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에게 부는 인도 붐-요가 그리고 뉴에이지 사상
요즘 인도 붐이 한창이다. 웰빙(well-being)과 힐링(healing)이라는 두 단어는 현대인의 삶의 질을 높여 주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주제다. 웰빙을 위해 채식 위주의 식단이나 요가 등을 선호하게 되고, 힐링을 위해 산사나 수도원을 찾거나 힐링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의 주요 행선지로 인도가 각광을 받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육체를 위한 웰빙과 정신을 위한 힐링을 동시에 기대할 수 있는 곳이어서 그런 듯싶다.
단적인 예로 요가를 들 수 있다. 요가는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이미 건강 프로그램으로 정착되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여서 소도시에까지 곳곳에 요가 학원이 들어섰고, 대부분의 헬스장이 요가 강습을 병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요가가 사실은 인도 힌두교 브라만 사제들의 득도를 위한 수행 방법으로 생겨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최근까지 요가는 사제들의 전유물로서 일반 서민은 이런 수행을 행할 수도 없었다. 인도 내에서도 요가의 대중화가 20세기 중반을 넘어서야 일어났다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롭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가의 발상지 인도에서조차 특정 계급이 종교적인 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었다니 말이다. 부연하자면, 요가는 종교적인 명상의 일종으로 시작된 것으로 일반인들에게 종교적 수행을 통해 심신이 맑아지고 건강을 회복하는 효과를 주면서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요가가 해외로 수출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비틀스 멤버들이 인도의 요기(Yogi)로부터 요가 수업을 받은 것이다. 그 이후로 전 세계인이 요가를 알게 되었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요가를 배우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한국도 20세기 후반부터 인도에 직접 가서 브라만 사제들에게 사사를 받고 돌아온 몇몇 요가 수행자들이 요가 학원을 차려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여기에 21세기 들어 웰빙 붐이 일어나면서 너도나도 배우는 단계까지 오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도의 고대 철학을 바탕으로 한 뉴에이지 사상은 더욱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음악, 영화뿐만 아니라 철학 사조 등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주고 있다. 뉴에이지 사상은 인간이 신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 각성을 통해 인간 내면에 있는 신성(神性)을 개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고대 우파니샤드각주1) 철학에서 말하는 ‘신이 내가 되고, 내가 곧 신이 된다’는 사상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뉴에이지 사상은 어떤 창시자나 종교적인 조직을 갖고 포교활동을 하는 다른 고등종교와 같지는 않지만 인도의 사상을 잘 대변해 주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도는 21세기 전 세계로 종교와 사상이라는 상품을 수출하고 있다.
고대 불교와 힌두교의 전파
기원전 6세기경 가우타마 싯다르타에 의해 창시된 불교는 당시 브라만교를 대체하는 세력으로 확장되었다. 북인도를 시작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갔는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실론 섬으로 진출했고, 북으로 히말라야를 넘어 중앙아시아 지역과 티베트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에 이르렀다. 또한 바닷길을 통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 영향으로 한국은 삼국시대 말기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고려 시대에는 국교로 장려되면서 조선을 거쳐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 민족 문화와 유산을 거론할 때 불교 유산을 빼놓으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한국 문화는 불교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인도는 고대부터 한국에 불교라는 수출품으로 이미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럼, 힌두교의 해외 진출은 어떠했을까? 인접한 네팔을 필두로 해서 동남아시아에 남아 있는 힌두교의 흔적이 현재까지 쉽게 확인된다. 인도네시아의 아름다운 섬 발리와 다른 섬의 몇몇 산악 부족들은 아직도 힌두교를 신봉하며 살고 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사원 유적군이 힌두교를 숭상한 크메르 제국의 유적이라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힌두 신의 전쟁 이야기, 《라마야나》 스토리가 동남아시아에 전통 문화로 자리잡았다는 것과 불교의 영향권에 있는 태국 또한 현재 왕을 힌두 신 중 하나인 ‘라마’라고 부를 정도로 힌두교의 흔적은 동남아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한다. 동남아시아도 불교와 함께 힌두교라는 정신 상품을 인도로부터 지속적으로 수입해 온 셈이다.
중세 이슬람이 수피즘으로 인도화되다
622년은 이슬람의 창시 원년으로 인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다준 해다. 마호메트가 알라신의 계시를 받아 새로운 종교를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하여 급속도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인도 아대륙(印度亞大陸)엔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정착하게 되었다. 11세기가 되어서야 아랍이 아닌 중앙아시아의 아프간, 우즈베크, 파탄족 그리고 페르시아인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이슬람교가 서서히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이슬람교는 페르시아의 우수한 정신문명을 흡수하고 고급 종교로서의 위용을 갖추고 난 후였고, 중앙아시아의 여러 인종을 아우르는 과정에서 다양성 속에 통합을 이루어야 하는 과제를 안은 채 인도와 만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슬람의 또 다른 전환점이 형성되었다.
그럼, 그 전환점이 무엇일까? 바로 이슬람 수피즘(Sufism)이다. 일명 이슬람 신비주의(mysticism)라고도 하는데, 이 수피즘으로 인해 민속 이슬람(Folk Islam)이 융성하게 되는 토대가 형성되었다. 유일신 사상과 강한 복종, 규율을 가르치는 이슬람교가 전혀 생소한 문화 속에서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슬람이 한 손엔 칼, 다른 한 손엔 코란을 들고서 강제로 개종을 시켰기 때문에 급속한 이슬람화가 가능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달리 말해 어떻게 이슬람교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삶 속에 녹아들어 갈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는 말이다.
아마도 수피즘이 그것에 대한 적절한 답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인도는 어떤 특정한 왕조가 현재의 영토를 아우르는 통일된 국가를 형성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힌두교라는 느슨한 종교적 유대감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각 지역마다 다양한 역사문화적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 힌두교도 이와 유사하게 여러 가지가 혼합된 종교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샤머니즘적 요소를 다분히 간직했지만 경전의 가르침을 좇는 무리가 있으며, 제의를 강조하는 부류도 있다. 특히 힌두교 내에 3억 3,000만이나 되는 신을 맞춤형으로 신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자를 신격화하여 숭배하기도 한다. 이런 종교적 바탕 위에 이슬람교가 정착했기에 토속 신앙을 흡수한 수피즘이 유독 인도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인도 수피즘은 이슬람 성자를 숭배한다. 성자의 무덤을 찾아가 기도하면 병이 낫거나 집안의 불운이 떠나간다고 믿었다. 델리에 있는 니자무딘 묘역은 그런 참배객들로 항상 붐빈다. 그 밖에 알라신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표시하기 위해 고행을 택하거나 금식 등 여러 행위를 하는데 이는 힌두교 수행에서 다분히 영향을 받은 것이다. 15~16세기 북인도의 이슬람 지배가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박티 운동(Bhakti Movement)각주2) ’이라 불리는 종교 부흥 운동이 성행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에서 나란히 이 운동이 일어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었고, 박티 운동의 성자 중 한 명인 구루 나나크(Guru Nanak)는 시크교(the Sikhism)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인도적 변형이 있었기에 이슬람이 힌두교와 공존하면서 인도에 뿌리내릴 수 있었고, 향후 인도에서 유행했던 수피즘이 다른 이슬람 지역까지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수피즘은 외래적인 것을 받아들여 인도적인 사상으로 변형시킨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간디의 사상에 온 세계가 열광하다
20세기 성자이면서 현실 정치인이기도 했던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물질주의로 병들어 가는 서구 사회의 폭력성에 대항하여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투영한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서구 사회를 감화시킨 인물이다. 간디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회, 정치 운동이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일어났으며, 그는 모든 약자들의 우상이 되었다. 사실 간디는 자신이 발명한 제품이나 기술로 인류 발전에 공헌한 것도 아니고, 인류를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경제인이나 학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갖고 있는 고상한 사상은 인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인류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스탠리 존스는 20세 초반 인도에서 활동했던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였다. 그는 간디에게 많은 영감을 얻어 간디의 사트야그라하(Satyagraha)각주3) 를 모방한 기독교 운동을 추진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간디의 아쉬람(Ashram)을 모방해 만든 기독교 아쉬람이 우타르칸드 주의 사트달(Sat Dal)에 세워져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이처럼 간디는 그를 종교적 교리로 설득하여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던 여러 기독교 선교사들로 하여금 오히려 그의 행동을 보고 설득당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한마디로 ‘간디’라는 상품은 사고파는 개념이라기보다 사상적 영향을 주고받는 개념으로 보았을 때 인기 있는 명품이었던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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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트 신학이 서구 기독교를 일깨우다
인도 기독교는 그 역사가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서구 선교사의 본격적인 포교 활동 이후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16세기 이후 포르투갈의 가톨릭 신부들의 포교부터 시작해서 19세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남인도와 북동부 지역에는 상당수의 달리트와 부족민이 집단 개종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현재 인도 기독교인의 80퍼센트가 그 조상이 하층 카스트 계급에 속한다. 이로 인해 힌두교가 주류인 인도 사회에서 기독교는 하층민의 종교로 취급당하기도 한다.
인도 기독교에서 발전한 달리트 신학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했다.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로 달리트가 설정되었다면, 이들을 해방시키는 구원자로 기독교의 예수가 등장하게 된다. 달리트 신학은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달리트라는 약자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해 놓은 주석서를 편찬했고, 국제 세미나나 학회에서 달리트 신학을 알려서 서구 중심의 기독교 신학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인도의 기독교는 분명 외래 종교임이 확실하지만, 달리트 신학은 인도 신학이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만하다. 마치 인도 수피즘이 인도적 이슬람을 탄생시켰듯이, 달리트 신학이 인도적 기독교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 신학인 달리트 신학은 나아가 다른 나라의 기독교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뉴에이지, 요가, 힌두교와 불교의 전파, 이슬람 수피즘의 영향, 인도식 신학의 영향 등은 인도가 정신세계 방면에서 세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도가 가지고 있는 부드럽지만 강한 힘(소프트 파워)이다.
[출처] 인도는 전 세계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작성자 임기영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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