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三昧經論 해제
金剛三昧經論에 관한 硏究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은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 대한 논(論)이다. 송나라 [고승전(高僧傳)] 第四권에 나온 신라국 사문 원효전(新羅國沙門 元曉傳)을 보면 [금강삼매경]이 어떻게 해서 원효에게로 전달되어 그가 이 경에 대한 이러한 글을 지어 남기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 약간 설화적(說話的)인 방식이긴 하지만 뚜렷이 기술되어 있다. 그 자세한 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이 [고승전]의 기록을 보면 원효는 처음에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소(註疏)] 五권을 지었다. 그러나 이 五권짜리 [주소]는 도난을 당했고 그 후 다시 三일 만에 현존하는 바와 같은 三권짜리 글을 남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 三권짜리 글을 [고승전]에 의하면 당시에 약소(略疏)라고 불렀던 모양인데, 그것이 후에 논(論)이란 한 단계 격식 높은 호칭을 받으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논(論)이란 호칭은 아무 책에나 붙이지 못하는, 그리고 임의로 붙였다고 통용되는 것도 아닌 권위를 지닌 것이다. 예로부터 엄밀히 [대장경(大藏經)]으로 말하자면 경(經. 부처님이 말씀하신 敎法을 적은 기본적인 문헌). 율(律. 역시 부처님이 말씀하신 도덕규범, 생활규범을 기술한 기본적인 문헌). 논(論. 위의 經과 律, 특히 經에 대하여 또는 經 속에 말씀하신 法門에 대하여 佛弟子中 권위있는 學者가 지은 解說, 또는 보다 광범한 발전적인 이론 전개를 하여 부처님의 교훈을 더욱 확실히 이해하게 하는 문헌)의 세 가지, 즉 삼장(三藏)이 골간(骨幹)이 되는 것이요, 이것을 정장(正藏)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불교의 역사상에서는 논을 지은 사람은 인도의 마명(馬鳴)이나 용수(龍樹). 세친(世親) 등을 필두로 그야말로 불교학자 중에서는 최고의 학자들이요, 부처님 제자로서도 가장 탁월한 제자로서 흔히 보살(菩薩)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권위를 인정받는 인물들이다. 중국에서는 약간 그 권위가 떨어진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많은 스님들이 논의 작자(作者)로 등장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원효만이 그러한 영광을 차지했고, 그 영광의 계기가 바로 이 [금강삼매경]에 대한 논(金剛三昧經論)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영광이 참으로 온 천하에 자랑스럽게 되는 까닭은 첫째로 [금강삼매경]에 대해서는 원효 이전에 아무도 손을 대고 눈을 돌려 말을 해본 사람이 없었고, 원효는 그 최초의 주석자(註釋者)이며, 동시에 최고(最高). 최심(最深)의 이해와 해설을 역사상에 남겼다는 사실이며, 둘째로는 이 저술을 논(論)이라고 부른 것이 그 자신이 아니라 당대 불교의 중심지였던 당나라에서 그곳 학자들에 의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금강삼매경]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성립된 것이며, 그 원효의 논은 불교사상사 위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며, 또 현대에 대해서는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아직까지 많은 연구가 없었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금강삼매경] 자체에 대한 연구로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원효가 그 첫 연구자이었으며 그 가장 완벽한 이해자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원효 이전에는 아무도 이 경의 존재를 몰랐고 그 중요성을 몰랐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경의 목록(經錄)이 있어서 누가 번역한 어떤 경이 있다는 것을 그것을 통해 알 수 있게끔 되어 있는데, 도안(道安. 三一四~三八五)은 그 경록 가운데에서 양나라 시대(凉代)의 실역(失譯. 역자 불명)이라고 적어 놓고 있으나 그로부터 一五0년 가량 경과한 시대의 승우(僧祐. 四四五~五一八)의 경록인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에는 이름이 있으나 이미 책이 없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후 수대(隋代)의 세 개의 목록이나, 당대(唐代)의 [정태록(靜泰錄)], [내전록(內典錄)], 간정록(刊定錄)] 등에도 [금강삼매경]은 궐본(闕本)으로 되어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七三0년 지승(智昇)의 [개원록(開元錄)]에 이르러서 습유편입(拾遺編入. 잃어버렸던 것을 찾아서 편입한다는 뜻)이라고 하여 현존본(現存本) 속에 기재하고 있다. 지승(智昇)은 [금강삼매경]의 크기를 二八지(紙)의 것이라고 하고 있는데(앞서 말한 송고승전의 원효전에도 三0지 가량(三十來紙)의 흩어진 경(重沓散經)을 가져왔다고 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현존본이 바로 그것이었음은 틀림없다) 그 일지(一紙)의 크기는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의 약 일단(一段)에 해당하므로, 二七단(段)으로 되어 있는 현존본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바가 없다.
우리 원효가 이 경에 대하여 논을 지은 연대는 아무 데에도 똑똑히 언급된 바가 없다. 그러나 [금강삼매경론]이 저술된 시기를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즉 그 논을 짓게 된 직접 동기가 왕(王)의 부인(婦人)이 종기를 앓아 도무지 약효가 없을 때이었다는 사실, 그러므로 그 부인이 누구였으며, 어느 때 일이었는가를 아는 일, 그리고 당시에 원효보다도 연상(年上)인 대안(大安)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또 당시 원효는 황룡사(黃龍寺. 皇龍寺가 아니다)에 머무르고 있었고 이미 유명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소(疏)와 별기(別記). 그리고 이장장(二障章) 등이 저술된 뒤이었다는 사실(그뿐만 아니라 이 경에 대한 논소(論疏)를 강한 것이 이미 수차에 걸친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가 국내에서 열린 상당히 뒤의 일이라는 사실 등을 고려에 넣어야 할 것이다).
원효는 六一七년부터 六八六년까지 七十년의 생애를 보냈다. 그리고 그가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려고 하다가 포기한 것이 대개 그 나이 四四세(六六一) 이후의 일로 보인다. 그의 수도가 급격한 진전을 보이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六六八년의 일이다. 원효의 나이 五一세이다. 이 저술은 그러므로 대강 그의 나이 五一세 이후 七0세까지의 사이, 그러나 그것도 만년에 가깝지 않고 五十대에 이룩한 저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직 [금강삼매경론] 자체에 대한 여러 가지 각도에서의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겨우 그 내용의 이해를 위한 시도(試圖)가 시작되었을 따름이다. 이 한글 역(譯)은 그러한 시도의 한 단계가 된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에 대한 연구가 이처럼 미흡한 것은 [금강삼매경] 자체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과문(寡聞)의 탓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금강삼매경]에 관한 연구로는 일본 동경의 미즈노. 고오겐(水野弘元) 교수의 한 논문이 있을 뿐이다. 그는 一九五五년에 [인도학불교학연구(印度學佛敎學硏究 通卷 六號 p二三九~二四四)]에 [보리달마(菩提達摩)]의 이입사행설(二入四行說)과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란 논문을 발표했고, 뒤이어 이를 보완한 자세한 것을 [구택대학기요(駒澤大學紀要)]에 게재하였다. 이 논문의 초점은 [금강삼매경]이 보리달마(菩提達摩) 이후에 당대초기(唐代初期)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이라는 것, 그리고 [금강삼매경] 안에 있는 이입설(二入說. 入實際品 參照)은 달마의 이입설(二入說)을 받은 것이라는 것이 두 가지 점에 귀착한다. 그러나 [금강삼매경] 자체의 해제(解題)에 있어서 그러한 문제에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다만 이 논문 가운데에서 [금강삼매경] 자체의 이해에 도움이 될 만한 연구 성과를 간추려 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 될 것이므로 그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1) 미즈노 교수에 의하면 [금강삼매경]은 능가경(楞伽經)]이나 [금강경(金剛經=金剛般若波羅密多經)]과 같이 표면적으로 그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서 표방되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 선종(禪宗)이 시작된 이래 부단히 선종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견해로서는 [금강삼매경]을 선종과 반드시 관련시킬 필요가 있는지 의심스럽게 여긴다. 선종에서 이 경을 어떻게 보았건 이 경은 그러한 종파적 관념과는 관계없이 깊은 선의 경지를 이야기하는 매우 심오한 경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2) 미즈노 교수는‘[금강삼매경]은, 불교의 극히 중요한 많은 교리가 설명되고 있어 경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논서(論書)라고 할 만한 철학적인 경전이다. 그것은 철학적 경전으로서의 [여래장(如來藏)계 경전], [대승열반경(大乘涅槃經)], [해심밀경(解深密經)], [능가경(楞伽經)] 등 중기 이후의 제 대승경에 유사하다’고 하고, 이 경에는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시대로부터 수대(隋代)경까지 중국에서 문제되었던 거의 모든 교리, 학설이 망라되어 있음을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이 경 안에서는 대승(大乘)의 공(空) 사상이 깊이 밑에 깔려 있고,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이나 [중론(中論)]의 게송에 나오는 문귀와 극히 비슷한 것이 도처에 언급되어 있고,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주명(呪名)과 같은 표현도 들어 있다. 또 화엄(華嚴)의 교리로서는 삼계허망유심조(三界虛妄唯心造)의 사상이, 또 그 같은 계통을 밟는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이나 [범망경(梵網經)]의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오십이위설(五十二位說)이 있다. 재가(在家)의 가치를 존중하는 이론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유마경(維摩經)]의 주장을 방불케 하고,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든가 장자궁자(長者窮子)의 비유라든가 하는 것은 [법화경(法華經)]과의 관련을 생각지 않을 수가 없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이란 말이나, 불성여래장(佛性如來藏), 그리고 일천제(一闡提) 등에 관한 언급을 대승의 [열반경(涅槃經)]과 관련시켜 생각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뿐만 아니라, 이 경에서는 정토(淨土)사상이 엿보이고, 정상말(正像末) 삼시(三時. 正法. 像法. 末法의 時代가 차례로 온다고 설하는 학설)의 사상, 참회의 사상 등이 들어 있다. 또 [능가경(楞伽經)], [섭대승론(攝大乘論)],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의 깊은 관련을 우리는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모든 점을 감안해서 미즈노 교수는 이 경이 인도의 원전(原典)으로부터 번역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위찬(僞撰)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를 표명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 경이 앞서 말한 [원효전]과의 관련 밑에 고찰한 결과 六四九년 이후 六六五년까지 一十여년 동안에 성립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작자를 원효 자신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흔적을 보인다.
이상의 미즈노의 견해는 그 대부분을 수긍할 수 있으나 몇 가지 특별히 수정하고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1)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이 [금강삼매경]은 원효의 논이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압축된 문장 스타일과 어휘를 구사한 극히 짤막한 경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는 백용성(白龍城) 스님이 옥중에서 번역한 한글 번역이 다소 가필되어 법보시판으로 항간에 유통되고 있으나, 그 한글 번역은 원효의 논에 의하여 대교(對校)해 보면 五十% 이상이 오역(誤譯)이다.
[금강삼매경]의 이해가 원효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이 경이 일본이나 근대 중국에서 크게 중요시되었다는 사실, 특히 용궁의 왕이 이 경의 흩어진 종이들을 묶어서 우리나라 사신에게 주면서 이 흩어진 페이지를 맞추는 것은 대안(大安)만이 할 수 있고, 그것을 강(講)하는 것은 원효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는 기록을 우리는 한갓 이야기로서 너무 경솔히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송나라 [고승전]에만 기록된 이 이야기는 원효가 그만큼 위대한 사상가였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또 한편 원효가 이 경의 성립과 무슨 관련이 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암시해 준다고도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 점에 대해서 더 세밀한 연구를 거듭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2) 다음은 [금강삼매경]의 사상적 성격에 대해서이다. 미즈노 교수는 이 경이 앞서 잠간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 남북조 이래 당초(唐初)까지 중국에서 문제되었던 모든 교리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 경은 단순히 그러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특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회통(會通)하고 있는 데 특징이 있는 것이다. 원효의 논 첫머리에 실린 [경의 종지(宗旨)에 대한 설명(辨經宗)]은 매우 중요한 독창적인 이해의 선언이다. [합해서 말하면 일미관행(一味觀行)이 그 요(要)이고, 열어서 말하면 십중법문(十重法門)이 그 종(宗)이다]라고 한 표현에도 드러나 있듯이 우리가 이 경과 논을 존중하는 까닭은 그것이 단순한 하나의 철학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일종의 신앙고백이며 신앙 중에서는 가장 고도의 신앙을 고백한 신비적 체험의 고백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미관행(一味觀行)이란 결코 말장난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3) 그리고 셋째로 미즈노 교수가 지적하지 않은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은 이 [금강삼매경]은 [대승기신론]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경전이라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반야(般若)의 공(空) 사상이라든가, 화엄의 유심(唯心) 사상이라든가, 유마(維摩)의 재가보살도의 강조라든가, 그 모든 것은 사실 그 하나하나로서는 아직 종합이 되지 않은 개별적 이론 제시에 불과했었지만 기신론적 입장에서 비로소 그것들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원융된 사상으로 제자리를 찾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기신론이 그 원리를 제공했다면 [금강삼매경]은 그 원리를 실제로 적용하여 보여 준 것이다.
[금강삼매경]에 대한 다른 주소(註疏)는 원효 이후 상당한 수에 달하였으나, 대부분 현존하지 않고, 현재 [속장경(續藏經)]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는 명(明)나라 시대의 원징(圓澄)이 지은 [금강삼매경 주해(註解)] 四권과 청(淸)나라 주진(誅震)이 지은 [금강삼매경 통종기(通宗記)] 一二권의 둘이 있다.
金剛三昧經論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에 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이 들어 있는 문헌은 앞에서 말한 바 있듯이 송나라 [고승전] 第四卷에 실린 [원효전]이다. 원효의 전기는 [삼국유사]에도 들어 있고 또 따로 전하고 있는 것이 있으나, 그곳에서는 [금강삼매경론]에 관하여 하등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 [고승전]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원효는 설씨(薛氏), 상주(湘州) 사람이다. 나이 二十에 불법에 귀의하고 수학 수행한 결과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에 통달하고 정의입신(精義入神. 신통력을 가진 듯 뜻에 밝았다)함이 만인의 적(萬人之敵)이 되었다. 의상(義湘) 법사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현장(玄奘), 자은(慈恩)의 문에서 공부할 생각을 품었으나 깨달은 바 있어 포기한 이후, 그의 행적과 발언은 미치광이 같기도 하고 패륜아 같기도 하였다. 속인과 같이 행동하여 술집이나 창가(倡家)에도 드나들고 금도철석(金刀鐵錫)을 가지고 조각을 하기도 하고 또 혹은 소(疏)를 지어 화엄(華嚴)을 강하기도 하고, 사당(祠堂) 안에서 악기를 치며 즐기기도 하고 혹은 여염집에 유숙하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산수(山水)에 마주앉아 좌선(坐禪)도 하는 등 마음대로 기회에 따라 행하되 도무지 일정한 규범이 없었다. 국왕이 백고좌(百高坐)를 설치하고 [인왕경(仁王經)] 대회를 열어 두루 석덕(碩德)을 찾는데 상주에서 그를 추천해 올렸으나 다른 승려들이 싫어하여 이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왕의 부인이 아주 악성(惡性)의 종창(腫瘡)을 앓게 되었는데 도무지 의약의 효험이 없었다. 왕자와 신하들이 모든 산천영사(山川靈祠)에 기도를 올렸으나 효험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무당이 말하기를‘타국으로 사람을 보내어 약을 구하면 병이 곧 나을 것이다’고 하므로 그 말대로 사신을 당나라로 보냈다. 해로(海路)로 당(唐)을 향해 가는 도중에 물결을 헤치고 한 노인이 나타났다. 배 위로 올라와 그 사신을 용궁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궁전에는 검해(鈐海)라는 용왕이 있었는데 그는 사신을 보고 말했다.‘너희 나라 부인은 청제(靑帝)의 셋째 딸이다. 우리 궁중에 옛날부터 [금강삼매경]이라는 경이 있으니 이각(二覺)이 원통(圓通)하여 보살행(菩薩行)을 행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지금 부인에게 병이 있으니 이것을 증상연(增上緣)으로 삼아 이 경을 보내 그 나라에 유통시키고자 할뿐이다’하고 三十장 가량이 되는 종이 뭉치를 가지고 와서 사신에게 주었다. 다 흩어지고 순서가 뒤바뀐 책이었다. 그러면서 또 말하기를‘해중에서 혹시 좋지 않은 일이 있을까 두렵다’고하여 용왕이 직접 칼을 가지고 와 사신의 허벅다리를 갈라 그 안에다 경을 넣고 밖에는 납 종이로 동여매고 약을 바르니 허벅다리가 원상 그대로 회복되었다. 용왕이 말하기를‘대안성자(大安聖者)를 시켜 흩어진 종이의 페이지를 맞추고 다시 책으로 매달라고 하고 원효법사에게 청하여 소(疏)를 짓게 하여 이를 풀이하면 왕의 부인의 병이 곧 나을 것이 틀림없다. 설사 히말라야의 아가타 영약의 힘이 크다 하지만 이것만 못하리라’고 하였다. 왕이 해면으로 사신을 내보내어 배를 타고 마침내 귀국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먼저 대안성자를 불러 그 차례를 맞추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나 대안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모양도 복장도 특이하여 항상 거리에 있으면서 구리로 만든 바리를 치면서‘대안, 대안’하고 노래를 부르며 다녔다. 그래서 그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왕이 대안에게 명령하니 대안이‘그 경을 이리로 가져오시오. 왕의 궁정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소’라고 하였다. 대안이 경을 받아서 배열을 하니 八품이 되는데 모두 부처님의 뜻대로 글의 뜻이 맞아 들어갔다. 대안이 말하기를‘속히 원효에게 시켜 강(講)을 하게 하시오.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하였다.
원효가 이 경을 받았을 때에는 그가 태어난 상주에 있을 때이다. 사신에게 원효는 말했다 ‘이 경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이각(二覺)을 종(宗)으로 하고 있으니 나에게 뿔 달린 탈 것(角乘. 소를 말함)을 마련해 주고, 책상을 갖다가 두 뿔 사이에 걸쳐 놓고 그 위에 필연(筆硯)을 놓으시오’하고 내내 이 소달구지 위에서 소(疏) 五권을 지었다. 왕이 날짜를 정하여 황룡사(黃龍寺)에서 연설을 하려 할 즈음에 박복한 녀석 하나가 이 새로 지은 소(疏)를 훔쳐 달아났다.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다시 三일을 더 연기하고 그동안에 다시 기록하여 三권으로 하였다. 이것을 약소(略疏)라고 부른다. 왕과 신하. 도인과 속인 등 모두가 구름같이 법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원효가 그 뜻을 펴는데 위엄과 격식이 있고 어려운 대목을 해석하는데 가히 만고의 원칙이 될 만하였다. 그 칭찬하는 소리가 공중에 비등했다. 원효는 또 시를 읊어 가로되‘옛날 백 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참여할 수 없었는데 오늘 아침 하나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데 있어서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구나’하였다. 그때에 모든 이름 있는 대덕 스님들이 얼굴을 숙이고 부끄러운 낯으로 엎드려 참회하였다. 소(疏)에는 광략(廣略) 二本이 다 본토(本土) 즉 신라에서 행해졌는데 중국에는 약본이 들어갔다. 후에 이 소(疏)를 고쳐 논으로 하였다.
이것이 대강 [송고승전] 원효전에 나와 있는 이야기의 줄거리이다. 이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토대로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저 나라의 [고승전]에만 실린 결과가 되었는지 아직 연구하여야 할 중대한 문제들이 많다.
金剛三昧經의 現存本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에는 第三四권 No, 一七三十으로 수록(收錄)되어 있고, 이는 현재 판본으로 남아 있는 [갑진 八월 초五일 우바새정 안지(甲辰八月初五日 優婆塞鄭 晏誌)]라는 발문(跋文)이 붙어 있는 고려본을 원본으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금강삼매경론]은 一九二三년에 조선불교회(朝鮮佛敎會)에서 활자화한 일이 있고 그것이 또한 [신수대장경] 편찬 때에 참고가 되었던 것 같다.
현존하는 가장 권위 있는 원본은 앞서 본 갑진본(甲辰本)이며, 이것은 단기 四二九一년에 동국대학교에서 영인(影印)된 바가 있다. [속장경(續藏經)]에나 [고려대장경]에 이 논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다. 더 연구할 문제인 줄로 안다.
現存 金剛三昧經論의 構成內容
상술한 [고승전]의 기록에는 이 경이 八품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본은 七품뿐이며 이 七품이 정설분(正說分)을 이루며, 그 앞뒤에 서분(序分)과 유통분(流通分)이 있다. [금강삼매경론] 자체의 구성 내용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권두에 실린 목차를 보면 좋으며 이 목차는 원효 자신이 해놓은 과문(科文)에 따른 것이다.
대강 그 구성 내용을 다음에 표기하여 다시 한 번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一, 서분(序分)
二, 정설분(定說分)
1, 무상법품(无相法品)
2, 무생행품(无生行品)
3, 본각이품(本覺二品)
4, 입실제품(入實際品)
5, 진성공품(眞性空品)
6, 여래장품(如來藏品)
7, 총지품(總持品)
三, 유통분(流通分)
이 중에서 원효의 독창적인 사상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곳은 서분이다. 그 첫째 대의(大義)를 말하는 글은 매우 음악적인 운율의 아름다운 명문이며, 동시에 전편의 사상을 간결하게, 그러나 남김없이 다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감탄을 금할 수 없는 글이며, 그의 다른 모든 저술의 대의(大義)들과 함께 깊이 음미하여야 할 글이다. 그 둘째 변경종(辯經宗)은 앞서 잠간 언급한 바와 같이 경의 종지를 밝히는 부분으로 원효의 불교관 전체를 알게 하는 의의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는 원효의 교판(敎判, 각종의 가르침을 분류하여 그 깊고 얕음을 따라 분류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원효의 십문화쟁(十門和諍)의 이상이 바로 이러한 정신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셋째 석제명(釋題名), 즉 제명풀이에 있어서도 우리는 원효의 독창적 견해에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심오하고 완벽한 이해는 놀라운 일이다.
정설분(正說分)에서는 이미 누누이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의 주석과 논증이 이 경 자체의 이해를 위한 결정적 열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원효가 이 논을 씀에 있어 인용한 불전(佛典)이 과연 어떠한 것들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은 그의 사상을 아는 데 있어서 크게 참고가 될 것이므로 이 이름만을 열거해 보기로 하자. 나오는 순서대로 적는다(아랫 숫자는 인용 회수).
능가경(楞伽經) 3
법화론(法華論) 2
법화경(法華經) 3
기신론(起信論) 3
십지론(十地論) 2
이장장(二障章) 4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 1
불성론(佛性論) 2
승만부인경(勝鬘夫人經) 2
무상론(无相論) 1
섭대승론(攝大乘論) 2
잡아함(雜阿含) 1
유가론(瑜伽論) 3
대열반경(大涅槃經) 3
해심밀경(解深密經) 1
중변론(中邊論) 1
지도론(智度論) 2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1
화엄경(華嚴經) 3
보성론(寶性論) 1
범망경(梵網經) 1
인왕경(仁王經) 1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9
이 책을 읽는 이를 위한 권고
[금강삼매경론]은 [대승기신론]의 이해가 다 된 것을 전제로 하고 쓰신 글이다. 물론 불교의 다방면에 걸친 기초 지식과 그리고 수행의 체험 없이는 [대승기신론]의 이해조차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 [대승기신론]을 모르고서는 [금강삼매경론]을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역자가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우선 [대승기신론]에 관한 착실한 공부부터 앞세워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첫째 권고이다.
다음으로는 반드시 이 책은 한문원전 및 한문원어를 표준으로 읽어 가야 하며 한글 번역만을 쫓아가서는 충분한 이해가 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여야 하겠다. 한글로 옮겨진 번역어는 도저히 한자가 가지고 있는 깊이와 넓이를 표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글자의 탓이라기보다도 역사의 탓이라고 보아야 할 점이 상당히 많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면밀히 원전을 연구하는 자세로 읽어 주기를 바란다. 이 [한국명저대전집]에는 이 전집의 성격과 체제상 해설을 일체 붙이지 않았다. 이것은 장차 다른 형태로 다시 다루고 엮을 계획이다.
셋째로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고방식을 크게 바꾸어야 하는 것이 일반 우리 속인(俗人)의 처지이다. 허심탄회하게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하며, 들은대로 실천해 가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사족(蛇足) 같은 이야기이기는 하나, 역자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다소라도 도움이 될까하여 적은 것이다. 너그러운 양해가 있기를 바란다.
'원효스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사회의 위기와 대안의 패러다임으로서 원효의 화쟁사상- 이도흠/한양대 국문과 강사 (0) | 2021.01.03 |
---|---|
원효스님 말씀 (0) | 2020.12.20 |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해설- 오형근 (0) | 2020.08.23 |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0) | 2020.08.09 |
[원효] 6. 원효의 윤리관 下 - “戒相에 머무르지 않기에 계바라밀 갖춘다” (0) | 2020.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