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인생에는 즐거움도 있는데 불교는 왜 괴로움을 말하는가?

수선님 2020. 5. 17. 12:14

인생에는 즐거움도 있는데   불교는 왜 괴로움을 말하는가?

 

본 법문은 호두 마을 주말 수행 〈프리 위빠싸나(pre-vipassana)〉 수련 기간에 행해진 김정빈 작가의 설법을 요약한 것입니다.

제가 차명수 법사님과 함께 진행하는 ‘프리 위빠싸나(pre-vipassana)’는 이름에서도 보듯이 위빠싸나 명상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미리 해두면 좋겠다 싶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프리’는 영어에서 ‘앞(前)’을 의미하는 접두사로 쓰이는 말인데, 저희의 프로그램이 ‘프리 위빠싸나’라고 불린다는 것으로써 이 뒤에 ‘메인 위빠싸나(main-vipassana)’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굳이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었는지 궁금하실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초심 수행자가 명상을 시작하게 되면 명상의 열매인 고요, 평화, 행복, 자유를 느끼기에 앞서 이런저런 상념(망상)에 시달리거나, 졸음에 시달리는 등의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나는 명상 체질이 아닌가 봐.”라든가, “내 근기가 너무 약해서.”라는 등의 생각을 갖게 되어 결국 명상을 등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지를 잘 알아 그에 대처할 필요가 있지만, 대개의 명상 프로그램에서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를 호소하면 지도자들은 대개 “보다 더 강한 정진력으로 사띠(sati)를 챙겨라.”라고들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사띠만 잘 챙기면 이런저런 상념에 시달릴 까닭도, 졸음이 몰려올 까닭도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띠가 잘 챙겨지지 않기 때문에 초심자가 아닌가요? 그런 초심자에게 사띠를 더 잘 챙기라는 말씀은 일견 맞지만 일견 너무 가혹한 요구가 아닐까요?

프리 위빠싸나는 후자의 입장에서 진행됩니다. 따라서 메인 위빠싸나보다 좀 느슨한 느낌으로 본 프로그램에 임하실 수 있는데, 이것은 정진의 면에서는 방일(放逸: 게으름)의 의미가 있다고 볼 여지가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런 자세야말로 고락중도(苦樂中道)적 자세일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고락중도의 문제는 다음 법문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고락 중도를 다루기 전에 먼저 불교가 서 있는 기초로서의 고(苦)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문제가 잘 밝혀져야만 고락중도를 다룰 수 있고, 그래야만 어떤 자세, 어떤 마음가짐으로 수행에 임해야만 초심자의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는지가 밝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불교는 이고득락(離苦得樂: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얻음)의 종교이며, 사성제(四聖諦)의 종교입니다. 이로써 불교의 출발점이 고(苦)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이 반드시 고, 즉 괴로운 것만은 아니잖습니까? 그런데도 불교가 고를 강조하다보니 불교는 허무주의 종교라는 인식이 퍼져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불교는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전파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가 늘 강조하는 것은 여시(如是), 즉 그러한 것을 그러하다고 하는 것, 즉 있는 그대로의 사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늙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허무주의입니까? 아닙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 저의 비유로 말한다면 ‘3× 3=9로서의 진실, 즉‘구구단’입니다.

이때 구구단은 법칙입니다. 그리고 법칙은 아무도 개변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구단을 고치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올바르지 못한 견해를 고쳐야 합니다. 나는 월급을 받으면서 잠시 구구단이 3× 3=35이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접고 3× 3=9를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사장이라면 직원에서 월급을 주면서 3× 3=6이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것이 욕심인 줄 알고 3× 3=9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월급의 문제에서는 이렇게 구구단을 잘 지키지만 인생의 문제가 되면 구구단을 잊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마침내 늙는다는 것, 내가 마침내 죽는다는 것을 있는 사람들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인데, 알고보면 이 두려움의 원인은 욕망― 늙고 싶지 않은, 죽고 싶지 않은 욕망입니다. 그러나 그 욕망은 구구단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것은 무지입니다.

이렇듯 모든 문제의 배경에는 욕망이 있고, 모든 욕망이 배후에는 무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리석어서 과욕을 부리고, 과욕을 부리면 괴로운 문제에 봉착한다.”로 정리할 수 있는데, 사실 12연기(十二緣起)가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12연기의 첫 번째인 무명(無明)이야말로 무지 그것이고, 여덟 번째인 갈애(渴愛)야말로 과욕 그것이며, 열두번째인 노사(老死)야말로 문제 그것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욕망을 잠시 접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늙는 것을 늙는다고 하고, 죽는 것을 죽는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려는 자세, 또는 인격은 대체로 마흔 살이 넘어서야 생깁니다. 그래서 저는 “진실한 의미에서의 불교는 나이 마흔이 되기 전에는 참으로 이해되기 어렵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일곱 살에 아라한이 된 분도 있으니 이것이 꼭 육체적인 나이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린 왕자’와 같은 ‘어린 현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현명한 이들을 대상으로 우리 진정한 불교를 향해, 즉 불교가 말하는 괴로움의 의미를 행해 나아가 보기로 합시다.

사람은 여러 가지 감정은 느끼며 삽니다. 이 감정을 불교에서는 느낌이라고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느낌을 여러 가지로 분류하셨고, 그중 108가지로 분류한 것이 잘 알려져 있어서 108번뇌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는 대개의 경우 느낌을 셋으로 분류하시곤 하셨습니다.

(1) 괴로운 느낌 : 고수(苦受) : 둑카(dhukha)

(2) 즐거운 느낌 : 낙수(樂受) : 수카(sukha)

(3) 중간 느낌 :불고불낙수(不苦不樂受), 또는 사수(捨受) : 우뻬카(upekha)

저는 이들 세 느낌을 시소(어린이들의 놀이 기구)에 비유하곤 합니다. 즉, 이를 시소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편성된다는 의미입니다.

고수 불고불낙수 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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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소를 타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것처럼, 시소의 왼쪽 편과 오른쪽 편은 서로 연관성이 있습니다. 즉, 시소의 왼쪽 편이 올라가면 오른쪽 편은 내려갑니다. 오른쪽 편이 올라갈 경우에는 왼쪽 편이 내려가지요. 이것은 시소의 왼쪽 편과 오른쪽 편이 ‘반대이지만 한 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왼쪽 편과 오른쪽 편의 반대성(反對性)에는 주목하면서도 한몸성(一體性)에는 주목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과 즐거움이 한 몸이라는 연관성에는 주목하지 않고, 그것들이 ‘따로따로’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나에게서 괴로움이 적어지기를! 나에게 즐거움이 다가오기를!”이라는 기대를 갖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잘못된 바람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의 의미는 앞의 시소의 비유로써 말한다면 “시소의 왼쪽 편은 올라가기를! 그러나 오른쪽 편도 올라가기를!”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던 날 간수의 특별 배려를 받아 발에 차고 있던 족쇄를 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쾌감을 느끼면서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족쇄를 차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쾌감을 못 느꼈을 거야.”

그렇습니다.

모든 즐거운 느낌은 괴로운 느낌의 반동적 결과입니다. 족쇄를 차고 있을 때의 괴로움, 즉 시소의 왼쪽 편이 한껏 치솟아 올라간 원인을 배경으로 그것이 해소되었을 때 즐거운 느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가 느끼는 즐거움의 양은 그가 지금까지 느끼고 있던 괴로움의 양에 정확하게 비례합니다.

사정은 괴로운 느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던 사람이 그 즐거움을 잃을 때 느끼는 것이 괴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도 그가 느끼는 괴로움의 양은 그가 지금껏 누리고 있던 즐거움의 양에 비례합니다.

어느 때 파세나디 왕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상살이에는 즐거운 때가 없지 않은데 부처님께서는 어째서 삶은 괴로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파세나디 왕에게 그가 사랑하는 대신의 이름을 들며 물으셨습니다.

“대왕은 그 대신을 사랑하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대신으로부터 대왕은 즐거움은 많이 느끼시겠구려.”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가정은 혹 해보셨는지요? 만일 그 대신이 죽게 된다면?”

“그렇다면 저는 큰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왕이여, 모든 것은 항상하지 않아 무너지는 것이니, 언젠가는 그 대신은 죽을 것이오. 만일 그 대신이 대왕에 앞서 죽지 않는다면 대왕이 먼저 죽음으로써 그와 헤어지게 되겠지요. 또, 죽음이 아니더라도 무상법에 의해 두 사람 사이에 즐거운 감정이 고통의 감정으로 바뀔 수 있는 여지는 매우 많소. 그 대신이 아플 수도 있을 것이고, 대신과 대왕의 의견이 달라져 서로 충돌하는 사태도 가정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세나디 왕에게 하신 부처님이 말씀대로 즐거운 감정과 괴로운 감정은 서로 의지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부처님께서는 자주 “모든 결합은 괴롭다(諸行皆苦: 제행개고).”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시소의 왼쪽 편만을 강조하고 오른쪽 편을 부정하는 편파적인 말씀이 아닌가 하는 점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부처님께서는 “사랑도 하지 말라. 미워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앞의 시소의 비유에 대입하여 “왼쪽에도 머물지 말라. 오른쪽에도 머물지 말라.”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올바른 이해가 도출됩니다.

앞의 시소의 비유를 이번에는 동전의 비유로 옮겨가 보겠습니다. 시소의 왼쪽을 동전의 앞면, 오른쪽을 뒷면에 옮기면 그렇게 될 것인데,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이 동전을 손에 들고 “나는 동전의 괴로운 쪽 면은 버리고 즐거운 쪽 면만을 갖겠다.”고 말한다면 그 말이 이치에 맞겠습니까?

물론 그 말은 불가능한 말이며, 현명하지 못한 말입니다. 동전의 앞면을 가질 경우 어쩔 수 없이 뒷면까지 가져야 합니다. 또한 뒷면을 가질 경우에도 어쩔 수 없이 앞면까지 가져야만 합니다. 즉, 우리는 동전에 대해 앞뒷면을 모두 가지든지 앞뒷면을 모두 버리든지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동전의 앞뒷면을 모두 갖는 편과 모두 버리는 편 중 여러분은 어떤 편을 택하시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버리는 편을 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알고 보면 불교는 바로 그것, 즉 동전의 앞뒷면을 모두 버리라는 가르침 그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동전의 앞뒷면을 모두 버리라고 하시는 까닭은, 동전 자체, 시소 자체가 괴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시소가 오르내린다는 것, 우리의 느낌이 끊임없이 괴로움으로 올라갔다가 즐거움으로 올라갔다가 하기를 반복한다는 것, 그 자체가 괴롭다는 의미입니다.

알고보면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동안의 윤회입니다. 우리의 느낌이 괴로울 때 우리는 지옥, 아귀, 수라, 축생계에 삽니다. 우리의 느낌이 즐거울 때 우리는 인간, 천상계에 삽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육도윤회를 되풀이하며, 이 윤회의 되풀이는 괴로운 것일 뿐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정리해서 말하면 (1) 괴로운 느낌은 괴로우니까 괴롭다, (2) 즐거운 느낌은 영원히 머물러 주지 않아서 괴롭다, 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3)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은 잠시 그곳에 머물다가 괴로운 느낌이나 즐거운 느낌 쪽을 이동하고, 그 다음 단계에서 다시 (1)과 (2)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괴로움으로 귀착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소 그 자체가 괴롭다는 것, 따라서 불법의 요체로서의 사성제에서 말하는 고가, 시소의 한쪽 편으로서의 고가 아니라 시소 전체를 총합한 의미에서의 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시소의 한쪽 편의 고를 그냥 고라 부르는 대신, 시소의 총합으로서의 고를 이와 구별하기 위해 고′(고 대쉬)라고 부를 것을 제안합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이 고′를 버리고 떠날 것을 제안하십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무엇을 만나게 될까요?

그것이 바로 닙바나(nibbana), 즉 열반(涅槃)입니다. 즉, 열반은 완전한 즐거움이며, 이렇게 되어 우리는 이번에는 시소의 한쪽 편에서의 즐거움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총합적인 즐거움을 만나게 됩니다. 바꿔 말하여 열반은 그냥 즐거움이 아니라 즐거움′(즐거움 대쉬)로서의 즐거움인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얻기를 바랍니다. 이를 이고득락적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시소 안에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지혜로운 추구가 아닙니다. 시소 자체를 버리는 것을 통한 이고득락의 추구, 그것이 불교이며, 그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삶의 가치 추구 방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왼전한 이고득락의 경지인 열반은 한편으로는 괴로움을 떠난 즐거움의 상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평등의 상태, 즉 시소로 보면 중간 지점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평등의 상태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즉, 중생의 평등과 부처님(아라한)의 평등이 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우리는 중생의 평등을 그냥 평등, 부처님의 평등을 평등′(평등 대쉬)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열반은 한편으로는 즐거움′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등′입니다. 즐거움′에서 부처님(아라한)은 늘 미소를 머금고 행복을 누리는 분입니다. 평등′에서 부처님(아라한)은 일체의 희비애락을 초월하여 번뇌에 물들지 않는 연꽃입니다.

연꽃에 비가 내립니다.

그렇지만 빗방울은 연꽃 안으로 스며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연꽃은 이슬을 흘러내려 보내도록 코팅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세상의 범부들 또한 괴로움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낀다. 너희 또한 괴로움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그들과 너희는 어떤 점에서 다르냐?

“세존께서 설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범부들은 괴로움과 즐거움의 느낌을 화살로 맞은 다음 그것을 잘 다룰 줄 몰라 두 번째 화살을 맞는다. 그렇지만 수행자는 그것을 거기에서 멈춘다. 그리하여 그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것.

그것은 괴롭거나 즐겁거나간에 어떤 느낌을 맞았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즉 위빠싸나 사띠(vipassana-sati)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명상적 사띠로써 느낌을 알아차릴 때 그 느낌은 연꽃 위에 내린 이슬처럼 곧 흘러내립니다. 그러나 불법을 모르는 범부들은 당황하거나(괴로운 느낌) 미혹하여(즐거운 느낌) 이슬을 자신의 마음 안으로 스며들도록 방치, 또는 허락합니다.

이 말은 그들이 시소의 오르내림을 그칠 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수행자는 그것을 그쳐야 하는 줄을 알고, 그치는 법을 알며, 그치는 법을 실천합니다.

그럼으로써 그의 감정의 시소는 점차 그 오르내림의 폭을 좁혀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소의 오르내림이 전혀 없는 경지, 즉 중간, 또는 평등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시소가 아무리 요동을 친다고 해도 중간 부분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잘 수행된 마음 또한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도 요동치지 않습니다.

“시장 한복판에 서 있어도 혼자 있는 것처럼”이라고 옛 선사는 말했습니다.

“마치 기둥이 서 있는 것처럼”이라고 사리뿟다 존자는 말했습니다.

“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이라고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우리 모든 번뇌, 모든 느낌으로부터 초연한 경지를 향해 지금 우리는 첫걸음을 막 떼어놓았습니다.

축하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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