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품반야경에서 선남자․선여인의 성격
문 을 식/동국대학교 강사
차례
1. 들어가는 말
2. 선남자․선여인의 일반적 의미
3. 대승불교 이전의 경전에서 선남자․선여인의 성격
(1) 단순히 ‘훌륭한 가문의 출신자’라는 의미로 쓰인 경우
(2) 비구 된 자가 출가하기 전 집에 있었을 때를 부르는 경우
(3) 5계를 지키고, 부모를 비롯한 처자․종친․사문․바라문을 공경하는 경우
4. 선남자․선여인과 보살과의 관계
5. 반야반라밀의 신앙자와 전지자로서 선남자․선여인
1) 반야바라밀의 신앙자로서 성격
(1) 모든 천신과 시방 현재불에 의해 수호되고 보호받는 경우
(2) 단지 반야바리밀을 서사하여 집에서 공양만 해도 이익을 얻는 경우
(3) 칠보로 된 탑을 세워 공양하는 것보다 반야바라밀을 수지독송하고 공양하는 것이
더 많은 복덕을 얻게 되는 경우
(4) 반야바라밀에 의해 모든 공덕을 얻게 되는 경우
2) 반야바라밀의 전지자로서 성격
(1) 반야바라밀을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하는 경우
(2) 반야바라밀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써서 독송하고 설하게 하는 경우
(3)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갖가지 인연으로 반야바라밀의 뜻을 연설하고 열어 보이며 분별하여
쉽게 해석해 주는 경우
3) 반야바라밀을 독송하고 설하는 법사로서 성격
6. 나오는 말
1. 들어가는 말
반야부 경전은 보살이 般若波羅蜜을 설하거나 행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반야바라밀이고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진리는 그것을 추구하는 주체의 무한한 작용 안에서 진실로 표현되므로 진리라고 하여 그 진리에 안주할 때에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님을 뜻한다. 이 점에서 반야경은 무엇이 진리인가를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지를 가르치고 있는 경전이라 할 수 있다. 반야경은 진리를 추구하는 주체들에 대한 것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반야경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주체는 보살이다. 반야경은 보살의 주체적인 실천을 확립하는 데 주안점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반야경에는 진리를 추구하는 주체로서 보살만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선남자․선여인도 여러 곳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반야경에서 반야바라밀을 실천하고자 하는 주체는 보살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보살과 선남자․선여인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겠다.
보살은 보시바라밀을 비롯한 6바라밀, 곧 반야바라밀이 가진 매우 높고 깊은 진리 그 자체의 지혜를 증득하기 위해 불굴의 노력으로 수행할 수 있는 자임에 반해, 일반적으로 선남자․선여인은 근기가 낮아 아직 반야바라밀을 직접 실천할 수 없어서 반야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하는 등의 좀더 쉬운 반야바라밀행을 실천하는 자라고 한다. 그러나 반야경 곳곳에서는 보살을 부를 때도 선남자라고 하는 경우가 발견되고 있다. 물론 선남자․선여인이 발심하면 보살이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선남자․선여인과 보살과의 관계는 근기의 높고 낮음에 그 기준이 있는 것인지? 보살에는 크게 退轉菩薩과 不退轉菩薩이 있다. 그때 그들은 이 양자 가운데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아니면 이 두 부류 모두에 속하는 것인지?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첫째로는 선남자와 선여인의 일반적인 의미와 대승불교 이전의 불교, 곧 초기와 부파 불교에서 선남자와 선여인의 쓰임새에 관해 알아보고, 또 그들은 재가자에만 한정해서 부르는 호칭인지, 아니면 출가비구와 비구니도 포함되는 것인지를 논의할 것이다.
둘째로는 선남자․선여인은 대승불교의 주체적 실천자인 보살과 관계는 어떠한 관계인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선남자․선여인과 보살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대승불교의 실천자로 영원히 양립하게 되는지, 아니면 선남자․선여인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 보살이 될 수 있는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 지를 논의할 것이다.
셋째로는 반야경에서 선남자․선여인은 단순히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거나 독송하며 올바르게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고, 반야바라밀의 뜻을 설하여 다른 사람에게 열어 보이고 분별하여 해석해 줌으로써 아주 많은 공덕을 얻는다고 한다. 이 가운데는 상당한 수행을 한 자라야만 할 수 있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때의 선남자․선여인은 대승 이전의 선남자․선여인처럼 단순히 信仰者로만 그치는지, 아니면 반야바라밀의 傳持者와 法師(dharma-bhāṇaka)로서의 역할도 하는 지를 논의할 것이다.
그런데 본고에서 주 텍스트로 삼는 반야경은 대승불교의 초기 경전에 속하지만 그 성립기간은 천 년 이상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들의 기원 문제는 대승의 기원 문제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반야경의 기원에 관해 확실하게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반야경의 발달 과정에 대해서도 여러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으로는 영국의 불교학자 에드워드 콘즈의 ‘팔천송 → 십만송, 이만오천송, 일만팔천송 → 금강경 → 일백오십송’의 네 단계론이다. 그러나 일본의 불교학자 히타카를 비롯한 일본 학자 대부분은 에드워드 콘즈의 견해와 대부분 일치하지만, 『금강경』의 연대에 대해서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일본 학자들의 대체적인 주장은 ‘금강경 → 팔천송 → 이만오천송 → 십만송 → 반야심경 → 그 밖의 반야경류’ 등으로 증광과 축소의 과정을 거쳐 오늘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반야경들은 서력 이전 100년 무렵부터 서력 1200년 무렵까지 아주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성립된 것들이다.
이 가운데 이 글에서 중심 텍스트로 삼고자 하는 『대품반야경』은 구마라집이 산스끄리뜨어로 쓰인 『이만오천송반야경』을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대략 서력 100년까지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반야경 가운데서 초․중기에 속하는 경전으로 볼 수 있지만 그 내용 면에서는 이미 풍부하고 정형화된 이론들이 설해져 있다. 그러므로 반야경 가운데 가장 일반성을 띠고 있다는 이점과 더불어 그 주석서인 「대지도론」이 현존하여 자료로 편리한 점이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이를 중심 텍스트로 하겠지만, 필요할 경우 그 전후의 다른 반야경들도 참고하며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2. 선남자․선여인의 일반적 의미
대승불교에서는 보살과 함께 선남자(kula-putra)․선여인(kula-duhitṛ)은 모두 반야바라밀의 실천자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보살은 일반적으로 6바라밀의 수행자라는 의미가 강하다. 한편 선남자․선여인도 똑같은 대승의 수행자이긴 하지만, 경전의 공양․수지․독송 등 보살보다 좀더 낮은 일상적인 수행의 실천자라는 점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선남자․선여인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들의 원래 의미인 ‘훌륭한 가문의 남자․여인’이라는 의미 외에 또 다른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먼저 이들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래는 좋은 가문의 남자․여자를 가리키는 것인데, 불전 안에서는 在俗의 청중을 부르는 이름이라고 한다. 다시 둘로 나누어 말한다. 첫째는 과거세에서 善根의 공덕을 쌓은 남자․여자이다. 그 과거세의 선근이 현세에서 계발되어 불법을 듣고 신앙할 수 있는 자, 또는 현세에서 선을 닦는 신앙심이 있는 선한 남자․여자를 말한다. 둘째는 염불하는 남자와 여자. 악인이라도 마음을 집중하여 염불하면 선남자․선여인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우선 재속의 불자이고, 과거에 쌓은 선근의 공덕이 현세에 계발되어 불법을 신앙할 수 있거나 현세에서 선근을 닦는 사람, 또는 염불하는 사람이라 하고 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선근의 공덕을 쌓거나 닦고 있는 재가의 남자․여자임을 알 수 있다.
또 상당히 후기에 속하는 규기의「아미타경통찬소」 권하에서도 ‘선남자․선여인은 우바새(upāsaka)와 우바이(upāsikā)로서 5계를 굳게 지키는 자들’이라고 하여, 마찬가지로 재가자를 가리키고 있다.
선남자(kula-putra)란 산스끄리뜨어로 우파삭가로서 근사남을 말하는데, 삭자는 남성이다. 그는 5계를 굳건히 지키며 능히 비구승을 받들어 섬기기 때문이다. 선여인(kula-duhitṛ)이란 우파사가라고 하고, [근사녀라고 이르며] 사자는 여성이다. 또한 5계를 지키며 능히 비구니를 받들어 섬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파삭가는 우바새를 가리키고, 우파사가(upāsikā)는 우바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각각 재가의 남녀 신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중기 대승경전인『승만경』에서는 위의 사전적 의미나 「아미타경통찬소」에서의 의미와 다르게 선남자․선여인를 세 부류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세 부류의 선남자․선여인은 깊고 깊은 이치를 스스로 해치지 않고 큰 공덕을 낳아 대승의 길로 들어간다. 세 부류는 어떤 사람들인가. 이른바 ① 선남자․선여인은 스스로 깊고 깊은 법의 지혜를 성취하는 자, ② 선남자․선여인은 법의 지혜를 기꺼이 따라 성취하는 자, ③ 선남자․선여인은 모든 깊은 법을 스스로 다 알지 못하니, 다만 부처님만을 믿고 나의 경계가 아니고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고 하여, 선남자․선여인은 오직 부처님만을 우러른다고 말한다."(번호는 필자)
이것은 부처님의 도에 들어가는 부류를 셋으로 나누어 말한 것이다. ①은 스스로 법의 지혜를 성취하는 부류, ②는 법의 지혜에 따라 성취하는 부류, ③은 스스로 깊은 법을 알지 못하니, 오직 부처님만을 믿어 의지하는 부류 등이다. 여기서 ①과 ②의 선남자․선여인이란 단순히 반야바라밀을 신앙하는 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바탕으로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자로 볼 수 있다. 또 인용문의 바로 앞의 구절에서 다만 여래를 믿는 사람도 마침내는 그와 같은 구경을 얻는 큰 이익이 있어서 깊고 깊은 이치(반야바라밀)를 비방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③의 선남자․선여인도 보살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①, ②와 ③을 보살 4위에 배대하여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①과 ②는 無生法忍을 얻어 최소한 보살위에 들어간 제 3위의 불퇴전보살 이상을 가리킨다면, ③은 제 1위의 초발의보살이나 제 2위의 구발의보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 의미를 확대해 해석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고 공양하며 정념하고 찬탄하는 반야바라밀의 신앙자로서 선남자․선여인을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선남자․선여인은 단순히 선근의 공덕을 쌓는 재가의 남자․여자만을 뜻하지 않고, 보살도 그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반야경보다도 늦게 성립된 문헌에서 살펴본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것은 뒤에서 보게 되듯이 ?대품반야경?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사전적 의미나 시기적으로 꽤 늦은 「아미타경통찬소」에서 보이는 선남자․선여인은 5계를 굳게 지키며 선근의 공덕을 쌓거나 닦고 있는 재가의 남자․여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기 대승경전인 『승만경』에서 선남자․선여인은 보살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선남자․선여인이 대승의 지지자나 신앙자의 성격에 그치지 않고, 보살로서 보살의 길을 걷는 수행자라는 의미도 있음을 나타낸 것이므로 우선 대승 이전의 불교에서 5계를 지키며 수행자들을 공양하여 선근공덕을 쌓는 일반 재가자, 더 나아가 출가하여 수행에 정진하는 자들도 선남자․선여인으로 지칭했는지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여기서는 초기불교의 중심 교리를 포함하고 있는 아함경을 중심으로 선남자․선여인의 성격은 어떠한 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3. 대승불교 이전의 경전에서 선남자․선여인의 성격
선남자․선여인이란 대승불교에서 처음 사용되는 용어는 아니다. 그것들은 대승불교 이전에도 사용되었고, 더욱이 불교 밖에서 이미 널리 사용되던 말을 불교가 채용하여 점차로 교리적인 용어로 바뀌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아함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예로부터 확인될 것이다. 아함경에서 선남자의 성격은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단순히 ‘훌륭한 가문의 출신자’라는 의미로 쓰인 경우, 둘째는 비구 된 자가 출가하기 전 집에 있었을 때를 부르는 경우, 셋째는 5계를 지키고 부모를 비롯하여 처자․종친․사문․바라문 등을 공경하는 경우이다.
(1) 단순히 ‘훌륭한 가문의 출신자’라는 의미로 쓰인 경우
『장아함경』 권13 「아마주경」에서 바라문 청년 암바타가 자신의 가문이 훌륭함을 자랑하자, 부처님께서 ‘너는 석가족의 하녀의 자식이다’라고 말할 때 암바타 청년의 친구들이 그를 변화하여 말하기를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암바타는 진실한 가문의 아들(族姓子)로서 용모가 단정하고 변재가 뛰어나며 박학다식한 자입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경우는 암바타 청년을 족성자(kula-putra: 빠알리 어로는 kula-putta), 곧 선남자로 불리고 있지만, 이것은 단순히 가문이 좋은 바라문 청년이라는 것을 밝힌 것일 뿐 불교 특유의 의미를 갖는 술어와 관련이 없는 진술이다.
(2) 비구 된 자가 출가하기 전 집에 있었을 때를 부르는 경우
신심이 있는 선남자가 올바른 믿음으로 집이 아닌 곳으로 출가하여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마땅히 법에 수순하리라’.
1)『잡아함경』 권2(「大正藏」 2, 12쪽a19). “信心善男子 正信非家出家 自念 我應隨順法.”
라다(Radha) 비구가 홀로 고요한 곳에서 골똘히 사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선남자가 수염과 머리를 깎고 물들인 가사를 입고서 올바른 믿음으로 집이 아닌 곳으로 출가하여 도를 배우면 정진을 증진시키고 모든 청정행을 닦고 법을 보고 스스로 알아 작증하여 나라는 생각이 이미 다하고, 청정행이 이미 확립되며, 지을 바를 이미 다 짓고, 후유를 받지 않음을 스스로 알아 아라한을 이루고 마음을 잘 해탈한다.
2)『잡아함경』 권6(「大正藏」 2, 40쪽b13). “羅陀比丘 獨一靜處 專精思惟 所以 善男子 剃除鬚髮
著染色衣 正信非家 出家學道 增益精進 修諸梵行 見法自知作證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 成阿羅漢 心善解脫.”
만약 선남자가 올바른 믿음으로 집이 아닌 곳으로 출가하여 도를 배운다면 그는 일체 응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4성제법을 안다.
3)「大正藏」 2, 10쪽6a17. “若善男子 正信非家 出家學道 彼一切所應當 知四聖諦法.”
선남자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서 올바른 믿음으로 집이 아닌 곳으로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나아가서 마음을 잘 해탈하여 아라한을 얻는다.
4)「大正藏」 1, 250쪽a9. “善男子 剃除鬚髮 著袈裟衣 正信非家 出家學道 乃至 心善解脫
得阿羅漢.”
여기서는 모두 ‘선남자가 올바른 믿음으로 집이 아닌 곳(非家)으로 출가하여 도를 배우면’이라는 가정법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출가하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가문이 좋은 집의 자녀’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물론 부처님 당시 세 가섭이나 사리불, 목건련 그리고 빔비사라 왕과 같은 좋은 가문의 자제들이 많이 출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출가하여 비구가 된 자들의 신분이 반드시 좋은 집안의 자제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빨리(Upāli)와 같이 그 당시 가장 하천한 계급인 슈드라(śūdra) 출신자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출가 이전의 신분이 어떠했었던 불교의 승가에 입문하는 자는 뛰어난 자라는 인식이 불멸 후 교단에 존재하여 출가하고자 하는 자들을 높여서 선남자 또는 족성자로 불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선여인도 믿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출가하여 무상삼매를 거듭하여 닦고 익히면 감로문과 구경의 감로열반에 머물 수 있다고 하고 있다.
(3) 5계를 지키고, 부모를 비롯한 처자․종친․사문․바라문을 공경하는 경우
이에는 다시 둘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5계를 지키는 경우이고, 둘째는 재가자로서 부모나 처자식 그리고 권속, 더 나아가서 출가 사문이나 바라문 또는 복전인 부처님 등을 공양하여 다음 생애에 천계에 태어나고자 공덕을 쌓는 경우이다.
첫째 5계를 지키는 경우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성이나 읍 또는 마을에 살면서 진실한 법을 성취하여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살생을 하지 않고, 도적질을 하지 않으며, 삿된 음행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는다.
5)『잡아함경』 권38(「大正藏」 2, 278쪽c21). “有善男子 善女人 在所城邑聚落 成就眞實法 盡形壽
不殺生 不偸盜 不邪婬 不妄語 不飮酒.”
이 인용문에 해당하는 빠알리 어 『증지부』에서는 “남자(purisa) 또는 여인(itthī)이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며, 승가에 귀의하며, 살생을 여의고, 불여취를 여의며, …”라고 하여, 선남자․선여인이 단순히 남자․여인으로 되어 있다. 이에 해당하는 『별역잡아함경』 권1에서도 “만약 마을이나 읍내 또는 성에서 남자 또는 여인이 살생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으며, 삿된 음행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술이 마시지 않고 수행한다면 …”라고 하여, 빠알리 어 『증지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선남자․선여인이라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경의 다른 번역인 축담무란(Dharmarakṣa)이 번역한 『계덕향경』에서는 선남자․선여인이라 하고 있고, 또 법현이 번역한 『계향경』에서는 ‘근사남(upāsaka)․근사녀(upāsikā)’로 되어 있다.
여기서 선남자․선여인을 남자․여인이라고 하건, 또는 근사남․근사녀라고 하건 이들 모두는 공통적으로 5계 또는 10선계를 지키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재가자로서 선남자․선여인의 종교생활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 선남자나 선여인은 재가자로서 재물의 이익을 얻어 부모를 공양하고 처자식과 권속 그리고 노복들에게 회향하고, 또는 선지식이나 사문 또는 바라문과 복전을 공양하여 공덕을 쌓음으로써 다음 생애에 천계에 태어나는 큰 과보를 받게 되는 경우
어떤 선남자가 뛰어난 재물의 이익을 얻고 쾌락을 수용하여 부모를 공양하고, 처와 자식, 종친, 권속에게 나누어주며, 종과 하인에게 넉넉하게 공급해 주고, 모든 선지식에게 보시하며, 때때로 사문․바라문․여러 뛰어난 복전을 공양하여 … 미래에 천계에 태어난다. ….
6)『잡아함경』 권46(「大正藏」 2, 337쪽b3). “有善男子 得勝財利 快樂受用 供養父母 供給妻子
宗親眷屬 給恤僕使 施諸知識 時時 供養沙門 婆羅門 種勝福田 … 未來生天 ….” 이와 비슷한 용
례는 「증일아함경』 권12(「大正藏」 2, 606쪽c9)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같은 책, 권16
(「大正藏」 2, 625쪽a~626b)에서는 선남자․선여인이 8관재법을 지키고자 바란다면 선취,
욕천, 색천, 무색천, 전륜성왕 등으로 태어나게 되고, 또 성문승․연각승․불승의 길을 걷고자
욕구하면 그 소원이 모두 이루어지게 된다고도 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중일법을 풍송하고 수지하고 널리 연설하고 유포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을 때 모든 천인들은
그들을 옹호하겠다(我等盡共擁護 是善男子善女人 諷誦受持 增一尊法 廣演流布 終不中絶).”
(「大正藏」 2, 550쪽c28)라고 하는 진술은 반야경에서 선남자․선여인들에게 반야바라밀의
수지․독송․공양을 권하는 것과 같은 유형의 진술이어서 주목된다. cf. 『대품반야경』 권9
(「大正藏」 8, 289쪽c19)의 “若有善男子 善女人 受持般若波羅蜜 乃至 正憶念 魔若魔民
不能得其便 世尊 我等亦當擁護 … 爲善知識所護.”(288쪽c21)의 “是善男子 善女人 受持般
若波羅蜜乃至 正憶念 不離薩婆若心 供養般若波羅蜜 恭敬尊重 華香 乃至 伎樂 我常當守護是人.”
앞의 두 인용문은 초기불교에서 재가자들이 보시하고 계를 잘 지키면 그 공덕으로 다음 생애에 천계에 태어나게 된다는 전형을 보여 주는 진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선남자․선여인은 출가와는 상관없이 재가신도로서 종교생활을 하는 선한 남자와 여인을 가리킨다.
이상의 세 가지 경우에서, 첫째는 단순히 좋은 집안 출신의 남녀를 지칭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출가하여 비구나 비구니가 되기 전의 재가 남녀를 가리키는 경우이며, 셋째는 출가하지 않고 재가자로서 부모나 처자식 그리고 권속, 더 나아가서 출가 사문이나 바라문 또는 복전 등을 공양하여 다음 생애에 천계에 태어나고자 공덕을 쌓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출가한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선남자보다 선여인의 용례가 훨씬 적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 당시의 사정이 초기 대승불교 시대와 달리 출가, 또는 남성중심의 사회임을 나타낸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부파불교에서는 선남자․선여인의 용례는 많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초기불교와 마찬가지로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의 성격을 지님을 볼 수 있다.
「아비달마집이문족론」에서는 선남자․선여인이 부처님의 정법을 듣고 깨끗한 믿음이 생기면 속세의 여러 가지 많은 더러움이 줄어들지만 그보다도 머리 깎고 출가하여 깨끗한 계를 수지하면 모든 번거로움을 떠나서 원만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고, 또 「아비달마순정리론」에서는 앞으로 올 세계에 어떤 선남자가 네 계급 가운데 어느 계급으로 태어나든 부처님께 귀의하고 출가하면 승보가 된다고 한다.
이처럼 대승불교 이전의 선남자․선여인은 재가적 성격을 지녔다. 그것은 재가자와 출가자가 현실세계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다. 곧 재가자들은 재물의 이익을 얻어 부모를 공양하고 처자식과 권속 그리고 노복들에게 회향하고, 또는 선지식이나 사문 또는 바라문과 복전을 공양하여 베풀고(施論), 5계와 10선계를 잘 지켜서(戒論) 좋은 공덕을 많이 쌓아서 다음 생애에 천계에 태어나는 큰 과보를 받기 위해(生天論), 이 세 가지를 실천하는 종교생활을 하였다면, 출가자들은 아라한(Arhat)의 깨달음을 얻어 윤회의 세간을 벗어나는 것을 이상으로 하여 수행․정진하는 종교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인도불교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4. 선남자․선여인과 보살과의 관계
반야경에서는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는 자를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선남자․선여인도 보살과 더불어 반야바라밀의 실천자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보살이라고 할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6바라밀의 수행자라는 의미가 강하지만, 선남자․선여인도 똑같은 대승의 수행자이긴 하지만 공양․수지․독송 등의 일상적인 수행의 실천자라는 점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보살도 반야바라밀을 듣고 받아 지니고 독송하도록 권하는 진술도 있다.
제석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매우 기이하고 드문 일입니다.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 반야바라밀을 만약 듣고서 받아 지니고 친근하며 독송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하고 바르게 기억할 때에는 이와 같은 금세의 공덕을 얻습니다.
7)『大正藏』 8, 280쪽c17. “爾時 釋提桓因白佛言 世尊 甚奇希有 諸菩薩摩訶薩 是般若波羅蜜
若聞受持 親近讀誦 爲他說正憶念時 得如是今世功德.”
그런데 이와 비슷한 진술이 선남자․선여인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교시가(제석천)여! 이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고 가까이 하며 독송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하고 바르게 기억하는 선남자․선여인이 얻게 되는 금세의 공덕을 그대는 한 마음으로 잘 들어라.
8)『大正藏』 8, 281쪽a7. “復次憍尸迦 是般若波羅蜜 受持 親近 讀誦 爲他說 正憶念
그렇다면 위의 두 인용문에서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고 가까이 하며 독송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하고 바르게 기억하는 선남자․선여인과 보살과는 어떤 관계일까? 선남자․선여인이 보살과 같은 것인지, 아니면 보살과 구별하여 다른 대승불교의 지지자 또는 신앙자로서만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인지?
먼저 보살과 선남자․선여인의 관계에 대한 「대지도론」 권56의 진술을 보기로 하겠다.
묻기를 ‘다른 곳에서는 모두 보살마하살이라고 말하는데 무엇 때문에 이제 선남자․선여인이라고 말하는가?’ 대답하기를 ‘앞에서 보살마하살이라고 한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실상의 지혜를 능히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공양․수지․독송 등의 잡설을 말하기 때문에 선남자․선여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9)『大正藏』 25, 459쪽a1. “問曰 餘處皆言菩薩摩訶薩 今何以言善男善女人 答曰 先說實相智慧
難受以能受 故則是菩薩摩訶薩 今說 供養 受持 讀誦 等雜說故 得稱善男子善女人.
다른 곳에서 보살이라 할 경우는 제법실상의 지혜와 같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차원 높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또 반야바라밀의 수행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理想像으로 생각되는 인물을 말하지만, 여기서 반야바라밀에 대한 공양이나 반야바라밀의 수지나 독송 등의 잡설에 대한 것을 말하므로 보살과 구분하여 선남자․선여인이라 한다고 한다. 그러면 그들은 분명히 보살과 그 격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리라. 그런데 다음의 진술은 이와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말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교시가여! 보살마하살,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와 우바이, 그리고 천자나 천녀가 이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고 가까이 하여 독송하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해주고, 바르게 기억하여 일체지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면, 여러 천자들아! 이 사람에게는 악마나 악마의 백성이 해를 끼치려고 해도 그 기회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선남자․선여인은 색이 공성임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10)『大正藏』 8, 280쪽a8. “憍尸迦 若菩薩摩訶薩 若比丘 若比丘尼 若優婆塞 若優婆夷 若諸天子
若諸天女 是般若波羅蜜若聽受持親近讀誦 爲他說正憶念不離薩婆若心 諸天子 是人魔 若魔民不
能得其便 何以故 是善男子善女人 諦了知色空 空不能得空便 無相不能.”
여기서 보살마하살,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와 우바이, 천자와 천자를 일괄해서 선남자․선여인이라 하고 있다. 특히 보살마하살도 선남자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인용한 「대지도론」의 진술과는 분명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재가신도인 우바새와 우바이는 물론이고 비구와 비구니, 천자와 천녀도 선남자․선여인이라고 하고 있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선남자와 선여인은 출가와 재가의 구분 없이 선남선녀 모두를 지칭하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보살과 선남자․선여인의 관계의 문제로 되돌아가서 논의를 하기로 하겠다. 곧 다음의 인용문은 앞의 인용문보다 더 직접적으로 보살을 선남자라고 호칭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살타파륜보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구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살타파륜보살이 일찍이 반야바라밀을 구할 때에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고, 명예나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반야바라밀을 구하기 위하여 사람의 자취가 없는 한적한 산 속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공중에서 소리를 들었다. 그대 선남자여! 여기서 동쪽으로 가거라.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참아야 한다. 잠에 정신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마실 것이나 먹을 것에 정신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밤과 낮의 구별도 잊고, 추위 또는 더위에도 상관하지 않아야 하며, 안도 사념하지 말고 바깥도 사념하지 말아야 한다.
11)『大正藏』 8, 416쪽a26. “須菩提白佛言 世尊 薩陀波崙菩薩摩訶薩 云何求般若波羅蜜 佛言
薩陀波崙菩薩摩訶薩 本求般若波羅蜜時 不惜身命 不求名利 於空閑林中 聞空中聲言 汝善男子
從是東行 莫念疲極 莫念睡眠 莫念飮食 莫念晝夜 莫念寒熱 莫念內 莫念外.”
이 인용문은 맨 끝에 나오는 살타파륜(상제)이라는 초발심보살이 불퇴전위보살인 담무갈보살에게 보살의 길이 무엇인지를 배우려는 가는 과정을 설한 부분에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는 살타파륜이라는 보살을 선남자로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상제품’과 ‘법상품(담무갈품)’에서는 자주 등장하고 있다. 거기서 살타파륜보살을 선남자라고 부르는 상대는 공중에서의 소리, 여러 부처님, 부호의 딸, 바라문, 석제환인, 담무갈보살 등 그 신분도 다양하다. 또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반야심경』에는 관자재보살을 선남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그때 사리불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어 합장 공경하고 관자재보살 마하살에게 아뢰었다. ‘선남자여! 만약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행을 배우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합니까?’ 이렇게 물으니, 이때 관자재보살 마하살이 구수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사리자여!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이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는 마땅히 5온의 성품이 공하다고 관해야 한다.
12)『大正藏』 8, 849쪽c1). “卽時 舍利弗 承佛威力 合掌恭敬白 觀自在菩薩摩訶薩言 善男子
若有欲學甚深般若波羅蜜多行者 云何修行 如是問已 爾時 觀自在菩薩摩訶薩告具壽舍利弗言
舍利子 若善男子善女人 行甚深般若波羅蜜多行時 應觀五蘊性空.”
곧 바로 세존께서 광대심심삼매에서 나와 관자재보살마하살을 칭찬하여 말씀하였다. 좋다, 좋다. 선남자여! 그와 같으니라, 그와 같으니라. 그대가 설한 것과 같으니라.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행은 마땅히 이와 같이 행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행할 때 모든 여래들도 모두 따라서 기뻐할 것이니라.
13)『大正藏』 8, 489쪽c23. “卽時 世尊從廣大甚深三摩地起 讚觀自在菩薩摩訶薩言 善哉 善哉
善男子 如是如是 如汝所說 甚深般若波羅蜜多行 應如是行 如是行時 一切如來 皆悉隨喜.”
첫 번째 인용문에서 출가비구인 사리불과, 두 번째의 부처님께서 관자재보살을 선남자라 부르고 있는 경우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관자재보살은 일생보처보살로서 한번만 더 생을 받으면 성불할 수 있는 대보살이다. 이러한 대보살을 선남자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까? 그리고 보살과 선남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위의 인용문들에서 볼 때에 선남자는 ‘훌륭한 가문의 남자(kula-putra)’를 뜻하는 원래의 의미가 아니고, ‘善은 善因의 뜻이므로 과거세에 지은 善事功德이 현세에 나타나 부처님의 교법을 듣고 믿어 실천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 같다. 대보살은 과거에 치열한 불도를 닦고 성불행이 완성된 존재로서 중생제도를 위해 이타심을 가지고 보살도를 실천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선남자는 보살을 부를 때 호칭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 불교학자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의 진술을 잠시 보기로 하겠다.
"보살 및 선남자․선여인은 모두 반야바라밀의 실천자이므로 어느 면에서는 보살과 선남자․선여인은 일치한다. 그러나 보살인 경우에는 新學(초발의, 초발심)보살부터 일생보처보살까지의 계위가 있어 그 내용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보살이라 하는 경우에는 모범적인 수행자로 상기되는 것이다.”
14) (平川彰(沈法諦 역), 「초기대승불교의 종교생활」, 서울: 民族社, 1989, 261쪽.
"대승경전의 용례로 보건대, 보살 가운데에는 관세음보살, 보현보살, 미륵보살 등이 포함되지만 그러나 이들은 일생보처 보살이지 현실적인 대승불교의 수행자로서의 보살과의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 그러나 보살에는 이밖에도 불퇴전보살 및 구발의보살 나아가 신발의보살 등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만약 대승의 신자를 보살 가운데 포함시키고자 한다면 신학보살 및 구발의보살 가운데에 이들을 포함시키는 것은 곤란하지 않다."
15) (같은 책, 264쪽.)
이 두 인용문에 따르면 관자재보살과 같은 일생보처보살이나 불퇴전지보살은 선남자․선여인, 특히 선남자의 범주에 들지 않고, 다만 신학보살이나 구발의보살, 곧 퇴전보살만 선남자의 범주에 포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반야경의 편찬자들이 아무 의식 없이 선남자․선여인이라는 술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남자․선여인은 출가와 재가, 인간이나 천신을 막론하고 이미 보살의 길에 들어선 자 또는 보살의 길에 들어설 가능성이 있는 모든 수행자를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했지 않았을까.
만약 이런 전제가 성립한다면 앞의 히라카라 아키라의 주장 가운데 소위 퇴전보살, 곧 범부보살만 선남자․선여인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고 불퇴전위 이상의 보살들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앞의 전제에서 보살의 길에 이미 들어선 자란 초발심보살부터 일생보처보살까지 모든 보살이 포함되고, 또 보살의 길에 들어설 가능성이 있는 자란 아직 보살의 길에는 들어서지 않았지만 반야바라밀을 수지하고 독송하는 등을 실천함으로써 언젠가는 보살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자, 곧 중생보살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히라카와 아키라의 주장과 달리 이 전제가 타당하다는 것은 앞의 두 인용문에서 사리불과 부처님께서 관자재보살을 선남자로 부르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남자․선여인의 성격을 대승적으로 모두를 포용하여 동참자의 범위를 확대한다면 관자재보살은 물론이고,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설한대로 알고 행하는 보살의 길을 걷는 자라면 누구든 선남자 또는 선여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초발의보살은 물론이고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설한대로 알고 행하여 무생법인을 얻어 보살위에 들어간 불퇴전지에 있는 보살과 같은 자들이라도 선남자 또는 선여인을 지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의 인용문은 그것을 방증하는 유효한 예로 볼 수 있다.
그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놀라지도 겁내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듣고서 받아 지니고 친근하게 설한대로 익히고 행한다면 이 선남자․선여인은 불퇴전지에 있는 보살마하살과 같다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세에서 오래도록 보시바라밀․지계바라밀․인욕바라밀․정진바라밀․선정바라밀․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았다면 마침내 깊은 반야바라밀을 믿고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6)『大正藏』 8, 313쪽b17. “?爾時 舍利弗白佛言 世尊 若有善男子 善女人 聞是深般若波羅蜜
不驚不怖不畏 聞已受持親近 如說習行 當知 是善男子 善女人 如阿惟越致菩薩摩訶薩 何以故
世尊 是般若波羅蜜甚深 若先世不久行檀那波羅蜜 尸羅波羅蜜 羼提波羅蜜 毘梨耶波羅蜜
禪那波羅蜜 般若波羅蜜 終不能信解 深般若波羅蜜.”
세존이시여! 선남자나 선여인이 선근을 성취하여 반야바라밀을 듣고 받아 지니며 나아가 설한대로 수행한다면 이 보살마하살은 구발의로서 선근을 심었고, 여러 부처님을 공양하고 선지식과 서로 가까이했다고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반야바라밀을 능히 받아 지니고 올바르게 억념한다면 이 사람은 머지 않아 아누따라삼약삼보리의 기별을 받는다고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선남자나 선여인은 불퇴전지에 있는 보살마하살처럼 아누따라삼약삼보리에서 빗나가지 않고 능히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으며, 얻고 나서는 능히 받아 지니며 독송하고 나아가 올바르게 억념한다고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17)『大正藏』 8, 315쪽a8. “世尊 善男子 善女人 善根成就 得聞般若波羅蜜受持 乃至如說修行
當知是菩薩摩訶薩 久發意種善根 多供養諸佛 與善知識相隨 是人能受持般若波羅蜜 乃至正憶念
當知 是人近受 阿耨多羅三藐三菩提記 當知 是善男子 善女人 如阿惟越致菩薩摩訶薩 於阿耨多
羅三藐三菩提不動轉 能得深般若波羅蜜 得已能受持讀誦 乃至正憶念.”
이와 같이 만약 선남자나 선여인이 선근을 성취하여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겁내지도 않고, 듣고서는 올바르게 받아 지니고 설한대로 행한다면 구발의보살로서 선근을 심었다고 하고, 불퇴전지에 있는 보살처럼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는다고 하니, 이때 선남자․선여인은 적어도 초발의보살 이상의 보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을 ‘설한대로 수행한다면 이 보살마하살은 구발의로서 선근을 심었고’라고 하여 보살마하살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처럼 선남자․선여인은 보살행을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용례는 다음에서도 볼 수 있다.
미륵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이 선남자는 보살승을 행해 아누따라삼약삼보리에 회향한다 해도 그 마음은 사물에 의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선남자가 모습을 취한다면 생각한대로 얻을 수 있다고 할 수 없다.’ 다시 수보리가 미륵보살에게 아뢰었다. ‘만약 마음이 모든 사물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가령 보살승을 행하는 선남자에게 잘못이 없습니다. 곧 그가 상을 취하되 시방의 많은 부처님께서 초발심 때부터 법이 모두 소멸할 때까지 심었던 여러 선근과 성문의 여러 선근과 유학인 또는 무학인의 선근과 모든 화합하고 수희한 공덕을 취하여 아누따라삼약삼보리에 회향한다면 상이란 없는 것이므로 이 보살은 전도가 없습니다.’
18)『大正藏』 8, 297쪽c23. “彌勒菩薩語 須菩提 是善男子行 菩薩乘 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是緣事 若善男子 取相不得 如所念 須菩提語 彌勒菩薩 若諸緣諸事無所有 是善男子行 菩薩乘者
取相於十方 諸佛諸善根 從初發心 乃至 法盡 及聲聞諸善根 學無學善根 一切和合 隨喜功德
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 以無相故 是菩薩將無顚倒.”
‘보살승을 행하는’ 선남자라는 한정은 있지만 ‘초발심 때부터 심은 선근’이란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선남자는 이미 초발심지에 들어선 보살임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인용문의 다음에 논의되는 내용, 곧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의 의미 내지 일체종지의 의미, 이른바 內空 내지 無法有法空은 신학보살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 마땅히 불퇴전지에 있는 보살마하살에게 설해야 한다. 또 선지식에게 보호되고 또 오랫동안 여러 부처님을 공야하고 선근을 심은 이러한 사람을 위하여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의 의미 내지 일체종지의 의미, 이른바 내공 내지 무법유법공을 설해야 한다. 이 사람이야말로 이러한 법을 듣고서도 마음이 빠지지 않고 놀라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용문들에서는 선남자․선여인이 모두 주격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선남자나 선여인이 보살의 異名으로도 사용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리라.
따라서 반야경에서 선남자나 선여인과 보살과의 관계는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관자재보살과 같은 대보살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이럴 경우는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아 사리불이 대보살인 관자재보살을 부를 때 ‘관자재보살이여’라고 부르는 호격으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둘째는 범부보살이 선근을 성취하여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며 나아가 설한대로 수행한다면 구발의보살을 지나서 불퇴전지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고 머지 않아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열어 주기 위해서 사용한 호칭이다. 곧 선남자나 선여인은 보리심은 냈지만 아직 반야바라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 못한 범부보살을 지칭하는 경우이다.
또한 반야경에서 이 두 가지 경우는 쓰이는 용법이 각기 다르다. 첫째의 경우는 주로 반야바라밀을 설명하기 위한 對告衆으로서 사용되는 경우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선남자․선여인을 함께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선남자만이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둘째는 과거세부터 오랫동안 6바라밀을 수행해 온 선남자․선여인을 말하는 것으로서, 보살과 선남자를 동격으로 보는 경우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살타파륜(상제) 보살이다.
19) (cf. 『大正藏』8, 419쪽a17. “저(장자의 딸)는 선남자(살타파륜보살 곧 상제보살)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몸에서 심장과 혈액과 골수를 꺼내어 담무갈보살에게
공양할 것을 구함으로써 무슨 공덕을 얻으려고 합니까? 그 선남자가 대답하였다. ‘담무
갈보살은 나를 위하여 반야바라밀과 방편력을 설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보살이라면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고 행해야 할 도입니다. 나는 이 법을 배우고 이 도를 배워 아누
따라삼약삼보리를 얻을 때 모든 중생의 의지처가 되려는 것입니다(長者女言 善男子
作是賣身 欲自出心髓血 欲供養曇無竭菩薩 得何等功德利 薩陀波崙答言 善女人 是人善
學般若波羅蜜 及方便力 是人當爲我說 菩薩所應作 菩薩所行道 我學是法 學是道 得阿
耨多羅三藐三菩提時 爲衆生作依止).”
그런데 『대품반야경』에서는 대부분 이 용법으로 쓰이며, 대체로 권11의 수희품, 권13의 문지품, 권15의 비유품, 권16의 대여품 그리고 권27의 상제품과 법상품 등에서 설해지고 있다. 이러한 선남자․선여인과 보살과의 관계는 「대지도론」에서 보았듯이 수행 내용에서는 각각 다르지만 대승이라는 넓은 시야에서 보면 선남자와 선여인라는 용어는 전문수행자로서 출가보살이건 일상생활을 하면서 수행하는 재가보살이건 대승의 길을 걷고 있는 자, 곧 보살도를 행하고 있는 보살을 다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5. 반야반라밀의 신앙자와 전지자로서 선남자․선여인
『대품반야경』 권8의 삼탄품과 멸쟁품, 권9의 대명품, 술성품, 권지품, 견이품, 존도품과 권10의 법칭품, 법시품 등에서는 단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고 독송하며 억념하고, 반야경을 써서 지니거나 공경하고 공양하고, 나아가 반야경을 글로 쓰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 써서 지니게 하며, 또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갖가지 인연으로써 반야바라밀의 뜻을 연설하고 열어 보이며 분별하여 알기 쉽게 해석해 주고 그것을 설한대로 수행하며, 다른 사람에게 반야바라밀의 뜻을 연설하고 열어 보이며 분별하여 알기 쉽게 해석해 주고 더 나아가 그것을 설한대로 수행하라고 권하면 무한한 공덕이 있다고 하여 그것을 믿도록 하는 반야바라밀의 신앙자와 전지자로서 선남자․선여인에 대해 설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다시 둘로 나뉘어 볼 수 있다. 곧 권8과 9, 그리고 권10으로 나뉘어지며, 이들 간에는 약간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다른가.
먼저 권8과 9에서는 스스로 반야바라밀을 신앙하는 것에 중심이 있다면, 후자는 다른 사람에게 반야바라밀을 신앙하고 실천하도록 하는 것에 중심이 있다는 점이다. 전자는 반야바라밀의 신앙자, 후자는 반야바라밀의 전지자이면서 법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재속의 선남자․선여인이라도 반야바라밀을 단순히 믿고 받아들여 신앙하느냐, 아니면 오랫동안 믿고 받아들여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믿고 따르도록 권할 수 있느냐에 따라 단계를 두고 있다. 그것은 반야경이 반야바라밀을 신앙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실천하는 보살행으로 나아가기 위한 경전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러한 두 가지 경우를 중심으로 선남자․선여인에 대한 논의를 계속할 필요가 있다.
1) 반야바라밀의 신앙자로서 성격
이때 선남자․선여인은 가문의 훌륭하고 유덕함에 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재가 생활을 하면서 반야바라밀을 바르게 신앙하는 자, 곧 앞에서 말한 것 가운데 전자에 속하는 자들을 말한다. 특히 이때 선남자․선여인은 ‘불법을 믿으며 선을 닦는 남자와 여자’라는 의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선남자․선여인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고 독송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공덕이 있게 된다고 하는데 이에는 대략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사천왕 이하 모든 천신과 시방의 현재불에 의해 수호와 옹호를 받게 되는 경우. 둘째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고 독송하지 않고 다만 경권을 서사하여 집에서 공양하는 것만으로도 이익을 얻게 되는 경우. 셋째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해 7보로 된 탑을 세워 공양하는 것보다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고 독송하고 공양하는 것이 훨씬 많은 복덕을 얻게 되는 경우. 넷째 반야바라밀에 의해 모든 이익을 얻게 되는 경우 등이다.
이제부터 이들을 하나씩 전거를 들면서 살펴보기로 하자.
(1) 모든 천신과 시방 현재불에 의해 수호되고 보호받는 경우
그때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여러 4천왕․33천․야마천․도솔천․화락천․타화자재천 나아가서 5정거천까지의 여러 천신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선남자․선여인이 능히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고 가까이 하며 독송하고 바르게 기억하여 일체지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언제나 이들을 보호하겠습니다.
20)『大正藏』 8, 280쪽b7. “爾時 三千大千世界中 諸四天王天 三十三天 夜摩天 兜率陀天 化樂天
他化自在天 乃至 首陀婆諸天 白佛言 世尊 是善男子 善女人 能受持般若波羅蜜 親近讀誦 正憶念
不離薩婆若心者 我等常當守護.”
그때 여러 천자들이 하늘의 꽃을 변화로 만들어 부처님 위에 뿌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한다면 악마나 악마의 백성들이 그들을 해치려고 해도 그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우리들은 마땅히 이 선남자․선여인을 보호하겠습니다.
21)『大正藏』 8, 287쪽c18. “爾時 諸天子 化作天花 散佛上 作是言 世尊 若有善男子 善女人
受持般若波羅蜜 乃至 正憶念 魔若魔民 不能得 其便 世尊 我等亦當擁護 是善男子 善女人.”
선남자․선여인이 받아바라밀을 수지하고 독송하면 천신들의 보호를 받는 이유는 전생에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공덕을 많이 지었고, 여러 부처님을 가까이 모셨으며, 선지식들의 보호를 받은 자들이므로 부처님과 동등하게 보거나 부처님에 버금가는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시방의 현재불에 의해서도 옹호를 받는다고 한다.
시방에 계시는 현재하는 여러 부처님도 또한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고 공양하며 독송하며 남을 위하여 설하고 반야바라밀을 바르게 기억하는 이 선남자․선여인을 항상 옹호한다.
22)『大正藏』 8, 281쪽c2. “十方現在諸佛 亦共擁護 是善男子 善女人 能聞受持 供養讀誦 爲他說
正憶念 般若波羅蜜者 是善男子 善女人.”
(2) 단지 반야바리밀을 서사하여 집에서 공양만 해도 이익을 얻는 경우
반야바라밀을 단지 베껴서 쓰고 책으로 만들어서 집에 공양할 뿐이며, 기억도 하지 않고, 독송도 않으며, 설하지 않고, 바르게 기억하지 않더라도 이러할 경우 사람이나 사람이 아닌 것이 해칠 기회조차 얻을 수 없다.
23)『大正藏』 8, 283b21. “般若波羅蜜 若有但書寫經卷 於舍供養 不受不讀 不誦不說 不正憶念
是處若人 若非人 不能得其便.”
이 선남자 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단지 베껴 써서 집에서 공양만 하고, 독송하지도 설하지도 않고 정념하지도 않을지라도 현세에 그와 같은 공덕을 얻게 된다.
24)『大正藏』 8, 283b28. “是善男子善女人 但書寫般若波羅蜜於舍供養 不受不讀不誦不說不正憶念
今世得如是功德.”
이렇게 공덕을 얻게 되는 데는 천계의 여러 천신들과 천자들이 반야바라밀이 안치되어 있는 곳에 찾아와서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여 찬탄하고 예배하기 때문이다. 또 반야바라밀이 안치되어 있는 곳은 과거의 부처님들이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고, 현재와 미래의 부처님도 마찬가지로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을 곳이므로 사람이건 사람이 아닌 것이건 악의를 품고 왔더라도 해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3) 칠보로 된 탑을 세워 공양하는 것보다 반야바라밀을 수지독송하고 공양하는 것이 더 많은 복덕을 얻게 되는 경우
갠지스 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시방 국토에 있는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각기 높이가 1유순이나 되는 칠보 탑을 세우고 1겁이나 1겁이 멸할 때까지 공경하고 존중하며 찬탄하고 꽃과 향 그리고 음악으로써 공양하면, 세존이시여! 이 선남자․선여인이 얻는 복은 많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대단히 많을 것이다. 석제환인이 아뢰기를,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써서 지니고 나아가 정념하며, 또한 공경하고 존중하며 찬탄하고 꽃과 향 나아가 음악으로써 공양한다면 그 복은 훨씬 많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모든 선법은 모두 반야바라밀 안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25)『大正藏』 8, 285쪽c5. “若十方如恒河沙等 國土中衆生 一一衆生 供養佛故 佛般涅槃後
各起七寶塔 高一由旬 是人 若一劫 若減一劫 恭敬尊重 讚歎花香 乃至 伎樂供養 世尊
是善男子 善女人 得福多不 佛言甚多 釋提桓因言 若有善男子 善女人 書持是般若波羅蜜
乃至 正憶念 亦恭敬尊重 讚歎花香 乃至 伎樂供養 其福大多 何以故 世尊 一切善法 皆入
般若波羅蜜中.”
이처럼 반야바라밀경을 글로 써서 받아 지니고 배우고 가까이 하고 독송하며 설하고 정념하며 나아가 꽃과 향 그리고 음악으로써 공양하면 그것은 칠보로 된 탑을 공양하는 것보다 숫자로 비유할 수 없을 만큼 그 공덕이 뛰어나다고 한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이 세상에 있으면 3보가 끝내 멸하지 않고, 일체지와 일체종지가 모두 세상에 나타나며, 천상의 권속은 늘어나고 아수라는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바라밀과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세상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26) cf.『大正藏』 8, 286쪽a~b.
(4) 반야바라밀에 의해 모든 공덕을 얻게 되는 경우
선남자․선여인이 오랫동안 6바라밀을 수행하고 또 明呪로서 염송하면 현세의 공덕과 함께 후세의 공덕도 얻는다고 한다. 반야바리밀경을 청정한 곳에 안치하고 예배하고 공양하는 것이다. 먼저 6바라밀을 오랫동안 수행하는 경우를 보기로 하자.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듣고서 받아 지니고 가까이하고 독송하며 바르게 기억하여 일체지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면 두 군대가 싸우고 있을 때에 이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외웠기 때문에 군대의 진중에 들어가도 결코 목숨을 잃는 일이 없고 칼이나 화살에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선남자․선여인은 오랫동안 6바라밀을 행하여 스스로 음욕이라는 칼이나 화살을 제거하고 아울러 다른 사람의 음욕이라는 칼이나 화살을 제거하였기 때문이다. …. 이런 인연으로 이 선남자․선여인은 칼이나 화살에 의해서 다치는 일이 없는 것이다.
27)『大正藏』 8, 283쪽a22. “爾時 佛告釋提桓因言 若有善男子善女人 聞是深般若波羅蜜 受持親近
讀誦正憶念 不離薩婆若心 兩陣戰時 是善男子善女人 誦般若波羅蜜故 入軍陣中 終不失命 刀箭不傷
何以故 是善男子善女人 長夜行六波羅蜜 自除婬欲刀箭 亦除他人婬欲刀箭 … 以是因緣
是善男子善女人 不爲刀箭所傷.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고 가까이하며 독송하며 바르게 기억하여 일체지의 마음을 떠나지 않으면 전쟁터에서도 결코 목숨을 잃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데는 선남자․선여인이 오랫동안 6바라밀을 행해 음욕․성냄․어리석음․사견․얽매임 등을 제거하는 인연 때문이다. 여기서 보듯이 선남자․선여인은 그냥 공교롭게 곤경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6바라밀을 수행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렇게 되는 데는 반야바라밀이 大明呪(mahāvidyāmantra)․無上明呪(anu taravidyāmantra)․無等等明呪(asamasamavidyāmantra)이기 때문이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이 명주 안에서 배우면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괴롭히지 않으며, 나아가서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고 모든 중생들의 마음을 관찰하여 마음대로 법을 설할 수 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모두 이 주문을 배워서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었고, 얻으며,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발심하여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고자 하는 선남자․선여인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고 가까이 독송하고 바르게 기억해야 한다. 그 이유는 반야바라밀로부터 나머지 다섯 바라밀이 생겨나고, 내공부터 무법유법공, 4념처에서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 생겨나며, 모든 삼매와 선정 그리고 다라니문이 생겨나고, 또 중생의 이익을 성취하고 부처님의 국토를 정화하는 것도 모두 반야바라밀로부터 생겨나며, 나아가서 사천왕천에서 색구경천, 수다원에서 아라한과 벽지불과 여러 보살마하살과 여러 부처님, 여러 부처님의 일체종지도 모두 반야바라밀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염부제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불․법․승의 삼보에 대한 믿음이 부서지지 않고, 의심을 갖지 않으며 結了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적다. 그리고 아누타라삼야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사람은 더욱 적으며, 또 아누타라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사람 중에서 극히 적은 사람만이 보살도를 수행하고, 또 이 가운데서 극히 적은 사람만이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을 정도로 깨닫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교시가여! 내가 부처의 눈으로써 동방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승기수의 중생들이 아누따라삼약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켜서 보살도를 수행하는 것을 보니, 이러한 중생은 반야바라밀의 방편력에서 멀리 떨여져 있기 때문에 한 사람 또는 두 사람 정도가 불퇴전지에 머물러 있고, 다른 많은 사람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로 떨어져 있다. 남방․서방․북방과 상․하와 그 사이의 네 방향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이다.
28)『大品般若經』, 권9(「大正藏」 8, 284쪽c5). “憍尸迦 我以佛眼見東方 無量阿僧祇衆生
發心行阿耨多羅三藐三菩提行菩薩道 是衆生遠離般若波羅蜜方便力故 若一 若二 住阿惟越致地
多墮聲聞 辟支佛地 南西北方 四維上下 亦復如是.”
이와 같이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기 어렵기 때문에 선남자․선여인으로서 발심하여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고자 한다면 먼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고 가까이하고 독송하고 설하고 바르게 기억해야 한다. 또 글로 써서 경전으로 만들어 꽃․향․영락․옷․깃발․일산 그리고 음악 등으로써 공양하고 존중하고 찬탄해야 함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반야바라밀을 끊임없이 열렬하게 받아 지니고 독송하며 송념하고 공양하며 찬탄하면 마침내 성불하게 된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모든 선법인 성문법․벽지불법․보살법․불법의 모든 선법을 포섭하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을 명주로서 송념하면 현세는 물론이고 후세의 공덕도 얻게 된다.
따라서 반야바라밀을 믿고 받들며 수행해 왔느냐 아니면 수행한 적이 없느냐에 따라 둘로 나뉘어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양자 모두 깊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은 어려우므로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고 독송하며 올바르게 기억하고, 또 공양하고 존경하며 찬탄함으로써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을 수 있고, 성불도 할 수 있다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누구나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대승불교의 평등주의 정신에 충실한 것으로 주목되는 것이다.
한편 반야바라밀의 수지와 서사 그리고 공양이 사리탑에 대한 공양보다 뛰어남을 강조한다. 이것은 반야바라밀로부터 부처님이 탄생한다는 佛母사상에 입각한 것이므로 불모인 반야바라밀의 수지, 독송, 서사 그리고 공양과 찬탄을 중요시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반야바라밀의 전지자로서 성격
여기서는 선남자․선여인 자신들이 반야바라밀을 신앙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반야바라밀을 다른 사람에게 글로 써서 주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갖가지 인연으로 반야바라밀의 뜻을 연설하여 열어 보이고 분별하여 쉽게 해석해 주는 경우를 말한다. 이에는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반야바라밀을 듣고 받아 지니고 독송하며 정념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하는 경우. 둘째 반야바라밀을 글로 쓰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 써서 지니게 하고 독송하고 남에게 설하도록 하는 경우. 셋째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갖가지 인연으로 반야바라밀의 뜻을 연설하고 열어 보이며 분별하여 쉽게 해석해 주는 경우이다.
(1) 반야바라밀을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하는 경우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스스로 듣고 받아 지니는 데 머물지 않고 남을 위해 설하면 지옥․아귀․축생의 3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소위 소승이라 불리는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선남자․선여인이 이렇게 하면 보살의 불퇴전지에 머물고, 또 반야바라밀은 모든 고통과 번뇌 그리고 늙음과 질병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선남자․선여인이 이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고 독송하며 바르게 기억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주면 이 사람은 지옥, 축생 그리고 아귀에 떨어지지 않고, 성문이나 벽지불지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선남자․선여인은 바로 보살의 불퇴전지에 머물러 있고, 이 반야바라밀은 모든 고통, 번뇌, 늙음 그리고 질병으로 멀리 떠났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29)『大正藏』 8, 291쪽b13. “善男子 善女人 聞是般若波羅蜜 受持讀誦 正憶念 亦爲他人說 是人
不墮地獄道 畜生餓鬼道 亦不墮聲聞 辟支佛地 何以故 當知 是善男子 善女人 正住阿惟越致地中故
是般若波羅蜜 遠離一切苦惱衰病.”
(2) 반야바라밀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써서 독송하고 설하게 하는 경우
반야바라밀을 스스로 써서 지니고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 독송하고 설하면 염부제에 있는 사람을 교화하여 십선도를 실천하도록 하고, 사선(四禪), 사무량심(四無量心), 사무색정(四無色定) 그리고 다섯 가지 신통력을 확립하는 것보다 그 공덕이 크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는 무루법을 설하고, 이 무루법을 수행함으로써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또 반야바라밀 안에는 여러 선법을 설하고 이 선법을 배우면 다시 왕족을 비롯하여 아라한과 벽지불이 태어나고, 더 나아가 이로부터 모든 부처가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염부제의 한 사람을 가르쳐 수다원과, 사다한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그리고 벽지불도를 얻게 할지라도 선남자․선여인이 한 사람을 가르쳐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게 하여 얻는 복덕의 크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교시가여! 보살에 인연하여 수다원에서 아라한과 벽지불에 이르기까지 탄생하고, 보살에 인연하여 제불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교시가여! 이러한 인연으로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경을 글로 쓰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 써서 지니게 하고 독송하고 설하게 하면 많은 복덕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는 널리 여러 선법을 설하고 이 선법을 배우면 다시 명문의 왕족, 바라문 그리고 대부호인 거사, 또는 사천왕에서 비유상비무상천에 이르기까지 출생하기 때문이다. 다시 사념처에서 일체종지까지 있고, 수다원에서 아라한과 벽지불에 이르기까지 있으며, 여러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30)『大正藏』 8, 294쪽a9. “憍尸迦 若善男子 善女人 敎一閻浮提人 令得須陀洹果 斯陀含 阿那含
阿羅漢 辟支佛道 不如善男子 善女人 敎一人 令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得福多 何以故 憍尸迦
以菩薩因緣故 生須陀洹 乃至 阿羅漢 辟支佛 以菩薩因緣故 生諸佛 以是因緣故 憍尸迦 當知
善男子 善女人 書般若波羅蜜經卷 與他人 令書持讀誦說 得福多 何以故 是般若波羅蜜中
廣說諸善法 是善法中學 便出生刹利大姓 婆羅門大姓 居士大家 四天王天 乃至 非有想非無想天
便有四念處 乃至 一切種智 便有須陀洹 乃至 阿羅漢 辟支佛 便有諸佛.”
(3)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갖가지 인연으로 반야바라밀의 뜻을 연설하고 열어 보이며 분별하여 쉽게 해석해 주는 경우
선남자․선여인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을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하고 꽃과 향 나아가 깃발과 일산 등을 공양하고,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승기의 겁 동안 보시바라밀을 행하더라도 이는 갖가지 인연으로써 다른 사람을 위해 반야바라밀의 뜻을 널리 연설하고 열어 보이고 분별하여 쉽게 해석해 주는 것보다 못하다고 한다.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수의 많은 부처님을 공양하면서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바라는 대로 공경하고 존중하며 찬탄하고 꽃과 향 나아가 깃발과 일산을 공양하고, 다시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갖가지 인연으로써 다른 사람을 위해 널리 반야바라밀의 뜻을 연설하고 열어 보이며 분별하여 쉽게 해석해 준다면 이 선남자․선여인의 복덕은 더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미래․현재의 많은 부처님이 모두 이 반야바라밀을 배워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이미 얻었고, 지금 얻으며, 앞으로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31)『大正藏』 8, 295쪽a1. “若有善男子 善女人 供養十方無量阿僧祇諸佛 盡其壽命 隨其所須
恭敬尊重 讚歎花香 乃至 幡蓋供養 若復有善男子 善女人 種種因緣 爲他人 廣說般若波羅蜜義
開示分別 令易解 是善男子 善女人 功德甚多 何以故 諸過去 未來現在佛 皆於是般若波羅蜜中學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已得 今得 當得.”
그러나 이것도 선남자와 선여인에게 와서 이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고 반야바라밀에서 설한 것처럼 수행하면 일체지의 법을 얻을 것이고, 일체지의 법을 얻고서 머지 않아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을 것이라고 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에서 수다원을 비롯한 초발심보살과 불퇴전보살이 출생하고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보살의 불퇴전지와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고자 하는 보살을 위하여 반야바라밀과 그 의미를 해석하고 설명해 주면 가장 큰 공덕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반야바라밀을 스스로 수지 독송하고 정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위해 써서 주고 그것의 의미를 설하고 해석해 주며, 무상정등각을 얻고자 하는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행하도록 북돋아 줌으로써 얻는 공덕이 크다는 것은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선남자․선여인은 단순히 반야바라밀을 신앙하는 자로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그것을 공유하고자 하는 보살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많은 공덕을 쌓으면 초발의보살은 물론이고 불퇴전지의 보살위에 들어가며, 더 나아가 정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반야바라밀을 독송하고 설하는 법사로서 성격
이상의 세 경우는 대중들에게 반야바라밀의 설하는 법사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으나 직접 법사라는 술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으므로 법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를 따로 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따라서 먼저 『대품반야경』에서 법사라는 술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핌으로써 앞의 세 경우도 선남자․선여인이 법사로서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대품반야경』에서 맨 처음으로 선남자․선여인이 법사를 지칭한 것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교시가여, 이 선남자․선여인이 이 반야바라밀을 독송하고 남을 위해 설하고자 할 때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신들이 모두 와서 법을 듣는다. 그리고 이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의 법을 설하도록 여러 천신들이 그 힘을 북돋아 줄 것이다. 또 이 법사들이 혹시 몹시 피로하여 법을 설하지 않으려고 해도 여러 천신들이 북돋아 주므로 곧바로 다시 설하게 될 것이다.
32)『大正藏』 8, 288쪽c25. “佛告釋提桓因 憍尸迦 是善男子 善女人 欲讀誦 說是般若波羅蜜時
無量百千諸天 皆來聽法 是善男子 善女人 說般若波羅蜜法 諸天子 益其膽力 是諸法師 若疲極
不欲說法 諸天益其膽力故 便能更說.”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이『소품반야경』 권2 「명주품」
(「大正藏」 8, 544쪽b19)에도 있다.
여기서는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독송하고 남을 위해 설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때 선남자․선여인을 법사로 호칭하고 있다. 남을 위해 법을 설하는 자를 법사라고 하는 데는 이해가 되지만, 반야바라밀을 독송하는 자를 법사라고 하는 것은 좀더 논의를 해야 될 것 같다.
법사(Dharma-Bhāṇaka)의 사전적 의미는 ‘法의 告示者’, ‘說法者’, ‘說法人’, ‘說法師’이며, 그 가운데 ‘Bhāṇaka’의 사전적 의미는 ‘찬탄’이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에 따르면, 그것의 의미는 ‘독송자’이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독송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 주로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을 독송하는 자로서 불탑을 근거지로 생활하면서 모여드는 세속의 신자들에게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불탑신앙을 권장했던 자일 것이라고 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앞의 인용문에서 선남자․선여인, 곧 법사는 반야바라밀이라는 법을 독송하는 자라는 의미도 이해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다음의 인용문에서도 선남자․선여인은 법사로서 반야바라밀을 천신들에게 설해 주고 수많은 공덕을 얻게 된다고 한다.
육재일인 매월 8일, 23일, 14일, 29일, 15일, 30일에는 모든 천신들의 무리가 모여 선남자․선여인이 법사가 되어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곳으로 모두가 찾아옵니다. 이 선남자․선여인은 이 대중 안에서 반야바라밀을 설하니, 생각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복덕을 얻는다.
33)『大正藏』8, 310쪽c5. “六齋日 月 八日 二十三日 十四日 二十九日 十五日 三十日 諸天衆會
善男子 善女人 爲法師者 在所說般若波羅蜜處 皆悉來集 是善男子 善女人 在大衆中 說是般若波羅蜜
得無量無邊 阿僧祇 不可思議 不可稱量福德.” cf.『도행반야경』 권2(「大正藏」 8, 443쪽c16).
그런데 마치 갓 태어난 송아지가 그 어미를 떠나지 않듯이 보살마하살도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기 위해 법사를 멀리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이미 법사는 보살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마침내 『대품반야경』의 끝에 이르면 법사는 보살을 지칭하는 것으로 바뀐다. 다음 인용문은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나(살타파륜보살)는 마땅히 몸을 팔아 재물을 손에 넣어 반야바라밀과 법사이신 담무갈보살을 위해 공양해야겠다.
34)『大正藏』 8, 418쪽c28. “我當賣身 得財 爲般若波羅蜜故 供養法師 曇無竭菩薩.”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선남자․선여인은 반야바라밀을 스스로 독송하고 찬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독송하도록 하고 나아가 그것을 이해가 쉽도록 해설하여 주는 법사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또 법사는 선남자․선여인이면서 보살을 지칭하는 것으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 나오는 말
지금까지 『대품반야경』에 나타난 선남자․선여인의 성격에 대해 크게 셋으로 나누어 논의를 진행하였다. 첫째는 선남자와 선여인의 일반적인 의미와 초기와 부파 불교에서 선남자와 선여인의 쓰임새, 그리고 그들은 재가자에만 한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출가비구와 비구니도 포함되는 것인지, 둘째는 선남자․선여인은 대승불교의 주체적 실천자인 보살과 관계는 어떠한 관계인지, 셋째는 반야경에서 선남자․선여인은 대승 이전의 선남자․선여인처럼 단순히 신앙자로만 그치는지, 아니면 반야바라밀의 전지자와 법사로서의 역할도 하는 지를 논의하였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초기불교의 전적인 아함경에서는 선남자․선여인은 단순히 좋은 집안 출신의 남녀를 지칭하는 경우, 출가하여 비구나 비구니가 되기 전의 재가 남녀를 가리키는 경우, 출가하지 않고 재가자로서 부모나 처자식이나 출가 사문, 복전 등을 공양하여 다음 생애에 천계에 태어나고자 공덕을 쌓는 경우의 세 가지로 쓰였음을 보았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출가한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고, 선남자보다 선여인의 용례가 훨씬 적게 나타났으며, 또 부파불교에서도 선남자․선여인의 용례는 많지 않지만 초기불교와 마찬가지로 재가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둘째, 선남자나 선여인과 보살과의 관계는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첫째는 관자재보살과 같은 대보살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는 경우로서, 부처님이나 사리불이 대보살인 관자재보살을 부를 때 ‘관자재보살이여’라고 호격으로 사용되었다. 둘째는 범부보살이 선근을 성취하여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며 나아가 설한대로 수행한다면 구발의보살을 지나서 불퇴전지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고 머지 않아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해서 사용한 호칭이었다. 곧 선남자나 선여인은 보리심은 냈지만 아직 반야바라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지 못한 범부보살을 지칭하는 경우였다.
또한 반야경에서 이 두 가지의 용법이 각기 달리 사용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의 경우는 주로 반야바라밀을 설명하기 위한 對告衆으로서 사용되었으나 이 경우 선남자․선여인을 함께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선남자만이 사용되었다. 둘째는 과거세부터 오랫동안 6바라밀을 수행해 온 선남자․선여인을 말하는 것으로서, 보살과 선남자를 동격으로 보는 경우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살타파륜(상제) 보살이라고 하였다.
셋째, 단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고 독송하며 정념하고, 반야경을 써서 지니거나 공경하고 공양하는 신앙자로서의 성격과 반야경을 글로 쓰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 써서 지니게 하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갖가지 인연으로써 반야바라밀의 뜻을 연설하고 열어 보이며 분별하여 알기 쉽게 해석해 주는 전지자와 법사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이때 법사는 보살의 이명으로 쓰이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초기와 부파 불교에서 재가와 출가를 구분아혀 성불도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자는 출가한 자로 제한된 데 대해, 초기와 부파 불교에서 성불할 수 있는 조건이 출가한 자로 제한된 것에 대해, 『대품반야경』에서는 출가와 재가, 수행의 정도에 관계없이 성불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확대되고 개방된 호칭이 바로 이 선남자․선여인이었다. 곧 『대품반야경』에서 선남자․선여인은 이미 보살의 길에 들어선 자와 아직 보살의 길에는 들어서지는 않았으나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수지하고 독송하며 공양하고 찬탄함으로써 언젠가는 보살의 길에 들어설 가능성을 있는 자를 모두 아우르는, 출가와 재가의 구분 없이 모든 선남선녀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대품반야경』에서 선남자․선여인은 불교의 위대한 선언인 ‘모든 중생은 누구든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임을 구현하는 데 부합하는 성격으로 사용된 술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지면과 시간적 제약, 그리고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대품반야경』이라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 논의를 전개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넓은 시야에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다음의 과제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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