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과 종학
- 현행 불교강원의 교과과정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
권 오 민*1)
목차
1. 들어가는 말
2. 현행 불교강원의 교과과정
1) 교과과정과 개요
2) 현행 교과과정의 유래
3. 관견(관견)을 통해 본 교과과정의 문제점
1) 선종 중심의 교과과정
2) 성종(성종) 중심의 교과과정
3) 차제방편을 무시한 교과과정
4) 그 밖의 의문점들
4. 개선방안--교과과정의 이원화
1) 교학(교학)으로서의 불교학
2) 종학(종학)으로서의 불교학
3) 교판에 의한 차제방편성의 회복
4) 이원적 교과과정
5. 맺음말
1. 들어가는 말
불교가 더 이상 특정 종교집단의 전유물이 아닌 오늘날에 있어서도 전통강원은 불교교육기관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비록 동국대학이나 그 밖의 몇몇 종립대학이라는 불교교육기관이 존재하고, 각 대학의 철학과에서 ‘불교철학’이라는 명칭으로 불교강의가 이루어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극히 소수의 교육생들을 대상으로 할뿐더러 그들이 그들의 불교지식을 세상에 펼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강원은 다만 출가승려들의 교육기관일 뿐만 아니라 그들 학인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불교지식을 세간에 펼친다고 할 때, 결국 한국사회의 불교도를 지도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 본다면, 불교강원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학인 개개인의 자질문제와 관계될 뿐만 아니라 불교도 전체의 자질문제, 나아가 한국불교의 명운이 걸린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같은 강원교육의 중요성으로 인해, 혹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일찍부터 전통강원의 교과과정에 대한 반성 내지 비판적인 논의가 있어왔다. 일찍이 1928년 3월 강원교육제도의 개선을 위해 조선불교학인대회를 개최한 이래 2003년 전국승가학인연합회에서 주최한 ‘승가교육과 한국불교’에 이르기까지 공사(공사)간의 수많은 목소리가 교계에 넘쳐났으며, 교계신문에 따르면 금년 초(2월 1일)에 조계종단의 승가교육 전반을 재점검하여 개선방안을 마련할 승가교육제도개선추진위원회가 출범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천학비재한 필자의 우수마발(우수마발)을 더하여 도리어 사계에 누(누)나 되지 않을지 염려 또한 적지 않다. 필자는 출가자도 아닐뿐더러 강원교육을 받아본 적도, 나아가 사집(사집)조차 변변히 공부해 본적도 없기에 이러한 주제를 떠맡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망설임과 만용이 필요하였다. 일말의 변명을 늘어놓자면, 필자는 지난 20여 년 간 국립대학 철학과에서 ‘불교철학’이라는 교과목을 운영하면서 ‘무엇을 교수해야 명(명)과 실(실)이 상부한 불교의 면목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을 것인가’하고 고민해 보았다는 사실이다.1)
애당초 철학과 종교의 구분을 허용하지 않는 동양의 사유전통에서 볼 때, 어떠한 불교도--이를테면 초기불교도, 아비달마도, 대승의 공관도, 유식도, 여래장도, 나아가 천태도 화엄도 정토도 선도 ‘불교철학’이라는 명목으로 강의할 수 있겠지만, 그 모두를 한 학기 한 강좌에 소화할 수 없을뿐더러 필자의 능력 또한 미칠 수 없는 경계였다. 더구나 필자의 이해에 의하는 한, 소승(초기불교와 아비달마)과 대승, 인도불교와 동아시아의 불교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기에 그러한 고민은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그러한 고민은 우리 현실의 불교와 조우하게 될 때 거의 절망으로 변하기도 하였는데, 앞서 언급하였듯이 현실의 불교를 지도하는 이는 대개 출가승려들이고, 그들의 기본교육은 강원에서 이루지기 때문에, 불교학도로서 평소 전통강원의 교과과정에 대해 느낀 바가 없지 않았으며, 이 같은 소이로 인해 증상만을 드러내게 되었음을 먼저 밝혀두는 바이다.
이미 말하였듯이 그동안 불교강원의 교육제도 전반에 걸쳐 수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필자가 처한 상황이 궁벽하여 그 모두를 열람하지 못하였다. 본고에서는 다만 국외(국외)의 한 불교학도가 현행 불교강원의 교과과정에 대해 사사로이 느낀 점을 드러내어 본다는데 의미를 두고자 한다. 다소 내용이 졸렬하고 문장이 거칠더라도 너그러운 이해가 있기 바란다.
2. 현행 불교강원의 교과과정
1) 교과과정과 개요
이른바 이력과정(이력과정)으로 일컬어지는 사미과(사미과)․사집과(사집과)․사교과(사교과)․대교과(대교과)의 네 과정은 전승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대개 조선 후기(17세기)에 정착된 것으로 알려진다. 각 과정의 교과목 또한 시대에 따라 약간의 증감이나 개변이 있었지만,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기본적인 교과과정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미과: ꡔ치문(치문)ꡕ
사집과: ꡔ서장(서장)ꡕ ꡔ도서(도서)ꡕ ꡔ선요(선요)ꡕ ꡔ절요(절요)ꡕ
사교과: ꡔ능엄경(릉엄경)ꡕ ꡔ기신론(기신론)ꡕ ꡔ금강경(금강경)ꡕ ꡔ원각경(원각경)ꡕ
대교과: ꡔ화엄경(화엄경)ꡕ
먼저 ꡔ치문ꡕ이라 함은 ꡔ치문경훈(치문경훈)ꡕ의 줄임말로, 승가구성원에 대한 경책과 훈계를 내용으로 한다. 이는 당말(당말)에 이루어진 작자미상의 ꡔ치림보훈(치림보훈)ꡕ을 토대로 하여 1313년 환주지현(환주지현)이 북송으로부터 원대에 이르는 여러 명승고덕과 공경대부의 말씀을 모아 편찬한 것으로, 「경훈(경훈)」 「면학(면학)」 「유계(유계)」 「잠명(잠명)」 「서장(서장)」등 12항목 67편(정선 활자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1348년 태고보우에 의해 전래되었다.2)
ꡔ서장ꡕ은 대혜종고(대혜종고, 1089-1163)가 42명과 주고받은 62통의 편지글을 모은 것으로, 요지는 사견(묵조)을 물리치고 정견(활구)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대혜는 원오극근(원오극근)의 제자로서, 임제(림제)의 12세 법손이다.
ꡔ도서ꡕ는 ꡔ선원제전집도서(선원제전집도서)ꡕ의 줄임말로서, 화엄종의 제5조이자 하택신회의 5세 법손이기도 한 규봉종밀(규봉종밀, 780-841)의 저술이다. 그의 법통에서 보듯이 그는 일찍이 선교일치를 주장하여 이와 관련된 선교의 여러 주장들을 모아 ꡔ선원제전집ꡕ(101권)을 찬술하였으며(원대 소실), 그 전체적인 요지를 간추린 것이 ꡔ도서ꡕ(4권)이다.
ꡔ선요ꡕ는 임제의 17대 적손인 고봉(고봉, 1238-1295)선사가 깨달음을 얻은 후 20여년 동안 행한 법문을 모은 책으로, 큰 뜻을 떨쳐 현관(현관)을 꿰뚫는 선의 요체를 밝힌 것이다. 전29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ꡔ절요ꡕ는 ꡔ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ꡕ의 줄임말로서, 규봉종밀이 선가의 4종(하택종․북종․홍주종․우두종) 중 하택종만을 별도로 드러낸 것을 보조국사 지눌(지눌, 1158-1210)이 요약하여 코멘트한 것이다.
다음으로 ꡔ능엄경ꡕ은 ꡔ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릉엄경ꡕ의 약칭으로, 긴 제목이 으레 그러하듯이 밀교부(관정부)에 소속된 경전이다. 이 경은, 아난이 마등가의 유혹에 빠져 있을 때 부처님께서 신주(신주)를 내려 문수보살로 하여금 그를 구해오게 한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그러한 유혹은 상주하는 진심의 자성이 청정하게 밝은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면서 5온․12처 등은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것일 뿐 그 본성은 여래장의 미묘한 진여성임을 밝히고, 그에 이르는 여러 다양한 수행의 방편(이를테면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과 4종 율의, 릉엄주 등)과 그 과정에 대해 설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경은 불멸 후 타국으로 유출되는 것이 금지되어 중인도 나란다사원 비장(비장)되어 있다가 당나라 중종 때(705년) 반랄밀제(반랄밀체)에 의해 전역(전역)되었다고 하는데, 일찍이 위경(위경)의 논란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대승으로의 믿음을 일으키는 논이라는 뜻의 ꡔ대승기신론ꡕ은 너무나 유명한 논서이기에 여기서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저자에 대해 의문이 없지 않아 쿠샨왕조의 카니시카왕 무렵(2세기 초) 협(협,Pārśva)존자의 제자로서 ꡔ불소행찬(불소행찬)ꡕ등을 지은 마명(마명,Aśvaghoṣa)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후대 동명이인의 저술이거나 중국찬술로 간주되기도 하며, 일찍이 역자(진체)의 진위에 대한 의심이 제기되기도 하였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권(단권)의 이 논은 진여 일심의 여래장사상의 완결편으로, 천태․화엄․선 등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거의 모든 불교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ꡔ금강경ꡕ은 ꡔ금강반야바라밀경ꡕ(라집역)의 줄임말로서, 이 역시 너무나 유명한 경이기에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사실은, 이것이 비록 독립된 경으로 전해지고 있을지라도 16회에 걸쳐(혹은 16종류로) 이루어진 ꡔ대반야경ꡕ중 9번째 경이며, ꡔ대품반야ꡕ(제2회) ꡔ소품반야ꡕ(제4회)와 더불어 가장 빠른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철저하게 일체의 언어 관념에 대한 비판(즉 무상, 혹은 파상)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ꡔ원각경ꡕ은 ꡔ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ꡕ의 줄임말로서, 문수 보현 등 12보살에게 원각(원각) 묘심(묘심)의 이치를 설한 경으로, 규봉종밀이 지적하였듯이 ꡔ대승기신론ꡕ의 내용과 상통한다. 또한 경의 제목도 완전하지 않을뿐더러 ꡔ능엄경ꡕ과도 유사한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중국찬술로 의심하기도 한다.4)
마지막으로 ꡔ화엄경ꡕ은 ꡔ대방광불화엄경ꡕ의 줄임말로, ‘방광(vaipulya)’이란 초기불교이래 불타의 법문양식(12분교)의 하나로 중층적인 교리문답을 의미하였으나 대승에서는 대개 심오한 뜻을 널리 설한 대승경전을 의미하며, ‘불화엄’에서 ‘화엄(avataṃsaka)’은 귀고리나 꽃다발과 같은 장식품을 의미한다. 곧 불화엄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부처의 공덕을 온갖 장식에 비유한 말로서, 이 경에서는 무한 광대한 불타 자내증의 세계, 혹은 백 천억 화신이라 하듯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부처로 충만된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2) 현행 교과과정의 유래
흔히 부처님의 법문의 양을 8만 4천이라 하기도 하고, 고려대장경을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듯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경론이 존재하는데, 이상과 같은 교과목은 언제 어떠한 근거에서 강원의 이력과정으로 정해지게 되었던 것인가? 애석하게도 이에 대한 결정적인 사료는 전하지 않으며, 몇몇 단편적인 사료와 구전에 따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선행된 연구에 의하면,5)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이력과정이 정착된 것은 교종이 완전히 사라진 조선후기 숙종 무렵이다.
김영수에 의하면, 청허(청허)의 4세 법손이 되는 월담설제(월담설제, 1632-1704)에 이르러 오로지 태고의 법맥에 속한 선종만이 남게 됨으로써 네 경 내 경을 구별할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선종의 승려도 화엄종이나 천태종과 같은 교종에서 숭상하든 ꡔ화엄경ꡕ ꡔ원각경ꡕ ꡔ법화경ꡕ 등을, 혹은 해동종의 ꡔ발심수행장ꡕ을 기탄 없이 강(강)하게 되었으며, 이 때 비로소 일대 이력과정이 정립되었다. 즉 ꡔ계초심학인문(계초심학인문)ꡕ ꡔ발심수행장ꡕ ꡔ자경문ꡕ과 ꡔ치문ꡕ으로부터 시작하여 ꡔ서장ꡕ ꡔ도서ꡕ ꡔ선요ꡕ ꡔ절요ꡕ의 4집을 독습(독습)한 다음 ꡔ능엄경ꡕ ꡔ법화경ꡕꡔ금강경ꡕ ꡔ원각경ꡕ의 4교를 연구하고, 그 후 ꡔ화엄경ꡕ과 ꡔ선문염송(선문념송)ꡕ을 강하였는데, 훗날 ꡔ법화경ꡕ이 ꡔ기신론ꡕ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6)
권상노의 견해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에 의하면, 편양(편양언기)의 법손이 되는 월담․월저(월저)와 벽암(벽암각성)의 법손이 되는 백암(백암,1631-1700)에 이르러 교종의 각파는 이미 세상에서 그 그림자도 볼 수 없게 됨으로 말미암아 구태어 선종을 표방할 필요도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종래 불립문자를 종지로 하여 경학을 경시하던 선종승려들도 ꡔ법화경ꡕ과 ꡔ화엄경ꡕ 등을 강설함으로써 이 시대 비로소 앞서 설한 14종의 학과로 이루어진 조선불교의 이력과목이 완성되었다.7)
물론 그 이전 시대에도 선교의 강학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ꡔ치문ꡕ ꡔ서장ꡕ ꡔ선요ꡕ는 본래부터 선종문헌이었고, ꡔ금강경ꡕ과 ꡔ능엄경ꡕ은 중국의 선종승려들도 연구하든 경전이었기에 일찍부터 독습되었으며, 고려 중엽 보조지눌이 돈오점수를 주장한 이후 점차 ꡔ초심ꡕ ꡔ도서ꡕ ꡔ절요ꡕ ꡔ염송ꡕ이 더해지고, 여말선초에 야운(야운)의 ꡔ자경문ꡕ이 더해졌다가 마침내 이 시대에 이르러 교종의 네 가지가 더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력과정 중 사집과가 가장 먼저 완비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선후의 순서를 정한 것은 벽송지엄(벽송지엄, 1464-1534)이었다. 그는 항상 “초학자를 이끌 때에는 먼저 ꡔ선원집ꡕ(도서)과 ꡔ별행록ꡕ(절요)으로써 여실지견(여실지견)을 세운 다음 ꡔ선요ꡕ와 ꡔ어록ꡕ(서장)으로써 지해(지해)의 병을 소제하여 활로(활로)를 지시해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8) 그는 아마도 조선건국 이래 억불(억불) 등에 의해 쇠퇴일로에 선 간화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사집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을 것인데,9) 이 같은 점에서 본다면 사집은 사교나 대교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교과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집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밖의 경론이 사교와 대교의 과정으로 편입된 결정적인 이유는 발견하기 어렵다. 김영수는, 달마는 비록 불입문자를 주창하였지만 최후에 혜가에게 ꡔ능엄경ꡕ과 ꡔ금강경ꡕ을 전하면서 이 경은 중생교화에 적당하다고 하였으며, 혜능은 ꡔ금강경ꡕ을 통해 깨달았고 후에 구결(구결)까지 저술하여 세상에 유포시켰기 때문에 선종에서 이 두 경을 소의경전으로 알고 숭상하였으며, ꡔ치문ꡕ이나 ꡔ서장ꡕ ꡔ선요ꡕ는 선종승려의 저술로서 선종에서 독습(독습)하던 것이라고 하였지만,10) 달마가 혜가에게 전한 것은 ꡔ능가경ꡕ일뿐더러 선종의 문헌으로 ꡔ서장ꡕ따위만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그것을 결정적인 이유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능화가 전하고 있는 진진응 설에 따르면, 교(교)에 4교와 대교, 선(선)에 ꡔ전등록ꡕ과 ꡔ염송ꡕ이 정해진 것은 백암성총(백암성총)에서 비롯된 일로서, 백암 이전에는 ꡔ화엄경ꡕ이 ꡔ소본(소본)ꡕ만이 있고 ꡔ연의초(연의초)ꡕ가 없었으며, 또한 ꡔ기신론필삭기ꡕ나 ꡔ반야경간정기ꡕ 같은 것이 없어서 사교와 대교가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다 강희(강희) 신유년(숙종7년, 1681)에 홀연히 임자도에 불서를 가득 실은 배가 떠내려 왔는데, 거기서 ꡔ연의초ꡕ와 ꡔ필삭기ꡕ ꡔ반야경간정기ꡕ등을 얻게 되었고, 백암대사가 이를 간행 유포함으로써 비로소 사교와 대교가 완전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11) 그렇다면 결국 사교와 대교의 정립은 우연에 의해 것이란 말인가? 아니면 천우신조에 의한 필연적인 것이란 말인가?
한편 권상노는, 사미과에서 ꡔ치문ꡕ등을 수습하는 것은 율신(율신)의 법을 알게 하기 위함이고, 사집과는 간경(간경)의 준비과정이며, 사교과에서는 경전을 연구하고 마침내 ꡔ화엄ꡕ과 격외(격외)의 ꡔ염송ꡕ으로서 대교의 이력을 마치게 되는 것으로, 후일 ꡔ법화경ꡕ이 ꡔ기신론ꡕ으로 대체된 것은 그것의 문의(문의)가 평이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12)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3. 관견(관견)을 통해본 교과과정의 문제점
1) 선종 중심의 교과과정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현행 교과과정은 철저하게 선종 중심이다.13) 강원 자체가 구체적인 어떤 텍스트를 강(강)하는, 다시 말해 읽고 해석하는 교육기관이기에, 불립문자 교외별전을 종지로 삼는 선종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이력과정은 교학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며, 나아가 벽송지엄 무렵까지도 선교가 나누어져 있어 선종에서는 ꡔ화엄경ꡕ이나 ꡔ법화경ꡕ등을 수학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에,14) 그러한 여러 경들을 교(교)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살펴보더라도 현행 교과과정은 선종, 그 중에서도 특히 보조지눌과 연관된다. ꡔ능엄경ꡕ과 ꡔ금강경ꡕ은 중국의 선종승려들도 연구하던 경전이라고 이미 말하였거니와 “ꡔ도서ꡕ와 ꡔ절요ꡕ로써 여실지견을 세운 다음 ꡔ선요ꡕ와 ꡔ서장ꡕ으로써 지해(지해)의 병을 소제하여 활로를 지시해야 한다”는 지엄의 말로 미루어보건대, 또한 대교과의 화엄을 거쳐 사교입선(사교입선)하는 것 또한 원돈신해문을 버리고 간화경절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로 볼 때, 현행 교과과정은 결과적으로 지눌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문제점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학인들의 입장에서는 초기불교로부터 선종에 이르는 온갖 불교를 맛보고 싶어하겠지만, 이는 조계종단의 종지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로 삼자면 강원이 조계종의 기초교육기관이라고 할 때, 현행 교과과정이 과연 조계종단의 종지(종헌 제2조: 본종은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한 근본교리를 봉체하며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함을 종지로 한다)를 구현할만한 인재를 육성하는데 적합한가? 하는 점이다.
조계종 교육원의 교육목표 제1항은 ‘조계종지의 체득’으로, “조계종의 가풍은 현 강원의 전통적인 교과목인 치문, 사집, 사교, 대교 등에 잘 드러나 있다. 서장에서는 간화선을 강조하고 있으며, 도서에서는 통불교적 입장에서 선교일치를 주장한다. 그밖에 선요 및 절요에서도 조계종의 수행가풍을 잘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교와 대교도 엄밀한 의미에서 사교입선을 위한 이력과목이라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조계종지의 체득은 기존의 전통적인 과목에 잘 담지되어 있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는 의미 없는 말들의 나열일 뿐이다.
즉 여기서는 종지를 구현하기 위해 반드시 사집이 설정되어야 하는 당위성이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사교와 대교가 다만 사교입선을 위해 배우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버리기 위해 배우는 것이라면 굳이 ꡔ능엄경ꡕ등이 되어야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혹은 문맥상으로 조계종의 수행가풍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만약 남종의 간화선이라면 다시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현행 교과과정은 간화선의 기본적인 취지를 밝히기에 적합한가?’ 만약 ‘선은 실천(행증)이지 앎의 대상이 아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강원의 존폐와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논의할 사항이 아니다.
또한 종헌 상에 나타난 석가세존의 ‘근본교리’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선학은 교학(근본교리)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현행 교과과정이 어떻게 근본교리를 커버하고 있는지 밝혀야만 하였다.
나아가 사법(사법)관계에 대해 종헌 제6조에서 “본종은 신라 헌덕왕 5년에 조계 혜능조사의 증법손인 서당(서당) 지장선사(지장선사)에게서 심인을 받은 도의국사(도의국사)를 종조로 하고, 고려의 태고 보우국사를 중흥조로 하여 이하 청허(청허)와 부휴(부휴) 양 법맥을 계계승승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행 교과과정으로 그 같이 면면히 이어온 그들 조사의 선법 또한 밝히기에 충분한가?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에 대해서는 어디서 배워야 하는가?
그것은 또한 그렇다할지라도 우매한 필자에게는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다. 종헌 상 조계종의 기원은 조계 혜능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는데, 어떠한 까닭에서 ꡔ육조단경ꡕ을 배우지 않으며, 중국 선종의 초조인 보리달마의 ꡔ이입사행론(이입사행론)ꡕ이나 근세에 알려진 일이기는 하지만 그가 의지하였다고 하는 ꡔ능가경ꡕ을 익히지 않는 것인가?
또한 간화선이 진실로 불타의 종취이며, 구경각에 이르는 첩경이라 한다면, 여타의 수많은 형태의 교(교)과 선(선)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지 않으면 안되며, 그런 의미에서 ꡔ도서ꡕ와 ꡔ절요ꡕ는 매우 설득력 있는 교과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ꡔ도서ꡕ에는 인도와 중국에서 전개된 거의 모든 불교사상이 저자의 불교관에 따라 발췌 정리되고 있다. 단언하건대 실질적으로 초학의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사집과에서 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그들 눈에 비친 ꡔ도서ꡕ의 구구절절은 화두와 다름없을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한다.
2) 성종(성종) 중심의 교과과정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 것인가? 흔히들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세상의 어떠한 종교도 철학도 사상도 진리를 외치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진리’란, 굳이 원효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 말을 발한 화자의 관념만큼이나 무량의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때문에 고정불변의 실체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불교사상사 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초기불교에서 직접적으로 진리에 대응하는 술어는 4성제의 ‘제’일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이다. 그것은 숲 속에서 코끼리 발자국이 제일이듯이 일체법 중의 제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4성제는 대승의 반야공관(공관)에 의해 방편설로 전락하고 말며, 공관 역시 유식(유식)의 도리를 드러내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유가행자들에 의하면, ꡔ반야경ꡕ에서는 제법이 공이라는 사실만을 밝혔을 뿐 궁극적 취지는 밝히지 못하였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유식성이었다.
나아가 유식성은 본래 청정한 자성인 진여 불성으로 이해되기도 하였으며, 동아시아에 이르러 그들의 통일적 불교관에 따라 3제원융(천태종)이나 사사무애(화엄종), 혹은 본래무일물(선종)을 세계의 실상 즉 진리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 모두는 중생 근기에 따른 방편일 뿐 본질과 목적은 동일한 것이라고.
그러나 역사의 현장에서는 그러하지 않았다. 온갖 부파의 분열은 차치하더라도 대․소승간의 갈등, 중관(공종)과 유식(유종)의 대립, 교종과 선종, 남종과 북종, 나아가 남종 내부에서조차 온갖 정사(정사)의 논란이 제기되었으며, 최근에 이르기까지 돈점의 논쟁이 이어져 그것이 마치 불교학의 중심문제인양 여겨지기도 하였다.
불교는 결코 단일하지 않다. 불타의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된 불교는 결국 인간이성의 역사와 함께 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고 지양하기도 하였으며, 종합하기도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규봉종밀은 소견(소견)으로도 뛰어난 불교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ꡔ도서ꡕ서문에서 배휴(배휴)는 이 책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명(마명)과 용수(용수) 두 분은 다같이 부처님의 경전을 널리 폈지만 공(공)이라 하고 성(성)이라 하여 종의를 달리하였으며, 혜능(혜능)과 신수(신수) 두 분은 다같이 달마의 심인을 전하였지만 돈(돈)과 점(점)으로 달리 품수하였으며, 천태(지의)는 오로지 3관(관)에 의지하였지만, 우두(우두,즉 법융)는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강서(강서,즉 마조)는 모든 것이 다 참이라 하였지만, 하택(하택,즉 신회)은 지견(지견)을 바로 가리켰으며, 그밖에도 어떤 이는 공(공)이라 하고 어떤 이는 유(유)라 하여 서로를 비판하였으며, 혹은 진(진)․망(망)이 서로를 포섭한다고도 하고, 서로를 부정한다고도 하였으며, ‘방편으로 은밀히 설한 것[밀지]’이라 하고 ‘분명하게 드러내어 설한 것[현설]’이라고도 하였으니, 인도와 중국에 그러한 종의는 참으로 번잡하다. 진실로 병에는 천가지 원인이 있기에 약도 다양한 종류가 생겨나게 된 것으로 …… ꡔ도서ꡕ에서는 원교(원교)에 근거하여 모든 종의를 인정하였으니, 비록 백가(백가)라 하더라도 역시 또한 모두 포섭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15)
어떻게 한 분의 불타로부터 비롯된 불교의 종의를 용수는 공으로, 마명은 진여일심으로 이해하였으며, 용수의 공관을 어떠한 까닭에서 천태지의는 일심삼관(일심삼관)으로, 법융은 일체의 공적(공적)으로 이해하였던가? 또한 보리달마로부터 비롯된 선법을 어떻게 혜능은 돈오로, 신수는 점수로 받아드렸으며, 혜능에서 비롯된 남종선을 마조의 홍주종에서는 망념이 바로 청정한 자성이라 하였으며, 신회의 하택종에서는 망념을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공적영지]고 하였던 것인가? 또한 어떠한 경을 어떤 이는 요의경으로, 또 어떤 이는 불요의경(방편설)로 파악하게 되었던 것인가?
불교가 단일하지 않은 것은 본질적으로 불타의 말씀이 그의 깨달음을 근거로 한 가설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말씀이 바로 깨달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던 것인가? 2500년에 걸친 불교사상사는 바로 무엇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에 대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우리는 그러한 역사의 끝자락에 서서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남겨진 불교만이 불교의 모든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한국불교가 거쳐온 지난 6백년간의 굴절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여도, 혹 그것은 이미 박제가 된 구호와 같은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오늘날 어떤 이들은 그 대안을 남방의 위빠사나에서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16)
앞서 필자의 이해에 의하는 한 인도의 불교와 동아시아의 불교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단편은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절대진리를 논할 때, 그것은 보편적인 것으로서 현실을 초월하는 것이든지 내재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물론 내재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이 바로 절대진리라는 것은 아니다. ꡔ기신론ꡕ식으로 말하자면, 바람이 자면 파도는 대해로 돌아가며, 무지의 망상을 사라질 때 진리가 드러난다. 설혹 진리가 현실에 내재한다고 할지라도 파도가 대해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바람이 자야하고, 진리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무지의 망상을 걷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 현실성을 배제한다. 절대는 언제나 추상적인 것이었다.
이에 중국불교의 주류를 이루는 사상가들은 구체적인 차별의 현실이 바로 절대진리임을 천명하였다. 흔히 대해에 비유되는 이러한 절대 보편적 진리성을 ‘성(성)’이라 하기도 하고 ‘리(리)’ 혹은 ‘총(총)’ 혹은 ‘체(체)’ 혹은 진(진)이라고 하여, ‘상(상)’ 혹은 ‘사(사)’ 혹은 ‘별(별)’ 혹은 망(망)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현상세계의 온갖 차별상은 ‘성’ 그 자체이든지 혹은 그것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는 바로 현실이다.’ 혹은 ‘현실은 바로 절대의 나타남이다.’ 천태와 화엄에서는 이를 각기 성구(성구)와 성기(성기)라고 하였다.
현상[상]과 본질[성], 보편[리]과 특수[사], 부분[별]과 전체[총], 나아가 생사와 열반, 중생과 부처, 그것은 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인가? ‘하나’라기보다 원융(원융)이다. 하나는 둘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떠한 차별 대립도 단절된 절대로서의 원융의 세계를 추구하였다. 다시 말하건대 그들이 추구한 ‘절대’의 ‘이상’은 상대의 현실을 떠난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불교사상가들이 생각한 최고의 진리는 항상 현실 그 자체를 절대적 이상으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떠남과 초월로부터 복귀와 내재, 아니 떠남과 복귀, 초월과 내재라는 구분조차 허용하지 않는 상즉(상즉)의 세계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불교사상을 성종(성종)이라 하며, 그 단초는 ꡔ기신론ꡕ이었다. 이는 필경 유식(상종)이나 중관(공종)과는 다른 것이었다.17) 화엄교판에 의할 것 같으면, 성종은 대승의 완성점(대승종교)이며, 유식과 중관은 대승의 시작(대승시교)에 불과하다.
성종과 상종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일성개성설(일성개성설)과 오성각별설(오성각별설)의 문제이다. 하물며 현장(현장)도 주저하였거늘18) 이 시대 누가 감히 ‘일체중생 실유불성’을 부정하여 5성(성문․독각․보살․부정․무성) 중 성문․독각․무성(예컨대 도축업자)은 결코 성불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는 ꡔ해심밀경ꡕ의 정설이며 법상종의 종의이다. 성종에 의하는 한 삼승은 방편이며 일승이 진실이지만, 상종에 의하는 한 일승이 방편이며 삼승이 진실이다. 어느 편이 진실인가? 그렇다면 ꡔ무량수경ꡕ에서 시방세계의 일체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면서 5역죄를 지은 자나 ‘정법을 비방하는 자’는 제외한다고 한 법장보살의 본원(제18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19)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주지하듯이 중관과 유식은 인도대승불교의 2대학파로서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질 때까지 존속하지만, 중국의 경우 같은 계통의 종파인 삼론종과 법상종은 50년도 채우지 못하였으며, 반대로 여래장사상은 인도에서는 필경 대승불교의 중요한 한 갈래였고 ꡔ여래장경ꡕ ꡔ승만경ꡕ ꡔ능가경ꡕ 등을 바탕으로 ꡔ보성론(보성론)ꡕ(완전한 명칭은 ꡔ구경일승보성론ꡕ)이 저술되었을지라도 중관학파나 유식학파처럼 하나의 학파로 성립하지는 못하였지만(티베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동아시아에서 발전한 거의 모든 불교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무아나 무상(무상)의 공을 설하는 불교전통에 반하여 ‘여래장’이라고 하는 통일적이고도 실재적인 원리를 설정하였기 때문은 아닐까? 혹은 분석과 비판이라는 부정적 입장을 취한 전자에 비해 지양과 종합이라는 긍정적 입장을 취한 이 사상이 그들의 성향에 보다 적합했기 때문은 아닐까?20)
우리는 대개 이러한 동아시아의 불교전통에 익숙하기 때문에 아무런 의의 없이 ‘여래장’(혹은 진여법성 혹은 진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리고, 그것이 바로 ‘진리’로서 깨달음의 조건이고 대상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이를 통해 지나간 2500년의 도정을 무시하고 불교를 ‘하나’로 묶어서 바라보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두고 ‘역사가 말해주는 것’이라느니, ‘역사적으로 검증된 것’이라는 등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21) 그것은 성향의 문제이고 신념의 문제이지 진실의 문제가 아니다.
성종은 말하자면 통일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차별론(상종)이 전제되지 않은, 구체적 현실에 대한 강렬하고도 정확한 인식이 결여된 통일론은 공허하다. 필자가 앞서 ‘구호’ 운운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괴로움(불안)을 공적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로서 직시해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세계는 언제나 주객 대립의 세계이다. 내가 있고 네가 있으며, 진실이 있고 거짓이 있으며, 깨끗함이 있고 더러움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항상 대립과 갈등의 투쟁이 꿈틀댄다. 또한 어제의 진실은 오늘 더 이상 진실이 아니며, 오늘의 나 또한 어제의 내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만약 모두 관념의 세계이며, 분별의 세계라면, 적어도 그에 대한 금강석과도 같은 강렬한 결택(결택)만이 우리를 그러한 세계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다.
강원이 언어로 구성된 텍스트에 입각하여 학문을 전수하는 교육기관인 이상 엄격한 분별과 결택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코 어렴풋하게 이해한 ‘회통(회통)’에 근거하여 ‘그게 그것이다’거나 ‘좋은 게 좋은 것’이며,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시각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학문이 아니다. 원효가 위대한 사상가라는 것은 그의 무애행에 기인하였겠지만, 그것은 현실상[상]에 대한 강렬하고도 정확한 인식이 전제되었으며, 말할 수 없는 ‘그것’을 극구 언어로 드러내고자 하였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불교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그 자체만으로도 지식의 보고이다. 그것은 인류가 산출한 위대한 지적 유산이다. 그것은 다만 유형(유형)의 보고(문화재)만이 아니다. 막말로 인류가 산출한 어떠한 관념체계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불교 스스로가 ‘성종’이라는 이념에 갇혀 ‘소승’이라 하고 ‘상종(상종,혹은 유종)’ 혹은 ‘공종(공종)’이라 하여 그 같은 언어적인 지식의 보고를 파기하고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승려들에 대한 이미지로 나빠진 것으로, 전통적으로 엘리트(지식)계층이었다. 무엇보다 문자를 알았으며, 인간 삶[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그에 대한 다양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으며, 이에 따라 사회 제문제에 대해 적극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정치적 역학관계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겠지만, 국사니 왕사라고 하는 것도 동일한 맥락이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불교는 좀 더 지적으로 성숙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강원의 교과과정과 결부된 문제이다. 오늘날 강원의 교과과정은 ꡔ금강경ꡕ을 제외한다면 중국선종서 내지 성종 일색이며, ꡔ금강경ꡕ 또한 불교사상사라는 관점을 완전히 배제한 채 혜능과 결부시켜 이른바 공소현(공소현)의 진리인 진공묘유(진공묘유, 혹은 파상현성, 혹은 별전선지)로 이해하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ꡔ기신론ꡕ 이전의 불교, 유식도 중관도 아비달마도 사라져버렸다.
일찍이 대각국사 의천은 교관겸수(교관겸수)․성상겸학(성상겸학)을 주장하였지만, 이는 선종 그 중에서도 특히 간화선을 중심으로 하며, 성종계통이 교학의 주류를 이루는 오늘날 한국불교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는 ‘성’과 ‘상’은 하늘의 해와 달, 역(역)에 있어서는 건(건)과 곤(곤)과 같다는 징관(징관)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같이 말하고 있다.
‘성’과 ‘상’의 두 갈래를 함께 배워야 비로소 달통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곧 ꡔ구사론ꡕ을 배우지 않으면 소승의 설을 알지 못하며, 유식과 ꡔ기신론ꡕ을 배우지 않고서 어찌 대승시교(시교)와 종교(종교)․돈교(돈교)를 알 것이며, 화엄을 배우지 않으면 원융의 세계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뜻이 얕은 것으로는 깊은 것에 이르지 못하지만, 깊은 것은 반드시 얕은 것과 함께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래서 경의 게송에서도 “연못이나 강의 물도 마실 힘이 없으면서 어찌 대해를 삼킬 수 있을 것이며, 성문 연각의 이승법도 알지 못하면서 어찌 대승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믿을 만한 말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승도 익혀야 하거늘 하물며 대승[의 상종]을 말해 무엇할 것인가?
요즘 불교(선․교)를 배우는 이들은 스스로 돈오(돈오)라고 말하면서 방편으로서의 소승[권소]을 멸시하고, ‘성’과 ‘상’에 대해 담론하다가 왕왕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니, 이는 모두 성종과 상종을 함께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이다.22)
감히 말하건대, 이 말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바다는 넓고도 깊다. 대개의 역사적 사건이 그러하듯이 어떤 한 사상이 발생하고 전개하는 데에는 항상 우연적이거나 필연적인 계기가 있게 마련이지만, 그러한 계기가 간과될 때 역사적 사건이 절대적인 운명처럼 다가서듯이 사상 역시 그러하여 절대적인 이념으로 과장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불교는 앞뒤가 막혀버린 과장된 불교는 아닐까? 시대가 변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설혹 진리는 변하지 않을지라도 그 진리를 접하고 해석하는 인간은 변하기 마련이다. 무엇이 먼저인가?
3) 차제 방편을 무시한 교과과정
이미 2-2) ‘현행 교과과정의 유래’에서 살펴보았듯이 현행 교과과정이 어떠한 근거에서 이력과정으로 편입되었는지 오늘날 여전히 알지 못한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아마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체적인 의도(선종의 종지구현)에 의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조선 중․후기 선교 통합(보다 정확히 말해 교종의 소멸)이라는 시대의 변이에 따라 자연적으로 정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선교의 통합이 국가권력에 의한 타율적인 통합이었으므로 통합의 정체성을 확인할만한 상황도 아니었으며, 그에 따른 새로운 교과과정을 모색할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 대학의 위기 운운하며 개별 학과의 학부제로의 통합과 같은 것이라고도 하겠다.23)
따라서 현행 교과과정은 타율적인 선교통합에 따른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것으로서, 계통적인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굳이 찾자면 성종에 입각한 선종계통의 문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미 언급하였듯이 ꡔ육조단경ꡕ이나 ꡔ이입사행론(이입사행론)ꡕ등을 먼저 익히지 않는 것도 의문이거니와 애당초 ꡔ기신론ꡕ이 정규과목이 아니었다는 점으로 볼 때 그렇게 말하기도 어렵다. 더욱이 ꡔ법화경ꡕ이 문의(문의)가 평이하여 ꡔ기신론ꡕ으로 대체되었다고 하는 것도, 떠내려온 배에 ꡔ기신론필삭기ꡕ등이 실려있어 비로소 사교와 대교가 완전해 질 수 있었다고 한 것도 현행 교과과정의 정체성과는 무관한 이야기이다.
강원의 이력과정이 사미과는 오늘날 초등학교에, 사집과는 중학교에, 사교과는 고등학교에, 그리고 대교과는 대학교에 해당한다고도 말하며,24) 권상노는, 사미과는 율신(율신)의 법을 익히기 위한 과정이고, 사집과는 간경(간경)을 준비하기 위한 단계이며, 사교와 대교는 간경의 과정이라고 하였는데, 형식상으로는 그러할지라도 내용상으로는 참으로 수긍하기 어려운 말들이다.
어떤 경의 논소(논소)도 아니고, 어떤 특정한 계통의 특정한 이의 편지글과 법문집, 당시 여러 교가(교가)와 선가(선가)의 종의를 종합 비교한 논문들을 어떻게 경을 읽기 위한 준비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들은 도리어 온갖 경(경)과 경의 취지를 밝힌 논소를 읽고 난 이후에 비로소 읽어야 할 것들이다. 그것들은 오늘날의 학제로 말한다면 대학원에서 행해지는 특수문제에 대한 세미나와 같은 각론(각론)으로, 이를 총론(총론,개론)에 앞서 배운다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ꡔ도서ꡕ에는 인도와 중국에서 전개된 거의 모든 불교사상이 언급되고 있다. 대략 간추려보면, ꡔ아함ꡕ과 ꡔ바사(파사)ꡕ등의 소승불교(인천사체교), ꡔ해심밀경ꡕ ꡔ유가사지론ꡕ ꡔ성유식론ꡕ등의 유식(장식파경교), ꡔ중론ꡕ ꡔ백론ꡕ등의 중관(파상현성교), ꡔ화엄경ꡕ ꡔ밀엄경ꡕ ꡔ승만경ꡕ ꡔ원각경ꡕ ꡔ여래장경ꡕ ꡔ법화경ꡕ ꡔ열반경ꡕ과 ꡔ보성론ꡕ ꡔ기신론ꡕ등의 여래장사상(진심즉성교), 대통신수의 북종(식망수심종), 우두법융의 우두종(민절무기종), 신회의 하택종이나 마조의 홍주종(직현심성종)을 교와 선의 기본 틀로 삼아 또 다른 여러 경론과, 용수와 데바, 무착과 세친, 청변과 호법 등을 종횡무진으로 인용 비교하고 있다. 적어도 이에 대한 이해 없다면 ꡔ도서ꡕ는 화중지병(화중지병)이 될 수밖에 없다. a와 b를 모르는데 어떻게 a와 b의 비교 회통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사집과에서 ꡔ도서ꡕ를 배우고 사교과와 대교과에서 ꡔ금강경ꡕ(공종)․ ꡔ기신론ꡕ등과 ꡔ화엄경ꡕ(성종)을 배우는 것은 앞뒤가 전도된 경우로서, 누가 보더라도 소정의 교육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교육은 계통에 따라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차제방편은 불교학의 기본원칙이다. 의천이 말하였듯이 연못이나 강의 물도 마실 힘이 없으면서 어찌 대해를 삼킬 수 있을 것이며, 성문 연각의 이승법도 알지 못하면서 어찌 대승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부처님 또한 그의 법률(법률)이 점진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한 특성의 법률이야말로 일찍이 없었던 미증유의 법임을 밝히고 있다.25)
불교는 결코 계시종교가 아니다. ‘있어라’ 하니 있었던 것도 아니며, 그렇게 적혀있기 때문에 진리인 것만도 아니다. 문헌비평은 결코 현대 학문만의 특성이 아니다. 동아시아불교의 특징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교상판석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경전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통해 불교의 체계를 정립하려던 시도가 아니었던가? 다시 말하거니와 현행의 교과과정은 최소한 전통적인 교상판석도 고려되지 않은 무작위의 교과과정으로, 만약 그 같은 차제방편에 입각하지 않을 경우, 감히 말하건대 ‘구호’만 양산할 뿐이다.
4) 그 밖의 의문점들
앞서 언급한 문제점의 대강을 필자가 평소 지녔던 졸렬한 의문으로 간추리면 이러하다.
첫째, 조계종은 필경 선종임에도 어떠한 까닭에서 선종의 초조인 보리달마의 근본사상을 담고 있는 ꡔ이입사행론ꡕ이나, 그가 “인자(인자)가 의지하여 깨달음을 얻고 세상을 제도할 수 있는 경이다”고까지 말한 ꡔ능가경ꡕ을 배우지 않으며,26) 6조 혜능의 법을 잇는다고 하면서 ꡔ육조단경ꡕ을 배우지 않는 것인가? 또한 어떠한 까닭에서 서당지장에게서 심인을 받은 도의국사를 종조로 하고 태고보우를 중흥조로 한다면서 ꡔ태고어록ꡕ 등을 배우지 않으며, 나아가 청허와 부유의 양 법맥을 계승한다면서 그들에 이르는 ꡔ선종사ꡕ를 선수(선수)하지 않는 것인가?
둘째, 소견에 의하면, 우리에게 전해진 불교사상은 크게 초기불교-아비달마불교(이상 소승)-대승 공관-유식-여래장-이에 근거한 중국의 성종 계통으로 발전하며, 천태나 화엄의 양대 교판에 따를지라도 대개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후설), 여래장 이전의 불교는 어디서 배우는 것인가? 대저 그것이 내전인가, 외전인가? 이에 대한 이해 없이 여래장으로 직입(직입)하는 것은 씨앗이나 싹은 보지 않고 문득 꽃만 보는 형국이며,27) 초등과정이나 중등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현행 강원에서 시행하는 졸업논문의 태반이 내전(성종) 밖의 주제인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셋째, 세간에서 흔히 행해지는 ‘불교기초교리강좌’에서는 대개 4성제 8정도 3법인 12연기, 그리고 대승불교(반야 공사상)가 강의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디서 배우는 것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기초’이기 때문에 독학하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불타 깨달음의 본질이 ‘연기’라고 하지만, 주지하듯이 현수법장은 그의 교판에 따라 연기를 업감연기(12연기, 즉 소승)-자성연기(유식)-진여연기(여래장)-법계연기(화엄)로 이해를 달리하였다. 각각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아야 하겠다. 업감연기설이 어려운가, 법계연기설이 어려운가?28)
일반적으로 상종(상종)으로 일컬어지는 아비달마(소승교)나 유식(대승시교)에 대해서는 불교학자들조차 어렵다고 말한다. 어렵기 때문에 배우지 않는 것인가, 소승 혹은 ‘대승의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에 배우지 않는 것인가? 시작이 어려운데 어찌 끝(종교,즉 ꡔ기신론ꡕ)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시작이 없었는데 어찌 끝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넷째, ‘어렵다’는 문제와 관련하여 강원의 학인스님들께 물어보아야 하겠다. 사집이 어려운가, 사교가 어려운가? 말 그대로 대교가 어려운가? 간경의 준비단계라는 사집을 통해 보다 어려운 사교를 알 수 있고, 사교를 통해 마침내 대교에 들 수 있는 것이라면, 설혹 사집이 어렵다고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가 않다고 한다면, 현행 교과과정에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섯째, 현실적인 문제로서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강원을 마치고서 동대 불교대학이나 승가대학에 들어갔다는 말은 흔히 듣는 말이지만, 불교대학 등을 마치고 강원에 들어갔다는 말은 대단히 희유한 말이다. 대교(대교)의 이력을 마치고 다시 불교대학에 들어가 불교학개론이나 아함(소승), 중관(대승시교) 등을 배운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강원 4년, 불교대학 4년, 도합 8년의 기간은 결과에 비해 너무나도 기나긴 세월이다.
4. 개선방안--교과과정의 이원화
1) 교학(교학)으로서의 불교학
대저 불교(불교)란 무엇인가? 엄격히 말한다면 그것은 불타의 말씀(Buddha vacana) 즉 불타 교법(교법)일 것이다.29) 그렇다면 다른 이의 말과 마찬가지로 단어 문장 등을 본질로 하는 그의 말씀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깨달음(자내증)이었다. 결국 불교란 불타의 깨달음을 근거로 하여 이룩된 경․율․논의 삼장을 말하며, 불교학이란 삼장을 소재로 한 전체적이고도 체계적인 학적 이해체계를 말한다.
따라서 사실상 ‘불교’와 ‘불교학’은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타의 말씀은 그의 깨달음을 근거로 한 가설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서 거기에 일정한 이론적 체계를 부여하려는 노력은 필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불교의 학적 체계는 이미 불타 재세 시 마트리카(matṛka,논모)라고 하는 형식으로 시작하여 불타입멸 후 산출된 수많은 아비달마(abhidharma)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다시 시대와 지역에 따른 이론적 반(반)․합(합)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밀교로까지, 혹은 천태 화엄 내지 선종으로까지 전개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불교는 결코 단일한 체계가 아니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전개된 온갖 상이한 학적체계가 모여 이루어진 매우 복합적이고도 유기적인 체계이다.
우리는 대개 그러한 제 체계를 시대적 구분에 따라 초기불교-아비달마(부파, 혹은 소승)불교-초기대승-중기대승-후기대승의 밀교로 나누기도 하고, 혹은 그 중의 두드러진 각각의 이론체계에 근거하여 유부 아비달마(바이바시카)․경량부․중관학파․유가행파로, 혹은 중국의 교판가(교판가)에 따라 소승교․대승시교(시교)․대승종교(종교)․대승돈교(돈교)․대승원교(원교)로, 혹은 화엄․아함․방등․반야․법화 열반(혹은 장․통․별․원교) 따위로 나누기도 한다.
필자 사견에 의하는 한, 이 모든 체계의 중심문제는 제(체), 법성(법성), 실상(실상), 진여(진여), 진실(진실), 실제(실제), 진면목 등의 말로 일컬어지는 진실(참)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거짓이라면, 진실은 무엇이며, 거짓된 현실세계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러한 진실을 어떻게하면 바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지난 2500년의 불교사상사는 이에 대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 어떤 하나의 해석체계는 필연적으로 그에 반하는 또 다른 해석체계를 낳게 되었고, 종합이 이루어졌으며, 그에 근거한 새로운 해석이 모색되었다.
예컨대 화엄의 ‘사사무애법계’가 아무리 절대적 이념이라 할지라도 ‘이사무애법계’의 ꡔ기신론ꡕ과 ‘이법계’의 중관과 유식, ‘사법계’의 아비달마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교설이다. 누가 말했다던가?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불교적으로 말하면 인연 없이 생겨난 것은 없다. 유식의 용어로 말하면 의타기(의타기)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우리는 역사와 전통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그러한 온갖 체계를 대소(대소)와 승렬(승렬)과 정사(정사)와 선오(선악)로 판가름 짓고 있다. 인연은 사라지고 결과만 남아있을 뿐이다. 문제는 사라지고 해답(주장)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련의 사상들을 각기 개별적인 독립된 교설로 여기는 것은, 그리하여 대소 승렬로 규정짓는 것은 다시 유식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변계소집(편계소집)의 허망분별일 뿐이다.
도대체 그들 사이에 무엇이 문제였던가? 무엇이 문제였기에 그 오랜 세월동안, 그토록 많은 학파(종파)들과 사상들이 나타나고 사라졌던가? ‘문제’를 갖지 않은 해답은 생명이 없다. 비판적 해석이 부재하는 철학사는 진정한 철학사가 아니다. 철학사는 비판의 산물이다. 인도의 저명한 현대철학자 라다크리슈난은 말한다.: “창조적인 정신이 철학을 떠났을 때, 철학은 철학사와 혼동되었다.”30)
불교사상사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철학사를 마치 지고의 철학인양 착각하고 있듯이 불교사상사를 지고의 불교(깨달음)인양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오늘날 ‘불교’에 관한 우리의 담론 또한 다만 상식이고 장식이며, 앵무새의 지저귐처럼 반복되는 구호나 선전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불교연구의 주류는 원전중심주의, 문헌실증주의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자체에 대한 연구라기보다 사실상 불교의 문헌학이다. 이는 물론 불교학의 기초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와 더불어 그것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철학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 또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문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반성과 그에 따른 세계에 대한 참다운 인식(정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주장(해답)에 앞서 그것의 문제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혹은 어떤 특정의 종의(종의)에,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유롭고 독립된 탐구가 결여될 때 진정한 교학의 연구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어떠한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비판정신에서 비롯된다. 비판이 없는 곳에 주체적 사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31)
2) 종학(종학)으로서의 불교학
그러나 다른 한편 불교학은 일반의 학문과는 다른 특성을 갖는다. 다만 진리에 대한 객관적 개념적 철학적 인식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실천적 종교적 인식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대개의 인도철학이 그러하듯이 육체적 경험(예컨대 선정)에 수반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전자의 진리인식을 ‘교(교,desana,언교)’라 하고, 후자의 진리인식을 ‘종(종,siddhānta,종취)’이라 하였다. 전자가 이해(요별,vijñāna)를 본질로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깨달음(자증,pratyātma)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ꡔ대비바사론ꡕ에서는 이를 세속정법(세속정법)과 승의정법(승의정법)이라고 하였다.32) 이는 바로 세계존재의 실상에는 궁극적 측면의 실상(종취법상,siddhāntanaya lakṣaṇa)과 언어적 측면의 실상(언교법상,desanānaya lakṣaṇa)이 있기 때문으로, 불교일반에서 전자가 피안이라면, 후자는 그것으로 건너가는 배에 비유되며, 전자가 달이라면, 후자는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된다.
세존의 정법(정법)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교법(교법)이고, 둘째는 증법(증법)으로, 교법이란 계경(계경)과 조복(조복,즉 율)과 대법(대법,아비달마)를 말하며, 증법이란 삼승의 보리분법을 말한다.33)
대혜(대혜)여, 일체 이승과 모든 보살에게는 두 가지의 법상(법상)이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종취법상와 언설법상이 그것이다. 여기서 종취법상이란 스스로 증득한 수승한 법상으로, 언어 문자의 분별을 떠나 무루계(무루계)에 들어 자신의 경지와 실천을 성취하면 일체의 올바르지 못한 생각[부정사각]을 초월하여 마구니와 외도를 제압하며, 지혜의 빛이 생겨나니, 이를 종취법상이라 한다. 언설법상이란 9부(부)의 여러 교법을 말하니, 일이(일이) 유무(유무) 등의 대립적 견해를 떠나 교묘한 방편으로 중생들의 마음에 따라 이러한 법에 들게 하니, 이를 언설법상이라고 한다.34)
그렇다면 불타의 승의정법(승의정법)은 무엇인가? 직접적이든[현시] 간접적이든[밀지] 언어문자(즉 경론)에 의해 드러나고 지시되는 불타 자내증의 본질은 무엇인가? 흔히들 연기이고 중도라고 하지만, 무엇이 연기이고 무엇이 중도인가? 이는 시대에 따라 그 해석을 달리한다. 우리는 이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법장에 의하는 한 네 종류의 연기가 있었으며, 승랑에 의하는 한 세 종류 혹은 네 종류의 중도가 있었지만, 홍주종에 의하는 한 화엄의 사사무애의 법계연기조차 지해(지해)의 분별일 뿐이며, 하택종에 의하는 한 삼론의 약교이제설(약교이체설)에 근거한 언망려절(언망려절)의 중도 또한 영지(영지)가 부정된 공적(공적)일 따름이다. 무엇이 진실인가?
사실상 유부 아비달마의 무상과 무아도, 중관의 일체개공도, 유가행파의 유식성도, ꡔ기신론ꡕ의 진여일심도 모두 불가설 불가득의 경계로서, 그들은 그것을 구경각의 본질로 이해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인가?
혹은 생성 변화하는 차별의 세계는 바로 진여일심의 여래성(성)이 나타난 것[성기]인가, 그 자체가 바로 일승의 묘법[성구]인가? 나아가 자성 청정심은 어떠한 사량 분별도 개입되지 않은 채 단박에 깨달아야 하는 것[돈오]인가, 점진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점수]인가? 단박에 깨닫는다 할지라도 깨닫고 나서 다시 닦아야 하는 것인가, 그것으로 구경에 이른 것이라 해야 하는 것인가? 어느 편이 진실인가?
혹은 구경각의 경계에서 보면 다 같은 도리인가? 그렇다면 온갖 논란과 시비는 어찌하여 일어나게 된 것인가? 아직 구경각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인가?
이러한 깨달음 내지 내적 통찰의 문제는 철저하게 주관적인 문제이자 신념의 문제이다. 진리를 승인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것이자 주체적인 것이다. 누가 아무리 진리라고 외쳐도 내가 그것을 진리로 승인하지 않은 이상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는 합리성에 근거한 토론이나 논쟁에 의해 결정될 문제가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성향의 문제이고, 선호의 문제이며, 신념의 문제이지 진위(진위)나 정사(정사)의 문제가 아니다. 필자는 동아시아에서의 교판이 바로 이 같은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지의에 의하는 한 화엄의 종의는 현실이 결여된 순일(순일) 무잡(무잡)의 특별한 것이기 때문에 별교(별교)였지만, 법장에 의하는 한 천태의 종의는 다만 회삼귀일의 동교(동교)의 일승일 뿐이다. 그들은 이같이 ‘별교’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였던 것이다.
필자는 앞서 ꡔ해심밀경ꡕ의 ‘일승방편 삼승진실’과 ꡔ법화경ꡕ의 ‘삼승방편 일승진실’ 중 어느 편이 진실인가? 하고 물은 적이 있다. 이 같은 물음은 끝없이 제기될 수 있다. 중관(공종)과 유식(유종) 어느 편이 진실인가?35) 중관 또한 귀류논증파(prasaṅgika)와 자립논증파(svātantrika) 중 어느 것이 진실이며, 유식의 경우 유상유식과 무상유식 중 어느 것이 진실인가? 대승에서는 설일체유부의 제법실유론을 무상의 이치도 모르는 마구니의 망언 따위로 여기지만, 유부에서는 무자성론(무자성론)이나 종자(수계) 상속설을 벙어리가 꿈속에서 잠꼬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조소하고 있다.
종학(종학)은 전통과 신념에 따른 것으로, 교학과는 구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깨달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종학은 교학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되며, 종학의 신념이 보다 강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교학의 궁극적인 귀결점(종취)임을 밝혀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이른바 교판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다만 맹목적인 추종만을 요구할 경우, 전통과 신념은 어느 순간 균열 상을 드러내게 될 것이고, 다른 교학체계가 비집고 들어와 어느 순간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3) 교판에 의한 차제 방편성의 회복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조계종의 강원에서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 그 동안 강원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논의는 빈번하였을지라도 교과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시안은 접하지 못하였다.36) 필자는 국외(국외)의 인사로서 이에 대해 언급할 어떠한 자격도 갖추지 못하였지만, 그리하여 매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기왕에 문제점을 들추어낸 이상 이에 대한 소견도 아울러 밝히기로 한다.
혹자는 현대 불교학과 전통 불교학의 충돌을 우려하기도 하지만, 그리하여 ‘승가학’이라는 일찍이 없었던 개념을 제시하기도 하였지만,37) 강원교육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많은 이들이 현행교과과정이 역사적 사실(예컨대 실증적 문헌비판)에 근거하지 않고 중세에 이루어진 교상판석에 근거하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38)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전통의 불교학은 궁극적으로 현대의 불교학과 충돌하지 않으며, 또한 앞서 언급하였듯이 현행 교과과정이 교상판석에 근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문헌비판에 따라 기존의 전통과 신념이 훼손되는 경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대승 비불설(비불설)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20세기 초 호적(호적)에 의해 제기된 초기선종사의 제 문제가 기존의 신념체계에 일대 충격을 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돈오의 간화선 자체를 훼손시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ꡔ기신론ꡕ이 2세기 인도의 마명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해서, 설혹 중국에서 찬술된 것이라고 해서 그 영향력이 상실되지 않는다. 만약 그 영향력이 상실되었다면, 그것은 다른 교학과 대별되는 ꡔ기신론ꡕ의 종의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대저 불교가 무엇인가? 전설(전설)에 따라 일단 ‘부처님의 말씀’이라 해두자. 그렇다면 어떤 부처님의 말씀을 말함인가? 2500년 전 가필라국에서 태어나신 부처님을 말함인가, ‘불교학개론’ 시간에 배웠던 법신(법신)이나 보신(보신)으로서의 여래를 말함인가? 백천억의 화신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실증될 것인가? 수많은 대승의 보살은 또 어떠한가? 이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비전과 관계되는 문제이다. 인류 역사상 ‘일체 중생이 바로 부처이다’고 하는 명제나 보현보살의 8대 행원, 법장보살의 48대원보다 더 장대한 비전과 염원이 어디 있었을 것인가?
필자는 불타의 자내증으로부터 비롯된 불교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인간 삶 저편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고, 서양의 종교나 철학과는 달리 그러한 비전을 직접적으로 현실의 삶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를 승가로 이해하고 있다. 다만 문제는 그 같은 비전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으로, 그것에 관한 탐구와 해석이 과정이 이른바 불교사상사였다고 이미 말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어떤 특정의 불교는 외부의 도전뿐만 아니라 내부의 도전에도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난 세월의 불교사상사였다.
인도에서 찬술된 논서를 한번이라고 읽어본 적이 있는 이라면 알 것이다. 그들이 불교내부의 온갖 이설(이설)과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외도들과 얼마나 격렬한 대론(대론)을 펼쳤는지를. 그것도 원고지 천장 이천 장의 분량이 아니라 만장 이만 장의 분량으로. 불교는 결코 ‘있어라’ 하니 ‘있었더라’고 하는 그러한 종교가 아니다. 필자는 맹목적인 유심주의를 경계한다. 그것을 한방에 깨달으면 인간만사(만사) 끝장난다는 식의 담론은 더더욱 경계해야 한다고 믿는다. 선인(선인)들은 화엄에서 말한 유심의 도리를 드러내기 위해 ‘유식’이라는 교해(교해)를 펼쳤으며, 그러하였기에 ‘진여일심’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있었다. 고타마로부터 유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거의 천년의 세월이 흘러야만 하였다. 만약 이를 간과할 경우, 구호만이 난무할 뿐으로, 앞서 ‘문제는 사라지고 주장(해답)만이 남았다’고 한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아울러 사교 중 ꡔ능엄경ꡕ과 ꡔ원각경ꡕ은 위경(위경)으로 의심받는 것으로, 이는 현대 문헌고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미 송대 이래 제기된 설이다.39) 이에 대해서도 혹자는 ‘종교란 어디까지나 실천이 주(주)가 될 뿐 아니라 일체가 유심조(유심조)이므로 후현(후현)들은 의경(의경)이니 위경이니 하는데 관심 갖지 말라’고 하였지만,40) 이 역시 교(탐구)와 종(신념)을 구분하지 못한, 불교를 초역사적인 이념으로만 간주하려는 지극히 수구적인 방어심리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승경전이 비불설이라 하여 어찌 폐(폐)할 수 있을 것이며, ꡔ부모은중경ꡕ이 위경이라 하여 어찌 버리겠는가? 다른 사회현상과 마찬가지로 종교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용납하지 않고서, 문헌학적 입장에서 위경이니 비불설이니 하여 이를 폐하고 오로지 ꡔ아함경ꡕ만이 불설이라 할 경우(이 역시 송지자에 따라 취사선택된 것이다), 결국 교조주의 내지 근본주의로 돌아가게 될 것이며, 이는 도리어 불교에 반(반)하는 것이다.
필자는 전통불교학이 현대의 불교학과 본질적으로 충돌하는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대안’이 없는 한 전통적인 교상판석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불교심리학 불교윤리학 등으로 개편하자는 목소리도 있지만, 불교 자체가 인간학일뿐더러 기본적인 교학의 천착 없이 이러한 응용학만을 배울 경우 지금보다 더 심각한 교학적인 혼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 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지의(지의)의 천태교판과 법장(법장)의 화엄교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의는 그의 ꡔ법화현의ꡕ에서 이른바 남3 북7로 일컬어지는 열 가지 학설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데,41) 남조의 세 가지는 승유(승유)가 주장한 유상교(유상교)․무상교(무상교)․포폄앙양교(포폄앙양교,ꡔ유마경ꡕ등)․만선동귀교(만선동귀교,즉 ꡔ법화경ꡕ)․상주교(상주교)의 5시교(시교)로 종합될 수 있으며, 북조의 일곱 가지 중 가장 큰 범주는 불타발타라 등이 주장한 인연종(인연종,비담)․가명종(가명종,성실)․광상종(광상종,삼론)․상주종(상주종,열반)의 4종에 법계종이나 진종(진종, ꡔ법화경ꡕ)․원종(원종,ꡔ대집경ꡕ)을 더한 것이다.
지의의 5시 8교에서 ꡔ법화경ꡕ의 위상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은 장교(장교)․통교(통교)․별교(별교)․원교(원교)의 화법4교이다.
장교란 삼장교(삼장교)의 줄임말로서, 대승불교 흥기 이전의 ꡔ아함ꡕ과 아비달마를 말한다. 이 불교에서는 대개 세계를 분석하여 5온․12처․18계 등과 같은 개별적인 요소[법]로 환원시키는 방법론을 채택하여 이른바 아공(아공) 법유(법유)를 주장한다.
통교(통교)란 앞의 장교(소승)와도, 뒤에 설할 별교․원교(대승)와도 통하는 교법이라는 뜻으로, 대승의 일반적 가르침인 공사상을 말한다. 지의에 따르면 장교에서도 공을 설하지만 그것은 사물을 분석 해체함으로써 드러나는 공(석법입공관, 줄여 석공관)인 반면, 여기서의 공은 사물 자체가 공(체법입공관, 줄여 체공관)이기 때문에 ‘아’도 ‘법’도 모두가 공이다.
별교(별교)란 앞의 장교․통교와도, 뒤에 설할 원교와도 구별되는 대승 보살만의 특별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즉 앞의 두 가지는 공(공,즉 단공)만을 설하지만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가설[가]로서 해명하며, 마침내 양자가 서로 일치[상즉]한다는 중도[중]를 지향한다. 다시 말해 별교에 있어서 중도는 공과 가설에 비해 특별한 것이며, 목적론적인 것(단중)이기 때문에 별교로서, ꡔ화엄경ꡕ이 대표적인 경전이다.
원교(원교)란 원만 원융하고 완전한 가르침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어떠한 차별 대립도 허용하지 않는 총체적 입장이므로 회삼귀일(회삼귀일), 삼승을 일불승으로 귀일시키는 ꡔ법화경ꡕ이 여기에 해당한다.
부처님의 일체 경교(경교)를 소승교․대승시교(시교)․대승종교(종교)․대승돈교(돈교)․대승원교(원교)로 판석한 화엄종의 교판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소승교는 현상의 세계를 분별하여 무아(즉 아공)의 도리만을 설하고 세계를 구성하는 온갖 인연 즉 제법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구사종(구사종)을 말한다.
대승시교는 일체개공을 설하여 대승의 단초가 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여기에는 현상을 분별하여 그것을 공(무자상)으로 이해한 상시교(상시교)와 일체의 공을 설하는 공시교(공시교)가 있다. 전자가 유식사상(법상종)이라면 후자는 중관사상(삼론종)에 해당한다. 대승종교는 대승의 종극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여래장사상을 설하는 ꡔ능가경ꡕ ꡔ대승열반경ꡕ ꡔ대승기신론ꡕ을 말하며, 대승돈교는 말씀을 통한 점진적인 방법이 아닌 즉각적 통찰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ꡔ유마경ꡕ이나 선종(선종)을 말한다.
대승원교는 대승의 원만한 가르침 혹은 완전한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ꡔ화엄경ꡕ을 말한다. 여기에는 다시 다른 삼승의 교(소승․시교와 종교의 점교․돈교)와 공통된 일승 즉 동교일승(동교일승)과 삼승의 교와는 차별되는 별교일승(별교일승)이 있는데, 지엄에 의하면 ꡔ화엄경ꡕ은 일체를 초월하는 별교인 동시에 일체를 포함하는 동교으로서의 일승원교였지만, 법장은 ꡔ화엄경ꡕ을 오로지 별교일승으로 해석하여 천태교학과 엄격히 구분하였다.
이상과 같은 교판의 공통분모는 소승과, 대승의 양대 산맥인 반야중관과 법상유식, 상주종(상주종) 혹은 종교로 일컬어진 ꡔ열반경ꡕ의 불성사상이나 여래장사상이다. 이는 문헌비평에 의해 설정된 현대적 의미의 인도불교사상사(초기불교-아비달마불교-대승초기-중기)와도 다르지 않다.
원측(원측) 또한 비록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ꡔ해심밀경ꡕ에 근거하여 4제법륜(소승)․무상(무상)법륜(반야중관)․요의(요의)법륜(법상유식)이라는 3시교판을 세웠고,42) 의천(의천) 역시 “ꡔ구사론ꡕ을 배우지 않으면 소승의 설을 알지 못하며, 유식을 배우지 않고서 어찌 대승시교(시교)의 종의를 알 것이며, ꡔ기신론ꡕ을 배우지 않고서 어찌 대승종교(종교)와 돈교(돈교)의 취지를 알 것인가?”라고 하였으며,43) ꡔ도서ꡕ에서 설하고 있는 교문(교문)의 상(상)․공(공)․성(성)의 3종(종)도 바로 이것이었다.44)
혹은 화엄의 4종법계에서 사법계는 소승 아비달마에, 이법계는 시교인 중관과 유식에, 이사무애법계는 여래장사상에 해당한다.
따라서 소승(초기불교와 아비달마), 반야중관, 유식, 여래장의 네 가지 사상은 어떤 식으로든 강원의 교과과정으로 편입되지 않으면 안 된다. 혹자는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교과과정만으로도 벅찬데 어떻게 4년이란 짧은 시간에 이 모든 것을 수학할 수 있다는 것인가?’라고.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차제 방편적으로 설치되기만 한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으며, 도리어 현행 교과과정에 대한 이해도 배가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이원적 교과과정
이상에서 제시한 개선방안에 따라 구체적인 교과과정을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현행 강원의 수학기간을 2년씩 나누어 교학과 종학을 이수할 것을 제안한다. 아울러 ꡔ치문ꡕ(이는 내용에 비해 글도 어렵고 분량도 많아 읽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번역 발췌) ꡔ초발심자경문ꡕ ꡔ사미(니)율의ꡕ ꡔ청규ꡕ와 같은 율신의 법을 익히는 것은 행자기간 동안 수습하거나 별도의 과정으로 설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 교학의 교과과정
① 불타전: 삼보의 첫 번째인 부처님에 대한 강좌가 없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다. 불타의 생애 내지 대승의 불타관을 익혀 교조에 대한 기본관념을 분명히 해야 한다.
② 초기불교와 아비달마(혹은 ꡔ아함경ꡕ과 ꡔ구사론ꡕ): 이는 모든 교판의 첫 번째 단계로서, 소승교․장교(장교)․아함시․비담(비담)․사제교(사체교)․구사종(구사종)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근년의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의 고조를 떠나 대승불교를 알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개설되어야 한다.
아비달마(팔리어로는 아비담마)는 초기경전에 대한 해석체계로서, 대단히 많은 종류가 있지만, 북전(북전) 아비달마의 대표적인 논서인 ꡔ구사론ꡕ이 적합하다. 혹자는 이에 비견되는 남전인 ꡔ청정도론ꡕ을 말하기도 하겠지만, 대승에서 비판 부정하는 소승은 바로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를 말하기 때문에, 이후 불교의 거의 모든 술어는 여기서 정리 정의되고 있을뿐더러 현장(현장)과 진제(진체)의 신구(신구) 역어(역어)가 그들의 다른 대승경론의 역어와 동일하여 계통적으로 대승불교를 학습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ꡔ구사론ꡕ이 학습되어야 한다.
③ 반야 공사상(혹은 ꡔ금강경ꡕ과 ꡔ중론ꡕ): 반야 공사상의 기본입장은 무상(무상) 즉 파상(파상)이며, 그것은 일차적으로 유부 아비달마에서 주장한 제법의 자상(자상)에 대한 파상이다. 그러나 불교계 일반에서 알려진 반야공관은 규봉종밀이 말한 것처럼 파상현성(파상현성) 즉 진공(진공)의 묘유(묘유)로, 이는 여래장이라는 스크린을 통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반드시 ꡔ중론ꡕ을 함께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용수의 ꡔ중론ꡕ은 대승교학의 출발점이라고도 할만한 것일뿐더러 천태교학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만약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ꡔ금강경ꡕ을 시교(시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점이 제기될 경우, 16회의 ꡔ반야경ꡕ중 다른 것(예컨대 ꡔ소품반야ꡕ)을 택해도 무방할 것이다. 혹은 종학과정에서 ꡔ금강경ꡕ을 ꡔ오가해ꡕ 등으로 대체하면 될 것이다.
④ 유식사상(혹은 ꡔ해심밀경ꡕ과 ꡔ성유식론ꡕ): 유식은 여래장사상의 기초일뿐더러 화엄의 법계연기의 실상인 3성(성) 6상(상)설의 이론적 기반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수많은 경론이 있지만, 중국 법상종의 소의경론이었던 이를 택하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⑤ 여래장사상(혹은 ꡔ능가경ꡕ과 ꡔ기신론ꡕ): 유식을 거쳤다면 ꡔ기신론ꡕ의 이해는 한결 용이할 것이다. 이에 관련된 경으로 ꡔ열반경ꡕ이나 ꡔ여래장경ꡕ ꡔ승만경ꡕ등을 들 수 있겠지만, ꡔ능가경ꡕ은 보리달마가 혜가에게 심인으로 전한 것이며, ꡔ기신론ꡕ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아울러 교육방법에 대해서는 여기서 거론할 사항이 아니지만, 이상의 모든 교과목의 교재는 반드시 종단차원에서 번역(대론인 경우 발췌)하여 강좌에 맞게 편집해야 한다. 강원이 불교학자를 양성하는 기관이 아닌 이상 이 모두의 한문 원전을 통독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그럴 수도 없다. 그리고 일방적인 주입식 강의가 아닌 전통적인 논강방식은 세간에서도 배워야 할 대단히 진취적이고도 효율적인 교육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경우 이상 교과과정은 2년의 기간동안 충분히 대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현행 교과과정 중의 나머지도 2년 동안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2) 종학의 교과과정
① ꡔ능엄경ꡕ ꡔ원각경ꡕ ꡔ화엄경ꡕ: 이미 교학과정에서 여래장사상을 이수하였으므로 성종계통인 이러한 경들 또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현행의 사교와 대교를 사집보다 먼저 설정한 까닭은 선교일치를 알기 위해서는 교(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ꡔ서장ꡕ과 ꡔ선요ꡕ는 이후 선수행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므로 실제적으로 사교입선(사교입선)의 최후단계에 이수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로서, 사집은 사교나 대교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이미 언급하였다.
② 선종사상사(혹은 조계종사): 조계종이 선종인 한 반드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이를 익혀야 여러 조사들의 계보와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③ ꡔ육조단경ꡕ: 이 역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④ ꡔ도서ꡕ와 ꡔ절요ꡕ: 선교일치의 구체적 이론적 근거를 학습해야 한다. 이미 교학의 과정에서 아비달마와 유식(상종), 중관(공종), 여래장(성종)을 배웠고, 또한 이미 선종사상사를 배웠기 때문에 훨씬 빠르고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⑤ ꡔ서장ꡕ과 ꡔ선요ꡕ: 조계종의 수행법이 간화선이라면, 지엄의 말대로 이제 마지막으로 지해(지해)의 병을 소제하여 활로(활로)를 제시해야 하는 것으로, 보조 또한 ꡔ육조단경ꡕ과 ꡔ화엄경ꡕ을 깨달음의 전기로 삼았고, ꡔ대혜어록ꡕ을 읽고서 크게 깨쳐 마음의 응어리가 일시에 해소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45)
5. 맺음말
오늘날처럼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내일을 가늠하기 어렵다. 미래의 불교도 가늠하기 어렵거니와 미래 사회에서는 어떤 불교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에 안주할 수만도 없으며, 그렇다고 전통을 허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것이 오늘의 딜레마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아비달마논서를 주로 읽어왔었다. 그 취지는 도외시한 채 ‘실유론’이란 이름 하에 단칼에 파(파)하는 세상의 무지와 선동에 절망하기도 하였으며,46) 역사의 과정이라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는 아비달마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중관과 유식도 그 전철을 밟았다. 생각해 보라. 중관과 유식을 운운하게 된 것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를. 그러나 그것도 말(언설)로써만 운운일 뿐, 필자는 ‘중관(중관)’과 ‘유식관(유식관)’을 통해 열반을 추구한다는 이를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우리는 과연 규봉종밀의 불교이해를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47) 그가 지해종사(지해종사)이기 때문에 이렇게 물은 것이 아니라 그의 ‘지해’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기회가 있을 적마다 불교는 결코 단일한 체계가 아님을 역설하였다. 혹자는 그럴 경우 ‘불교는 독립된 종교로서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고 우려하고 있다.48) 그러나 불교는 독립된 종교로서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불타 열반 후 그가 남긴 교법(교법)의 정리와 해석을 둘러싸고 일어난 부파분열을 반드시 부정인 시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불타교법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타교법은 결코 도그마가 아니다. 그러하기에 불교는 아비달마불교를 거쳐 대승의 중관․유식․여래장으로, 혹은 남방의 제국에서는 남방의 불교로, 티베트에서는 티베트의 불교로, 동아시아에 이르러서는 동아시아의 불교, 이를테면 천태․화엄․정토․선 등의 온갖 불교로 백화 만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돈오일심이 우리 불교의 모든 것이 되었다. 그것도 형형색색의 누더기를 걸친 채, 회통불교라는 이름아래. 그러나 시대가 변하였다. 몇 번의 클릭으로 2천년 전의 불교로 다가갈 수도 있으며, 저 험난한 탕글라고개 넘어있는 티베트불교와 조우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질 것이며, 혹여 자동번역 변환장치만 개발된다면 지금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간화선의 위기’ 운운하는 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일심진여의 위기’ 운운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비판불교’라는 이름 하에 그 단초는 이미 구축되었다. 이미 기존불교에 식상한 많은 이들이 초기불교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있으며, 남방불교나 티베트불교에 경도되어 있다.49)
혹자는 ‘현대불교학이 성하면 불교가 쇠퇴한다’고도 하였으며, ‘현대불교학은 훼불(훼불)의 불교학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쇠퇴하고, 훼손되는 불교라 함은 어떤 불교를 말함인가? 이미 수많은 불교가 훼손되고 쇠퇴하였다. 말한 대로 소승불교가 그러하였으며, 중관․유식불교가 그러하였다. 다만 낡아빠진(훼손된) 누더기(방편)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그것을 두고 ‘역사가 증명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 도리어 그 같은 말에 절망할 뿐이다. 불교는 역사주의가 아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신행(신행, 540-594)의 삼계교(삼계교)를 공부하면서, 비록 지해(지해)였기는 하지만 전율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1400년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이제 그만 하자. 필자는 학회의 요청으로 주제넘게 이 같은 과제를 떠맡게 되었고, 조계종이라는 특정의 교단을 염두에 두고 현행 강원의 교과과정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에 대해 평소의 느꼈던 바를 조금은 도발적으로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요지는, 기왕의 교과과정을 보다 정확하고 분명하게 탐구하자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비록 설정된 교과과정이 전통적인 교학과 종학에 기초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반드시 비판적이고도 주체적인 탐구와 해석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다만 옛 방식에 따라, 선인들이 주석하였던 방식대로 그것을 읽고 새기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말도 있지만, ‘승가’에는 현재의 승가(현전승가)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승가(사방승가)도 존재한다. 미래의 승가에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현전의 승가에서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논 평
“교학(교학)과 종학(종학)”에 대한 논평문
각 묵*50)
먼저 재가 학자로서 출가자들의 강원교과과정이라는 민감한 주제로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글을 써주신 권오민 교수님(이하 발제자라 칭함)께 감사드린다. 행간 가득 배어나오는 발제자의 불교와 불교사에 대한 고결한 문제의식과 승가의 교육에 대한 진지한 점검과 제언에 논평자도 크게 공감을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분들이 계시는 한 한국불교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발제자는 원고지 230매에 달하는 장문의 발제문을 통해서 먼저 현행 불교강원의 교과과정 전체에 대한 개요를 정확하게 나열하고, 이러한 현행 교과과정이 언제부터 한국불교에서 가르쳐지기 시작했는가에 대해서 ① 김영수의 설(월담설제(1632-1704) ② 권상노의 설(백암, 1631-1700) ③ 진진응/이능화의 설(1681년에 사교와 대교의 확정) 등을 소개하고 있다. 조계종의 이념서적이랄 수 있는 사집을 확정한 벽송지엄(1464-1534)을 현행 강원교과과정의 효시로 본다면 이는 이미 500년이 되었고, 최종 완성된 시기를 두고 보더라도 300년 이상이 된 교과과정이랄 수 있다.
다음에 현행 강원교과과정의 문제점으로 ① 선종 중심의 교과과정 ② 성종중심의 교과과정 ③ 차제방편을 무시한 교과과정을 들고 있으며, 그 밖의 의문점들로 ㉠ 선종임에도 초조보리달마의 가르침을 배우지 않는다 ㉡ 여래장 이전의 불교는 어디서 배우나 ㉢ 불교기초교리강좌에서 가르치는 4제 8정도 3법인 12연기 대승불교(반야 공사상)은 어디서 배우나 ㉣ 사집-사교-대교의 문제 ㉤ 강원마치고 다시 동대나 승가대로 진학하는 이유 등을 들면서 현행 강원교과과정의 문제점들을 점검해보고 있다. 이것은 논평자도 크게 공감하는 부분이며, 조계종 교육원의 소임자들과 강원 교직자 스님들도 귀담아 들어야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발제자는 현행교과과정의 개선 방향으로 ① 교학과 종학의 이원화와 ② 교판에 의한 체제 방편성의 회복을 들고 있으며, 이것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현행 4년의 과정을 2-2제로 바꾸어 전반 2년은 교학 이수과정, 후반 2년은 종학 이수과정으로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교학의 교과과정으로는 ① 불타전 ② 초기불교와 아비달마 ③ 반야 공사상 ④ 유식 ⑤ 여래장 사상을 들고 있으며, 종학의 교과과정으로 ① 능엄경, 원각경, 화엄경 ② 선종사상사 ③ 육조단경 ④ 도서와 절요 ⑤ 서장과 선요를 들고 있다. 이러한 발제자의 제안 역시 조계종 교육원에서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논평자는 발제자의 이러한 지적과 제언에 크게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세부적이고 사소할 수도 있는 이론(이론)은 제기하고 싶지 않다. 대신에 발제자의 지적과 제언에 덧붙여서 몇 가지를 제언하면서 논평문을 접고자 한다.
첫째, 우열론에 바탕한 교상판석의 중국 종파불교를 이제는 벗어나야한다. 우열론이 아닌 각 시대와 각 교파의 불교를 그 자체로서 완성되고 완결된 가르침으로 존중해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발제자의 “소승(초기불교 및 아비달마), 반야중관, 유식, 여래장의 네 가지 사상은 어떤 식으로든 강원의 교과과정으로 편입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둘째, 사교입선의 선종중심의 이념구현을 더 이상 강원의 교육목표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이미 선원은 기본선원 교과과정을 확정하여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강원에서 선종중심의 교과과정을 운영할 필요는 더 이상 없다고 본다.
셋째, 아직도 한문 중심의 교재를 강원에서 고집해야하는가? 지금 출가하는 스님들은 거의 한문에 문외한이거나 백지상태에 가까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미 평균연령도 33세가 넘는다. 이들에게 생소한 한문강의가 큰 의미가 있는가? 치문의 한자는 어렵다. 일학년부터 이런 어려운 한자와 한문으로 주눅 들게 할 필요가 있는가? 한자는 단지 매개 언어일 뿐이다. 이러한 매개 언어 습득에 치중하다보면 알맹이인 불교교육은 등한시 되어버린다.
넷째, 교재를 모두 한글화하여야한다. 한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가르쳐야한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언어인 한글로 불교자체를 가르쳐야한다. 한글로 출가자의 기본인 교학 수행 전법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해주어야한다.
다섯째, 무엇이 불교인가를 사색하고 고뇌하게 가르쳐야한다. 그 기준은 초기불교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출가 비구는 역사적으로 실존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치고 제정하신 법과 율을 받아 행하고 받아 지니는 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실천적으로는 사제/팔정도, 사상적으로는 연기/무아의 원칙에 어긋나는 불교는 과감하게 비판하고 버려야한다. 진여자성, 여래장, 불성, 일심을 힌두의 아뜨만과 동일시하여, 이것이 불교의 핵심인양 호도하고 있는 것이 성종중심의 한국불교라고 논평자는 감히 진단한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힌두교와 같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는 스님들도 있다. 그리고 발제자도 지적하듯이 불교교양대학에서는 예외 없이 모두 사제, 팔정도, 12연기, 3법인/3특상, 온․처․계, 37조도품 등 초기불교의 기본법수를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다. 강원에서도 이러한 기본 가르침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 한국불교는 큰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으며, 의식이 있는 재가자들로부터 외면 받게 될 것이고 지금도 받고 있다고 본다.
여섯째, 궁극적으로는 범어원전을 직역한 교재로 교육을 해야 한다. 그래야 중국이라는 산을 넘어서 진정한 한국불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불교 승가가 반드시 이루어내어야 할 문제이다. 중국불교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아울러 세계불교에 당당히 동참하면서 세계불교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범어불전 중심의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범어불전중심의 공부가 되면 자연히 초기불교, 아비달마, 유식, 중관, 여래장 계열 등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고, 불교 2600년사를 통해서 불교가 어떻게 시대적, 사상적, 지정학적, 정치적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 혹은 변질되어왔는가에 대한 안목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불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일곱째, 구체적 방법으로 발제자의 제언처럼 현행 4년제 강원을 2-2제로 바꾸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논평자의 입장에서 정리해보자면, 처음 2년은 기본과정이 되고 다음 2년은 전공과정이 되어야한다고 본다. 1․2학년 때는 사제․팔정도 연기․무아에 입각하여 각 시대와 각 교파의 불교를 개론적으로 정리하여 정확하게 이해하고 3․4학년 때는 학인의 관심에 따라서 초기․아비담, 중관, 유식, 여래장, 선, 밀교 계열의 전공분야를 정해서 전공과정을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3․4학년과정은 각 강원마다 전공분야를 정해서 학인스님들이 그 강원으로 전학하여 공부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본다. 예를 들면 해인사는 여래장 계열, 송광사는 중관계열, 통도사는 유식계열, 화엄사는 초기․아비담 계열 등의 전문교과과정을 개설하여 학인 스님들이 3․4학년 때에는 이들 강원으로 전학하여 전공과목을 깊이 공부하는 방법을 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본다. 이런 기본과정과 전공과정 교육을 마친 뒤 자연스럽게 학림이나 대학원의 심화과정으로 진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여덟째, 마지막으로 욕심을 버려야한다. 학부의 철학과 4년 동안에 세계의 모든 철학을 가르칠 수 없다. 오히려 학부과정은 철학개론과 철학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강원 4년 과정에서 불교 2600년사에 전개되어온 대가들의 심오한 불교학을 다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다. 강원의 기본과정은 불교하는 방법과 중노릇하는 방법을 철저하게 가르치는데 치중해야할 것이다. 불교하는 방법은 초기불교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 없는 불교란 애초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본 가르침을 철저하게 가르치고 각 교파, 각 시대, 각 나라의 불교전개의 역사와 그 주요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 1․2학년 과정이 되어야할 것이다. 이런 바탕 하에 3․4학년의 전공과정에서는 자기가 공부할 방향을 설정해서 평생을 공부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방향설정을 해주어야한다. 강원은 이 정도로 족하다고 본다. 그 외 심화과정은 전문학림이나 대학원과정을 택하면 될 것이다.
현행 강원교과과정에 대해서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예리한 진단과 고결한 제언을 해주신 발제자 권오민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두서없는 논평문을 접는다.
논 평
“교학(교학)과 종학(종학)”에 대한 논평문
김 방 룡*51)
1. ‘현행 불교 강원의 교과과정을 다시 생각한다.’는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이 글은 현 조계종 강원교육의 교과과정에 대한 개요와 함께 그 문제점을 분석하고 개선방향을 제시한 글이다. 교학에 대한 식견이 뛰어나신 권오민 교수님(이하 논자)께서 한국불교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바탕으로 하여 평소 생각하고 있는 승가교육에 대한 문제점과 그 대안을 그대로 잘 드러낸 글이라 생각한다.
삼보의 하나인 ‘승가교육’의 문제에 대하여 재가의 학자들이 왈가불가 한다는 것 자체가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을 학자들은 가지고 있다. 승가 또한 승가교육의 문제를 공론화나 여론화하기 보다는 승가 자체적으로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왔다. 누구나 꺼리기 쉬운 주제에 대하여 불교(학)에 대한 자신의 종합적 안목을 토대로 하여 직론(직론)을 편 본고는 승가교육의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불교학계의 교과과정에 대하여도 반성의 여지를 같게 하였다.
“불교 강원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학인 개개인의 자질문제와 관계될 뿐만 아니라 불교도 전체의 자질문제, 나아가 한국불교의 명운이 걸린 문제라 할 수 있다”는 논자의 지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제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현승가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점과 한계에 대하여 따끔하게 지적하고, 미래 이상적인 승가상을 확립하기 위한 다양하고도 진지한 담론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중 승려의 자질 향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승가교육에 대한 학계의 논의는 시기적으로 적절할 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2. 현 조계종단 차원에서 승가교육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4년부터라 할 수 있다. 종단개혁입법에 의하여 승가교육에 대한 본격적인 체계를 갖추려는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95년 교육원이 개원되고 교육과정은 다음과 같이 6단계로 정비되어 진다.(《승가교육》제4집, pp.193-194)
• 기초교육 : 사미, 사미니 수계 전 6개월 이상. (행자교육원)
목표 - 행자에게 출가자로서 필요한 기초교학, 계율, 종교원리 승의 등을 체현케 하며, 보살도 실현자로서 원력을 세우게 한다.
• 기본교육 : 강원 / 중앙승가대학 / 동국대 / 기초선원.
목표 - 조계종지∙원시경전∙대승경전을 망라한 경전교육, 교학, 수행, 전법을 하나 되게 하는 교육을 하며, 계율의 체득과 불교역사를 바르게 이해케 한다. (기본 교육을 마쳐야 구족계를 수지함)
• 전문교육 : 승가대학원 / 학림 / 율원 / 선학연수원
목표 - 경․율․선의 심화발전과 전승인력 양성
• 일반교육 : 구족계 수지 이후 지도자 교육과정
목표 - 수행자․지도자로서의 정체성 함양과 완성
• 직무․직능교육 : 직무별 / 분야별 교육과정
목표 - 교역직 선발을 위한 교육, 전법(교화) 기능 연마, 지도자로서의 정체성 함양과 완성.
• 특수교육 : 문화예술/전문분야/전법인력 교육과정
목표 - 포교에 필요한 전문분야 교육, 문화예술분야에 관한 교육
3. 위의 2의 내용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현재 조계종의 승려 교육은 (비록 최근의 일이며,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의 내실을 갖추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차치해 두고) 그 체계에 있어서 상당부분 정리되어 있다.
따라서 조계종의 승려 교육을 주제로 한 본고에서는 ‘2005년 현재 조계종의 승려교육체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으며, 그 주관 기관인 교육원의 활동은 어떠한가’ 하는 객관적인 인식의 토대 위에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교육원을 방문하지 않더라고 《승가교육》1-5집에는 이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논자의 날카로운 문제제기와 대안제시에도 불구하고 여러 곳에서 현행 조계종 승려교육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가 부족한 점이 드러나고 있다.
첫째, 논자는 현행 기본적인 교과과정을 사미과,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를 나열하고 이에 대하여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승려의 교과과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현 조계종 교육과정인 기초교육, 기본교육, 전문교육, 일반교육, 직무․직능교육, 특수교육 등의 교과과정을 전체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적어도 기초교육과정과 기본교육과정의 교과목의 전부를 나열하고 이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이루어 졌어야 한다.
여기서 다룬 <강원의 교과과정>은 전체 교육과정 중 기본교육과정에 속하며, 이 기본교육과정 또한 강원과 함께 중앙승가대학, 동국대, 기초선원이 있으며, 강원이란 이 중 하나의 선택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둘째, 만약 ‘강원’만을 제한하여 교과과정의 문제를 제기한다 하더라도, 전국 강원의 교과과정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어야 한다. 적어도 2000년 12월 22일 교육원 회의를 통하여 마련된 다음의 <강원 교과개선 표준안>(《승가교육》제 4집, p.153)을 가지고 분석이 이루어졌어야 좀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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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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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요
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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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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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범망경
조계종사
포교론
4. 비록 <강원 교과개선 표준안>이나 현재 강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객관적인 교육과정을 조사해서 논의를 진행한 것은 아니라 해도 논자가 제시한 교과과정 개선안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논자가 제시한 교과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학제
교학(2년)
종학(2년)
과목
불타전 : 부처님의 생애와 사상
초기불교와 아비달마 : 아함경, 구사론
반야공사상 : 금강경, 중론
유식사상 : 해심밀경, 성유식론
여래장 사상 : 능가경, 기신론
(단 행자 기간동안에 치문은 발췌해서 공부하고, 초발심자경문, 사미(니)율의, 청규 등을 미리 공부할 것)
능엄경, 원각경, 화엄경
선종사상사 혹은 조계종사
육조단경
도서, 절요
서장, 선요
이와 같이 논자가 제시하고 있는 교과개정 개선안의 큰 특징은 교학과 종학을 나누고 교판에 의하여 차제방편성을 회복하고자 한 점이다. 이러한 주장은 교육원의 <강원 교과개선 표준안>과도 분명한 차이가 나는 점이다. 즉 교학을 단계를 밟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난 후 선수행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교과과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5. 본고에서 의문 나는 점을 질문 드리고자 한다.
첫째, 논자는 교학과 종학을 나누고 교학의 차제방편설에 의한 교과과정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대학의 불교학과와 조계종단의 교육방식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계종은 분명 불교의 많은 종파 중 선종에 해당하는 하나의 종파이다. 불교의 각 종파는 자기 종파가 제시하고 있는 교리체계와 수행법에 의지하여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논자의 정의로 말하면 ‘종학’ 만이 필요한 것이며, 그 종학의 체계 속에 교학적 밑바탕을 마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불교학자를 양성하는 기관이 아닌 조계종이란 한 종단에서 교학과 종학을 나누어 교과과정을 설정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그 의견을 묻고 싶다.
둘째, 현행 조계종의 체제로 볼 때 기본교육은 선원, 강원, 중앙승가대학, 동국대, 중 하나를 이수하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논자가 제시하고 있는 교학과 종학을 나누어 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면, 강원을 반드시 마친 후에 선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된다. 만약 그렇다면 이미 대학교육을 마치고 30대 후반 이후에 출가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강원의 마치고 선원에 가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강원에서 교학과 종학을 나누어 실행한다면 선원, 중앙승가대, 동국대 등의 기본 교육기관의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지 논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셋째, 교과 과정의 개선과 더불어 교육의 내실화 문제가 중요하다. 교재개발의 문제, 질 높은 강사의 확보, 교육 방법론의 개선 등이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본고에는 이 점에 대한 언급을 소략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논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6. 기타 논자의 몇 가지 지적 중에는 조계종의 교육체계에 대한 강한 비판들이 들어 있다. 대표적으로 사집과 사교의 순서 문제, 달마와 혜능의 사상이 교과과정에 생략되고 있는 문제 등은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예를 들어 사집과 사교의 순서 문제에 대하여 돈오를 표방하는 선종의 입장에서는 사집 이후 사교를 배우는 것이 순서에 맞다고 평자는 생각한다.) 기타 논자의 많은 지적들에 대해서는 이미 논의가 이루어진 부분이 많으며, <강원 교과개선 표준안>에 수용되어 있는 측면도 많다고 생각한다.
1994년에 와서야 승려의 교육과정에 대한 종단적인 논의가 진행될 정도로 한국불교의 교육은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 <조계종사>의 근대편과 고중세편이 나온 것도 최근의 일이며, <간화선 지침서> 또한 이제야 나오게 될 정도로 승가교육의 체계화 및 승려의 자질향상의 문제는 조계종의 현안 중의 현안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논자가 1994년 이후 교육원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된 승가교육의 개혁안과 교육과정을 총체적으로 검토하여 그 문제점과 대안을 비판적으로 제시하였다면 좀더 좋은 논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아울러 강원교육과 선원교육의 유기적 관련성을 염두에 두고 강원의 교과과정을 논의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학에 대한 차제 방편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 대안의 교과목을 제시한 논자의 견해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으며, 특히 중앙승가대나 동국대 등의 교육에 있어서는 많은 참조가 되리라 생각한다.
끝으로 좋은 논문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신 권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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