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2

아함경에서의 공사상 (阿含經에서의 空思想)

수선님 2020. 7. 19. 11:18

{阿含經}에서의 空思想

 


 

김 태 완

(부산대)

차 례

Ⅰ. 서 론

Ⅱ. 空觀

(1). 五蘊을 觀함

(2). 六根을 觀함

(3). 空의 의미

Ⅲ. 空處定

Ⅳ. 空三昧

Ⅴ. 결 론

Ⅰ. 서 론

불교에서의 '空'이라는 말은 대체로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이며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소수의 연구서 이외에 대다수의 교리 개설서나 교리사에서는 空思想을 대승불교의 핵심으로 다루며, 초기불교에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물론 '공'이 般若나 中觀 등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공'으로 표현되는 사상을 탐구해 보아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무엇 보다도 아함경에서의 붓다의 교설 가운데 중요한 부분에 '공'이라는 용어가 적지 않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空' 자가 經名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몇 가지 있으며, 특히 중아함 190 [小空經4] 에서는 붓다가 아난다에게 "나는 공을 많이 행한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도 '공'이 붓다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부분을 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모든 대승경전이 "如是我聞"으로 시작하여 아난다가 들은 붓다의 말을 직접 전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은, 대승경전의 성립자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바로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으로 주장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째, 따라서 보다 초기에 성립한 경전들에서 '空'으로 표현되는 사상을 찾아 그 내용을 밝혀봄으로써 空思想의 원형을 알 수 있고, 그러므로써 大乘 空思想을 보다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반야경전들보다 더 일찌기 성립한 경전은 漢譯 四阿含과 Pāli 5 Nikāya이다. 본 논문에서는 한역 사아함에서 '공'자와 연관된 모든 표현을 찾아, 그 문맥에서의 '공'의 쓰임에 따라 분류하고, 그 하나 하나의 '공'의 의미를 밝혀 보려 한다. '공'의 쓰임에 따라 교설들을 분류해 보면, (1) 虛空, 空閑, 空村, 空閑樹下 등처럼 단순히 빈공간을 가리키는 경우, (2) 空觀에서 사용되는 경우, (3) 禪定의 空處定에서 사용되는 경우, (4) 三三昧의 空三昧에서 사용되는 경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즉 觀法과 禪定과 三昧에서 空이 사용된다. 도식적으로 나눈다면 觀法은 통찰력인 지혜의 측면이고, 禪定과 三昧는 정신집중의 수행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공'은 불교의 총체인 戒, 定, 慧 가운데에서 定과 慧에 관계됨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1) 단순히 빈공간을 가리키는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3가지를 하나 하나 살펴 보며 '공'의 쓰임과 의미를 알아 보겠다.

 

II. 空觀

空觀이란 경험세계를 '空'이라고 '觀'하는 것이다. 세계를 空이라고 觀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계를 요소로 분석하여, 그 각각의 요소를 空이라고 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계를 환상으로 보아 세계가 본질적으로는 空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中國의 天台宗에서는 전자의 방식을 析空觀이라 하여 聲聞, 緣覺의 이른바 小乘의 觀法이라 하고, 후자의 방식을 體空觀이라 하여 보살 즉 대승의 觀法이라 한다. 그러나 아함경에서는 분석적인 방법과 단도직입적인 방법이 이와 같은 취지로 뚜렷이 구분되어 나타나지는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이러한 구분없이 아함경에 나타난 그대로의 空觀을 살펴 보겠다.

아함경에서 세계를 요소로 분석하는 방법에는 이른바 五蘊(五陰, 五受陰, 五盛陰, 五聚蘊이라고도 한다), 十二處(六根, 六境), 十八界(六根, 六境, 六識) 등이 있다. 五蘊(pañca-skandha)은 色蘊(rūpa-skandha,감각자료), 受蘊(vedanā-skandha,感覺,印象), 想蘊(saɡjñā-skandha,知覺,表象), 行蘊(saɡskāra-skandha,作爲), 識蘊(vijñāna-skandha,意識) 등으로서, 경험세계를 다섯 가지로 분석한 것이다. 六根은 六處 또는 六入이라고도 하는데,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마음(意) 등으로서, 知覺機能을 분석한 것이다. 六境은 색(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觸感(觸), 모든 사유대상(法) 등으로서, 六根의 대상을 그 각각에 따라 나눈 것이다. 六識은 六根과 六境의 接觸에 의하여 발생하는, 또는 六根과 六境이 因緣되어 생겨나는 知覺認識을 그 각각에 따라 나눈 것이다. 따라서 六根과 六境의 十二處, 또는 六根과 六境과 六識의 十八界는 五蘊과 마찬가지로 경험세계를 인식론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아함경에서는 세계를 이와같이 분석하고, 그 하나 하나의 요소가 空이라고 觀하라는 가르침이 다수 나오는데, 주로 五蘊과 六根으로 분석하는 형태이다.

(1). 五蘊을 觀함

五蘊으로 분석하는 경우는 대개 다음의 유형으로 나타난다.

色은 덧없다(無常)고 觀하라. 이렇게 觀하면 그것은 바른 觀이다. 바르게 觀하면 곧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즐겨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즐겨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마음이 해탈했다고 한다. 이와같이 감각(受), 표상(想), 作爲(行), 의식(識)도 또한 덧없다고 觀해야 한다. 이렇게 觀하면 그것은 바른 觀이다. 바르게 觀하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즐겨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즐겨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마음이 해탈했다고 한다. 이와같이 마음이 해탈한 사람은 만일 스스로 확인코자 하면, 나의 태어남은 이미 다했고, 梵行은 이미 이루어 졌고, 할 일은 다 했다고 깨달아서, 내세에 태어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덧없다고 觀하는 것과 같이 고통(苦)이다, 空이다, 나가 아니다(非我)라고도 觀하라.(잡아함 1권 1,[無常經])

이경우는 오온의 하나 하나에 대하여 無常하며, 苦이며, 空이며, 非我라고 觀하는 것이다. 즉 경험세계의 총체인 오온 전체가 空이라고 觀하는 것이다. 여기서 공은 무상, 고, 비아와 나란히 열거되고 있을 뿐, 공과 무상, 고, 비아와의 관계나, 空의 의미, 또 왜 오온의 하나 하나가 무상, 고, 공, 비아인가 하는 이유 등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에 비하여 다음 경에는 무상, 고, 공, 비아 사이의 관계와 공의 의미가 드러나 있다.

色은 덧없다. 덧없는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나가 아니며, 나가 아닌 것은 空이요, 空인 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니니 또한 나가 아니다. 지혜로운 자는 이와같이 깨달아 안다. 감각, 표상, 作爲, 의식은 덧없다. 덧없는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나가 아니며, 나가 아닌 것은 空이요, 空인 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지혜로운 자가 깨달아 아는 것이다. 이 오온은 덧없고, 괴로우며, 공이며, 나가 아니니, 있는 것이 아니다. (증일아함 24권,6 [善聚品32])

여기서는 오온의 하나 하나가 덧없다(無常). 덧없는 것은 곧 고통이며(苦), 고통인 것은 나가 아니며(無我), 나가 아닌 것은 空이라는 것으로, 오온 = 무상, 무상 = 고통, 고통 = 무아, 무아 = 공의 순서로 논의가 진행되어 나가고 있다. 이것은 공과 무상, 고, 무아가 모두 오온의 본성이라는 말이며, 결국 오온 = 무상 = 고 = 무아 = 공이 되어서, 무상, 고, 무아, 공이 각각 오온의 본성을 여러가지 다른 각도에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무상, 고, 무아, 공은 본질적으로 같은 하나의 것을 나타내는 다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오온이나 六根으로 분석하는 경우에는 빠짐없이 [無常苦空非我(혹은 無我)(非我所가 때로 부가됨)]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無常(a-nitya), 苦(duɅkha), 無我(an-ātman,非我)가 모두 否定的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비해, 空(śūnyatā)은 부정과 긍정을 떠나 중성적이라는 것이다. 이점은 또 [空인 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非有非不有)]라는 말에서도 나타난다. 단순히 있어야 할 것이 없다면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일 수 있겠으나, 여기서의 공은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공을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은 곧 中道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공이 가지는 한 가지 의미가 중도임을 드러내는 것인데, 불교에서의 중도는 붓다의 가르침의 근본적 입장이다. 이점은 뒤에서 다시 고찰할 것이다.

이와같이 오온으로 분석하는 관법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공은 무상, 고, 비아와 더불어 오온의 구성요소 각각의 본질을 나타내는 말이며, 둘째, 이 경우 無常, 苦, 空, 非我는 하나의 본질을 서로 다른 시각에서 나타낼 뿐 그 내용은 같은 것이며, 세째, [空者非有非不有]라는 의미에서 中道가 空의 성격이 된다는 것이다.

(2). 六根을 觀함

육근으로 분석할 경우에 그 설하는 형식을 보면, 우선 육근의 하나하나가 덧없는 것이라고 觀하면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고, 기쁨과 탐욕을 떠나며 마음이 바르게 해탈해서, 내생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스스로 확인할 수 있으며, 덧없음과 마찬가지로 괴롭고, 공이며, 나가 아님도 같다(如無常, 如是苦空非我, 亦如是說)고 하는 것이 있다. 이 형식은 앞에서 본 오온의 경우와 같다. 이와는 약간 다른 형식으로 다음의 경이 있다.

모든 것은 덧없다. 어떻게 모든 것이 덧없는가. 이른바 눈은 덧없는 것이요, 색과 眼識과 眼觸과 眼觸으로 因緣하여 생기는 감각, 즉 괴롭다는 감각, 즐겁다는 감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감각도 덧없는 것이다. 귀, 코, 혀, 몸, 마음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다. ...... 덧없음의 經과 같이 괴로움, 空, 나가아님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설한다.(잡아함 8권 195,[無常經1])

이 경우는 눈, 색, 眼識 등으로 분석하고 있으므로 六根, 六境, 六識 등의 十八界로 세분하여 觀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구조 즉 [如無常, 如是苦空無我, 亦復如是]라는 구조는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무상, 고, 공, 무아를 단순히 열거하고 있을 뿐, 이들 사이의 관계나 공의 의미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다음 경은 공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색다르다.

"세존이여, 世間이 空이라 하는 것은 무엇 때문 입니까?" 붓다가 사밋디에게 말한다. "눈은 공이니, 항상되어 바뀌지 않는 法인 공이며, 내것으로서도 공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 성질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색이나, 眼識이나, 眼觸이나, 眼觸에 因緣하여 생기는 괴롭고 즐겁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 등도 역시 공이니, 항상되어 바뀌지 않는 法인 공이고, 내것으로서도 공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 성질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귀, 코, 혀, 몸, 마음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이 世間이 空하다는 것이다."(잡아함 9권 232,[空經])

[阿毘達磨俱舍論] 제 8 권에 의하면, 世間은 有情世間(생물계, 衆生世間, 有情界라고도 한다)과 器世間(생물, 즉 有情이 살고있는 장소, 器物世間, 器世界라고도 한다)으로 나누어 진다. 불교에서의 世間이라면 요컨데 迷界의 輪廻世界인데, 四聖諦로 말하면 苦集二諦의 세계이다. 이러한 세간이 空이라는 것이다. 그 까닭은 육근이 본래 공이며, 나에게 속한 것(我所)이 공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에게 속한 것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육근과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모든 사유대상의 六境과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의 六識으로 분석될 수 있다. 이렇게 분석된 六根, 六境, 六識이 空이니 나와 나에게 속한 것이 空일 수밖에 없다. 이 六根, 六境, 六識의 十八界는 우리가 '나'라고 말하는 바로 그 '나'와 '나에게 속한 것'이며, 또 우리의 경험세계인 世間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世間은 空인 것이다.

그런데 이 十八界, 나와 나에게 속한 것, 世間이 왜 空이라는 것인가. 그것은 '그 성질이 스스로 그러하기'(此性自爾) 때문이다. 나와 나에게 속한 것, 세간은 그 성질이 본래 空이다. 즉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다음 두 경을 보자.

어떤 것을 第一義空經이라 하는가. 비구들이여, 눈은 생길 때에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에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눈은 實이 아니면서 생기고, 생기면 사라진다. 業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이, 이것이 사라지면 다른 것이 이어서 생긴다. 다만 俗數法은 제외한다. 귀, 코, 혀, 몸, 마음도 이와 같지만, 俗數法은 제외한다. 俗數法이란 것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는 것을 말함이니, 마치 無明에 緣해서 行이 있고, 行에 緣해서 識이 있고, ......, 큰 고통의 덩어리가 모여 생겨남과 같다. 또 俗數法이란,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지니, 無明이 사라지므로 行이 사라지고, 行이 사라지므로 識이 사라지고, ......, 큰 고통의 덩어리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잡아함 13권 335,[第一義空經])

눈이 생길 때에는 오는 곳을 알지 못하고, 눈이 사라질 때에는 곧 사라지지만 가는 곳을 알지 못하니, 눈은 있지 않으면 생기고, 있으면 사라진다. 이 모두는 여러 法의 因緣이 모인 때문이다. 이른바 因緣法이란, 이것을 緣하여 이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곧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無明에 緣하여 行이 있고, 行에 緣하여 識이 있고, ......, 귀, 코, 혀, 몸, 마음이 또한 이와 같이, 있지 않으면 생기고, 있으면 사라지지만, 그 오는 곳을 알지 못하고, 가는 곳 또한 알지 못한다. 이 모두는 여러 法의 因緣이 모인 때문이다. 長者여, 이것이 이른바 空行第一之法이다.(증일아함 49권 8, [非常品51])

정리해 보면, 첫째, 눈, 귀, 코, 혀, 몸, 마음 즉 六根은 있지 않으면 생겨나고, 있으면 사라진다. 둘째, 생길 때에는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에는 가는 곳이 없다. 세째, 業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다. 네째, 六根은 實이 아니면서 생기고, 생기면 사라진다. 다섯째, 이것이 사라지면 다른 것이 이어서 생겨난다. 여섯째, 이것은 모두 여러 法의 因緣이 모인 때문이다. 일곱째, 이 因緣이란 것은 俗數法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나며,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空의 뜻(空義)이며, 空의 작용(空行)이다.

요컨데 空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生滅變化는 있으나, 생멸변화의 主體 즉 作者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業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으며, 實이 아니면서 생기고 사라지며, 있지 않으면 생겨나고 있으면 사라지지만, 생길 때는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는 가는 곳이 없다. 이러한 생멸변화는 모두 여러 法의 인연이 모인 때문이다. 인연의 모임에 이름을 붙인 것이 곧 因緣法 또는 俗數法 또는 假號法이다. 인연법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결국 공을 인연법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연법을 바르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선 인연법에서 분명히 밝혀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인연이란 것이 이것과 저것 사이의 상호 의존관계를 가리키는 것인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인연에 따른 생겨나고 사라짐이 시간적인 사실이냐 하는 것이다.

첫째, 우선 인연이 이것과 저것 사이의 상호 의존관계가 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고찰해 보자. 인연을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나며,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라고 하고 있으므로, 마치 인연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상호 의존관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과 '저것' 사이에 상호 의존관계가 이루어지려면 '이것'과 '저것'이라는 관계의 주체가 실재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요구된다. 그런데 六根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 作者가 없다고 하므로, '이것','저것'이라는 관계의 주체가 실재한다고 볼 수가 없다. 따라서 비록 인연을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이 표현이 이것과 저것 사이의 상호 의존관계를 나타낸다고는 볼 수가 없다.

다음으로 이것과 저것이라는 관계의 주체가 없이 관계만이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그러한 상황에서는 비록 이것과 저것 이라는 관계의 주체가 실재하는 작자가 아니라고 해도, 이것과 저것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은 사실이어서 그것을 이름하여 인연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의 이것과 저것은 생기면 바로 사라지므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어쨋든 생기고 사라짐이 연속되므로 있지 않다고도 할 수 없다. 한편 이것과 저것이 항상 실재하며 자립하는 작자라면, 생기고 사라지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상호 관계하지 않고도 실재하므로, 서로 간에 인연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입장에서 본다면 실재하는 작자로서의 이것과 저것을 인정한다면 오히려 상호 의존관계가 성립할 수가 없고, 이것과 저것이 생기고 사라지는 변화의 연속이어서 고정되게 있다고도 있지 않다고도 할 수 없어야만 이것과 저것이 상호 인연관계라고 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이것, 저것이라는 관계의 주체가 실재하는 작자가 아닐 경우, 이것과 저것의 인연을 상호 의존관계로 볼 수도 있고,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다. 과연 어떠한 입장이 經에서 말하는 붓다의 입장과 같은가. 조금 후에 경에 의거하여 살펴 보자.

둘째, 먼저 六根의 생겨나고 사라짐을 시간적인 사실로 보고서 위의 空義를 해석해 보자. 그러면 [無有而眼生, 已有而眼滅]은 '있지 않았던 눈이 생겨나고, 있었던 눈은 사라진다' 즉 과거에 없었던 눈이 현재에 생겼다가 미래에는 사라진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또 [眼生時無有來處, 滅時無有去處]는 눈이 그곳으로부터 생겨났다가, 사라질 때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그러한 어떤 근원적 실재가 없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래서 업보 즉 생멸은 있으나 作者가 없으며, 實이 아니면서 생기고 사라진다. 그리하여 [此陰滅已, 異陰相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실재하지 않는 五蘊이 끊임없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실재하지 않는 오온의 시간에 따른 생멸은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인연이 되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六根의 생겨나고 사라짐을 시간적인 사실로 보지 않고 空義를 해석해 보자. 그러면 [無有而眼生, 已有而眼滅]은, '있지 않으면 눈은 생기고, 있으면 눈은 사라진다' 즉 눈은 無 -> 生 -> 有 -> 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눈은 생길 때에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에 가는 곳이 없다. 즉 눈은 미래공간에서 현재공간으로 왔다가 과거공간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무 -> 생 -> 유 -> 멸은 時空間的인 사실이 아닌 것이다. 미래와 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없다. 단지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지는, 이것과 저것 사이의 인연만이 있을 뿐이다. 이때 이것과 저것은 恒常되게 實在하는 作者가 아니고 끊임없이 생기고 사라지는 변화의 도중에 있는 무규정자 즉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러한 것이다. 이처럼 인연에 따라서 끊임없는 生滅相續이 일어나지만, 이러한 생멸상속은 시공간적인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공간이란 오히려 인연상속에 붙여진 假名일 뿐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六根이 끊임없이 생기고 사라짐을, 실재하지 않고 作者도 없는 육근의 생멸상속이 시간의 틀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 진다고 보느냐, 아니면 실재하지도 않고 작자도 없는 육근이 끊임없이 생기고 사라지는 이것에 시간이라는 가명을 붙였다고 보느냐 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점이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시간을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구조라고 인정을 하느냐, 아니면 실재하지 않으면서 거짓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느냐 하는 두 가지 시각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붓다의 참된 가르침인가. 다음의 경을 보자.

벽지불이 대답하였다....... 눈을 잘 觀하라. 이 눈은 나(我)가 아니다. 나 역시 그(눈)의 것이 아니다. 또 내가 눈을 만들지도 않고, 그것(눈)이 나를 만들지도 않는다. 그것(눈)은 있지 않는 가운데에서 생겨서, 있게 되면 곧 스스로 무너져 없어진다. 또 그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아니요, 모두 因緣의 모임에 緣由한다. 인연이 모인다는 것은, 이것을 緣하여 이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생겨나며, 이것이 없으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눈, 귀, 코, 입, 몸, 마음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두 空寂하다. 이러한 까닭에 누이여, 눈과 색에 집착하지 말라. 색에 집착하지 아니하면 곧 안온한 곳에 이르러서, 다시는 정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누이여, 이것을 배워야 한다.(증일아함 32권9, [力品38-2])

정리하면, 첫째, 눈 즉 六根은 내(我)가 아니며,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내가 육근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앞서 오온으로 분석하는 경우에 밝힌, '五蘊이 空이며 동시에 無我'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른바 我空이다. 둘째, 육근은 있지 않은 가운데에서 생겨서, 있게 되면 곧 스스로 무너져 없어진다. 이것은 앞서 본, '눈은 실재하지 않으면서 생겨나고 생기면 사라지지만 그 이유는 그것의 본성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라는 것과 같다. 세째, 육근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아니다(非往世今世後世). 이것은 앞서 본, '눈이 생길 때에는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에는 가는 곳이 없다'는 것이 시간성의 부정임을 보다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고 보여진다. 네째, 육근은 모두 인연의 모임에 연유한다. 다섯째, 인연의 모임이란, '이것을 緣하여 이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생겨나며, 이것이 없으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사라진다'이다. 인연법에 대한 설명이 앞서의 것과 좀 달라져 있다. 앞서는 이것과 저것의 연관적 無有生滅이었는데, 여기서는 이것과 저것의 구별이 없이, 이것 하나만의 無有起滅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인연이 '이것'과 '저것'이라는 실재하는 작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여섯째, 六根은 모두 인연의 모임일 뿐이기 때문에 空寂하다. 이른바 法空이다. 일곱째, 따라서 눈 즉 육근과 색 즉 六境에 집착할 것이 없다. 이것은 空의 意義 다시말해, 我空法空의 실천상의 의의를 말하는 것이다. 여덟째, 집착하지 않으면 安穩한 곳에 이르른다. 이것은 空思想의 궁극적 가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육근은 있지 않은 가운데에서 생겨서, 있게 되면 곧 스스로 무너져 없어지지만,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아니다. 분명히 육근의 생멸이 시간적인 사실이 아님이 나타나 있다. 또 인연이란, 있고, 없고,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이제 이것과 저것의 구별이 없이, 이것만이 있다. 인연을 이것과 저것의 상호 의존관계처럼 말하고 있지 않다. 대체 이러한 상황은 어떠한 상황일까. 다음의 경을 보자.

모든 行은 환상 같고 불꽃 같아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니, 진실로 오고 진실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구여, 空인 모든 行을 알고, 기쁘하고, 생각하라. 空인 모든 行은 항상 머물러 변하거나 바뀌는 法이 아니다. 空이므로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다. 비유하면 눈 밝은 사람이 밝은 등불을 들고 빈 방에 들어가서, 그 빈 방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여, 모든 空인 行과 空인 마음을 관찰하여 기쁘하라. 그러면, 空인 法과 行은 항상 머물러 바뀌지 않는 법이며, 나와 내 것도 空인 것이다. 눈, 귀, 코, 혀,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과 法이 因緣하여 생기는 意識도 세 가지가 화합하는 觸이며, 觸은 感覺과 表象과 생각을 함께 生하는데, 이 모든 法은 無我이고, 無常이며, 나와 내 것이 空이다.(잡아함 41권 273,[手聲喩經])

정리하면, 첫째, 諸行은 환상 같고 불꽃 같이 찰라에 사라지며, 진실로 오고 진실로 가는 것이 아니다. 諸行은 곧 諸法이니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모두 제행에 속한다. 이것은 '實이 아니면서 생기고 생기면 사라진다', '있지 않으면 생기고 있으면 사라진다', '있지 않은 가운데에서 생겨서 있으면 곧 스스로 사라진다' 등의 표현이 나타내는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하고 있다. 찰라 찰라에 생기고 사라지는 것은 환상 같은 모든 行일 뿐이고, 생기고 사라지는 어떤 것도 실재하는 것은 없다. 즉 세계는 환상처럼 생멸하지만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으므로 시간과 공간 역시 의미를 상실한다. 공간적으로 연장되거나 시간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꿈과 같다. 꿈 속에서도 공간과 시간과 사물이 있는 듯이 경험되지만 이것이 허구라는 것은 깨어보면 드러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지금 경험하는 이 세계도 꿈과 같은 환상으로서, 깨달음을 얻으면 공허일 뿐 공간도 시간도 사물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공인 제행은 항상 머물러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 꿈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변화가 실재로 변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것인 것처럼, 끊임없이 생멸 상속하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은 환상일 뿐이고 실재로는 아무것도 변하거나 바뀌는 것은 없다. 이미 실재하는 사물이 없으므로 시공간이 의미를 상실했으나, 이것을 시공간적으로 표현하면 공허함과 영원함이 될 것이다. 아무것도 실재하는 것이 없는 공허함과 시간이 멈추어버린 영원함이 바로 공이라면, 끊임없이 생멸상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도 실은 전혀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 것이다. 꿈과 환상은 늘 있으나, 변화하고 바뀌는 것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째, 그러므로 나(我)도, 내것(我所)도 空이다. 아무것도 실재하는 것이 없는데 나와 내것이 있을 수가 없다. 나와 내것이 없으니 집착할 대상도 집착하는 주체도 없고, 고통을 일으키는 것도 고통스러워 하는 것도 없다. 그래서 空寂하고 安穩할 뿐이다. 이렇게 되면 공이란 시공간 조차 부정되는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 공허일 뿐이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非有)고 하며, 꿈이나 환상과 같긴 하지만 시공간적인 세계가 경험된다는 측면에서는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非不有)라고 할 수 있다.

(3). 空의 의미

이제 지금까지 살펴본 空의 의미를 정리해 보자. 世間은 공이다. 즉 諸法과 諸行은 공이다. 다시말해 五蘊과 十八界가 空이다. 이러한 세간의 제법은 없으면 생기고 있으면 사라지며, 이것이 사라지면 다른 것이 相續하지만, 실재하지도 않고 作者도 없다. 즉 세간의 제법은 실재하지도 않고 작자도 없는 환상과 같고 꿈과 같은 것으로서, 고정되는 일이 없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져 간다. 이때 실재하지도 않고 작자도 없는 제법의 생멸은,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지며,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식으로 제법의 因緣에 따른 和合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간의 제법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멸하는 것처럼 경험된다. 그러나 본래가 공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세간의 제법은 생겨날 때에는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에는 가는 곳이 없다. 즉 경험세계인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공간이 공인 것이다. 결국 제법은 세간의 입장에서는 있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非不有), 공의 입장에서는 있는 것이 아니다(非有). 그러므로 나와 나의 것도 세간의 제법으로는 있는 듯하지만, 본래는 공이다. 나와 나의 것이 없으므로 집착할 것이 없고, 집착이 없으므로 안온하다. 요컨데 세간이란 본래 空寂하며 安穩한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세간의 본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어두움(無明) 때문이다. 즉 지혜의 어두움인 어리석음 때문이다. 위에서 본 비유처럼 마치 어두운 빈 방에 밝은 등불을 들고 들어가는 것과 같다. 등불이 없을 때에는 그 방은 어둠으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단 등불을 비추면 그 방은 텅 빈 참된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간은 공이다. 본래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데, 無明의 어두움이 가득차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명의 어두움이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세간이다. 그래서 세간이 공이라는 것을,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한 것이다. 밝아지면 즉 무명의 어두움을 걷어내면 세간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두움 속에서는 세간이 있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세간의 참모습은, 텅 비고 고요하며, 바뀌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도 나의 것도 대상도 없다. 따라서 무엇에 대한 집착이 있을 수 없다. 집착하는 주체와 집착의 대상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집착은 세간의 본모습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 속에서 그 가득찬 어두움에 대한 것이다. 집착은 괴로움의 씨앗이다. 밝게 되어서 무명의 어두움을 걷어내면 안온한 것이다. 붓다가 애써 세간이 공임을 가르쳤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空과 無常, 苦, 無我와의 관계이다. 이미 앞에서 오온 = 무상 = 고 = 무아 = 공의 관계를 보았다. 이제 여기서는 왜 이러한 관계가 되는지를 살펴보자. 세간의 제법이 본래 공인 입장에서는 생기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지만, 경험세계에서 나타나는 공은 곧 인연법으로서, 제법은 실재하지도 않고 작자도 없이, 없으면 생기고 있으면 스스로 사라짐을 계속하여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닌 中道의 모습을 갖는다. 이와 같은 내용의 중도는 다음의 경에 잘 설해져 있다.

그 때에 아난다는 챤나에게 말하였다. "나는 붓다께서 마하 캇챠아나에게 가르치는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혹은 있다 혹은 없다라는 두 극단으로 잘못 치우쳐 있다. ...... 캇챠아나여, 세간의 모임을 진실되게 바로 관찰한다면 세간이 없다는 견해가 생기지 않을 것이고, 세간의 사라짐을 진실되게 바로 관찰한다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캇챠아나여, 여래는 두 극단으로 부터 벗어나 中道에서 말하니, 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기니, 즉 無明을 緣해서 行이 있고... 나아가 生老病死憂悲惱苦가 모이게 된다. 또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지니, 즉 無明이 사라지면 行이 사라지고... 나아가 生老病死憂悲惱苦가 사라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잡아함 10권 262 [闡陀經])

결국 중도란 '세간이 있다' 또는 '세간은 없다'는 단정적이고 고정된 판단을 부정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 세간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은 인연법에 따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간의 제법은 모두 인연이 모인 것이다. 인연이 모인다는 것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으며,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법이 無常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無我이고 無我所라는 것도 이미 인용한 經에서 지적되었다. 또 인연으로 해서 큰 고통의 덩어리가 모여 생겨남(純大苦聚集起)도 앞서 인용한 경에서 지적 되었다. 이와 같이 세간의 제법이 무상하고 고이며 무아라는 것은 바로 이 인연법에 연유하고 있다면, 세간의 제법이 공임을 인연법으로 나타내고 있으므로, 결국 無常, 苦, 無我는 空의 異名 내지는 공의 한 가지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도 지적하였듯이 이렇게 보면 부정적 의미를 지닌 무상, 고, 무아 보다도 긍정도 부정도 아닌 중성적 의미를 가진 공이 보다 포괄적으로 세계의 참모습을 지적하려고 사용한 假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空處定

禪은 산스크리트어 dhyāna의 音譯이다. dhyāna는 禪, 禪那 등으로 음역되거나, 定, 靜慮, 思惟, 修定 등으로 意譯되거나, 禪定, 禪思등으로 음역과 의역을 혼합하거나 하여 漢譯되고 있다. 아함경에 나와있는 선정의 종류는 四禪, 四無色定, 安那般那念, 四無量心, 三昧, 八解脫, 八勝處, 十一切處, 十想, 三十七助道品 등 여러가지가 있다. 이들 가운데 空과 관련되어 설해지는 것은 三三昧체계에서의 空三昧와 四禪과 四無色定을 합한 八禪體系, 또는 여기에 滅盡定을 더한 이른바 九次第定體系에서의 空處定 등 둘이다. 공삼매는 다음 장에서 논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공처정을 살펴보자.

初禪, 二禪, 三禪, 四禪, 空處定, 識處定, 不用處定(無所有入處定), 有想無想處定(非想非非想處定), 滅盡定(滅想定) 등의 九次第定은 거쳐 올라가고 내려가는 순서대로 배열된 것이다. 구차제정의 하나 하나의 의의에 관해서는 다음의 경에 잘 설명되고 있다.

初禪을 바르게 받을 때에는 말(言語)이 고요히 사라지고(寂滅), 二禪을 바르게 받을 때에는 感覺과 觀察이 고요히 사라지고, 三禪을 바르게 받을 때에는 즐거운 마음(喜心)이 고요히 사라지고, 四禪을 바르게 받을 때에는 들고 나는 숨(出入息)이 고요히 사라지고, 空入處를 바르게 받을 때에는 색깔과 형태라는 생각(色想)이 고요히 사라지고, 識入處를 바르게 받을 때에는 空入處라는 생각이 고요히 사라지고, 無所有入處를 바르게 받을 때에는 識入處라는 생각(識入處想)이 고요히 사라지고, 非想非非想入處를 바르게 받을 때에는 無所有入處라는 생각(無所有入處想)이 사라지고, 想受滅을 바르게 받을 때에는 생각을 받음(想受)이 고요히 사라진다. 이것이 점차로 모든 行이 고요히 사라지는 것이다. ......, 初禪을 바르게 받을 때에는 말이 멈추어 없어지고(止息), 二禪을 ......, 想受滅을 바르게 받을 때에는 생각을 받음(想受)이 멈추어 없어진다. 이것이 점차로 모든 行이 멈추어 없어지는 것이다.(잡아함 17권474[止息經])

여기에서 보면 구차제정의 각각의 단계는 제나름의 의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순서는 뛰어 넘을 수 없는 계단처럼 차례 차례로 거쳐 가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차례를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다.

사리풋타는 곧 如來의 앞에 앉아서 몸과 뜻을 바로하고 생각을 잡아매고 初禪에 들어갔다. 初禪에서 일어나 二禪에 들어 갔다. 二禪에서 일어나 ....... 有想無想處에서 일어나 滅盡定에 들어갔다. 滅盡定에서 일어나 有想無想處에 들어갔다. 有想無想處에서...... 第二禪에서 일어나 初禪에 들어 갔다.(증일아함 18권 9[四意斷品26-1])

따라서 어느 단계의 의의는 그 전후 단계와 연관되어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연관관계를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라문이여, 因緣이 있어서 想이 생기고 因緣이 있어서 想이 사라진다. ...... 惡하고 善하지 못한 法을 없애는 감각과 관찰이 있어서 벗어남이 생기니 즐겨 初禪에 들어, 먼저 欲想을 없애고 喜樂想을 낸다. 바라문이여, 이로써 因緣이 있어서 想이 생기고 因緣이 있어서 想이 사라짐을 안다. 감각과 관찰을 없애고 안으로 한 마음을 즐기면, 감각과 관찰은 없고 定이 생겨나 즐겨 第二禪에 드니, 바라문이여, 初禪想은 사라지고 二禪想이 생긴다. 이로써 因緣이 있어서 想이 사라지고 因緣이 있어서 想이 생김을 안다. ...... 有想無想處想이 사라지고 想知滅定에 든다. 이로써 因緣이 있어서 想이 생기고 因緣이 있어서 想이 사라짐을 안다.(장아함 17권28[布咤婆樓經])

이와 같은 禪定의 체계에서 空은, 좁은 의미로는 四無色定 가운데의 空處定에서의 空이 있고, 넓은 의미로는 사무색정과 멸진정 전체, 나아가서는 구차제정 모두가 공을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먼저 공처정에서의 공의 의미를 보자.

空入處를 바로 받을 때에는 色想이 고요히 사라진다.(잡아함 474[止息經])

모든 色想을 버리고 성냄을 없애고 다른 想을 생각하지 않고 空處에 들어가니, 바라문이여, 모든 色想은 사라지고 空處想이 생긴다. 이로써 因緣이 있어서 想이 사라지고 因緣이 있어서 想이 생김을 알 수 있다.(장아함 17권28[布咤婆樓經])

비구가 모든 色想을 벗어나 對想을 없애고 약간의 想도 생각지 않으면 한량없는 空이니, 이것이 無量空處를 이루어 노니는 것이다.(중아함 164 [分別觀法經3])

이로써 보면 사무색정에서의 첫 단계인 공처정은 色想 즉 색깔과 형태 등의 모든 감각인상에서 벗어나는 단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공이란 色想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모든 감각인상은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는 생각(空處想)만이 남는다. 그렇지만 아직 이러한 생각은 남아 있다. 그래서 다음 단계는 識入處이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識이라는 생각(識想)을 없애야 하는 단계가 된다. 여기에서 넓은 의미의 공의 의의가 나타난다. 넓은 의미의 공이란 마지막 단계인 멸진정까지 想을 없애가서 마침내 아무런 상이 없는 것을 말한다. 다음 경에서는 붓다가 행하는 공이 사무색정과 멸진정에 모두 해당됨이 나타나 있다.

나는 空을 많이 행한다. ...... 만약 이 속에 없다면, 이때문에 나는 이것을 空이라고 본다. 만약 이 속에 다른 것이 있다면 나는 진실로 있다고 본다. 이것을 진실한 空을 行해서 잘못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비구가 만약 空을 많이 행하려고 한다면, 그 비구는 마을이라는 생각(村想)을 말아야 하고, 사람이라는 생각(人想)을 말아야 하고, 오로지 일 없다는 생각(無事想)을 자꾸 해야 한다. ...... 비구가 空을 많이 행하려고 한다면, 그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말아야 하고, 일 없다는 생각을 말아야 하고, 오로지 땅이라는 생각(地想)을 자꾸 해야 한다. ...... 비구가 空을 많이 행하려 한다면, 그는 일 없다는 생각을 말아야 하고, 땅이라는 생각을 말아야 하고, 오로지 한량 없는 빈 곳(無量空處想)을 자꾸 생각해야 한다. ...... 비구가 空을 많이 행하려 한다면, 그는 땅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고, 한량 없이 빈 곳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고, 오로지 한량 없는 識이 있는 곳(無量識處想)을 자꾸 생각해야 한다. ...... 비구가 空을 많이 행하려 한다면, 그는 한량 없는 빈 곳이라는 생각을 말아야 하고, 한량 없는 識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말아야 하고, 오로지 아무것도 없는 곳(無所有處想)이라는 생각만 자꾸 해야한다. ...... 비구가 空을 많이 행하려 한다면, 그는 한량 없는 識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말아야 하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말아야 하고, 오로지 생각 없이 마음이 안정됨(無想心定)을 자꾸 생각해야 한다. 그는 이와 같이 알아서, 한량 없는 識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비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비지만, 오직 생각 없는 마음이 안정됨만 비지 않는다. ......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곧 [나는 본래부터 생각없이 마음이 안정(無想心定)되어 있어서, 본래 그렇게 행하고 그렇게 생각한다. 본래 그렇게 행하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그것을 즐겨할 것도 없고 그것을 찾을 것도 없으며 그것에 머무를 것도 없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아, 탐욕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중아함 49권 190[小空經4])

여기서 볼 수 있듯이 空이란 글자 그대로 비워서 없는 것이다. 마을이라는 생각(村想), 사람이라는 생각(人想), 일없다는 생각(無事想), 한량 없이 빈 곳이라는 생각(無量空處想), 한량 없는 識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無量識處想),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는 생각(無所有處想) 등을 모두 비워나가서 결국 생각 없는 마음이 안정됨(無想心定)에 이르러서는, 여기에 조차 머무르지 않음(滅盡定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으로써 해탈하는 것이다. 이것을 붓다는 자신이 행하는 空行이라고 하는 것이다. 禪定의 단계별로 생각(想)을 비워 나아가는 것은 결국 觀法을 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다음의 경을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약 비구가 禪定을 깊이 닦아서 大地가 모두 허위임을 觀하고, 진실로 땅이라는 생각(地想)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면, 물, 불, 바람과 四無色, 이 세상과 저 세상, 해, 달, 별, 지식과 견문, 감각, 마음과 의식, 및 이들 지식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이르기 까지도 역시 이와 같이 모두 허위이며 진실된 法은 있지 않고, 다만 因緣의 모임에 거짓으로 이름붙여 여러가지 이름이 있을 뿐, 그것이 空寂임을 觀해서, 法도 非法도 있다고 보지 않게 된다.(별역잡아함 8권 151)

세간의 제법을 法도 非法도 아닌, 즉 있다고도 볼 수 없고 있지 않다고도 볼 수 없으며, 여러가지 이름이란 因緣의 모임에 거짓으로 붙인 것일 뿐이라고 觀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앞서 살펴 보았던 空觀이다. 이로써 보면 결국 禪定과 觀法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함께 행해져야하는 수행법인 것이다.

 

IV. 空三昧

三昧는 산스크리트어로 samādhi인데 , 三昧, 三摩地, 三摩提로 音譯하고, 定, 禪定, 寂定, 等持 등으로 意譯한다. Dyāna 역시 定, 禪定으로 번역되기도 하므로 서로 비슷한 수행법으로 여겨진다. 空三昧(śūnyatāsamādhi)는 三三昧 가운데 하나이다. 三三昧는 三修法이라고도 한다. 三三昧는 空三昧, 無相三昧, 無願三昧인데, 경에 따라서는 無願三昧를 無作三昧라고도 하고 無相三昧를 無想三昧라고도 한다. 또 空定, 無想定, 無願定이라고 漢譯한 경도 있다. 삼삼매의 순서는 공삼매가 항상 먼저 오고 무원삼매와 무상삼매는 일정한 순서가 없다. 공삼매는 사리풋타와 수붓티가 항상 행했던 것이라 한다. 삼삼매의 의미에 관해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때 붓다가 여러 비구들에게 말했다. "이것이 세 가지 三昧이다. 어떻게 셋인가. 空三昧와 無願三昧와 無想三昧의 셋이다. 어찌하여 空三昧라고 부르는가. 이른바 空이라는 것은 모든 法이 전부 空虛하다고 觀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해서 空三昧라 한다. 어찌하여 無想三昧라고 부르는가. 이른바 無想이란 것은 모든 法에 관하여 想念이 전혀 없어서 (어떠한 법도) 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해서 無想三昧라고 한다. 어찌하여 無願三昧라고 하는가. 이른바 無願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법에 대하여 바라고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無願三昧라고 한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이 세 가지 삼매를 얻지 못하면 오래도록 나고 죽음에 있으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비구들이여, 마땅히 방편을 구해서 이 세 삼매를 얻도록 하라."(증일아함 16권 10[高幢品24-3])

공삼매는 모든 法이 전부 공허하다고 觀하는 것이며, 무상삼매는 모든 법에 관하여 想念이 전혀 없어서 어떠한 법도 볼 수가 없는 것이며, 무원삼매는 모든 법에 대하여 바라고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로써 보면 적어도 공삼매는 空觀과 다르지 않다. 한편 또 다른 경에서, 붓다는 공삼매를 무원삼매와 무상삼매를 얻는 바탕이 되 며, 무원삼매와 무상삼매를 포괄하는 가장 주요한 삼매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리풋타가 붓다에게 말했다. "예, 세존이시여, 저는 늘 空三昧에서 노닙니다." 붓다가 사리풋타에게 말했다. "좋고 좋다 사리풋타야, 空三昧에서 노닐 수가 있다니. 왜냐하면 空三昧가 가장 제일이기 때문이다. 비구가 空三昧에서 노닐면, 나와 사람과 壽命이 없다고 헤아리고, 衆生이 있다고 보지 않으며, 모든 行의 本末을 보지 않아서, 行의 근본을 짓지 않으며, 따라서 行이 없으므로 다시는 몸을 받지 않는다. 몸을 받지 않으므로 괴롭거나 즐거운 갚음을 다시 받지 않는다. 사리풋타야 알아라. 나는 옛날 佛道를 이루기 전에 보리수 아래에 앉아서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이 衆生들은 어떤 法을 얻지 못하여 生死에 흘러 다니며 해탈하지 못하는가.] 그 때 나는 다시 이와 같이 생각했다. [空三昧가 없으면 곧 나고 죽음에 흘러다니면서 마침내 해탈에 이르지 못한다. 이 공삼매가 있음에도, 다만 중생이 아직 능히 해내지 못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世間이라는 마음을 일으키니, 곧 죽고 사는 것을 나누어 받는다. 이 공삼매를 얻는다면 원할 것이 없어서 곧 無願三昧를 얻게 되고, 무원삼매를 얻으면 여기에서 죽어 저기에서 태어남을 구하지 않으니 想念이 모두 사라진다. 그 때 그 수행자는 다시 無想三昧를 얻어 즐거울 수 있다. 이처럼 중생들은 모두 삼매를 얻지 못하는 까닭에 나고 죽음에 흘러다니게 된다. 모든 法을 觀察하면 곧 공삼매를 얻고, 공삼매를 얻으면 곧 아누타라삼약삼보오디를 이룰 것이다.] 나는 그 때 공삼매를 얻어서, 밤낮 7일 동안 보리수를 관찰하여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사리불아, 이러한 방편으로써 공삼매가 모든 삼매 가운데 가장 제일삼매임을 알 수 있다. 王三昧란 空三昧이다. 그러므로 사리불아, 方便을 구해서 공삼매를 이루도록 하여라."(증일아함 41권 [馬王品45],6)

여기서 본다면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이룬 깨달음은 바로 공삼매를 얻어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모든 法을 관찰하여 공삼매를 얻고, 위 없이 높고 바르고 평등 원만한 깨달음(anuttara-samyak-saɡbodhi)을 이룬 것이다. 그래서 공삼매를 모든 삼매 가운데 第一三昧요 王三昧라고 하는 것이다. 공삼매를 얻지 못하면 나고 죽음에 휩쓸려 흘러다니며 그곳으로 부터 벗어날 수 없다. 공삼매를 얻으면, 나(我)와 사람(人)과 壽命이 없다고 헤아리고, 衆生이 있다고 보지 않으며, 모든 行의 本末을 보지 않아서 행의 근본을 짓지 않으며, 행이 없으므로 다시는 몸을 받지 않는다. 몸을 받지 않으므로 괴롭거나 즐거운 갚음(果報)을 다시 받지 않는다. 결국 모든 법이 전부 공허하다고 觀하는 것으로서 공삼매가 곧 空觀과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공삼매를 얻으면 원할 것이 없어서 곧 무원삼매를 얻게 되고, 무원삼매를 얻게 되면 여기서 죽어 저기에서 태어남을 원하지 않으니 想念이 모두 사라져서 무상삼매를 얻는다. 이로써 보면 공삼매가 삼삼매 가운데 가장 주요할 뿐만 아니라 삼삼매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삼삼매를 얻는 것이 곧 해탈하는 것이라면, 공삼매를 얻는 것 역시 해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론

이제까지 아함경에 나타난 空思想을 空觀, 空處定, 空三昧로 나누어서 살펴 보았다. 空觀은 定과 慧로 수행법을 나눌 때, 관찰과 지혜에 속하는 수행법이다. 즉 觀은 세계의 실상을 어떠하다고 깨달아 아는 것이다. 따라서 관은 단순한 지성적 이해가 아니다.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空觀은 세계를 五蘊, 十二處, 十八界로 분석하여, 그 요소 하나 하나가 空이라고 觀하는 것과 오온, 십이처, 십팔계 전체가 단도직입적으로 공이라고 관하는 것으로써 세계가 공임을 깨달아 아는 것을 말한다. 세계의 참된 실상은 공 즉 텅 빈 것이다. 우리에게 경험되는 세계는 환상이다. 즉 실체가 없이 생겼다가는 사라짐을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항상됨은 없고, 나와 나에게 속한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의 의식은 나와 나에게 속한 것이 있다고 잘 못 알고서 집착하지만 기대는 항상 좌절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므로, 이러한 나라는 의식은 항상 고통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공인 세계는 無常하며, 無我이며, 苦이다. 실재로는 공인 이러한 세계는 경험되는 환상같은 세계를 연출하는데, 이것이 바로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없으면 생기고 있으면 사라지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있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러한 세계이다. 생길 때는 생기지만 실체도 없고 나오는 곳도 없으며, 사라질 때는 사라지지만 실체도 없고 사라져 가는 곳도 없다. 공에서 와서 공으로 가는 것이다. 이 생기고 사라지는 세계는 마치 時空間 속에 존재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텅 비어 있을 뿐이므로 시간과 공간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시공간적으로 생기고 사라지는 듯이 보이는 이 세계가 사실은 생기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참모습은 텅 빈 것이다. 다만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환상과 같은 경험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계는 因緣의 모임에 의하여 성립한다. 인연의 모임이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때 이것이니 저것이니하는 그러한 실체는 없다. 그저 생기는 듯하다 사라져 버리는 환상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중도의 세계이다. 이러한 중도의 세계의 실상을 바로보지 못하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 거짓에 집착함으로써 고통이 생긴다. 이러한 중도의 세계를 바로 보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 공관의 내용은 대개 이와 같다.

禪定에서 공을 행하는 것은 좁은 의미로는 空處定을 나타내고, 넓은 의미로는 九次第定 전체를 나타낸다. 공처정은 구차제정 가운데 다섯 번째이며 四無色定의 첫 단계인데, 이 선정의 단계에서는 色想이 사라진다. 구차제정이란 9가지의 단계로 생각(想)을 없애가는 선정 수행법이다. 이 가운데 공처정에 들면 색깔과 형태 등 모든 감각인상에서 벗어나, 이러한 감각인상이 없는 텅 빈 공간이라는 생각(空處想)만이 남게된다는 것이다. 한편 넓은 의미로 보면 구차제정 모두가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없애가서 결국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빔에 도달하는 것이므로 구차제정 전체가 공행이 된다. 이러한 공행의 결과는 공관의 결과처럼, 세계는 단지 인연의 모임일 뿐이며 진실로는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空三昧는 無相三昧, 無願三昧와 더불어 三三昧 수행법 가운데의 하나이다. 공삼매는 諸法 즉 모든 세계가 공이라고 단적으로 觀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공삼매는 공관과 다르지 않다. 특히 공삼매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을 때 사용했던 수행법으로서 모든 삼매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이며, 무상삼매와 무원삼매를 얻는 바탕이 된다.

이처럼 아함경에서 공사상은 관법에서의 공관, 선정에서의 공처정, 삼매에서의 공삼매로 나타나지만 그 결과는 같다. 즉 세계가 인연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것이며,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있지 않다고도 할 수 없다. 이러한 공사상은 대승의 공사상과 다르지 않게 보인다. 특히 본론에서 註를 통하여 이미 밝혔듯이 핵심적인 몇 구절들은 [반야경]이나 [금강경] 같은 대승경전들이나, 용수의 [중론] 속에 나오는 구절들과 많이 닮아있다. 대승의 공사상과 아함경의 공사상의 상이점을 연구하여 상호관계를 밝혀 볼 이유가 여기에서도 드러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이전에 먼저 無常, 苦, 無我와 空의 관계를 철저히 밝히고, 또 Pāli 5 Nikāya에서의 공사상을 밝히는 것이, 대승과 아함 공사상의 관계를 보다 분명히 해 줄 것이다.





참고문헌

*.경전

1. 長阿含經, 大正藏 권1.

2. 中阿含經, 大正藏 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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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金剛般若波羅蜜經 1권] 鳩摩羅什역, 大正藏 권8.

6. [小品般若波羅蜜經 10권] 鳩摩羅什역, 大正藏 권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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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동화, [원시불교사상],(서울:보련각,1992)

2. 고익진, [아함법상의 체계성연구],(서울:동국대출판부,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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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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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藤田宏達,"原始佛敎에서의 空",[佛敎思想]7,(昭和57)

 

 

 

 

 

 

 

[출처] [공유] 아함경에서의 공사상 (阿含經에서의 空思想)|작성자 가롯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