 의심을 극복하였는가 하는 것은 그가 깨달은 뒤에 설하였다고 하는 게송에 아름답게 요약되어 있다.
현상이 열렬하고 사색하는 브라흐만 앞에 나타날 때
현상을 그 원인으로 인식하듯이 그의 의심은 사라진다.
현상이 열렬하고 사색하는 브라흐만 앞에 나타날 때
조건의 소멸을 인식하듯이 그의 의심은 사라진다.
현상이 열렬하고 사색하는 브라흐만 앞에 나타날 때
하늘을 비추는 태양처럼 마라(죽음 Mara)의 힘을 흩뜨리듯이
그의 의심은 사라진다.
장애의 마지막을 극복함으로써 스스로의 힘으로 열반에 도달하여 해탈의 기쁨을 즐기면서 붓다는 그의 깨달음과 해탈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면서 꼬박 일주일 동안 깨달음의 나무 밑에서 깨달음의 자리를 지키면서 계속 있었다. 이것은 마라의 힘을 분쇄시킨 후에 만나는 가장 큰 도전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환경은 물론 살아 있는 존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충돌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인간의 삶, 물질적·사회적 환경, 도덕적 삶과 그 결말의 본질, 즉 해탈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깨달은 이는 이러한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우선 그는 그의 철학의 초석인 무상(anicca)과 관련이 있는 생각들에 대해 그가 이해한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변화와 인과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술어가 실재론자와 영원론자 또는 본질론자와 허무론자와 관련된 것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12개의 새로 만들어진 용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빠띠쨔삼뮤빠나(paticcasamuppanna)와 빠띠쨔삼뮤빠다(paticcasamuppada), 그리고 이다빠쨔야따(idappaccayata)이다. 빠띠쨔삼뮤빠나는 두 개의 독립된 단어인 빠띠쨔(paticca)와 삼뮤빠나(samuppana)의 합성어이다. 전자는 '∼로 향하여 움직였음'이란 의미의 동명사이며, 후자는 '일어난 또는 함께 일어난'을 의미하는 과거분사이다. 일반적으로 이 어구는 '의존하여 일어난'으로 번역되며, '일어난, <어떤 조건 또는 일련의 조건들을> 향하여 움직인' 사건이나 대상 또는 일의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조건이나 일련의 조건들에 관계되는 것으로 보이는 경험된 결과를 말한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분리된 실재가 아니라 인식된 관계성 속에서 함께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순간적인 것이 아닌 계속되는 현재에서의 인식이다. 과거분사의 사용은 바로 직전의 과거를 현재의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경험을 명백한 과거와 알려지지 않은 미래로까지 뻗쳐서 붓다는 보편적 원리를 공식화하였고, 그것을 전자와는 다른 순수한 명사적 형태인 '의존하여 일어남'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경험에 기초한 이러한 원리는 절대적 법칙이나 실재가 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붓다는 '이것'이라는 이다(ida)와 '조건이 됨'이라는 빠쨔야따(paccayata)에서 유래한 또 하나의 새로운 용어인 이다빠쨔야따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상호성은 물론 조건성을 표현한다. 그리고 나서 붓다는 사회적 · 정치적 · 도덕적 현상은 물론 그것이 지진과 같은 물리적 사건이거나 인간의 육체와 같은 생물학적 현상이거나 탐욕·증오 등과 같은 심리적 사건이거나 간에 인간 경험의 모든 면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러한 개념들을 계속해서 적용하였다. 현재 우리의 관심은 환경과 관련한 붓다의 이러한 원리의 적용에 있다.
환경으로서의 물질적 육체
도덕론 뿐만 아니라 인식론 · 존재론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며 또한 세계(loka)의 가장 작은 단위를 나타내는, 붓다에게서 인용한 것을 가지고 환경에 대한 그의 개념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비구여, 인식(sasannamhi)이나 정신(samanake)과 관련된 이 6피트의 긴 몸뚱이 속에서, 나는 세계와 그것의 발생, 그것의 소멸, 그것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선언한다.
두 개의 독립된 존재 또는 실재를 육체와 정신이라고 말할 것 없이, 붓다는 여기에서 심신적 개체를 세계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심신적 개체가 세계라면 그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환경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이제 물질적인 육체(kalebara)는 그것이 인식(sanna)이나 정신(mano)과 연관되어 있지 않는 한, 완전한 사람은 아니다. 이 물질적인 육체는 아버지와 어머니(matapettikasambhava)로부터 태어나 쌀과 죽(odan-akumma sapaccaya)에 의존하는 네 가지 물질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 육체와 함께 여섯 가지 감각기관들이 일어나며, 그것들 가운데 마지막이 정신이다. 하지만 이러한 심신적 개체와 연관된 의식(sanna)이 완전히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 다음에 새로 잉태되는 사람은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이 될 것이다. 과거의 삶과 윤회의 가능성을 인정한 붓다에게 있어 기억의 형태로 이전의 삶을 인식하는 것은 완전한 인간을 말할 때에 인지되어질 필요가 있는 중요한 조건이다. 따라서 가장 내부의 사람은 다양한 조건들에 의존하면서 지속되는 의식(vinnanasota)의 흐름이다. 기질(sankhara)과 함께 그것은 생성(bhavasota)의 과정이 된다. 그것은 이 의식의 흐름이 계속되는 유동, 또는 해탈을 달성한 사람이 죽는 순간에 사로잡히는 생성이다. 그러한 사람은 사는 동안에 기질을 완화시킨다. 가장 단순하거나 해(害)가 없는 형태, 즉 관심에서 가장 크고 해로운 형태 즉 탐욕으로 자라나게 하는 것 없이 기질을 완화시키는 것(samkhara upasama)은 해탈(nibbana)과 동의어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사람의 도덕적 비도덕적 성격은 그 사람 기질의 본성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의 기능과 더불어 인식이 개성의 중요한 요소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붓다는 물질적 육체가 없이 생존하는 이러한 정신적 개체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육체에서 분리된 존재의 개념은 그의 교설의 일부가 아니다. 따라서 육체는 인간을 위한 직접적인 환경이 된다.
붓다에 의하면, 직접적인 환경으로서의 물질적인 육체는 좋은 건강을 유지할 것을 필요로 한다. 다른 문맥에서처럼 그는 중도(中道)의 채택을 권하였다.
붓다는 그가 깨닫기 전에 행한 과도한 단식을 포함하는 극도의 고행 형식에 의해 그 자신의 육신에 가해진 해로움을 알아차렸다. 그 해로움은 노년에 그가 지속적으로 요통 등을 호소할 때에 더욱 두르러지게 나타났다. 따라서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먹는 것과 그릇된 종류의 음식을 먹는 것에 빠지는 것이다. 붓다는 몇몇 음식은 몸을 망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인류가 오직 세 가지 질병을 겪을 때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심리적인 병인 탐욕(iccha)과 물질적인 것인 배고픔(anasana) 그리고 자연적인 것인 노쇠함(jara)이다. 그러나 고기를 먹은 결과 인간들은 98가지 형태의 질병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이러한 두 가지 극단적 형태를 피할 것과 먹는 것에 있어서 절제의 길을 따를 것을 권하였다. 말씀 중에 종종 반복되는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고귀한 제자는 먹는 데 있어 절제를 아는 자이다. …… 재미나 즐거움 또는 장식이나 미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 몸의 지탱과 유지를 위해, 몸에 해가 없게 하기 위해, 도덕적 생활(brahmacariya)을 진전시키기 위해 충분한 만큼만, 발생에 따라 숙고한 뒤에 음식을 먹는다.
"나는 낡은 감정을 깨뜨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감정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면 나에 대한 비난이 없을 것이며 안온하게 사는 것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여기에서 붓다가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도덕적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육체적 행복은 정신 건강의 기반이다. 깨달음의 요소(bohhhanga) 가운데 하나는 평온, 즉 고요의 계발이며, 이것은 생각의 평온(citta-passaddhi)뿐만 아니라 육신의 평온(kaya-passaddhi)도 포함하고 있다.
물질적 환경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으로 옮겨가서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들에 대한 물질적 환경으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첫째는 깨닫기 전의 환경에 대한 붓다의 애정이고, 둘째는 아름다움 환경에 대한 그의 인식이며, 셋째는 그가 그것에 대해 표현한 존경과 감사이다.
첫째로, 심한 고행을 닦는 동안에 그는 한 방울의 물(udabindu)에 대해서조차 애정(daya)을 발전시켰다고 말해지며, 심지어 미물(微物)도 해치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다.
둘째로, 붓다가 그의 포기, 분투, 그리고 그의 깨달음과 해탈을 묘사하고 있는 '신성한 탐구의 말씀'에서는 그가 정진을 위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는 것과 쾌적한 땅, 고요한 작은 숲(pasadikam vanasan am), 맑은 물이 흐르는 강과 여울 그리고 그가 보시를 얻을 수 있는 가까운 마을을 찾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세 번째는 보다 더 중요한 데,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붓다가 깨달음 직후에 그가 앉았던 자리와 그에게 그늘을 제공했던 나무 앞에 서서 꼬박 일주일 동안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것들을 응시하고 있었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환경을 일차적으로 인간의 소비를 위한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서구의 전통과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그렇게 시작하여 붓다와 그의 제자들이 자연 환경을 존중하고 양육하며 보존하는 것을 계속해서 장려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붓다는 불, 바람, 비, 그리고 심지어는 초목들과 같은 자연 현상에 깃든 신들의 베다적 개념을 인식하고 있었다. 마치 사람들에게 자연 식물을 존중하도록 장려하듯이 붓다는 다른 물리적 현상이 아닌 유원(遊園, arama), 작은 숲(vana), 나무들(rukkha), 약초(osadhi), 풀(tina), 커다란 나무들(vanaspati)에서만 살고 있는 신들(devata)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원이나 작은 숲의 나무심기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공덕을 쌓아 천상에 도달한다고 말해진다. 게다가 공기를 맑게 하고 한낮의 태양열로 고생하는 여행자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는 나무를 파괴하는 것은 친구(mittadubhi)를 배반한 자로 간주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붓다는 그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자연환경은 인간이 깨달음과 해탈로 이끄는 명상을 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임을 알아차렸다. 관련 문장에서는 이렇게 말해지고 있다.
사람은 다섯 가지 장애, 즉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욕망, 나쁜 의지, 게으름과 나태, 동요와 근심, 의심을 극복하기 위하여 숲 속, 나무 밑, 산 중턱, 황야, 언덕의 동굴, 묘지, 숲 속의 자주 드나드는 곳, 훤히 트인 곳이나 짚더미 위 등의 외딴 곳에 잘 간다.
말씀의 끝에 붓다는 종종 그의 제자들에게 사색을 하기 위해서 나무 밑이나 빈터에 자주 가라고 충고하곤 했다.
어떻게 이러한 자연환경이 사색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임이 판명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첫째, 그들은 욕망이나 감각적 즐거움을 일으키는 점에서 처음 두 가지 장애의 원인인, 일반적으로 매력적이거나 또는 싫은 대상들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둘째, 그러한 환경으로 옮겨간 사람은 사색하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산만한 것들이 없으므로 세 번째 장애를 통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셋째, 좀더 중요하게 그들은 사람이 마지막 두 가지 장애인 동요와 근심과 의심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실상의 깨달음, 즉 무상(無常)과 연기(緣起)를 깨닫는데 자연적인 경험의 근거를 제공한다. 딸라뿌따(Talaputa)는 숲을 수행자가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보았다.
금 깃털 금 볏의 하늘을 지나가는 자
깊고 다채로운 날개들을 가지고
투덜대는 천둥 구름에게 인사하네.
감미롭고 다양한 울음으로
그것은 그대가 거기서 명상하고 있는 동안
그들이 그대에게 줄 기쁨이니
이러한 환경이 깨침과 해탈의 달성을 용이하게 하면서도, 그들은 또한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이 신선하고 자연 그대로이며 오염물질이 없기 때문에 물질적인 안녕에도 기여한다. 이러한 이유로 붓다와 그의 제자들은 특히 식사 후에 낮잠(divavihara)을 자기 위해 종종 숲 속이나 나무 밑으로 물러가곤 하였다.
기리마난다(Girimananda)라는 한 제자가 아팠을 때에 무상(無常, anicca) · 무아(無我, anatta) · 불길함(asubha) · 나쁜 결과(adinava) · 포기(pahana) · 무열정(viraga) · 소멸(消滅, nirodha) · 무기쁨(anabhirati) · 모든 기질들의 무상(sabbasankharesu anabhirati)에 대한 인식과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anapanasati)의 인식을 계발시킬 수 있도록 작은 숲이나 나무 밑으로 데려갈 것을 권하였다.
아나따핀디카(Anatapindika)의 아라마(arama) · 고시타라마(Ghositarama) · 니그로다라마(Nigrodharama) 또는 뿌바라마(Pubbarama)의 경우처럼 일반적으로 '정사(精舍)'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아라마라는 용어는 글자 뜻 그대로 '기쁨의 장소', 즉 유원(遊園)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거주하는 곳이 자연식물, 특히 과일나무들로 둘러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비구들은 숲을 붓다(buddhavannita)에 의해 칭송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많은 비구들은 그들이 생생하게 묘사한 숲의 매력을 즐겼다. 상낏짜(Sankicca)는 숲에 대한 찬미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울퉁불퉁한 바위들
그곳은 맑은 물이 좋아하는, 바위의 세계
검은 얼굴의 원숭이와 겁 많은 사슴이 드나들고
바위들이 서있는 물이끼에 덮인 곳
그것들은 내 마음 기쁨의 고지
나는 숲과 산의 동굴에 머물렀노라.
바위 많은 골짜기들과 자주 드나드는 외딴 곳에
그리고 그곳은 야생 생물들이 배회하는 곳.
범부에게 숲은 적의적인 환경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감각적 즐거움의 누그러지지 않은 추구로부터 일어나는 위험들을 극복한 사람에게는 그러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은 야생동물(va amiga), 심지어는 발정한 코끼리(mattakunjara)까지도 빈번히 드나드는 숲 속의 서식지를 즐길 수 있었다. 적의적인 환경으로 보이는 곳에서 살아남는 그들 능력의 이유는 동물들이 발산하는 애정과 비손상의 느낌이다. 상키챠는 다시 이렇게 입증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존재들이 썩어 없어지거나, 그것들이 파괴된다거나, 그것들이 고통과 번민을 겪거나 하는 그런 바람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 불교학이 열반을 달성했다는 것은 감동이나 감정의 모든 흔적들을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그러한 열반을 이룬 비구들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미학적 즐거움의 감정을 표현하였다.
아마빗 하늘색 꽃으로 뒤덮인
가을 하늘처럼 푸르고 얼룩덜룩한
모든 그들의 다양한 날개 있는 민중들의
군중들과 함께 재빠르게
그런 곳은 내 영혼이 기뻐하는 구릉(丘陵)이라네.
생물학적 환경
다음으로 중요한 환경은 동물의 생명(tiracchanayoni)이다. 인간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간의 관계는 서양의 전통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된다. 고전적 서구 전통은 동물의 생명을 인간들의 이익을 위해 창조된 어떤 것으로 간주하였고, 현대의 과학적 전통은 인간을 동물 종(種)의 진화에서 단지 하나의 더 높은 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붓다는 동물을 전체 집단의 종을 구성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므로 그들을 동물의 태(胎)라고 하는 한편, 인간은 한 종을 구성하므로 세계라고 하였다. 붓다의 견해는 숫따니빠다에서 인용한 다음의 문장에서 명확히 표현되어 있다.
풀이나 나무들을 생각해 보라.
비록 그들이 어떠한 차이도 토로하지 않지만
그들의 뚜렷한 특징은 그들 종(種)에서 일어난다.
다양한 것은 진실로 그들 종이다.
그 다음에는 딱정벌레나 나방 등을 생각해 보고
개미나 흰개미들로 내려가라.
그들의 뚜렷한 특징은 그들 종에서 일어난다.
다양한 것은 진실로 그들 종이다.
크고 작은 네 발 달린 짐승들도 생각해 보라.
그들의 뚜렷한 특징은 그들 종에서 일어난다.
다양한 것은 진실로 그들 종이다.
긴 등을 가진, 배로 기어다니는 뱀들도 생각해 보라.
그들의 뚜렷한 특징은 그들 종에서 일어난다.
다양한 것은 그들 종이다.
그 다음에는 물을 그들 활동의 영역으로 가지면서 물 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들도 생각해 보라.
그들의 뚜렷한 특징은 그들 종에서 일어난다.
다양한 것은 그들 종이다.
그 다음에는 날개로 날아다니는 하늘의 여행자인 새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
그들의 뚜렷한 특징은 그들 종에서 일어난다.
다양한 것은 그들 종이다.
이러한 종(種)들에서는 그들 종에서 일어나는 뚜렷한 특징이 많지만, 인간들 사이에서는 그들 종에서 일어나는 뚜렷한 특징들이 마찬가지로 많지는 않다.
인간을 별개의 종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붓다는 또한 신(神)들조차도 이러한 능력을 부인하겠지만 깨달음과 해탈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들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도덕적 완성은 동물의 손이 미치는 곳 너머에 있다. 그러나 인간이 이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러므로 무조건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말씀 가운데의 수수께끼 같은 말은 그것이 욕구의 면에서 더욱 본능적이고 자동화된 동물의 행동뿐 아니라 인간의 행동임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행위(carana)라고 불리는 그림(citta)을 본 적이 있는가?
예, 그렇습니다.
행위라고 불리는 그 그림은 화가가 생각해낸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림으로 그려진 것은 그 이상의 그림(cittatara)이라 불린다.
그리고 붓다는 동물의 종보다 더 잘 이러한 행위의 방법을 따르는 다른 종은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함축된 것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기본적인 욕구를 성취하기 위하여 어떤 행위의 과정이 취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가에 의해 창조되는 그림과 같다. 그러나 화가에 의한 차후의 그림이 앞의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과 똑같이, 뒤따르는 행동은 일반적으로 선행한 것의 모사(模寫)가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예술가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기질적 경향을 발전시켰다. 동물들은 반복되는 환경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을 강요받지 않는 한, 그들의 행동 방식을 의식적으로 또는 일부러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붓다는 인간은 할 수 있으며 그것이 그들이 인간인 이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말씀 가운데서 제자들에게 한 그의 조언은 그들 자신의 생각들을 직접 주시하고 그것들이 열정과 증오와 혼란에 의해 염오되어 있는지 보는 것이다. 만약 염오되어 있다면, 그러한 염오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기본적 욕구와 행복 · 고통의 감정 면에서 인간과 동물은 동등하다(Patipuggala)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비록 실용적인 붓다께서 그들을 밑바닥의 동물 다음에 삿된 행동과 선한 행동과 정상의 깨친 행동들을 가진 인간이 뒤따르는 계급체계에 놓을지라도,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 음식을 줌으로써 많은 이익이 생긴다. 이러한 계급체계가 삿된 행동의 사람이 항상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가정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경우에는 그럴 가능성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지만 삿된 인간일지라도 교정될 수 있고 깨침과 해탈을 달성하도록 만들어질 수 있다는 주장에 근거한다는 것을 주목할 수도 있다. 비록 동물로 태어나는 것이 지옥보다는 더 좋은 존재 상태라고 간주될지라도, 붓다는 동물이 겪는 고통의 양은 필설로조차 다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 때문에 붓다는 모든 살아 있는 생물들에 대하여 누그러지지 않는 우정과 자비와 동정을 요구한다. 그것이 우는 소리가 싫어서 까마귀를 죽인 비구에게 붓다는 속죄(pacittiya, 단타)의 벌을 내리고 계율로 정하였다. 누구든지 고의로 살아 있는 생물의 목숨을 빼앗는 자는 단타를 받을 것이다. 붓다는 한때 비구들에게 짚 대신에 진흙과 소똥으로 어떤 비구가 지은 임시 용도의 오두막을 허물어뜨리라고 지시한 적이 있는데, 그런 비구는 그 과정에서 죽을지도 모를 생물들에 대해 어떠한 자비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호의적인 생각을 가지고서라도 모든 살아 있는 생물들에 대하여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많은 공덕을 쌓는 것으로 된다. 사람은 단 한 번이라도 동물들에 대하여 증오하는 생각을 마음에 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하여 우호적임으로써 착하다거나 훌륭하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붓다는 세계 전체에 대하여 동정적이었던 사람으로 칭송되고 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물들과 존재에 대해 동정심을 베푸는 적극적인 행동은 종종 부정적으로 형식화되어 생명 파괴를 삼갈 것을 요구하는 가르침에 첨가되었다. 마지막으로 브라흐만의 진리의 개념에 대한 토의에 몰두하는 일단의 유랑자(流浪者)들에게 그 자신의 진리에 대한 해석을 설명하였다. 그는 만약 브라흐만이 모든 살아 있는 생물들은 해를 입어서는 안되며 모든 감각적 기쁨이나 존재는 무상하고 무아이며 변하기 쉬운 것이어서 개인과 관계된 모든 것의 소유자인 항상하고 영원한 아(我)는 없다고 말한다면, 브라흐만은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생명을 빼앗는 것을 삼가는 가르침을 강조하였지만, 비독단적이었던 붓다는 영취산에서 돌아오는 동안 사자의 시체가 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살을 요리하여 먹은 몇몇 비구들을 비난하거나 벌주기를 거절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비구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사실 그는 다른 동물에 의해 남겨진 고기를 먹는 자들은 계율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동물에 대한 또 다른 실용적인 태도는 비구들에게 수많은 인류의 이익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을 위한 동정을 통하여 여행을 떠나라고 한 붓다의 훈계에 구현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모든 인류를 구제하는 책임이나 동물들이 열반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책임을 비구들에게 할당함으로써 그들에게 '불가능한 임무'를 제안한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사회적 환경
마지막으로 우리는 가장 중요한 환경, 즉 인간사회에 이르렀다. 인류가 물질적이고 생물학적인 환경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아직도 그가 속하는 종(種)에 더 의존하고 있다. 직접적인 사회 환경은 가족 단위이다. 유신론적 사회에서는 부모는 단지 조상이거나 또는 도와 주는 자이고 신은 창조자라고 믿었던 반면에, 붓다는 부모를 인간생활의 인과관계에서 최고로 중요하다고 여겼다. 붓다가 새로 잉태된 인간에게 자리잡은 과거의 삶과 연관된 의식의 흐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 출생의 조건을 구성하는 것의 단지 3분의 1일 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합, 그리고 임신하기에 적당한 계절에 있는 어머니가 나머지 3분의 2를 구성한다. 그와 같이, 붓다가 부모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존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부모의 책임을 감소시킨다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상호 관계는 다음의 문장에서 명백히 표현되고 있다.
동양의 가르침으로서 아들이 그 어버이를 섬기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들에 의해 부양되었으므로 나는 그들을 부양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의무를 이행할 것이다. 나는 가족 전통을 유지할 것이다. 나는 나의 유산을 받을 만하다. 나의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나는 그들을 대신하여 선물을 분배할 것이다."
그리고 동양의 가르침으로서 아들에 의해 그렇게 섬겨진 부모는 보답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 그들은 아들이 나쁜 짓을 못하도록 할 것이며, 아들이 선한 일을 하도록 도울 것이며, 그에게 어떤 기술을 가르칠 것이며, 어울리는 아내를 찾아줄 것이며, 적절한 시기에 그의 유산을 물려줄 것이다. 평화롭게 그리고 두려움이 없게 하면서, 이런 식으로 동양의 가르침은 망라되어 있다.
전생으로부터 몇 가지 성격적 특징을 넘겨받을 수도 있으나 부모는 어떤 사람의 성장과 발달을 위한 적당한 환경을 제공한다. 몸을 위한 음식물 외에 아이가 부모로부터 받는 최초의 유산은 언어이다. 아이가 그 다음에 부모가 속하는 공동사회의 관습과 믿음 체계를 배우는 것은 이러한 언어를 통해서이다. 사회적 도덕적 풍습은 그러므로 처음에는 부모에 의해, 그리고 나서는 연장자나 선생님들에 의해 한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붓다가 그 사회의 연장자들을 존경할 것을 권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인간의 심리를 분석한 뒤에 붓다는 자기 본위가 인간 성격의 중요한 부분임을 발견하였다. 불확실하고 무상한 세계의 상황 속에 놓여 있으므로 어떠한 살아 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생존을 위해 버둥거려야 한다. 인간의 종(種)과 다른 종들을 구별하는 것은 바로 자기 본위를 따르는 인간의 방식이다. 하나의 사회는 자기 본위를 가진 개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만약 각 개인이 다른 사람들의 것을 무시하면서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숲의 율(律)보다 더 나쁜 상황을 가지게 될 것이니, 왜냐하면 심지어 몇몇 육식 동물들조차도 그들 자신의 그룹 내에서 제지 당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사회는, 만약 그것이 동물들의 사회와 구별되어질 수 있다면, 자기 본위가 상호 자기 본위의 관계 속에서 그 역할을 해야 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개개인의 인간은 상호 자기 본위를 위해서 희생할 것을 요구 받는다. 이것이 붓다가 인간들의 매력을 끄는 가정의 계(戒)60)라고 여긴 것이다.
붓다에 의하면, 자기 본위의 상호성은 오직 무명(akusala)의 세 가지 근원인 탐(貪)·진(瞋)·치(痴)를 없애는 것에 의해 그 궁극적인 가치에서 실현될 수 있다. 탐욕을 없애는 것이 자살에 상당하는 자기 본위의 절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질의 완화는 붓다가 자기 자신의 안녕과 다른 사람들의 안녕의 궁극적 도덕 원칙이 참된 안녕으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들어가는 건전한 사회 환경을 이룩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깨달은 것이다. 적합한 환경에 대한 논의를 끝마칠 때, 우리는 붓다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 과거에 칭찬할 만한 행동을 할 기회를 가졌던 것과 자신을 적절히 확립할 수 있는 것은 진실로 환경을 살아가기에 적당하도록 만드는 조건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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