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삼매경론 강의 1
서론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은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 대한 논전論傳이다.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저자는 <금강삼매경>의 해설서인 <금강삼매경론>은 원래 소疎이었는데 중국에 약소略疎가 들어왔을 때 경전을 번역하는 학자들이 그 내용이 너무나도 뛰어나서 소를 론論이라 고쳤다고 전하고 있다.
보통 인도의 대 학승 용수龍樹, 무착無着 세친世親등이 쓴 것을 논전이라 한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한국은 대 학자들 이라도 논사論師라고 붙이지 않고 논전도 <금강삼매경> 말고는 없다.
당시는 중국 문화가 더 선진적이었으므로 중국에서 인정한 것이 더 공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금강金剛의 뜻부터 알아보자.
금강은 인도의 학자들이 주로 쓰는 말인데 부처님 바로 직전 묘각妙覺과 부처님의 경지를 묘사할 때 금강이라는 말을 썼다. 금강삼매가 나타나는 경지는 十地(法雲地)의 뒤, 묘각의 앞에 있는 등각等覺으로 마지막 부처가 되는 깨달음을 얻는 삼매三昧다. 삼매는 삼마디 즉 선정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일체의 번뇌가 다 끊어지고 지혜가 원만해 지는데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도 한다. 금강을 비유한 선정의 이름이다. 왜 금강을 비유로 했는가? 자신의 단단함과 다른 것을 깨뜨리고 뚫는 예리한 힘이 다른 어느 것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을 닦아 가는 절차는 천차만별이다. 사람마다 수행심의 차별도 많고 근기도 각각 다르다. 마음에 대한 강의는 <유식30송唯識30頌과 <반야심경찬般若心經撰>에서 많이 거론하여 왔다. 우리 마음의 경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수 있다. 하나는 망심忘心. 다른 하나는 진여심眞如心이다. 망심은 유루심有漏心 즉 부정한 마음이 번뇌심煩惱心이다. 이 번뇌심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유식30송>을 강독 했다. 원효대사의 이장의二障義는 번뇌심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이다.
원효대사는 번뇌장과 소지장이 인간의 근본마음을 장애 한다고 했다. 우리의 근본마음은 지혜심智慧心 보리심菩提心이다. 지혜는 작용이고 체體는 진여이다. 진여는 절대불변絶對不變 불생불멸不生不滅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진眞은 가장 진실한 것, 여如는 여여 즉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다, 진여는 청정, 진여심은 가장 청정한 마음, 가장 진실한 마음이다. 본래 우리 마음이나 물질계에 있는 본래 순수한 성질을 진여성 불성佛性이라 한다. 이것은 인연에 의해서 형성 된 것이 아니다. 능조能造도 피조被造도 아니고 본래 자연 그대로의 진리이다. 이것은 평등한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유일신을 세워 창조주 피조물, 능조자 피조자를 구별하지만 불교는 그것을 없애버렸다. 모든 이치는 주종 관계가 아니고 정신계 물질계 모두 평등한 것이고 인간과 인간도 평등한 것이다. 여기서 발전한 것이 일여一如, 만물이 평등한 가운데서도 주가 인간의 마음으로 들어와 마음이 주가 되면서 마음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게 된다. 만법은 평등한 것인데 왜 유심唯心, 마음을 강조하게 되는가? 진여성은 평등한것인데 각각 개성이 있다. 이것이 자성自性 자상自相이다.
마음의 자성 자상만 논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도 자상 자성이 있다. 자는 개아個我다, 의자도 개아가 있고 이 마이크도 개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연법의 모임이니까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우리가 직관直觀하면 바로 공空한 것이다. 그러나 인연법因緣法을 떠나서 공은 따로 존재 할 수 없다. 이때 공성空性은 바로 진여성이고 그래서 일반적으로 보면 다 평등한 것인데 그러나 우리 동물세계에서 나를 이끌어 가는 마음의 주체, 우주적인 마음, 대승심大乘心, 대심大心, 일심一心이 있다. 우주를 다 cover 할 수 있는 마음이다. 그러면서도 이 마음에 자성과 자상이 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나, 약사불藥師佛, 아미타불阿彌陀佛 본성은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각자 인행시因行時 공덕功德을 쌓아서 성불成佛할 때 나름대로 자상과 자성이 있다. 보살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어떤 분이시다 하는게 있어서 우리가 찬탄하면서 그 이념을 따라간다. 부처님이나 보살의 이념을 따라서 우리 불자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대심 대승 대승심이 바탕이 되어 금강삼매 금강심이라고 한다. 금강심은 파괴할 수도 없고 없어질 수도 없고 어디 넘어가는 마음도 아니고 때묻는 마음도 아니다. 연꽃에 비유할 수 있다.
연꽃은 흙탕물 속에 피어 있으면서도 때묻지 않는다.(연화심) 금강심은 흔들리지 않고 부정타지 않는다. 이 마음이 나타날 수 있는 삼매가 금강삼매이다. 금강삼매는 부정타는 마음을 깡그리 정화해 버리고 도달하는 선정禪定이다. 이 선정을 닦아야 망심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선심善心과 악심惡心을 다 정화淨化해 버린다. 선심과 악심은 상대적인 마음이다. 선심이 일어나서 얼마가지 못하고 나쁜 마음이 일어난다. 이렇게 자꾸 변하는 동요심動搖心이 번요뇌란煩搖惱亂 즉 번뇌심이다. 번뇌를 가지고 있는 한 고뇌하고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선정의 마음은 이것을 다 정화하여 우리의 대승심, 금강심으로 되돌아 가려고 하는 운동이 다. 삼매는 선정만이 아니고 선정이 主가 되고 함께 육바라밀六波羅密을 다 수행修行해야 한다. 그 중 선정바라밀禪定波羅密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다른 보살행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평등한 것인데 이것을 망각하고 번뇌심이 나타났는데 유식이라는 말은 이 마음이 번뇌심도 발생하고 지혜로운 마음도 발생하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마음과 관련되어 있고 마음과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한다. 마음이 위주가 되고 마음이 판단해서 우리를 이끌어 간다. 마음의 변화 때문에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떠나서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망식을 정화하고 지혜를 얻는 것이다. 전식득지 이것이 유식의 뜻이다. 유식은 간거簡去 임지任持의 뜻이 있다. 유식의 대의는 망심을 간거 즉 제거하는 것이다.
마음은 똑같은 마음인데 번뇌심으로 자기가 나타내어 자기 스스로 억압 압박한다. 요즈음말로 스트레스다. 이것은 자기가 조성한 것이지 신이나 부처나 한 것이 아니다. 자기 마음이 한 것이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다름이다. 모든 인간의 운명을 유일신 등에 맡겨 버리는 것이 아니고 자력 종교다. 모든 힘을 자기 정신력을 발휘하면서 얻을 수 있다. 금강삼매는 일종의 정신개발이다. 나쁜 마음을 제거하고 좋은 마음을 개발하는 것이다. 나쁜 마음을 제거하고 좋은 마음을 개발하는데는 금강삼매가 으뜸이다.
마음의 현실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연의 마음 즉 의타기성依他起性이고 다른 하나는 원성실성圓成實性 즉 불성이다. 여러 인연에 의해서 생겨나는 성질의 것, 마음은 몸에 의지하고 있고 공기 등 모든 자연과 함께 하면서 한 생각 움직임, 마음이 주가 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어려가지 인연이 모아져서 한 생각 한생각을 일으킨다. 이런 것을 의타기라 한다. 마음이외의 여러 가지 사물도 인연이 모여 개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몸도 인연으로 모여진 것이므로 생이 있고 멸이 있다. 생로병사. 이 무상한 이치를 모르면 망심이 생기고, 똑같은 인생이지만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인간은 인연법으로 형성된 것이므로 태어나서 늙어가고 언젠가는 죽는다. 이것을 달관達觀해 버리면 죽으면서도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 달관하지 못한 사람은 죽으면서도 일분 일초라도 더 살려고 발버둥친다. 죽음을 앞둔 이들의 최후의 모습을 보면 갖가지 마음을 알 수 있다. 망심은 무지. 고를 발생 생사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지혜로서 관찰할줄 알아야 한다. 달관은 지혜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여기는 생사가 없다.
원성실성은 진여심. 본래 원만하게 성취된 진실성이다. 이 마음은 부처나 우리나 똑같이 있는데 이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범부중생이고 깨달으면 부처다.
이 마음을 깨닫고 찾고자 하는 것이 참선參禪이요. 수행이다. 마음을 정화하면서 올라가는 수행단계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수승한 수행은 금강삼매이며 금강은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 없다. 반대로 금강은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금강삼매는 어떤 번뇌도 박살낸다 즉 정화할 수 있다. 이 삼매에서 모든 번뇌가 정화되어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부처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 삼매가 최고의 삼매 최고의 수행 성불의 경지境地인 것이다. 돈오돈수가 여기에 해당된다. 여기에 진입하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 금강삼매경론을 요약해서 정리 한다면 네 부문으로 나눈다.
1. 經의大意를 서술하였고[述大意]
2. 經의 宗旨에 대하여 설명 하였으며[辨經宗]
3. 經의 題名에 대한 해석을 하였고[釋題名]
4. 經文을 하나하나 의심을 풀어가며 뜻을 새기었다.[消文義]
위의 1. 2. 3.은 경문 해석에 앞서서 원효대사께서 이 금강삼매경의 대의와 종지 그리고 제명에 대한 설명을 하는 부분으로서 경 전체의 사상을 간결하게 그러나 남김없이 두루 담고 있다. 아름다운 운율의 수려한 문체와 독창적이고 해박한 사상은 불교의 핵심과 원효의 불교관 전체를 알수 있는 주옥 같은 글이다. 4.消文義에서 원효스님의 주석 또한 이 글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경을 이해하기 어려운 완벽한 논전인 것이다.
이 네번째부문 科文解釋은 세 가지로 분류 할수 있다. 즉
1). 序分
2). 正說分
3). 流通分
이다. 그리고 2) 正說分은 이 경의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앞의 一品부터 六品까지는 별현으로 따로 관행을 나타낸 것이고 끝의 총지품은 의심나는 부분을 없애는 것이다. 이 별현 육품은 다음과 같다.
(1). 무상법품 : 무상관을 밝힌다.
(2). 무생행품 : 무생행을 나타낸다.
(3). 본각리품 : 본각에 의하여 사물을 이롭게 함을 나타낸다.
(4). 입실제품 : 허에서 실로 들어가게 한다.
(5). 진성공품 : 모든 행을 분별하여 진성의 공으로 나오게 한다.
(6). 여래장품 : 무량한 문으로 여래장에 듦을 나타낸다.
금강삼매경론 강의 2
此經略開四門分別, 初述大意, 次辨經宗, 三釋題名, 四消文義.
이 金剛三昧經論은 요약해서 내용을 전개하면 네 가지 항목으로 분별할수 있다.
처음은 金剛三昧經의 大意를 서술하였고, 다음은 經의 宗旨를 밝혔으며, 세 번째는 經의 題目을 解釋하였고, 네 번째는 經文의 뜻을 풀이 하였다.
[1]. 大意를 서술함
第一述大意者. 夫一心之源, 離有無而獨淨, 三空之海, 融眞俗而湛然. 湛然融二而不一, 獨淨離邊而非中.
첫번째로 경전의 근본 뜻을 서술한다면, 대저 一心의 근원이니 一心의 근원은 有와 無를 떠나서(有 無에 대한 집착을 떠나서) 홀로 청정하며 三空의 바다는 眞과 俗을 融合하여 맑고 고요한 것이다. 맑고 고요하게 眞과 俗 둘이 융합된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는 아니다. 홀로 청정하여 有執 無執의 偏見을 떠났으나 中道도 아니다.
뒤에 나올 것이지만 원효대사는 一心 一覺 一道 一味등 一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 一은 진여본성, 마음의 근원등을 의미한다. 일각은 本覺, 본래 우리들은 깨달음
을 가지고 있다. 一味 觀行 할수 있는것이 一心, 일미 관행으로 들어가면 바로 一
心 이다. 一心이 아닌것은 煩惱 妄想으로서 能所가 있게 되는 것이다. 智 따로 境 따
로 즉 능소가 있으면 어디 까지나 상대적인데 境智無二 이니까 "하나" 절대적이다.
이 하나는 一卽多 多卽一의 하나, 이 하나로 부터 삼라만상이 전개된다.
一心은 하나의 진여법성과 함께 할수 있다.
有 : 인연법, 육안으로 볼수있는 표면상에 나타난 모든 사물과 정신계를 말한다.
범부들이 보고 듣고 만질수 있는것들, 시야에 들어오는 존재들, 인연이 모여
모습이 생긴것, 형상이 있는것. "여기 있다"고 하는것. 삼라만상
無 : 모습이 없는것, 설명할수 없는 경지, 언어 도단의 경지. 이런 경지는 물질에도
있고 마음에도 있다. 有에 대한 상대적인 말, 아주 없는 것이 아니고, 형언 할수
없는 것이 아니고, 형언할수 없는 진리의 세계, 眞如. 空. 無相. 無我.
홀로 청정 : 예나 지금이나 청정하다. 연꽃에 비유 할수 있는 청정이다. 인간계에 태
어 나서 설사 죄를 지었다 해도 본심은 청정한 것이다. 天上天下 唯我獨尊
은 실달태자 혼자의 청정이 아니고 뭇 중생들의 마음의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듯이 그런 청정이다.
三空 : 三三味 三解脫 모두 같은 뜻을 가진 말이다.
1.我空 : 내몸과 더불어 마음의 아상은 인연법인 까닭에 공한 것이다. 인연으로
된 것은 극미의 모임이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2.法空 : 모든 法에는 自性이 있다. 個性 즉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질이다.
이 자성도 인연의 모임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공한 것이다.無子性空이
다
3.俱空 : 공에 대한 집착마저 다 없어저 진여본성에 계합하는 것을 말한다.
我空 法空 俱空의 三空 즉 모든 것은 실체가 없고 假有이며 空이라는 진
리의 바다는 一心의 眞如의 바다이다.
三空의 안목으로 관찰하면 모든것이 다 眞如의 세계이다. 부처의 눈에는 모든것
이 다 부처로 보이는 이치와 같다.
불교는 이 空의 이치를 철저히 이해함으로서 貪嗔痴 三毒을 스스로 정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自相과 自性이 空한 실체가 없는 존재[緣起 존재이며
空의 존재] 假有의 존재 즉 주변 조건에 의존하여 존재하고 변화해 가는 일시적
인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소유 불가능이다. 이런 존재가 변화해 가는것
을 고정적인 것으로 소유하려고 할때 집착이 강해지게 되고 고통이 따르는 것이
다. 이런 이치를 철저히 깨달으면 욕망과 번뇌를 제거하고 영원한 평화를 누리
는 것이다.
三三昧 : 1.空三昧 : 만법은 인연법인데 그 인연법을 觀하면 三三昧를 얻을수 있다.
色은 空한 것이다. 인연법이 모인 까닭에(色蘊) 空한 것이다. 물질
도 인연법이고 마음도 인연법이다.
2.無相三昧 : 소유욕. 소득심. 相의 세계는 차별이 있게 되는데 相을 떠나야 化
合이 있다. 우리 마음을 화합으로 인도하는 선정. 무차별. 평등.
有나 相에 집착하면 不平等. 요즈음 우리 사회는 극도로 모습에
집착하는 풍조가 만연. 我相이나 모든 모습에 대한 집착을 타파
하면 차별심이 없어지므로 이 세상은 평화롭고 화합된 사회가 될
수 있다.
3.無願三昧(無作三昧) : 더 이상 수행을 닦고 지을것이 없다. 더 할것 없다.
다 만족하게 되어졌다. 空의 도리가 완전히 원만하게 되어 진다. 空
을 觀하는 것이 禪定이(三昧)다. 용수보살이 자세하게 잘 설명해
놓았다.
바다를 비유법으로 쓰는 이유는 진리가 무한히 넓고 깊고 광대 무변하기 때문이다.
一心의 근원에서 볼때 二門이 있으니 하나는 眞 또 하나는 俗이다.
眞 : 眞諦. 眞如性. 원만하고 흠이 없는 진실한 진리, 性, 空, 出世間, 理.
俗 : 俗諦. 因緣法. 依他起性. 現相界. 相. 色, 世間, 事.
融合 : 統合. 化合. 無애自在. 모습에 집착하면 사물이 딱딱하게 보이지만 眞如法性으
로 보면 森羅萬象이 부드럽고 진실하고 아름답고 평등하게 보인다.
융합이란 운동경기장에서 선수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같은 행동, 일치
된 목소리로 움직인다 해도 사실은 개개인이 모두 각자의 행동을 하고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융합은 또한 솥의 발이 셋이 모두 지탱하고 있어야 솥이 균
형을 잡듯이 구성원 모두가 서로 돕고 자기 역할을 하며 화합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인연법이 그러한 것이므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하는 이치를 알아서 융합된 세
상을 이룩해가야 한다.
中道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원효대사는 중도에 빠질까봐 이것마저 경계 하엿다.
非中而離邊故, 不有之法不卽住無, 不無之相不卽住有. 不一而融二故, 非眞之事未始爲俗, 非俗之理未始爲眞也. 融二而不一故, 眞俗之性無所不立, 染淨之相莫不備焉. 離邊而非中故, 有無之法無所不作, 是非之義莫不周焉.
中道가 아니면서 또한 偏見을 떠나 치우치지 않으므로 있지(有)아니한 法은 無에도 머물지 않고, 없지(無)않은 相은 있다는것(有)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융합하였으므로 진이 아닌 事(有에 해당)는 비롯함이 없이 본래부터 俗諦인 것이고 俗이 아닌 理(無에 해당)는 본래부터 眞諦인 것이다. 진제와 속제 두 가지가 융합하면서 하나가 아니므로 眞 과 俗의 본성이 함께 서 있지(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고 染(속제 부정)과 淨(진제 청정)의 相이 갖추어 지지 않는 것이 없다. 편견을 떠났으면서도 중도도 아니기 때문에 有無의 法은 어디서나 존재 하는 것이고(만들어져 있지 않음이 없으며 --- 진여는 만든것이 아니고 그대로 존재 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의 뜻은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
無所不作을 "존재하는것" 이라 번역 하였다. "만들어져 있지 않음이 없으며"와 결국 같
은 뜻이겠지만 진여는 만든것이 아니고 본래 그대로 존재 하는 것이란 의미를 강조하
기 위해서 였다.
여기서 俗諦라 함은 有에 해당하는 현상계, 인연법으로 된 삼라만상을 말한다. 煩惱妄
想을 떼어놓고 원리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번뇌 까지를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
니 앞 뒤 문맥을 살펴보고 어떤 경우인가를 알아야 한다. 인연법을 망각하고 진여법성
을 망각 한것을 無明이라고 한다. 무명은 번뇌를 일으키는 부정한 마음이다. 번뇌도 나
름대로 모습이 있다. 善惡이란 것도 사실은 마음의 모습이다. 물론 순수한 인연법도 모
습이다. 마음도 文의 앞뒤를 보고 부정한 마음 즉 번뇌심을 말하는지 청정심, 진여심
을 가리키는지 판단 해야 한다.
모든 삼라만상은 三自性으로 나눌수 있다.
1. 邊計所執性(煩惱妄想)--- 俗諦(色 相) --- 世間
2. 依他起性(因緣法) --- 俗諦(色 相) --- 世間
3. 圓成實性(眞如法性) --- 眞諦(空 無相) --- 出世間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不一不二이다(色卽是空 空卽是色)
眞俗이 圓融無애라는 것은 煩惱心까지 넣은것이 아니고 인연법과 무애자재한 것이
一心이다. 華嚴學에서 理事無애의 뜻이다.
一心之源은 有 無를 떠나서 진제와 속제가 원융무애한 것이다.
爾乃無破而無不破, 無立而無不立, 可謂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矣, 是謂斯經之大意也.
이와 같이 진리의 세계는 (본래 진리니까) 타파하지 아니 하면서 타파하지 않음이 없으며 세우지 않으면서 세워지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가히 고정적인 진리라는 것이 없으면서도 지극한 理致이며, 그러하지 않으면서도 크게 그러하다. 이것이 이 經의 大意다.
밀가루에 비유한다면 밀가루 자체는 변함이 없으면서 풀, 국수, 과자, 빵, 부침이 등
여러가지를 만든다.
속제는 원래 비롯함이 없이 未始로 부터 속제대로 형성되어 있고 진제는 또 본래부터
진제대로 형성되어 잇다. 이 뜻은 眞 俗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본래부터 함께 해온 것
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진리는 無始無終이고 不生不滅이며 본래 존재 하는 것이다. 신
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다. 본래 우리는 이 진리와 더불어 살았고 이 세상에 와
서 이 진리와 더불어 살고 있다. 이 진리를 옳게 깨달은 사람을 菩薩 내지 부처라 하고
이 진리를 외면하고 사는 사람을 凡夫衆生이라고한다. 아무리 부자라도 이 진리를 모
르면 자만심만 있어 가지고 약자를 누르려 하고 지배하러 든다. 돈이 많고 지식이 많
아도 겸손하게 인격체를 이끌고 살아 가는것이 불교적인 삶이다. 마음을 비우면 비울
수록 우주 법계의 모든것과 화합하고 모든것을 받아들인다. 모든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 허공이다. 마음을 비운것을 허공에 비유 할수 있다. 모든 삼라만상이 허공안에서
논다. 허공은 새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 파괴되는 법도 없고 무
시무종이다. 一心을 허공에 비유 하기도 한다.
良由不然之大然故, 能說之語妙契環中, 無理之至理故, 所詮之宗超出方外. 無所不破故, 名金剛三昧, 無所不立故, 名攝大乘經, 一切義宗無出是二, 是故亦名無量義宗. 且擧一目以題其首故, 言金剛三昧經也.
一心은 진실로 如然하지 않으면서 크게 如然하기 때문에 經에서 說하는 모든 말씀이 오묘하게 진리에 契合하고 理致가 없는듯 하면서도 지극한 이치가 있으므로 금강삼매경에 말씀되어진 바는 현상계 인연법의 집착을 떠나 있는 것이다. 번뇌를 깨뜨리지(정화시키지)않는 바가 없기 때문에 金剛三昧라 이름하고 세우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에 大乘의 원리를 다 포섭하는 攝大乘經 이라 이름한다. 일체의 진리를 宗旨로 하는것이 이 두 가지(金剛三昧 攝大乘)에서 벗어남이 없기 때문에 無量의 진리를 지닌 宗이라 이름한다. 우선 하나의 제목을 든다면 으뜸가는 것을 제목으로 하여 金剛三昧經이라 한다.
不然 : 如然하지 않다. 불변이 아니다. 無常하다는 뜻이다. 인연이 모여 된것이므로 인
연이 모이면 生하고 인연이 흩어지면 滅하여 그 모습(相)이 항상 변한다.
大然 : 우주 법계의 모든 방대한 眞如法性이 변함없이 고요함을 말한다. 허공같은 원리
요. 生滅을 떠난 것이다.
모습 내면의 뿌리는 진여법성으로 無始無終이다. 一物이라고 하지만 어떤 이름으로도
맞지 않는다. 無名無相. 형용할수 없다. 언어도단 심행처멸이요 佛性이라는 상에 떨어
져도 안된다. 집착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無佛, 無聲聞緣覺 이라고도 한다
금강삼매경론 강의 3
經의 宗旨를 밝힘
第二辯經宗者. 此經宗要有開有合, 合而言之, 一味觀行爲要, 開而設之, 十重法門爲宗.
이 경의 근본요지는 널리 열어서 설명할수도 있고 종합해서 설명할수도 있다. 종합해서 설명한다면 一味의 觀行을 요지로 하고 널리 열어서 설명한다면 十重法門을 宗旨로 한다.
一味觀行 : 一心에 진입할수 있는 觀行을 말하며 眞如法性을 관찰할수 있는 수행
즉 金剛三昧를 말한다.
觀行 : 선정을 의미하며 眞諦 俗諦(우주만물 마음까지)를 관찰함을 뜻한다. 모습(相)
만 관찰하고 性을 보지 못하면 見性이 못된다.
十重法門 : 一로 시작하는 용어로 부터 내지 十으로 시작하는 용어로 법을 설명하는 항
목.
言觀行者, 觀是橫論, 通於境智, 行是堅望. 亘其因果, 果謂五法圓滿, 因謂六行備足. 智卽本始兩覺, 境卽眞俗雙泯. 雙泯 而不滅, 兩覺而無生.
觀行이라고 말하는 것은 觀은 橫的으로 논술하자면 境智에 통하는 것이요, 行은 縱的으로 實踐 修行하여 因果에 이른다. 果는 五法이 원만한 것을 말하고 因은 六行이 구족함을 말한다. 智는 곧 本覺과 始覺의 두 깨달음이고 境은 곧 眞과 俗의 대립이 없어진 것이다. 모두 없어졌지만 眞과 俗의 현상이 아주 없어진것이 아니요 본각과 시각을 깨달았지만(본래 있던 각이 드러난 것이지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無生이다.
六行 : 菩薩이 닦아가는 修行位를 말한다. 즉 十信 十住 十行 十廻向 十地 等覺位
이다. 이수행이 구족하면 佛果를 이룬다.
五法 : 淨法界와 四智를 말한다.
淨法界 : 無漏法界로서 第九識인 아마라식이 정화되어 청정한 一心의 세계를 이
룬것을 말한다.
四智 : 一心에 도달하는 최고의 지혜로서 成所作智 妙觀察智 平等性智 大圓鏡
智를 말하며 六行이 구족되어 아마라식이 정화될때 전팔식이 四智로 전
환되어 佛果를 이룬다.
1).成所作智---前五識이 정화됨으로써 발생하는 지혜.
2).妙觀察智---第六意識이 정화됨으로써 발생하는 지혜.
3).平等性智---第七말나식이 정화됨으로써 발생하는 지혜.
4).大圓鏡智---第八아뢰야식이 정화됨으로써 발생하는 지혜.
이러한 지혜(四智)는 우주 진리를 손바닥위의 구슬 보듯이 환하게 볼수
있는 지혜이다. 불타는 사지를 구족하고 三身을 구족하였으며 三身은 法
身 報身 化身을 말한다. 이들 삼신을 통하여 불타의 자비가 육도의 중생
들에게 미치게 된다.
等覺位에서 金剛三昧에 들면 四智를 얻어(轉識得智) 五法이 원만해 진다.
智 : 최고의 지혜는 四智이다.
境의 性과 相을 다 觀하는 智慧이다.
지혜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근기에 따라서 수행에 따라서 聲聞 緣覺 菩薩의 지
혜가 나타나는 것이다.
境 : 眞諦 俗諦(정신계 물질계 모두 포함, 心法 色法), 깨달음의 대상.
진여성, 의타기성, 인연법(境相 境性)
境智不異 : 우리의 지혜가 모든 진리의 세계를 바로 보아 和合을 이루어 能所가 없는
心一境性이 된것을 말한다.
우리 凡夫는 境智不異가 아니다. 마음따로 대상따로 이다. 즉 能所가 있다. 이때 마
음은 忘心이다. 智가 못되는 것이다. 이 忘心은 能然이고 대상은 所然이다. 우리 마음
이 망심으로 분별하여 境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主觀 客觀이 나뉘는 것이다.
觀察할수 있는 능력에 따라 行이 실천 된다.
成佛하기 전의 觀行은 無漏因을 쌓아 가는 것이다. 관찰의 힘이 있기 때문에 無漏因을
쌓고 四智를 얻어 물질계와 정신계의 眞如法性인 淸淨法界를 깨달아 境智不異의 세계
로 진입한다.
우리는 몸이 허락 하는한 부지런히 정진 해야 한다. 생업에도 열심히 종사하고 어려운
이웃도 돕고 부처님 법도 전하며 수행정진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本覺 : 우리는 본래부터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 본래 우리는 우주 만
법을 깨달을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나 무명이 일으킨 번뇌망상으로 가리워
져 발휘하지 못하고 잇다. 깨달음의 성능인 지혜를 본래 가지고 있다.
始覺 : 후천적으로 六行을 닦으면서 점차 깨달아 가서(凡夫覺 相似覺 隨分覺 究竟
覺) 본래 가지고 있던 깨달음의 성능인 지혜가 드러나면 우리는 본각의 자리에
이른 것이다.
無生之行, 冥會無相, 無相之法, 順成本利. 利旣是本利而無得故, 不動實際, 際旣是實際而離性故, 眞際亦空. 諸佛如來於焉而藏, 一切菩薩於中隨入, 如是名爲入如來藏, 是爲六品之大意也.
無生之行(본래 생멸리 없는 行)은 無相의 法을 깨닫는 것이고, 無相의 法은 本覺의 利(본래 구족된 진리의 세계)에 순조롭게 도달되는 것이다. 利는 이미 本覺의 利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로 동요하지 않는 不動의 실제요, 際는 이미 實際인 것이요 性을 떠나 있는 것이다. 고로 眞際 또한 空虛하다. 이성은 眞如本性이 아니라 인연으로 된 自性이다. 제불여래도 여기(진제역공)에 존재 하는 것이다. 모든 보살은 이 가운데 따라 진입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여래장에 들어 간다고 한다. 이것이 六品의 大意이다.
無生 : 無起라고도 하니, 제법의 실상은 생멸이 없음을 말한다. 생멸이 없다는 것, 즉
무생무멸과 같은 뜻이다.
無相 : 생멸 변화하는 사물을 有相이라고 함에 대하여 생멸 변화하지 않는 것을 無相이
라고 하고 때로는 有 無의 두 가지 相을 초월한 空을 가리켜 無相이라고 한다.
如來藏 : 1).妄識으로 보는경우, 煩腦藏 所知藏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六行으로 두드려
깨야함.
2).眞. 妄이 함께 공존, 8識에, 진망화합식(번뇌와 지혜가 함께 화합해서 이루
어진 마음.)
3).완전히 청정심으로, 부처의 경지, 진제와 空의 세계, 무상의 경지.
於此 觀門, 從初信解乃至等覺立爲六行. 六行滿時, 九識轉顯, 顯無垢識, 爲淨法界, 轉餘八識, 而成四智. 五法旣圓, 三身斯備, 如是因果不離境智, 境智無二, 唯是一味, 如是一味觀行, 以爲此經宗也. 所以大乘法相無所不攝, 無量義宗 莫不入之, 名不虛稱, 斯之謂歟. 合論一觀, 略述如之.
이에 대한 觀門은 처음 信解로 부터 等覺에 이르기 까지의 六行을 세우는 것이다. 六行이 원만하게 되면 第九識이 轉變해서 無垢識이 나타난다. 煩惱 없는 깨끗한 마음인 무구식은 淸淨法界[眞如의 세계]가 된다. 나머지 八識은 전환되어 四智를 이룬다. 이렇게 청정법계와 四智로 五法이 원만해지면 三身 즉 法身[진리의 몸], 報身[공덕의 몸], 化身[교화의 몸]이 여기에 구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因[六行] 果[五法]는 境과 智를 떠나지 않고 境 智는 둘이 아니라 오직 一味인 것이다. (주관 객관이 둘이 아니다.) 이와 같은 一味觀行이 이經의 宗旨이다. 그러므로 大乘的 眞理의 法相이 포섭되지 아니한 것이 없고 한량없는 진리와 종지는 거기 들어가지 아니함이 없다.(다 포함된다) 攝大乘經 無量壽經이라고 칭한것이 헛된 부름이 아니요 바로 이 경전에 합당한 이름 그대로이다. 一味의 觀行을 종합적으로 서술함은 대략 이와 같다.
六行 : 菩薩이 부처의 지위에 이르기 위해 닦은 수행자체로써 十信位, 十住位, 十行
位, 十廻向位, 十地位, 等覺位를 말한다. 이 여섯가지 位를 다 닦아서 갖추어지
면 等覺位에서 八識이 변하여 四智가 나타나고 第究識은 轉變하여 淸淨法界가
되어 五法이 원만해 지고, 진리를 깨달은 몸은 三身이 구비되는 것이다.(入實際
品에 자세히 나옴.)
第九識 : 섭론종(섭대승론 진제)에서는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 阿陀那識,
阿梨耶識, 阿滅識 등 구종의 심체 가운데 前八識은 번뇌가 있는 망식이지
만 제9의 아마라식은 청정한 심체이며 眞如性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
다.
眞諦唯識(구유식)---섭론종
玄奬唯識(신유식)---법상종은 망식이 정화되어 四智가 드러나면 청정법계가
그대로 드러나니 第九識을 따로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
第九識이 如來藏에 본래 있었는데 六行이 원만할때 나타난다
[출처] [공유]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해설- 오형근|작성자 까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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