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소개받은 해주입니다.
그간 제가 화엄경학을 중심으로 공부해 와서 오늘은 화엄경 수행방편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화엄경의 수행은 入法界
화엄경의 수행은 한마디로 入法界라 하고, 法界에 증득해서 들어간다 해서 증입으로 얘기합니다. 대승불교의 전반적 수행 계위를 얘기할 때 ‘信解行證(신해행증)’으로도 얘기를 하는데 거기에 마지막 증입단계를 화엄경에서는 입법계품으로 보기도 합니다.
입법계품 말씀은 우리가 많이 들어 친밀하게 느껴지는 대표적 구도자 선재동자라 하는 구법자 얘기가 있는데, 선재동자가 그 이전 품에서 설하신 가르침을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선지식들을 통해서 한 번 더 펼쳐보이는 여정이 실려 있는데요. 처음에 문수보살을 만나 신심을 견고히 해서 발심, 발보리심을 하게 됩니다.
문수보살의 가르침대로 선지식을 찾아갑니다. 덕운비구(공덕운비구) 선지식인데요, 거기서 염불해탈문을 얻어요.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여 해탈을 얻고 그 선지식 가르침대로 계속해서 53선지식(문수보살 포함)을 뵙게 되지요. 한 중앙에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을 뵙고 그 여정의 마지막이 보현보살 선지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고 다시 보현보살에게서 10종 대원, 보현행원(普賢行願)을 실천해 나가는 길을 지금도 걸어가고 있는 그 가르침을 설하는 경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화엄경의 수행은 마음을 바꾸는게 아니라 마음을 더 넓고 크게 증장시키는 것
心造諸如來(심조제여래)-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든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유심도리(唯心道理)다. 유심! 오직 마음이다. 우리 불자님들의 구경처(究竟處)는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고 ‘저희들도 부처님처럼 되어지이다’ 하는 발원을 많이 하고 계시는데 그러기 위해 수행을 한다, 즉 행을 닦는다, 달리 말하면 修心, 마음을 잘 닦아서, 마음을 찾아서...그런데 찾고 보니까 그 마음을 찾은 도인의 마음은 또 다시 無心道人이라 합니다. 마음이 없다. 무심(無心), 그러나 화엄경에서는 유심(唯心), 오직 마음이라 합니다. 그 유심도리에 의해 수행하는 말씀을 전체적으로 다양하게 설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일부만 소개합니다.
물론 화엄에서는 부분과 전체가 둘이 아닌 인드라 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부 연관되어 있는 말씀이라서, 하나가 전체고 하나 가운데 전체가 다 있는 그러한 말씀을 하고 있지요.
선지식들의 모든 가르침을 자세히 보면 다양하고 독특한 부분도 많은데 한국 불자님들은 그 모든 선지식을 칠정례(七頂禮) 아침 저녁 예불하고 사시마지(巳時摩指) 올릴 때 보면 사대보살 중심으로 신행하지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그리고 관세음보살님, 입법계품에서는 거기에 청법 대중으로만 계시는 지장보살님이 계신데, 그 지장보살님은 대원본존(大願本尊)이라 해서 큰 원의 대표지요.
보현보살이 10대원이라 해서 행원(行願)을 얘기해요. 그 원의 부분을 지장보살님에게 미뤘고, 미륵보살님은 미륵보살님의 자씨(慈氏)미륵이라는 대자(大慈)는 관세음보살님의 대비(大悲)와 합해서 대자대비 관세음보살로 대표하여 입법계품의 말씀을 받들고 실천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부분적으로 들어가 보면 각 선지식들의 가르침이 아주 다양하게 펼쳐져 있기도 합니다.
화엄경에서 보면 모든 것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화엄경 가운데 대표적 게송이고, 대표 게송이라 하여 화엄경 제1게라 하고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만약 삼세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 일체가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 이지요. 그 구절을 60권 화엄경의 다른 구절에서는 心造諸如來(심조제여래)라 하여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든다 합니다.
그 두 번역본을 합해서 보면 모든 것은 부처님이시고, 그 부처님을 만난 것은 마음이고 마음이 부처님이고 모든 것이 다 부처님 마음이니 그 모든 것의 ‘나’ 우리 중생들의 모습은? 다시 말해 마음을 얼마나 크고 넓게 쓸 것인가? 그래서 화엄경의 유심도리에 의해서의 수행은 마음을 바꾸는 게 아니고 마음을 넓고 더 크게 증장시키는 겁니다. 본래 부처님 마음이니까 그것을 얼마나 쓸 수 있는가? 마음이라는 말의 의미는 다양하게 얘기합니다. 선한 마음 악한 마음, 중생 마음, 보살님 마음, 부처님 마음 그 중의 나는 어느 마음을 주로 쓰며 살고 있을까요?
'지금 여기_ Here & Now'
법계 존재로서 우리 존재는 법성신,
부처님 마음이 중생 마음이고 지금 그대로 바로 쓰는 마음
@의상대사 화엄일승법계도
화엄경 말씀에 의하면 중생의 성품은 별도로 없어요. 불성 뿐이라고 우리가 말하고 있잖아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부처성품 뿐인데 그 부처성품을 쓰지 않고 다른 마음을 쓰고 있지요. 화엄경에서는 불성에서 더 나아가 부처님의 마음(여래심,여래성)은 온전히 지혜 마음이라 해서 여래지(如來智)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중생마음은 중생심이지만 중생성은 들어본 말은 아니죠. 불성 뿐이라는거죠. 중생심은 온전히 중생지혜와 동격이 아니죠. 주로 지혜를 못 쓰고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부처님 성품이 있긴 한데 지금 당장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서 가능성으로만 있고, 그래서 이 다음 언젠가 성불하는 것으로 발원하고 있는데요,
화엄경은 지금 여기에요. 'Here & Now' 입니다. 지금 여기 이 몸으로 바로 되는 부처님 처럼 바로 되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이 몸과 이 마음을 바로 쓰면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된다고 하는 경입니다. 그 마음을 지금 여기서 당장 활발발하게 일어나서 사용되는 그 마음을 ‘여래성기심(如來性起心)’ 여래의 성품이 그대로 일어나 있다는거죠.
부처님 마음을 지혜라고 하면 一切智智(일체지지- 가장 뛰어난 지혜)라고도 하는데,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 떠난 것은 부처님의 一切智智를 얻기 위해 떠납니다. 그것을 중생 입장에서 신심발심하여 구도자의 입장으로 떠나는 마음은 보살도라는 보살행을 통해서 실천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을 화엄교학에서는 여래성기 구득심(如來性起 求得心)이라 표현합니다. 화엄학에서는 많이 알려진 용어입니다.
나에게 부처님성품이 있고 열심히 수행하여 언젠가 금생에 성불하고 안되면 다음 생에 세세상행보살도(世世常行菩薩道)해서 구경원성살바야(究竟圓成薩婆若)한다고 길게 잡고 있잖아요?
그 세세생생을 살 때 지금은 중생으로 살고 세세생생 다 살고 난 뒤에 구경성불 하는 것보다 지금 여기에서 이 몸으로 바로 성불해서 아직도 괴로워하는 중생들과 함께 일승(부처님 세상)으로 가는 삶을 계속해서 살면 더 좋겠지요. 굉장히 끌리는 말씀인데 쉽지는 않지요.
그 마음은 여래성품이 그대로 일어나서 만덕을 다 갖추고 있는 마음이다. 그게 우리들의 본래 마음이라는 겁니다. 우리 본래 마음은 부처님 성품이 그대로 일어나 모든 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고 해서 그 마음을 쓰기만 하면 부처님처럼 사는 게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가능성이 아닌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는 마음, 우리 행동 안에 일어나고 있는, 믿고 알고 행하고 증득해 들어가는 모든 여정 가운데 언제나 일어나 있는 마음입니다. 본인이 알아차리든 못 알아차리든, 중생의 대부분은 못 알아차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마음이 항상 일어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법계가 어디냐? 화엄수행이 유심도리에 의한 수행인데, 법계에 증입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본다면 법계가 어떤 세계인가? 당연히 부처님 세계이죠. 성불하여 머무는 세계니까요. 보살님들도 문수 보현 등 불보살들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그 법계에 있는데 단지 우리가 있는 줄 모를뿐. 그 세계는 우리 중생들의 본래세계이고 본래세계는 일체유심이 불보살님의 마음이지만 우리 중생들도 가지고 있는 본래 마음이고 그래서 법계 존재로서의 우리 중생은 신라 의상대사가 이르기를 우리 존재를 법성신(法性身)이라 했어요. 평균키가 오척 쯤 되는 중생이라 해서 오척신(五尺身), 오척법성(五尺法性)이라 합니다.
법성게를 지을 때 도인과 함께 반시로 지었는데 보시는 이 글자는 고려 대장경 글자 그대로로서 하나의 그림인데 이 그림 따라 가면 위쪽 빨간 줄에 도인이 나오는데 거기 법성게 글자 210자가 함께 있어요. 이 그림을 의상대사 제자들은 이 그림 자체가 오척신이다. 키가 오척 쯤 되는 ‘나’라고 합니다. 오척 쯤 되는 이 몸을 오척법성신(五尺法性身)이라 표현합니다.
선재동자가 증득해 들어간 법계인 화엄의 세계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세계인데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입니다. 그것을 시와 그림 210자 그리고 하나의 붉은 줄 도인과 합쳐서 합시일인이라 하지만 크게 보면 네모나게 생겼다 해서 반시라 합니다. 이 반시 속에 법성게가 들어있고, 이 그림 자체는 바로 ‘나’를 그렸다는 겁니다. 해주스님을 그린 것이 아니라 개개 중생의 오척(五尺)되는 몸을 그린 겁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디 가셨나? 華嚴經을 제목으로 보면 대방광 체상용(大方廣 體上用)으로 얘기했고 불화엄경이잖아요? 부처님과 화엄(꽃으로 장엄한다) 보살세계인데 불보살세계가 제목으로 보면 佛華嚴經인데 우리나라에서는 668년부터 그려져서 지금까지 오척신을 그린 것이라고 이해했답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오척되는 몸과 마음의 중생신, 오척법성신 자체가 부처님이다. 그러면 부처님 마음이 중생의 마음이고 그것이 불성을 가진 지금 그대로 바로 쓰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쓰려고만 하면 바로 쓸 수 있는 본래마음이니까요.
'귀법성가(歸法性家)'
자기 본래 마음을 되찾고 자기 본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
화엄경에서도 여래출현(여래성기- 부처님 마음, 성품이 그대로 일어난)하신 것이 10가지로 말한 중에 마음으로도 나타나는데(여래심) 그 말씀 중에 우리 중생들에게도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 마음이 있고, 그 지혜는 반야바라밀에서 말하는 반야지혜를 포함한 모든 것을 다 아는 지혜라 해서 一切智智라고 하는 智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해서 고통에 쌓여있다고 합니다. 미혹과 망상과 집착 때문에 알지 못하고 그래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이것은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여래장 불성을 가지고 있는데 가능성으로만 가지고 있는 것과 여래성기심이 있는데 몰라서 못쓰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보죠. 예를 들어 여기 법당의 불이 환하고 밝지만 전기스위치를 켜지 않는다면 캄캄하겠지요. 전기시설이 다 구비되어 있지만 스위치를 켜야 환해지는 거죠. 스위치를 켜기 전과 후는 밝기가 다르지요. 그것은 불성 여래장이라는 의미구요. 여래성기라고 하는 여래성으로 말할 때는 불은 다 켜져서 환한데 눈을 감고 있는거죠. 그래서 캄캄하죠. 눈을 뜨면 밝아요. 눈을 감든 뜨든 똑같이 밝지요. 그것 처럼 못 깨달았을 때와 깨닫고 난 뒤에 바뀐 것은 없어요. 그렇지만 마음에는 엄청난 변화가 오겠지요. 그 마음이 여래성기심(如來性起心)이라고 하는 성기심(性起心)입니다. 그게 중생의 마음은 본래는 성기심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망상과 집착 때문에 눈감고 있어 밝은 것을 보지 못한다는 의미와 같지요.
若有欲知佛境界(약유욕지불경계) 또는 若人欲識佛境界(약인욕식불경계)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하라!
마땅히 그 뜻을 허공처럼 맑혀라!
부처님처럼 되어야 온전한 불경계를 알 수 있어요. 되기 전에 부처님 세계가 이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망상일 뿐이에요. 그러니 불불상견이라고 합니다. 허공처럼 맑히려면 망상, 집착을 없애야 하죠.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趣)
망상과 모든 집착을 멀리 여의어서
영심소향개무애(令心所向皆無碍)
마음이 향하는 바로 하여금 걸림 없게 하라!
그래서 화엄의 세계는 걸림 없는 무애자재의 세계입니다. 화엄법계는 자재하게 노닐 수 있는 세계라고 했습니다. 망상 집착을 없애고 본래마음을 찾는 것이 유심도리로 자기의 본래 마음을 찾는 것이 수행이라고 했어요. 다시 말해서 자기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것, 자기의 본래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을 의상스님은 그 세계를 법성게에서 ‘법성가(法性家)’라고 얘기하셨어요. 법성게 구절 중에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 구절이 있는데 법성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 집이 법성가(法性家), 법성의 집, 달리 말하면 ‘실제 자리’ ‘중도 자리’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얘기하지만 법성의 집에 돌아간다. 내가 법성신이고 내가 있는 집이 법성가죠. 그러니 내가 쓰는 마음도 원융한 법성 그것이 부처님 성기심이라 하는 거지요.
화엄의 수행은 입법계이고 그것을 풀면 자기 본래 마음을 되찾고 자기 본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죠. 그것이 ‘귀법성가(歸法性家)- 본래 고향으로 돌아간다’입니다. 이런 수행방편이 아주 많아서 ‘重重無盡’이라합니다. 화엄의 수행은 인드라망 같은 중중무진 세계입니다.
@ 백담사 신중단 탱화
보현관.행.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그 화엄의 모든 수행을 크게 둘로 나누어보면 보현행으로 마무리 됩니다.
보현행을 보현관행이라고도 하여 관과 행으로 나누어보는데 무슨 관을 하는가에 따라서 행이 다르게 나오겠지요. 그 둘 중 법성이라는 원융한 존재, 법성의 성품은 여래성기(如來性起)로 성기관을 하는 것. 달리 말하면 내가 본래 부처인 법성신(法性身)을 바로 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
자기 본래모습, 자기 본래부처, 법성신, 성기심, 그것을 바로 보라! 부처를 바로 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법성성기임을 보라는 거죠. 그것을 조사선에서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바로 여래자리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찰나 순간에 가능한 겁니다. 굉장히 쉬운데 엄청나게 어려운가 봐요.
어려워서 방편으로서 연(緣)따라(연기관) 보살행을 하는 것으로 공덕을 지어가고, 그 공덕이 쌓이면 불세계에 장엄을 하는 그 경계에 바로 도달되는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보현관
신심으로 발보리심 하게 하는 문수지혜가 일체지지(一切智智) 시발
먼저 이 세계로 바로 가는 것은 자신이 법성신(오척법성신)임을 바로 보면 십불(十佛)로 출현한다고 했어요. 화엄경에서 부처님은 모든 부처라는 ‘열(十)’이라는 원만수를 써서 十佛로 얘기해요. 법성게에도 보면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이 있죠. 좀 어렵지요? 예불문에도 거의 화엄이에요.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佛陀耶衆) 모두 중중무진의 華嚴(화엄)부처님이죠. 그렇게 배대하여 나누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에게 젖어 있어요. 그 법성게 마지막에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이라 하여 부처님을 구래불이라고도 했어요.
십부처님, 비로자나부처님, 십신무애, 삼불원융으로 부처님을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법성신으로 바로 보면 바로 그때 십불로 출현하지만 실은 옛날부터 부처였다고 해요. 그렇다면 못 깨달아도 옛날부터 부처냐? 아닙니다. 모든 미혹을 다 끊고 모든 덕을 다 이룬 때 부터를 구래불이라 한답니다. 그렇다면 내가 법성신인데 그것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이고 망상 부리고 안 부리고의 차이인데 내가 법성신임을 바로 보기만 하면 그 때 바로 십불로 출현하는 때라고 했습니다.
본다고 보려고 일으키는 마음도 따지고 보면 망상입니다. 망상 부리는 그 마음으로는 법성신을 못 보겠지요. 무슨 마음으로 봐야하느냐? 지혜의 마음으로 봐야 해요. 지혜가 없어 얻으려고 하는데 지혜의 마음으로 본다면 지혜가 있어야 보지요.
그런데 우리는 지혜를 갖고 있으면서 쓰지 않고 있을 뿐인거죠. 그 지혜 중에 누구나 쓰고 있는 지혜가 있는데 바로 믿음! 신지라는 믿음의 지혜입니다. 선재동자가 제일 먼저 문수보살을 만나는데 그 분은 대지문수로서 미묘하고 특수한 지혜를 가진 분이죠. 信心으로 발보리심 시키는 지혜죠. 그래서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만나자마자 發心해서 거기 있는 복성동네사람 모두가 발심하죠. 그 지혜로 그 보리마음으로 一切智智를 구하러 가는거 거든요.
신심이 없으면 마중물이 없어서 안되요. 그 마중물과 같은 지혜가 문수지혜예요.
예부터 부처라는 부분을 의상계 화엄에서는 마음호랑이 ‘心虎’라는 비유를 들어요.
어떤 사람이 꿈에 호랑이를 봤어요. 무서웠죠. 무서워서 벌벌 떨다가 깼는데 깨고 보니 진짜가 아닌 마음이 만든 호랑이였어요. 夢識이 만든 호랑이. 꿈에서는 무서웠어요. 근데 깨고 보니 안 무서워요. 자기 마음이 만든 호랑이임을 알아서 그랬거든요. 더 나아가서 보면 꿈을 꿀 때도 꿈속 호랑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이 만든 호랑이가 아닌 것이 아니에요. 꿈속 호랑이도 자기 마음이 만든 호랑이죠. 꿈 깨서 그것을 알았을 뿐이고, 꿈속에서는 몰랐을 뿐인거죠. 알고 모르고의 차이죠. 물론 단지 아는 것이 아닌 ‘요달(了達)해 알아야 된다.’고 해서 ‘요지’라고도 해요. 꿈꿀 때도 꿈에서 깨어날 때도 그 호랑이는 자기 마음이 만든 호랑이죠. 문제는 꿈을 깨어야 자기 마음이 만든 호랑이임을 아는거죠.
그래서 꿈 깨는 게 필요하고 그게 바로 發心이죠. 단지 마음 호랑이일 뿐. 예부터 부처라 함은 꿈을 깬 그 때부터 마음 호랑이인 줄 아니까 단혹(斷惑)한 이후부터 구래불이라 합니다. 이치는 쉽죠? 화엄에서는 모든 게 마음이니까요. 부처도 내 마음이고, 경도 내 마음 읽는(보는 것)거에요. 꿈을 깨든 아니든 본래 자기 모습은 그대로 부처 모습이죠.
‘화엄석재’를 지으신 설잠스님(매월당 김시습)이 인용한 중국의 천여유칙 스님 이란 분은 그 경계를 若人欲識佛境界(만약 부처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인덴 頭上安頭(머리위에 머리를 올렸다)라고 했어요. 자기가 부처인데 뭘 또 다른 부처 경계를 찾느냐 하는 거죠. 본래는 이런데, 깨닫고 나면 확실하지만, 깨닫든 못 깨닫든 자기 모습이 아닌 것은 아니에요. 단지 묘용이 달라져요.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하라! 고 하니까 거기 대고 수정염오와(누가 일찍이 더럽혔느냐?)라고 해요. 육도를 윤회해도 그 성품은 그대로다 라고 봐요.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趣) 발파구수(拔波求水) 파도는 없애고 물을 구하는 격인 겁니다. 파도가 온통 그대로 물이지 그런데 파도를 다 없애 버린다면 물이 어디 있는가? 물이 온전히 파도인데요. 우리 중생 몸 그대로 여래로 살게 끔 해주는 말이죠.
마지막으로 영심소향개무애(令心所向皆無碍) 하라! 마음이 향한 바가 모두 걸림 없게 하라- 이를 만복청산이로다 라고 덧붙여요. 즉 깨달아도 못 깨달아도 원 그대로다. 눈앞에 가득 청산이다.
깨달은 경계란 ‘봄이 오니 꽃피고 새 울더라.’ 는 거잖아요? 그러한 경계를 십불의 경계로 말하는데 내가 법성신임을 바로 알면 십불의 신통묘연이 바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그렇게 하면 더 이상 할 게 없어요. 도인 분들이나 서옹 큰스님 경계처럼 그대로 사시는 게 다 부처로 사는 겁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잠 오면 잠자고 하는거죠. 그런데 중생들은 ‘잠도 하나 못 잤나?’ 고 해요. ‘밥도 제대로 못 먹나?’ 죠. 그래서 수행방편이 필요합니다.
보현행
緣따라 공덕 지어가는 수행 방편
그렇다면 모두 화엄은 통틀어 緣따라 공덕 지어가는 수행 방편을 바라밀행이라 했어요.
6바라밀,10바라밀 속에 다 포섭시켰는데, 특히 반야지혜가 없으면 안 됨을 강조하여 반야지혜여야 보시가 보시바라밀이 되고, 지계가 지계바라밀이 되고, 선정이 선정바라밀이 돼서 반야바라밀을 기본으로 6바라밀 10바라밀 수행이 모두 연 따라 일어나는 수행방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수행이 걸림 없는 수행인데, 그것을 無碍行(무애행)이라 하고 인연 따라 나타난 수행이라도 걸림 없는 수행은 모든 존재들의 體는 온전히 같다. 심성은 하나뿐이라서. 그것을 확실히 알아 서로의 힘을 밀어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임을 잘 알라고 하죠. 그것의 기본은 심성 하나 뿐임을 바탕으로 하면요. <!--[endif]-->
선재가 찾아간 보살 선지식 중 해탈장자라는 분이 <10가지 마음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준 게 있어요. 해탈장자는 부처를 뵙고 싶으면 얼마든지 뵈요. 대단하죠. 부처님을 뵙는 마음은 부처님 마음처럼 깨끗하고 지혜로워야 뵙겠죠. 안보여요. 망상부린 만큼 안보여요. 그래서 부처님처럼 마음을 닦아야 하는데 그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어요. 그것이 해탈장자의 해탈경계인데 열 가지로 말합니다. 그래서 십신무진 중중무진입니다.
선업을 지으라!
첫 번째, 선업을 지으라 했어요. 착한 업. ‘선법으로 마음을 붙들어 두라’는 거죠.
부조자심하라! 무슨 뜻인가? 중환자를 일어나게 하는 지팡이 같은 것이 선업입니다.
이 대단한 부처님 마음 세계에 내가 나의 모습을 찾는 일을 하는 게 수행인데 첫 출발은 그 대단한 여래 성기심을 그대로 못 일으키고 미혹으로 망상 부려서 다른 말로 병든 상태죠. 병 상태(망상,집착상태)에서는 건강한 참마음을 쓰기 어려우니까 제일 먼저 신심이 있어야 하는데 신심도 내기 어려운 입장에서 기본기를 익히는 것이 바로 ‘선업 짓는 것’이라는 겁니다.
초기경전에서도 출가스님에게는 사성제 팔정도를 가르치고, 먼저 재가자에게는 시계생천(施戒生天)법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보시하고 나누는 삶, 지계, 행동도 잘 갈무리하면 생천, 천상에 태어난다.
육도윤회(六道輪廻)하는 중생 중에서 가장 복 많은 중생 세계죠.
아시다시피 교진녀를 비롯한 다섯 사문은 그 생천 하는 복을 구하고자 출가한 것은 아니죠. 그런데 고행이야말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부처님을 떠나갔다가 다시 뵙고서 팔정도 사성제 중도를 실천하죠. 복 많이 받으려고 생천하려고, 윤회에서 해탈하는 것은 이 다음 생으로 미루고 금생에 알콩달콩 잘 살고, 적당히 욕심 부리고 한다면 팔정도 사성제를 실천하기 어렵잖아요?
내가 믿으면 믿는대로 나오는 힘이 부족하다면 좋은 일부터 하라고 한겁니다. 좋은 일도 실천하기 쉽지 않아요. 대부분 마음이 손해 보려고 하지 않지요. 그게 얼마나 자기 신심의 뿌리를 굳건히 하는 일임을 잘 모르죠. 이 일을 하면 신심의 뿌리로 바뀌어요. 선근이 깊이 박히죠. 선근과 신심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뿌리를 튼튼하게 해요.
스님들은 출가자나 불자들에게 ‘참 선근이 깊다’고 말해요. 선업을 지을 마음뿌리가 깊다는 거죠. 그 선법에 의해 반드시 신심이 일어나고 발보리심으로 보리심 수행에 의해 일체지지 해탈한다는 거지요. 선근이 있다 없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출가했을 때 처음 어른스님들께서요. 거기다가 불법대기(佛法大器)는 선근이 깊어야 한다고 봐요.
법의 물(法水)로 자기 마음을 윤택하게 하라!
둘째는 법의 물 法水로 자기 마음을 윤택하게 하라! 고 했어요.
본래 마음을 찾으려면 법의 물을 줘서 마음을 윤택하게 하고, 그래야 법아(법의 씨앗)가 발아하여 보리수가 생장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메마르면 물이 없어 씨를 뿌려도 죽어요. 법을 가까이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법회를 열고 설법을 듣고 경전 보고 어록을 보고 가르침을 듣죠. 보리심을 키울 마음을 만드는 거에요. 우리 마음이 신심으로 깊어지면 발심하여 보리심을 내는데, 보리심은 앞으로 부처될 마음이고, 부처님 마음이기도 해요.
내가 접하는 대상, 육진경계에 물들지 말라!
세 번째 정치자심. 마음을 깨끗하게 다스리라!
내가 접하는 대상, 육진경계에 물들지 말라!
원래 깨끗한 마음인데 자꾸 무명에 가까이 하면 윤회 쪽으로 가게 되니 접하는 모든 대상 즉 안이비설신의근이 상대하는 색성향미촉법 육진 혹은 육근에 끌려가지 말고 자기 마음이 만든 것에 자기가 매달리면 윤회로 떨어져요. 이를 원효스님은 그래서 육정, 육근을 참회해야 한다고 해서 ‘대승육정참회문(大乘六情懺悔文)’을 지으셨어요.
거기에 ‘환호환탄환사(幻虎還呑幻師)’가 나오죠. 幻師가 요술로 호랑이를 만들어 幻虎인데, 자기가 환술로 만든 호랑이에게 도리어 잡아먹히니 환호환탄환사(幻虎還呑幻師)라 표현했어요. 모든 것은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만든 대상인 色경계, 法경계에 끌려가고 집착하고 악업을 짓고 자기 청정마음을 못쓰니까, 거기에서 물들지 말고 요동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마음이 되면 無心_염오심이 없습니다.
힘이 충분히 완성되기까지는 공덕을 계속 지어가라!
네 번째 선업을 지어 신심이 일고 발보리심이 되고 잘 생장하여 해탈로 가고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으려면, 그 힘이 충분히 완성되기까지는 공덕을 계속 지어가야 합니다. 그 모든 공덕행이 바라밀행입니다.
부처님 경계로 자기 본래 마음을 밝게 살피라!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행으로 경계로 자기 마음을 밝게 살피라 합니다.(조찰자심, 照察自心)
부처님 마음으로 본래 부처인 자기 마음을 항상 비추어 살피라고 했어요. 마중물이라는 문수대지 같은 신심의 지혜로 자기 본래 자기마음을 살피면 一切智智를 확실하게 쓸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자재와 부처님의 평등으로 육진에 자유자재하고 마음을 너그럽게 하고 항상 원래 깨끗한 마음으로 유지하면 그 자리가 바로 부처. 법계자리다. 화엄의 수행은 ‘법계 안에서 법계에 들어가는 수행’인겁니다.
육진경계란, 있다고 하는 모든 존재들! 반야심경에서도 그것이 모두 空해서 없다고 말씀하시지요. 있다고 하는 모든 존재를 일체가 오온이거나 색수상행식 아니면 육근 육경 육처 18계를 말합니다.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만나 意識이 발하여 空하고 없는데 그것을 幻으로 망상과 매달려서 成佛 못한다고 말씀하시지요.
그 점에서 다시 보면 육진경계도 육근도 사실은 마음이 만든 것으로,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화가가 자기 마음이 어떤 줄 몰라도 모든 걸 다 그려내지만 모르고 그린 세계는 모르는 세계, 다시 말해 망상으로 만들어지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화엄의 유심세계는 청정한 마음으로 일체세계를 만들기 때문에 만들어진 세계가 모두 청정하고 지혜로운 부처님 세계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마음 다스리고 살피려면 우리들 마음을 대상화 시킬 수 있어야 해요. 병들었는지 어떤지 그래야 보지요. 보고 뭐하는지 잘못되어 있는지 알아야 돼요.
우리는 항상 자기 마음으로 다른 것을 살피는 데만 써왔어요.
意根이 眼根과 함께 해서 색경계를 대상으로 살피고, 耳根이 意根과 함께 해서 소리 경계에 끄달리고, 법문을 들어도 그 법문이 법의 물에 흠뻑 젖어서 마음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 자기 意根으로 분별하죠. ‘저 법문은 괜찮네. 저 법문은 좀 이상하네, 그 전의 법사가 훨씬 잘하네.’ 이런 걸 살피며 분별망상 일으키고 있지요.
그 청정한 마음을 대상화시켜서 청정지혜의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되면 육진에서 자유자재합니다. 일단계로는 대부분은 육진에 끌려가고 요동칩니다. ‘지금 내가 훌륭하게 될 사람인데 요것밖에 못된 것은 누구누구 때문이다.’ 라고 생각한다거나 ‘더 잘 살 수 있었는데 요렇게 밖에 못사는 것은 누구누구를 만나서이다.’ 등등 자기 마음이죠. 거기에 전부 끌려가서 온갖 口業, 意業을 짓지만, 거기에 무심하면 무심도인이고 화엄에서는 그게 자유자재죠. 오히려 그것으로 마음을 계발해요.
보이는 모든 대상은 자기마음이고 거기에서 자기마음을 보는 겁니다. 마음에 안 맞는 일이 생기면 혹시 마음이 더렵혀져 있는지를 살펴보죠. 이 단계에 오면 거기에 선악이나 염정이나 염오 진망이 없어요. 거기에 끌리지 않아요. 부처님의 마음으로 일어난 것은 다 부처님 행이고 부처님 출현이에요. 부처님이 누운상 열반상 모두 부처님 행이죠. 일체 진망 염오 선악에 걸림 없이 모든 육진경에 자유자재하면 청정함을 지키려고 조심하는 활발발한 일체 모든 것에서 부처로 출현하는 행으로 나아갑니다. 그게 화엄, 불국세계장엄입니다.
마무리 하면 보통은 불성과 인과에 밝아야 한다고 합니다. 본래 성품과 인과에 밝으면 자유자재하고 동체대비로 불국세계로 가는데, 여기서는 불성을 다른 말 법성이라 바꾼거에요. 불성은 유정에게만 있는데 법성은 유정무정에 모두 있어요. 원래 자신이 법성신임을 확실하게 믿고 모든 공덕행과 보살행은 인과법에 맞아야 하니까 그렇게 공덕 지으면 자타일시 성불도로 다 행복합니다.
[출처] 화엄경의 수행_20180624,해주스님,상도선원|작성자 자비산림 상도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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