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성의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것은 ‘자타불이(自他不二)’예요. 즉, 나와 네가 둘이 아니다. 다르지 않다는 말이예요.
친한 친구, 부부사이에는 자신이 아끼는 물건은 상대방에 주려 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좀 받기가 미안하잖아요. 그래서 사양할 때 경상도 사람들은 그러죠.“니캉 네캉 남이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너와 나는 남이 아니다’. 남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네 것과 내 것이 구분이 없다. 즉, 너와 나를 서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를 자타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친구간, 부부도 그렇고 사랑한다는 둘이 아니다. 깨달음의 덕성은 하나입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불이성에 대해 바로 알고 있느냐 입니다. 일체 모든 사람과 선을 긋는 사람은 깨달은 부처도, 보살도 아닙니다. 이것을 하나의 생각과 마음으로 체감하는 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이것을 하나로 느끼는 사람은 진정한 애정과 사랑을 잃지 않습니다.
예컨대 남편이 아파 누워있습니다. 부인이 밖에 나갔다가 뜻밖의 좋은 핸드백을 선물 받았어요. 남편이 아파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데 핸드백을 자랑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좋은 일이 생겼다고 남편 앞에서 좋아할 수 있어요? 그러면 진정한 가족, 부부가 아니겠죠.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남편 앞에서는 즐거움보다 그 아픔을 같이 나누는게 가족이 아니겠습니까. 하나의 관계이기 때문에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픈 것입니다. 네가 괴로우면 자신도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한 진정한 희생과 봉사가 가능해지는 것은 다른 사람을 남으로 느끼지 않고 나의 하나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전제입니다. 그와 같을 때 보살행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보살이라는 것도 이기적인 면이 있어요. 중생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있지만 뒤집어 보면 자신의 행복을 위한 면도 있어요. 자기의 행복을 위해 애쓰니까, 남을 위한 노력이 더욱 절절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이 자타불이의 이야기입니다.
고통과 즐거움은 둘이 아닙니다. 이것은 설명하기 어려운데 비유를 들자면 어떤 여자가 있는데 이 여자가 연극을 잘해요. 춘향이 역을 잘하면서 인기를 끌었어요. 그런데 친구한테 “괴로운 연기를 할 때는 나도 너무나 괴로워. 슬퍼할 때는 내 마음도 슬퍼”라고 말하자 친구가 “네가 슬프면 그 연극 하지마”그러면 그 여자는 뭐라 하겠어요. “너 미쳤어. 내가 그것 때문에 인기가 많은데”라고 하지 않을까요.
이처럼 연극할 때 그 고통이, 슬픔이 가짜인가요? 진짜인가요? 클라이맥스 때 애통하게 울면서 장면이 끝났어요. 그럼 그 감정에 이입된 주인공은 바로 울음을 멈추지 못하잖아요. 연극이라도 몰입이 되면 정말 슬픈 감정이 됩니다. 그런데 이를 가짜라고 할 수 없잖아요.
이를 보면 슬픔과 기쁨이 둘이 아닌 것입니다. 슬퍼서 울지만 진짜 괴로워서 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것 때문에 칭찬을 받고 연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연기할 뿐이지 실제 고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받지만 진짜 고통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슬픈 영화 보면 우리는 울잖아요. 연극에 동화되어 감정에 복받쳐서 울고 그럽니다. 그러나 본인에게 고통이 되지는 안잖아요. 울면서도 영화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에 감동받았다면 다음에 또 보겠죠. 그것이 진짜 고통을 받는다면 다시 영화를 보겠어요? 이는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이 참으로 미묘해서 진짜와 가짜를 넘나들어요. 이것이 자타불이예요. 그래서 즐거움과 고통이 둘이 아니다. 보살은 이 세상을 영화처럼 보기 때문에 영화 속처럼 중생과 더불어 현실에 살면서 중생이 괴로워하면, 같이 괴로워합니다. 보살이 그렇게 같이 울고 슬퍼하는 게 진짜가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것이 실제가 아닌 영화와 같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정말 괴로워하거나 슬픔에 빠지는 것도 아니 예요. 그래서 보살은 세상을 유희한다고 해요. 보살은 슬퍼하고 중생과 더불어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감정에서 자유로운 거예요.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울고불고 하지만은 우리가 그것을 영화라는 것을 알고 있듯이 중생을 위한 헌신도 고통 속에서도 계속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닙니다. 춘향이 연극 이야기를 예로 들면, 춘향이 시대가 이조 중엽으로 보면 말투나 무대장치나 그 시대에 맞게 하겠지요. 그리고 배우도 춘향이의 모습으로 말과 행동을 해야겠지요. 그렇지 않고 현 시대 모습을 나타나면 관객들이 감동을 받을 리가 없겠지요. 그와 같이 연극에서 주인공은 춘향이의 모습으로 나타나야지 자신의 본 모습을 나타내면 안돼요. 우리 자신이 그대로 부처라서 언제나 부처이지만 현실에서는 중생으로 생각하고 활동하지 않으면 안돼요.
어느 한쪽에서도 우리가 부처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우리의 세계가 깨져버려요. 예를 들어 순이 엄마가 있는데 미관에는 백호상에, 얼굴에는 황금빛이 나타난다면 순이 엄마는 없어져 버려요. 이 사바세계가 한꺼번에 구멍이 나고 무대가 깨져버리는 겁니다. 중생으로 나타나서 그 역할을 할 때는 중생으로 나타나야지, 본래의 자기모습으로 나타나면 중생의 세계가 깨어져 버립니다. 본질은 온전히 부처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도라는 것은 완전한 행복을 뜻합니다. 부처님이 성도를 하고 교단이 성립될 무렵에 고향 친인척을 제도 하시고자 가비라성으로 가십니다. 태자가 부처님이 되어서 고향에 오시니 모두가 마중을 가는데 한 사람이 마중을 나가지 않았어요. 그 사람이‘야수다라’입니다. 부처님의 부인입니다. 자신과 사랑스런 아들을 버리고 야반도주한 부처님이 반가울 리가 있겠어요? 그런 남자를 뭐가 반갑다고 나가겠어요.
부처님은 다른 어떤 마을에서도 인근에서 자리를 잡고 숲속에서 자고 수행하며, 탁발할 때만 마을 안에 가서 공양 받고 그 답으로 법문을 하셨다고 합니다.
야수다라가 그 모습을 보고 아들 라훌라에게 “저 분이 바로 네 아버지다. 가서 이 세상에서 제일 비싼 보배를 달라고 청해라.”라고 시키자야수다라의 심술이 보이잖아요. 매일 걸식하는 부처님에게 값비싼 보물이 있었겠어요. 라훌라는 엄마가 시킨대로 부처님께“세상에서 가장 비싼 보배를 선물로 주세요”라고 하자 부처님이“그래, 네가 너에게 가장 비싼 보배를 선물하마”라고 말씀하시며 라훌라에서 발우를 내밀며“나를 따라오너라”라고 합니다. 라훌라는 뭐가 무엇인지 모르고 부처님을 따라 갑니다. 부처님은 라훌라를 숲에 데리고 가서 머리를 깎고 수행자를 만들어 버려요.
저는 이것을 보면서 부처님이 깨달음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지 느낄 수 있었어요.
저는 부처님이 아들을 숲으로 데리고 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상상이 돼요.
“네가 장차 가비라성의 성주가 되어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다. 그렇지만 나도 일찍이 그와 같은 상황이었지만 부귀영화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출가를 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부귀영화도 늙음을, 병듦을, 죽음을 막아주지 못했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그 고통을 진실로 보호해주지 못한다. 아버지는 깨달음을 성취해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터득했다. 그래서 너를 숲으로 데려가려는 것이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성취하면 이 말의 뜻을 너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가치 있다는 것을~.”
이렇게 부처님이 라훌라에게 말하는 모습이 그려져요.
그러니까. 제주에서 멀리 문경 봉암사까지 여러분들이 왔어요. 봉암사에는 최고의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 철야로 스님들이 정진하는 곳이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진정한 수행, 그래서 깨달음을 성취하는 길만이 모든 고뇌에서 확실한 보장을 받는 다는 것을 바로 아시고 수행하는데 더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이병철 기자 taiwan08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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