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시킴 히말라야 / 임현담

수선님 2020. 4. 19. 11:42

시킴 히말라야 / 임현담

 

윤회

 

부처는 평생 윤회에 대하여 설법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다만 연기와 업을 들어 단초를 제공하기는 했다. 현재의 삶은 지난 생의 결과라 생각하면 그것이 윤회임을 믿는 것이다.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는 힌두교는 범아일체를 교의로 하여 아트만 즉 자아를 인정하지만 불교는 자아를 부정한다. 현재의 삶이 윤회 자체라고 생각하면 굳이 윤회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윤회를 인정해도 해가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일 따름이고, 죽음은 마침표가 아닌 쉼표이다. 누구나 하나의 순례지가 있을 것이다. 오고가는 사이에 삶을 지배하는 죽음에 대하여 명상해보라. 답이 나올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의 답이. 단 먼저 찾아가라, 갑작스러운 죽음의 방문을 받기 전에.

늦지 않다. 60살까지는 전생을 살았다고 간주하고 나머지 생은 후생이라 생각해보라.

 

 

의식주행에 매달리는 일상은 목적에 시달리는 노예와 무엇이 다른가? 따라서 자연이 가지고 있는 무목적성을 잃게 된다. 산을 걷다보면 모든 목적이 무목적 안으로 수렴되는 순간을 만난다. 히말라야 같은 큰 산 앞에서 부처님이 푸른 허공에서 홀로 서서 시공을 초월하여 여는 영산법회와 같은 감회를 느낀다. 굳이 도를 깨치려고 노력하지 마라. 네가 도가 되면 그만이다. 굳이 부자가 되려 하지 마라. 네가 보석이 되면 그만이다.

 

 

힌두교와 불교가 다른 점은 힌두교는 아니다 아니다이며/ 불교는 있다고 하면 없다고 답하고 없다면 있다고 답한다는 점이다.

 

 

무고한 육신을 죽이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자살은 괴로움이 잔뜩 쌓여있는 마음에 대해서 해야지, 지각능력이 없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육체에 대해서 하면 안 된다. 자살 충동을 느끼게 하는 고뇌를 만들어내는 진짜 주범은 마음이다. 그러나 판단 착오로 인해 무고한, 지각능력 없는 육체가 그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다. 우리네 삶에는 늘 잔고가 있다. 아무리 정신이 나가고 모자라도 육신이라는 잔고가 있고, 육신이 병들어도 정신이라는 잔고가 남아 있으니 살아 있는 동안 여하튼 잔고가 있게 마련이라 이것을 밑천삼아 갈 수 있는 곳까지 기어서라도 가야 한다.

무는 유를 초월하는가, 유가 무를 초월하는가. 무심은 유심을 포함하며 유심의 초월이다.

 

 

힌두교는 유일신인가, 다신교인가, 일원론인가, 이원론인가? 힌두교는 답한다. 그 모두다.

 

 

힌두교의 신의 수는 33천 만 개다. 이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이므로 큰 의미를 들 것은 아니다. 그러니 범신론이라 한다. 경우에 따라 돌멩이 하나에도 신성을 부여하니 당연하다.

 

 

불교는 힌두교를 매끈하게 갈아 군더더기를 빼고 세상에 나온 철학이다. 힌두교는 태생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정해지는 지극히 불평등한 종교다. 4개의 계급도 모자라 감히 거기에도 끼지 못해 불가촉천민이라는 최하위 계급가지도 만든 종교이므로 현대 종교로서는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종교다. 불교에 붓다이즘이라는 단어가 붙여진 것은 부처의 철학적인 가르침을 종교로 착각한 무지몽매한 학자들에 의해 붙여진 300년 전의 일이다. 불교는 신성을 부정하고 있으며 부처는 자신을 절대로, 절대로 신격화 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신신당부하였다. 부처는 태생적인 계급사회를 부정하고 평등하게 모든 계층의 사람을 받아들여 모두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인간이다. 부처는 스스로 깨어난 자, 혹은 항상 깨어 있는 자의 의미고 이름은 고타마, 부족의 명칭이 석가족이었으므로 석가모니 부처라 한다.

 

 

내가 불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5살 때 원불교에서 京星이라는 불명을 받았으니 50년 전의 일이다. 내가 깨달은 사람도 아니고 신심이 두터운 사람도 아니나 49년을 헛되이 보내고 난 지금에 이르러 느낀 것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친구들아! 내 이야기에 조금의 오류가 있거나 틀린 점이 있다면 나에게 도움의 말을 해주기 바란다. 목적과 수단 방편.

 

 

7.阮籍集에는 사람이 아름다움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해 쓰여 있다. “바람이 나부끼듯 황홀하니 곧 깊고 그윽하여 어둠을 꿰뚫는다. 얼음처럼 깨끗하고 옥처럼 맑으니 곧 맑고 깨끗하여 생각이 떠오르며 담백하게 아무런 욕심도 지니지 않으니 뜻이 커지고 정감이 어울릴 수 있게 된다.”이른 아침 설산에 올라갈 때, 이 모든 것이 해당된다. 이 이야기는 어떤 심리상태 혹은 형이상학이 아니다. 無事無慾을 걸음걸음에 밟는다.

 

 

11.히말라야는 밖으로 매달린 이 자리의 고단한 인연을 떨쳐내고 저편 세상에서의 맑은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 고맙다. 이런 히말라야는 나를 조금씩 변형시켜 삶의 무게 중심을 히말라야로 옮겨 놓았다. 결국은 히말라야는 心地에 더 이상 끌려다니는(不隨萎萎地) 일은 그만 하고 가는 곳마다, 서는 곳마다 주인장(隨處作主 立處皆眞)’이 되는 길을 찾게 해주리라 믿는다.

 

 

17.東山의 오조법연이 물었다. “석가와 미륵이 모두 그의 노복이다. 어디 말해보라. 그는 대체 누구냐.”

 

 

19.禪家에는 一機一境이라는 얘기를 한다. 여기에 一言一句가 더해진다.

 

 

35.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과거의 3),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모니불(현재의 4), 다음에 미륵불이 온다고 함.

 

 

44.25, 마호메트평전을 쓴 게오르규는

어떤 종교는 사랑 위에, 혹은 희망 위에 구축된다고 했다.

 

 

45.사실 범부조차 큰 산을 바라보게 되면 순식간에 마음이 비워지니, 안과 밖이 합치되어 그 길이 하나가 된다. 지식 따위는 일순간에 날아가며 비어버리는 경험을 만난다. 종교의 첫걸음은 이런 지식들이 버려지고 비워지는 자리에서 시작한다.

 

 

60.인생은 젊은 시절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차차 노병을 겪으며 변화되어 나가며 죽음에 접근한다. 깨달음도 凡에서 聖으로 나가는 길, 세속의 먼지를 털고 피안으로 간다.

 

 

61.휴정의 선가귀감에 의하면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선이요, 말 있음으로써 말 없음에 이르는 것은 교다.’앉은 채로 천하의 혀를 끊는다.

 

 

62.마음으로 반조하지 않으면 경을 보아도 이익이 없다.

 

 

78.세속의 먼지구덩이 같은 곳에 사는 사람으로서 고공의 바람소리 같은 높은 이야기를 어찌 쉽게 풀어내겠는가?

 

 

81.정신을 집중해서 생각을 먼 데까지 하여 자연의 묘리를 깨닫고 있으니, 외물이나 자신을 모두 잊고 형채를 벗어나며 온갖 지헤를 떨쳐 버린다. 지혜를 품고 있으면 유한이지만 그것을 떨어뜨려내면 무한이 된다. 이 자리가 최고경지가 된다. 고개를 넘어서며 하얀 히말라야를 만나는 순간,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무한이 유한을 버린다. 唯識無境을 공부한다.

 

 

96.본시 산사람이라 산중의 이야기를 즐겨 나눈다. 오월의 솔바람을 팔고 싶으나 그대들이 값 모를까 그게 두렵다. 작자미상

 

 

159.생과 사, 두려운 中有의 험로는 좁고 5독은 그 길에서 기다리는 무장한 산적처럼 수시로 달려드니 존경할 만한 스승을 찾아라, 그가 안전하게 길을 인도하리니./빠드마삼바바

 

 

190.空은 지혜의 하늘

 

 

192.노자 41. 큰 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큰 형상은 형태가 보이지 않는다.

 

 

193.자연은 어떤 위력적인 강대한 에너지를 품고 있어 인간이라는 왜소함이 무의식적으로 견주어지며 위축된다.-먼지 속의 인간. 나는 기껏해야 인간일 뿐이다.

 

196.깨달음의 단서는 명상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오색의 깃발이 펄럭이고 눈앞으로 거대한 설산이 황금빛으로 변하는 모습 안에서 감추어진 법문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9.사자의 꼬리가 되느니 개의 머리가 되라(Better be the head of a dog than the tail of a lion).

 

 

205.저 푸른 하늘은 무심한 듯하지만 인간사를 바라보고, 캉첸중가는 자신의 산자락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과 애환을 함께 해왔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떠나는 강물은 이 모든 이야기를 품어 하류로 흘러간다. 하여 자연과 사람이 하나인 연인불이(然人不二)였다.

 

 

208.野壇法席과 惹端法席의 차이

 

 

213.히말라야를 걷다 보면 심심치 않게 자연과 정신은 둘로 나뉘어져 있지 않은 하나라는 생각이 들다가 그 생각조차 없어지는 무념에 들어간다. 만념이 일념이 되고 일념이 마지막 통로를 통해 무념으로 들어가는 현상을 경험한다.

 

 

221.신화를 얘기할 때 그것을 하나의 비유로만 생각한다면 신화를 잘못 아는 일이 된다. 과학적 지식에 자신을 너무 맡겨서는 그것도 집착이므로 곤란하다. 신화에 정성스럽게 귀 기울이는 일은, 단 한 걸음에 원시와 고대로 건너가는 경험이 된다.

 

 

224.우리 나라 불교에는 저통 불교에 칠성신앙과 산신신앙이 함께 어우러진다. 과민하게 생각하지 마라. 거짓 종교는 절대적인 비종교가 아니다. 거짓 종교라도 종교의 완전한 결여가 아니라, 오류가 첨가된 것이므로 오류란 전도된, 일그러진 진리 자체일 뿐이다.

 

 

254.문수보살의 집은 견고부동한 空의 세계 위에 구축되어 있고 세속을 초월한 지혜의 상징, 진여의 비유임은 틀림없다.

 

 

263.흐르는 땀방울 하나하나가 죄라 한다. 내 죄는 무엇인가?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 삶의 識 안에 사원을 세운 지 10년이 훨씬 넘었다. 반가부좌로 허리를 펴고 앉아 내 사원을 바라보니 이승에서 그 세월은 참으로 잠시였다. 이 사원의 터를 닦은 것은 이승의 내가 아니었다. 識이라는 흐름 저편, 즉 前 삶-前生의 내가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265.이 삶에서 끝을 보리라. 용맹정진의 發心은 집착의 다른 얼굴은 아닐 런지? 그러나 비통스럽게 완성은커녕 삶의 온갖 인연의 흐름으로 험한 비구름, 모진 바람에 서까래가 내려 앉으니 앞서간 識에 누를 더하는 모습이다. 과거의 識들이 정성스럽게 물려준 사원을 도리어 허물고 있으니 언제쯤이면 단청을 올리고 본존불에 점안할지 까마득하다. 초발심을 찾는 동안 눈물 하나 더 떨어진다.

 

 

278.노자의 바라보기 윤회-노자가 세상을 결별하기 전에 준 가르침. 도덕경 5천자

 

 

287.데에비드 봄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는 에너지 덩어리다. ‘물질은 응축된 얼어붙은 빛이다

 

 

293.종소리는 지극히 종교적 상징이며 법의 진동이다. 그 소리가 법의 세계로 안내한다.

 

 

294.인도 신화에 의하면 인드라는(帝釋天 : 붓다의 수호신)은 천둥과 번개를 일으키는 신이다.

 

 

295.空은 더 이상 부러지려야 부서지지 않는다.

 

 

305.반야는 지혜의 불꽃. 그 위에 먼지나 파리가 앉을 수 없다.

 

 

306.붓다의 열반

붓다는 열반 직전에 아난다에게 나는 이미 모든 법을 설했고 내게 비밀은 없으며 육신은 이제 가죽끈에 매어 간신히 움직이는 낡은 수레와 같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설법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에 의지하라.

진리에 의지하고, 진리를 스승으로 삼아라.

진리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장아함경 』「유행경」중에서

소멸이란 존재의 본질이다. 실존이 존재의 본질이지만 소멸 역시 존재 본질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타고 남은 가벼운 재는 종교적으로 설명한다.

 

 

318.위대한 열반이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 영원함이란 끝나는 것이 아니다. 有爲의 열반이 無爲의 법륜을 굴린 것으로 보아도 좋다.

 

 

345.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을 통해 존재들이 시간에 의해 지배받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풀어보면 모든 존재는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 시간 흐름 앞에서 겸허하게 자세를 고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공자의 가는 것들은 이와 같으니 밤낮을 쉬지 않는구나는 말의 의미도 그렇다. 아무리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인물도, 동서양을 잇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한 대왕은 물론, 시대를 지배했던 담론도 시간 속에서는 무력하다.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살기 위해 <논어> 자로편에서 正名을 말했으나, 한 존재를 지배하는 것은 시간과 함께 자연이라는 주변 환경이다.

 

 

348.좋은 자리에 이르면 지복이 차오르고 어디선가 아름답고 영적인 힘이 몰려와 나의 내부를 가득 채워준다. 내 안을 가득 채운 지복을 두두물물과 나누고픈 순간이 뒤따라와 사발팔방을 자비의 시선으로 어루만진다. “복 받으시라, 모두 붓다에 이르시라.” 따라서 근원에서 노닐며, 그 길을 잃지 않고, 그 원천을 끊이지 않게 하며, 내 삶을 다하리다.’ 맹세한다.

 

 

356.<장자>에서 하늘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것은 천락, 인간과 자연의 통합은 천화, 인간과 사회의 통일은 인화, 인간 사이의 조화는 인락이라 이야기한다. 이 모든 것은 조화가 바탕이다. 시킴의 기본틀은 이것들이 만들었으니 어울림이 시킴이라는 모습을 창출했다.

 

 

361.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원망보다는 현실적이고 현명하게 유혈을 빗겨갔다. 생명을 경시하는 이즘이나 종교는 아류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연기로 인함이 불가의 핵심 중에 하나다. 역사를 가만히 보면 그 많은 요소들이 맞물리며 種의 터를 닦아나가고 있다. 너그러운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고 이해하며 살아가면 극락정토가 되고, 그 반대로 다투고 경쟁하면서 망가지면 천국이 아닌 천국(淺國)의 길로 나아간다.

 

 

362.영혼이란 한 개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고위의 에너지 형태다. 자연에게도 당연히 이런 에너지 패턴이 있기에 인간은 美라는 개념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감동이라는 행위를 통해 접촉한다. 결국 아름다움 자체가 우주 창조의 정신이다.

 

 

363.거대한 산, 드넓은 바다 등은 성인은 물론 범부에게도 감동을 준다. 아름다움을 통해서 수학적인 무한이 인간에게 다가온다. 사람의 힘으로는 결코 꾸며낼 수 없는 풍경이 우리 내부에 자리한 원형적인 무한과 감수성을 통해 반응하며 공명한다. 그런 떨림과 울림 사이에서 과거가 영상을 만든다. 그러나 범부에게 지난 삶의 단서가 주어지는 일이 그리 대단한가. 다만 삼사라(윤회)와 까르마라는 법을 확실하게 믿게 해줄 따름이다. 그리하여 남은 삶, 그리고 다시 태어난다면 다음 삶에서는 피안으로 향하는 대승의 뱃전에서 노 젓는 보디삿뜨바(보살)가 되리라 서원한다. .

 

 

372.시선 아래로 구름이 지나간다. 풍경에 도취되며 어떤 애틋한 그리움 같은 것이 더해진다. 돌아보면 인간 세상이란 얼마나 덧없는가. 그야말로 空幻이다. 그러나 저 웅장한 자연은 그동안 역사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모든 인간사를 굽어보고 있었다. 사람은 단지 머물다 갈 뿐이다. “누가 주인인가?” “인간이 과연 주인인가?”모두가 한갓 먼지가 되어 고원을 떠돈다. 현상이란 공화이며 공화 또한 현상이다. 인간이 사라진다고 허무와 공허인가? 그렇지 않다. 萬有다. 萬有有變이다. “그러면 우리가 귀의할 곳은 어딘가. 덧없이 흘러가는 인간사인가, 권력인가, 아니면 자연과 합일되는 자리이던가.”그나마 산은 오랫동안 모습을 쉬이 바꾸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지나가버리는 것들에게 내 삶을 어찌 걸겠는가. 누구나 뭉친 먼지 덩어리에서 흩어진 먼지로 가는 길을 반복하는 여정에서 이 자리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무엇일까? 내 識이 겪었던 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질문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찢어진 시간이 이어지며 내 전생을 손으로 쓰다듬는 살가운 느낌을 만난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세월을 타고 이제는 푸석거리는 젖은 벽돌들이 어떤 의미를 전해주려는데 그 행간을 쉬이 읽어 내지 못하고 있다.

 

 

376.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99.산에서 산을 제대로 감상하는 법은 잊는 것이다. 하늘을 비행하는 비행사는 비행의 위험함을 잊어야 아름다움을 감상할 능력이 생긴다. 바다를 항해할 경우 바다의 위험함을 벗어나야만 미적 감각이 눈에 들어온다. 敬哀喜怒哀樂은 물론 생사 그리고 모시는 신까지 통째로 잊는 殺佛殺祖까지 나가야 산이 산이 되고 물이 물이 된다. 잊고 나가는 길.

 

 

2014.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