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과 수행

괴로움(苦)의 바른 이해

수선님 2020. 7. 5. 11:32

둑카(DUKKHA, 괴로움, 불만족)

 

모든 생명들은 언제나 행복이라 불리는 무엇을 추구해 왔다. 과거에 추구한 것도 같은 목표인 행복이며, 또한 현재에도 우리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추구하는 것이 욕망의 충족과 즐거운 감각(행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래에도 우리는 가장 붙잡기 어려운 행복을 계속해서 추구하리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계속적인 추구는 모두의 가장 기본적인 추구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좋은 것만 경험하려 하며, 불쾌하고 싫은 것은 피하려고 한다. 우리가 될 수 있으면 경험하고 싶어하는 '행복'을 빨리어로는 'sukha'(수카)라고 부르며 이는 근본적으로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즐거운 감각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신적이건 육체적이건 모든 존재가 피하려고 하고, 원하지 않는 괴로운 경험을 통틀어서 'dukkha'(둑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불만족스러운 모든 경험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고 빨리어 그대로 남겨둘 것이며, 그것의 의미는 앞으로 둑카의 여러 측면을 설명하면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둑카라는 단어는 모든 불교도들이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적을 피하거나 정복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적의 특성을 알아야 하듯이, 마찬가지로 행복의 적인 둑카에 대해서도 우리가 그것을 피하거나 열렬한 노력을 통해 정복할 수 있으면 우리는 그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둑카를 철저히 바라보아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아낸 다음 그것의 원인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밝혀내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나 다른 이들에게 둑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또는 그것은 별 문제가 안 되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타조가 적을 피하는 방식처럼 매우 비효율적이다(타조는 궁지에 몰리면 머리를 모래에 처박는다). 우리는 눈을 뜨고 우리가 왜 가지각색으로 고통 받는 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고통과 슬픔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니고 다니는 것이 피곤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그것을 내려놓고 홀가분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는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세상의 방식을 통해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으로 향할 수 있을지를 함께 생각해 보자. 대개 사람들은 광고 등을 보고, 경제력을 통해 물건을 갖게 된다. 그들은 물건을 소유하고,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욕망의 충족을 느끼며 계속 이런 방식을 반복함으로서 행복한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단지 당나귀 앞의 당근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이런 저런 것을 소유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소유물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은 단지 일시적인 즐거움일 뿐이다. 만일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둑카가 된다.

'감각적인 욕망이 증가하면 둑카도 증가한다'는 말처럼 물질적인 방식으로는 둑카의 끝을 보장할 수 없으며 더욱 증가할 뿐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인류의 역사를 모른다면 그는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깨닫는 지적능력이 하위 생명체보다 더욱 뛰어나다고 생각할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모든 끔찍한 고통은 지진, 홍수, 화재, 태풍, 질병과 같은 자연재해보다 탐욕적이고 잔혹하며, 어리석은 인간에 의해 수천 배나 더 많이 발생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는 둑카를 없애는 길을 보여준 훌륭하고 성스러운 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반박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종교적인 박해로 고통을 받아서 도주하고 은신하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기에 언제나 악한 마음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인간은 세계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 된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다. 거기에는 증오심에 뿌리를 둔 행위, 경멸하는 말과 모욕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행복을 찾고 있고, 남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의도도 매우 많다.

우리는 기본 전환으로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즐기며,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해 잘못된 성행위를 하고, 행복을 얻기 위해 거짓말과 비방을 하며, 감각과 인식을 흔들어 희열을 얻기 위해 술과 마약을 먹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나 이러한 五戒(오계)에 반하는 행동방식은 확실히 불행으로 향하는 길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이제 둑카를 자세히 바라보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에 부딪쳐 보기로 하자. 붓다의 말씀을 기록한 책(경전)에서 우리는 둑카의 범위에 대해 설명한 구절이 수없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jatipi dukkha(자-띠삐 둑카-) : 태어남은 둑카이다.

jarapi dukkha(자라-삐 둑카-) : 늙음은 둑카이다.

vyadipi dukkha(브야-디삐 둑카-) : 병듦은 둑카이다.

maranampi dukkham(마라남삐 둑캉) : 죽음은 둑카이다.

soka parideva dukkha(소-까빠리데-와둑카)

domanassu-payasa pi dukkha(도-마낫수빠-야-사-삐 둑카-):

슬픔, 비탄, 고통, 절망은 둑카이다.

appiyehi sampayogo dukkho(압삐에-히 삼빠요-고-둑코-) :

싫어하는 것을 만나는 것은 둑카이다.

piyehi vippayogo dukkho(삐에-히 윕빠요-고- 둑코-) :

좋아하는 것과 헤어짐은 둑카이다.

yam piccam na labhati tampi dukkham(얌삣창 나 라 바띠 땀삐 둑캉) :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둑카이다.

samkhittena pancupadanakkhanda dukkha(상킷떼-나 빤쭈빠-다-낙칸다- 둑카-) :

즉, 오온에 대한 집착은 둑카이다.

 

이는 이론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근본적인 우리 삶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 어떤 사람은 누구나 아는 그런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에 대해 좀 더 선명하게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각각의 구절들을 설명하도록 한다.

이로 인해 삶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한 지혜가 일어나서 어느 정도의 행복을 얻는 이익이 있다. 삶에 대해 스스로 속이는 것은 더욱 괴로워지는 방법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두려움 없이 둑카와 직면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방식으로 보일지 모르나 이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스스로 둑카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우울하며 염세적이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불교 국가를 방문한 많은 사람들은 불교인들이 행복하고 침착하다고 말한다.

☆ jatipi dukkha(자-띠삐 둑카-)

과거의 어느 때인가 우리는 태어났다. 태어남(jati)은 불교인의 관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일반적으로 태어남이란 출산을 의미한다. 그러나 붓다가 "태어남은 둑카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태에 들 때부터 출산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의미한다. 약 9개월 간의 전 과정동안 계속적인 둑카를 경험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궁은 편안하고 안전한, 아늑한 작은 집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자궁은 우리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도피처로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곳으로도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 경전에서는 매우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청정도론' 16장 37-40 구절에서 자궁은 결코 즐거운 곳이 아니라고 붓다고사 장로는 말한다. '... 어떤 존재가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간다는 것은 파랑이나 빨강, 흰색의 연꽃 등 아름다움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불쾌한 관의 무더기(힘줄, 혈관 등)와 피부로 덮인 덩어리 같은 기관(내장)에 둘러싸여 있다. 게다가 그것은 소화물과 배설물로 가득 찬 배 안의 한 부분이다. 만일 이전에 살았던 적이 없던 존재가 태어났다면 자궁은 즐거운 곳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만일 서구의 종교 이론처럼 사람의 인생은 신이 불어넣은 영혼과 부모로부터 계승된 유전형질이 합쳐져 자궁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거나 또는 서구 심리학의 이론처럼 단지 유전 형질로 시작될 뿐이라면 자궁은 그런대로 견딜만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불교와 맞지 않는다. 우리 불자들은 존재는 과거 업에 따라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적이고 교양 있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죽었고, 그의 정신의 연속체가 과거 업으로 인해 자궁에 들어가 태어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아주 드문 경우이겠지만 만일 과거생의 기억이 남아 있다면 자신이 들어가 있는 곳이 좁은 감옥처럼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얼마나 무력감을 느끼겠는가! 만일 인간 세상보다 더욱 순수한 존재로 있다가 입태한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그의 곤혹스러움은 더욱 심할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광채 나는 미묘한 몸, 생각만으로 곧바로 이동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감각적인 즐거움도 경험할 수 있는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는 전생의 천인은 탁하고 거친 살, 마음대로 이동하지도 못하고, 더럽고 고통스런 감각으로 제한된 존재로서 어떤 느낌을 일으키겠는가? '그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는 열에 의해 자루 속에 들어 있는 과자처럼 구워지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이렇게 자궁에 감금되어 있다가 10개월 후 해방이 오고 아기는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출산의 과정은 아이와 어머니 모두에게 고통스럽다. 붓다고사 장로는 다시 말한다. '자궁으로부터 지옥구덩이 같이 가장 무시무시한 통로인 자궁 입구를 통해 끄집어내어지는데, 그 자궁 입구는 극심하게 좁아서 마치 코끼리가 열쇠 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새로 태어날 때 아기가 내는 첫 울음소리는 당연하게 생각되어지지만 그것은 고통의 울부짖음이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는 소리내어 웃지 않을 뿐 아니라 미소조차 짓지 않는다. '청정도론'은 이렇게 말한다.

'태어난 후 그에게는 고통이 일어난다. 민감한 상처부위처럼 섬세한 그의 몸은 손위에 올려지고, 목욕시켜지고, 닦여지고, 수건으로 문질러지게 된다. 그리고 그때의 고통은 바늘 끝에 찔리는 것처럼, 면도날로 베이는 것처럼 따끔거리며 아프다. 이것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밖으로 나오면서 겪는 고통이다.'

게다가 요즘은 의사나 산파가 아기를 격려하기 위해 손바닥으로 찰싹 때리는 것도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 대한 전주곡으로서 더해져야 한다. 그래서 아기는 울부짖는다. 특히 우리가 담마의 분명한 빛을 통해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존재가 태어나면 반드시 '태어남은 둑카이다'로 시작되는 공식의 나머지 모든 부분의 고통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모두가 똑같은 방식이나 똑같은 크기로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가 태어남을 받든지 몇몇 종류의 고통이 꼭 따른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상당한 정도의 행복이 있는 '선취(善趣, sugati)'라고 불리는 인간 세상에 태어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태어남을 잊어버린다(그 과정에 대한 기억은 빠르게 덮인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기억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육체적, 정신적인 커다란 둑카로 가득 차 있는 사건이다.

☆ jarapi dukkha(자라-삐 둑카-)

누구나 태어나면 반드시 늙어간다. 이는 참으로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즐거움의 추구에 방해가 될 늙음의 여러 측면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으며, 그러는 동안 어느새 늙음에 붙잡혀서 그것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jara(자라)'라는 단어는 단지 늙음만을 의미하지 않고 '숙성' 또는 '쇠퇴함'이라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태어나면서 늙음은 시작된다. 성장하는 과정도 늙어 가는 과정이 모습을 바꾸면서 다시 새로워지는 것일 뿐이다. 늙음의 과정은 보통 나이가 들어갈 때처럼 그것이 뚜렷하게 진행될 때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늙음은 사람이 나이 먹기 전에도 질병이나 다른 요소로 인해서 시작된다. 그래서 우리는 급하게 늙음을 말하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든 그것은 오게 되어 있다. '늙음은 둑카(苦)이다.' 늙음은 달갑지 않은 변화이다. 그것은 악화되는 것이며 쇠약해지는 것이다. 이 세상의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반드시 쇠퇴하고 결국에는 파괴된다. 특히 가지가지 요소로 만들어진 이 몸은 반드시 변질된다. 몸을 '나',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것은 둑카이다. 이 둑카는 세 가지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사람의 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사지가 더 이상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내장기관이 고장나서 소화, 배설을 못시키는 등의 수많은 늙음의 징후들이 있다.

두 번째 측면은 다섯 감각기관, 특히 시력과 청력이 쇠약해진다.

세 번째는 마음의 쇠퇴이다. 기억력은 약해지고, 정신은 오락가락해지며, 마음은 더 이상 사물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인 사지와 내장이 쇠약해지고 감각기관이 쇠퇴해지는 경우, 육체적인 고통은 있을지 모르나 그로 인해 사람이 비참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둑카에서 벗어나는 담마(法 법)의 길을 선택하는 마음의 능력이 제한되고 이해력이 결핍되는 경우 둑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늙음은 둑카이다'라는 사실은 우리 자신과 주변을 통해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증거를 댈 필요는 없다. 그런데 왜 이런 둑카의 측면을 언급했을까?

그 까닭은 비록 우리는 늙음을 맞이하게 되지만(늙음이 나타나기 전에 죽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그 사실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젊을 동안 자신의 젊음에 대한 자신감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잊으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늙음은 둑카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보통 우리의 혼란스러운 마음은 그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늙음이라는 서곡이 울려 퍼진 후 오게 되는 죽음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평등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 vyadipi dukkha(브야-디삐 둑카-)

우리는 이미 태어났다. 그리고 지금 젊거나 늙었거나 또는 그 중간이거나 우리는 질병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어떠한 형태의 질병이든지 그것은 반드시 둑카이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는 100년이나 되는 삶의 기간을 육체적인 질병 없이 살아갈 수는 있지만 단 한순간이라도 정신적인 질병에서 자유로운 자를 찾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수많은 육체적인 질병도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이지만 탐욕·성냄·어리석음이라는 악의 뿌리로부터 생기는 마음의 질병은 우리가 스스로 완전히 담마(法(법))를 보지 않는 한 항상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이다.

'건강은 최상의 얻음이다(법구경 204)'라고 우리의 스승께서는 이렇게 건강을 예찬하셨다. 그리고 이 말이 또한 정신적인 질병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진정한 예찬이 아니겠는가! 만일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만을 의미하는 것일지라도 여전히 건강은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고 자비로운 행동을 하는 등의 선업을 많이 쌓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얻음이다.

그런데 빨리어 'byadhi'의 의미에는 가벼운 병까지도 포함이 된다. 인생을 살면서 이러한 둑카를 겪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질병은 둑카이다'를 강조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마음은 질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건강은 대화를 할 때 부드러운 이야깃거리가 되지만 질병을 겪고 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싫어한다. 이것은 좋아하는 것을 잡으려고 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싫어하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다.

다른 경우를 보면 탄생과 젊음에 대해서는 좋아하고 죽음과 늙음에 대해선 그 반대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는 우리 스스로 더욱 많은 둑카를 만들 뿐 이다. 질병은 감추어야 할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지금 나의 몸은 건강하다. 그리고 많은 방식으로 담마를 수행할 수 있다. 만일 질병이 온다면 나는 그렇게 수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해서 담마(법)를 수행해야 한다.'

☆ maranampi dukkham(마라남삐 둑캉)

둑카의 과정은 인생 전체에 걸쳐서(태어남, 늙음, 질병) 진행되며 사람들은 감각의 즐거움을 통해 둑카를 견뎌내면서 죽음으로 행해간다. 이러한 위협은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커다란 둑카로 다가오는데 이는 우리가 그에 대해 잘못된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죽음이란 것은 우리가 걷고 있는 외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괴물이 아니라 단지 몸과 마음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정상적으로 겪게 되는 커다란 변화의 현상일 뿐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나의 자아', '나의 영혼'에 속해 있어서 상점에 앉아 있는 주인처럼 몸과 마음 안에 '나'가 앉아 있다는 믿음을 고집하는 한 우리는 많은 둑카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몸과 마음에 대한 갈망을 줄일 수 있다면, 그것들(몸과 마음)은 다만 서로 연관된 흐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육체적인 고통은 여전히 경험하게 되더라도 정신적 고통인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정복할 수 있다.

우리 인생의 시작은 태어남이며 그 끝은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이 몸과 마음을 통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마음은 바로 앞의 마음과 뒤의 마음이 서로 의지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순간적인 경험의 연속물이다. 매우 예리한 관찰력을 지닌 사람은 이러한 관찰력을 이용해 마음의 태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도록 권고 받는다.

몸에도 태어남과 죽음은 있다. 그리고 태어남이 더 강할 때 몸은 자라고 낡은 부분은 새로워진다. 그러나 죽음이 더 강할 때는 늙음이 나타난다. 몸의 늙음의 과정을 보는 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무집착의 태도가 길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집착은 비록 완전하게 계발되지 않을지라도 죽음의 때에 이르러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보통 '죽음'이라는 말은 육체를 통한 삶의 과정이 끝남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은 정신적 흐름(citta-santana)과 육체적 흐름(kaya-santana), 이 둘의 상호 의존적인 흐름일 뿐이다. 죽음의 순간에 흐름은 멈추며 육체적 흐름은 네 가지 요소(四大)로 흩어지고 정신적 흐름은 이미 만들어진 업에 따라서 계속 흘러간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고통이다. 부처님께서는 '죽음은 둑카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항상 살고자 하는 욕망과 감각적인 즐거움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혀서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해 왔기 때문이다. 죽음이 일어난 후 죽음은 가능한 좋게 보이도록 꾸며진다. 시체는 장식되고 커다란 관에 넣어져서 인위적으로 보존되며 누구도 그것을 볼 수 없다. 그리고 수많은 향기 나는 꽃이 관 위와 둘레에 놓여지고 나면(아마도 땅속에서 시체가 썩을 때 나는 악취를 꽃 냄새가 없애줄 것이라는 잠재적인 생각일 것이다.) 성대한 의식이 행해진 후 품위 있는 방식으로 안치된다. 이것은 요즘 도시인들이 행하는 방식이다.

부처님 당시의 일반적인 처리방식은 시체를 숲의 특정한 구역에 버려서 썩게 남겨 두는 것이고, 이렇게 불쾌한 진실을 감추지 않는 단순한 방식은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비록 어떤 경우에는 위엄 있게 꾸며서 전시를 하지만 그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 때문이며 그 이면에는 항상 죽음의 불쾌한 모습을 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을 우리가 좋아하는 한 부분만을 보아서는 안 되며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고 해야 한다.

앞에서 다룬 태어남, 늙음, 병듦 그리고 죽음이라는 둑카의 측면은 '가끔 겪는 둑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인생을 통해서 한 번 또는 특정한 시기에 겪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업이나 다른 원인으로 인해서 불치의 병을 겪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에게 질병은 가끔 일어난다.

이러한 네 가지 커다란 둑카의 원인에 이어서 역시 때때로 겪는 다섯 가지 둑카가 표현된다. "슬픔, 비탄, 고통, 번민, 절망은 둑카이다." 이 모두는 세상에 공통되는 것이다.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 soka parideva dukkha(소-까빠리데-와둑카) : 슬픔, 비탄

'슬픔'은 부모, 친척, 친구를 잃거나 재산, 또는 돈을 잃었을 때 느끼게 된다. 그에 의해 기진맥진해진 마음은 편안할 수 없다. 이러한 슬픔이라는 둑카에 압도된 마음으로는 담마를 수행할 수 없다.

"비탄'이란 슬픔은 스스로 참아낼 수 없을 만큼 강해졌을 때 일어나며 눈물과 울부짖음의 상태로 감정이 폭발하는 것이다. 비탄은 멈추어져야만 하고 평화롭고 균형 잡힌 마음의 상태로 대체되어야 한다.

☆ domanassu-payasa pi dukkha(도-마낫수빠-야-사-삐 둑카-) : 고통, 절망

'고통'은 육체적인 둑카이다. 즉, 작게는 모기에게 물렸을 때의 육체적 공통으로부터 크게는 병이나 상처에 동반하는 육체적인 고통을 말한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 가는 것을 고통스러워하고 죽음이 오는 것을 원망한다. 늙음, 병듦,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나셨던 부처님조차도 그것들을 경험해야 했다. 그것들은 분명히 고통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적인 고통 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 역시 견뎌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담마(法)를 정확하게 수행한다면 정신적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다.

'절망'은 슬픔, 고통, 번민이 너무나 강해서 견디기 힘들 때 일어나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더 이상의 탈출구를 찾지 못한 나머지 자살로까지 치닫게도 한다. 만일 절망으로 자살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우울증이 생길 수 있다. 이러한 에너지의 부족 상태에서는 절망을 치유할 수 없다.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는 "슬픔은 단지 안의 음식을 약한 불로 요리하는 것과 같다. 비탄은 강한 불로 요리를 할 때 단지로부터 음식이 끓어 넘치는 것과 같다. 절망은 단지 안의 음식이 다 말라버릴 때까지 끓어 넘쳐서 찌꺼기만 남은 것과 같다."라고 비유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삶을 살아가면서 위에서 설명한 '때때로 겪는 둑카'와 함께 '자주자주 겪는 둑카'의 쓴맛도 봐야만 한다. 자구 겪는 둑카는 다음의 세 측면이 있다.

☆ appiyehi sampayogo dukkho(압삐에-히 삼빠요-고-둑코-)

☆ piyehi vippayogo dukkho(삐에-히 윕빠요-고- 둑코-)

☆ yam piccam na labhati tampi dukkham(얌삣창 나 라 바띠 땀삐 둑캉)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은 둑카이다. 좋아하는 것과 떨어지는 것은 둑카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둑카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인생에서 단 한 번만 찾아오고, 늙음은 인생에서 특정한 기간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병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끔 일어나는 반면, 이러한 세 가지는 우리가 매일같이 경험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자주 겪는 둑카'라고 부른다.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appiyehi sampayogo dukkho)'은 원하지 않는 사람이나 동물과 만나는 것, 불쾌한 것과 접촉하는 것,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 불쾌한 날씨를 견뎌야 하는 것 등을 나타낸다. 이러한 싫어하는 것과의 불쾌한 접촉은 미약하게는 싫어하는 감정으로부터 격렬한 분노에 이르기까지 감정을 자극한다. 만일 우리가 충분한 알아차림을 갖고 있지 않다면 마음은 이렇게 좋지 않은 상태로 인해 쉽게 괴로워지게 된다.

'좋아하는 것과 떨어지는 것(piyehi vippayogo dukkho)'도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서 결코 피할 수 없다. 앞의 경우에서 우리는 성냄이라는 화살에 상처를 받게 되는데 반해 이 경우에는 욕망으로 고통받기가 쉽다. 우리는 어떤 사람, 동물, 물건을 갈망하고 우리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이러한 형태의 둑카로 공통을 받아야 한다. 욕망과 집착에 지배받고 있으면서 헤어짐이 자주 일어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가 이런 종류의 둑카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무상(無常)의 바다 속을 헤엄치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둑카를 자주 느껴야만 한다.

우리는 또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yam piccam na labhati tampi dukkham)'을 겪어야 한고, 우리가 담마를 수행하지 않는 한 이는 둑카일 수밖에 없다. 부처님께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을 매우 광범위하게 보여주셨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태어남에 지배받는 존재에게서 다음과 같은 바램이 일어난다. '내가 태어남에 지배받지 않았으며,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그러나 이는 바램만을 통해 얻어질 수 없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그것은 둑카이다."

여기에서 '가끔 겪는' 것으로 설명한 둑카의 각 형태에서도 위와 같은 문단이 반복된다. 이러한 문단을 줄이게 되면 다음과 같이 될 수 있겠다.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번민, 절망에 지배받는 존재에서 바램이 일어난다. '아! 우리가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번민, 절망에 지배받지 않았으면!, 그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그러나 이러한 바램은 얻어질 수 없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둑카이다."

☆ 오온에 대한 집착

부처님은 만일 우리가 둑카의 많은 측면을 경험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단지 바램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강조하셨다. 오직 담마의 수행과 통찰력만이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오온에 대한 집착은 둑카이다.'

이 마지막 구절은 둑카의 측면 중에서 가장 미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가장 우리 자신과 밀접하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오온(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은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부분이고, 어느 곳에서도 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계속되는 둑카이다. 태어날 때 우리는 과거생에 만든 업 때문에 그것들에 집착한다. 현생에서도 우리는 욕망과 거부반응을 통해 계속해서 업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이러한 오온은 본질적으로 견고하지 않다. 그것들은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고,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물이나 마른 모래를 한 움큼 움켜쥐는 것과 같다.

우리는 낙담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無常(무상)한 존재는 둑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자연스런 성품에는 자아나 영혼이 없다. 그것들은 실제로 내부에 들어앉아 있는 주인이 없다. 그것들은 無我(무아 anatta 아낫타)이다. 우리가 이러한 오온을 실제와 반대로 착각하여 그것들은 견고하고 행복의 기반이 되며, 변치 않는 '신'이나 영원한 '자아'가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스스로 둑카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오온은 다음과 같이 제시되면서 모든 다른 종류의 둑카를 요약한다.

간단히 말해서 "오온에 대한 집착은 둑카이다." 그것들(오온)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것들 때문에 사람은 슬퍼하고 한탄하며, 그들 중 첫 번째 色蘊(색온 : 몸) 때문에 고통받고, 나머지(受<수 : 느낌>, 想<상 : 생각>, 行<행 : 의도>, 識<식 : 앎>) 때문에 비탄에 빠진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절망에 빠진다.

그것들은 좋아하는 것과 떨어지고, 싫어하는 것과 만나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그것들에 집착하면 반드시 우리는 엄청난 양의 둑카를 만들어 내게 된다.

오온이 둑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왜곡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둑카를 분명하게 보지 못한다. 그러나 진지하게 수행하는 사람은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이 외부대상에 많은 자극을 받아서 심하게 활동할 때 둑카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몸이 활발히 움직일 동안은 몸 고유의 둑카를 알기란 쉽지 않다.

몸의 경우 기본적으로 네 가지의 상태에 있다. 걸음, 서 있음, 앉음, 그리고 누워있음이다(다른 자세들은 단지 이 네 가지 자세의 변형일 뿐). 몸이 이러한 각각의 자세 중 하나의 자세로만 오랜 시간동안 있게 되면 곧 고통스러워진다.

어떤 사람이 도보로 일주를 할 때 몇 km나 몇 십km를 걸은 후에는 몸의 자세를 앉는 자세로 바꾸던가 해서 몸을 쉬어주어야 한다. 왜냐 하면 몸이 아프기 때문이다(육체적 둑카). 또는 어떤 사람이 기차역이나 버스정류장에서 줄을 서서 오랫동안 서 있어야만 할 때, 30분 정도로 서 있는 자세는 불편해질 것이고, 한 시간이나 그 이상이 지나면 육체적인 둑카 때문에 앉을 필요성이 생겨날 것이다.

또는 어떤 사람이 수행을 하느라 전혀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다고 하자. 처음 삼십분이나 사오십 분까지는 아주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그의 마음이 수행주제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면, 몸의 고통이 점점 강하게 느껴질 것이다. 마침내는 경행을 한다든지 눕든지 해서 움직일 필요가 생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다면(병원 입원 등) 이 자세 역시 불편해진다. 누워 있는 동안조차도 사람은 몸에서 현저해지는 둑카를 피하기 위해 이쪽저쪽으로 몸을 움직여야만 한다.

우리가 하루 종일 분주히 움직이면서 자주 몸의 자세를 바꿀 때 우리는 이러한 모든 둑카를 보는 것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것이 둑카를 보다 적게 만드는 것은 아니며, 단지 우리가 그 사실에 무지한 것일 뿐이다.

이는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고성제)에 대한 무지이다. 그것은 또한 12연기의 첫 번째 요소인 無明(무명)이다. 우리가 둑카에 무지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괴로움의 커다란 원인에 무지한 것이다. 이러할 때 어떻게 우리가 행복할 수 있겠는가?

매일 한 시간이나 그 이상을 열심히 좌선 수행하는 수행자는 몸의 둑카에 대해 알게 된다. 그러면 그는 그것에 정면으로 대면하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네 가지 정신적인 蘊(온 : 느낌, 형상기억, 의지, 인식)을 둑카라고 말할 때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다소 내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정신적으로 이리저리 헤매는 사람(정신적인 훈련을 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 상태가 산란하고 혼란스럽다. 무지(moha 모하)에 덮여있기 때문에 그의 마음상태는 분명하지 않아서 둑카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고 수련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아서 그런 준비를 하는 사람은 곧 둑카를 알게 된다. 정신적인 蘊(온)의 어느 것도 몸처럼 견고하지 못하다.

느낌, 형상기억, 의지, 인식의 알아차림은 놀랄만한 속도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영원하지 않은 것, 그것이 둑카이다.' 게다가 어떤 수행자가 心一境性(심일경성 : 대상과 마음이 하나가 됨)을 얻기 위해 열심히 정진하지만 이러한 네 개의 蘊(온)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면서 마음은 곧장 흩어져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는다면, 그는 곧 '산란한 마음'은 본래 둑카라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은 둑카이다'라는 우리 자신에 대한 탐구는 苦성제를 보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이번 생 안에 법의 길에 들어서고자 하는 불제자는 최소한 이 고성제(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둑카를 내적으로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이 법의 수행에 대한 가장 훌륭한 동기가 된다. 둑카를 내적으로 체험하게 되면 그는 그것이 일어난 원인(고집성제)을 보려고 할 것이고, 그러므로 이 세상의 즐거운 대상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줄여 나갈 준비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8정도를 수행할 때 둑카의 소멸, 곧 열반(nibbana)을 내적으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마하목꿋 왕자가 태국 왓 보원니웻 수도원장이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둑카, 그것은 이 오온이다. 존재에 대한 갈망이 그것의 원인이며, 그것의 소멸은 열반(nibbana)이고, 열반으로 가는 성스러운 길은 八正道(팔정도)이다."

☆ 마무리

'태어남'은 보통 이번 생에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은 다음 생(만일 이번 생으로 태어남을 끝내고자 하지 않는다면)에서는 담마(법)를 수행할 수 없게 되는 커다란 둑카가 없기를 목표로 해야한다. 이는 지금 善業(선업)을 많이 쌓음으로써 가능해진다.

'늙음'은 가장 큰 육체적 둑카이며 반드시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만일 마음이 잘 다스려져 있어서 비탄이라는 정신적 둑카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는데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질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잘 다스려진 사람은 자기 연민에 빠진다거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또는 비통함을 느낌으로써 일어나는 둑카를 가중시키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때 괴로움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어난 모든 것은 사라지는 성질이 있다"라는 간결한 법의 가르침은 경전에서도 수 없이 찾을 수 있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 두려움과 걱정이라는 죽음에 대한 정신적인 둑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실제적인 육체의 죽음보다 더욱 고통스럽다. 마음은 비록 육체적 고통이 매우 커지더라도 둑카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훈련되고 개발될 수 있다.

'슬픔'은 법의 수행에 의해 완전히 끊을 수 있고 만일 이렇게 된다면 또한 '비탄'의 원인까지도 없애게 될 것이다.

'육체적 고통'은 몸에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그것을 치료할 수 없을 때는 참고 견뎌야 한다. 그러나 마음이 몸을 '나에게 속한 것'으로서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정신적 번민'은 훈련되지 않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법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도에 따라 그것은 줄어들 것이다. 그에 비해 자아에 대한 집착이 허상이라는 것을 본 아라한은 그것을 완전히 없애버린다.

역시 정신적인 조건인 '절망'이 갈망과 무지의 배후에 남을 것이다. 절망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신적인 개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싫은 것과 만나는 것,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두 욕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욕망이 적을수록 이러한 둑카는 적어진다. 욕망이 없어지면 둑카 또한 없어진다.

'오온에 대한 집착'은 그것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동시에 둑카이다. 집착이 사라질 때, 이와 관련된 정신적 둑카가 사라지고, 그리고 나면 그는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순수한 오온의 상태가 계속된다.

그러나 붓다를 포함한 모든 아라한은 그들의 마지막 생 동안 우리와 마찬가지로 육체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육체와 관련된 고통은 계속되었다. 부처님조차도 마지막 생에서 몇 번의 병을 앓으셨다. 그러나 부처님과 아라한들은 모두 오늘에 이르기까지 육체적인 조건으로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하지는 않는다.

현재 이 생에서 겪는 우리의 경험은 우리가 과거에 한 행위에 의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현재 많은 둑카를 겪고 있다면 우리는 과거에 많은 악업을 지었고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악의 뿌리를 스스로 강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일어나 있고 치유될 수 없는 둑카를 우리는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미래에 열매를 맺게 될 업을 계속해서 짓고 있다. 만일 번뇌와 관련된 업을 짓는다면 우리는 더욱 많은 둑카를 얻어야만 할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이를 이해하고 둑카의 줄어듦과 끝을 향해서 훈련하고 노력해야 한다. 법의 수행을 통해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한 행복을 만들어 간다.

 

이 글은 '붓다의길따라선원'의 진용스님께서 하신 법문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테넷으로 참고하십시오

 

 

 

 

[출처] 괴로움|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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