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연기
-지금부터는 부처님께서 깨친 중도연기(中道緣起)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공부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정견(正見)의 확보를 위해 중요합니다.
정견의 확보는 수행의 필수 요건입니다.
-우리도 부처님이 깨친 이 중도와 연기만 제대로 알고 깨치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아주 간명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친 중도.연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중도와 연기를 이해하면 우리 생활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공부해 나가겠습니다.
1. 부처님은 무엇을 깨쳤는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 하고, 부처님을 깨친 분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뭘 깨쳤을까요?
바로 중도(中道)와 연기(緣起)를 깨친 것입니다.
“비구들아, 두가지 극단이 있으니 출가자들은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않된다.
두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여러 가지 애욕(당시 상황은 쾌락주의가 성행)에 빠져 그것을 즐기는 것이니, 그것은 열등하고 세속적이고 범부의 짓이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되는바가 없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짓에 빠져 고통(또다른 당시 상황은 고행주의가 성행)스러워 하는 것이나,
그것도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되는 바가 없다.
비구들아, 여래는 이 두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원만히 잘 깨달았다. 중도는 눈을 뜨게하고 앎을 일으킨다. 그리고 고요함과 수승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된다.“
<율장(律藏. 마하박가)>
-이 초전법륜(처음 가르침을 폄)의 첫 가르침을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 합니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치고 난후 가장 먼저 5비구를 찾아가 당신이 중도를 깨쳤음을 선언합니다.
“나는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쳤다.“
-중도는 불교의 근본 사상 :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 당신이 “중도를 깨쳤다” 고 중도대선언을 하셨으니 중도가 불교의 가장 근본 사상이고 출발점인 것입니다.
2. 부처님이 깨친 중도란 무엇인가?
-중도대선언에서 밝힌 중도는 “극단적인 두 변(邊. 극단)에 잡착하지 말라는 기본적이고도 간단한 말입니다.
-「숫타니파타」의 중도 : 초기경전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숫타니파타」「피안중도품(彼岸中道品)」에서는 중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양 극단에 집착하지도 않고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중도. 양 극단을 여윈 자리 : 선-악, 옳음-그름, 있다-없다, 내편-네편,괴로움-즐거움, 깨끗하다-더럽다와 같이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친 상대적인 견해를 양변(兩邊)이라 합니다.
있음(有)과 없음(無)과 같이 대립하는 양변을 완전히 버리면, 오히려 극단적인 양 극단에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 양 극단마저 살리는 중도를 이룹니다. 이렇듯 양 극단을 떠난 경계를 중도라 하지만, 그것이 양 극단의 가운데를 가르키는 것은 아닙니다.
-중도란 공이고 연기이며, 우리의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도에서 양 극단(양변)을 떠난다는 것은 중간을 취하라는 말이 아니고, 양변을 취하지 마라는 뜻이지만, 양변에 머무르고 집착하지 않아야 되겠지만 ‘양변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짧은 말 속에 중도가 충분히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즉, 이것과 저것을 모두 떠나서 원융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원융함 속에서 다시 ‘이것’과 ‘저것’이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과 ‘저것’이 합해진 자리라 표현해도 될 것입니다.
중도를 알면 불교 전체를 아는 것이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중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중도를 안다는 것은 물론 수행을 열심히해서 증득을 해야겠지요.
“분별 속에 분별이 없는 것이 중도라네~. 이 도리 알으면 발 뻗고 잘 수 있네~“
(원덕스님 / 달마선원)
-변견(邊見) : 양변을 완전히 떠난 것이 중도인데, 선에 머물든지 악에 머물든지 어느 한 쪽에 머물러 집착하는 것을 변견이라 합니다.
-양변에 떨어진 세계관의 문제 : 세계를 볼 때 선과 악, 옳음과 그름, 내편과 네편, 인간과 하느님, 부처와 중생, 번뇌와 깨달음 등 상대로 나뉘어 보면 서로 모순되어 대립과 투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양변, 즉 상대 모순의 대립 투쟁하는 세계 인식으로는 평화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평화의 세계를 이루려면, 양변을 버려야 합니다. 진정한 평화를 이루려면 상대 모순의 양변을 다 버리면서도 양변을 다 아우르는 중도가 되어야 합니다.
-중도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 : 바른 길(正道), 상황에 맞는 지혜로운 말과 행동, 조화와 균형, 화합과 상생, 공평무사, 가장 잘된 것(맛있는 밥과 같은 것), 치우침과 집착이 없는 행위, 조율이 잘 된 피아노, 반야바라밀...
-중도사상은 인류 문명의 유일한 활로(活路)인 것입니다.
3. 선종(禪宗, 간화선)의 중도
-달마스님을 비롯하여 역대 조사 스님이 본래 부처님의 마음을 전한 것이 선(조사선)입니다. 이 선이 중국에서 한 종파로 성립된 것이 바로 선종입니다.
-선종 사상을 정립한 분이 6조 조계 헤능스님입니다. 스님은 「육조단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합니다.
“내가 지금 너희들에게 법문하는 방법을 가르쳐 선종의 근본 종지를 잃지않게 하겠노라. ... 나고 들어감에(생각을 일으키거나, 집어 넣을 때나)양변을 떠나고 일체 법을 설할 때에 자성을 여의지 말라.
혹 어떤 사람이 와서 너희에게 법을 묻거든 말하되, 모두 쌍(雙)으로 하여 다 대법(大法)을 취하고 오고 감에 서로 원인이 되어 마침내는 두 법을 모두 없애어 다시 갈 곳이 없게하라. ...
이들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 때문에 어두운 것이다.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으로써 변화하여 어둡고, 어둠으로써 밝음이 나타나나니, 오고 감이 서로 인연한 것이다.“
육조스님께서 선종의 근본 종지(宗旨)로 말씀하신 “나오든지 들어가든지간에 양변을 떠나라“ 한 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선종에서는 누구에게 법을 설할 때에도 중도에 의거하여 설법해야지, 중도를 벗어나면 불법의 종지를 잃게 됩니다.
<백장(百丈. 720~810)스님의 법문>
“일체의 있음(有)과 없음(無) 등의 견해가 전혀 없고, 또한 없다는 견해도 없는 것이 불법을 바로 보는 견해이니라.“
“있음과 없음을 보지 아니하면, 곧 바로 부처님의 참 모습을 보느니라.”
<대주(大珠)스님의 법문>
“마음에 이미 양변이 없으면 가운데(中)도 어찌 있을 것인가. 다만 이렇게 얻은 것을 중도(中道)라 이르니 참으로 여래의 길이니라.“
-이 중도와 화두의 관계를 무문관 제22측에 나오는 육조스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혜명(慧命)스님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혜명 상좌는 육조스님의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고 대유령으로 쫒아왔습니다. 육조스님은 가사와 발우를 던지면 말했습니다.
“이 옷은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니, 힘으로 다룰 수 있겠는가. 그대에게 맡길테니 가지고 가거라.“
혜명이 다가가 들려고 했지만, 가사는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혜명은 두려움에 떨며 말했습니다.
“저는 진리를 구하러 왔지 옷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행자께서는 깨달음을 열어 보여 주십시오.“
육조스님이 말했습니다.
“선(善)도 생각하지 많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을 때, 너의 본래 면목은 어디에 있는가.“
이 말을 들은 혜명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가사를 빼앗으려 한 것은 악이며, 법을 받으려고 한 것은 선입니다. 그런데 혜능 선사는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라고 이릅니다. 중도로서 생각의 길이 끊어진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바로 화두를 제시한 것입니다. 이렇게 중도의 구조는 화두와 본래 궤를 같이합니다.
-중도는 말로 되는게 아닙니다. 중도, 중도라고 하니 잣대의 가운데로 이해하기 쉬운데 불교의 중도는 선을 긋듯이 한 가운데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운데라 할 수 없지만, 양 극단을 떠난 자리를 억지로 이름 붙여 가운데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가운데로 보면 그것도 집착이며 변견입니다.
-중도를 바로 이해하고 온 몸과 마음으로 깨치면 자유자재한 삶, 영원한 자유를 누리고 행복한 사람이 되어 매일 매일 좋은 날, 모든 일이 좋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설사 이생에서 깨치지 못하더라도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려고 노력만 해도 생활이 바뀌고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중도의 도리는 이론만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간화선은 (모든 수행은) 중도의 도리와 그 실천의 길을 화두(염불, 주력, 위빠사나, 사경, 간경, 기도, 절, 봉사 등 한가지 수행을 택해 꾸준히 지속적으로 하는 것입니다)를 들고, 그것을 철두철미하게 의심을 통해서(모든 수행법은 정신이 일도된 일념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타파하여 구현해내는 수행입니다.
화두의(모든 수행은) 구조 또한 이 중도의 실천원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도는 이것과 저것, 혹은 그 밖의 것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어떤 개념 작용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유작용이 자취를 감춘 말과 생각이 끊어진 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유와 판단작용을 정지시키는 일념된 수행을 통해서, 중도의 도리가 잘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中道가 부처님
중도(中道)가 부처님이니 중도를 바로 알면 부처님을 봅니다.
중도는 중간 또는 중용(中庸)이 아닙니다.
중도는 시비선악(是非善惡) 등과 같은 상대적 대립의 양쪽을 버리고 그의 모순, 갈등이 상통하여 융합하는 절대의 경지입니다.
시비선악 등의 상호 모순된 대립, 투쟁의 세계가 현실의 참모습으로 흔히 생각하지만 이는 허망한 분별로 착각된 거짓 모습입니다.
우주의 실상은 대립의 소멸과 그 융합에 있습니다.
시비(是非)가 융합하여 시(是)가 즉 비(非)요
비(非)가 즉 시(是)이며,
선악이 융합하여 선이 즉 악이요 악이 즉 선이니
이것이 원융무애한 중도의 진리입니다.
자연계뿐만 아니라 우주전체가,
모를 때에는 제각각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모두 일체(一體)입니다.
착각된 허망한 분별인 시비선악 등을 고집하여 버리지
않으면 상호투쟁은 늘 계속되어 끝이 없습니다.
만법이 혼연융합한 중도의 실상을 바로 보면
모순과 갈등, 대립과 투쟁은 자연히 소멸되고
융합자재한 일대단원(一大團圓)이 있을 뿐입니다.
악한과 성인이 일체(一體)이며 너는 틀리고 나는 옳다함
이 한 이치이니
호호탕탕한 자유세계에서 어디로 가나 웃음뿐이요,
불평불만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대립이 영영 소멸된 이 세계에는 모두가 중도(中道) 아님이 없어서
부처님만으로 가득 차 있으니
이 중도실상의 부처님 세계가 우주의 본 모습입니다.
우리는 본래로 평화의 꽃이 만발한 크나큰 낙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시비선악의 양쪽을 버리고 융합자재한 이 중도실상을 바로 봅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원한 휴전을 하고 절대적 평화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삼라만상이 일제히 입을 열어 중도를 노래하며
부처님을 찬양하는 이 거룩한 장관 속에서
손에 손을 맞잡고 다같이 행진합시다.
<1983년 부처님오신날 성철스님 법어>
● 부처님의 깨달음과 가르침에는,
중도.연기.무아.공.무집착.무분별.무차별.무심.무념.대평등.자리이타.상구보리하화중생.법계연기.진여법성.인드라망.마하반야.아뇩다라삼먁삼보리.조견오온개공.정견.무상정등정각.구경각.쌍차쌍조.원융무애.본래부처.본지풍광.본래면목.무량광 무량수.원만구족.천상천하유아독존.동체대비.일체동근.사무량심.4섭법(보시섭,애어섭,이행섭,동사섭).육바라밀,삼법인.사성제.팔정도.성성적적.평상심.진공묘유.응무소주 이생기심.정혜.이사.체용.명암.자유자재 활발발. 색즉시공 공즉시색. 살활. 진제와 속제가 불이...
평상심이 도.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 유와 무에 집착하지 않으면 바로 부처를 본다. 자비와 지혜가 둘이 아니다. 번뇌가 곧 보리다. 미혹이 곧 깨달음이다... 등등
표현되는 내용은 실로 다양하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이중
그 핵심은 중도.연기에 있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이 똑 같은 말의 다른 표현 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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