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철학

상키야 철학의 修習法 / 정승석

수선님 2020. 4. 19. 12:30

상키야 철학의 修習法

 

정승석

Ⅰ. 상키야와 요가의 접점

알 비루니(Al-B r n )라는 페르시아 사람이 쓴 {인도誌}(Kit bal-

Hind)는 서기 1030년 무렵의 인도인의 생활이나 문화를 아라비아어

로 상세히 묘사한다. 여기서는 인도 지식인의 사고 방식으로 소개된

것 중에서도 상키야와 요가의 철학 사상의 색채가 농후하여, 당시에

상키야와 요가의 영향력이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인도의 지식층이 상키야와 요가의 철학을 그와 같이 선호했던 배경

으로는 여러 가지 이유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심층적으로 파악하기에 앞서 우선 간명하게 고려할 수 있는 그 이유

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인도의 정통 철학 중에서는 상키

야와 요가가 학파로서는 가장 유래가 깊고 일찍 성립하여 유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상키야와 요가가 각각 이론과 실천으로서

밀접한 유대 관계를 이루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양자

중의 어느 한쪽에 대한 선호는 자연스럽게 다른 한쪽에 대한 선호도

수반하게 된다.

그런데 위의 둘째 이유에는 상키야 철학이 그 이론의 구체적인 실천

법을 요가 철학에 위임하고, 요가 철학은 상키야의 이론을 채택하여

그 실천법의 타당성을 확보한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이 분야의 선구적 학자인 독일의 가르베(Garbe)는 일찍이 1896년에

출판한 {상키야와 요가}에서, "세계관, 有情觀, 심리관에 관한 일체

의 상키야적 사상이 그대로 요가 체계에 채용되어 있기 때문에, 인

도 사상에서 요가 체계를 상키야의 한 분파라고 보는 것은 정당한

견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서는 일찍이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가르베의 주장이 거의 정설처럼 통용되고 있다. 이에 따라 상키야

철학은 수행의 방향을 제시하는 형이상학적 이론을 정립하고, 요가

철학은 그 이론을 적용하는 구체적인 실천법을 제시한다는 인식이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그리고 그 이론의 실천법을 대변하는 것이 요

가라는 인식에서, 상키야 철학에서는 고유한 실천법을 기대할 수 없

다고 속단하거나 수행론적 의의를 상키야 철학에는 부여하지 않으

려는 경향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한 가지 문제를 좀더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

각한다. 이론과 실천으로서의 유대 관계가 성립되려면, 양자 사이의

접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접점은 이론면이나 실천면의

어느 일면에서만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양면에서 상대의 요소로서

인정될 때, 그 유대 관계는 더욱 밀접하게 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상키야 철학의 이론적 요소가 요가 철학에서 인정되고, 요가 철학의

실천적 요소가 상키야 철학에서 인정될 때, 양자의 밀접한 유대 관

계도 인정될 수 있다. 이 중에서 전자는 많은 고찰로써 확인되어 있

으나, 후자에 대한 고찰은 상대적으로 도외시되어 왔다.

이 글에서는 상키야 철학의 실천적 요소를 고찰하는 데 주력하여,

이론의 修習法으로 불릴 만한 상키야 철학의 실천 관념을 조명함으

로써 수행론적 의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주목할 만한 것

은 {상키야 카리카}(Sk)의 제51송이 제시하는 8성취이다. 이 8성취

를 해설하는 주석서들에서는 상키야 철학의 독자적인 수습법을 구

축하고자 하는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에서 필자가 특별히 주목한 것은, {金七十論}이 8성취를 해설

하면서 제시하는 6行觀이다. 상키야 철학의 많은 주석서들 중에서

도 오직 금칠십론만이 6행관을 제시하고 있다. 더욱이 금칠십론은

산스크리트 원본이 없이 漢譯으로만 전해져 있다. 이 점에서 6행관

에 대한 고찰은 한계를 갖고 있으나, 상키야 철학 이외의 문헌에서

볼 수 있는 유사 관념과 대비함으로써 그 수행론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Ⅱ. 8성취

대부분의 주석서들에 의하면 8성취에서 성취(siddhi)란 지혜를 얻는

수단이며, 이 지혜로써 해탈을 성취한다. 따라서 간단하게 말하면,

성취란 해탈의 지혜를 얻는 것이라고 이해되지만, 이것이 직접적으

로 또는 즉각적으로 해탈에 도달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성취는

해탈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지혜를 얻는 수단이며, 이 점에서 그것

은 간접적이거나 단계적인 해탈 수단이다.

해탈의 지혜를 얻는 여덟 가지 수단으로서 "①사색(思量, 숙려), ②

聽聞(語, 聲, 聞), ③독송(학습, 면학), ④⑤⑥세 가지 고통의 소멸(3

苦의 滅), ⑦벗을 얻음, ⑧보시(또는 淨化)가 8성취이다."

여기서 세 가지 고통이란 心身에서 기인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인

依內苦, 타인이나 동식물 등의 외적 원인에 의한 고통인 依外苦, 자

연 현상이나 신이나 정령 등에 유래한다고 생각되는 고통인 依天苦

이다. 3고의 멸은 3성취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Sk가 제1송에서 상

키야 철학의 목적으로 천명한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주석서들이 해설하는 8성취의 취지는 대체로 유사하지만,

소수의 주석서들은 열거의 순서상 중간에 위치하는 3고의 멸을 다

른 5성취보다 궁극적인 수단으로 간주한다. 전자의 이해를 다수설,

후자의 이해를 소수설이라고 한다면, 양측에서 독특한 견해를 제시

한 것으로는 전자를 대표하는 것은 금칠십론이고 후자를 대표하는

것은 {탓트바 카우무디}(Tk)이다. 즉, 다수설 중에서도 금칠십론은

8성취의 실천 방법으로 6행관을 제시한 점이 매우 독특하며, 소수설

중에서 Tk는 8성취 중의 보시를 정화로 간주한 점이 독특하다.

Tk는 Sk의 주석서들 중에서 바른 논리를 추구하는 표준적 주석으로

평가된다. 8성취에 대한 해설에서도 Tk는 소수설이기는 하지만, 3고

의 멸에 대한 해설이 대변하듯이, Sk의 사상을 객관적 논술로써 원

론적으로 반영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1. 다수설의 8성취

그러나 8성취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다수설에 반영된 것으로 간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다수설에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취지를

파악하는 데는 Tk와 같은 소수설이 유용할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가우다파다의 註}(Gb)의 설명으로써 8성취의 일반적 의미를 제시

한다. Gb를 채택한 것은 Gb가 8성취를 간명하게 설명하면서 다수설

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①사색은 여기서 무엇이 진리일까, 미래는 어떠할까, 무엇이 최고의

선일까, 어떻게 내가 내 존재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고 항상

헤아려 생각할 때와 같은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성찰함으로써 순수

정신(靈我, puru a)은 원질(自性, prak ti)과 다르며, 통각, 아만, 미세

요소, 감관, 조대 요소, 이 모든 것들이 다양하고 다르다는 지혜를

얻는다. 이런 방식으로 원리들에 대한 지혜가 발생하며, 이것으로

해탈을 얻는다. 이것이 사색이라고 불리는 첫째 성취이다.

口傳의 교시에 의해, 즉 ③聽聞에 의해 얻은 지혜로부터 원질, 통각,

아만, 미세 요소들, 감관들, 조대 요소들에 대한 지혜가 진전되며,

이로부터 해탈이 보증된다. 이것이 구전의 교시 또는 청문이라고 불

리는 성취이다.

베다와 다른 성전들의 ③학습으로부터 25원리에 대한 지혜가 획득

되고, 이로부터 해탈을 얻는다. 그래서 이 학습이 셋째 성취이다.

④⑤⑥세 가지 고통을 방지하는 것이 넷째 성취이다. 이것은 고려되

어 있는 구제와 더불어 스승을 섬기는 데 있으며, 해탈은 그(스승)의

조언과 교시에서 유래한다. 고통은 종류는 셋인 까닭에 이 성취는

세 가지이다. 따라서 앞의 세 성취과 함께 여섯 성취를 이룬다.

벗으로부터 얻은 지혜를 통해 해탈을 얻을 때, 이것이 ⑦벗들과의

교제라고 불리는 일곱째 성취이다.

⑧보시란 거처, 의약, 3杖, 발우, 음식, 옷 등을 베풀어 성자들을 돕

고 그들로부터 지혜를 얻을 때 구제를 얻는 것이다. 이것이 보시라

고 불리는 여덟째 성취이다.

다른 책들에서는 이 여덟 성취를 ①自度成(T ra), ②善度成(Sut ra),

③全度成(T rat ra), ④喜度成(Pramoda), ⑤重喜度成(Pramudita), ⑥

滿喜度成(Pramodam na), ⑦愛成(Ramyaka), ⑧遍愛成(Sad

pramudita)와 같은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이상과 같은 다수설에 의하면 8성취의 각 항목에는 수행 次第의 관

념이 고려되어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각 항목을 실천하는 데서 단

계나 순서를 요구하지 않으며, 각 항목이 독자적인 지혜 획득의 수

단으로 간주된다. 다만 마지막에 언급한 8성취의 별명에서 3고의 멸

(④⑤⑥)이 개념상으로는 단계적인 수단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Gb의 설명으로는 순차적인 喜度成, 重喜度成, 滿喜度成이 각기 어

떤 고통의 소멸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육티 디피카}(Yd)에 의하면, 依內苦의 소멸은 ④喜度成, 依

外苦의 소멸은 ⑤重喜度成, 依天苦의 소멸은 ⑥滿喜度成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Yd는 3고의 멸과 다른 수단들 사이에 단계 또는 인과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Yd에서는 의외고의 소멸인 희도

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통은 신체적인 것 등의 세 가지이다. 이것들 중에서, 달성하는 데

장애로서 서 있는 바람 등과 같은 신체적 고통을 아유루 베다에 설

명된 행위를 통해 파괴한 후에,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중의 어떤 것을

통해 [지혜를] 성취하는 것이 喜度成이라고 불리는 넷째 성취이다.

여기서 "앞에서 말한 세 가지"란 먼저 열거한 3성취로서 사색, 청문,

독송을 가리킨다. 그리고 "세 가지 중의 어떤 것을 통해"라는 조건은

나머지 重喜度成과 滿喜度成에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된다. 그렇다

면 여기서 사색, 청문, 독송이라는 3성취는 3고를 소멸한 후에 지혜

를 성취하는 수단으로 이해되어 있다. 따라서 이에 의하면, '3고의

멸 → 3성취(사색, 청문, 독송) → 지혜'라는 인과가 성립된다.

2. 소수설의 8성취

그러나 소수설을 대표하는 Tk는 이와는 상반하는 시각에서, 3고의

멸이 주요한(第一義的) 수단이고 나머지 5성취가 부차적(第二義的)

인 수단임을 먼저 천명하는 것으로 8성취를 해설한다.

소멸되는 고통은 셋이기 때문에 그 소멸은 셋이라고 말한다. 이것들

이 주요한 3성취이다. 그러나 그 [3고의 멸의] 수단이 됨으로써 다

른 5성취는 부차적이다. 그것들도 원인과 결과로서 확정되어 있다.

그 중에서 맨 앞의 독송을 특징으로 하는 성취는 원인일 뿐이지만,

주요한 성취(즉 3고의 멸)는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중간의 것(즉 다

른 성취)은 원인이기도 하고 결과이기도 하다.

이처럼 Tk는 8성취에 '독송 → 4성취(청문, 사색, 벗을 얻음, 정화)

→ 3고의 멸 → 지혜'라는 인과 관계가 고려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Tk는 이 인과를 전제하고서 나머지 5성취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스승의 입으로부터 자아(아트만)에 관한 지식(adhy tma-vidy )인 문

자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③독송(학습)이고 제1의 성취이며, 自度

成(t ra)으로 불린다. 그 결과가 말(聲, 聞)이다.

②말이란 文句이며, 말로부터 생긴 의미의 인식(artha-j na)을 함축

한다. ... 이것이 제2의 성취로서 善度成(sut ra)으로 불린다. 읽기와

의미에 의해 이 청문( rava a)은 2종이다.

①사색이란 思辨(tarka)이며, 聖敎(전승)에 모순되지 않는 논리로 聖

敎의 의미를 고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찰이란 의문과 반대 주장(p

rva-pak a)의 배제에 의해 自說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것을 聖敎 학

자( gamin, 베다에 정통한 학자)는 이해(manana)라고 부른다. 이것

이 제3의 성취로서 全成度라고 불린다.

스스로 성찰한 이해도 벗의 동의가 없으면 [바른] 이해가 아니다.

이 때문에 제2의 이해를 일컬어 ⑦'벗을 얻음'[이라고 한다]. 논리에

의해 스스로 고찰한 의미도 스승, 제자, 동료와 함께 담론되지 않는

동안은 신뢰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벗, 즉 함께 담론하는 스승, 제

자, 동료를 얻는 것이 '벗을 얻음'이며, 이것이 제4의 성취로서 愛成

(ramyaka)으로 불린다.

⑧정화(d na)란 識別智의 청정이다. '어근 d 는 정화의 의미이다.'라

고 말하는 이 어근으로부터 정화라는 말이 파생하기 때문이다. 尊師

파탄잘리가 "혼란이 없는 식별지는 3고를 떨쳐 버리는 수단이다."라

고 말한 그대로이다. '혼란이 없는'이란 청정이며, 그것(청정)은 習

氣와 顚倒(오류)를 제거함으로써 식별의 직접 체험(viveka-s k t-k

ra)을 청징한 흐름에 확립하는 것이다. 또 그것은 열심히 끊임없이

오랫동안 닦은 修習의 완성이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것(수습)도 정화에 포괄된다. 그리고 이것은 제5의 성취로서 遍愛成

(sad -mudita)라고 불린다.

이로부터 [성립되는] 세 가지 주요한 것(3고의 멸이라는 성취)은 ④

喜度成(pramoda), ⑤重喜度成(mudita), ⑥滿喜度成(modam na)이

라고 한다. 이상으로 성취는 여덟이다.

상키야 철학에서는 해탈을 독존(kaivalya)이라고 표현하며, 이 독존

을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인 수단을 식별지(viveka-j na)라고 표현한

다. Tk는 논리적 정연성을 갖추고서, 이 식별지를 확립하는 과정 또

는 수단으로서 8성취를 설명한다. 이에 의하면 독송과 청문은 사색

을 얻는 과정이며, 이 경우의 사색은 독자적인 이해(제1의 이해)를

의미한다. 그리고 '벗을 얻음'은 그 이해를 바르게 확립하는 실증적

이해(제2의 이해)를 의미한다. 이렇게 성립된 이해를 식별지가 되도

록 청정하게 하는 것이 정화이다.

8성취를 식별지라는 지혜의 수습 과정으로 이해하여 강조하는 입장

은 다수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Tk는 3고의 멸을 해탈에 도달하

기 직전의 과정인 양 이해하고 있으나, 다수설의 Yd는 3고의 멸을

지혜 수습의 조건으로 간주함으로써 오히려 지혜 수습의 위상을 제

고하고 있다.

Ⅲ. 6행관

8성취 중에서 독송과 청문은 상키야에서 추구하는 지혜가 어떠한

내용의 지식으로부터 형성되는지를 시사한다. Gb를 비롯한 다수설

에 의하면 그 지혜는 상키야의 전변설에서 열거하는 25원리에 대한

지혜이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원질과 순수 정신은 다르

다."라고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어 {자야망갈라}(J)는 청문에서 듣는 말이란 상키야의 교전

을 가리키며, 독송이란 상키야의 교전을 학습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다. 또 {마타라 브릿디}(Mv)는 스승 밑에서 상키야의 지식을 학습하

는 것을 독송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소수설에서는 이보다 객관적

이고 구체적인 성격의 지식을 제시한다. 즉 Tk는 그 지식을 "말로부

터 생긴 의미의 인식"이라고 이해하고, {상키야 찬드리카}(Sc)는

"동사와 명사의 격, 동사의 태로 이루어진 단어 집합의 분석"이라고

이해한다.

소수설도 상키야 철학을 대변하는 한, 그 지식의 원천이 상키야의

교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점에서 소수설은

25원리에 대한 지식 수련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데 주력했

다고 이해할 수 있다. 결국 8성취에서 추구하는 지혜는 일차적으로

25원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지혜이다. 바로 이 같은 인식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8성취 전체가 지혜 습득의 과정이나 수단임을 천명하는

것이 금칠십론의 6행관이다. 금칠십론은 다음과 같은 선언적인 명

시로부터 8성취를 해설한다.

이 8종은 6行[이라는 관찰]로 능히 성취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바라문이 출가하여 도를 공부하면서 이렇게 사유하는 것과 같다. 어

떤 것이 뛰어난 것인가? 무엇이 진실인가? 무엇이 최후의 궁극적인

것인가? 어떻게 하여야 지혜를 성취하여 드러낼 수 있게 되는가?

[그는] 이렇게 사색(思量)함으로써 지혜를 얻는다. [다른 원리들과

는] 원질(自性)이 다르고, 통각(覺)이 다르고, 아만(慢)이 다르고, 5

종의 미세 요소(5唯)가 다르고, 11종의 감관(11根)이 다르고, 5종의

원소(5大)가 다르며, 순수 자아(眞我)가 다르다라고 25원리의 의미

를 [사색하는] 과정에서 지혜를 일으킨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6행관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8성취의

첫째인 사색(思量)을 설명한다.

이러한 지혜로부터 6종의 관찰을 일으킨다. 첫째는 5大의 과실을 관

찰하여, 그 과실을 보고 싫어함을 일으켜 5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다. 이것을 思量位라고 한다.

둘째는 11根의 과실을 관찰하여, 그 과실을 보고 싫어함을 일으켜

11근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持位라고 한다.

셋째는 이러한 지혜를 이용하여 5唯의 과실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

과실을 보고 싫어함을 일으켜 5유로부터 벗어난다. 이것을 如位에

든 것이라고 한다.

넷째는 아만의 과실과 8자재를 관찰하여, 그 과실을 보고 싫어함을

일으켜 아만 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至位라고 한다.

다섯째로 통각의 과실을 관찰하여, 그 과실을 보고 싫어함을 일으

켜, 통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을 縮位라고 한다.

여섯째는 원질의 과실을 관찰하여, 그 과실을 보고 싫어함을 일으켜

물본 물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 단계를 독존이라고 한다.

그 바라문은 이 같은 사색에 의해 해탈을 얻을 수 있다. 이 성취는

사색에서 유래하여 획득되므로 ①사색 성취라고 불린다.

상키야의 25원리 중에서 독존의 원리인 순수 정신을 제외한 나머지

24원리는 모두 물질 원리(신체적 기능이나 요소)에 속한다. 이 6행

관은 그 24원리를 여섯 단계로 구분하여 조대한 대상으로부터 미세

한 대상을 향해 사색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색의 과정인 6

행관은 먼저 천명했듯이, 8성취의 각 항목에 적용되어 각 성취와 해

탈을 매개하는 과정으로 설명된다. 다시 말하면 6행관은 8성취의 각

항목을 완결하여 해탈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다. 6행관의 마지막인

독존이 곧 해탈이다.

금칠십론의 이 같은 설명은 8성취의 어느 것이라도 해탈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개별적인 효용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 성취

가 해탈의 수단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6행관이다. 이 점에서 6행관

이란 식별지가 확립되는 과정이다. 즉 금칠십론이 생각하는 해탈의

과정은 '각 성취 → 6행관(식별지) → 해탈'이다. 그리고 금칠십론은

이 6행관에서 수행 차제의 관념을 도입한다. 이 수행 차제의 관념은

독송과 3고의 멸을 설명하는 데서 더 발전된 양상을 드러낸다.

독송과 3고의 멸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6행관에 앞서 독송의 8단계

와 25원리의 이해가 차례로 요구된다. 독송의 8단계란 "기꺼이 청문

하기를 바라고 → 마음을 쏟아 명료하게 듣고 → 잘 파악하고 → 잘

기억하고 → 원리를 이해하고 → 사색하고 → 판별하여 → 진실이

그대로 들어오게 한다."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3고의 멸에서도 적용

된다. 따라서 독송(③)과 3고의 멸(④⑤⑥)에는 '독송의 8단계 → 25

원리의 이해 → 6행관 → 해탈'이라는 차제가 고려되어 있다. 내용으

로 보아 이 차제는 사실상 청문(②)에도 적용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벗을 얻음(⑦)은 독송의 8단계가 효과를 거두지 못할 때 필요

한 수단이다.

다수설에 의하면 8성취의 마지막 항목은 보시(⑧)이지만, 이것만큼

은 다른 성취들과의 연관성이 희박하다. 따라서 이것은 소수설이 해

석한 대로 정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수습법으로서는

타당할 것이다. 8성취를 8淸淨道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는 불교의 대

지도론에서도 보시를 청정도라고 일컫는다는 점을 부연하고 있다.

여기서 청정도는 이 8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불교 이외의 일

반 수양법을 가리키는 通名인데도, 보시만를 청정도, 즉 정화로 간

주한다는 것은 상키야 철학 자신이 내리고 있는 평가라고 한다.

그러나 다수설의 이해를 따른다면, 보시는 수행자들에게 통용되는

일반적인 미덕이나 관행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Ⅳ. 8성취와 6행관의 수행론적 意義

상키야 철학의 핵심을 智報 해탈, 즉 지혜의 결과로서 얻는 해탈이

라고 표현하면서, 8성취는 이 같은 해탈에 대한 動力因과 그 결과를

해명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라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상키야의 핵

심을 지혜의 결과로서 얻는 해탈이라고 파악한 것은 매우 타당한 이

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점만을 의식하거나 강조하다 보면, 상

키야 철학에 내재된 실천적 성격을 간과하기 쉽다. 예를 들면 8성취

에 대한 다음과 같은 주장이 그러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8성취를 인과 관계 또는 목적과 수단에 연관하여

분석하거나 요약해서는 안 되며, 해탈을 위해 설정된 것임이 분명한

지혜의 길이라는 점이다. 오로지 8성취가 지혜의 길을 독특하게 규

정한다. 그러나 지혜의 길을 언급할 때, 각각의 방도와 지혜는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 둘은 동일하다. 그리고 해탈의 진정한 원

인인 지혜는 해탈과 별개가 아니다. 지혜의 완성은 곧바로 해탈의

완성을 이끈다. 그러므로 사색 등의 8성취는 곧장 해탈의 길로서 해

탈의 완성을 제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가 식별지를 가리킨다는 전제에서는 지혜가 곧

해탈이라는 이해는 동의할 수 있다. 이 경우의 지혜란 불교의 6바라

밀에서 강조하는 반야의 역할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앞에서 고찰

한 바에 의하면, 권위 있는 주석가들은 8성취를 이해하는 데서 목적

과 수단 또는 인과 관계를 고려했을 뿐만 아니라, 수행 차제적 관념

도 도입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다각적으로 이해함으로써 8성취는

좀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수습법으로서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더욱이 8성취가 곧장 해탈로 직결된다는 인식도 주석서들에서는 그

다지 부각되지 않고, 오히려 희석되는 경우도 있다.

8성취는 막연히 지혜와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 습득의 구체

적인 실천 수단이자 과정이다. 위에서 인용한 내용을 주장하는 학자

도 이 점을 주목하여, 사색 등으로 구성되는 8성취는 말하자면 상키

야의 8正道라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8성취는 통각(覺)에 의해 독존

해탈을 달성하기 위한 필수적이고 충분한 조건이라고 지적하면서,

상키야 체계에서의 바라밀(p ramit )이라는 문제를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까지 말한다. 이러한 이해는 8성취가 그 역할과 비중에

서 불교의 8정도나 6바라밀에 상응하는 상키야 철학의 실천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상키야 철학과 불교의 일치점들 중의 하나로서, 8

성취의 일부 별명에 깔려 있는 관념이 불교에서 통용된 것임을 지적

하는 견해도 주목할 만하다.

8성취에서 ①사색과 ⑦'벗을 얻음'은 8성취로서의 성취의 특징을 보

여 주며, 상키야 철학의 핵심인 智報 해탈을 형성하는 것도 그것이

라고 한다. 여기서 벗을 얻음이 수단으로서 중시된 점은, 선행하는 6

성취에 비해 상키야의 철학적 논의와는 직결되지 않는다 점에서 조

금 이질적이다. 그런데 수행에서 벗을 중시하는 전통은 초기 불교에

서부터 발견된다. 예를 들어 상응부에서는 "8정도를 수행하여 열반

에 이르기 전에 징조가 있다. 그 징조는 훌륭한 벗을 사귀는 것이다.

훌륭한 벗을 가지는 수행자는 머지 않아 8정도를 수행하여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라고 한다.

한편 금칠십론에 의하면, 사색의 구체적인 방법이 곧 6행관이다. 그

리고 여기서 다른 7성취에도 적용되는 6행관은 8성취의 실천적 성

격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수습법으로서 제시된 것임을 인정할 수 있

다. 이것은 지혜를 심화하는 명상의 수습 과정으로 역설되어 있다.

그러나 6행관은 오직 금칠십론에서만 제시되고, 다른 주석서들에서

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발상이 학파 외부에서 유래

했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거친 대상으로부터 출발하여 미세한 대상을 사색하는 것은 명상의

전통적인 수법이다. 이런 수법의 전형은 초기 불교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身隨觀 → 受隨觀 → 心隨觀 → 法隨觀'으로 진행되는 4念

處의 수행이 그 전형이다. 내용상 6행관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

지만, 불교의 集異門論에서 언급하는 6隨念이나 6順明分想, 莊嚴經

論에서 언급하는 6성취도 6행관을 이끌어 낸 수행 차제적 관념으로

서 고려해 볼 만하다.

그런데 6행관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각 단계마다 대상에 대해

싫어함을 일으켜 그로부터 벗어나는 厭離를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6행관의 핵심은 대상에 대한 염리이며, 결국 식별지라는 해

탈의 지혜는 이 염리에 의해 획득된다. 여기서 상키야 철학의 실천

관념은 불교 또는 요가 철학의 그것과 조우한다.

염리는 불교와 요가 철학에서 중시하는 離欲(vair gya)에 상당한다.

이욕은 모든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린 심적 상태이다. 이욕은 선정

또는 삼매에 도달하는 필수적인 조건일 뿐만 아니라, 선정이나 삼매

에 돌입하는 시발이다.

중아함경에서는 4禪 중의 첫째 단계를 "욕심을 떠나고, 착하지 않은

악한 法을 떠나, 覺(=尋)도 있고 觀(=伺)도 있으면서 번뇌를 떠남으

로써 기쁨과 즐거움이 있게 된다."라고 설명한다. 한편 {요가 수트

라}에서는 "경험의 대상이나 전승에서 유래하는 대상에 대한 갈망

을 벗어난 자에게 일어나는 통제 의식이 이욕이다."라고 이욕을 정

의한다. 이에 대한 주석은 "신성하거나 세속적인 대상과 결부되어

있더라도, 명상의 힘을 통해 享受를 본질로 삼지 않으며, 버리거나

취하는 일도 없이, 마음이 대상의 과실을 관찰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통제 의식이 이욕이다."라고 해설한다.

금칠십론의 6행관에서는 대상의 과실을 관찰함으로써 일어나는 것

이 염리이듯이, 요가 철학에 의하면 대상의 과실을 관찰함으로써 일

어나는 것이 이욕이다. 따라서 6행관이라는 수습법은 요가의 기본

적인 수행관의 적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상키야와 요

가 철학의 밀접한 유대 관계가 성립함을 확인할 수 있다.

요가 철학은 명상의 수행 체계이다. 이 전통이 상키야 철학에서도

수용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 구체적인 증거를 8성취에서 발

견할 수 있었다. 다만 8성취라는 수습법은 철저한 지식 정화의 수습

으로써 식별지라는 지혜를 획득하고자 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그

리고 6행관은 그 지식 정화의 방법을 제시하고 그 필요성을 역설한

점에 수행론적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