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고전의 시작] 용수_ 중론中論

수선님 2020. 5. 31. 12:45

절대적이고 고정적인 건 없나니
_용수(龍樹) 《중론中論》

 

죽음과 삶을 자유자재로 한 사람

안티바하나 왕에게 샤크티만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외투를 주자 그는 말했다. “이 외투는 제가 왕위에 오를 때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네가 왕위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너의 아버지와 스승 용수는 불로장생의 약을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에 네 아버지의 수명은 스승 용수의 수명과 같을 것이다.”

왕자는 용수가 머물러 있던 슈리파르바타로 떠났다. 용수는 머리를 세우고 왕자에게 가르침을 주기 시작했다. 그때 왕자는 칼로 스승의 목을 베었으나 실패했다. 용수가 말했다. “예전에 내가 쿠샤라는 풀의 줄기를 자르는 바람에 벌레가 죽은 일이 있다. 그 업이 지금도 나에게 계속되고 있다. 나의 목은 쿠샤라는 풀로 자를 수 있을 것이다.”

왕자는 쿠샤라는 풀로 용수의 목을 베었다. 그 순간 용수의 잘린 머리에서 노래가 들려왔다. “나는 지금 극락으로 갈 것이다. 나중에 나는 다시 그 몸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나중에 한 여인이 용수의 머리와 몸을 가까이에 두었다. 그러자 머리와 몸은 썩지 않고 매년 가까워졌다. 마침내 머리와 몸이 하나가 되어 다시 가르치고 중생을 위하여 활동했다.

티벳의 승려 부톤이 쓴 《불교사》에 전하는 용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다. 용수(龍樹, 150?~250?)의 인도 이름은 나가르주나다. ‘나가’는 용(龍)이란 말이고, ‘아르주나’는 ‘힘을 획득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톤이 전하는 얘기에서 두 가지의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나가르주나가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추앙받았다는 사실이다. 부톤은 나가르주나가 죽음과 삶을 자유자재로 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나가르주나의 신비한 능력은 이름의 유래에서도 알 수 있다. 본래 이름은 슈리만이었는데 용궁에 가서 용들을 설복시키고 돌아온 후에 나가르주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가르주나는 용궁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용을 설득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양 극단에 머물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나가르주나의 가르침이 연기(緣起)였다는 점이다. 연기란 모든 사물과 현상이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없어진다는 말이다. 원인과 조건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우리는 지금 책을 보고 있다. 이 책은 종이가 있어 생겨났다. 종이는 나무가 있어 생겨났다. 나무가 없다면 종이가 없고 종이가 없으면 책이 없다.

나가르주나의 죽음을 보자. 나가르주나는 쿠샤라는 풀의 줄기를 잘라 벌레가 죽게 하는 죄를 저질렀다. 그래서 나가르주나를 칼로는 죽일 수 없고 쿠샤라는 풀로만 죽일 수 있다. 쿠샤라는 풀의 줄기를 자른 원인이 있었기에 쿠샤라는 풀로 죽임을 당하는 결과가 있다.

나가르주나의 가르침이 연기였음은 《중론》의 서문에 해당하는 제1품 제2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희론(戱論)이 적멸하며
상서로운 연기(緣起)를 가르쳐주신 정각자(正覺者)
설법자 중 제일인
그분께 경배합니다.

희론은 온갖 잘못된 이론을 가리킨다. 희론을 없애준 것이 연기이고 그 연기를 가르쳐준 사람이 정각자, 즉 부처라고 했다. 나가르주나는 자신의 생각을 400여 수의 시로 발표했다. 그것이 나가르주나의 대표작인 《중론》이다. 그러면 중론이란 무엇인가? 나가르주나는 “여러 가지 인연으로 우주 만물이 생겨나는 것”을 중도(中道)라 했다. 연기 자체가 중도라는 의미인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말한다. 내가 있어 네가 있고, 또 네가 있어 내가 있다. 그러므로 나와 너, 그 어느 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

승려 월칭(月稱)은 나가르주나를 칭송하며 “지혜의 바다에 태어나 양극단에 머물지 않고 정각(正覺)에 머문 분”이라고 했다. 나가르주나가 중도를 가르쳤음을 찬양하는 말이다. ‘양극단에 머물지 않는다’는 중도의 의미는 유학의 《중용》에서 말하는 ‘중’과 일치한다. 다만 설명 방법이 다를 뿐이다. 《중용》이 현실의 사례를 들어 가르친다면, 《중론》은 연기라는 우주 만물의 생겨남과 사라짐의 원리를 통해 가르친다.

 

고유한 실체는 없다

《중론》은 내용과 형식에서 특별하다. 《중론》의 제1품 제1게를 보자.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영원하지도 않고 영원하지 않지도 않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다.

나가르주나는 자신의 주장을 말하기보다 상대의 잘못된 주장을 부정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런 서술 방법은 나가르주나의 사상과 연관된다. 나가르주나의 핵심 사상을 ‘공(空) 사상’이라고 한다. 공 사상은 진리로 공인된 가르침을 내세우지 않는다. 다만 비판과 부정을 통해 자신의 공 사상을 드러내고자 한다.

나가르주나의 공 사상을 이해하려면 당대의 사상적 동향을 알아야 한다. 당대 불교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는 종파가 지배하고 있었다. 설일체유부는 일체, 즉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하는 종파다. 이 종파는 당대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브라만교의 영향을 받았다. 브라만교는 모든 것에는 그것을 다스리는 신(神)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설일체유부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신의 존재를 긍정하게 되었다.

나가르주나는 설일체유부와 브라만교에 맞서 공 사상을 설파했다. 우주 만물은 모두 연기(緣起)에 의해 생기고 없어진다. 그러므로 만물은 항상 변하여 잠시도 고정된 모습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연기에 의해 생겨나고 없어지므로 고정된 실체를 갖지 않는다.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모든 사물은 스스로 생겨나지 않는다”고 했다. 사물의 실체, 변하지 않는 본성을 불교에서는 자성(自性)이라고 한다. 나가르주나는 우주 만물은 자성을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공 사상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라는 물신이 지배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왜 일을 하는가? 돈을 벌기 위해서다. 돈이란 무엇인가? 물건을 교환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농부는 돈을 가지고 싱싱한 물고기를 산다. 어부는 돈을 가지고 햅쌀을 산다. 돈은 교환을 위해 생겨난 것일 뿐 고유한 실체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돈이 고유한 실체가 있는 것처럼 돈에 집착한다. 나가르주나는 말한다. 돈에는 자성이 없다. 집착하지 마라. 우주 만물은 고유한 실체, 즉 자성이 없다. 따라서 우주만물을 지배하는 신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 대승의 길을 가다

부처가 입적하고 100년쯤 지나자 경전을 해석하는 다양한 견해가 나타나 서로 엇갈리게 되었다. 부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10대 제자들마저 모두 죽고 난 뒤부터는 경전 해석은 물론 계율의 통일성마저 사라졌다.

불교 교단은 점차 보수적인 흐름과 진보적인 흐름으로 나뉘게 되었다. 부처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때와 장소에 따라 달리 표현해도 되는가? 자신의 깨달음을 최고의 목표로 해야 하는가, 아니면 중생 구제를 최고의 목표로 해야 하는가?

부처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깨달음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견해가 보수적인 흐름이었다. 반면에 진보적인 흐름은 부처의 가르침을 때와 장소에 따라 달리 표현하면서 중생 구제를 최고의 목표로 하자고 했다.

입장 차이가 커지자 분열이 불가피했다. 보수적 흐름의 승려들은 경전의 자구 해석에 매달린 채 경전을 해석하는 자신들만의 ‘논(論)’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불교 교리는 어려워졌고 출가하여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불교가 민중들로부터 유리되자 민중 속에서 대중적 불교 운동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이 민중적 불교 운동과 혁신적인 승려들이 결합하면서 대승불교 운동이 등장했다. 대승불교 운동은 깨달음과 중생 구제를 함께 추진하려는 불교 운동이다. 그래서 ‘위로는 진리의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라는 말이 대승불교의 표어가 되었다. 대승불교 운동의 주체들은 보수적인 종파들을 소승불교라 불렀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가면서 논쟁이 일어났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은 소승불교와 논쟁 과정에서 지은 책이다. 나가르주나의 제자인 핀가라가 《중론》을 해설하면서 나가르주나가 왜 이 책을 썼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주 만물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갖가지 잘못된 견해가 있는데, 부처님은 연기설(緣起說)을 정답을 제시하셨다. 부처님이 열반에 든 지 500년이 지나 상법시대가 되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릇되게 이해하게 됐다. 이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선생님이 《중론》을 지었다.”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나가르주나는 소승불교와 가장 단호하게 논쟁했다. 소승불교 쪽에서 보면 나가르주나는 기피 인물 1호였다. 나가르주나가 한 왕국의 왕자에게 암살당한 사건은 그런 사정을 보여준 것이었다. 왕위를 탐낸 샤크티만이 소승불교와 손을 잡고 왕의 정신적 후원자였던 나가르주나를 제거했던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모든 사물에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고 하여 소승불교와 브라만교의 교리를 근본부터 흔들어놓았다. 절대적인 신도 없고 고정적인 것도 없다! 나가르주나의 주장은 중생들에게 희망이었다. 자신들을 둘러싼 사회와 질서가 바뀔 수 있다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나가르주나를 정점으로 하여 불교는 대승의 길로 갔고, 중생은 스스로 깨우치며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Tip. 생각 플러스

《중론》의 핵심은 연기다. 모든 사물이 연관되어서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래서 그 사물이 생겨나게 하는 본성은 없다. 스스로의 본성(자성이라 한다)이 없으니 공이라 했다. 이 주장은 소승불교라 불리게 되는 설일체유부의 주장과 다르다. 설일체유부는 만물의 본성 혹은 본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두 주장을 비교하며 공과 있음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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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항상 있지도 않고 중도에 사라지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희론(戱論)이 적멸하며 상서로운 연기를 가르쳐주신 정각자(正覺者). 설법자 중 제일인 그분께 경배합니다. -《중론》 <귀경계(歸敬偈)> 중에서

여러 부처가 어떤 때는 자성이 있다고 하고 어떤 때는 자성이 없다고도 했다. 모든 사물의 실상은 자성이 없기도 하고 또 자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물의 실상을 마음으로 알 수 있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 번뇌에서 벗어나면 곧 열반이다. 일체는 진실이다. 그리고 일체는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 진실이면서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 진실이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것이 여러 부처가 말한 진리이다. -《중론》 <관법품(觀法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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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는 세계가 바뀔 때 그 모습이 달라지지만 그 본체에는 차이가 없다. 마치 금으로 만든 그릇을 녹여 다른 물건으로 만들 때 모양에는 차이가 있지만 색깔에는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 또 우유가 변하여 요구르트가 되면 맛은 서로 다르지만 드러나는 색깔은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 모든 존재는 미래의 세계에서 현재의 세계로 오면 미래 세계의 모습을 버리고 현재 세계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본체에는 차이가 없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세계에서 과거의 세계로 가면 모습은 달라지지만 그 본체에는 차이가 없다. -《대비바사론》 중에서

*《대비바사론》:2세기경 500인의 승려가 공동 집필한 불교 서적. 설일체유부의 사상과 발전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다. 위의 글은 설일체유부에 속한 승려 법구의 말이다.

 


용수, 《중론》

용수의 초기 작품으로 ‘중관론(中觀論)’이라고도 불린다.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연관 속에서 유(有)로든 무(無)로든 파악될 수 있다는 ‘중관론’이 제시되어 있다. 즉 ‘공(空)’과 ‘연기(緣起)’의 문제를 단적으로 ‘유’ 또는 ‘무’로 단정하지 않는 부정(否定)의 부정(否定), 즉 중론의 방법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이것은 인도 중관학파와 중국 삼론종(三論宗)의 근본 입장이다. -송영배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출처: https://dongosong.net/archives/4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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