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 진표는 완산주 사람이다. 아버지는 진내말, 어머니는 길보랑이며 성은 정 씨이다. 나이 12살 때에 금산사의 숭제 법사의 강석 밑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배우기를 청했다 스승이 그에게 말했다. "일찍이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서 선도 삼장에게 배운 뒤에 오대산에 들어가 문수보살 현신에게서 5계를 받았다."
이에 진표가 아뢰었다. “부지런히 수행하면 얼마나 되면 계를 얻게 됩니까?"
정성이 지극하다면 1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스승의 말을 들은 진표는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선계산 불사의암에 머물면서 삼업을 닦아서 망신참법으로 계를 얻었다 그는 처음 7일 밤을 정하여 오륜을 돌에 두들겨서, 무릎과 팔뚝이 모두 부서지고, 낭떠러지로 피가 비 오듯 했다 그래도 아무런 부처의 감응이 없자 몸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다시 7일을 정하였다. 14일이 되는 날 마침내 지장보살을 뵙고 정계를 받았으니 바로 개원 28년 경진(740) 3월 15일 진시요, 진표의 나이 이 때 23세였다.
그러나 그의 뜻은 미륵보살에게 있는지라 감히 중지하려 하지 않고 영산사로 옮겨가서 또 처음처럼 부지런하고 용감하게 수행했는데, 과연 미륵보살이 감응하여 나타나더니 점찰경 2권과 증과간자 1백 89개를 주면서 말했다.
“이 가운데서 제 8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를 비유한 것이고, 제 9간자는 구족계를 얻은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고 나머지는 모두 침향과 단향나무로 만든 것으로서, 이것들은 모두 번뇌에 비유한 것이다 너는 이것을 가지고 세상에 법을 전하여 남을 구제하는 뗏목을 삼도록 하라."
진표는 성별을 받자 금산사로 와서 살았으며 해마다 정성껏 단석을 열어 법시를 널리 베풀었다. 그 단석의 정결하고 엄함이 이 말세에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풍교와 법화가 두루 미치자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아슬라주에 이르렀다. 섬 사이의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고 물속으로 그를 맞아들였으므로 진표가 이곳에서 불법을 강의하니 그 물고기와 자라들까지도 계를 받았다. 그때가 곧 천보 11년 임진(752) 2월 15일이었다.
어떤 책에서는 원화 6년(811)이라 했는데 잘못이다. 원화는 헌덕왕 때이다 경덕왕이 이 말을 듣고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보살계를 받고 곡식 7만7천석을 내렸다 초정과 열악들도 모두 계품을 받았으며, 비단 5백단과 황금 50냥을 보시했다.
그는 이것을 모두 받아다가 절에 나누어 주어 널리 불사를 일으켰다. 그의 사리는 지금도 발연사에 있으니 곧 바다의 물고기들을 위하여 계를 주던 곳이다. 그의 제자 가운데 불법을 얻은 영수로는 영심, 보종, 신방, 체진, 진해, 진선, 석충 등이 있으며 모두 산문의 개조가 되었다. 영심은 진표가 바로 간자를 전했으므로 속리산에 살면서 진표의 법통을 계승한 제자인데, 그 단을 만드는 법은 점찰 6윤과는 약간 다르나 수행하는 법은 산 속에 전하는 본규와 같았다.
당승전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개황 13년(593) 광주(광동)에 참법을 행하는 중이 있었는데, 가죽으로 첩자 두 장을 만들고 선과 악 두 글자를 써서 사람에게 던지게 해서 선자를 얻는 자는 길하다고 했다. 또 그는 스스로가 박참법을 행하여 지은 죄를 없게 해 준다고 하였다. 그래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함부로 그 법을 받아들여 비밀하게 행하니 이 일이 청주(중국)에까지 알려졌다. 동행했던 官司가 이를 조사하여 보고 요망스러운 일이라 하니 그들이 말했다.
"이 탑참법은 점찰경에 의한 것이고, 박참법은 여러 경에 있는 내용에 따른 것으로, 오체투지 하여 마치 온 몸을 땅에 던져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한다."
그때 이 사실을 아뢰자, 황제는 내사시랑 이원찬을 시켜 대응사로 가서 여러 대덕들에게 묻게 했다 대사문 법경과 언종 등이 대답했다.
"점찰경은 두 권으로 되어있습니다 책머리에 보제 등이 외국에서 번역한 글이라고 했으니 근래에 나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본으로 전해 오는 것도 있는데, 여러 기록을 검사해 보아도 어느 곳에도 올바른 이름과 번역한 사람, 시일이나 장소가 모두 없습니다. 탑참법은 여러 가지 경과는 다르므로 여기에 의해서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이리하여 칙령으로 이것을 금지시켰다.
이제 이것을 시험 삼아 논해본다 청주거사, 탑참 등의 일은 마치 대유가 시서발총하는 것과 같으므로 ‘범을 그리다가 이루지 못하고 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불타가 미리 방비한 것도 바로 이 까닭인 것이다 만일 점찰경을 번역한 사람이나 그 시일과 장소가 없다고 하여 의심스럽다고 한다면, 이 또한 마를 취하기 위하여 금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실단이 길고 조밀하여 더러운 것과 흠이 있는 것을 깨끗이 씻어주고 게으른 자를 격앙시킴이 이 경전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대승참이라 했다. 또한 육근이 모인 가운데서 나왔다고도 했다. 개원, 정원에 나온 두 석교록 속에는 정장으로 편입되었으니 비록 性宗은 아니나, 그 상교의 대승으로는 또한 넉넉한 셈이다 어찌 탑참이나 박참의 두 참과 함께 말할 수 있겠는가 사리불문경에는 불타가 장자의 아들 빈야다라에게 말했다. "네가 7일 낮 7일 밤 동안에 너의 전죄를 뉘우쳐서 모두 씻게 하라."
다라가 이 가르침을 받들어 정성껏 밤낮으로 행하니 제 5일 저녁이 되자 그 방안의 여러 가지 물건이 비 오듯이 내리더니, 수건, 자루, 총채, 빗자루, 칼, 송곳, 도끼와 같은 물건들이 그의 눈앞에 떨어졌다 다라가 기뻐하며 부처에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것은 네가 물욕을 벗어날 징조니라, 모두 베고 쓸고 터는 물건이다." 이 말에 따르면 점찰경에서 輪을 던져 相을 얻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으로 진표공이 참회를 일으켜서 간자를 얻고, 불법을 듣고 부처를 본 것이 허망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경을 거짓되고 망령된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해서 미륵보살이 진표 스님에게 친히 전수했겠는가? 만일 이 경을 금한다면 사리불문경도 또한 금할 것인가? 언종의 무리야말로 확금불견인(攫金不見人)이니 글을 읽는 자들은 이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루어 읊도다.
요계에 현신해서 용롱를 일깨우니 영악과 선계에 감응해서 통했네
정성 다해 탑참 전했다 말하지 말라 동해에 다리를 놓은 어룡도 감화하였네.
진표율사는 전주 벽골군 도나산촌 대정리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이르러 출가할 뜻을 가지니 아버지는 이를 허락했다. 율사는 금산수 순제법사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순제는 사미계법을 전해 주고 공양차제비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 2권을 주며 말했다.
그는 즉시 손으로 낫을 쥐고 스스로 자기 머리칼을 잘라 버렸다. 율사는 자비한 마음으로 그의 머리를 다시 깎아 주고 계를 주었다. 이들은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가 있는 곳을 보고 표를 해두었다. 그들이 명주 해변을 돌아 천천히 가는데, 물고기며 자라 등이 바다에서 나와 율사의 앞으로 오더니 몸을 맞대어 육지처럼 만드니, 율사는 그들을 밟고 바다에 들어가서 계법을 염송하고 되돌아왔다. 고성군에 이르러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비로소 발연수를 세우고 점찰법회를 열었다.
그 곳에 거주한지 7년 만에 이 곳 명주지방에는 큰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렸다. 율사는 이들을 위해서 계법을 설하니 사람들이 받들어 지켜 3보에 공경을 다했다. 이때 갑자기 고성 바닷가에 무수한 물고기들이 죽어서 밀려왔다. 이것을 팔아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마련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율사는 발연수에서 나와 다시 불사의 방에 도착했다. 그 뒤에는 고향으로 가서 아버지도 찾아뵙고 혹은 진문대덕의 방에 가서 살기도 했다. 이때 속리산의 대덕 영심 대덕 융종, 불타 등이 율사를 찾아와 청했다.
"우리들은 불원천리 하고 와서 계법을 구하오니 법문을 주시기 원합니다."
율사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잠자코 있는지라, 세 사람은 복숭아나무에 올라가 땅에 거꾸로 떨어지며 용맹스럽게 참회했다. 그러자 율사가 교를 전하여 관정하고 드디어 가사와 바리때와 공양차제비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 2권과 간자 189개를 주었다. 다시 미륵진생 아홉째 간자와 여덟째 간자를 주면서 경계하기를, "아홉 번째 간자는 법이요, 여덟 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인데 내 이미 너희에게 주었으니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 길상초가 난 곳에 정사를 세우고 이 교법에 의해서 인간계와 천상계의 중생들을 건지고, 후세에 널리 펴도록 하라."
영심 등이 가르침을 받들고 속리산으로 돌아가 곧바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길상사라고 했다. 영심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율사는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발연사에 이르러 도업을 닦으며 끝까지 효도했다. 율사는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올라가서 입적했다.
제자들이 시체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공양하다가 뼈가 흩어져 떨어지니 비로소 흙을 덮어 무덤을 만들었다. 이내 그 무덤에 푸른 소나무가 났는데 세월이 오래 지나자 말라 죽었다. 다시 한 그루 났는데 뿌리는 하나지만 지금은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대개 그를 공경하는 자가 있어 소나무 밑에서 뼈를 찾는데 혹은 얻는 자도 있으나 얻지 못한 자도 있었다. 이에 나는 율사의 뼈가 아예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정사(1197) 9월에 특별히 소나무 밑에 가서 뼈를 주워 통 속에 담았는데 세 홉 가량 되었다. 이에 큰 바위 위에 있는 두 그루 소나무 밑에 뼈를 모시고 돌을 세웠다고 했다.
이 기록에 실린 진표의 사적은 발연석기와는 같지 않다. 때문에 영잠의 기록만 추려서 싣는다. 후세의 어진 이들은 마땅히 상고할 것이다. 무극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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