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침묵, 그리고 이심전심의 소통 / 윤종갑 | |||
특집 | 좋은 말 나쁜 말 그리고 불교 | |||
| [75호] 2018년 09월 01일 (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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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과 선불교의 언어관과 말문화 분석 1. 여시아문(如是我聞) 불교는 ‘여시아문’으로 시작된다.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이를 잊지 않고 항상 되새기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시작은 ‘공자왈(孔子曰)’로 시작되는 유교나 ‘예수(하나님), 가라사대’로 시작하는 기독교와는 엄연한 차별성을 갖는다. 유교나 기독교에서는 듣는 주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하는 주체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으로 공자가 말씀했기 때문에 진리가 되고, 예수(하나님)가 전했기 때문에 진리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절대자의 말씀으로 인해 유교 경전(《논어》)과 성경이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곧 유교와 기독교의 탄생과 유지의 결정체가 되었다. 불교의 ‘여시아문’은 유교의 ‘공자왈’과 기독교의 ‘예수, 가라사대’와는 방점의 주체가 다르다. 말[가르침]을 편 주체보다는 말을 들은 주체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그 누가 아닌 내가 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들었다’는 그 말 속에는 내가 들은 그 말에 대한 진실성과 책임감을 보증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누가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들은 그 말이 실제 진실함을 나 스스로 확인하였기 때문에 그 말을 소중한 가르침으로 되뇌며 가슴에 새기는 것이다.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그 가르침을 이와 같이 진리로서 확인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지위가 아무리 높고 그럴듯한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말이 실제 내게 올바른 것임을 확인시켜주지 못하면 그것은 내게 무용한 것으로, 결코 내가 가르침으로서 들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말이라 할지라도 옳은 말을 가려서 들어야 하고, 내가 진리로서 확인한 말을 해야 한다. 누구의 말이든 내게 진리로서 확인이 되지 않은 한, 말[가르침]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궁극적 진리인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말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판단이 요구된다. 말은 깨달음[열반]으로 가는 계단 내지 사닥다리가 될 수 있지만, 반대로 괴로움[윤회]으로 떨어지는 낭떠러지가 될 수도 있다. 언어가 지닌 이러한 이중성으로 인하여 불교의 여러 학파[종파]에서는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인도의 중관학파와 중국의 선불교가 언어를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불교에서 수행은 3업(三業)을 청정하게 하고 8정도(八正道)를 행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데, 3업과 8정도의 한 축이 언어[말]와 관계한다. 즉 구업(口業)과 정어(正語)는 언어의 나쁜 기능을 통제하고 끊어버리는 대신 지혜롭고 자비로운 말로 나쁜 업장을 소멸하고 깨달음에 들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수행지침[수행방법]이다. 중관학파와 선불교는 이러한 언어의 중요성과 수행방법을 이어받아 언어가 지닌 폐단을 없애고 그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깨달음의 길로서 언어 사용은 비단 불교의 수행방법론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적용될 수 있는 일상적인 진리이다. 따라서 이 글을 통하여 중관학파와 선불교에서의 언어에 대한 관점을 알아보고, 이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된 잘못된 언어 습관과 언어폭력에 대해 어떤 시사점을 주며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언어, 깨달음으로 가는 사닥다리 1) 언어를 통해 궁극적 진리를 깨치다[二諦說] 중관학파의 개조가 되는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 약 150~ 250)는 괴로움[윤회]과 깨달음으로 가는 두 길 가운데 어디로 갈 것인지를 선택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언어[문자]라고 보았다. 즉 나가르주나는 진리를 언어로 기준으로 하여 두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이제설], 그것은 언어 관습에 따른 일상적인 차원에서의 진리(世俗諦, paramārtha-satya)와 언어 관습으로 표현할 수 없는 궁극적인 차원에서의 진리(勝義諦, samvrti-satya)이다.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이 두 가지 진리에 대한 구분을 알지 못하면 부처님의 깊고 심오한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언어를 기준으로 하여 일상적인 진리와 궁극적인 진리로 나누지만, 이 둘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언어 관습에 따른 일상적인 진리에 의거하지 않으면 궁극적인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 그리고 궁극적인 진리를 성취하게 되면 일상적인 진리가 그대로 궁극적인 진리임을 알게 되어 실제 진리가 두 가지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즉 세속이 승의이며, 승의가 세속이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나가르주나는 이를 윤회가 열반이며, 열반이 곧 윤회라고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인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언어 관습에 따라 소통하는 일상생활을 바르게 잘해야 한다. 언어 관습 그 자체는 궁극적인 진리[깨달음]가 될 수 없지만 궁극적인 진리에 이르는 길을 알려 준다. 그러므로 언어 관습에 따른 일상적인 진리[세속제]를 방편으로 잘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언어 관습에 따른 세속제는 불교의 공과 사성제, 연기설처럼 붓다의 가르침을 진실되게 알려준다. 그렇지만 그것이 언어[개념]로 표현되어 있는 한, 어디까지나 달[깨달음]을 가리키는 손가락[방편]일 뿐, 달 자체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언어로 표현된 것이라 하여 모두 세속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가르침을 진실되게 알려주기 때문에 세속에서의 진리[세속제]로 인정받는 것이다. 우리는 공과 사성제, 연기설과 같은 세속제를 사닥다리로 하여 궁극적인 진리인 열반으로 나아가야 한다. 열반 역시 언어상으로는 세속제에 해당하지만 언어를 통해 열반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실제 체험을 하게 되면 비로소 궁극적 진리를 증득하게 된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실제 세속제의 내용이 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사성제, 연기법, 팔정도와 같은 진리를 철저히 이해하고 통찰하여 잘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세속제를 올바로 이해하여 체험함으로써 승의제로 나아갈 수 있으며, 승의제를 온전히 체득하게 되면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새로 구입한 책상을 보고 ‘반질반질하다’고 하는 진술은 궁극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 아니다. ‘궁극적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우리는 절대로 ‘반질반질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가? 거칠고 울퉁불퉁한 책상과 비교해서 반질반질 광택이 나는 책상을 만지면서, “아, 정말 반질반질하구나!” “참 좋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명에서 나온 어리석은 진술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으로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가? 나가르주나는 이 경우에 한 ‘반질반질하다’는 말은, ‘일상적 진리’에 해당하며 일상사라는 구체적인 맥락에서 구체적인 현상을 표현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사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방편(方便)인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 진리가 진리의 전부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일상적 진리는 궁극적 진리로 나아가기 위한 전 단계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상적 진리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궁극 진리를 표현할 수가 없고, 궁극 진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열반에 이를 수 없다.(《중론》 24-10) 나가르주나는 일상적 진리, 즉 일상생활에서 행해지는 상식적인 차원에서의 언어 습관을 부정하지 않는다. “누가 석양을 보며 ‘아, 이제 해가 떨어지는구나!’ 하는 소리를 했다고 우리는 그 사람의 뒤통수를 때리며 ‘이 어리석은 사람아!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해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지구가 해의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는 거야.’ 하면서 그를 나무라지는 않는다. 비록 석양이 해가 떨어지는 것과 상관없이 오로지 지구의 자전에 의해 생길 뿐이라는 것이 정확한 사실이라 하더라도, 일상사에서 ‘해가 떨어진다’는 말은 시간을 말하기 위한 수단으로, 석양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표현으로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고, 또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지구의 자전을 아는 사람이 ‘해가 떨어진다’는 말을 쓰는 것과,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문자적 절대성을 고집하며 그 말을 쓰는 것은 천양지차다. 지구의 자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해가 떨어짐’ 자체를 궁극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집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물에 대해 일상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공’의 입장으로 보면 절대적 타당성을 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일상적인 표현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여기며, 거기에 집착하는 일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적으로 표현되는 진리와 이를 넘어서 있는 궁극적인 진리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진리의 가르침은 두 가지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 일상적 진리와 궁극적 진리다.(《중론》 24-8) 이 두 가지 종류의 진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있는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중론》 24-9) 따라서 우리는 언어에 의해 소통되는 개념적 인식은 일상적 차원에서 진리이지 궁극적인 차원에서 진리가 아님을 환기해야 한다. “일상적 언어활동의 진리(세속제)는 수단이며, 최고진리는 목적이다.”(《입중론》 80게) “크나큰 자비에서 나온 수단적인 지혜를 동반한 제불세존(諸佛世尊)의 이러한 교설은 진실의 감로(甘露)에 들어가는 수단으로 규정된다.”(Prasannapadā) 그렇지만 언어로 표현된 세속제가 없으면, 궁극적인 최고의 진리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깨달음을 위해서는 일상적인 세속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진실이라는 성전의 정상에 오르는 것은 바른 세속의 계단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中觀心論頌》 3-2) 2) 말을 들은 즉시 그 자리에서 곧장 깨닫다[言下便悟] 선종(禪宗)을 대표하는 선사(禪師)인 혜능(慧能, 638~713)은 자신의 깨달음이 언어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마땅히 머묾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應無所住而生其心).”(《法寶壇經》)는 소리를 듣고 단박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말을 들은 즉시 그 자리에서 곧장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인데, 이것을 선종에서는 ‘언하변오(言下便悟)’라고 한다. 말을 들은 즉시 깨침은 ‘돈오(頓悟)’를 의미하는 것으로, 혜능 이후 돈오는 깨달음의 방식으로서 선종의 정통이 되었다. 이러한 선종의 전통은 혜능뿐만 아니라 선종의 초조인 달마대사(達磨大師)로부터 법맥을 이어받은 2조 혜가(慧可, 487~593)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혜가는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라.”고 하는 달마 대사의 말씀으로부터 그 자리에서 바로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 두 선사 외의 선(禪)의 여러 종장들도 이렇게 선문답이나 설법을 듣고 말끝에 단박 깨달았다. 따라서 선불교에서도 중관학파와 마찬가지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언어가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중관학파에서는 언어가 궁극적인 진리에 이르는 방편으로서 중요한 것이지 언어 그 자체에서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선불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선불교에서 언어의 기능은 언어[개념]에 매여 있는 일상적 사고 작용을 해체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러한 해체를 가장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선문답(禪問答)이라는 방법이다. 선문답의 곳곳에는 사람들의 헛된 분별을 낚아 올리기 위한 그물이 던져져 있다. 그 정체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는 선문답에서 제시된 낱낱의 언어가 착각을 촉발시키는 소재가 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선문답이 지향하는 근본적인 목적을 알 수 없게 된다. 이 그물은 진실한 그 무엇이 있는 듯이 설정된 ‘허(虛)한 말[假名]’들로 짜여 있다. 그래서 그것이 진실하다고 착각하여 그 허한 말의 낚싯밥을 무는 순간 그 낚싯밥이 자신이 만든 허망분별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채게 하는 것이다. 선문답의 목적은 이처럼 의식 작용의 고착된 요소들을 포착하여 그 힘을 무력화시키는 데 있다. 이 목적을 적절히 수행하기 위하여 선사들은 문답 속에 일종의 함정을 파놓는다. 그것은 상대의 경직된 관념을 역으로 활용하는 장치이며, 이 장치로 상대를 유인한 다음 결국은 해체시킴으로써 그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이다. 선문답의 과정에서 제자는 선사의 한 마디 말끝에 몰록 깨쳐야 한다. 물론 그러기까지는 무르익은 수행이 주입되어 있어야 한다. 말 길[語路]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상태에서 한마디 듣고 바로 깨닫는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이렇듯 말과 생각을 떠난 자리에서 행해지는 선문답을 깨달음을 위한 방편으로 활용한다. 행위에 대해 골똘히 의심해 나가다가 그 의심이 단단히 뭉쳐졌을 때 여러 가지 기연(機緣)을 통해 의심을 타파하고 바로 마음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직지인심(直指人心) ·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한다. 혜능이 ‘깨달았다’라고 했을 때 그 깨달음의 의미가 바로 이러한 것으로, 혜능은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없는 깨달음은 모름지기 말을 듣자마자 얻으니,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자기의 본성을 본다.(《법보단경》) 만약 자기 마음을 알고 자성을 본다면 모두 불도를 이룰 것이다. 《유마경》에서는 말하기를 ‘즉각 확 열려서 본래의 마음을 회복한다.’라고 하였다. 여러분, 나는 홍인(弘忍) 스님이 계신 곳에서 한 번 듣고서 듣자마자 곧장 깨달아 문득 진여(眞如)인 본성을 보았다.(《법보단경》)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혜능은 언어[말]를 통해 즉각적인 깨침과 동시에 본래의 마음과 본성을 본 것이다. 다시 말해 혜능의 깨달음은 마음의 본성인 자성을 보는 것이다. 마음의 본성을 봄으로써 불도(佛道)를 이룬다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바로 이러한 깨달음이다. 혜능이 언어를 통해 즉각적으로 깨친 것은 자신의 본래 마음과 본성이다. 언어를 통해 깨달음이 가능한 것은 언어가 단순한 소리나 의미가 아닌 깨달음의 본질[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증득자[깨친 자]는 언어를 본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진실을 본 것이다. 어떤 스님이 운문(雲門)에게 물었다. “부처의 말도 조사의 말도 뛰어넘는 절대 진리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운문이 말하였다. “호떡이다.” — 《벽암록(碧嚴錄)》 제77칙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종지로 삼는 선불교는 언어를 부정한다. 언어를 부정하면서도 선불교는 언어를 최대한 활용하며 그 맥을 이어왔다. 화두(話頭)가 이런 관계를 잘 보여준다. 화두란 말 그대로 ‘말(話)의 머리(頭)’이다. 이 말의 머리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선문답을 통해 깨달음으로 이끄는 안내[표지]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 표지는 상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의문부호이다. 즉 사전적인 의미로는 화두를 절대 알 수 없다. ‘호떡이다’라고 하든 ‘찐빵이다’라고 하든 어떤 표현을 쓰고 내용이 무엇이든 화두의 본래 기능은 깨달음의 본 자리를 지시할 뿐, 허명(虛名)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에게 물었다.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조주가 대답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 《무문관(無門關)》 제37칙 상식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위의 내용은 분명 해괴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에 목마른 자에게는 ‘뜰 앞의 잣나무’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다. ‘뜰 앞의 잣나무’를 찾지 못하면 목말라 죽어야 할 위급한 상황인 것이다. 언어와 논리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수수께끼를 언어와 논리를 통해 풀어야 하는 모순을 화두가 던지고 있다.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라는 화두 앞에 그러한 모순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물음을 던진 화두 자체를 해체하는 일이다. 이처럼 선의 언어, 화두의 언어는 언어를 해체하여 논리적 모순을 초월하는 데서 그 아름다움을 빛낸다. 그것이 곧 ‘뜰 앞의 잣나무’가 사량분별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나 본래의 ‘뜰 앞의 잣나무’가 되어 품어내는 아름다움이다. 화두는 이처럼 모순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이른바 논리적, 이성적 판단을 불가능하게 하는 초논리적, 초이성적 사유를 요청한다. 따라서 화두는 일상적 진리를 넘어선 직관과 체험의 진리로 나아가게 한다.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거나 ‘뜰 앞의 대나무’나 ‘뜰 앞의 뽕나무’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한 수행승이 운문 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른 똥막대기이니라(幹屎厥).” — 《무문관》 제21칙 위의 내용도 마찬가지이다. 신심이 깊은 상식적인 불자라면 부처를 똥막대기로 비하하였다고 난리를 칠 것이다. 그러나 선사들은 상식적인 “‘말 길[語路]’을 따라 판단을 결정하는 사람들의 사유 습관을 고의적으로 유도하여, 그 말이 가리키는 뜻을 잡도록 허용하고 결국은 포착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몰아붙인다. 이것으로써 사람들이 미리 준비하고 있는 인식과 판단의 도구를 모조리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무장해제가 되면 마치 고삐가 없이 맨손으로 야성이 살아 있는 소를 길들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것과 같이 된다. 그것은 화두 공부가 무르익어 은산철벽(銀山鐵壁)에 이른 것과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이리저리 돌아가지 않고 촌철살인의 한 마디로 철벽을 만들어 주는 방법이 바로 화두 공부의 처음이자 끝이다.” 이처럼 선불교는 화두를 통해 언어가 아닌 언어가 가리키는 마음을 보고자 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언어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것이 선의 언어, 즉 선문답과 화두이다. 3. 말과 침묵‐희론적멸과 언어도단 중관의 이제설과 선불교의 선문답은 언어를 활용하여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최선의 방책으로 시설되었다. 다시 말해, 언어가 지닌 부정성을 제거하고 그 장점을 최대한 살려 깨달음을 얻기 위한 비책(秘策)이다. 시끄러운 교실에서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기 위해 반장이 “시끄럽다!”라고 고함을 치는 행위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시끄럽다!”라는 고함이 시끄러운 소리를 보태기 위해 행한 것이 아닌 것처럼, 이제설과 선문답은 희론과 분별의식을 더 강화하기 위해서 시설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실을 조용하게 하기 위한 반장의 고함처럼 희론과 분별의식을 소멸시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시설되었다. 따라서 이제설과 선문답이 떠안은 최대의 과제는 희론과 분별의식의 단초가 되는 언어를 해체시키는 일이다. 그러한 언어의 해체작업이 사구부정(四句否定)을 통한 희론적멸과 선문답을 통한 언어도단이다. 이는 곧 말로써 말을 해체하는 것으로, 그 해체의 끝은 침묵이다. 말 길이 끊어지면서 비로소 언어로 싸여 있던 제법의 실상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1) 희론적멸‐부처는 어떠한 법도 교시하지 않았다[佛亦無所說] 중관불교는 희론적멸을 통해 침묵에 이른다. 희론(戱論)이란 ‘프라판차(prapañca)’를 번역한 것으로, ‘언어의 허구’를 뜻한다. 그런데 나가르주나는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되는 분별(vikalpa)이 바로 이 희론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보았다. 즉 희론이란 언어 사용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관념과 개념의 허구이다. 인간의 괴로움은 희론으로 인한 실체에 대한 집착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가르주나는 희론을 해체하여[희론적멸] 공을 드러내고자 한다. 따라서 깨달음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희론을 제거해야 한다. 희론이 제거되어야 ‘적정(寂靜)’과 ‘무분별(無分別)’이 주어지며 ‘진실의 상(相)’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관의 이제설에 따르면, 언어는 그것이 아무리 정합적으로 표현될지라도 궁극적인 진리 그 자체는 될 수 없는 것으로, 열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번은 부정되어야만 할 장애 요소이다. 나가르주나는 희론과 해탈, 그리고 언어의 관계에 대해 다음이 같이 기술한다. 업과 번뇌가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에서 일어나고, 분별은 희론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희론은 공성에서 소멸한다.(《중론》 18-5) 여러 부처님에 의해 자아[我]가 있다’라고도 가설(仮說)되었고 ‘자아가 없다’(無我)라고도 설해졌다. 또한 어떠한 자아[我]도 아니고 무아(無我)도 아니라고 설해졌다.(《중론》 18-6) 마음이 작용하는 영역이 소멸하면 언어의 대상이 소멸한다. 실로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법성(法性)은 열반과 같다.(《중론》 18-7) 위의 내용은 우리가 어떻게 깨달음[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가에 대해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깨달음이란 업과 번뇌가 사라진 상태이다. 따라서 업과 번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가르주나는 그러한 업과 번뇌(kleśa)의 근원을 희론으로 규정한다. 즉 번뇌의 뿌리는 분별(vikalpa)인데, 분별은 다시 희론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업과 번뇌의 근원이 되는 희론을 지멸시켜야 한다. 그러면 희론을 어떻게 지멸시킬 수 있을까? 나가르주나는 희론을 지멸시키기 위해 인간의 사유 체계를 네 가지로 나누어 해체한다. 그것이 사구(catuṣkoṭi)의 부정이다. 사구부정은 인간이 논할 수 있는 사유의 모든 형식체계를 네 가지 범주로 나누어, 이 모두가 성립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무분별지를 획득하고자 하는 체계이다. 그 결과 대립과 분별을 초월함으로써 공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른바 희론적멸로써 열반적정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구부정은 세계의 존재 방식을 인간 사유의 네 가지 범주로 나누어 각각 고찰하고 그것이 성립할 수 없음을 논증한다. 즉 인간의 사유가 어떤 문제에 대해 이론을 구성해내더라도 사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며, 네 가지 범주 또한 성립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구 전체에 대한 해명은 인간의 사유 전체를 해명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사구 전체가 부정되면, 이와 관련된 인간의 사유 전체가 부정된다. 나가르주나의 사구부정은 다음과 같이 논식화할 수 있다. 제1구: A(A이다) 제2구: ~A(A가 아니다) 제3구: A∩~A(A이면서 A가 아니다) 제4구: ~A∩~~A(A도 아니고 A가 아닌 것도 아니다) 이때 전체 범주를 U라고 할 때, 인간 사유의 전체 범주는 A와 ~A로 이분화된다. 따라서 어떤 개념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사고 유형은 위의 네 가지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나가르주나는 이 네 가지 가운데 그 어느 것을 선택하든지 간에 반드시 논리적으로 부정될 수밖에 없음을 논증한다. 사구부정을 통해 나가르주나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언어와 사유의 분별을 넘어서는 ‘무집착’과 ‘무분별’의 정신이다. 다시 말해 사구부정은 언어와 개념에 의해 범주화된 인간의 실체론적인 사고방식을 해체하기 위한 전략이다. 사구부정으로 인해 희론이 지멸된 상태에서는 사유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이 사라지게 되고, 이에 따라 언어의 대상 역시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모든 존재는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윤회의 세계[세속]와 열반의 세계[승의]가 하나로 되는 것이다. 희론이 적멸하게 되면 어떠한 법도 교시될 수 없다. 침묵의 가르침만 드러날 뿐이다. 나가르주나는 희론적멸 후의 침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지각이 적멸하고 희론이 적멸하여 길상(吉祥)하다. 어떤 곳에서도 누구에 대해서도 불타에 의해 어떠한 법이 교시되지 않았다.(《중론》 25-24) 2) 언어도단‐말없이 침묵하다[黙然無語] 선불교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을 통해 침묵에 이른다. 언어를 사용하여 언어의 길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언어의 길을 끊음으로써 분별의식을 끊고, 분별의식이 끊어짐으로써 본래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도단은 언어로부터의 해탈이며, 언어로부터의 해탈은 분별의식 혹은 관념[개념]으로부터의 해탈이다. 말없이 침묵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불교의 본질이다. 선불교에서 깨달음[見性]이란 언어의 본질[自性]을 바로 봄으로써 언어의 질곡[희론분별]에서 벗어나는 체험이다. 이에 따라 선사들은 언어문자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책을 고심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잘 알려진 것이 화두(話頭)이다. 화두는 깊은 의심을 통해 정신을 극도로 집중시켜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으로 다른 말로 공안(公案)이라고도 부른다. 화두는 ‘말[話]보다 앞서는[頭] 것’을 뜻하는데, 말 그대로 생각이나 말을 떠올려내기 전에 존재하는 자신의 본래 마음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선사들은 선문답을 통해 제자들에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짧은 글귀 등을 던지곤 했다. 이 질문들은 대부분 상식으로는 절대 대답이 나올 수 없는 것들이 많은데, 인간의 불완전한 언어로 어떻게든 형상과 개념을 초월한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 즉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종류의 생각과 언어를 배제시킴으로써 언어 관념의 길을 차단해서 언어 관념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와 더불어 사물을 지시하거나 행위를 요구하거나 행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 역시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파격적인 상황과 충격요법이 주어진다. 따라서 선의 언어는 단지 언어문자뿐만 아니라 몸짓 언어, 그리고 바람 소리, 빗소리와 같은 자연 언어도 포함한다. 화두는 말 길과 생각의 길을 끊는다. 말로써 말을 여의고, 말로써 말을 초월하는 것이 화두의 역할이다. 언어의 길이 끊기면 마음도 분별을 멈춘다. 이처럼 화두는 말의 작용은 물론 생각의 작용을 차단한다. 생각의 모든 퇴로를 차단하여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 도저히 그곳을 피해 나갈 길이 없다. 바로 그 순간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간절히 의심한다. 화두를 들고 의심하는 그 순간 의심 삼매에 들어 생각이 길이 끊어지는 것이다. 알음알이가 작용을 멈추는 것이다. 아래의 두 인용문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수산성념(首山省念) 선사가 죽비를 들고 대중에게 말했다. “여러분, 이것을 죽비라고 부르면 죽비라는 모습에 걸리는 것이요, 그렇다고 해서 죽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그것도 역시 죽비가 아니라는 모습에 걸리게 된다.” 이에 대해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가 묻는다. “죽비라 부르면 집착이고 죽비라 부르지 않으면 등지게 된다고 하니, 말이 있어도 안 되고 말이 없어도 안 된다. 속히 말해 보라. 속히 말해 보라.” — 《무문관》 제43칙 당나라 때 선사 향엄(香嚴)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 입으로 나뭇가지를 물고 손에는 잡을 가지가 없고 다리도 나무를 밟지 못한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데, 나무 아래서 어떤 사람이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하자. 이에 대답하지 않으면 그의 질문을 어기는 결과가 되며, 대답한다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바로 이럴 때 어떻게 대해야 할까?” — 《무문관》 제5칙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죽비이다’라고 할 수도 없고, ‘죽비가 아니다’라고도 말할 수 없다. 대답할 수도 없고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다. 이른바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끊고서 한 마디 말해 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종류의 생각과 언어를 배제시킴으로써 언어 관념의 길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쥐가 소의 뿔 속으로 기어들어가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경우에 봉착하여 꼼짝하지 못하는 것처럼, 언어 관념을 통한 사려분별로써는 어떻게도 손을 쓸 수 없는 극한상황을 연출하여 언어 관념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벙긋 입을 놀리는 순간 천길만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마는 처지이다. 이런 경우에 처하게 되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침묵 외에 그 무엇도 말할 수 없다. 일체의 사리분별과 삼라만상은 언어로 지어진 실체가 없는 아지랑이요 이슬이요 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침묵에 계합할 뿐 모든 사량분별과 의논을 끊어야 한다. 이것을 언어도단, 심행처멸이라 한다(默契而已, 絶諸思議故曰, 言語道斷, 心行處滅).”(《傳心法要》) 4. 이심전심의 소통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중관과 선불교의 언어관은 이중성을 띠고 있다. 즉 언어는 진리를 가능하게 하지만, 불화와 고통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양날의 칼인 셈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최고의 보시가 법보시라고 하면서도 “사람이 태어날 때 입안에 도끼가 생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쁜 말을 하여 그것을 자기 자신을 찍는다.”(《상윳따 니까야》 6)라고 하여 언어 사용에 주의할 것을 강조하였다. 말[언어문자]은 칼이나 도끼와 같기 때문에 잘못 사용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심지어 죽임에 이르게 한다. 그렇지만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의사가 칼을 잡고 수술을 하지 않을 수 없듯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언어 사용의 어려움과 불가피성은 부처님의 깨달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경전을 보면 처음에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자신의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지 않으려고 하였다.(《增一阿含》 10, 19. 〈勸請品〉) 이유는 너무나 뜻밖의 체험인 데다 특히 언어로써 설명하기가 곤란한, 아니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범천(梵天)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언어에 의지하여 가르침을 펴면서도 언어와 체험의 괴리라는 이 문제가 늘 가르침을 어렵게 만들었고, 부처님 이후의 불교 역사에서도 이 문제는 계속 불교의 생명력을 위협하였다. 중관불교와 선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염려했던 언어의 실재화에 따른 실체적 사고가 모든 괴로움의 원인임을 간파하여 실체론적인 사고를 해체시키는 것을 그들 가르침의 제일 목표로 삼았다. 그리하여 궁극적 진리는 희론적멸한 것으로, 언어문자를 세우지 않고[不立文字], 말씀으로 전하는 경전인 교(敎) 밖에서 따로 전한다[敎外別傳]고 주장한다. 즉 언어문자에 구속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전한다[以心傳心]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심전심은 부처와 가섭이 마음으로 서로 소통한 것에서 유래한다. 즉 옛날 세존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니, 모두 잠잠히 말이 없었으나 가섭(迦葉) 존자만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부처가 전하고자 하는 진심을 홀로 알아챈 것이다. 이처럼 선(禪)은 한 송이 꽃과 한 번의 미소 사이에서 홀연히 이루어졌다. 여기서 세존이 꽃을 들었다는 ‘세존염화(世尊拈花)’, 꽃을 드니 미소 지었다는 ‘염화미소(拈花微笑)’, 대중에게 꽃을 들어 보인다는 ‘염화시중(拈花示衆)’,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다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은 불교의 소통 방식의 중요한 한 특징이 되었다. 이심전심의 소통 방식은 언어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소통 방식과는 다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는 순간까지 언어 속에서 살아간다. 하루도 언어 없이는 살아가기 쉽지 않은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사회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고,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문화창달과 개인적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원천이 바로 언어이다. 따라서 언어가 없으면 생존은 가능하지만 온전한 사회생활은 불가능한 것이다. 특히 오늘날 현대사회는 정보가 홍수를 이루는 시대이다. 정보는 언어를 비롯한 다양한 양식을 통하여 끊임없이 양산되고 소멸한다. 인터넷과 같은 각종 정보 매체의 발전과 이용자 확산으로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바로 앞에서 터진 교통사고 현장이나 기사 내용까지도 개인이 언제, 어디서든 수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신속한 대량의 정보 전달은 자신과 세상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지만 그 역효과 또한 만만치 않다. 확인되지 않거나 출처 등이 불명확한 정보가 확산하거나 이를 여과 없이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대중들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 · 경제 · 문화 등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것으로 이제는 개인적인 삶을 위협하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마음과 마음을 서로 주고받는 이심전심의 소통이 아닌 단지 자신의 편리와 이익을 누리기 위한 정보(언어) 교환이 현대인의 주요한 소통 방식이 된 것이다. 중관과 선불교의 이심전심의 소통 방식에서 볼 때, 현대사회의 정보 매체와 전달 방식은 분별과 희론의 극대화로 치닫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 정보화시대를 맞아 현대인들은 정보 매체를 자신의 주인으로 삼아 그 주인의 부름에 따라 움직이는 종이 되어 버린 격이다. 이러한 상황은 최근에 상영된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인간적인 소통의 부재로 인해 점차 가상현실에 빠져들어 파멸의 위기에 치닫게 되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경고한 영화이다. 중관과 선불교에서 경계하는 언어의 개념화로 인해 빠지게 되는 허구, 꿈, 이슬, 물거품, 아지랑이, 무지개의 세계가 이 영화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 꿈에서 깨어나는 일이다. 꿈에서 깨어나게 되면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중관과 선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결국 언어와 관념의 장막을 걷어내고 현실의 지평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언어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그 언어와 정보에 휘둘리는 종이 되지 말고 그것이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것임을 알고 그것을 자유롭게 부리는 주인이 되라는 것이 중관과 선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리하여 언어와 정보의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말고 그 홍수 사태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을 제시한 것이 이심전심이다. 이심전심은 현상[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본성[마음]을 보는 것이며, 이러한 본성과 본성, 진심과 진심 간의 만남과 소통이다. 그래서 이심전심의 소통은 서로의 인격이 상대에게 완전히 스며들어 완벽한 하나가 되는 체험[현상]이다. 두 인격체가 하나의 인격체로 융합되는 것이다. 이심전심을 방해하는 최대의 마군(魔軍)은 실체적 사고방식인데, 이는 곧 언어의 개념화[관념화]이다. 오늘날 각종 매체로 전달되는 수많은 정보의 가면을 벗기고 나면 그 민낯은 언어의 개념화[관념화]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언어와 정보의 홍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침묵해야 하는가. 유마(維摩)의 침묵에서도 드러나듯이 침묵은 때론 그 어떤 설법보다도 명확하게 진실 그 자체를 온전하게 전달한다. 예컨대 9년의 침묵 속에서 깨달음을 언표하기를 거부했던 달마 대사의 9년 면벽(九年 面壁)도 이에 해당한다. 달마의 9년 면벽은 벽관(壁觀)을 9년 동안 행한 것이 아니라 실제 달마 자신이 본 것은 자신의 마음, 즉 자성청정심이었다. 말 없는 가운데 자신의 가르침을 오롯이 드러낸 것이다. 이와 같은 묵언(黙言) 수행은 어떤 설법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달마의 9년 면벽은 9년 묵언이며, 9년 묵언이란 언어에 끄달리지 않고 곧바로 마음을 찾아 정면 돌파하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언어는 침묵을 통하여 진정한 진리의 언어가 된다. 그리고 침묵의 의미는 다시 언어를 통하여 세간에 드러난다. 이러한 때 침묵과 언어는 벌써 단순한 침묵을 벗어나 언어가 수반된 침묵이고 침묵이 근거가 되는 언어가 된다.” 이러한 침묵의 가르침은 달마의 후계자 구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달마 : 각자가 깨달은 바를 말해 보라. 도부(道副) : 제 생각으론 언어문자에 집착해서도 안 되며, 그렇다고 그것 없이 지낼 수도 없습니다. 문자란 도(道)를 깨닫는 도구로만 사용해야 할 줄 압니다. 달마 : 자네는 나의 살갗을 얻었군. 총지(總持) : 지금의 제 견지(堅持)로는 아난다가 아크쇼브야의 불국토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불국토를 단 한 번 보았을 뿐 다시는 보지 못했으니까요. 달마 : 그대는 나의 살을 얻었도다. 도육(道育) : 사대(四大)가 본래 공허하고 오온(五蘊)이 모두 가공적인 것입니다. 세상에 불변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달마 : 자네는 나의 뼈를 얻었군. 혜가 : (입을 열지 않는다. 다만 공손히 허리만 굽혀 예를 올린 후 자기 자리에 부동자세로 서 있다.) 달마 : 그대는 내 골수(骨髓)를 얻었네.”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달마가 자신의 천화(遷化)를 예감하고 4명의 제자를 불러 각자 깨우친 바 득심(得心)을 피력해 보도록 한 문답이다. 말로 대답한 3명의 제자와는 달리 침묵으로 응대한 혜가의 대답은 아주 선적이다. 자신이 깨친 궁극의 진리를 언설로 표현할 수 없었기에 침묵과 절[拜]로써 대답한 것이다. 혜가가 허리를 굽혀 절을 올린 것은 불법(佛法)의 원점, 근본을 말하며 부동의 자세는 자성본체(自性本體)를 상징한다. 이처럼 선불교에서는 지극한 진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침묵[묵언]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불교의 침묵[묵언]을 잘못 이해하여 ‘벙어리 수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은 공동체의 생활을 위해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며 그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 만든 ‘빠와라나(Pavāranā, 自恣)의 제정’에 잘 드러나 있다. 안거와 같은 공동체의 생활을 편안하게 하고자 남의 일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각자 할 일만 하며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는 제자들에게 부처님은 꾸짖고 있다. 즉 서로 친근하게 화합하면서 편안한 안거[3개월]를 보내기 위해 서로 말을 하지 않고 ‘묵언 수행(Mūgabbata)’하였다는 제자들에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경책하였다. “다른 교단의 계율인 ‘벙어리 수행’을 지켜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우기 안거를 끝마친 비구들은 함께 모여 대중에게 세 가지에 대해 물어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본 것이 있는지, 자신의 잘못을 들은 것이 있는지, 자신의 잘못이라고 의심이 되는 것이 있는지, 이 세 가지를 대중에게 말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이것은 서로를 위해 좋은 것이며 계율을 어기지 않게 한다.”[율장(律藏, Vinaya-Piṭaka) 《마하왁가(Mahāvagga)》 4편 1-2] 이는 침묵(묵언)이 단지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불화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침묵은 중관과 선불교에서처럼 궁극의 진리를 표현하는 하나의 소통의 수단[방식]으로서 인정되는 것이지 남의 허물을 회피하거나 덮어주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중관과 선불교의 침묵은 항상 희론적멸과 언어도단에 따른 궁극적 진리의 표현으로서 사용되었다. 언어의 부작용과 긍정적 효과의 양면성에 대해 그 어느 학파[종파]보다 철저하게 깨달았던 중관과 선불교에서의 언어관은 분명하다. 정법(正法)에 어긋나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많은 절을 짓고 보시를 행하였던 양(梁)나라 황제 무제(武帝, 464~549)가 자신의 공덕에 대해 달마 대사에게 물었을 때, 달마는 단 한마디로 대답하였다. “무공덕(無功德)!” 자칫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달마 대사는 ‘공덕이 없다’고 잘라 말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선사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나가르주나 역시 사타바하나(Śātavāhana) 왕조의 왕에게 권력은 왕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복지와 주권을 지켜 주기 위해 사용되어야 함을 강력하게 제시하였다. 그것을 기술한 책이 《권계왕송(勸戒王頌)》과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휴정(休靜, 1520~1604) 서산(西山) 대사와 유정(惟政, 1544~1610) 사명(四溟) 대사가 보여주었듯이 불의의 침략에 맞서 칼을 들고 나설 수 있는 기백들은 선사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붓다가 무아와 침묵을 말하면서도 인도 정통사상의 인종차별과 계급타파를 부정하며 인도의 권력 집단에 정면으로 맞섰던 사실에서 그 전통을 찾을 수 있다. 중관과 선불교에서의 침묵과 직언(直言)은 깨달음을 위한 두 가지 표현 방식이다. 침묵의 승의제는 직언의 세속제를 바탕으로 한다. 직언의 세속제가 일상의 생활 속에서 구현된 그것이 바로 침묵의 승의제이다. 직언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이심전심의 소통이 가능한 세계가 중관과 선불교에서 추구한 깨달음의 세계이다. 삼독과 불의로 오염된 세속의 세계를 정화하게 되면 그것이 승의의 세계이다. 이처럼 세속과 승의는 별도의 세계가 아닌 하나의 세계이다. 선어록은 선사가 내뱉은 일상의 언사와 행동거지였고, 깨달음의 대상도 목적도 거기에 있었다. 현실의 삶이 진실이고 불법(佛法)이였으며 종교였다. 따라서 중관과 선불교의 언어관과 깨달음은 별도의 언어 교육과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 언어와 일상의 생활이 바로 깨달음이 도출하는 언어 교육 공간이고 깨달음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정한 선 공부를 제시하는 것은 자칫 자유롭고 생동감 넘치는 활발발한 선의 생명력을 빼앗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정형화된 맹목적 깨달음 지상주의는 중관과 선불교에서 가장 경계하는 깨달음의 실재화 폐단을 낳게 마련이다. 추상의 이론이 아닌 구체적 현실이 바로 진실임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가 중관의 이제설이고 선불교의 선문답과 화두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의 현장이 깨달음의 텍스트인 것이다. 이처럼 언어의 실상을 알게 되면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다. 우리가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그곳이 모두 그대로 참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날마다 좋은 날이다! ■
윤종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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