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수선님 2020. 8. 9. 11:47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설(薛)씨. 원효는 법명,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 압량(押梁 : 지금의 慶山郡) 불지촌(佛地村) 출신.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이며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다. 648년(진덕왕 2) 황룡사에서 중이되어, 각종 불전을 섭렵하며 수도에 정진하였다. 650년(진덕여왕 4) 의상과 함께 당(唐)의 현장과 규기에게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날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돌아왔다. 10년 뒤, 다시 의상과 함께 해로를
통하여 입당(入唐)하기 위하여 가던 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지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이후, 655년에서 660년 사이에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 실계(失戒)의 사실이 오히려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
다. 실계 후,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면서 광대들이 무롱(舞弄)하는 큰 박을 본 따 무애(無碍)박을 만들어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인데, 그 노래를 <무애가(無
碍歌)>라 불렀다. 그리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미친사람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여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있어 거사(居士)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고, 혹은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祠堂)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는 또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는 등 대중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뱅이나 어린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일생은 화쟁의 방법에 의하여 자리(自利)를 구하고 대중교화를 통하여 이타(利他)를 행함으로써 석가 이후 '상구보리 하화중행'으로 대표되는 불타의 참정신을 구현한 것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서나 <대승기신론소> 등에서 볼 수 있는 일심사상(一心思想) ·무애사상(無碍思想) ·화쟁사상(和諍思想) 등은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이론을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공헌하였으며,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시키려 한 대저술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다. 일생을 참선과 저술, 대중교화에 힘쓰던 그는, 686년(신문왕 6)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나이 70세, 법랍 38세로 입적하였다. 뒤에 1101년(고려 숙종 6)에 대성화정국사 (大聖和靜國師)라 시호했다. 저술은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3권·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3권· <화엄경종요(華嚴經宗要)>· <유마경소(維摩經疏)>3권·<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3권· <범망경소(梵網經疏)>2권· <범망경보살계본사기 (梵網經菩薩戒本私記)>2권·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1권· <섭대승론소(攝大乘論疏)>4권· <대승기신론종요 (大乘起信論宗要)>1권· <초장관문(初章觀文)>2권· <반주삼매경소(般舟三昧經疏)>1권· <아미타경소(阿彌他經疏)>1권· <무량수경소(無量壽經疏)>1권· <삼론종요(三論宗要)>1권 등 9부 240여권에 달한다. 이는 양으로도 남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도 매우 훌륭하여 당나라의 석학들이 그의 저술을 '해동소(海東宵)'라고 칭송했다.

원효 대사(元曉 大師 : 617~686)

 

① 생애(生涯)

 

㉠ 출생(出生)

  

신라(新羅)가 고대 국가(古代 國家)의 면모(面貌)를 갖추어가던 진평왕(眞平王) 39년(617)에 육두품(六頭品) 출신(出身)으로 하급관리(下級官吏)였던 설담날(薛談捺)의 아들[어릴 적 이름은 ‘설서당(薛誓幢 : ‘서당’은 ‘새털’이란 뜻)’]로 압량(押梁 : 지금의 ‘경북(慶北) 경산군(慶山郡) 자인면(慈仁面)’) 불지촌(佛地村)에서 태어났는데, 원효(元曉)의 출생 과정(出生 過程)은 석가(釋迦)의 그것과 비슷했다고 함

  

원효(元曉)의 어머니는 어느 날 유성(流星)이 뱃속으로 들어와 요동(搖動)을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꿈을 깼고 그 직후(直後) 아기를 잉태(孕胎)하였으며, 친정집으로 가던 도중(途中)에 아랫배가 아파 밤나무 밑에서 쉬다가 오색(五色)구름이 찬란한 가운데 원효(元曉)를 낳았는데, 그녀가 갑자기 산기(産氣)를 느껴 남편(男便)의 옷을 밤나무에 걸어놓은 채 해산(解散)하였기 때문에 그 밤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 불렀으며, 나중에 여기에 절을 지어 ‘사라사(沙羅寺)’라 이름하였다고 함

 

㉡ 상구보리기(上求菩提期)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원효(元曉)는 ‘사람은 왜 죽을까?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을까?’하는 철학적(哲學的)인 사색(思索)을 하기 시작하다가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절감(切感)하고서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오묘(奧妙)한 이치(理致)를 터득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10세 전에 황룡사(黃龍寺)에서 출가(出家)해 ‘원효(元曉 : ‘진리(眞理)의 새아침’으로 당시로는 ‘새벽’을 의미(意味)하는 ‘새부(塞部)’였으며,『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그 이름을 풀이해 ‘불일초휘(佛日初輝 : 부처의 태양(太陽)이 처음으로 빛남)’를 의미(意味)한다고 기록(記錄)했음)’라는 법명(法名)을 스스로 지었음

  

사미(沙彌 : 불도(佛道)를 닦는 20세 미만의 어린 중) 시절에는 낭지(朗智)ㆍ혜공(惠空) 스님을 찾아다니는 등 여러 곳을 떠돌며 공부하던 중, 진덕여왕(眞德女王) 4년(650)과 문무왕(文武王) 1년(661)의 두 차례에 걸쳐 의상(義湘 : 625~702)과 함께 입당(入唐)을 시도(試圖)하다가 당항성(黨項城 : 지금의 ‘경기(京畿) 화성시(華城市) 서신면(西新面)’)의 한 고분(古墳) 속에서 잠결에 해골(骸骨) 물을 마시고는 “모든 것은 마음에서 만들어진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진리(眞理)를 깨달은 후에 유학(留學)을 포기(抛棄)하고 돌아왔는데, 그 때 원효(元曉)가 읊었다는 게송(偈頌)이 다음의『오도송(悟道頌)』임

 

                    

『오도송(悟道頌)』 

心生故種種法生      마음이 일어남에 온갖 것 생겨나고 

심생고종종법생 

心滅故龕墳不二      마음이 없어지니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로다 

심멸고감분불이 

三界唯心萬法唯識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인식(認識)이라 삼

계유심만법유식

​心外無法故用別求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하랴.

​심외무법고용별구

​한편, 또 다른 설(說)로는 소년(少年) 시절에는 화랑(花郞)의 무리에 속하였으나 백제(百濟)와의 싸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유(理由)도 없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진덕여왕(眞德女王) 2년(648)에 출가(出家)할 것을 결심(決心)하고는 자기 집을 헐어 ‘초개사(初開寺)’라는 절을 세웠다는 것임

 

㉢ 하화중생기(下化衆生期) 

 

655년에서 660년 사이에 원효(元曉)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許諾)하려나. 내가 하늘 바칠 기둥을 다듬고저 하는데[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誰許沒柯斧 我破支天柱)].”라는 노랫말을 퍼뜨려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 설총(薛聰)을 낳아 불교 교단(佛敎 敎團)에서 배척(排斥)받아 파계(破戒)한 후, 속인(俗人)의 옷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 : 작은 마을에 거하는 사나이)’라 부르면서 광대(廣大)가 춤출 때 쓰는 커다란 박을 본 따 무애(無碍)박을 만들어 쓰고 방방곡곡(坊坊曲曲)을 돌아다니며 중생(衆生)들에게 “승(僧)과 속(俗)이 다른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이며, 또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만 계속 외우면 죽어서 극락(極樂)에 갈 수 있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전파(傳播)하였음

  

그러던 중 신문왕(神文王)이『인왕경(仁王經)』을 듣기 위하여 전국(全國)의 고승(高僧)들을 불러들일 때 원효(元曉)도 함께 추천(推薦)받았으나 다른 승려(僧侶)들로부터 배척(排斥)받아 그 자리에 끼지 못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당(唐)나라로부터 새로『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구한 후, 이 불경(佛經)을 설법(說法)할 고승(高僧)을 찾다가 결국 대안 법사(大安 法師)에게 부탁을 하자, 대안(大安)은 이미 성(聖)의 세계(世界)와 속(俗)의 세계(世界)의 의미(意味)를 완전히 꿰뚫고 있어 왕(王)에게 설법(說法)할 기회(機會)와 그만한 학식(學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오로지 원효(元曉)만이 이 경(經)을 강의(講義)할 수 있다”며 원효(元曉)에게 기회(機會)를 양보하였음

 

  그리하여 원효(元曉)가 왕(王)을 비롯한 명사(名士)ㆍ고승(高僧)들을 상대(相對)로 강론(講論)을 시작하자 그 강론(講論)은 흐르는 물처럼 도도히 장내(場內)에 울려 퍼졌고, 마침내 위풍당당(威風堂堂)한 원효(元曉)의 모습을 찬양(讚揚)하는 소리가 고승(高僧)들의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는데, 강론(講論)을 끝낸 원효(元曉)는 “지난날 나라에서 백 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그 축에 끼일 수도 없더니, 오늘 아침 단 한 개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마당에서는 나 혼자 그 일을 하는구나!”라고 하여 원효(元曉)의 인품(人品)과 학식(學識)을 시기(猜忌)하던 고승(高僧)들이 부끄러워하면서 깊이 뉘우쳤다는 일화(逸話)가 전해오고 있음

 

㉣ 입적(入寂)

  원효(元曉)는 불경 연구(佛經 硏究)에 더욱 매진(邁進)하여 원효(元曉)의 연구(硏究)가 미치지 않은 불경(佛經)은 하나도 없었다고 하는데, 그러다가 686년 3월 30일 산중(山中) 깊숙이 외딴 곳에 자리잡은 경천(涇川)의 남산(南山) 혈사(穴寺)에서 70세의 나이로 조용히 입적(入寂)하였음

 

② 불교사적 평가(佛敎史的 評價)

  

원효(元曉)는 ‘불교 수입국(佛敎 輸入國)’으로서의 위상(位相)에 머무르던 우리의 불교 수준(佛敎 水準)을 그가 이룩한 탁월(卓越)한 교학 연구(敎學 硏究)로 인해 오히려 불교 문명권(佛敎 文明圈) 국가(國家)들이 우리나라를 주목(注目)하게 만든 ‘한국 역사(韓國 歷史)가 낳은 최고(最高)의 사상가(思想家)’이며, 또한 당대(當代) 동아시아(東 Asia) 최고(最高)의 이론(理論)을 지녔음에도 스스로를 낮추고 대중(大衆) 속으로 파고들어 대중(大衆)을 교화(敎化)시키려고 애쓴 그의 열정(熱情)에서 ‘원효(元曉)의 진정(眞正)한 위대(偉大)함’을 느낄 수 있는데, 특히 원효(元曉)가 정토신앙(淨土信仰)을 스스로 해석(解釋)하여 “경전(經典)의 깊은 의미(意味)를 몰라도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만 계속 외우면 서방정토(西方淨土), 즉 극락(極樂)에 갈 수 있다”고 주장(主張)한 것은 ‘불교 대중화 운동(佛敎 大衆化 運動)’의 혁명적(革命的) 발상(發想)이었다고 할 수 있음

 

③ 주요 저서(主要 著書)

  

원효(元曉)가 남긴 저서(著書)는 무려 87부 180여 권이나 되지만,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23권 뿐인데, 그 가운데 대표적 저서(代表的 著書)로는『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ㆍ『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ㆍ『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등이 있으며, 그 외에 1997년부터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와 미국(美國)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캠퍼스(State University of New York - Stony Brook)가 공동(共同)으로 추진(推進)해온『영어판 원효 전서(英語版 元曉 全書 : Complete Works of Wonhyo)』전(全) 5권의 번역작업(飜譯作業)이 5년간의 대장정(大長征)을 마치고 2003년에 출간(出刊)되기도 했음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창시자(創始者)인 마명(馬鳴)이 지었다고 전하는 ‘대승불교철학(大乘佛敎哲學)의 개론서(槪論書)’인『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원효(元曉)가 주석(註釋)을 붙인 책으로, 많은 주석서(註釋書)들 가운데 원효(元曉)와 중국(中國)의 혜원(慧遠 : 334~416) 및 법장(法藏 : 643~712)의 주석서(註釋書)가 가장 권위(權威)가 있어 예로부터『기신론삼소(起信論三疏)』로 꼽히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원효(元曉)의『해동소(海東疏 : 중국(中國)에서 볼 때 해동(海東)인 신라(新羅)의 대사(大師)가 지은 책이라 하여 붙은 이름임)』가 특히 뛰어나다고 함

  

이 책이 이런 놀라운 평가(評價)를 받게 된 까닭은 불교(佛敎)의 모든 내용(內容)을 ‘일심(一心 : 자기 자신(自身)이 가진 하나의 온전한 마음)’이란 관점(觀點)에서 일관(一貫)되게 풀어내어, “삼보(三寶) 즉 불교(佛敎)에 귀명(歸命)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스스로 우리 안에서 마음을 그 본래(本來)의 원천(源泉)으로 귀일(歸一)하게 하는 것”이며, “사람들의 마음[중생심(衆生心)]이란 뜻의 대승(大乘)은, 그 본체(本體)가 크고, 그 모양[상(相)]이 크며, 그 능력(能力)이 커서 이 세상(世上)의 온갖 가능성(可能性)이 모두 포괄(包括)되어 있는 것”이란 결론(結論)을 이끌어 낸 원효(元曉)의 탁월(卓越)한 안목(眼目) 때문이었음

  

그 이후로 중국(中國) 화엄학(華嚴學)의 대가(大家)인 3조 법장 현수(三祖 法藏 賢首)나 규봉 종밀(圭峰 宗密 : 중국(中國) 당(唐)나라 때의 선사(禪師)로 화엄종(華嚴宗) 제4조(第四祖)인 청량 징관(淸凉 澄觀 : 760~820)의 제자(弟子)이자 화엄(華嚴) 제5조(第五祖)로 꼽히고 있으며, 선(禪)ㆍ교(敎) 일치(一致)를 주장(主張)) 등 중국(中國)의 고승(高僧)들은 원효(元曉)의 이 주소(註疏)를 참고(參考)로 하거나 부분적(部分的)으로는 그대로 인용(引用)하면서 그들의 주소(註疏)를 시도(試圖)했을 만큼 중국인(中國人)의 기신론(起信論) 연구(硏究)를 위한 기본 문헌(基本 文獻)이 되었는데, 특히 현수(賢首)는 이 책을 읽고 큰 감동(感動)을 받아 이후 불교 경전(佛敎 經典)에서 의문점(疑問點)이 있을 때마다 원효(元曉)에게 편지(便紙)로 질문(質問)함으로써 자신(自身)의 사상 형성(思想 形成)에 결정적(決定的)인 도움을 받았음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지금까지 중국(中國)의 어느 누구도 주석(註釋)한 바가 없고 오직 원효(元曉)의 주석(註釋)만이 현존(現存)하는 유일(唯一)한 작품(作品)인 이 책은 원래 전(全) 5권으로서 원효(元曉)가 왕명(王命)에 따라 지어 경주 황룡사(慶州 皇龍寺)에서 강의(講義)를 하던 중, 어느 날 몽땅 도둑을 맞아 부랴부랴 전(全) 3권으로 된 약소(略疏)를 다시 지은 것인데, 이 책이 중국(中國)에 전해지자 너무도 훌륭한 저술(著述)이므로 “이는 인간(人間)이 쓴 것이 아니라 필경 보살(菩薩)이 쓴 것”이라 하여 역경삼장(譯經三藏)들에 의해서『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으로 승격(昇格)되어 대장경(大藏經) 안에 편입(編入)됐으며, 또한 원효(元曉)의 손자(孫子)인 설중업(薛仲業)이 779년에 일본(日本)에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 이 책에 흠뻑 빠져있던 한 일본 고관(日本 高官)이 극진(極盡)한 대접(待接)을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만큼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에서 널리 애독(愛讀)된 명저(名著)임

  

보통 사람이 쓴 것은 ‘소(疏)’라 하고, ‘논(論)’은 마명(馬鳴)ㆍ용수(龍樹)같은 대보살(菩薩)이나 부처[불타(佛陀)]의 제자(弟子)들이 쓴 경전(經典) 해설서(解說書)에 붙이는 이름이기 때문에, 이 책이『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은 중국(中國)의 불교가(佛敎家)들이 원효(元曉)를 마명(馬鳴)이나 용수(龍樹)ㆍ무착(無着)ㆍ세친(世親) 등과 같은 위상(位相)으로 평가(評價)했다는 의미(意味)이자 우리나라 불교가(佛敎家)의 저술(著述)이 ‘논(論)’으로 승격(昇格)된 예(例)는 오직 원효(元曉)의 이『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 있을 뿐임

  

이 책의 내용(內容)과 관련해서는 그 주제(主題)가 흔히 ‘삼매(三昧)’라는 수도상(修道上)의 정신적 단계(精神的 段階)를 설명(說明)하는 것으로 오해(誤解)하기 쉽지만, 원효(元曉)는 ‘인간(人間)의 집중(集中)된 마음의 상태(狀態))를 인간(人間)이 자기 소외(自己 疎外)에서 본래적(本來的)인 자기(自己)로 환원(還元)되는 것’으로 규정(規定)하고, 이러한 자기 소외(自己 疎外) 현상(現象)을 회복(回復)하기 위한 방법(方法)으로서의 삼매론(三昧論)을 펼치고 있음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인간 세상(人間 世上)의 이데올로기적(Ideologie 的) 투쟁(鬪爭)을 화합(和合)시키는 열 가지 방법론(方法論)에 관한 논문(論文)’이라는 뜻을 가진 이 책은 신라(新羅)의 삼국통일(三國統一 : 668년) 이후(以後)에 씌어진 원효(元曉)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을 단적(端的)으로 보여주는 핵심적(核心的)인 저술(著述)이지만 완성본(完成本)은 아직 발견(發見)되지 않은 채 다만 1944년에 해인사(海印寺) 장경판(藏經板) 속에서 인출(引出) 시에 발견(發見)된 잔편(殘片) 4매(枚) 밖에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정확한 내용(內容)은 알 수 없음

  

하지만 이종익(李鍾益 : 1912~1991) 박사(博士)의 연구(硏究)에 의하면 서로 모순(矛盾)되는 종파간(宗派間)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논점(論點)들을 삼승일승화쟁문(三乘一乘和諍門)ㆍ공유이집화쟁문(空有異執和諍門)ㆍ불성유무화쟁문(佛性有無和諍門)ㆍ아법이공화쟁문(我法二空和諍門)ㆍ삼성일이화쟁문(三性一二和諍門)ㆍ오성성불화쟁문(五性成佛和諍門)ㆍ이장이의화쟁문(二障異義和諍門)ㆍ열반이의화쟁문(涅槃異義和諍門)ㆍ불신이의화쟁문(佛身異義和諍門)ㆍ불성이의화쟁문(佛性異義和諍門) 등 10가지 법문(法門)으로 정리하여 회통(會通)함으로써 각 종파(宗派)로 난립(亂立)되어 있던 인도(印度)ㆍ중국(中國)의 불교(佛敎)를 하나로 통합(統合)하는 일승불교(一乘佛敎)의 건설(建設)을 위한 논리적 근거(論理的 根據)를 제시(提示)하였는데, 그리하여 한국 불교 사상(韓國 佛敎 思想)의 핵심(核心)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印度)에까지 전해져 산스크리트어(Sanscrit 語)로 번역(飜譯)되기도 했다고 함

 

④ 삼대 사상(三大 思想)

 

​원효(元曉)가 평생(平生) 추구(追求)했던 목표(目標)는 모든 중생(衆生)을 이롭게 하는 ‘신라 불국토(新羅 佛國土 : 즉 ‘정토(淨土)’) 만들기’인데, ‘일심 사상(一心 思想)’은 이를 실현(實現)하기 위한 원효(元曉)의 사상적(思想的) 패러다임(Paradigm : 이론적(理論的) 틀)이고, ‘화쟁회통(和諍會通)’은 일심(一心)의 근원(根源)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론(方法論)이라 할 수 있으며, ‘무애(無碍)’는 일심(一心)의 구체적(具體的) 표현 행위(表現 行爲) 즉 실천행법(實踐行法)을 설파(說破)하고 있음

 

㉠ 일심 사상(一心 思想)

  

원효(元曉)의 모든 저술(著述)에서 철저하게 천명(闡明)되고 있는 사상(思想)으로서 원효(元曉)에게 있어 ‘일심(一心)’이야말로 바다처럼 만강(萬江)을 다 갈무리하는 넉넉한 마음, 거울처럼 만상(萬象)을 다 감싸 안는 따뜻한 마음, 삼국(三國)의 모든 백성(百姓)들이 한 민족(民族)ㆍ한 핏줄임을 비추어볼 줄 아는 일미(一味)의 큰 마음, 즉 만물(萬物)의 주추(主樞)이며, 그리하여 원효(元曉)는 일심(一心)의 세계(世界)를 불국토 극락(佛國土 極樂)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大乘)ㆍ불성(佛性)ㆍ열반(涅槃)이라고 불렀음

 

 또한 원효(元曉)는 “한 마음의 근원(根源)으로 돌아가 중생(衆生)을 이롭게 한다[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는 것을 궁극(窮極)의 목표(目標)로 설정(設定)하였는데, 이 말의 다른 표현(表現)이 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 위로는 보리(菩提 : ‘세속적(世俗的)인 번뇌(煩惱)를 끊고 얻는 깨달음의 경지(境地)’로 도(道)ㆍ지(智)ㆍ정각(正覺) 등으로 번역(飜譯))의 지혜(智慧)를 구하여 닦고, 아래로는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하여 제도(濟度)하는 일)’이며, 이를 실현(實現)하기 위한 육바라밀(六波羅密)의 실천(實踐)을 강조하였음

 

㉡ 무애 사상(無碍 思想)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원효(元曉)가『화엄경(華嚴經)』의 “모든 일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이라야 한길로 나아가 생사(生死)의 번뇌(煩惱)에서 벗어나리라[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는 구절(句節)을 좋아하여 스스로를 ‘무애(無碍)’라 이름지었으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모두 부처를 알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우게 된 것은 원효(元曉)의 공(功)이 크다’고 기록(記錄)하고 있을 정도로 원효(元曉)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自由人)이었음

 

또한, 원효(元曉)가 파계(破戒)하고 설총(薛聰)을 낳은 것이나 평민 옷을 입고 소성거사(小姓居士)로 시정을 돌아다니며 무애가(無碍歌)를 부른 것은 바로 이 ‘사람들의 마음, 즉 중생심(衆生心)’을 찾기 위한 것이었는데,『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통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진리(眞理)인 진속일여(眞俗一如 : 깨달음의 세계(世界)와 중생(衆生)이 사는 세속(世俗)이 다르지 않다)를 찾아냈으며, 그리하여 원효(元曉)는 부처와 중생(衆生)을 둘로 보지 않고, 오히려 “무릇 중생(衆生)의 마음은 원융(圓融)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泰然)하기가 허공(虛空)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平等)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고 하였음

 

㉢ 화쟁 사상(和諍 思想)

 

원효(元曉)는 어느 한 종파(宗派)에 치우치지 않고 대승불교(大乘佛敎) 경전(經典) 전체(全體)를 섭렵(涉獵)하고 통효(通曉)한 인물(人物)이었으며, 그리하여 전체 불교(全體 佛敎)를 하나의 진리(眞理)에 귀납(歸納)하고 종합(綜合)ㆍ정리(整理)하여 자기 분열(自己 分裂)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立場)에서 불교(佛敎)의 사상 체계(思想 體系)를 세웠는데, 이런 원효(元曉)의 조화 사상(調和 思想)을 말하며, 오늘날 우리나라 불교(佛敎)가 비교적(比較的) 종파적(宗派的) 성격(性格)이 약한 ‘통불교적(通佛敎的) 성격(性格)’을 갖게 된 배경(背景)에는 이 화쟁 사상(和諍 思想)이 지층(地層)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함. 

 

 

 

 

 

 

 

[출처] 원효 대사(元曉 大師 : 617~686) |작성자 무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