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懷疑論(회의론)의 克服(극복)과 12處說(처설)의 가르침 6
촉(觸, Sparsa)이란 무엇이냐 하면 충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충돌이 발생할까요?
발생합니다. 지금 누가 변했느냐 하는 겁니다. 내가 변한 겁니다. A로 있다가 어느 시점에 B로 갔을 때 진짜 나는 어느 것입니까? A나 B나 같다고 한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죠. 그러나 우리는 12처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보이는 것만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우리예요. 그러다 보니 보이는 내용이 서로 달라진 A와 B에 대해서 다르다고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것이 육식이었죠.
달라졌다면 나는 달라진 겁니까. 아까 말했다시피 ‘나’는 상일성을 가져야 ‘나’라고 할 수 있고, 상일성을 갖고 있다면 변하지 말아야 하는데 내가 변했다 이거예요. 내가 요청하는 바는 변하지 말아야 하는데 내가 경험하는 바는 변했다는 거예요. 무엇인가 우리가 갈등을 일으킬 만한 상황이 제시되죠. 그래서 촉은 충돌을 바탕으로 한 갈등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겁니다.
A를 나라고 할지 B를 나라고 할지 서로 충돌하게 됩니다. A와 B는 서로 다른데 서로 다른 것이 나라는 자리에 들어가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엄청난 충돌이 벌어집니다. 얼마나 큰 충돌이 벌어지는지 설명을 해드리죠. 앞 시간에 모든 것은 보여야만 존재한다는 논리를 설명해드렸죠. 그렇게 보이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하려면 신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타당했습니다. 그러면 열반은 보이느냐, 보이지 않는데도 있다라고 했다 이거예요. 그럼 어떻게 12처설하고 모순되지 않게 설명할 수 있느냐, 신이 안 보인다고 없다는 경우와 열반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차이가 납니다. 신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도 영원히 안 보입니다. 그래서 절대 타자라고 부릅니다. 절대적으로 인식론적으로는 나와 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열반은 수행이라는 방법을 통하면 보입니다. 차이가 나죠. 따라서 12처설은 어떻게 말하느냐 하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도 인식이 안 되는 것은 없다고 말하면서 폭을 넓히기 시작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보일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조건을 명시하고 보인다라고 말하라는 겁니다.
어떤 수행을 통해서도 끝내 인식되지 않는 것을 있다라고 하겠느냐, 12처설은 그런 것은 없다라고 합니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수행과 방법을 통해서 인식이 되면 그때는 있다라고 하자는 겁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논의가 허용이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 여러분들이 열반에 대해서 있다고 해야 할까요, 없다고 해야 할까요? 지금은 안 보이니까 없다고 해야 되지만 내가 수행을 통해서 자증(自證)을 한다면 그때는 있다라고 하는 식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는 보여야 있는 것이다라는 논리가 바탕이 된 거죠. 즉, 12처에 바탕을 두니까, 열반은 지금 안 보이지만, 수행을 통해서 자증이 되면 있다라고 하겠다 하는 논리도 같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문제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나옵니다. 전생을 봤습니까, 못 봤습니까? 우리가 어제가 있었다는 걸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어제를 보았고 그것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있다라고 할 때는 기억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기억이 있어야 인식이 된 것입니다. 기억이 될 때는 어제라고 하고 기억이 안 될 때는 없다라고 합니다. 그럼 우리의 전생은 있다고 해야 할까요, 없다고 해야 할까요? 열반이 존재한다는 것과 전생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근거가 훨씬 달라요. 열반은 수행을 통해서 자증이 되기 때문에 있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생은 문제가 다릅니다.
전생이 없는 것이 아니냐라고 의심할 수 있는 이유는 일단 전생이 기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생도 열반처럼 수행을 통해서 기억해 낼 수만 있다면 있다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전생은 이렇게 해도 기억해낼 수 없다고, 전제를 한번 해봅시다. 그랬을 때도 전생이 있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전생은 있다라고 할 수 있는 논리가 12처에서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얼마나 깊이 있는 근거를 준비해 놓고 전생은 있다라고 하시는지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없다라는 건 무엇을 보고 없다라고 합니까? 없는 것이 기억이 될 때 없다라고 합니다. 실제 우리의 전생에 대해서 ‘있다’라고도 ‘없다’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있었다고도, 없었다고도 자신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전생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보고 우리는 없다라고 합니까? 있었던 것이 없어진 것을 보고 없다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없다라는 말을 언제 쓰는지 잘 보아야 됩니다. 없다라는 것은 무엇인가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 무엇인가라는 것은 언제든지 한번은 인식이 되었어야 주제로 등장할 것 아닙니까? 이것은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어쩌면 전생이 있다, 없다라는 말은 성립이 안 되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전생이 있는지, 없는지 말 못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은 언제부터 시작이 될까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초의 기억은 언제부터일까요?
심리학자들이 연구한 견해로는 인간은 똑같이 공통적인 시점을 기억하고 있다고 봅니다.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은 어릴 때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누구나 꾸는데, 이것은 바로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맨 처음 세상 속으로 나올 때의 기억이 자신이 세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경험과 결합되어서 높은 곳에서 뚝 떨어지는 것으로 재현이 된다고 합니다. 사람의 기억은 대체로 특별한 것들이 기억이 되지, 평범한 것은 기억이 되지 않습니다.
대개 모태 안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모태 안은 너무나 편안하기 때문에 특별히 기억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태에서 분리되어 태어나는 순간은 기억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아들은 어머니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무척 싫어합니다. 그와 같은 충격을 다시 받기 싫은 것이지요.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현실적으로 전생을 기억하기는 힘듭니다. 전생은 기억하지도 못하고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기억해 낼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전생을 어떻게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방법이 있습니다. 전생이 있었는데, 전생의 기억이 깨지는 단계가 있다. 그 단계를 명확히 밝혀서 보편타당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비록 기억되지 않아도 전생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부처님께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전생의 기억이 깨어지는지를 알아야 되겠지요. 바로 촉(觸)에서 깨집니다. 충돌 때문에 깨져버립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이 집에서 나올 때 가스불을 잠궜는지, 안 잠궜는지 기억이 명확하지 않을 때가 있었지요. 전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의 의문은 이 느낌과 아주 닮아 있다는 걸 여러분은 느낄 겁니다. 만약에 가스불을 안 잠궜다면 안 잠궜다는 기억이 명확히 있어야 할 것이고, 잠궜다면 잠궜다는 기억이 있어야 잠근 거예요. 그런데 잠근 것도 아니고 안 잠근 것도 아닌 이와 같은 상황이 왜 벌어지는 줄 아십니까? 동일한 시점에 서로 상반된 생각이 부딪쳐버리면 둘 다 무효화되어 버립니다.
촉이란 그런 대치된 생각이 서로 충돌하는 겁니다. 완전히 다르다라고 안 A와 B가 한 공간에서 충돌하는 겁니다. 충돌하면서 A에 대한 것도 B에 대한 것도 부서져 버립니다. 변화에 있어서 가장 완벽한 변화는 죽음을 정점으로 한 변화입니다. A라는 존재가 B라는 존재로 완전히 바뀌는 경우는 죽음입니다. 그 죽음의 전후법에 대해서 완전히 다르다라는 생각이 들고 어느 것이 진짜 나인가 하는 경우가 벌어진다고 합시다. 어느 것을 나라고 하겠어요?
촉의 모습은 깨달음의 대상으로 남아 있을 만큼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촉이 어느 정도의 충돌을 의미하느냐 하면 기억을 상실하게 하는 정도의 충돌을 의미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기억이 깨집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살펴볼 줄 아는 능력을 지혜의 눈이라고 해서 혜안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을 가져야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안에 끝없이 축적됩니다.
육촉(六觸) 곧 충돌이 발생하면 그 다음에 수(受)라는 것이 발생합니다. ‘수’는 존재의 느낌인데 이것도 정확한 모습을 포착하기란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애가 발생합니다. 애란 갈애입니다. 끊임없이 좋은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것입니다. 이 주제들이 다 문제입니다.
앞 시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경전은 문제를 제시하는 겁니다. 그랬을 때 특히 육육법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혜안이라고 하죠. 부처님은 이 지혜의 눈을 얻은 것을 전제로 해서 일체 모든 것을 육육법으로 설하신 것입니다. 그냥 육안을 가진 자에게는 이와 같은 얘기가 통할 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보이는 내용으로서 존재하고 보는 자로 존재한다는 얘기로 끝냈어요.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세상에는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까지 포함하여 세상을 살피면 모든 것은 육근, 육경, 육식, 육촉, 육수, 육애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가르침에서 12처에서는 보지 못한 존재의 비밀이 한 꺼풀 벗겨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닙니다. 존재의 비밀을 완전히 풀기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온, 12연기로 점점 더 심화되어 갑니다. 간략하게나마 그런 부분을 계속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최봉수(불교학자/철학박사)
[출처] 회의론의 극복과 12처설의 가르침|작성자 임기영양벌리영어논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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