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공의 논리

수선님 2020. 5. 3. 11:59

우리는 논리에 의해 사유하며, 논리는 <개념>과 <판단>과 <추리>로 이루어져 있다. 개념이 설정되면, 그런 <개념>들을 연결하여, ‘무엇이 어떠하다’는 하나의 <판단>이 작성되고 그런 판단들을 조리 있게 배열하면, 三段論法(syllogism)과 같은 <추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우리는 논리를 통해 어떤 문제에 대한 합당한 결론이나 이론을 도출해 낸다. 그러나 -論理인 <中觀論理>에서는 <개념>의 독립적 실재성[= 有自性, 法有]을 비판하고, 그런 개념들을 결합하여 構成해 내는 <판단>에 내재하는 본질적 모순[= 二邊]을 지적하며, 그런 판단들에 의해 築造된 <추론>의 부당성을 力說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反論理的 비판 과정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어 있는 논서가 바로 龍樹의 ?中論?인 것이다. ?中論?에서는, 특히 아비달마(Abhidharma) 불교의 衒學的 哲學體系에서 實體視하던 갖가지 개념들[= 法數]을 대상으로 삼아 반논리적 비판 작업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런 비판 작업의 토대는 初期佛典에 등장하는 緣起說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公式으로 표현되는 연기설의 還滅門이다. 이를 통해 갖가지 <개념>들의 실체성이 해체되기에, 그런 <개념>들의 결합에 의해 구성되는 <판단>에서 논리적 오류가 도출될 수 있다.

緣起公式에서 말하는 <이것>과 <저것>에는,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과 같은 價値개념은 물론이고, <연료>와 <불>과 같은 存在개념, <눈>과 <시각대상>과 같은 認識개념, <주체>와 <작용>과 같은 體用개념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모든 개념쌍들이 대입될 수 있다. <더러운 것>이 없으면 <깨끗한 것>도 없으며, <연료>가 없으면 <불>도 없고, <눈>이 없으면 <시각대상>도 없으며, <주체>가 없으면 <작용>도 없다. 따라서, <더러운 것>이나 <불>, <눈>, <주체>등은 결코 독립적으로 실재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의 이치이다. <더러운 것>은 항구불변하는 실체가 없기에[= 無自性: nisvabhāva] (śūnya)하고, <불>도 독립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하며, <눈>도 하고 <주체>도 하다. 五蘊이나 六界, 涅槃如來敎學的 개념들은 물론이고,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들은 그 독립적 實體[= 自性: svabhāva]가 없기에 하다.

따라서, 이런 한 <개념>들을 결합하여 구성하는 갖가지 <판단>들 역시 논리적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卑近한 예를 들어보자. ‘비가 내린다’는 體用판단의 경우, <비(主體)>가 없으면 <내림(作用)>도 없으며, <내림>이 없으면 <비>도 없는 것이기에[= 還滅緣起的 토대], ‘비’라는 主語와 ‘내린다’는 述語를 분할[= 分別: vikalpa]하게 되면 논리적 오류에 빠지고 만다. 즉, <비>속에 <내림>이라는 술어의 의미가 들어 있을 수도 없고 들어 있지 않을 수도 없다.

먼저, ‘비’라는 주어에 ‘내린다’는 술어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보면 ‘비가 내린다’는 말은 ‘<내리는 비>가 내린다’는 말이 되고 만다. 즉, ‘비’라고 말을 하는 순간 이미 내리고 있는 것인데, 그것에 대해 다시 ‘내린다’는 술어를 부가하여 ‘비가 내린다’는 말을 하게 되니, 내리는 것이 두 개인 ‘중복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1句的 이해 비판, 因中有果論的 常見 비판]. 그렇다고 해서, ‘비’라는 主語에 ‘내린다’는 述語의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고 보게 되면,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는 말이 되는데, 이 세상 어디에도 내리지 않는 비는 없다. ‘비’라고 말을 하면 내리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2句的 이해 비판, 因中無果論的 斷見 비판].

서구논리학에서는 <개념>을 연결하여 만들어지는 <판단>의 종류를 두 가지로 나눈다.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이 그것이다. 주어의 의미 속에 술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판단이 분석판단이며, 그렇지 않은 판단이 종합판단이다. 그러나 중관논리에서는 판단에 대한 그런 구분의 타당성을 모두 비판한다. ‘비가 내린다’는 판단을 분석판단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위에서 말했듯이 ‘중복의 오류’에 빠지게 되고, 종합판단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분할 불가능한[= 不二] 사태를 두 개의 개념으로 분할한 후, 그 개념쌍을 연결하여 구성되는 인간의 모든 판단들은 필연적으로 논리적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판단들의 사실성은 해체된다.

마지막으로 <추리론>의 경우, 중관논리에서는 적대자가 추론을 통해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되면, 그와 동등한 타당성을 갖는 상반된 추론식을 제시함으로써 적대자가 구성한 추론의 절대적 타당성을 비판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내세운 추론식을 신봉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사상을 비판하는 적대자가 ‘모든 것이 하다면 四聖諦는 없다’라고 假言推理 형식의 추론을 구성하는 경우, 龍樹는 ‘모든 것이 하지 않다면 四聖諦는 없다’고 상반된 추론식을 제시함으로써 상대의 주장을 논파한다[?中論? 24 觀四諦品].

그러면 중관논리에서 이렇게 <개념>의 독립적 실재성과 <판단>의 사실적 대응성과 <추론>의 절대적 타당성을 비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우리는 언어와 생각에 의해 구성된 자기 나름의 세계관에 토대를 두고 형이상학적 고민을 하며, 우리의 언어와 생각은 <개념>과 <판단>과 <추론>을 이용해 논리적 방식으로 구사된다. 따라서, 그런 고민들을 야기한 논리적 방식의 본질적 허구성이 폭로될 수만 있다면 문제는 가장 간단히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의 고민을 야기한 세계관 자체가 허구였음이 판명되면 그로 인해 야기된 형이상학적 고민 역시 허구로 귀결될 것이다. 中觀的 -論理에서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소시킨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들었던 철학적 고민들 중, ‘지금 이렇게 뚜렷하게 나타나 보이는 찬란한 이 삶은 언젠가 소멸해 버리고 말 것이다’라는 판단이 야기하는 비장한 느낌은, 체험할 수도 없고 체험한 적도 없는, 死後의 <>를 임의로 설정함으로써 발생되는 거짓된 實存感일 뿐이며,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판단은, 인생을 떠나 <내>가 실재한다는 착각에 토대를 둔 그릇된 感傷이다. 또, ‘나는 눈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는 판단은 <보이는 대상>과 관계없이 <보는 작용>인 눈이 실재한다는 세계관에 토대를 둔 실재론적 陳述인 것이다. 즉, 그런 의문들과 관점들은 사물의 眞相에 토대를 두고 구성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思考世界를 제멋대로 裁斷[= 分別]한 후 조작해 낸 허구적 의문이고 관점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 허구성을 자각하게 되면 문제 자체가 해소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다. 그 결과 ‘현실의 이 삶이 새삼스럽게 찬란할 것도 없고[∵ <>가 없으면 <>도 없기에], 이 세상에 태어날 주체가 따로 있던 것도 아니며[∵ <세상>이 없으면 <나>도 없기에], 눈이 따로 있어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다[∵ <대상>이 없으면 <눈>도 없기에]’라는 實相을 자각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실상은 無相實相이다. 라는 이 있는 實相이 아니라 實相이란 말이다. 그런 모든 感傷疑問들은 우주와 인생의 정연한 이치인 <緣起實相>을 위배하고 우리의 생각에 의해 문제가 되는 事態를 분할[= 分別]했기 때문에 발생된 거짓 판단들인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떤 事態건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다[= 不二]. 왜냐하면 ‘모든 것은 緣起的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적 고민이나 갈등이 있는 경우, 中觀論理的 분석 과정을 통해 그런 고민과 갈등을 야기한 갖가지 세계관을 하나하나 해체함으로써[= 止滅, 擇滅(無爲)] 우리는 마음의 平安을 얻게 된다. 初期佛典의 <無記說>의 취지는, 붓다(Buddha)가 14가지(혹은 10가지) 철학적 문제[= 難問]에 대해 침묵을 한 후, 四諦五蘊, 十二緣起등을 說示함으로써 애초의 그런 의문을 구성한 사고 방식을 치료한다는 데 있다. 아비달마 논서에서도 14難問이나 62등의 邪見을 일으킨 癡心에 대한 치료법으로 緣起觀法을 제시한다. 그리고, 邪見에 대한 이런 치료 과정을, 붓다의 교법을 대하는 一部 아비달마 논사들의 實在論的 태도(realistic attitude)에 적용하여 보다 정밀하게 재현해 낸 논서가 바로 龍樹의 ?中論?인 것이다.

3. 中觀論理正當性에 대한 解明 - ?廻諍論?

지금까지 간략히 살펴보았지만, 중관논리에서는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還滅 緣起에 토대를 두고, 우리의 思惟의 도구인 <개념>의 실재성과 <판단>의 사실성, <추리>의 타당성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 그 결과, ‘모든 사물은 自性(svabhāva)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성에 대해 그렇게 비판하기 위해서는, 中觀論師 역시 개념을 이용하여 ‘모든 사물은 自性이 없다’는 판단을 작성해 내야하고, 어떤 <이유>를 들어 그런 판단을 주장하는 추론을 구성해야 하며, <언어>를 통해 이를 표출한 후, 그런 사실을 스스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언어>와 <이유>와 <인식>의 실재성, 즉 自性은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물은 自性이 없다’는 판단은 진리로서의 보편타당성을 상실하고 마는 것 아닌가? 왜냐하면, 자성이 없는 모든 사물의 범위 중에서 <언어>와 <이유>와 <인식>등은 제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廻諍論?에서 적대자인 실재론자(realist)는 空思想이 봉착하게 되는, 바로 이러한 自家撞着을 지적하고 있다. 실재론자가 제시하는 논박들을 유사한 성격끼리 묶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 말소리도 공해야 하기에 자가당착에 빠진다(제1, 2송).

②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 사실을 아는 인식은 실재해야 하기에 자가당착에 빠진다(제5, 6송).

③ 모든 것이 공하다면 공이라는 이름은 실재해야 하기에 자가당착에 빠진다(제9송).

④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 부정의 대상은 존재해야 하기에 자가당착에 빠진다(제11, 12송).

⑤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에 대한 이유도 공해야 하기에 그런 주장은 부당하다(제17, 18, 19송).

이에 대한 용수의 답변을 통해, 우리는 ‘自性이 없다’거나 ‘하다’는 언명의 진정한 정체를 파악하게 된다. 먼저 용수는 사상이 봉착하게 되는 역설적 상황을 회피하지 않는다. 적대자가 말하듯이, 용수는 ‘모든 것이 자성이 없다’는 <말>도 자성이 없으며, <인식>이나 <이름>,< 부정의 대상>, <이유> 모두가 그 자성이 없다는 점을 시인한다.

서구논리학에서도 역설의 발생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럿셀(Russell)의 階型理論(type theory)이나 타르스키(Tarski)의 二種言語論이 그것이다. 위와 같은 경우 이들은 ‘모든 것은 자성이 없다’는 말은 제2계의 언어 라거나 메타-언어(meta-language)라는 규정을 가함으로써 역설적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보편타당성을 상실한 恣意的인 해결일 뿐이다. 일상 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역설적 상황에서, 우리가 언제나 럿셀이나 타르스키와 같은 방식의 대처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금지’ 라는 글귀를 예로 들어보자. 이는 역설적 상황이다. 낙서금지라는 낙서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계형이론이나 이종언어론에서는, ‘일반적인 낙서’와 ‘낙서금지라는 낙서’ 사이에 선을 그음으로써 역설적 상황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선을 긋는다고 하여 ‘낙서금지’라는 글씨에 의해 더럽혀진 담벼락이 깨끗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낙서금지라는 말은 결코 쓸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낙서금지라는 말이 쓰여지는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첫째는 깨끗한 담벼락에 그 어느 누구도 낙서를 하지 않는 상황인데 집주인이 다짜고짜 낙서금지라는 글을 큼직하게 써 놓는 경우이고, 둘째는 낙서가 잘못된 것이라는 죄의식 없이 동네 어린 아이들이 낙서를 하는 경우 집주인이 그것을 막기 위해 한 구석에 ‘낙서금지’라는 글을 써 놓는 경우이다. 전자와 같은 상황이라면 집주인의 행위는 분명 자가당착적 역설에 빠진 웃음거리가 된다. 그러나 후자와 같은 상황이라면 ‘낙서금지’라는 글귀는 역설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다른 낙서를 억제하는 작용을 할 수가 있기에 그 가치가 인정된다. ‘모든 사물은 자성이 없다’는 <敎說>이 빠지게 되는 역설에 대한 ?廻諍論?의 해명 역시 그 구조가 이와 동일하다.

幻覺女人을 진짜 여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 붓다의 神通力으로 만들어진 환각의 사람이 그런 착각을 제거해 주듯이, 또 집에 데와닷따(Devadatta)가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집에 데와닷따가 없다’고 말해 줌으로써 잘못된 생각을 시정해 주듯이, 모든 사물에는 自性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自性이 있다’고 착각하기에, 한 <敎說>을 통해 ‘모든 사물은 自性이 없다’고 말하여 사물의 진상을 알려 주는 것이다. 즉, 自家撞着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先行하는 잘못이 있는 경우에 그에 대응하여 發話되는 것이 사상의 言明이다. 이는 應病與藥의 구조이다. 이라는 先行條件이 있기에 을 주는 것이다. 成道梵天 勸請神話가 이를 대변 하듯이 붓다의 교설 역시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응병여약적 구조를 갖는다.

龍樹는 ?廻諍論?을 통해 불교적 교설의 응병여약적 성격을 논리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모든 사물은 자성이 없다’는 말이 단순한 주장이라면 이는 역설에 빠진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물의 진상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사물에 자성이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 이를 시정해 주기 위해 그 말이 발화된 것이라면 이는 정당할 수 있다. 마치 죄책감 없이 낙서가 자행되고 있던 담벼락 한 쪽에 쓰여지는 <낙서금지> 라는 낙서와 같이….

Ⅱ. 逆說(paradox)과 中觀論理

1. 逆說이란?

그리스(Greece) 남쪽 바다 한 가운데에 크레타(Creta)라는 섬이 있다. 이 크레타 섬은 해상 무역의 중심지이기에 그 주민들은 대부분 장사꾼들이다. 그 주민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크레타섬의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말도 크레타 사람이 한 것이기에 ‘이 말도 거짓말이라면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어야 하고 이 말만은 거짓말이 아니라면 이 말은 거짓말이어야 한다.’ 이것이 逆說(paradox)이다. 이는 근세 서양 철학자 럿셀(Russell: 1872-1970)이 고전적 집합론에서 발생하는 역설(paradox)을 설명하면서 함께 들었던 로 이 말을 한 당사자의 이름을 따서 ‘에피메니데스 (Epimenides)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서구의 논리 철학자 들은 이 이외에도 다양한 역설들을 고안해 낸 바 있다. ‘他敍的(heterological)’이라는 형용사가 타서적인지 여부를 묻는 데서 발생하는 그렐링(Grelling) 의 역설(1908), 우편엽서의 역설, 리샤르(Richard)의 역설(1905), 베리(Berry)의 역설 (1906년), 부랄리-포르티(Burali-Forti)의 역설, 칸토르(Cantor)의 역설등이 그 예들이다.

그런데 논리철학자나 수학자들이 고안한 위와 같은 예들 이외에도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는 역설적인 發話나 상황을 흔히 경험하게 된다. 이를 나열해 보자.

아이들이 떠드는 교실에서 한 아이가 “떠들지 마”라는 소리를 내는 것.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금지”라는 문구.

사람이 붐비는 백화점에서 “집에나 있지, 왜들 나와?”라고 짜증을 내는 것.

이런 역설적 상황이나 發話 행위들을 접할 경우, 이를 전혀 포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역설적 성격을 포착하여 “사돈 남말 하네!”라는 속담을 들어 비판을 가하는 경우도 있고, 그것들이 역설에 빠진 言行인줄 알면서도 그런 역설적 言行者들의 의도에 그대로 순응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일상 생활 속에서 역설적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다양한 태도는, 더 나아가면 역설에 대한 논리철학적 해결 방안에 그대로 대응된다. 따라서 역설과 그 해결 방안의 문제란, 비단 수학이나 철학 이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 전반에 걸쳐 우리가 항상 접하며 대처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서양철학사 내에서도 역설적 상황이 철학자 자신의 입지를 궁지로 몰고 간 예들이 많이 발견된다. 명제(proposition)의 철학적 사용을 비판하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철학의 자가당착, 로고스 中心主義 (logocentricism) 西歐思想史를 해체(deconstruction)시키고자 하는 데리다(Derrida) 자신의 로고스에서 보듯이, 逆說(paradox)이란 인간이 보편타당한 철학을 정립하려고 할 때 필연적으로 빠지게 되는 딜레마 (dilemma)로, 단순히 철학자 자신의 논리 전개 과정의 결함으로 인해 惹起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논리를 전개하여 어떤 결론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 인간의 선천적(a priori) 사유 구조의 한계에 기인한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禪家의 수많은 명제들 역시 구조적으로 역설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자를 세우지 말아라 (不立文字)”, “입만 열면 그르친다(開口卽錯)”, “마음을 비워라(無心)”, “욕심을 내지 말라(無慾)”, “모든 집착을 다 내려 놓아라 (放下着)”등의 말들 역시 모두 역설을 발생시킨다. 즉,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것 자체가 문자를 세운 것이고, <입을 열면 그르친다>고 입을 열었으며, <마음을 비우라는 생각>이 다시 마음을 채우게 되고, <욕심을 내지 않겠다>는 욕심을 내게 되며, <모든 집착을 내려놓겠다>는 집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학적, 논리적, 철학적 영역은 물론이고, 우리들의 일상 생활이나 종교적 분야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사고가 미치는 모든 영역에서 역설(paradox)적 상황이 발생함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확립자 龍樹(Nāgārjuna: 서력 기원 후 150~250경)의 논서를 보게 되면 도처에서 이런 逆說(paradox)과 유사한 구조의 논법을 이용하여 토론 상대자를 논파하는 것이 발견된다.

2. 龍樹論書에서 발견되는 역설적 상황

그러면 龍樹가 토론 상대자의 주장에서 이런 역설적 상황을 포착해 내어 논파하는 실례를 들어 보겠다.

만일 존재하고 있는 것만이 부정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空性적 부정은 존재하는 것 아닌가? 왜냐하면 그대는 ‘[空性的 부정인] 사물에 自性이 없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만일 그대가 空性을 부정하고, 또 그런 空性은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부정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그대의 이런 말은 파괴된다.

즉, 적대자가 “존재하고 있는 것만이 부정될 수 있는 법이니 自性이 없는 것을 부정하는 龍樹의 논의는 옳지 못하다”는 의미의 비판을 가하자 이를 재비판하는 과정에서 위와 같은 역설의 논법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존재하는 것만이 부정되는 법이라면 空性에 대한 그대의 부정 역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일 테니 그대의 부정 대상인 空性은 존재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또, 그와 반대로 空性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존재하는 것만이 부정된다’는 애초의 그대의 주장은 훼손된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 실재론자의 원 주장:

부정이란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가능하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대의 부정은 옳지 않다.

* 龍樹의 반박: 옳지 않다는 그대의 부정 역시 옳지 않다.

① 옳지 않다는 그대의 부정이 타당하려면, 그대의 부정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부정>이어야 한다.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부정>은 존재해야 하기에 그대의 주장은 오류에 빠진다.

② 그와 반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부정>을 부정하는 그대의 부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이라면, 부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만 가능하다는 그대의 주장에 예외가 있는 꼴이 되어 그대의 주장은 오류에 빠진다.

이는, 상대의 비판 역시 그런 비판의 대상에 속하기에 상대의 비판은 오류에 빠진다는 것으로, <자기 부정을 포함하는 전체>라는 구조를 갖는 전형적 역설을 이용한 비판 논법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龍樹의 저술로 포장되어 있는 ?大智度論?을 보게 되면 붓다 자신도 이러한 역설적 상황을 이용하여 상대를 비판하였음을 알게 된다. 舍利弗外叔長爪梵志를 교화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사리불의 출가에 분개한 長爪梵志는 붓다와 대면하게 되자 자신은 “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는다(一切法不受)”고 주장하게 되는데 그에 대해 대응하면서 붓다는 역설(paradox)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인용해 보자.

<長爪梵志>: 고따마여, 나는 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는다.

<붓다>: 장조여, 그대가 말하는 ‘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런 견해는 인정하는가?

<長爪梵志>: 고따마여, ‘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런 견해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붓다>: 그대가 말하는 ‘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런 견해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정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꼴이니 뭇사람들과 다를 게 없는데 어째서 스스로 뽐내면서 잘난 체하느냐?

즉, “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만은 인정한다면 “그 어떤 법”이라는 주어의 범위에 예외가 있는 꼴이 되어 오류에 빠지고, 그와 반대로 그런 주장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내세운 주장을 파기하는 꼴이 되니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이처럼 龍樹는 물론이고 전통적으로 불교 내에서는 이러한 역설(paradox)을 이용하여 적대자를 논파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예는 전형적 역설 구조는 아니지만 크맆키(Kripke)가 소개한 최소의 고정점 (fixed-point)을 갖지 못하는 근거 없는(non-grounded) 개념을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中論? 7 觀三相品을 보자.

, , 에 있어서 또다른 유위법의 이 있다면 그야말로 무한하게 된다. (반대로) 만일 없다면 그것들(=생, 주, 멸)은 유위법이 아니다.

아비달마 논사들은 , , 三相이 유위법 중 心不相應行法에 속하며 그와 동시에 모든 유위법은 三相의 특징(lakaa)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즉, 諸行無常하기 때문에 그 어떤 유위법이건 생겨나면() 머물다가() 소멸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역설(paradox)이 발생한다. 아비달마 이론에 의하면 , , 은 모두 무상한 유위법에 속하므로 , , 자체도 다시 생, 주, 멸의 三相을 띠어야 한다. 또, 그런 생, 주, 멸의 三相 역시 유위법이기에 다시 생, 주, 멸의 삼상을 띠어야 하며 결국 무한한 삼상이 필요하게 된다. 무한소급은 논리적 오류이다. 즉, 그 정체성(identity)의 확립을 위해 무한소급을 야기하는 개념은 최소의 고정점(fixed-point)을 갖지 못하는 근거 없는 (ungrounded) 개념이다. 그와 반대로 생, 주, 멸이 다시 삼상의 특징을 갖지 않는다면 생, 주, 멸은 유위법의 범위 밖에 있는 꼴이 되어 애초의 아비달마적 주장을 훼손시킨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龍樹는 ?廣破論(Vaidalyaprakaraa)? 제4절과 ?廻諍論(Vigrahavyavartani)? 제32, 33송을 통해, “근거 있음(groundedness)”의 不在를 근거로 들어 <인식 수단(pramāṇa: )>의 실재성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다. ?廻諍論?의 비판을 인용해 보자.

실재론자의 원 주장: 모든 대상은 <인식 수단>을 통해 확립된다.

龍樹의 반박: 그런 <인식 수단>은 무엇에 의해 확립되는가?

① 만일 다른 인식 수단에 의해 인식 수단이 성립하게 된다면 이는 무궁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는 최초의 성립도, 중간도, 끝도 존재하지 않는다.

② 그것[=인식 수단]이 만일 인식 수단 없이 성립한다면 論議는 깨어진다. 거기에 불일치함이 있다. 또, 특별한 이유가 말해져야 한다.

전형적 역설은 아니지만 이렇게 역설적 상황을 이용하여 상대의 주장을 논파하는 예가 龍樹의 논서 도처에서 눈에 띤다. 아니 더 나아가 이러한 역설 구조 자체는 龍樹의 논법의 중핵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中觀論理逆說의 구조

<中觀論理>는 한 마디로 <四句 批判論理>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中觀論理의 구조는 역설의 논리적 구조와 동일하다.

먼저 역설의 논리적 구조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어떤 크레타 사람이 “크레타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장이다.” 라는 말을 할 경우 이 말도 크레타 사람에 의해 발화된 것이기에 이 말이 거짓말이라면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장이가 아니어야 하고, 그와 반대로 이 말만은 참말이라면 예외가 하나 있는 꼴이 되어 “모두”의 의미가 훼손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발화는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고 거짓말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크레타 사람들”이라는 主語에 이 말을 한 당사자가 <내포(inclusion)>되어 있기에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지게 되고, 그와 반대로 이 말을 한 당사자만은 주어의 의미에서 <배제(exclusion)>되어 있다면 사실에 위배되기에 예외가 발생하는 오류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자기 자신을 원소로 하지 않는 보통 집합들의 집합은 보통 집합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원소로 하는 특수 집합인가?’를 묻는 <집합론의 역설>의 경우도 위와 마찬가지로 <내포>와 <배제>의 딜레마(dilemma)에 빠져 있다. 즉, <보통 집합들의 집합>역시 보통 집합에 내포될 수도 없고 배제될 수도 없는 것이다. <보통 집합들의 집합>이 보통 집합에 내포된다면 특수한 집합으로 배제되어야 하고, 그와 반대로 보통 집합에서 배제되는 특수한 집합이라면 보통 집합에 내포되어야 하는 것이다.

앞 장에서 예로 들었던 생, 주, 멸 三相에 대한 비판과 인식 수단에 대한 비판은 “근거 있음(groundedness)”의 不在를 통해 상대의 주장을 비판하는 논법이기에 전형적 역설 논법은 아니지만 그 구조는 역설의 논리적 구조와 동일하다. 인식 수단의 예를 들 경우, 인식 수단이 모든 대상을 확립시킨다면 그런 인식 수단 역시 모든 대상에 <내포>되어야 하기에 “무한 소급의 오류”에 빠지게 되고 그와 반대로 <배제>시키면, 예외를 인정하게 되니 애초의 주장이 훼손되고 마는 것이다. 즉, 전형적 역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포>시킬 수도 없고 <배제>시킬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中論?을 보면 龍樹가 실재론적 세계관을 논파하는 많은 게송들도 이러한 논리 구조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가는 작용’이 없는 ‘가는 자’가 실로 성립하지 않는다면 ‘가는 자’가 간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성립되겠느냐?(?中論?, <2-9>)

만일 ‘가는 자’가 간다면 ‘가는 작용’이 둘이라는 오류에 빠진다. ‘가는 자’라고 말하는 것과, 존재하는 ‘가는 자’, 그 자가 다시 간다는 사실에 의해서.(?中論?, <2-10>)

가는 자가 간다고 하는 주장, 그런 주장을 한다면 다음과 같은 오류에 빠진다. 가는 작용 없이 가는 자가 있고 (또 그) 가는 자의 가는 작용을 추구하(게 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中論?, <2-11>)

여기서 <2-9>의 게송과 <2-11>의 게송은 동일한 논리 구조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양자가 함께 <2-10> 게송의 논리 구조에 대립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2-10>은 <내포의 오류>를 노래한 게송이고 <2-9>와 <2-11>은 <배제의 오류>를 노래한 게송이다.

가는 자가 간다”는 분별이 있을 경우 “간다”는 술어(predicate)의 의미가 “가는 자”라는 주어(subject)의 의미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기에 <가고 있는> 가는 자가 <다시> 간다는 말이 되어 감이 두 번 중복되는 오류에 빠진다는 비판을 기술한 것이 <2-10> 게송이고, 그와 반대로 <간다>는 술어의 의미가 배제된 <가지 않는> 가는 자가 <어딘가에 있어서 그 자가> 간다고 보는 경우에는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고우주 가는 자가 간다가 내표될때는 중복의 오류이고 분리된다면 가는자라는 주체게 가는작용이 없어서 주어가 성립할수 없는 논리적으로 오류라는 것

원 문장: 가는 자가 간다.

第一句적인 이해: 가고 있는 가는 자가 간다

→ 주어와 술어에 각각 두 개의 감이 있게 된다.

第二句적인 이해: 가지 않는 가는 자가 간다

→ 주어가 성립될 수 없다.

이를 좀 더 쉬운 예에 대입하여 설명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일상 생활 가운데 “비가 내린다”는 문장을 스스럼없이 사용한다. 그러나 이 명제는 “가는 자가 간다”는 명제와 동일한 논리적 오류에 빠져 있다. 이 문장은 “비”라는 主語(subject)와 “내린다”는 述語(predicate)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라는 주어에는 이미 “내린다”는 술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내리지 않는 비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가 내린다”는 말을 할 경우 내리고 있는 비에 대해 다시 내린다는 표현을 쓰게 되니 비가 두 번 내리는 꼴이 된다. 마치, 꿈을 꾼다고 말을 하면 꿈을 두 번 꾸는 꼴이 되고 얼음이 언다고 말을 하면 얼음이 두 번 어는 꼴이 되듯이. 그렇다고 해서 그와 반대로 “비”라는 주어에 “내린다”는 술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면 내리지 않는 비가 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사실에 위배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원 문장: 비가 내린다.

第一句적인 이해: 내리고 있는 비가 내린다.

→ 비가 두 번 내리는 꼴이 된다.

第二句적인 이해: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 내리지 않는 비는 그 어디에도 없다.

龍樹는 ?中論?을 통해 ‘가는 자가 간다’는 명제 이외에도 수많은 명제들을 이와 동일한 구조에 의해 논파하고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다음과 같은 게송에서도 동어반복적 중복의 오류가 지적되고 있다.

만일 불이 연료에 의존한다면 성립된 불이 (또다시) 성립(되는 꼴이)된다. 이와 같은 존재라면 불 없는 연료 역시 존재하리라.

이는 불과 연료의 관계에 대한 第一句的인 이해에 내재하는 오류를 지적하는 게송으로 ‘불이 연료에 의존하여 성립한다’는 진술의 경우 ‘불’이라는 주어를 發話한 순간 이미 ‘불’이 성립되어 있어야 하므로 그것이 ‘연료에 의존하여 성립한다’고 하게 되면 불이 두 번 성립되는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어떤 事態(fact)에 대한 第二句的인 이해에 내재하는 오류를 지적하는 게송들은 다음과 같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다면 能見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能見이 본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타당할 수 있겠는가?

어떤 無相의 존재도 어디에건 존재하지 않는다. 無相인 존재가 없다면(=일체가 을 갖고 있다면) 은 어디서 (없다가 생기는 식으로) 나타날 수 있겠는가?

만일 個體 스스로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면, 그렇다면 를 스스로 짓는 어떤 個體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겠는가?

能見이 본다’, ‘존재가 을 띤다’, ‘어떤 개체가 를 짓는다’는 판단을 하는 경우, 보기 전에는 能見은 존재할 수 없고, 을 띠기 전에는 그 어떤 존재도 무의미하며, 五陰盛苦와는 별도의 개체가 있을 수 없다는 비판을 함으로써 그런 모든 판단들이 오류에 빠져 있음을 지적해 내는 것이다.

이렇게 中觀論理에서는 어떤 사태에 대해서건 第一句적인 분별을 해도 오류에 빠지고 第二句적인 분별을 해도 오류에 빠진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즉, 어떤 문장이건 <주어>의 의미 속에 이미 <술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에 그 문장을 발화한 순간 <술어>의 의미가 <중복>되는 오류에 빠지며, 그와 반대로 <술어>의 의미를 <주어>의 의미에서 <배제>시킨다면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고찰해 보았던 역설(paradox)의 논리적 구조와 일치한다. 즉, 어떤 하나의 事態에 대해 언급하면서 분별해 낸 두 개념 쌍을 상호 연관시키게 되면, 어느 한 쪽이 이미 다른 한 쪽을 <내포>하고 있기에 오류에 빠지게 되고, 그와 반대로 어느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이 <배제>되어 있다면 그 어느 한 쪽의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大智度論?에 등장하는 <長爪梵志의 오류>와, ?廻諍論?의 <인식 수단의 오류> 및 ?中論?의 <가는 작용의 오류>의 논리적 구조를 상호 비교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장조범지의 오류: [전형적 ]역설(paradox)>

{원 주장}: 나는 그 어떤 이론()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포의 오류}: 원 주장도 하나의 이론이기에 원 주장 역시 성립하지 않아야 하기에 오류에 빠진다.

{배제의 오류}: 원 주장만은 이론이 아니라면 사실에 위배되는 예외가 있는 꼴이 되어 원 주장은 오류에 빠진다.

<인식 수단의 오류: 근거의 부재(ungroundedness)>

{원 주장}: 인식 수단은 모든 것을 확립시킨다.

{내포의 오류}: 그런 인식 수단 역시 인식 수단에 의해 확립되어야 하기에 제2, 제3, …의 인식 수단이 필요하게 되어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진다.

{배제의 오류}: 인식 수단만은 그 스스로 확립되는 것이라면 예외가 있는 꼴이 되어 원 주장은 오류에 빠진다.

<가는 작용의 오류: 동어반복(tautology)>

{원 주장}: 가는 자가 간다.

{내포의 오류}: 간다는 작용을 갖는 가는 자가 간다면 가는 작용이 두 개 있게 되는 오류에 빠진다.

{배제의 오류}: 간다는 작용을 갖지 않는 가는 자가 간다면 사실에 위배되기에 오류에 빠진다.

4. 逆說的 상황이 惹起되는 이유

그러면 위와 같은 역설적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럿셀(Russell)은 ‘自己-指稱(self-reference)’이라고 말하며, 이런 자기-지칭으로 인해 일종의 惡循環(vicious-circle)이 야기된다고 주장한다. ‘크레타섬의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의 경우, 다른 모든 크레타 사람은 물론 이 말을 한 당사자인 에피메니데스 역시 이 말의 지칭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자기지칭적이라고 해서 모두 역설에 빠지는 것은 아니며 역설에 빠진다고 해서 모두 자기지칭적인 것은 아니라고 럿셀의 주장을 비판한다. 즉, ‘이 문장은 검은 잉크로 쓰여 있다’와 같은 문장은 자기지칭적인 문장이지만 역설에 빠지지 않으며, ‘우편엽서의 역설’과 같이 자기지칭적이 아닌 경우에도 역설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분석해 보면 이런 예들도 철저한 의미에서 자기지칭적 역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 문장은 검은 잉크로 쓰여 있다’는 자기지칭적인 문장은 물론이고, 하나의 사태(fact)를 주어(subject)와 술어(predicate)로 구분하여 발화되는 모든 문장들은, 전형적 역설은 아니지만, 앞 장에서 예로 들었던 <同語反覆 (tautology) 逆說>을 야기한다. 즉, ‘<가는 자>가 <간다>’와 같이 위의 문장은 ‘<검은 잉크로 쓰여진 이 문장>은 <검은 잉크로 쓰여 있다>’는 동어반복적인 문장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외견상 자기지칭적이지 않은 듯이 보이는 <꽃이 핀다>는 문장 역시 <피어 있는 꽃이 핀다>는 식의 동어반복적 문장이다. 칸트(Kant)의 術語를 빌려 표현하면, 이 문장은 종합판단이 아니라 분석판단인 것이다. 中觀的으로 眺望해 보면 칸트가 말하는 종합판단도 일종의 분석판단일 뿐이다. 칸트는 ‘모든 물체는 延長的이다’와 같은 명제는 분석판단이고, ‘모든 물체는 무게가 있다’와 같은 명제는 종합판단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中論」 2 觀去來品 11에 대한 月稱(Candrakīrti)의 설명을 보면 칸트가 말하는 종합판단도 분석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中論」 2 觀去來品 11에서 龍樹는 ‘가는 자가 간다’는 명제는 <동어반복의 오류>에 빠진다[두개의 가는 작용이 있게 됨]는 의미의 설명을 하고 있는데 적대자는 이 게송을 비판하면서 ‘그러면 데바닷따가 간다’고 하면 된다고 반박한다. 그러자 月稱(Candrakīrti)이 다음과 같이 재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인용해 보자.

[문] 여기서 이제 묻는다. 가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데바닷따가 간다’고 하는 표현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는 작용은 존재한다.

[답]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데바닷따에 의지하여 [다음과 같은] 이런 생각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대체 [다음의 세 가지 중] 어떤 것인가? [①] 존재하는 가는 자가 가는 것인가, [②] 그렇지 않으면 가지 않는 자가 가는 것인가, [③] 아니면 그런 두 가지와 다른 그 어떤 자가 가는 것인가? 그런데 이 모든 경우 중 그 어떤 것도 불합리하다.

즉, ‘가는 자가 간다’는 분석판단의 동어반복적 외형을 지우기 위해, 적대자는 이를 ‘데바닷따가 간다’는 식의 종합판단으로 바꾸었지만, 이는 ‘가는 데바닷따가 간다’는 의미이어야 하기에, 위와 같은 논리에 위해 비판받게 되며, 결국 분석판단적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분석판단 역시 동어반복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 사실 종합판단, 또는 경험적 판단이란 <실재론(Realism)>적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즉, 하나의 事態(fact) 속에서 각각의 개념(conception)들이 독립적인 실체성을 갖고 관계한다는 세계관이 前提되어야 <종합판단>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각각의 개념들이 엄정한 에 의해 오려질 수 있어야 그렇게 오려진 개념들을 서로 관계시켜 경험적 판단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사태 내의 개념들은 그렇게 분할되지 않는다.

우리의 눈 앞에서 누군가가 걸어가고 있다고 하자. 그런 하나의 사태(fact)를 어떻게 <가는 자>와 <가는 작용>으로 오려낼(scissor out) 수 있겠는가? 즉, 分割(partition) 또는 分別(vikalpa)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모든 물체는 무게가 있다’는 명제는 ‘무게를 갖는 모든 물체는 무게가 있다’는 분석판단일 뿐이고, ‘이 문장은 검은 잉크로 쓰여 있다’는 문장은 ‘검은 잉크로 쓰여진 이 문장은 검은 잉크로 쓰여 있다’는 동어반복(tauotology)적인 분석판단일 뿐이다.

따라서 “자기지칭적이긴 하지만 역설에 빠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비판의 경우, 그 때 말하는 역설이 서구논리학적에서 말하는 전형적 역설이라면 타당할지 몰라도, 중관적 조망 하에서 본다면 부당한 비판이다. 이와 같이 자기지칭적인 문장은 물론이고,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모든 문장들이 동어반복적인 분석판단인 것이다. 즉, 주어의 의미에 이미 술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판단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 어떤 하나의 사태에 대한 판단은 술어를 이미 지칭하고 있는 주어가 다시 술어와 조합되는 것이기에 외견상 자기지칭적이지 않은 문장도 그 의미 구조는 자기지칭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지만 자기지칭적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을 야기하지 않는 사태가 있다. 즉,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집합이 그것이다. 집합은 ‘도시의 집합’이나 ‘사람의 집합’과 같이 그 집합 전체는 그 원소에 포함되지 않는 집합도 있고 ‘도서관의 장서 목록’과 같이 자기 자신도 그 원소에 포함되는 집합도 있다. 여기서 후자의 성격이 자기지칭적이다.

어떤 도서관에 있는 장서들의 이름을 모두 기입해 놓은 <도서관의 장서 목록>이라는 장서에는 그 자신의 이름도 기입되어 있다. ‘도서관의 장서 목록’의 존재는 이렇게 자기지칭적 성격을 갖는 사태이지만 논리적 오류에 빠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장서의 이름>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점이다. 겉표지가 상실되어 이름을 모르는 장서도 있을 수 있고 동일한 이름의 장서이지만 그 내용이 상이한 장서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각 장서들의 엄밀한 자기-정체성(self-identity)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각 <장서의 이름> 란에 각 장서의 내용 전체를 기입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도서관의 장서 목록>이 만들어지게 되면 이 목록에는 도서관에 있는 모든 장서의 내용이 모두 기입되어 있어야 하고 그 장서 중에는 <도서관의 장서 목록>이라는 그 책 자체의 내용 역시 모두 기입되어야 하기에 결국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이는 ‘근거 부재의 오류’에 해당하는 역설적 상황이다. 그러면 이런 오류가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장서 목록의 개념을 정의한 후 장서 목록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정의 과정에는 반드시 恣意性介入되기에 ‘자기지칭적 성격을 갖는 사태이지만 논리적 오류에 빠지지는 않는 것이 있다’는 명제의 무한-보편적 타당성이 훼손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 ‘역설에 빠진다고 해서 모두 자기지칭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비판에 대해 검토해 보자. 우편엽서의 한쪽에는 ‘이 엽서의 반대쪽에 있는 문장은 거짓이다’라고 쓰여 있는데, 그 반대쪽에는 ‘이 엽서의 반대쪽에 있는 문장은 참이다’라고 쓰여 있는 경우, 각 문장은 자기를 지칭하지 않지만 역설을 야기한다고 한다. 또, ‘이 다음 문장은 거짓이다. 이 앞 문장은 참이다’라는 형식의 역설의 경우에도 앞, 뒤의 그 어느 문장도 자기를 지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 이런 비판이 부당한 이유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위에 인용한 두 가지 예에 등장하는 앞, 뒤의 문장이 역설을 야기하기 위해서는 두 문장이 불가분리적으로 관계해야 한다. 즉, ‘이 엽서의 반대쪽에 있는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문장은 그 문장 하나만으로는 결코 위와 같은 형식의 역설을 야기할 수 없다. ‘이 엽서의 반대쪽에 있는 문장은 참이다’라는 문장과 결합하고 있어야만 역설이 발생한다.

즉, 역설을 야기시키는 구조 전체를 놓고 보면 앞, 뒤의 각 문장은 自己가 소속되어 있는 <결합된 두 문장 전체> 중 一部를 가리키는 것이기에 自己-指稱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거짓말이다’라는 ‘거짓말 쟁이의 역설’의 경우도 ‘이 말은’이라는 주어와 ‘거짓말이다’라는 술어가 결합됨으로써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지, 만일 ‘이 말은’이라는 주어와 ‘거짓말이다’라는 술어를 결합시키지 않고 어느 한쪽만 보게 되면 역설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이 말은 거짓말이다’라는 문장에서, 역설을 발생시키는 것은 이 문장 全體가 아니라 이 문장의 一部인 ‘거짓말이다’라는 술어이다.

따라서 전형적인 ‘자기지칭적 문장’이라고 해도 전체 중 그 일부를 지칭하는 것이지 전체 모두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English’나 ‘검은(black)’과 같은 自敍的(autological) 형용사의 경우도 이는 마찬가지다. ‘English’라고 하더라도 ‘English’라는 것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 <색깔>이나, <綴字의 수>가 아니라 그 <의미>만이 ‘English’이다. ‘검은(black)’의 경우는 그 <의미>나 <綴字의 수>가 아니라 그 <색깔>이 ‘검은(black)’ 것이다.

따라서 ‘우편엽서의 역설’의 경우, 어느 한 면에 쓰인 문장이 반대 면에 쓰인 문장을 지칭하고 있다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자기가 속한 분할 불가능한 전체’ 중 一部를 지칭하는 것이기에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똑같이 ‘자기지칭적’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해 보았듯이 ‘자기지칭적이라고 해서 모두 역설에 빠지는 것은 아니며 역설에 빠진다고 해서 모두 자기지칭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비판은 부당하다. 즉, 逆說(paradox)이란 럿셀(Russell)의 지적과 같이 어떤 命題(proposition)나 事態(fact)의 ‘自己-指稱(self-reference)’에서 야기된다고 보아야 한다. 더 범위를 넓히면, 럿셀의 <전형적 逆說>은 물론 크립키(Kripke)의 <根據不在(ungroundedness)>, 中觀論理의 <同語反覆(tautology) 逆說> 등, 논리적 모순을 초래하는 모든 역설적 상황들이 ‘명제나 사태의 자기지칭적 성격’에 기인한다 하겠다.

그러면 어째서 자기지칭적인 명제나 사태에서 역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 어째서, 비단 전형적 역설을 야기하는 명제나 사태뿐만 아니라 물론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모든 문장들이 역설적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 한 마디로 말하면, ‘분할 불가능한 전체를 분할을 했기 때문’이다.

먼저, <전형적 역설>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하자. 럿셀(Russell)의 착안과 같이 ‘자기 부정을 포함하는 전체’가 전형적 역설의 발생 원인이다. ‘크레타섬의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의 경우 ‘크레타섬의 사람들’과 ‘이 명제의 發話者’는 결코 분할될 수 없는 하나인데, 이를 분할하여 ‘크레타섬의 사람들’을 주어로 삼았기 때문에 결국 자기지칭적 발화가 되고 만다. 그런데 전형적 역설의 경우는, 자기지칭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주어에 대해 부정적 의미의 서술을 하게 된다. ‘거짓말쟁이다’라는 술어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 명제는 자기-부정적 명제가 되고 만다. 다른 것을 부정(타자-부정)하기 위해 그 다른 것을 주어로 삼아 어떤 명제를 진술하였는데, 그 다른 것 속에 발화 당사자도 내포되어 있기에 그것이 결국 자기-부정적 역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말은 거짓말이다’라는 ‘거짓말쟁이의 역설’의 경우, ‘이 말’과 ‘거짓말’이 분할 불가능한 전체임에도 이를 분할하여 발화하면서 부정적 진술을 덧붙였기에 자기지칭적 부정으로 귀결되어 역설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根據 不在(ungronundedness)>의 오류에 대해 검토해 보자. 본고 제2장에서 고찰해 보았듯이, 龍樹가 ?廣破論(Vaidalyaprakaraa)? 제4절이나 ?廻諍論(Vigrahavyavartani)? 제32, 33송에서 <인식 수단(pramāṇa)>의 실재성을 논파하는 논법이 이에 해당된다. “모든 대상은 인식 수단에 의해 확립된다”고 주장하는 경우, 그 인식 수단을 확립시키기 위한 根據로서 제2의 인식 수단이 요구되고, 제2의 인식 수단을 확립시키기 위한 근거로서 다시 제3의 인식 수단이 요구되며, 결국 무한한 인식 수단이 필요하게 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이런 비판법이 <근거 부재>의 오류를 이용한 논법이다. 그런데 이 역시 전형적 역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분할 불가능한 전체>를 분할했기에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인식 대상> 속에는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 수단> 역시 포함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인식의 세계에서 인식 수단과 인식 대상은 분할 불가능한 전체인데, 이를 분할하여 하나를 ‘작용의 도구’로, 다른 하나를 ‘작용의 대상’으로 삼아 그런 도구가 대상에 작용한다고 보는 경우, 그 도구는 자기 자신에게도 작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무한소급에 빠지는 것이다. 이 역시 자기지칭적 사태이다.

마지막으로, 中觀論理的 <同語反覆의 오류>에 대해 고찰해 보겠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가는 자가 간다’는 ?中論? 2 觀去來品의 문장과 동일한 구조를 갖는 ‘비가 내린다’는 문장을 예로 든다. ‘비가 내린다’는 문장의 경우, ‘내린다’는 작용과 분리된 ‘비’라는 존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즉, 내리고 있어야만 ‘비’라는 호칭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재론자(Realist)들과 같이 ‘비’라는 주체와 ‘내린다’는 작용을 별개의 존재로 간주하게 되면 ‘비가 내린다’는 발화는 동어반복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 즉, 내리고 있는 비가 다시 내려야 하는 것이다. ‘비가 내린다’는 사태는 <분할 불가능한 전체>인데, 여기서 ‘비’라는 주체와 ‘내린다’는 작용을 오려 내어(scissor out) 즉, 분할하여 문장을 구성하기에, <同語反覆의 오류>가 발생한다. ‘비’라는 개념에는 이미 ‘내린다’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라는 주어와 ‘내린다’는 술어의 槪念은, 결코 종합판단적으로 관계 맺어지는 독립된 他者일 수는 없는 것이다. ‘비’라는 主語他者인 ‘내린다’는 述語와 관계지으려고 하지만 ‘내린다’는 술어는 타자가 아니라 ‘비’라는 주어 자신의 일부이기에, ‘비가 내린다’는 發話는 ‘자기지칭적 중복 진술’이 되고 만다.

지금까지 고찰해 보았듯이 <분할 불가능한 전체>를 분할하려고 하는 경우, 자기-지칭적 명제나 事態가 야기되고, 결국 역설적 상황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서양 논리학에서는 <전형적 역설>이나, <근거 부재>의 상황만을 논리적 오류라고 간주한 반면, 龍樹는 그런 두 가지 오류는 물론이고, 모든 일상적 문장에서도 <동어반복>이라는 논리적 오류를 간파해 내어 자신의 논리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분할 불가능한 전체>를 분할하려고 하기 때문에 전형적 역설의 <자기지칭적 부정의 오류>나, 근거 부재(ungroundedness)시 발생하는 <자기지칭적 무한소급의 오류>, 또는 中觀論理적인 <자기지칭적 동어반복의 오류>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본고 제3장에서 고찰해 보았듯이 이 세 가지 모두, 자기지칭적 사태나 명제에서 <내포(inclusion)>와 <배제(exclusion)>의 딜레마가 야기됨으로써 발생되는 오류인 것이다.

5. 逆說의 해결

<분할 불가능한 전체>를 분할함으로써 야기되는 역설적 상황을 이용하여 적대자의 주장을 논파하는 것이 中觀論理의 요체이다. 그러면, 龍樹 자신의 진술들은 그런 역설적 상황에서 빠져 나와 있다고 볼 수 있는가? ?廻諍論? 서두의 다음과 같은 비판이 이런 의문을 대변한다.

만일 ‘그 어디서건 모든 사물에 自性이 없다’면 自性이 없는 그대의 말은 自性을 부정할 수 없다(제1송).

이와 달리, 만일 이 말이 自性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그대의 앞에서의 주장은 깨어진다.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기에 거기에 특별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으면 안된다(제2송).

즉, 龍樹가 실재론자의 세계관을 논파하면서 모든 존재들(諸法: sarvabhāvāḥ)의 空性(=無自性性)을 이야기하자, 실재론자는 그러한 空性 역시 해야 하기에 自家撞着에 빠지게 된다고 龍樹를 역공격하는 것이다.

만일 럿셀(Russell)이었다면 이에 대해 답하면서 ‘모든 것은 自性이 없다’는 명제만은 모든 것에 포함되지 않는 2의 명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럿셀의 階型理論(type-theory)에서는 逆說(paradox)의 발생을 피하기 위해 언어의 계층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構成된(constructed) 것이다. 언어의 계층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은 수학의 公理(axiom)와 같은 약속일 뿐이기에, 그런 약속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명제들의 진리성은 그 약속 바깥의 세계에서는 보편타당성을 잃고 만다.

역설(paradox)에 대한 럿셀의 해결방안과 유사하지만 보다 향상된 방법이 타르스키(Tarski)에 의해 고안된 바 있다. 럿셀은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이나 ‘리샤르(Richard)의 역설’, ‘부랄리-포르티(Burali-Forti)의 역설’, ‘집합론의 역설’등이 모두 같은 구조를 갖는다고 보았지만, 램지(Ramsey)는 이를 비판하면서 <언어상의 역설>과 <논리상의 역설>을 구분할 것을 제안하였다. 즉, ‘에피메니데스의 역설’과 같은 것은 <언어상의 역설>에 속하고 ‘집합론의 역설’과 같은 것은 <논리상의 역설>에 속한다는 것이다.

타르스키는 램지의 이런 분류법을 계승하면서 이 중 <언어상의 역설>의 문제는 논리 체계 내부에서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럿셀이 고안한 계형이론은, 논리 체계 내부에서 명제의 자기지칭(self-reference)을 금지시킴으로써, 역설을 해결하려 한 것이었으나, 타르스키는 명제에 대한 眞․僞를 기술하는 가치 개념을 논리 체계 밖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그것을 써서 이야기하는 언어(die Sprache von der wir sprachen)>와 <반성된 언어(die betrchtete Sprache)>를 구분함으로써 역설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전자를 <고차언어(Meta-sprache)>, 후자를 <대상언어(Objekt-sprache)>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대상언어>란 ‘연구의 대상이 되는 언어’이고 <고차언어>란 ‘대상언어 중의 명제나 추리등을 설명하고 해석하고 가치판단하기 위하여 쓰여지는 언어’이다. 예를 들어 ‘눈은 희다’는 표현은 <대상언어>에 해당되고 ‘눈은 희다는 참이다’는 표현은 <고차언어>에 해당된다는 말이다. 즉 명제의 체계와 그 명제에 대한 가치 판단의 체계를 구별함으로써 역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에 인용한 ?廻諍論?의 예에 적용하면, ‘모든 사물에 自性이 없다’는 龍樹의 말은 ‘반성된 언어(die betrchtete Sprache)인 <고차언어(Meta-sprache= meta-language)’에 해당되고, 이 말에 의해 비판되는 ‘사람에게는 自性이 있다’, ‘地․水․火․風 四大에는 自性이 있다’와 같은 말들은 ‘우리가 그것을 써서 이야기하는 언어인 <대상언어(Objekt-sprache= object-language)>에 해당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은 自性이 없다’는 말 속에 이 말만은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하기에 역설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잔 하크(Susan Haak)의 지적과 같이 이와 같은 해결책은 형식적 해결책은 될지언정 철학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즉, 그 유용성은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해결이 직관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는 말이다.

비근한 예를 들어, 담벼락에 ‘낙서 금지’라는 글씨가 쓰여 있을 때, 그 글씨만은 결코 낙서의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不立文字’라는 말을 썼을 때 이 문자만은 결코 문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세상은 타르스키나 럿셀이 만든 <논리학의 장기판(chess board of logic)>보다 그 넓이가 넓다.

이렇게, 역설(paradox)에 대한 럿셀(Russell)이나 타르스키(Tarski)의 해결책은, 恣意的 성격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本稿 제2장과 제3장에서 고찰해 보았듯이 龍樹는 논쟁 상대가 봉착한 역설적 상황을 드러내 줌으로써 적대자의 주장을 논파하고 있다. 즉,< 中觀論理>에서는 역설적 상황을 인간 사고의 한계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렇게 상대를 논파하는 龍樹中觀論理 역시 역설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의문에 토대를 둔 비판이, 본장 서두에 인용한 ?廻諍論? 제1송과 제2송에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龍樹는 이런 비판을 피해 나간다. 그리고 龍樹의 논의 역시 역설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의미 하게 쓰일 수 있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의 교설>이라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다.

먼저 龍樹는 ‘모든 것에 自性이 없다’는 자신의 말 역시 自性이 없다고 시인한다. 즉, 이 명제의 의미 속에는 이 명제 자체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점에서 龍樹의 해결 방안은 럿셀이나 타르스키와 다르다. 적대자인 실재론자는 다음과 같이 여섯 갈래의 논의(akoiko vāda)를 나열하며 龍樹가 역설에 빠져 있음을 力說한다.

[1] 그런데 만일 모든 존재가 하다면, 그에 의해 그대의 말은 하다. 모든 존재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한 그것[=말]에 의해 부정함은 성립하지 않는다[A]./ 거기에서는 모든 존재들이 하다고 부정하는 것, 그것은 성립되지 않는다[B]./

[2] 만일 모든 존재들이 하다는 부정이 성립한다[~B]면, 그에 의해 그대의 말은 하지 않다./ 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의해 부정함은 성립하지 않는다[C]./

[3] 만일 모든 존재들은 하고, 부정을 행한 그대의 말은 하지 않다[~C]면, 그에 의해 그대의 말은 모든 곳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된다[D]./ 여기서는 실례(實例)에 위배됨이 있다./

[4] 그런데 만일 그대의 말이 모든 곳에 포함되고 또 모든 존재가 하다[~D]면, 그에 의해 그것[=그대의 말]도 역시 하다./ 하기 때문에 이[=그대의 말]에 의해 부정함은 존재하지 않는다[E]./

[5] 만일 하고 이에 의해 모든 존재들이 하다는 부정이 존재한다[~E]면, 이에 의해 한 모든 것들도 <작용을 할 수 있는 것들(kāryakriyāsamarthā)>이 되리라[F]. 그러나 이는 기대되지 않는다./

[6] 만일 실례(實例)에 위배됨을 없애려고 생각해서 한 모든 것들은 <작용을 할 수 있는 것들(kāryakriyāsamarthā)>이 되지 않는다[~F]고 한다면, 한 그대의 말에 의해 모든 존재의 自性을 부정함은 성립하지 않는다[A]./

이런 비판에 대해 龍樹, 한 것들도 그 작용(kārya)을 하는 경우에는 어떤 역할을 한다(√vt)고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즉, 위에 인용한 [5], [6]의 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또, 緣起性이기 때문에 自性한 수레와 옷감과 물단지등도 각각의 作用(kārya)인 나무와 풀과 흙을 운반하는 경우에, 꿀과 물과 우유를 담는 경우에, 추위와 바람과 더위를 막는 경우에 역할들을 한다(vartante). 이와 같이 이러한 연기성이기 때문에 無自性한 나의 말도 사물들의 無自性性을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vartate). 이런 상황 에서, 무自性성이기 때문에 그대의 말은 空性이라고 말했던 것, 또 그것이 空性이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모든 존재의 自性을 부정함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 그것은 옳지 않다.

마치 꼭두각시(nirmitaka)가 다른 꼭두각시를 제압하고 허깨비(māyāpurua)가 스스로의 마술로 만들어낸 다른 허깨비를 제압(pratiedha)하듯이, ‘모든 사물은 하다’는 自性이 없는 말에 의해, 自性이 없는 모든 것의 自性을 부정(pratiedha)하는 작용(kārya)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부정은, 꼭두각시 여인에 대해 진짜 여인이라고 잘못 파악하는 경우 다른 꼭두각시가 이를 시정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꿈을 꿀 때, 꿈 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것은 생시가 아닌 꿈이라고 알려주는 것과 같이 空性의 교설 역시 하지만 그 작용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空性의 교설이 역설에 빠짐에도 불구하고 有意味 (significant)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이다.

더욱이 龍樹空性의 교설이 무엇을 주장하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무엇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먼저 주장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살펴보자. 적대자는 空性의 교설을 역설적 상황에 빠뜨림으로써 비판한 후, 자신의 그런 비판 역시 동일한 논리에 의해 비판받을 수 있다고 할 龍樹의 항변을 예상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空性的] 부정을 [실재론자가] 부정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이 逆說에 빠진]다고 하는 생각이 있겠지만 그것은 없다. 그와 같이 그 특징으로 인해 망쳐지는 것은 그대의 주장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이 게송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풀어 쓸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의 自性은 부정되지 않는다’고 ‘모든 것의 自性은 부정된다’는 말을 부정한다면 ‘모든 것의 自性은 부정된다’는 말의 自性도 부정되지 않을 것이고, 이와 반대로 이 말의 自性 역시 부정된다면 ‘모든 것의 自性은 부정되지 않는다’는 말에 예외가 있는 꼴이 되어 옳지 못하다.

그러나 적대자는, 자신은 ‘모든 것의 自性은 부정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세운 적이 없으며, 이 논쟁은 애초에 龍樹가 ‘모든 것의 自性은 부정된다’는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반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龍樹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만일 무엇인가가 나의 주장이라면 그로 인해 그런 과오는 나의 것이리라. 그러나 나의 주장은 없다. 그러므로 나의 과오는 없다.

즉, ‘모든 것이 自性이 없다’는 명제는 龍樹의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 분명 龍樹는 도처에서 모든 것이 自性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니…. 그러나 이것이, 空性(śūnyatā)의 교설이 逆說(paradox)에 빠짐에도 불구하고 有意味(significant)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이다.

세 번째로, 龍樹가 제시하는 명제는 그 어떤 것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고찰해 보자. 적대자는 ‘어떤 존재를 부정하려면 부정되기 이전에 그것이 존재하고 있었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모든 사물은 自性이 없다는 龍樹空性의 교설을 비판한다.

존재하기 때문에 항아리가 집에 없다는 부정, 이것이 있으므로, 그러므로 그대의 이런 自性 부정은 존재하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이다.

‘집에 항아리가 없다’는 부정이 가능하려면 항아리가 실재로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에 自性은 없다(sarveṣāṃ bhāvānāṃ na vidyate svabhāvaś)’는 부정은 自性이 원래 있어야 가능하다고 龍樹를 비판한다. 이에 대해 龍樹는 먼저 상대를 역설에 빠뜨림으로써 논파한다. 즉, 존재하는 것만이 부정될 수 있는 것이라면, 空性에 대한 적대자의 부정도 그런 부정의 대상인 空性이 존재해야 가능할 것이기에, 오히려 空性의 교리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또, 그와 반대로 空性의 교리는 부정되지만 空性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떤 존재를 부정하려면 부정되기 이전에 그것이 존재하고 있었어야 하는 것’이라는, 자신이 내세운 애초의 주장에 위배되는 사례(反喩: pratidṛṣṭānta)가 하나 있는 꼴이니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어서 龍樹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부정하지 않는다. 또 무엇인가 부정되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당신은 부정한다’는 비방, 이것은 그대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무엇인가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 자체가 ‘龍樹는 무엇인가를 부정한다’는 말을 부정한 자가당착에 빠진 말 아닌가? 즉, 스스로 부정적인 표현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龍樹는 그것이 부정이 아니라고 한다.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상대를 역설에 빠뜨림에 의해 상대를 비판하면서 그 스스로도 역설에 빠져 있는 모습이 분명한데도 자기 자신은 역설에 빠지지 않는다고 하는 龍樹言明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로 인해 中觀論理의 특징이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다. 역설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는 일 ―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럿셀 이후 서구 논리학자들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럿셀(Russell)의 階型理論(type theory), 타르스키(Tarski)의 二種言語論, 체르멜로 (Zermelo)의 公理的 集合論(axiomatic set theory)등이 모두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연구 성과들인데 이런 이론들 모두 構成的(constructive)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즉, 이런 해결 방안들이 형식적으로는 유용할지 몰라도 철학적으로 역설의 문제를 보편타당하게 해결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설명한다면, 이 넓은 세상에서, 역설의 발생을 금지시킨 하나의 ‘장기판(chess-board)’을 고안한 것일 뿐이다.

그럼 龍樹는 어떻게 해서 역설에서 벗어난 것일까? 먼저 明記하여야 할 것은 서구의 논리학자들이 고안했던 모든 종류의 역설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龍樹가 제시한 것이 결코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龍樹는 역설을 인간 사고의 한계로 보았다. 따라서, 그렐링(Grelling)의 역설(1908), 우편엽서의 역설, 리샤르 (Richard)의 역설(1905년)등 모든 역설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이 자리에서 모색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렇게 분별 행위를 비판하는 龍樹의 논의만이, 어째서 역설의 덫에 걸리지 않고 유의미할 수 있는지 고찰해 보는 일만이 과제로 남는다.

그 어떤 분별을 하더라도 역설이 발생하기에, 모든 사유와 명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 中觀論理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나 龍樹中觀論理를 구사하는 空性의 교설만은, 그 독특한 성격으로 인해, 自家撞着的 역설에 빠지지 않고 有意味할 수 있다. 그러면 그 독특한 성격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하면, <對機說法的 性格>이다. 즉, 空性의 교설은 <應病與藥>과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이기에 역설을 피해 有意味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廻諍論?에서 空性의 교설에 대한 실재론자의 비판에 대해, 龍樹가 항변하며 제시하는 비유들을 열거해 보자.

① 꼭두각시(nirmitaka)가 다른 꼭두각시를 제압하고 허깨비(māyāpurua)가 스스로의 마술로 만들어낸 다른 허깨비를 제압(pratiedha)하듯이, 이런 부정도 그와 같으리라.

② 혹은, 만일 [어떤 사람이] 꼭두각시 여인에 대해 [진짜] 여인이라고 잘못 파악하는 경우, 어떤 다른 꼭두각시가 [이를] 시정해 주게 되는데 이것은 그와 같으리라.

③ 그것은 마치 데바닷따가 존재하지 않는 집에서, [잘못된 인식을 가진 누군가가] ‘데바닷따가 집에 있다’고 하는, 그런 경우에 [올바른 인식을 가진] 어떤 사내가 이에 대해 ‘[데바닷따가 집에]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말은 <데바닷따의 없음>이라는 사물(bhāva)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데바닷따가 집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줄(jñāpayati) 뿐이다. 그와 같이 ‘사물(bhāva)들은 自性이 없다’는, 이런 말은 사물(bhāva)들의 無自性性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들에 自性이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다(jñāpayati).

이 세 가지 비유 모두, ‘모든 사물은 自性이 없다’는 空性의 교설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여기서 龍樹는 <空性의 교설>을 <다른 꼭두각시>를 제압하는 꼭두각시, <다른 허깨비>를 제압하는 허깨비, <다른 꼭두각시 여인에 대한 착각>을 시정해 주는 꼭두각시, <‘데바닷따가 집에 있다’는 오해>를 제거해 주는 ‘데바닷따가 집에 없다’는 말에 비유한다. 이들 비유를 보면 그 어느 경우건, <다른 꼭두각시>, <다른 허깨비>, <다른 꼭두각시 여인에 대한 착각>, <‘데바닷따가 집에 있다’는 오해>등, 비판의 대상이 先行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에는 自性이 없다’는 空性의 교설의 경우도, ‘모든 사물에는 自性이 있다’는 <잘못된 판단>의 <>이 先行하는 상황에서, 그런 판단을 <治療>해 주기 위한 <도구>로서 龍樹에 의해 發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느 누가 그 어떤 주장도 하지 않고 있는데 무턱대고 龍樹가 ‘모든 사물은 自性이 없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後者와 같은 경우라면, 空性의 교설 역시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서구 논리철학에서 公理的(axiomatical)으로 해결하려한 전형적 逆說과, 역설적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할 수 있는 空性의 교설의 성격을 비교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형적 역설> <空性의 교설>

① 발화의 선행조건이 없다. ① 선행조건이 있는 경우에 한해 발화된다(應病與藥).

② 발화된 명제를 주장으로 본다. ② 발화된 명제를 도구로 본다(方便性).

이렇게 空性의 교설은 무턱댄 주장이 아니라, <先行하는 잘못된 판단>을 비판해 주는 <도구>인 것이다. 즉, 동일한 發話라고 하더라도, 어떤 선행하는 <주장>이 있는 경우에 한해 그것을 비판하는 <도구>로 쓰였기에 龍樹의 발화는 有意味할 수 있다. 그러나 럿셀(Russell)등은, ‘크레타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에피메니데스의 발화’가 나오게 된 <선행조건>이나 언어의 <도구적 성격>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면 ‘에피메니데스의 발화’가, 空性의 교설과 같이 有意味할 수 있는 상황을 설정해 보자. 크레타섬은 그리스 남쪽의 지중해상에 위치한 섬으로 해상무역의 중심지였기에 그 주민의 대부분이 장사꾼들이었으며 거짓말도 잘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주민 중 한 사람이 ‘우리 크레타섬의 사람들은 모두 진실하다’는 뻔한 거짓말을 한다. 이것을 보고 같은 크레타섬 사람인 에피메네스가, ‘아니다! 크레타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을 한다면 이 말로 인해 앞의 말은 비판된다. 여기서 ‘에피메니데스의 발화’는 유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 발화를 하기 이전에 <선행조건>으로서, ‘크레타섬의 사람들은 모두 진실하다’는 잘못된 주장이 있었고, 그런 <주장>을 대상으로 삼아 그를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서 ‘에피메니데스의 발화’가 쓰인 경우에는 유의미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금지’라는 글씨 역시, 아무도 담벼락에 낙서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써 놓은 것이라면 그 글씨로 인해, 원래는 깨끗할 수도 있었을 담벼락이 오히려 더럽혀졌기에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죄책감 없이 온갖 낙서를 자행하고 있는 상황[→선행조건]에서, 낙서의 잘못을 알려주기 위해[→도구적 성격] 그 글씨를 쓴 것이라면, ‘낙서금지’라는 글씨는 自家撞着에 빠짐에도 불구하고 有意味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不立文字’라는 禪家의 명제도 ‘文字’를 통한 공부에만 집착하는 풍토가 성행하는 상황에 한해서 有意味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고찰해 보았듯이 <空性의 교설>이나 <遮詮的 發話>는 그 이전에, <비판의 대상이 되는 發話先行>하는 상태에서, <도구>와 같이 구사되는 것이기에 自家撞着의 모습을 띰에도 불구하고 無意味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論者는, 新造語(a newly coined world)를 만들어, 中觀論理의 이러한 성격을 <논리적 정당방위(logically legitimate self-defence)>라고 부르겠다.

恣意的으로 自己指稱(self-reference)을 금지시킴으로써 역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 럿셀(Russell)이나 타르스키 (Tarski)등 西歐 논리철학자들의 해결 방안은, 그 성격이 構成的(constructive)이기에, 보편적 진리성이 결여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들은 이 넓은 세상에서 단지 자그마한 <논리학의 장기판>을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그러나 <空性의 교설>은, 상대방이 이 세계를 보고 어떤 개ㄴ념이나 판단을 오려내는(scissor out) 경우에 한해, 즉 어떤 논리에 입각한 어떤 주장을 하는 경우에 한해, 그것을 비판하는 도구로서 구사되었기에, 역설의 모습을 띰에도 불구하고 有意味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倫理의 구조적 동질성

의 역설적 구조 - 自家撞着

이 세상 모든 것은 緣起的이다. 따라서, 이 세상 그 어떤 사태건 分割할 수가 없다. 즉, 오릴 수가 없다. 예를 들면, 눈(能見)과 시각대상(所見)을 나눌 수가 없고, 나와 세상을 나눌 수가 없으며, 긴 것과 짧은 것을 나눌 수가 없고, 삶과 죽음을 나눌 수가 없다. 그러나 연기실상을 위배하고 우리의 사유가 어떤 事態에 대해 분할을 가할 경우 논리적 오류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런 오류를 지적해 주는 논리가 바로 <의 논리>이다. 의 논리는, 우리의 구성적(constructive) 사유에 의해 이루어진 <판단>이나 <추론>의 절대적 타당성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反論理>라고 부를 수가 있으며, 모든 <개념>의 독립적 실재성을 해체(deconstruct)시킨다는 점에서 <涅槃論理>라고 부를 수가 있을 것이다. 또, 의 논리는 緣起實相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도출된 논리이기에 <緣起論理>라고 부를 수가 있고, 思惟의 이율배반적 속성을 비판하는 논리이기에 <中道論理>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中觀論理>라고 부를 수도 있다.s

불교 논서 중 의 논리가 克明하게 표출되어 있는 논서가 바로 龍樹의 ?中論?인데, ?中論?의 논리는 초기불전의 緣起說에 토대를 두고 있다. 연기설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기에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기에 저것이 멸한다’는 緣起公式으로 표현되는데 이 중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기에 저것이 생한다’는 구절은 연기의 構成的(constructive) 측면인 流轉門의 원리를 나타낸 것이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기에 저것이 멸한다’는 구절은 연기의 解體的 (deconstructive) 측면인 還滅門의 원리를 나타낸 것이다. 龍樹는 이 중 還滅門緣起說만을 논리적 오류가 없는 연기의 표현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中論?에서 갖가지 <판단>에서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경우 그 토대로서 제시되는 연기설은 환멸문의 형식으로 기술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만일 <가는 자>를 떠난다면 <가는 작용>은 성립되지 않는다. <가는 작용>이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가는 자>가 성립하겠는가?

<>이 없으면 은 포착되지 않는다. 이 없어도 <>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보는 작용>이나 <듣는 작용> 따위 그리고 <감수 작용> 등이 속해 있는 그것(= 근본 주체)이 만일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들(=<보는 작용> ) 역시 존재하지 않으리라.

이렇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개념쌍의 환멸연기적 관계에 대해 선언을 함으로써 각 개념들의 독립적 실재성(= 自性: svabhāva)을 비판한 다음 龍樹는 두 개념쌍으로 이루어진 <판단>에서 논리적 오류를 도출시킨다.

위에 인용한 2 觀去來品의 경우 ‘<가는 자>가 간다’는 판단에 대해 龍樹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비판한다.

<가는 자>가 간다고 주장하는 자에게는, <가는 작용> 없이 <가는 자>가 있다는 오류가 있게 된다.

[왜냐하면 ]<가는 자>에 소속된 <가는 작용>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만일 <가는 자>가 다시 간다면 <가는 작용>이 두 개인 오류가 있게 된다. [그 두 가지는 ]<가는 자>라고 부르게 만드는 것과, 가고 있는 존재인 <가는 자>이다

一例로 지금 누군가가 걸어가고 있다고 할 때, 거기서 <가는 자>와 <가는 작용>을 분할하여 ‘<가는 자>가 간다’고 표현하게 되면 논리적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가는 자>라는 주어 속에 <가는 작용>이라는 술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면, 가는 작용이 두 개로 되는 ‘중복의 오류’에 빠지고, 배제되어 있다고 보면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

한국어로는 ‘가는 자가 간다’는 표현이 생경하기에 다른 卑近한 예로 바꾸어 이런 오류에 대해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바람()이 분다’는 표현의 경우 ‘바람’이 없으면 ‘분다’는 작용도 있을 수 없으며 ‘분다’는 작용이 없으면 ‘바람’도 있을 수 없다. ‘바람’과 ‘분다’는 작용은 緣起的이다. 그런데 연기성을 위배하고 ‘바람’과 ‘분다’는 작용을 분할한 후, ‘바람이 분다’는 발화를 하는 경우 논리적 오류가 발생한다. ‘바람이 분다’는 것은 분할 불가능한 하나의 사태인데 <생각의 가위>에 의해 바람을 오려낼 경우(= 分別), 우리는 ‘분다’는 작용이 ‘바람’이라는 개념에 내포되어 있는지 배제되어 있는지 물을 수가 있다. 이 때 그 어떤 쪽의 대답을 한다고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논리적 오류에 빠진다. 먼저, ‘분다’는 술어의 의미가 ‘바람’이라는 주어 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생각의 토대 위에서 ‘바람이 분다’는 發話를 하게 되면 이미 ‘불고 있는 바람이 다시 분다’는 말이 된다. 즉, 바람이 두 번 분다는 ‘중복의 오류’에 빠진다. 그와 반대로, ‘분다’는 술어의 의미가 ‘바람’이라는 주어 속에서 배제되어 있다고 본다면 ‘불지 않는 바람이 있다’는 뜻이 되는데 그런 바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에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바람이 분다’는 말을 하는 경우 ‘분다’는 의미는 ‘바람’ 속에 <내포>되어 있을 수도 없고 <배제>되어 있을 수도 없다.

이를 고대 인도의 세계 발생 이론에 대비시키면 <내포>적 관점은 因中有果論的 세계관과 통하고 <배제>적 관점은 因中無果論的 세계관과 통한다. 엄밀히 말하면 ‘<가는 자>가 간다’, 또는 ‘바람이 분다’는 판단에 대한 그런 두 가지 이해 방식은 主中有述論(주어 속에 술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과 主中無述論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常斷二邊說과 비교하면 인중유과론은 원인이 결과로 그대로 이어진다는 常見에 해당되고 인중무과론은 원인과 결과는 단절되어 있다는 斷見에 해당된다.

이를 다시 四句와 비교하면 상견은 어떤 사태에 대한 제1구적인 해석이고 단견은 제2구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中道에는 두 가지가 있다. 실천적 중도와 사상적 중도가 그것이다. 苦行快樂의 양극단(= 二邊)을 떠난 八正道의 수행이 실천적 중도의 수행이라면 常見斷見의 양 극단(= 二邊)을 떠난 십이연기설은 思想的 중도설인 것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설에서는 인중유과론적 상견도 비판하고 인중무과론 적인 단견도 비판한다. 龍樹는 십이연기설의 인과론적 중도성을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판단에 적용하여 술어의 의미가 주어 속에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도 없고 배제되어 있다고 볼 수도 없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연기의 중도성을 드러낸다.

비단, ‘바람’이나 ‘부는 작용’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들이 이렇게 분할 작용에 의해 탄생된 것들이다. ‘더러움’이라는 개념은 ‘깨끗함’이라는 개념과 함께 발생하였고, ‘인식수단(pramāṇa: 能量)’이라는 개념은 ‘인식대상(prameya: 所量)’이라는 개념과 함께 발생하였으며, ‘불’이라는 개념은 ‘연료’라는 개념과 함께 발생한 것이다. 즉, 가치개념이건 인식개념이건 존재개념이건 모두 대응쌍과 함께 발생한 것이기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즉, 그 自性이 없으며 하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런 개념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분할을 한 후 다시 양자를 연결하는 행위가 先行해야 한다. 즉, 개념을 오려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오려진 개념들은 허구이다. 허구의 개념들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판단들은 필연적으로 논리적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의 논리에 의해 어떤 <판단>의 사실성이 비판되는 과정은 <逆說(paradox)>적 명제가 논리적 오류로 귀결되는 과정과 그 구조가 동일하다. 예를 들어 보자.

전형적 역설인,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의 경우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을 한 <에피메니데스>가 <크레타 사람>가운데에 내포되기에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지며, 이와 달리 <에피메니데스>만은 <크레타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즉, <에피메니데스>는 <크레타 사람>에 내포시킬 수도 없고, <크레타 사람>에서 배제시킬 수도 없다. 여기서 에피메니데스 역시 크레타 사람에 내포된다는 사실은 四句판단 중 제1구적인 판단과 같은 구조를 가지며, 에피메니데스만은 크레타 사람에서 배제된다는 생각은 四句판단 중 제2구적인 판단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

많은 불교적 명제들 또한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문자를 세우지 말라며 문자를 세우는 <不立文字>, 입만 열면 그르친다면서 입을 열고 있는 <開口卽錯>. 마음을 비운다는 마음으로 마음을 채우고 있으며, 욕심을 버리겠다는 욕심을 내고 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이와 같이 역설을 도출시킬 수 있다. 이 중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명제의 경우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바로 그 말 역시 문자의 범위에 내포되고 말기에 역설이 발생되는 것이다. 즉, 타자를 향해 부정적인 발화를 하였는데 그것이 다시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마치 부우메랑을 던진 것과 같은 자가당착이 발생한다.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말 역시 문자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제1구적인 것이고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것은 문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제2구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예에서 보듯이 상관하는 두 事體[] 중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에 내포(inclusion)시킬 수도 없고 배제(exclusion)시킬 수도 없다는 것이 <중관 논리>와 <역설>의 공통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思考의 한계이다.

그러면 이런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럿셀(Russell)은 ‘自己指稱(self-reference)’이라고 말하며, 이런 자기지칭으로 인해 일종의 惡循環(vicious-circle)이 야기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논자 역시 이에 일부 동의한다. ‘불립문자’라는 말을 한 순간 자기지칭이 발생하고, 에피메니데스가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을 한 순간 자기지칭이 발생한다. 그러면 어째서 자기지칭이 일어난 것일까? 한 마디로 말해, ‘위와 같은 발화를 하면서 문제가 되는 사태를 분할했기 때문’이다. 즉, 분할 행위가 자기지칭에 선행한다. 분할이란 을 긋는 것이다. 크레타 사람 전체가 거짓말쟁이인데 자신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고 자신과 크레타 사람 사이에 선을 긋고, 불립문자라는 발화 역시 문자에 속하는데 불립문자만은 문자가 아니라고 불립문자라는 문자와 다른 문자들 사이에 심정적으로 선을 그었기에 무심코 역설적 발화를 하게 되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는 하나의 사태에서 ‘바람’과 ‘분다’를 분할하는 경우 ‘중복의 오류’와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가 발생하듯이, 불립문자라는 발화 역시 그 발화만은 문자가 아니라고 문자의 세계에서 분할해 내었기에 ‘자가당착의 오류(prasaga sama)’와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pratidṛṣṭānta sama)’가 발생한다.

이와 같이 의 논리에서는, <분할 불가능한 하나의 사태>를 우리의 思考가 주어와 술어, 주체와 작용, 실체와 현상 등으로 오려낸 후(=분할, 분별) 어떤 發話를 하는 경우 자기지칭을 야기하게 되며, 결국 <논리적 자가당착>이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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