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수선님 2020. 6. 21. 11:45
Jorge Luis Borges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1>연재를 시작하며

- “20세기 서구지성에 불교사상 단비 뿌려”-

- 붓다 깨달음 자기체험 통해 자세히 묘사 -

<김 홍 근>

▲1957년 부산 生

▲외대 스페인어과 졸업, 同 대학원 수료(문학석사)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원 수료(문학박사, 중남미문학 전공)

▲서울대 대학원 강사

▲고려대 대학원 강사

▲현 한국외국어대 강사·성천문화재단 연구실장·문학평론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20세기 서구지성에 매우 큰 영향을 준 작가다. 문학가로 사상가로 명망 높은 그가 타계 10년전에 <불교강의>를 저술 자신의 사상근저에 불교가 뒷받침됐음을 알게한다. 본지는 새해를 맞아 보르헤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자기화’시켰는지를 정확히 알 수있는 <불교강의>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20세기의 창조자’라고 불리는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1976년 <불교강의>를 저술했다. 20세기 후반에 활동하는 전세계 작가와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으며, 후기구조주의와 해체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등 최근 서구사상사 상의 큰 반전을 이루고 있는 정신적 흐름의 사상적 기초와 인식의 맹아(萌芽)를 마련한 것으로 알려진 보르헤스가 불교강의를 직접 저술할 정도로 불교에 깊은 애착과 정통한 이해를 가졌던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연재가 진행됨에 따라, 작금 서구사상가들이 맞고 있는 ‘인식의 전환’에 불교가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한 단초가 드러날 것이다.

보르헤스에 미친 불교의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그의 대표적 단편소설인 ‘알레프’를 보자. 이 소설에는 보르헤스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사귀던 애인이 죽고난 뒤 기일을 맞아 그녀의 집에서 가족과 친지들의 추모 모임이 열렸을 때 그도 참석한다. 그곳에서 죽은 애인의 사촌오빠를 만나는데, 이 사람은 반쯤 실성한 것 같은 시인이었다. 왜냐하면 취중에 “지구 표면 전체를 묘사하는 시를 쓰겠다”는 호언을 보르헤스에게 떠들어 대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 보르헤스에게 시인은 부에노스아이레스시 외곽에 있는 자신의 고택 지하실에 우주의 비밀을 간직한 물체가 있는데 그것은 동전만한 크기의 발광체(發光體)라고 알려준다. 그말을 외면했던 보르헤스는 여러날이 지난 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 집을 찾아가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그 집 지하실에서 보르헤스는 ‘알레프’라고 불리는 발광체를 보게 된다. 그는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때 나는 알레프를 보았다. … 그 거대한 순간에 나는 수백만 가지의 황홀하거나 잔혹한 장면들을 보았다. 정말 놀라운 일은, 그 많은 장면들이 한 점에서 보이는데도, 서로 겹쳐지지도 않고, 투명한 실루엣으로 보이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본 것은 한 번에 보았는데, 글로 쓰자니 이렇게 하나하나 나열할 수 밖에 없다. … 알레프의 직경은 2~3센티미터밖에 안 되지만, 우주 전 공간이 축소되지 않고 거기 있었다. 각각의 사물의 갯수는 무한했는데, 왜냐하면 (거울에 비친 달이 복수가 되는 것처럼) 나는 우주의 모든 지점에서 그것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 나는 내 열굴과 내장을 보았으며, 너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현기증이 나서 울고 말았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그 이름을 남용하지만 결코 본 일이 없는 玄玄한 가상의 대상, 즉 불가해한 우주를 내 두 눈이 보았기 때문이다.” (보르헤스 전집 Ⅰ, 625쪽 이하 보르헤스 글은 원문에서 필자가 직접 번역)

보르헤스의 서술은 평범한 소설속의 묘사를 뛰어 넘는 직관이 담겨있다. 그것은 마치 번개같이 짧은 순간에 우주의 신비를 깨달은 어느 각자(覺者)의 체험담같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그 무한 시공간체(時空間體)의 이름을 <알레프>라 불렀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 알파베트의 첫글자로, 흔히 문명의 기원을 상징하며 또한 신성(神性)을 담고 있는 글자로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알레프>는 희랍어에서는 알파로 발음된다.

보르헤스는 그의 <불교강의>중 붓다에 관한 전설을 설명하는 곳에서 싯다르타 태자가 오랜 수행 끝에 보리수 아래 앉아 정각을 이루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홀로 나무 아래 정좌한 싯타르타는 순간적으로 자신과 모든 중생의 수많은 전생을 보았다. 한눈에 우주 구석구석의 수없는 세계를 전관(全觀)했다. 그뒤, 모든 인과 과의 사슬들을 직관했다. 새벽녘에는 사성제를 관하였다.” (보르헤스, <불교강의> 10쪽)

보르헤스 자신이 묘사한 이 글을 보면, 그의 단편 <알레프>의 모티브가 바로 붓다의 정각 장면이고, 자신이 지하실에서 본 광경은 붓다가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직관한 공을 관통한 진리의 모습을 자신의 입장에서 자세히 풀어 쓴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르헤스는 그의 단편을 통해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밝혀보고 싶어 했던 것이고, 또 그 작업을 통해, 그도 붓다처럼 우주의 비의(秘義)를 엿보았다는 체험을 작품화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불타가 성도한 깨달음의 내용을 정밀하게 표현한 <화엄경>의 핵심인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선재(善財) 동자가 오랜 순례 뒤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전관한 장엄세계의 모습은 보르헤스가 <알레프>에서 묘사한 놀라운 체험의 장면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알레프는 탑으로 상징된다.

“숫자상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 모든 탑들이 전혀 따로따로의 방식대로 서 있는게 아니라, 각각의 탑들은 나머지 모두와의 완전한 조화 속에서 그 나름의 개별적 존재성을 보유하고 있다. … 젊은 순례자 수다나(善財)는 각개의 탑 하나하나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탑들 속에서, 즉 하나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 그 각각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그런 곳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카프라,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범양사출판부, 343쪽에서 재인용)의상대사가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화엄일승법계도>에서 칠언절구의 시로 노래했듯이, 보르헤스도 그것을 <알레프>라는 소설속에서 작품화한 것이다. <알레프>는 1949년 발표된 작품이다. 따라서 보르헤스는 매우 일찍부터 불경을 읽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는 여러차례 인터뷰에서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통해 불교를 알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1914년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거주하며 학교를 다녔는데, 그가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읽은 시기는 독일어를 배워 독일 문학과 철학을 원문으로 읽었던 1918년(19세) 때였기 때문에 불교는 이때 이미 상당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불교강의>를 쓰면서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 다이세즈 쓰지키(D. T. Suzuki), 파올 도이센(Paul Deussen), 아더 윌리(Arthur Waley) 등 수많은 불교학자와 중국문학가들의 책을 인용하고 있다. 그는 또한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정통했고, 주역의 서문을 쓴 일도 있다. 그가 만년에 이르러 고향 부에노스 아이레스시에서 가장 애착을 가진 일곱가지 주제를 7일간에 걸쳐 강연을 했을 때도 불교를 포함시켰다. 불교는 보르헤스가 젊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집착했고, 그의 사상이 변화를 맞을 때마다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중요한 테마였다.

보르헤스는 1899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변호사인 아버지과 영문학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그는 영어, 불어, 스페인어로 된 책이 무한히 꽂혀있었던 도서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특히 할머니가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집안에선 영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사용하였다. 이 영향으로 그는 유년시절부터 많은 영국소설을 읽게 된다.

보르헤스는 15세 되던 해인 1914년에 아버지를 따라 유럽으로 이주한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유럽식 교육을 받으며 불어와 독어를 익히게 된다. 이어 라틴어도 마스터하게 된다. 1921년 조국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그는 새로운 문예사조를 반영하는 문학잡지를 발간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초기에 당시 유행하던 아방가르드 풍의 시를 썼다. 그러나 곧 그의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성향을 표현하기 위해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아버지가 사망한 해인 1938년 시립도서관에 취직한다. 같은 해 성탄절날 창문에 머리를 부딪히는 사고를 당해 의식불명 상태에까지 빠진다. 의식이 돌아온 뒤, 스스로의 사고 능력을 실험해 보기위해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의 대표작은 1944년 출판한 단편집 <픽션>과 1949년 출판한 <알레프>에 수록된 소설들이다. 그가 처음 이 작품들을 발표했을 땐 당시 문학계로부터 이해를 받지 못하고 단지 소수의 지식인 작가들만이 그의 글을 읽었다. 대중으로부터 외면받던 그는 1961년 베케트와 유럽출판인상을 공동으로 수상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그는 1967년 하버드 대학 찰스 엘리엇 노른 렉취에서 강의하고 계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등 1986년 죽을 때까지 왕성한 문학활동을 하게 된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2>보르헤스의 불교사상

- ‘苦의 원인’은 집착…무아무상일때만 자유얻어 -

- 이성 현실 집착하는 서구사상에 眞空正道 제시 -

20세기가 저무는 지금 보르헤스가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서구의 지성들에게 끼친 영향력 때문이다. 이성을 중시하는 헤레니즘과 계시를 중시하는 헤브라이즘 사이에서 사상적 변전을 거듭해왔던 서구사상의 흐름이 18세기 이후 계몽주의와 과학주의에 의해 이성 중심의 극단적 지적 편향을 보였을 때, 편협한 이성주의의 한계를 누구보다 먼저 예리하게 지적하고 그 극복 대안을 제시한 사람이 보르헤스이다.

20세기 후반부에 세계 지성계를 리드하는 미셀 푸코, 자크 데리다, 모리스 블랑쇼, 쥬네트 등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과 평론가들 그리고 존 가드너, 토마스 핀천, 존 바스 등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한결같이 그들의 사상적 원천으로서, 정신적 아버지로서 보르헤스를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보르헤스가 그들에게 끼친 공통된 영향은 그가 보여준 ‘이성주의적 이분법-주체와 객체, 자아와 차아등-의 붕괴’이다. 보르헤스의 이런 사상은 물론 불교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불교에 대한 보르헤스의 관심은, <알레프>에서 보여준 불타가 깨달음에 도달한 순간에 직관했던 시공을 초월한 세계의 모습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 ‘깨달음의 내용’에 초점을 맞춘다.

불타가 녹야원에서 처음 법륜을 굴렸을 때의 설법이 그 ‘깨달음’의 내용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고, 집, 멸, 도의 사성제와 그 바탕이 되는 삼법인 즉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재법무아(諸法無我)이다.

석가가 깨달은 내용의 핵심을 전하는 사성제와 삼법인은, 현실의 실상을 직시한 결과로 보게된 인간 존재의 참된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을 구성하는 오온은 실체가 없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고이며, 고의 원인은 인간의 집착에서 오며, 집착은 인간의 무지에서 온다. 여기서 보르헤스는 서구의 이성주의가 안고 있는 고를 깨닫고 그것이 신, 로고스 혹은 제일원인 같은 ‘근원’과 ‘중심’에 대한 집착에서 온 것이라고 보았다.

보르헤스는 근원과 중심을 추적해 보았다. 그것은 형이하학적, 공간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었다.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중심은 바티칸에도, 예루살렘에도, 메카에도 없었다. 따라서 형이상학적인 중심을 추구할 수 밖에 없고, 그때 그가 만난 세계의 중심은 ‘한권의 신성한 책’ 혹은 ‘도서관’이었다. 이때부터 보르헤스에게는 ‘도서관’의 이미지가 항상 따라다녔다. 그는 도서관에서 태어나, 도서관에서 살다가, 도서관에서 죽고, 도서관에 묻힌 작가였다.

그러나 그는 그가 추구했던 책과 도서관을 영원히 만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담고 있고 모든 것의 근원을 담보하는 한권의 신성한 책을 상정하면, 그 순간 그 책은 이미 다른 ‘책’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즉 어떤 책도 고유의 실체를 가진, 자성을 지닌 책이 될수 없기 때문이었다.

책이 성립하려면, 언어의 체계가 사전에 필요하고, 언어의 체계는 인간의 사회가 형성되어야 하고… 즉 모든 책은 끊임없이 이전의 다른 책의 존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가 깨달은 것은 ‘제법무아’였다. 모든 책은 고유한 자성을 가질 수가 없다. 모든 책은 다른 책들과의 인연소기(因緣所起) 관계에 놓여져 있는 것이었다. 중심이 해체되고, 근원이 부정되자, 그의 관심을 끈 것은 텍스트들의 관계성이었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이론인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다.

현상적인 모든 사물은 모두 인(직접원인)과 연(간접원인)에 따라 생긴다고 보는 연기론에 텍스트를 대입하면 그대로 상호텍스트성 이론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상(事象)이 서로 관계되어 성립하는 것처럼, 모든 책은 이전과 이후의 다른 책들과 밀접한 연관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결국 근원적인, 세계의 중심이 되는, 오리지날한 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중심의 부정은 ‘다원(多元)’을 낳고, 실체의 부정은 ‘상호관계성’을 낳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개념중의 하나인 ‘다원주의’는 이렇게 ‘상호텍스트성’과 동전의 앞뒤면같은 관계를 가진다.

한편 한권의 책이 다른 책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된다면, 독창적인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라는 개념도 의심받게 된다. 과연 그만의 오리지날한 작품을 쓰는 작가가 존재할 수 있는가? 제법무아는 ‘작가’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작가도 연기법-상호텍스트성을 벗어날 수 없다.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또 하나의 핵심적인 개념인 ‘작가의 죽음’이 탄생한다. 색과 공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존재의 연기성(空性)을 깨달아 진공정도(眞空正道)의 정관을 얻는다는 용수의 <중론>이 이룩한 ‘부정의 극복을 통한 대긍정’의 가르침대로, 작가의 죽음이라는 부정적 성격은 ‘독자의 탄생’이라는 긍정적 창조를 낳는다. ‘소아(小我·작가)’의 죽음 뒤에 따르는 해방된 ‘대아(大我·독자)의 탄생은 문학행위의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즉 한 텍스트에 대한 모든 권위와 도그마는 사라지고, 모든 텍스트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앞에 그대로 노출되게 된 것이다. 모든 책은 자기만의 완고하고 허위투성이의 자성(유일한 해석)을 버리고, 다른 텍스트들과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종교다원주의적 발상이 싹트게 된다.

제법무아의 시각에서 세계가 공이라고 하는 사상은, 객관적 현상을 실체로 인정하고 그 드러난 모습에 충실하려는 리얼리즘 문학과는 양립하기가 어렵게 된다. 보르헤스는 리얼리즘 작가들과는 달리 현실을 공(空)으로 보았다. 그는 ‘공’을 서구적인 용어 내에서 ‘환상(幻想)’ 혹은 ‘환영(幻影)’으로 표현했다. 만일 현실 자체가 환영(마야)이라면, 그 현실을 충실하게 그려낸 문학작품은 ‘환상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면 할수록, 그 작품은 더욱 환상적이 된다. 그는 자신의 문학을 ‘환상적 사실주의’라고 부른다. 환상적 사실주의는 ‘색즉시공’의 문학적 표현이기도 하다.

제법이 무아라는 것, 제행이 무상이라는 것, 세상의 중심이 없다는 것 등의 생각은 현실에 대한 정직한 직시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것은 결코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무아이기 때문에 모두가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 무상이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세계의 중심이 없기 때문에 내가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 보르헤스의 글들은 서구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의 씨앗을 제공했다.

편역:김홍근<외대강사·문학평론가>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3>전설상의 붓다(1)

- “나는 苦·病·死를 멸하겠다”-

- 보살은 인간세상 구원위해 환생 -

*불교강의 목차

제1장 전설상의 붓다

제2장 역사상의 붓다

제3장 불교에 영향을 준 사상들

제4장 불교의 우주관

제5장 윤회

제6장 불교교리:법륜과 열반

제7장 대승불교

제8장 라마불교

제9장 중국불교

제10장 탄트릭불교

제11장 불교윤리

붓다(佛陀)의 전설은 붓다가 누구였나를 보여주는 증거라기보다 붓다가 짧은 순간의 깨달음을 통해 도달한 경지에 대한 증거라고 여러 학자들이 지적했다. 학자들은 전설적이고 신화적인 이야기 속에는 불교의 핵심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동의했다. 전설은 우리에게 수많은 세대에 걸친 선인(善人)들이 믿어 왔고 또 지금도 많은 인류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내용을 밝혀준다.

붓다의 전기는 하늘에서 시작한다. 보살(‘覺者’라는 뜻으로, 성불할 사람을 지칭. 여기선 전생의 붓다를 가리킴.)은 수많은 전생의 공덕에 의하여 신들이 사는 제4천(天)에 탄생한다. 그곳에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환생할 시간과 땅과 왕국 등의 인간세를 굽어본다. 네팔 남부 지방의 카필라 성을 통치하는 숫도다나 왕의 왕비 마야(이것은 환영(幻影)인 우주를 창조한 마술적 힘과 같은 발음이다)부인을 어머니로 선택한다. 마야부인은 꿈속에서 여섯개의 상아를 가지고 눈같이 흰 몸에 루비처럼 붉은 머리를 한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꿈이 깨자 왕비는 몸속에서 고통이나 이질감 대신 몸이 가뿐하고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신들은 부인의 몸속에 신궁(神宮)을 창조한 것이다. 그 경내(境內)에서 보살은 기도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춘상월 부인은 해산하기 위해 친정 콜리성으로 가다가 카필라와 콜리의 경계에 있는 룸비니 동산을 지나가고 있었다. 무성한 잎이 공작새 꼬리처럼 반짝이고 있던 무우수(無憂樹) 한그루가 부인의 머리위로 가지 하나를 늘어뜨렸다. 부인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 가지에 달린 잎새를 받았다. 그 순간 보살이 깨어나 부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오른쪽 옆구리로 나왔다. 아기는 일곱발자국을 걸어가서 상하 좌우 전후를 둘러보았다. 우주에 자신과 동일한 인물이 없다는 것을 보고 난 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첫번째 자요, 제일 높은 자이다. 이번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다. 나는 고(苦), 병(病), 사(死)를 멸(滅) 하겠다”

두조각의 구름이 몰려와 산모와 아기가 목욕할 수 있도록 찬물과 더운물을 부었다. 장님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고, 절름발이가 걷고, 악기들이 절로 울려퍼지고, 제4천의 신들이 기뻐서 춤추고 노래했다. 지옥의 죄인들은 그들의 고통을 잊어버렸다. 같은 순간, 미래에 그의 아내가 될 야소다라와, 마부와, 말과 코끼리가 태어나고 후에 그 그늘 아래서 붓다가 정각을 이룰 보리수도 태어났다. 아기 이름은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라는 뜻에서 싯다르타로 정해지고, 샤카족 가족 사이에선 고타마로 불렸다.

산모는 아기가 태어난지 이레만에 죽어 33인의 여신들이 살고 있는 하늘로 올라갔다. 예언자 아시타는 천신들의 환호성을 듣고 산에서 내려와 아기를 품에 안고 말했다.

“이분은 지극히 존엄하신 분이다.”

그리고는 아기의 몸에서 선택된 자의 상호(相好)를 확인했다. 두개골 가운데엔 왕관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눈섭은 소눈섭 같았다. 40개의 가지런하고 흰 치아, 사자같은 턱, 긴 두팔, 황금빛 피부, 손가락 사이엔 물갈퀴 등을 가지고 있었다. 발바닥에는 호랑이, 코끼리, 연꽃, 피라미드 모양의 메루산, 바퀴, 만자(卍字) 등의 각종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윽고 자신이 이미 너무 늙어버려 장래에 붓다가 설법할 법문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친 아시타는 눈물을 흘렸다.

해몽가들은 마야부인의 꿈 이야기를 듣고, 장차 태어날 아기가 왕위를 계승하면 세계의 주인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며, 만일 출가하면 세계의 구원자(佛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숫도다나왕은 자신의 아들이 세계의 주인이 되게 하기 위하여 세개의 궁전을 짓고, 그 속에서 태자가 유한성(有限性), 고통, 죽음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태자는 언변술, 식물학, 문법, 격투기, 달리기, 멀리뛰기, 수영 등의 교육을 받고, 시험에서 항상 일등을 하였다. 특히 궁술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는데, 싯타르타가 쏘아올린 화살은 그 누구의 화살보다 더 멀리 날아갔고 화살이 떨어진 곳에서 샘이 솟아났다.(이 샘을 찾아 나서는 모험이 키플링의 소설 <킴 Kim>의 주제이다.) 이런 무훈(武勳)들은 훗날 불타가 악마를 굴복시키고 거둘 승리의 상징으로 보인다. 왕자는 19세가 되자 결혼하게 된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4>전설상의 붓다(2)

- 북문 밖 사문 얼굴 보고 출가 결심-

- 고행버리고 깨달음위해 명상잠겨 -

결혼 후 10년의 꿈같은 세월이 흘렀다. 태자는 자신의 궁궐에서 8만4천의 궁녀들에 둘러싸인 채 쾌락에 탐닉하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어느날 아침 마차를 타고 궁을 나왔다.

태자는 동쪽 성문 밖에서 지팡이를 짚고 손발을 떨며 머리카락이 마른 풀처럼 빛이 바래고, 지팡이처럼 바짝 마른 등이 굽은 사람을 보고 소스라치듯 놀랐다. 누구인지 묻는 태자의 질문에 마부는, “저사람은 노인(老人)인데 이 땅의 모든 사람은 그와 같이 늙게 된다”고 대답했다. 남쪽 성문을 나서자 이번에는 문둥병에 걸려 몰골이 흉측한 사람을 보았다. 마부는 설명하길 “그 사람은 병자(病者)인데 이 세상 그 누구도 병고(病苦)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없다”고 했다. 또 서쪽 성문 밖에선 관속에 누워있는 사람을 보았다. “움직이지 않는 저 사람은 사자(死者)인데 죽음은 태어나는 모든 생명이 겪을 숙명이지요”하고 마부가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북쪽 성문 밖에서 탁발을 하러 다니고 있는 수도승을 보았는데 그는 생사를 초탈한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후기의 전설에는 이 네 사람이 천사의 화신이라고 한다) 마침내 그 출가사문(出家沙門)의 얼굴에서 싯다르타는 길을 발견했다.

출가를 결심한 그날 밤에 아내가 아들을 출산했다는 전갈이 왔다. 태자는 궁으로 돌아갔다. 한밤중에 잠에서 깬 그는 후궁을 둘러보다 잠들어 있는 궁녀들의 모습을 보았다. 한 궁녀는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리고 있었고, 다른 궁녀는 머리가 어지럽게 헝클어진 채 코끼리에게 밟힌 상을 하고 있었다. 잠꼬대를 지껄이는 궁녀와, 온몸에 종기 부스러기가 난 궁녀도 있었다. 모두가 죽은 사람 같았다. 싯다르타는 혼잣말을 했다.

“유한한 세계에서 순수하고 영원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야. 불결하고 흉측스럽기까지 한 존재들이다. 그것도 모르고 남자들은 곁에 장식한 노리개에 홀려서 탐심을 낸단 말이야.”

태자는 야소다라의 침실로 들어갔다. 아내는 아기를 품에 안고 잠들어 있었다. 아기와 산모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일 저 팔을 치우면 아내가 깨어날거야. 성불한 뒤 돌아와 내 자식을 안아 보리라.”

싯다르타는 왕궁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달렸다. 성문이 저절로 열리고 말은 발굽을 땅에 닿지 않고 달렸다. 강을 건넌 뒤, 수행하던 시종에게 말과 옷을 벗어주며 작별했다. 싯다르타는 칼을 집어 머리칼을 잘라 허공으로 던졌다. 천신(天神)들이 달려와 머리카락을 유물처럼 주워 모았다. 말은 슬피 울며 돌아가서 곧 죽었다. 수행승의 모습을 한 천사가 그에게 다가와 황포(黃布) 3조각, 요대, 단검, 탁발을 위한 검, 바늘 그리고 광주리 하나를 주었다.

싯다르타는 7일동안 홀로 앉아 있었다. 그뒤 일어나 가르침을 받을 만한 숲속에 사는 은둔자들을 찾아 보았다. 풀잎으로 엮은 옷을 입은 이도 있었고, 나뭇잎으로 중요부분만 가리고 있는 이도 있었다. 모두 과일로 연명하였는데, 하루 한끼 먹는 사람, 이틀에 한끼 먹는 사람, 사흘에 한끼 먹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물, 불, 태양 혹은 달에게 경배를 올리고 있었다. 하루종일 한발로 서 있는 사람도 있었고 가시덤불에서 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싯다르타에게 북쪽에 살고 있는 세분의 스승에 대해 말해 주었다.

세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지만, 싯다르타는 만족할 수 없었다. 고행을 참아내는 일로써 수행을 삼고 있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어떤 보상을 전제로 한 고행은 아무 쓸모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한 스승은 싯다르타에게 무념, 무상의 경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생노병사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는 스승과 하직하고 보다 높은 수행을 위해 길을 떠났다. 세번째 스승으로부터 그는 사유(思惟)를 초월하고 순수한 사상만 남는 비상비비상처(非相非非相處)의 경지를 배웠다. 그러나 그것도 자기가 출가한 궁극의 목적은 아니었다.

그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6년동안 고행과 단식에 몰두했다. 사나운 비바람과 강렬한 햇살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천신들은 그가 죽은 줄 알았다. 싯다르타는 마침내 고행이 무용(無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일어나 강물에 목욕하고 죽을 조금 먹었다. 그의 몸은 잃어버린 기력과 아시타가 확인했던 상호들과, 후광을 되찾았다. 새들이 그의 머리 위를 날며 경의를 표했다. 그는 보리수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정각을 얻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결심을 한 뒤, 명상에 잠겼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5>전설상의 붓다(3)

 

- “마침내 나는 진리를 깨달았다”-

- 쾌락 고행여읜 중도의 팔정도 제시 -

그때 애정과, 죄악과, 죽음의 고인 ‘마라’가 싯다르타를 공격했다. 마라의 공격은 긴밤 내내 계속되었다. 공격을 시작하기 전 마라는 꿈속에서, 자신의 왕관이 떨어지고 궁궐의 꽃은 시들고 연못은 말라버리고, 악기 줄이 끊어지고 자신의 머리 위로 재가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자기 칼이 칼집에서 뽑히지 않는 것을 보았다. 화가 난 마라는 악마들, 호랑이들, 사자들, 표범들, 거인들, 뱀들로 구성된 자신의 군대를 총동원했다. 그중에는 야자나무처럼 키가 큰 놈도 있었고 난장이처럼 작은 놈도 있었다. 맨앞에는 산만한 크기에 500개의 머리와 불을 뿜는 500개의 혓바닥 그리고 각각의 손에 다른 무기를 든 팔이 천개나 되는 거대한 코끼리가 싯다르타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라의 군대는 싯다르타에게 불화살을 퍼부었다. 그러나 불화살은 싯다르타의 사랑의 힘에 의해 꽃잎으로 바뀌어 떨어져 내렸다.

불화살은 화대(花臺)가 되어 싯다르타의 주변에 쌓였다. 패배당한 마라는 자신의 딸들로 하여금 그를 유혹하게 했다. 그를 둘러싼 여인들은 음악을 연주하며 교태를 부렸다. 싯다르타는 여인들에게 그들의 본질이 환영(幻影)임을 일깨웠다. 손가락으로 여인들을 가리키자, 곧 추한 노파로 변해버렸다. 혼란에 빠진 마라의 군대는 사분오열되어 각지로 흩어졌다.

홀로 나무아래 정좌(定坐)한 싯다르타는 번뇌의 불꽃과 생사의 매듭이 풀어지는 것을 보았다. 모든 이치가 그 앞에 밝게 드러났다. 그는 자신과 모든 중생의 수많은 전생을 낱낱이 보았다. 우주 구석구석의 수없이 많은 세계를 한눈에 전관(全觀)했다. 그뒤 모든 인과 의 사슬을 살펴보았다.

이윽고 새벽녘에 이르러 사성제(四聖諦)와 삼법인(三法因)을 직관하였다. 이제 그는 태자 싯다르타에서 부처님이 된 것이다. 천상의 신들과 미래불들이 그를 칭송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나는 진리를 찾아 수많은 생의 수레바퀴를 전전했다. 그토록 자꾸 태어나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마침내 나는 진리를 깨달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생사의 윤회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칼 프리드리히 쾨펜 Karl Friedriech Koppen에 의하면) 여기서 네팔과 티벳의 경전이 끝나면서 전설의 가장 오래된 형태가 끝이 난다.

부처님은 성수(聖樹)아래 7일간을 더 앉아 있었다. 신들은 그에게 음식과 옷을 바치고 향을 피웠으며 꽃을 던지면서 축하했다. 비가 오자 뱀의 왕 ‘나가’가 자신의 7개의 머리로 둥그렇게 똬리를 틀어 불타의 머리 위에 지붕을 만들었다. 비가 그치자 나가는 젊은 브라만으로 변해 무릎을 꿇고 말했다.

“당신을 놀라게 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비와 추위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드리려고 한 것 뿐입니다.”

나가는 부처님과 몇마디 짧은 말을 주고 받은 뒤에 부처님께 귀의했다. 이어 한 신이 다가와 나가의 뒤를 따라 재가불자로 귀의했다. 동서남북의 공간을 지배하는 네명의 왕이 다가와 부처님에게 각각 석기(石器) 하나씩을 바쳤다. 부처님은 그들의 뜻을 존중하여 네개를 녹여 하나로 만들었다. 이후 40년간 부처님은 탁발할 때 그 바루를 사용하게 된다.

브라흐마신(梵天)이 수행자들을 이끌고 천상에서 내려와 부처님에게 중생들을 구제할 설법을 하시도록 간청했다. 부처님은 마침내 이 간청을 받아들였다. 대지의 정령이 공기의 정령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공기의 정령은 천상각지의 온갖 신들에게 이 기쁜소식을 전했다.

부처님은 베나레스시를 향해 걸어갔다. 서문으로 들어가서 탁발을 한뒤 녹야원(鹿野苑)으로 갔다. 그곳에서 지난날 고행을 포기할 때까지 함께 수행하던 다섯 수행자들과 재회하여 그들을 위해 최초의 설법(初傳法輪)을 했다. 그들에게 세속적인 쾌락의 삶과 육체를 학대하는 고행의 삶의 양 극단을 떠나 중도의 삶을 걸어야 한다는 ‘중도(中道)’의 가르침과 중도의 구체적 실천방법인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직업, 바른 노력, 바른 기억, 바른 명상’의 팔정도, 그리고 망집(妄執)의 제거를 통해 고를 극복하는 ‘사제(四諦)’의 가르침을 설했다. 그말을 듣고 깨달은 다섯 사람은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어느 경전에 전하기를 그날 이후 지상에는 여섯명의 성자가 거주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가 이루어졌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6>전기속의 붓다(4)

 

- “오직 진리를 등불삼고 의지하라”-

- “모든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

카필라의 숫도다나왕은 아들이 붓다가 되어 존경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다. 아들이 보고 싶어 카필라를 방문하도록 청하는 사신을 보냈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은 부처님이 회고해 보니 고향을 떠난지도 벌써 열두해가 넘어 있었다. 부처님은 2만명이 넘는 제자를 거느리고 수도 카필라바스투를 방문했다. 부처님이 출가하기 직전 태어났던 아들인 라훌라와 왕위를 계승할 아우 난다 그리고 사촌형제들인 아난다와 데바닷타도 부처님을 따라 출가했다. 특히 이 두 사촌형제 가운데 아난다는 일생을 바쳐 부처님을 공경하고 시봉하였으나, 데바닷타는 부처님 교단에 반역하여 부처님을 괴롭혔다.

어느날 어부들이 당나귀, 강아지, 망아지, 원숭이 등의 서로 다른 머리가 백개나 달린 거대한 물고기를 잡아 부처님 앞으로 가지고 왔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길, “그 물고기는 전생에 수도승이었는데 어리석게도 동료들을 ‘당나귀 대가리’, ‘강아지 대가리’하며 놀려대다가 이 생에서 저런 모습으로 벌을 받고 있다”고 했다.

데바닷타는 종단의 개혁을 주장했다. 승려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노천에서 자야하며 물고기 음식은 피하고 성안이나 민가에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남달리 큰 야심을 품고 있던 그는 부처님의 자리를 탐내기 시작했다. 그는 마가다의 태자 아자타삿투에게 접근하여 부처님을 암살할 것을 사주했다. 부왕을 옥에 가두고 왕위를 빼앗은 아자타삿투는 열여섯명의 자객을 보내 부처님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부처님 앞에서 몸이 떨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모습에 감화되어 모두 제자가 되었다.

한번은 부처님이 지나가는 길 위에 데바닷타 일행이 숨어있다가 아래로 바위를 굴렸다. 그러나 바위는 좁은 골짜기에 걸려 멎고 말았다. 또 한번은 부처님을 향해 사나운 코끼리를 풀어 놓았다. 그러나 그 코끼리는 부처님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꿇었다. 데바닷타의 음모는 세번 다 실패로 돌아갔다. 이설(異說)에 의하면 부처님에게 달려든 코끼리의 수가 수십마리에 이른다고 했다. 그때 부처님의 손가락에서 사자들이 뛰쳐나와 코끼리를 물리쳤다고 한다. 마침내 분노한 대지(大地)는 데바닷타를 삼켜서 영원히 화염속에 휩싸이게 했다. 부처님께서 데바닷타와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먼 옛날 큰 거북이 한마리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상인의 목숨과 짐을 구해주었다. 그러나 뭍에 오른 그 상인은 배은망덕하게도 선행(善行)을 한 그 거북이를 잡아다 불에 구워 먹었다” 부처님은 이야기 말미에 “그 상인이 바로 데바닷타이고, 난 그 거북이였다”고 말씀하셨다.

베살리 시(市)에서 부처님은 행실이 좋지 않기로 유명했던 여인인 암바팔리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녀는 후에 자신 소유의 농원을 승단에 기증하게 된다. 이렇듯 부처님은 유녀에서 왕에 이르기까지 일체 중생을 근기에 맞게 교화했다. 45년의 긴 세월이 흐른 뒤 악신(惡神) 마라가 다시 부처님께 찾아왔다. 그리고 말하길 “이제 종단도 확립되고 승려의 수도 충분하니 그만 이 세상을 떠나시는게 어떠냐고 전했다. 부처님은 석달 뒤에 이 세상을 하직하겠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땅은 전율했고 태양은 어두워졌으며 폭풍이 몰려와 뭇생명은 겁에 질렸다.

전설에서는 부처님은 몇 천년이라도 살 수 있지만 자의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한다. 사후 부처님은 인드라 천(天)으로 올라 가서 불법(佛法)의 보호를 당부하셨다. 그 다음 용궁으로 내려가셔서 용왕으로부터 불법의 수호를 약속받으셨다. 신들과 용들과 악마들과 땅과 별의 정령들과 나무와 숲의 정령 등 모두가 부처님께 죽음을 거두시도록 간청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세상에서 무상(無常)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대답하셨다. 쿠시나가라에서 금세공(金細工) 춘다가 올린 공양을 드시고 병이 악화되었다. 부처님은 제자들과 작별하기 위해 목욕을 하고 물을 마신 후, 나무아래 누우셨다. 나무는 놀래서 갑자기 꽃을 피웠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종단의 분열과 불화를 예언하셨다. 그리고 오로지 진리를 등불삼고 의지할 것을 당부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머리를 북으로 향하고 얼굴은 서쪽으로 바라보며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누우신 채로 열반에 드셨다. 때는 죽음을 맞기에 가장 적당한 시간인 저녁무렵이었다.

보르헤스는 생각하기를, 궁극적 진리는 이성적 논리보다는 오히려 신화나 설화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고 보았다. 작가인 보르헤스는 불교공부를 하면서 <불전(佛傳)>이나 <불소행찬(佛所行讚)> 등에 문학적으로 전승되어 온 부처님의 생애 이야기에 함축되어 있는 가르침에 주목했다.

그는 불교강의를 하면서 제일 먼저 부처님의 생애에 관한 전승 설화를 집약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보르헤스는 첫장의 소제목을 서구인 기준으로 ‘전설상의 佛陀’라고 붙였다. 편역자는 그대로 직역하였는데 한국 독자들의 오해가 염려돼 이번 호부터 제1장 제목을 ‘전기속의 佛陀’로 바꾼다.

편역 :김홍근 <외대강사·문학평론가>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7>전기속의 붓다(5)

 

- 무상의 도리 일깨워 준 부처님 열반 -

- 늦게온 가섭위해 관밖 두발 보이셔 -

석존의 죽음은 “열반에 들었다”고 표현된다. 열반은 깨달음의 경지를 일컫는 말로서 죽음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지만, 부처님의 죽음에 한하여 이 말이 사용되고 있는 예가 많다. 훗날 경전에서는 진리와 일체가 되어 시공을 초월한 존재가 된 붓다가 생사의 본질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상(無常)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한계가 있는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석존은 쿠쉬나가라 숲속 두그루의 사라나무 아래에서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날이 새자 아난다는 부처님의 입멸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모두가 놀라고 슬퍼했지만 이윽고 향과 꽃다발을 가지고 와서 석존의 유체에게 바치고 악기를 연주하여 6일동안 성대히 장례식을 치렀다. 먼 곳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제자 마하가섭이 뒤늦게 도착해 슬피 울었다. 가섭의 울음이 끊임없는데 이변이 생겼다.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발을 내 보이신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열반이 죽음도 소멸도 아님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7일째되는 날 쿠쉬나가라 동문밖 천관사(天冠寺, 마쿠타 반다나 차이타)에 시신을 안치하였다. 사람들은 향목으로 장작을 만들어 화장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장작에 불을 붙여보았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마침내 석존의 심장에서 불이 일어나 삽시간에 장작더미로 번졌다.

화장 뒤 유골은 수습되어 사리함에 담겨졌다. 한조각이라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사리함은 꿀로 채워졌다. 유골은 다시 삼등분되었다. 하늘에서 신들이 내려와 한부분을 하늘로 모셔갔다. 또 한부분은 용왕이 모셔다가 지하세계에 보관하였다. 나머지 부분은 8명의 왕들이 나누어서 각각 자기의 왕국에 사리탑을 세웠다. 부처님의 입멸을 지켜보지 못한 많은 참배객들은 가장 가까운 사리탑으로 가서 참배하였다. 이때 건립된 불사리탑 8개 중에서 오늘날 분명히 확인된 것은 2개 뿐이다.

지금까지 부처님 전기에 내려오는 붓다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파울 도이센(Paul Deussen)은 1887년에 쓴 그의 책에서 말하길 “18~19세기에 서양에 알려진 인도, 티벳 등의 불교설화를 읽고서 그 내용이 너무나 환상적이면서 깊은 신비감에 휩싸였다”고 했다. 그는 서구인들의 사고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세계를 접했던 것이다. 또한 설화에 등장하는 여러 사상(事象)들의 상징체계가 서구인들의 언어세계와 다른 점에도 놀라움을 표시했다. 예를 들어, 붓다가 6개의 상아가 달린 흰코끼리가 되어 어머니의 옆구리로 들어갔다는 것은 서구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그러나 이런 서술은 인도와 인근지방의 사람들에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6은 신성한 숫자로서, 6개의 상아는 브라만의 육문(六門)이라고 불리는 동, 서, 남, 북, 상, 하의 여섯 공간 즉 우주를 의미한다. 또한 코끼리는 그들에게 가장 가까운 동물로서 순종과 성스러움을 상징한다.

이상 석존의 전설상의 생애를 살펴보기 위해 두권의 책을 참고로 했다. 한권은 윈터니쯔(Winternitz)가 ‘붓다의 생애에 관한 세세한 이야기’라고 번역한 <불전(佛傳, Lalitavistara)>인데 이 책은 뒤에 대승불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시 인용될 것이다. 이 책은 20세기 초에 서구어로 번역되었다.

또 다른 한권은 기원 후 2세기경 북인도의 바라문 출신인 마명(馬鳴, Asvaghosha)이 지은 <붓다차리타(佛所行讚, Buddhacarita)>이다. 이 책은 석존의 일생을 찬술(讚述)한 감동적인 서사시로서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었고 후에 중국어와 티벳어로 번역되었다. 쿠산 왕조 때의 이 불교시인은 부처님의 전기를 아름다운 음율에 실어 노래했다. 그 내용은 세속적 행복에 대한 태자 싯다르타의 무상감(無常感)과 고뇌, 대각(大覺)의 환희, 교화사업, 제자 사리불(舍利佛)과 목련과 대가섭(大迦葉) 등의 출가인연, 입적과 사리탑의 건립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서사시는 당시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자주 낭송되어 대중사이에 불교신앙이 널리 퍼지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책은 1894년 영어로 번역되었다.

마명의 또 다른 서사시로는 아난타(阿難陀)가 아름다운 아내 순다리(Sundari)에게서 애집(愛執)을 버리고 성자의 경계에 들어 대승불교적 사도로 승화되기 까지의 경위를 유려한 미문체로 묘사한 <순다리와 난타의 시(Sundarananda-Kavya)>가 있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7>역사상의 불타

 

- 45년간 전법행선지 인도지리와 일치 -

- 서구 철학자 지고한 정신세계에 감동 -

붓다의 전기를 연구할 때 부딪히는 문제는 붓다의 생애에 대한 자료도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기록으로 전해 내려온 게 아니라 문학이나 전설의 형태로 알려져 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어느 개인이 자의적으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대부분 원래 사실이 다소 과장되게 표현된 것일 뿐이다. 인도작가들의 과장법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들이 없는 것을 조작해 낸 것 같지는 않다. 불전(佛傳)에 등장하는 정황묘사를 통해 우리는 당시의 실제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싯다르타 태자가 왕궁을 버리고 출가한 것이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은 정확한 사실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숫자는 어떠한 상징적 복선을 깔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스승을 찾아가 배웠다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단순히 찬양하기만을 위한다면 스승을 찾았다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했다고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테니 말이다.

붓다의 발병(發病)과 죽음에 관한 대목도 거의 사실적인 묘사에 가깝다. 붓다의 병환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알려져 있는 음식도 누군가가 꾸며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사실적인 기록인 것으로 보여진다.

출가하기 전 태자로서의 싯다르타의 화려한 생활에 대한 묘사는, 출가 후 겪게 되는 고통스런 수행과 극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다소 과장하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불교학자 올덴버거(Oldenberg)는 ‘숫도다나’란 이름이 ‘순수한 쌀’ 혹은 ‘순수한 음식을 가진 자’의 뜻을 가진 정반왕(淨飯王)으로 번역되는 것을 보고 그가 왕이라기 보다는 넓은 쌀 경작지를 소유한 부유한 대지주였다고 생각했다.

정각을 이루기 전 붓다의 수행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러나 45년간의 전법여행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기적에 대한 몇몇 과장된 묘사만 제외한다면 대부분 사실인 것 같다. 특히 기록된 전법 행선지와 오늘의 실제 지리(성지)는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서 잠깐 붓다가 살았던 기원전 6세기는 인류사에 성인들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다. 공자(孔子), 노자(老子), 피타고라스 그리고 헤라클리토스 등이 붓다와 동시대인들이다.

서구인의 입장에서는 붓다의 일생과 예수의 일생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이 불가피한 일인지 모른다. 예수의 전도생활은 격정적이고도 극적인 사건으로 채워진 반면 붓다의 전도생활은 인류의 스승으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신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여 도둑들 사이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죽었다는 교리는 태자가 출가하여 성도(成道)한 뒤 깨달음의 길을 열었다는 사실보다 훨씬 강열하다. 그러나 관과할 수 없는 사실은 불교는 개인의 유일한 인격이라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예수같이 드라마틱한 인물상은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자체에 위배된다는 점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들 중 두사람이 내이름으로 모이면 내가 그중 세번째 사람이 되겠다’고 했다. 비슷한 상황에서 붓다는 ‘너희는 자기 자신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라고 가르쳤다. 타력 신앙과 자력 신앙의 대조가 뚜렷하다.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는 말하기를 개인으로서 고타마의 존재는 불자의 신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덧붙이기를 대승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붓다는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이땅에 나타나는 원형(原型)이기 때문에 붓다의 개성적인 모습은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일회적(一回的)이고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붓다의 삶과 가르침은 역사적인 주기 때마다 반복되며 고타마는 과거에서 미래로 끝없이 연결되는 거대한 흐름의 한 사슬의 역할을 다하였다.

출가수행의 전통은 고타마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도인에게 적용되며 오늘날에도 장년기를 넘어선 많은 인도인들은 가족과 재산을 뒤로하고 수행사문의 길을 걷는다.

에드워드 콘즈는 말한다. “서구의 역사학자의 눈에는 붓다의 인간적인 모습만 사실이고 신비로운 정신세계는 모두 픽션으로 보이겠지만 불자의 입장에서는 붓다의 지고한 정신세계가 일차적으로 가장 소중한 것이지 붓다의 개인사(個人史)는 찬란한 정신적 보석을 감싸는 누더기처럼 부차적인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의 불교사(佛敎史) 학자들이 부딪히는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다. 쇼펜하우어처럼 인도인들도 역사를 경시한다. 연대기(年代記)적인 의식이 희박한 것이다. 11세기 초반의 아랍학자였던 알베루니(Alberuni)는 인도에서 13년을 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도사람들은 역사적인 사건의 순서나 왕위 계승의 계보(系譜)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질문을 할라치면 어떤 대답을 만들어 답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

사실 인도인들에겐 어느 역사적인 날짜나 장소 혹은 개인의 이름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사상이나 정신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붓다의 탄생지로 알려진 카필라바스투(城)는 샨캬교 창시자 카필라가 불교에 미친 커다란 영향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인도철학자들은 종종 여러시대의 철학학파들을 동시대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도철학사가 확립된 것은 막스 밀러(Max miiller)나 도이센(Deussen) 같은 유럽학자들에 의해서였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8>불교에 영향을 미친 사상(1)-산키아학파

 

- 무신론 주창하며 생의 본질 탐구 -

- 인도 육파철학중 하나 數의 철학 -

우리가 앞장에서 살펴본 바대로, 불타의 탄생지가 카필라성(城)이라고 알려져 내려오는 사실속에는 산키아학파의 창시자 카필라(Kapila)의 사상이 불교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카필라성(城 바스투)은 사실상 ‘산키아학파의 요람’을 의미하며, 여기서 불타가 탄생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교의 기본 가르침을 살펴보기에 앞서 산키아학파의 교리를 일견(一見)해 볼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불교신앙이 꽃을 피운 후부터 지금까지 카필라성은 많은 불교인들이 순례하는 성지(聖地)가 되었다. 당(唐)의 현장법사도 7세기 초반 카필라성의 유적을 답사하고 귀국하여 중국에 외부세계의 현실을 부정하는 관념론(觀念論, idealism)을 도입하였다.

인도 육파철학(六派哲學)의 하나인 산키아(Sankhya, 혹은 상캬로도 발음함)는 산스크리트어로 ‘수(數)’ 혹은 ‘숙고(熟考)’를 의미하며, ‘수론(數論)’으로 번역된다. 가르브(Garbe, 프랑스 불교학자)에 의하면, 바라문 승려들이 카필라의 교리가 지나치게 세분(細分)된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것을 비꼬기 위하여 ‘수(數)의 철학’이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이것이 그만 이름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산키아는 2원론이다. 우주에는 태초에서부터, 복합물질인 프라크리티(Prakriti)와 무수한 수의 개별적이고 비물질적인 영혼인 푸루샤(Purusha)가 있다고 믿는다. 프라크리티는 3가지 요소(guna)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첫번째 요소는 사트바(sattva)로서 객체속에서는 가볍고 빛나는 것이 되고, 주체속에서는 안락과 행복이 된다. 두번째 요소는 라자(raja)로서 객체에서는 강하고 활동적인 것이 되고, 주체에서는 열정과 공격성이 된다. 세번째 요소는 타마(tama)인데 객체에서는 어둡고 무거운 것이 되고, 주체에서는 무관심과 꿈이 된다.

첫번째 요소는 신(神)들의 세계를 지배하고, 두번째 요소는 인간세계를 지배하며 세번째 요소는 동식물과 광물의 세계를 지배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사물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이나 고통은 그 사물속에 잠재해 있다는 것이다. 꽃을 볼 때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꽃에 내재해 있는 것을 우리가 느끼기 때문이다. 다양한 색깔들의 원인도 이 요소들에 기인한다. 사트바가 강하면 노란색이나 흰색이 되고, 라자가 강하면 붉은색이나 푸른색이 되며, 타마가 강하면 회색이나 검은색이 된다.

푸루샤(개별적 영)들은 물질과 결합하여 생물(生物)이 된다. 각각의 사물은 물질적 육체와 아주 섬세한 재료로 구성된 심리적이고 영적인 육체로 나뉠 수 있다고 믿는다.

푸루샤는 옮겨 다니기 위해 몸이 필요하며, 영혼은 있으나 몸이 불편한 지체부자유자에 비유된다. 프라크리티는 영혼이 없이는 보고 느낄 수 없으며, 몸은 있으나 볼 수 없는 장님에 비유된다. 물질적 육체는 인간의 죽음과 함께 소멸하지만, 심리적 육체는 소멸하지 않고 영혼과 함께 윤회한다.

이 섬세한 심리적 육체는 산스크리트어로 링가(linga)라고 불리며, 마누스(manus, 중심기관), 분별지(分別知), 개성(個性)의 원리(즉, ‘나는 말한다, 나는 강하다, 나는 만진다, 나는 죽는다’ 등 ‘나’라고 생각케 하는 환상) 등 13개의 기관으로 구성된다. 산키아학파의 학자들은 동시적(同時的)인 지각(知覺)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모든 지각은 무한소(無限小)의 지속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동시에 보고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색깔과 소리의 지각은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비물질적인 영혼은 사건의 행위자가 아니라 관객이며 목격자이다. 영적 육체가 이것을 깨달을 때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깨어진다. 영혼과 두 육체(물질적 육체와 심리적 육체)는 상호 분리된다. 심리적 육체는 첫번째 요소인 사트바의 도움과 수도(修道)를 통하여 이 확신에 이르른다. 몸으로부터 해방된 영혼은 절대적인 무의식의 경지에 도달한다. 경전에서는 이 상태를 영상이 비치지 않는 빈 거울에 비유한다. 이 무의식은 단순히 의식의 상실이나 배제가 아니다. 영혼은 이전에 생활이나 꿈의 목격자였던 것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깊은 꿈의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본질적으로는 우리 생의 배우가 아니라 관객이라는 논리를 환기시키기 위해 산키아학자들은 아름다운 비유를 든다. 무용이나 연극공연을 보러가면 우리들은 흔히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같은 착각을 한다. 우리들이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한사람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또 그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컨디션을 함께 한다. 이 친밀한 동거(同居)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곧 그 사람이라고 믿는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 프랑스의 대문호(大文豪) 빅토르 위고는 이와 유사하게 자신의 자서전 제목을 <그의 생의 목격자가 이야기하는 빅토르 위고>라고 붙였다.

인도의 여타 철학체계처럼, 산키아학파도 무신론(無神論)이다. 그러나 바라문 승려들은 이것을 가지고 산키아학파의 정통성을 문제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인도사람들 사이에서 정통성은 인격신에 대한 믿음의 유무에 의해 결정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인도의 옛 기도(祈禱)와 의식(儀式)과 송가(訟歌)를 모은 베다(Veda) 경전을 숭배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뿐 아니라, 산키아학파의 무신론은 그리 공격적인 것이 아니다. 전지전능한 유일신(有一神)은 부정하지만, 민간신앙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들은 인정하였다. 가르브(Garbe)는 산키아 경전의 한 귀절을 인용한다.

“신(神)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신은 자비신으로 세상을 창조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세상은 고해(苦海)이기 때문이다. 고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락탄치오(Lactancio)도 에피쿠로스(Epicuro)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만일 신이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면서도 실행하지 않았다면, 그는 무능(無能)한 존재이다. 만일 할 수 있는데도 원치 않는다면, 그는 사악한 존재다. 만일 원치도 않고 행할 수도 없다면, 그는 사악하고도 무능한 존재다. 만일 원하기도 하고 할 수도 있다면, 이 세상에 가득찬 악의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9>불교에 영향을 미친 사상(2)-베단타학파(상)

 

- 베다경전 뿌리둔 범아일여 사상 -

- 우주본체와 개인 합일통해 해탈 -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이 그렇듯이, 불교도 베다의 사상에 그 연원을 두고있다. 베다라는 말은 ‘지혜’를 뜻하며, 오랜 옛날부터 구전(口傳)되어 오다가 문자로 기록된 방대한 양의 경전들을 포함한다. 코란은 계시를 기록한 책이며, 성경은 여러차례의 협의과정(結集)에 의하여 공인받은 책들만 묶은 것인데 비해, 인도에서 베다의 신성(神聖)함은 유사(有史) 이전부터 확립되어 온 것이다.

베다는 찬가(讚歌), 기도, 주구(呪句), 연도(連禱), 주석, 명상, 제사, 가영(歌詠) 등을 집대성하고 있다. 그것은 신성(神性)의 작품으로, 하나의 세계가 소진될 때마다 브라만신(神)에게 계시된다. 브라만은 영원한 베다의 언어를 통하여 세계를 창조한다. 따라서 재창조되는 새로운 세계에서 실재로 ‘바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바위’라는 베다의 말이 필요하다.

인도 육파철학(六派哲學)에서 가장 중요한 학파인 베단타는 베다 경전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 베단타는 ‘베다의 말미(末尾)’ 또는 ‘베다의 심오한 경지’를 뜻한다. 베다의 마지막 부분인 이 베단타는 ‘우파니샤드(奧義書)’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름을 딴 베단타학파는 우파니샤드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여 체계적인 해석을 하였다.

베단타는 종교적으로도 범신론(汎神論)적 다신교이며, 사상적으로는 일원론(一元論)이다. 사상적인 면에서 베단타는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스피노자(Spinoza) 그리고 쇼펜하우어(Schopenhauer)의 철학에 가깝다. 베단타 이론에 따르면 세상에는 하나의 실재(實在)만 존재하는데, 그것이 객관적으로 인식되면 브라만(梵)이 되고 주관적으로 인식되면 아트만(我)이 된다. 그 실재는 비인격적이며 유일한 존재이다. 이 세계에도, 신에게도 복수성(複數性)은 존재치 않는다. 파르메니데스도 이 세계에는 다양성이 존재치 않는다고 말했다. 엘레아학파의 제논(Zenon)도 시간과 공간이 변화한다는 개념이 내부에서 모순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역설을 만들어 냈었다. 상카라(Sankara, 8세기 베단타철학자)는 단지 하나의 사고주체(브라만)이 존재하고 그 본질은 영원한 현재라고 믿었다.

브라만은 주기적으로 우주를 파괴하고 재창조한다. 그러나 이 파괴와 창조는 본질적으로 마술적이며 환각적인 작용이다. 베다에 이미 기록되길, 신은 마야(Maya, 幻)의 마력을 빌어 외부세계를 창조하는 마법사라고 한다. 우주의 주기적인 창조와 파괴를 설명하기 위해 2가지 이유가 제시되었다. 한편으로 이 창조와 파괴의 주기성은 들숨과 날숨처럼 자연스러운 일로 이해되고, 다른 한편 그것은 한가한 신성의 끝없는 장난으로 여겨진다. 헤라클리토스도 “시간은 주사위를 던지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러나 그 아이는 무서운 힘을 행사한다”고 말했다. 또한 17세기 독일의 신비주의자 안젤루스 실레시우스(Angelus Silesius)는 “이 모든 것은 신성의 장난이다”고 했다.

세상의 거짓된 본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상카라는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한 사람의 어리석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뱀으로 보이는 것이 실재로는 새끼줄이다. 그러나 그것이 뱀이든 새끼줄이든 실제로는 신(神)의 겉모습에 불과하다. 우리는 무지(無知) 때문에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고, 세계를 실재(實在)로 착각한다. 세계는 무지와 환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모두 본질의 겉면에 불과할 뿐이라고 상카라는 말한다. 마야(幻)는 존재하지 않는다. 열과 빛이 불의 속성인 것처럼, 마야는 신의 속성일 뿐이다. 신의 정확한 모습을 파악한다면, 환상 따위는 믿지 않게 될 것이다. 우주는 거대한 환영(幻影)이며, 육체, 자아, 창조주로서의 신의 개념 등은 그 환영의 부분적인 모습일 뿐이다.

사물의 비실재성을 강조하는 베단타철학은 결국 아트만(我)이 브라만(梵)을 철저히 인식하여 그와 합일함으로써 해탈에 이른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를 가르친다. 베단타의 궁극적 가르침은 ‘네가 바로 브라만이다’로 귀결된다. 이것을 알게 되면, 인간은 비록 몸을 가지고 세상속에서 살지만 그것이 환영이란 것을 잊지 않는다. 신은 복된 자이며, 해방된 영혼 역시 그러하다. 이런 교설(敎說)들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베단타의 가르침은 ‘네가 그것이다(Tat twam asi)’와 ‘나는 브라만이다(Aham brdhmdsmi)’라는 유명한 두마디로 요약된다. 둘다 대우주의 본체(梵)와 개인의 본질(我)이 일체라는 것을 확인한다. 또한 이 말들은 세계를 만들었다가 부수는 영원한 본질이 우리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인류 전체가 파멸되어도 한 사람만 살아 남는다면, 우주는 그로 인해 다시 복원될 것이다.

베단타의 다른 철학자들이 말하길, 인간의 근본적인 잘못은 자신과 육체를 동일시하여 감각적인 쾌락을 좇는 것이라고 한다. 그 욕망이 영혼을 세계에 얽어매게 되고, 이로서 계속 윤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베다가 알려주는 인간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곧 해탈의 길이다. 우리들은 창조주를 사랑해야지, 피조물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10>불교에 영향을 미친 사상(3)-베단타학파(하)

 

- 불교에 영향을 미친 사상③-베단타학파<下>

-“우리 모두 동일한 존재다” 주장-

- 탈 근대주의 사상가에 자아탐구 방법제시-

베단타학파의 라마누자(Ramanuja)는 해방된 영혼은 죽음 뒤에 순수의식으로 남는다고 주장했다. 또다른 이들은 이슬방울이 바다물에 합류하듯 개인의 영혼은 신성(神性)에 흡수된다고 말한다. 에드윈 아놀드 경(Sir Edwin Arnold)은 자신의 시(詩) ‘아시아의 빛’ 끝 귀절을 ‘이슬방울은 빛나는 바다속에 소멸한다’고 썼다.

베단타 경전에 이런 말이 있다. ‘꿈꾸는 사람이 자신의 여러 모습을 꿈꾸지만 실제로는 결코 스스로를 벗어나는 일이 없는 것처럼, 혹은 마법사가 허황되게 변신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스스로는 항상 마법사인 것처럼, 그렇게 세계는 브라만에서 나오지만 브라만 자신의 본질이 변화하는 법은 없다.’ 13세기 페르시아의 범신론자 할랄 우딘 루미(Jalal-Uddin Rumi)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그물을 던지는 자요 낚이는 고기이며, 거울이면서 비치는 영상이며, 함성이며 메아리이다.” 쇼펜하우어도 비슷한 글을 썼다. “고문하는 자와 고문받는 자는 동일인이다. 고문하는 자는 자기가 고통과는 상관없다고 믿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고문받는 자는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믿지만 그것 역시 착각이다.” 에머슨의 시 ‘브라만’은 이렇게 시작한다.

“만일 붉은 암살자가 죽인다고 생각하고

피살자는 암살 당했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모르고 있다.

내가 때로는 이 길을 때로는 저 길을

걷는다는 것을”

또 뒤에 가서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서 벗어나려는 자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들이 내게서 벗어나 날려고 할때

그 날개가 바로 나다.

나는 의심하는 자이며 그 의심이다.

나는 브라만이 부르는 노래이다.”

보들레드도 “나는 때리는 손이며 맞는 뺨이다”고 말했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아르주나는 전쟁에 직면한 절박한 순간에 적군들이 모두 친척임을 상기하며 활을 놓고 땅에 털석 주저앉는다. 그는 양편 군대속에서 “스승과 부친과 아들과 손자들 그리고 그외 친척들”을 보고 칼을 거둘 결심을 한다. 그때 마부로 화신하여 아르주나의 마차를 몰던 크리슈나신이 아르주나에게 현신하여 전쟁이란 한갓 환영이란 것을 일깨운다. “산자를 위해서도 죽은자를 위해서도, 지혜로운 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는 없었다. 너도 그랬고, 저 왕자들도 그랬다.

앞으로도 우리 모두가 존재하지 않을 때는 없을 것이다…이 사람은 저 사람을 죽이고 저 사람은 이 사람에 의해 죽는다고 생각하는 자는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다.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고 어느 누구도 죽지 않는다. 육신의 소유주가 소년, 청년, 노년기를 거쳐가듯이 죽은 후에도 다른 육신을 얻게 될 것이다. 현명한 자는 육신의 죽음에 미혹되지 않는다. 칼도 그를 죽일 수 없고, 불도 그를 태울 수 없으며, 물도 그를 적실 수 없으며, 바람도 그를 말릴 수 없다.” 크리슈나는 더불어 이렇게 덧붙인다. “전쟁터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크리슈나의 이런 말은 플로티누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상기시킨다. “이번 연극에서 죽는 배우는 다음 연극에서 역할을 바꿔 다시 출연한다. 연극에서 죽는 것은 진짜 죽은 것이 아니다. 죽음은 마치 연극배우들이 역할을 바꾸는 것처럼 몸을 바꾸는 것이다.”

인도 육파철학 중 산키야학파와 베단타학파를 소개한 보르헤스의 글은 특히 이 두 학파의 가르침의 핵심인 ‘자아(自我)의 아이덴티티(正體性)’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두 학파가 설파한 정체성의 문제에서 보르헤스가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적 주체(modern ego)의 문제는 데카르트에서 헤겔을 통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사상계에서 가장 핵심적 주제가 되어 왔다. 보르헤스는 그의 작품을 통하여 이 근대적 주체에 대한 회의를 표시했는데 그 모티브를 산키아학파와 베단타학파의 교설에서 빌어왔다.

예를 들어, 산키아학파는 배우로서의 자아와 관객으로서의 자아를 인식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우리는 배우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그 배우를 바라보는 관객으로서의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자각함으로써 보다 큰 대아(大我)와의 합일(合一)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그의 짧은 평론 <보르헤스와 나>에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명한 작가 ‘보르헤스’는 배우에 불과한 것이다. 번잡한 세상사는 (배우)보르헤스의 몫이다.

(배우)보르헤스에 관해서는 우편함을 통해 소식을 듣고, 문인 인명사전에서 그의 이름과 이력을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해서 보르헤스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진 유명작가 보르헤스는 ‘나’가 아니고 ‘그’이다. 반면 ‘나’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관객인) 존재이다. ‘나’는 끊임없이 ‘보르헤스’에게서 도망치지만 그는 끈질기게 ‘나’를 쫓아오고, 세상은 나를 ‘보르헤스’로 기억한다. 이렇게 내 생은 도망자의 생이었다. 그런데 보르헤스와 나 우리 둘 중 누가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편 깨달음의 세계를 통해 조망하는 브라만의 차원에서는 암살자와 피살자가 모두 동일인이라는 생각을 차용하여 보르헤스는 그외 단편소설 <신학자들>을 썼다. 이 소설에서 신학적 입장이 다른 두 신학자가 치열한 논쟁을 벌이다가 한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 화형(火刑)에 처하게 한다. 그러나 가해자의 입장에 있었던 신학자도 후일 죽게 되는데, 그는 사후(死後) 신성의 마음 속에서는 정통파와 이단자, 고발자와 희생자, 증오하는 자와 증오받는 자 모두 동일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이런 생각들이 조금 더 발전하면 필연적으로 무아(無我)에 이른다.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비판과 반성은 근대적 주체에 대한 검토로 초점이 모아지고 많은 탈(脫)근대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불교의 무아사상이다. 그리고 서구에서 이점을 누구보다 먼저 지적한 것이 보르헤스이다. ‘탈근대의 창시자’라는 보르헤스의 별명은 이런 연유로 붙여진 것이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11>윤회

- 붓다 윤회 벗어나는 해탈의길 제시 -

- 인도인 ·서양지성들 영혼환생 믿어 -

오늘날의 불교는 거대한 종교가 되어 방대한 경전과 주석 그리고 복잡한 이론을 구축한 학파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원래 붓다의 가르침은 해탈에 이르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는 매우 단순하고 실천적인 것이었다. 붓다는 추상적 토론의 무용(無用)함을 비유하기를, 인간이 화살을 몸에 맞았는데도, 그것을 뽑을 생각은 않고 그 상처의 원인만 따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붓다는 현학적인 토론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화살 뽑는 시급한 일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불렀다.

또한 붓다는 우주가 유한한지 무한한지, 창조되었는지 아닌지 등을 물어오는 사람에게 대답대신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지는 비유를 들었다. 우주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의 한 부분만을 만지고서 거대한 코끼리를 정의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유대교(구약)를 전제로 하듯이, 붓다의 가르침도 힌두교(베다)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 힌두교는 윤회에 대한 믿음을 중요시한다. 현대인들에겐 다소 환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윤회설은 사실 알고 보면 굉장히 광범위한 지역의 부족들 사이에서 인정되어온 것이다.

그리스에서 윤회설을 주창한 사람은 피타고라스였다. 디오게네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자기의 전생(前生)을 기억해 내는 능력을 헤르메스(그리스 신화에서의 언어의 창조신. 제우스의 아들로 신과 인간사이의 통역을 맡음)로 부터 받았노라고 말했다 한다. 그는 자신이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헤르모티모였다고 말하며, 어느 신전에서 당시 전쟁에서 헤르모티모가 사용했던 방패를 찾아냈다. 고대 그리스 종교의 하나였던 오르페우스교(敎)에선,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가르쳤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그의 <단편>에서, “나는 남자도 되어 보았고, 여자도 되어 보았다. 나는 나무였고, 새였으며, 물속에서 고기로도 살아 보았다”고 기록했다. 특히 그는 물속에서 육지를 보고 매우 동경했으며, 육지에서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공화국> 제10권에서 어느 상처받은 병사가 천국과 지옥을 순례하면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오르페우스의 영혼과 만났는데, 그 시(詩)와 음악의 신은 백조의 몸을 빌어 환생해 있었다 한다.

트로이 전쟁을 지휘했던 아르고스의 왕 아가메논은 독수리로 환생했고, 율리시즈는 평범한 무명씨(無名氏)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플라톤은 윤회의 주기를 천년으로 추정했는데, 이것은 브라만신의 잠자는 시간인 일겁(一劫)의 천이백만년에 비하면 매우 소박한 스케일에 지나지 않는다. 3세기경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플로티누스는 “윤회하는 생들은 순차적인 꿈과 같은 것이다. 혹은 침대를 옮겨 다니면서 자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시저는 영국과 프랑스 북부지방에서 살았던 고대(古代) 켈트족의 사제계급인 드루이다족의 연구에 몰두했는데, 이들은 영혼의 불멸과 윤회 전생(轉生)을 믿었다. 다음의 6세기경의 영국 시는 그 사상의 편린을 보여준다.

나는 칼날이었다

나는 강의 물방울이었다

나는 빛나는 별이었다

나는 책의 글자였다

나는 최초의 책이었다

나는 등불의 빛이었다

나는 물 위의 다리였다

나는 독수리처럼 여행하였다

나는 하프의 줄이었다

나는 마법에 걸려 일년동안 물거품속에 갇혀 있었다

유대신비주의 카발라에서는 윤회를 ‘길굴(Gilgul, 回歸)’과 ‘이부르(Ibbur, 回生)’로 구분한다. 길굴에 대해서 이삭 루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피를 흘리고 죽은 사람의 영혼은 물속으로 들어가서 이리저리 떠돌아 다닌다. 폭포를 만나면 그 고통은 극에 달한다” 이부르는, 조상이나 스승의 영혼이 후손의 영혼에 스며들어가 그를 훈련시키고 기를 불어 넣는 것을 가리킨다.

인도인들은 윤회를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로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마누법전에 이런 말이 있다. “승려를 살해한 사람은 그 상황에 따라 개, 돼지, 말, 낙타, 소, 염소, 양, 들짐승, 새 혹은 풀카자(카스트 계급의 최하위 천민)로 태어난다” 또, “비단옷을 훔친 사람은 메추리로, 아마포(亞痲布)를 훔친 사람은 개구리로, 무명옷을 훔친 사람은 백로로 태어난다. 향수를 훔친 사람은 새앙쥐로 태어나고 박하를 훔친 사람은 칠면조로, 익힌 곡식을 훔친 사람은 고슴도치로, 날곡식을 훔친 사람은 돼지로, 소를 훔친 사람은 악어로 태어난다. 불을 훔친 사람은 거위로, 집기를 훔친 사람은 꿀벌로, 붉은 옷을 훔친 사람은 붉은 꿩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인간의 영혼이 다른 인간이나 동물 혹은 식물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생각은 서구의 많은 지성인들에게 호기심과 함께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볼테르는 윤회설에 대해 식이요법적인 가설을 세웠다. 브라만계급의 지도자들은 더운 인도에서 육식을 하는 것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사람들이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인간이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아랍지방에서도 식중독과 기생충으로 인한 병을 방지하기 위해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다. 볼테르는 소에 대한 숭배도, 인도에서는 고기보다 우유가 훨씬 더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12>윤회

- 해탈하면 윤회의 수레바퀴 멈춰 -

- 서구학자들 일회성 창조설 부정 -

데이비드 흄은 윤회설이야말로 철학이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영혼이 미래에서도 불멸한다는 교설은 동일한 논리로 영혼이 과거에서도 존재해 왔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의지’이며, 세계의 모든 사물의 모습은 그 의지의 표상이라고 보았다. 그는 영원하고 편재(遍在)하는 그 존재가 지속적으로 세상에 나타난다고 신화화된 이론이 윤회설이라고 보았다.

인도의 윤회설은 우주의 창조와 파괴가 끝없이 계속된다고 하는 우주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주가 반복해서 창조되고 파괴된다는 이론은 무엇보다도 우주의 절대적이고 일회(一回)적인 창조설을 부정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 이 사실에 접한 서구의 학자들은 혼돈스러워서 매우 당황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약의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천지창조설을 정면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창조에서 파괴로 이어지는 한 주기는 일겁년(Kalpa)동안 지속된다. 거의 무한한 시간인 겁의 단위를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인도의 경전들은 흔히 다음의 비유를 든다.

여기 3만미터의 바위산이 있다. 백년에 한번 베나레스에서 짠 부드러운 비단천으로 그 바위산을 스친다. 이렇게하여 바위산이 완전히 닳아 없어지기 전에는 일겁의 시간이 다 흐르지 않는다. 글쎄 최근의 천문학에서 사용하는 아찔한 단위도 이 정도에 이르지는 않는 것 같다.

서구인들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장구한 시간단위에 인도인들의 정신은 익숙해져 있다. 기원후 2세기 프랑스 리용의 주교였던 유명한 신학자 이레네오(Lreneo)는 창세기의 6일간에서 힌트를 얻어 우주의 역사가 6천년간 지속될 것이라고 계산했다. 말세론(末世論)은 인도인들에겐 우스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브라만신의 세계에도 밤과 낮 그리고 해(年)가 있다. 그러나 브라만신의 하루는 인간세의 43억2천년에 해당한다. 겁(劫)의 세월들이 모여 다시 네개의 주기를 만드는데 첫번째가 황금의 시대(Krita-Yuga)로 4,000신년(神年)동안 지속되고, 두번째는 은(銀)의 시대(Treta-Yuga)로 3,000신년(神年)을, 세번째로 동(銅)의 시대(Duapara-Yuga)로 2,000년을, 네번째는 철(鐵)의 시대(Kali-Yuga)로 1,000신년동안 지속된다고 한다. 이런 복잡하고 거대한 연대학(年代學)은 대략 리그베다 시대(기원전 10-12세기)와 마하바라타 시대(기원전 4-2세기) 사이에 만들어졌다. 인도의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에는 전사(戰士), 마술사, 문법학자로 등장하는 유명한 원숭이왕(王) 하누만(Hanuman)이 복잡한 연대학을 정리하여 체계를 세우는 장면이 나온다.

위에서 말한 네개의 시대에서 각각의 시대마다 인간의 수명, 키, 윤리가 다르다. 뒤로 갈수록 수명이 줄어든다. 황금의 시대에선 모든 인간들이 신처럼 오래 살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맨 마지막 철의 시대다. 브라만 신도 영생(永生)하지 않고 수명이 있다. 그는 36,000겁을 산다. 그가 죽으면 다른 브라만신이 태어나 다시 끝없는 창조와 파괴의 놀이를 계속한다.

새로 태어난 브라만신은 먼저 자신의 궁전을 짓는다. 거대한 궁전은 그러나 비어 있어서 쓸쓸하다. 브라만신은 다른 신들을 창조한다. 그뒤 메루산, 대지, 인간과 지옥을 창조한다.

불교에서 겁(劫)은 부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해서 전후 두시대로 나뉜다. 공겁(空劫)시대에는 부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 불겁(佛劫)시대에는 연꽃이 피어 보리수아래에서 정각을 얻을 성자의 탄생을 알린다.

만일 이생에서의 탄생이 전생의 업보라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수많은 전생을 전전하며 오늘까지 살아왔지만 해탈을 얻어 열반(Nirvana)에 들기만 하면 미래에 전전해야 할 수 많은 삶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한다. 시작도 끝도 없는 삶의 수레바퀴 속에서 인간은 허망한 부침(浮沈)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전생(前生)의 행위가 이 생을 결정하고, 이 생의 행위가 내생(來生)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다음 생을 결정하는 행위를 인도 철학자들은 업(業, Karma)이라고 정의했다.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만들다’ 혹은 ‘창조하다’를 의미하는 ‘크리(Kri)’에서 파생되었다. 업은 우리가 끊임없이 짜나가는 천(織物)과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의 모든 행위, 말, 생각 그리고 어쩌면 꿈까지도 사후(死後) 그의 다음 생을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가 받을 몸과 운명은 모두 전생의 업에 달린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지니고 있으면, 그것이 씨가 되어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한다.

라드하크리슈난은 업을 ‘윤리유지법(倫理維持法)’이라고 정의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윤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한편 매 우주의 주기마다 그 우주의 산, 강, 대지, 바다, 숲의 모양을 결정하는 것은 전(前) 우주 때의 인간의 행위라고 한다. 과일나무에서 열매가 맺고, 땅에서 곡식이 자라는 것은 모두 인간의 공덕(功德)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리(地理)는 윤리의 투영(投影)이 된다.

업의 작용은 비인격적이다. 상과 벌을 판별하는 판관신(判官神)은 존재치 않는다. 모든 행위는 상이나 벌의 씨앗을 안고 있다. 그 결과가 행위 후 즉각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그것을 피할 도리는 없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13>윤회

- 영혼실체 부정…윤회의 주체 ‘業’-

- 부처님 현생의 바른생활·안심 가르쳐-

크리스마스 험프리는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가 죄인에게 그 죄를 묻는 것이 아니다. 그 죄 자체가 그를 벌하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란 있을 수 없고, 또 누구도 대신 벌 받을 수 없다”

업은 동사가 아니고 명사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주어가 되지 따로 그 행위와 주체를 필요치 않는다. 업의 본질은 행위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고통스럽거나 행복한 다른 행위로만 나타나는 것이다. 업은 우주의 법칙이지만 그 법을 제정한 입법자(立法者)나 그 법에 따라 심판할 재판관은 존재치 않는다. 업의 작용에는 인정사정이 없다. 담마파다 경전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늘에도, 바다 속에도, 깊은 골짜기에도 인간이 자신이 저지른 악행으로부터 벗어날 공간은 없다”

업에 대한 믿음은 불행에 대해 체념하고 참고 견디게 만든다. 파울 도이센은 인도 자이푸르에서 만난 어느 장님 거지에게 어쩌다 시력을 잃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장님은 “전생에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이지요”하고 대답했다. 그저 받는 고통이나 그저 얻는 행복은 없다는 것이다. 인도인들은 자선을 허식이거나 공연한 짓으로 본다. 고통받는 사람은 그 고통으로 인해 오히려 전생의 죄를 보상받기 때문이다. 그 고통을 덜어 주려고 도와주는 것은 빚을 갚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그래서 간디는 보호소나 병원 짓는 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인도에서 윤회에 대한 믿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그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끊이지 않은 기독교 사회와 분명히 대조된다. 한편 조용히 수도하는 것 외에 거의 모든 선업(善業)은 이웃을 도와주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만일 자선이 무의미하다면, 대체 어떤 것이 선업이 될 수 있을까.

업은 보편적인 법칙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로 업보(業報)를 뜻하기도 한다. 사람은 현세(現世)에서 행하는 악행과 선행에 따라 내세(來世)의 몸과 환경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불교신자는 윤회와 업이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어쩌면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윤회에 대해선 대개 수긍하지만 대부분 업이라는 개념에 대해선 생소해 하고 고개를 갸우뚱 한다. 플라톤이나 피타고라스가 보는 윤회의 논리는 불멸하는 순수 영혼을 먼저 상정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영혼이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옮겨 다닌다는 것이다. 반면에 불교는 자아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생(轉生)과 윤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업의 개념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개인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다는 복잡한 업의 논리에 바탕을 둔 윤회관은 한 사람의 영혼이 육체를 바꾸어 간다는 단순한 윤회관보다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의 불교학자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도, 교리와 현실(민간신앙)사이의 괴리현상의 대표적인 예가 무아설과 윤회설 사이의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불교는 무아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영혼과 같은 실체적 존재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윤회는 무엇인가 실체적인 영혼같은 존재가 업을 짊어진 채 한 생(生), 또 한생, 그 거주처를 바꿔가는 것이다. 즉 윤회에는 마땅히 그 주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불교는 윤회설을 수용했는데, 그렇다면 무아설과 윤회의 주체와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 것인가.

석존에게는 이 문제가 별로 심각하게 인식되고 있지 않다. 석존은 어디까지나 현생에서의 바른 생활방식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안심(安心)을 가르친 사람이다. 한편, 석존은 무아(an-atman)설을 가르쳤지만 당시 힌두교 철학자들이 벌이고 있던 아트만(我) 논쟁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즉, 석존의 무아설은 형이상학적으로 아트만의 존재 여부를 검토하여, 그 존재를 부정했다는 의미의 무아설이 아니었다.

정말로 아트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존속하고 또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어야 할텐데 사실상 진정한 아트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무아설이 석존의 무아설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아집도 없애고 산다는 실천적인 의미에서의 무아설이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불교는 윤회를 실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와 무아설과는 특별히 모순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석존의 입멸 후 약 백여년이 지나 부파불교의 시대로 접어들면 무아설은 그대로 무영혼설로 통용되어 곧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변해간다. 그와함께 불교도 사이에서 물리적 의미로 수용된 윤회관은 마땅히 업을 짊어지고 윤회하는 주체를 묻게 되고, 따라서 그것과 무아설과의 관계도 역시 의문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상 이것은 힌두교 계통의 철학자들과 벌인 토론에서 비판을 받은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대 인도의 불교지도자들은 무아설과 윤회의 주체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도 불교 교리발달사의 커다란 주제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에 대한 연구는 결국에 가서 유식학파의 아뢰야식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교리적인 입장에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가 표방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상주하는 실체로서의 영혼을 인정하지 않지만, 인격적 주체로서의 업을 유지하고 있는 영혼은 3세를 통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즉, 그것은 불생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윤회의 주체로서 업이나 경험에 따라서 계속 변화해 가면서 이어지는 유위법(有爲法)인 것이다. 유식(唯識), 법상(法相) 학설에서 말하는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이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타의 세계 PP·434~435>

편역:김홍근 <외대강사 ·문학평론가 >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14>윤회

- 불교 궁극지향 열반 …업사상은 방편-

- 개인사물 생멸하나 윤회주체는 일정-

윤회의 문제는 동시에 개인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의 문제와 연결된다. <순수의 길(Visuddhimagga)>이란 책에 이런 말이 있다. “난 어디에서도 누구를 위한 무엇이 되어 본 일이 없고, 어느 누구도 나를 위한 무엇이 된적이 없다.” 석존과 동시대인이었던 헤라클리토스도 비슷한 의미의 이런 말을 했다. “어느 누구도 동일한 강물에 몸을 두번 적실 수 없다.” 또 플루타르크는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 안에서 죽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 속에서 죽는다”고 말했다. <순수의 길>에 이런 말도 나온다. “미래에 살 인간은 과거에서 살지 않았고 현재 살지도 않는다. 현재 사는 사람은 과거에 살지 않았고, 미래에 살지도 않을 것이다.”헤라클리토스가 말한 인간의 무상성(無常性)을 피타고라스 학파의 에피카르무스는 그의 희곡에서 이렇게 풍자했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쓴 사람이 어느날 친구를 만나자, 인간은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자기는 이제 그때 돈을 빌린 그 사람이 아니라고 우겼다. 친구는 그 변명을 받아들이고 대신 저녁식사에 그를 초대했다. 그가 만찬장에 도착했을 때, 하인들이 그를 도로 내쫓았다. 친구는 이미 그를 초대했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원전 2세기경 서북인도를 지배한 그리스왕 메난드로스(인도명 미린다)와 불교 경전에 정통한 학승 나가세나(那先) 사이에 오고 간 대론서 <미린다 팡하(미린다 王問經)>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개인은 영속하지 않지만 윤회하는 주체는 일정하다는 것이다. 왕이 묻는다. “윤회가 사실이라면, 다시 태어난 자와 죽어 없어진 자는 동일합니까. 혹은 다릅니까?” 나가세나 존자가 대답한다.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습니다” “비유를 들어 주십시요” “대왕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릴 때의 그대와 지금의 그대는 같습니까?” “아닙니다. 어릴 적 나와 지금의 나는 다릅니다.” “만일 그대가 그 어린애가 아니라면 그대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또 선생도 없었다는 것이 됩니다. 죄를 지은 자와 그 죄로 손발이 잘린 자가 다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 주십시요.” “여기 어떤 사람이 등불을 켠다고 합시다. 그 등불은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대왕이여, 초저녁에 타는 불꽃과 밤중에 타는 불꽃이 같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초저녁의 불꽃과 밤중의 불꽃이 각각 다릅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불꽃은 똑같은 등불에서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대왕이여, 인간이나 사물의 연속은 꼭 이와 같이 지속됩니다. 생겨나는 것(生)과 없어지는 것(滅)은 별개의 것으로 보이지만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존재는 동일하지도 않고 상이(相異)하지도 않으면서, 최종 단계의 의식으로 포섭되는 것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두 현자(賢者)는 여러 날에 걸쳐 대화를 이어나갔으며, 마침내 그리스의 왕은 불교에 귀의하였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사후에 태어날 수 있는 조건이 여섯가지라고 말한다. 이것은 육도윤회(六道輪廻)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1)천계도(天界道). 인도사회에서 상식화되어 있던 신화의 영향을 받아 대개 33천(天)이 있다고 한다. 살아 있을 때의 공덕에 의해 사후에 좋은 세계에 태어난다는 민간신앙적 요소의 영향을 받은 생천사상(生天思想)은 천계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불교문학에서는 천계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2)인간도(人間道).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그 어려움을 비유하기를, 심해(深海)에 사는 거북이가 백년에 한번 수면위로 고개를 내미는데 망망대해에 떠있는 나무조각과 우연히 머리를 부딪칠 확률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우리에게 일깨운다.

3)아수라도(阿修羅道). 아수라는 데바(神)의 적으로서 그리스 신화의 타이탄이나 스칸디나비아 신화의 거인(巨人)과 비슷하다. 전설에 의하면 아수라들은 브라만신의 서해부(사타구니)에서 태어나 땅밑에 그들의 왕국을 세우고 살고 있다고 한다. 아수라와 비슷한 존재로는 나가(naga, 龍神 혹은 蛇神)가 있는데, 나가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뱀으로서 지하궁전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4)축생도(畜生道). 동물에는 네가지 종(種)이 있다고 한다. 첫째 다리가 없는 것, 둘째 다리가 두개인 것, 셋째 다리가 네개인 것, 넷째 다리가 많은 것으로 나눈다. 붓다의 윤회전생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자타카(本生譚)에는 여러 동물의 몸으로 태어났던 붓다의 전생(前生)이야기가 등장한다.

5)아귀도(餓鬼道). 아귀의 원말은 프레타(Preta)인데, 이는 ‘가버린 사람(죽은 사람)’이란 뜻으로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고통받는 버림받은 영혼을 가리킨다. 아귀의 배는 산만큼이나 부풀어 있지만. 입은 바늘귀처럼 작아서 항상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다. 더럽고 피골이 상접해 있으며 검거나, 노랗거나 혹은 푸른 색을 띠고 있다. 그들은 인광(燐光)을 먹기도 하고 자기 살을 뜯어 먹기도 한다. 대개 공동묘지에서 배회하며 살고 있다.

6)지옥도(地獄道). 지옥은 대개 지하에 있지만, 바위 속이나 큰 접시안에 만들어 지기도 한다. 지옥의 중앙에는 염라대왕이 있는데, 그는 죄인에게 신(神)이 보낸 첫번째 전령(어린이)과 두번째 전령(노인), 세번째 전령(환자)과 네번째 전령(죄수) 그리고 다섯번째 전령(시체)를 보았느냐고 묻는다. 죄인은 그 전령들을 보았지만, 그들이 상징이고 경고였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염라대왕은 죄인을 열지옥(熱地獄)에 가둔다. 그곳은 네벽과 상하가 철판으로 둘러싸여 있고 네개의 문이 있는데 지면의 철판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고 한다. 수백년이 지나야 겨우 한쪽 문이 삐끗 열리는데, 그곳을 나서면 분뇨지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수백년 뒤에는 개(犬)의 지옥으로 옮겨진다.

불교의 궁극적 지향점은 정각(正覺)을 통해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신도는 이 세계에 다가가기가 어렵다. 그래서 불교는 차선(次善)의 방편으로 선업(善業)과 공덕쌓기를 강조하는 인도 민간신앙의 윤회와 업사상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편역:김홍근<외대강사 ·문학평론가>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15>윤회

- 윤회는 ‘시간·존재’본질 푸는 방편 -

- 시간은 환 선은 시공 넘나드는 정신체험 -

윤회라는 주제는 한편 인도인들의 시간관(詩間觀)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보르헤스도 윤회를 시간의 문제를 풀기 위해 인간이 찾아낸 한 방편으로 보고 있다.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죽음’이며, 죽음은 인간에게 ‘시간’의 문제로 다가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의 문제를 풀려고 노력했다. 한 철학자가 평생을 바쳐 각고의 사색과 연구 끝에 철학사에 남을 만한 위대한 학설을 정립했다 하더라도, 시간의 근본문제 해결에 얼마나 이바지했는가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보르헤스는 말하기를 많은 작가들이 생(生)이라는 수수께끼를 마주해 그것을 풀기 위하여 노력하면 결국 시간이란 문제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즉 인간의 모든 정신적 체험은 시간체험으로 환원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간과 세계의 근본을 생각하고 인식하는 학문을 흔히 형이상학(形以上學)이라고 한다. 베르그송이 형이상학의 핵심문제는 시간이라고 말했지만, 더 나아가 시간인식은 인간의 모든 정신적 체험의 핵심을 이룬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인간이 쳇바퀴처럼 흘러가는 일상(日常)에서 벗어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지금 여기’를 인식하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경험인가. ‘오늘’은 ‘오!-늘(常)’인 것이다. 그 경험은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기도 하고, 신성한 공포를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왜 내 이름이 갑돌이인지 새삼 되돌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때 모든 것은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와 진다. 흐르고 흘러도 또 새로운, 변하고 또 변해도 그대로인 시간과 함께 하는 것이다. 참선이란 어쩌면 시간을 거스르는 방법이며 선(禪)이란 시간체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 문명(文明)의 기본구조는 시간이란 불가사의한 문제를 푸는 방법론에 의하여 만들어 진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윤회도 넓게 보아 시간이 제기한 문제를 인간이 해결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볼 수 있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永遠)도 그 해결책 중의 하나이다. 종교도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문제를 풀기 위한 고심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의 해결책도 재미있다. 그는 시간의 문제를 인류가 발명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인 영원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이데아론(論)에 따라 먼저 영원한 존재를 상정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존재는 타존재들에게 자신을 투영시키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영원 속에서는 그것을 실현시킬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타존재들은 하나씩 하나씩 연속적으로 투영되는 사물만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 속에선 하나씩 하나씩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영원한 존재는 시간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플라톤은 시간을 영원의 움직이는 영상이라 불렀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암 블레이크는 “시간은 영원의 선물이다”고 했다. 만일 인간이 시간을 초월한 신이나 혹은 전 존재(全存在)를 딱 한번에 다 파악해야 한다면 압도당해 죽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대신 영원은 관대하게도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그 모든 경험을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겪을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따라서 시간은 영원이 인간에게 선사한 선물이 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시간의 문제와 정면으로 부닥친 사람이다. 그는 고백록 제11권에서 그의 영혼이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불타오른다고 했다. 그는 신의 날은 나날이 아니라 ‘오늘’뿐이라고 하면서 영원으로 통하는 시간인 현재를 강조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또 일어날 것이지만 모두 정확하게 각자의 ‘바로 지금’에서만 일어난다고 하였다.

시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색 중 특이한 것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 대신 미래에서 현재로 흘러들어 오는 시간을 발견한 점이다. 인간이 미래의 어느 시간을 의식하고 그것에 기초한 소망스런 미래상(未來像)을 그려낸다면, 그때부터 그 미래상은 현재를 의욕적이고 건설적인 창조의 시간으로 바꾼다는 점을 그는 지적했다. 미래의 성취에 대한 강한 확신은 커다란 인력(引力)이 되어 현재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고무하게 된다. 뿐만아니라 영원의 시간 속에 매몰되어 버린 화석(化石)같은 과거도 미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쏘이면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고난은 찬란한 미래를 위한 시금석(試金石)으로 변하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사색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게 하기도 하고, 혹은 고난의 오늘을 극복하는 힘을 주기도 한다. 또한 시간관(時間觀)은 문명이나 시대의 성격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 주기도 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도인들처럼 그리스인들도 윤회를 믿었다. 다시 말하면, 인도인들처럼 그리스인들도 시간을 원형(圓形)으로 본 것이다. 시간은 순환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기독교는 시간을 직선으로 본다. 시간은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까지 일회적(一回的)이고 직선적이며 유한(有限)하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 유한한 시간의 밖에 무한한 시간인 영원을 상정함으로써 유한한 시간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현대(現代)’라는 이 시대의 이름은 우리 현대인들의 의식 저변에 깔려있는 시간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 ‘현대’라는 말은 영어 모던(modern)의 번역어이다. 모던의 원래의 뜻은 ‘새로운’이었으며 영어의 뉴(new)와 동의어였다. 현대인인 우리들은 왜 자신을 ‘새로운 사람’으로 부르고 있을까? 바로 우리의 시간관이 ‘새로운 것이 좋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새로운 것은 곧 좋은 것을 의미한다. 이 시대에는 진보(進步), 선진(先進), 첨단(尖端), 진화(進化), 혁명(革命) 등의 직선논리가 각광을 받고 사회에 난무하고 있다.

과거엔 부끄러움이었던 불초(不肖, 아버지를 닮지 않음)가 새로움에 대한 숭배로 인해 미덕으로 대접받는 시대를 살며 맹목적으로 앞을 향해 질주하는 인간 군생들-현대인들에게 보르헤스는 불교를 인용하여 시간이란 환(幻)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편역:김홍근<외대강사 ·문학평론가>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16>윤회

- 윤회는 ‘시간·존재’본질 푸는 방편 -

- 시간은 환 선은 시공 넘나드는 정신체험 -

윤회라는 주제는 한편 인도인들의 시간관(詩間觀)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보르헤스도 윤회를 시간의 문제를 풀기 위해 인간이 찾아낸 한 방편으로 보고 있다.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죽음’이며, 죽음은 인간에게 ‘시간’의 문제로 다가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의 문제를 풀려고 노력했다. 한 철학자가 평생을 바쳐 각고의 사색과 연구 끝에 철학사에 남을 만한 위대한 학설을 정립했다 하더라도, 시간의 근본문제 해결에 얼마나 이바지했는가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보르헤스는 말하기를 많은 작가들이 생(生)이라는 수수께끼를 마주해 그것을 풀기 위하여 노력하면 결국 시간이란 문제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즉 인간의 모든 정신적 체험은 시간체험으로 환원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간과 세계의 근본을 생각하고 인식하는 학문을 흔히 형이상학(形以上學)이라고 한다. 베르그송이 형이상학의 핵심문제는 시간이라고 말했지만, 더 나아가 시간인식은 인간의 모든 정신적 체험의 핵심을 이룬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인간이 쳇바퀴처럼 흘러가는 일상(日常)에서 벗어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지금 여기’를 인식하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경험인가. ‘오늘’은 ‘오!-늘(常)’인 것이다. 그 경험은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기도 하고, 신성한 공포를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왜 내 이름이 갑돌이인지 새삼 되돌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때 모든 것은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와 진다. 흐르고 흘러도 또 새로운, 변하고 또 변해도 그대로인 시간과 함께 하는 것이다. 참선이란 어쩌면 시간을 거스르는 방법이며 선(禪)이란 시간체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 문명(文明)의 기본구조는 시간이란 불가사의한 문제를 푸는 방법론에 의하여 만들어 진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윤회도 넓게 보아 시간이 제기한 문제를 인간이 해결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볼 수 있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永遠)도 그 해결책 중의 하나이다. 종교도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문제를 풀기 위한 고심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의 해결책도 재미있다. 그는 시간의 문제를 인류가 발명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인 영원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이데아론(論)에 따라 먼저 영원한 존재를 상정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존재는 타존재들에게 자신을 투영시키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영원 속에서는 그것을 실현시킬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타존재들은 하나씩 하나씩 연속적으로 투영되는 사물만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 속에선 하나씩 하나씩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영원한 존재는 시간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플라톤은 시간을 영원의 움직이는 영상이라 불렀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암 블레이크는 “시간은 영원의 선물이다”고 했다. 만일 인간이 시간을 초월한 신이나 혹은 전 존재(全存在)를 딱 한번에 다 파악해야 한다면 압도당해 죽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대신 영원은 관대하게도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그 모든 경험을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겪을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따라서 시간은 영원이 인간에게 선사한 선물이 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시간의 문제와 정면으로 부닥친 사람이다. 그는 고백록 제11권에서 그의 영혼이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불타오른다고 했다. 그는 신의 날은 나날이 아니라 ‘오늘’뿐이라고 하면서 영원으로 통하는 시간인 현재를 강조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또 일어날 것이지만 모두 정확하게 각자의 ‘바로 지금’에서만 일어난다고 하였다.

시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색 중 특이한 것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 대신 미래에서 현재로 흘러들어 오는 시간을 발견한 점이다. 인간이 미래의 어느 시간을 의식하고 그것에 기초한 소망스런 미래상(未來像)을 그려낸다면, 그때부터 그 미래상은 현재를 의욕적이고 건설적인 창조의 시간으로 바꾼다는 점을 그는 지적했다. 미래의 성취에 대한 강한 확신은 커다란 인력(引力)이 되어 현재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고무하게 된다. 뿐만아니라 영원의 시간 속에 매몰되어 버린 화석(化石)같은 과거도 미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쏘이면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고난은 찬란한 미래를 위한 시금석(試金石)으로 변하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사색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게 하기도 하고, 혹은 고난의 오늘을 극복하는 힘을 주기도 한다. 또한 시간관(時間觀)은 문명이나 시대의 성격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 주기도 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도인들처럼 그리스인들도 윤회를 믿었다. 다시 말하면, 인도인들처럼 그리스인들도 시간을 원형(圓形)으로 본 것이다. 시간은 순환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기독교는 시간을 직선으로 본다. 시간은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까지 일회적(一回的)이고 직선적이며 유한(有限)하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 유한한 시간의 밖에 무한한 시간인 영원을 상정함으로써 유한한 시간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현대(現代)’라는 이 시대의 이름은 우리 현대인들의 의식 저변에 깔려있는 시간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 ‘현대’라는 말은 영어 모던(modern)의 번역어이다. 모던의 원래의 뜻은 ‘새로운’이었으며 영어의 뉴(new)와 동의어였다. 현대인인 우리들은 왜 자신을 ‘새로운 사람’으로 부르고 있을까? 바로 우리의 시간관이 ‘새로운 것이 좋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새로운 것은 곧 좋은 것을 의미한다. 이 시대에는 진보(進步), 선진(先進), 첨단(尖端), 진화(進化), 혁명(革命) 등의 직선논리가 각광을 받고 사회에 난무하고 있다.

과거엔 부끄러움이었던 불초(不肖, 아버지를 닮지 않음)가 새로움에 대한 숭배로 인해 미덕으로 대접받는 시대를 살며 맹목적으로 앞을 향해 질주하는 인간 군생들-현대인들에게 보르헤스는 불교를 인용하여 시간이란 환(幻)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편역:김홍근<외대강사 ·문학평론가>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17>불교의 우주관

- 고대불교 우주론 부처님 교설과 거리있다 -

- 공허한 논쟁보다 해탈위한 실천수행강조 -

불교는 힌두교의 우주관을 받아들여 우주는 같은 구조로 된 무한히 많은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우주가 유한하다고 긍정하는 것은 옳은 식견이 아니다. 우주가 무한하다고 보는 것 역시 옳지 못하다.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다고 하는 것 또한 옳은 의견이 아니다. 이러한 삼중부정(三重否定)은 아마도 우리에게, 현세(現世)에서의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시급한 문제에 집중하도록 독려하면서 공허하고 무익한 논쟁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

에반스-웬츠(W. Y Evans-Wentz)가 <티벳 사자(死者)의 서(書)> 서문에서 소개한 고대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각 세계의 배꼽(중앙)에는 ‘메루(Meru)’ 혹은 ‘수메루(Sumeru)’라고 불리는 산이 솟아 있다. 그 산은 머리부분을 잘라낸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다. 동쪽 사면(斜面)은 은으로, 남쪽 사면은 옥으로, 서쪽 사면은 루비로, 북쪽 사면은 금으로 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신(神)들의 도시와 선인(善人)들의 낙원이 있다. 맨 아래 층에는 지옥이 있다.

팔만사천 마일 높이의 메루산 위로 태양, 달, 성좌(聖座)가 돌고 있다. 메루산 주위에는 일곱개의 황금산이 차례로 메루산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고, 각각의 황금산 사이에는 일곱개의 바다가 동심원(同心圓)을 그리며 메루산을 에워싸고 있다. 따라서 세계 지도는 일곱개의 원이 그려져 있는 화살 과녁 모양이 된다. 바다의 깊이와 산맥의 높이는 중심에서 멀어져 갈수록 낮아진다. 마지막 산맥 외부에 위치한 바다가 인간이 접하는 바다이다. 이 바다에는 네개의 대륙과 무수한 수의 섬이 있다.

동쪽대륙은 반달형의 모양인데 그곳 주민들 역시 반달형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들은 성품이 차분하고 인자하다. 대륙의 색깔은 흰색이다. 남쪽 대륙엔 우리 인간들이 살고 있는데 대륙과 인간 얼굴의 모양이 모두 배(梨)를 닮았다. 이곳엔 선과 악, 부(富)와 유복(裕福)이 있고 청색을 띠었다. 서쪽 대륙은 둥글고 붉은 색이다. 주민들은 힘이 센데 소고기를 먹고 둥근 얼굴을 하고 있다. 북쪽 대륙은 사각형으로 녹색이다. 네 대륙중 여기가 가장 크며 주민들의 얼굴은 사각형이며 채식주의자들이다. 주민들의 영혼은 사후에 나무에 깃든다.

대륙마다 두개의 작은 위성대륙이 있다. 인간이 사는 대륙의 왼쪽에는 라크샤사(rakshasa)의 위성대륙이 있다. 그들은 인류의 적인 악마들인데 공동묘지에서 살면서 시체를 선동하고, 제사를 망치고, 착한 자를 괴롭히고, 인간을 잡아 먹는다. 얼굴이 못생긴 악마도 있고, 아름다운 악마도 있다. 어떤 것들은 외눈이나 외귀도 있다. 다리가 두개인 것, 세개인 것, 네개인 것도 있다. 고대 서사시에는 그들의 별명이 자주 등장한다. 살인자, 악한, 공물도적, 어둠의 거인, 몽유환자, 식인종, 육식동물, 흡혈귀, 걸식가, 흑면귀(黑面鬼) 등으로 불린다. 일설에 의하면 라마교의 고승인 파드마-삼보하바가 8세기경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들에게 전파했다고 한다.

동쪽 대륙 주민의 수명은 2백50년, 남쪽 주민은 1백년, 서쪽 대륙 주민은 5백년, 북쪽 대륙 주민의 수명은 이천년이다. 구약성경에는 인간의 생명이 70년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자연수명을 1백년이라고 보았다. 쇼펜하우어의 견해는 인도인의 생각과 일치한다. 병으로 죽는 것은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것 만큼 자연스럽지 않은 사고(事故)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계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수평적인 묘사이다. 수직적으로 보면 세계는 세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아래층은 감각의 지역이다. 이곳엔 신, 인간, 악마, 유령, 동물 그리고 지옥의 생물들이 산다. 이 층의 가장 아래 부분은 지옥인데 팔열지옥(八熱地獄)과 팔한지역(八寒地獄)이 있다. 지옥의 위에는 우리 인간들이 산다.

가운데 층은 형상의 지역이다. 제일 위층은 무형(無形)의 지역이다. 가운데 층과 윗층에는 신들만이 살고 있다.

신들은 수명이 무척 길지만 영생(永生)하는 것은 아니다. 몇몇 신들은 메루산 꼭대기에서 살고, 다른 신들은 허공 위에 세워진 궁전에서 산다. 신들의 계급이 올라갈수록 쾌락은 비육체적인 것이된다. 하급으로 내려갈수록 인간과 비슷하게 된다. 하급신의 사랑의 행위는 인간과 유사하다. 상급으로 올라갈수록 사랑의 행위도 키스, 애무, 미소 혹은 명상으로 바뀐다.

신의 세계에선 임신과 출산도 없다. 자식들은 이미 예닐곱살 먹은 상태로 신의 무릎 위로 급작스럽게 태어난다(유태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아담은 33살 먹은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가운데 층의 신들은 감각적인 쾌락과는 상관이 없다. 그들의 음식은 환희이며 그들의 몸은 섬세한 물질로 되어 있다. 그들에게 시각과 청각은 있지만, 미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은 없다. 최상층의 신들은 육체가 없고 순수한 명상적 무아경(無我境) 속에 산다. 그 명상은 2만, 4만, 6만, 8만 우주년(宇宙年)까지 지속된다.

각각의 세계는 물 위에 떠있고, 물은 바람 위에, 바람은 창공 위에 떠 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세계들은 세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데, 각 그룹들 사이에는 넓고 황량하며, 어두운 빈 공간이 있어 유형(流刑)의 장소로 사용된다.

지금까지 위에서 묘사한 이러한 환상적인 우주관은 석존이 가르친 교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석존이 한결같이 강조했듯이, 중요한 것은 우리를 해탈로 이르게 하는 실천적 수행이다. 힌두교 전통 하의 인도에서 불교가 등장한 것은 실사구시(實事求是)적 개혁을 의미했던 것이다.

편역:김홍근<외대강사·문학평론가>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18>열반

- 생사 벗어난 완전한 깨달음-

- 업에서 해방된 궁극의 도달처-

니르바나(nirvana, 涅槃)라는 말은 서구인들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가장 매력적인 말이 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부드러운 발음을 내는 용어의 깊은 뜻은 간과한 채, 너도 나도 현묘(玄妙)하면서도 이국적(異國的, exotic)인 이 말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유럽과 미주(美洲)의 작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의 시인 루고네스(Leopolda Lugones)는 니르바나라는 말을 환각이나 혼돈이란 뜻과 혼동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까닭모를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그는 마침내 어렴풋한 니르바나에서

깨어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니르바나는 산스크리트어인데 팔리어로는 닙바나(nibbana)로 발음되고 중국어로는 니판(ni-pan)으로 발음된다. 역시 니르바나라는 발음이 가장 듣기에 좋은데, 이는 어원적으로는 휴지(休止)나 소멸을 의미한다. 혹은 동사로 ‘사라지다’나 ‘종식되다’로 번역될 수 있다. 불교 경전에서는 흔히 의식(意識)을 촛불이나 등불에 비유하는데 이 불꽃은 기름이 다하면 자연적으로 사그라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르바나라는 말은 매우 적절한 용어로 보인다.

부처님은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이 용어를 차용했고, 자이나교에서 역시 이 용어를 사용했다. 고대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니르바나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종종 브라마니르바나(brahmanirvana 브라만(神)에 녹아듬)로 변형되어 쓰이기도 한다. ‘신성(神聖) 속에 녹아든다’는 개념은 대양(大洋)에 합류하는 물 한방울이나 우주적 용광로 속으로 사라지는 작은 불꽃 등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힌두전통 속의 인도인들은 개인의 영혼이 우주적 규모의 대양이나 화염과 합치(合致)될 수 있다고 믿는다. 흔히 니르바나는 브라만 신이나 행복이란 단어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브라만 신에 녹아든다는 것은 개인이 곧 브라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불교에서는 의식과 물질, 주체와 객체, 영혼과 신성을 부정한다. 우파니샤드에는 우주의 순환이 신이 꾸는 꿈이라고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그 꿈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주의 운행은 꿈과 같은 것이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꿈은 아니다. 니르바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유럽의 학자들은 처음에 니르바나의 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오해했다. 달만(P. Dahlman)은 니르바나를 ‘무신론과 허무주의(nihilism)의 심연’으로 불렀고, 부르노(Burnouf)는 절멸(絶滅)로 번역했다. 이런 현상에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는 니르바나가 무(無)의 완곡화법인줄 알았다. 또한 데이비드(Rhys David)는 생각하길, 니르바나는 이 땅에서 쟁취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의식의 소멸이 아니라 탐·진·치 삼독의 극복에 의하여 달성된다고 보았다. 피셸(Pischel)은 욕망의 소멸(Trishna)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죽음 이전에 니르바나에 도달한 성인은 이제 그의 행동의 업(業)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의 행위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그로 인해 상이나 벌을 받지 않는데, 그는 이미 생사(生死)의 수레에서 벗어났고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리수 아래서 니르바나에 도달한 부처님은 40년 뒤 육체적 죽음을 통하여 파리니르바나(Parinirvana, 완전한 열반)를 이룬다. 논리적으로는 세계가 환영(幻影)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에겐 그때부터 우주가 사라져야 한다. 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은 죽어야 하듯이 끔찍한 계시를 받은 사람도 죽어야 한다. 베단타 경전에 적혀 있기를 마치 도자기가 완성되어도 도공의 회전 작업대는 계속 돌아가듯이 깨달음을 이룬 사람도 계속 살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삶은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쌓았던 행위의 관성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 이후의 행위는 또 다른 결과를 불러오지 않는다. 꿈을 꾸는 자가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계속 꿈이 진행되도록 두는 것처럼 지반묵티(jivan-mukti, 땅위의 學者)도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상카라는 이렇게 비유한다. “눈이 아픈 자에게 달이 2개로 보이더라도 그는 원래 달이 하나인 것을 아는 것처럼, 깨달은 사람은 감각의 세계를 지각하고 살지만 그것이 환영이라는 것을 안다” 달만은 인도의 고대 서사시를 인용한다. “성공과 실패, 생과 사, 육체적 쾌락과 고통… 나는 그런 허구(虛構, fiction)들의 친구도 적도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니르바나는 “안식의 문, 폭풍우 이는 바다속의 안전한 섬, 시원한 동굴, 피안(彼岸), 신성한 도시, 모든 병의 해독제, 욕망의 갈증을 가라앉히는 물, 열락의 음식, 생사윤회의 강(江)에 빠진 조난자들을 구제하는 대안(對岸)”이다.

<미란다왕문경>에서 말하기를, 니르바나는 비시간적이어서 감각적으로는 인식되지 않는다고 한다. 여러 생을 거친 뒤에야 겨우 그곳에 도달할 수 있지만, 니르바나는 사실상 그 생들을 선행하고 그 생들의 외부에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 위치를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불자들은 대개 그곳을 깨달은 사람이 편히 쉬는 곳이라고 형이상학적으로 인식하여 흔히 “열반에 든다”라고 표현한다.

오스트리아의 불교학자 에리히 프라우알너(Erich Frauwallner)는 부처님 당시에 사용되던 니르바나의 뜻을 연구해서 이 말에 대한 서구인들의 이해를 향상시켰다. 우리들은 불꽃이 꺼지는 것을 불이 소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인들은 불이 등을 켜기 전에도 존재했고, 등을 끈 뒤에도 지속한다고 생각한다. 불을 켜는 것은 불이 눈에 보이게 하는 것이고, 끄는 것은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지 불을 근절시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의식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육체가 있을 때 우리는 의식을 느낀다. 죽을 때 육체는 사라지지만 의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처님은 니르바나를 묘사할 때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해탈을 통해 열반에 드는 것은 부처님이 가르친 교설의 핵심이다. 부처님은 세상의 모든 신비를 풀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가 가르치고자 한 것은 속세(俗世) 즉 표피적인 세계로부터 해탈하는 방법이었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이것을 겨냥하고 있다.

편역:홍근(외대강사·문학평론가)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19>대승불교(1)

- “중생 전체의 해탈을 추구 ”-

- 용수보살 주창…자비실천 강조 -

역사적으로 보면 새로나온 특이한 이론일지라도 기존의 유명한 사상가의 이름을 빌려 알려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이론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거나, 스승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의지 혹은 모두에게 존경받는 고명(高名)을 빌어 새 이론에 권위를 부여하려는 목적 등에서 그러는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전에는 소수의 직계제자들에게만 자신의 내밀한 사상을 강의하고 오후에는 대중들을 대상으로 일반론을 강의하였다고 한다. 비전(秘傳)은 아무래도 극소수에게만 전해지는가 보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도 그랬고 이점에서 부처님도 예외가 아니다.

열반에 들기 직전 부처님은 제자들 중의 한명에게 기존에 행한 설법의 요약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부처님은 지상에서 뿐 아니라 천상에서도 설법을 베풀었으며 그 비전(秘傳)은 용왕의 지하궁전에 보관되어 있다가 기원후 2세기경에 나가르주나(龍樹)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여기서 대승불교가 탄생한다.

부처님이나 예수같은 옛 성인들은 스스로 종교를 창시하려고 하지 하지 않았다. 부처님의 목적은 업보의 윤회를 믿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소망하는 수도승들의 개인적인 해탈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이의 소망이었다. 프랑스 시인 르꽁뜨 드리슬은 그 적멸에의 열반을 이렇게 표현했다.

시간과 이름과 공간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생이 휘저어 놓은 평정을 가라앉혀 주소서

하지만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에 비운다는 표현은 채운다는 표현보다 어딘지 모르게 어려워보인다. 모든 종교는 시대에 따른 신도들의 다양한 욕구를 수용해야 하고, 불교도 오랜 세월동안 깊고도 다양한 변화과정을 거쳐왔다.

대승(大乘, Mahayana)이란 말은 ‘큰 수레’를 의미한다. 이와함께 원시불교는 소승(小乘, Hinayana) 즉, ‘작은 수레’라고 불리게 되었다. ‘수레’라는 용어는 다음의 비유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큰 집에서 불이 났는데, 한사람이 염소가 끄는 ‘작은 수레’를 타고 혼자서만 빠져나왔다. 반면 다른 사람은 소가 끄는 ‘큰 수레’에 대중을 싣고 빠져나왔다. 두 사람의 행위 중 어떤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인가? 해답은 자명하다.

대승불교는 신도들에게 수많은 전생(轉生)을 통하여 자신이 성불(成佛)도 하고 많은 타인들도 구원하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긴 과정 중의 한 단계일지라도 이 생은 열반에 이르는 소중한 단계임에 틀림없다. 이렇게하여 적멸에의 지향은 생의 의지와 조화를 이루게 되고, 비움은 곧 채움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비움과 채움은 서로 상응하게 된다.

몇몇 불교사학자에 따르면 이미 아소카왕(기원전 264~228)시절부터 종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유명한 왕은 불교를 신봉했지만 신앙을 강요하기 위하여 무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종교전쟁은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교와 그 지파인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유물이다. 동양에서는 한사람이 여러 종교를 숭배해도 갈등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고 한 곳에 여러 종교의 제단이 같이 꾸며져 있는 곳도 있다.

대승불교 이론의 가장 어려운 점은 그 논리체계가 너무나 복잡하다는 사실이다. 긍정과 부정을 되풀이하고, 나누고 또 나누고 해서 결국 논리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 본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리의 건축물을 부수기 위하여 논리의 도구를 사용(때로 남용)한다.

대승과 소승 둘 다 기본교리는 같다. 양자는 모두 삼법인(제행무상·일체개고·제법무아)과 사성제(고·집·멸·도)에 기초한다. 그런데 대승불교는(서양철학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절대이상주의다. 우주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색·성·향·미·촉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인식된 표상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바로 꿈꾸는 것이다. 후에 세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꿈의 재료로 만들어졌다.

(「폭풍」, 4막1장)

서양철학자 버클리(Berkeley)와 쇼펜하우어도 현실을 환으로 보는 철학을 전개했다. 끝없이 윤회전생을 하는 속세(Samsara)는 이미 열반(Nirvana)의 세계이다. 이것을 의식하기만 하면 우리는 열반에 이르른다. 초원의 억새풀(억조창생)까지도 성불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언젠가 도달할 해탈의 그날을 기다리며 육도(六道)를 윤회하는 것이다.

소수의 수행승을 대상으로한 원시불교의 서원은 다시는 다른 육체로 환생하지 않겠다고 한 굳건한 의지를 다지고 적멸에 이르러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지만, 다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대승불교의 서원은 그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것을 혼자가 아니라 모두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성불을 미루고서라도 타인의 성불을 위해 노력하는 보살의 이상향이 불타의 이상향과 나란히 제시되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매진할 것을 권했다. 반면 대승불교는 자비의 실천을 강조한다. 복전(福田)은 팔정도를 통해 얻어질 뿐만 아니라 염불과 좌선 그리고 보시에 의해서도 구해지는 것이다.

천상불(天上佛)이란 개념은 플라톤식 원형(原型)개념과 유사하다. 석가모니불의 원형인 천상불의 이름은 아미타불(Amitabha)이며 ‘무량광명(無量光明)’이란 뜻이다. 여러 천상불은 지상에 각자 한명씩의 보살과 붓다를 가진다.

초기에 원시불교의 승려들과 대승불교의 승려들은 같은 사원에서 함께 거주하며 설법했다. 당연히 각자의 교의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두 교파는 서로의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어갔다. 서로의 차이점이 두드러져서 수용하기 어렵게되자 두 교파는 과도기를 거치면서 나름대로의 길을 걷게 된다.

편역:김홍근<외대강사·문학평론가>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20>대승불교(2)

- 이상형은 보살…인류애 지향-

- 용수보살 중론통해‘공’사상 확립 -

- 자비의 화신 미륵보살 기다려 -

대승불교의 가장 유명한 스승인 나가르주나(용수·BC2~3세기)는 북인도 날란다에 대승원을 짓고 제자들을 모아 가르쳤다. 여기서 확립된 교리는 후일 동아시아 여러나라로 전파된다.

대승불교는 이 세상이 실재하지 않다고 가르친다. 반면 소승불교는 세상의 외관(外觀)은 일시적이고 허망하지만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Skandha)는 실재한다고 가르친다. 대승불교에서는 수행하는 그가 열망하는 열반까지도 환(幻)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만일 모든 것이 공이라면, 사성제니, 팔정도니, 업이니, 윤회니, 승단이니 심지어 부처님까지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대해 나가르주나는 두가지 차원에서 진리를 고려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하나는 인습적인 진리로써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설명하는데 사용된다. 또 하나는 절대 진리로서 니르바나(열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주를 거울에 비친 반영(反影)에, 메아리에, 그리고 꿈에 비유한다. 우리들은 사랑과 증오로부터, 노심초사로부터,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그런데 그 본질이 바로 공이라는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부정(否定)의 방법들을 통해 중도(中道)를 설파했다. 파괴도 없고, 불멸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고 불어나지도 않으며, 파괴되지도 않고 지속되지도 않으며, 단일(單一)도 아니고 복수(複數)도 아니며, 입구도 없고 출구도 없다는 것이다.

불교의 특성상 나가르주나의 공론(空論)이 출현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내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때, 나는 철학자임이 분명하다. 나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자아와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한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1711~76)도 결국 무아론(無我論)을 주장했다.

원시불교에서는 깨달음을 통해 열반에 이르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사라진다고 말하고, 각자(覺者)를 불이 꺼진 등에 비유한다. 나가르주나는 말하기를 원래 없던 것이 어떻게 있거나 없거나 할 수 있느냐고 한다. 열반의 세계는 공의 세계이며, 현상세계를 넘어선 그 세계에선 이미 삼사라(俗世)가 니르바나라는 것이다. 자성(自性)이 공함을 깨달은 자는 니르바나에 이른다. 광대한 우주조차도 그와 똑같이 공한 것이다. 자(自)와 타(他)의 구분이 녹아 없어진 세계가 바로 니르바나라는 것이다.

니르바나에 도달하는 특수한 과정도 부정된다. 나가르주나는 자신의 저술에서 이렇게 썼다.

걸어 온 것에도 길은 없고

걸어야 할 것에도 길은 없다

그러나 걸어온 것과 걸어야 할 것 없이는

길 또한 없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엘레아학파의 제논도 이와 유사한 말을 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결코 과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화살이 아니다. 왜냐하면 화살은 궤도의 각 순간마다 정지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지상태가 비록 무한히 많다고 할지라도 모인다고 해서 결코 움직임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원전 4세기경 디오도로 크로노스(Diodoro Cronos)는 “벽은 무너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벽돌들이 잘 결합되어 있을때 벽도 굳건히 서있다. 벽돌이 무너지고 없다면 이미 벽 또한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가. 이런 논지들이 단순한 궤변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크로노스와 제논과 나가르주나는, 현실이란 우리가 논리로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허망한가 하는 것을 일깨우려고 했던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사물의 본질이 공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 부정적 방법을 강조했던 것 같다. 그 이전의 학승들은 모두 부처님의 전지(全知)만 강조해 왔다. 이와 반대로 그는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갠지스강이 있고 또 그 각각의 갠지스강에 있는 모래알을 다 합쳐도 그 수는 부처님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사물의 수보다는 적을 것이다”고 말했다. <최상지혜>라는 책에 적혀있기를, 모든 것은 단순히 이름 뿐이며 본성은 공하고 또한 ‘최상의 지혜’조차도 이름일 뿐이며 공한 것이라는 사실을 현자는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원시불교에서는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아라한(Arhat)을 든다. 그는 성자로,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업을 쌓지 않아 다시는 태어나지 않고 입적하면 바로 열반에 드는 사람이다. 그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우주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또한 자신의 무한한 전생을 반추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대승불교에서는 보살(Bodhisattva)을 이상형으로 본다. 그는 수많은 생과 사를 거쳐 언젠가는 붓다가 될 운명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미래의 성불 못지않게 현세에서의 자비행을 소중히 여긴다. 전설에 의하면 부처님도 전생의 어느 순간에 호랑이의 허기를 달래주기 위해 몸을 보시한 적이 있다고 한다.

고독한 성자인 프라티에카 붓다(Pratyeka Buddha)의 경우도 있다. 그는 스승의 도움없이 깨달음에 이르렀지만 그것을 전달할 줄은 모르는 사람이다. 경전에는 그를 중요한 꿈을 꾼 벙어리나 밀림을 홀로 종횡하는 코뿔소에 비유한다.

대승불교는 여러 부처님의 존재를 인정하여 일련의 이름들을 명명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세계에 수많은 부처님들이 계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 세계의 부처님은 인도에서 태어나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룬 분이다. 각 부처님들은 그가 속한 세계에 따라 체격이나 나이가 다양하게 정해진다. 모든 부처님들에게 동일한 조건이 있다. 즉 몸에 서른두개의 성상(聖相)이 있고, 발에는 백팔개의 성흔(聖痕)이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가 이룩하고자 가장 열망하는 것은 모든 인류사이의 형제애이다. 이 땅에 오실 부처님은 미륵불(Maitreya)로서 서기 4457년에 출현할 것이다. 그의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자비의 화신’ ‘사랑의 충만자’이다. 그는 지금 천상에 계시지만, 이땅에는 이미 그가 계시한 성전이 존재한다고 한다. 오랜 세월 대승불교도들에겐 미륵불이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7세기 초엽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인도를 순례하였을 때 어느 계곡에서 엄청나게 큰 금박목조 미륵불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 조각가는 세번이나 천상에 올라가 친견한 후에 그 작품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미륵불에 관한 설화는 매우 다양하다. 그 중의 하나를 현장법사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절에서 미륵불탱화 조성을 위해 크게 불사를 벌이고 수년간 기도하였다. 어느날 이름모를 낯선 사람이 찾아와 그림을 그리겠다고 자원했다. 그는 등과 물감을 방에 들인 뒤, 안에서 문을 잠구어 버렸다. 여러 날이 지나도 기척이 없어 방문을 열어보니 그 사람은 온데 간데 없고 찬란한 불화만이 걸려 있었다. 그날밤 한 승려의 꿈에 미륵불이 나타났는데 그 얼굴은 사라진 사람의 모습과 같았다.

편역:김홍근<외대강사 ·문학평론가 >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21>라마불교(1)

- 염불·주술 융합 티벳중심 발전-

- 사제계급 뚜렷 …환생믿고 다신론적 사고 -

라마불교는 대승불교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계급제도적, 제정일치적으로 특이하게 변형되어 나온 것이다. 부처님은 인도 북부와 갠지스 강변에서 가르침을 펼쳤지만, 라마불교는 티벳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고 14세기에 황금기를 맞았다.

라마불교를 연구한 라이스 데이비드 등 대부분의 서구학자들은 이 종교체제와 가톨릭 교회와의 유사성을 지적했다. 전생활불(轉生活佛)이라고 일컬어지는 달라이라마는 17세기 이후 티벳의 원수(元首)가 되어왔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1949년 집권한 후 티벳을 점령했다. 점령시 종교적 전통을 존중해 주겠다고 약정한 조약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점령 후 티벳 고유의 문화적 체제와 관습들이 모두 뿌리 뽑혀졌다. 달라이라마가 인도로 망명하자 많은 신도들이 그를 따라가서 인도의 서북부 다람살라에 티벳 망명정권을 수립했다.

소승불교에는 수도승만 있지 사제계급은 없다. 반면 라마불교에는 뚜렷한 사제계급이 있어서, 두 지도자인 달라이라마(위대한 왕)와 판첸라마(위대한 스승)는 중세 때의 가톨릭 교황들처럼 정신적인 권력과 함께 세속적인 권력도 행사한다. 주술(呪術)을 중시하는 고유신앙을 가진 티벳과 몽골인들은 사성제 같은 지고한 진리나 팔정도같은 엄격한 실천법에 쉽게 적응되기 어려웠다. 그들을 교화시키는 데에는 화려하고 복잡한 제례의식이나 번화한 염불의식 혹은 몸속 깊이 체득되어 있는 전통적 주술행위와 토착신앙을 융합한 종교형식이 필요했다. 버나드쇼는 “콩고의 토인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키는 일은 사실상 기독교를 콩고의 토인이 믿는 민간신앙으로 바꾸는 일이 되고 만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티벳인들은 외래종교를 고유의 정신체계와 융합시켜 독특한 혼합종교를 만들어 내었다. 거기에는 대승불교에 내재해 있던 다신(多神)적 체계와 주술적인 요소도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공산주의가 티벳을 점령하고 억불정책을 쓰기 전까지는 불교사원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다. 일반적으로 각 가정에서는 아들 중의 한명을 가까운 사원으로 보냈다. 팔구세 가량의 이들 소년들 중에서 소수만이 초심자로 받아들여지고 오랜 공부와 시험뒤에 정식 승려가 된다. 대개 수도원장들은 그 지방에서 가장 존경받고 권위있는 인물이 된다.

달라이라마가 열반에 들면, 사원 부근의 가난한 집에서 환생한다고 믿었다. 그 아이는 신탁에 의해 발견되고 법도에 따른 교육을 받는다. 가난한 집에서 환생한다는 사실은 무슨 민주적 전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권세있는 집안으로 하여금 권좌의 계승문제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막자는 목적에 따른 것이다. 티벳은 원래 관음보살의 교화의 땅으로 알려져 있어서, 달라이라마는 세대를 거쳐 전생(轉生)하는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다. 옴마니반메훔(오! 연꽃잎의 이슬이여)은 특히 달라이라마가 입적할 때 마치 연꽃잎에 맺힌 이슬이 바다로 흡수되는 것처럼 열반에 입적하는 것을 기리는 주문이다.

티벳에서는 다양한 신성(神性)이 경배된다. 여러 부처님들과 그 제자들, 보살들, 대승불교의 창시자 용수(나가르주나) 등과 함께 험악한 얼굴의 사천왕, 지옥의 왕이며 사자(死者)의 심판관인 염라대왕(그의 상징은 해골과 남근(男根)이다) 그리고 자연의 힘을 의인화한 여러 신들이 모두 경배의 대상이다.

티벳불교는 불교의 윤리 도덕적인 면을 강조한다. 선행은 사후 필히 보상을 받으며, 악행은 꼭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정통불교가 자아라는 개념을 배제한 업(業)의 논리에 의지하는데 비해, 라마불교는 세대에서 세대로 윤회전생하는 개인적 자아의 영혼을 인정하는 편이다. 죽은 자는 이땅이나 아니면 육도(六道)의 어디에선가 환생한다는 것이다.

마귀들은 호시탐탐 인간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사전에 부적을 준비해 두는 것이 신중한 태도다. 이런 믿음하에 부적은 승려들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환자들을 위해서는 승려들이 독경을 통한 정신치료법을 실시하였다. 악귀를 쫓고, 병을 치료하며, 극락정토로 인도한다고 믿는 주문을 수시로 암송하는 일이 민간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가장 효험이 있다고 믿은 주문은 역시 옴마니반메훔이었다.

만트라(mantra)는 산스크리트어로 ‘문자’ ‘언어’의 뜻이다. 한자로는 ‘진언(眞言)’이라고 음역하며, 밀교에서는 ‘다라니(陀羅尼, dharani)’라고도 부른다. 만트라는 단순한 언어의 뜻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 말은 다른 나라에서도 번역되지 않고 원어발음 그대로 따라한다. 유대 신비주의 일파인 카발라에서도 성경의 글자에는 창조의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해로운 말, 불길한 말, 싸움을 불러오는 말, 불같이 뜨거운 말, 행운을 불러오는 말, 친절한 말 등 힘을 내재하고 있는 말들이 있으며 그것들을 잘 배합하면 효능은 더 증대된다. 각각의 마귀마다 치명적인 말이 있고 승려들은 그 주문들을 알고 있다.

만트라는 음송되지만, 글이나 문양으로 쓰여져서 관상(觀想)되기도 한다. 숙소나 사원의 지붕을 장식하는 깃발에 그려지기도 하고, 옷이나 부적에 쓰여지기도 한다. 환자는 식이요법 중 만트라가 쓰인 종이를 먹기도 한다.

만트라를 독창(讀唱)하거나 관상하면 복을 쌓고 해탈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물론 사원에 시주하거나 가난한 사람을 돕는 선행을 병행해야 한다. 부자들은 대개 보석을 시주하고, 가난한 자들은 버터를 시주한다.

라마의 권력은 어마어마하게 크다. 정신적 권한과 세속적 권한을 모두 가진다. 국가의 모든 산물, 사형을 포함한 모든 판결권 그리고 신도의 현세적 운명뿐 아니라 미래의 삶까지도 결정한다.

라마불교는 임종의 시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죽음의 시간이 임박하면 승려는 죽음의 왕국을 여행하는 여러가지 지침이 담겨있는 경을 낭송한다. 화장이나 매장이 끝난 뒤에도 독경과 장례는 계속된다. 그 기간은 49일간 지속되며 죽은 사람을 나타내는 지방은 마지막에 태워진다.

육체적 죽음뒤 첫번째 바르도(bardo, 단계)는 깊은 잠의 기간으로 4일간 지속된다.

그뒤 영혼을 비추는 밝은 빛이 나타나고 그제서야 사자(死者)는 자신이 죽은 것을 안다. 만일 그가 해탈을 한 자라면 이것이 마지막 단계다.

諮 :김홍근<외대강사·문학평론가>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22>라마불교(2)

- 구루신앙 영향 종교지도자 존중-

- 계율 강조 … 음악 연극 만다라 성행 -

승려는 사자(死者)에게 이렇게 독경한다.

“당신의 식(識)은 이제 공(空)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공은 무(無)가 아니라 충만한 것으로서 어디에도 매이지 않으며 찬란히 빛나고 가볍게 떨리면서 행복한 바로 식(識) 자체인 완벽한 붓다입니다.” 그리고는 마치 눈에 비치는 물위의 달이 보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그런 자신의 신성을 명상하라고 권한다.

해탈하지 못한 자의 영혼은 두번째 바르도로 들어간다. 죽은 자는 사람들이 방청소를 하고 그의 옷을 벗기는 것을 보게 되며 가족들이 우는 것을 듣는다. 하지만 그는 말을 할 수 없다. 이때 그는 환영을 보게 된다. 먼저 선신(善神)들이 나타나며 그뒤 무서운 모습의 악신(惡神)들이 나타난다. 이때 승려는 독경을 통해 그 환영들은 실제가 아니라 단지 그의 의식의 그림자일 뿐이란 것을 일깨운다.

다음 칠일동안 일곱명의 평화의 신들이 나타나 각기 다른 색깔의 빛을 비추어 영혼이 환생할 세계를 보여준다. 그중에는 인간세계도 들어 있다. 승려는 독경을 통해 영혼이 속세의 유혹을 뿌리치고 좋은 세계를 선택하도록 권고한다.

그 신들과 빛이 보여주는 세계는 실상 그 영혼이 생전에 축적한 업(業)의 방사(放射)일 뿐이다. 칠일이 지나면 그 신들은 다시 모습을 바꾸어 이번에는 험악한 악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것은 머리가 세개에, 팔이 여섯개 그리고 다리가 네개 달렸다. 온몸을 해골과 검은 뱀으로 치장하고, 입에선 화염을 내뿜는다. 오른쪽 팔들은 칼, 도끼, 수레바퀴를 휘두르고, 왼쪽 팔들은 종, 쟁기, 해골을 치켜든다. 그 해골에는 피가 담겨있어 마실 때마다 악귀의 입으로 피가 흘러 내린다.

이렇게 해서 십사일째가 되면 호랑이, 돼지, 범, 사자의 머리를 단, 동서남북을 대표하는 거대한 몸짓의 사방수호신이 나타나 영혼을 위협한다.

마침내 영혼은 염라대왕 앞으로 불려나가 심판을 받게된다. 변호신이 나와서 그의 선행을 열거하고 나면, 악신이 나와 그의 죄과를 들춘다. 영혼은 변명을 하려 들지만, 업경(業鏡)에 그의 생전의 행위가 생생히 비친다. 재판관 염라대왕은 양심이며, 업경은 기억이다.

긴 통과의식이 끝나면 사자는 자기가 어디에 다시 태어날지를 알게 된다. 자세한 것을 알고 싶은 독자는 에반스 웬츠(W.Y.Evans Wentz)의 <티벳사자(死者)의 서(書), The Tibetan Book of the Dead>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 책에는 융(Jung)의 유명한 서문이 있다. 책 제목은 이집트의 <사자의 서>를 연상시킨다. 보다 쉬운 텍스트로는 ‘새들에 대한 붓다의 설법’이란 서사시가 있다.

아침 저녁으로 지저귀는 새소리의 합창에서 발상을 따온 것 같은 새들의 회의 장면은 그리스, 페르시아, 영국, 인도 등지의 문학에 등장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붓다는 신들과, 악귀들과, 인간들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언어로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이 서사시에서 관세음보살은 뻐꾸기로 화신(化身)하여 티벳과 인도의 새들에게 설법한다. 독수리, 학, 거위, 비둘기, 까마귀, 부엉이, 닭, 종달새, 공작새 등은 각자 삶의 고(苦)와 무상(無常)을 고백한다.

뻐꾸기로 변한 관세음보살은 사회자인 앵무새의 요청으로 그 자리에 모인 새들에게 세상의 실상(實相)이 공(空)임을 깨우쳐 준다. 돌로 세워진 굳건한 궁전도 결국 세월의 풍화작용을 견딜 수 없으며, 일가친척과 친구와의 만남도 하룻밤 함께 빵을 나눈 여행자 사이의 만남과 진배없는 것이다. 육체는 구름처럼 허망하고, 공작새의 찬란한 깃털도 사라지는 거품과 같은 것이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태어나고 죽는 꿈을 꾸는 것이다. 그 설법에 감화받은 새들은 앞으로 행실을 바로잡을 것을 맹세한다. 단지 악에 깊이 물들어 있는 솔개와 까마귀만이 맹세에 불참한다. 감화받은 닭은 이렇게 말한다.

속세에 사는 동안에는 영원한 행복이란 없다.

이것 저것 해야할 일은 끝이 없다.

육체도 혈액도 무상하지 않은 것은 없다.

죽음의 신 마라는 항상 노리고 있다.

아무리 부자라도 결국 빈손으로 홀로 떠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도 언젠가는 잃을 수 밖에 없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실체는 없다.

이탈리아 아시시 출신의 프란시스코도 새들에게 설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한 설교는 새들에게 아름다운 옷과 원하는 곳으로 날아갈 수 있는 자유를 준 신께 감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라마는 티벳어로 상인(上人)이라는 뜻이다. 티벳불교는 인도 대승불교중 특히 후기밀교(後期密敎)의 구루(上人) 신앙의 영향을 받아 종교 지도자를 존중하는 강한 전통을 세우게 된 것이다. 오늘날 티벳불교의 주된 전통은 1042년 인도에서 입국한 아티샤가 주도한 불교부흥운동 이후에 세워진 것이다. 티벳에서는 이 시기 이후의 불교역사를 후기홍통시대(後期弘通時代)라고 한다.

아티샤는 정법(正法)을 수호하고 계율을 엄수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의 사후 여러 개의 종파가 생겨나고, 정법과 계율은 다시 세속권력과 결탁하여 타락해 갔다. 14세기 말 아무드 지방의 촌카파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개혁운동의 지도자들은 아티샤의 법맥을 계승할 것을 선언하고, 승려의 덕행을 존중했으며, 밀교의 바탕인 반야(般若), 중관(中觀) 교리의 철저한 학습을 주장했다. 몽골과 중국 동북지방으로 전파된 티벳불교는 아티샤의 개혁 이후 세확장에 따른 것이다.

티벳불교의 종교의례음악은 라마승의 독경과 찬가가 조화를 이루고 기악반주를 곁들인다. 종교음악은 티벳 태음력에 기준한 종교적 제일(祭日) 등에 빠짐없이 연주된다. 또한 라마승에 의해 의례적인 색채가 강한 가면무용이나 자타카(本生譚)를 소재로 한 설화극과 함께 공연되기도 한다.

종교미술로는 밀교 특유의 만다라를 많이 사용한다. 만다라는 사물의 본질, 중심, 우주, 도량을 나타내며, 완전무결한 세계의 상징으로 괘폭에 그려져 사원안에 걸렸다. 만다라에는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이(理)의 세계를 나타내는 태장계와 원과 모(方形)를 짝지어 지(智)의 세계를 나타내는 금강계의 두갈래가 있는데 티벳에서는 후자의 만다라를 많이 사용하였다.

편역:김홍근<외대강사· 문학평론가>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23>중국불교

- 민간종교 융합…생활 깊이 침투-

- 선불교 발달 …문학 미술에도 영향 -

중국의 불교사는 매우 복잡하다. 그 첫 전래시기도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후 1세기경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꿈속에서 온몸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귀인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는데, 깨어나 알아보니 그 사람이 부처님이었다고 한다. 황제는 인도에 사절단을 보내 부처님 법을 가르쳐 줄 스님을 초빙해 왔다. 다른 설에 의하면 이미 기원전 3세기경에 인도북방 서역을 통해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다고도 하며 전한(前漢) 애제(哀帝) 1년을 초전(初傳)으로 보기도 한다. 대략 기원 전후 무렵 전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불교가 전래될 무렵 중국은 벌써 고도의 문화를 확립하고 있었다. 한무제(漢武帝)는 공자의 가르침(儒敎)을 통치이념으로 삼아 사회를 안정시켰고, 민간에서는 노자의 사상(道敎)이 널리 퍼져 있었다. 공자와 노자는 기원전 6세기에 살았고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리토스 등과 동시대 인물이었다. 유교는 초월적 세계보다는 사회질서 규범을 중시했고, 도교는 불교처럼 세계의 비현실성을 일깨웠다. 이를 호접몽(胡蝶夢)으로 표현한 장자의 유명한 비유가 있다.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기분좋게 날아다녔다. 꿈이 깨자 자신이 나비꿈을 꾼 장자인지, 지금 장자가 된 꿈을 꾸는 나비인지 알 수 없었다.”

초기의 불교전도시대에 인도와 중국의 학승들이 여러 경전을 번역하여 중국인에게 불교를 전하는 한편 그 이해를 깊이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유교와 도교사상을 확립하고 있던 지식인들은 불교사상의 독자성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어서 전설상의 황제(黃帝)나 노자의 가르침을 빌어 이해하고자 했다. 이렇게 중국 고유의 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한 격의불교(格義佛敎)가 한동안 성행하였다.

5세기 초 구마라습이 서역을 경유하여 장안(長安)에 도착한 후 여러 대승경전을 한역(漢譯)하여 불교 고유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번역된 경전이 정리되면서 논(論)의 연구가 진척되고 여러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526년에 보디다르마(達摩大師)가 중국에 들어왔다. 불교진흥에 힘쓰고 있던 양(梁) 무제(武帝)가 달마대사를 청해 가르침을 받고자 했으나, 대사는 화려한 사원과 수많은 승려 등 외모적인 겉치레보다 진리를 올바로 증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어전에서 물러나와 수도에 힘썼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9년간 면벽(面壁)참선 정진을 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 선불교의 초조가 되었다. 선(禪)은 중국어로 찬(Ch'an)이라고 발음되는데, 근대에 와서 일본에 의해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서구에서는 일본식 발음인 젠(Zen)이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수·당(隋·唐)시대에 이르러 중국의 정치가 통합되면서 문화가 번영하였다. 중국불교도 이때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이 시대는 불교 본래의 모습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와 실천이 실현된 시기였다. 삼론(三論), 천태(天台), 화엄(華嚴), 법상(法相), 밀교(密敎), 율(律), 선(禪), 정토(淨土) 등의 종파가 확립되었다.

수·당(隋·唐)시대 이후 한때 폐불이 있어서 여러 경전이 소각되고 종파도 중절되었으나 실천에 전념하는 정토교와 선종 그리고 민간신앙에 동화된 밀교가 번창하였다. 그중에서도 선종은 중국 특유의 불교로 발달되고 탁월한 승려가 배출되어 그 가르침이 계승되어감과 동시에 고승들의 어록이 편집되었다. 또 선종의 사원에서는 자급자족적인 생활규정이 생겨 그것을 청규(淸規)라고 했다. 송(宋)나라 이후 대장경이 출판되고 경전이 간행됨으로써 불교사상이 지속적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한편 불교는 중국인들의 조상숭배사상과 도교적 민간신앙과 타협하고 그것들을 흡수하였다. 가족의 중요성이 체질화된 중국인들에게 출가(出家) 독신생활은 그리 긍정적으로 비쳐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지식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직접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일은 드물었다. 따라서 일반 승려들은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농민 출신들이 많았다. 사원에서 교육을 실시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았다. 때때로 가난한 서민들이 어린 자식을 사원에 파는 경우도 있었다. 체계화된 유교식 교육을 받은 인재를 등용하는 관료체제가 확립된 중국사회에서 출세를 지향하는 지식인들에게 출가 수도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출가제도는 중국인들에게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또한 불교가 외래종교라는 사실도 자존심 높은 중국인들에겐 약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불교의 초월적 인식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유교의 혁신을 가져온 신유학(Neo-confucianism)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불교는 민간의 일상생활에 깊숙히 침투해 갔다. 중국의 문학과 조형미술은 불교를 모르면 이해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영향을 받았다. 대승불교의 제불(諸佛)과 여러 보살 중에서 민간에 가장 친숙한 인물은 관세음보살이었다. 여성화된 자애로운 모습을 띤 이 자비의 화신상을 중국 어디서나 만나볼 수 있다.

서구 유일신(唯一神) 신앙의 배타적 성격과는 달리, 중국에선 여러 종교가 쉽게 혼융되었다. 유·불·도의 3교 융화가 활발히 논의되었고, 실제로 사원내에 도교의 영향을 받은 산신각(山神閣)이 세워진 사원이 많았다.

가장 유명한 불교소설인 「서유기(西遊記)」는 손오공과 삼장법사 일행이 불경을 구하러 중국에서 서쪽으로 여행을 떠나 겪게되는 환상적인 모험 이야기이다. 소설이 쓰여진 연도는 정확치 않지만 대략 16세기경으로 추측된다. 삼장법사와 동행하는 원숭이와 말과 돼지는 법사의 분신들로 각각 지성, 영성, 감성을 상징한다. 그들은 천신만고 끝에 불경을 구해 돌아오지만 그 경전들은 모두 백지였다. 이것은 어쩌면 지고한 진리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不立文字)을 상징하는지 모른다.

멀리 인도에서 이룩된 불교는 인도의 온갖 문화를 수용, 포용하면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였으며, 또 중국으로 전해진 다음에는 중국의 독특하고 우수한 문화와 접촉, 융화되어 풍부하고 다양한 중국적인 불교문화를 이룩하였다. 그 문화는 한국과 일본에도 전파되었다.

편역: 김홍근<외대강사 ·문학평론가>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24>탄트라불교

동양사회에서 자연의 마법적 힘에 대한 믿음은 보편적인 현상이며 특히 인도의 종교들은 종종 마법을 차용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마법적 요소를 불교에 결합시킨 것이 탄트라불교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인도에는 많은 마법사들이 마술을 부리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탄트라불교의 기원은 확실치가 않다. 잡부·순수밀교와 구별하여 대개 8세기 후반 인도에서 발전한 비의적(秘義的) 수행체계로 보며, 개인의 요가적 실천과 의례를 통해 전체와의 신비적 합일에 도달하려는 비밀불교(密敎)를 가리킨다. 탄트라불교는 우주의 남성적 원리를 중시하여 ‘부(父)탄트라’로 불리는 우도밀교(右道密敎)와 여성적 원리를 중시하여 ‘모(母)탄트라’라 불리는 좌도밀교(左道密敎)로 나뉜다. 중국인들은 남성적 원리(방편, upaya)와 여성적 원리(반야, prajna)가 서로 같은 것으로서 궁극적 실체의 양면을 나타낼 뿐이라고 보고 좌·우도밀교를 혼합하였다. 이 혼합밀교의 만다라에서 우도는 원 속의 천둥번개로 상징되고, 좌도는 원 속의 자궁으로 상징된다.

좌·우도 모두 엄격한 고행을 배격하지만, 특히 좌도밀교에서는 성적 요소와 인간의 구원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 오히려 감각적 요소를 통한 해탈을 추구한다. 인간 육체와 관련된 행법을 통해 이원적 대립을 통일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탄트라란 힌두교 시바파 가운데 샤크티(性力)를 숭배하는 집단의 문헌을 총칭하는 말이다.

탄트라 문학에선, 해탈에 이르는 각 단계에서 필요한 정신적이거나 신비한 힘을 의인화한 신(神)들을 노래하는 송가(頌歌)와 주문(呪文) 등이 많다. 물론 이 신(神)들은 속세에 속하는 존재들이지만 큰 힘을 가지고 있어서 명상의 대상으로는 훌륭한 목표가 된다.

탄트라불교는, 해탈이란 스승(guru)이 제자(chela)에게 직접 말로 가르치는 비전(秘傳)에 의하여만 얻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비의는 경전을 통해서는 결코 터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수행에는 염불독송, 제례의식, 자아와 특정한 신성과의 일치를 위한 명상이라는 세가지 요가 행법이 시행된다.

서양에서는 만져지고 눈에 보이는 것이 중시된다. 동양에선 그와 더불어 들리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말이 가지는 발음 중에는 신성(神性)에 해당되는 것이 있어서 반복해서 그 발음을 내면 신성이 현현한다고 믿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25>禪불교(1)

- “정신집중 체험통한 깨달음 중시 ”-

- 경전문구보다 조사의 이심전심 강조 -

불교는 인도 북부에서 기원하여 동아시아로 퍼졌다. 이 전도는 주로 인도 승려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인도에서 동아시아로 건너간 승려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람은 보리달마일 것이다. 그는 6세기 초엽 중국에 입국하여 선종(禪宗)의 초조가 되었다.

그가 양무제(梁武帝) 앞에서 세속적 공덕을 쌓는 일보다 공적(空寂)한 지혜를 파악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불교의 가장 성스러운 교리(聖諦第一義)를 묻는 황제의 질문에 달마는 성스러운 것이 없는 텅빈(確然無聖)이라고 대답하고 떠나버렸다. 그는 황제의 실력으로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숭산 소림사(嵩山 少林寺)에 들어가 면벽참선(面壁參禪)을 했다고 한다.

자신의 신앙심을 증명하고자 왼팔을 끊어 바친 혜가(蕙可)에 의해 달마의 법(法)은 이어진다. 수년에 걸친 면벽기간동안 침묵을 지키던 달마는 그 충직한 제자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었다.

“제 마음은 평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제 마음을 진정시켜 주십시요.”달마가 대답했다.

“어디 자네 마음이란 것을 내놓아 보게. 그러면 내 그것을 진정시켜 줌세.”한동안 침묵이 흐른 끝에 혜가는 스승에게 “마음을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고 고백하였다.

달마가 말했다.

“좋아, 자네 마음은 이제 평온을 찾게 되었네.”

그 말을 듣는 순간, 혜가는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전등(傳燈)의 시작이다. 이후 선가(禪家)에서는 깨달음의 순간에 대한 수많은 일화들이 전해 내려온다. 우리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고민하다가 문득 그 답을 깨치게 되었을 때나 익살맞은 농담에 순간적으로 미소지을 때 느끼는 신비로운 경험을 통해 그 깨달음의 세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중국의 선종은 7세기에 등장한 천재 혜능(638~713)에 의해 크게 발전한다. 그뒤 한국과 일본에 전해져 극동불교의 대표적인 종파로 자리잡는다. 선(禪)은 중국어로는 찬(Chan), 일본어로는 젠(Zen)으로 발음된다.

선불교는 순수한 정신집중을 통해 언어와 감각의 실재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 사물과 자신 나아가 붓다의 존재마저 의심해보는 수련이 요구된다. 많은 선원(禪院)에선 불경(佛經)의 권위가 그리 높지 않다. 선체험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며, 개별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스승과 제자의 직접적인 관계가 매우 친밀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경전의 문구보다 조사(祖師)의 직접적인 이심전심 가르침이 더 중시되었다. 서양에도 “문자는 정신을 가두지만, 성령은 정신을 해방시킨다”는 속담이 있다.

좌선의 목적인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하여 가장 많이 이용되는 방법은 화두(話頭 혹은 公案)를 붙잡는 일이다. 화두는 대개 논리적인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물음으로 구성된다. 전형적인 화두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어느날 제자가 “부처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왔다. 동산수초선사(洞山守初禪師)는 “마삼근(摩三斤)”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에 무슨 특별한 상징적인 뜻이 담겼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에게 와서 물었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의미가 무엇입니까?” 스승이 대답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庭前栢樹子)”고 말했다. 제자가 단순한 물건을 대상으로 들었다고 항의하고 다시 질문했다. 그러자 조주는 다시 한번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고 대답했다.

서양에서 엄격한 수도원 생활규칙을 세운 성 베네딕트(St. Benedict)의 규범과 비교할만한 <백장청규(百丈淸規)>의 저자인 백장의 문하에는 많은 승려가 모여 들었다. 불어난 승려들을 수용할 새로운 절을 짓고, 그 절을 관리할 지도자를 뽑기 위하여 모두 모이게 했다. 그들 앞에 항아리를 하나 놓고, “‘항아리’란 말을 쓰지 않고 이게 뭔지 말해 보아라”고 했다. 수제자 중 한 사람이 나서서, “진흙조각도 아닙니다”고 대답했다. 이때 주방에서 일하던 젊은 스님이 지나가다 그 말을 듣고 항아리에 다가가 발로 찼다. 그는 아무 일이 없은듯이 다시 주방으로 가버렸다. 백장은 그 젊은 스님에게 새로 지은 사원을 맡겼다.

‘토요’라는 일본소년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는 열두살이 되던 해 모쿠라이 선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선사는 더 크면 오너라 하고 돌려보냈다. 소년은 다음날 다시 와서 졸라댔다. 할수없이 스승은 문제를 내주었다. “넌 두손으로 치는 손뼉소리를 들을 수 있을거다. 그렇다면 한 손으로 치는 손뼉소리를 내게 들려줄 수 있겠니?” 자기 방으로 돌아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소년의 귀에 이웃사람의 노래소리가 들렸다. “아! 알았다” 하고 소년은 외쳤다. 다음날 소년은 스승을 찾아가 그 노래소리를 흉내내었다. “아니다. 한손의 손뼉소리는 그게 아니다” 하고 스승이 말했다. 소년은 조용한 장소를 찾아갔다.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들려왔다. “그래, 이거야!” 하고 소년은 생각했다. 다음날 소년은 스승 앞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흉내냈다. “그건 물방울 소리인 것 같은데, 한 손 손뼉소리가 아니야. 더 찾아 보거라” 하고 스승이 말했다.

그뒤, 바람소리, 새소리, 귀뚜라미 소리 등등 많은 소리를 내었지만 모두 퇴짜맞았다. 일년이 넘었건만 소년은 여전히 한 손이 내는 손뼉소리를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스승에게 찾아가 “아무리 소리를 찾아 다녀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제 지쳤습니다. 차라리 아무 소리도 내지 않겠습니다”고 말했다. 스승이 말했다.

“이제야 찾았구나.”

- “우주전체 풀어야할 화두”-

- 지적이해 보다 체험 직관 중시-

- 다도· 꽃꽂이 등 생활선 일본서 정착 -

깨달음을 통한 자아발견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선사들은 가끔 화두 대신 거친 방법을 썼다. 한번은 수로화상이 마조(馬祖)를 방문하여 물었다. “달마조사가 서방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대답 대신 마조는 그에게 절을 하라고 명했다. 수로가 몸을 숙이자마자 마조는 그를 짓밟았다. 이상하게도 수로는 당장에 깨닫게 되었다. 일어나 손뼉을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기이하고 기이하다. 수백 수천의 삼매(三昧)와 무량한 묘의(妙義)가 한 터럭 끝에 그 근원을 두고 있구나!” 그는 스승에게 큰 절을 올리고 물러갔다. 수로는 후에 방장이 되고 난 후 가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조가 나를 짓밟은 후, 나는 줄곧 웃고 있다.”다른 선사들도 할(喝:고함소리)이나 방(棒:방망이) 등 충격요법을 사용했다. 덕산(德山)은 깨닫기 전에, 용담(龍潭)선사가 있는 절에 가서 머물게 되었다. 어느날 저녁, 선사가 좌정하고 있던 덕산에게 말하였다. “밤이 깊었는데 어찌 물러가 쉬지 않는가?” 덕산은 인사를 드리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밖으로 나갔다가 곧 다시 돌아와서 말하였다. “밖이 너무 어두워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선사는 호롱불을 켜서 그에게 건네 주었다. 그러나 덕산이 막 호롱불을 받으려하자 선사는 갑자기 불을 훅 불어 꺼버렸다. 이 순간에 덕산은 문득 깨달았고 스승에게 예배하였다.

선불교는 기독교나 이슬람 신비주의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수단에 불과한 논리적 도식(圖式)을 믿지 않는다. 수십권의 ‘신학대전’도 진리에 대한 구체적 체험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감각을 통한 인식보다는 직관적 인식을 더 선호한다. 셋째, 논리적 갑론을박을 초월하여 결정적 확신을 안겨주는 절대지(絶對智)를 추구한다. 이것을 파악한 사람은 전제(前提)나 결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는 현 단계에서의 사물들의 대립관계가 보다 높은 차원에서는 모두 통합된다는 것을 인지한다. 따라서 세속적인 도덕윤리관을 초월할 수 있게 된다. 성 어거스틴이 “먼저 사랑하라. 그러면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도 되리라”고 말한 것은, 깊은 사랑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악한 행위를 할 수 없으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넷째, 에고의 소멸을 말한다. 과거의 개인적 삶은 전체 속으로 용해되고 그때 평화와 법열(法悅)이 보상처럼 따라온다. 다섯째, 자아와 삼라만상이 모두 일체감을 가진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블레이크는 이렇게 노래했다. “모래알 속에서 우주를 보고, 들꽃 속에서 하늘을 본다. 너의 손바닥 안에 무한(無限, infinity)이 있으며, 찰라 속에 영원이 깃든다.” 여섯째, 무한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한편 이 종교들 사이의 차이점도 크다. 불교는 유일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선불교에선 무조건 믿는다는 것은 이해되기 어렵다. 유태교와 그 지파인 기독교와 이슬람에서와는 달리, 선불교에는 죄와 참회 그리고 용서라는 감상적인 개념들이 존재치 않는다. 깨달음은 기도와 두려움, 신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속죄 등에 의해 얻어지지 않는다. 덕산선사는 결코 기도하지도 않았고, 죄의 사함을 빌지도 않았으며, 불상(佛像)을 숭배하지도 않았다. 그는 경전에 매달리지도 않았고, 촛불을 켜고 두 손을 빌지도 않았다. 그의 생각에 그런 행위들은 형식적인 의례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깨달음을 향한 꾸준하고 집중적인 노력이었다.

대혜(大蕙)선사는 깨달음을 막 꺼지려는 촛불이나 우리 목에 댄 칼날로 비유했다. 이 우주 전체가 우리가 풀어야 할 생생한 화두이다. 모든 화두는 사실 우주라는 큰 화두에 포함되는 것이다. 또한 부분은 전체를 머금고 있다. 일중일체(一中一切)요, 다중일(多中一)이다. 작은 화두 하나가 풀리면, 우주 전체가 드러난다.

불교교리를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적 깨달음의 무아경(無我境)이다. 인도에서 흔히 쓰는 여행자의 비유가 있다. 어떤 사람이 사막을 걷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 피곤하고 목이 타서 죽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샘이 있는 곳의 길을 일러주었다. 그러나 길을 아는 것은 실제로 물을 마시는 것과는 다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샘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사막은 생사로 가득찬 속세이고, 목마른 여행자는 우리 모두이며, 길을 가리켜 준 자는 부처님이고, 샘은 열반(니르바나)이다.

불교는 언어와 변론을 믿지 않는다. 앞에서 얘기한대로, 붓다는 초기 설법에서, 화살에 맞은 사람에게 시급한 것은 화살에 맞은 이유가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했다. 선불교는 이 가르침에 충실하여 모든 의례와 논리와 사변에 앞서 정각(正覺)에 비중을 둔다. 따라서 갑자기 열린 꽃봉오리에 흔히 비유되는 깨달음이야말로 선의 시작이자 끝이다.

선(禪)은 그 가르침이 퍼졌던 사회의 일상생활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건축, 시, 회화, 서도 등 많은 예술이 선미(禪味)를 담고있다. 신중한 생략과 암시가 그 생명이다. 동양화의 여백미와 일본의 단시(短詩) 하이쿠(俳句)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하이쿠는 5·7·5조의 단시이다.

바람에 너울대는/풀잎끝 이슬방울/덧없는 인생

인형가게에 들린/자식없는 부인/만지작 만지작 인형을 못놓네

강물에 출렁이는/살구꽃 그림자/떠내려가진 않네

난간에 기대어/가을달을 바라보니/내 본래 얼굴이로다

검술과 궁술의 고된 수련도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흔히 정신수양의 한 방편으로 이용된다. 숙련된 궁사는 어둠속에서도 정확히 과녁을 맞춘다. 그는 정신적 안정을 통해 어둠을 꿰뚫는 심안(心眼)을 터득한 것이다.

생활속의 선불교는 일본에서 토착화되면서 일본예술혼의 기저를 이루었다. 불교의 유입과 함께 꽃꽂이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사원에서 의식(儀式)으로 시작된 꽃꽂이는 후에 민간에서도 널리 행해졌다. 꽃꽂이의 미학은 기묘한 불균형을 이루는 디자인 형태에 달려있다. 그것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징하는 세 요소의 조화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에 꽃꽂이 하는 사람의 신앙적 정성이 깃들면 그 아름다움은 배가 된다.

일본식 정원도 유명하다. 작은 공간에 바위와 관목 그리고 물로 자연스러움을 창조한다.

다도(茶道) 또한 선불교적 정서의 산물이다. 차를 마시는 일상의 작은 행위도 생의 오묘한 이면을 드러내고 고양시키는 신성한 종교적 의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27>불교와 윤리

- “부처님 가르침 행복의 길 제시”-

- 신분·인종 초월 진리의 삶 일깨워 -

네팔의 작은 왕국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나 정각(正覺)을 이룬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난 2천5백년 동안 동양의 무수한 사람들에게 인생의 지침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동양이란 지역적 범주에서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부처님은 신분과 인종을 넘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얻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길을 밝힌 것이다.

아래에 불교 경전에 전해지는 가르침을 인용한다.

증오는 결코 증오를 멈추게 할 수 없다. 사랑만이 증오를 멈추게 한다. 모든 옛 가르침이 이 점을 강조했다.

어느 전투에서 천명의 적을 굴복시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모르게 자기를 굴복시킨 사람도 있다. 이 중 진정한 승리자는 후자이다.

가슴속 불보다 더 뜨거운 불은 없다. 증오보다 더한 악은 없다. 육체에 끌려다니는 삶보다 더한 고통은 없다. 마음의 평화를 능가하는 행복이란 없다.

이 세상에서 착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행복을 가져다 준다. 이 세상에서 격정을 끊고 욕망을 극복하는 것은 행복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이기주의를 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최상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

행복이란, 무소유(無所有)를 깨닫고 진리를 구하여 지혜에 도달한 사람의 것이다. 가진 자가 겪는 저 고통을 보라. 스스로 사슬에 묶인 자가 거리에 가득하다.

이 세상의 온갖 고통과 슬픔은 모두 애욕(愛慾)으로 인해 일어난다. 따라서 이 땅에 대한 애욕을 버린 자는 자유롭고 행복하다. 만일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애욕(집착)을 가지지 마라.

속마음에 진심(瞋心, 노하는 마음)을 품지 않고, 유형(有形)·무형(無形)의 그 어떠한 사물에도 구애되지 않는 자에겐 귀신들도 범접할 수 없다. 그의 마음은 공포의 먹구름이 걷히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우며 행복이 충만하다.

언젠가 부처님이 숲속에 기거할 때, 어느 재가신자의 외아들이 죽었다. 그 아이의 일가 친척들이 밤새 장례를 치르고 새벽녘에 옷이 흠뻑 젖은채 지나가다 부처님과 마주쳤다. 부처님이 어디갔다 오느냐고 묻자 아버지가 대답했다. “부처님, 하나밖에 없는 제 아들이 죽었습니다. 정말 명랑하고 사랑스런 아이였답니다.” 부처님이 말했다. “사랑스런 겉모습이 주는 즐거움에 한눈 팔고, 괴로움과 늙어감에 어쩔줄 몰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신(死神)의 수중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밤낮으로 깨어 자신을 경책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외양에 이끌리지 않고, 고통의 뿌리를 송두리채 뽑으며, 극복하기 매우 어려운 죽음의 유혹을 물리친다.

어느 불한당이, 부처님이 악업(惡業)을 선업(善業)으로 갚아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가 욕을 했다. 부처님은 묵묵히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지쳤을 때, 부처님이 입을 열었다. “만일 누군가가 선물을 거절한다면, 그 선물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 그가 대답했다. “그야 물론 선물하려고 한 사람 것이 되겠죠.” 부처님이 덧붙였다. “네가 나에게 욕을 했는데, 내가 그것을 사양했으니 그 욕은 자네 것이 아닌가. 그 많은 욕을 붙들고 자네, 그래 앞으로 어찌 살아가려나?” 그 불한당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물러갔다. 그는 다시 돌아와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어느 부처님의 제자가 엄격한 고행생활에 지쳐 다시 쾌락적인 생활로 돌아가려고 했다. 부처님이 그를 불렀다.

“너는 옛날에 현악기를 잘 타지 않았느냐?”

“네, 그렇습니다.” 제자가 대답했다.

“줄이 강하게 매어졌을 때, 악기가 제소리를 내더냐?”

“아닙니다.”

“줄이 약하게 풀어졌을 땐 어떠냐?”

“역시 제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럼 너무 강하지도 않고, 너무 약하지도 않게 적당히 매어졌을 때 제소리가 나겠구나?”

“네.”

“그래, 영혼도 마찬가지란다. 너무 힘있게 조이면 편벽해지고, 너무 약하면 나약해진다. 그러니, 악기 조율할 때처럼 네 영혼을 가꾸도록 하여라.”

강이 두 왕국의 경계를 이루며 흘렀다. 양국의 농부들은 그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어느해 가뭄이 들어 농사지을 물이 모자라게 되었다. 서로 물을 끌어 들이려다 시비가 일었다. 급기야 양편의 농부들이 편싸움을 벌였다. 싸움에 진 농부들의 편을 들기 위하여 군대가 충돌했다. 이에 질세라 상대편의 군대도 달려왔다. 마지막엔 양쪽의 왕까지 정예부대를 이끌고 와서 대치하게 되었다. 일촉즉발의 순간에, 그 부근을 지나가던 부처님이 달려와 양 진영의 왕을 불러 모았다. 부처님이 왕들에게 말했다.

“저 강물과 여러분 백성의 피중 어느 것이 더 귀합니까?”

“예, 그야 물론 저 사람들의 피가 강물보다 귀합니다.”

“왕이여, 잘 생각해 보시오. 별것 아닌 것을 위해 고귀한 것을 희생시켜야 하는 지를! 전쟁이 일어나면 피의 강이 새로 생기겠지만, 저 강물의 수면은 조금도 올라가지 않을 것이오.”

부끄러움으로 뺨이 붉어진 양쪽의 왕들은 평화적으로 합의하여 강물을 나누기로 하였다. 며칠후 비가와서 다시 물이 풍족해졌다.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들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진리로 이끄는 최선의 윤리인 것이다.

편역:김홍근 <외대강사 ·문학평론가>

여기 까지 보르헤스 의 불교강의 변역 끝


여기 부터는 편역한 김홍근님의 의견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28>불교란 무엇인가(1)

- “苦 여의는 깨달음의 종교”-

- 사성제 ·팔정도 등 가르침 이해보다 체득해야 -

<보르헤스 불교강의>를 집필한 보르헤스는 그 내용을 압축하여 실제로 대중 앞에서 강연을 가졌다. 다음 글은 그가 1977년 7월6일 조국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콜로세움 극장에서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가진 강연 내용이다.

독자들은 이 글에서 그동안의 연재를 압축·정리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여러분들께 말씀드릴 주제는 불교입니다. 이천오백년전, 네팔의 어느 작은 왕국에서 싯타르타 혹은 고타마라 불리던 한 왕자가 태어나 정각(正覺)을 이루고, 베나레스에서 법륜(法輪)을 굴리기 시작하여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가르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선 불교사의 세세한 변천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대신 저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널리 퍼진 종교인 불교의 핵심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합니다. 불교는 기원전 5세기에 발생하여 전세계에 널리 퍼지면서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석가는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리토스, 피타고라스, 제논과 동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불교를 서구인들에게 알린 대표적인 인물은 일본의 타이스즈키(鈴木大拙)박사입니다. 석가가 가르친 내용이나 스즈키박사가 현대적인 용어로 소개한 내용이나 그 핵심은 모두 같습니다. 불교는 종파에 따라 신화, 우주론, 마술적 샤마니즘 등의 영향을 받아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지만, 역시 그 근본은 공통적이며 저는 그 공통적인 면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장구한 세월을 지탱해 온 불교의 생명력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불교의 생명력을 역사적인 이유만으로 설명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작위적이 되기 쉽고 많은 논란거리를 남길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두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첫번째는 불교의 포용성입니다. 다른 종교의 포용성은 제한적인 반면, 불교의 포용성은 시대와 장소에 상관없이 늘 그러해 왔습니다.

불교는 결코 쇠와 불의 힘을 믿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무력(칼)이나 종교재판(화형)으로 사람을 깨우치게 만들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인도의 아쇼카왕이 불교에 귀의했을 때, 그는 백성들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불교신자는 개신교나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소화할 수 있고, 그외 이슬람교나 유대교 혹은 유교나 도교도 포용할 수 있습니다. 타 종교모임에 참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기독교인이나 이슬람교도에겐 불교법회에 참석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불교의 관용성은 불교의 응집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불교의 본질이 관용적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본질은 우리가 흔히 요가라고 부르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요가란 어원적으로 라틴어 유구(yugu)와 같은 것으로,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규율(規律)을 의미합니다. 불교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2천5백년 전 붓다가 베나레스의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행한 설법의 내용을 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때 주의할 것은 그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 깊이 느끼는 것, 즉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뿐만아니라,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고 접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어떤 종교라도 단순한 지식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그것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가져야만 그 실상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불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붓다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붓다가 정각 후 베나레스에서 처음 설법한 내용인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 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그 뜻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붓다가 깨달아 전하고자 하는 우주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팔정도까지 설명하기엔 너무 번거롭기 때문에 불교의 핵심인 사성제를 살펴보는 데 주안점을 두겠습니다.

그전에, 붓다에 관한 전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선(禪)불교 신자인 어느 동양인 친구와 오랜 기간동안 가까이 지내면서 대화를 나누어 왔습니다. 이천 오백년 전에 싯타르타 혹은 고타마라 불리던 네팔의 한 태자가 살았고, 출가하여 붓다(이 말은 ‘깨어난 사람’을 의미하는데, 삶이라고 하는 긴 꿈을 꾸는 잠에서 깨어난 각자(覺者)라는 뜻입니다)가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믿어왔고, 지금도 믿습니다. ‘붓다’의 뜻을 말씀드리니, 제임스 조이스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역사란 내가 깨어나고 싶은 악몽이다”라고 그는 말했지요. 어쨌든 싯타르타 태자는 나이 서른 살에 인생이란 잠에서 깨어나 붓다가 되었습니다.

저는 불교신자인 그 동양인 친구와 자주 토론했습니다. “당신은 기원전 5세기에 카필라바스투 지방에서 태어난 싯타르타 태자에 대해 왜 믿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왜냐하면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요. 중요한 것은 진리를 깨치는 것입니다.” 그는 이어 천진난만한 얼굴로 덧붙이기를, 역사적인 붓다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거나 믿는다는 것은 마치 수학 공식을 공부하는 것과 피타고라스의 전기를 혼동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극동지방의 산사(山寺)에서는 스님들이 참선을 할때 몰두하는 주제(話頭) 중의 하나로 붓다의 존재를 의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일종의 관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대부분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합니다. 기독교 신자라면, 삼위일체 중의 하나인 성자(聖子)가 지상으로 강림하여 인간의 생을 살면서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필히 믿어야만 합니다. 불교신자는 돈독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붓다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붓다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을 믿는 것보다는 그분이 남긴 가르침을 믿는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에 관한 전설은 너무도 아름다와서 저는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홍근<외대강사·문학평론가>

​- 法의 맛은 한가지 해탈의 맛-

- 불교의 요지는 오직 한가지 견성성불에 있습니다.-

- 우리몸에 박힌 화살 ‘자아’를 뽑아내야 합니다.-

붓다의 전설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깊이 연구한 사람은 프랑스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붓다의 전기는 일정한 기간을 살다 간 한 인간에 관한 기록이므로 그 내용에 대해선 특별히 문제삼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붓다에 관한 전설은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그들에게 영감을 주어왔기 때문에 그 내용이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붓다의 전설은 많은 나라에서 수천년동안 수많은 아름다운 그림과 조각과 시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하나의 종교일 뿐만 아니라 신화, 우주관, 정교한 철학체계(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이기도 해서 그것이 담아서 소화해내지 못할 인간의 사고가 없을 정도입니다. 불전(佛傳)에서 전하는 붓다의 생애중 가장 중요한 대목은 역시 그가 정각을 이루는 장면입니다.

성불(成佛)을 이루고 난 붓다는 법을 설(說)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정각을 이뤄 고해(苦海)를 건넌 붓다는 다른 중생들도 건네 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는 베나레스의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합니다. 이어 계속 법을 설하는데, 초기 설법 중에는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고 하는 ‘불의 비유’가 있습니다. 즉 육체와 정신과 사물이 모두 불붙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시기 서양에선 그리스 에페소 출신의 철학자 헤라클리토스가 ‘모든 것은 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붓다가 가르친 법은 고행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붓다는 고행이 잘못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저속하고 비천하여 고통스러운 육체적 삶에 빠져서도 안되지만, 그 못지않게 천박하며 괴로운 고행의 삶에 매여서도 안됩니다. 붓다는 그 양 극단을 여윈 중도(中道)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후 사십년 이상을 살면서 대중을 일깨우는데 힘썼습니다.

그는 많은 제자를 두었고, 임종의 때가 오자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스승을 둘러싼 제자들은 모두 상심하였습니다. ‘스승이 안계시면 우린 어떡하나’ 하고 탄식하였습니다. 붓다는 말하기를, 자신도 제자들처럼 인간으로서는 무상(無常)하고 비실재(非實在)의 존재이며 그러나 대신 그들에게 법(法)을 남기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붓다와 예수의 큰 차이점을 보게 됩니다. 예수는 죽기 전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만일 두 사람이 모인다면 자신이 그 모임의 세번째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면 붓다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즉, 그는 첫번째 설법에서부터 가르침의 바퀴(法輪)를 굴렸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사후 불교는 아시아 전역으로 퍼지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라마불교, 탄트라불교, 소승불교, 대승불교, 선불교 등 오늘날 불교의 모습은 매우 다채롭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붓다가 처음 설법한 불교의 핵심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극동지방에서 가르치는 선불교(禪佛敎)라고 봅니다. 그외에는 신화적이거나 주술적인 요소가 많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우화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불교도 있는데, 어떤 것은 그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부처님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같은 기적을 싫어하였습니다. 그에겐 기적이 속된 허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여기 백단(白檀) 나무그릇(鉢盂)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인도의 어느 도시에서 부유한 상인 하나가 박하 향이 나는 백단나무로 귀한 발우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미끄러운 대나무 꼭대기 높은 곳에 그 그릇을 올려놓고, 누구든 기어올라가는 사람에게 주겠노라 하였습니다. 외문(外門)의 수도승들이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헛되이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붓다의 어린제자 중 한명이 공중제비를 돌아 대나무 꼭대기를 여섯번이나 돌면서 발우를 집어 땅에 내려왔습니다. 상인은 그에게 발우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붓다는 그를 교단에서 추방하였습니다. 괜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붓다도 예절을 지키기 위해 기적을 행했다고 불전은 전합니다. 어느날 붓다는 한낮에 사막을 가로질러 가야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삼십 삼천(天)의 신들은 각자 그림자를 하나씩 땅위에 드리웠습니다. 붓다는 그 어느 누구도 섭섭하게 만들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삼십 삼인으로 나누어 모든 그림자의 보호를 받도록 하였다 합니다.

붓다가 가르친 비유 중에는 아주 교훈적인 것이 많은데, 그중 화살의 비유가 유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전쟁에서 부상을 당했는데, 그는 자신의 몸에서 화살을 빼려고 하지 않고, 먼저 누가 쏘았는지, 그가 어느 카스트 계급에 속하는지, 화살의 재료가 무엇인지, 그 사람이 어느 방향에서 쏘았는지, 화살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 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문제에 대해 옆사람과 논쟁하다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붓다가 말하기를, “반면에 나는 화살 뽑는 것을 가르친다”고 하였습니다. 화살은 무엇입니까? 화살은 우리 모두가 마음에 박힌 채 다니는 자아(自我)입니다. 붓다는 우리에게 쓸데없는 문제에 헛되이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붓다는 열반 뒤에도 계속 살 것인가, 아닌가? 이런 질문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몸에 박힌 화살을 뽑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자각이 해탈을 위한 중요한 관문입니다.

붓다는 말합니다. “대양(大洋)의 그 많은 물이 모두 한가지 소금맛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법의 맛은 모두 한가지 해탈의 맛을 가지고 있다.” 그가 가르치는 법문은 바다처럼 넓고 다양하나 오직 한가지 목적-견성성불(見性成佛)하여 해탈에 이르는 것으로 초점이 모아집니다. 물론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많은 학승들이 나와 복잡한 형이상학적 논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결국 불교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이점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불교신자는 그 어떤 다른 종교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해탈법문과 사성제(四聖諦) 즉, 고(苦)와 고의 원인(集)과 고의 치유(滅)와 치유에 이르는 길(道)입니다. 그 길의 끝에는 니르바나(涅槃)가 있습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사성제의 순서는 고대의 의료전통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그 전통이란 발병, 진단, 처방 그리고 치유의 단계를 말합니다. 여기서 치유란 열반을 가리킵니다.

 

유일神 부정…業力따라 윤회

“우리는 생의 한순간도 쉬지않고 인연의 천을 짜고 있습니다 ”

이제 어려운 문제에 접어 들었습니다.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윤회’를 알아봅시다. 이 문제는 서구에서 문학에서만 조금 다루었을뿐,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낯선 것입니다. 윤회의 주체는 영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교에선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윤회하는 것은 업(業, karma)인데, 그것은 일종의 정신작용으로서 무한히 전생(轉生)하는 것입니다. 서구에서도 이런 생각을 한 사상가가 여럿 있는데, 특히 피타고라스가 대표적입니다. 피타고라스는 전생에서 트로이전쟁에 참가하였다고 하는데, 그 전쟁에서 사용했던 방패를 어느 사원에서 발견하였습니다. 플라톤의 <신국론(神國論)> 제 10권에는 ‘에르’라는 이름의 병사의 꿈이야기가 나옵니다. 환생할 영혼들이 망각의 강물을 마시기 전에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는 것을 그는 꿈에서 봅니다. 그는 아가멤토(트로이전쟁의 그리스코 총사령관)가 독수리를, 오르페우스(그리스신화의 하프의 신)가 백조를 그리고 율리시스가 인간중에서 가장 비천한 자로 환생하도록 선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엠페도클레스는 전생을 기억해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가씨였고, 사슴이었으며, 바다의 말못하는 고기였다.” 시저는 영국 켈트족의 사제계급인 두루이다들이 윤회를 믿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켈트족의 시인 탈리에시는, 자신은 우주의 모든 사물이 되어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전쟁터의 장군이었고, 손에 들린 칼이었으며, 육십개의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였고, 마술에 걸려 물방울 속에 갖혔으며, 밤하늘의 별이었고, 빛이었으며, 나무였고, 어느 책의 글자였으며, 맨 처음엔 한권의 책이었다.” 니카라구아 출신으로 중남미의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루벤 다리오는 자신의 아름다운 시를, “나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침대에서 잠을 잤던 병사였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윤회는 문학의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신비주의자들에게서도 윤회사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플로티누스는 말하기를, 이 생에서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것은 마치 이 침대에서 자다가 다른 침대로, 혹은 이 방에서 자다가 다른 방에서 자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전생에서도 이런 행동을 한 것 같은 감정을 느끼는 때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단테 가쓰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의 아름다운 시에 보면 “나는 전생에도 이 자리에 있었다”는 귀절이 나옵니다. 이어 그는 사랑하는 여인에 대하여, “당신은 과거에 무수한 생 동안 내것이었소. 그리고 앞으로도 무한히 내것이 될 것이오”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서양에서도 불교의 윤회와 가까운 순환설이 있었습니다. 성 어그스틴 같은 이는 <신국론(神國論)>에서 그것을 비판했지요.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과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은, ‘겁’이라고 하는 무한한 시간의 주기로 우주가 구성되어 있다는 힌두사상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윤회를 믿은 것이지요. ‘겁’이라고 하는 시간 단위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여기 천미터가 넘는 쇠로된 산이 있다고 합시다. 육백년마다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그녀의 비단옷으로 그 철산을 스치는데 그 철산이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 일겁의 하루에 해당합니다. 신들의 수명은 대개 겁 단위로 되어있다고 합니다.

힌두 전통에 의하면, 우주의 역사는 주기별로 나뉘며, 주기와 주기 사이 기간에는 베다의 말씀만 남는다고 합니다. 그 말씀에 따라 다음 주기의 세상이 창조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브라만 신조차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며 윤회한다고 합니다.

언젠가 겁의 시간이 흐른뒤 브라만 신은 다시 태어나 자신의 궁전을 둘러보았습니다. 방과 낭하가 모두 텅 비어 쓸쓸했습니다. 그는 다른 신들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는 다른 신들과 생명들을 창조하였습니다. 창조되어 태어난 신들은 먼저 태어나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브라만 신을 보고, 그가 창조주라고 믿었습니다.

이쯤에서 거시적 우주사에 대한 말씀을 줄이겠습니다. 불교에는 신(神)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혹은 신이 있다 해도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운명이 전생의 업(業)에 의하여 미리 정해졌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1899년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난 것, 내가 만년에 눈이 멀은 것, 오늘밤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강연하는 것 등 이 모두가 내가 전생에 지은 업의 작용입니다. 현세에서의 나의 행동 중 전생의 행위와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업(業)이라는 것입니다. 업이란 너무도 정교한 정신적 구조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의 어느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인연의 천을 짜고 있습니다. 이 천을 구성하는 실은 우리들의 의지, 행동, 잠, 불면 그리고 꿈까지도 그 재료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그 천을 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때, 우리의 업을 계승하는 다른 존재가 태어나는 것입니다.쇼펜하우어의 제자인 도이센(Deussen) 은 불교를 너무나 좋아했는데, 인도여행중 거리에서 장님 거지를 만났습니다. 너무나 불쌍해 보여 그를 동정하니, 그 거지가 말하기를 “제가 장님으로 태어난 건 모두 전생의 업보 때문이지요. 제 눈이 멀은건 죄가를 치르느라 그런 겁니다. 합당한 결과지요.” 인도 사람들은 고통을 피하지 않습니다. 간디는 병원의 설립을 반대한 적이 있습니다. 병원과 원호시설들은 사람이 자신의 빚을 갚을 기회를 단지 연기시킬 뿐이라는 거지요. 남을 도와줄 때도 신중해야 합니다. 어차피 빚을 갚기 위한 고통이라면, 또한 자신의 잘못을 상쇄시켜줄 어려움이라면, 그것을 겪는 것을 피하게 하는 것은 곧 그 빚을 탕감하는 기회를 지연시키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업은 인정사정이 없는 윤리유지 법이지만, 단순히 전생의 행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현생은 전생에 의해 결정되지만, 전생은 전전생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이렇게 끝없이 원인은 소급됩니다. 인도인들과 불교신자들은 일반적으로 현생이 과거에 무한한 생을 거쳐 왔다고 믿습니다

 

주체 부정…기본 가르침 ‘無我’

‘나는 생각한다 ’→잘못 ‘생각이 일어난다 ’→타당

순간에 충실 ·부정훈련 거듭하면 깨달음 만나

인간에게 허용된 여섯가지의 운명(六道輪廻) 중에서, 다시 얻기 가장 어려운 길은 인간이라는 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소중한 기회를 최대한 살려야 합니다. 붓다는 비유를 빌어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거북이 한 마리가 바다속에 살았는데, 육백년에 한번 수면으로 올라옵니다. 그 거북의 머리가 넓은 망망대해에 떠 있던 나무팔찌에 끼일 확률이 바로 인간 몸을 받고 태어날 수 있는 확률이라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기회에 우리는 성심전력하여 성불(成佛)을 이루고 열반에 들도록 노력하라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신(神)의 개념을 부정하고,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이란 존재치 않는다면, 삶의 의미와 고통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때 떠오르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이라는 개념입니다. 이 용어는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기에, 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을 빌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쇼펜하우어의 <의지(意志)>를 생각해 봅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를 인식하였습니다. 하나의 의지가 있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육화(肉化)하고 또 세계라는 표상을 만들었습니다. 이 의지는 철학자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표현됩니다. 베르그송은 ‘생의 충동(Elan vital)’이라고 불렀고, 버나드 쇼는 ‘생명력(the life force)’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베르그송과 쇼는 ‘생의 충동’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꿈꾸고 창조해 나가기에 힘써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와 붓다는 세계를 하나의 꿈(幻)이라고 보고,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랜 수련에 의하여 그러한 각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삶이란 어쩔 수 없이 불행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산다는 것은 태어나고(生), 늙어가며(老), 병들기도 하다가(病), 이윽고 죽습니다(死).

인생에는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괴로움이 있는데, 그 중에는 붓다의 말씀 중 가장 정(情)적인 표현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지 못하는 괴로움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자살은 무모한 행위입니다. 그것이 감정적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꿈속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계가 하나의 환영(幻影)이며 따라서 생이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서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때문에 불교에서는 정신수련과 명상을 중시합니다. 불교사원에서 하는 수련법 중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수련자는 매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주인공이라 부르고, 지금은 정오다, 지금 나는 뜰을 지나고 있다, 나는 지금 스승을 만나러 가고 있다고 되뇌어야 합니다. 동시에 그는 주인공과 정오, 뜰과 스승 그리고 그런 생각조차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아(無我)는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가지는 가장 큰 착각이 ‘나’라는 의식입니다. 이 점은 철학자 흄과 소펜하우어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주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련의 정신적 상태만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나는 생각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아(常我)와 그것의 작용인 생각을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대신 흄이 제시한 것처럼,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생각이 일어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우리는 ‘누군가 비를 오게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비가 온다’이지요. 주체가 끼어들지 않습니다. 날씨가 덥다고 하지 누군가가 날씨를 덥게 한다가 아닙니다. 이처럼 ‘내가 생각한다’가 아니라 ‘생각이 난다’이며, ‘누군가가 나를 아프게 한다’가 아니라 그냥 ‘나는 아프다’입니다. 이처럼 주체라는 고정관념으로부터 탈피해야 합니다.

불교사원에서 초심자들은 매우 어려운 수행을 거쳐야 합니다. 그들이 사원을 떠나겠다면 붙잡지 않습니다. 어떤 곳에선 수행자들의 명단을 만들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내 비서인 마리아고다마(일본계 혼혈로 나중에 보르헤스의 부인이 됨)가 한 말입니다. 초심자가 처음 절에 들어오면 매우 힘든 일을 해야 합니다. 밥짓고, 청소하고, 마당을 쓰는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어서 낮잠잘 틈도 없습니다. 이렇게 그는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의 정신이 다다라야 하는 종착역은 이 세상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는 부정의 훈련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선불교와 달마대사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보리달마는 6세기경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달마대사를 맞이한 중국의 황제는, 불교를 보호하고 후원하는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하여 사원과 수행승의 숫자를 쭉 열거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달마대사가 말하기를, “그 모든 것은 환영(幻影)의 세계에 속합니다. 사원과 승려들은 모두 무상(無常)한 것이고, 이 점에서 폐하나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어전에서 물러나 장시간의 면벽참선에 들어갔습니다.

달마대사를 시조로 하는 선불교는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들어갔습니다. 선불교는 깨달음에 이르는 독특한 수행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선 수년간의 수련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깨달음은 갑자기 옵니다. 그것은 결코 삼단논법이나 연역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즉각적으로 진리를 자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논리를 넘어서는 갑작스런 깨침(일본어로는 흔히 사토리라 합니다) 입니다.

 

그림자 없는 행위 ‘열반 도달’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불교는 인류 구원의 문화유산 모두 정신의 자양분 삼으십시오"

우리는 늘상 주체·객체, 원인·결과, 논리·비논리, 이것·저것의 이분법적 구분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단순 편가름을 넘어서야 합니다. 선사들은 논리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를 제자에게 제시함으로써, 이들이 논리를 초월할 때 비로소 도달하는 진리를 깨우치게 유도합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붓다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스승은, “뜰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효과를 겨냥한 아주 비논리적인 대답입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보리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물었습니다. 스승은 “마삼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말은 사실은 즉각적으로 영감을 일깨우기 위한 방법입니다. 말대신 때리거나 고함칠 수도 있습니다. 제자의 물음에 대하여 스승은 흔히 폭력으로 대답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보리달마에 대해, 지금은 거의 전설적인 것이 되어버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면벽참선 하고 있는 보리달마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찾아와 제자되기를 청하며 그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렸습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왼팔을 끊어 자신의 단심(丹心)의 증거로 스승께 올렸습니다. 그로서는 심사숙고 끝에 그런 행동을 감행한 것입니다. 스승은 그것마저도 환영(幻影)에 속하는 물질세계의 일이므로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그를 불러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불안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혀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스승은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러면 네 마음을 가라앉혀주마” 하고 대답했습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 제자는 “아무리 찾아도 마음을 못찾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스승은 원래 존재하지 않기에, 제 아무리 마음을 찾아도 만날 수 없으리라고 하는 암시를 주었습니다. 그 말에 제자는 즉각 진리를 깨쳤습니다. 그는 자아란 존재치 않는다는 것과 모든 것이 실체를 결여하기 때문에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선불교의 핵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불교처럼, 신앙을 구속하는 교리를 표명하지 않는 종교를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불교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불교를 나와 무관한 타문화로 볼게 아니라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해 보는 사람만이 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우리에게 생각하기를 요구하는데, 그 생각이란 우리의 죄와 그 속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본바탕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서구인을 가장 사로잡는 테마인 죄의식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불교는 우리 삶의 본질을 직시하라고 가르칩니다. 만일 제가 불교승이라면 이 순간 이제 막 살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저의 이전의 삶은 모두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처럼 이 시간 이전의 모든 우주사(史)도 꿈에 불과합니다. 선의 세계는 미묘한 지적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자아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나는 행복할 수 있다거나 나는 행복하여야 한다라는 생각을 넘어설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평안한 마음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열반이 가만히 앉아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붓다 자신이 그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붓다는 성스러운 보리수 아래서 열반에 들고난 뒤 그냥 계속 앉아만 있었던게 아니라 수십년간 중생들과 어울리며 가르침을 폈습니다.

열반에 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간단히 말해, 우리들의 행위가 이제 더이상 그림자를 던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행위 하나하나는 업(業)이라는 정신적 그물을 짜나갑니다. 우리가 열반에 도달하면 우리들의 행위는 이제 더이상 그림자를 남기지 않게 되고, 우리들은 자유로와지게 됩니다. 성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받게되면 도무지 선과 악을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않고 계속 선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열반이란 무엇입니까? 서구에서 불교가 일으킨 반향의 상당부분은 ‘니르바나’라고 발음되는 이 아름다운 말에 힘입은 바 큽니다. 그 말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습니다. 니르바나라는 말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무엇입니까? 불이 꺼지는 것 혹은 소멸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아마도 니르바나에 이르면 욕망의 불이 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흔히 열반이란 용어는 큰 소멸, 즉 죽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어느 불교학자가 지적하기를, 붓다 당시의 인도 물리학에선 지금과는 달리 불이 꺼져도 불이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붓다는 그런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불이 꺼지더라도 그 불은 없어지는게 아니라 다른 상태로 변할 뿐이라는 거지요. 따라서 니르바나가 단순한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지속됩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인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의 초월적 경험을 흔히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감정을 표현하는 용어로 나타냅니다. 그들은 포옹, 장미, 포도주 등으로 초월자와의 합일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열반은 그런 비유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열반은 종종 폭퐁우치는 바다 가운데 있는 안전하고 단단한 땅인 섬으로 비유됩니다. 혹은 높은 탑이나 정원으로 비유됩니다. 그것은 사념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불교는 그야말로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많은 시간동안 불교에 몰두했습니다마는, 솔직히 말해 제가 알고 있는 불교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밤 이 자리에서 말씀드린 불교이야기는 박물관 중에서 유물 한 점을 보여드린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제게 불교는 단순한 한 점의 유물이 아닙니다. 불교는 저에게 있어 구원의 길입니다. 아니, 저뿐 아니라 수억의 사람들에게 그러합니다. 불교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퍼진 종교이며 우

리 모두가 정신의 자양분으로 삼아야 할 인류의 숭고한 문화유산입니다. 오늘밤 이 소중한 주제에 대한 제 말씀을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33>연재를 마치고 <좌담회>

- “화엄의 바다에서 리얼리티 찾아”-

- 무아사상 심취 포스트모더니즘영향 -

*참석자

조달공 <성균관대며예교수>

김호성 <동국대강사>

김홍근 <편역자 외국어대강사 >

현대불교신문은 지난 1월 17일자(61호)부터 32회동안 연재해 온 ‘보르헤스의 불교강의’를 마감하며 그간 연재된 내용을 정리하고 불교와 보르헤스문학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좌담을 마련했다. 이 좌담에는 조달공씨(성대명예교수), 김호성씨(동대강사), 편역자 김홍근씨(외대강사)가 참여했다. <편집자 주>

김홍근: ‘보르헤스의 불교강의’를 연재하며 그의 불교에 대한 천착(穿鑿)에 가장 감명 받은 사람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편역자의 입장에서 보다는 첫 독자로서의 입장에서 그의 글을 읽고 정리하며 저는 두가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동양인도 유럽인도 아닌 아르헨티나, 중남미인이 불교라는 종교와 그 사상을 어떻게 보았느냐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종교학자나 철학자가 아닌 문인가 그것도 환상문학을 하는 입장에서 불교를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조달공: 이번 연재를 보며 저도 보르헤스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의 영향은 프랑스 문학에도 지대하게 끼쳐져서 까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자를 밟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문학가로서 어떻게 불교의 정신을 그토록 정확히 받아 들이고 자기화 시켰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김호성: 동양권 종교 사상의 큰 기둥인 불교가 근대 이후 서구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이야 잘 알려진 얘기지만 보르헤스란 인물을 알면서 저도 상당히 놀란 것이 사실입니다. 그의 <불교강의>는 우리나라에서도 넓게 읽혀져야할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저는 그의 소설을 몇편 읽었는데 상당히 어렵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의상스님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김홍근: 그의 <불교강의>나 강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마음에 꼭 각인된 것, 다시말해 자신이 충분히 소화한 것만을 남에게 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철저히 천착하며 불교를 자기화 시켰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 그는 부처님의 생애와 전생담과 같은 불전(佛傳)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호성: 저는 굳이 ‘전설상의 붓다’와 ‘역사상의 붓다’를 구분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갖습니다. 부처님의 전기는 합리성과 역사성으로만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관심 가졌던 설화적 요소들은 이미 우리들도 다 듣고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전설적인 붓다’와 ‘역사적인 붓다’를 구분하는 것은 근래의 일이고 불교전통 자체는 그것이 어우러져서 서술되는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조달공: 불교를 역사적으로 풀이하려는 것은 학자들의 입장이고 그 존재에 대한 믿음의 필요성은 보편적인 사람들의 입장입니다. 불교적 특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전생담’과 같은 이야기는 믿음의 차원에서 보편적으로 받아 들여져야 하는 것이지 역사나 전설이나 신화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불교본래의 의미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김홍근: 바로 그런 점에 보르헤스의 특성이 있습니다. 그는 2백여년간 서구를 지배해 온 이성주의에 대한 회의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설화적 요소를 통해 상상력을 발현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설화를 통해 보다 원형에 가까운 붓다의 모습을 보려했습니다. 이는 곧 그의 문학관으로 직결됩니다. 그는 늘 질문했습니다. 무엇이 리얼리티냐 라고 말입니다. 그 질문에서 그는 “이성적 판단에 의지한 사실은 환영(겉모습)이다.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을 봐야한다”라는 답을 얻은 것이고 거기서 그의 환상적 사실주의 문학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조달공: 리얼리티란 불교에서 보면 현상계의 반쪽에 지나지 않는것입니다. 진리의 본체는 현상의 리얼리티로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리얼리티는 인식계의 한 모습에 불과하고 진리의 얼굴 즉, 진리의 본체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김호성: 아까 의상스님을 생각했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스님은 <화엄일승법계도기>를 쓰셨고 또 <법성게>를 쓰셨는데 시의 형식을 빌었습니다. 후에 누가 “왜 시에 의지해서 법계의 진리를 나타내려 했는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스님은 “허(虛)에 즉하여 실(實)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답합니다. 허는 환상 허구이고 실은 사실인데 허와 실이 둘이 아니란 것이지요. 보르헤스도 그걸 잘 파악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의 허구를 통한 리얼리티, 환상적 사실주의는 화엄의 이치와도 통해 있는 것입니다. 화엄의 인드라망이나 일중일체 다즉일의 진리를 문학에 충분히 용해시켰다는데 그의 위대성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김홍근: 그의 환상적 사실주의란 ‘색즉시공’의 문학적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부처님의 전기 중 깨달음의 장면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서 <알레프>와 같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조달공: 그는 니체나 쇼펜하우어의 정신을 많이 읽었는데 그런 영향도 영향이지만 <알레프>와 같은 작품을 통해 서구의 시간관과 세계관을 부정하고 불교적인 시간관과 세계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역시 그가 불교를 체득하여 문학에 용해시킨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김홍근: 보르헤스는 윤회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윤회의 주체를 ‘업’으로 파악하고 업사상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업과 관련한 견해를 ‘현생의 나의 행동 가운데 전생의 나의 행동과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업이란 쉬지 않고 짜여지는 인연의 그물이다’라고 피력했습니다. 서구사상에 미로의 개념이 있습니다만 그는 업의 그물을 체득함으로 공간적 미로가 아닌 ‘시간적 미로’라는 아이디어를 얻게 된 것입니다. 서구인에게 쉽게 이해되지는 않으리라고 자신도 생각했던 이 업보사상을 그는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을 통해 표현 하고자 했습니다.

김호성: 보르헤스는 윤회를 매우 길게 얘기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윤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학계에서도 윤회의 주체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아무래도 윤회의 주체는 업이라는 쪽이 많은 설득력을 갖습니다. 보르헤스도 이를 제대로 본 것입니다. 그가 얻은 미로라는 아이디어는 의상의 법계도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 법계도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의 업이고 최종에는 정각을 이루는 것입니다. 서양의 미로에 대한 아이디어는 그 핵심에 신(神)을 두고 그 신을 보면 죽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법계도는 그 핵심에 붓다 즉, 성불을 둡니다.

조달공: 윤회란 그것을 따지기도 이전의 필연입니다. 사물이나 시간이란 것도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꽃이 피었다 지는 것을 보는 시각을 의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서구 기독교의 경우 시간의 시작과 끝을 얘기하지만 불교는 지옥이나 극락 마저도 윤회의 한 과정(장소)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인간 구제에 대한 관점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신의 의지를 내세운다면 불교는 인연의 흐름을 말하죠. 그러니까 모든 것의 주체는 자기이고 모든 인연도 결국은 자기의 것이어서 성불도 자기의 일이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이 자신의 확대된 개념이 중생이고 우주이고 법계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김홍근: 그렇기 때문에 궁극으로 확대된 자아(自我), 그러니까 ‘무아(無我)’에 대한 관심이 보르헤스를 지배하기도 했던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는 이 테마에 심취해 연극에서의 배우와 관객의 의미를 설정했습니다. 배우로서의 나가 있지만 그를 바라보는 관객으로서의 나도 있다는 이 아이디어는 상당히 신선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김호성: 무아라는 것은 서구사상에서 하나의 방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와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 정설이었는데 우파니샤드 등의 인도사상에 영향 받은 쇼펜하우어나 니체 같은 사람들이 이 정설을 부정하는데, 실체 존재 이성 로고스에의 구조적 부정은 요즘 얘기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황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보르헤스의 관심이 무아설에 얼마나 깊게 들어갔는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조달공: 불교에 많은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나 니체를 서양에서는 리힐리스트(허무주의자)로 몰아 세우기도 했지만 그들은 허무주의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불교는 허무주의와 전혀 다르니까요.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플라톤에서 시작 된다고 봅니다. 2차대전이 끝나며 벽에 막힌 현실을 탈피하려는 노력에서 비로소 존재의 가치를 실체와 현상에서만 찾지 않고 보다 깊은 곳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프랑스를 비롯해 많은 실천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사회의 사상적 근저인 ‘진리는 고정불변’이란 관념이 깨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힘들었습니다. 무상을 몰랐던 것이지요. 플라톤의 원소이론만 해도 무상의 진리를 내포한 것인데 그 자체를 활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김호성: 얼마전에 원로학자 김지견 박사님은 ‘포스트모더니즘은 의상(義相)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의상은 ‘법계도기’를 쓰고도 자신의 이름을 붙히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쓰면 이미 집착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스님은 ‘무유주(無有主)’라 했습니다. 보르헤스도 무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매우 깊었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김홍근: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텍스트는 연기론이라는 측면에서 고정불변의 텍스트는 없다는 개념을 확고히 할 수 있습니다. 보르헤스도 도서관과 책의 얘기에서 이에대한 언급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선불교에 대한 관심도 지대해서 ‘보르헤스와 나’라는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김호성: 선불교에 대해 그는 ‘부처님 가르침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가지고 있는 것이 극동지역의 선불교’라고 말했는데 저는 이 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초전법륜 속의 근본진리를 꿰뚫는 선불교의 모습에 그는 상당히 매력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김홍근: 보르헤스의 문학이 폭넓게 소개되는 것과 함께 그의 불교적 천착 그리고 문학에 영향 끼친 불교의 요체들을 점검해 보니 역시 보르헤스는 아직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줄 큰 인물임을 느낍니다. 우리나라의 불교학자나 문인 또는 일반 불자와 독자들 모두가 문학가로서의 보르헤스와 불교를 폭넓게 소화한 사상가로서의 보르헤스를 균형있게 만나는 기회가 많길 바랍니다.

정리=임연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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