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신라시대의 고승(高僧).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 성은 김씨. 한신(韓信)의 아들이다.
19세 때(29세에 출가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최근의 고증을 따랐음.) 경주 황복사(皇福寺)에 출가하였다. 얼마 뒤 중국으로 가기 위하여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으나,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정탐자로 오인받고 수십일 동안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10년 뒤인 661년(문무왕 1)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 갔다.
처음 양주(揚州)에 머무를 때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그를 관아에 머무르게 하고 성대히 대접하였다. 얼마 뒤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智儼)을 청하였다. 지엄은 전날밤 꿈에 해동(海東)에 큰 나무 한그루가 나서 가지와 잎이 번성하더니 중국에 와서 덮었는데, 그 위에 봉(鳳)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니 한개의 마니보주 (摩尼寶珠)의 밝은 빛이 멀리까지 비치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의상을 특별한 예(禮)로 맞아 제자가 될것을 허락하였다. 그곳에서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은밀한 부분까지 분석하였다. 당나라에 머무르면서 지엄으로부터 화엄을 공부한 것은 8년 동안의 일이며, 나이 38세로부터 44세에 이르는 중요한 시기에 해당한다. 의상이 터득한 화엄사상은 넓고도 깊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남긴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통하여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신라로 돌아온 그해에 낙산사 (洛山寺)의 관음굴 (觀音窟) 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다.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 (白花道場發願文)> 은 그의 관음신앙 (觀音信仰)을 알게 해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다. 그뒤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까지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하였는데, 이는 화엄사상을 펼 터전을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귀국후부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674년 경주의 황복사에서 표훈(表訓)·진정(眞政) 등의 제자들에게 <화엄일승법계도>를 가르쳤다는 것으로 보아, 부석사가 이룩되기 전부터 훌륭한 제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의상 이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화엄사상이 전개되어 있었지만, 화엄사상이 크게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의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의상이 화엄대교를 전하기 위하여 중악 팔공산 미리사(美里寺), 남악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강주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 가야현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하여 온다. 또, 의상의 교화활동 중 가장 큰 업적은 많은 제자들의 양성이었다. 그에게는 3, 000명의 제자가 있었고, 또 당시에 아성(亞聖)으로 불린 오진 (悟眞)·지통(智通)·표훈·진정·진장(眞藏)·도융(道融)· 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10명의 제자가 있었다.
이밖에도 <송고승전>에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 그리고 <법계도기총수록 (法界圖記叢隨錄)>에 나타나는 신림(神琳) 등이 의상의 훌륭한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항상 스승을 모시면서 화엄학을 수학하였다. 의상은 황복사에서 이들에게 <법계도>를 가르쳤고, 부석사에서 40일간의 법회를 열고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문답하였으며,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화엄경>을 90일 간에 걸쳐 강의하였다. 지통의 <추동기(錐洞記)>, 도신의 <도신장(道身章)>, 법융의 <법융기(法融記)>, 진수의 <진수기(眞秀記)> 등은 모두가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문헌들이다. 668년(문무왕 8)에 세수 78세로 태연자약하게 입적 하였다고 한다.
저술로는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記)>1권, <화엄일승법계도> 1권, <백화도량발원문>1권 및 최근 발견된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등이 있다.
의상 대사(義湘 大師 : 625~702)
① 생애(生涯)
㉠ 출가(出家) 및 중국 유학(中國 留學)
진평왕(眞平王) 47년(625) 진골(眞骨) 김씨(金氏) 집안인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 경주(慶州)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記錄)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진골(眞骨) 집안 출신(出身)이어서 원효 대사(元曉 大師 : 617~686)보다 유복한 생활(生活)을 영위했을 것으로 보임
19세 때 출가(出家)하여 경주(慶州) 황복사(皇福寺)에서 공부하던 중, 문무왕(文武王) 1년(661) 귀국(歸國)하는 당(唐)나라 사신(使臣)의 배를 타고 당(唐)으로 건너가 서안(西安 : 당(唐)나라 때의 이름은 ‘장안(長安)’임)의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주석(住錫)하던 중국(中國) 화엄종(中國 華嚴宗)의 제2조 지엄(第二祖 智儼) 스님에게 제자(弟子)되기를 청하자, 스님은 “전날 밤 꿈에 해동(海東)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나서 가지와 잎이 무성하다가 중국(中國)에 와서 덮었는데, 그 위에 봉(鳳)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摩尼寶珠)의 밝은 빛이 멀리까지 비치는 꿈을 꾸었다.”고 말하면서 제자(弟子)되기를 허락(許諾)함과 함께 특별한 예로 대하였는데, 수제자(首弟子) 법장 현수(法藏 賢首 : 643~712)와 쌍벽(雙璧)을 이루던 대사(大師)는 스승에게서 화엄교학(華嚴敎學)을 전수받았을 뿐만 아니라, 같은 종남산(終南山)에 거주하며 계율사상(戒律思想)을 선양하던 도선 율사(道宣 律師)와 깊이 교류하기도 했음
대사(大師)는 지엄(智儼) 문하(門下)에서 8년간 화엄종(華嚴宗)을 공부하면서『화엄경(華嚴經)』의 미묘한 뜻을 은밀한 부분까지 분석하였는데, 그리하여 대사(大師)가 남긴「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통해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듯이 대사(大師)가 터득한 화엄사상(華嚴思想)은 넓고도 깊이가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음
㉡ 귀국(歸國)
대사(大師)는 유학(留學)을 떠난 지 10년만인 문무왕(文武王) 10년(670)에 신라(新羅)로 귀국(歸國)하게 되는데, 귀국(歸國) 동기(動機)는 신라(新羅)의 대당 투쟁(對唐 鬪爭)에 분노한 당 고종(唐 高宗)이 신라정벌계획(新羅征伐計劃)을 세우자 당시 그곳에 있던 김인문(金仁問 : 629~694, 태종무열왕 김춘추(太宗武烈王 金春秋 : 602~661)의 둘째 아들)ㆍ김흠순(金欽純 : 김유신(金庾信 : 595~673) 장군(將軍)의 아우) 등이 대사(大師)를 통해 이 소식을 본국에 알리도록 했기 때문으로 보임
귀국(歸國)한 그 해에 대사(大師)는 오늘의 강원도(江原道) 양양(襄陽)의 관음굴(觀音窟)에서 대사(大師)의 관음신앙(觀音信仰)을 알게 해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名文)으로 된「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을 올리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에게 기도를 드린 후 낙산사(洛山寺)를 지었는데, 이곳은 의상(義湘)이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을 친히 보았던 곳이라 하여 서역(西域)의 관음주처지(觀音主處地)인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에서 사찰(寺刹) 이름을 따왔으며, 그 뒤 부석사(浮石寺)를 세울 때까지 화엄사상(華嚴思想)을 펼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의 산천(山川)을 두루 편력(遍歷)하다가 676년 왕명(王命)으로 영주 부석사(榮州 浮石寺)를 창건하고 화엄종(華嚴宗)을 강론(講論)하여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창시자(創始者)가 되었음
㉢ 입적(入寂)
효소왕(孝昭王) 원년(元年 : 692) 승전 법사(勝詮 法師) 귀국(歸國) 시에 지엄(智儼) 문하(門下)에서 같이 배운 중국 화엄종(中國 華嚴宗)의 제3조 법장(第三祖 法藏)이 자신(自身)의 저서(著書)『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를 보내면서 문법질의서(問法質疑書)를 통해 대사(大師)의 비판(批判)을 요청(要請)해오자, 이를 제자(弟子)들에게 주어 화엄(華嚴)의 깊은 뜻을 배우게 했고, 또 전국에 화엄종(華嚴宗)의 10개 사찰(寺刹), 즉 ‘화엄십찰(華嚴十刹)’을 건립(建立)했으며, 제자(弟子)로는 ‘십대덕(十大德)’이라 하여 오진(悟眞)ㆍ지통(智通)ㆍ표훈(表訓)ㆍ진정(眞定)ㆍ진장(眞藏)ㆍ도융(道融)ㆍ양원(良圓)ㆍ상원(相源)ㆍ능인(能仁)ㆍ의적(義寂)의 열 제자(弟子)를 배출(排出)하는 한편, 문하(門下)에 무려 3,000명의 제자(弟子)를 두는 등 대사(大師)는 화엄종(華嚴宗)의 발달을 위해 노력(努力)하다가 효소왕(孝昭王) 11년(702) 세수(世壽) 78세로 입적(入寂)하였음
②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
대사(大師)의 대표적 저술(代表的 著述)인『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화엄사상(華嚴思想)의 요체(要諦)를 제시(提示)해 주는 것으로 중국(中國)과는 다른 독특(獨特)한 불교사상(佛敎思想)을 발전시켰는데, 부석사(浮石寺)를 중심으로 화엄종(華嚴宗)을 전파(傳播)한 대사(大師)의 화엄학(華嚴學)은 실천(實踐)을 앞세우고 있어 부석사(浮石寺)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을 모신 것이라든지, 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에 관음진신(觀音眞身) 주처(住處)의 도량(道場)을 개설(開設)한 것 등이 대표적 사례(代表的 事例)라 할 수 있으며, 이처럼 대사(大師)의 불교사상(佛敎思想)은 화엄학(華嚴學)에 바탕을 두면서도 관음신앙(觀音信仰)이나 정토신앙(淨土信仰)을 포용하는 성격(性格)을 지녔음
그리하여 대사(大師)의 화엄종(華嚴宗)은 중국(中國)과는 달리 우리 고유의 성격(性格)을 띤 것으로 평가(評價)받고 있는 바, 그 증거는 원래 화엄종(華嚴宗) 사찰(寺刹)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主佛)로 모시며 그 본전(本殿)을 ‘화엄전(華嚴殿 : 또는 ‘비로전(毘盧殿)’이라고도 함)’이라고 부르는데 반해, 대사가 건립(建立)한 화엄십찰(華嚴十刹) 가운데 제1 총본산(第一 總本山)인 부석사(浮石寺)는 오히려 주불(主佛)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이며, 본전(本殿)의 이름도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는 점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데, 이렇듯 대사는 ‘아미타(阿彌陀)가 곧 무량수(無量壽)이고, 무량수(無量壽)가 곧 비로자나(毘盧遮那)’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화엄교학(華嚴敎學)과 정토사상(淨土思想)을 유합(類合)시키는 불교사상(佛敎思想) 초유(初有)의 업적(業績)을 이루어냈으며, 이리하여 대사(大師)는 ‘정토신앙가(淨土信仰家)’로 평가(評價)받기도 함
대사(大師)는 또한 완고한 골품제 사회(骨品制 社會) 속에서 평등(平等)을 강조하며 민중(民衆)의 고통(苦痛)을 덜어주려 애썼는데, 문무왕(文武王)이 대사(大師)에게 노비(奴婢)를 하사(下賜)하자 불법(佛法)은 평등(平等)하고 귀천(貴賤)을 가릴 수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고, 또 왕(王)이 성(城)을 쌓으려 하자, “정치(政治)가 현명(賢明)하면 풀언덕 땅에 금만 그어도 성(城)이 되어 백성(百姓)이 넘어가지 않고 재앙(災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政治)가 현명(賢明)치 못하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더라도 재난(災難)은 해소되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공사 중지를 촉구하기도 했음
③「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 정의(定意)
일명『해인도(海印圖)』로도 불리는 이것은 화엄(華嚴)의 법계(法界)를 하나의 도형(圖形)으로 형상화(形象化)한 것으로 대사(大師)의 대표적 저술(代表的 著述)인데,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에서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까지의 총(總) 210자(字)를 가운데에서부터 일렬로 배열(配列)하는 한편, 첫 글자인 ‘법(法)’과 마지막 글자인 ‘불(佛)’이 다시 이어지도록 하여 ‘시작과 끝은 통하므로 사물(事物)의 진리(眞理)가 곧 깨달음’임을 상징(象徵)하고 있음
㉡ 구성(構成)
『법계도(法界圖)』는 4개의 큰 대립구도(對立構圖)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사섭법(四攝法)을 의미(意味)하며, 또한 구부러짐이 모두 54번인 것은 선재동자(善財童子 :『화엄경(華嚴經)』의「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구도자(求道者)임)가 만난 53명의 선지식(善知識 : 문수보살(文殊菩薩)에서 시작하여 비구(比丘)ㆍ비구니(比丘尼)ㆍ장자(長者)ㆍ양의(良醫)ㆍ박사(博士)ㆍ상인(商人)ㆍ공인(工人)ㆍ국왕(國王)ㆍ천신(天神)ㆍ외도(外道)ㆍ남자(男子)ㆍ여자(女子), 그리고 관음(觀音)ㆍ미륵(彌勒)ㆍ보현 보살(普賢 菩薩)에 이르기까지 온갖 계층(階層)의 사람들 53명을 말하며, 이는 ‘이 세상(世上)의 모든 존재(存在)는 불성(佛性)의 구현체(具現體)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표상(表象)임)과 대각(大覺)을 의미(意味)하는 등 이 도형 속에 화엄(華嚴)의 모든 사상(思想)이 상징적(象徵的)으로 담겨있기도 함
대사(大師)는 210자(字)로 된 이것을 다시 압축하여 ‘행행도처 지지발처(行行到處 至至發處 : ‘걸어도 걸어도 그 자리, 가도 가도 떠난 자리’란 뜻임)’란 단 한 마디로 결론(結論)지었는데, 이를 해석(解釋)하자면 ‘출발한 곳이 마침내 끝나는 곳이고, 끝나는 곳이 다시 출발하는 곳’이라는 의미(意味)임
㉢ 전문(全文)
7언(言) 30구(句)로 된 시(詩)의 형태를 띤 이『법계도(法界圖)』의 내용(內容)은 불교(佛敎)에서의 법(法), 즉 진리(眞理)의 세계(世界)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그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음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마음됨 원융하여 두 모습 없고 모든 것 동요 않고 마냥 고요해.
이름과 모양 다 끊어버리니 깨달아 안 바라 다른 경지 아닐세.)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참 내 성품은 깊고도 미묘해 제 것이 어디 있나, 緣따라 이룩되지.
하나 안에 일체요 다(多) 안에 하나 하나가 곧 일체요 다(多)가 곧 하나.)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포함(包含)돼 있고 모든 티끌 속에 역시 그러해.
한량없이 먼 시간이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한량없는 그 시간이니.)
구세십세호상즉 잉불잡란격별성 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相共和
(구세와 십세가 서로 부합하지만 뒤섞이는 일 없이 간격을 두고 따로 서 있네.
초발심 때가 그냥 정각이니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 하네.)
이사명연무분별 십불보현대인경 능인해인삼매중 번출여의부사의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能仁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
(리(理)와 사(事)가 명연히 무분별하니 십불(十佛)과 보현대인의 경지로다.
능력(能力)있는 사람이 해인삼매 속에서 마음대로 불가사의한 일을 내보내)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비 오듯 보배를 뿌려 중생을 돕고 허공을 채우니 중생이 그릇따라 이익을 얻네.
그러므로 행자(行者)는 본제(本際)로 되돌아가 망상을 끊고 다시는 얻음이 없으니)
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득자량 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무조건 선교(善巧)하게 뜻대로 되어 집으로 돌아갈 때 차례로 자량(資糧)을 얻고,
다라니의 무진보(無盡寶)로써 법계의 실보전(實寶殿)을 장엄하고,)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마침내 실제 중도(實際 中道)의 자리에 앉으니 이름하여 불(佛)이라 하나 옛부터 움직인 일 없도다.)
㉣ 관련 전설(關聯 傳說)
이 법계도(法界圖)와 관련해서는 신비(神秘)스런 전설(傳說)이 전해오고 있는데, 그 내용(內容)은 다음과 같음
대사(大師)가 중국(中國) 화엄종(華嚴宗)의 제2조(第二祖)인 지엄(智儼)에게서『화엄경(華嚴經)』의 도리(道理)를 배우던 어느 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스스로 깨달은 바를 저술(著述)해 남에게 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일러 주었고, 또 어느 날은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나타나 머리가 총명(聰明)해지는 약(藥)을 10여 제(劑)나 지어 주었으며, 또 하루는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나타나 비결(秘訣)을 전수해 주었다.
대사(大師)가 이 사실을 스승에게 고하자 스승은 “나는 꿈에 한 번 신인(神人)을 만났을 뿐인데 너는 세 차례나 만났으니 멀리서 찾아와 공부한 것이 헛되지 않았다.”며 그 동안 얻은 바를 책으로 정리하라고 일러주었고, 이에 대사는『대승장(大乘章)』10권을 편집해서 스승에게 올렸는데, 스승은 이를 보고 “의리(意理)는 아름다우나 문장(文章)이 옹색하다.”고 하여 대사는 다시 번거로운 것을 삭제하고 뜻이 통하도록 한 다음『입의숭현(立義崇玄)』이란 이름을 지어 올렸다.
이를 받아본 스승은 대사와 함께 불전(佛殿)에 나아가 “원컨대 이 글이 성인(聖人)의 뜻에 맞는다면 불에 타지 마소서.”라고 서원(誓願)한 뒤 책을 태웠는데 다른 부분은 모두 불에 탔으나 210字만은 타지 않자, 스승은 이 글자를 주워서 대사에게 다시『화엄경(華嚴經)』의 요지(要旨)를 쓰게 하였고, 그리하여 대사가 며칠 동안에 새로 게송(偈頌)을 지어『해인도(海印圖)』에 써넣으니 이것이 바로『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다.
이에 스승은 경탄(驚歎)하여 가로되, “나는 72개의 해인(海印)을 그렸는데 그대는 한 개 해인으로 다하였노라. 그대의 해인은 총체(總體)가 되고 나의 해인은 별개(別個)가 되노라.”라고 하였다.
④ 선묘(善妙)와의 인연(因緣)
㉠ 첫 만남
처음으로 중국(中國) 땅에 도착한 대사(大師)는 산동반도(山東半島) 북쪽 등주(登州)의 한 독실한 신도(信徒) 집에 잠시 머물던 중에 그 집의 딸인 아름다운 처녀 선묘(善妙)를 만나게 되었지만, 대사(大師)가 여자를 멀리했기에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못하다가 대사(大師)는 적산 법화원(赤山 法華院)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때부터 선묘(善妙)는 아침ㆍ저녁으로 탁발에 나서는 대사(大師)를 멀리서 바라보며 흠모(欽慕)하다가 하루는 자신(自身)의 마음을 전하려 했지만 대사(大師)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음
㉡ 용(龍)으로 변한 선묘(善妙)
얼마 후 대사(大師)는 당(唐)나라 수도(首都) 장안(長安) 근처의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가 지엄(智儼) 문하(門下)에서 10년간 공부하다가 귀국(歸國)하게 됐는데, 도중에 대사(大師)가 잠시 그녀의 집에 들렀을 때 대사(大師)의 방문(訪問)을 예상한 선묘(善妙)는 옷가지와 그릇ㆍ가재도구 등을 상자에 담아둔 채 기다리고 있었으나, 길이 서로 어긋나는 바람에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대사(大師)가 탄 배가 떠나버리자, 선묘(善妙)는 “내가 스님을 위하는 마음이 진실하고 조금도 불순함이 없다면 이 상자가 스님에게 전해질 것”이라며 상자를 바다에 던졌는데, 파도가 이 상자를 대사(大師)에게 전해줬고, 또한 선묘(善妙)가 “이 몸이 용(龍)이 되어 스님이 탄 배를 수호(守護)하고 불사(佛事)를 도와드리고 싶다”며 황해(黃海)에 몸을 던지자 곧바로 용(龍)으로 변해 배를 호위하면서 신라(新羅)까지 무사히 보살폈다고 함
㉢ 부석사(浮石寺) 창건 전설(創建 傳說)
귀국(歸國)한 대사(大師)가 문무왕(文武王) 10년(676)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사찰(寺刹)을 지으라는 왕(王)의 분부를 받고 지금의 부석사(浮石寺) 터에 절을 지으려 할 때, 이미 이곳에 절을 짓고 살던 5백여 명의 다른 종파(宗派) 불승(佛僧)들이 크게 반발하였는데, 대사(大師)가 마음속으로 부처님에게 어려움을 호소하자 갑자기 하늘에서 바위로 변한 선묘(善妙)의 용(龍)이 나타나 3일 동안 공중에 머물면서 반대(反對)하는 불승(佛僧)들을 향하여 내리칠 듯 위협(威脅)하니, 그들은 두려워서 달아나고 종국에는 굴복하여 새 절을 짓는데 협조하였으며, 그리하여 선묘(善妙)가 바위가 되어 땅에 내려앉은 바위를 ‘부석(浮石)’ㆍ선묘(善妙)의 도움으로 지어진 이 절의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 지었다고 함
⑤ 일본(日本)에서의 위상(位相)
미국(美國) 태생(胎生)의 유명(有名)한 동양미술사학자(東洋美術史學者)였던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 : 1910~1996) 교수(敎授)는 자신의 명저(名著)『한국문화(韓國文化)의 뿌리를 찾아』를 통해 일본(日本)에서의 의상 대사(義湘 大師)의 위상(位相)이 어느 정도인지를 다음의 실례(實例)를 들어 기록(記錄)해 놓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터무니없는 억지 내용에 대해서는 일본인(日本人)들의 상습적(常習的)인 역사 왜곡(歷史 歪曲) 습관(習慣)으로 이해(理解)하면서, 이에 대해 따끔한 일침(一針)을 가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음
일본(日本)의 나라[내량(奈良)] 조정(朝廷)에서는 화엄불교(華嚴佛敎)를 받아들일 때부터 의상 대사(義湘 大師)를 ‘지쇼’라고 부르며 극진(極盡)한 존경(尊敬)의 대상(對象)으로 받들어 왔는데, 그 대표적 사례(代表的 事例)로는 대사(大師)가 창건(創建)한 절인 부석사(浮石寺)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히데요시[수길(秀吉)] 군(軍)에 의해 불타버리지 않고 살아남은 극소수(極少數)의 절 가운데 하나였으며,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면서 부석사(浮石寺)에 걸려있었던 의상(義湘)을 사랑했던 한국 처녀(韓國 處女) 묘화(妙花)의 초상화(肖像畵)를 탈취(奪取)해 갔으며, 1915년에는 돈을 들여 부석사(浮石寺) 경내(境內)를 보수(補修)하기도 하였다.
또한 13세기의 일본 승려(日本 僧侶)인 묘에 쇼닌[명혜상인 고변(明惠上人 高弁 : 1173~1232, ‘상인(上人)’은 일본(日本)에서 스님들을 받들어서 이야기할 때 부르는 이름임)]은 화엄종(華嚴宗)을 되살려 선종(禪宗)과 합치기 위해 의상(義湘)과 원효(元曉 : 일본(日本)에서는 ‘겐교’ 또는 ‘강교’로 불림)의 일대기(一代記)를 쓰기로 마음먹고 중국(中國) 송(宋)나라의 찬녕(贊寧)이 지은『송고승전(宋高僧傳)』을 탐독(耽讀)한 후, 이에 근거(根據)하여 ‘화엄연기(華嚴緣起)’에 관한 글을 짓는 한편으로, 당시 일본 최고(日本 最高)의 사찰미술화파(寺刹美術畵派)인 고잔지[고산사(高山寺)]파(派) 화가(畵家)들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는데, 오늘날「화엄종조사회권(華嚴宗祖師繪卷)」또는「케곤엔기[화엄연기(華嚴緣起)]」라는 표제(表題)가 붙어 교토[경도(京都)] 고잔지[고산사(高山寺)]에 6권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보관(保管)돼 있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2권은 원효 대사(元曉 大師)를, 그리고 4권은 의상 대사(義湘 大師)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주요 내용(主要 內容)은 충분한 해탈(解脫)로 중국행(中國行)을 포기(抛棄)하고 의상(義湘)과 헤어지는 원효(元曉), 의상(義湘)과 그를 사랑했던 처녀(處女) 선묘(善妙)와의 러브 스토리(Love Story)를 다룬 내용(內容)들이다.
그러나 오쿠다이라 히데오[오평영웅(奧平英雄)]란 사람이 쓴『일본(日本) 그림의 대가(大家)들』이란 책에는 이 두루마리 그림을 두고 “일본(日本)으로 돌아오는 두 신라 승려(新羅 僧侶)”라는 설명(說明)이 달려 있는데, 일본(日本)에 가본 적도 없는 두 분에 대해 이런 설명(說明)이 버젓이 나와 있는 것은 일본(日本)에 있는 모든 한국 문물(韓國 文物)이 그 국적(國籍)을 잃게 됐던 상황(狀況)을 반영(反影)하는 것이다.
[출처] 의상 대사(義湘 大師 : 625~702) |작성자 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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