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반야심경

반야경(般若經)의 이해

수선님 2020. 8. 2. 12:22

반야경(般若經)의 이해

 

 

반야경 일반
대품반야경 봉발품
금강경(金剛經)
반야심경(般若心經)
공사상(空思想)

 

 

 


인터넷 불교교육원
불 교 학 과

2002 . 12. 30

 

 

 


머 리 말

 

공(空)이란 용어는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말로 특히 <반야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에서 강조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이 말은 자성(自性, svabhava), 실체(實體, dravya), 본성(本性, prakti), 자아(自我, atman) 등과 같이 인간이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없다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개념들은 오직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으로 실제로 이러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空)이란 용어의 원어는 sunya로서 본래 ‘부풀어 오른’, ‘속이 텅 빈’, ‘공허한’ 등을 의미하여 ‘부풀어 오른 모양으로 속이 비어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sunya라는 말이 불교에 도입되어 공(空)으로 한역되고, 특히 <반야경>을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으로 다루어진다. 이 공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취급하여 사상적인 관점에서 논의한 것을 공사상이라 하며 특히 대승불교에서 이러한 공사상을 강조한 사람들을 공론자(空論者)라 부르고, 그들의 주장을 공론(空論)이라 한다. 이러한 공론자는 용수 이후 중관파(中觀派)를 형성하여 공사상을 전개해 가며 그들은 스스로를 공성론자(空性論者)라 불렀다.

  <반야경>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공사상은 후에 용수에 이르러 철학적 체계를 가지고 대승불교 철학을 발생시키는 계기가 된다. 용수는 공의 개념이 불타가 깨달은 연기법의 이치와 일치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또한 부파불교 중의 하나인 설일체유부에서 주장한 법의 견해를 비판하여 공은 곧 무자성(無自性)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용수에 의해 명확하게 체계화되는 공사상에 대한 논리는 이미 불타의 근본교설을 전하는 초기불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왜냐하면 불타의 근본사상을 나타내는 것이 다름아닌 연기설이며, 이 연기설을 바탕으로 공을 이론적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의 이론적 전개와 관련하여 불타는 당시 중요한 논쟁의 주제였던 아트만(atman, 自我)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불타는 세간이 공한 것은 아트만이 없는 까닭이며, 그 아트만은 안, 이, 비, 설, 신, 의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 어디에도 없음을 설하고 있다. 이처럼 초기불전에서는 공의 의미가 무아(無我)설과 밀접히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대승경전 가운데 가장 먼저 성립된 것이 <반야경>으로 이 <반야경>은 후에 <대반야바라밀다경> 600권으로 집대성된다. 이러한 <반야경>에 공통되는 중심사상이 공관(空觀)으로 공관이란 일체 존재하는 사물들은 그 본성이 공하며, 또한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고 관하는 것을 말한다. 이 <반야경>의 공관은 대승불교 자체의 기본적인 교설이 되고 아울러 대승불교도의 실천적 기반을 이루게 된다.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관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면 대승불교 이전의 부파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부파불교 가운데 설일체유부의 교리는 <반야경>의 공사상이 출현하는 사상적 배경이 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설일체유부에서 일체법이 존재한다는 실유(實有)의 주장은 <반야경>의 공사상과 대승불교의 중관철학이 발생하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부파인 설일체유부는 모든 요소를 법(法)이라 부르고 그 법을 5위75법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일체 존재를 다양한 법의 이름을 분류하고 그리고 그 각각의 법에는 파괴되지 않는 법의 고유한 자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색법, 심법, 심소법, 심불상응법, 무위법의 5위로 구분되는 일체 존재와 그 각각에 속하는 75개의 법은 과거, 현재, 미래를 걸쳐 항상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설일체유부의 법체항유설(法體恒有說)로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야경>은 각각의 법에는 그와 같은 실체, 자성이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공이라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즉 모든 법은 공한 것이기 때문에 고정적인 법의 관념을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체법은 다른 법과 조건지워져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정적, 실체적 본성을 갖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무자성인 것으로, 이 무자성인 것은 곧 공인 것이다.

  그러나 일체가 공하다는 관찰은 반야바라밀을 실천하여 얻어지는 것으로 이것은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단계가 아니라 지혜의 완성에 도달한 경지에서 얻어진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반야지혜로서 공관은 용수와 그 이후의 사상가들에게 있어 이제설(二諦說)의 입장에서 명확히 그 구분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반야경>은 법의 공을 주장하고 있으며, 공관은 반야바라밀의 경지에서 얻어지는 지혜인 것이다.

 


※ 본 반야경의 이해는 한학기 동안 진행된 "반야경의 이해"란 교과목의 강의 순서에 따라 내용을 정리하고 내용을 보완하여 편집한 것입니다.
우선 반야경 일반은 "허공의 몸을 찾아서(석지명 著, 불교시대사 간)"의 반야경 소개 부분을 옮긴 것이고, 대품반야경 봉발품은 한문본과 한글대장경 해석본을 첨부한 것이고, 금강경은 천불동에서 정리한 금강경을 재 편집하여 산스크리트어의 번역본은 각묵스님(불광출판사)의 금강경 역해를 참조한 것이고, 반야심경은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자료와 제가 전에 정리해 둔 내용으로 편집한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의 공사상은 동국대학교에서 발행한 "불교사상의 이해"의 "공사상" 부분입니다.

본 "반야경의 이해"는 제가 한학기동안 공부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목적으로 정리된 것으로 원저자들에게 사용의 허락은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학습 및 연구 목적외의 상업적인 목적으로의 사용은 불가합니다. 또한 내용에 있어서 완전한 교정이 이루어 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논문이나 학술적인 목적의 인용은 원 출판물의 확인을 한 후에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   차


Ⅰ. 반야경 일반(허공의 몸을 찾아서, 석지명 인용) ............................................................ 3

1. 반야부 경전들과 그 중요성(반야부 일반 1)
2. 반야경의 종류가 많은 이유(반야부 일반 2)
3. 바라밀의 반야(대품반야경 1)
4. 반야의 공과 육바라밀(대품반야경 2)
5. 방법적 부정과 결과의 긍정(대품반야경 3)
6. 회향(대품반야경 4)
7. 허공의 공(대품반야경 5)
8. 공의 보시(대품반야경 6)
9. 한 바라밀 속의 육바라밀(대품반야경 7)
10. 무소득의 공(반야심경)
11. 형상을 떠난 부처님의 몸(금강경 1)
12. 머무는 바 없이 내는 마음(금강경 2)
13. 역설적 부정의 이유(금강경 3)


Ⅱ. 반야부 경전 강독 ......................................................................................................................  37

1. 대품반야경 봉발품
2. 금강경
3. 반야심경


Ⅲ. 공사상(空思想) .......................................................................................................................... 156

1. 공의 의미와 공사상의 배경
2. 공사상의 전개

 

 

 

 


Ⅰ. 반야경 일반

 


1. 반야부 경전들과 그 중요성(반야부 일반 1)

반야경을 이해하지 않고는 다른 대승경전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반야경을 보통 부처님의 어머니경(佛母經)이라고 부른다.

<밀린다판하>를 살펴보면서 그리스의 서양식 사고방법이 불교에 대해서 던지는 질문과 답변을 들어보았다. 이제 우리는 대승경전에 들어가려고 한다.

대승경전의 처음은 반야부 경전이다. 반야부는 공(空)사상으로 대승의 지혜를 깨우치려고 한다. 이 공사상을 통과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이 반야부를 통과하려면 상당한 신심과 노력이 필요하리라고 생각된다. <금강반야경>을 한문으로 읽을 때, 뜻을 모르면서도 공덕을 쌓기 위해서 읽은 것처럼 이 반야부 경전에 대해서 공부할 때에도, 업장을 녹이고 공덕을 쌓는 마음가짐으로 달려들어야 한다. 반야사상은 모든 대승사상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불교 교리발달에 있어서 <반야경>의 공사상이 차지하는 위치와 중요성, 그리고 <반야경>의 종류에 대해서 알아보자.

교리적으로 기본 골격을 볼 때, <아함경(阿含經)>은 반야부 경전으로 이어지고 반야부는 <법화경>으로 이어진다. 다른 한편으로 반야부의 공사상에서 여래장(如來藏)·불성사상(佛性思想)을 가르치는 경전과 유식사상(唯識思想)을 가르치는 경전으로 이어진다. 여래장사상을 가르치는 경전은 <여래장경> <승만경> <열반경> 등이 있다. 유식사상을 가르치는 경전으로는 기본적으로 <해심밀경>이 있다.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을 통합하는 경전으로 <능가경>이 있고 논장으로는 <대승기신론>이 있다. <화엄경>은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의 기본을 다 통합해서 나타내려고 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크게 본다면 <아함경>에서 <반야경>으로, <반야경>에서 <법화경>과 <화엄경>으로 갈라지는 셈이다.

<아함경>의 기본은 연기법(緣起法)이다. 물론 <아함경>에 공사상·법화사상·화엄사상·불성사상 등이 다 들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연기사상을 강조한다는 뜻이다. 이 연기법은 반야부 경전에서 공사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발전된다. 일체사물이 인연법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상호의존(相互依存)과 상호버팀의 상태에 있고, 상호의존의 상태에 있으므로 독자성이 없고 독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이다. 불교에 있어서는 이 공사상을 터득하는 것이 바로 지혜가 된다. 그러나 공사상은 다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긍정적으로 나타낼 필요를 느끼게 된다. 공사상을 뒤집어서 일체만물이 서로 차 있다는, 서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시도가 바로 법화사상이다. 다른 한편으로 <반야경> 공사상의 시각에서 사물을 보면 깨달음의 가능성에 대한 설명과 왜 현상세계의 미혹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반야경>의 공사상을 보충하고 깨달음의 가능성을 알리려는 의도로 여래장사상·불성사상의 경전이 있고 현상의 미혹세계가 어떻게 벌어지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유식사상의 경전이 있게 된다. <반야경>으로부터 법화사상과 여래장·유식사상이 이어지므로 <반야경>의 공사상은 모든 대승사상과 대승경전을 이루는 초석이 된다. 이 <반야경>을 이해하지 않고는 다른 대승경전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반야경을 보통 불모(佛母)의 경, 즉 부처님을 낳는 어머니와 같은 경이라고 부르고 있다.

<반야경>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종류, 많은 이름의 경들이 모여 반야경전의 무리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반야부 경전이라고 한다. 불교경전 중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경전이 바로 반야부 경전이다. 전체 중요한 대승경전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반야부 경전의 양이 많은 것은 중복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소품반야경>이 <대반야경>에도 포함되어 있고 또 <소품반야경>과 거의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이름을 가지고 행세하는 경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야부 경전들은 범어본·티벳어본 그리고 한문번역본이 있다. 범어본, 즉 산스크리트어본은 10종 이상이 되고 티벳어본은 12종 이상이 된다. 그리고 한문으로 번역된 것은 42종 이상이 된다. 이 반야부 경전은 편집된 순서로 짐작해서 크게 <소품반야경> 계열, <대품반야경> 계열, <십만송반야경> 계열, <금강반야경> 계열, <반야심경> 계열, <대반야경> 계열 등이 있다.

<소품반야바라밀다경>은 <도행반야경> <소품반야경> <팔천송반야경> <불모출생삼장반야경> <대반야경> 제4회·제5회 등의 각기 다른 이름으로 번역되어 지칭되고 있다. 이 <소품반야경>은 여러 사람이 여러 가지 이름으로 한문번역을 했다. 보통 <소품반야경>이라고 하면 구마라집이 10권으로 번역한 것이 가장 유명하다.

<대품반야바라밀다경>은 <방광반야경> <광찬반야경> <대품반야경> <이만오천송반야경> <대반야경> 제2회·제3회 등이 있다. 보통 <대품반야경>이라고 하면 구마라집이 번역한 <대품반야바라밀경> 27권본을 의미한다.

<십만송반야바라밀다경>은 <대반야경> 제1회에 해당된다. 범어 원문을 정확히 말하면 13만2천6백 개의 게송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 <십만송반야경> 은 현장법사가 번역한 <대반야경> 600권 중에서 1권에서부터 400권에 이르고 있어서 반야부 경전 중 가장 양이 많다. 반야부 경전에서 가장 양이 많다는 것은 모든 경전 중에서 간장 양이 많다는 뜻이 된다.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은 우리 한국불교인들에게 아주 친숙한 반야부 경전이다. 보통 <금강반야경> 또는 <금강경>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 <금강경>은 <대반야경>의 제9회 <능단금강분>에 해당된다. 구마라집·보리류지·진제삼장·달마급다·현장법사 등이 번역했지만 한국불교에서는 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주로 표본으로 애용하고 있다.

<반야심경>도 우리에게 친숙하다. 구마라집·현장·보리류지·실차난타·반야·시호 등에 의해서 번역되었다. 이름도 갖가지이다. 마하반야바라밀다대명주경·반야바라밀다심경·마하반야수심경·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불설요의반야바라밀다경·불설오십송반야바라밀경·불설제석반야바라밀다심경·불설관상불모반야바라밀다보살경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현장법사가 번역한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쓰고 있다. 현장법사가 번역한 <반야심경>의 이름은 반야바라밀다심경인데도 절에서 상단예불을 마치고 신중단에 <반야심경>을 외울 때는 여기에 '마하'라는 말을 붙여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고 외우고 있다. 현장법사가 번역한 이 경을 우리는 보통 <반야심경> 또는 <심경>이라고 부르고 있다.

<대반야바라밀다경>은 현장법사가 번역한 것으로 600권이나 된다. 이 600권의 <대반야경>은 4처 16회로 되어 있다. 이 경이 네 군데의 장소에서 16회에 걸쳐서 설해졌다는 뜻이다. 제1회는 <십만송반야경> 400권으로 되어 있다. 600권 중에 3분의 2가 1회에 속하는 셈이다. 제2회·제3회에는 구마라집이 번역한 <대품반야경>의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제4회·제5회에는 구마라집이 번역한 <소품반야경>의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1회에서 제5회까지의 분량이 전체 600권 중에서 565권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전체 <대품반야경>의 90% 이상을 이루고 있다.

제6회부터 제16회까지는 나머지 35권이 배당된 것이다. 제6회는 <승천왕반야경>, 제7회는 <문수반야경>, 제8회는 <유수반야경(濡首般若經)>, 제9회는 <금강반야경>, 제10회는 <이취반야경(理趣般若經)>이다. 제11회부터 제16회까지는 각 회에 육바라밀의 하나하나를 배당했다. 즉, 제11회는 <보시반야바라밀다경>이고 제12회는 <지계반야경>이 되는 식이다. <대반야경>이 제1회부터 제16회까지 있지만 제1회와 제11회에서 제16회까지만 현장법사가 새롭게 번역했고 제2회부터 제9회까지에 속하는 반야부 경전들은 이미 번역되어서 유행되는 것들을 다시 번역하고 정리해서 이 <대반야경>에 포함시켰을 뿐이다.
 


2. 반야경의 종류가 많은 이유(반야부 일반 2)

먼저 핵심적인 사상이 생기고 그것이 기본적 경의 모습을 갖추고, 다시 전해지고, 수정되면서 현재 형태의 반야부 경전들이 생겼으리라.

반야부 경전들은 잛은 것은 260자의 <반야심경>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긴 것은 600권의 <대반야경> 같은 것도 있다. <금강경> 같은 길이의 것도 있다. 또 같은 내용이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반야부에서 왜 이와 같이 다양한 경전들이 생겼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간다. 왜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은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간다.

어떤 지역에서 긴 세월 동안 대승의 사상을 가진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면서 나름대로 부처님의 본래적 취지를 그리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똑같은 말도 사람에 따라서, 시대 환경이나 개인의 주관에 따라서 나름대로 독특하게 듣고 기억할 수가 있다. 불경을 편집할 때, 부처님 말씀과 상관없이 불도 수행자들이 마음대로 편집했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입과 입으로 또는 마음과 마음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의 말씀을 전해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또 부처님의 말씀을 그 시대나 환경의 요청에 의해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수행자들이 부처님 말씀에 의해서 수행을 하다 보니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 경우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세계에는 한 부처님만 그 세계의 교주가 될 수 있다는 원칙이 있다.

사바세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이미 교주로 계신다. 그래서 설사 어떤 수행자가 깨들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독자적으로 부처님 행세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의 깨달음을 석가모니부처님의 이름으로 돌리게 된다. 실제로 우주의 진리는 같기 때문에 누가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 기본적 내용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새로운 깨달음도 석가모니부처님이 이미 깨달은 내용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그 기본적인 내용은 같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의 표현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대승의 사상을 가진 수행자들은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대승적인 견지에서 전해 듣고 지니고 실천하게 된다. 그들이 어
떤 시대의 일정한 기간 동안 축적된 반야를 중심으로 한 불법의 아이디어를 책으로 엮게 된다. 이 경우 먼저 핵심적인 사상이 생기고 그 핵심이 기본적 경의 모습을 갖추고 다시 그것이 전해지고 수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가진 반야부 경전의 한 종류가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대승경전이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에 의해서 편집되지 않았다고 해서 대승경전을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큰 업을 짓는 것이 된다. 부처님의 원력과 위신력은 중생의 소견으로 상상할 수 없다.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생각할 때 시간을 말하고 편집자를 말하지만, 우리의 두뇌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힘과 방법으로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중생들의 세계에 나타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께서 직접 쓰시거나 부처님이 구술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목전에서 기록하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만들어진 대승경전과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용과 형태의 대승경전과는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반야부 경전들이 기본적인 내용에 큰 차이가 없이 여러 형태로 편집된 이유를 짐작해 보느라고 중생의 입장에서 경전편집의 절차를 추리해 볼뿐이다. 어떤 시대, 어떤 환경에서든 대승불교도들이 자신들에게 축적된 부처님 말씀을 편집했을 때 그것이 반야부 경전의 한 형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편집된 반야부의 한 경전에 다른 종류의 아이디어나 보다 높고 색다른 수준의 깨달음이나 표현들이 추가되면서 그 경전의 양이 늘어날 수가 있다. 이 경전은 앞의 기본 경전에 비해서 그 내용의 질적인 면이나 양적인 면에서 발전된 형태의 경전이 되는 것이다.

경전은 어떤 한 사람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신앙공동체의 산물이기 때문에 번잡하고 똑같은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올 수가 있다. 또 전체적으로 완전한 체제가 갖추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세월이 가면서 경의 체제가 정비되고 간략화 되며 축소된 경전이 되는 것이다.

또 기존의 경을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체제를 바꾸는 일도 생각할 수 있다. 이때는 주로 어떤 용어를 집중적으로 사용한다거나 아니면 다른 용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가 있다. 또 목표하는 바를 유도하기 위해서 경의 구성을 바꿀 수도 있다.

그래서 현재 다양한 형태의 반야부 경전들이 생기기까지는 반야부의 한 경전이 편집되거나, 그 경전에 새로운 사상이나 표현이 추가·삭제되어 확장되거나 축약되거나,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기존의 경의 형태나 표현을 고치는 등의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소품반야경> <대품반야경> <십만송반야경> <금강경> <반야심경> 등이 있다는 것을 정리했다. 이 중에서 <소품반야경> <대품반야경> 그리고 <십만송반야경>중에 어떤 것이 보다 먼저 생긴 원형이냐가 문제가 된다. 학자에 따라서 <십만송반야경>으로부터 <대품반야경>, 다시 <소품반야경>으로 축소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소품반야경>에서 <대품반야경>을 거쳐 <십만송반야경>으로 확장되었으리라고 보는 주장이 더 강한 설득력을 갖는 것 같다.

한편 반야부 경전 연구학자들은 <금강경>을 큰 것으로부터 작은 것으로 축소된 모형으로 잡고 있다. 범어본 <금강경>에는 '대승(大乘)'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고 범어본·한역본을 막론하고 공이라는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금강경>의 내용은 간소하면서도 반야부의 모든 경전들에 공통적인 부정적·역설적 수사법은 극치에 달해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서 <반야경>에 정통하고 원숙한 편집인이 <십만송반야경>으로부터 <대품반야경>을 거쳐 <소품반야경>으로 축소된 것을 새롭게 구성해 <금강경>을 탄생시켰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반야부 경전 축소의 극단적인 형태는 <반야심경>에서 보여진다. <반야심경>은 대본과 소본이 있다. 대본은 다른 긴 경전들과 마찬가지로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소본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는 서두를 빼고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반야심경>의 내용을 보면 불교교리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을 존재로 인정하는 불교에서 일체법이라고 정한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과 감각기관과 그 대상인 십이처와 그리고 십이처에 따른 인식이 나타나 있다. 온(蘊)·처(處)·계(界) 삼과가 있다는 말이다. 인연법의 구체적 표현인 십이인연의 순관과 역관이 있는가 하면 불교의 기본입장인 사성제도 있다. 언어가 경제적으로 절약되면서도 '무소득공'이라는 반야사상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또 이 <반야심경>이 일곱 번이나 한문으로 번역되었다는 것도 이 경이 의도적으로 축소된 반야부의 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현장법사가 번역한 600권의 <대반야바라밀다경>이 가장 뒤늦게 편집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미 각기 유포된 경전들이 한 울타리로 모아지고 그 위에 육바라밀이 질서정연하게 추가된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대반야경> 16회 중에서 <십만송반야경>이 1회에, <대품반야경>이 2·3회에, <소품반야경>이 4·5회에 나타나고 거기에 반야부의 대부분 경전들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3. 바라밀의 반야(대품반야경 1)

반야는 단순한 지혜가 아니라 순간 순간의 실천속에서 항상 새롭게 터득되는 지혜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즉 지혜의 완성을 의미한다.

반야부 경전의 내용 중 반야사상의 핵심이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에 압축되어 있다면 우리는 복잡하게 현장법사의 <대반야경>이나 구마라집의 <대품반야경>을 뒤적거릴 것이 아니라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통해서 반야사상을 엿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대품반야경>의 내용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에 대해서는 접촉할 기회가 많지만 보다 큰 반야 경전에 접근할 기회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품반야경>과 <십만송반야경>의 중간인 구마라집의 <대품반야경>을 여기저기 뒤적이다가 <금강경>으로 넘어가려고 생각하고 있다. 구마라집의 <대품반야경>은 한글로 번역되어서 <마하반야바라밀경>이라는 원래 이름을 달고 서점에 나와 있다. 당장의 흥미나 지식을 얻기 위해서 그 <대품반야경>의 번역본을 읽는다면 읽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실망하게 될 이고 신심으로 반야경전을 모시는 자세로 구해서 읽는다면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금강경> <반야심경>의 원형 같은 것이 전체의 문맥 가운데에 그대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주석한 책들은 시중에 너무 많이 나와 있다. 한글로 번역한 사람들의 주석뿐만 아니라 조사스님들의 주석까지도 같이 번역하고 해석한 책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이 반야경전의 교리적 핵심을 파악하는 데 있으므로 여기서 <금강경오가해설의> 같은 것을 가지고 깊이 파 들어갈 수는 없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의 원문 가운데에 반야사상의 핵심을 나타내는 부분만 알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한문본이 아닌 범어본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보기로 한다.

에드워드 콘즈라는 학자는 범본 즉 산스크리트어본 <반야경>을 연구하는 데 일생을 다 바쳤다. 그 에드워드 콘즈가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그런데 그 영어번역본이 한글로 번역되어서 현재 시중 서점에 나와 있다. 제목은 '불교, 지혜의 원천, 금강경, 반야심경 뜻과 풀이'로 되어 있다. 요즈음 서양식 사고에 익숙한 분들은 이 책을 보시면 반야사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신식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이 책의 설명을 어렵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시중에서 얻기 쉬운 <금강경>과 <반야심경> 한글번역본을 한 가지 구해서 읽으면 되겠다.

먼저 <마하반야바라밀경>의 제목 뜻을 알아보고 부처님께서 왜 반야바라밀을 닦아야 하며 어떻게 닦으라고 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마하반야바라밀경>에는 세 가지의 산스크리트어가 합해져 있다. 마하와 반야와 바라밀이 그것이다. 마하는 범어의 음을 따서 그대로 한문으로 옮긴 것으로 '크다' '위대하다'의 뜻이다.
마하에 야나가 붙어서 마하야나 라고 하면 '대승' 즉 '큰 수레'의 뜻이 된다. 반야도 범어 프라즈냐를 번역하지 않고 한문음으로 적은 것이다.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지혜의 뜻이 되겠다. 보통 '깨달음의 지혜'로 번역되고 있으나 지혜라고 번역하면 단편적 지식과 혼동될 것을 두려워해서 번역하지 않고 반야라는 말을 그대로 쓰고 있다. 이 반야의 지혜는 부분적인 정보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조망해서 보는 총체적 깨달음의 지혜이기 때문에 그 뜻을 다 옮기려고 하면 말이 너무 길어질 것이다. 그 다음 바라밀은 범어 파라미타를 번역하지 않고 음으로만 옮긴 것이다. 뜻은 '완성하다' '궁극의 경지 또는 열반의 피안에 도달하다'이다. 반야와 바라밀을 합하면 반야의 지혜를 실천한다는 뜻이 된다. 반야는 단순한 지혜가 아니라 순간 순간의 실천 속에서 항상 새롭게 터득되는 지혜이기 때문에 반야는 그 말만으로도 반야바라밀 즉 지혜의 완성 또는 지혜를 닦아서 피안의 세계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현장법사 이전에는 <반야경>에 이름을 붙일 때 바라밀다를 바라밀로 줄여서 불렀지만 현장법사부터는 바라밀다의 '다'음을 넣기 시작했다. 그래서 구마라집의 <대품반야경>은 <마하반야바라밀경>이고 현장법사의 <대반야경>은 <대반야바라밀다경>이다. 반야바라밀다는 지혜의 완성이라는 뜻이지만 이 지혜는 육바라밀 전체를 포함한 육바라밀을 동시에 실천함으로써 얻어지고 행해지는 포괄적인 지혜를 의미한다. 지혜를 실천한다는 말은 바로 보시·인욕·선정 등을 실천한다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육바라밀 중의 하나를 들면 다른 다섯 가지가 동시에 포함되어 나오는 식이다.

<대품반야경>의 서두에서 부처님의 첫마디를 '보살마하살이 존재의 실상을 여실히 보는 지혜를 얻어 일체 사물의 진면목을 알려고 하면 반야바라밀을 닦아야 한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육바라밀을 실천하려면, 부처님의 복전에 씨앗을 뿌리려면,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칭찬 받으려면, 부처님의 눈이나 법의 눈 등을 얻고자 하면, 무슨 일이든지 좋은 결과를 얻고자 하면, 반드시 반야바라밀을 닦아야 한다고 설한다. 그리고 하루만이라도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소승법을 완성한 것보다도 훨씬 더 뛰어나다고 한다. 여기에 우리는 의문이 따른다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 좋은 줄은 알겠는데 어떻게 닦아야 하느냐가 문제이다. 우리의 마음을 대신해서 사리불이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닦아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부처님은 "일체의 육체적·정신적인 것을 공이라고 관(觀)하면 그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이미 인연법을 공부했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일체의 사물은 상호의지·상호포함의 관계에 있게 되어 독자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을 살펴본 바 있다. 모든 사물이 상대 의지관계에 있으므로 독자적이고 실체적이며 영구적인 성품과 독자성이 없으므로 실체성이 비었다. 즉, 공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야경>에서의 부처님은 그렇게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일체의 사물이 공하다고 말씀하실 뿐이다. 여기서 부처님은 왜 공한가를 설명하지 않은 채로 모든 존재의 요소·감각기관·감각기관의 대상·인식 등이 공하다고 말씀하신다.

일체의 사물을 공이라고 이해하고 공이라고 관하고 공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라는 점은 알 것 같다. 인연법의 필연적인 결론은 모든 사물이 공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한걸음 뿐만 아니라 부정의 부정, 무한부정으로 나아간다. 사물의 공함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까지도 공하다고 한다.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도 공하고, 십이인연의 순관(順觀)이나 역관(逆觀)도 공하다고 한다. 반야바라밀을 닦는 자체도 공하다고 한다. 반야바라밀을 닦아서 어떤 소득을 얻겠다고 하는 것도 공하다고 한다. 일체가 다 공하다고 깨닫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방법이라고 한다. 이 공에 대해서 무아를 살펴본 적도 있고, 앞으로 공이 계속 나올 것이기 때문에 공에 대해서는 별도로 더욱 깊이 들어가기로 하고 지금은 <대품반야경>에 어떤 내용이 있는가를 알
아보자.
 

4. 반야의 공과 육바라밀(대품반야경 2)

멋있는 사람은 육바라밀의 연기에서 탄생할 수있다. 바라밀의 연기를 잘 하려면 공사상에
입각한 반야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

공사상과 반야바라밀 그리고 육바라밀의 실천에 대하여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 공사상을 터득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공사상과 반야바라밀, 공사상과 육바라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간다.

먼저 포괄적인 반야바라밀로서의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데 공사상의 활용을 보도록 하자.

부처님이 말씀하신다.

사리불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보시바라밀을 행하면서 지혜를 맑히니, 완전한 비움에서 아끼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계율을 지키는 바라밀을 행하면서 지혜를 맑히니, 완전한 비움에서 죄와 죄 아님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인욕바라밀을 행하면서 지혜를 맑히니, 완전한 비움에서 성내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정진바라밀을 행하면서 지혜를 맑히니, 완전한 비움에서 심신의 정진에 게으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선정바라밀을 행하면서 지혜를 맑히니, 완전한 비움에서 산란하지도 고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지혜를 맑히니, 완전한 비움에서 어리석은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보살은 보시와 간탐, 지계와 파계, 인욕과 성냄, 정진과 게으름, 고요와 산란, 지혜와 어리석음을 구별하지 않고, 비방과 해침과 업신여김과 공경함을 분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래 불생불멸의 공한 법 가운데, 비방하는 이와 비방 받는 이, 공경하는 이와 공경 받는 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야바라밀이 육바라밀과 완전히 결합되고, 공사상에 의해서 보다 철저하게 실천되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있어서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데 완전히 마음을 비우고, 일체의 집착을 여의니까 육바라밀이 진정으로 실천될 수 있고, 그런 가운데 사물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의 수행과 공사상·육바라밀이 뒤엉켜 있지만 반야바라밀은 바로 공사상의 실천이므로 공사상에 의해서 육바라밀을 닦는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공사상은 진정한 반야에 이르는 방법이기도 하고 반야의 지혜로 보니 일체의 사물이 완전히 공하다는 결론이기도 하
다.

어떤 독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를 얻는 일과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일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다고 그토록 신경을 써야 하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반야경>은 그런 회의는 전혀 예상하지 않고 있다. 어떤 일이든지 좋은 일이 생기려면 반야바라밀을 닦아서 사물을 여실히 보는 지혜를 얻어야 하고 지혜를 얻는 방법은 공사상에 의해 일체의 자기중심적 집착을 지움으로써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혜도 얻을 필요가 있느냐?' '육바라밀을 왜 실천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것은 '좋은 일이 왜 필요가 있느냐?'는 원초적인 물음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이 세상의 무대에 올라와 있는 배우들이다. 책을 읽고 계신 분들이 20세 이상이라고 치고 약 80년 후가 되면 우리 모두는 이 무대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무대 아래로 내려오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가 무대에서 연극을 잘하고 박수를 많이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업에 의해 밀려나왔지만 불법을 닦으면서 타성적·반복적인 업을 뛰어넘어 원력에 의해서 이 세상에 살기로 정한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는 누구나 멋있는 삶을 살아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 멋있는 사람은 육바라밀의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탄생할 수 있다. 또 육바라밀의 연기를 진정으로 잘하려면 공사상에 입각한 반야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무대에서 연기할 대본을 진실하고 좋고 아름답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목숨이 귀한 것인 줄을 알면서도 육바라밀의 연기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흔연히 버릴 수 있는 구도를 잡을 수도 있다. 그 지혜의 대본에서만 내가 남을 위해 죽는 배역을 담당하기도 하고 남이 나를 위해 죽어주는 연기가 나올 수 있다. 내가 다른 이에게 매달리기도 하고 남이 나에게 매달리기도 하는 연기가 나올 수 있다. 이쪽 마음을 전혀 알아주지 않는 이에게 500생을 바쳐서 일방적으로 마음을 쏟는, 보통 인간의 마음 특히 요즘 젊은이들의 문화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그런 대본과 연기가 나올 수 있다. 그런 대본과 연기 속에서 인생의 진진(津津)한 맛이 우러나온다. 그러면 반야지혜의 빈 마음과 육바라밀의 연기 속에서는 걸림도 없고 얻음도 없다. 부족할 것이 없으므로 남는 것도 없고, 이익 될 것이 별도로 없으므로 손해 될 것도 없다.

이러한 경지에서 <반야심경>의 소득 없음과 공포 없음이 이해된다. <반야심경>은 오온·십이처·십팔계·십이인연·사성제를 다 부정한다. 진정한 공사상의 반야에 이르면 가르치는 도구들이 이제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강을 건넌 다음에는 뗏목이 필요 없다. 공사상의 지혜를 얻는 다음에는 그것을 전해 주는 방편도구인 교리조차도 놓아야 한다. 그 교리는 그 자체를 마침내 놓아 버릴 것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 놓으니 걸림도, 무서움도, 얻음도 없다. <반야심경>은 그 경지가 바로 구경(究竟)의 열반이라고 한다.

춘원 이광수 선생은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대상에 지극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애인을 가정해서 '님이 가르쳐 준 육바라밀'이라는 시를 만들었다. 반야의 공사상과 이 공사상에 입각한 육바라밀의 실천정신에서 볼 때 춘원선생의 육바라밀 시는 턱없이 못 미친다. 그러나 남녀간의 애정을 출발점으로 삼고 또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쉽게 목격하고 그릴 수 있는 자기 버림, 자기 비움, 자기 바침의 모형으로 삼을 수 있다는 뜻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미 절집에선 흔히 전해져 있다. 그러나 자기를 완전히 지워 버린 정열, 즉 공의 지혜에 얼마나 접근했는가에 주의를 기울이며 들어보면 새로운 맛이 날 수도 있다.

님에게 아까운 것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를 배웠노라.
님에게 보이고자 애써 단장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지계를 배웠노라.
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때림이나 꾸지람이나 기쁘게 받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인욕을 배웠노라.
자나깨나 쉴 새 없이 님을 그리워하고 님 곁으로 오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정진을 배웠노라.
천하의 많은 사람 중에 오직 님만을 사모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선정을 배웠노라.
내가 님의 품에 안길 때, 기쁨도 슬픔도 님과 내가 있음도 잊을 때,
거기서 나는 지혜를 배웠노라.
이제 알았노라.
님은 이 몸에 깨끗한 마음을 가르치려고 화현한 부처님이시라고.

여기서 육바라밀의 실천대상이 자신의 님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공사상으로 반야바라밀을 닦기 위해서 행하는 육바라밀과 무한 부정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러나 이 님을 모든 인류와 환경으로 확산해도 똑같은 자기 비움의 정열이 있다면 우리 중생이 그릴 수 있는 육바라밀 실천의 한 모형이 될 수가 있다.
 


5. 방법적 부정과 결과의 긍정(대품반야경 3)

수행자세의 입장에서는 무소득(無所得) 공이고 수행이 만드는 결과 면에서 볼 때는 유소득(有所得)의 복덕이나 공덕이 된다.

<반야경>에 나타나는 부정과 긍정에 대해서 살펴보자. 부처님은 무한부정을 통해서 반야바라밀 자체까지도 공함을 강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야바라밀을 닦음으로써 원하는 이상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공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거나 좋은 곳에 태어난다는 긍정적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뒤의 복선(伏線)을 찾거나 양자택일을 해야 할 처지에 이른다.

먼저 무한부정을 통해서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무소득에 대한 강조를 보자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사리불아, 모든 것은 공한 상태에 있어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더러울 것도 깨끗할 것도, 늘 것도, 줄 것도 없다.
오온·십이처·십팔계도 없고 무명이나 무명의 소멸도 없다. 사성제도 없고 지혜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부처님도 없고 부처님을 얻는 길도 없다. 과거의 것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없다.

이 정도의 부정만 가지고도 <반야경>에 있어서 무한부정의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내용은 <반야심경>에서 부정하는 내용과 흡사하다. <반야심경>에서의 부정은 보다 간결하게 되어 있지만 여기 <대품반야경>에서는 좀더 범위가 넓혀져 있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긍정의 목표를 말하는 부분을 보자.

선남자 선여인은 육바라밀을 행할 때에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만약 보시를 하지 않으면 반드시 빈궁한 집안에 태어나게 되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키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만약 계를 지키지 못하면 삼악도에 떨어지고 사람의 몸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선남자 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고 가까이하며 독송하고 타인을 위하여 설하면 금생과 후생에 공덕을 얻는다. 또 타인을 위해 반야바라밀의 뜻을 쉽게 풀이해주고 반야바라밀 닦기를 권하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의 복덕(福德)은 무량하다.

여기서, '보시를 하지 않으면 빈궁한 집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하는 말은 '보시를 하면 부자 집안에 태어난다.'라는 말을 뒤집어서 표현한 것이다. '보시를 해서 부자 집안에 태어나라.'는 권유이기도 하다. 물론 <반야경>에서의 궁극적인 이상은 빈궁을 피하거나 부자 집안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체종지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이 말씀은 불도나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공덕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또 '계를 지키지 못하면 삼악도에 떨어진다.'는 말은 '계를 지켜야만 천상이나 인간세계에 태어난다.'는 말을 뒤집어서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반야경>을 독송하고 전해 주고 풀이해 주면 복덕이 무량하다고 한다. 반야바라밀을 닦아서 소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소득이 있다는 말이다. 불교의 이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속적인 소망을 이루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반야경>에서의 부처님은 한편으로는 무한의 부정을 통해서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은 필경에 아무 것도 얻을 바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빈궁한 집안에 태어나지 않고 삼악도를 면한다.'고 가르치신다. 반야바라밀을 닦아야만 일체종지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궁극적인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얻을 바가 있다는 긍정과 아무것도 얻을 바가 없다는 부정이 동시에 설해질 때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소화해야 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각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무소득과 유소득, 또는 얻을 바가 없음과 얻을 바가 있음이 상충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꾸몄지만 이 두가지는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을 닦는 자세면에서 볼 때에 이것을 닦아서 어떤 이익을 얻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무소득으로 표현한 것이고, 반야바라밀을 닦은 결과면에서 볼 때에 반야바라밀을 닦은 결과는 당연히 세속적인 복덕 뿐만 아니라 출세간적인 지혜로 나타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소득이 없음에 관한 것은 반야바라밀 수행과정의 이야기이고, 소득이 있음에 관한 것은 반야바라밀 수행결과의 이야기이다.

<반야심경>에서도 모든 것을 부정한 후에 '철저한 무소득에 의해서, 보살이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공포가 없어서 구경열반(究竟涅槃)에 이른다.'고 하는 부분은 반야바라밀을 닦는 자세를 깨우치는 말이고 <반야심경>의 시작과 끝에 '모든 고통을 다 제거한다.'고 하는 부분은 반야바라밀을 닦은 결과를 알려 주는 말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좋아해서 하는 일과 꼭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군대생활에서 사병들 마음의 흐름을 보면 사람들이 좋아서 하는 일과 꼭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한편은 의무적으로 등산하면서 놀아야 하고 다른 한편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서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양자택일의 조건을 만들어 놓고 사병들에게 선택을 하라고 하면 많은 사병들이 일하는 쪽을 선택한다.
물론 애국충성의 문제는 별도이다. 좋은 것과 의무적인 것을 구별하면 그렇다는 뜻이다. 의무적으로 노는 것은 일종의 노동이 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일종의 휴식이 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그대로 행복이 된다. 피로도 모른다. 능률도 오른다. 정당한 일을 좋아해서 할 경우 일하는 자체가 즐겁기 때문에 그 일의 결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일만 열심히 하면 일의 성과를 계산하거나 말거나 일한 만큼 성과는 자연히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 확실한 길이라면 그것을 닦아서 얻는 결과를 계산할 필요가 없다. 수행에 공덕이 있다면 수행자가 수행의 결과를 계산하거나 말하거나 수행의 결과는 있을 것이다.
더욱이 반야바라밀은 공사상을 실천하는 것이다. 공을 실천하려면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지워야 한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 사물을 실체로 착각하는 습관의 업을 고쳐야 한다. '있다' '없다'의 양자택일로만 선택하던 방식을 버리고, 있음과 없음의 구별이 지워진 차원에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는 최초의 걸림돌이 지금까지 생각하던 있다의 관념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소멸이 있다고 생각하며 허공이 있다고 생각한다. '없다'는 사실마저도 실제로 있다고 생각해서 문제가 생긴다. 공의 눈으로 보면 있고 없음이 없다.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은 사물을 여실히 보는 지혜를 닦는 것이다. 있다는 관념의 벽을 뚫지 않고는 사물을 여실히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닦는 방법으로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 즉 완성된 지혜로 세상을 보면 일체의 것이 다 공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사물의 공함을 보는 특수한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게 하는 것이다. 결과의 얻음을 생각
하면 공이라는 특수안경을 벗는 셈이 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얻을 바 없음이 강조된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은 결과를 얻겠다는 마음으로 닦아서는 안 되고 아무런 결과에 대한 기대 없이 닦아야 한다. 반야바라밀을 닦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 아니라 그 수행 자체가 좋기 때문에 닦는 것이다. 결과는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수행 자체가 목적이 된다. 내가 수행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 세상의 진리는 우리가 닦은 수행에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게 한다.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누릴 복덕이나 공덕이 된다. 과정의 부정과 결과의 긍정 사이에는 아무런 어긋남이 없다.

<대품반야경>의 부정과 긍정에 대해서 부처님은 한편으로는 무한의 부정을 통해서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은 필경에 아무것도 얻을 바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빈궁한 집안에 태어나지 않고 삼악도(三惡道)를 면한다.'고 가르치신다. 언뜻 생각하면 두 가지가 상충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반야바라밀을 닦는 자세면에서 볼 때에는 이것을 닦아서 어떤 이익을 얻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무소득으로 표현한 것이고 반야바라밀을 닦은 결과면에서 볼 때에 반야바라밀을 닦은 결과는 당연히 세속적인 복덕뿐만 아니라 출세간적인 지혜로 나타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소득이 없음에 관한 것은 반야바라밀 수행과정의 이야기이고 소득이 있음에 관한 것은 반야바라밀 수행결과의 이야기이다. 수행자세의 입장에서는 무소득의 공이고 수행이 만드는 결과를 볼 때는 유소득의 복덕이나 공덕이 된다.
 


6. 회향(대품반야경 4)

선행은 악업을 소멸하는 데 쓰여지지만 악업이 선행으로 돌려질 수는 없다. 또 자신의 악업이 다른 이의 선업을 탕감할 수도 없다.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에는 회향이라는 말이 나온다. 회향이란 회전취향(廻轉趣向)의 뜻이다. 즉 자신이 닦은 선근이나 수행의 공덕이 다른 중생이나 자신의 깨달음으로 돌려지는 것을 말한다.

이 회향은 보통 세가지의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의 선근공덕을 다른 이의 이익에 돌리는 것이다. 살아 있거나 죽은 이를 위해서 자신이 공덕을 짓고 그 공덕을 그들에게 돌리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자신의 선근공덕을 부처님이 되는 지혜를 얻는데 돌리는 것이다. 셋째는 자신의 선근공덕을 해탈열반을 얻게 하는 방편에 돌리는 것이다. 해탈열반을 얻게 하는 대상은 자신과 중생이 다 포함된다. 그런데 공덕을 돌리는 것은 세 가지이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세 가지가 다 부처님의 지혜를 얻는 데 돌리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내가 공덕을 짓고 그 공덕을 그에게 돌린다 하더라도 그 공덕이
회향된 결과는 그 공덕을 받은 이의 깨달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 <대품반야경>에서의 회향의 뜻은 반야바라밀을 닦은 공덕이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 데 이바지하는 것을 뜻한다.

갑이라는 사람이 선근공덕을 지었고 을이라는 사람은 악행을 지었다고 가정해 보자. 또 갑이라는 사람 자신도 한때는 좋은 일을 하기도 했지만 다른 때는 나쁜 일을 행하기도 했다고 하자.
여기에 회향의 의미를 적용한다면 을이 지은 악행의 과보를 갑이 지은 선근공덕으로 탕감해 준다는 뜻이고 또 갑 자신이 지은 악행의 과보를 자신이 지은 선행의 공덕으로 탕감하거나 면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불교에서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을 가르친다. 어떤 선행을 지었으면 그 결과로 좋은 과보를 받는다. 악행을 지었으면 나쁜 과보를 받는다. 자업자득 원칙에 의해서 지은 과보를 면할 수가 없다. 자기가 지은 업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자기가 받아야 한다. 그런데 갑이라는 사람이 지은 선행공덕이 어떻게 을이라는 사람이 지은 악행의 과보를 면하게 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회향의 뜻은 자업자득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 나온다.

먼저 <대품반야경>에 나오는 회향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 보자. 아난이 부처님께 여쭌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보시가 세상을 여실히 보는 지혜에 회향되어 보시바라밀이 되고 또 반야바라밀이 되옵니까?

"상대를 여읜 법으로써 보시하고 지혜에 회향하면 이것을 보시바라밀이라고 하고 무소득으로 지혜에 회향하면 이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느니라."

여기서 부처님은 상대를 여읜 보시를 말씀하는데 이것은 무소득과 같은 내용이다. 상대란 보시를 베푸는 사람, 받는 사람, 베푸는 물건, 얻어지는 공덕 등이 상대적으로 있는 것을 말한다.
나와 네가 있기 때문에 상대요, 선행공덕과 그에 따른 소득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소득이 된다. 상대와 소득을 여의고 보시하면 절대적 무소득의 보시가 된다. 절대 무소득의 정신으로 보시하거나 계를 지키거나 인욕 등을 행하면서 육바라밀의 행을 짓되, 육바라밀의 행이 이루는 공덕을 지혜를 얻는 과보에 돌리면 그것이 진정한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육바라밀의 선행공덕을 반야바라밀 즉 최고 지혜의 완성으로 돌리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이다. <반야경>의 많은 곳에서 살반야라는 지혜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무상(無相), 정등(正等), 정각(正覺)으로의 회향이 강조되고 있다.

선근공덕을 보리지혜로 회향한다고 할 때 선행이 자신이나 타인의 업장의 과보를 소멸하고 깨달음을 얻는 방향으로 돌려진다면 악행도 선행으로 돌려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선행은 악업을 소멸하는 데 쓰여지지만 악업이 선행으로 돌려질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자신의 악업이 자신의 선행을 탕감할 수는 있지만 다른 이의 선업을 탕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반야경>에는 선근공덕이 지혜로 회향된다는 말만 있지 악행이 회향된다는 말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순전히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나의 공덕이 다른 이의 악업과보를 감해 줄 수 있으니까, 다른 이와 입장을 바꾸어서 말할 때 내가 다른 이의 공덕을 나의 악업과보를 탕감하는 데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선행을 쌓은 주체만 능동적으로 회향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악행을 한 사람은 그 특권이 없다.
악업자는 선행자의 처분을 수동적으로 받을 뿐이다. 불교에서 선행의 회향만 있고 악행의 회향이 없는 것을 깨달음을 구하고 깨달음을 전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반야경>에는 회향이라는 말만 나와 있을 뿐, 어떻게 회향의 원리가 자업자득의 기본원칙에 우선해서 발휘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회향의 원리를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지혜와 무명미혹 그리고 선과 악이 각기 상대적이지만 지혜와 선행에는 무명과 악행에 우선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지혜와 선행을 빛이라고 하면 무명과 악행을 어둠이라고 할 경우 빛과 어둠이 상대적이어서 빛이 어둠을 무너뜨릴 수는 있지만 어둠이 빛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가령 천년 동안 어둠 속에 있던 동굴에 빛이 비칠 경우, 어둠의 축적기간이 천년이었기 때문에 천년 동안 빛을 비춰어야 어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는 순간에 어둠은 없어진다. 동굴 안이 어둡고 밝은 것은 빛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지, 어둠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혜와 선행공덕은 자업자득이라는 원칙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명과 악업을 소멸하는 쪽으로 회향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반야경>이 말하는 공사상에 의거한 회향이다. 어떤 이가 꿈을 꾸고 있을 때, 무서운 호랑이가 나타나서 잠자는 사람을 깨울 수가 있다. 그런데 그 잠자던 사람이 호랑이를 만나기 전에 갖가지 악업을 많이 지었다고 해도 잠을 깨고 나면 꿈속의 악업은 간 곳이 없다. 물론 꿈속의 호랑이도 가짜이다. 지혜를 꿈을 깬 상태라고 하고 무명미혹을 꿈을 꾸는 상태라고 가정할 수 있다. 꿈을 꾸는 가운데 선행과 악행은 다 같이 실체가 없다. 꿈속에서의 호랑이도 실체가 없는 가짜이다. 그러나 꿈속의 호랑이가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잠자는 사람을 꿈으로부터 깨어나게 할 수 있다. 선행공덕이 꿈속의 것처럼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꿈속의 호랑이처럼 잠자는 사람으로 하여금 꿈을 깨게 할 수는 있다.

사람이 꿈에서 깨어날 경우 꿈속의 나도 없고 호랑이도 없다. 꿈속의 악업도 없고 선행도 없다. 꿈이 분명히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허깨비로 있었다. 미혹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것은 허깨비였다. 그것은 착각의 현상이었다. 이 공사상의 원리, 반야지혜의 원리에서 선근공덕은 자업자득의 원칙을 뛰어넘어 깨달음으로 돌려질 수 있다. 지혜바라밀, 즉 지혜가 완성된 상태에서는 있는 것은 오직 깨어남의 지혜일 뿐이다. 그러나 공사상은 지혜가 있다는 표현도 어떤 실체사상을 유발할 염려가 있다고 해서 경계한다. 지혜는 그저 밝을 뿐이다. 있고 없을 것이 없다. 있고 없음의 이야기는 꿈속 경계의 이야기이다. 선근공덕이라는 꿈속의 호랑이는 잠자는 사람을 꿈에서 깨어나게 했다. 꿈에서 깨어나 회향된 마당에 꿈속의 것이 있거나 없거나를 따지고 꿈속의 논리로 지혜가 있고 없음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7. 허공의 공(대품반야경 5)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다 가지는 허공, 가졌다는 생각도 없으므로 잃을 것도 없는 저 허공이 부럽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 <대품반야경>의 여기저기를 산책하는 중이다. 공사상을 허공의 비유에 의해서 살펴보자.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을 허공의 비어 있는 상태, 또는 아무것도 없는 청정한 상태에 비유하고 있다. 반야바라밀은 바로 공의 완성이므로 공을 허공에 비유한다. <반야경>의 공사상과 허공의 특징 가운데는 어떤 유사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부처님과 조사스님네는 허공의 비유를 많이 쓰고 있다. 공사상을 말할 때도 허공의 비유를 쓰지만 마음을 나타낼 때도 허공의 비유를 쓴다. 불자들이 허공의 비유를 쓰지 않더라도 허공은 좋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다 가지는 허공, 가졌다는 생각도 없으므로 잃을 것도 없는 저 허공이 부럽지 않은가?

먼저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수보리야, 허공이 청정한 까닭에 반야바라밀이 청정하느니라. 허공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 않는 까닭에 청정하느니라. 반야바라밀도 마찬가지이다. 허공은 취할 수 없는 까닭에 청정하고 반야바라밀도 마찬가지로 청정하느니라. 허공은 붙잡을 수 없고 모양이 없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은 까닭에 청정하느니라. 반야바라밀도 허공과 마찬가지로 청정하느니라.

허공의 청정한 특징은 반야바라밀의 특징이라고 한다. 즉 완성된 공의 지혜로 볼 때, 모든 존재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완전히 비어서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그 허공을 통해서 무엇이든지 볼 수 있다. 완전히 마음을 비우고 완전히 집착을 쉴 때 사물이 있는 그대로 보인다. 앞의 모양도 보이고 뒤의 모양도 보인다. 술도 보이고 술이 변해버린 식초도 보인다. 우유도 보이고 우유가 변해진 요구르트도 보인다. 완전히 비어서 붙잡을 것도 모양도 없다. 특정한 모양이 없기 때문에 무한한 모양으로 변화할 수 있다. 모양이 없으면서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양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어서, 항상 비어 있고 항상 차 있다. 공의 상태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이와 같은 공의 지혜를 체득하고 공의 지혜로 사물을 보는 것이다.

공사상의 전문가인 용수보살이 저술했다고 하는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에는 허공에서 열 가지 특징을 끌어내고 있다. 천태종에 입문해서 뒤에 선종의 대가가 된 영명연수선사도 그의 저술인 <종경록(宗鏡錄)>에서 허공의 열 가지 비유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면 용수보살이 말하는 허공의 열 가지 뜻을 살펴보자.

첫째로는 걸림이 없다는 무장애의 뜻이 있다. 허공은 이 형상의 세계에서 장애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아무런 걸림이 없다. 형상을 가진 우리의 몸은 걸림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걸림이 없이 쓸 수 있다. 공의 정신으로 모든 집착을 지워서 반야바라밀을 닦고 성취할 수 있다면 우리는 걸림이 없음을 성취하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곳에 있다는 주편(周遍)의 뜻이 있다. 허공은 이 세상 어느 곳이나 이르지 않음이 없이 두루 있다. 정신이나 물질을 막론하고 멀고 가까움, 크고 작음, 밝고 어두움에 상관없이 허공은 어느 곳에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가치의 기능을 다 발휘하지도 못하고 그 아름다움을 다 음미하지도 못하고 살고 있다. 정의에 집착한 사람, 평등에 집착한 사람, 제도개혁에 집착한 사람, 의식개혁에 집착한 사람, 불평불만에 집착한 사람들이 인생이라는 넓은 바다 가운데 편협한 부분만을 보고 작은 것만을 누리고 있다. 공의 지혜를 닦는 것은 어둠이나 밝음이나 선이나 악이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누리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악조차도 하나의 예술이 된다.

셋째는 평등하다는 뜻이 있다. 허공은 광대해서 조잡함이 없다. 안이나 밖이 없이 전체이다. 공간적·시간적으로 전체이므로 끊어지고 갈라짐이 없다. 그래서 허공은 영원하다. 끝남이 없다. 반야바라밀로 보니, 모든 인연이 항상 나에게 있다. 눈에 보이든지 보이지 않든지, 어떤 처지로 갈라져 있어도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만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다섯째로 형상이 없다는 무상(無相)의 뜻이 있다. 허공은 형상이 끊어졌다. 공간적 형상도 없고 시간적·심리적 모양도 없다.

여섯째는 청정하다는 뜻이 있다. 허공은 청정해서 더러움이 없다. 허공에 아무런 붙을 것이 없으므로 쌓일 것도 없고 따라서 깨끗하다.

일곱째는 변할 것이 없다는 부동(不動)의 뜻이 있다. 허공은 변할 것이 없어서 이루어짐과 부서짐이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서 불생불멸이다. 반야바라밀을 닦아서 공의 지혜로 세상을 살면 형상이나 추함이나 흔들림이 없다. 허공의 마음은 그것들을 모두 감싸 버린다. 튀어나오는 모양은 그대로 보아 둔다. 빈 마음은 무조건 있는 모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여덟째는 한량이 없고 여유가 있다는 유공(有空)의 뜻이 있다. 허공은 한량이 없다. 무한한 여유가 있다. 답답하지 않다.
허공은 비어 있으므로 어떤 가치 기준을 댈 수가 없다. 부족할 것도 없다. 헤아릴 수가 없고 무한하다. 반야바라밀의 마음, 공을 실천하는 지혜의 마음은 풍족하면서도 넘칠 것도 없다. 끊임없이 비우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아무것에도 의지함이 없고 심지어 허공 자체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공공(空空)의 뜻이 있다. 허공은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있다. 의지해서 신세질 것이 없으므로 보답해야 할 것도 없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부모·형제자매·부부·친지·사업상의 동업자·고객 등 모두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도움 받는 일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도움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다. 도움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의무적인 신세가 아니기 때문에 의무적인 보답이 필요 없다.
스스로 좋아서 도우면 된다. 그 도움이 보답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부담스럽다. 도움을 주고받을지언정 기뻐서 주고 기뻐서 받는 것이다. 그래서 얽매임이 없다. 반야바라밀의 공은 이래서 좋다.

열째는 자유롭고 걸림이 없다는 무득(無得)의 뜻이 있다. 허공은 집착할 것이 없으므로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자유롭다. 아무런 얻을 것도 없고 얻고자 하는 것도 없다. 그래서 대자유이다. 해방이다. 반야바라밀은 이 해방, 이 해탈, 이 자유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선사스님들의 허공에 비유한 가르침도 하나 들어보자.

마음은 허공과 같으니, 그 끝을 헤아릴 수가 없느니라. 모든 허공계가 본래 나의 일심체이니라. 허공을 여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법신은 허공이요, 허공은 법신이니 이 둘은 다르지 않느니라. 천지는 허공을 통하여 덕을 베풀고, 사람은 빈 마음을 통하여 덕을 베푸니, 참선은 마음의 허공을 알리며, 마음의 허공을 이용하는 법을 가르치느니라.

또 있다.

그대들은 허공이 되라. 허공은 비움으로써 삼라만유를 소유하나니 큰 사람이 되려면 마음이 허공과 같아야 하느니라.

마음의 허공은 성취하는 반야바라밀, 너무도 멋있고 귀하고 시원한 것이다. 이 허공의 마음들이 있는 곳이라면 삼악도(三惡道)라고 하더라도 살 만한 것이다.
 


8. 공의 보시(대품반야경 6)

보시를 하는 사람이 보시에 머뭄이 있으면 즉, 보시에 매달리는 상이 있으면 그러한 보시는
이미 진정한 보시의 의미를 상실한다.

출세간의 보시바라밀 또는 무주상보시를 닦음으로써 무소득의 반야바라밀을 실천하고 집중적으로 무소득의 반야바라밀을 닦음으로써 무량공덕을 얻는 것에 주된 관심을 갖고 <대품반야경>을 보자. 육바라밀 중에서 보시바라밀을 진정한 무주상의 자세로 할 수 있다면 다른 나머지 바라밀에 의한 반야바라밀도 보시바라밀과 같이 무주상·무소득의 자세로 실천하면 될 것이다.

<대품반야경>에서 사리불존자와 수보리존자가 대화하면서 진정한 보시바라밀에 대해서 묻고 대답한다. 사리불존자가 수보리존자에게 "세속적인 보시바라밀과 탈속한 보시바라밀은 어떻게 다릅니까?"하고 묻는다. 수보리존자가 대답한다.

어떤 보살은 시주가 되어 승려나 걸인에게 음식이나 옷가지 또는 갖가지 필요한 것을 베풀어 준다. 그는 보시하면서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베풀고 저들은 받거니와 나는 결코 아끼고 탐내지 않으며, 나는 시주가 되고 일체를 버린다.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보시바라밀을 행한다.'

이렇게 보시한 공덕을 자신과 중생들의 지혜를 얻는 데 회향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이 보시의 인연으로 중생들이 금생에는 즐거움을 얻고, 다음 생에는 해탈열반에 이르게 하라.'

이 사람의 보시에는 세 가지 걸림이 있다. 나라고 하는 생각, 남이라고 하는 생각, 베푼다는 생각이다. 이 세 가지 관념에 걸리는 보시이기 때문에 이것을 세속적인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세속적인 집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출세간적인 보시 또는 탈속한 보시는 세가지 청정함을 갖추어야 한다.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 보시하는 물건, 그리고 보시의 결과에 대해서 아무런 매달림이 없어야 한다. 보살은 일체중생에게 베풀고 최고의 지혜에 회향하지만, 아무런 뽐냄이나 자부심이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베푼다는 마음까지도 없다. 보시바라밀 이외의 다섯 가지 바라밀도 보시바라밀과 같다.

여기서 사리불존자가 묻고 수보리존자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경이 펼쳐지지만 이 대화의 내용을 부처님이 증명하고 인정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과 다름이 없다. 보시바라밀에 약간의 상(相)만 있어도 그 보시는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바라밀행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특히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구별하는 것, 준다는 생각, 그리고 보시의 결과로 얻어지는 공덕에 대한 기대 심리가 문제가 된다. 아무런 기대가 없이 무심으로 보시바라밀을 실천할 때 그 보시가 진정한 보시라는 것이다.

이 무소득을 나타내기 위해서 부처님은 아주 멋있는 비유를 든다. 이 비유는 나는 새를 이용한 것인데 음미할수록 맛이 있다.

수보리야, 비유컨대 날개가 잇는 새는 허공을 날아오르되 떨어지지 않고, 비록 공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또는 공중에 머물지 않음과 같다.

이 말씀, 참으로 멋있는 비유 아닌가. 완성된 공의 지혜를 허공에 비유했듯이 새가 땅을 떠나 허공으로 가지만 그 새는 허공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에 새가 허공에 머물면 새는 허공에서 땅으로 떨어져 죽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시를 하는 사람이 보시에 머물면 즉 보시에 매달리는 상이 있으면 그러한 보시는 이미 진정한 보시의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비유를 다른 데서도 찾을 수 있다. 달리는 자전거가 서게 되면 넘어지게 된다. 돌아가는 팽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반야경>의 부처님 말씀 중에 혹시 상충점이 있지 않는지 의아해 하면서 반야바라밀을 닦는 수행에 대한 과보가 있다는 말과 없다는 말에 대해서 알아본 바 있다. 그때, 우리는 무소득은 수행자세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요, 반야바라밀을 닦은 사람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반드시 좋은 과보가 따른다고 하는 것은 수행결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렇다고 풀이했었다. 보시바라밀을 행할 때 우리의 자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무소득의 무심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은 알아들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무소득의 마음가짐이 필요한 보다 깊은 이유는 무엇일까?'하는 물음이 아직 남아 있다.

우리는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가 접한 옛날이야기의 내용은 권선징악의 스토리를 주로 해서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로 끝난다. 물론 주인공은 선인선과의 사람, 즉 좋은 일을 하고 좋은 결과를 얻어서 행복하게 잘살더라는 내용이다. 우리가 읽은 부처님의 전생이야기 즉 <본생경>의 내용도 마찬가지로 권선징악의 내용이다. 그러나<반야경>에서의 부처님은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은 결과를 얻어서 행복하게 잘살더라는 이야기는 좋은 결과가 있는 부분에서 이야기를 끝맺은 것이므로 인간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야기가 길거나 짧거나 상관없이 인생의 바른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의 영화는 좋은 결과로 끝나지 않는 것도 많이 있다. 이야기를 꾸미기 위해서 주인공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법을 어기는 역할을 맡게 한다. 그 주인공은 법은 위반하지만 비도덕적인 일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법을 어기는 사람이 아무런 탈이 없이 잘사는 줄거리로 영화를 만들면 그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미칠 나쁜 영향을 고려해서 최후에 주인공의 몰락을 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주인공이 관객으로부터 사랑받게끔 꾸며진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어이없게 죽어가는 장면으로 끝나는 예도 많이 있다. 영화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러하다.

인생행로에 있어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끊임없이 교차되므로 주인공의 불행이나 행복 어느 쪽을 이야기의 끝으로 장식해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앞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있다. 죽음을 맞이하는 범부중생들에게는 필연적으로 닥쳐올 죽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 삶의 참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된다. 얻는 것, 남는 것이 있는 이야기의 끝은 중간에 짤린 이야기이다. 주인공이 아무 소득 없이 사라지는 이야기만이 끝까지 바로 이야기한 것이 된다.

우리는 지금 무소득의 보시바라밀 등 육바라밀 즉 반야바라밀을 닦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삶의 실상면에서 보나, 공을 닦는 수행자를 위해서나, 최후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장면이 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야경>에서의 부처님도 반야바라밀을 닦음으로 인해서 어떤 지혜나 얻을 것이 없음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계신다. 이야기의 끝을 무소득으로 그리라는 것이다. 최후에 주인공에게 어떤 좋은 결과가 얻어지는 내용으로 끝나는 영화가 아니라 최후에 주인공이 어이없이 죽어야만 되는 그래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소득의 공에 입각한 보시바라밀, 또는 무소득에 입각한 육바라밀 하나하나를 닦아야 한다는 것은 수행의 자세 문제이다. 그 수행의 결과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는 반드시 무한한 공덕이 따른다. 부처님은 다른 것에는 일체 눈길을 보내지 않고 오직 반야바라밀에 집중해서 공덕을 얻는 것을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

수보리야, 항상 무소득의 반야바라밀을 생각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생각이 집중하는 것은 비유컨대 음욕이 많은 사람이 정결한 여인과 결혼할 기약을 하는 것과 같느니라. 그런데 약혼한 여인이 제때에 남자에게 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생각 생각은 항상 그 여인에게 맴돌 것이니라. 그 남자는 '그 여인이 오면 함께 더불어 앉고 누우며 즐기리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할 것이니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해야 하느니라. 항하의 모래알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가득찬 분량의 공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보살이 무소득의 반야바라밀을 닦아서 얻는 선근공덕의 천분, 만분, 무량억천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또 반야바라밀 외에 다른 선근공덕을 무량억겁 동안 닦았다고 하더라도 반야바라밀을 하룻동안 열심히 닦은 공덕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부처님은 집중적으로 무소득의 반야바라밀을 닦으라고 권하고는 그 공덕이 엄청나다고 말씀하신다. 부처님은 약혼녀를 기다리는 사내의 마음을 비유로 들어서 집중하는 마음가짐을 설명하신다. 일체가 다 공하다는 관찰과 깨달음에서 주는 이, 받는 이, 주는 물건, 보시 공덕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바라밀에만 온 마음을 다 쏟으면 그 기간이 단 하루라고 하더라도 무량억겁 동안에 걸쳐 지은 다른 공덕보다 더 수승하다고 한다.


 
9. 한 바라밀 속의 육바라밀(대품반야경 7)

우리가 굶을 수 있고 참을 수 있고 꿈을 노래하며 육바라밀을 동시에 실천한다면 우리는 바로 대자유인이요, 대해탈인이요, 대평화인이다.

<대품반야경>의 <섭오품> 중 '섭오'라는 말은 육바라밀의 한 가지 한 가지가 다른 다섯 가지를 포함한다는 것을 뜻한다. 보시바라밀을 행하면서 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나머지 바라밀도 동시에 실천하는 것이다. 육바라밀의 다른 한 가지 한 가지를 행할 때도 마찬가지로 다른 다섯 가지를 겸해서 실천하는 것이다. <대품반야경>은 이와 같이 한 바라밀의 실천 속에서 육바라밀 전체를 실천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별도로 한 품을 만들었다. <대품반야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말은 물로 반야바라밀·육바라밀·공·지혜·아뇩다라삼먁삼보리 등이지만 한 바라밀 속에 다른 바라밀을 실천한다는 생각은 모든 곳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우리가 육바라밀·공사상·반야바라밀을 엮어서 공부할 때 공사상에 의해서 육바라밀 하나 하나를 닦으면 완전히 집착을 비운 마음으로 닦기 때문에 육바라밀이 제대로 실천되고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에는 공을 닦는 것이 보시바라밀을 닦은 것이요, 육바라밀 전체를 닦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라는 전제가 들어 있다.

하나가 다섯을 포함한다는 생각은 교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부처님이 가르치는 인연법은 세상의 모든 사물이 서로 의존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이 의존상태는 주관과 객관의 상대관계를 비롯해서 '크다' '작다'와 같은 개념들의 상대적인 관계, 그리고 공간적·시간적 상대관계를 말한다. 인연법에 의한 모든 존재의 상호의존 관계는 모든 것에 독자성·영구성·실체성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바로 공사상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사물의 인연관계를 상호포함의 관계로 말할 수 있다. 내가 상대에게 의지해 있으므로 독자성이 없다는 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상대가 나에게 포함되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육바라밀의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서 완전하게 실천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탐심을 버리지 않고 성내는 마음을 없앨 수 없으며, 어리석음을 지우지 않고 탐심을 여읠 수 없다. 한 가지를 치료하자면 문제의 원인이 되는 다른 것을 치료해야 한다. 한 가지 좋은 일을 하자면 그 좋은 일을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그 일의 근원이 되는 다른 좋은 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보시를 완전하게 실천하려면 다른 다섯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 다른 한 가지 하나하나를 실천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대품반야경> <섭오품>을 읽어보자.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쭌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보시바라밀을 행하면서 어떻게 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바라밀을 행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이르신다.

보살이 보시를 할 때 그 보시를 지혜를 얻는 데 회향하고 몸과 입과 생각을 단정하고 인자하게 가다듬어야 하느니라. 보시를 할 때는 받는 이가 성내고 욕하더라도 이때 보살은 인욕하며 성내지 않느니라. 보시할 때 받는 이가 성내고 욕하더라도 보살은 움츠러들지 않고 이렇게 생각하느니라. '나는 응당히 베풀고 아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느니라.' 이때, 몸과 마음의 정진이 생기는 것이니라. 보시를 행하면서 오직 세상을 여실히 보는 지혜를 생각할 뿐이니라. 이것이 보시를 행하면서 선정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니라. 보살은 보시를 할 때 보시는 공하여 환상과 같은 것이라고 마음에 새기느니라. 보시한 결과로 이익이 있고 없음을 생각하지 않느니라. 이것이 보시를 행하면서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니라.

보시하면서 육바라밀을 동시에 실천하는 내용이다. 보시하면서 몸과 입과 뜻을 단정히 하여 계를 지키고, 상대의 비방과 욕설을 인욕하고 어려움을 당해도 분발하여 정진하고, 보시하면서도 오직 공의 지혜만을 생각하고, 보시의 공덕을 반야바라밀에 회향하여 지혜를 실천한다는 것이다. 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바라밀을 실천할 때도 마찬가지로 다른 다섯 가지를 동시에 실천하는 것이다.

육바라밀 하나하나는 다 조복(調伏)시키거나 없애고자 하는 문제점들을 전제하고 있다. 바로 간탐심·과욕심·성내는 마음·해태심·어지러운 마음·어리석음의 미혹이다. 보시는 간탐심을 대처하기 위해서이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발동을 다스리기 위해서이다. 인욕은 성내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이고, 정진은 게으른 마음을 재촉하기 위해서이다. 선정은 어지러운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서이고 지혜는 어리석음을 물리치기 위해서이다. 육바라밀을 동시에 닦으면 좋은 줄은 알지만 육바라밀 쪽에서 보면 왜 꼭 동시에 닦아야 하는가가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육바라밀이 바로잡고자 하는 여섯 방향의 문제점을 보면 왜 육바라밀이 동시적으로 행해져야 하는가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간탐심( 貪心)·욕망심(慾望心)·진에심(瞋 心)·해태심(懈怠心)·착잡심(錯雜心)·우치심(愚癡心)의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여섯 가지 문제점이 인간에게서 나타날 때 한 가지씩 차례차례 일어나지 않는다.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한 가지 문제점은 반드시 다른 문제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성내는 마음은 자기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때 일어난다. 즉 간탐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 터무니없이 욕심을 내는 간탐심은 어리석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어리석음은 흐트러진 생각으로부터 일어난다. 흐트러진 생각은 다시 게으름이나 감각기관의 욕망으로부터 일어난다. 이렇게 여섯 가지 문제점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가지 문제점을 제거하려면 다른 다섯 가지의 문제점을 동시에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한가지 바라밀을 행할 때 다른 다섯 가지 바라밀을 같이 닦아야 한다. 육바라밀의 대상인 간탐심·욕망심·진에심·해태심·착잡심·우치심이 상호의존 관계 속에 있고 서로 상대를 자체에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들을 대치하는 육바라밀도 상호의존 관계 속에 있고 서로 상대를 자체에 포함하고 있다. <대품반야경>의 <섭오품>즉 육바라밀의 한 가지 한 가지가 다른 다섯 가지를 포섭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품은 이 같은 상호의지·상호포함 관계를 밝히려고 한다.

우리는 춘원 이광수 선생의 육바라밀 시를 읽은 적이 있다. 춘원 선생은 님을 상징하고 님에게 향하는 마음을 육바라밀로 표현했다. 필자는 이 육바라밀의 상호포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육바라밀을 한데 같이 뭉쳐서 번역할 수 있을까를 궁리한 적이 있다. 필자는 육바라밀을 두 개씩 뭉쳐서 번역하기로 했다. 먼저 보시와 지계를 '굶을 수 있다.'로 번역하고, 인욕과 정진을 '참을 수 있다.'로 번역했다. 그리고 선정과 지혜를 '꿈을 노래할 수 있다.'로 번역했다. 육바라밀을 굶을 수 있고, 참을 수 있고, 꿈을 노래할 수 있는 것으로 번역한 것이다. 육바라밀을 이와 같이 번역한 것은 육바라밀 자체의 뜻보다는 <금강경> <반야심경> <대품반야경> 같은 반야부 경전들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정하고 그것을 참작하여 그와 같이 번역한 것이다.

필자는 반야부 경전들의 대의를 '무소득의 정신을 철저히 실천하되 역사라는 무대를 꾸미는 데 육바라밀의 행으로 최선을 다하라.'는 구절로 압축하곤 한다. 물론 다른 요소도 많이 있지만 공사상과 무집착사상, 무소득의 긍정사상 등이 <반야경>의 주요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사상의 무집착이 무조건 버리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소유해도 좋으나 언제든지 버릴 수 있어야 하고 굶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보시와 지계이다. 또 시시한 어려움에 흔들리거나 좌절하지 말고 끊임없는 인욕의 정신심을 가져야 한다. 지금의 편안을 일부러 불편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지만, 불편하게 살아야 할 경우가 오더라도 굴욕을 받아야 할 경우가 오더라도 아무리 엄청난 좌절이 오더라도 참으면서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욕과 정진이다. 굶을 수 있고 참을 수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역사 위에 참답고 좋고 아름다운 무대를 꾸며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감정을 정리하는 선정과, 허공의 마음을 알리고 허공의 마음을 이용하는 지혜이다.

우리가 만약 굶을 수 있고 참을 수 있고 꿈을 노래하면서 육바라밀을 동시에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무서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부족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괴로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바로 대자유인이요, 대해탈인이요, 대평화인이다.
 


10. 무소득의 공(반야심경)

반야바라밀의 뜻 자체는 지혜의 완성일 뿐이지만 그 지혜를 완성하는 내용은 공사상과 무소득 정신에 입각한 육바라밀의 실천이다.

현장법사가 번역한 <반야심경>은 반야부 경전들 가운데 부피가 큰 것으로부터 작은 것으로 축약된 경전이다.

<반야심경>의 산스크리트 원본은 대본과 소본이 있는데 이 중에서 소본은 현장법사가 <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한 것으로 한국불교에서 조석으로 읽는 <반야심경>이다. <반야심경>의 한역 종류, 광본·약본 종류 등은 앞에서 설명했으므로 바로 <반야심경>의 내용을 보기로 하자.

관세음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오온(五蘊)이 다 공함을 보고 모든 고통과 액난을 건진다. 물질과 정신의 요소인 오온이 공한데 이 공한 가운데는 눈·귀·코·혀·몸·뜻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나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대상이나 그리고 감각기관과 감각기관의 대상 사이에서 생기는 인식도 없다. 윤회로 가는 십이인연이나 해탈로 가는 십이인연도 없고,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도 없다. 영적인 앎이나 일체의 얻을 것이 없다. 아무런 소득이 없으므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공포가 없어서 잘못된 생각을 여의고 열반에 이른다.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님들도 모두 이 반야바라밀에 의해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다. 여기 모든 고통을 여의게 하는 신비한 주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이다.

<반야심경>을 포함한 모든 반야부의 경에서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은 공을 실천하는 정신으로 마음에 일체의 집착을 지우고 육바라밀을 동시에 실천해서 그 공덕을 반야바라밀로 회향함을 뜻한다. 그래서 최초에 나오는 반야바라밀은 바로 한 가지의 바라밀을 닦으면 다른 다섯 가지를 동시에 닦는 종류의 육바라밀행을 뜻한다. 그리고 경전을 짧게 줄이다 보니까 반야바라밀을 닦는 공덕이 먼저 나온다. 물론, 공사상을 터득하면 세상이 있는 그대로 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불생불멸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에 고통을 여의게 되겠지만 일단 반야바라밀을 닦는 성과가 제시된다. 그리고 나선 반야바라밀을 닦는 방법으로 철저한 부정이 시작된다. 불교에서 물질과 정신의 요소를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색수상행식 오온이 부정된다. 모든 감각기관과 그 대상과 인식이 부정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십이인연이나 고집멸도 사성제도 부정된다. 어떤 종류의 지혜나 얻을 것도 부정된다.

이 부정은 반야바라밀을 닦는 필수적인 방법이다. <반야경>에 있어서 반야는 바로 나를 중심으로 한 집착을 여읜 눈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이다. 공사상을 닦는 것이 집착을 여의는 방법이다. 집착을 여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다 부정되어야 한다. 심지어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반야바라밀 자체까지도, 어떤 종류의 얻음도 부정된다. 이 부정을 통해서만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는 지혜의 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 있어서 부정은 사물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공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즉 무상하게 변하는, 무상하게 스러지는, 무상하게 없어지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물질이나 정신 모든 감각기관과 인식이 실체적인 것이 아니고 없어질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도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은 것으로 진리를 깨우치는 데 이용하고 난 후에는 버려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철저하게 부정하기 위해서는 '사물은 존재하되 공한 상태에 있다.'는 설명도 필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의 마당에서 사물 자체의 존재를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상대적 상호의존의 상태, 독자적 실체가 없는 무자성의 상태, 공한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어떤 긍정이 있지 않으면 무조건의 부정에 대해서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볼 때 주인공이 너무 억울하게 핍박과 고통을 받으면 시청자들은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서 항의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핍박의 과정이 있어야 시청자들의 감정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작가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부당하고 억울한 고초를 겪게 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에 있어서 반야바라밀을 닦는 과정으로서의 부정도 그와 같다.

앞에서도 여러 번 생각해 보았듯이 반야부 경전들에 있어서 부정은 육바라밀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한 방법적인 부정이다. 가령 보시를 행하되 철저하게 공을 깨달은 상태에서 주는 이와 받는 이, 주는 물건, 보시공덕의 결과에 대해서 마음을 쓰지 않는 상태에서 보시를 행한다면 이 보시가 진정한 반야바라밀로 회향될 수가 있다. 지계나 인욕 등 다른 바라밀을 실천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집착의 마음을 완전히 비우려면 사물뿐만 아니라 보시를 행하는 자체, 교리 자체, 반야바라밀 자체까지도 부정해야 한다. <반야심경>에서는 짧게 줄이느라고 십이인연과 사성제까지만 부정하고 어떤 지혜나 얻을 바도 없다고 하지만 우리가 본 <
대품반야경>에서는 더 많은 부정들을 본 바 있다.

반야바라밀로 회향되는 육바라밀 수행자세의 입장에서 부정이 계속되지만 수행의 결과면에서는 다시 긍정으로 돌아선다. 그래서 <반야심경>은 보살이 반야바라밀의 무소득 마음에서 아무런 걸림이나 공포가 없으니 그것이 바로 궁극의 열반에 드는 것이라고 한다. <반야심경>의 처음은 관자재보살 즉 관세음보살로 수행주체의 이름을 밝히고 여기서는 그냥 보살이라고만 한다. 구마라집은 관세음보살이라고 번역했고 현장법사는 관자재보살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을 많이 쓰기 때문에 필자도 관세음보살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경열반을 얻는 보살은 관세음보살이나 반야바마밀을 닦는 모든 보살이 될 것이다. <대품반야경>에서 도 출연하는 수행자는 보살마하살로 불리워진다.

<반야심경>은 다시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궁극적인 깨달음의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 반야바라밀이 아주 신비롭고 밝고 높고 귀한 주문이라고 밝히면서 바라밀 즉 고해를 건너 피안에 이르는 도피안의 정신을 나타내는 바라밀다 주문으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라는 짧은 다라니가 붙는다.

이 바라밀다의 진언은 모든 고통과 액난을 멸제하며 절대로 헛되지 않다는 말도 첨부되어 있다. 반야바라밀이 신비로운 주문이라고 할 때 이 반야바라밀에는 철저히 버리고 비우고 지우는 공사상의 실천 육바라밀 중에서 한 가지의 바라밀을 닦을 때마다 다른 다섯 가지의 바라밀을 동시적으로 닦는 것, 육바라밀의 닦음을 반야바라밀로 회향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절차가 다 포함되어 있다. 반야바라밀은 극히 상징적인 것이다. 반야바라밀의 뜻 자체는 지혜의 완성일 뿐이지만 그 지혜를 완성하는 내용은 공사상과 무소득 정신에 입각한 육바라밀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은 '아제아제'로 이어지는 주문을 바라밀다주라고 하고 있지만 반야바라밀다라고 하는 말 자체가 대단히 상징성을 띤 주문이다. 그래서 현재 이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을 주문으로 외우는 법회도 있다.
 


11. 형상을 떠난 부처님의 몸(금강경 1)

온 세상의 만물이 모두 허망하니라, 사물의 겉모습이 그것의 진실된 모습이 아닌 줄을 알면 그 자리에서 바로 여래를 보리라.

반야부 경전 중에서 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경>을 보도록 하겠다. 구마라집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했고 현장법사는 600권 <대반야경> 가운데 제9회 577권에서 <능단금강분>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했다. 한국불교에서는 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사용하고 있다. 이 경을 <금강반야경> 또는 <금강경>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전에 살펴보았듯이 <금강경>에는 대승·소승이라는 말과 공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
는다. 그래서 대소승의 구별이 희미하고 공이라는 말이 반야사상의 핵으로 사용되기 이전에 편집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금강경>의 조직이 잘되어 있고 또 반야부 경전들에 공통적인 역설적 부정의 논리가 극도로 발달된 것으로 보아서 <대품반야경>이나 <십만송반야경> 같은 <반야경>으로부터 대승·소승이나 공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빼고 축약해서 반야사상이 간략하게 편집되었을 것이라는 짐작도 있다. 이 <금강경>은 <반야심경> 다음으로 널리 읽혀지고 있다. 선종에서는 5조 홍인대사 이후로 <금강경>을 애용해 오고 있다. 선종의 꽃을 피운 6조
혜능대사는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금강경>가운데 나오는 한 구절에 감명을 받아 출가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소의경전처럼 애독되고 있다.

반야부 경전의 대의로 알려진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의 문구를 보고 그 의미를 헤아려 보겠다. 이 문구는 <금강경>을 비롯한 반야부 모든 경전들이 전하고자 하는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육체적 외모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적 외모로는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말씀하신 육체적 외모란 외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은 다 허망해서 진실된 실체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일체의 사물을 보되 현재의 겉모양만을 보지 말고 그 모양에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더하기와 빼기를 해서 이 순간 이 자리의 모습뿐만 아니라 모든 순간, 모든 자리의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다면 그 즉시 여래를 볼 것이니라.

이 구절이 <금강경>의 대의를 잡는 맥줄이기 때문에 뜻을 좀더 잘 살려서 번역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번역하고 보니 더욱 복잡하게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온 세상의 만물이 모두 허망하니라. 사물의 겉모습이 그것의 진실된 모습이 아닌 줄을 알면, 그 자리에서 바로 여래를 보리라.'

이미 앞에서 소개한 산스크리트어본 <반야경> 연구전문가인 에드워드 콘즈는 이 부분을 범어본 <금강경>으로부터 이렇게 번역했다.

'겉표시가 붙은 곳에는 반드시 속임이 있느니라. 겉표시가 없는 곳에는 아무데나 속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겉표시가 없는 곳에서 표시로 나타나느니라.'

미국의 로스엔젤레스 부근에는 디즈니랜드가 있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 볼 것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중에서 유령의 집이라는 것이 있다. 깜깜한 장소에 우리가 알 수 없는 효과장치를 이용해서 귀신들이 댄싱파티를 하는 장면도 있다. 또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면 귀신과 같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유령의 집에서 우리는 눈앞에 있는 사물의 모양을 보되 현재의 모양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모양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여러 미녀들의 모습이 유령처럼 실물 모양으로 나타나는데 순간순간 나이가 다른 모습으로 변해진다. 한 순간에는 20대의 꽃다운 청춘으로 다음 순간에는 40대로, 60대로, 80대로 그 다음 순간에는 막 태어난 아기로 연이어서 1살, 2살, 3살, 7살, 10살, 17살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다시 20살의 모습이 된다. 어떤 때는 태어나서부터 성장하여 늙어 가는 모습을 단계적으로 자세히 보이기도 하고 다른 때는 20세, 80살, 1살, 10살의 모습을 어지럽게 보이기도 한다.

그 미녀 유령들의 형체에 우리가 걸어가서 접근할 수가 있다. 인형 같은 형체로 생각하고 접근해서 만져 보려고 하면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영사기로 비치는 그림 같은 것도 아니다. 사람의 몸이 닿은 부분은 모양이 없어져 버리지만 영사기로 비추는 것이라면 우리의 몸에 지워진 부분의 모양이 나타나야 할 터인데 우리의 몸은 그대로이다. 어떤 장치로 그와 같이 여인들이 실물적으로 보이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물체가 없는 효과를 내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다.

이 환경에서 필자는 공의 세계를 실감한다. 수초 사이에 우리는 미녀의 어렸을 때와 늙었을 때를 다 보아 버린다. 30세의 미녀가 현재인지 80노인이 현재인지 갓난아기가 현재인지 구별이 안 된다. 현재로 말하면 모든 나이가 다 현재이고 과거나 미래로 보면 모든 나이의 단계가 다 과거나 미래가 된다. 갓난아기 속에서 노인을 보고 노인 속에서 이팔청춘의 미녀를 본다. 만개한 미녀에게서 핏덩이의 아기와 뼈와 주름진 가죽만 앙상한 임종 직전의 노파도 본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현재의 모양을 보되 지금 순간, 이 자리 이 모습의 모양만을 볼것이 아니라, 변해 왔고 변해 갈 모양들을 한꺼번에 보라.'는 내용이 바로 이 같은 경계의 관찰법이 아닐까. 핏덩이 아기에게서 80노파를, 80노파에게서 청춘의 미녀를 한꺼번에 보는 지혜의 관찰 말이다.

전에 필자가 30여 년 간 알고 지내던 노보살님 한 분이 운명하셨다. 그분은 젊었을 때 사찰의 신도회장 일을 맡아 보면서 부처님 도량을 수호하고 스님네를 봉양하는 일을 많이 했었다. 85세가 될 때까지는 나이를 잘 셀 수 있었지만 85세가 넘은 다음부터는 나이 세는 일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분은 젊었을 때의 사진에 검은 리본을 걸쳐 놓고 필자는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의 구절을 읽었다. 젊었을 때의 사진에 멈추어 계신 보살님, 그 사진과 병풍 뒤에 뼈와 가죽으로만 되어 있는 노보살님, 이제는 숨쉬기를 그만둔 채로 누워 계신 노보살님을 비교해 보면서 어떻게 하면 필자가 저 보살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금강경>은 모양을 지우고 모양을 보아야만 그 모양의 진실을 볼수 있다고 한다. 필자는 노보살님을 만나고 싶고 다시 정을 나누며 절일도 하고 108배나 삼천배 기도도 하고 싶다. 다른 분이 아닌 꼭 그분을 찾고 싶다. 모양을 지우고 모양을 볼 때 바로 여래를 만날 수 있다면 필자는 운명하신 그 보살님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양을 지운다는 말이 얼굴 모양이 바뀐다거나 나이와 함께 변한다거나 이름이 달라지는 것 등을 상상하는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떠나신 노보살님이 모양을 바꾼다고 할 때 노보살님의 정신과 육체는 필자가 알고 있던 모습과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 노보살님은 산이나 바다나 바람이나 구름의 모양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육체적·정신적 인간형을 가지면서 나를 멀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특징을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원효스님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한 암자에서 열심히 기도를 했다. 삼매에 들어서 무아지경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나물 캐는 노파가 찾아와서 하룻밤 쉬어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원효스님은 마음속에 약간 짜증이 났다. 원효스님이 기도하는 암자가 아니더라도 그 노파가 큰절에 가서 부탁하면 하룻밤을 쉬고 가게 해줄 터인데 하필이면 기도하는 곳에 와서 마침 기도가 잘되는 중에 끼어들어서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 야속했다.
원효스님은 그 노파를 큰절로 가게 했다. 그날 밤에 원효대사는 꿈을 꾸었다. "너는 나를 보겠다고 기도하면서 막상 내가 나타나니 나를 쫓아 보내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힐난하는 것이었다. 원효대사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관세음보살을 찾으면서, 찾아온 관세음보살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원통했다.

<금강경>은 얼굴을 지운다. 특히 내가 꼭 만나고자 하는 사람의 얼굴을 지운다. 얼굴을 지우고 보라고 한다. 이 말은 만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기가 꼭 만나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하는 뜻이다. 춘원 선생이 육바라밀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항상 새로운 얼굴로, 무수한 얼굴로 나타나는 님에게 육바라밀의 행을 하라는 뜻이다. 모양을 지우고 모양을 봄으로써 여래를 보는 것은 결국 육바라밀의 실천 속에서 내가 다시 만나고자 하는 저 노보살님을 찾으라는 뜻이 된다. 필자는 운명하신 노보살님도 다시 만나고 여래도 보고 싶다.


12. 머무는 바 없이 내는 마음(금강경 2)


매달림 없는 마음으로 역사무대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는 일상사의 하나하나에 조심스럽고 성실하게 임해야 한다.

<금강경> 중에 유명한 구절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基心)'이 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은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육조스님은 이 구절을 듣고 깨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 먼저 <금강경> 가운데 이 구절이 나오는 상황을 읽어보기로 하자.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묻는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업한다고 하면 그 장엄은 진정한 장엄이 아니라 오직 그 이름만 장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그렇기 때문에 수행하는 보살은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눈에 보이는 것을 비롯해서 모든 감각기관의 대상에 의지해서 마음을 내면 안 된다. 응당 머문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할지니라."

부처님이 수보리존자에게 묻고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데로 유도한다.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생각으로 장엄하면 그것은 이미 불국토도 아니고 장엄도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것이거나 정신적인 것을 막론하고 불국토를 어떤 실체적인 것으로 잘못 집착하기 때문이다. 반야부의 모든 경전들과 마찬가지로 <금강경>도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철저한 자기 지움, 자기 버림, 집착의 지움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깨달음의 세계를 꾸민다는 이름으로, 깨달음을 실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이미 그것은 깨달음에서 멀이진 것이다. 그 깨달음의 세계 또는 불국토가 실체적인 것이 되면 현실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과 이상세계를 기다리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철저한 공을 닦는 길과는 반대의 길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 바로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장엄은 수행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지언정 목표로 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음에 감각기관의 대상에 머문 바가 없이 마음을 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이어진다. 감각기관의 대상은 육체적·물질적인 것이니까 나쁘고 정신적인 것은 좋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육체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을 막론하고 객관적인 불국토가 실체적으로 독자성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집착의 마음으로 불국토를 장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러 번 반복하지만 불국토나 불국토의 장엄은 반야바라밀을 닦은 결과일지언정 목표는 아니다. 이것은 어떤 이가 수행하다가 목숨을 거둔 다음에 그 수행자의 몸을 화장하여 사리가 나왔다면 그 사리는 수행한 결과일지언정 수행의 목표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효부상을 받기 위해서 노력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가 효부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다면 그녀는 이미 효부가 아니다. 사회봉사를 해서 사회적인 존경도 받고 국가로부터 훈장도 받은 사람이 있을 경우 그는 봉사한 결과로 훈장이나 존경을 받을지언정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봉사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가 상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내었을 때 그는 이미 존경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부처님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마음으로 장엄을 하면 이미 그것은 장엄이 아니므로 감각기관의 대상에 의지하지 말고 깨달음의 세계를 꾸미기 위한 마음을 내라고 한다.

그 다음에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이어진다. 이 구절의 뜻만 생각하면 '집착이 없이 마음을 내라.'가 되지만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과 관련을 지어서 생각한다면 '불국토라든지 장엄한다는 것에 대한 일체의 집착을 여의고 불국토를 장엄할 마음을 내라.'는 뜻이 되겠다. 여기서는 수행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므로 일차적으로 부정하는 불국토나 부정 뒤에 오는 불국토가 다 같이 공사상에 의한 육바라밀과 육바라밀을 반야바라밀로 회향하는 것이 되겠다. 이 불국토의 장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라는 무대 위에 육바라밀의 행을 공연하는 것이 된다. '응무소주' 즉 '머무는 바 없음'이 <반야심경>에서의 '색불이공(色不異空)'이라고 한다면 '이생기심' 즉 '마음을 내라.' 는 <반야심경>에서의 '공불이색(空不異色)'이 될 것이다. '색불이공' 즉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현실에서 공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요, '공불이색' 즉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공의 세계에서 현실의 역사세계로 나오는 것이 된다. '응무소주' 즉 '불국토에 머무는 바 없다.'는 것이 현실의 세계에서 공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요, '이생기심' 즉 '불국토를 장엄할 마음을 내라.'는 것이 공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나오는 것이다.

선사님들의 게송 중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산사에 고요히 앉아 있으니 고요적적하여
자연의 본래자리 그대로라.
무슨 일로 서풍이 불어서 수풀을 움직이며
기러기 소리가 추운 겨울 하늘을 길게 가르는가.

고요히 앉아 있는 부분이 현실세계에서 공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람이 불고 새가 우는 것은 공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나오는 것을 뜻한다. 차별이 있는 현실에서 차별이 없는 고요로 들어가고 차별 없는 고요에서 차별이 있는 지혜를 가지고 현실세계로 나오는 것이다.

필자는 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집착이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 또는 '매달림이 없는 정열'로 표현하기도 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일이 진리에 합당하고 인류에게 이익된 일일 경우 결과의 성패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로 통칭되는 육바라밀의 행을 하는 것이 바로 불국토 또는 정토를 장엄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달림 없는 마음으로 역사무대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는 일상사의 하나하나에 조심스럽고 성실하게 임해야 한다. 밥 먹는 일, 옷 입는 일, 잠자는 일 하나하나가 불사가 되어야 한다.

일본 사람들은 차에도 '오차'라고 해서 경어 '오'자를 붙이고 밥에도 '고항'이라고 해서 '고'자를 붙인다. 대부분의 사소한 일에도 '오'자를 붙임으로써 그 일의 존중을 나타낸다. 이것은 일본의 언어문화일 뿐이고 일본인들이 모든 일을 그들이 쓰는 말과 같이 신중하고 정성스럽게 처리하는 것은 별문제이다. 여하튼 한 동작 한마디마다 육바라밀의 행으로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심정으로 온 정성을 다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필자는 며칠 전에 한 객스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스님은 '돈 들이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즐거운 마음 만들기 모임'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한 시골의 수련원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깨우친 바가 컸고 그 깨우침을 현실에서 실천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 첫 번째의 실천방법이 자리양보라고 했다. 도시나 시골길을 다니다 보면 버스나 기차를 타게 된다고 한다. 그 스님은 처음에 자신보다 연세가 높은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자리를 양보하기로 했는데 이제는 나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가 물었다. 먼 길을 가면서 누구에게나 자리를 양보하면 너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러자 그 스님은 양보하기는 하지만 자리에 집착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양보해 주는 이와 양보 받는 이가 교대해서 앉으면 서로 피곤하지 않고 자리를 교대하는 중에 평소에 느끼지 못하는 인간관계의 정도 생긴다고 대답했다. 그 스님은 또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두고 자리를 지키고 계속 앉아 있는 일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곤한 일이라고 말했다. 필자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찌 꼭 버스나 기차에서의 자리 지키기만 피곤한 일일까보냐, 이 세상의 모든 편안한 자리를 혼자 차지하고 계속 지키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버스나 전철에서의 자리양보, 인생의 모든 자리에 있어서의 상호교대, 참으로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서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이 꼭 신문방송에 나올 만큼 거창한 일을 해야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소한 생활중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처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보살행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집착이 없는 불국토 장엄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육바라밀 전체를 한꺼번에 실천해서 불국토를 장엄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할 능력이나 환경이 되지 못하면 육바라밀 중에 한 가지라도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13. 역설적 부정의 이유(금강경 3)

손가락이 달을 가리킨다면 손가락은 속제(俗諦)이다. 달은 언어에 의해 가리켜진, 그러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진제(眞諦)이다.

<금강경> 가운데 나타나는 역설적인 부정에 대하여 <금강경>에서는 '무엇 무엇은 무엇 무엇이 아니므로 무엇 무엇이니라.'라는 부정의 논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된다. 이 부정의 논리가 경을 읽는 분들을 당황하게 한다. '갑은 갑이 아니므로 그 이름이 갑이니라.'는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이 부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좀 딱딱하고 재미가 없을 것이다. 이 부정의 뼈대는 마치 수학의 공식과 같기 때문이다. <금강경>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는 공덕이 큰 것을 생각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대해야 할 것이다.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이 역설적 부정에는 뗏목의 비유, 정해진 법이 없음, 불가득, 무소득의 자세가 한맥으로 연결되어 있다. 먼저 부정의 형태를 보도록 하자.

수보리야,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단지 그 이름이 티끌일 뿐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세계는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니라.
온갖 티끌에 대해서 여래는 티끌이 아니라고 하니, 단지 그 이름이 티끌일 뿐이니라.
세존이시여, 여래가 사람의 몸이 크다고 하는 말씀은 큰 몸이 아니기 때문에 큰 몸이라고 하신 것이옵니다.
수보리야, 범부에 대해서 여래가 범부가 아니라고 하니 단지 그 이름이 범부일 뿐이니라.

<금강경>에서는 지금 본 것처럼 '무엇은 무엇이 아니므로 그 이름이 무엇이니라.'의 논법이 처음부터 끝까지 많이 널려 있다. 이 형식에서 우리는 의문이 생긴다. 각 부정의 형식마다 세 가지의 같은 단어가 반복되는데 이 세 가지 가운데서 어떤 것이 긍정이고 어떤 것이 부정이냐는 것이다. 가령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므로 반야바라밀이라고 할 경우, 어떤 반야바라밀이 부정되어야 할 반야바라밀이고 어떤 것이 긍정되어야 할 반야바라밀이냐는 것이다.

우리는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에 대해서 살펴본 바 있다. 진제는 언어로 이야기할 수 없는 진리이고 속제는 언어에 의해서 임시방편적으로 진리를 나타내는 진리의 모형을 말한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고 있다면 손가락은 언어로 진리를 가리키는 속제이고 달은 언어에 의해서 가리켜진, 그러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진제이다. 우리가 어떤 것이 부정되어야 할 반야바라밀이고 어떤 것이 긍정되어야 할 반야바라밀이냐고 물을 경우, 어떤 것이 속제의 임시적인 진리이고 어떤 것이 진제의 궁극적인 진리이냐는 질문이 된다.

그렇다면 앞에 말한 세 개의 반야바라밀 중에서, 먼저 일차적으로 제시되는 반야바라밀과 제 이차적으로 부정되는 반야바라밀은 궁극적인 반야바라밀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부처님과 수보리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누차 설명한다. 첫 번째 반야바라밀과 두 번째 반야바라밀은 속제적 또는 방편적인 반야바라밀이 된다. 그렇다면 세 번째의 반야바라밀이 궁극적으로 긍정되어야 할 반야바라밀이 되겠는데 <금강경>은 선뜻 긍정점을 바로 내놓지 않고 있다.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부정됨으로써 진정한 반야바라밀이 될 수가 있다. 부정되는 반야바라밀은 오직 이름만 있을 뿐이다. 실체적인 것에 대해서 집착이 없는 반
야바라밀, 그것이 진정한 반야바라밀이다. 그래서 우리가 세 번째의 반야바라밀을 집어서 이것이 궁극적인 진제의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다시 부정되어야 할 반야바라밀이 된다.

<대품반야경>과<반야심경>을 살피면서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무한부정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반야바라밀을 닦는 절대부정·무한부정에 있어서 사물이나 사물의 공함을 알려주는 가르침이나 사물의 공함을 체득함으로써 얻어지는 어떤 종류의 소득도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기본자세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십이처·십팔계·십이인연·사성제·지혜·소득이 다 부정이다. 이 같은 철저한 부정을 <금강경>에서는 간단한 형식으로 표현한다. 그 간단한 표현이 바로 3단계의 긍정·부정·긍정이다. 일차적으로 어떤 것을 제시하고 그것을 부정하고 그 임시적인 이름만을 말하
는 방법이다. 앞에 예를 들었듯이 반야바라밀이라고 할 경우, 그것은 이미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여기에는 반야바라밀을 닦는 사람이 전제되고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이 실체적인 것으로 잘못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엄연히 있고 또 우리가 목적하는 반야바라밀을 모르는 체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을 계속 부정되는 것이라고 전제해서 '단지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라고 나타내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공의 실천을 통한 육바라밀을 닦는 방법으로 부정의 뒤에 긍정의 꼬리를 달아 주는 것은 중생의 근기에 순응해 주는 <금강경>의 친절이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즉 '만약 모든 사물을 보되 그 겉모습의 상을 지우고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볼 것이니라.'에서 '모양을 지우고 모양을 본다.'는 앞부분은 부정을 나타내고, '그러면 바로 여래를 볼 것이니라.'는 뒷부분은 긍정을 나타낸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基心)'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도 마찬가지로 부정과 긍정의 순환형태이다. '머무는 바 없이' 부분은 부정이요, '마음을 내라.'는 부분은 긍정이 되는 것이다. 부정과 긍정이 이어지지만 뒤의 긍정은 항상 앞의 부정을 전제로 한 잠정적 긍정이다. 앞부분의 부정이 떨어지고 뒤의 것만 홀로 긍정되는 순간 뒤의 것은 공사상에 위배된 것으로 부정되어야 할 것이 된다.

또 이것은 현상의 세계에서 공의 세계로 들어가고 공의 세계에서 현상의 세계로 나오는 형식으로도 볼 수 있다. 반야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형상세계에서 공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공을 전제로 해서 공의 세계에서 현상세계로 나오는 것이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상을 지우고 일체의 사물을 보는 것은 현상세계에서 공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바로 여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공의 세계에서 현상세계로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공의 세계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방식은 <금강경>의 전체적인 구도에 걸쳐서 일관성 있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주의할 점은 긍정이 무조건적 긍정이 아니라 반드시 앞의 부정을 전제할 임시적 또는 잠정적 긍정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부정의 형태이든지 긍정의 형태이든지 육바라밀을 닦는 수행자세로서 지켜야 할 철저한 절대부정의 자세는 유명한 뗏목의 예로 나타난다. <금강경>의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으로 비유한다. 예를 들면 반야바라밀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까지도 공사상을 실천하고 체득하기 위해서 버려야 할 터인데 일반 사물에 대한 집착은 말할 것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또 육바라밀을 통해서 공사상을 실천하는 기본자세로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내포하는 이유를 나타내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有定法名阿 多羅三 三菩提)', 즉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다.'라는 말이다. 만약 나와 너, 내 것과 남의 것, 좋은 과보와 나쁜 과보가 수행자의 마음에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그 수행자는 이미 그것들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공과 무소득의 정신에 보시 바라밀을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선과 악의 개념,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개념이 고정되어 있다면 진정한 무소득·무장애의 자세로 인욕바라밀을 실천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속에 고정적으로 정해진 바가 있어서 그것에 걸리기 때문이다.

무유정법(無有定法)이 명(名)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고정된 법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 최고의 지혜라고 하는 태도는 다시 저 유명한 과거의 마음, 현재의 마음,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생각할 때 과거의 마음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현재의 마음은 일정한 형상이 없기 때문에, 미래의 마음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잡을 수 없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구태여 마음까지 다 들먹이며 해석하지 않더라도 얻을 수 없다는 불가득(不可得)은 바로 무소득과 일치한다. 그리고 무소득은 일정하게 고정된 바가 없음을 깨닫는 것과 일치한다. 불가득과 무소득은 또한 일체법을 뗏목으로 보는 태도와 같다.

 

 

 

 

 

 

 

 

 

 

 

Ⅱ. 반야부 경전 강독

 


1. 대품반야경 봉발품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27권. K-3(5-225). T-223(8-217). 후진(後秦) 시대(A.D. 403∼404) 번역. [역] 구마라집(鳩摩羅什). [범] Pa cavi atisahasrik praj p ramit -s tra. [별] 대반야경(大般若經), 대품경(大品經), 대품반야(大品般若),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이] 광찬경(光讚經),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의 제2회, 방광반야바라밀경(放光般若波羅蜜經).
전체 90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은 이 경의 내용을 순차적으로 해석한 것인데, 대지도론에서는 품(品)의 구성을 크게 넷으로 나누었다. 첫째 사리불품(舍利弗品)은 이 경전의 제1 서품(序品)에서부터 제6 설상품(舌相品)까지를 가리키며, 둘째 실상품(實相品)은 제7 가품(假品)에서 제65 도공품(度空品)까지를 가리킨다. 셋째 방편품(方便品)은 제67 무진품(無盡品)에서 제87 여화품(如化品)까지를 가리키며, 넷째 상제보살품(常啼菩薩品)은 제88 상제품(常啼品)과 제89 법상품(法上品)을 가리킨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둘째 실상품의 부분이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10권과 함께 대승 불교 운동 초기에 성립된 것으로 믿어진다.

 


摩訶般若波羅蜜經奉 品第二

佛告舍利弗.若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能作是功德.是時四天王皆大歡喜意念言.我等當以四 奉上菩薩.如前天王奉先佛 .三十三天乃至他化自在天亦皆歡喜意念言.我等當給侍供養菩薩.減損阿修羅種.增益諸天衆.三千大千國土.四天王天乃至阿迦尼 天皆大歡喜意念言.我等當請是菩薩轉法輪.舍利弗.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增益六波羅蜜時.諸善男子善女人.各各歡喜念言.我等當爲是人作父母妻子親族知識.爾時四天王天乃至阿迦尼 天皆大歡喜.各自念言.我等當作方便.令是菩薩離於 欲.從初發意常作童眞.莫使與色欲共會.若受五欲障生梵天.何況阿 多羅三 三菩提.以是故.舍利弗.菩薩摩訶薩斷 欲出家者.應得阿 多羅三 三菩提非不斷.舍利弗白佛言.世尊.菩薩摩訶薩要當有父母妻子親族知識耶.佛告舍利弗.或有菩薩有父母妻子親族知識.或有菩薩從初發心斷 欲修童眞行.乃至得阿 多羅三 三菩提不犯色欲.或有菩薩方便力故受五欲已.出家得阿 多羅三 三菩提.譬如幻師若幻弟子.善知幻法幻作五欲於中共相娛樂.於汝意云何.是人於此五欲頗有實受不.舍利弗言.不也世尊.佛告舍利弗.菩薩摩訶薩以方便力故化作五欲.於中受樂成就衆生亦復如是.是菩薩摩訶薩不染於欲.種種因緣毁 五欲.欲爲熾然欲爲穢惡.欲爲毁壞欲爲如怨.是故舍利弗.當知菩薩爲衆生故受五欲舍利弗白佛言.菩薩摩訶薩云何應行般若波羅蜜.佛告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見菩薩不見菩薩字.不見般若波羅蜜亦不見我行般若波羅蜜.亦不見我不行般若波羅蜜.何以故.菩薩菩薩字性空.空中無色無受想行識.離色亦無空.離受想行識亦無空.色卽是空.空卽是色.受想行識卽是空.空卽是識.何以故.舍利弗.但有名字故謂爲菩提.但有名字故謂爲菩薩.但有名字故謂爲空.所以者何.諸法實性.無生無滅無垢無淨故.菩薩摩訶薩如是行.亦不見生亦不見滅.亦不見垢亦不見淨.何以故.名字是因緣和合作法.但分別憶想假名說.是故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見一切名字.不見故不著

 


봉발품  제2 (奉鉢品 第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빌다를 향하여 나아갈 때 이렇게 좋은 공덕을 짓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 때에 사천왕이 모두 크게 기뻐하면서 마음 속으로, '우리들은 마땅히 예전의 천왕이 과거 부처님께 발우를 올린 것처럼, 이 보살에게 네 개의 발우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삼십삼천에서 타화자재천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크게 기뻐하면서 마음 속으로, '우리들은 마땅히 보살을 받들어 모시고 공양하여, 아수라의 무리를 줄이고 여러 하늘의 무리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삼천대천세계 국토의 사천왕천에서 아가니타천에 이르기까지 모두 크게 기뻐하면서 마음 속으로, '우리들은 마땅히 이 보살에게 법륜을 굴려 주도록 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리불아, 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향하여 육바라밀다로 늘어났을 때 여러 선남자와 선여인은 각각 환희하고 생각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마땅히 이 사람을 위해서 부모나 처자나 친족이나 좋은 벗이 되어야 한다'라고 한다.
이때 사천왕천에서 아가니타천에 이르기까지 모두 크게 기뻐하면서 각자가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길, '우리들은 마땅히 방편을 써서 이 보살이 음욕을 여의어 초발의(初發意)보살 때부터 항상 동진(童眞)이 되게 하고, 색욕을 범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다섯 가지 애욕을 받아들이면 범천에 태어나는 데에도 장애를 받는데, 어찌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겠느냐. 이러한 까닭에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음욕을 끊고 출가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니, 끊지 않은 장애가 없느니라."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에게는 마땅히 부모와 처자와 친족과 벗이 있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보살에게는 부모와 처자와 친족과 벗이 있고, 어떤 보살은 초발심 때부터 음욕을 끊어 동진의 행을 닦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니 색욕을 범하지 않는다. 또 어떤 보살은 방편의 힘으로 다섯 가지 욕락을 누린 뒤에 출가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니, 마치 환사(幻師)나 그 제자가 환의 법을 잘 알아 다섯 가지 욕락을 환으로 만들어 놓고 그 가운데서 서로 즐기는 것과 같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그 다섯 가지 욕락을 실제로 누리를 것이냐, 아니냐?"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살마하살이 방편의 힘으로 다섯 가지 욕락을 변화로 만들어 놓고, 그 가운데서 즐거움을 누리며 중생의 모습을 성취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이 보살마하살은 즐거움을 누리며 중생의 모습을 성취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이 보살마하살은 욕략에 물듦이 없이 갖가지 인연으로 다섯 가지 애욕거리를 좋은 것이 아니라고 꾸짖는다. 애욕을 사나운 불꽃이라 여기며, 욕락을 원수같이 여긴다. 사리불아, 이러한 이유에서 보살은 오직 중생을 위해서 다섯 가지 욕락을 수용한다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사리불이 부처님게 아뢰었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는 보살을 보지말고 보살이란 글자도 보지말고 반야바라밀다도 보지말고, 내가 반야바라밀다를 향하여 간다고도 보지말고 반야바라밀다도 보지말고, 내가 반야바라밀다를 향하여 간다고도 보지말고, 또한 내가 반야바라밀다를 향하여 가지 않는다고도 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보살도, 보살이란 글자도 그 자성이 공하니, 공성(空性) 가운데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도 없으며, 또한 색을 떠나 공성이 없고, 수. 상. 행. 식을 떠나서는 공성도 없다. 따라서 색이 바로 공성이고 공성이 바로 색이며, 수. 상. 행. 식이 바로 공성이고 공성이 바로 식이다.
왜냐 하면 사리불아, 단지 이름만을 가지고 보리(菩提)라 하기 때문이고, 단지 이름만을 가지고 보살이라 하기 때문이며, 단지 이름만을 가지고 공성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또한 무엇인가. 모든 법의 실제 성품은 생겨난 적도 없고 멸한 적도 없으며, 더러운 적도 없고 깨끗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행하되, 생한 것도 보지 않고 멸한 것도 보지 않으며, 더러움도 보지 않고 깨끗함도 보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름이란 것은 인연의 화합으로 지어진 것이어서, 단지 분별과 생각으로 짐짓 이름을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향하여 갈 때 모든 이름을 보지 않고, 또한 보지 않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2. 금강경 경전 강독


금강경(金剛經)

 

1. 이 金剛經 자료는 昭明太子의 32分 科判을 기준으로 하여, 우리말로 된 科目을 붙이고, 각 品별로 다음의 순서로 정리하였다.
  1) 산스끄리뜨(Sanskrit, 梵語) 원전 [로마자표기]
      Vajracchedik Praj  p ramit S tra
  2) 산스끄리트 원전번역 : 각묵스님(불광출판사)
  3) 唐 三藏法師 玄  譯  《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
  4) Edward Conze 英譯   The Diamond Sutra
  5) 鳩摩羅什 譯 懸吐 讀音  《金剛般若波羅蜜多經》
  6) 우리말 옮김(李淸譚)


2. 이 자료의 저본으로 삼은 原書는 다음과 같다.
 산스끄리뜨 原典과  Edward Conze 英譯本 :  Conze, E., Buddhist
      Wisdom Books (George Allen & Unwin, London, 1958)
 玄  譯本 : 《大正新修大藏經》제7권 般若部三, pp.980-985
 鳩摩羅什 譯 懸吐本 :  無比 감수, 승가대학원 편,《金剛經全書》
      (서울: 민족사, 1997)
 우리말 옮김 :  李淸潭강의,《金剛經大講座》(서울: 보성문화사,1982)

 

하나. 법회가 열리기까지


Vajracchedik Praj  p ramit S tra

NAMO BHAGAVATYAI  RYAPRAJ  P RAMIT YAI.

1. eva  may   rutam ekasmin samaye. Bhagav    r vasty   viharati sma Jetavane'n thapi  adasya- r me mahat  bhik u-sa ghena s rddham ardhatrayoda abhir bhik u- atai  sa bahulai  ca bodhisattvair mah sattvai . atha khalu Bhagav n p rv h a-k la-samaye niv  ya p trac varam    ya  r vast   mah -nagar   pi   ya pr vik at. atha khalu Bhagava   r vast   mah -nagar   pi d ya caritv  k ta-bhakta-k tya  pa c dbhakta-pi  ap ta-pratikr nta  p tra-c vara  prati  mya p dau prak alya nya  dat praj apta eva- sane parya kam  bhujya  jum k ya  pra idh ya, pratimukh   sm tim upasth pya. atha khalu sambahul  bhik avo yena Bhagav  s tenopasamkraman upasamkramya Bhagavata  p dau  irobhir abhivandya Bhagavanta  tri -pradak i  k tyaik nte nya  dan.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슈라와스띠의 제따 숲 급고독원에 많은 비구승가와 함께 머무셨나니, 1250인의 비구들과 많은 보살 마하살들과 같이.
그 때 참으로 세존께서는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하시고 가사와 바루를 수하시고 슈라와스띠 큰 도시로 탁발을 위해서 들어가셨다. 탁발을 마치신 후 공양을 드셨다. 공양 후에는 탁발로부터 돌아오셔서 바루와 가사를 제자리에 내려놓으시고 두 발을 씻고 미리 준비된 자리에 않으셨다. 가부좌를 결하고, 곧게 몸을 세우고, 전면(前面)에 마음 챙김을 확립하시고서.
그 때 많은 비구들이 세존께 나아갔다. 나아가서는 세존의 두 발에 머리를 대고 인사를 드리고서 세존을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서 한 쪽 곁에 않았다.

 


[玄 ]
大般若波羅蜜多經第五白七十七

三藏法師玄 奉   詔譯

    第九能斷金剛分
如是我聞. 一時薄伽梵. 在室羅筏. 住誓多林給孤獨園. 與大苾芻衆千二百五十人俱. 爾時世尊於日初分. 整理裳服執持衣鉢. 入室羅筏大城乞食. 時薄伽梵於其城中行乞食已出還本處. 飯食訖收衣鉢洗足已. 於食後時 敷如常座結跏趺坐. 端身正願住對面念. 時諸苾芻來詣佛所. 到已頂禮世尊雙足. 右 三 退坐一面. 具壽善現亦於如是衆會中坐.

 

The Diamond Sutra
translated by Edward Conz

Homage to the Perfection of Wisdom,
the Lovely, the Holy !

1.  ITRODUCTION

1a.  The Convocation of the Assembly
l. Thus have I heard at one time. The Lord dwelt at Sr vast , in the Jeta Grove, in the garden of An thapindika, together with a large gathering of monks, consisting of 1,250 monks, and with many Bodhisattvas, great beings. Early in the morning the Lord dressed, put on his cloak, took his bowl, and entered the great city of Sr vast  to collect alms. When he had eaten and returned from his round, the Lord put away his bowl and cloak, washed his feet, and sat down on the seat arranged for him, crossing his legs, holding his body upright, and mindfully fixing his attention in front of him. Then many monks approached to where the Lord was, saluted his feet with their heads, thrice walked round him to the right, and sat down on one side.

 


[鳩摩羅什]
金剛般若波羅蜜經
금 강 반 야 바 라 밀 경

姚秦天竺三藏鳩摩羅什譯


 法會因由分第一

如是我聞하사오니 一時에 佛이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하사 與大比丘衆千二百
五十人으로 俱러시니 爾時에 世尊이 食時에 著衣持鉢하시고 入舍衛大城하사 乞食하실새 於其城中에 次第乞已하고 還至本處하사 飯食訖하시고 收衣鉢하시며 洗足已하시고 敷座而坐하시다


1. 법회가 열리기까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이란 절에서 천 이백 오십인과 함께 계시었다.
그 때 세존께서는 진지 잡수실 때가 되어, 가사 입으시고 바리 들으시고 사위 서울에 들어가시와 성 안에서 차례대로 비시었다. 그리고 절로 돌아오셔서 진지 잡수시고는 가사와 바리를 거두시고 발 씻으신 뒤 자리 펴고 앉으시었다.
둘. 수부띠가 가르침을 청하다


2. tena khalu puna  samayena- yu m n Subh tis tasy m eva par adi samnipatito'bh t sa ni a  a . atha khalv  yu m n SUBH TIR utth ya- san d, ek  sam uttar sa ga  k tv  dak i a  j nu-ma  ala  p thivy   prati  h pya, yena Bhagav  s tena-a jali  pra amya Bhagavantam etad avocat:
  carya  Bhagavan parama-  carya  Sugata, y vad eva Tath gatena-arhat  samyaksambuddhena bodhisattv  mah sattv  anuparig h t   parame a-anugrahe a.   carya  Bhagavan y vad eva Tath gatena-arhat  samyaksambuddhena bodhisattv  mah sattv   par ndit   paramay  par ndanay . tat katha  Bhagavan bodhisattva-y na-samprasthitena kulaputre a v  kuladuhitr  v  sth tavya  katha  pratipattavya  katha  citta  pragrah tavyam?
evam ukte BHAGAV N  yu manta  Subh tim etad avocat: s dhu s dhu Subh te, evam etad yath  vadasi. anupa-rig h t s Tath gatena bodhisattv  mah sattv   parame a-anugrahe a, par ndit s Tath gatena bodhisattv  mah -sattv   paramay  par ndanay . tena hi Subh te    u s dhu ca su  hu ca manasikuru, bh  i ye 'ha  te yath  bodhisattva-y na-samprasthitena sth tavya  yath  prati-pattavya  yath  citta  pragrah tavyam. eva  Bhagavann ity  yu m n Subh tir Bhagavata  pratya rau  t.


그때 수보리 존자가 그 곁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던 수보리 존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쪽 어깨로만 상의를 입고서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서 세존을 향해서 합장하여 인사드리고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최고로 경이롭습니다. 선서시여. 여래 아라한 정등각에 의해서 보살 마하살들은 최상의 은총으로 감싸여 있습니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 아라한 정등각에 의해서 보살 마하살들은 최상의 부촉으로 부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선남자나 선여인은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조복받아야 합니까?"
이와 같이 여쭈었을 때 세존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재 선재라 수보리여, 참으로 그대가 말한 바와 같다. 여래 아라한 정등각에 의해서 보살 마하살들은 최상의 은총으로 감싸여 있다. 여래 아라한 정등각에 의해서 보살 마하살들은 최상의 부촉으로 부촉되어 있다.
그러니 참으로 수보리여, 잘 들어라. 그리고 마음에 잘 새기라. [이제]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선남자나 선여인이 어떻게 머물러야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조복받아야 하는지를 나는 그대에게 설하리라."
"그렇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수보리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玄 ] 爾時衆中具壽善現從座而起偏袒一肩. 右膝著地合掌恭敬 而白佛言. 希有世尊乃至如來應正等覺. 能以最勝攝受. 攝受諸菩薩摩訶薩乃至如來應正等覺. 能以最勝付囑. 付囑諸菩薩摩訶薩. 世尊. 諸有發趣菩薩乘者. 應云何住. 云何修行. 云何攝伏其心. 作是語已.
爾時世尊告具壽善現曰. 善哉善哉. 善現. 如是如是. 如汝所說. 乃至如來應正等覺. 能以最勝攝受. 攝受諸菩薩摩訶薩乃至如來應正等覺. 能以最勝付囑. 付囑諸菩薩摩訶薩. 是故善現. 汝應諦聽 極善作意. 吾當爲汝分別解說. 諸有發趣菩薩乘者. 應如是住. 如是修行. 如是攝伏其心. 具壽善現白佛言. 如是如是世尊. 願樂欲聞.


1b.  Subhuti makes a request
2. At that time the Venerable Subhuti came to that assembly, and sat down. Then he rose from his seat, put his upper robe over one shoulder, placed his right knee on the ground, bent forth his folded hands towards the Lord, and said to the Lord: 'It is wonderful O Lord, it is exceedingly wonderful, O Well- Gone, how much the Bodhisattvas, the great beings, have been helped with the greatest help by the Tathagata, the Arhat, the Fully Enlightened One. It is wonderful, O Lord, how much the Bodhisattvas, the great beings, have been favoured with the highest favour by the Tathagata, the Arhat, the Fully Enlightened One. How then, O Lord, should a son or daughter of good family, who have set out in the Bodhisattva- vehicle, stand, how control their thoughts?'
  After these words the Lord said to the Venerable Subhuti: 'Well said, well said, Subhuti! So it is, Subhuti, so it is, as you say! The Tathagata, Subhuti, has helped the Bodhisattvas, the great beings with the greatest help, and he has favoured them with the highest favour. Therefore, Subhuti, listen well, and attentively! I will teach you how those who have set out in the Bodhisattva- vehicle should stand, how progress, how control their thoughts.' 'So be it, O Load', the Venerable Subhuti replied to the Lord.


[鳩摩羅什]
 善現起請分第二

時에 長老須菩提가 在大衆中이라가 卽從座起하사 偏袒右肩하시며 右膝著地하시고
合掌恭敬하사 而白佛言하사대 希有世尊하 如來가 善護念諸菩薩하시며 善付囑諸菩薩하시나니 世尊하 善男子善女人이 發阿 多羅三 三菩提心하니는 應云何住며 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佛言하사대 善哉善哉라 須菩提야 如汝所說하야 如來가 善護念諸菩薩하며 善付囑諸菩薩하노니 汝今諦聽하라 當爲汝說호리라 善男子善女人이 發阿 多羅三 三菩提心하니는 應如是住하며 如是降伏其心이니라 唯然世尊하 願樂欲聞하노이다

 

2. 수부띠가 가르침을 청하다
그때 대중 가운데 계시던 장로 수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를 벗어 메고 오른 무릅을 땅에 꿇고 합장하여 공경하며 부처님께 사뢰었다.
"거룩하시옵니다. 세존이시어,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잘 당부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욕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어떻게 그 마음을 지녀야 하오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겠아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갸륵하고 갸륵하도다. 수보리야, 너의 말과 같이 여래가 모든 보살을 잘 보살피고 잘 당부하느리라. 너희가 이제 자세히 들으라. 너를 위하여 말해 주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욕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지니고 이와 같이 마음을 지니고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 것이니라."
"예, 세존이시여. 기꺼이 듣겠습니다."

 

 


셋. "큰 수레"의 바른 뜻


3. BHAGAV N etad avocat: iha Subh te bodhisattva-y na-samprasthitena eva  cittam utp dayitavyam: y vanta  Subh te sattv   sattvadh tau sattva-samgrahe a sa g h t  a  a-j  v  jar yu-j  v  sa sveda-j  vaupap duk  v , r pi o v -ar pi o v , sa j ino v -asa j ino v  naiva sa j ino na-asa j ino v  y van ka cit sattvadh tu-praj apya-m na  praj apyate, te ca may  sarve 'nupadhi e e nirv  a-dh tau parinirv payitavy  . evam aparim  an api sattv n parinirv pya na ka cit sattva  parinirv pito bhavati. tat kasya heto ? sacet Subh te bodhisattvasya sattva-sa j   pravarteta, na sa bodhisattva iti vaktavya . tat kasya heto ? na sa Subh te bodhisattvo vaktavyo yasya - tma-sa j   pravarteta, sattva-sa j   v  jiva-sa j   v  pudgala-sa j   v  pravarteta.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여기 [이 세상에서]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는 이렇게 마음을 내어야(發心) 한다. 수보리여, 중생들은 중생의 세계에서 중생이라는 무리로 무리지어져 있나니, 알에서 태어나는 것, 태에서 태어나는 것,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 화현하여 태어나는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인식작용이 있는 것, 인식작용이 없는 것, 인식작용이 있는 것도 인식작용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그리고 다시 [다른] 어떤 중생의 세계가 더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들을 모두 무여 열반의 경지로 완전히 열반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어떠한 중생도 완전히 열반에 든 자는 없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만일 수보리여, 보살에게 중생이라는 산냐가 생긴다면 그는 보살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자아(自我)라는 산냐가 생기거나 중생이라는 산냐나 영혼이라는 산냐나 개아(個我)라는 산냐가 생긴자는 보살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玄 ] 佛言善現. 諸有發趣菩薩乘者. 應當發趣如是之心. 所有諸有情. 有情攝所攝. 若卵生若胎生. 若濕生若化生. 若有色若無色. 若有想若無想. 若非有想若非無想. 乃至有情界. 施設所施設. 如是一切. 我當皆令於無餘依妙涅槃界而般涅槃. 雖度如是無量有情令滅度已. 而無有情得滅度者. 何以故. 善現. 若諸菩薩摩訶薩有情想轉不應說名菩薩摩訶薩. 所以者何. 善現. 若諸菩薩摩訶薩不應說言有情想轉. 如是命者想. 士夫想. 補特伽羅想. 意生想. 摩納婆想. 作者想. 受者想轉當知亦爾. 何以故. 善現. 無有少法名爲發趣菩薩乘者.


2.  THE BODHISATTVA'S CAREER

2a.  The Vow of a Bodhisattva
3. The Load said: Here, Subhuti, someone who has set out in the vehicle of a Bodhisattva should produce a thought in this manner: 'As many beings as there are in the universe of beings, comprehended under the term "beings"― egg- born, born from a womb, moisture- born, or miraculously born; with or without form; with perception, without perception, and with neither perception nor non- perception,― as far as any conceivable form of beings is conceived: all these I must lead to Nirvana, into that Realm of Nirvana which leaves nothing behind. And yet, although innumerable beings have thus been led to Nirvana.' And why? If in a Bodhisattva the notion of a 'being' should take place, he could not be called a 'Bodhi- being', 'And why? He is not be called a Bodhi- being in whom the notion of a self or of a being should take place, or the notion of a living soul or of a person.'


[鳩摩羅什]
 大乘正宗分第三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降伏其心이니 所有一切衆生之類
인 若卵生과 若胎生과 若濕生과 若化生과 若有色과 若無色과 若有想과 若無想
과 若非有想非無想을 我皆令入無餘涅槃하야 而滅度之호리니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호대  實無衆生得滅度者니라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면 卽非菩薩이니라

 

3. "큰 수레"의 바른 뜻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시킬 것이다. 무릇 일체 중생의 종류인 <알로 생긴 것>·<태로 생긴 것>·<습기로 생긴 것>·<화하여 생긴 것>·<형상이 있는 것>·<형상이 없는 것>·<생각 있는 것>·<생각 없는 것>·<생각 있는 것도 생각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남김없이 다 부처되는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하여 이와같이 한량없이 많은 중생을 다 제도하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된 바 없느니라. 왜냐 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산다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넷. 머무름이 없이 실천하라


4. api tu khalu puna  Subh te na bodhisattvena vastu-prati  hitena d na  d tavyam, na kvacit prati  hitena d na  d tavyam, na r pa-prati  hitena d na  d tavyam, na  abda-gandha-rasa-spra  avya-dharme u prati  hitena d na  d tavyam. eva  hi Subh te bodhisattvena mah -sattvena d na  d tavya  yath  na nimitta-sa j  y m api pratiti  het. tat kasya heto ? ya  Subh te'prati  hito d na  dad ti, tasya Subh te pu ya-skandhasya na sukara  pram  am udgrah tum. tat ki  manyase Subh te sukara  p rvasy   di y  k  asya pram  am udgrah tum?
SUBH TIR  ha: no h da  Bhagav n.
BHAGAV N  ha: evam dak i a-pa cima-uttara- svadha- rdhva  digvidik u samant d da asu dik u sukaram  k  asya pram  am udgrah tum?
SUBH TIR  ha: no h da  Bhagavan.
BHAGAV N  ha: evam eva Subh te yo bodhisattvo' prati  hito d na  dad ti, tasya Subh te pu ya-skandhasya na sukara  pram  am udgrah tum. eva  hi Subh te bodhisattva-y na-samprasthitena d na  d tavya  yath  na nimitta-sa j  y m api pratiti  het.


"그런데 다시 수보리여, 참으로 보살은 경계에 머물러서 보시를 해서는 안 된다. 그 무엇에 머물러서 보시를 해서는 안 된다. 형상에 머물러서 보시를 해서는 안 되며 소리, 향기,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머물러서 보시를 해서도 안 된다. 이와 같이 참으로 수보리여, 보살 마하살은 니밋따(겉모양) 산냐에도 역시 머무르지 않는 그러한 보시를 해야 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하는 자, 그의 공덕의 무더기는 쉽게 그 양을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동쪽 방향의 허공의 양을 쉽게 잴 수가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와 같이 동, 남, 서, 북, 아래, 위의 방위와 간방위들 - 이들 모든 열 가지 방향에서 허공의 양을 쉽게 잴 수가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와 같이 수보리여, 보살이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하는 자, 그의 공덕의 무더기는 쉽게 그 양을 잴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수보리여,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는 니밋따(겉모양) 산냐에도 역시 머무르지 않는 그러한 보시를 해야 한다."


[玄 ] 復次善現. 若菩薩摩訶薩不住於事應行布施. 都無所住應行布施. 不住於色應行布施. 不住聲香味觸法應行布施. 善現. 如是菩薩摩訶薩如不住相想應行布施. 何以故. 善現. 若菩薩摩訶薩都無所住而行布施. 其福德聚不可取量.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東方虛空可取量不. 善現答言. 不也世尊. 善現如是南西北方四維上下. 周遍十方一切世界虛空可取量不. 善現答言. 不也世尊. 佛言善現. 如是如是. 若菩薩摩訶薩都無所住而行布施. 其福德聚不可取量亦復如是. 善現. 菩薩如是如不住相想應行布施.


2b.  The Practice of the Perfections
4. Moreover, Subhuti, a Bodhisattva who gives a gift should not be supported by a thing, nor should he be supported anywhere. When he gives gifts he should not be supported by sight- objects, nor by sounds, smells, tastes, touchables, or mind- objects. For, Subhuti, the Bodhisattva, the great being should give gifts in such a way that he is not supported by the notion of a sign. And why? Because the heap of merit of that Bodhi- being, who unsupported gives a gift, is not easy to measure. What do you think, Subhuti, is the extent of space in the East easy to measure?― Subhuti replied: No indeed, O Lord.― The Load asked: In like manner, is it easy to measure the extent of space in the South, West or North, downwards, upwards, in the intermediate directions, in all the ten directions all round?― Subhuti replied: No indeed, O Load.― The Lord said: Even so the heap of merit of that Bodhi- being who unsupported gives a gift is not easy to measure. That is why, Subhuti, those who have set out in the Bodhisattva- vehicle, should give gifts without being supported by the notion of a sign.


[鳩摩羅什]
 妙行無住分第四

復次須菩提야 菩薩이 於法에 應無所住하야 行於布施니 所謂不住色布施며 不住聲香味觸法布施니라 須菩提야 菩薩이 應如是布施하야 不住於相이니 何以故오 若菩薩이 不住相布施하면 其富德을 不可思量이니라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東方虛空을 可思量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須菩提야 南西北方과 四維上下虛空을 可思量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須菩提야 菩薩의 無住相布施하는 福德도 亦復如是하야 不可思量이니라 須菩提야 菩薩이 但應如所敎住니라

 

4. 머무름이 없이 실천하라
"또 수보리야, 보살은 온갖 법에 끄달리지 말고 보시를 할 것이니, 빛이나 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하며,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이나 이치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지만 현상에 머물지 말 것이니 왜 그러냐 하면 보살이 만일 현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생각으로 다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쪽·서쪽·북쪽과 네 간방과 아래위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가르친 그대로 머물지니라."

 

 

다섯. 이치 그 차체로서 참답게 보라


5. tat ki  manyase Subh te lak a a-sampad  Tath gato dra  avya ?
SUBH TIR  ha: no h da  Bhagavan, na lak a a-sampad  Tath gato dra  avya . tat kasya heto ? y  s  Bhagavan lak a a-sampat Tath gatena bh  ita saiva-alak a a-sampat. Evam ukte BHAGAV N  yu manta  Subh tim etad avocat: y vat Subh te lak a a-sampat t van m   , y vad alak a a-sampat t van na m  eti hi lak a a-alak a atas Tath gato dr   avya .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32가지 대인]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봐야 하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32가지 대인]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32가지 대인]상을 여래께서 설하신 것, 그것은 [32가지 대인]상을 구족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대답하자 세존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32가지 대인]상을 구족[했으므로 여래라고 보면] 그것은 거짓이다. [32가지 대인]상을 구족[했으므로 여래라고 보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참으로 이와 같이 [32가지 대인]상과 [32가지 대인]상이 아니라는 [두 측면에서] 여래를 보아야 한다."


[玄 ]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可以諸相具足觀如來不. 善現答言. 不也世尊. 不應以諸相具足觀於如來. 何以故. 如來說諸相具足卽非諸相具足. 說是語已佛復告具壽善現言. 善現. 乃至諸相具足皆是虛妄. 乃至非相具足皆非虛妄. 如是以相非相應觀如來. 說是語已.


2c.  Buddhahood and the thirty-two Marks
5. The Lord continued: 'What do you think, Subhuti, can the Tathagata be seen by the possession of his marks?'― Subhuti replied: 'No indeed, O Load. And why? What has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as the possession of marks, that is truly a no- possession of no- marks.' The Load said: 'Wherever there is possession of marks, there is fraud, wherever there is no- possession of no- marks there is no fraud. Hence the Tathagata is to be seen from no- marks as marks.'


[鳩摩羅什]
 如理實見分第五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身相으로 見如來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不可以身相
으로 得見如來니 何以故오 如來所說身相은 卽非身相이니이다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凡所有相이 皆是虛妄이니 若見諸相非相하면 卽見如來니라

 

5. 이치 그 차체로서 참답게 보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육신의 몸매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육신의 몸매로 여래를 볼 수 없사옵니다. 왜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육신은 곧 육신이 아닌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있는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현상이 진실상이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여섯. 그토록 깊은 법을 누가 바로 믿으랴


6. Evam ukte  yu m n SUBH TIR Bhagavantam etad avocat: asti Bhagavan kecit sattv  bhavi yanty an gate' dhvani pa cime k le pa cime samaye pa cim y   pa ca- aty   sad-dharma-vipralopa-k le vartam ne, ya ime v eva r pe u s tr nta-pade u bh  yam  e u bh ta-sa j  m utp dayi yanti?
BHAGAV N  ha: m  Subh te tvam eva  voca , asti kecit sattv  bhavi yanty an gate' dhvani pa cime k le pa cime samaye pa cim y   pa ca aty   sad-dharma-vipralope vartam ne, ya ime v eva r pe u s tr ntapade u bh  yam  e u bh ta-sa j  m utp dayi yanti. api tu khalu puna  Subh te bhavi yanty an gate' dhvani bodhisattv  mah sattv   pa cime k le pa cime samaye pa cim y   pa ca- aty   sad-dharma-vipralope vartam ne gu avanta    lavanta  praj avanta  ca bhavi yanti, ya ime v eva r pe u s tr nta-pade u bh  yam  e u bh tasa j am utp dayi yanti. na khalu punas te Subh te bodhisattv  mah sattv  eka-buddha-paryup sit  bhavi yanti, na-eka-buddha-avaropita-ku ala-m l  bhavi yanti, api tu khalu puna  Subh te aneka-buddha- atasahasra-paryup sit  aneka-buddha- atasahasra-avaropita-ku ala-m l s te bodhisattv  mah sattv  bhavi yanti, ya ime v eva r pe u s tr nata-pade u bh  yam  e v eka-citta-pras dam api pratilapsyante. j  t s te Subh te Tath gatena buddha-j  nena, d    s te Subh te Tath gatena buddha-cak u  , buddh s te Subh te Tath gatena. sarve te Subh te' prameyam asamkhyeya  pu yaskandha  prasavi yanti pratigrah  yanti. tat kasya heto ? na hi Subh te te    bodhisattv n   mah sattv n m  tma-sa j   pravartate na sattva-sa j   na j va-sa j   na pudgala-sa j   pravartate. na-api te    Subh te bodhisattv n   mah sattv n   dharma-sa j   pravartate, eva  na-adharma-sa j  . na-api te    Subh te sa j   na-asa j   pravartate. tat kasya heto ? sacet Subh te te    bodhisattv n   mah sattv n   dharma-sa j   pravarteta, sa eva te     tma-gr ho bhavet, sattva-gr ho j va-gr ha  pudgala-gr ho bhavet. saced a-dharma-sa j   pravarteta, sa eva te     tma-gr ho bhavet, sattva-gr ho j va-gr ha  pudgala-gr ha iti. tat kasya heto ? na khalu puna  Subh te bodhisattvena mah sattvena dharma udgrah tavyo na-adharma . tasm d iya  Tath gatena sandh ya v g bh  it : kolopama  dharma-pary yam  j nadbhir dharm  eva prah tavy   pr g eva-adharm  iti.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수보리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들이 있어서 미래세의 후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할 시기가 되었을 때에 이런 경전의 말씀들이 설해지면 참되다는 산냐를 일으키기나 하겠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대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 어떤 중생들이 있어서 미래세의 후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할 시기가 되었을 때에 이런 경전이 말씀들이 설해지면 참되다는 산냐를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미래세에 보살 마하살들이 있어서 미래세의 후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할 시기가 되었을 때에 [그들은] 공덕을 쌓고 계를 지니고 지혜가 있어서 미래세의 후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할 시기가 되었을 때에 [그들은]공덕을 쌓고 계를 지니고 지혜가 있어서 이런 경전의 말씀들이 설해지면 참되다는 산냐를 일으킬 것이다.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그들 보살 마하살들은 한 부처님만을 섬기고 한 부처님 밑에서만 선근을 심은 자가 될 뿐만 아니라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그들은] 몇 십만의 부처님을 섬기고 몇 십만의 부처님 밑에서선근을 심은 그런 보살 마하살들이 되리니, 이런 형태의 경전의 말씀들이 설해질 때에는 한 마음으로 청정한 믿음을 역시 얻게 될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그들을 안다. 수보리여, 여래는 부처의 눈으로써 그들을 본다. 수보리여, 여래는 그들을 깨달아 [안다]. 그들 모두는 수보리여,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쌓고 얻게 될 것이다[라고].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그들 보살 마하살들에게는 자아라는 산냐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이라는 산냐, 영혼이라는 산냐, 개아라는 산냐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또한 그들 보살 마하살들에게는 법이라는 산냐도 법이 아니라는 산냐도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역시 수보리여, 산냐도 산냐 아님도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무슨 이유에서인가? 만일 수보리여, 그들 보살 마하살들에게 법이라는 산냐가 생겨난다면 그것은 그들의 자아에 대한 집착이며, 중생에 대한 집착이요, 영혼에 대한 집착이요, 개아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 아니라는 산냐가 생겨난다면 그것도 단지 자아에 대한 집착일 뿐이며, 중생에 대한 집착이요, 영혼에 대한 집착이요, 개아에 대한 집착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무슨 이유에서인가?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법을 국집해서도 안 되고 법이 아닌 것을 [국집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두고서 여래는 설하였다. '법문이란 뗏목과 같은 것이라도 깊게 아는 자들은 법들도 반드시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임에랴'라고."


[玄 ] 具壽善現復白佛言. 世尊. 頗有有情. 於當來世後時後分後五百歲正法將滅時分轉時. 聞說如是色經典句生實想不. 佛告善現. 勿作是說. 頗有有情於當來世後時後分後五百歲. 正法將滅時分轉時. 聞說如是色經典句生實想不. 然復善現. 有菩薩摩訶薩於當來世後時後分後五百歲. 正法將滅時分轉時. 具足尸羅具德具慧. 復次善現. 彼菩薩摩訶薩非於一佛所承事供養. 非於一佛所種諸善根. 然復善現. 彼菩薩摩訶薩於其非一百千佛所承事供養. 於其非一百千佛所種諸善根乃能聞說如是色經典句. 當得一淨信心. 善現. 如來以其佛智悉已知彼. 如來以其佛眼悉已見彼. 善現. 如來悉已覺彼. 一切有情當生無量無數福聚. 當攝無量無數福聚. 何以故. 善現. 彼菩薩摩訶薩. 無我想轉無有情想. 無命者想. 無士夫想. 無補特伽羅想. 無意生想. 無摩納婆想. 無作者想. 無受者想轉. 善現. 彼菩薩摩訶薩無法想轉無非法想轉. 無想轉亦無非想轉所以者何. 善現. 若菩薩摩訶薩有法想轉. 彼卽應有我執. 有情執. 命者執. 補特伽羅等執. 若有非法想轉. 彼亦應有我執. 有情執. 命者執. 補特伽羅等執. 何以故. 善現. 不應取法不應取非法. 是故如來密意而說筏喩法門. 諸有智者法尙應斷何況非法.


2d.  Buddhahood and the Dharmabody
   2da.  The Dharmabody as the body of teachings
6. Subhuti asked: Will there be any beings in the future period, in the last time, in the last epoch, in the last 500 years, at the time of the collapse of the good doctrine who, when these words of the Sutra are being taught, will understand their truth?― The Lord replied: Do not speak thus, Subhuti! Yes, even then there will be such beings who, when these words of the Sutra are being taught, will understand their truth. For even at that time, Subhuti, there will be Bodhisattvas who are gifted with good conduct, gifted with virtuous qualities, gifted with wisdom, and who, when these words of the Sutra are being taught, will understand their truth. And these Bodhisattvas, Subhuti, will not be such as have honoured only one single Buddha, nor such as have planted their roots of merit under one single Buddha only. On the contrary, Subhuti, those Bodhisattvas who, when these words of the Sutra are being taught, will find even one single thought of serene faith, will be such as have honoured many hundreds of thousands of Buddhas, such as have planted their roots of merit under many hundreds of thousands of Buddhas. Known they are, Subhuti, to the Tathagata through his Buddha- cognition, seen they are, Subhuti, by the Tathagata with his Buddha- eye, fully known they are, Subhuti, to the Tathagata. And they all, Subhuti, will beget and acquire an immeasurable and incalculable heap of merit.
  And why? Because, Subhuti, in these Bodhisattvas ⑴ no perception of a self takes place, ⑵ no perception of a being, ⑶ no perception of a soul, ⑷ no perception of a person. Nor do these Bodhisattvas have ⑸ a perception of a dharma, ⑹ a perception of a no- dharma. ⑺ No perception or ⑻ non- perception takes place in them.
  And why? If, Subhuti, these Bodhisattvas should have a perception of either a dharma, or a no- dharma, they would thereby seize on a self, on a being, on a soul, on a person. And why? Because a Bodhisattva should not seize on either a dharma or a no- dharma. Therefore this saying has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with a hidden meaning: 'By those who know the discourse on dharma as like unto a raft, dharmas should be forsaken, still more so no- dharmas.'

 

[鳩摩羅什]
 正信希有分第六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頗有衆生이 得聞如是言說章句하사옵고 生實信不
잇가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莫作是說하라 如來滅後後五百歲에 有持戒修福者가 於此章句에 能生信心하야 以此爲實하리니 當知是人은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에 而種善根이라 已於無量千萬佛所에 種諸善根하야 聞是章句하고 乃至一念生淨信者니라 須菩提야 如來가 悉知悉見하노니 是諸衆生이 得如是無量福德이니라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며 無法相하며 亦無非法相이니라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若心取相하면 則爲著我人衆生壽者니 何以故오 若取法相이라도 卽著我人衆生壽者며 若取非法相이라도 卽著我人衆生壽者니라 是故로 不應取法이며 不應取非法이니라 以是義故로 如來가  常說호대 汝等比丘가 知我說法을 如筏喩者라하노니 法尙應捨어든 何況非法가


6. 그토록 깊은 법을 누가 바로 믿으랴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어, 자못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실다운 신심을 낼 수 있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부처님이 가신 뒤 후 오백세에 계를 받아 지니고 복을 닦는 수행자가 있어서 이 같은 말과 글귀에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기리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이나 셋·넷·다섯 부처님에게만 착한 마음의 바탕을 튼튼히 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 없는 천 만 부처님 계신 곳에서 착한 마음의 바탕을 튼튼히 한 사람이니,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거룩한 믿음을 내느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이 한량 없는 복덕 짓는 것을 다 아시고 보시느라.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은 다시는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산다는 생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생각>·<그릇된 법이란 생각>도 없기 때문이니라. 왜냐 하면, 이 모든 중생이 만일 마음에 지키는 것이 있으면 곧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산다는 생각>에 걸리기 때문이며, 만일 <법이란 생각>을 지켜도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산다는 생각>에 걸리며 <그릇된 법>이라는 생각을 지켜도 곧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산다는 생각>에 걸리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정법을 지키지도 말고 그릇된 법을 지키지도 말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항상 말하기를 '너희들 비구는 알라. 내가 말한 바 법은 뗏목과 같으니 정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그릇된 법이야 말할 게 있겠느냐' 하였느니라."

 

 


일곱. 얻은 것도, 말씀하신 것도 없나니


7. punar apara  BHAGAV N  yu manta  Subh tim etad avocat: tat ki  manyase Subh te, asti sa ka cid dharmo yas Tath gatena-anuttar  samyaksambodhir ity abhisambuddha , ka cid v  dharmas Tath gatena de ita ?
evam ukta  yu m n SUBH TIR Bhagavantam etad avocat: yath -aham Bhagavan Bhagavato bh  itasya-artham  j n mi, na-asti sa ka cid dharmo yas Tath gatena-anuttar  samyak-sambodhir ity abhisambuddha , na-asti dharmo yas Tath gatena de ita . tat kasya heto ? yo'sau Tath gatena dharmo'bhisambuddho de ito v , agr hya  so'nabhilapya , na sa dharmo na-adharma . tat kasya heto ? asa sk ta-prabh vit  hy  rya-pudgal  . tat kasya heto ? asa sk ta-prabh vit  hy  rya-pudgal  .

다시 또 세존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를 어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여래가 '[이것이] 무상 정등각이다'라고 철저히 깨달았다 할 그 어떤 법이 있는가? 혹은 여래는 어떤 법을 가르치기는 했는가?"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 때 수보리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이 설하신 뜻을 깊이 아는 바로는 여래가 '[이것이] 무상 정등각이다'라고 철저히 깨달았다 할 그 어떤 법도 없으며 여래는 그러한 어떤 법을 설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여래께서 철저히 깨달으셨거나 설하신 그 법은 잡을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법도 아니요, 법이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시]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참으로 성자들은 무위(無爲)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玄 ] 佛復告具壽善現言. 善現. 於汝意云何. 頗有少法如來應正等覺證得阿 多羅三 三菩提耶. 頗有少法如來應正等覺是所說耶. 善現答言. 世尊. 如我解佛所說義者. 無有少法如來應正等覺證得阿 多羅三 三菩提. 亦無有少法是如來應正等覺所說. 何以故. 世尊. 如來應正等覺. 所證所說所思惟法. 皆不可取不可宣說非法非非法. 何以故. 以諸賢聖補特伽羅皆是無爲之所顯故.


   2db.  The Dharmabody as the result of Gnosis
7. The Lord asked: What do you think, Subhuti, is there any dharma which the Tathagata has fully known as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 or is there any dharma which the Tathagata has demonstrated?― Subhuti replied: No, not as I understand what the Lord has said. And why? This dharma which the Tathagata has fully known or demonstrated― it cannot be grasped, it cannot be talked about, it is neither a dharma nor a no- dharma. And why? Because an Absolute exalts the Holy Persons.


[鳩摩羅什]
 無得無說分第七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得阿 多羅三 三菩提耶아 如來가 有所說法耶
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如我解佛所說義컨댄 無有定法名阿 多羅三 三菩提며
亦無有定法如來可說이니이다 何以故오 如來所說法은 皆不可取며 不可說이며 非法이며 非非法이니 所以者가 何오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而有差別이니이다

 

7. 얻은 것도, 말씀하신 것도 없나니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겠느냐. 또 여래가 어떤 법을 설명한 일이 있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제가 알기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결정된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것이 없사오며, 또한 결정한 법 없는 것을 여래께서 설명해 주셨사옵니다. 왜냐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그것은 모든 성현께서 함이 없는 법으로 차별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여덟. 부처님도 깨달음도 법에 의지해 나실 뿐


8.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ya  ka cit kulaputro v  kuladuhit  vema  tris hasramah s hasram lokadh tu  sapta-ratnaparip r a  k tv  Tath gatebhyo' rhadbhya  samyaksambuddhebhyo d na  dady t, api nu sa kulaputro v  kuladuhit  v  tato nid na  bahutara  pu ya-skandham prasunuy t?
SUBH TIR  ha: bahu Bhagavan bahu Sugata sa kulaputro v  kuladuhit  v  tato nid na  pu ya-skandha  prasunuy t. tat kasya heto ? yo'sau Bhagavan pu ya-skandhas Tath gatena bh  ita , a-skandha  sa Tath gatena bh  ita . tasm t Tath gato bh  ate: pu ya-skandha  pu ya-skandha iti.
BHAGAV N  ha: ya  ca khalu puna  Subh te kulaputro v  kuladuhit  vema  tris hasramah s hasra  lokadh tu  sapta-ratna-parip r a  k tv  Tath gatebhyo' rhadbhya  samyaksambuddhebhyo d na  dady t, ya  ceto dharma-pary y d anta a  catu p dik m api g th m udg hya parebhyo vistare a de ayet samprak  ayed, ayam eva tato nid na  bahutara  pu ya-skandha  prasunuy d apram-eyam asa khyeyam. tat kasya heto ? ato nirj t  hi Subh te Tath gat n m arhat   samyaksambuddh n m anuttar  samyaksambodhir, ato nirj t   ca Buddh  Bhagavanta . tat kasya heto ? buddhadharm  buddhadharm  iti Subh te 'buddhadharm   caiva te Tath gatena bh  it  . tenocyante buddhadharm  iti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우고서 여래 아라한 정등각들게 보시를 행한다면 참으로 그 선남자나 선여인은 이로 인해서 아주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많습니다, 선서시여. 참으로 그 선남자 선여인들은 이로 인해서 [실로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공덕의 무더기라고 설하신 것, 그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나니 그래서 여래께서는 설하시기를 '공걱의 무더기, 공덕의 무더기'라 하시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참으로 수보리여,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우고서 여래 아라한 정등각들게 보시를 행한다 하더라도 다시 이 법문 가운데서 단지 네 구절로 된 게송이라도 뽑아내어 남들에게 상세히 가르쳐주고 자세히 설명해준다면 이것이 이로 인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이 더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을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여래 아라한 정등각들의 무상 정등각은 참으로 이로부터 생겨났고 부처님 세존들도 이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무슨 이유에서 인가? '불법(佛法), 불법(佛法)'이라는 것, 그것은 수보리여, 참으로 불법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했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불법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玄 ]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若善男子或善女人. 以此三千大千世界盛滿七寶持用布施. 是善男子或善女人. 由此因緣所生福聚寧爲多不. 善現答言. 甚多世尊. 甚多善逝. 是善男子或善女人. 由此因緣所生福聚其量甚多. 何以故. 世尊. 福德聚福德聚者. 如來說爲非福德聚. 是故如來說名福德聚福德聚.
佛復告善現言. 善現. 若善男子或善女人. 以此三千大千世界盛滿七寶持用布施. 若善男子或善女人. 於此法門乃至四句伽陀. 受持讀誦究竟通利. 及廣爲他宣說開示如理作意. 由是因緣所生福聚. 甚多於前無量無數. 何以故. 一切如來應正等覺阿 多羅三 三菩提皆從此經出. 諸佛世尊. 皆從此經生. 所以者何. 善現. 諸佛法諸佛法者. 如來說爲非諸佛法. 是故如來說名諸佛法諸佛法.


   2dc.  The Dharmabody as the result of Merit
8. The Load then asked: What do you think, Subhuti, if a son or daughter of good family had filled this world system of 1,000 million worlds with the seven precious things, and then gave it as a gift to the Tathagatas, Arhats, Fully Enlightened Ones, would they on the strength of that beget a great heap of merit?― Subhuti replied: Great, O Lord, great, O Well- Gone, would that heap of merit be! And why? Because the Tathagata spoke of the 'heap of merit' as a non- heap. That is how the Tathagata speaks of 'heap of merit'.― The Lord said: But if someone else were to take from this discourse on dharma but one stanza of four lines, and would demonstrate and illuminate it in full detail to others, then he would on the strength of that beget a still greater heap of merit, immeasurable and incalculable. And why? Because from it has issued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 of the Tathagatas, Arhats, Fully Enlightened Ones, and from it have issued the Buddhas, the Lords. And why? For the Tathagata has taught that the dharmas special to the Buddhas are just not a Buddha's special dharmas. That is why they are called 'the dharmas special to the Buddhas'.


[鳩摩羅什]
 依法出生分第八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若人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로 以用布施하면 是人의 所得福德이 寧爲多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是福德이 卽非福德性일새 是故로 如來가 說福德多니이다 若復有人이 於此經中에 受持乃至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一切諸佛과 及諸佛阿 多羅三 三菩提法이 皆從此經出이니라 須菩提야 所謂佛法者는 卽非佛法이니라

 

8. 부처님도 깨달음도 법에 의지해 나실 뿐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했다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이 복덕은 곧 복덕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오니 그래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신 것이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네 글귀라도 받아 지니고 남을 위해 말해 준다면 그 복이 저것보다 더 뛰어나리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모든 부처와 모든 부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온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니라."

 

 

아홉. 모두 하나되메 네 가지 모습(아상·인상· 중생상·수자상)이 없다


9a) tat ki  manyase Subh te, api nu srota pannasyaiva  bhavati: may  srota patti-phala  pr ptam iti?
SUBH TIR  ha: no h da  Bhagavan, na srota pannasyaiva  bhavati: may  srota patti-phala  pr ptam iti. tat kasya heto ? na hi sa Bhagavan ka cid dharmam  panna . tenocyate srota panna iti. na r pam  panno na  abd n na gandh n na ras n na spra  avy n na dharm n  panna . tenocyate srota panna iti. saced Bhagavan srota pannasyaiva  bhaven: may  srota patti-phala  pr ptam iti, sa eva tasya- tma-gr ho bhavet sattva-gr ho j va-gr ha  pudgala-gr ho bhaved iti
9b)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api nu sak d g mina eva  bhavati: may  sak d g mi-phala  pr ptam iti?
SUBH TIR  ha: no h da  Bhagavan, na sak d g mina eva  bhavati: may  sak d g mi-phala  pr ptam iti. tat kasya heto ? na hi sa ka cid dharmo ya  sak d g mitvam  panna . tenocyate sak d g mi-iti.
9c)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api nv an g mina eva  bhavati: may -an g mi-phala  pr ptam iti?
SUBH TIR  ha: no h da  Bhagav n, na-an g mina eva  bhavati: may -an g mi-phala  pr ptam iti. tat kasya heto ? na hi sa Bhagavan ka cid dharmo yo'n g mitvam  panna . tenocyate'n g mi-iti.
9d)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api nv arhata eva  bhavati: may -arhattva  pr ptam iti?
SUBH TIR  ha: no h da  Bhagavan, na-arhata eva  bhavati: may -arhattva  pr ptam iti. tat kasya heto ? na hi sa Bhagavan ka cid dharmo yo'rhan n ma. tenocyate' rhann iti. saced Bhagavann arhata eva  bhaven: may -arhattva  pr ptam iti, sa eva tasya- tma-gr ho bhavet sattva-gr ho j va-gr ha  pudgala-gr ho bhavet. 9e) tat kasya heto ? aham asmi Bhagava s Tath gatena-arhat  samyaksambuddhena-ara  -vih ri  m agryo nirdi  a . aham asmi Bhagavann arhan vitar ga . na ca me Bhagavann eva  bhavati: arhann asmy aha  v tar ga iti, sacen mama Bhagavann eva  bhaven: may -arhattva  pr ptam iti. na m   Tath gato vy kari yad: ara  -vih ri  m agrya  Subh ti  kula-putro na kvacid viharati, tenocyate'ra  -vih ry ara  -vih ri-iti.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참으로 '[성자의] 흐름에 든 자[豫流]'가 '나는 예류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나는 예류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는 어떤 법에도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흐름에 든 자'라 합니다. 형상에 든 것도 아니고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든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흐름에 든 자'라 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흐름에 든 자'가 '나는 예류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낸다면 그것은 참으로 그에게 자아에 대한 집착이 생긴 것이고 중생에 대한 집착, 영혼에 대한 집착, 개아에 대한 집착이 생긴 것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참으로 '한 번만 더 돌아올 자[一來]'가 '나는 일래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한 번만 더 돌아올 자'는 '나는 일래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한 번만 더 돌아올 자'가 됨에 들었다는 그 어떠한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한 번만 더 돌아올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참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자[不還]'가 '나는 불환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자'는 '나는 불환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자'가 됨에 들었다는 그 어떠한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참으로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은 '나는 아라한됨을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지 않습니다.
그것을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아라한 됩을 증득했다는 그 어떠한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아라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됨을 증득했다'는 [생각을] 낸다면 그것은 참으로 그에게 자아에 대한 집착이 생긴 것이고 중생에 대한 집착, 영혼에 대한 집착, 개아에 대한 집착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저는 여래 아라한 정등각께서 '다툼이 없이 머무는 자들 가운데서 제일'이라고 지목된 자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아라한으로 욕망을 여읜 자입니다. 그러나 너는 '나는 아라한이다. 나는 욕망을 여의었다.'라는 그런 [생각]을 내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제가 '나는 아라한 됨을 증득햇다'는 [생각을] 내었다면 여래께서는 저를 두고 '수보리 선남자는 다툼 없이 머무는 자들 가운데서 제일이라서 어떤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그를 두고] 말하기를 다툼 없이 머무는 자, 다툼 없이 머무는 자다'라고 인정하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玄 ]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諸預流者頗作是念. 我能證得預流果不. 善現答言. 不也世尊. 諸預流者不作是念. 我能證得預流之果. 何以故. 世尊. 諸預流者無少所預故名預流. 不預色聲香味觸法故名預流. 世尊. 若預流者作如是念. 我能證得預流之果. 卽爲執我有情命者士夫補特伽羅等.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諸一來者頗作是念. 我能證得一來果不. 善現答言. 不也世尊. 諸一來者不作是念. 我能證得一來之果. 何以故. 世尊. 以無少法證一來性故名一來.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諸不還者頗作是念. 我能證得不還果不. 善現答言. 不也世尊. 諸不還者不作是念. 我能證得不還之果. 何以故. 世尊以無少法證不還性故名不還.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諸阿羅漢頗作是念. 我能證得阿羅漢不. 善現答言. 不也世尊. 諸阿羅漢不作是念. 我能證得阿羅漢性. 何以故. 世尊. 以無少法名阿羅漢. 由是因緣名阿羅漢. 世尊. 若阿羅漢作如是念. 我能證得阿羅漢性. 卽爲執我有情命者士夫補特伽羅等. 所以者何. 世尊. 如來應正等覺說我得無諍住最爲第一. 世尊. 我雖是阿羅漢永離貪欲. 而我未曾作如是念. 我得阿羅漢永離貪欲. 世尊. 我若作如是念. 我得阿羅漢永離貪欲者. 如來不應記說我言. 善現. 善男子得無諍住最爲第一. 以都無所住. 是故如來說名無諍住無諍住.


3.  THE RANGE OF THE SPRITUAL LIFE

3a.  The four Great Saints
9a. The Lord asked: What do you think, Subhuti, does it occur to the Streamwinner, 'by me has the fruit of a Streamwinner been attained'? Subhuti replied: No indeed, O Load. And why? Because, O Load, he has not won any dharma. Therefore is he caled a Stream- winner. No sight- object has been won, no sounds, smells, tastes, touchables, or objects of mind. That is why he is called a 'Streamwinner'. If, O Load, it would occur to a Stream- winner, 'by me has a Streamwinner's fruit been attained', then that would be in him a seizing on a self, seizing on a being, seizing on a soul, seizing on a person― 9b. The Lord asked: What do you think, Subhuti, does it then occur to the Once- Returner, 'by me ahs the fruit of a Once- Returner been attained'?― Subhuti replied: No indeed, O Lord. And why? Because there is not any dharma that has won Once- Returnership. That is why he is called a 'Once- Returner'.― 9c. The Lord asked: What do you think, Subhuti, does it then occur to the Never- Returner 'by me has the fruit of a Never- Returner been attained'?― Subhuti replied: No indeed, O Lord. And why? Because there is not any dharma that has won Never Returnership. Therefore is he called a 'Never- Returner'.― 9d. The Lord asked: What do you think, Subhuti, does it then occur to the Arhat, 'by me has Arhatship been attained'?― Subhuti: No indeed, O Lord. And why? Because no dharma is called 'Arhat'. That is why he is called an Arhat. If, O Load, it would occur to an Arhat, by me has Arhatship been attained', then that would be in him a seizing on a self, seizing on a being, seizing on a soul, seizing on a person.― 9e. And why? I am, O Lord, the one whom the Tathagata, the Arhat, the Fully Enlightened One has pointed out as the foremost of those who dwell in Peace. I am, O Load, an Arhat free from greed. And yet, O Lord, it does not occur to me, 'an Arhat am I and free from greed'. If, O Lord, it could occur to me that I have attained Arhatship, then the Tathagata would not have declared of me that 'Subhuti, this son of good family, who is the foremost of those who dwell in Peace, does not dwell anywhere; that is why he is called "a dweller in Peace, a dweller in Peace".


[鳩摩羅什]
 一相無相分第九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須陀洹이 能作是念호대 我得須陀洹果不아 須菩提가 言
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須陀洹은 名爲入流로대 而無所入이니 不入色聲香味觸法일새 是名須陀洹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斯陀含이 能作是念호대 我得斯陀含果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斯陀含은 名一往來로대 而實無往來일새 是名斯陀含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阿那含이 能作是念호대 我得阿那含果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阿那含은 名爲不來로대 而實無不來일새 是故로 名阿那含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阿羅漢이 能作是念호대 我得阿羅漢道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實無有法名阿羅漢이니 世尊하 若阿羅漢이 作是念호대 我得阿羅漢道라하면 卽爲著我人衆生壽者니이다 世尊하 佛說我得無諍三昧하야 人中에 最爲第一이라 是第一離欲阿羅漢이라하시니 我不作是念호대 我是離欲阿羅漢이라하노이다 世尊하 我若作是念호대 我得阿羅漢道라하면 世尊이 卽不說須菩提가 是樂阿蘭那行者어니와 以須菩提가 實無所行일새 而名須菩提가 是樂阿蘭那行이라하시나이다

 

9. 모두 하나되메 네 가지 모습(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다
"수보리야, 네생각에 어떠하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나는 수다원과를 증득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어. 왜냐 하오면 수다원이라 함은 성인의 흐름에 들어갔다는 말이지만 실은 들어간 것이 아니오니, 물체·소리·향내·맛·촉감·법에 들어간 것이 아니온데 이름을 수다원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나는 사다함과를 증득했노라' 하겠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어. 왜냐 하오면 사다함이라 함은 '한번 갔다 온다'는 말이지만 실은 가고 옴이 없는 것을 사다함이라 이름한 때문이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아나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나함과를 증득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아나함은 오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실은 오지 않는 것도 없사오니 그래서 름을 아나함이라 하였기 때문이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증득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실로 어떠한 법도 없는 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하는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증득했노라' 하오면 곧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란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이 남아 있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제가 <다툼 없는 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가장 제일이라> 말씀하셨아오니 이것이 첫째 가는 욕심 없는 아라한이오나, 세존이시여, 저는 '내가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일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하오면 세존께서는 곧 수보리에게 아란나행(다툼 없고 욕심을 여읜 무쟁삼매(無諍三昧)의 행)을 좋아하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온데 실은 수보리가 행함이 없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좋아한다'고 이름하셨사옵니다."

 

 

열. 정토를 장엄한다 함은


10a)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asti sa ka cid dharmo yas Tath gatena D pa karasya Tath gatasya-arhata  samyaksambuddhasya-antik d udg h ta ?
SUBH TIR  ha: no h da  Bhagavan, na-asti sa ka cid dharmo yas Tath gatena D pa karasya Tath gatasya-arhata  samyaksambuddhasya-antik d udg h ta .
10b) BHAGAV N  ha: ya  ka cit Subh te bodhisattva eva  vaded:aha  k etra-vy h n ni p dayi y mi-iti, sa vitatha  vadet. tat kasya heto ? k etra-vy h   k etra-vy h  iti Subh te, 'vy h s te Tath gatena bh  it  . tenocyante k etra-vy h  iti. 10c) tasm t tarhi Subh te bodhisattvena mah sattvenaivam aprati  hita  cittam utp dayitavya  yan na kvacit-pra i  hita  cittam utp dayitavyam, na r pa-prati  hita  cittam utp dayitavya  na  abda-gandha-rasa-spra  avya-dharma-prati  hita  cittam utp dayitavyam. tad yath pi n ma Subh te puru o bhaved upeta-k yo mah -k yo yat tasyaiva r pa  tma-bh va  sy t tad yath pi n ma Sumeru  parvata-r j , tat ki  manyase Subh te api nu mah n sa  tmabh vo bhavet?
SUBH TIR  ha: mah n sa Bhagavan mah n Sugata sa  tma-bh vo bhavet. tat kasya heto ?  tma-bh va  tma-bh va iti Bhagavan a-bh va  sa Tath gatena bh  ita . tenocyata  tma-bh va iti. na hi Bhagavan sa bh vo na-abh va . tenocyata  tma-bh va iti.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여래가 연등 여래 아라한 정등각의 곁에서 얻은 그 어떤 법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연등 여래 아라한 정등각의 곁에서 얻은 그 어떤 법도 없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어떤 보살이 말하기를 '나를 [불]국토 건설을 이룩하리라'라고 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불]국토 건설, [불]국토 건설'이라고 하지만, 그것들은 [불국토]건설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였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불]국토 건설'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수보리여, 보살 마하살은 이와 같이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 어떤 것에도 머무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형상에 머무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하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머루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구족한 몸과 큰 몸을 가지고 있다 하자. 그 몸이 이러한 형태여서 마치 산들의 아 인 수미산과 같다 하자.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그 몸은 참으로 크다 하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그것은 큽니다." 그것은 큽니다. 세존이시여. 그 몸은 큽니다. 선서시여.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몸, 몸'이라는 것, 그것은 몸이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였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몸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것은 몸이 아니며, 몸 아님도 아닙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몸이라고 합니다."
[玄 ]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如來昔在然燈如來應正等覺所頗於少法有所取不. 善現答言. 不也世尊. 如來昔在然燈如來應正等覺所都無少法而有所取. 佛告善現. 若有菩薩作如是言. 我當成辦佛土功德莊嚴. 如是菩薩非眞實語. 何以故. 善現. 佛土功德莊嚴佛土功德莊嚴者. 如來說非莊嚴. 是故如來說名佛土功德莊嚴佛土功德莊嚴. 是故善現. 菩薩如是都無所住應生其心. 不住於色應生其心. 不住非色應生其心. 不住聲香味觸法應生其心. 不住非聲香味觸法應生其心. 都無所住應生其心.
佛告善現. 如有士夫具身大身其色自體. 假使譬如妙高山王. 善現. 於汝意云何. 彼之自體爲廣大不. 善現答言. 彼之自體. 廣大世尊. 廣大善逝. 何以故. 世尊彼之自體如來說非彼體故名自體. 非以彼體故名自體.


3b.  The Bodhisattva's thought of Enlightenment
10a. The Lord asked: What do you think, Subhuti, is there any dharma which the Tathagate has learned from Dipankara, the Tathagata, the Arhat, the fully Enlightened One? Subhuti replied: Not so, O Lord, there is not.

3c.  The Bodhisattva and his Pure Land
10b. The Lord said: If any Bodhisattva would say, 'I will create harmonious Buddhafields', he would speak falsely. And why? 'The harmonies of Buddhafields, the harmonies of Buddhafields', Subhuti, as no- harmonies have they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Therefore he spoke of 'harmonious Buddhafields'.

3d.  The Bodhisattva's Final Nirvana
10c. Therefore then, Subhuti, the Bodhisattva, the great being, should produce an unsupported thought, i.e. a thought which is nowhere supported, a thought unsupported by sights, sounds, smells, tastes, touchables or mind- objects.
  Suppose, Subhuti, there were a man endowed with a body, a huge body, so that he had a personal existence like Sumeru, king of mountains. Would that, Subhuti, be a huge personal existence? Subhuti replied: Yes, huge, O Load, huge, O Well- Gone, would his personal existence be. And why so? 'Personal existence, personal existence', as no- existence has that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for not, O Lord, is that existence or non- existence. Therefore is it called 'personal existence'.

 

[鳩摩羅什]
 莊嚴淨土分第十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於意云何오 如來가 昔在然燈佛所하야 於法에 有所得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在然燈佛所하사 於法에 實無所得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菩薩이 莊嚴佛土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莊嚴佛土者는 則非莊嚴일새 是名莊嚴이니이다 是故로 須菩提야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生淸淨心이니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應無所住하야 而生其心이니라 須菩提야 譬如有人이 身如須彌山王하면 於意云何오 是身이 爲大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大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佛說非身이 是名大身이니이다

 

10. 정토를 장엄한다는 함은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얻은 바 법이 있느냐 없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실로 얻은 법이 없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느냐. 안 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하오면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오며 그 이름이 장엄이옵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 것이니, 마땅히 물질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며, 또 소리·향기·맛·부딪침·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니, 마땅히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쓸 것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만 하다면 네 생각에 어떠하냐. 이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말씀하시어 큰 몸이라 이름하시었기 때문이옵니다."

 

 

열 하나. 짓는 바 없는 복덕이 뛰어나도다


11.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y vatyo Ga g y   mah nady   v luk s t vatya eva Ga ga-nadyo bhaveyu , t su y  v luk  api nu t  bahavyo bhaveyu ?
SUBH TIR  ha: t  eva t vad Bhagavan bahavyo Ga g -nadyo bhaveyu , pr g eva y s t su Ga g -nad  u v luk  .
BHAGAV N  ha:  rocay mi te Subh te prativeday mi te y vatyas t su Ga g -nad  u v luk  bhaveyus, t vato loka-dh t n ka cid eva str  v  puru o v  sapta-ratna-parip r a  k tv  Tath gatebhyo'rhadbhya  samyaksam buddhebhyo d na  dady t, tat ki  manyase Subh te, api nu s  str  v  puru o v  tato nid na  bahu pu yaskandha  prasunuy t?
SUBH TIR  ha: bahu Bhagavan bahu Sugata str  v  puru o v  tato nid na  pu ya-skandha  prasunuy d aprameyam asa khyeyam.
BHAGAV N  ha: ya  ca khalu puna  Subh te str  v  puru o v   t vato loka-dh t n sapta-ratna-parip r a  k tv  Tath gatebhyo'rhadbhya  samyaksambuddhebhyo d na  dady t, ya  ca kulaputro v  kuladuhit  veto dharma-pary y d anta a  catu p dik m api g th m udg hya parebhyo de ayet samprak  ayed, ayam eva tato nid na  bahutara  pu yaskandha  prasunuy d aprameyam asa khyeyam.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가령 강가 큰 강의 모래알들과 같이 많은 [수의] 강가 강들이 있다 하자. 그러면 그 [모든 강들의] 모래알 역시 참으로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는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그러한 강가 강들만 하여도 많다고 하겠는데 하물며 그러한 강가 강들의 모래알들이겠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나는 그대에게 제기하리라. 나는 그대에게 분명히 알게 하리라. 그들 강가 강들의 모래알들이 있는 만큼의 그와 같은 세계들을 어떤 여자나 남자가 침보로 가득 채우고서 여래 아라한 정등각들게 보시를 행한다고 하자.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참으로 그 여자나 남자가 이로 인해서 아주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많습니다. 선서시여. 참으로 그 선남자 선여인들은 그것으로 인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는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을 것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참으로 수보리여, 여자나 남자가 그러한 [많은] 세계들을 침보로 가득 채우고서 여래 아라한 정등각들게 보시를 행한다 하더라도 다시 이 법문 가운데서 단지 네 구절로 된 게송이라도 뽑아래어 남들에게 자세히 가르쳐주고 자세히 설명해준다면 이것이 이로 인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이 더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을 것이다."


[玄 ]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乃至 伽河中所有沙數. 假使有如是沙等 伽河. 是諸 伽河沙寧爲多不. 善現答言. 甚多世尊甚多善逝. 諸 伽河尙多無數何況其沙. 佛言善現. 吾今告汝開覺於汝. 假使若善男子或善女人. 以妙七寶盛滿爾所 伽河沙等世界. 奉施如來應正等覺. 善現. 於汝意云何. 是善男子或善女人. 由此因緣所生福聚寧爲多不. 善現答言. 甚多世尊. 甚多善逝. 是善男子或善女人由此因緣所生福聚其量甚多. 佛復告善現. 若以七寶盛滿爾所沙等世界. 奉施如來應正等覺. 若善男子或善女人. 於此法門乃至四句伽他受持讀誦究竟通利. 及廣爲他宣說開示如理作意. 由此因緣所生福聚甚多於前無量無數.


3e.  The merit derived from Perfect Wisdom
11. The Lord asked: What do you think, Subhuti, if there were as many Ganges rivers as there are grains of sand in the large river Ganges, would the grains of sand in them be many?― Subhuti replied: Those Ganges rivers would indeed by many, much more so the grains of sand in them.― The Lord said: This is what I announce to you, Subhuti, this is what I make known to you,― if some woman or man had filled with the seven precious things as many world systems as there are grains of sand in those Ganges rivers, and would give them as a gift to the Tathagatas, Arhats, fully Enlightened Ones― what do you thing, Subhuti, would that woman or man on the strength of that beget a great heap of merit?― Subhuti replied: Great, O Lord, great O Well- Gone, would that heap of merit be, immeasurable and incalculable.― The Load said: But if a son or daughter of good family had taken from this discourse on dharma but one stanza of four lines, and were to demonstrate and illuminate it to others, then they would on the strength of that beget a still greater heap of merit, immeasurable and incalculable.


[鳩摩羅什]
 無爲福勝分第十一
 
須菩提야 如恒河中所有沙數하야 如是沙等恒河가 於意云何오 是諸恒河沙가
寧爲多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하 但諸恒河도 尙多無數어든 何況其沙리잇가 須菩提야 我今實言으로 告汝호리니 若有善男子善女人이 以七寶로 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하야 以用布施하면 得福이 多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하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若善男子善女人이 於此經中에 乃至受持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而此福德이 勝前福德하리라

 

11. 짓는 바 없는 복덕이 뛰어나도다
"수보리야,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 수와 같이 그렇게 많은 항하가 있다면 네 생각에 어떠하냐.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가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다만 저 모든 항하만 하더라도 수 없이 많사온데 하물며 그 모래이겠나이까."
"수보리야, 내 이제 너에게 실다운 말로 이르노니,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저 모든 항하강의 모래처럼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채워서 다 보시했다면 그 복덕이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 내지 사구게 등만 받아 지니고 남을 위해 일러 준다면 이 복덕이 앞에 말한 복덕보다 뛰어나리라."

 

 

열 둘. 바른 가르침은 두루 존경 받느니


12. api tu khalu puna  Subh te yasmin p thiv -prade a ito dharma-pary y d anta a  catu p dik m api g th m udg hya bh  yeta v  samprak  yeta v , sa p thiv -prade a  caityabh to bhavet sa-deva-m nu a-asurasya lokasya; ka  punar v do ya ima  dharma-pary ya  sakala-sam pta  dh rayi yanti v cayi yanti paryav psyanti parebhya  ca vistare a samprak  ayi yanti, parame a te Subh te   carye a samanv gat  bhavi yanti. tasmi   ca Subh te p thivi-prade e   st  viharaty anyatara-anyataro v  vij aguru-sth n ya .


"다시 수보리여, 어떤 지방에서 [여자나 남자가 이 법문을 듣고] 이 법문 가운데서 단지 네 구절로 된 게송이라도 뽑아내어 가르쳐주고 자세히 설명해준다면 천 인 아수라를 포함한 세계가 그 지방을 탑묘처럼 여길 것이다. 하물며 이 범문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간직하고 독송하고 이해하고 남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수보리여, 그들은 최고의 경이로움을 갖춘 자들이 될 것이니 다시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수보리여, 그 지방에는 스승과 다른 여러 지혜로운 구루들이 머문다."


[玄 ] 復次善現. 若地方所於此法門. 乃至爲他宣說開示四句伽他. 此地方所尙爲世間諸天及人阿素洛等之所供養如佛靈廟. 何況有能於此法門. 具足究竟書寫受持讀誦究竟通利. 及廣爲他宣說開示如理作意. 如是有情成就最勝希有功德. 此地方所大師所住. 或隨一一尊重處所. 若諸有智同梵行者說是語已.


12. Moreover, Subhuti, that spot of earth where on has taken from this discourse on dharma but on stanza of four lines, taught or illumined it, that spot of earth will be a veritable shrine for the whole world with its gods, men and Asuras. What then should we say of those who will bear in mind this discourse on dharma in its entirety, who will recite, study, and illuminate it in full detail for others! Most wonderfully blest, Subhuti, they will be! And on that spot of earth, Subhuti, either the Teacher dwells, or a sage representing him.


[鳩摩羅什]
 尊重正敎分第十二
 
復次須菩提야 隨說是經호대 乃至四句偈等하면 當知此處는 一切世間天人
阿修羅가 皆應供養을 如佛塔廟어든 何況有人이 盡能受持讀誦가 須菩提야
當知是人은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이니 若是經典所在之處는 則爲有佛과
若尊重弟子니라

 

12. 바른 가르침은 두루 존경 받느니
"그리고 또 수보리야, 이 경에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따라서 일러준다면, 마땅히 알라. 이곳은 일체 세간의 하늘·사람·아수라가 다 마땅히 부처님의 탑과 절같이 공경할 것인데 하물며 어떤 사람이 능히 받아 지니어 읽고 외는 것이겠느냐.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최상의 제일 가는 희유한 법을 성취한 것이니, 만일 이 경전이 있는 곳이면 곧 부처님이 계신 곳이 되고 존경 받는 제자가 있는 곳이 되느니라."

 

 

열 셋. 법 그대로 받아 지니라


13a) evam ukta  yu m n SUBH TIR Bhagavantam etad avocat: ko n ma-aya  Bhagavan dharma-pary y  , katha  caina  dh ray mi?
evam ukte BHAGAV   yu manta  Subh tim etad avocat: praj  p ramit  n ma-aya  Subh te dharma-pary ya , eva  caina  dh raya. tat kasya heto ? yaiva Subh te praj  p  ramit  Tath gatena bh  it  saiva-a-p ramit  Tath gatena bh  it . tenocyate prj  p ramiteti.
13b) tat ki  manyase Subh te api nv asti sa ka cid dharmo yas Tath gatena bh  ita ?
SUBH TIR  ha: no hida  Bhagavan, na-asti sa ka cid dharmo yas Tath gatena bh  ita .
13c)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y vat tris hasramah s hasre loka-dh tau p thiv -raja  kaccit tad bahu bhavet?
SUBH TIR  ha: bahu Bhagavan bahu Sugata p thiv -rajo bhavet. tat kasya heto ? yat tat Bhagavan p thiv -rajas Tath gatena bh  itam a-rajas tad Bhagava s Tath gatena bh  itam. tenocyate p thiv -raja iti. yo'py asau loka-dh tus Tath gatena bh  ito 'dh tu  sa Tath gatena bh  ita . tenocyate lokadh tur iti.
13d)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dv tri  an mah puru a-lak a ais Tath gato 'rhan samyaksambuddho dra  avya ?
SUBH TIR  ha: no hida  Bhagavan, na dv tri  an-mah puru a-lak a ais Tath gato'rhan sa yaksambuddho dra  avya . tat kasya heto ? y ni hi t ni Bhagavan dv tri  an-mah puru a-lak a  ni Tath gatena bh  it ny, a-lak an ni t ni Bhagava s Tath gatena bh  it ni. tenocyante dv tri  an-mah puru a-lak a  ni-iti.
13e) BHAGAV N  ha: ya  ca khalu puna  Subh te, str  v  puru o v  dine dine Ga g -nad -v luk -sam n  tma-bh v n parityajet, eva  parityajan Ga g -nad -v luk -sam n kalp  s t n  tmabh v n parityajet, ya  ceto dharma-pary y d anta a  catu p dik m api g th m udg hya parebhyo de ayet samprak  ayed, ayam eva tato nid na  bahutara  pu ya-skandha  prasunuy d aprameyam asamkhyeyam.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수보리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법문은 무어라 이름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이것을 [마음에] 간직하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묻자 세존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여래가 설한 이 법문은 '지혜의 완성'이라 이름한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마음에] 간직하라.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참으로 수보리여, '지혜의 완성'이라고 여래가 설한 것 그것은 [지혜의] 완성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했다. 그래서 말하기를 '지혜의 완성'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여래가 설한 그 어떤 법이 참으로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햇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그 어떤 법은 있지 않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삼천 대천 세계에 [있는] 대지의 티끌이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대지의 티끌은 많습니다. 선서시여.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대지의 티끌'이라고 여래께서 설하신 것, 그것은 [대지의] 티끌이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래서 말하기를 대지의 티끌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이 세계라고 여래께서 설하신 것 그것은 [세]계가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세계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32가지 대인상들 때문에 여래 아라한 정등각이라고 봐야 하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32가지 대인상들 때문에 여래 아라한 정등각이라고 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32가지 대인상들을 여래께서 설하신 것, 그것들은 [32가지 대인]상들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래서 말하기를 32가지 대인상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
세존께서 말씀하셧다. "그리고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여자나 남자가 매일 매일 강가 강의 모래알들과 같이 [많은] 몸들을 바친다 하자. 이와 같이 강가 강의 모래알들과 같은 겁들 동안 몸들을 바친다 하더라도 이 법문에서 단지 네 구절로 된 게송이라도 뽑아 내어 남들에게 상세히 가르쳐주고 자세히 설명해준다면 이것이 이로 인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이 더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는 것이다.


[玄 ] 具壽善現復白佛言. 世尊當何名此法門. 我當云何奉持. 作是語已. 佛告善現言. 具壽. 今此法門. 名爲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 如是名字汝當奉持. 何以故. 善現. 如是般若波羅蜜多. 如來說爲非般若波羅蜜多. 是故如來說名般若波羅蜜多.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頗有少法如來可說不. 善現答言. 不也世尊. 無有少法如來可說. 佛告善現. 乃至三千大千世界大地微塵寧爲多不. 善現答言. 此地微塵甚多世尊. 甚多善逝. 佛言善現. 大地微塵如來說非微塵. 是故如來說名大地微塵. 諸世界如來說非世界. 是故如來說名世界.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應以三十二大士夫相觀於如來應正等覺不. 善現答言. 不也世尊. 不應以三十二大士夫相觀於如來應正等覺. 何以故. 世尊. 三十二大士夫相如來說爲非相. 是故如來說名三十二大士夫相. 佛復告善現言. 假使若有善男子或善女人. 於日日分捨施 伽河沙等自體. 如是經 伽河沙等劫數捨施自體. 復有善男子或善女人. 於此法門乃至四句伽他. 受持讀誦究竟通利. 及廣爲他宣說開示如理作意. 由是因緣所生福聚甚多於前無量無數.


4.  THE FIRST ENDING

13a. Subhuti asked: What then, O Lord, is this discourse on dharma, and how should I bear it in mind?― The Load replied: This discourse on dharma, Subhuti, is called 'Wisdom which has gone beyond', and as such should you bear it in mind!

5.  TRANSCENDENTALITY

5a.  The dialectical nature of reality
  And why? Just that which the Tathagata has taught as the wisdom which has gone beyond, just that He has taught as not gone beyond. Therefore is it called 'Wisdom which has gone beyond'. 13b. What do you think, Subhuti, is there any dharma which the Tathagata has taught?― Subhuti replied: No indeed, O Lord, there is not.― 13c. The Lord said: When, Subhuti, you consider the number of particles of dust in this world system of 1,000 million worlds― would they be many?― Subhuti replied: Yes, O Lord. Because what was taught as particles of dust by the Tathagata, as no- particles that was taught by the Tathagata. Therefore are they called 'particles of dust'. And this world- system the Tathagata has taught as no- system. Therefore is it called a 'world system'.― 13d. The Lord asked: What do you think, Subhuti, can the Tathagata be seen by means of the thirty- two marks of the superman?― Subhuti replied: No indeed, O Lord. And why? Because those thirty- two marks of the superman which were taught by the Tathagata, they are really no- marks. Therefore are they called 'the thirty- two marks of the superman'.

5b.  The supreme excellence of this teaching
13e. The Lord said: And again, Subhuti, suppose a woman or a man were to renounce all their belongings as many times as there are grains of sand in the reiver Ganges; and suppose that someone else, after takin from this discourse on Dharma but one stanza of four lines, would demonstrate it to others. Then this latter on the strength of that would beget a greater heap of merit, immeasurable and incalculable.


[鳩摩羅什]
 如法受持分第十三

爾時에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當何名此經이며 我等이 云何奉持하리잇고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是經은 名爲金剛般若波羅蜜이니 以是名字로 汝當奉持하라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佛說般若波羅蜜이 則非般若波羅蜜이니라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所說法不아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如來가 無所說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이 是爲多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하 須菩提야 諸微塵을 如來가 說非微塵일새 是名微塵이며 如來가 說世界非世界일새 是名世界니라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三十二相으로 見如來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不可以三十二相으로 得見如來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三十二相이 卽是非相일새 是名三十二相이니이다 須菩提야 若有善男子善女人이 以恒河沙等身命으로 布施어든 若復有人이 於此經中에 乃至受持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其福이 甚多니라

 

13. 법 그대로 받아 지니라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전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전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 이름으로써 너희가 마땅히 받들어 지녀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부처님이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이니 아니라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어떤법을 설명한 바가 있느냐 없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신 바가 없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먼지의 수를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심히 많사옵니다, 부처님이시여."
"수보리야, 여래는 이 모든 먼지를 먼지가 아니라고 말하나니 이것이 이름이 미진이며 여래가 말하는 세계도 그것이 세계가 아닌 것이니 이것이 이름이 세계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가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친견할 수 있느냐 없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친견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오면 여래께서 삼십 이상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곧 상이 아니오라 이름을 삼십이상이라 하시는 것이옵니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있어서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몸과 생명을 가지고 보시한 사람도 있고(있지만),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 가운데 내지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해 설명해 주었다면 그 복이 심히(훨씬 더) 많으니라."

 


열 넷. 고집하는 생각들을 모두 여읜 평안


14a) atha khalv  yu m n SUBH TIR dharma-vegena-a r  i pr mu cat, so'  r  i pram jya Bhagavantam etad avocat:   carya  Bhagavan parama-  carya  Sugata, y vad aya  dharma-pary yas Tath gatena bh  ito 'gra-y na-sa prasthit n   sattv n m arth ya  re  ha-y na-sa prasthit n   arth ya, yato me Bhagava  j  nam utpannam. na may  Bhagava  j tv eva r po dharmapary ya   ruta-p rva . parame a te Bhagavann   carye a samanv gat  bodhisattv  bhavi yanti ya iha s tre bh  yam  e  rutv  bh ta-sa j  m utp dayi yanti. tat kasya heto ? y  cai   Bhagavan bh ta-sa j   saiva-abh ta-sa j  . tasm t Tath gato bh  ate bh ta-sa j   bh ta-sa j eti.
14b) na mama Bhagavan du kara  yad aham ima  dharma-pary ya  bh  yam  am avakalpay my adhimucye. ye 'pi te Bhagavan sattv  bhavi yanty an gate 'dhvani pa cime k le pa cime samaye pa cim y   pa ca- aty   sad-dharma-vipralope vartam ne, ya ima  Bhagavan dharma-pary yam udgrah  yanti dh ray sya ti v cayi yanti paryav psyanti parebhya  ca vistare a samprak  ayi yanti, te parama-  carye a samanv gat  bhavi yanti.
14c) api tu khalu punar Bhagavan na te  m  tma-sa j   pravarti yate, na sattva-sa j   na j va-sa j   na pudgala-sa j   pravarti yate, na-api te    k cit sa j a na-a-sa j   pravartate. tat kasya heto ? y  sa Bhagavann  tma-sa j a saiva-a-sa j  , y  sattva-sa j   j va-sa j   pudgala-sa j   saiva-a-sa j  . tat kasya heto ? sarva-sa j  -apagat  hi Buddh  Bhagavanta .
14d) evam ukte BHAGAV N  yu mantam Subh tim etad avocat: evam etat Subh te evam etat. parama-  carya-samanv gat s te sattv  bhavi yanti ya iha Subh te s tre bh  yam ne nottrasi yanti na samtrasi yanti na sa tr sam  patsyante. tat kasya heto ? paramap ramiteya  Subh te Tath gatena bh  it  yaduta-a-p ramit . y   ca Subh te Tath gata  parama-p ramit   bh  ate, t m aparim   -api Buddh  Bhagavanto bh  ante, tenocyate parama-p ramiteti.
14e) api tu khalu puna  Subh te y  Tath gatasya k  nti-p ramit  saiva-a-p ramit . tat kasya heto ? yad  me Subh te Kalinga r j -a ga-pratyanga-m  s ny acchaits t, tasmin samaya  tma-sa j a v  sattva-sa jn  v  j va-sa j   v  pudgala-sa j   v  na-api me k cit sa j   v -a-sa j   v  babh va. tat kasya heto ? sacen me Subh te tasmin samaya  tma-sa j  -abhavi yad vy p da-sa j  -api me tasmin samaye'bhavi yat. sacet sattva-sa j   j va-sa j   pudgala-sa j a-abhavi yad, vy p da-sa j  -api me tasmin samaye'bhavi yat. tat kasya heto ? abhij n my aha  Subh te't te'dhvani pa ca-j ti- at ni yad aha  k  ntiv d    ir abh vam. tatra-api me na- tma-sa j   babh va, na sattva-sa j   na j va-sa j   na pudgala-samj   babh va. tasm t tarhi Subh te bodhi-sattvena mah sattvena sarva-sa j  -vivarjayitv -anuttar y   samyaksambodhau cittam utp dayitavyam. na r pa-prati  hita  cittam utp dayitavyam, na  abda-gandha-rasa-spra  avya-dharma-prati  hita  cittam utp dayitavyam, na dharma-prati  hita  cittam utp dayitavyam, na adharma-prati  hita  cittam utp dayitavyam, na kvacit-prati  hitam cittam utp dayitavyam. tat kasya heto ? yat prati  hita  tad eva-aprati  hitam. tasm d eva Tath gato bh  ate:aprati  hitena bodhisattvena d na  d tavyam. na r pa- abda-gandha-rasa-spra  avya-dharma-prati  hitena d na  d tavyam. 14f) api tu khalu puna  Subh te bodhisattvenaiva r po d na-parity ga  kartavya  sarva-sattv n m arth ya. tat kasya heto ? y  cai   Subh te sattva-sa j   saiva-a-sa j  . ya eva  te sarva-sattv s Tath gatena bh  it s ta eva-a-sattv  . tat kasya heto ? bh ta-v d  Subh te Tath gata  satyav d  tath v dy ananyath v d  Tath gata . na vitatha-v d  Tath gata . 14g) api tu khalu puna  Subh te yas Tath gatena dharmo 'bhisambuddho de ito nidhy to, na tatra satya  na m   . tadyath -api n ma Subh te puru o 'ndhak ra-pravi  o na ki cid api pa yet, eva  vastu-patito bodhisattvo dra  avyo yo vastu-patito d na  parityajati. tadyath  -api n ma Subh te cak u m n puru a  prabh t y   r trau s rye'bhyudgate n n vidh ni r p  i pa yet, evam a-vastu-patito bodhisattvo dra  avyo yo'vastu-patito d na  parityajati. 14h) api tu khalu puna  Subh te ye kulaputr  v  kuladuhitaro vema  dharmapary yam udgrah  yanti dh rayi yanti v cayi yanti paryav psyanti parebhya  ca vistare a samprak  ayi yanti, j  t s te Subh te Tath gatena buddha-j  nena, d  t s te Subh te Tath gatena buddha-cak u  , buddh s te Tath gatena. sarve te Subh te sattv  aprameyam asamkhyeya  pu ya-skandha  prasavi yanti pratigrah  yanti.


그 때 참으로 수보리 존자는 법력에 [감응되어] 눈물을 흘렸다. 그는 눈물을 닦고서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최고로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최상승에 굳게 나아가는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고, 최고로 수승한 승[최수승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여래께서는 이런 법문을 설해주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제게는 지혜가 생겼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런 형태의 법문을 전에는 결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이 세상에서] [이런] 경이 설해질 때 듣고서 참되다는 산냐를 일으키는 보살들은 경이로움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참되다는 산냐, 그것은 참으로 참되다는 산냐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참되다는 산냐, 참되다는 산냐'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 법문이 설해질 때 이해하고 확신을 가지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나 어떤 중생들이 있어서 미래세의 후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할 시기가 되었을 때에 이 법문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간직하고 독송하고 이해하고 남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그들은 최고의 경이로움을 갖춘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다시 세존이시여, 이들에게는 자아라는 산냐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며 중생이라는 산냐도 영혼이라는 산냐도 개아라는 산냐도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산냐도 산냐 아님도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자아라는 산냐 그것은 참으로 산냐가 아니요, 중생이라는 산냐, 영혼이라는 산냐, 개아라는 산냐 그것도 참으로 산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시]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불세존들께서는 일체의 산냐를 멀리 여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드리자 세존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다. 수보리여. 참으로 그러하다. 수보리여. 여기 [이 세상에서] [이런]  경이 설해질 때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공포를 가지지 않는 그러한 중생들은 최고의 경이로움을 구족한 자들이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여래가 설한 이 최고의 바라밀 그것은 참으로 [최고의] 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수보리여, 여래가 최고의 바라밀을 설한 것 그것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세존들도 역시 설한다. 그래서 말하기를 최고의 바라밀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여래의 인욕바라밀 그것은 참으로 [인욕]바라밀이 아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깔리 왕이 내 온 몸이 살점을 도려내었을 때 나에게 자아라는 산냐나 중생이라는 산냐나 영혼이라는 산냐나 개아라는 산냐나 그 어떠한 산냐나 산냐 아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무슨 이유에서인가? 만일 수보리여, 그 때에 나에게 자아라는 산냐가 생겼다면 그 때에 악의의 산냐 역시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중생이라는 산냐, 영혼이라는 산냐, 개아라는 산냐가 생겼더라도 그 때에 악의의 산냐 역시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나는 분명히 안다. 과거에 오백 생 동안 나는 인욕을 설하는 성선(聖仙)이었다. 그 때에도 역시 나에게는 자아라는 산냐가 생기지 않았고 중생이라는 산냐, 영혼이라는 산냐, 개아라는 산냐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수보리여, 보살 마하살은 일체 산냐를 버리고서 위없는 정등각에 마음을 내어야 한다. 형상에 머무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하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머무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하며 비법에 머무는 머무는 마음도 내지 않아야 하며 어떤 것에도 머무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다시] 무슨 이유에서인가? 머무름이라는 것 그것은 참으로 머무르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래는 설했다. '머무름 없이 보살은 보시를 행해야 한다.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머무름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라고."

"그런데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서 이런 형태의 철저한 보시를 행해야 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이 중생이라는 산냐 그것은 참으로 [중생이라는] 산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래가 설한 그들 일체 중생들은 참으로 중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여래는 참됨을 말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여래는 진실을 말하는 자요, 그대로를 말하는 자요, 다르지 않게 말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여래는 거짓말을 하는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여래가 철저히 깨달았고 설하고 깊이 사유한 법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 수보리여, 사람이 어둠에 들어가면 어떤 것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경계에 떨어진 보살도 '경계에 떨어져서 보시를 행하는 자'라고 간주되어야 한다. 다시 예를 들면 수보리여, 눈을 가진 사람이 밤이 새고 태양이 떠올랐을 때에 여러 종류의 색깔들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경계에 떨어지지 않은 보살은 '경계에 떨어지지 않고 보시를 행하는 자'라고 간주되어야 한다."

"그런데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선남자들이나 선여인들이 이 법문을 배우고 [마음에] 간직하고 독송하고 이해하고 남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수보리여,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그들을 안다. 수보리여, 여래는 부처의 눈으로써 그들을 본다. 수보리여, 여래는 그들을 깨달아 [안다]. 그들 모두는 수보리여,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쌓고 얻게 될 것이다[라고]."


[玄 ] 爾時具壽善現. 聞法威力悲泣墮淚.  仰 淚而白佛言. 甚奇希有世尊. 最極希有善逝如來今者所說法門. 普爲發趣最上乘者作諸義利. 普爲發趣最勝乘者作諸義利. 世尊. 我昔生智以來未曾得聞如是法門. 世尊. 若諸有情聞說如是甚深經典生眞實想. 當知成就最勝希有. 何以故. 世尊. 諸眞實想眞實想者. 如來說爲非想. 是故如來說名眞實想眞實想. 世尊. 我今聞說如是法門. 領悟信解未爲希有. 若諸有情於當來世後時後分後五百歲. 正法將滅時分轉時. 當於如是甚深法門. 領悟信解受持讀誦究竟通利. 及廣爲他宣說開示如理作意. 當知成就最勝希有. 何以故. 世尊. 彼諸有情無我想轉無有情想無命者想無士夫想無補特伽羅想無意生想無摩納婆想無作者想無受者想轉. 所以者何. 世尊. 諸我想卽是非想. 諸有情想命者想士夫想補特伽羅想意生想摩納婆想作者想受者想卽是非想. 何以故. 諸佛世尊離一切想. 作是語已.
爾時世尊. 告具壽善現言. 如是如是. 善現. 若諸有情聞說如是甚深經典. 不驚不懼無有怖畏. 當知成就最勝希有. 何以故. 善現. 如來說最勝波羅蜜多. 謂般若波羅蜜多. 善現. 如來所說最勝波羅蜜多. 無量諸佛世尊所共宣說故. 名最勝波羅蜜多. 如來說最勝波羅蜜多. 卽非波羅蜜多. 是故如來說名最勝波羅蜜多.
復次善現. 如來說忍辱波羅蜜多. 卽非波羅蜜多. 是故如來說名忍辱波羅蜜多. 何以故. 善現. 我昔過去世曾爲 利王斷支節肉. 我於爾時都無我想或有情想或命者想或士夫想或補特伽羅想或意生想或摩納婆想或作者想或受者想. 我於爾時都無有想亦非無想. 何以故. 善現. 我於爾時若有我想. 卽於爾時應有 想. 我於爾時若有有情想命者想士夫想補特伽羅想意生想摩納婆想作者想受者想卽於爾時應有 想. 何以故. 善現. 我憶過去五百生中. 曾爲自號忍辱仙人. 我於爾時都無我想. 無有情想無命者想無士夫想無補特伽羅想無意生想無摩納婆想無作者想無受者想. 我於爾時都無有想亦非無想. 是故善現. 菩薩摩訶薩遠離一切想. 應發阿 多羅三 三菩提心. 不住於色應生其心. 不住非色應生其心. 不住聲香味觸法應生其心. 不住非聲香味觸法應生其心. 都無所住應生其心. 何以故. 善現. 諸有所住則爲非住. 是故如來說諸菩薩. 應無所住而行布施. 不應住色聲香味觸法而行布施.
復次善現. 菩薩摩訶薩爲諸有情作義利故. 應當如是棄捨布施. 何以故. 善現. 諸有情想卽是非想. 一切有情如來卽說爲非有情. 善現. 如來是實語者諦語者如語者不異語者. 復次善現. 如來現前等所證法或所說法或所思法. 卽於其中非諦非妄. 善現. 譬如士夫入於闇室都無所見. 當知菩薩若墮於事. 謂墮於事而行布施亦復如是. 善現. 譬如明眼士夫過夜曉已日光出時見種種色. 當知菩薩不墮於事. 謂不墮事而行布施. 亦復如是.
復次善現. 若善男子或善女人. 於此法門受持讀誦究竟通利. 及廣爲他宣說開示如理作意則爲如來. 以其佛智悉知是人則爲如來. 以其佛眼悉見是人則爲如來悉覺是人. 如是有情一切當生無量福聚.


14a. Thereupon the impact of Dharma moved the Venerable Subhuti to tears. Having shed tears, he thus spoke to the Lord: It is wonderful, O Lord, it is exceedingly wonderful, O Well- Gone, how well the Tathagata has taught this discourse on Dharma. Through it cognition has been produced in me. Not have I ever before heard such a discourse on Dharma. Most wonderfully blest will be those who, when this Sutra is being taught, will produce a true perception. And that which is true perception, that is indeed no perception. Therefore the Tathagata teaches, 'true perception, true perception'.― 14b. It is not difficult for me to accept and believe this discourse on Dharma when it is being taught. But those beings who will be in a future period, in the last time, in the last epoch, in the last 500 years, at the time of the collapse of the good doctrine, and who, O Load, will take up this discourse on Dharma, bear it in mind, recite it, study it, and illuminate it in full detail for others, these will be most wonderfully blest.― 14c. In them, however, no perception of a self will take place, or of a being, a soul, or a person. And why? That, O Lord, which is perception of self, that is indeed no perception. That which is perception of a being, a soul or a person, that is indeed no perception. And why? Because the Buddhas, the Lords have left all perceptions behind.
14d. The Lord said: So it is, Subhuti. Most wonderfully blest will be those beings who, on hearing this Sutra, will not tremble, nor be frightened, or terrified. And why? The Tathagata has taught this as the highest (param ) perfection (p ramit ). And what the Tathagata teaches as the highest perfection, that also the innumerable (aparim na) Blessed Buddhas do teach. Therefore is it called the 'highest perfection'.

5c.  Selfless Patience and perfect inner freedom
14e. Moreover, Subhuti, the Tathagata's perfection of patience is really no perfection. And why? Because, Subhuti, when the king of Kalinga cut my flesh from every limb, at that time I had no perception of a self, of a being, of a soul, or a person. And why? If, Subhuti, at that time I had had a perception of self, I would also have had a perception of il-will at that time. And so, if I had a perception of a being, of a soul, or of a person. With my superknowledge I recall that in the past I have for five hundred births led the life of a sage devoted to patience. Then also have I had no perception of a self, a being, a soul, or a person.
  Therefore then, Subhuti, the Bodhi- being, the great being, after he has got rid of all perceptions, should raise his thought to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 He should produce a thought which is unsupported by forms, sounds, smells tastes, touchables, or mind- objects, unsupported by dharma, unsupported by no dharma, unsupported by anything. And why? All supports have actually no support.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Tathagata teaches: By an unsupported Bodhisattva should a gift be given, not by one who is supported by forms, sounds, smells, tastes, touchables, or mind- objects.

5d.  The existence and non-existence of beings
14f. And further, Subhuti, it is for the weal of all beings that a Bodhisattva should give gifts in this manner. And why? This perception of a being, Subhuti, that is just a non- perception. Those all- beings of whom the Tathagata has spoken, they are indeed no- beings. And why? Because the Tathagata speaks in accordance with reality, speaks the truth, speaks of what is, not otherwise. A Tathagata does not speak falsely.

5e.  Truth and Falsehood
14g. But nevertheless, Subhuti, with regard to that dharma which the Tathagata has fully known and demonstrated, on account of that there is neither truth nor fraud.
  In darkness a man could not see anything. Just so should be viewed a Bodhisattva who has fallen among things, and who, fallen among things, renounces a gift. A man with eyes would, when the night becomes light and the sun has arisen, see manifold forms. Just so should be viewed a Bodhisattva who has not fallen among things, and who, without having fallen among things, renounces a gift.

5f.  The Merit acquired, its presuppositions and results
14h. Furthermore, Subhuti, those sons and daughters of good family who will take up this discourse on Dharma, will bear it in mind, recite, study, and illuminate it in full detail for others, they have been known, Subhuti, by the Tathagata with his Buddha- cognition, they have been seen, Subhuti, by the Tathagata with his Buddha- eye, they have been fully known by the Tathagata. All these beings, Subhuti, will beget and acquire an immeasurable and incalculable heap of merit.―


[鳩摩羅什]
 離相寂滅分第十四
 
爾時에 須菩提가 聞說是經하사옵고 深解義趣하사 涕淚悲泣하사 而白佛言하사대 希有世尊하 佛說如是甚深經典은 我從昔來所得慧眼으로 未曾得聞如是之經호이다 世尊하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고 信心淸淨하면 則生實相하리니 當知是人은 成就第一希有功德이니이다 世尊하 是實相者는 則是非相일새 是故로 如來가 說名實相이니이다 世尊하 我今得聞如是經典하고 信解受持는 不足爲難이어니와 若當來世後五百歲에 其有衆生이 得聞是經하고 信解受持하면 是人은 卽爲第一希有니이다 何以故오 此人은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이니 所以者가 何오 我相이 卽是非相이며 人相衆生相壽者相이 卽是非相이라 何以故오 離一切相을 卽名諸佛이니이다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如是如是하다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고 不驚不怖不畏하면 當知是人은 甚爲希有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來가 說第一波羅蜜이 非第一波羅蜜일새 是名第一波羅蜜이니라 須菩提야 忍辱波羅蜜을 如來가 說非忍辱波羅蜜일새 是名忍辱波羅蜜이니라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我昔爲歌利王에 割截身體하야 我於爾時에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호라 何以故오 我於往昔節節支解時에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應生嗔恨일러니라 須菩提야 又念過去於五百世에 作忍辱仙人하야 於爾所世에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호라 是故로 須菩提야 菩薩이 應離一切相하고 發阿 多羅三 三菩提心이니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應生無所住心이니라 若心有住면 卽爲非住니 是故로 佛說菩薩이 心不應住色布施라하노라 須菩提야 菩薩이 爲利益一切衆生하야 應如是布施니라 如來가 說一切諸相이 卽是非相이며 又說一切衆生이 則非衆生이니라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 語者며 不異語者니라 須菩提야 如來所得法은 此法이 無實無虛하니라 須菩提야 若菩薩이 心住於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入暗에 則無所見이요 若菩薩이 心不住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有目하야 日光明照에 見種種色이니라 須菩提야 當來之世에 若有善男子善女人이 能於此經에 受持讀誦하면 則爲如來가 以佛智慧로 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야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하리라

 

14. 고집하는 생각들을 모두 여읜 평안
그때 수보리가 이 경 설하심을 듣고 그 뜻을 깊이 알고는 눈물을 흘리고 슬피울며 부처님께 사뢰었다.
"참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심히 깊은 이 경전을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예로부터 오면서 얻은 바 지혜의 눈으로는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을 얻어 듣지 못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의 말씀을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이 생긴 것이오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줄로 마땅히 알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실다운 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오니 그러므로 여래께서 실다운 상이라고 이름하셨나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와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알아서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이 다음 세상 후오백세에 어느 중생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고 알아서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곧 제일 희유한 사람이옵니다. 왜그러냐 하오면 이 사람은 <나라는 생각>도 없고 <남이라는 생각>도 없고 <중생살이라는 생각>도 없고 <오래 산다는 생각>도 없는 까닭이옵니다. 왜그러냐 하오면 <나라는 생각>이 곧 관념이 아니오며 <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산다는 생각>도 곧 관념이 아닌 때문이옵니다. 왜그러냐 하오면 일체의 온갖 상을 다 여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는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참으로 희유한 사람인 줄 알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이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니 그래서 제일바라밀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을 인욕바라밀이라 한다고 여래가 말하였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에 가리왕에게 몸뚱이를 베이고 찢기었을 적에 내가 그때에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이 없었나니, 어찌한 까닭이냐 하면 내가 지난 날 마디마디 사지를 찢길 때에 만약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마땅히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또 생각하니 과거 오백세 동안 인욕선인이 되었던 저 세상에서도 <나라는 생각>이 없었고 <남이라는 생각>도 없었으며 <중생살이라는 생각>도 없었고 <오래산다는 생각>도 없었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킬 것이니, 물질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며 마땅히 소리·향기·맛·부딪침·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머물은 바 없이 마음을 낼 것이니라. 설사 마음에 머물은 것이 있어도 머물은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부처님이 '보살은 마음을 물질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말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보시하나니, 여래가 말한 일체의 상도 곧 이 상이 아니며 또한 온갖 중생이라 한 것도 곧 중생이 아니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이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진여의 말을 하는 이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법은 이 법이 진실한 것도 아니고 허망한 것도 아니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면 어두운 데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 같고, 만일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밝은 눈으로 햇빛이 밝게 비칠 적에 갖가지의 온갖 물건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면 곧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보나니 한량 없고 가 없는 공덕을 성취하느니라."

金剛般若波羅蜜經上 終

 

 

열 다섯. 경을 지니어 베우고 가르치는 큰 공덕


15a) ya  ca khalu puna  Subh te str  v  puru o v  p rva-   a-k la-samaye Ga g -nad -v luk -sam n  tmabh v n parityajet, eva  madhya- h a-k la-samaye Ga g -nad -v luk -sam n  tmabh v n parityajet, s ya- h a-k la-samaye Ga g -nad -v luk -sam n  tmabh v n parityajet, anena pary ye a bah ni kalpa-ko i-niyuta- atasahasr  y  tmabh v n parityajet; ya  cema  dharmapary ya   rutv  na pratik ipet, ayam eva tato nid na  bahutara  pu yaskandha  prasunuy d aprameyam asamkhyeyam. ka  punar v do yo likhitvodg h  y d dh rayed v cayet paryav pnuy t parebhya  ca vistare a samprak  ayet. 15b) api tu khalu puna  Subh te 'cintyo' tulyo 'yam dharmapary ya . aya  ca Subh te dharmapary y s Tath gatena bh  ito'gra-y na-samprasthit n   sattv n m arth ya  re tha-y na-samprasthit n m sattv n m arth ya, ya ima  dharma-pary yam udgrah  yanti dh rayi yanti v cayisyanti paryav psyanti pare-bhyas ca vistare a samprak  ayi yanti, j  t s te Subh te Thath gatena buddha-j  nena, d  t s te Subh te Tath gatena buddha-cak u  , buddh s te Tath gatena, sarve te Subh te sattv  aprameye a pu ya-skandhena samanv gat  bhavi yanti, acintyena-atulyena-am pyena-aparim  ena pu ya-skandhena samanv gat  bhavi yanti. sarve te Subh te sattv   sam   ena bodhi  dh rayi yanti. tat kasya heto ? na hi  akya  Subh te 'ya  dharmapary yo h na-adhimuktikai  sattvai   rotu  na- tma-d   ikair na sattvad   ikair na j va-d   ikair na pudgala-d   ikai . na-abodhisattva-pratij ai  sattvai   akyam aya  dharma-pary ya   rotu  vodgrah tu  v  dh rayitu  v  v cayitu  v  paryav ptu  v . neda  sth na  vidyate. 15c) api tu khalu puna  Subh te yatra p thiv prade a ida  s tra  prak  ayi yate, p jan ya  sa p thiv prade o bhavi yati sa-deva-m nu a-asurasya lokasya, vandan ya  pradak i  ya  ca sa p thiv prade o bhavi yati. caitya-bh ta  sa p thiv prade o bhavi yanti.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여자나 남자가 오전 중에 강가 강의 모래알들처럼 [많은] 몸들을 바치고 그와 같이 낮에도 강가 강의 모래알들처럼 [많은] 몸들을 바치고 저녁에도 강가 강의 모래알들처럼 [많은] 몸들을 바치며 이런 방법으로 수많은 백천만억 겁 동안 몸들을 바친다 하더라도 이 법문을 듣고서 비방하지 않으면 이것이 참으로 이로 인해서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더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은 것이다. 하물며 [이 법문을] 베껴 쓰고 배우고 [마음에] 간직하고 독송하고 이해하고 남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누가 다시 더 말을 하겠는가?"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이 법문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고 비교할 수가 없다. 최상승에 굳게 나아가는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고, 최고로 수승한 승[최수승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애래는 이런 법문을 설했다. 이 법문을 배우고 [마음에] 간직하고 독송하고 이해하고 남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주는 자들을 수보리여,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안다. 수보리여, 여래는 부처의 눈으로써 그들을 본다. 수보리여, 여래는 그들을 깨달아 [안다]. 그들 모든 중생들은 수보리여,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쌓고 얻게 될 것이다[라고]. 그들은 불가사의하고 비교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고 한량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구족한 자들이 될 것이다[라고]. 수보리여, 그들 일체 중생들은 육신과 더불어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라고].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참으로 확신이 부족한 중생들은 이 법문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아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도 중생이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도 영혼이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도 개아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보살의 서원을 가지지 않은 중생들은 이 법문을 듣거나 배우거나 [마음에] 간직하거나 독송하거나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읻. 이런 경우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어떠한 지방에서건 이 경이 설해진다면 그 지방은 천. 인. 아수라를 포함한 [모든] 세계의 공양을 받아 마땅하고 예배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 지방은 오른쪽에 모시고 도는 [예경]을 받아 마땅한 곳이 될 것이다. 그 지방은 탑묘처럼 여겨질 것이다."


[玄 ] 復次善現. 假使善男子或善女人. 日初時分以 伽河沙等自體布施. 日中時分復以 伽河沙等自體布施. 日後時分亦以 伽河沙等自體布施. 由此異門經於俱 那庾多百千劫以自體布施. 若有聞說如是法門不生誹謗. 由此因緣所生福聚. 尙多於前無量無數. 何況能於如是法門具足畢竟. 書寫受持讀誦究竟通利. 及廣爲他宣說開示如理作意.
復次善現. 如是法門不可思議不可稱量. 應當希冀不可思議所感異熟. 善現. 如來宣說如是法門. 爲欲饒益趣最上乘諸有情故. 爲欲饒益趣最勝乘諸有情故. 善現. 若有於此法門受持讀誦究竟通利及廣爲他宣說開示如理作意. 卽爲如來以其佛智悉知是人. 卽爲如來以其佛眼悉見是人. 則爲如來悉覺是人. 如是有情一切成就無量福聚. 皆當成就不可思議不可稱量無邊福聚. 善現. 如是一切有情其肩荷擔如來無上正等菩提. 何以故. 善現. 如是法門非諸下劣信解有情所能聽聞. 非諸我見. 非諸有情見. 非諸命者見. 非諸士夫見. 非諸補特伽羅見. 非諸意生見. 非諸摩納婆見. 非諸作者見. 非諸受者見. 所能聽聞. 此等若能受持讀誦究竟通利. 及廣爲他宣說開示如理作意無有是處. 復次善現若地方所聞此經典. 此地方所當爲世間諸天及人阿素洛等之所供養. 禮敬右 如佛靈廟.


― 15a. And if, Subhuti, a woman or man should renounce in the morning all their belongings as many times as there are grains of sand in the river Ganges, and if they should do likewise at noon and in the evening, and if in this way they should renounce all their belongings for many hundreds of thousands of millions of milliards of aeons; and someone else, on hearing this discourse on Dharma, would not reject it; then the latter would on the strength of that beget a greater heap of merit, immeasurable and incalculable. What then should we say of him who, after writing it, would learn it, bear it in mind, recite, study and illuminate it in full detail for others?
15b. Moreover, Subhuti, ⑴ unthinkable and ⑵ incomparable is this discourse on Dharma. ⑶ The Tathagata has taught it for the weal of beings who have set out in the best, in the most excellent vehicle. Those who will take up this discourse on Dharma, bear it in mind, recite, study and illuminate it in full detail for others, the Tathagata has known them with his Buddha- cognition, the Tathagata has seen them with his Buddha- eye, the Tathagata has fully known them. All these beings, Subhuti, will be blest with an immeasurable heap of merit, they will be blest with a heap of merit unthinkable, incomparable, measureless and illimitable. All these beings, Subhuti, will carry along an equal share of enlightenment. And why? ⑷ Because it is not possible, Subhuti, that this discourse on Dharma could be heard by beings of inferior resolve, nor by such as have a self in view, a being, a soul, or a person. Nor can beings who have not taken the pledge of Bodhi- beings either hear this discourse on Dharma, or take it up, bear it in mind, recite or study it. That cannot be.
15c. ⑴ Moreover, Subhuti, the spot of earth where this Sutra will be revealed, that spot of earth will be worthy of worship by the whole world with its Gods, men and Asuras, worthy of being saluted respectfully, worthy of being honoured by circumambulation,― like a shrine will be that spot of earth.―


[鳩摩羅什]
 持經功德分第十五

須菩提야 若有善男子善女人이 初日分에 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며 中日分에 復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며 後日分에 亦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야 如是無量百千萬億劫을 以身布施어든 若復有人이 聞此經典하고 信心不逆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何況書寫受持讀誦하야 爲人解說가 須菩提야 以要言之컨댄 是經이 有不可思議不可稱量無邊功德하니 如來가 爲發大乘者說이며 爲發最上乘者說이니라 若有人이 能受持讀誦하야 廣爲人說하면 如來가 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야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無有邊不可思議功德하리니 如是人等은 卽爲荷擔如來阿 多羅三 三菩提니라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樂小法者는 著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일새 則於此經에 不能聽受讀誦하야 爲人解說하리라 須菩提야 在在處處에 若有此經하면 一切世間天人阿修羅의 所應供養이니 當知此處는 卽爲是塔이라 皆應恭敬作禮圍繞하야 以諸華香으로 而散其處하리라


15. 경을 지니어 베우고 가르치는 큰 공덕
"수보리야,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 모래와 같이 많은 몸으로 보시하고 한낮에 또 항하 모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저녁 때에 또한 항하 모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한량 없는 백천만억겁을 몸으로 보시하더라도, 만일 또 다른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신심으로 거슬리지 아니했다면 그 복이 저보다 뛰어나리라. 하물며 이 경을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고 남을 위해 해설해 줌이겠느냐.
수보리야, 요긴하게 말하면 이 경이 가히 생각할 수 없고 가히 헤아릴 수 없는 한 없는 공덕이 있나니, 여래가 대승을 일으킨 이를 위하여 설명한 것이요, 최상승을 일으킨 이를 위하여 설명한 것이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능히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해 일러 주면 여래가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보시는 바 헤아릴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끝 없으며 가히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공덕을 다 얻어 성취하리니, 이러한 사람들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이 되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소승의 법을 좋아하는 이는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이라는 생각>·<오래살겠다는 생각>에 집착하여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읽고 외운다든지 남을 위해 해설하여 주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어느 곳이나 이 경이 있는 곳이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하리니, 마땅히 알라. 이곳은 곧 탑을 모신 곳이어서 응당 모두 공경하고 예배하고 돌면서 모든 꽃과 향을 그곳에 뿌리느니라."

 

 

열 여섯. 경은 능히 어둔 업장을 맑히네


16a) api tu ye te Subh te kulaputr  v  kuladuhitaro vem n eva r p n s tr nt n udgrah  yanti dh rayi yanti v cayi yanti paryav psyanti yoni a  ca manasikari yanti parebhya  ca vistare a samprak  ayi yanti, te paribh ta bhavi yanti, suparibh t   ca bhavi yanti tat kasya heto ? y ni ca te    Subh te sattv n   paurva -janmik ny a ubh ni karm  i k t ny ap ya-sa vartan y ni, d   a eva dharme tay  paribh t-atatay  t ni paurvajanmik ny a ubh ni karm  i k apayi yanti, buddha-bodhi  ca-anupr psyanti. 16b) tat kasya heto ? abhij n my aha  Subh te 't te-dhvany asa khyeyai  kalpair asa khyeyatarair D pa karasya Tath gatasya-arhata  samyaksambuddhasya pare a para-tare a catur-a  ti-buddha-ko i-niyuta- atasahasr  y abh van ye may   r git   r gy  na vir git  . yac ca may  Subh te te Buddh  Bhagavanta  r git   r gy  na vir git , yac ca pa cime k le pa cime samaye pa cim y   pa ca aty   saddharma-v pralopa-k le vartam na im n eva r p n s tr nt n udgrah  yanti dh rayi yanti v cayi yanti paryav psyanti parebhya  ca vistare a samprak  ayi yanti, asya khalu puna  Subh te pu yaskandhasya- antik d asau paurvaka  pu ya-skandha   atatam m api kal   nopaiti, sahasratam   api  atasahasratam m api, ko itam m api ko i- atasatam m api ko i-  atahasratam n api ko i-niyuta- atasahasratamim api, samkhy m api kal m api ga an m apy upam m apy upani adam api y vad aupamyam api na k amate. 16c) sacet puna  Subh te te  m kula-putr     kuladuhitr     v -aha  pu yaskandha  bh  eyam, y vat te kulaputr  v  kuladuhitaro v  tasmin samaye pu yaskandha  prasavi yanti pratigrah  yanti, unm da  sattv  anupr pnuyu  citta-vik epa  v  gaccheyu . -api tu khalu puna  Subh te 'cintyo 'ya  dharmapary yas Tath gatena bh  ita , asya-acintya eva vip ka  pratik  k itavya .


"그런데 수보리여, 그들 선여인이나 선남자들이 이런 형태의 경전들을 배우고 [마음에] 간직하고 독송하고 이해하고 근원적으로 마음에 잡도리하고 남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더라도 [오히려] 그들은 수모를 당하게 되고 아주 심한 모욕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그들 중생들은 전생에서 지은 나쁜 업들로 악도에 떨어져야 하겠지만 현금(現今)에서 그런 모욕을 받음으로 해서 전생에 지은 나쁜 업들이 소멸되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증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나는 분명하게 아나니, 과거세에 셀 수 없고 [도저히] 더 셀 수 없는 그런 겁들 이전에, 연등 여래 아라한 정등각의 이전 더욱 더 이전에 팔만사천백천만억 나유타의 부처님들이 계셨나니, 나는 그분들을 편히 모셨고 편히 모셨기에 그분들도 불편함이 없으셨다. 수보리여, 다시 나는 [거듭 거듭] 그 불세존들을 편히 모셨고 편히 모셨고 편히 모셨기에 그분들도 불편함이 없으셨다.
다시 미래세의 후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할 시기가 되었을 때에 [선남자 선여인들이] 이런 경전의 말씀들을 배우고 [마음에] 간직하고 독송하고 이해하고 남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준다면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이 공덕의 무더기에 비하면 저 앞의 공덕의 무더기는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십만분의 일에도 억분의 일에도 백억분의 이러에도 십조분의 일에도 백천억조분의 일에도 산수로도 비유로도 유비로도 나아가서는 상사(相似)로도 미치지 못한다."

"만일 다시 수보리여, 내가 그 선남자나 선여인들이 그 때에 쌓고 얻게 될 그들의 공덕의 무더기를 모두 말한다면 중생들은 미치거나 마음이 광란하게 될 것이다.
수보리여, 참으로 이 법문은 불가사의하다고 여래는 설하였지만 이 [법문의] 과보도 또한 불가사의하다고 기대해도 좋다."


[玄 ] 復次善現若善男子或善女人. 於此經典受持讀誦究竟通利. 及廣爲他宣說開示如理作意. 若遭輕毁極遭輕毁. 所以者何. 善現. 是諸有情宿生所造諸不淨業應感惡趣. 以現法中遭輕毁故. 宿生所造諸不淨業皆悉消盡. 當得無上正等菩提. 何以故. 善現. 我憶過去於無數劫復過無數. 於然燈如來應正等覺先復過先. 曾値八十四俱 那庾多百千諸佛我皆承事. 旣承事已皆無違犯. 善現. 我於如是諸佛世尊皆得承事. 旣承事已皆無違犯. 若諸有情後時後分後五百歲. 正法將滅時分轉時. 於此經典受持讀誦究竟通利. 及廣爲他宣說開示如理作意. 善現. 我先福聚於此福聚. 百分計之所不能及. 如是千分若百千分. 若俱 百千分. 若俱 那庾多百千分. 若數分若計分若算分若喩分. 若 波尼殺曇分亦不能及. 善現. 我若具說. 當於爾時. 是善男子或善女人所生福聚. 乃至是善男子是善女人所攝福聚. 有諸有情則便迷悶心惑狂亂. 是故善現. 如來宣說如是法門. 不可思議不可稱量. 應當希冀不可思議所感異熟.


― 16a. And yet Subhuti, those sons and daughters of good family, who will take up these very Sutras, and will bear them in mind, recite and study them, they will be humbled,― well humbled they will be! And why? The impure deeds which these beings have done in their former lives, and which are liable to lead them into the states of woe,― in this very life they will, by means of that humiliation, ⑵ annul those impure deeds of their former lives, and ⑶ they will reach the enlightenment of a Buddha.― 16b. With my superknowledge, Subhuti, I recall that in the past period, long before Dipankara, the Tathagata, Arhat, fully Enlightened One, during incalculable, quite incalculable aeons, I gave satisfaction by loyal service to 84,000 million milliards of Buddhas, without ever becoming again estranged from them. But the heap of merit, Subhuti, from the satisfaction I gave to those Buddhas and Lords without again becoming estranged from them― compared with the heap of merit of those who in the last time. the last epoch, the last five hundred years, at the time of the collapse of the good doctrine, will take up these very Sutras, bear them in mind, recite and study them, and will illuminate them in full detail for others, it does not approach one hundredth part, not one thousandth part, nor a one hundred thousandth part, not a ten millionth part, nor a one hundred millionth part, nor a 100,000 millionth part. It does not bear number, nor fraction, nor counting, nor similarity, nor comparison, nor resemblance.― 16c. ⑷ If moreover, Subhuti, I were to teach the heap of merit of those sons and daughters of good family, and how great a heap of merit they will at that time beget and acquire, beings would become frantic and confused. Since, however, Subhuti, the Tathagata has taught this discourse on Dharma as unthinkable, so just an unthinkable karma- result should be expected from it.


[鳩摩羅什]
 能淨業障分第十六

復次須菩提야 善男子善女人이 受持讀誦此經호대 若爲人輕賤하면 是人이 先世罪業으로 應墮惡道언마는 以今世人이 輕賤故로 先世罪業이 則爲消滅하고 當得阿 多羅三 三菩提하리라 須菩提야 我念過去無量阿僧祇劫이 於然燈佛前에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하야 悉皆供養承事하야 無空過者호라 若復有人이 於後末世에 能受持讀誦此經하면 所得功德이 於我所供養諸佛功德으로 百分에 不及一이며 千萬億分과 乃至算數譬喩로 所不能及이니라 須菩提야 若善男子善女人이 於後末世에 有受持讀誦此經하는 所得功德을 我若具說者면 或有人이 聞하고 心卽狂亂하야 狐疑不信하리라 須菩提야 當知是經은 義도 不可思議며 果報도 亦不可思議니라


16. 경은 능히 어둔 업장을 맑히네
"또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 만약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이 사람은 선세 죄업으로 응당 악도에 떨어질 것이지만 이 세상 사람이 천히 여김으로써 선세의 죄업이 곧 소멸되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니라. 수보리야, 내가 생각하니 과거 한량 없는 아승지겁 전에 저 연등부처님 앞에서 팔백사천만억나유타 수의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며 그냥 지나쳐 버린 적이 없었느니라. 만일 또 다른 사람이 이 다음 말세에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한다면 그 공덕은 내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하나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 내지 어떤 수의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다음 말세에 이 경을 받아 지니어 독송하는 이가 얻는 공덕을 내가 다 갖추어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곧 미치고 어지러워 여우처럼 의심하고 믿지 않으리라.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그 뜻도 가히 생각할 수 없고 그 과보 또한 가히 생각할 수 없느니라."

 

 

열 일곱. 마침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깨닫다


17a) atha khalv  yu m n SUBH TIR Bhagavantam etad avocat: katha  Bhagavan bodhisattva-y na-samprasthitena sth tavyam, katha  pratipattavyam, katha  citta  pragrah tavyam?
BHAGAV N  ha: iha Subh te bodhisattva-y na-samprasthitenaiva  cittam utp dayitavya : sarve sattv  may -anupadhi e e nirva adh tau parinirv payitavy  . eva  ca sattv n parinirv pya, na ka cit sattva  parinirv pito bhavati. tat kasya heto ? sacet Subh te bodhisattvasya sattva-sa j   pravarteta, na sa bodhisattva iti vaktavya . j va-sa j   v  y vat pudgalasa j   v , pravarteta, na sa bodhisattva iti vaktavya . tat kasya heto ? na-asti Subh te sa ka cid dharmo yo bodhisattva-y na-samprasthito n ma. 17b) tat ki  manyase Subh te asti sa ka cid dharmo yas Tath gatena D pa karasya Tath gatasya-antik d anuttar   samyaksambodhim abhisambuddha ?
evam ukta  yu m n SUBH TIR Bhagavantam etad avocat: yath -aha  Bhagavan Bhagavato bh  itasya-artham  j n mi, na-asti sa Bhagavan ka cid dharmo yas Tath gatena D pa karasya Tath gatasya-arhata  samyaksambuddhasya antik d anuttar   samyaksambodhim abhisambuddha .
evam ukte BHAGAV N  yu manta  Subh tim etad avocat: evam etat Subh te evam etat, na-asti Subh te sa ka cid dharmo yas Tath gatena D pa karasya Tath gatasya-arhata  samyaksambuddhasya-antik d anuttar   samyaksambodhim abhisambuddha . sacet puna  Subh te ka cid dharmas Tath gatena-abhisambuddho'bhavi yat, na m   D pa karas Tath gato vy kari yad: bhavi yasi tva  m  ava-an gate 'dhvani   kyamunir n ma Tath gato 'rhan samyaksambuddha iti. yasm t tarhi Subh te Tath gatena-arhat  samyaksambudhena na-asti sa ka cid dharmo yo 'nuttar   samyaksambodhim abhisambuddhas, tasm d aha  D pa kare a Tath gatena vy k to: bhavi yasi tva  m  ava-an gate 'dhvani   kyamunir n ma Tath gato 'rhan samyaksambuddha . 17c) tat kasya hetos? Tath gata iti Subh te bh ta- tathat y  etad adhivacana . ya  ka cit Subh ta eva  vadet: Tath gatena-arhat  samyaksambuddhena-anuttar  samyaksambodhir abhisambuddheti, sa vitatha  vadet, abhy cak  ta m   sa Subh te asatodg h tena. tat kasya heto ? # na-asti Subh te sa ka cid dharmo yas Tath gatena-anuttar   samyaksambodhim abhisambuddha . ya  ca Subh te Tath gatena dharmo 'bhisambuddho de ito v , tatra na satya  na m   . tasm t Tath gato bh  ate sarvadharm  Buddha-dharm  iti. tat kasya heto ? sarva-dharm  iti Subh te a-dharm s Tath gatena bh  it . tasm d ucyante sarva-dharm  Buddha-dharm  iti.
17e) tad yath - api n ma Subh te puru o bhaved upetak yo mah k ya .
 yu m n SUBH TIR  ha: yo 'sau Bhagava s Tath gatena puruso bh  ita upetak yo mah k ya iti, a-k ya  sa Bhagava s Tath gatena bh  ita . tenocyata upetak yo mah k ya iti.
17f) BHAGAV N  ha: evam etat Subh te. yo bodhisattvo eva  vaded: aha  sattv n parinirv payi y mi-iti, na sa bodhisattva iti vaktavya . tat kasya heto , asti Subh te sa ka cid dharmo yo bodhisattvo n ma?
SUBH TIR  ha: no hida  Bhagavan, na-asti sa ka cid dharmo yo bodhisattvo n ma.
BHAGAV N  ha: sattv   sattv  iti Subh te a-sattv s te Tath gatena bh  it s, tenocyante sattv  iti. tasm t Tath gato bh  ate: nir tm na  sarva-dharm  ni sattv   nirj v  ni pudgal   sarva-dharm  iti. 17g) ya  Subh te bodhisattva eva  vaded: aha  k etra-vy h n ni p dayi y mi-iti, so 'pi tathaiva vaktavya . tat kasya heto ? k etra-vy h  k etra-vy h  iti Subh te 'vy h s te Tath gatena bh  it h, tenocyante k etra-vy h  iti. 17h) ya  Subh te bodhisattvo nir tm no dharm  nir tm no dharm  ity adhimucyate, sa Tath gatena-arhat  samyaksambuddhena bodhisattvo mah sattva ity  khy ta .


그 때 참으로 수보리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는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조복받아야 합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여기 [이 세상에서]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는 이렇게 마음을 내어야 한다.  '나는 일체 중생들을 [모두] 무여 열반의 경지로 완전히 열반에 들게 하리라. 이렇게 셀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하리라. 이렇게 셀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어떠한 중생도 완전히 열반에 든 자는 없다'라고.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만일 수보리여, 보살에게 중생이라는 산냐가 생긴다면 그는 보살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혼이라는 산냐나 나아가서 개아라는 산냐가 생긴다면 보살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라 이름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여래가 연등 여래의 곁에서 무상 정등각을 철저히 깨달았다 할 그 어떤 법이 있는가?"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 때 수보리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을 깊이 아는 바로는 여래께서 연등 여래 아라한 정등각의 곁에서 무상 정등각을 철저히 깨달았다 할 그 어떤 법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드리자 세존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다, 수보리여. 참으로 그러하다. 여래가 연등 여래 아라한 정등각의 곁에서 무상 정등각을 철저히 깨달았다 할 그 어떤 법이란 없다. 만일 여래가 철저히 깨달았다 할  그 어떤 법이 있었다면 연등 여래가 나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이여, 그대는 미래세에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여래 아라한 정등각이 될 것이다'라고. 참으로 수보리여, 여래가 연등 여래 아라한 정등각의 곁에서 무상 정등각을 철저히 깨달았다 할 그 어떤 법이란 없기 때문에 연등 여래가 나를 인정하기를 '젊은이여, 그대는 미래세에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여래 아라한 정등각이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여래라 하는 것은 '참되고 그러함'을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읻. 수보리여, 여래라 하는 것은 '생겨남이 없음'을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여래라 하는 것은 '법이라는 것까지 완전히 끊어짐'을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여래라 하는 것은 '결코 생겨남이 없음'을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생겨남이 없음, 그것이 곧 최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어떤 자가 말하기를, '여래 아라한 정등각은 무상 정등각을 철저히 깨달았다'라고 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여래가 무상 정등각을 철저히 깨달았다 할 그 어떤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보리여, 여래가 철저히 깨달았거나 설한 법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설하기를 '일체 법이 불법'이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다시] 무슨 이유에서인가? 일체 법이라 한 것은 수보리여, [일체] 법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일체 법이 불법이라고 한 것이다. 예를 들면 수보리여, 사람이 있어 구족한 몸과 큰 몸을 가진 것과 같다."
수보리 존자가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에 대해서 설하시기를 구족한 몸, 큰 몸이라고 하신 것, 그것은 [구족하고 큰] 몸이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구족한 몸, 큰 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와 같다. 수보리여, 보살이 말하기를 '나는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하리라'라고 한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보살이라고 이름할 만한 그 어떤 법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보살이라고 이름할 만한 그 어던 법은 없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중생들, 중생들'이라는 것은 그들은 수보리여, 중생들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했다. 그래서 말하기를 중생들이라 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설하기를 '일체 법은 자아가 없고 일체 법은 중생이 없고 영혼이 없고 개아가 없다'고 한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이와 같이 말하기를 '나는 [불]국토를 건설하리라'라고 한다면 그도 역시 그와 같이 [보살이 아니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불]국토 건설, [불]국토 건설'이라는 것, 그것은 수보리여, [불국토] 건설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했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불]국토 건설이라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법들은 자아가 없다, 법들은 자아가 없다'고 확신할 때 그를 여래 아라한 정등각은 보살 마하살이라고 부른다."


[玄 ] 爾時具壽善現復白佛言. 世尊. 諸有發趣菩薩乘者. 應云何住. 云何修行. 云何攝伏其心. 佛告善現. 諸有發趣菩薩乘者. 應當發起如是之心. 我當皆令一切有情於無餘依妙涅槃界而般涅槃. 雖度如是一切有情令滅度已. 而無有情得滅度者. 何以故. 善現. 若諸菩薩摩訶薩有情想轉不應說名菩薩摩訶薩. 所以者何. 若諸菩薩摩訶薩不應說言有情想轉. 如是命者想士夫想補特伽羅想意生想摩納婆想作者想受者想轉. 當知亦爾. 何以故. 善現. 無有少法名爲發趣菩薩乘者.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如來昔於然燈如來應正等覺所. 頗有少法能證阿 多羅三 三菩提不. 作是語已具壽善現白佛言. 世尊如我解佛所說義者. 如來昔於然燈如來應正等覺所. 無有少法能證阿 多羅三 三菩提. 說是語已佛告具壽善現言. 如是如是. 善現. 如來昔於然燈如來應正等覺所. 無有少法能證阿 多羅三 三菩提. 何以故. 善現. 如來昔於然燈如來應正等覺所. 若有少法能證阿 多羅三 三菩提者. 然燈如來應正等覺. 不應授我記言. 汝摩納婆於當來世. 名釋迦牟尼如來應正等覺. 善現. 以如來無有少法能證阿 多羅三 三菩提. 是故然燈如來應正等覺授我記言汝摩納婆於當來世名釋迦牟尼如來應正等覺. 所以者何. 善現. 言如來者卽是眞實眞如增語. 言如來者卽是無生法性增語. 言如來者卽是永斷道路增語. 言如來者卽是畢竟不生增語. 何以故. 善現. 若實無生卽最勝義. 善現. 若如是說如來應正等覺能證阿 多羅三 三菩提者. 當知此言爲不眞實. 所以者何. 善現. 由彼謗我起不實執. 何以故. 善現. 無有少法如來應正等覺能證阿 多羅三 三菩提. 善現. 如來現前等所證法. 或所說法. 或所思法. 卽於其中非諦非妄. 是故如來說一切法皆是佛法. 善現. 一切法一切法者. 如來說非一切法. 是故如來說名一切法一切法.
佛告善現. 譬如士夫具身大身. 具壽善現卽白佛言. 世尊. 如來所說士夫具身大身. 如來說爲非身. 是故說名具身大身. 佛言善現. 如是如是. 若諸菩薩作如是言. 我當滅度無量有情. 是則不應說名菩薩. 何以故. 善現. 頗有少法名菩薩不. 善現答言. 不也世尊. 無有少法名爲菩薩. 佛告善現. 有情有情者. 如來說非有情故名有情. 是故如來說一切法無有有情. 無有命者無有士夫無有補特伽羅等. 善現. 若諸菩薩作如是言. 我當成辦佛土功德莊嚴亦如是說. 何以故. 善現. 佛土功德莊嚴佛土功德莊嚴者. 如來說非莊嚴. 是故如來說名佛土功德莊嚴佛土功德莊嚴. 善現. 若諸菩薩於無我法無我法深信解者. 如來應正等覺說爲菩薩菩薩.

 

6.  THE BODHISATTVAS

6a.  The Bodhisattva's Vow
17a. [(Subhuti asked: How, O Lord, should one set out in the Bodhisattva- vehicle stand, how progress, how control his thoughts?― The Lord replied: Here, Subhuti, someone who has set out in the Bodhisattva- vehicle should produce a thought in this manner: 'all beings I must lead to Nirvana, into that Realm of Nirvana which leaves nothing behind; and yet, after beings have thus been led to Nirvana, no being at all has been led to Nirvana'. And why? If in a Bodhisattva the notion of a 'being' should take place, he could not be called a 'Bodhi- being'. And likewise if the notion of a soul, or a person should take place in him.)] And why? He who has set out in the Bodhisattva- vehicle― he is not one of the dharmas.

6b.  The Bodhisattva's state of mind when he met Dipankara
17b. What do you think Subhuti, is there any dharma by which the Tathagata, when he was with Dipankara the Tathagata, has fully known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 Subhuti replied: There is not any dharma by which the Tathagata, when he was with the Tathagata Dipankara, has fully known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 The Lord said: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Tathagata Dipankara then predicted of me: 'You, young Brahmin, will be in a future period a Tathagata, Arhat, fully Enlightened, by the name of Shakyamuni!'

6c.  The Bodhisattva at the end of his career
17c. And why? 'Tathagata', Subhuti, is synonymous with true Suchness (tathata).― 17d. And whosoever, Subhuti, were to say, 'The Tathagata has fully known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 he would speak falsely. And why? [(There is not any dharma by which the Tathagata has fully known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 And that dharma which the Tathagata has fully known and demonstrated, on account of that there is neither truth nor fraud.)] Therefore the Tathagata teaches, 'all dharmas are the Buddha's own and special dharmas'. And why? 'All- dharmas', Subhuti, have as no- dharmas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Therefore all dharmas are called the Buddha's own and special dharmas.― 17e. [(Just as a man, Subhuti, might be endowed with a body, a huge body.)]― Subhuti said: That man of whom the Tathagata spoke as 'endowed with a body, a huge body', as a no- body he has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Therefore is he called, 'endowed with a body, a huge body'.

6d.  The Bodhisattva's attitude to his tasks
17f. The Lord said: So it is, Subhuti. The Bodhisattva who would say, 'I will lead beings to Nirvana', he should not be called a 'Bodhi- being'. And why? Is there, Subhuti, any dharma named 'Bodhi- being'?― Subhuti replied: No indeed, O Lord.― The Lord said: Because of that the Tathagata teaches, 'selfless are all dharmas, they have not the character of living beings, they are without a living soul, without personality'.― 17g. [(If any Bodhisttva should say, 'I will create harmonious Buddha- fields')], he likewise should not be callled a Bodhi- being. [(And why? 'The harmonies of Buddhafields, the harmonies of Buddhafields', Subhuti, as no- harmonies have they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Therefore he spoke of 'harmonious Buddhafields'.)] 17h. The Bodhisattva, however, Subhuti, who is intent on 'without self are the dharmas, without self are the dharmas', him the Tathagata, the Arhat, the fully Enlightened One has declared to be a Bodhi- being, a great being.

[鳩摩羅什]
 究竟無我分第十七

爾時에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善男子善女人이 發阿 多羅三 三菩提心하니는 云何應住며 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若善男子善女人이 發阿 多羅三 三菩提心者는 當生如是心이니 我應滅度一切衆生호리라 滅度一切衆生已하야는 而無有一衆生도 實滅度者니라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則非菩薩이니라 所以者가 何오 須菩提야 實無有法發阿 多羅三 三菩提心者니라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於然燈佛所에 有法得阿 多羅三 三菩提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如我解佛所說義컨댄 佛이 於然燈佛所에 無有法得阿 多羅三 三菩提니이다 佛言하사대 如是如是하다 須菩提야 實無有法如來得阿 多羅三 三菩提니라 須菩提야 若有法如來
得阿 多羅三 三菩提者인댄 然燈佛이 卽不與我授記하사대 汝於來世에 當得作佛호대 號를 釋迦牟尼어니와 以實無有法得阿 多羅三 三菩提일새 是故로 然燈佛이 與我授記하사 作是言하사대 汝於來世에 當得作佛하야 號를 釋迦牟尼라하시니 何以故오 如來者는 卽諸法如義니라 若有人이 言如來得阿 多羅三 三菩提라하면 須菩提야 實無有法佛得阿 多羅三 三菩提하니 須菩提야 如來所得阿 多羅三 三菩提는 於是中에 無實無虛하니라 是故로 如來가 說一切法이 皆是佛法이라하노니 須菩提야 所言一切法者는 卽非一切法일새 是故로 名一切法이니라 須菩提야 譬如人身長大하니라 須菩提가 言하사대 世尊하 如來가 說人身長大가 卽爲非大身일새 是名大身이니이다 須菩提야 菩薩도 亦如是하야 若作是言호대 我當滅度無量衆生이라하면 卽不名菩薩이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實無有法名爲菩薩이니라 是故로 佛說一切法이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라하노라 須菩提야 若菩薩이 作是言호대 我當莊嚴佛土라하면 是不名菩薩이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莊嚴佛土者는 卽非莊嚴일새 是名莊嚴이니이다 須菩提야 若菩薩이 通達無我法者는 如來가 說名眞是菩薩이니라

 

17. 마침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깨닫다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마땅히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마땅히 이와같이 마음을 낼 것이니, 내가 일체 중생을 제도하리라 하여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지만 실은 한 중생도 제도된 자가 없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그것은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가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여래가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제가 아는 바로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면, 연등불께서 곧 나에게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서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수기>를 주시지 않으셨을 것인데,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으므로 그래서 연등불께서 나에게 수기를 주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가 될 것이니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하셨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라 함은 곧 모든 법이 같다는 뜻이니,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수보리야, 실로 부처님은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느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 가운데에는 실다움도 없고 허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여래가 말하기를 '일체 법이 다 이 불법이라'고 하였느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 함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러므로 이름이 일체법이니라. 수보리야, 비유컨대 사람의 몸이 아주 큰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고 말씀하신 것은 곧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이옵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으니 만일 '내가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했노라' 하고 말하는 이라면 곧 보살이라 할 수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도 두지 않는 것이 보살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법>이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중생살이>도 없고 <오래산다는 것>도 없다'고 하셨사옵니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했노라' 하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곧 보살이 아니니, 왜 그러냐 하면 여래가 말씀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없는 진리를 통달했다면, 여래가 '참으로 이것이 보살이라' 말하리라."

 

 

열 여덟. 모든 중생과 하나되어 보시고


18a)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sa vidyate Tath gatasya m  sa-cak u ?
SUBH TIR  ha: evam etad Bhagavan, sa vidyate Tath gatasya m  sacak u .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sa vidyate Tath gatasya divya  cak u ?
SUBH TIR  ha: evam etad Bhagav n, sa vidyate Tath gatasya divya  cak u .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sa vidyate Tath gatasya praj  -cak u ?
SUBH TIR  ha: evam etad Bhagav n, sa vidyate Tath gatasya praj  -cak u .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sa vidyate Tath gatasya dharma-cak u ?
SUBH TIR  ha: evam etad Bhagavan, sa vidyate Tath gatasya dharma-cak u .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sa vidyate Tath gatasya buddha-cak u ?
SUBH TIR  ha: evam etad Bhagavan, sa vidyate Tath gatasya buddha-cak u .
18b)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y vantyo Ga g y   mah -nady   v luk , api nu t  valuk s Tath gatena bh  it  ?
SUB TIR  ha: evam etad Bhagavann, evam etat Sugata, bh  it s Tath gatena v luk  .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y vantyo Ga g y   mah -nady   v luk s t vantya eva Ga g -nadyo bhaveyu , t su y  v luk s t vanta  ca lokadh tavo bhaveyu , kaccid bahavas te lokadh tavo bhaveyu ?
SUB TIR  ha: evam etad Bhagavann, evam etat Sugata, bahavas te loka-dh tavo bhaveyu .
BHAGAV N  ha: y vanta  Subh te te u loka-dh tu u sattv s te  m aha  n n bh v   citta-dh r   praj n mi. tat kasya heto ? citta-dh r  citta-dh reti Subh te a-dh rai   Tath gatena bh  it s. tenocyate citta-dh reti. tat kasya heto ? at ta  Subh te citta  nopalabhyate, an gata  citta  nopalabhyate, pratyutpanna  citta  nopalabhyate.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여래는 육안(肉眼)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셧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여래는 천안(天眼)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여래는 혜안(慧眼)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여래는 법안(法眼)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여랜는 불안(佛眼)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강가 큰 강의 모래알들에 관해서 참으로 여래가 설한 적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선서시여. 여래께서는 모래알들에 관해서 설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강가 큰 강의 모래알들만큼의 많은 강가 강들이 있다 하자. [다시] 그들 [강가 강들의] 모래알들만큼 많은 강가 강들과 그만큼의 세계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 세계들은 어떻든 많다 하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선서시여. 그 세계들은 많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들 세계들에 있는 중생들의 여러 가지 마음의 흐름을 나는 [지혜로] 알고 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마음의 흐름, 마음의 흐름'이라는 것, 그것은 수보리여, [마음의] 흐름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했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마음의 흐름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과거심도 얻지 못하고 미래심도 얻지 못하며 현재심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玄 ] 佛告善現. 於汝意云何如來等現有肉眼不. 善現答言. 如是世尊. 如來等現有肉眼. 佛言善現. 於汝意云何. 如來等現有天眼不. 善現答言. 如是世尊. 如來等現有天眼. 佛言善現. 於汝意云何. 如來等現有慧眼不. 善現答言. 如是世尊. 如來等現有慧眼. 佛言善現. 於汝意云何. 如來等現有法眼不. 善現答言. 如是世尊. 如來等現有法眼. 佛言善現. 於汝意云何. 如來等現有佛眼不. 善現答言. 如是世尊. 如來等現有佛眼.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乃至 伽河中所有諸沙. 如來說是沙不. 善現答言. 如是世尊. 如是善逝. 如來說是沙. 佛言善現. 於汝意云何. 乃至 伽河中所有沙數. 假使有如是等 伽河. 乃至是諸 伽河中所有沙數. 假使有如是等世界. 是諸世界寧爲多不. 善現答言. 如是世尊. 如是善逝. 是諸世界其數甚多. 佛言善現. 乃至爾所諸世界中所有有情. 彼諸有情各有種種. 其心流注我悉能知. 何以故. 善現. 心流注心流注者. 如來說非流注. 是故如來說名心流注心流注. 所以者何. 善現. 過去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7.  THE BUDDHAS

7a.  The Buddha's Five Eyes
18a. What do you think, Subhuti, does the fleshly eye of the Tathagata exist?― Subhuti replied: So it is, O Lord, the fleshly eye of the Tathagata does exist.― The Lord asked: What do you think, Subhuti, does the Tathagata's heavenly eye exist, his wisdom eye, his Dharma- eye, his Buddha- eye?― Subhuti replied: So it is, O Lord, the heavenly eye of the Tathagata does exist, and so does his wisdom eye, his Dharma- eye and his Buddha- eye.
 
7b.  The Buddha's superknowledge of others' thoughts
18b. The Lord said: What do you think, Subhuti, has the Tathagata used the phrase, 'as many grains of sand as there are in the great river Ganges'?― Subhuti replied: So it is, O Lord, so it is, O Well- Gone! The Tathagata has done so.― The Lord asked: What do you think, Subhuti, if there were as many Ganges rivers as there are grains of sand in the great river Ganges, and if there were as many world systems as there are grains of sand in them, would those world systems be many?― Subhuti replied: So it is, O Lord, so it is, O Well- Gone, these world systems would by many.― The Lord said: As many beings as there are in these world systems, of them I know, in my wisdom, the manifold trends of thought. And why? 'Trends of thought, trends of thought', Subhuti, as no- trends have they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Therefore are they called 'trends of thought'. And why? Past thought is not got at; future thought is not got at; present thought is not got at.


[鳩摩羅什]
 一體同觀分第十八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肉眼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肉眼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天眼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天眼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慧眼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慧眼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法眼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法眼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佛眼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佛眼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恒河中所有沙를 佛說是沙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說是沙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一恒河中所有沙하야 有如是沙等恒河어든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가 如是寧爲多不아 甚多니이다 世尊하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爾所國土中所有衆生의 若干種心을 如來悉知하노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諸心이 皆爲非心일새 是名爲心이니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過去心不可得이며 現在心不可得이며 未來心不可得이니라


18. 모든 중생과 하나되어 보시고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육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육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천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혜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법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법안이 있아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불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불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항하에 있는 모래에 대해 부처님이 그 모래를 말한적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이 모래를 말씀하셨아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와 같은 수의 항하가 있고 이 모든 항하의 모래와 같은 수의 불세계가 있다면, 참으로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세계 가운데 있는 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가 다 아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고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 그것은 수보리야,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열 아홉. 온 법계를 두루 교화하다


19. tat ki  manyase Subh te ya  ka cit kulaputro v  kuladuhit  vema  tris hasramah s hasra  lokadh tu  sapta-ratna-parip r a  k tv  Tath gatebhyo'rhadbhya  samyaksambuddhebhyo d na  dady t, api nu sa kulaputro v  kuladuhit  v  tato nid na  bahu pu ya-skandha  prasunuy t?
SUBH TIR  ha: bahu Bhagav n bahu Sugata.
BHAGAV N  ha: evam etat Subh te evam etat, bahu sa kulaputro v  kuladuhit  v  tato nid na  pu yaskandha  prasunuy d. tat kasya heto ? pu ya-skandha  pu ya-skandha iti Subh te a-skandha  sa Tath gatena bh  ita . tenocyate pu ya-skandha iti. sacet Subh te pu ya- skandho'bhavi yan, na Tath gato'bh  i yat pu ya-skandha  pu ya-skandha iti.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가득 채우고서 여래 아라한 정등각들께 보시를 행한다면 그 선남자나 선여인은 이로 인해서 참으로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많습니다. 선서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다. 수보리여. 참으로 그러하다. 그 선남자나 선여인은 이로 인해서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을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공덕의 무더기, 공덕의 무더기'라는 것, 그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였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공덕의 무더기라 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일 공덕의 무더기가 [실제로] 있다고 한다면 여래는 '공덕의 무더기, 공덕의 무더기'라고 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玄 ]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若善男子或善女人. 以此三千大千世界盛滿七寶奉施如來應正等覺. 是善男子或善女人. 由是因緣所生福聚寧爲多不. 善現答言. 甚多世尊. 甚多善逝. 佛言善現. 如是如是. 彼善男子或善女人. 由此因緣所生福聚其量甚多. 何以故. 善現. 若有福聚如來不說福聚福聚.


7c.  The Buddha's Merit is no Merit
19. What do you think, Subhuti, if a son or daughter of good family had filled this world system of 1,000 million worlds with the seven precious things, and then gave it as a gift to the Tathagatas, the Arhats, the fully Enlightened Ones, would they on the strength of that beget a great heap of merit?― Subhuti replied: they would, O Lord, they would, O Well- Gone!― The Lord said: So it is, Subhuti, so it is. On the strenght of that this son or daughter of good family would beget a great heap of merit, immeasurable and incalculable. But if, on the other hand, there were such a thing as a heap of merit, the Tathagata would not have spoken of a 'heap of merit'.

 

[鳩摩羅什]
 法界通化分第十九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若有人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로 以用布施하면 是人이 以是因緣으로 得福多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此人이 以是因緣으로 得福이 甚多니이다 須菩提야 若福德이 有實인댄 如來가 不說得福德多어니와 以福德이 無故로 如來가 說得福德多니라


19. 온 법계를 두루 교화하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해서 받는 복이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는 복이 매우 많사옵니다."
"수보리야, 만일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아니할 것인데 복덕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여래가 복덕이 많다 말 하느니라."

 

 

스물. 물질과 모습을 여의다


20a) tat ki  manyase Subh te r pa-k ya-parini patty  Tath gato dra  avya ?
SUBH TIR  ha: no h da  Bhagavan, na r pa-k ya-parini patty  Tath gato dra  avya  tat kasya heto ? r pa-k y -parini patti r pak ya-parini pattir iti Bhagavan aparini pattir e   Tath gatena bh  it  tenocyate r pak ya-parini pattir iti.
20b)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lak a a-sampad  Tath gato dra  avya ?
SUBH TIR  ha: no h da  Bhagavan, na lak a a-sampad  Tath gato dra  avya . tat kasya heto ? yai   Bhagava l lak a a-sampat Tath gatena bh  it , alak a a-sampad e   Tath gatena bh  it . tenocyate lak a a-sampad iti.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색신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야 하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색신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색신 구족, 색신 구족'이라는 것, 그것은 [색신] 구족이 아니라고 세존께서 설하셨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색신 구족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32가지 대인]상을 구족했다 하여 여래라고 보아야 하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32가지 대인]상을 구족했다 하여 여래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32가지 대인]상을 구족했다고 여래께서 설하신 것 그것은 [32가지 대인]상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셨나니 그래서 [32가지 대인]상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玄 ]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可以色身圓實觀如來不. 善現答言. 不也世尊. 不可以色身圓實觀於如來. 何以故. 世尊. 色身圓實色身圓實者. 如來說非圓實. 是故如來說名色身圓實色身圓實.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可以諸相具足觀如來不. 善現答言. 不也世尊. 不可以諸相具足觀於如來. 何以故. 世尊. 諸相具足諸相具足者. 如來說爲非相具足. 是故如來說名諸相具足諸相具足.


7d.  The Buddha's Physical Body
20a. What do you think, Subhuti, is the Tathagata to be seen by means of the accomplishment of his form- body? Subhuti replied: No indeed, O Lord, the Tathagata is not to be seen by means of the accomplishment of his form- body. And why? 'Accomplishment of his form- body, accomplishment of his form- body', this, O Lord, has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as no- accomplishment. Therefore is it called 'accomplishment of his form- body',― 20b. The Lord asked: What do you think, Subhuti, is the Tathagata to be seen through his possession of marks?― Subhuti replied: No indeed, O Lord. And why? This possession of marks, O Lord, which has been taught by he Tathagata, as a no- possession of no- marks this has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Therefore is it called possession of marks'.


[鳩摩羅什]
 離色離相分第二十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佛을 可以具足色身으로 見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如來를 不應以具足色身으로 見이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具足色身이 卽非具足色身일새 是名具足色身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를 可以具足諸相으로 見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如來를 不應以具足諸相으로 見이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諸相具足이 卽非具足일새 是名諸相具足이니이다


20. 물질과 모습을 여의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를 구족한 육신으로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한 육신으로 볼 수 없사옵니다. 왜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구족한 육신이 곧 구족한 육신이 아니라, 이름이 구족한 육신이기 때문이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구족한 몸매로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한 몸매로 볼 수 없사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몸매의 구족은 곧 구족이 아니옵고 그 이름이 몸매의 구족이기 때문이옵니다."

 


스물 하나. 말씀하지만 말씀하신 것이 없어라


21a) BHAGAV N  ha: tat ki  manyase Subh te, api nu Tath gatasyaiva  bhavati: may  dharmo de ita iti?
SUBH TIR  ha: no h da  Bhagavan, na Tath gatasyaiva  bhavati: may  dharmo de ita iti.
BHAGAV N  ha: ya  Subh te eva  vadet: Tath gatena dharmo de ita iti, sa vitatha  vadet, abhy cak  ta m   sa Subh te 'satodg hitena. tat kasya heto ? dharma-de an  dharma-de aneti Subh te, na-asti sa ka cid dharmo yo dharma-de an  n mopalabhyate.
21b) evam ukta  yu m n SUBH TIR Bhagavantam etad avocat: asti Bhagavan kecit sattv  bhavi yanty an gate 'dhvani pa cime k le pa cime samaye pa cim y   pa ca- aty   saddharma-vipralope varta  ne ya im n eva r p n dharm    rutv -abhi raddadh syanti?
BHAGAV N  ha: na te Subh te sattv  na-a-sattv  . tat kasya heto ? sattv   sattv  iti Subh te sarve te Subh te a-sattv s Tath gatena bh  it   tenocyante sattv  iti.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참으로 여래가 '나는 법을 설했다'는 이런 [생각을] 내겠는가?"
수보리는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나는 법을 설했다'는 그런 [생각을] 내시지 않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누가 이와 같이 말하기를, '여래는 법을 설했다'고 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설법, 설법'이라 [하지만] 수보리여, 설법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한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 때 수보리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들이 있어서 미래세의 후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할 시기가 되었을 때에 이런 형태의 법들을 듣고서 수승한 믿음을 일으키겠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들은 중생이 아니고 중생이 아님도 아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중생, 중생'이라 [부르는] 그들 모두는 중생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였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중생이라 하기 때문이다."

 

[玄 ]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如來頗作是念. 我當有所說法耶. 善現. 汝今勿當作如是觀. 何以故. 善現. 若言如來有所說法卽爲謗我. 爲非善取. 何以故. 善現. 說法說法者. 無法可得故名說法. 爾時具壽善現白佛言. 世尊. 於當來世後時後分後五百歲. 正法將滅時分轉時. 頗有有情聞說如是色類法已能深信不. 佛言善現. 彼非有情非不有情. 何以故. 善現. 一切有情者. 如來說非有情故名一切有情.


7e.  The Buddha's teaching
21a. The Lord asked: What do you think, Subhuti, does it occur to the Tathagata, 'by me has Dharma been demonstrated?' Whosoever, Subhuti, would say, 'the Tathagata has demonstrated Dharma', he would speak falsely, he would misrepresent me by seizing on what is not there. And why? 'Demonstration of dharma, demonstration of dharma', Subhuti, there is not any dharma which could be got at as a demonstration of dharma.

21b. Subhuti asked: Are there, O Lord, any beings in the future, in the last time, in the last epoch, in the last 500 years, at the time of the collapse of the good doctrine who, on hearing such dharmas, will truly believe?― The Lord replied: They, Subhuti, are neither beings nor no- beings. And why? 'Beings, beings', Subhuti, the Tathagata has taught that they are all no- beings. Therefore has he spoken of 'all beings'.


[鳩摩羅什]
 非說所說分第二十一
 
須菩提야 汝勿謂如來가 作是念호대 我當有所說法이라하라 莫作是念이니 何以故오 若人이 言如來가 有所說法이라하면 卽爲謗佛이라 不能解我所說故니라 須菩提야 說法者는 無法可說을 是名說法이니라 爾時에 慧命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頗有衆生이 於未來世에 聞說是法하고 生信心不잇가 佛言하사대 須菩提야 彼非衆生이며 非不衆生이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衆生衆生者는 如來가 說非衆生일새 是名衆生이니라

 

21. 말씀하지만 말씀하신 것이 없어라
"수보리야, 너는 말하지 말라 여래가 '내가 설명한 바 법이 있다고 생각하리라'는 이런 생각 내지 말라. 왜냐 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설명한 바 법이 있다'고 하면 곧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고, 나의 말한 바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법을 말한다는 것은 법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설법이라 이름하느니라."
그때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이 다음 세상에 이런 법문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는 이가 있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중생이다 중생이다 하지만 여래는 중생이 아닌 것을 중생이라 이름하여 말하느니라."

 

 

스물 둘. 진리는 얻는 것이 아니며


22. tat ki  manyase Subh te, api nv asti sa ka cid dharmo yas Tath gatena-anuttar   samyaksambodhim abhisambuddha ?
 yu m n SUBH TIR  ha: no h dam Bhagavan na-asti sa Bhagavan ka cid dharmo yas Tath gatena-anuttar i  samyaksambodhim abhisambuddha .
BHAGAV N  ha: evam etat Subh te evam etat, a ur api tatra dharmo na sa vidyate nopalabhyate. tenocyate 'nuttar  samyaksambodhir iti.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여래가 무상 정등각을 철저히 깨달았다 할 그 어떤 법이 있는가?"
수보리 존자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무상 정등각을 철저히 깨달았다 할 그 어떤 법이 있지 않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다. 수보리여. 참으로 그러하다. 털끝만한 법도 있지 않으며 얻은 것이 없으니 그래서 말하기를 무상 정등각이라고 한다."


[玄 ]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頗有少法如來應正等覺現證無上正等菩提耶. 具壽善現白佛言. 世尊. 如我解佛所說義者. 無有少法如來應正等覺現證無上正等菩提. 佛言善現. 如是如是. 於中少法無有無得故名無上正等菩提.


7f.  The Buddha's Dharma
22. What do you think, Subhuti, is there any dharma by which the Tathagata has fully known the upmost, right and perfect enlhtenment?― Subhuti replied: No indeed, O Load, there is not any dharma by which the Tathagata has fully known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 The Lord said: So it is, Subhuti, so it is. Not even least (anu) dharma is there found or got at. Therefore is it called 'utmost (anuttara),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


[鳩摩羅什]
 無法可得分第二十二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佛이 得阿 多羅三 三菩提는 爲無所得耶니이다 佛言하사대 如是如是하다 須菩提야 我於阿 多羅三 三菩提에 乃至無有少法可得일새 是名阿 多羅三 三菩提니라


22. 진리는 얻는 것이 아니며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어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것은 얻은 것이 없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내지 조그마한 법도 얻은 것이 없으니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느니라."

 


스물 셋. 맑은 마음으로 선을 행하라


23. api tu khalu puna  Subh te sama  sa dharmo na tatra ki cid vi amam. tenocyate 'nuttar  samyaksambodhir iti. nir tmatvena ni sattvatvena nirj vatvena ni pudgalatvena sam  s nuttar  samyaksambodhi  sarvai  ku alair dharmair abhisambudhyate. tat kasya heto ? ku al  dharm   ku al  dharma iti Subh te a-dharma  caiva te Tath gatena bh  it  . tenocyante ku al  dharm  iti.

 "그런데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이 법은 평등하여 거기에는 어떤 차별이 없다. 그래서 말하기를 무상정등각이라 한다. 무상정등각은 자아가 없고, 중생이 없고, 영혼이 없고 개아가 없기 때문에 평등하나니 그것은 모든 능숙한 법[선법(善法)]에 의해서 철저히 깨달아지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능숙한 법들, 능숙한 법들' 이라는 것, 그것들은 [능숙한] 법들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였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능숙한 법들이라 하기 때문이다."


[玄 ] 復次善現. 是法平等於其中間無不平等故名無上正等菩提. 以無我性無有情性無命者性無士夫性無補特伽羅等性平等故名無上正等菩提. 一切善法無不現證. 一切善法無不妙覺. 善現. 善法善法者. 如來一切說爲非法. 是故如來說名善法善法.


― 23. Furthermore, Subhuti, self- identical (sama) is that dharma, and nothing is therein at variance (vishama). Therefore is it called 'utmost, right (samyak) and perfect (sam- ) enlightenment'. Self- identical through the absence of a self, a being, a soul, or a person,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 is fully known as the totality of all the wholesome dharmas. 'Wholesome dharmas, wholesome dharmas', Subhuti― yet as no- dharmas have they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Therefore are they called 'wholesome dharmas'.


[鳩摩羅什]
 淨心行善分第二十三

復次須菩提야 是法이 平等하야 無有高下일새 是名阿 多羅三 三菩提니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로 修一切善法하면 卽得阿 多羅三 三菩提하리라 須菩提야 所言善法者는 如來가 說卽非善法일새 是名善法이니라


23. 맑은 마음으로 선을 행하라
"또 수보리야, 이 법이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 하느니라.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중생살이>도 없고 <오래산다>는 생각도 없이 온갖 착한 법을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착한 법이라 함은 여래가 곧 착한 법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이것이 이름이 착한 법이니라."

 

 

스물 넷. 복을 감히 지혜에 견줄 수 있으랴


24. ya  ca khalu puna  Subh te str  v  puru o v  y vantas tris hasramah s hasre lokadh tau Sumerava  parvata-r j nas t vato r   n sapt n   ratn n m abhisa h tya Tath gatebhyo'rhadbhya  samyaksambuddhebhyo d na  dady t, ya  ca kulaputro v  kuladuhit  veta  praj  p ramit y  dharmapary y d anta a  catu p dik m api g th m udg hya parebhyo des yed, asya Subh te pu yaskandhasya-asau paurvaka  pu yaskandha   atatam m api kal   nopaiti y vad upani adam api na k amate.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여자나 남자가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산의 왕인 [모든] 수메루들과 같은 무더기만큼의 칠보들을 모아서 여래 아라한 정등각들께 보시를 행한다 하더라도 다시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법문으로부터 단지 네 구절로 된 게송이라도 뽑아내어 남들에게 가르쳐 준다면 이 공덕의 무더기에 비하여 저 앞의 공덕의 무더기는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내지는 유비(類比)로도 미치지 못한다."


[玄 ] 復次善現. 若善男子或善女人. 集七寶聚量等三千大千世界. 其中所有妙高山王持用布施. 若善男子或善女人. 於此般若波羅蜜多經中乃至四句伽他受持讀誦究竟通利. 及廣爲他宣說開示如理作意. 善現. 前說福聚於此福聚. 百分計之所不能及. 如是千分若百千分若俱 百千分. 若俱 那庾多百千分. 若數分若計分若算分若喩分若烏波尼殺曇分亦不能及.


7g.  Once more about the Buddha's Merit
24. And again, Subhuti, if a woman or man had piled up the seven precious things until their bulk equalled that of all the Sumerus, kings of mountains, in the world system of 1,000 million worlds, and would give them as a gift; and if, on the other hand, a son or daughter of good family would take up from this Praj  p ramit , this discourse on Dharma, but one stanza of four lines, and demonstrate it to others, compared with his heap of merit the former heap of merit does not approach one hundredth part, etc., until we come to, it will not bear any comparison.


[鳩摩羅什]
 福智無比分第二十四

須菩提야 若三千大千世界中所有諸須彌山王의 如是等七寶聚를 有人이 持用布施어든 若人이 以此般若波羅蜜經으로 乃至四句偈等을 受持讀誦하야 爲他人說하면 於前福德으로 百分에 不及一이며 百千萬億分과 乃至算數譬喩로 所不能及이니라


24. 복을 감히 지혜에 견줄 수 있으랴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수미산왕만한 칠보의 덩어리로 보시해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에서 네 글귀의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고 남을 위해 설명해 주었다면, 앞의 복덕으로는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온갖 산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느니라."

 

 

스믈 다섯. 교화하지만 교화한 바가 없도다


25. tat ki  manyase Subh te api nu Tath gatasyaiva  bhavati: may  sattv h parimocit  iti? na khalu puna  Subh te eva  dra  avya . tata kasya heto ? na-asti Subh te ka cit sattvo yas Tath gatena parimocita . yadi puna  Subh te ka cit sattvo' bhavi yat yas Tath gatena parimocita  sy t, sa eva Tath gatasya - tma-gr ho'bhavi yat, sattva-gr ho j va-gr ha  pudgala-gr ho 'bhavi yat.  tma-gr h  iti Subh te agr ha e a Tath gatena bh  ita . sa ca b lap thagjanair udg h ta . b lap thag-jan  iti Subh te a-jan  eva te Tath gatena bh  it  . tenocyante b lap thagjan  iti.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참으로 여래가 '나는 중생들을 완전히 해탈하게 했다'는 이런 [생각을] 내겠는가? 참으로 그러나 수보리여. 이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여래가 완전히 해탈하게 한 어떤 중생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다시 수보리여, 여래가 완전히 해탈하게 했다 할 어떤 중생이 존재한다면 참으로 여래에게 자아에 대한 집착이 있는 것이고 중생에 대한 집착, 영혼에 대한 집착, 개아에 대한 집착이 있는 것이다. 자아에 대한 집착 그것은 수보리여, [자아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였다. 그것은 단지 어리석은 범부들이 집착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어리석은 범부들이라 하지만 그들은 [어리석은] 범부들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였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어리석은 범부들이라 한다."


[玄 ]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如來頗作是念. 我當度脫諸有情耶. 善現. 汝今勿當作如是觀. 何以故. 善現. 無少有情如來度者. 善現. 若有有情如來度者. 如來卽應有其我執有有情執有命者執有士夫執有補特伽羅等執. 善現. 我等執者如來說爲非執. 故名我等執. 而諸愚夫異生强有此執. 善現. 愚夫異生者. 如來說爲非生故名愚夫異生.


7h.  The Buddha as a Savior, and the nature of emancipation
25. What do you think, Subhuti, does it occur to a Tathagata, 'by me have beings been set free'? Not thus should you see it, Subhuti! And why? There is not any being whom the Tathagata has set free. Again, if there had been any being whom the Tathagata had set free, then surely there would have been on the part of the Tathagata a seizing of a self, of a being, of a soul, of a person. 'Seizing of a self', as a no- seizing, Subhuti, has that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And yet the foolish common people have siezed upon it. 'Foolish common people', Subhuti, as really no people have they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Therefore are they called 'foolish common people'.


[鳩摩羅什]
 化無所化分第二十五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汝等은 勿謂如來作是念호대 我當度衆生이라하라 須菩提야 莫作是念이니 何以故오 實無有衆生如來度者니 若有衆生如來度者면 如來가 卽有我人衆生壽者니라 須菩提야 如來가 說有我者는 卽非有我어늘 而凡夫之人이 以爲有我일새 須菩提야 凡夫者는 如來가 說卽非凡夫是名凡夫니라


25. 교화하지만 교화한 바가 없도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여래가 생각하기를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하리라' 한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야, 그런 생각을 하지말라. 왜냐하면 실로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중생이 있어서 여래가 제도하였다면 여래는 곧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산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나라는 생각>이 있다 함은 곧 <나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닌데 범부들이 <나라는 생각>이 있다고 함이니라.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도 여래는 곧 범부가 아니라고 말하나니 이름을 범부라 하느니라."

 

 

스믈 여섯. 법신은 모습이 아니다


26a) tat ki  manyase Subh te, lak a a-sampad  Tath gato dra  avya ?
SUBH TIR  ha: no h da  Bhagav n, yath -aha  Bhagavato bh  itasya-artham  j n mi na lak a a-sampad  Tath gato dra  avya .
BHAGAV N  ha: s dhu s dhu Subh te, evam etat Subh te evam etad, yath  vadasi: na lak ana-sampad  Tath gato dra  avya . tat kasya heto ? sacet puna  Subh te lak a a-sampad  Tath gato dra  avyo 'bhavi yad, r j -api cakravart  Tath gato'bhavi yat. tasm n na lak a a-sampad  Tath gato dra  avya .
 yu m n SUBH TIR Bhagavantam etad avocat: yath -aha  Bhagavato bh  itasya-artham  j n mi, na lak a a-sampad  Tath gato dra  avya .
Atha khalu BHAGAV  S tasy   vel y m ime g the abh  ata:

 YE M   R PE A CA-ADR K UR
 YE M   GHO E A CA-ANVAYU 
 MITHY -PRAH  A-PRAS T 
 NA M   DRAK YANTI TE JAN  

26b)  dharmato Buddh  dra  avy 
 dharnak y  hi n yak  
 dharmat  ca na vij ey 
 na s   aky  vij nitu .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32가지 대인]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야 하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의 설하신 뜻을 깊이 아는 바로는 [32가지 대인]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셧다. "선재 선재라. 수보리여, 참으로 그러하다 수보리여, 참으로 그러하다. [32가지 대인]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만일 다시 수보리여, [32가지 대인]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야 한다면 전륜성왕도 역시 여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2가지 대인]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봐서는 안 된다."
수보리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제가 세존의 설하신 뜻을 깊이 아는 바로는 [32가지 대인]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봐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참으로 세존께서 그 때에 이 게송을 읊으셨다.

"형상으로 나를 보았거나
소리로서 나를 찾았던 자들은
그릇되이 정진한 것이니
그 사람들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법으로 부처님들을 보아야 한다.
참으로 스승들은 법을 몸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의 본성은 분별로 알아지지 않나니
그것은 분별해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玄 ]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可以諸相具足觀如來不. 善現答言. 如我解佛所說義者. 不應以諸相具足觀於如來. 佛言善現. 善哉善哉. 如是如是. 如汝所說. 不應以諸相具足觀於如來. 善現. 若以諸相具足觀如來者. 轉輪聖王應是如來. 是故不應以諸相具足觀於如來. 如是應以諸相非相觀於如來. 爾時世尊而說頌曰
    諸以色觀我  以音聲尋我  彼生履邪斷  不能當見我
    應觀佛法性  卽導師法身  法性非所識  故彼不能了


7i.  The true nature of a Buddha
26a. What do you think, Subhuti, is the Tathagata to be seen by means of his possession of marks?― Subhuti replied: No indeed, O Lord.― The Lord said: If, Subhuti, the Tathagata could be recognized by his possession of marks, then also the universal monarch would be a Tathagata. Therefore the Tathagata is not to be seen by means of his possession of marks.― Subhuti then said: As I, O Lord, understand the Lord's teaching, the Tathagata is not to be seen through his possession of marks.
  Further the Lord taught on that occasion the following stanzas:

 Those who by my form did see me,
   And those who followed me by voice
   Wrong the efforts they engaged in,
   Me those people will not see.

26b.  From the Dharma should one see the Buddhas,
 From the Dharmabodies comes their guidance.
 Yet Dharma's true nature cannot be discerned,
 And no one can be conscious of it as an object.


[鳩摩羅什]
 法身非相分第二十六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如是如是하니이다 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佛言하사대 須菩提야 若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者인댄 轉輪聖王이 卽是如來로다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如我解佛所說義컨댄 不應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爾時에 世尊이 而說偈言하사대

 若以色見我어나  以音聲求我하면
 是人은 行邪道라  不能見如來니라


26. 법신은 모습이 아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가히 서른두가지 상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그러하옵니다. 서른 두 가지 상으로서 여래를 뵐 수 있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만일 서른 두 가지 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 하겠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을 제가 아옵기로는 서른 두가지 상으로써 여래를 뵐 수 없사옵니다."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일 모양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는 이는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니
 여래를 볼 수 없으리."

 

 

스믈 일곱. 그러나 끊음도 멸함도 없다


27. tat ki  manyase Subh te lak a a-sampad  Tath gatena anuttar  samyaksambodhir abhisambuddh ? na khalu punas te Subh te eva  dra  avya . tat kasya heto ? na hi Subh te lak a a-sampad  Tath gatena anuttar  samyaksambodhir abhisambuddh  sy t. na khalu punas te Subh te ka cid eva  vaded: bodhisattva-y na-sampratisthitai  kasyacid dharmasya vin  a  praj apta ucchedo veti. na khalu punas te Subh te eva  dra  avyam. tat kasya heto ? na bodhisattva-y na-samprasthitai  kasyacid dharmasya vin  a  praj apto noccheda .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32가지 대인]상을 구족하였기 때문에 여래는 무상 정등각을 철저하게 깨달았는가?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그대는 이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참으로 수보리여, [32가지 대인]상을 구족하였기 때문에 여래는 무상 정등각을 '철저하게 깨달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누구도 그대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들은 어떤 법의 소멸이나 단멸을 인정한다'라고. 수보리여, 참으로 그대는 이렇게 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들은 어떤 법의 소멸이나 단멸을 결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玄 ] 佛告善現. 於汝意云何. 如來應正等覺以諸相具足現證無上正等覺耶. 善現. 汝今勿當作如是觀. 何以故. 善現. 如來應正等覺不以諸相具足現證無上正等菩提.
復次善現. 如是發趣菩薩乘者. 頗施設小法若壞若斷耶. 善現. 汝今勿當作如是觀. 諸有發趣菩薩乘者. 終不施設少法若壞若斷.


7k.  The effectiveness of meritorious deeds
27. What do you think, Subhuti, has the Tathagata fully known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 through his possession of marks? Not so should you see it, Subhuti. And why? Because the Tathagata could surely not have fully known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 through his possession of marks.
  Nor should anyone, Subhuti, say to you, 'those who have set out in the Bodhisattva- vehicle have conceived the destruction of a dharma, or its annihilation'. Not so should you see it, Subhuti! For those who have set out in the Bodhisattva- vehicle have not conceived the destruction of a dharma, or its annihilation.


[鳩摩羅什]
 無斷無滅分第二十七

須菩提야 汝若作是念호대 如來가 不以具足相故로 得阿 多羅三 三菩提아 須菩提야 莫作是念호대 如來가 不以具足相故로 得阿 多羅三 三菩提라하라 須菩提야 汝若作是念호대 發阿 多羅三 三菩提心者는 說諸法斷滅가 莫作是念이니 何以故오 發阿 多羅三 三菩提心者는 於法에 不說斷滅相이니라


27. 그러나 끊음도 멸함도 없다
"수보리야, 네가 만일 생각하기를, '여래는 구족상을 쓰지 않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도다' 하겠느냐, 그런생각을 하지 말라. '여래가 구족상을 쓰지 않음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지 말라."
"수보리야, 네가 만일 생각하기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모든 법이 단멸하는 것으로 말하는구나' 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 그러냐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모든 법에 대해 단멸상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스믈 여덟. 보살은 지은 복덕을 돌려받지도
            탐하지도 않느니


28. ya  ca khalu puna  Subh te kulaputro v  kuladuhit  v  ga g nadi-v luk -sam  l lokadh t n sapta-ratna-parip r  n k tv  Tath gatebhyo'rhadbhya  samyaksambuddhebhyo d na  dady t, ya  ca bodhisattvo nir tmake v anutpatti-ke u dharme u k  nti  pratilabhate, ayam eva tato nid na  bahutara  pu ya-skandha  prasaved aprameyam asamkhyeyam. na khalu puna  Subh te bodhisattvena mah sattvena pu ya-skandha  parigrah tavya 
ayu m n SUBH TIR  ha: nanu Bhagavan bodhisattvena pu yaskandha  parigrah tavya ?
BHAGAV N  ha: parigrah tavya  Subh te nodgrah tavya  tenocyate parigrah tavya iti.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선남자나 선여인이 강가 강의 모래알들과 같이 많은 세계들을 칠보로써 가득 채우고서 여래 아라한 정등각들에게 보시를 행한다 하더라도 다시 보살이 자아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법들에서 인욕을 성취한다면 이로 인해서 참으로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더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을 것이다.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보살 마하살은 공덕의 무더기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
수보리 존자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보살은 공덕의 무더기를 수용해서는 안 됩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수용은 하더라도 국집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말하기를 수용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玄 ] 復次善現. 若善男子或善女人. 以 伽河沙等世界盛滿七寶奉施如來應正等覺. 若有菩薩於諸無我無生法中獲得堪忍. 由是因緣所生福聚甚多於彼.
復次善現. 菩薩不應攝受福聚. 具壽善現卽白佛言. 世尊. 云何菩薩不應攝受福聚. 佛言善現. 所應攝受不應攝受. 是故說名所應攝受.


28. And again, Subhuti, if a son or daughter of good family had filled with the seven precious things as many world systems as there are grains of sand in the river Ganges, and gave them as a gift to the Tathagatas, Arthats, fully Enlightened Ones,― and if on the other hand a Bodhisattva would gain the patient acquiescence in dharmas which are nothing of themselves and which fail to be produced, then this latter would on the strenght of that beget a greater heap of merit, immeasurable and incalculable.
  Moreover, Subhuti, the bodhisattva should not acquire a heap of merit.― Subhuti said: Surely, O Lord, the Bodhisattva should acquire a heap of merit?― The Lord said: 'Should acquire', Subhuti, not 'should seize upon.' Therefore is it said, 'should acquire'.


[鳩摩羅什]
 不受不貪分第二十八
 
須菩提야 若菩薩이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로 持用布施어든 若復有人이 知一切法無我하야 得成於忍하면 此菩薩이 勝前菩薩의 所得功德이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以諸菩薩이 不受福德故니라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云何菩薩이 不受福德이니잇고 須菩提야 菩薩의 所作福德은 不應貪著일새 是故로 說不受福德이니라

 

28. 보살은 지은 복덕을 돌려받지도 탐하지도 않느니
"수보리야, 보살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했더라도, 만일 또 다른 사람이 일체 법에 내가 없음을 알아서 참다운 진리를 이루어 얻었다면, 이 보살이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더 뛰어나리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셨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 것이옵니까."
"수보리야, 보살이 복덕을 짓는 것은 탐착해서가 아니니 그러므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스믈 아홉. 여래의 몸가짐은 그대로 평안하네


29. api tu khalu puna  Subh te ya  ka cid eva  vadet: Tath gato gacchati v   gacchati v , ti  hati v  ni  dati v   ayy   v  kalpayati, na me Subh te sa bh  itasya-artham  j n ti. tat kasya heto ? Tath gata iti Subh te ucyate na kvacid-gato na kuta cid  gatg . tenocyate Tath gato 'rhan samyaksambuddha iti.


 "그런데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어떤 자가 이와 같이 말하기를 '여래는 가거나 오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는다'라 하면 그는 나의 설한 바 뜻을 깊이 알지 못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여래라고 일컫는 것은 어디로 가지도 않았으며 어디로부터 온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여래 아라한 정등각이라 한다."

 

[玄 ] 復次善現. 若有說言如來若去若來若住若坐若臥. 是人不解我所說義. 何以故. 善現. 言如來者卽是眞實眞如增語. 都無所去無所從來故名如來應正等覺.


29. Whosoever says that the Tathagata goes or comes, stands, sits or lies down, he does not understand the meaning of my teaching. And why? 'Tathagata' is called one who has not gone anywhere, nor come from anywhere. Therefore is he called 'the Tathagata, the Arhat, the fully Enlightened One'.


[鳩摩羅什]
 威儀寂靜分第二十九

須菩提야 若有人이 言如來가 若來若去若坐若臥라하면 是人은 不解我所說義니 何以故오 如來者는 無所從來며 亦無所去일새 故名如來니라


29. 여래의 몸가짐은 그대로 평안하네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만약 오다거나 간다거나 앉았다거나 눕는다거나'한다 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바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바가 없으며 또한 어디로 가는 것도 없으니 그러므로 여래라 이름하는 때문이니라."

 

 

서른. 모두가 하나인 이치


30a) ya  ca khalu puna  Subh te kulaputro v  kuladuhit  v  y vantas tris hasra-mah s hasre lokadh tau p thiv -raj  si t vat   lokadh t n m eva r pa  ma i  kury t y vad evam asa khyeyena virye a tad yath pi n ma param  u-sa caya  tat ki  manyase Subh te api nu bahu  sa param  u-sa cayo bhavet?
SUBH TIR  ha: evam etat Bhagavann, evam etat Sugata, bahu  sa param  u-sa cayo bhavet. tat kasya heto ? saced Bhagavan bahu  param  u-sa cayo 'bhavi yat, na Bhagavan avak yat param  u-sa caya iti. tat kasya heto ? yo 'sau Bhagavan param  u-sa cayas Tath gatena bh  ita , a-sa caya  sa Tath gatena bh  ita . tenocyate param  u-sa caya iti.
30b) ya  ca Tath gatena bh  itas tris hasramah s hasro lokadh tur iti, a-dh tu  sa Tath gatena bh  ita . tenocyate tris hasramah s hasro lokadh tur iti. tat kasya heto ? saced Bhagavan loka-dh tur abhavi yat, sa eva pi da-gr ho 'bhavi yat, ya  caiva pi  a-gr ha  Tath gatena bh  ita , agr hah sa Tath hatena bh  ita . tenocyate pi  a-gr ha iti.
BHAGAV N  ha: pi  a-gr ha  caiva Subh te 'vyavah ro 'nabhilapya . na sa dharmo na-adharma , sa ca b lap thagjanair udg h ta .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선남자나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땅의 미진들 만큼의 세계들을 헤아릴 수 없는 노력으로, 원자덩이와 같은 그러한 형태의 가루로 만든다 하자.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참으로 그 원자덩이는 많다 하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합니다. 선서시여, 그 원자덩이는 많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그 원자덩이가 [참으로] 많은 것이라면 세존께서 원자덩이라 설하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시]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원자덩이, 그것은 [원자]덩이가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원자덩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삼천대천세계라 여래께서 설하신 것, 그것은 [삼천대천] 세계가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삼천대천세계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만일 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한 덩어리로 뭉쳐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덩어리로 뭉쳐진 것이라고 여래께서 설하신 것, 그것은 [한 덩어리로] 뭉쳐진 것이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한 덩어리로 뭉쳐진 것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수보리여, 한 덩어리로 뭉쳐진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고 희론할 수 없다. 그것은 법이 아니요, 법이 아님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어리석은 범부들이 [그와 같이] 집착할 뿐인 것이다."


[玄 ] 復次善現. 若善男子或善女人. 乃至三千大千世界大地極微塵量等世界. 卽以如是無數世界色像爲墨如極微聚. 善現. 於汝意云何. 是極微聚寧爲多不. 善現答言. 是極微聚. 甚多世尊甚多善逝. 何以故. 世尊. 若極微聚. 是實有者. 佛不應說爲極微聚. 所以者何. 如來說極微聚卽爲非聚故名極微聚. 如來說三千大千世界卽非世界故名三千大千世界. 何以故. 世尊. 若世界是實有者卽爲一合執. 如來說一合執卽爲非執故名一合執. 佛言善現此一合執不可言說不可戱論. 然彼一切愚夫異生强執是法.


8.  ADVICE TO THE IMPERFECT

8a. The material world
30a. And again, Subhuti, if a son or daughter of good family were to grind as many world systems as there are particles of dust in this great world system of 1,000 million worlds, as finely as they can be ground with incalculable vigour, and in fact reduce them to something like a collection of atomic quantities, what do you think, Subhuti, would that be an enormous collection of atomic quantities?― Subhuti replied: So it is, O Lord, so it is, O Well- Gone, enormous would that collection of atomic quantities be! And why? If O Lord, there had been an enormous collection of atomic quantities, the Lord would not have called it an 'enormous collection of atomic quantities'. And why? What was taught by the Tathagata as a 'collection of atomic quantities', as a no- collection that was taught by the Tathagata. Therefore is it called a 'collection of atomic quantities'.

30b. And what the Tathagata taught as 'the world system of 1,000 million worlds', that he has taught as a no- system. Therefore is it called 'the world system of 1,000 million worlds'. And why? If, O Lord, there had been a world system, that would have been a case of seizing on a material object, and what was taught as 'seizing on a material object' by the Tathagata, just as a no- seizing was that taught by the Tathagata. Therefore is it called 'seizing on a material object'.― The Lord added: And also, Subhuti, that 'seizing on a material object' is a matter of linguistic convention, a verbal expression without factual content. It is not a dharma nor a no- dharma. And yet the foolish common people have seized upon it.


[鳩摩羅什]
 一合理相分第三十

須菩提야 若善男子善女人이 以三千大千世界로 碎爲微塵하면 於意云何오 是微塵衆이 寧爲多不아 甚多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若是微塵衆이 實有者인댄 佛이 卽不說是微塵衆이니 所以者가 何오 佛說微塵衆이 卽非微塵衆일새 是名微塵衆이니이다 世尊하 如來所說三千大千世界가 卽非世界일새 是名世界니 何以故오 若世界가 實有者인댄 卽是一合相이니 如來가 說一合相은 卽非一合相일새 是名一合相이니이다 須菩提야 一合相者는 卽是不可說이어늘 但凡夫之人이 貪著其事니라


30. 모두가 하나인 이치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먼지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먼지를 많다고 하겠느냐."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 그러냐 하오면 만일 이 먼지가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이것을 먼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이오니, 그 까닭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먼지는 곧 먼지가 아니오라 이런 것을 먼지라 하신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도 곧 세계가 아니므로 이것을 세계라 하신 것이오니, 왜 그러냐 하오면 만일 세계가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로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온데,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로 된 것>은 곧 <하나로 된 것>이 아니므로 이것을 <하나로 된 것>이라 하셨사옵니다."
"수보리야, <하나로 된 것>은 곧 말로 할 수 없는 것인데 다만 범부들이 그 일을 탐하고 집착하느니라."


서른 하나. 알음알이를 내지 말지니


31a) tat kasya heto ? yo hi ka cit Subh ta eva  vaded:  tma-d   is Tath gatena bh  it , sattva-d   ir j va-d   i  pudgala-d   is Tath gatena bh  it , api nu sa Subh te samyagvadam no vadet?
SUBH TIR  ha: no h da  Bhagavan no h da  Sugata, na samyag-vadam no vadet. tat kasya heto ? y  s  Bhagavann  tma-d   is Tath gatena bh  it , a-d   i  s  Tath gatena bh  it . tenocyata  tma-d   ir iti.
31b) BHAGAV N  ha: eva  hi Subh te bodhisattva-y na samprasthitena sarva-dharm  j  tavy  dra  avy  adhimoktavy  . tath  ca j  tavy  dra  avy  adhimoktavy   yath  na dharma-samj   pratyupasth he. tat kasya heto ? dharma-sa j   dharma-sa j eti Subh te a-sa j ais  Tath gatena bh  it . tenocyate dharma-sa j eti.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어떤 자가 이와 같이 말하기를, '여래는 자아라는 견해를 설하셨다. 여래는 중생이라는 견해, 영혼이라는 견해, 개아라는 견해를 설하셨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그는 바른 말을 한 것인가?"
수보리가 대답했다."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선서시여. 그는 바르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자아라는 견해라고 여래께서 설하신 것 그것은 [자아라는] 견해가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자아라는 견해라 하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와 같다. 수보리여,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는 참으로 일체 법들을 알아야 하고 보아야 하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 법이라는 산냐를 일으키지 않고 알아야 하고 보아야 하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법이라는 산냐, 법이라는 산냐'라는 것, 그것은 [법이라는] 산냐가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였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법이라는 산냐라 하기 때문이다."


[玄 ] 何以故. 善現. 若作是言. 如來宣說我見有情見命者見士夫見補特伽羅見意生見磨納婆見作者見受者見. 於汝意云何. 如是所說爲正語不. 善現答言. 不也世尊. 不也善逝. 如是所說. 非爲正語. 所以者何. 如來所說我見有情見命者見士夫見補特伽羅見意生見摩納婆見作者見受者見卽爲非見故名我見乃至受者見. 佛告善現. 諸有發趣菩薩乘者. 於一切法應如是知. 應如是見. 應如是信解. 如是不住法想. 何以故. 善現. 法想法想者. 如來說爲非想是故如來說名法想法想.


8b. Views and Attitudes
31a. And why? Because whosoever would say that the view of a self has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the view of a being, the view of a living soul, the view of a person, would he, Subhuti, be speaking right?― Subhuti replied: No indeed, O Lord, no indeed, O Well- Gone, he would not be speaking right. And why? That which has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as 'view of self', as a no- view has that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Therefore is it called 'view of self'.― 31b. The Lord said: It is thus, Subhuti, that someone who has set out in the Bodhisattva- vehicle should know all dharmas, view them, be intent on them. And he should know, view and be intent on them in such a way that he does not set up the perception of a dharma. And why? 'Perception of dharma, perception of dharma,' Subhuti, as no- perception has this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Therefore is it called 'perception of dharma'.


[鳩摩羅什]
 知見不生分第三十一

須菩提야 若人이 言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라하면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是人이 解我所說義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是人이 不解如來所說義니 何以故오 世尊이 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은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일새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니이다 須菩提야 發阿 多羅三 三菩提心者는 於一切法에 應如是知하며 如是見하며 如是信解하야 不生法相이니 須菩提야 所
言法相者는 如來가 說卽非法相일새 是名法相이니라


31. 알음알이를 내지 말지니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나라는 소견>·<남이라는 소견>·<중생살이라는 소견>·<오래 산다는 소견>을 말했다'고 하면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이 사람이 내가 말한 뜻을 안다고 하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지 못한 것이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나라는 소견>·<남이라는 소견>·<중생살이라는 소견>·<오래 산다는 소견>은 곧 그것이 <나라는 소견>·<남이라는 소견>·<중생살이라는 소견>·<오래 산다는 소견>이 아니오니, 이런 것을 <나라는 소견>·<남이라는 소견>·<중생살이라는 소견>·<오래 산다는 소견>이라고 하시었기 때문이옵니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이는 일체의 법에 대하여 마땅히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고 이렇게 믿고 깨달아서 법이란 생각을 내지 말 것이니라. 수보리야, 법상이라 하는 것은 곧 법상이 아니니 이런 것을 여래가 법상이라 말하느니라."

 

 

서른 둘. 조건 따라 나타난 것은 참이 아닐세


32a) ya  ca khalu puna  Subh te bodhisattva mah sattvo 'pramey n asamkhyey  l lokadh t n saptaratna-parip r a  k tv  Tath gatebhyo 'rhadbhya  samyaksambuddhebhyo d na  dady t, ya  ca kulaputro v  kuladuhit  veta  praj  p ra-mit ya dharmapary y d anta a  catu p dik m api g th m udg hya dh rayed de ayed v cayet paryav pnuy t parebhya  ca vistare a samprak  ayed, ayam eva tato nid na  bahutara  pu yaskandha  prasunuy d aprameyam asamkhyeyam. katha  ca sa prak  ayet? yath  na prak  ayet. tenocyate sa prak  ayed iti.

 T RAK  TIMIRA  D PO.
 M Y -AVA Y YA BUDBUDA 
 SUPINA  VIDYUD ABHRA  CA
 EVA  DRA  AVYA  SA SK TAM

32b) Idam avocad Bhagav n.  ttaman   sthavira Subh tis, te ca bhik u-bhik u y-up sakop sik s te ca bodhisattv   sa-deva-m nu a-asura-gandharva  ca loko Bhagavato bh  itam abhyanandann iti.

 rya-VAJRACCHEDK  Bhagavat  PRAJN P RAMIT  sam pt .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보살 마하살이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들을 칠보로 가득 채우고서 여래 아라한 정등각들께 보시를 행한다 하자. 그리고 다시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반야바라밀 법문으로부터 단지 네 구절로 된 게송이라도 뽑아내어 [마음에] 간직하고 가르쳐주고 독송하고 이해하고 [아울러] 남들에게 상세하게 잘 가르쳐 준다면 이로 인해서 이것이 측량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이 더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자세히 가르쳐주어야 하는가? 가르쳐주지 않는 것처럼 해야하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자세히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형성된 것은 참으로 이와 같이 보아야 하나니
"별, 눈의 가물거림, 등불과도 같고
환영, 이슬, 물거품과도 같으며
꿈, 번개, 구름과 같다."고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장로 수보리와 그리고 그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과 보살들과 천. 인. 아수라. 간다르와 등 [모든] 세계는 세존의 말씀을 듣고 환희하고 기뻐했다.


[玄 ] 復次善現. 若菩薩摩訶薩以無量無數世界盛滿七寶奉施如來應正等覺. 若善男子或善女人. 於此般若波羅蜜多經中乃至四句伽他. 受持讀誦究竟通利如理作意. 及廣爲他宣說開示. 由此因緣所生福聚. 甚多於前無量無數. 云何爲他宣說開示. 如不爲他宣說開示故名爲他宣說開示. 爾時世尊而說頌曰
    諸和合所爲  如星 燈幻
    露泡夢電雲  應作如是觀.
時薄伽梵說是經已. 尊者善現及諸苾芻苾芻尼 波迦 波斯迦. 幷諸世間天人阿素洛健達縛等. 聞薄伽梵所說經已. 皆大歡喜. 信受奉行.
大般若波羅蜜多經第五白七十七


8c. The key to supreme knowledge
32a. And finally, Subhuti, if a Bodhisattva, a great being had filled world- systems immeasurable and incalculable with the seven precious things, and gave them as a gift to the Tathagatas, the Arhats, the fully Enlightened Ones,― and if, on the other hand, a son or daughter of good family had taken from this Praj  p ramit , this discourse on Dharma, but one stanza of four lines, and were to bear it in mind, demonstrate, recite and study it, and illuminate it in full detail for others, on the strength of that this latter would beget a greater heap of merit, immeasurable and incalculable. And how would he illuminate it? So as not to reveal. Therefore is it said, 'he would illuminate'.

 As stars, a fault of vision, as a lamp,
 A mock show, dew drops, or a bubble,
 A dream, a lightning flash, or cloud,
 So should one view what is conditioned.

9.  THE SECOND CONCLUSION

32b. Thus spoke the Lord. Enraptured, the Elder Subhuti, the monks and nuns, the pious laymen and lay- women, and the Bodhisattvas, and the whole world with its Gods, men, Asuras and Gandharvas rejoiced in the Lord's teaching.


[鳩摩羅什]
 應化非眞分第三十二

須菩提야 若有人이 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로 持用布施어든 若有善男子善女人이 發菩薩心者가 持於此經하야 乃至四句偈等을 受持讀誦하야 爲人演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云何爲人演說고 不取於相하야 如如不動이니라 何以故오

     一切有爲法이     如夢幻泡影하며
 如露亦如電하니  應作如是觀이니라

佛이 說是經已하시니 長老須菩提와 及諸比丘比丘尼와 優婆塞優婆夷와 一切世間天人阿修羅가 聞佛所說하고 皆大歡喜하야 信受奉行하시니라


32. 조건 따라 나타난 것은 참이 아닐세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보시했더라도, 다른 선남자 선여인이 보살심을 내어 이 경전을 지니되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받아지니고 읽고 외어 남을 위해 연설해 주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리라. 어떻게 하는 것이 남을위해 연설하는 것인가.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라. 그 까닭은 이러하니라."

 "일체의 함 있는 법은 꿈같고
 꼭두각시·거품·그림자이며
 또한 이슬같고 번개같거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여 마치시니, 장로 수보리와 비구·비구니와 우바새·우바이와 여러 세계의 하늘사람·세상사람·아수라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모두 다 크게 기뻐하며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金剛般若波羅蜜經下 終

 

 

 

 

 

 

 

 

 

 


梵本對照 西藏本에 의한 新譯金剛經
全  在  星


(0. 1. a) 거룩한 금강으로 능단하는 자인 반야바라밀이라는 대승경을 시설합니다. (1b. 1) 인도어로 아리야 바즈라 (2) 체디까쁘랑나빠라미따 나마 마하야나쑤뜨라 (3) 서장어로 팍빠 시럽끼 퍼리 (2a. 1) 뚜 친빠 도제 쬐빠셰 (2) 자와 텍빠첸빼 도 부처님과 (3) 모든 보살님께 귀의합니다(2b. 1).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스라바스띠에 (2) 제따 태자의 숲 아나따삔디까 정사에 (3) 천이백 오십인의 많은 수행승의 (4) 무리와 매우 많은 보살 마하살과 함께 계셨다(3a. 1).
그런데 세존께서는 아침에 (2) 하의와 가사를 몸에 착용하시고 바루를 들고 (3) 스라바스띠의 큰 도시로 탁발하기 위해 들어가셨다. 그리고 (4) 세존께서는 스라바스띠의 큰 도시로 탁발하기 위해 들어가시고 (5) 나서, 탁발을 하시고 공양을 (3b. 1) 드시고 식후에 탁발을 물리고 바루와 가사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셨다 (2). 펴놓은 자리위에 결가부좌를 하시고 몸을 곧게 (3) 균형 잡으시고 주의력을 집중시켜 앉아 계셨다. 그런데 많은 수행승들이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4) 가까이 가서 함께 모였다. 세존의 발에 머리를 조아리며 (5) 세존께서 계신 곳을 세 번 돌아서 한 쪽으로 (4a. 1) 물러 앉았다.
2. 그런데 이 때에 장노 쑤부띠가 이 모임에 (2) 참석하여 앉았다. 그리고 장노 쑤부띠는 자리에서 (3) 일어나 가사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4) 땅에 대고,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합장하여 (5) 세존께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 "세존이시여(4b. 1),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이께서 (2) 보살 마하살에게 얼마만큼이나 최상의 유익으로 (3) 유익함을 베푸시며,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깨달으신 (4) 부처님께서는 보살 마하살들에게 얼마만큼이나 (5) 최상의 부족으로 부촉하시는지 세존이시여 (5a. 1) 놀라운 일입니다. 선서이시여, 놀라운 (2)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승에 입문하여 (3) 어떻게 머물며 이렇게 수행하며 어떻게 (4) 마음을 조복해야 합니까?"
이렇게 여쭙고 나자 세존께서는 (5) 장노 쑤부띠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5b. 1), 훌륭하다. 훌륭하다. 쑤부띠여, 그러하다. 그러하다. 여래는 (2) 보살 마하살들에게 최상의 유익으로 (3) 유익함으로 베풀며 여래는 보살 (4) 마하살들에게 최상의 부촉으로 (5) 부촉한다. 쑤부띠여, 그러므로 듣고 잘 마음에 (6a. 1) 새겨라. 보살승에 입문한 자가 (2) 어떻게 입지하고 어떻게 수행하며 (3) 어떻게 마음을 조복하는지를 내가 네게 설할 것이다."
"세존이시여 (4)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장노 쑤부띠는 세존의 (5)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3. 세존께서는 장노 쑤부띠에게 이와 같이 (6b. 1)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여기 보살승에 입문해서 (2) 이처럼 '나는 생명으로 모여 (3) 형성된, 알에서 나거나 태에서 나거나, 습기에서 (4) 나거나, 화현하여 나거나, 형상이 (5) 있거나, 형상이 없거나, 알음얼 (7a. 1) 있거나, 알음얼이 없거나, 알음얼이 없지도 않거나 하는 어떠한 뭇삶이든지, 뭇삶이란 알음얼 아래 파악되는 (2) 이 어떠한 뭇삶의 세계라도 열반, 무여 (3) 열반의 세계로 이끌어야 한다. 이와 같이 (4) 무량한 뭇삶을 완전히 열반으로 이끌었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뭇삶도 (5) 열반으로 이끌지 않았다'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7b. 1)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만약 보살이 뭇삶에의 (2) 알음얼을 일으키면 그는 보살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3) 쑤부띠여, 만약 뭇삶에의 알음얼을 일으키거나 영혼이란 알음얼을 (4) 일으키거나, 개인이란 알음얼을 일으키면 그는 보살이라고 인정될 수 (5) 없기 때문이다."
4. "또한 쑤부띠여, 보살은 존재물에 머물지 않고 (8a. 1) 보시를 행해야 한다. 어떠한 것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를 (2) 행해야 한다. 형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 이와 같이 (3)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뜻의 대상에도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4) 행해야 한다. 쑤부띠여, 무엇보다도 인상을 따라서 알음얼에 머물지 않도록 보살은 보시를 행해야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8b. 1) 쑤부띠여, 보살이 어떠한 것에도 머물지 앟고 보시를 행하는 공덕의 (2) 쌓임은, 쑤부띠여, (2) 크기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쑤부띠여 (3),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방의 허공의 크기를 헤아리기가 쉽다고 생각하느냐?" (4)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5)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이와 같은 방법으로 남쪽, 서쪽(9a. 1) 북쪽과 상하의 방향과 그 사잇 방향과 (2) 시방의 허공의 크기를 헤아리기가 쉽다고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3)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4)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이와 같이 보살이 어떠한 것에도 (5)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행하는 것의 공덕쌓임은, 쑤부띠여, 그 크기를 헤아리기가 (9b. 1) 쉽지 않은 까닭이다."
5. "쑤부띠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상호가 (2) 구족하다면 여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쑤부띠가 (3)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상호가 구족하다 (4) 고 여래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5) 여래께서 상호가 구족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10a. 1) 상호가 구족한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이와 같이 (2) 대답하자, 세존께서는 장노 쑤부띠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상호가 구족한 한 (4) 허망하며 상호가 구족하지 않은 한 허망하지 않다 (5). 이처럼 여래를 상호와 상호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6. 이렇게 (10b. 1) 말씀하시자 장노 쑤부띠는 세존께 다음과 같이 (2) 여쭈었다 : "세존이시여, 미래의 마지막 오백년에 착한 법이 (3) 무너지게 되면, 누군가 뭇삶들이 이와 같은 (4) 경전의 설해진 구절들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불러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11a. 1). : "너는 이와 같이 미래에 마지막 오백년에 (2) 착한 법이 무너지게 되면, 누군가 뭇삶들이 (3) 이와 같은 경전의 설해진 구절들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불러 일으키는 (4)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지 마라. 쑤부띠여 (5), 미래의 때에 마지막 오백년에 착한 법이 (11b. 1) 무너지면 계율을 갖추고 공덕을 갖추고 지혜를 갖춘 (2) 보살 마하살들이 나타날 것이다. 쑤부띠여, 이들 보살 (3) 마하살들은 단 한분의 깨달은 이에게 예배 (4) 드리지 않으며, 단 한 분의 깨달은 이에게 공덕의 뿌리를 심는 것이 아니라, 쑤부띠여, 수십만의 깨달은 이에게 예배를 드리며 수십만의 깨달은 (12a. 1) 이에게 공덕의 뿌리를 심는 보살 (2) 마하살들이 나타날 것이다. 쑤부띠여, 이와 같이 경전의 (3) 설해진 구절들에서 하나의 정명(淨明)의 마음을 발견한 자들은 여래로부터 (4) 인정받고, 쑤부띠여, 그들은 여래로부터 보살핌을 받는다. (5) 쑤부띠여, 이들 모든 뭇삶들은 헤아릴 수 없는 공덕 쌓임(2b. 1)을 일으켜 모을 것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이냐? (2) 쑤부띠여, 이들 보살 마하살들은 자아라는 알음얼을 (3) 일으키지 않으며, 뭇삶이란 알음얼을 일으키지 않으며, 영혼이란 알음얼을 (4) 일으키지 않으며, 개인이란 알음얼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쑤부띠여 (5) 이들 보살 마하살들은 또한 법이라는 알음얼과 (13a. 1) 법이 아니라는 알음얼도 일으키지 않으며 그들은 (2) 알음얼도 알음얼이 아닌 것도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3), 만약 이들 보살 마하살들이 법으로 알음얼에 (4) 들게 되면 이것은 그들에게 자아의 집착이 되며, 뭇삶에의 (5) 집착과 영혼에의 집착과 수명에의 집착이 되기 때문이다. (13b. 1) 만약 법무아에의 알음얼에 들게 되어도 또한 이것은 그들에게 자아에의 (2) 집착이 되며, 뭇삶에의 집착과 영혼에의 (3) 집착과 개인에의 집착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쑤부띠여, 보살은 (4) 법에도 잘못 집착해서는 안되며 법이 아닌 것에도 집착해서는 (5) 않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심사숙고하여 여래는 '이 (14a. 1) 법문을 땟목처럼 아는 자들은 법들마저 (2) 버려야 하거늘, 법이 아닌 것은 말해 무엇하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7. 달리 (3) 또한 세존께서는 장노 쑤부띠에게 말씀하셨다 (4) : "쑤부띠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위없이 (5)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으로 바르게 원만히 깨달은 어떠한 법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혹은 여래가 가르친 어떠한[다른] 법 (2)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세존께서는 장노 (3) 쑤부띠에게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4) :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뜻을 살펴보면, 여래께서 (5) 위없이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으로 바르게 원만히 (15a. 1) 깨달은 어떠한 법도 없습니다. 여래 (2)께서 가르치신 어떠한[다른] 법도 없습니다.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3) 여래께서 바르게 원만히 깨달은 (4) 시거나 또한 가르치신 이 법은 파악될 수 없고 설해질 수 없는데 그것은 법도 아니고 법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15b. 1) 거룩한 분들은 무위로서 특징지워지기 때문입니다."
8. 세존 (2)께서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훌륭한 아들 (3) 또는 훌륭한 딸 누군가가 십억세계의 이 우주를 (4) 칠보로 가득 채워서 보시를 행하면 그 훌륭한 아들 또는 훌륭한 (5) 딸은 그것을 인연으로 공덕 쌓음이 많이 생겨난다고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16a. 1)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많겠습니다. 선서이시여, 많겠습니다. 훌륭한 아들 또는 훌륭한 딸은 그것을 원인으로 공덕 (3) 쌓임이 많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 공덕쌓임은 쌓임이 아닌 (4)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공덕쌓임, 공덕 (5) 쌓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16b. 1) : "쑤부띠여, 훌륭한 아들 또는 훌륭한 딸이 (2) 십억세계의 우주를 칠보로써 가득 (3) 채워서 보시를 행하는 것보다, 이 법문으로부터 네귀의 한 구절이라도 취해서 (4)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로 설명하고 올바로 가르치면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더욱 많은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공덕 (5) 쌓임을 낳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17a. 1) 쑤부띠여,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의 위없는 올바른 (2) 완전한 깨달음이 여기에서 (3) 출현했고 세존이신 깨달은 이도 여기에서 출현한 까닭이다(4).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깨달은 이의 법, 깨달은 이의 법(5)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은 이의 법이 아니라고 여래가 설한 까닭이다 (17b. 1). 그러므로 깨달은 이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9. "쑤부띠여,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2) 흐름에 든 이가 나는 흐름에 든 이란 과보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3)"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4) 세존이시여, 그는 어떠한 것에도 들지 않은 까닭입니다 (5). 그래서 흐름에 든 이라고 합니다. 형상에도 들지 않고, 소리에도 아니고 (18a. 1) 향기에도 아니고, 감촉에도 아니고, 뜻의 대상에도 (2) 들지 않는데 그래서 흐름에 든 이라고 불리웁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3) 세존이시여, 만약 흐름에 든 이가 흐름에 든 (4) 이의 과보를 얻었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그의 자아에의 집착인 (5) 것이며, 뭇삶에의 집착인 것이며, 영혼에의 집착인 것이며, 개인에의 집착인 (18b. 1) 것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2) 다시 한번 오는 이가 이처럼 나는 다시 한번 오는 이의 과보를 얻었다고 (3)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4).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다시 한번 오는 이의 성품에 든 어떠한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5) 그래서 다시 한번 오는 이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다시 (19a. 1) 한번 오는 이가 이처럼 '나는 다시 한번 오는 이의 과보를 얻었다'고 (2) 생각하면, 그것은 그의 자아에의 집착인 것이며, (3) 뭇삶에의 집착인 것이며 영혼에의 집착인 것이며, 개인에의 집착인 것입니다.(4)"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5) 돌아오지 않는 이가 이처럼 '나는 돌아오지 않는 이의 과보를 얻었다'고 (19b. 1)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2) 돌아오지 않는 이의 성품에 든 어떠한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3). 그래서 돌아오지 않는 이라고 합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4) : "쑤부띠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거룩한 이는 이처럼 '나는 거룩한 이의 과보 (5)를 얻었다'라고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20a. 1)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거룩한 이로 (2) 불리울 만한 어떠한 법도 없는 까닭입니다. (3)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만약 (3) 거룩한 이가 이처럼 '나는 거룩한 이의 과보를 얻었다'고 생각하면, (4) 그것은 그의 자아에의 집착인 것이 , 뭇삶에의 집착인 (5) 것이며, 영혼에의 집착인 것이며 개인에의 집착인 것이다. 세존이시여, 저를 두고 (20b. 1)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완전히 깨달은 이께서 (2) 번뇌없이 사는 자들 가운데 최상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3) 탐욕을 끊은 자로 거룩한 이이지만, 세존이시여, 저는 이처럼 (4) '나는 거룩한 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5) 이처럼 제가 '나는 거룩한 이의 과보를 얻었다'라고 생각했다면 (21a. 1) 여래께서 제게 '훌륭한 아들, 쑤부띠는 번뇌 (2) 없이 사는 자 가운데 최승자이며, 어떠한 것에도 머물지 않으면서 번뇌 (3) 없이 머문다. 번뇌없이 머문다'라고 수기를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4)"
10.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는 (5)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이 이신 (21b. 1) 연등불로부터 받은 어떠한 법이라도 있는가? (2)"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여래께서 (3)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완전히 깨달은 이 이신 (4) 연등불로부터 받는 어떠한 법도 없습니다. (5)"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어떠한 보살이든지 (22a. 1) 이처럼 '나는 모든 국토의 장엄을 성취할 것이다'고 (2) 말한다면 그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모든 국토의 장엄 (3) 모든 국토의 장엄이라고 하는 것은 장엄이 아니라고 여래가 (4) 말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모든 국토도 장엄이라고 한다. 쑤부띠여, 그러므로 (5) 보살 마하살은 이처럼 머무는 바가 없이 마음을 (22b. 1) 일으켜야 한다. 어떠한 것에도 마음을 머무는 바가 없이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형상에도 (2) 머무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되며, 소리, 향기, 맛, 감촉, 뜻의 대상에도 (3) 머물지 않고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쑤부띠여, 예를 들어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4) 몸이 이처럼 되었는데, 마치 산의 왕 쑤메루 만큼 이라면 쑤부띠여, (5)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몸은 크다고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대답했다 (23a. 1) : "세존이시여, 그 몸은 큽니다. 선서이시여, (2) 그 몸은 큽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여래께서 그것은 존재물이 (3)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몸이라고 합니다."
11.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5) : "쑤부띠여,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갠지스강의 모래알 만큼의 (23b. 1) 바로 그만큼의 갠지스강이 있다면, 그 가운데 있는 모래알들은 많다고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2) 대답했다 : "그 갠지스강도 많겠는데 그것들의 (3) 모래알은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4), 네 말이 옳다. 잘 마음에 새겨야 한다. 갠지스강들의 모래알 (5) 만큼의 세상의 세계를 장정이나 아낙네들이 각각 (24a. 1) 일곱 가지 보석으로써 잘 채워서 이렇게 오신 이 (2),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이에게 보시를 행하면 쑤부띠여 (3),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장정이나 아낙네가 그것을 바탕으로 많은 공덕쌓임을 이루겠는가?"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많겠습니다. 선서이시여, 많겠습니다. (5) 그 장정이나 아낙네는 그것을 바탕으로 (24b. 1) 공덕을 많이 이루겠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2), 누군가가 세계의 요소만큼 일곱 가지 보석으로 가득 채워 (3)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이들에게 (4) 보시를 행하는 것보다 누군가가 이 법문에서 사행시의 게송 하나 (5) 만이라도 받아서 남에게 올바로 잘 설하고 (25a. 1) 올바로 잘 가르치면, 이것을 바탕으로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2) 많은 복덕이 생겨난다."
12. "또한, 쑤부띠여, 이 법문 (3)으로부터 사행시의 게송 하나 만이라도 포교하거나 가르치는 그 지방은 (4) 신과 인간고 아쑤라가 사는 세계의 성지가 될 것이다. 누군가가 이 법문 (5)을 받아서 보고 수지하고 독송하고 기억하고 (25b. 1) 올바로 숙고하는 자는 가장 놀라운 경이를 성취할 것이라는 것은 (2) 말할 나위가 없다. 그 지방에는 스승이나 라마와 같은 적당한 분이 머문다."
13. 이와 같이 (3) 말씀하시자 장노 쑤부띠는 다음과 (4) 같이 여쭈었다 : "세존이시여, 이 법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5) 이것을 어떻게 받아 지닙니까?"
이렇게 여쭙자 세존께서는 장노 (26a. 1) 쑤부띠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2), 이 법문의 이름은 '지혜의 피안으로 도달하는' 도피안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이처럼 수지해야 한다. (3)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여래가 반야바라밀이라고 (4) 설한 것은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이라고 (5) 한다."
"쑤부띠여,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설한 어떠한 법 (26b. 1)이라고 존재하는가?"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2), 여래께서 설하신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존께서 (3)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많은 십억 세상의 세계에 (4) 있는 땅의 티끌은 얼마만큼인지 그것이 많다고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5)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땅의 티끌은 많습니다. 선서이시여, (27a. 1) 많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세존이시여, 땅의 (2) 티끌이라는 것은 티끌이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3) 그래서 땅의 티끌이라고 합니다.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세계도 세계가 (4)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5) 세계라고 부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27b. 1)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위대한 분이 갖춘 서른 두 개의 상호로서, 이렇게 오신 이, (2)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이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3)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4) 여래께서 말씀하신 위대한 분이 갖춘 서른 두 개의 상호는 (5) 상호가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28a. 1) 위대한 분의 서른 두 개의 상호라고 합니다."
세존 (2) 께서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장정이나 아낙네 누구라도 (3) 날마다 갠지스강의 모래알 만큼의 [자신의] 몸을 희생시키는 것보다 누군가가 이 법문 (4)에서 사행시의 게송 하나 만이라도 취해서 다른 사람에게 (5) 올바로 가르치면 그는 그것을 인연으로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많은 공덕을 (28b. 1) 이룰 것이다."
14. 그대에 장노 쑤부띠는 가르침의 위력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렸다. 그는 눈물 (2)을 닦고 세존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 "이 법문을 여래 (3) 께서 설하신 것은, 세존이시여, 희유하십니다 (4), 선서이시여,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제게 지혜가 생겨난 (5) 이래로 저는 이와 같은 법문을 일찍이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29a. 1) 무슨 까닭입니까? 세존이시여, 이 경전을 설할 때에 뭇삶들이 올바른 (2) 알음얼을 일으키면 가장 놀라운 경이가 (3) 될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세존이시여, 올바른 알음얼 (4) 이란 것은 알음얼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알음얼 (5) 이라고 여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설하신 (29b. 1) 법문에 대하여 [제가] 이해하고 믿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만 세존이시여, (2) 미래의 마지막 오백년에 뭇삶들이 이 법문을 (3) 받아 쓰고, 지니고, 설명하고, 독송하고, 기억하면 (4) 가장 놀라운 경이가 될 것입니다. 또한 세존이시여, 그들은 (5) 자기에의 알음얼을 일으키지 않고, 뭇삶에의 알음얼을 일으키지 않고, 영혼에의 (30a. 1) 알음얼을 일으키지 않고, 개인에의 알음얼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2).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세존이시여, 자기에의 알음얼과 뭇삶에의 (3) 알음얼과 영혼에의 알음얼고 개인에의 알음얼 이란 (4) 것은 알음얼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깨달은 이 이신 모든 불 (5) 세존께서 모든 알음얼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드리자 (30b. 1) 세존께서는 장노 쑤부띠에게 다음과 같이 (2) 말씀하셨다 : "그러하다 쑤부띠여, 그러하다. 뭇삶들이 이 경전을 설할 (3) 때에 두려워 하지 않고 떨지 않고 전혀 무서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가장 놀라운 경이를 갖추게 될 (4)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쑤부띠여, 이 반야바라밀은 여래가 (5) 설했는데, 여래가 설한 최상의 반야바라밀을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불 (31a. 1) 세존 또한 설하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최상의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또한, 쑤부띠여, 여래가 인욕 (3) 바라밀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라밀이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4) 쑤부띠여, 까링가의 왕이 나의 손발과 팔다리를 떼어 낼 (5) 때에 나에게 자아에의 알음얼이나 뭇삶에의 알음얼이나 영혼에의 (31b. 1) 알음얼이나 개인에의 알음얼도 생겨나지 않았다. 나에게 어떠한 알음얼도 없었으며 (2) 알음얼이 아닌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만약 (3) 그때에 나에게 자아에의 알음얼이 생겨났다면, 해치고자 하는 마음의 알음얼도 (4) 생겨났을 것이며 뭇삶에의 알음얼과 영혼에의 알음얼과 개인에의 (5) 알음얼이 생겨났다면 해치고자 하는 마음의 알음얼도 생겨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쑤부띠여 (32a. 1), 나는 기억하고 있는 데, 과거세의 오백세의 생애를 (2) 인욕설자라고 하는 선인으로 있었지만, 나에게 자아에의 알음얼이 생기지 (3) 않았고, 뭇삶에의 알음얼과 영혼에의 알음얼과 개인에의 (4) 알음얼도 생겨나지 않았다. 쑤부띠여, 그러므로 보살 마하살은 (5) 모든 알음얼을 버리고 위없는 올바른 원만한 (32b. 1) 깨달음에로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형상에도 머무르지 않도록 마음을 일으켜야 (2) 하며,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에도 머물지 않도록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3). 뜻의 대상에도 머물지 않도록 마음을 일으켜야 하며, 뜻의 대상이 아닌 것에도 머물지 않도록 (4)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어느 것에도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5) 머문다는 것은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33a. 1) '이와 같이 보살은 아무것에도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2)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쑤부띠여, 보살은 이처럼 모든 뭇삶의 (3) 이익을 위해서 보시를 베풀어야 한다. '뭇삶에의 (4) 알음얼이라는 것도 알음얼이 아니며 여래가 이 모든 뭇삶 (5) 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뭇삶이 아니다. (33b. 1)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여래는 올바로 말하고 진실을 말하고 (2) 있는 그대로 말하지, 여래가 거짓을 말하지 않기 (3) 때문이다."
"또한 쑤부띠여, 여래가 올바로 원만히 (4) 깨닫거나 가르친 법에는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다. 쑤부띠여, 이를테면 (5) 예를 들어 눈 있는 사람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34a. 1) 사물에 빠져 보시를 행하는 보살을 (2) 관찰해야 한다. 또한 쑤부띠여, 이를테면 예를 들어 날이 밝아서 태양이 떠오르면 눈 (3) 있는 자는 여러 가지 형상을 보는 것처럼 사물 (4)에 빠지지 않고 보시를 행하는 보살을 보아야 한다." (5)
"또한, 쑤부띠여, 훌륭한 아들 또는 훌륭한 딸이 이 법문을 얻어 받아 (34b. 1) 지니고 독송하고 기억해서 남에게 (2) 널리 올바로 가르치면, 그들은 모든 여래가 알아주고 (3) 모든 여래가 눈여겨 본다. 그들 모든 뭇삶들은 헤아릴 수 없는 (4) 공덕쌓임을 이루게 된다."
15. "또한, 쑤부띠여, 어떤 장정이나 아낙네가 아침에 (5) 갠지스강의 모래알 만큼의 몸을 희생시키고, 한낮과 저녁에도 (35a. 1) 갠지스강의 모래알 만큼의 몸을 희생시키고, 이러한 (2) 방법으로 무량한 백 천만 억 겁 동안 몸을 희생시키는 것보다 (3) 누군가 이 법문을 듣고 버리지 않으면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셀 수 없고 (4)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낳는다. 누군가가 하물며 글자를 써서 (5) 얻어서 받아 지니고 독송하고 기억해서 다른 사람에게 (35b. 1) 널리 올바로 가르치나면 말해 무엇 하겠는가?
"또한, 쑤부띠여, 이 법문은 (2) 헤아릴 수 없고 견줄데가 없다. 그 과보도 또한 헤아릴 수 없는 것 (3) 임을 알아야 한다. 이 법문은 최상승에 올바로 (4) 든 뭇삶을 위하고 지극승에 올바로 든 (5) 뭇삶을 위해 여래가 설한다. 이 법문 (36a. 1)을 얻어서 받아 지니고 독송하고 (2) 기억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세히 올바로 가르쳐 주는 사람을 (3) 여래는 알아주고 여래는 눈여겨 본다. 이들 모든 뭇삶들도 (4)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쌓임을 갖추게 될 것이다. (5) 헤아릴 수 없고, 견줄 수 없고, 어디에도 없고, 한계가 없는 (36b. 1) 공덕쌓임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들 모든 뭇삶은 나의 깨달음의 과보 (2)를 얻을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저열한데 믿음을 지닌 자들은 (3) 이 법문을 들을 수가 없으며, 자아에의 알음얼을 지닌 자들은 (4), 뭇삶에의 알음얼을 지닌 자들도, 영혼에의 알음얼을 지닌 자들도 (5), 개인에의 알음얼을 지닌 자들도 듣고 받아 지니고 독송하고 기억할 수 (37a. 1)가 없다. 이러한 [경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쑤부띠여 (2), 이 경전이 가르쳐지는 그 지방을, 신과 인간과 아수라로 이루어진 (3) 세상이 공경해야 한다. 그 지방을 경계해야 (4) 하며, 위요해야 한다. 그 지방은 탑묘처럼 (5) 되어야 한다."
16. "또한, 쑤부띠여, 훌륭한 아들 또는 훌륭한 딸이 이처럼 (37b. 1) 경전의 말씀을 얻어서, 받아 지니고 독송하고 기억하면 (2), 그들은 박해받을 것이다. 심하게 박해받을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3) 이들 뭇삶들은 전생의 불선업이 [그들을] 악취로 이끌었는데, (4) 현세에서 박해를 받음으로서 전생의 불선업을 (5) 청정하게 하여, 부처의 깨달음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쑤부띠여 (38a. 1), 나는 기억한다. 헤아릴 수 없고 (2) 또한 셀 수 없이 많은 과거의 겁에,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3) 깨달은 이이신, 연등불의 과거시대 훨씬 이전의 (4) 팔천사백만억 꼬띠(俱底)의 깨달은 이들을 나는 기쁘게 했고 불쾌(5)하지 않게 했으며, 실망시키지 않았다. 쑤부띠여, 그들 불세존(38b. 1)을 내가 기쁘게 했고 실망시키지 않은 것과, 후세에 (2) 마지막 오백세가 되어 이 경전을 얻어서 쓰고 받아 지니고 독송하고 (3) 기억하는 것과 쑤부띠여, 이 공덕쌓임에 비해 (4) 앞의 공덕쌓임은 백분의 일에도 못미치며, 천분의 일과 십만 분의 (5) 일과 숫자와 크기와 헤아림과 비교와 유추와 동기로 봐서 감당하지 못한다."
"쑤부띠여, (39a. 1) 만약 그때에 훌륭한 아들 또는 훌륭한 딸이 공덕 (2) 쌓임을 얼마만큼 잘 획득하는가에 대하여, 그들 훌륭한 아들 또는 훌륭한 딸의 (3) 공덕쌓임을 내가 설한다면, 뭇삶들은 어찔어찔하고 (4)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또한 쑤부띠여, 이 법문은 불가사의 (5) 하며 그 과보 또한 불가사의한 것을 알아야 한다. (39b. 1)"
17. 그 때에 세존께 장노 쑤부띠는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 "세존 (2) 이시여, 보살승에 입문한 자는 어떻게 (3)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지녀야 합니까?"
이와 같이 (4) 여쭙자 세존께서 장노 쑤부띠에게 다음과 같이 (5)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여기 보살승에 입문한 자는 (40a. 1) 이처럼 '나는 모든 뭇삶을 무여 (2) 열반계로 완전히 멸도하리라. 이와 같이 해서 (3)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멸도하여도 어떠한 뭇삶도 멸도 (4) 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5), 만약 보살이 뭇삶에의 알음얼을 일으키면 그는 또한 보살 (40b. 1) 이라고 할 수 없으며, 내지 개인에의 알음얼을 일으켜도 보살 (2) 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보살승에 (3) 입문한다고 하는 어떠한 법도 없기 때문이다."
"쑤부띠여 (4),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이렇게 오신 이 이신 연등불로 (5)부터 위없는 올바른 원만한 깨달음으로 바르고 원만하게 (41a. 1) 깨달은 어떠한 법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시자 (2) 장노 쑤부띠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3) :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여래로부터 (4) 위없는 올바른 원만한 깨달음으로 바르고 원만하게 (5) 깨달은 어떠한 법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대답하자 세존께서는 (41b. 1) 장노 쑤부디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2), 그러하다. 그러하다. 여래가 연등여래로부터 위없는 (3) 올바른 원만한 깨달음으로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어떠한 법도 (4) 없다. 쑤부띠여, 만약 여래가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5) 어떠한 법이라도 있다면, 연등여래는 나에게 '바라문의 (42a. 1) 동자여, 너는 미래에 샤끼야무니라고 불리우는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2),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이가 될 것이다'라고 수기를 주지 (3) 않았을 것이다. 쑤부띠여, 이와 같이 여래가 위없이 올바르고 원만한 (4) 깨달음을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어떠한 법도 없으므로, 그 (5) 까닭에 연등여래는 나에게 '바라문의 아들이여, 그대는 미래에 (42b. 1) 샤끼야무니라고 불리우는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2) 이가 될 것이다'라고 수기를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여래 (3) 라는 것은 '진실진여'의 명칭인 까닭이다 (4)."
"쑤비띠여, 누군가가 이처럼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5) 원만히 깨달은 이가 위없이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으로 바르고 (43a. 1) 원만하게 깨달았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 말한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2) 쑤부띠여, 여래는 위업이 올바르고 원만한 (3) 깨달음으로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어떠한 법도 없는 (4) 까닭이다. 쑤부띠여, 여래가 바르고 원만하게 (5) 깨닫거나 또는 가르치는 법에는 옳음도 그름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43b. 1) 모든 법을 깨달은 이의 법이라고 말한다. 쑤부띠여 (2), '모든 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 '모든 법'이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3) 깨달은 이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쑤부띠여, 이를테면 예를 들어, 한 장부가 사람의 몸을 갖추고 (4) 크낙한 몸이 되는 것과 같다."
장노 쑤부띠는 말씀드렸다. (5) :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장부가 사람의 몸을 갖추고 크낙한 몸 (44a. 1) 이 되다'고 하신 것 여래께서 '몸이 없음'을 (2)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갖추고 크낙한 몸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3)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그러하다. 그러하다. 보살이 (4) 이와 같이 '나는 모든 뭇삶을 멸도할 것이다'라고 (5) 한다면 그는 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쑤부띠여, (44b. 1) 보살이라고 하는 어떠한 법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쑤부띠는 대답했다 (2) :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3),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법에는 뭇삶이 없으며 영혼이 없으며 (4) 개인이 없다고 말했다."
"쑤부띠여, 어떤 보살이 이처럼 '나는 국토의 장엄을 이룰 것이다'라고 말했다면, 그 또한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45a. 1)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국토의 장엄, 국토의 장엄' (2) 이라고 말한 것은 장엄이 아니라고 여래가 말한 까닭이다 (3). 그러므로 국토의 장엄이라고 한다."
"쑤부띠여, 어떤 보살이 (4) 이처럼 '모든 법은 무아이다. 모든 법은 무아이다'라고 신해하면 (5) 그는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이에게 (45b. 1) 보살 마하살이라고 불리운다."
18. "쑤부띠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2) 여래에게는 육신의 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대답했다:"세존 (3) 이시여, 그렇습니다. 여래께서는 육신의 눈을 갖고 계십니다."
세존께서는 (4)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는 (5) 신성의 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46a. 1), 그렇습니다. 여래께서는 신성의 눈을 갖고 계십니다."
세존께서는 (2)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는 (3) 지혜의 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4), 그렇습니다. 여래께서는 지혜의 눈을 갖고 계십니다."
세존 (5) 께서는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는 (46b. 1) 법의 눈이 있 고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2). 여래께서는 법의 눈을 갖고 계십니다."
세존게서는 말씀하셨다 (3) : "쑤부띠여,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는 부처의 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4)?" 쑤부디는 대답했다 : "그렇습니다. 여래 (5)께서는 부처의 눈을 갖고 계십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47a. 1),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갠지스강의 모래만큼의 (2) 갠지스강이 또한 그만큼 있는데 그들의 모래알 만큼의 (3) 세계가 있다면 그 체계는 많다고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4), 그렇습니다. 그 세상의 세계는 많겠습니다."
세존께서는 (5)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뭇삶이 있든 (47b. 1) 그들의 갖가지 마음의 의식의 흐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2).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의식의 흐름, 의식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흐름이 (3) 아니라고 여래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흐름'이라고 (4)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과거의 마음도 지각할 수 없고 미래의 (5) 마음도 지각할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지각할 (48a. 1) 수 없기 때문이다.
19. 쑤부띠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2) 훌륭한 아들 또는 훌륭한 딸이 많은 십억 세계를 일곱 가지 (3) 보석으로 가득 채워 보시를 행하면, 그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4) 많은 공덕쌓임을 이루겠는가?"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5) 많겠습니다. 선서이시여, 많겠습니다."
세존게서는 (48b. 1)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그러하다. 그러하다. 훌륭한 아들 또는 훌륭한 (2) 딸이 그것을 바탕으로 공덕 쌓임을 많이 이룰 것이다. 또한 쑤부띠여, 만약에 (3) 공덕쌓임이 공덕쌓임이었다면 여래가 '공덕쌓임 (4), 공덕쌓임'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20. "쑤부띠여, 이것은 (5) 어떻게 생각하느냐? 완성된 형상의 몸을 통해 여래를 볼 수 (49a. 1) 있다고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2), 그렇지 않습니다. 완성된 형상의 몸을 통해 여래를 볼 수가 (3) 없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세존이시여, 완성된 형상의 몸 (4) 이라고 하는 것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셨기 (5)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완성된 형상의 몸이라고 합니다."
세존께서 (49b. 1)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원만한 상호를 (2) 통해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대답했다 (3) :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원만한 상호를 통해서 여래 (4)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여래께서 (5) 원만한 상호라고 말하는 것은 원만한 상호가 (50a. 1)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원만한 (2) 상호라고 합니다."
21.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3),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이처럼 '나는 법을 설한다'고 (4) 생각한다고 여긴다면 쑤부띠여, 그것은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여래가 (5) 설한 어떠한 법도 없기 때문이다. 쑤부띠여, 누군가가 이처럼 (50b. 1) '여래가 법을 설한다'고 한다면 쑤부띠여, 그는 허망과 잘못에 (2) 사로잡혀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누군가 법을 설한다'라고 하는 (3) 것도 '누군가 법을 설한다'라는 것을 인식하는 어떠한 법도 (4)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존께 장노 쑤부띠는 다음과 같이 (5) 여쭈었다 : "세존이시여, 미래에 이처럼 (51a. 1) 설한 법을 듣고 진실한 믿음을 내는 어떤 뭇삶이 나타나리라고 (2) 보십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3), 그들은 뭇삶도 아니고 뭇삶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4) 쑤부띠여, 뭇삶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가 그들을 '뭇삶이 (5) 아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뭇삶이라고 한다.
22. "쑤부띠여, (51b. 1)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위없이 올바르고 원만한 (2) 깨달음에로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어떠한 법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느냐?"
장노 (3)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4) 위없이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에로 바르게 원만히 (5) 깨달은 어떠한 법도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52a. 1), 그러하다. 그러하다. 거기서 아주 작은 법이라도 지각할 수 (2) 없다. 그러므로 위없이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23. "또한 (3) 쑤부띠여, 이 법은 동등하여 아무런 불평등도 없다. 그러므로 위없이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위없이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에는 뭇삶도 없고 영혼도 (4) 없고 개인도 없어 평등하다. 그것은 이들 모든 착한 법에 의해서 바르고 (5) 원만하게 깨달아진다. 쑤부띠여, 이들 '착한 법, 착한 법'(52b. 1)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가 법이 아닌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착한 (2) 법'이라고 한다."
24. "또한 쑤부띠여, 어떤 훌륭한 아들 또는 훌륭한 딸이 (3) 십억 세계에서 산의 왕인 쑤메루산 (4) 만큼의 일곱 가지 보석더미를 모아서 보시를 행하는 것보다 (4), 누군가가 이 반야바라밀로부터 사행시 한 게송 (53a. 1) 만이라도 얻어서 남에게 가르치면, 쑤부띠여 (2), [이것에 비해] 앞의 공덕쌓임은 백분지 일도 못 미치며 동기마저도 (3) 감당하지 못한다."
25. "쑤부띠여,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는 이처럼 (4) '나는 뭇삶을 제도했다고 생각한다고 여긴다면, 쑤부띠여,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5).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여래가 제도한 어떠한 뭇삶도 (53b. 1) 없기 때문이다. 쑤부띠여, 만약 여래가 어떤 한 뭇삶이라도 (2) 제도했다면 이것은 여래의 자아에의 집착이며 (3), 뭇삶에의 집착이며, 개인에의 집착이며, 영혼에의 집착 (4) 이 될 것이다. 쑤부띠여, 자아에의 집착이라고 하는 것은 집착이 아니라고 여래 (5)가 말했다. 그것을 그런데 어리석은 일반사람들이 집착하고 있다(54a. 1). 쑤부띠여, 어리석은 일반 사람들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2) 여래는 말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일반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다(3),"
26. "쑤부띠여,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원만한 상호를 통해 여래를 (4)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그렇지 (5) 않습니다. 원만한 상호를 통해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54b. 1)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그러합니다. 그러합니다. 원만한 (2) 상호를 통해 여래를 볼 수 없다. 쑤부띠여, 만약 (3) 원만한 상호를 통해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 (4) 성왕도 여래일 것이다. 그러므로 원만한 (5) 상호를 통해 여래를 볼 수 업다."
그래서 세존께 (55a. 1) 장노 쑤부띠는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 "세존이시여 (2), 제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살펴보면 (3) 원만한 상호를 통해 여래를 볼 수는 (4) 없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이 때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5) :

나를 형상을 통해 보고
나를 소리를 통해 아는 자들은
잘못된 (55b. 1) 길에 빠지나니,
그 사람들은 나를 보지 못하리.
깨달은 이는 법성을 본다 (2)
스승들은 법신이네.
법성은 인식될 수 없으므로,
그것은 파악될 (3) 수 없으리.

27. "쑤부띠여,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원만한 상호를 통해서 이렇게 (4) 오신 이, 거룩한 이가 올바르고 원만한 (5) 깨달음에로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았다고 생각하느냐? 쑤부띠여, 너는 이처럼 보아서는 안 된다. 쑤부띠여 (56a. 1) 원만한 상호를 통해서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2) 가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에로 바르게 원만히 깨달은 (3) 것이 아니다. 쑤부띠여, 너는 이처럼 보살승을 (4) 입문한 자들이 어떠한 법을 파괴하거나 (5) 단멸시킨다고 생각한다면 쑤부띠여, 그처럼 보아서는 안 된다. 보살승 (56b. 1)에 입문한 자들은 어떠한 법이라도 파괴하거나 (2) 단멸시키는 일이 없다.
28. "쑤부띠여, 또한 훌륭한 아들 또는 훌륭한 딸이 (3) 갠지스강의 모래알 만큼의 세계를 일곱 가지의 보석으로 (4) 가득채워서 보시를 행하는 것보다, 어떤 보살이 이 제법 (5) 에 자성이 없고 생성이 없다는 사실에 인내를 보여주면,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57a. 1)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이 많은 공덕쌓임을 이룰 것이다 (2). 그러나 쑤부띠여, 보살들은 공덕쌓임을 (3) 자기 것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장노 쑤부띠는 말씀드렸다 : "세존이시여, 보살 (4) 들은 공덕쌓임을 자기 것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까?(5)"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자기 것으로 하더라도 잘못 (57b. 1)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자기 것으로 한다'고 말한 것이다."
29. "또한, 쑤부띠여, 어떤 사람이 (2) 이처럼 (3) '여래께서는 가시거나 오시거나 서있거나 앉으시거나 (3) 누우신다'라고 말했다면, 그는 내가 설한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4) 무슨 까닭이냐? 여래라고 하는 이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어디로부터 (5) 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58a. 1) 깨달은 이라고 한다."
30. "또한, 쑤부디여, 어떤 훌륭한 아들 또는 훌륭한 (2) 딸이 십억 세계에 있는 그 만큼의 (3) 티끌을 이를테면, 예를 들어 원자의 무리처럼 미세하게 만들면 (4), 쑤부띠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원자의 무리는 많다고 생각하느냐? (5)"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그 원자의 (58b. 1) 집합은 많겠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세존이시여, 만약 원자의 집합 (2) 이 있더라도 세존께서는 원자의 집합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3)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세존이시여, 원자의 집합 (4) 이라고 하는 이 집합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래께서 말씀하셨기 (5)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자의 집합이라고 합니다. 여래께서 (59a. 1) 십억 세계라고 말씀하신 것은 (2) 세계가 아니므로, 여래께서 세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억 세계 (3)라고 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4) 세존이시여, 만약 하나의 세계만이 있다고 하시면, 이것은 전일체에 (5)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여래께서 (59b. 1) 전일체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집착이 아니라고 여래께서 (2)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전일체에의 집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3) ; "쑤부띠여, 전일체에의 집착은 언어일 뿐이며 그 법은 말해질 수(4) 없다. 그런데 어리석은 일반사람들은 [거기에] 집착한다.
31. "쑤부띠여 (5), 어떤 사람이 이처럼 '여래께서는 (60a. 1) 자아에의 견해를 말씀하시고, 뭇삶에의 견해를 말씀하시고 (2) 개인에의 견해를 말슴하신다'고 말한다면, 쑤부띠여, 그는 또한 올바로 말 (3) 하는 것인가?"
쑤부띠는 대답했다 :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4). 선서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세존이시여, 여래 (5) 께서 자아에의 견해를 설하신 것은 견해가 아니라고 여래 (60b. 1)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아에의 견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쑤부띠여, 여기 보살 (3) 승에 입문한 자는 모든 법을 알고 보고 (4) 신해해야 한다. 무엇보다 법에의 알음얼에 머물지 않고 알아야 한다(5).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쑤부띠여, '법에의 알음얼, 법에의 알음얼'이라고 하는 것은 법에의 (62a. 1) 알음얼이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 '법에의 알음얼, 법에서 알음얼'이라고 한다.
32. 또한, 쑤부띠여, 보살 (3) 마하살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4) 세계를 일곱 가지 보석으로 채워서 보시를 행하는 것보다 (5) 어떤 훌륭한 아들 또는 훌륭한 딸이 이 반야바라밀로부터 (61a. 1) 사행시의 게송 하나만이라도 써서 받아 가지거나 지니거나 (2) 독송하거나 기억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세히 (3) 가르치면, 이것을 바탕으로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커다란 공덕을 (4) 이룰 것이다. 올바로 잘 개현하는 방법은 올바로 잘 개현하지 (5) 않는 것처럼 올바로 잘 개현하는 (62a. 1) 것이다."

별들과 어둠과 등불처럼
환상과 이슬과 거품처럼 (2)
꿈, 전광, 구름처럼
모든 지어진 것 보아야 하리(3).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슴하시고 나자, 장노 쑤부띠와 (4) [수행승들과] 보살들과 (5) 수행승, 수행녀, 평신도, 평신녀의 사부대중과 (62b. 1) 신과 사람과 아쑤라와 건달바의 모든 세계가 환희하여 (2)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을 찬탄했다.
거룩한 (3) 금강으로 능단하는 반야바라밀이라는 대승경전 (4) 이 끝났다.
나·모·바·가·바·떼, 쁘·랑·냐·빠·라·미·따·예(5), 옴·나·땃·띠·따, 일·리·시, 일·리·시, 밀·리·시, 밀·리·시, (63a. 1) 비·나·얀, 비·나·얀, 나·모·바·가·바·떼(2), 쁘·랏·띠얌·쁘라·띠, 이·리·띠, 이·리·띠, 미·리·띠, 미·리·띠, 슈·리·띠(3), 슈·리·띠, 우·슈·리, 우·슈·리, 부·유·예, 부·유·예, 쓰·와·하.
금강을 (4) 능단하는 이 정수를 한번 염송하는 자는 금강을 능단하는 경을 만구천 번 읽은 자와 (5) 같을 것이다. 길상이 있기 바랍니다.

 

 

 

 

 

 

 

 

 

 

 

 

 

 

 


3. 반야심경(般若心經)


1. 經題의 意味
2. 經의 成立
3. 般若心經의 種類
4. 後世의 硏究
5. 般若心經의 中心思想
6. 般若經의 思想的 意味
7. 經의 구조
8. 經의 本文과 解釋
Ⅰ). 小本 般若心經 산스크리트원문
Ⅱ). 小本 般若心經 산스크리트본의 우리말 飜譯
Ⅲ). 玄裝역 漢文本

참 고 문 헌

 

 

1. 經題의 意味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지고 또 가장 많이 유통되는 것이 바로『般若心經』이다(입니다). 산스크리트 본에는 경명을 플라즈냐 파라미타 흐리디야 수트라(pra-pramit-hrdaya-stra)라 하며, 정확한 명칭은『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으로서 보통『般若心經 』,『心經』이라 줄여서 부르고 있다(있습니다).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근본이 도는 진리의 글을 말한다.

經題를 풀이하여 보면『摩訶』는 상대 개념을 초월한 절대적인 큼이요, 위대함이다.

『摩訶』라는 말은 산스크리트본에는 없다(으며). 최초로 漢譯된 般若心經의 이름은 구마라습의 <摩訶반야바라밀대명주경>이다. 현장 역<般若心經>에 바로 이 구마라습 역의 <般若心經>이름에서 '摩訶'라는 두 글자를 빌어와 첨가한 것이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이고 이것이 유포본으로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마하는 대(大), 다(多)로 표현하는데 만법의 근원, 만법의 자성을 의미한다. 만법의 자성은 일체를 다 삼키고 있는 일체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모양은 무변화에 대소를 떠난 모양이다. 그러므로 편의상 그렇게 표현한다.

다음으로 『般若』는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praj)의 音譯語로서 '지혜'라고 意譯하고, 팔리 어로는 판냐(pa)이다(라고하며). 프라즈냐는 '알다'라는 의미의 동사 즈냐(j)에 접두사 프라(pra)를 붙인 문자이다. 또한 이 말은 파자나티라는 동사형으로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원시불교에서부터 이미 이 말에 불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서 '최고의 지혜','깨달음의 지혜', 즉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波羅蜜多』는 산스크리트 어 파라미타(pramit)를 音譯한 말(인데)이다. 구마라습은 이것을 바라밀이라 번역하고 있다. 이 말은 크게 나누어 두 종류의 해석이 있다. 첫째는 '최고의'를 의미(하며)하는 형용사 파라마(parama)에서 파생하는 말인 파라미(prami)에, 상태를 나타내는 접미사 타(t)가 더해져서 된 추상명사로서 '극치·완성·성취'를 의미하고 있다. 첫번째 해석에 의하면 반야바라밀다는 '지혜의 완성' 또는 '극치의 지혜'라고 번역할 수 있다.

둘째는 '저쪽의 언덕'을 의미(합니다)하는 명사 파라(pra)의 목적격 파람(pram)에 '간다'라고 하는 어근 이(i)를 붙여서 '저쪽의 언덕에 가는 자'라는 파라미트(pramit)의 명사를 만들고, 문법규칙에 의하여 최후의 티(t)를 생략하고, 접미사 타(t)를 붙여서 파라미타(pramit)라는 복합어를 만들었다는 것으로서, '저쪽의 언덕에 가는 것, 간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둘째의 해석에 의할 것 같으면, 반야바라밀다는 '지혜에 의해서 피안에 가는 것' 혹은 '지혜에 의해서 피안에 간 상태'라고 번역할 수 있다.

『心』은 산스크리트 어 흐리다야(hrdaya)를 意譯 한 것으로 '심장'의 뜻으로서 그것이 의미하는것은 정수·정요이다.

『經』은 영원히 일관 불변하는 법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의 강요가 되는 글이다.

그러므로, 경제의 의미는 반야의 대지혜 광명에 의해서 바라밀의 완전무결한 존재실상을 해명하는 정요를 설한 만고 불변의 진리자의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도리를 밝힌 핵심이 되는 경전", 넓은 의미로는 "큰 지혜로 우리에게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이 되는 말씀"을 말한다.

 

2. 經의 成立

『般若波羅蜜多心經』은 그 이름으로 보면 『大般若經』에 속한다(하며). 『大般若經』은 대승경전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경전이다. BC 1세기에서 활동한 中觀哲學을 확립하여 이름이 알려진 나가르쥬나(龍樹150-250)이전에 완성된 것으로 본다. 『華嚴經』 『法華經』『大乘涅槃經』등은『大般若經』보다 뒤에 나왔다.

BC 1세기경에 大乘佛敎운동이 일어나면서 불경인 『阿含經』연구가 활발하여진 것을 짐작할 수있다(있는데). 그것들이 모아져 『8천송반야경』이 나오게 되었다(고). 그 뒤 기원 1세기경에는 6백 卷 『大般若經』이 이루어 졌다(는데). 그런데 『般若波羅蜜多心經』은 이 6백 卷의 『大般若經』에 들어있지 않다. 그러니 『般若波羅蜜多心經』은 빨라도 2세기 이후에 쓰여졌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이 『般若波羅蜜多心經』이 이뤄진 상한선이다. 2세기까지는 없었다는 뜻이다. 이경은 649년 당의 현장 스님이

서유기의 주인공인 삼장법사 玄裝(602-664)이 인도에서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원전『般若波羅蜜多心經』을 漢譯(하였습니다)한 것이 中國 唐나라 정관 23년 5월 24일이라고 한다. 玄裝의 제자 知仁이 스승의 口譯을 받아 적었다고 전한다. 이 일이 玄裝 47살 때인 서기 649년의 일이다. 玄裝이 12살에 출가하여 낙양 정토사에서 스님이 되어 여러 스님들로부터 『열반경』등 불경을 배웠으나 불경 속의 낱말이 서로 모순되므로 인도어로 된 원전을 직접 배우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629년(정관 3년 8월)에 혼자 인도를 향해 떠나 17년만인 645년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27살에 떠나서 43살에 돌아왔다. 그때 불경을 520질 657부를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 『般若波羅蜜多心經』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현재 산스크리트어원전으로 가장 오래된 것을 뜻밖에도 일본 法隆寺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서기  609년에 法隆寺에 안치되었다. 지금 인도에 있는 오래된 원전도 법륭사의 원전보다 훨씬 뒤의 것이라고 한다.

일본 法隆寺에 『般若波羅蜜多心經』원전을 안치시킨 것이 609년이고 玄裝이 인도에서 『般若波羅蜜多心經』을 가지고 온 것이 645년이다. 그러면 『般若波羅蜜多心經』을 지은 연대는 『大般若經』이 나온 뒤인 2세기부터 6세기 사이이다. 6세기에서 전파기간을 2세기 동안으로 본다면 2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 『般若波羅蜜多心經』이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가쥬나 이우 아상가(無着 310-390), 바스반두(世親 320-400)등이 활동한 시기에 지어진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3. 般若心經의 種類
(원전의 법본은 대본과 소본의 2종류인데 그 중에 소본이 이에 해당하는 내용)

산스크리트본 『般若心經』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다른 경전들처럼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되는 序分과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歡喜奉行)"로 끝나는 流通分이 있는 廣本 또는 大本이고, 다른 하나는 이 앞뒤가 없이 다만 正宗分만 있는 略本 또는 小本이 있다.

이 산스크리트 원본에서 많은 漢譯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玄裝의 번역본이다. 그것은 小本을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이 小本의 산스크리트 寫本은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유독 일본의 法隆寺에 보존되어 있어 이채롭다. 전설에는 서기 609년 오노노이·모꼬라는 사람이 중국으로부터 전래받았다고 전하나, 그 학술적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어쨋거나 그것이 왜 일본에만 전해오는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그리고)원본이 같은 小本이리라 믿어지는 것을 한자로 音譯한 것이 돈황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현재 大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있고). 經題는 『梵本般若波羅蜜多心經』(은)이라고 붙여져 있으며, <觀自在菩薩이 玄裝 법사를 위하여 친히 敎授한 梵本으로서 潤色하지 않는다>라는 副題가 붙어있어 이채롭다. 현재 이 돈황출토 梵本般若心經은 大正新修大藏經에 수록되어 있다.

대본의 사본은 일본 장곡사에 전해지고 있다. 그 원본은 홍법 대사의 제자 慧運이 838년 入唐했다가 847년 귀국하면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며, 高野山의 正智院에 전해 왔었다고 전한다.

유명한 비교사상가 막스·뮐러(Max Mller)는 法隆寺 사본과 장곡사 사본을 비교·교정해 가면서 校正本 및 英譯을 출반하여 前世紀 불교학계의 큰 수확으로 평가되어 있다.

The ancient palm-leaves containing the Parj-prmit-hridaya-stra and the Ushinisha-vigaya-dhrani, Edited by F Max Mller and Bunyin Nanjio, Oxford, clarendon Press, 1884.

제목의 뒤에 나오는 陀羅尼經은 佛頂尊勝陀羅尼라는 玄裝이 있고, 이 Max Mller의 勞作은 아리얀(Aryan) 씨리즈에 수록된 것이다.

般若心經의 한문번역본은 앞서 언급했던 돈황출토본을 제외하고 일곱가지가 남아 있다.

① 姚秦 鳩摩羅什(Kumrajiva) 飜譯, 서기 402∼413. 『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1 卷

② 당 玄裝 번역(649년) 『般若波羅蜜多心經』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양의 불교문화권 국가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讀頌用이다.

③ 般若(Praja, 740∼810)와 利言 등의 飜譯. 『般若波羅蜜多心經』1 卷. 이것은 大本에 해당한다.

④ 法月의 重譯(738) 『普?智藏般若波羅蜜多心經』1 卷. 이것은 廣本의 般若心經 산스크리트문에 對應한다. 法月은 중인도 마가다 (Magadha)국의 스님이다.

⑤ 唐 知慧輪의 번역. 『般若波羅蜜多心經』1 卷.

⑥ 法城 飜譯. 『般若波羅蜜多心經』1 卷.

⑦ 宋 施護 飜譯. 『聖佛母般若波羅蜜多心經』1 卷.

이 일곱가지의 한문번역본 가운데서 가장 많이 읽히는 것으로는 玄裝번역과 구마라집본이며, 讀頌用으로는 특히 玄裝 번역본이 널리 유통되고 있다.

한편 般若心經의 영역본으로는 앞서 말한 Max Mller 본 이외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Samuel Beal : A Catena of Buddhist Scripture from the Chinese, London Trbner and Co, 1817.

Ditto Journ al of Royal Asiatic Society, N.S. I. 1865, 25∼8.

Edward Conz : Tests,-Sources and Bibliography of the Prajpramit-hrda JRAS 1948. p.p 33∼51.

이 외에 몽고역도 있는데 그것은 대본역에 해당하며 비교적 티베트본에 가깝다.

般若心經의 원본과 異譯本에 관해서는 요시오의 勞作 <般若心經異本全集>이 있다.

또한 산스크리트본과 한문번역본을 대조하면서 그 번역과정과 원본의 문법까지를 상술한 저술로서는 나카무라·하지매의 <般若心經·金剛經>이 있다. 우리말 해석판도 십여 종류 나와 있는데 대부분 에세이를 겸한 불교입문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4. 後世의 硏究

<般若心經>은 中國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으로 말미암아 한문으로 讀頌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 왔다. 그 의미를 알고 讀頌한다기 보다는 그대로 외우기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口念에 그친 경우가 많다. 물론 경전의 受持, 讀頌 공덕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般若心經』에서 강조되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실천이며, 사려가 아니라 행동이다. 이것은 마치 念佛의 참뜻이 왜곡되어 呼佛로 전락되는 경우와 흡사하다. 이점에 대해서는 깊은 반성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般若心經에 관해 후세의 연구가들이 남긴 주석서로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약 60여 종류에 달한다. 그것은 대부분 般若空觀 학파에 의한 저술이다.

대승운동의 큰 주류를 논할 때 우리는 먼저 龍樹를 중심으로 하는 中觀學派를 든다. 사물의 본질을 無自性·空으로써 파악하며, 일체의 개념적인 것을 초월할 것을 주장한다. 그들이 근본으로 삼는 중요한 경전들은 『金剛經』,『般若經』등 반야를 주제로 하는 經論들이다.

한편 이와 상반된 이론을 펴는 대승학파를 唯識학파라고 부른다. 사물의 본질을 공로서가 아닌, 즉 眞空妙有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유식학파들의 소의경전은 『解深密經』·『唯識二十論』등이다.

물론 이들의 지향점이 다르다는 의미는 아니고 단지 방법론상의 서술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시대적으로 보아서 유식학파는 공관학파보다 다소 후대에 성립된 것이며, 지역적으로도 구분이 가능하다. 따라서 반야를 宗旨로 하는 『般若心經』의 주석서가 대부분 공관학파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는지도 모르겠다.

이『般若心經』주석서의 대종을 이루는 또 다른 학파는 禪家이다. 선가의 비약적 논리, 아니 논리를 초월한 논리의 기틀이 『般若心經』에서 마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채롭게 유식학파의 입장에서 이 般若心經을 분석하고 해석한 주석서도 있다. 우리나라의 圓測 법사가 저술한 『般若心經贊』도 유식계통의 문헌중 하나이다.

이 육십여종의 般若心經 주석서를 저술한 사람들은 나라별로 나누어 보면 역시 중국사람이 제일 많다. 唐·宋·明·淸나라의 시대를 거치면서 꾸준히 저술이 나타나며 그들은 거의 대장경안에 수록되어 있다. 그 다음에는 일본 사람, 그리고 한국의 경우 新羅시대, 學僧들의 저술이 몇 편 있다.

天竺이라고 저자의 나라이름이 表記된 것은 인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곳에서는 그 가운데에서 특히 철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의 문헌들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唐 慧淨. 『般若波羅蜜多心經疏』1 卷.
唐 淸邁.『般若波羅蜜多心經疏』1 卷.
唐, 窺基(632-682)『般若波羅蜜多心經幽贊』2 卷.

이들 셋은 唯識說의 입장에서 空觀을 해설한 저술들이다.

唐, 法藏(643-712) 『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1 卷.
天竺國, 提婆 『般若波羅蜜多心經註』1 卷.
宋, 師會(?-1166) 『般若心經略疏連珠記』2 卷.
明曠, 『般若波羅蜜多心經疏』1 卷.
唐, 慧忠 『般若波羅蜜多心經註』1 卷

※ 이상 모든 心經註疏의 대본은 현장의 약본임

宗防·如玘 共註 : 般若心經註解 2卷 (明人)
弘贊 : 般若波羅密多心經添足 (明人)
大顚了通(1100전후) : 大顚注心經(淸人)

이들 주석서의 대부분은 卍續藏經에 수록되어 있다. 제 四一 卷에서 四二 卷 사이에 四十六 종이 수록되었고, 또한 大正新修大藏經에 二十여종이 수록되어 있다.

이 주석서들을 훑어 보면 모든 것이 玄裝의 번역본을 母本으로 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다른 말로 하면 『般若心經』의 경우 玄裝의 번역본이 기본적인 텍스트로서 인정되고 있다는 말이다.


※ 우리 나라에서 硏究한 사람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연구가로서 『般若心經』에 관한 주석서를 집필한 사람으로는 圓測(613∼696)과 元曉(617∼686)가 있었다고 한다(지만). 그러나 원효의 저술은 현존하지 않고 다만 원측의 『般若波羅蜜多心經贊』1 卷만이 현존할 따름이다. 최근 이 원효의 『般若心經疏』를 복원하려는 학자가 있어 그 대강을 『般若心經復元疏』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일이 있다.

원측의 생애나 사상경향 등에 대해서는 詳論을 피하고, 다만 『般若心經贊』의 개요와 그 사상의 핵심에 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원측은 眞平王 35년(서기 613)에 태어나서 12살 때 당나라로 건너가서 六九六년 당나라 佛授記寺에서 入寂할 때까지 중국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당시 중국의 실권자 則天武后로부터 生佛과 같은 예경을 받았던 분이라고 『宋高僧傳』에서는 말하고 있다.

『般若心經贊』은 전체적으로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ⅰ). 敎起因緣. 경의, 성립개경을 논하는 서술부분.(불교흥기의 인연을 밝힘)

ⅱ). 辦經宗體. 경의 요지를 간결하게 설명하는 본론부분.(반야심경의 종지를 밝히는 부분)

ⅲ). 訓釋題目. 경의 제목을 해설하는 부분.(반야바라밀심경 이라는 명칭의 의미를 밝힘)

ⅳ). 判文解釋. 경의 본문을 조목별로 나누어 해설하는 부분.(반야심경의 본문을 나누고 그 내용을 해석하는 것)

공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중관학파에서는 모든 존재의 본성이 공하다고 하여 일체의 형이상학적 존재를 부정했으나, 유식학파에서는 모든 존재가 식의소산이라고 함으로써 현상의 근원으로서 식을 인정하기 때문에 서로 대립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원측은 유식학의 계통에 속해 있으면서도 공과 유식을 대립시키기보다는 이 둘을 모두 융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현종 때에 《般若經》등 불경의 간행·보급을 위해 반야경보라는 재단을 설치하였다. 현종은 죽은 양친의 원당으로 현화사를 창건하고, 《大般若經》600권을 비롯하여 《金光明經》《묘법연화경》등을 조판하여 이 절에 두게 하는 한편, 이들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곡물로써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이 바로 반야경보이다.

조선 초에는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라는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언해본이 간행되었다. 이것은 세로 28.1cm, 가로19cm인 목판으로서 보물 제177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나라 종희의 현정기를 삽입하여 효령대군과 한계희등이 왕명으로 국역하여 세조 10년(1464)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했다. 권말의 책장 일부를 도려냈으나 판각이 정교하고 인쇄가 깨끗한 초간본이며, 이것이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본이다.

다음으로 반야바라밀다심경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을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라고 한다. 간단히 《반야심경언해》 또는 《심경언해》라고도 한다. 조선 세조 9년(1463)에 왕명을 받은 한계희등이 국문으로 번역하여 간경도감에서 간행하였다. 그 후 명종 8년(1553)에 황해도 해주 자비산 심원사에서 중간했다.

그 후에 것으로는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병연주기회편》이 간행되었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승려 법장 현수의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를 승려 명안이 연주시격으로 편찬한 책이다. 조선 숙종36년(1710)에 승려 수연이 교정하고, 지리산 쌍계사에서 간행하였다.

 

5. 般若心經 의 中心思想

『般若心經』은 大乘佛敎의 핵심경전이다(으로). 大乘佛敎의 근본경전인 반야계 경전의 요지가 이 경에 담겨(져있습니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大乘佛敎가 보급되고 있는 곳에서는 어느 종파 어떤 행사이건, 이 시경이 주야로 독송되고 종교의식 속에 중요 절차로 자리하고 있다.

『般若經』을 비롯해 『維摩』·『法華』·『華嚴』·『無量水經』 등의 경전성립으로 발달되어 왔다. 이들 경전 가운데에서 가장 기본되고 중심되는 것이 『般若經』이다.

반야계통의 중요경전은 통칭 '十本般若'라고 지적되듯이, 小品·大品·仁王·金剛·濡首·勝天王·理趣·大盤若智 등이며, 대체로 그 집대성으로 간주되는 『大般若經』은 6백 卷이나 되는 방대한 것이다. 『인왕반야경』과 『般若心經』만은 이 『大般若經』에 예속되지 않는다. 이 반야부경전 중에서 가장 일찍 이루어져 원초적인 것은 『金剛般若經』, 가장 짧게 간추려져 그 요지 정수를 잘 나타내는 것이 바로 『般若心經』이다.

따라서 발달불교인 大乘佛敎의 기본 줄거리가 '반야계 경전'에 담겨 있고, 이 계통경전 중의 핵심요지가 이 『般若心經』에 설파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대승 가운데의 대승요지를 설하는 경전 중의 핵심경전이 바로 『般若心經』이라고 평가된다.

『般若心經』은 반야분의 중심사상을 간략하게 압축하여 제시한 극히 짧은 경으로서, 다르고 있는 주요내용은 般若, 5蘊, 諸法, 6根, 界, 12因緣 4諦, 無所得, 涅槃, 般若바羅密多, 아뇩다라삼먁삼보리등이다.

『般若心經』은 주로 이 '반야바라밀다'의 실천과 효과를 밝히고 있다. 즉, 그 첫 구절에 보살이 이것을 실행한다는 내용이 밝혀지고, 뒷 부분에 보살은 이것에 의해 마음에 흔들림이 없어지며 열반을 증득하고 三世諸佛도 이에 의해서 위없이 올바른 깨침을 이룬다고 강조하며, 나아가 이는 불사의한 신통묘력을 지닌 진설어-呪·眞言이라고 지적하여, 그 秘密眞言이 열여덟자 운음 그대로 떨어지고 있다.

『般若心經』에는 '반야바라밀다'의 실천내용 설명이 태반을 차지한다. 곧 부처될 후보자요, 부처 뜻 실현자로서 내세워진 보살 중 가장 현실적인 '관세음보살'이 이것을 실천할 때에, 五蘊 모두가 空性임을 관조하여 온갖 괴로움을 해결한다고 교설하기 시작하여, 이 가운데 五蘊皆空 즉 만물(구성요소 다섯)은 공성에 지나지 않음을 다각도로 길게 역설하고 있다.

예컨대 만물(諸法)이 空性인 모습(특징 : 실상)을, 생김도 아니요 없어짐도 아니요 또 不垢不淨 不增不減이라고 변증하고 있다. 생과 사, 현실과 이상, 그리고 增益과 減損 등은 대립하는 양극단이요, 절대가 못되는 상대세계이며 기쁨과 슬픔이나, 지옥과 천국 등을 되풀이 왕복하는 동요의 세계이어서, 안정과 피안이 이루어질 수 없지 않는가.

따라서 이와 같은 양극단 대립하는 상대 세계를 부정 초월함으로써 진실의 세계가 열려오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거부하는 不生不滅이라는 변증논리로써 치우친 세계에서 벗어난 中道實相 곧 空性(평등의 조화)인 모습이 설명되고 있다.

이 '제법의 공성인 실상'은 근본불교의 緣起觀과 諸法無我의 취지를 되살려 낸 것이요, 훗날 諸法實相이라는 기치아래 오묘한 철학체계를 꽃피우게 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有나 無나 또는 생과 멸 등의 양극단적 세계관은 상대적으로 대립하는 우리들의 세계요, 개념화된 견해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들로써 '사물의 실상'에 접근하기는커녕 편견에 빠져 치우친 행동을 유발하여 생활을 막는 결과에 이르고 만다.

따라서 『般若心經』에서는 당시까지 불교일반에서 중요시되었던 교리내용마저 부정 거부하여 '만물의 실상'을 완벽하게 나타낼 관인 五蘊과 18界로도 '만물의 실상'을 완벽하게 나타낼 수 없으므로 공성 안에는 이들도 없다고 설명하고, 나아가 이상실현 방법인 12인연의 順觀과 逆觀이나 4성제 그리고 궁극 목표인 智와 得, 즉 보리와 열반마저도 없다고 부정한다.

위세서처럼 兩刀論法과 부정논리를 통해 만물의 실상(諸法空相)을 밝혀냄을 일반적인 경험과 지식과 인식 개념의 불완전한 결합과 모순을 철저히 비판하여 언어나 사념 이전의 근원적 본질을 알게 함이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물들지 않은 인간 본성의 깨끗함을 닦아 길러가게 하고 보다 높은 차원의 가치세계를 창조 참여하게 하며, 나아가 끌리고 막히는 등의 흔들림 없이 굳은 자아의식의 확립과 인간 주체의 존엄을 고수하여 마음의 활달한 자유와 인생의 평온을 이루게 함이다.

결국 보살이 만물의 空性無所得無自性을 알아내는 '반야바라밀다'의 실천에 의해 마음 흔들림이나 두려움 그리고 번뇌망상은 없어지고 최고열반을 증득하게 하는 것이 『般若心經』의 중요 글자이다. 

 

6. 般若經의 思想的 意味

『般若心經』은 大乘佛敎의 독특한 사상을 전하고 있는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로)이다. 그렇다고 해서 『般若心經』이 수많은 대승경전 가운데 그저 한 가지 경에 불과하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般若心經』은 260자라는 짧은 경문이지만, 大·小乘 경전의 내용을 간결하고도 풍부하게 응축하고 있어서, 예불이나 각종 의식에는 물론 식사 때에도 지송하고 있을 뿐 아니라 초종파적으로 공통으로 독송하는 경전(입니다)이다. 佛敎에 입문하지 않더라도 불교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전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기 앞서 외워두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할 만큼 불교 입문서로서의 대표성도 가지고 있다.

『般若心經』을 포함하고 있는 일련의 경전들을 보통 '般若經'이라 부른다. 학자들은 이 般若經을 근본 반야경전. 잡부 반야경전. 기타 반야경전으로 구분하고 있다.

근본 般若經典에 속하는 것으로 600부 ≪大般若經≫≪大品般若經≫≪小品般若經≫이 있고, 잡부 般若經에 속하는 것으로 ≪金剛經≫이나 지금 논하고자 하는 ≪般若心經≫등이(있습니다)있다. 그러다 보니 般若經의 양은 엄청나게 많아서 현재 남아 있는 대승경전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般若經이 大乘佛敎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하다고 하는 까닭이 양적으로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般若經이 가지는 大乘佛敎의 선구적인 역할(인데)이다. 즉 수많은 대승경전 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경전이 바로 '반야'라는 이름을 가진 경이고, 이 般若經이 성립되어 문자화된 것은 大乘佛敎의 발생과 거의 같은 시기인 서력 전후라는 사실이다(입니다).

'大乘'이라는 말이 般若經에서 처음으로 나타내는 것을 비롯하여 大乘佛敎의 모든 사상을 이 경전들이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維摩經≫은 般若經의 中心 思想을 드라마 형식으로 전개한 것이고, ≪法華經≫이나 ≪華嚴經≫도 각각 특색 있는 구성을 하고는 있지만, 사상적으로 말하면 般若經에 나타나는 여러 사상 가운데 몇 가지에 역점을 두어 보다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般若經과는 전혀 이질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정토경전까지도 般若經의 보살사상을 토대로 해서 비로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般若心經』은 이렇게 양적으로 방대하고 질적으로 大乘佛敎의 전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般若經의 내용 중 가장 핵심만을 설한 것이다.

 

7. 經의 구조

『般若心經』은 흔히 인도의 우수한 학승들이 반야계 경전뿐만 아니라 팔만대장경의 8만4천 법문을 260자 안에 요약한, 전무후무한 경전이라고 일컫는다. 그만큼 군더더기 하나 없이 불교사상의 정수를 오롯이 담아내었다는 말인데, 음미할수록 한자한자가 놀라운 짜임새로 구성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선 공사상의 핵심을 정교하게 변증하는 앞 단계가 있고 이어서 바라밀의 경지를 웅장한 톤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그 결론으로 진언의 내용이 풍부한 울림으로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심경은 대체로 四分하여 말할 수 있다. 입의분, 파사분, 공능분, 총결분(으로 나눕니다)이 그것이다.

▶ 입의분은 반야의 주된 뜻을 세우는 부분입니다. 지혜로써 저 언덕을 건너가는 이치로 살펴보니 일체의 현상이 공하다는 것을 밝히고, 그래서 일체의 괴로움을 해탈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觀自在菩薩'에서 '度一切苦厄' 까지가 이에 해당. (25자)

▶ 파사분은 그릇된 인식을 깨뜨리고 반야의 공관으로 비춰보는 부분입니다. 모든 현상과 가치와 방편을 지혜의 공도리(空道理)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물질 현상은 공이며, 공이 또한 일체 현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공성(空性)은 일체에 가득차 있어서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 십이인연(十二因緣), 사제법(四諦法)까지 텅 비어 공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공한 도리는 아무 얻을 바가 없는 무소득(無所得)의 경지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에서 '以無所得故'까지가 이에 해당한다.(109자)

▶ 공능분은 지혜의 공관으로 일체 현상을 비춰본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을 설한 부분입니다. 일체의 현상은 지혜의 눈으로 보면 공한 것임은 앞에서 모두 설명했습니다. 이 부분은 거기서 나타나는 경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마음에 아무 걸림이 없이 자유로우며 마침내 열반에 이르러 성불을 이루는 대목입니다.  '菩提薩陀'에서 '故得阿 多羅三 三菩提'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61자)

▶ 총결분은 전체 경의 결론 부분입니다. 지혜로써 저 언덕을 건너가는 이치는 그대로 진리의 참 모습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무한한 공덕을 나타내는 큰 위신력을 가지고 있음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에서는 반야의 공관이야말로 궁극의 진리에 도달하는 깨달음의 경지를 규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인 극찬구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의 끝부분 '故知 般若波羅蜜多' 에서부터 끝의 眞言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65자)

 

8. 經의 本文과 解釋

Ⅰ). 小本 梵語原典 般若心經

 

Praj  p ramit  H daya S tra


O  namo Bhagavatyai  rya-Praj  p ramit yai!
 rya-Avalokite varo bodhisattvo gambh r   praj  p ramit -cary   caram  o vyavalokayati sma: pa ca-skandh s t    ca svabh va  ny n pa yati sma.
iha   riputra r pa    nyat    nyataiva r pa , r p n na p ithak   nyat    nyat y  na p ithag r pa , yad r pa  s    nyat  tad r pa ; evam eva vedan -sa j  -sa sk ra-vij  na .
Iha   riputra sarva-dharm     nyat -lak a  , anutpann  aniruddh , amal  avimal , an n  aparip r   .
Tasm  Ch riputra   nyat y   na r pa  na vedan  na sa j   na sa sk r   na vij  nam. na caksu - rotra-ghr  a-jihv -k ya-man  si. na r pa- abda-gandha-rasa-spra  avya-dharm   na cak ur-dh tur y van na manovij  na-dh tu . na-avidy  na-avidy -k ayo y van na jar -mara a  na jar -mara a-k ayo. na du kha-samudaya-nirodha-m rg . na j  nam, na pr ptir na-apr pti .
Tasm  Ch riputra apr ptitv d bodhisattvasya praj  p ramit m   rity viharaty acitt vara a . citt vara a-n stitv d atrasto vipary sa-atikr nto nish h -nirv  a-pr pta .
tryadhva-vyavasthit   sarva-buddh   praj  p ramit m-  ritya-anuttar   samyaksambodhim abhisambuddh  .
Tasm j j  tavyam: praj  p ramit  mah -mantro mah -vidy -mantro 'nuttara-mantro' samasama-mantra , sarva-du kha-pra amana , satyam amithyatv t. praj  p ramit y m ukto mantra  tadyath : gate gate p ragate p rasa gate bodhi sv h . iti praj  p ramit -hridaya  sam ptam.

[Conze, Edward, Buddhist Wisdom Books (George Allen & Unwin, London, 1958) pp.77-102.]

 

Ⅱ). 小本 般若心經 산스크리트본의 우리말 飜譯

全智者인신 覺者에게 예배합니다.

求道者이신 거룩하신 觀自在보살은 深遠한 지혜의 완성을 실천하고 있을 때에 존재에는 다섯가지 구성요소가 있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보살은 이러한 구성요소가 그 本性에서 말하면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舍利弗이여! 이 세상에 있어서는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다. 또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물질적 현상인 것은 아니다.

이리하여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감각도, 表象도, 의지도, 지식도 모두 실체가 없는 것이다.

舍利弗이여, 이 세상에 있어서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실체가 없다는 특성이 있다. 生했다는 일도 없고, 滅했다는 일도 없고, 더러운 것도 아니고, 더러움에서 떠난 것도 아니고, 주는 일도 없고, 느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실체가 없다는 입장에 있어서는 물질적 현상도 없고, 감각도 없고, 표상도 없고, 의지도 없고, 지식도 없다.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신체도 없고, 마음도 없고, 형태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고, 촉각의 대상도 없고, 마음의 대상도 없다. 눈의 영역에서부터 의식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모두 없는 것이다.

[깨달음도 없기 때문에] 미혹도 없고, [깨달음이 없어지는 일도 없으므로] 미혹이 없어지는 일도 없다. 이리하여 마침내 늙음도 죽음도 없고, 나아가 늙음과 죽음이 없어지는 일도 없다. 고통도 고통의 원인도, 고통을 제거하는 것도, 고통을 제거하는 길(道)도 없다. 아는 일도 없고, 얻는 바도 없다.

그러므로 얻는다는 일이 없어서 모든 구도자는 지혜의 완성의 덕택으로 마음에 걸림이 없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고, 顚倒된 마음을 멀리 떠나서, 영원한 平安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과거·현재·미래에 계시는 깨달으신 분들은 모두 지혜의 완성의 덕택으로 위없는 올바른 깨달음을 얻으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혜의 완성의 위대한 진언, 위대한 깨달음의 진언, 無上의 진언, 無比의 진언은 모든 고통을 가라앉히는 것이며, 속임이 없으므로 진실하다. 이 진언은 지혜의 완성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설했졌다.

가테 가테 파아라가테 파아라상가테 보디 스바아하

여기에 지혜의 완성의 마음을 끝낸다.

 

 

 

Ⅲ). 玄裝역 漢文本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煖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陀 衣般若波羅蜜多故 心無가碍 無가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 多羅三 三菩提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반야심경 해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는 크다(대), 많다(다), 초월하다(승)의 뜻이고, 반야는 지혜, 깨달음의 뜻이며, 바라밀다는 저 언덕에 이르다(도피안)는 뜻이다. 심경은 핵심되는 부처님의 말씀이란 뜻이다. 일체를 초월하는 지혜로 피안에 도달하는 가장 핵심되는 부처님의 말씀.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이 (삼계. 사생. 육도의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깊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오온(물질적 현상, 감각작용, 의지적 충동, 식별작용)이 모두 공함을 (실체가 없음을) 확연히 알고 이 모든 고통(4고, 8고)에서 벗어났느니라.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물질적 현상이 그 본질인 공과 다르지 않고, 공 또한 물질적 현상과 다르지 않으니, 물질적 현상이 곧 본질인 공이며, 공이 곧 물질적 현상이니라. 감각작용, 지각작용, 의지적 충동, 식별작용도 다 공이느니라.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여, ( 이 모든 존재들이 외관상으로는 생겨나는 것 같기도 하고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더러운 것 같기도 하고 깨끗한 것 같기도 하고 증가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감소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 모든 현상계의 본질적 차원(관세음보살의 차원)에서는 생겨나는 일도 없고 없어지는 일도 없으며,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으며, 감소하는 일도 없고, 증가하는 일도 없느니라.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그러므로, 사리자여) 이 현상계의 본질의 차원인 공의 입장에서는 물질적 현상도 없고, 감각작용과 지각작용 그리고 의지적 충동과 식별작용도 없느니라.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이 공의 세계에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사유작용 등 감각작용도 없고, 빛깔과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비감각적 대상인 원리 등 객관대상도 없으며, 시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 촉각의 영역) 사유의 영역등 주관작용도 없느니라.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이 공의 세계에서는) 무명도 없고, 무명의 소멸도 없으며(행, 식, 명색, 6입, 촉, 수, 애, 취, 유, 생도 없고 그 소멸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늙고 죽음의 소멸도 없느니라.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이 공한 세계에서는)고통도 없고, 고통의 원인도 없고, 그 원인의 소멸도 없고 그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수행방법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 공의 세계에서는)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은 것도 없고,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도 없느니라.
 
 
菩提薩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無 碍 無 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그럼므로 사리자여)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느니라. (보살은) 뒤바뀐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는 열반에 이르렀느니라.
 
 
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 多羅三 三菩提
삼세제불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최상의 깨달음인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완전한 깨달음)를 얻었느니라.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그러므로, 이 반야바라밀다는 이 큰 신비한 주문이며, 큰 밝은 주문이며, 큰 최상의 주문이며, 이 얼마나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주문인가를 알아야 하느니라.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이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은 능히 일체의 고액을 소멸시키며 진실하여 거짓이 없나니, 그러므로(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이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일러 가로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3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우리 함께 피안으로 가자. 피안에 도달하였네. 아! 깨달음이여 영원하라."

 

 

◈ 참 고 문 헌 ◈

1. 般若心經論議. 尹柱逸譯. 寶蓮閣.
2. 생활속의 반야심경. 李喜益著. 경서원刊.
3. 般若心經 講論. 越祖宋醉玄. 경서원.1
4. 新반야심경 강의. 혜담스님. 불교시대사. 
5. 智慧의 完成. -般若心經-鄭柄朝著. 東國大學校附設譯經院. 
6. 한권으로 읽는 팔만대장경. 영담스님강수. 진현종지음. 1997. 들녘
7. 佛敎常識百科. 홍사성 엮음. 불교시대사 
8. 經典의 世界. 불광교학부 엮음. 불광출판부
9. 多夕柳永模의 불교 사상. 朴永浩저. 문화일보
10. 반야심경·금강경 李箕永 飜譯,解說. 韓國佛敎硏究院
11. 불柳타의 반야사상. 寶山 엮음. 미래문화사
12. 般若心經 行信論. 혜담스님. 불광출판사
13. 반야심경강의. 高神覺卑. 경서원
14. 반야심경강의 한길로. 경서원
15. 만화반야심경. 임기준. 불교만화사
16. 경전성립론
17. 불교경전의 이해

 

 

 

 

 

 

 

 

 

 


Ⅲ. 공사상(空思想)

 

1. 공의 의미와 공사상의 배경
1) 공의 의미
2) 공사상의 역사적 배경

2. 공사상의 전개
1) 공사상의 역사적 전개
2) "중론"에 나타난 공사상
3) 나가르주나 이후 공사상

 


1. 공의 의미와 공사상의 배경

1) 공(空)의 의미
     
 공(空)이란 용어는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말로, 특히 <반야경(般若經)>을 비롯한 대승경전에서 강조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이 말은 자성(自性, svabhava), 실체(實體, dravya), 본성(本性, prakti), 자아(自我, atman) 등과 같이 인간이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없다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개념들은 오직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으로 실제로 이러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책상'이라는 사물을 생각하는 경우, 그 책상에는 본질적으로 책상의 자성이란 없다고 하는 것을 '공'이란 말로 나타내는 것이다. 책상이란 나무 등으로 만들어져 사람이 그 곳에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쓰게 하는 물건이지만, 실제 그 책상에 사람이 앉게 되면 그 때는 의자로서 사용되는 것이지 책상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가르주나(N g rjuna, 용수, 150 ~ 250)를 비롯한 대승불교의 사상가들은 '책상의 자성'이라는 영원한 성격에 집착되어 있는 것은 '책상'이라는 말에 사로잡혀 함부로 가치판단을 부여하는 인간 내면의 본성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집착을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잘못된 분별(分別)을 없앨 것을 설하였다. 특히 자아와 같이 인간 내면의 본질로 간주되는 것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본질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아라는 말에 집착되어 있는 인간의 잘못된 생각을 경계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본질, 자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공(空)'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또한 우리들이 언어에 대해 일방적으로 부여하는 개념 분별로서 잘못된 망상을 없앨 것을 공사상은 강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를 갖는 공(空)이란 용어의 원어는   nya로서, 본래 ‘부풀어 오른’, ‘속이 텅 빈’, ‘공허한’ 등을 의미하여 ‘부풀어 오른 모양으로 속이 비어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어원적인 면에서   nya는   (= v ,  vi :  vayate, 부풀다, 증대하다)라는 동사 어근으로부터 만들어진 과거분사   na에서 파생한 형용사로서, 이   na는 중성명사로서 '허공, 결여, 부족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의 원어인   nya라는 말은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는 상태', 즉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nya라는 말의 용례 가운데 자주 쓰이는 형태에 'A는 B에 대하여   nya이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으며, 이것은 'A는 B가 공한 것이다'라는 말로 곧 'A에게는 B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형태는 예를 들면 '존재하는 것에는 아뜨만이 없다'라고 하는 경우와 같이 불교일반에서 공의 의미를 나타낼 때 자주 쓰인다. 이 형용사   nya의 추상명사형이   nyat  로 공의 성질 등을 의미하여 '공성(空性), 공상(空相)'등으로 한역되고, 영어로는 emptiness, voidness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또   nya라는 말은 인도 숫자의 0을 의미하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nya라는 말이 불교에 도입되어 공(空)으로 한역되고, 특히 <반야경>을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으로 다루어진다. 이 공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취급하여 사상적인 관점에서 논의한 것을 공사상(空思想)이라 하며 특히 대승불교에서 이러한 공사상을 강조한 사람들을 공론자(空論者,   nyav din)라 부르고, 그들의 주장을 공론(空論,   nyav da)이라 한다. 이러한 공론자는 용수 이후 중관파(中觀派, M dhyamika)를 형성하여 공사상을 전개해 가며 그들은 스스로를 공성론자(空性論者,   nyat v din)라 불러 '사물에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렇든 공(空)이란 말은 대승불교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용어이지만, 그 의미가 본격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대승경전 가운데 최초로 성립된 반야경에서이다. 이 반야경을 성립시킨 대승불교도는 공사상을 밝히려는 일념으로 반야경을 제작하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공에 대한 개념은 반야경 이전의 초기 불전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에 먼저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공사상을 살펴봄으로써 공의 역사적 배경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2) 공사상의 역사적 배경

⑴ 초기 불전에 나타난 공사상
<반야경>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공사상은 후에 나가르주나에 이르러 철학적 체계를 가지고 대승불교 철학을 발생시키는 계기가 된다. 용수는 공의 개념이 붓다가 정각(正覺)에서 증득한 연기법의 이치와 일치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또한 부파불교 중의 하나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주장한 법의 견해를 비판하여 공은 곧 무자성(無自性)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용수에 의해 명확하게 체계화되는 공사상에 대한 논리는 이미 불타의 근본교설을 전하는 초기불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왜냐하면 불타의 근본사상을 나타내는 것이 다름 아닌 연기(緣起, pratitya-samutp da)에 대한 교법이며, 이 연기설을 바탕으로 공(空)을 이론적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의 이론적 전개와 관련하여 불타는 당시 중요한 논쟁의 주제였던 아트만(atman, 自我)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초기불전 가운데 최고(最古)의 것으로 간주되는 "숫따니빠따(Suttanip ta)"에서는 "항상 생각을 집중하여 자아(自我)에 집착하는 견해를 타파하여, 세간(世間)을 공으로서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왕(王)을 보는 일은 없다(No. 1119)."라고 말해, 곧 공에 대한 관찰은 자아(自我) 즉 아뜨만에 집착하는 견해를 타파하며, 또 그와 같이 보는 사람은 죽음을 초월한다고 말하고 있다. 붓다가 무아(無我, an tman)를 설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지만, 이와 같이 공에 대한 관찰도 또한 아뜨만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즉 아뜨만에 대한 집착을 타파할 수 있는 것도 세간이 다름 아닌 공이기 때문이다. 붓다의 공에 대한 가르침이 아뜨만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은 다음의 경전에서도 잘 나타난다.

세존이시여, '세간은 공이다, 세간은 공이다'라고 합니다. 세존이여, 대체 어찌하여 '세간은 공이다'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난다여, 아(我) 혹은 아소(我所)에 대하여 공인 까닭에 '세간은 공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아 혹은 아소에 대하여 공한 것인가 하면, 안(眼)은 아 혹은 아소에 대하여 공이다. 모든 색(色)은 아 혹은 아소에 대하여 공이다. 안식(眼識)은 아 혹은 아소에 대하여 공이다. 안촉(眼觸)은 아 혹은 아소에 대하여 공이다. [이(耳)는 ... 비(鼻)는 ... 설(舌)은 ... 신(身)은 ... 의(意)는 ...] 그리고 의촉(意觸)을 연(緣)으로 생기는 고(苦). 낙(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수(受)도 아 혹은 아소에 대하여 공이다. 아난다여, 아 혹은 아소에 대하여 공인 까닭에 '세간은 공이다'라고 하는 것이다.(相應部 35. 85)

이 대화에서 보이는 "아 혹은 아소에 대하여 공이다."라고 하는 것은 "아와 아소가 없다."는 말과 같은 것으로 곧 무아를 나타낸다. 그리고 아(我, attan)란 인도 고대 문헌인 우빠니샤드(Upani ad) 이래 사물의 궁극적인 본질을 나타내는 아뜨만을 의미하며, 아소(我所, attanya)란 '아에 속하는 것' 혹은 '아(我)의 작용'을 의미한다. 이렇듯 붓다는 아난다( nanda, 阿難)에게 세간이 공하다고 하는 의미는 아뜨만이 없는 까닭이며, 그 아뜨만은 안, 이, 비, 설, 신, 의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 어디에도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초기불전에서는 공의 의미가 무아(無我)설과 밀접히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초기 불전의 무아설은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교설로서 정형화되어 설해지며, 경우에 따라서 무상. 고. 공. 무아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일체가 무상하고 고인 까닭에 무아라고 설해지며, 또한 무상하고 고인 까닭에 공이며 무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가 설한 일체법(一切法)은 붓다가 정각에서 직관한 연기의 이치에 근거를 두는 것이므로 이 공과 무아의 교설도 다름 아닌 연기의 이치가 전제로 된다. 이러한 공의 이치가 연기법에 따르고 있는 것은 '여래(如來)가 설하신 것은 매우 깊은 이치를 밝히고 있으며, 공과 상응하는 법이며, 연기법에 수순하고 있습니다(잡아함 1258)'라는 구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붓다의 근본 가르침은 공의 이치와 상응하며 연기법에 일치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초기 불전에 나타나는 공(空) 개념이 무아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은 붓다가 살아 있던 당시의 사상적 면모를 보이는 중요한 요소를 제공해 준다. 이것은 붓다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인도 고대 문헌인 우빠니샤드에서의 핵심적 논점이 바로 아뜨만이었으며, 이 아뜨만을 부정하는 무아설이 공과 밀접한 관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빠니샤드의 아뜨만과 붓다의 공의 개념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⑵ 아뜨만과 공

공(空)의 개념이 초기 불전에서 아뜨만, 즉 자아와 관련하여 나타나는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붓다의 근본사상에 비추어 볼 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아뜨만은 이미 붓다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지만, 붓다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인도의 대표적인 우빠니샤드 문헌의 중요한 사상적 주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우빠니샤드는 베단따(Ved nta)라고 불려 '베다의 끝', '베다의 정수(精髓)'를 의미하여 인도사상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으며, 최초의 우빠니샤드는 불교 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우빠니샤드의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아뜨만이며, 따라서 우빠니샤드에 등장하는 다수의 사상가들은 아뜨만에 대해 다양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우빠니샤드의 대표적인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인 야즈냐발캬(Y j avalkya)는 일체 모든 존재의 근거가 아뜨만으로서 그 아뜨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실로 일체는 그 일체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아뜨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일체가 사랑스러운 것이다. 실로 메뜨레이여, 보여지고, 들려지고, 생각되어지고, 이해되어지는 것이 바로 아뜨만이다. 실로 그 아뜨만이 보여지고, 들려지고, 생각되어지고, 이해되어지는 것에 의해 일체는 알려진다.(브리하드 아란야까 우빠니샤드, BAU 2. 4. 5)

야즈냐발캬는 이와 같이 아뜨만은 궁극적 존재로서 모든 만물의 근본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감각기능도 아뜨만에 의해 작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보고, 듣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각각의 기능이 작용하는 것도 그 본질로서 아뜨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야즈냐발캬는 아뜨만을 '결코 보이지 않지만 보는 자, 들리지 않지만 듣는 자, 생각되어지지 않지만 생각하는 자'(BAU 3. 7. 23) 등으로 표현하여 인식기능의 주체자로서 아뜨만의 개념에까지 발전시키고 있다.
이렇듯 불교 흥기 이전에 이미 우빠니샤드에서는 아뜨만에 대해 다양한 주장을 전개시켰으며, 그러한 사상적 분위기는 붓다 시대에 이르러서도 중요한 철학적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제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이 무아설로 나타나고, 그리고 무아에 대한 붓다의 주장은 그의 정각에서 확인한 연기법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바탕이 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연기설에 입각했을 때 각각의 현상에는 그와 같은 본질이나 주체자로서 아뜨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없는 것으로, 그것은 비어 있는 것 즉 공(空)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교 경전이 '아와 아소에 대해 공이다'라고 하는 것도 우빠니샤드에서 밝히고 잇는 주체자로서의 아뜨만, 그리고 그 아뜨만의 작용과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불교의 공 개념이 이와 같이 초기부터 우빠니샤드의 아뜨만과 관련하는 것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불교의 핵심인 연기설의 바탕 위에 공의 개념은 전개된다. 즉 붓다는 연기에 대한 이치를 직관함으로써 일체 존재물은 상호 인연관계로서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자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연기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각각의 사물에는 본질적인 아뜨만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곧 공이며, 또 그러한 가르침을 무상. 공. 무아의 형태로 정형화하여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붓다의 공사상은 불교의 역사적 전개 속에서 설일체유부의 교리적 갈등을 뛰어넘어 '반야경'에서 다시 강조되고, 그리고 나가르주나에 이르러 공과 무자성(無自性)의 관계로 재정립된다. 반야경에서 공의 개념을 재삼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재확인을 대승불교도의 입장에서 명확히 선언한 것으로, 이것은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설일체유부로 대표되는 부파불교의 교리상의 모순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설일체유부와의 관계에서 반야경의 공사상에 대해 다음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⑶ 반야경과 공
많은 대승경전 가운데 가장 일찍이 성립된 것이 <반야경>으로, 이 <반야경>은 후에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密多經)> 600권으로 집대성된다. 반야경 가운데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줄여서 반야심경)과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波羅蜜多經, 줄여서 금강경)등은 특히 우리들에게 잘 아려져 있다. 반야(般若)라는 말은 산스끄리뜨어 praj  의 음(音)을 번역한 말로서 지혜(智慧)를 의미하며, '바라밀다'란 p ramit 의 음을 번역한 것으로 '완전히 도달한 것', '완성'이란 의미로 한문에서도 '도피안(到彼岸)'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반야경의 초기 형태는 남인도를 무대로 성립하며, 그 후 기원 2세기경까지 반야경은 점차적으로 늘어나고 그 무대도 서인도, 북인도로 옮겨 간다. 특히 북인도에 자리한 쿠샤나(Ku  na, 月氏) 왕조 시대에는 다수의 반야경이 제작된다. 이 반야경 가운데 금강경은 최초의 원시적인 형태를 잘 나타내며, 반야심경은 발전되 반야경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다수의 <반야경>에 공통되는 중심사상이 공관(空觀)으로, 공관이란 일체 존재하는 사물들은 그 본성이 공이며, 또한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고 관(觀)하는 것을 말한다. 이 <반야경>의 공관은 대승불교 전체의 기본적인 교설이 되고 아울러 대승불교도의 실천적 기반을 이루게 된다.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관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면 대승불교 이전의 부파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부파불교 가운데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m Sarv stiv din)의 교리는 <반야경>의 공사상이 출현하는 사상적 배경이 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설일체유부에서 일체법이 존재한다는 실유(實有)의 주장은 <반야경>의 공사상과 대승불교의 중관(中觀) 철학이 발생하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부파인 설일체유부는 인간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법(法, dharma)이라 부르고 그 법을 5위(位) 75법(法)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인간과 자연계를 포함한 일체의 존재를 다양한 법의 이름을 분류하고 그리고 그 각각의 법에는 파괴되지 않는 법의 고유한 자성(自性)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색법(色法), 심법(心法), 심소유법(心所有法), 심불상응법(心不相應法), 무위법(無爲法)의 5위로 구분되는 일체 존재와 그 각각에 속하는 75개의 법은 과거, 현재, 미래를 걸쳐 항상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설일체유부의 독특한 법체항유설(法體恒有說)이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야경>은 각각의 법에는 그와 같은 실체, 자성이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공이라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즉 모든 법은 공(空)한 것이기 때문에 고정적인 "법(法)의 관념"을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체법은 다른 법과 조건지워져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정적, 실체적 본성을 갖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무자성(無自性)인 것으로, 이 무자성인 것은 곧 공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법이 공한 것을 가장 잘 나타내 보여 주는 경전이 바로 반야심경으로, 반야심경에 나타나는 "색(色)은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 수(受). 상(想). 행(行). 식(識)도 또한 그와 같다. 사리자야, 이 모든 법은 공의 모습이며, 따라서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으며, 깨끗지도 않고, 늘어나는 것도 없으며, 줄어드는 것도 없다."라고 하는 구절은 이 공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반야심경에서 보듯이 설일체유부에서는 파괴되지 않는 자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는 갖가지 법, 가령 안. 이. 비. 설. 신. 의의 6근(根)이나 색. 성. 향. 미. 촉. 법이 6경(境), 공. 집. 멸. 도의 4제(諦) 등도 이 반야심경은 바로 공의 모습이기 때문에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반야심경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일체가 공이라고 하는 관찰은 반야바라밀다를 실천하여 얻어지는 것으로, 이것은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단계가 아니라 지혜의 완성에 도달한 경지에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야지(般若智)로서 공관은 용수와 그 이후의 사상가들에게 있어 이제설(二諦說)의 입장에서 명확히 그 구분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반야심경으로 대표되는 <반야경>은 법의 공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와 같이 관하는 공관이 곧 '지혜', '반야'로서, 다시 말해 공관(空觀)이란 반야바라밀의 경지에서 얻어지는 지혜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설일체유부의 법유(法有)의 입장과 반야경의 법공(法空)의 입장을 서로 대비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설일체유부 → 법의 유자성(有自性) → 법의 실유(實有) [법유(法有)]
+-반  야  경 → 법의 무자성(無自性) → 법의 공(空) [법공(法空)]

이렇듯이 반야경은 법의 공을 천명하는 것을 주요한 과제로 삼고 대승불교의 기치를 높였지만, 그러나 이 공의 개념이 불교역사상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며 불타의 교설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반야경은 설일체유부가 주장하는 교리에 대한 명확한 반대를 공이란 말로 표현하였지만, 그 공(空)이 지니는 불교사상적 가치는 '제2의 석가(釋迦)'라 불리는 나가르주나(N g rjuna)에 이르러 비로소 명확히 되어진다. 즉 나가르주나는 그의 중론(中論)에서 공사상의 역사적 위상이 붓다의 교설에 대한 올바른 이해임을 명확히 하고, 아울러 공사상은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緣起法)에 의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2. 공사상의 전개

1) 공사상의 역사적 전개
 
<반야경>의 공(空)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이 용수이며, 이 용수의 대표적인 저술인 <중론(中論, Madhyamakakarikah)>을 중심으로 한 사상을 일반적으로 중관(中觀) 사상이라 하며, 또 그 중관 사상의 흐름을 이어받는 불교 논사들을 중관파(中觀派, Madhyamika)라 부른다. 용수는 <중론> 외에도 다수의 저작을 남기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저술은 역시 <중론>으로, 이것은 중론에 대해 많은 주석서가 씌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용수 당시의 제자로서 용수의 사상을 드높인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리야데바( ryadeva, 聖提婆, 170 ~ 270)와 라후라발드라(R hulabhadra, 羅侯羅跋陀羅, 200 ~ 300) 이다. 아리야데바는 용수의 사상을 선양(宣揚)하여 특히 외도(外道)의 사상을 맹렬하게 비판한 까닭에 그로 인해 논적(論敵)에게 암살되었다고 전해진다. 아리야데바는 <사백론(四百論)>, <백론(百論)>, <백자론(百字論)> 등을 남기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백론은 나가르주나의 중론, 십이문론(十二門論)과 더불어 중국에서 삼론종(三論宗)의 기본 전적으로 중요시되었다. 라후라발타라는 용수와 아리야데바의 제자로서, 이미 <중론>에 대한 주석을 주었다고 전해지지만 남아 있지 않고, 그의 현존하는 저술로는 <반야바라밀다찬(般若波羅蜜多讚)>, <법화찬(法華讚)> 등이 전해진다. 아리야데바와 라후라발타라는 용수와 함께 초기 중관파로 분류되며, 용수의 사상을 선양하고 중관 사상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초기 중관파에 이어서 용수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중관파를 형성시키며 아울러 중관사상을 완성하는 데 기여하는 사상가들이 나타나는데 그들이 곧 중기 중관파의 논사들이다. 그리고 이 중기중관파의 논사들에게 공통되는 점은 모두가 용수의 중론에 대해 주석서를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반야등론광석(般若燈論廣釋)을 지은 아발로키타브라타(Avalokitavrata, 觀誓)에 의하면 중론의 주석가는 8인으로, 용수나 자신의 주석 외에 붓다팔리타(Buddhap lita), 찬드라키르티(Candrak rti), 데바샤르만(Deva arman), 구나슈리(Gu a r ), 구나마티(Gu amati), 스티라마티(Sthiramati), 바바비베카(Vh vaviveka) 등이 주석서를 남겼다고 전하고 있다. 한역으로 전해지는 것으로는 청목(靑目)이 주석한 중론과 무착(無著)의 순중론(順中論)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주석가들 가운데 실제 중관사상의 역사적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붓다팔리타(佛護, 470 ~ 540), 바바비베카(淸弁, 500 ~ 570), 찬드라키르티(月稱, 600 ~ 650)이다. 붓다팔리타는 중론의 주석서로서 근본중론주(根本中論註)를 남겼지만 그의 주석 태도는 후에 바바비베카에 의해 비판을 받는다. 바바비베카는 그의 반야등론(般若燈論)에서 붓다팔리타의 주석 태도를 비판하고 논리식에 따른 주석 태도를 취하였지만, 이러한 논리 중심이 태도는 후에 다시 찬드라키르티의 프라산나파다(Prasannapad , 明句論)에서 비판된다. 이러한 비판은 후에 티베트에서 중관파를 바바비베카 계통의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 Svat ntrika)'로 구분하는 계기가 된다.
이 중기 중관파의 뒤를 이어 나타나는 중관파가 후기 중관파로 분류되는 논사들로서, 그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 즈냐나가르바(J  nagarbha), 샨타라크시타(  ntarak ita), 카말라실라(Kamala ila), 아티샤(Ati a)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중 즈냐나가르바(智藏, 700 ~ 760)는 후기 중관파의 개조로 간주되는 인물로서 그의 주저인 이제분별론(二諦分別論, Satyadvayavibha ga)의 제목에서도 보이듯 중관파의 중요한 문제가 후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2제설'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음을 알 수 잇다. 샨타라크시타(寂護, 725 ~ 783)는 날란다(N land ) 승원(僧院)의 대학장(大學匠)으로서 후기 대승불교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이미 섭진실론(攝眞實論, Tattvasa graha)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지어 인도의 모든 사상을 불교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으며, 또한 주저인 중관장엄론(中觀莊嚴論, Madhyamak la k ra)을 저술해 자신의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 후기 중관파의 논사 가운데 특히 샨타라크시타, 카말라실라, 아티샤 등은 티베트의 불교 전래와 교단의 확립에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이 후기 중관파이 사상은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뒤에도 티베트에서 그 명맥을 유지해 가는 것이다.
중국에서의 중관사상은 서역(西域)의 쿠마라지바(Kum raj v , 鳩摩羅什, 344 ~ 413)가 나가르주나의 저술을 번역하면서 알려지게 된다. 이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나가르주나의 중론과 십이문론, 아리야데바의 백론은 삼론으로 중시되어 후에 삼론종(三論宗)으로 발전하고, 특히 수(隋)나라 길장(吉藏, 549 ~ 623)에 이르러 삼론종은 크게 번성하게 된다. 길장은 앞의 세 논서에 대한 주석서를 포함해 전26부에 달하는 저술을 남기고 있으며, 특히 중관의 기본 개념인 이제에 대해 이제장(二諦章)을 저술해 자신의 2제에 대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길장에 의해 대성한 삼론종은, 당(唐)나라의 현장(玄 , 602 ~ 664)에 의해 유식계통의 법상종(法相宗)이 성행하면서 급격히 쇠퇴하게 되어, 삼론교학에 대한 연구는 미미해진다.
이 삼론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관법사(貫法師). 인법사(印法師). 혜관(慧觀) 등이 연구하였다고 전해지며, 특히 혜관은 일본에 삼론종을 전달해 일본 삼론종의 초조(初祖)로서 추앙받게 된다. 신라에서도 원효(元曉)에 의해 이제장(二諦章), 삼론종요(三論宗要), 중관론종요(中觀論宗要) 등과 같은 중요한 중관사상 계통의 저술이 지어졌다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2) 중론에 나타난 공사상
용수는 <중론>을 저술하여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 용수의 사상은 중관파로 이어지고 또 그의 영향은 중국을 비롯한 대승불교권에서는 소위 '팔종(八宗)의 조사(祖師)'라고 불릴 정도로 강대하였다. 이 <중론> 속에서 용수는 '공사상'의 이론적 근거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중론> 제24장 18게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릇 연기하고 있는 것, 그것을 우리들은 공성(空性)이라 설한다. 그것은 임의로 시설(施設)되어진 것[假名]이며, 그것은 중도(中道) 그 자체이다.

이 게송에서 볼 수 있듯이 용수는 <반야경>에서 '공'이라고 설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연기(緣起)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곧 우리가 '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실제는 모든 사물이 각기 독자적인 존재의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연기의 관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관계로 이루어진 까닭에, 연기의 관계를 떠나있는 독자적인 성질로서 '자성'이나 '실체'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용수는 이러한 연기의 인연관계를 떠나 있는 것을 '자성(自性)'이라고 부르고 따라서 자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무자성(無自性)'이며 '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사물이 연기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실체인 자성에 의해 생긴다고 한다면 그 때는 자성이 서로 연기한다는 모순이 될 것이라고 중론의 게송은 설하고 있다. 곧 자성이란 인(因)과 연(緣)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립적인 것이며,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는 일 없는 항상 고정불변한 존재이지만, 실제로 그와 같은 것은 생겨날 수도 있을 수도 없음을 용수는 지적하고 있다.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과 연의 상호관계로 생겨나는 것이고 따라서 그와 같은 것은 곧 자성이 없는 까닭에 공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중론의 중심 내용은 연기=무자성=공의 관계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용수가 고정불변한 자성의 개념을 부정한 것은 그 자성의 관념이 우리 인간들의 망상 - 이것을 용수는 희론(戱論, prapa ca)이라 말한다. - 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 이 자성의 개념은 다양한 인연의 관계를 초월해 영원한 동일성을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특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 내재한 본질적 속성을 가리키고 있다. 즉 우리의 삶의 세계는 수많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약속에 의거한 언어적 세계로서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불변의 세계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언어를 불변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해 그로 인해 번뇌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론>은 그와 같은 불변적인 성질로서 자성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우리 삶의 세계가 연기의 이치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에 대하여 용수는 중론의 귀경게(歸敬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연기(緣起)는 불멸(不滅). 불생(不生). 부단(不斷). 불상(不常). 불래(不來). 불거(不去). 불이(不異). 불일(不一)하며, 희론(戱論)이 적멸(寂滅)한 것이며, 길상(吉祥)한 것임을 가르쳐 주신 정등각자(正等覺者), 설법자 가운데 최고인 그에게 나는 귀의합니다.

이 구경게에서 8가지 부정의 논리로서 나타나는 연기의 이치는 곧 일체사물이 본질적으로 생멸. 단상. 거래. 이일의 대립적인 개념을 떠나있는 '공'의 이치와 동일함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용수는 이 귀경게에 이어서 그러한 연기의 이치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닌 것임을 '사구불생(四句不生)'의 논리로서 증명해 가고 있다. 따라서 중론에서는 이처럼 붓다의 연기법이 '공사상'과 '무자성' 논증의 논리적 바탕이 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아울러 그러한 연기법에 대해 제26장의 관십이인연품(觀十二因緣品)에서 붓다가 설한 '12연기'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중론>이 이와 같이 연기법을 바탕으로 무자성, 공에 대한 논리를 수립하여 <반야경>의 '공관'에 대한 이론적인 체계를 세우고 있지만, 이러한 이론적 체계에 무엇보다 중요한 관점을 용수는 '이제설(二諦說)'의 정립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2제'에 대한 교설은 공에 대한 이해와 직접적인 관계를 보이는 것은 물론, 동시에 용수 이후 <중론>의 주석가들 사이에서 그 견해 차이로 인해 중관파가 둘로 나뉠 정도로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교설이기도 하다.  <중론> 제24장에서 용수의 반대자는 만약 일체가 공이라면 사성제, 사향사과(四向四果), 삼보(三寶) 등의 일체도 공하여 모두가 그 의미를 잃게 될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용수는 그 반대자가 공용(空用), 공성(空性), 공의(空意)에 대해 무지한 까닭에 그와 같이 스스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고 말한 뒤 다음과 같이 '이제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러 부처님은 2제에 의거해 법을 설하시는데
첫째는 세속제(世俗諦)이고, 둘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24-8)

2제의 구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어 깊고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한다. (24-9)

세속제에 의하지 않으면 제일의제는 설해지지 않고
제일의제에 의하지 않으면 열반은 얻을 수 없다. (24-10)

이들 게송에서 보이듯 '세속제(世俗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 勝義諦라고도 한다.)'의 2제는 불타가 의거해 설하는 것으로, 이 2제에 대한 바른 이해는 진실한 뜻을 아는 관건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2제에 대한 바른 구별의 필요성은 나가르주나에 의해 명확히 제시되었지만, 실제 2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용수 이후 <중론>의 주석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용수는 반대론자에 대하여 그들이 공의 바른 의미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2제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용수는 '연기와 공성을 파괴한다면 세간의 일체 언어습관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24-36)’라고 하여 연기와 공의 이치야말로 세간을 성립시키는 근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세간의 언어 습관인 세속제가 다름아닌 연기와 공을 바탕으로 성립하는 까닭에, 만약 연기와 공을 부정한다면 세간의 삶을 부정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삶의 세계가 언어의 세계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변의 자성세계가 아니라 약속과 습관에 의거한 연기의 세계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와 같이 세속제를 성립시키는 바탕으로서 연기와 공의 이치를 바로 알지 못한다면 제일의제를 알 수도 없고 또한 열반을 얻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연기와 공의 이치는 반야경에서 설하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경지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따라서 그 반야바라밀의 세계는 곧 제일의제의 진리세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다시 말해 세간의 언어 습관인 세속제가 성립하는 근저로서 연기와 공에 대한 이해야말로 승의의 진리를 알고 열반을 얻게 하는 구체적인 지혜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용수는 2제설을 통해 연기와 공의 이치가 세간을 세간답게 하고 제일의제와 열반을 얻게 하는 구체적인 지혜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였던 것이다.
용수는 <중론>에서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관'을 연기설과 같은 위치에 놓음[同置]으로써  공관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대승불교의 역사적 위상(位相)을 확립시켰다. 이로 인해 <반야경>으로 대표되는 대승불교는 역사적으로 그 연원(淵源)이 불타에게 유래되었음이 분명해지고 아울러 대승불교의 역사적 의미는 더욱 공고히 되었다. 이 중론의 내용은 용수 이후 다수의 주석가들을 통해 그 사상적 의미가 심화되었고 또한 용수사상을 이어받아 중관파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3) 용수 이후 공사상

중기 중관파는 후에 중관파를 2개의 학파로 구분할 정도로 용수의 사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한 차이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찬드라키르티의 프라산나파다 제1장 관연품(觀緣品)으로, 찬드라키르티는 그의 저술 속에서 붓다팔리타를 비판하는 바바비베카의 견해를 다시 비판하여 붓다팔리타의 견해를 옹호하고 있다. 즉 찬드라키르티의 프라산나파다에 따르면, 바바비베카는 붓다파리리타가 증인(證因)이나 유례(喩例) 등이 필요로 되는 논리식의 사용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에 대하여, 찬드라키르티 자신은 중관파가 스스로 자립적 논증을 행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여 바바비베카를 다시 비판하고 있다. 또한 찬드라키르티는 바바비베카의 연기에 대한 이해와 주장 명제에 '승의(勝義)에 있어서'라는 한정사를 붙이는 것 등에도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프라산나파다에 보이는 이러한 비판은 근본적으로 용수의 '2제설'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바바비베카와 찬드라키르티의 제1의제, 즉 승의제(勝義諦)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다. 먼저 바바비베카의 승의제에 대한 견해를 보면 그는 자신의 중관심론주 사택염(中觀心論思擇焰)에서 "승의(勝義)는 2종이다. 첫째는 현행(現行) 없이 일어나며, 출세간적이고, 무루(無漏), 무희론(無戱論)인 것이며, 둘째는 현행을 동반해 일어나 복덕(福德)과 지(智)의 자량(資糧)에 수순하여 청정세간지(淸淨世間智)라 일컬어지며, 희론을 갖는 것이다."라고 말해 승의제를 2종류로 나누고 있다.
여기에서 청정세간지라 일컬어지는 지(智)를 바바비베카는 '문사수(聞思修)로 얻어진 반야지혜'라 부르며 그러한 반야지혜는 '올바른 세속에 대한 바른 분별력'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세속에 대한 바른 이해는 승의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것을 바바비베카는 "진실이라는 누각(樓閣)에 오르는 것을 올바른 세속이란 사다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中觀心論頌 3-12)"라고 사다리에 비유해 말하고 있다. 즉 바바비베카에 있어서 세속에 대한 바른 분별력은 승의의 반야지를 얻는 수단이 되는 것으로, 따라서 그러한 바른 분별력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수단으로써 논리식이 중시되었다.
이것에 대하여 찬드라키르티는 승의제란 모든 언어적 세계와 언어로 나타나는 일체 경계를 떠난 '무희론(無戱論)의 승의'만이 있을 뿐으로, 그것이 곧 정견(正見)의 경계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정견의 경계만이 진실된 것이고 나머지는 잘못된 분별의 경계로서 세속제라고 말하고 있다.(入中論 6-23). 즉 찬드라키르티에 의하면 승의제는 붓다가 성취한 정견의 경계로서, 그것을 구체적인 언어로써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언어로 표현이 가능한 것은 오직 세속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찬드라키르티는 세속을 진실된 세속과 진실되지 못한 세속의 두 종류로 나누고, 세간에서 보통사람이 진실된 것으로 인정하는 진실세속은 성자(聖者)의 입장에서는 단지 세속적인 것 - 찬드라키르티의 표현에 의하면 유세속(唯世俗, sa v tim tra) -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세간의 언어에 의해 승의제가 표현 가능하다고 하는 바바비베카의 입장과 표현 불가능하다는 찬드라키르티의 입장이 서로 대립하여 나타나는 것이 중기 중관파의 공사상에 대한 역사적 전개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공이라는 세간의 언어로 표현된 개념은 승의제의 세계를 나타낸다고 생각한 것이 바바비베카로서 따라서 그는 논리식의 사용에 있어서 '승의에 있어서'라는 한정사를 붙여 승의의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바비베카 자신도 승의를 둘로 구분하여 언어로 표현 가능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이것에 대하여 찬드라키르티는 승의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체험의 절대적 세계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찬드라키르티의 프라산타파다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것으로, 또한 이러한 차이로 인해 후대 키베트에서 바바비베카 계통을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 붓다팔리타. 찬드라키르티 계통을 귀류논증(歸謬論證)파로 명명(命名)해 구분하여 중관의 두 학파로서 간주하기에 이른 것이다.
중기 중관파에서 이와 같이 논점이 되었던 2제설은 후기 중관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중관사상의 중심 개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저술이 후기 중관파의 개조로 일컬어지는 즈냐나가르바의 이제분별론(二諦分別論)인 것이다. 이미 저술의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그는 2제에 대한 바른 이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 첫머리에서 "2제가 이미 구별되어 있음에도 대논사(大論師)들 조차 어리석은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설에 어떠한 목적이 있겠는가. 그 까닭에 나는 2제를 구별한다."(제1송)라고 하여 2제 분별의 필요성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후기 중관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2제에 대한 바른 이해가 강조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후기 중관파에 이르기까지 같은 불교내에서 서로 대립되었던 중관파와 유식파(唯識派)의 사상적 대립이라는 역사적 사실도 포함되어 있다. 즉 이러한 사실은 중기 중관파의 논사인 바바비베카와 찬드라키르티에 의해 유식설 비판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불교 논리학파 등이 영향에 따른 2제설의 재정립 등이 후기 중관파에 부여된 과제로서 새롭게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과제를 담당한 사람들이 후기 중관파이며 그들에 의해 불교사상은 또한 새롭게 전개해 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즈냐나가르바는 이제분별론을 저술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2제설을 중심으로 한 중관사상의 과제를 완벽히 해결하고자 한 사람이 후기 대승불교의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샨타라크시타이다. 샨타라크시타는 이미 섭진실론(攝眞實論)을 지어 대학자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또한 중관장엄론을 지어 자신의 사상을 명확히 나타내 보였다. 중관장엄론은 전체 97게송과 자신의 주석으로 이루어진 저술로 이 책은 샨타라크시타 자신의 2제에 대한 견해를 밝힌 저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승의제란 구체적으로 '희론(戱論)이 적멸(寂滅)' 된 상태를 가리키지만, 그러한 승의제는 또한 논리식으로 표현이 가능하여 이것을 샨타라크시타는 '승의에 있어 무자성에 대한 논증'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논리식을 사용하는 점에서 샨타라크시타는 바바비베카 계통을 이어받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샨타라크시타의 논리식 사용에는 여러 가지 특색이 나타난다. 그는 '무자성'을 논증하기 위하여 불교 이외의 모든 사상을 비판하고 또한 불교 내부의 사상에 대해서도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경량부(經量部). 유식파(唯識派)의 순서로 비판하여 일체법이 무자성. 무아임을 논증하고 있다. 이러한 논증을 위해 그는 중관장엄론 제1게송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유명한 '이일다성(離一多性)의 증인(證因)'을 사용하여 무자성의 논증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 무자성은 이미 용수의 중론에서 나타나듯 공사상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이 무자성의 논증에 인도의 모든 학파의 견해를 인용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무자성의 논증이란 중관장엄론 제92게에 나타나듯이 결국 무아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샨타라크시타에 이르러서도 무자성의 논증은 결국 무아설에 의거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후기 중관파의 사상이 붓다의 무아설과 용수의 무자성 논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으며 또한 붓다의 연기설을 그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연기설에 의거해 전개된 불교의 공사상은 반야경에서 특히 선양되고 나아가 용수에 의해 연기. 무자성. 공의 형식으로 철학적으로 체계화되고 더욱이 후기 중관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중요한 사상적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후기 중관파의 무자성에 대한 논증도 보다 깊이 있고 광범위한 의미에서 공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논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 강조된 공사상은 대승불교 역사 전체에 걸쳐 언제나 항상 불교 사상가들의 정신을 자극하고 명확히 그 의미를 밝혀야 하는 일관된 중심 사상이었던 것이다.

 

 

 

 

 

 


금강경의 법문전개과정에 대한 고찰
김 광 하(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 운영위원)

 

<목차>

1) 서론

2) 금강경이 전제하고 있는 현실승단(僧團)의 의식(意識)
    가) 4단계 성인(聖人)의 수행과정
    나) 재가불자의 보시(布施)

3) 당대 승단의 4단계수행이론과 생천(生天)보시의 이론적 근거
    가) 해탈수행(解脫修行)의 이론적 근거
    나) 보시(布施)의 이론적 근거로서의 인과법(因果法)과 3륜(三輪)

4) 금강경의 법문 전개과정
    가) 보시의 실천행위와 그 실천의식에 대한 반성(反省)
    나) 수행의 사고과정의 반성과 인욕(忍辱)바라밀

5) 금강경 하편(下篇)의 오온불생론(五蘊不生論)의 전개

6) 맺는 말 - 사상(四相)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편집자 주> 이 글은 금강경에 대한 기존의 심학적 해석의 테두리를 벗어나 당시 승단과 사회역사적 현실에 천착하여 그 당시 경전 집필자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나를 염두에 두고 금강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특히 보시문제에 대한 불교적 입장, 四相에 대한 이해 등등은 금강경을 이해하는 지평을 확장시킨 의미있는 이론적 검토라 생각된다.
본지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 딱딱하고 긴 논문을 게재한 것은 이와 같이 실천적인 관점에서 경전을 재해석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 시대의 바른 불교적 삶, 실천의 장을 여는데 기여하는 많은 논문들이 나와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이다. 그리고 본지가 지향하고 있는‘역사실천과 이론사유의 통일적 발전’이라는 본지의 사명에도 부합되는 것이라고 판단되어 이 글을 싣는다.
이 논문을 쓴 김광하님은 연세대학교 71학번으로 연세대 불교연구회 활동시기부터 현재까지 불교공부를 계속해 오고 있으며, 현재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 운영위원이자 외국인노동자인권문화센터 상임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직업은 사업가이다.


1) 서론

금강경은 B.C 1세기에서 A.D 1세기경에 출현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불멸 후 400∼500 년이 지난 이 시기는 불교에 대한 승단의 이론이 발전하여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등의 학파가 형성되고, 경제적으로는 확고한 왕권의 비호와 자산가와 상공업자 등 부호들에 의한 사원 및 토지 등의 기증, 즉 대규모의 물적 보시에 의해 현실적 세력을 확보한 상태로 알려지고 있다.
 불멸 후 100∼200년 승단은 금(金)을 보시받을 수 있느냐에 대한 가부(可否)문제로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리되었다. 금강경은 제2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서 보시를 실천하는 주체로서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을 상정함으로써 경 첫머리에 부처님이 보살에 유촉한 것을 밝혀 교법의 정당성과 정통성의 당위를 주장하고, 보살이 주체가 되는 보시(布施)의 실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보시는 일반 신도가 실천하는 것이니, 금강경은 보시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문제가 되는 시점에서 이루어진 경임을 말하고 있다. 금강경은 금강경이 처한 역사적 현실에 대한 사료가 더 밝혀질수록 더욱 구체적으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나, 이 글은 금강경의 법문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당대의 기존 승단의 수행 및 보시론에 대한 금강경의 문제제기의 입장에서 해명하는데 머물고 있다.


2) 금강경이 전제하고 있는 현실승단(僧團)의 의식(意識)

가) 4단계 성인(聖人)의 수행과정
금강경이 직면하고 있는 기존 승단의 수행론은 금강경에서 예시되어 있듯, 4가지 단계(預流, 一來, 不還, 阿羅漢)를 거쳐 수행을 완성하는 이론이다. 초기 경전에는 이러한 수행단계가 그다지 큰 문제로 부상하지 않았으나, 후기에 갈수록 이러한 수행체계는 공식화되고 수행의 척도로서 확고한 기준이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승단이 확립되어 있다는 현실이 가지는 수행적 의미는 교리상으로 입문하는 수행자에게 수행의 단계가 객관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일단 수행자에게 4가지 단계에 의한 수행과제가 주어졌을 때, 각 수행단계는 수행자의 수행(因)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果)으로 이해된다. 한 단계와 그 다음단계는 수행의 고하심천(高下深淺)을 결정짓는 것으로 수행자는 다음의 단계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수행적 당위성(當爲性)이 있다. 이는 수행의 완성으로 가기 위한 도덕적 가치이며 동시에 승단의 수행질서를 형성하는 객관적 근거이다.
이는 4쌍8배(4雙8配)의 수행단계로서 수행에 의하여 그 결과를 얻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의 차제심천(次梯深淺)은 수행승단의 위계(位階)에 의하여 그 가치가 객관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수행의 목적은 이로써 확고하며 궁극적으로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윤회(輪廻)에서 해탈(解脫)하는 것으로써 수행은 완성(完成)된다.
이러한 현실은 승단(僧團)이 예류과에서 아라한으로의 수행에만 모든 가치와 수행을 집중함으로써 광범위한 중생제도나 이타행(利他行), 즉 사회적 자비실천 행위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하게 되었다. 불멸 후 200년 경 승단 내부적으로는 이러한 수행체계에 대한 검증의 객관성에 혼란이 야기되어 수행자간의 갈등과 승단 내의 위계(位階)나 명예에 대한 혼돈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마하데바에 의하여 제기된 아라한의 자질에 대한 문제와 아라한의 정의가 승단의 주요한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었음이 알려지고 있다.

금강경은 수행자가 수행과정에서 심리적으로 그것을 얻었다는 인식을 일으키고 각 단계마다 현실적인 획득 혹은 유소득(有所得)의 인식을 가져와, 승단 사회에 자기과시의 욕망이나 비교우위의 아만(我慢)을 낳고 있다고 당대의 승단을 진단하고 있다.
금강경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에서 아라한은 이욕(離欲)이며 이욕(離欲)의 의미는 무쟁삼매(無諍三昧)이니 다툼 없는 삼매에 머뭄으로써 수보리는 논쟁과 오만을 초월하였음을 설하고 있다.

나) 재가불자의 보시(布施)
재가불자의 수행은 보시행(布施行)로서 불타 재세시부터 자비의 한 방편으로 설해졌다. 보시를 통하여 하늘에 난다는 생천(生天)사상은 초기경전의 전형적 설법형태에서 발견되니 처음에 생천설법으로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사성제(四聖諦)를 설하고 있다. 보시로 인한 생천(生天)사상은 기본적으로 선인선과(善人善果) 악인악과(惡人惡果)의 인과응보(因果應報)이다. 보시를 통하여 재가자는 인과(因果)의 원리로 인하여 그 복(福)을 확신하고 현실적으로 혹은 내생에 그 보상(報償)을 확신하고 있다. 전생설화(자타카는 인과응보의 사례집이다)에 의하면 보살은 오랜 수행을 통하여 불토를 장엄하며, 세세생생의 보살공덕으로 32상의 원만상(圓滿相)을 획득하고 깨달음의 수기를 얻어 성도하였다. 금강경에 비판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이러한 인과론은 보시행위로 인하여 자기 자신에게 보상(報償)이 돌아오는 것을 보증하는 이론이다.
인과법(因果法)의 실천을 통하여 보시자는 보시의 실천과 그 결과의 보상을 기대하니, 결과에 대한 기대가 일어날 때 행위의 의도는 개인적 욕망(欲望)을 형성하고 아상(我相)을 생성케 하고 있다. 이는 현실적으로 보시의 원인과 보시물을 확보하는 현실적 추구(追求), 즉 재물추구의 경제적 경쟁(競爭)이나 사회적 투쟁을 야기하고 있다. 또한 화폐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보시물의 경제적 가치여하에 따른 응보(應報)의 차이를 확신하는 물질주의적 인과의식(因果意識)을 낳고 있으며 이는 자기과시(自己誇示)의 욕망과 사회적 갈등을 낳고 있다.
금강경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수행이론과 보시이론에 이기적 욕망(我相)이 숨어있음을 폭로하고 이러한 아상(我相)을 생성케 하는 수행이론과 보시사상을 반불교적(反佛敎的) 교리로서 비판하고 있다.


3) 당대 승단의 4단계수행이론과 생천(生天)보시의 이론적 근거

가) 해탈수행(解脫修行)의 이론적 근거
초기경전을 보면 각 수행단계는 수행자가 수행의 심화에 따른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며 각 수행단계에 따라 느낌, 지각, 의식 등 오온(五蘊)의 형태가 달라짐을 설하고 있다. 금강경에서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대한 인식과정이 수행의 첫 단계인 수다원임을 말하고 이러한 6법(경계)에 대한 수행에 들어가는 입류(入流)를 수다원으로 인식하고 있다. 승단의 조직이 확고한 현실에서 수행자는 이러한 이미 알려진 각 단계를 인지(認知)하며, 이러한 각 단계를 사고를 통하여 기억(記憶)하고, 수행을 통하여 각 단계의 형상을 기대(期待)하고 추구(追求)하게 된다.
수행자가 승단 내에 소속되고 있는 한, 이러한 단계는 수행의 가치와 더불어 또한 현실적 위계질서(位階秩序)를 형성하고 있다. 각 단계마다 나타나는 수행의 차이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차별적 현상, 즉 기쁨 고요함 감수 및 상(想)의 소멸(消滅) 등을 통하여 확인된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은 이러한 수행의 차별을 보증하는 인간의 기관이며, 수행의 결과 각 단계마다 각각 다른 결과를 나타낸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존재는 수행의 단계가 가능한 현실적 근거(根據)이자 토대(土臺)이니, 수행을 통하여 5온은 수행에 따른 단계로서 각각의 결과를 나타내는 지대(地帶)이며, 4가지 단계의 성인(聖人)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인과(因果)가 반영되는 근거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6경계 즉,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대한 관(觀) 혹은 위빠사나로서 마음 챙김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는 현재 남방불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5온(五蘊)은 생멸(生滅)하여 현상의 무상(無常)을 설명하지만 5온 자체는 존재하며 생멸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는 같은 이유로 존재하며 생멸한다. 수행을 통하여 5온은 수행의 단계에 따른 현상을 차별적으로 나타내며, 수행자는 수행을 통하여 각 단계의 성인(聖人)됨을 의식하니, 이는 각 단계의 수행경지의 생성(生成)을 전제하고 있고 각 단계의 생성된 결과는 수행의 심천(深淺)을 의미한다.
각 단계의 수행의 경지는 해탈의 심천(深淺)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수행에 의한 5온의 생성소멸(生成消滅)에 대한 차별적(差別的) 가치평가(價値評價)의 근거이다. 법(法)은 생성(生成) 소멸(消滅)하는 것이며, 수행의 결과 수행자는 그 형성된 법을 유소득(有所得)함을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윤회(輪廻)에서 벗어남이 최종목표이며 그 이상형은 아라한으로서 인식되었다. 수행의 목표는 윤회에서의 해탈이며 그 수단이 4단계 성인(聖人)의 획득과정인 이상,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보살행 혹은 공덕행은 부차적이며, 단순히 생천(生天)의 방편에 불과하다. 수행을 통하여 획득되는 여러 단계의 성인의 경지는 현실적으로 타인에게 인지되는 것이니, 결과적으로 승단(僧團)내외에서 명예, 이득과 환대가 따르고 있다. 이미 초기 경전인 쌍윳따 니까야에는 승단 내에 아라한 등 성인(聖人)에게 주어지는 이익, 명예와 환대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금강경의 문제의식은 수행의 완성이 현실적으로 수행성취의 오만(傲慢)과 중생에 대한 자비행에 대한 무관심을 낳는 당대 승단의 수행이론을 검토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대승초기경전으로 알려져 있는 8천송 반야경과 유마경에는 소승성인(小乘聖人)의 승단 위주의 삶과 오만을 기술하고 있다.

나) 보시(布施)의 이론적 근거로서의 인과법(因果法)과 3륜(三輪)
보시를 통한 생천(生天)은 인과법의 일부이다. 보시자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통하여 보시물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으며, 사회적 가치에 따라 이미 평가(評價)된 보시물의 현실적 가치도 인지(認知)하고 있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은 보시물의 사회적 가치를 결정하는 현실적으로 확인 가능한 감각대상(感覺對象)이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대한 가치판단은 사회적(社會的) 경제적(經濟的) 가치(價値)를 반영하며, 이를 기초로 보시자가 보시물을 인식하고 판단(判斷)한다. 보시자가 보시물과 보시대상에 대한 가치판단(價値判斷)을 전제로 보시행위에 대한 결과를 기대하는 한, 그 응보(應報)는 보시자의 보시물과 보시대상에 대한 사회적 가치판단을 반영하게 된다. 자신에 대한 응보를 기대하는 이기적 욕망은 이미 사회적(혹은 세속적)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보시는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지향하나, 도리어 이기적 욕망(利己的 欲望)의 실현을 위한 사회적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직면한 금강경은 이러한 모순의 근거를 이기적(利己的) 욕망과 응보(應報)에 대한 집착(執着)으로 판단하고 있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문은 보시자가 원하는 욕망의 성취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보시자는 보시실천이 깊을수록 자기보상에 대한 욕망이 깊어지며, 이러한 행위는 현실적으로 보시물의 확보(確保) 즉 부(富)의 축적(蓄積)에 대한 욕망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사회적 행위는 부의 축적을 위한 사회적 경쟁(競爭)이나 투쟁(鬪爭)을 초래하고 있다. 승단은 이러한 보시물의 수혜자(受惠者)이다.
보시는 중생(衆生)에 대한 사랑으로 출발하였으나 사회적으로는 도리어 부의 축적에 대한 욕망, 경쟁(競爭)이나 자기과시의 수단, 응보에 대한 욕망의 충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금강경은 이러한 모순(矛盾)에 대하여 수행자와 보살의 실천의식(實踐意識)에 주목하고 있다.


4) 금강경의 법문 전개과정

금강경은 첫 머리에 보살승이 불타가 위촉한 법임을 나타내고, 보살승이 불타의 교법에서 출발한 것임을 설명하여 불타교법에서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다. 수보리 스스로의 입을 통하여 금강경의 가르침이 미증유의 법임을 고백하게 하고 있다(제14 離相寂滅分 序頭). 이는 대승이 주장하는 가르침이 대승 스스로 올바른 불타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나, 역사적으로 금강경의 보살승의 이론과 이 이론을 주장하는 세력이 기존 승단에서는 아직 새로운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가) 보시의 실천행위와 그 실천의식에 대한 반성(反省)
금강경은 실천주체로서 비구 비구니의 문제가 아닌 선남자 선여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금강경을 저작한 이의 보시실천주체에 관한 역사적 상황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개인적 기복(祈福)의 성취에 집착하여 보시를 행하는 선남자(善男子)선여인(善女人)은 자신이 이러한 행위에 의하여 응보를 기대하고 있으나, 보시자의 의식(意識)은 스스로 인과법(因果法)의 진리에서 행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금강경은 인과응보의 이론에 대한 검토보다 우선 보살승에 나아가는 선남자 선여인의 보시행위에 대한 마음가짐 혹은 의식(意識)에 대한 검토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는 일단 인과응보의 진리여부(與否)에 대한 검토가 아닌, 보시자의 의식을 검토하는 내적 성찰(內的 省察)을 의미하니 이는 금강경의 고유한 성찰 방향(方向)이다.
객관적 인과이론(因果理論)이나 공덕 혹은 제사만능주의(祭祀萬能主義)나 일방적 고행주의(苦行主義)에서 벗어나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욕망을 모든 사회적 갈등과 고통의 원인으로 이해하고 욕망을 성찰하는 수행방식은 초기 법구경이나 잡아함 혹은 상응부경전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성찰은 역사적으로 기존 종교집단인 브라만들의 제사만능주의(祭祀萬能主義)나 이에 반발한 쾌락 혹은 고행주의(苦行主義)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욕망과 욕망의 결과인 고통을 성찰하여 욕망을 버리는 불타의 가르침은 역사적으로 볼 때 기존의 종교와는 다른 새로운 인식임을 알 수 있다. 갈등의 원인이 전생의 죄업 혹은 제석천에 의한 화복이 아닌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자기소유(自己所有)의 욕망을 그 원인으로 하는 사상은 기존 종교집단의 제사에 의한 공덕행위나 고행을 거부하고 있다. 불타는 인간의 욕망이 그 원인임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연기법(緣起法)의 이해를 요구하였다. 즉 고통을 이해하고 고통의 원인(原因)을 아는 것이니 원인의 올바른 인식을 강조하였다. 초기 아함부의 연기론이나 4성제가 모두 원인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불타가 제시한 욕망에 대한 성찰은 금강경이 일관되게 경에서 추구하는 과제이다.
보시대상에 대한, 즉 중생(衆生)에 대한 인식은 제도 혹은 보시하는 대상으로서의 인식이니 이는 일단 구제하는 주체를 전제(前提)하고 있다. 금강경은 제도 혹은 보시의 관념에 이러한 이기적 욕망이 출발점이 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금강경이 소승에서 대승으로 나아가는 교리적 향상을 전제로 한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역사적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존 승단의 수행과, 보시를 실천하고 있는 일반신도의 삶에 대한 반성의 측면에서 그 법문내용이 검토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중생제도(衆生濟度) 혹은 자비의 실천은 제도(濟度)한다는 관념 때문에 오히려 이기적(利己的) 욕망(欲望)을 생성케 하니 먼저 모든 대상에 대한 제도(濟渡)의 사고(思考)를 버릴 것이 요청된다. 금강경은 제도한다는 사고(思考) 속에 이기적 욕망을 보고 있다. 보시물의 평가(評價)도 감각모습[色聲香味觸法]을 인식대상으로 판단하여 보시하는 한, 인과법(因果法)에 기초하여 결과에 대한 응보를 추구하는 개인적 욕망을 위한 사고이니 이러한 평가는 사물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구별된다. 금강경은 따라서 3륜(三輪) 즉 대상 주체 보시물에 대하여 중생제도를 전제하는 사고판단의 자세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즉 중생제도가 인과응보(因果應報)를 통한 개인적 욕망충족(欲望充足)의 과정임이 밝혀진 이상, 이러한 사고(思考)의 중지(中止)를 금강경은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판단의 포기는 금강경이 처한 현실인식의 결과이며, 사고기능의 단절과는 구별된다. 사고(思考)의 단절(斷絶)은 현실적 행(行)을 낳지 못한다.

 중생제도가 인과응보를 근거로 보상을 기대하는 이기적 욕망의 과정임을 단정한 금강경은 이러한 욕망을 버리는 것이 불타의 교설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욕망을 버려야 함은 아직 당위(當爲)이다. 이에 대하여 금강경은 이러한 욕망충족이 보시자의 중생제도의 실천의식 속에 형성된 사고과정임을 지적하고, 먼저 중생제도에 대한 이기적 사고(思考)를 중지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아·인·수자·중생상(我·人·壽者·衆生相)은 응보를 받는 주체의 여러 변형을 의미하니, 금강경의 입장에서는 이기적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이다. 금강경은 또한 32상과 깨침도 수행자가 인과응보의 형태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한, 불타의 본지(本旨)가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참다운 중생제도는 보상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이며, 인과응보의 이기적(利己的) 보상의식(報償意識)에서 벗어나 보시를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금강경 제14 이상적멸분에서 보살은 일체중생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한다고 불타는 설하고 있다(菩薩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이러한 보시이론은 기존 승단의 보시이론과는 다르니, 공덕을 쌓는 행위로서의 보시를 거부하고 있다. 제7장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에서 민족사판 금강경은 무위법(無爲法)을 인과법(因果法)의 제약을 넘어서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구역(舊譯)금강경(陣 眞諦 역 금강반야바라밀 고려대장경)에는 무위진여(一切聖人 皆以無爲眞如所顯)로 해석하여 일체성현은 무위진여(無爲眞如)로서 인과(因果)의 보상을 바라는 욕망을 떠나있음을 밝히고 있다. 무위진여(無爲眞如)는 생멸하는 유위법(有爲法)에 대한 욕망이 사라진 무소득(無所得)의 의미이니 금강경은 일체현성(一切賢聖)은 수행에 대한 성취나 이기적 보상의식(報償意識)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에드워드 콘즈는 일체현성(一切賢聖)은 곧 4쌍8배(4雙8配)의 기존 승단의 성인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어 법(法)과 비법(非法)의 비유를 들어 공덕에 대한 불타교설의 현학적 전개를 경고하고 있다. 이는 수행공덕과 보시에 대한 결과를 확정하는 법보(法寶)를 소유하고 있다는 당대 승단의 인식을 비판하는 것이니, 금강경은 이러한 소유의식(所有意識)이 오만과 욕망형성의 한 원인임을 지적하고 있다.

나) 수행의 사고과정의 반성과 인욕(忍辱)바라밀
법(法)과 비법(非法)의 비판을 통하여 일정한 공덕의 결과를 얻었다는 교법(敎法)의 소유의식(所有意識)이나 실천의식이 이기적 욕망의 충족과정임을 지적한 금강경은 다음 장에서 기존 승단의 수행이론에 대하여 비판한다. 4단계 성인(聖人)의 수행이론이 성취욕과 과시욕의 수단이 됨을 경고하고, 불타의 진리는 수행에 대한 이기적 소유의 욕망을 버림이라고 다시 강조하고 있다. 아상을 수행과 보시행위 속에 은폐되어 있는 이기적 집착과 욕망을 깨닫고 그러한 미망(迷妄)의 사고과정(思考過程)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불타가 본래 가르친 수행임을 가리왕(歌利王)의 비유를 통하여 강조하고 있다. 금강경은 수행승단이나 보살이 다 같이 보상을 추구하는 유소득(有所得)의 미망(迷妄)이 6법(色聲香味觸法)수행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경의 첫 머리에서 보살이 6법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묻고 있으며, 수행4과 중 첫 단계인 수다원과에 대한 물음에서도 6법에 들어가는 것(入流)에 대한 의미를 묻고 있다.
모든 부처는 일체의 자기소유의 생각을 떠나 있다. (14장 離一切相 卽名諸佛, 상(相)은 상(想)의 의미이다.) 일체(一切)는 논리적 의미의 일체가 아닌 기존 승단의 수행 및 보살행에 관한 이기적(利己的) 사유형식을 의미한다. 금강경이 가르치는 인욕행은 욕망을 억제하는 단순한 인내의 차원이나 수행을 통하여 보상을 획득하는 수행이 아닌, 인욕(忍辱)을 통하여 수행자의 사고과정이 이기적 욕망과 집착의 사고과정에서 벗어나야 함을 의미한다. 가리왕과 인욕선인의 설화를 통하여 신체적 고통을 당하나 그의 사고(思考)는 증오나 원망의 사고과정에서 벗어나 있음을 예시하고 있다. 이러한 인욕행은 기존 승단의 4단계수행에 대한 금강경의 비판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무아(無我)의 자각을 전제로 한 인욕행(忍辱行)이 불타가 본래 가르친 수행임을 주장하고 있다.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자각을 기초로 한 수행은 아함부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불타의 가르침이다.

수행자의 사고(思考)가 아상의 욕망에 의하여 욕망충족 과정에 있는 한,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없음을 금강경은 지적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기존 승단의 수행의식이 이러한 이기적 사고과정의 미망(迷妄)에 처해 있다고 금강경은 진단하고 있다.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의 수행단계는 수행자가 수행에 의한 보상으로서의 자기성취욕구 즉 아상(我相)에서 벗어나 있을 때 수행의 의미가 있다. 이는 수행단계론에 배타적 가치를 부여하여, 이익중생(利益衆生)의 길을 외면하고 있는 당대 승단의 수행에 대한 경고이니 역사적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불타의 가르침이나 경(經) 이름 자체도 그 내용을 수용(受容)하는 수행자가 경의 수지(受持)를 통하여 기대하는 보상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경의 가르침을 수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승단이 불교의 경(經)과 가르침을 독점(獨占)하고 그 수행이나 보시에 대한 결과를 개인에 대한 보상의 차원에서 인식 확정하는 승단의 오만(傲慢)과 사회적 자비행의 삶을 외면하는 현실을 암시하고 있다.

경(經) 즉 승단(僧團)이 현실세계에서 불법(經典)을 소유하고 있다는 승단의 인식이 아상(我相)을 형성하는 원인이므로, 금강경은 불법이 진리를 얻기 위한 방편(方便)임을 주장하여 승단이 소유하고 있는 불법자체에 대한 배타적(排他的) 가치를 부정(否定)하고 있다. 이러한 금강경의 불법 방편설(佛法 方便說)은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으며, 불타가 가르친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하여 광범위한 방편(方便)을 불법의 한 형태로서 허용하는 사고(思考)이다. 이러한 사고는 대승을 주장하는 새로운 집단의 다양한 현실접근을 반영하고 있다.


5) 금강경 하편(下篇)의 오온불생론(五蘊不生論)의 전개

금강경은 경 전편을 통하여 당대의 승단의 수행과정과 보살행이 불타의 가르침과 어긋나고 있다는 현실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존 승단은 수행을 통하여 중생사회와 멀어지고 있으며, 승단 내부에는 수행위계(修行位階)에 대한 회의와 갈등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공덕을 얻기 위한 보살행은 세속적 물질추구(物質追求)의 결과를 낳고 있다.
 금강경은 진리와 자비가 현 승단에서 서로 분리(分離)되는 모순(矛盾)을 성찰하고, 자비의 실천과 불법의 진리인식이 통일적으로 이루어진 불교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금강경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살행이 이기적 욕망과 집착의 사고과정(思考過程)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밝히고, 인과응보의 이기적 욕망의 제약(制約)을 벗어난 보시를 실천하는 것이 불타가 말하는 올바른 보살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기존 승단의 수행과정인 4과(예류 일래 불래 아라한)도 이러한 욕망과 집착의 사고 과정임을 지적하고 있다.

금강경은 욕망(欲望)과 집착(執着)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신의 수행에서 감추어져 있는 (14장 끝부분의 어둠 속의 비유) 욕망과 집착의 미망(迷妄)을 각성(覺省)하여 욕망과 집착의 사고과정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말하며 상편을 마감하고 있다.
이러한 수행과 보시행위 속에 감추어진 미망을 자각하고 벗어나는 체험을 금강경은 수보리의 체루비읍(涕淚悲泣)으로 표현하고 있다. 감추어진 욕망을 발견하고 욕망에서 해탈하는 가르침과 인욕행은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깨달아 수행하는 초기 불타설법의 계승이며, 아상(我相)에 의한 사고(思考)의 미망(迷妄)에 대한 지적은 금강경이 처해 있던 당대 불교 승단의 수행의식(修行意識)에 대한 비판이다. 무아를 실천하는 인욕행은 곧 자비행으로서 욕망을 깨달아 이해하는 과정과 일치하니 금강경은 지(知)와 행(行)의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금강경은 불타생존시의 수행은 수행과 자비가 일치하였으나 당대 현실은 일치하고 있지 않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금강경은 다시 보살의 삶, 실천, 인식을 물음으로서 하편을 시작하고 있다. 상편(上篇)을 통하여 금강경은 욕망의 사고과정에서 형성된 이기적 소유욕구 즉 아상(我相)에서 벗어나는 성찰, 즉 의식의 미망에서의 해탈을 논하고, 이어 다음 단계로서 오온자체(五蘊自體)에 대한 인식을 하편에서 문제삼고 있다. 그 대상은 기존 승단의 수행론의 기초인 5온[色受想行識]과 6법[色聲香味觸法] 등 제법(諸法)의 생성소멸(生成消滅)에 대한 인식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현실적으로 현 승단이 안고 있는 보시와 수행의 갈등과 미망을 벗어나되, 새로운 불교의 실천세력으로서의 보살은 어떻게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대승불교가 내세우는 보살은 기존 승단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대안세력이니 기존 승단의 수행과 보시인식에 대한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인식을 요청하게 된다. 금강경 하편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보살의 당위(當爲)를 논하고 그 당위근거(當爲根據)로서 보살의 이념의 기초를 불타 본래의 가르침을 재해석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금강경 하편은 무아법(無我法)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통달무아법(通達無我法)을 말하며 경의 말미에 꿈과 같고 이슬과 같은 (如夢幻 亦如露,,)의 시(詩)를 제시하여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한층 깊은 인식에 도달할 것을 보살에게 요청하고 있다.

금강경 상하편의 전체적 전개과정은 상편에서는 기존 승단의 수행과 보시의 이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하편에서는 독자적인 보살의 이념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대승불교(大乘佛敎)출현의 역사적 당위를 반영하고 있으며, 상편에서 하편으로의 전개는 새로운 불교담당주체로서의 보살이 자기성찰의 이론적 근거를 독자적으로 해명하는 자연스러운 논리전개로 보여진다. 금강경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대승불교출현의 역사적 당위에서 그 해석을 구할 때 전체적인 금강경법문의 전개과정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수행을 통하여 성인의 지위를 얻는 것은 5온6법 즉 제법의 생성소멸(生成消滅)을 전제하고 있다. 기존 승단에서 전제하고 있는 제법의 생성소멸론이 4단계 수행을 얻게 되는(所得) 이론적 근거인 이상, 생성소멸론에 대한 탐구를 금강경은 요청하고 있다. 금강경은 오온(五蘊) 등 제법의 생성소멸의 무상(無常)을 인정하나 그 궁극적 실상은 불생(不生)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금강경의 고유한 인식이며 기존 승단의 제법에 대한 실재론적 인식(我空法有)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인식이다.
이 불생법[不生혹은 無生法]은 깊은 수행에 이른 보살만이 인식 가능하다는 다른 대승경전에서의 언급으로 보아 이러한 인식이 대승불교집단의 고유한 사색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제법(諸法)자체가 불생(不生)인 이상, 금강경은 4단계 수행이론에 의한 수행의 결과는 가능하나, 얻거나 소유(所有)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金剛經 不受不貪分,,, 不受福德,,) 즉 수행에 의한 인과관계(因果關係)는 인정하나 그 실천과 결과를 얻는 주체(主體)의 실재를 부정하고 있다. 이는 4쌍8배의 수행이론에 대한 새로운 반성을 의미하니, 각 단계의 결과를 기대하는 수행의식(修行意識)이나 보시에 대한 결과를 성취했다는 실재론적(實在論的) 소득주체(所得主體)의 허구를 비판하는 성찰이다. 이러한 허구의식이 아상(我相) 등임을 비판하는 금강경의 이론적 기반은 오온불생론(五蘊不生論)이다. 진리의 몸인 여래를 설명하는 금강경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에서 금강경은 여래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현장(玄奬)은 필경불생(畢竟不生)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의정(唐 義淨)과 진제(陣 眞諦)는 진여(眞如)로 번역하고 있다. 구마라즙은 불생(不生)을 제법여의(如來者諸法如義)로 해석하고 있으며, 제법여의(諸法如義)는 제법이 본래 한결같아 일어남이 없으며(無生), 묶여 있거나 풀릴 것이 없는 불박불해(不搏不解)의 의미이다.

4단계 수행이론은 수행을 통하여 인간은 오온(五蘊) 등 제법의 결박에서 벗어난다고 하나 금강경은 제법(諸法)이 깨끗하고 한결같아 오온 등 제법에서 벗어난다는 수행이 허구임을 말하고 있다. 오온(五蘊)의 수행을 통하여 기존 승단은 수행의 결과를 과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수행의 결과는 자기를 높이고 타인을 비하하는[自高卑他 - 8천송반야경] 종교적 오만(傲慢)과 중생의 현실고통에 대한 외면을 초래하고 있다. 이는 이론적 결과가 아닌 금강경 시대의 역사적 현실임을 암시하고 있다. 금강경은 수행 속에 형성되고 있는 아상(我相)을 폭로하고 있으니, 이러한 오온계공(五蘊皆空)의 법문은 일반 대승경전의 주제이기도 하다. 수행과 보시는 그 결과가 불생(不生)이며 여여(如如)하여 한결같으니, 얻을 수 없으며 보살은 이러한 실상을 이해하고 무아(無我)의 보시, 무아(無我)의 수행을 실천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수행과 보시를 하되 법상(法相)을 일으키지 않으며 (제32 應化非眞分), 일체법(一切法)에 무아(無我)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 (제28 不受不貪分).

금강경은 말미에 번개 이슬 꿈 등의 비유를 통하여 불타의 제법무상(諸法無常)의 진리에서 나아가 오온(五蘊) 등 제법이 불생(不生)임을 밝히고, 불생(不生)이 곧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이해와 동일(同一)함을 주장하고 있다. 금강경은 무아(無我)의 진리를 심층적 이해할 때 제법여의(諸法如義)의 인식에 도달함을 말하니 무아법의 깊은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空)의 이론적 근거로서 제법(諸法)의 상의상존(相依相存)의 연기법(緣起法)이 제시되고 있으나, 금강경은 번개 이슬 꿈 그림자 등의 비유로 오히려 무상(無常)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금강경의 오온불생론(五蘊不生論)은 초기불교의 제법무상(諸法無常)의 진리를 토대로 전개된 사고(思考)임을 알 수 있다. 금강경은 제법무상(諸法無常)의 진리를 숙고하여 제법불생(諸法不生)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진리를 성찰하였으며 기존 승단의 수행이론과 보시이론 속에 욕망과 집착이 있음을 성찰하였다. 초기불교의 연기법(緣起法)이 욕망(欲望)과 고통(苦痛)의 인과관계(因果關係)를 밝혀 고통의 원인을 없애는 실천수행의 가르침임을 비추어 볼 때, 금강경은 초기 아함부에 나타나는 가르침의 형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승경전은 오온불생론(五蘊不生論) 즉 오온(五蘊)및 제법이 모두 공(空)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기존 승단의 수행목적이 예류과에서 아라한의 성취에만 배타적 가치를 추구하는 현실에 대하여, 금강경은 오온제법(五蘊諸法) 불생론(不生論)을 통하여 예류과에서 나아가 아라한과의 실재성(實在性)과 그 취득만을 추구하는 수행론의 허구를 논증하고 있다. 진정한 불법수행은 무아(無我)의 진리를 실천하는 데 있으며 보살의 인욕행(忍辱行)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제시하고 있다. 깨달음을 위한 불법의 수행과 자비의 실천은 이로써 통일적으로 실천 가능해 졌으니, 금강경은 제법불생(諸法不生)의 깨달음을 통하여 기존 승단의 수행4과(修行4果)의 배타적 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금강경의 법문과정은 당대 기존 승단의 수행과 보시이론의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불제자의 당위로서 보살을 내세우고 그 이념을 제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금강경은 법문전개과정은 불멸(彿滅) 후 500년을 살고 있던 당대 불교도의 역사적 문제의식과 중생제도의 윤리회복을 요청하는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6) 맺는 말 - 사상(四相)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아라한과를 포함하는 수행4과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배타적(排他的) 수행제일주의(修行第一主義)의 태도가 이기적 아상(我相)을 형성하고, 고통에 처해 있는 중생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하는 기존 승단의 현실을 목격한 금강경은 그 모순의 근거로서 중생에 대한 자비행(慈悲行)과 깨달음이 분리(分離)되고 있는 승단의 수행단계론(修行段階論)과 보시공덕사상을 문제삼고 있다.

금강경은 지혜와 자비의 분리(分離)를 극복하고, 지행불이(知行不二)의 수행, 즉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통일적으로 추구하는 보살의 삶을 새로운 불법실천의 대안(代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보살의 삶과 수행, 실천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는 금강경 서두에서 제시되고 있다. 여러 대승경전군에서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듯이, 보살의 수행과정과 중생에 대한 자비행의 일치(不二)를 강조하는 것은 금강경이 출현한 시대의 역사적 당위였으며, 오온(五蘊) 및 제법불생론(諸法不生論)은 이 역사적 당위를 실천하기 위한 금강경의 이론적 근거임을 알 수 있다. 이론으로서의 제법불생론(諸法不生論)은 당대의 기존 승단과는 이념을 달리하는 새로운 집단 즉 보살의 사상임을 알 수 있다.
금강경의 보살이념은 오온(五蘊)등 제법의 공(空)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대승경전일반의 주제이며 끝없는 중생제도의 보살행을 요구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왜 화엄경 보현보살행원품 등 대승경전일반에서 그토록 중생에 대한 자비와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보살행을 성불(成佛)에 이르는 과정 즉 보리심을 일으키고 나아가 무상정등정각의 깨달음에 이르는 필수적 과정으로 이해하는가에 대한 당위를 설명해 주고 있다. 어떠한 깨달음도 중생현실을 외면하고 성취될 수 없으며,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은 중생에 대한 보살행에서 얻어진다는 대승의 가르침은 중생에 대한 자비행이 없이 중생 사회와 격리된 채 깨달음을 추구하는 당대 기존 승단의 수행과정이 부처님의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인식 위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금강경은 결론적으로 이러한 당대 승단의 깨달음은 무아의 진리(無我法)에 투철하지 못하여 아직 유소득(有所得)을 추구하는 법상(法相)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하고 법상을 내지 말 것[不生法相]을 설하고 있다. (제31 知見不生分)

유소득(有所得)을 추구하는 자세는 승단(僧團)에는 각 성인의 수행단계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자기권위와 오만을 낳으며, 재가신도에게는 공덕의 실천을 통한 자기보상의 욕망을 일으키니, 양자 공히 결과적으로 수행계단이나 물질적 보시가치의 우열에 따라 부귀나 명예, 물질적 보상을 차별적으로 요청하는 현실을 낳고 있다. 금강경은 이러한 법상(法相)을 추구하는 당대의 현실을 보고 있으며, 법상을 추구하는 수행이나 공덕행이 전제하는 제법(諸法)의 실재론적 인식을 오히려 이기적 욕망의 사고형태로서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법에 대한 실재론적 인식 즉 법상(法相)이 곧 수행자나 재가신자의 이기적 보상욕구(報償欲求)의 이론적 근거이며, 수행자나 보살이 이러한 보상을 이기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한, 현실의 중생에 대한 고통과 그에 대한 자비가 오히려 결여되고 있는 역사적 현실을 금강경은 보고 있다.

승단과 재가신도는 불법에 대한 당대 승단의 해석(我 人 衆生 壽者)에 따라 수행 및 보시를 행하고 있으나, 오히려 현실은 고통받는 중생과는 멀어지고 있으니 이러한 현실에 대한 고민이 곧 대승을 추구하는 집단과 금강경의 문제의식임을 알 수 있다. 금강경 제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에서 금강경의 불타는 이러한 법상이 없이 선법(善法)을 실천할 것을 말씀하시니, 아 인 중생 수자(我 人 衆生 壽者)의 인식이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을 때 참다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음을 설하고 있다. 따라서 아 인 중생 수자(我 人 衆生 壽者)에 대한 해석은 역사적 관점에서 당대 승단의 불교해석에서 구할 수 있다고 본다. 사상(四相)은 금강경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으니, 즉 아(我)는 공덕을 얻는 주체이며, 인(人)은 수행에서 얻어지는 4단계 성인(聖人) 즉 수다원 아나함 사다함 과 아라한과를 의미하며, 중생(衆生)은 공덕성취의 대상이며, 수자(壽者)는 지속적인 공덕의 쌓임에 대한 실재론적 인식으로 해석된다. 금강경은 동시대 승단의 불교해석이 이러한 4상(四相)에 기초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러한 당대 승단의 불교해석이 성과(聖果)를 취득하는 수행에만 배타적 가치를 부여하는 사고(思考) 및 의식(意識)을 초래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수행과 자비가 분열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불멸(佛滅) 후 400년에서 500년 사이에 새로이 나타난 불교집단인 대승불교는 제법불생(諸法不生)의 공사상(空思想)을 통하여 기존 승단의 점진적 4단계수행에 은폐되어 있는 아상(我相)과 중생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하는 이기적(利己的) 수행을 비판하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기존 승단의 수행론에서 결여되어 있는 중생에 대한 광범위한 자비행(慈悲行)의 회복(回復) 즉 보살행을 추구하고 있다.
금강경의 문제의식은 단순히 소승에 대한 대승의 교리발전(敎理發展)의 관점이 아닌 역사적 승단의 삶에 대한 윤리적 실천적 반성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수행과 자비행의 일치를 추구하고 있으니 이러한 문제의식은 오늘의 현실에도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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