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언어에서 윤회와 업은 불교를 상징하는 말처럼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보편화된 개념이다. 특히 업(業)은 이 말이 지닌 본래의 의의가 무시된 채, 자신의 행위가 어쩔 수 없는 것인 양 합리화하는 말로서 쓰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업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그것도 다 네가 타고난 업이다.' 등의 말을 우리는 흔히 사용하고 또 듣고 있다. 따라서 업은 당연히 제거되어야 할 부정적인 것이 된다. 업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은 불교의 교리상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업에 대한 그러한 인식이 일반화된 데에는 교리를 실제에 적용함에 있어서 잘못된 경향 때문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교리를 따지기 이전에 당장 눈에 띄는 모순도 있다. 업이라는 개념은 윤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일상적인 관념에서 업이 없는 편이 좋을 부정적인 것이라면 윤회 또한 원해서는 안 될 부정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신앙인들은 사후에도 자신의 삶이 계속되길 바라며, 그 다음의 세계에서도 더욱 좋은 신분으로 자신의 삶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불교의 교리상으로 보면 업과 마찬가지로 윤회로부터도 탈피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다. 이렇듯 불교에 있어서 교리와 현실과의 괴리는 결국 윤회와 업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적용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도의 윤회와 업
윤회사상은 인도인들의 독특한 발상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현실에서의 육신이 사라진 후에도 영원한 삶이 있길 희구한 것은 인도인만이 아닌 인류의 공통된 심정이다. 따지고 보면 영원한 삶에 대한 희구가 종교를 탄생시켰고, 어느 종교나 사후에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음을 제시한다. 그 사후의 세계는 크게 두 종류로 분류된다. 하나는 온통 행복으로 가득 찬 낙원이고, 다른 하나는 지독한 고통만이 계속되는 연옥이다. 따라서 사후에 낙원에 태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종교가 요구하는 바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개하여 현실사회에서의 인간행위와 사후세계의 여러 양상을 연결시킴으로써 인간의 행위를 자발적으로 규율코자 한 것이 인도에서 발전된 업과 윤회의 사상이다. 그래서 인간은 현실세계의 행위에 따라 사후에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아 다양한 모습의 생명체로서 다양한 세계에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다. 사후에 다시 지상에 태어날 수도 있고 달이나 태양을 포함한 천상에 태어날 수도 있다. 또는 조상들의 세계나, 신들의 세계에 태어날 수도 있다. 또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은 식물일 수도 있고 가축일 수도 있으며,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그 신분 역시 이전의 세상과는 다르다. 어떤 사후세계는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의 행위에 따라 또 그 다음 세상으로 계속 연결되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輪廻)라고 한다. 인간은 이러저러한 세상을 수레바퀴가 돌아가듯이 계속 맴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윤회의 원어인 상사라(sa sara)라는 말은 '흐르다' '움직이다'는 뜻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흘러 맴돈다'는 뜻으로서 유전(流轉)이라고도 번역된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윤회의 세계는 번뇌로 더럽혀진 인간의 생존이기 때문에, 윤회를 생사(生死)라고도 표현한다.
다른 종교의 내세관과 윤회라고 불리는 인도의 내세관이 크게 다른 점은 내세가 일회적이냐 연속적이냐 하는 점에 있다. 그 발상은 동일하지만, 기독교의 예로써 알 수 있듯이 일반 종교의 내세관은 인간의 영혼이 사후에 천국이나 연옥의 어느 한 곳에서 더 이상 다른 세계로 나아가지 않지만, 인도의 내세관은 그 영혼이 다양한 모습을 취하면서 영원히 다양한 세계를 전전한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의 내세관은 종말론이지만, 인도의 내세관은 순환론이다. 현실의 세계보다 더 좋은 세계를 전전하기 위해서는 그때 그때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인도의 전통적 신앙에 의하면 인간의 사후세계는 신들이 결정한다. 그리고 그 판단기준은 당연히 인간의 행위이다. 좋은 세계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인간이 신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그들에게 잘 보이도록 행동해야 한다. 이러한 행동을 업이라 하였던 것이다. 신들의 비위를 맞추어 좋은 사후세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최선의 행위는 조상과 신들의 은혜를 기원하고 감사하는 제사였다. 그래서 업의 원어인 카르마(Karma)라는 말도 애초에는 제사를 의미하는 말로서 쓰였다. 제사와 업은 동일한 의미였다는 것인데, 이러한 영향은 불교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불교에서는 의식(儀式)의 작법을 갈마( 磨)라고 하는데, 여기서 갈마란 카르마라는 말의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성립하기 이전 인간의 인지가 개발되는 과정에서 업의 의미도 확대되었다. 인간의 행위에 대해 보다 합리적인 탐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보통 행위라든가 행동이라 할 때는 신체적으로 나타나는 동작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인도의 사상가들은 행위는 신체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도 나타나고, 더 나아가 밖으로 표출되지 않은 의식이나 마음도 행위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소위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이 이것이다. 이는 매우 합당하고 진보적인 사고방식이었다. 행위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함으로써 업을 단순한 운명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의지의 자유라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사후세계는 신들의 의지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결정될 수도 있다는 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도사상가들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이러저러한 세계를 전전하면서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영혼을 구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최선의 방법은 그런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생사의 세계인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하였다. 업과 윤회에 대한 이런 고차원적 사고방식은 불교에서도 그대로 계승된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은 인도의 유신론적 차원을 탈피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었다. 인도의 기존 종교에서는 실제 윤회와 업을 받아들이는 입장이 숙명론적 차원을 크게 탈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윤회를 완전히 탈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 천상의 낙원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불교가 성립할 당시에도 일반 신앙인의 지배적인 관념이었다. 따라서 제12문에서 설명하였듯이 부처님은 소위 생천론(生天論)이라든가 기존의 관념을 채택하였다. 이를 채택함에는 보다 깊은 뜻이 있었다. 그 깊은 뜻이란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운명을 극복하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는 무한한 능력과 의지의 자유에 눈뜨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신앙형태에서 불교인은 업과 윤회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숙명론적 입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적 수용
불교가 업과 윤회의 사고방식을 채택함에 있어서 불교의 근본교리와 배치되는 모순에 부닥치게 된다. 윤회는 영혼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는데,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은 영혼과 같은 절대적 실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비달마불교에서는 매우 상세한 연구로써 업을 이론화하여 업설을 정립하게 된다. 불교의 업설이 체계화되기 이전에 기존의 업설은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을 지니고 있다. 첫째, 선하거나 악한 행위는 원인이 되어 행복이나 재앙이라는 결과를 야기한다는 인과율이다. 둘째, 행위의 세력이 그 과보를 받을 때까지는 행위자 속에 어떠한 형태로 존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행위자와 그 보답을 받는 자가 동일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을 반드시 사실이라고 인식할 수는 없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첫째의 조건이다. 자신의 행위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유한한 인간존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업이니 윤회니 하는 것은 현상으로부터 유추한 하나의 가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업설은 하나의 행위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하는 것이고, 이 가정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신념과 사회적 필요성에 달려 있다. 이 업이 또 윤회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전제되어야 한다.
행위와 결과에는 시간차가 있으므로, 과거의 행위와 곧 다가올 결과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연계가 있어야 한다.
죽음이 결과의 발생을 막지 못한다.
영혼은 업에 의해 구속된다.
업의 보이지 않은 힘에 있어 영혼은 자기의 원에 어긋나더라도 하나의 신체에서 다른 신체로 이동한다.
영혼의 자유는 과거의 업의 결과가 머물러 있는 한 저지된다.
이상의 전제조건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윤회와 업이 불멸의 진리로서 성립하기 위해선 어떤 행위의 영향력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은 불멸하는 어떤 존재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의 존재를 믿게 되고, 영혼의 존재 여부는 당시 사상가들의 주요 쟁점이었다. 불교는 본래부터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는 점에 교리상의 문제점이 대두되었고, 이 문제는 아직까지 근본적으로는 불식되지 않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불교 내부에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우선『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서는 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가장 넓은 의미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작용과 활동을 가리킨다. 따라서 업은 정신적일 수도 있고 물질적일 수도 있으며, 의지적일 수도 있고 비의지적일 수도 있다. 반드시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다. 둘째, 단순한 일상의 행위가 아니라 규정되어 의식화(儀式化)된 동작이다. 업의 본래 의미로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위로서의 업과 구별하기 위해 한역에서는 갈마( 磨)라고 한다. 셋째, 일반적인 의미로서 결과를 야기하는 선하거나 악한 동작이다. 즉 윤리적 종교적 가치나 반가치를 지니는 행위 전반이다.『구사론(俱舍論)』에서는 이러한 업의 성격과 종류를 면밀히 분석하고서, 업의 영향에 의한 연기의 법칙을 사용하였다. 이를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이라 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공업(共業)의 존재를 주장한 점이다. 앞에서 소개하였듯이 원래 업설은 자신이 지은 업의 결과는 반드시 자기에게 돌아옴을 전제로 한다. 이 때문에 업을 더욱 숙명론적이거나 이기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보다 냉철히 파악해 들어가면 자신의 행위는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타인의 행위 또한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우리는 경험으로써 알 수 있다. 공업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즉 공업은 사회공동의 연대책임을 고려한 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소속한 사회 내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를 자신만이 아니라 연대사회가 받으며, 마찬가지로 그 사회 내의 타인이 지은 업의 과보를 자기도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 법칙이 성립하므로 개인은 자기발전을 통해 사회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으며, 또 타인의 구제와 사회발전을 통해 자신의 구제와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업을 의지의 자유로서 또는 적극적 능동적 행위로서 이해해야 함은 이 때문이다.
영혼을 부정함으로써 야기된 윤회의 주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알라야식 연기설(제40문 참조)이 대두된다. 윤회의 주체는 바로 인간의 의식(意識)이라는 것이다. 알라야식이 행위의 모든 세력을 담고 있다가 외부로 노출되어 새로운 형태를 취한다고 본다. 다시 여래장 연기설(如來藏緣起說) 또는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 제41문 참조)이 대두된다. 윤회의 주체는 결국 진여(眞如) 또는 법계(法界)라고 표현되는 현상세계의 진상 자체이며, 더 이상 그 연유는 묻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행위의 인과관계라는 법칙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을 결정하는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제10문에서 설명한 대로 일찍이 부처님이 비현실적인 관념적 논쟁은 무의미함을 천명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서의 가치를 불교는 업설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런 업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존재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 자기 창조, 또는 자기 변혁의 가능성을 업설은 천명하는 것이며, 이를 확고한 신념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방편으로서 불교는 윤회설을 채용한 것이다. 소위 육도(六道) 또는 육취(六趣) 윤회를 제시한다. 평범한 인간들은 현세에서의 행위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계라는 여섯 세계를 맴돈다. 그러나 가능하면 이런 세계로부터 탈피하여 완전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윤회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윤회는 근본적으로 인간 의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변혁을 통해 고통의 세계인 현실이 곧바로 열반이라는 이상세계로 개조될 수 있음을 불교는 확신하고 있다.
불교의 윤회설이 인도의 다른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윤회를 인간의 내부에서 파악하였다는 점이다. 인도철학의 각 학파들은 윤회를 외적인 현상이라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역시 형상체인 인간의 육체를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육체적 고행을 수행의 방법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불교는 윤회를 생명의 무한성을 상징하는 것이라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불교는 윤회를 내적으로, 심리적으로, 의식 속에서 파악했던 것이다.
불교에 의하면 마음은 찰나적인 것이고 가장 쉽게 움직이는 것이다. 윤회 역시 생명의 움직임인 이상, 움직임을 본질로 하는 마음의 차원, 즉 의식의 차원에서 윤회는 파악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한다. 앞서 말한 대로 윤회의 주체 문제도 인간의 의식으로써 해결되는 것이다.
업의 의의
아직까지 엄존하고 있는 신앙형태로서, 많은 불교신자들이 업과 윤회를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숙명론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윤회를 외적인 현상이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의 세계이고, 따라서 어떤 좋은 보답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도 인간의 의지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행위인 의업(意業)이 중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업은 적극적, 능동적 실천행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해탈이든 열반이든 불국토든 불교의 이상은 업을 억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업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생사윤회를 고통과 동일시하고, 이 윤회의 원인이 업이라 하여, 업을 목적 달성의 장애가 된다고 간주함으로써 일상행위의 적극성이 약화되어 왔다. 그러나 현실을 극복하는 노력없이는 그 이상도 달성될 수 없다. 업이란 그러한 노력이다. 그 과정을 겪어 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결과에 입각하여 일체 행위의 무의미함을 지적함으로써 업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초래하고 있다. 더욱이 교리상으로도 궁극의 목적에 도달하면 업의 나쁜 영향은 더 이상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업의 영향은 나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개조와 발전을 위해서라면 주저 없는 노력, 즉 업이 필요하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무능을 전생의 업으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 나의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릴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회향사상(제82문 참조)은 공업으로써 그 논리성이 해명될 수 있으며, 중생구제의 서원을 위해 자진해서 고난을 감수한다고 하는 보살의 이타적 사상도 공업의 논리를 통해 성립된다. 불교의 업설 중 공업이 지닌 사회성이 대승의 회향사상이나 보살도를 유인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업설이 그 효용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복을 개인적으로 한정하지 말고 사회적 복지로 확대하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水野弘元,「業說について」,『印度佛敎學硏究』, vol. 4(1953), pp. 111∼119.
Romchandra Pandeya, Indian Studies in Philosophy
(New Dehli:Motilal Banarsidass,1977), p. 210.
佐佐木現順,『業の思想』, レグルス文庫 128(東京:第三文明社, 1980), pp. 56∼59.
정승석,「業說의 兩面性問題」,『청년여래』(如來藏佛敎硏究會, 佛紀 2525), pp. 20∼33.
☞ 출처 : 조계사 : http://www.ijogyesa.net/
[출처] [불자가 꼭 알아야 할 100가지] 윤회와 업 |작성자 별하나두리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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