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상(華嚴思想)
(1) 화엄사상의 위치
(2) 화엄경의 개요
① 경의 이름(經名)
② 경이 설해진 때(說時)
③ 설주(說主)와 설처(說處)
④ 경의 종류
(3) 화엄교학의 역사
(4) 화엄경의 중심사상
① 법신불(法身佛)사상
② 보살사상
③ 유심(唯心)사상
④ 법계(法界)연기사상
⑤ 정토(淨土)사상
화엄경 해설
제1강 화엄학의 범주와 사상 개요
제2강 화엄경의 편찬과 유통
제3강 화엄경의 구성 조직
제4강 화엄경의 내용 -초회 6품
제5강 화엄경의 내용 -제2회 6품
제6강 화엄경의 내용 -해인삼매
제7강 화엄경의 내용 -제3회 6품
제8강 화엄경의 내용 -제4회 4품
제9강 화엄경의 내용 -십바라밀
제9강 화엄경의 내용 -십바라밀
제11강 화엄경의 내용 -제6회 십지품
제12강 화엄경의 내용 -십지보살행
제8강 화엄경의 내용 -제7회 11품
제14강 화엄경의 내용-여래출현·제8회 이세간품
제15강 화엄경의 내용-제9회 입법계품
제15강 화엄경의 내용-보현행원품
제17강 화엄경의 중국 전래와 연구
제18강 화엄경의 연구
법성게 강의
화엄사상(華嚴思想)
(1) 화엄사상의 위치
화엄사상은『화엄경(華嚴經)』을 소의로 해서 성립ㆍ전개된 사상이며『화엄경』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해서 불교사상사에서 차지하는 그 의의가 자못 크다고 하겠다.
첫째, 화엄경은 시간상으로 보면 붓다가 성도하신 후 2ㆍ7일에 설한 경이며, 중생들의 근기를 고려하지 않고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설한 해인삼매정중설(海印三昧定中說)이라고 하는 점이다.
둘째, 공간상에서 보면 양적으로 방대하여 80권이나 된다.
셋째, 설법상에서 보면 설주(說主)와 설처(說處)가 다양하다. 붓다는 해인삼매에들어 광명만을 놓고 있고, 붓다를 대신해서 여러 보살들이 법(法)을 설하고 있다. 설법의 장소를 보면 지상ㆍ천상 그리고 다시 지상의 순서로 자리를 옮기면서 7 곳에서 설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넷째, 설법의 내용이 매우 다양하다. 경의 이름에서만 보면 부처(佛)만을 설하는 경인 듯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불신(佛身)사상ㆍ보살(菩薩)사상ㆍ유심(唯心)사상ㆍ연기(緣起)사상ㆍ정토(淨土)사상 등이 고루 설해지고 있다. 그러므로『화엄경』을 여러 사상의 보고(寶庫)라고도 한다.
다섯째,『화엄경』을 시간상에서 보면 성도 후 2ㆍ7일 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붓다의 음성경(音聲經)이었다. 그 음성경이 제자들의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던 구전경(口傳經)의 시대를 거쳐 문자화되어 게송경(偈頌經)으로 나타난 것은 서기를 전후한 시대였다.
이 시대를 우리는 초기 대승불교시대라고 한다. 반야경(般若經)ㆍ법화경(法華經)ㆍ무량수경(無量壽經) 등 소위 초기 대승경전들과 함께 문자화되어 나타난『화엄경』은 소승불교와는 그 사상성을 달리하고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소승불교사상의 중심과제가 인간 고(苦)의 원인규명과 그 고에서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화엄경의 중심사상(대승불교사상)은 인간 석가모니불에 대비되는 영원불멸의 부처가 무엇이며, 어떻게하면 그 부처가 될 수 있을까라고 하는 것인데 그 해답으로써 깨달음〔覺〕과 실천행〔行〕이 원만한 보살의 원행(願行)이 제시되고 있다.
(2) 화엄경의 개요
① 경의 이름(經名)
화엄경이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약명(略名)이고 산스크리트어[梵語]로는 Mah vaiplya-buddha-ga a-vy ha-s tra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大)는 소(小)에 대한 상대적인 대(大)가 아니라 절대적인 대(大), 상대가 끊어진 극대(極大)를 말한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한 절대(絶對)의「大」라고 할 수 있다. 방광(方廣)이란「넓다」는 뜻인데, 특히 공간적으로「넓다」는 뜻이다. 따라서「대방광(大方廣)」이란 크고 넓다는 뜻으로 붓다를 수식하는 형용사다.
그러므로 대방광불(大方廣佛)이란 한량없이 크고 넓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붓다를 말한다. 그 붓다는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고 한다. 비로자나불이란 산스크리트어 바이로차나(vairocana)를 중국인들이 그 소리에 따라 적은 것인데 광명변조(光明遍照)라는 뜻이다.
『60화엄경』의 노사나불품(盧舍那佛品)에서는 이 소식을 불신충만제법계(佛身充滿諸法界)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화엄(華嚴)이란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이다. 화엄을 산스크리트어로는 Ga a-vy ha라고하는데, Ga a란 잡화(雜華)라는 뜻이고, vy ha란 엄식(嚴飾)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화엄이란 잡화엄식(雜華嚴飾)이라는 말 그대로 가지가지의 꽃을 가지고 장엄한다는 뜻이다.
『화엄경』「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에서는 "부처님께서 마가다국의 적멸도량에서 정각을 이루셨는데, 그 곳은 금강(金剛)으로 꾸며져 있고 많은 보배와 가지가지의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화엄경』을 잡화경(雜華經)이라고도 하는 데, 잡화(雜華)라는 말이 바로 위의 경구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요약해서 말하면『대방광불화엄경』은 광대무변하게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萬德)과 가지가지의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이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법화경(法華經)과 화엄경을 들 수 있는데, 법화경이 법(法)을 설하는 경전이라면 화엄경은 불(佛)을 설하는 경이라고 할 수 있다.
불(佛)을 설(說)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전지전능하며 무소부주(無所不住)한 붓다, 즉 비로자나불의 불가사의한 힘(不思議神力)과 불가사의한 세계(世界)와 불가사의한 작용(不思議用)과 불가사의한 공덕(不思議功德) 등을 설하는 경(經)이라는 뜻이다.
위에서 말한 비로자나불의 신력(神力)과 세계(世界)와 작용(作用)과 공덕(功德)의 4가지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결코 헤아려 알 수 없다고 한다. 그 소식을 낙업광명천왕(樂業光明天王)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부처님의 경계는 참으로 깊고 깊어 생각하기조차 어려워라. 깨닫지 못한 중생들 어찌 헤아려 알 수 있을까?"
신라의 의상(義湘)스님도 부처님(法身佛)의 세계는 깨달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경계( 智所知非餘境)며, 10부처님(十佛)이나 보현보살(普賢菩薩)과 같은 대인(大人)들만이 알 수 있는 경계이지, 중생들이 감히 짐작해서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했다.
불(佛)을 설한다는 두번째 뜻은 앞에서 말한 불가사의한 신력과 세계와 작용과 공덕을 갖춘 비로자나불이 되는 길(道)에 대해 설한 경(經)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무명에 덮히어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중생이 한 걸음 두 걸음 닦아 나가 52단계를 거쳐 마침내 부처가 되는 과정, 즉 보살의 길(菩薩道)을 설명하는 경이라는 뜻이다.
② 경이 설해진 때
화엄경은 언제쯤 설해 졌으며 설해진 장소는 어디일까. 성도후 붓다에 의해서 직접 설해졌을까. 그렇다면 (大本)화엄경은 왜 붓다가 직접 설하지 않고 여러 보살들이 대신 설하는 형태로 되어 있을까라고 하는 등의 물음에 대한 답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화엄경의 설시(說時)에 대해서『60화엄경』의 「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과「십지품(十地品)」에서는 "시성정각(始成正覺)"의 때(時)로,「이세간품(離世間品)」에서는 "성등정각(成等正覺)"의 때라고 전하고 있다. 즉, 화엄경은 붓다가 "처음 정각을 이루신 때" 혹은 "등정각을 이루신 때"에 설해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세친(世親: 400∼480)의『십지경론(十地經論)』에 인용된『십지경(十地經)』이나 시라달마(尸羅達摩)가 번역한『십지경』에서는 이 경의 설시(說時)를 "성도미구2ㆍ7일(成道未久二七日)"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십지경』은 붓다가 성도한 후 오래지 않은 제 2ㆍ7일에 설했다는 뜻이다.
성도 후 처음 7일은 법락(法樂)을 자수용(自受用)하시고, 제 2ㆍ7일에 이 경(經)을 설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말하는『십지경』은 대본 화엄경의「십지품」에 해당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중국 화엄종의 제 3조로 불리우는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은 화엄경을 "해인삼매정중설(海印三昧定中說)"이라 말하고 있다. 즉, 화엄경은 붓다께서 성도하신 후, 해인삼매 속에서 중생의 수준에 관계없이 깨달으신 진리의 내용을 그대로 설하신 것이라고 했다.
천태대사 지의(智 : 538∼597)는 5시 8교판(五時八敎判)에서 제 1에 화엄시(華嚴時)를 두고 있다. 즉, 화엄경은 붓다가 성도한 후 제 3ㆍ7일에 설하신 경이라고하는 뜻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화엄경은 붓다가 성도하신 직후, 혹은 제 2ㆍ7일에, 혹은 제 3ㆍ7일에 설하신 경(經)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대본 화엄경의 설시(說時)를 성도 직후, 혹은 제 2ㆍ7일 혹은 제 3ㆍ7일로 보는 데는 다소의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불교경전은 음성경(音聲經)과 송경(誦經)의 과정을 거쳐 문자경(文字經)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음성경이란 붓다께서 설하신 소리 경을 말하며, 송경이란 제자들에 의해서 입에서 입으로 독송되어 오던 구전경(口傳經)을 말하며, 문자경이란 체계화된 형태의 문자로 기록된 경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들이 보는 경전들은 대개 이와 같은 3단계를 거쳐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화엄경』의 완본(完本) 즉 대본경(大本經)에는 60화엄ㆍ80화엄ㆍ장역화엄(藏譯華嚴)의 3가지가 있는데, 이들 화엄경은 처음부터 하나의 단일 경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단행본의 경전들을 한데 모아서 편찬한 것이다.
예를들어『60화엄경』의「십지품」은『십지경(Dasabhumika-s tra)』에,「명호품(名 品)」과「광명각품(光明覺品)」은『도사경』에,「입법계품」은『간다뷰-하(Ga avy ha)』에,「성기품」은『여래흥현경(如來興顯經)』에 해당한다. 이들 경전들은 일찍이 인도나 중앙아시아에서 단행본으로 유행하고 있었는데 대본화엄경의 경우 편찬자의 구상에 따라 화엄경의 각 품으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이들 경전을 역경사상(譯經史上)에서 보면 2세기 초에는 지루가참(支婁迦讖)에의해서 이미『도사경』이 번역되어 있었고,『간다뷰-하(Ga havy ha)』와『십지경(十地經)』은 3세기 중엽 이전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용수(龍樹:150-250년경)의『대지도론(大智度論)』과『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는 이 2경(經)이 수회에 걸쳐 각각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본화엄경은 노산(盧山) 혜원(慧遠: 334∼416)의 제자인 지법령(支法領)이 392년에 서역(西域)에서 그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구해서 418년에 중국에 가져 온 사실을 보면 400년경 이전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산스크리트어 원전의 화엄경을 지법령이 418년에 중국에 가지고 왔고,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중심이 되어 421년에 번역을 마치니『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60권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마가다국의 붓다가야에서 성도한 후 제 2ㆍ7일에 설하여진 단행본의 화엄경전류(華嚴經典類)들이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421년에 대본(大本) 화엄경으로 성립되게 되었다.
③ 설주(說主)와 설처(說處)
화엄경은 그 구성상 몇 가지의 특징이 있다. 여기서 편의상『60화엄경』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이 경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은 설법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회(各會)마다 붓다는 미간백호(眉間白毫) 등 신체의 각 부위에서 광명(光明)만을 놓고 있고, 붓다를 대신하여 여러 보살들이 법(法)을 설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2품(二品)만은 예외다. 제25「심왕보살문아승지품」과 제30「불소상광명공덕품」만은 보살이 질문을 하고 붓다가 그 답을 하고 있다.
둘째, 설법의 장소가 다양하다는 점이다. 지상의 적멸도량(寂滅道場)을 위시해서 천상의 도솔천(兜率天)에 이르기까지 그 장소는 다양한데, 7 곳에서 8 번의 설법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보광법당(普光法堂)에서는 2번의 설법이 있게 된다.
셋째, 설법의 장소(說處)가 철저하게 보살의 수행 계위(階位)를 염두에 두고 구상되었다는 점이다. 화엄교학에서는 보살의 수행 계위를 보통 52단계로 나누고 있다. 이 경의 서분(序分)인 제1 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를 빼놓고 제2 보광법당회(普光法堂會)로부터 제8 서다원림회(誓多園林會)까지에 보살의 52계위를 배당시키고 있다.
여기서 이 경의 설처(說處)와 설주(說主)를『60화엄』에 의해서 살펴 보면, 그 설처는 제1 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ㆍ제2 보광법당회(普光法堂會)ㆍ제3 도리천궁회( 利天宮會)ㆍ제4 야마천궁회(夜摩天宮會)ㆍ제5 도솔천궁회(兜率天宮會)ㆍ제6 타화천궁회(他化天宮會)ㆍ제7 중회보광법당회(重會普光法堂會)ㆍ제8 서다원림회(誓多園林會)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설주는 이 설처의 순서대로 보현보살(普賢菩薩)ㆍ문수보살(文殊菩薩)ㆍ법혜보살(法慧菩薩)ㆍ공덕림보살(功德林菩薩)ㆍ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ㆍ금강당보살(金剛幢菩薩)ㆍ보현보살(普賢菩薩)ㆍ문수, 보현보살로 되어 있다.
④ 경의 종류
현존하는 화엄경에는『60화엄경』ㆍ『80화엄경』그리고 티벳어역인『장역화엄(藏譯華嚴)』등 3가지 종류의 완전본과 화엄경의 일부분인 입법계품(入法界品)만을 번역한『40화엄경』이 있다. 이들 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 60화엄경』: 위에서 말한 4가지『화엄경』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359∼429)에 의해서 번역된『60화엄경』이다.『60화엄경』의 원본이 처음 발견된 것은 현재 중국의 화전현(和田縣)이다. 현재의 화전현은 중국 서북부의 신강성(新彊省) 자치지구(自治地區)에 속해 있다. 옛날에는 이곳을 우전(于 : Ho-tan)이라고 불렀는데 1959년에 화전현으로 개칭했다.
법현(法顯: 339∼420)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곳 우전은 옛날부터 불법이 크게 유행해서 스님들과 일반인들은 물론 국왕까지도 불교를 신봉해서 6재일(六齋日)을 받들어 지키고, 1년에 한번씩 행상(行象: 붓다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사)을 거행했다고 한다.
60화엄의「후기(後記)」,『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권9,『화엄경수현기(華嚴經搜玄記)』권1 등에 의하면 그와 같이 불교가 성행하던 우전(于 )에 한 사람의 중국인 구법자가 찾아왔다. 지법령(支法領: 생몰연대 미상)이었다. 그는 우전국(于 國)에 머무르면서 이 나라의 동남쪽 깊은 산에 많은 대승경전(大乘經典)이 비밀리에 숨겨져 있다는 얘기를 듣고 국왕에게 간청해서『화엄경』의 전분(前分)「3만 6천게(三萬六千偈」의 산스크리트어 본[梵本]을 장안(長安)으로 가져 왔다.
화엄경「3만 6천게」를 장안에 가져오기는 했으나, 그것을 중국어로 번역할 사람이 없어 고민하던 중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Buddhabhadra 359∼429) 즉 각현(覺賢)을 만나게 되었다. 각현이 장안에 온 것은 서기 406∼7년 경이었는데 그 때 장안에는 401년에 이미 들어 와 있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청정한 계율 생활을 하며 선관(禪觀)을 닦고있던 수행자 각현은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궁녀들의 환대 속에 지내던 구마라집 내지 그 교단과 마찰이 생겼고, 그러므로 해서 장안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추방당하게 되었다. 장안에서 추방당한 각현(覺賢)과 그 제자들은 411년 노산(盧山) 혜원(慧遠: 334∼416)을 찾아가 그 곳에서 1년 정도 머무르면서 선경(禪經)을 번역하다가 413년 2월 동진(東晋)의 수도 건강(建康)에 있는 도량사(道場寺)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때 우전(于 )에서『화엄경』 산스크리트어 본(本)을 가지고 건강에 와있던 지법령(支法領)은 각현을 찾아가『화엄경』의 번역을 부탁하게 되었다.
각현은 동진의 강희(康熙) 14년(418) 3월 10일 번역을 시작해서 원희(元熙) 2년(420) 6월 10일에 마치니 2년 3개월에 걸쳐 이루어진 대작업이었다. 번역본과 산스크리트어본을 다시 대조해서 교정작업을 완전히 끝낸 것은 영초(永初) 2년(421) 12월 28일이었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각현에 의해 번역된『화엄경』은 60권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60화엄이라고 부르며, 동진때 번역되었기 때문에「진역(晋譯)」이라 부르기도 하며, 그후 새로 번역된 신역(新譯)에 대한 대칭으로「구역( 譯)」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60화엄경』은 7처(處) 8회(會) 34품(品)으로 되어 있다.
㉯『80화엄경』: 당(唐)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대승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화엄경』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화엄경』의 완전한 산스크리트어본과 그것을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고 있던 중 마침 우전국(于 國)의 실차난타(實叉難陀: Siksananda 652∼710) 즉 학희(學喜)가 화엄경 산스크리어본 4만 5천 송(頌)을 가지고 장안(長安)에 왔다. 학희(學喜)는 695년에 대편공사(大遍空寺)에서 번역을 시작해서 699년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마치니, 그때 보리유지(菩提流志)와 의정(義淨)은 산스크리트어본을 읽고 현수법장(賢首法藏)은 그것을 필사했다.
번역이 끝나자 측천무후는 친히 그 서문을 지으니 현재 이 경의 첫머리에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60화엄』을 수정 보완해서 80권본으로 만드니, 이것을『80화엄』이라 부르며, 당대(唐代)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경(唐經)이라 부르기도 하고, 구역( 譯)에 대한 대칭으로 신역(新譯)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신역은 구역과 비교해 보면 문장이 부드럽고 내용도 구역이 8회(會) 34품(品)인 데 비해 9회(會) 39품(品)으로써 보다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40화엄경』: 이 경은 완전본이 아니라 화엄경의 일부분인 입법계품(入法界品)만을 떼어내어 번역한 부분경(部分經)이다. 이 경은 남천축(南天竺) 오다국(烏茶國)의 사자왕(師子王)이 화엄경의 산스크리트어본을 당(唐)의 덕종(德宗)에게 보낸 것을 반야(般若: Praj )삼장이 798년에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화엄경 대본(大本)의 최후 부분인「입법계품(入法界品)」만을 보완수정한 것으로써「입불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入不可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이 본래의 이름이다.
신역 화엄경보다도 약 100여년쯤 후에 번역된 이『40화엄경』에 반야(般若)가 보현(普賢)의 10종대원(十種大願)과 서방 정토사상(淨土思想)적인 내용을 첨가한 것은『화엄경』의 신앙성과 연결시켜 볼 때 그 의의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 화엄교학(華嚴敎學)의 역사
『화엄경』은 샤카무니 붓다가 깨달으신 진리의 내용을 그대로 설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과 같은 범부 중생으로서는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렇지만 여기에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화엄교가(華嚴敎家)들에 의해서 쓰여진 주석서가 그것이다.
복잡하고도 난해한 화엄경의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체계화시킨 화엄의 조사(祖師)로서, 5조설(五祖說)ㆍ7조설ㆍ10조설등이 있으나, 여기서는 화엄경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주석서를 중심으로 화엄교학의 역사를 살펴 보기로 한다.
① 인도에서 화엄경을 부분적으로나마 체계적으로 연구ㆍ분석한 최초의 사람은 용수(龍樹, Nagarjuna : 150∼250)다. 그는 붓다가 열반하신 6ㆍ700여 년 후에 활동한 사람으로서 화엄사상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사상의 전반에 걸쳐서 괄목할 만한 연구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후대에 8종(八宗)의 조사로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다. 화엄과 관계되는 그의 저술로는『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1권이 있다. 다음 인도에서의 화엄교가로서 또 한 사람 세친(世親, Vasubandhu : 400-480)이 있다. 그는『십지경론(十地經論)』을 지었는데 이 책은 중국에 전래되어 지론종(地論宗)의 모태가 되었다. 그에게는『십지경론』이외에『정토론(淨土論)』이 또 있는데, 여기서 세친은 화엄의 연화장세계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둘이 아니며, 화엄경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극락세계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서로 다르지 않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② 중국에서의 화엄교가로는 첫째 두순(杜順 : 557-640)이 있다. 중국 화엄종의 초조로 불리우고 있는 두순은 학문적인 이론가나 저술가라기 보다는 실천을 중요시한 두타행자(頭陀行者)였으며 보현행자(普賢行者)였다. 그의 저술로 법계관문(法界觀門)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고 법장이나 징관의 저술에 인용되고 있을 뿐이다.
지엄(智儼 : 602-660)은 중국 화엄종의 제 2조로 불리고 있는데, 그는 화엄경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화엄교가였다. 그의 화엄 관계 저술로는『화엄경공목장(華嚴經孔目章)』4권,『50요문답(五十要問答)』2권,『일승십현문(一乘十玄門)』1권,『육상장(六相章)』1권과『화엄경수현기(華嚴經搜玄記)』9권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수현기(搜玄記)』는『60화엄경』에 대한 최초의 주석서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법장(法藏 : 643-712)은 현수(賢首)국사 또는 향상(香象)대사라고도 불리우는 인물로써 화엄교학의 체계를 완성한 사람이다. 그가 남긴 화엄관계의 중요 저술로는『화엄5교장(華嚴五敎章)』1권,『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1권,『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등이 있다. 그가 신라 의상에게 보낸 현수국사기해동서(賢首國師寄海東書)는 당시 한국과 중국과의 문화교류 내지 화엄사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청량대사 징관(澄觀 : 738-835)은 화엄교학 뿐만 아니라 천태(天台), 율(律), 선(禪)은 물론 외전(外典)에도 박학다식했던 사람이다. 그는 화엄의 법계연기의 교의(敎義)를 4종법계(四種法界)로 체계화했으며 교(敎)와 선(禪)의 일치(一致)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 )』80권을 썼는데 이것은『당경(唐經)』에 대한 주석으로써『80화엄경』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지침서가 될 수 있다.
다음 규봉 종밀(宗密 : 780-841)은 중국 화엄종의 제 5조로 불리우는 인물로서『보현행원품수소초(普賢行願品隨疏 )』6권을 지었으며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했다.
③ 신라에 있어 주목할 만한 화엄사상가로는 자장(慈藏)과 의상(義湘)이 있다.
자장은 신라 선덕여왕 5년 즉 636년에 입당(入唐)했다가 643년에 귀국해서 화엄교학과 화엄신앙을 홍포했다. 화엄경을 강설하기도 하고 오대산을 문수도량으로 만들어 화엄사상을 신앙화하는데 노력했다. 이런 점에서 한국불교에 있어 화엄사상과 화엄신앙의 초조는 자장으로 재정리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의상(義湘 : 625-702)은 중국 화엄종의 제 2조인 지엄 문하에서 수학한 후 귀국해서 10대 제자를 양성하고 화엄10찰(華嚴十刹)을 건립하는 등 화엄사상의 홍포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지은『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신라시대 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조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연구 전승되어 오고 있다.
고려시대의 화엄사상가로 균여가 있다. 균여(均如 : 923-973)도 자장과 같이 교학과 신앙을 동시에 했던 사람이다. 그는『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를 위시한 5부 18권이나 되는 저술을 현재까지 남기고 있고 보현보살의 10종 대원을 11수의 향가로 만들어 일반 민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했다.
균여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화엄가로서 보조국사 지눌(知訥 : 1158-1210)이 있다. 그에게는『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3권이 현존하고 있다.
조선조에는 숭유배불정책 때문이었는지 특기할 만한 화엄관계의 저술은 보이지 않는다. 김시습(金時習)의『화엄법계도주병서(華嚴法界圖註幷書)』가 있고 연담유일(蓮潭有一)의『현담사기(玄談私記)』2권이 있을 정도다.
④ 일본 화엄사상사에서 우리나라와 관계되는 것으로써 주목되는 것이 3가지쯤 있다. 첫째 일본에 화엄 전적을 전한 최초의 사람은 누구이며, 일본 화엄에 있어 초강(初講)의 조사인 심상(審祥)의 국적은 어디인가.
둘째 일본에 유포되어 있는『화엄오교장』의 화본(和本)과 송본(宋本)은 고려 균여가 말하고 있는 연본(鍊本)과 초본(草本)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셋째 고산사(高山寺) 명혜(明惠 : 1173-1232)가『화엄연기(華嚴緣起)』의 주인공을 신라의 원효와 의상으로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 등이다.
(4). 화엄경의 중심사상
『화엄경』의 사상과 우리들이 소위 말하는 화엄사상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화엄경』의 사상이 말 그대로 화엄경에 설해 지고 있는 사상을 말하는 것이라면, 화엄사상은 화엄가(華嚴家)들에 의해서 체계화되고 전개되어온 사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전자보다는 후자 쪽의 뜻이 명확하여 이해하기는 쉽지만, 그 사상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화엄경에 있고, 화엄경의 내용은 화엄가의 견해가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불설(佛說) 그대로라고 하는 점에서 전자가 가지는 의미는 자못 크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화엄사상보다는『화엄경』의 사상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화엄경의 사상은 다음과 같이 크게 5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① 법신불사상(法身佛思想)
― 부처란 무엇인가 ―
법신불(法身佛)이란 "법(法)을 몸으로 하는 붓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법(法)이란 진리(眞理)를 말한다. 그러므로 법신불이란 "진리를 몸으로 하는 붓다", "진리의 붓다"라는 뜻이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vairocana)이라고 한다. 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몇 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 비로자나 법신불은 어떤 모양이나 색깔이 없다. 즉, 무상(無相)이며 무색(無色)이다.
둘째, 법신불은 아니계신 곳이 없다. 온 법계에 충만해 있어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즉, 무소부주(無所不住)다.
『화엄경』에서는
부처님 몸 법계에 가득하시니(佛身充滿於法界)
중생들 앞에 항상 계시네(普現一切衆生前)
인연따라 어디에나 나타나시니(隨緣赴感靡不周)
언제나 이 보리좌에 항상 계시네(而恒處此菩提座)
라고 설하고 있다.
비로자나(vairocana)는 광명변조(光明遍照)라는 뜻이다. 태양의 광명(光明)이 온 세계를 두루 비추는 것과 같이 법신불은 온 법계에 충만해 있다. 충만해 있으면서 와도 온 곳이 없고, 가도 가서 머무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셋째, 법신불은 그 능력이 부사의 해서 불가능한 일이 없다. 화엄경「여래광명각품(如來光明覺品)」에서는
한 몸(一身)을 무량신(無量身)으로 나투기도 하고
무량한 몸(無量身)을 다시 한 몸으로 만들기도 하면서
중생들의 성질을 모두 알기에 그를 따라 온갖 곳에 다 나타나시네.
라고 설하고 있다.
또「십지품(十地品)」에서는
날아가는 새가 허공을 가듯 석벽(石壁)을 지나갈 수 있고, 땅 위를 걸어가듯 물위를 갈 수 있다. 또 물 속을 들어가듯 땅 속에도 그렇게 갈 수 있다.
고 설한다.
넷째, 법신불의 공덕은 무량하다.「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에
법신불의 공덕은 불가사의해서 보는 사람은 누구나 번뇌가 다 없어지고
환희의 마음이 솟아난다.
고 하며,「보왕여래성기품」에서는
해가 떠서 광명이 비치더라도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중생은 광명을 보지 못한다. 육안(肉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앞을 보는 사람과 똑같이 광명의 이익을 받는다. 그와 같이 사견(邪見)이나 무지(無智)에 빠져 신심안(信心眼)이 없기 때문에 법신 부처님의 지혜광명은 보지 못하더라도 누구나 그 공덕을 입으며 살아간다.
고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이 법신불의 기능이며 작용이다. 다시 요약하면 법신불은 모양도 색깔도 없다. 태양광명과 같이 법계(法界)에 충만해 있어 아니 계신 곳이 없지만 생(生)한 일도 없고 멸(滅)하는 일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신통이 자재하여 못하는 일이 없으며, 그 공덕 또한 무량해서 법신의 광명을 한번만 봐도 부처님의 지혜가 얻어져 생사를 해탈할 수 있다고 한다.
다시 요약해서 말하면 법신불은 전지(全知)하고 전능(全能)하며 무소부주(無所 不住)한 존재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일까. 불교 교학에서는 그것을 법(法)이라고도 하고, 제법의 실상(諸法實相)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우주의 법칙이며, 자연의 섭리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도리(道理)라고도 할 수 있다.
제법의 참모습(實相)과 사람의 도리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법칙을 자각하신 분이 인간 샤카무니 붓다이다. 그 법의 자각에 의해서 싯다르타 태자는 붓다가 되었고, 붓다에 의해서 자각된 그 법을 우리는 법신불이라고 한다.
이렇게 설명하면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여호아신(神)이나 알라와 다를 바가 없지않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유일신교의 신은 만물을 창조하거나 인간을 심판하여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일을 한다지만, 법신불은 무공용(無功用)이라는 점이다. 무공용(無功用)이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의지를 갖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태양광명과 같이 온 세계를 두루 비출 뿐이다. 무공용이기 때문에 법신불은 배타적이거나 독선적이지 않다.
② 보살사상(菩薩思想)
― 어떻게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가 ―
보살사상이란 우리와 같은 범부중생이 대자재한 해탈의 법신불을 추구해 닦아가는 수행의 길과 실천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菩薩)이란 무슨 뜻인가.
보살이란 보리살타(菩提薩 : Bodhisattva)의 약어(略語)이며 음역(音譯)이다. 구역(舊譯)에서는 도중생(道衆生)이라 번역하고 있고 신역에서는 각유정(覺有情)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살이란 각(覺)을 구하는 중생, 깨달음을 구하는 유정(有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각, 즉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서 정진하는 자(者)를 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보살에는 ㉮구도(求道)의 보살 ㉯서원(誓願)의 보살 ㉰여래(如來)의 활동자로서의 보살 등이 있다.
여기서㉮ 구도의 보살이란 선재동자(善財童子)와 같이 도(道)를 구하기 위해서 일로(一路)를 추구해 가는 사람을 말하며, ㉯서원의 보살이란 법장(法藏)보살과 같이 깨달음을 남에게 주는, 혹은 남을 깨닫게 하겠다는 원(願)을 세운 보살을 말한다. ㉰여래(如來)의 활동자로서의 보살이란 여래의 기능이나 역할을 대신하는 보살을 말한다. 즉, 여래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文殊), 행(行)을 상징하는 보현(普賢), 자비를 상징하는 관음(觀音)보살 등을 말한다.
여기서 ㉮는 상구보리(上求菩提)의 보살이라면 ㉯와 ㉰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보살이란 자기완성과 이웃구제의 원(願)을 세워 정진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 상구보리(上求菩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하기 위해 수행하고 정진하는 자를 보살이라 한다면, 그와 같은 보살사상은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을까.
보살이라는 용어 내지 관념의 유래를 고찰함에 있어서 ①조각문(彫刻文) ②보살상(像)의 각문(刻文) ③불교성전(聖典) 등이 참고가 될 수 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조각문(彫刻文)이라고 할 수 있는 아쇼카왕[阿育王] 때의 석주(石柱)에는 보살이라는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 즉, 붓다의 탄생지인 룸비니동산에 있는 아쇼카왕의 석주에는「세존 탄생(世尊誕生)」으로 되어 있지「보살탄생(菩薩誕生)」으로 되어있지 않다.
여기서 세존(世尊)이라고 하는 용어는 정각을 이룬 붓다를 부르는 호칭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붓다께서 탄생할 때는 태자의 신분이었지, 성불(成佛)한 세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세존 탄생」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석주가 만들어진 아쇼카왕대까지는 보살이라는 명칭이 없었거나, 아니면 있었다고해도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아쇼카왕이 재위했던 B.C 3세기에는 아직 보살이라는 관념이 일반화되어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로 유명한 녹야원(鹿野苑)에서 보살상(菩薩像)이 출토된 일이 있는데, 그 상에는 카니시카왕 3년에 비구 발라(Bala)가 만든 보살상임을 알게 해주는 기록이 있다.
카니시카왕 3년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그의 재위년이나 그가 살해된 해(서기 152년 설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를 참고해 보면 서기 2세기 중엽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다음 성전(聖典)상에서 보살의 개념을 살펴보면, 팔리의『숫타니파타』나『법구경(法句經)』등에는 보살의 용어가 보이지 않는다. 원시경전이나 율문(律文)에는 가끔 보이고 있으나, 그것들의 성립 연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의 대부분의 대승경전에는 보살의 개념이 나오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은 2세기 후반에 지루가참(支婁迦讖)이 한역(漢譯)한『도사경(兜沙經)』이나『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과 2세기에서 3세기 중엽의 용수(龍樹)가 주석(註釋)한『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등이 있다. 이들 성전을 통해서 보면 2세기 후반 이전에는 이미 보살의 관념이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3가지 논술에 의하여 살펴보면 보살이라는 명칭이 생겨나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된 것은 서기 전 2세기 이후에서 서기후 2세기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좀더 좁혀서 적극적으로 추정해본다면 B.C를 전후한 시대에 보살이라는 명칭이나 관념이 생겨나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 보살도란 우리와 같은 범부중생들이 수행해서 부처의 지위(地位)에까지 가는 과정을 말한다. 즉, 보살의 수행도라고 할 수 있다.
보살의 수행도에는 본생(本生)의 10지(十地)나 반야(般若)의 10지도 있으나 화엄교학에서는 화엄경의 10지를 포함해서 보다 세밀하게 52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 첫단계가 믿음(信)이다.
10신(十信) 다음에 10주(十住)가 있고, 그 다음에 10행(十行)ㆍ10회향(十廻向) 그리고 10지(十地)가 있다.
여기까지의 50위(位)는 중생의 단계다. 그 다음에 등각위(等覺位)와 묘각위(妙覺位)가 있다. 그러므로 중생의 단계에서 불위(佛位)까지를 합하면 52단계가 된다. 이것이 화엄교학에서 말하고 있는 보살도의 구조다. 10신(十信)으로부터 10주(十住)ㆍ 10행(十行)ㆍ10회향(十廻向)ㆍ10지(十地)까지의 보살 계위(階位)는 그 명칭은 각각 다르지만, 그 내용은 10지로 요약할 수 있다.
「십지품(十地品)」에서 말하는 보살의 10지(十地)란 ①환희지(歡喜地) ②이구지(離垢地) ③명지(明地) ④염지(焰地) ⑤난승지(難勝地) ⑥현전지(現前地) ⑦원행지(遠行地) ⑧부동지(不動地) ⑨선혜지(善慧地) ⑩법운지(法雲地) 등이다.
10신(十信)에서부터ㆍ10지(十地)까지의 50위(位)는 중생의 단계며, 그 다음은 불(佛)의 단계로서 등각ㆍ묘각의 계위가 있고, 그 다음에 정등정각(正等正覺)의 불위(佛位)가 있어 전체로 보면 53계위가 된다.
이와 같은 보살도의 계위는「입법계품」의 53선지식의 계위에 맞도록 체계화 한 것으로써 화엄교가들에 의한 구상일 뿐 화엄경 자체의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 범부 중생이 크게 자재한 법신불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한 행을 실천해야 하는 데 화엄경에서는 그 실천행을 참으로 복잡하고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보살의 10지(十地)만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제1 환희지(歡喜地)보살의 실천행에만도 10가지가 있고 제10 법운지(法雲地)보살의 실천행에도 10가지가 있다. 그러므로 10지위(十地位)보살의 실천행을 모두 합하면 100가지 이상이 되는 셈이다. 이와 같이 10신위ㆍ10주위ㆍ10행위ㆍ10회향위의 보살행을 모두 합하면 그 수가 대단히 많아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보살행도 명칭이나 설명의 방식이 다를 뿐이지 요약하면「명법품(明法品)」에 나오는 보살의「청정 10바라밀(淸淨十波羅蜜)」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면 보살의 청정 10바라밀이란 무엇인가.
「명법품」에서 말하는 10바라밀이란 ①청정한 단(檀)바라밀 ②시(尸)바라밀 ③찬제( 提)바라밀 ④비리야(毘梨耶)바라밀 ⑤선(禪)바라밀 ⑥반야(般若)바라밀 ⑦방편(方便)바라밀 ⑧원(願)바라밀 ⑨력(力)바라밀 ⑩지(智)바라밀 등이다.
이 10바라밀(十波羅蜜)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에 방편ㆍ원ㆍ력ㆍ지의 4바라밀을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만일 그렇다면 제⑥반야바라밀과 제⑩지바라밀은 어의(語意)상으로 같은 것이기 때문에 지바라밀이 중복되게 된다. 여기서 제 ⑥ 반야(般若)바라밀은 보살의 10지(十地)에서 보면 제6 현전지(現前地)에 해당하고 제 ⑩지(智)바라밀은 제10 법운지(法雲地)에 해당한다.
현전지(現前地)에서는 지혜만이 나타나지만 법운지(法雲地)에서는 지혜와 함께 대비(大悲)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제 ⑥반야바라밀은 지(智)의 행(行)만이 요구되지만 제 ⑩지바라밀에서는 지와 함께 동체대비(同 大悲)의 행까지 요구된다.
③ 유심사상(唯心思想)
― 만물(萬物)의 주체는 누구인가 ―
불교 교학에서 마음(心)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부파불교시대에도 인간의 심성(心性)은 본래로 깨끗하다고 하는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이 있었고, 대승불교의 중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여래장(如來藏)사상이나 유식(唯識)사상 또는 선(禪)사상에 있어서도, 그 중심과제는 마음(心)의 탐구 혹은 마음의 정화(淨化)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문제를 떠나서는 불교사상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心)은 불교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어 왔다.
마음(心)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유심설(唯心說)이 대두되게 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보면 유심설(唯心說)이냐 유신설(唯神說)이냐 하는 양대 주장이 있어왔다. 즉, 천지만물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자연물을 포함한 인간의 희로애락의 감정이나 행ㆍ불행 등은 무엇에 의해서 좌우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것들은 오직 신(神)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유신설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그것은 오직 인간의 마음작용(가짐)에 달려있다고 하는 유심설(唯心說)도 만만치 않게 주장되어 왔다. 전자를 신본주의(神本主義)라고 한다면 후자는 심본주의(心本主義)라고 할 수 잇다.
불교는 물론 심본주의에 가까운 종교다. 불교 경전상에 유심설이 명확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화엄경』의「10지품(十地品)」이 처음이다. 3계유심(三界唯心)으로 표현되는「10지품」의 유심설(唯心說)이 유심구(唯心句)의 시초인 것이다.『화엄경』에는 참으로 다양하게 유심(唯心)이 설(說)해지고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에
"만일 삼세의 모든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법계의 본성이나 모든 것들은 오직 마음(心)이 지은 것인 줄을 알아야 한다〔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10지품(十地品)」에
"삼계는 허망하나니 단지 이 마음이 지은 것일 뿐이며 12연분(緣分)도 또한 마음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三界虛妄 但是心作 十二緣分 是皆依心〕."
이 2경문이『화엄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유심구(唯心句)다. 12연기는 물론 욕계ㆍ색계ㆍ무색계로 불리는 온 법계나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붓다까지도 오직 이 마음(心)에 의한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천지만물을 포함한 모든 것(一切)은 오직 이 마음(心)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며, 인간의 희로애락의 감정이나 행ㆍ불행 등도 모두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마음이「일체(一切)」를 만들었다고 할 때, 좀더 구체적으로 마음(心)은 어떤 마음이며, 마음에는 어떠한 종류가 있을까. 또「일체」라고 하는 것에는 어떠한 것들이 포함될 수 있을까.
용수(龍樹)나 세친(世親)ㆍ징관(澄觀) 등의 화엄교가들은 마음(心)을 2종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즉, 마음에는 진심(眞心)과 망심(妄心)의 2종심(二種心)이 있다는 것이다.
유심구(唯心句)를 해석함에 있어 마음에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과 중생심(衆生心)이 있다고 하는 이들 화엄교가들의 해석은 후대 유식사상(唯識思想)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화엄교가들은「유심구」에서의 마음(心)을 이와 같이 2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지만,『화엄경』자체의 경문(經文)에서는 그 마음을「욕심(欲心)」, 또는「탐심(貪心)」으로 분명하게 못을 박고 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유심(唯心)에서의 마음을 고정불변하는 청정심(淸淨心)으로 잘못 해석하면「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일체유신조(一切唯神造)」로 잘못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고정불변의 유심(唯心)이 일체를 만든다고 하면 절대 유일의 신(神)이 천지(일체)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되면 그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설하는 불교의 근본사상과는 먼 얘기가 된다.
유심구(唯心句)에서의 마음(心)을『화엄경』에서는 욕심 또는 탐심으로 설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찰라찰라로 생멸변화하는 중생심(衆生心)임을 알 수있다.
다음 일체에는 어떠한 것들이 포함되는 것인가.
㉮ 희로애락(喜怒哀樂) 등 인간의 감정
㉯ 사람이 생각하고 설계해서 만든 인공물(人工物)
㉰ 산천초목과 같은 자연물
등이 모두 포함되는가, 아니면 ㉮와 ㉯만 포함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 ㉮와 ㉯는 사람의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마음가짐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조금도 부자연스럽지가 않다. 그러나 ㉰의 경우는 다소 다르다. 인간의 마음에 의해서 산천초목과 같은 자연물까지도 만들어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화엄경』에서는 유심구(唯心句)의 마음(心)을 욕심 또는 탐심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탐내고 욕심내는 그 마음은 곧 중생심이다. 그런데『기신론(起信論)』에서는 중생심(衆生心)은 곧 법(法)이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찰라찰라로 생멸변화하는 이 중생의 마음(心)이 곧 법(法)이며, 이 법은 곧 연기법(緣起法)인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는 것은 곧「일체유법조(一切唯法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체는 법(法)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법(法)인 마음(心)이 모든 것을 만든다고 할 때의 그 마음은 능소(能所)의 2원적(二元的)인 마음(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심(唯心)이 일체를 만든다고 해서 일체(一切)를 만드는 심(心)[能]이 있고, 그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일체[所]가 따로 있다고 하면 그것은 유일신교(唯一神敎)에서 어떤 절대자가 천지만물을 창조했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와 같은 것은 불교의 근본사상과 어긋나며 주체(主)와 객체(伴)의 구족(具足)을 설하는 화엄사상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서의 마음(心)은 초월의 절대적인 유심(唯心)이 아니라, 연(緣)하여 생(生)하면서 동시에 멸(滅)해 가고, 멸하면서 동시에 생하는 연기의 작용, 그 자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주(主)와 객(客)이 일여(一如)인 마음(心)이며 법(法)이다. 이와 같은 마음이나 법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생멸변화하는 연기법의「작용」그 자체이기 때문에 정형(定形)의 실체(實 )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화엄경』에서는 삼계(三界)는 허망(虛妄)하다고 하는 공관(空觀)에 입각한 유심(唯心)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④ 법계연기사상(法界緣起思想)
― 만물(萬物)은 어떤 관계로 존재하는가 ―
불교의 교학사상에 있어서 실상론(實相論)과 연기론(緣起論)은 양대 중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론에는 소위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로부터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기설이 있지만 이중에서 법계연기설은 화엄교가들에 의해서 체계화된 연기사상이다.
이 법계연기사상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緣起의 諸法〕은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혹은 어떻게해서 생겨났는가 라고 하는 제법(諸法)의 발생론이나 생성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세계의 개개물물이 서로 어떤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계연기설이란 제법의 존재론 또는 존재 양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우주법계의 모든 것들은 어떠한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을까.
첫째, 연기(緣起)의 제법(諸法 :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현상적으로 보면 천차만별의 형태로서 서로 다르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원융무애(圓融無碍)하게 상의상성(相依相成)한다. 즉, 모든 존재물은 서로 즉(卽)하고 서로 입(入)해서 걸림이 없이 원융하게 서로 관계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마치 바닷물과 파도와의 관계와 같다. 현상에서 보면 바닷물과 파도는 서로 다르지만 본질면에서 보면 바닷물과 파도는 둘이면서도 하나다. 이 둘은 상즉상입하여 서로 걸림없이 바닷물이 되었다 파도가 되었다 하는 작용을 계속한다. 이와 같은 작용을 상즉상입이라 하고 상의상성하는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연기의 제법은 상즉상입하여 주반구족(主伴具足)의 관계에 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다름(차별ㆍ차이)은 있을지언정 높고 낮음이나 주종의 관계에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주반구족이라는 말의 본 뜻은 주(主)와 반(伴)이 따로 없이 절대 평등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수직의 주(主)와 종(從)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평의 평등관계에 있다고 보는 사상이다. 예를 들어 남자가 있기에 여자가 있고, 여자가 있기에 남자가 있다. 인간이 있기에 자연이 있고, 자연이 있기에 인간이 있다고 보는 절대평등의 사상이다.
남자와 여자, 자연과 인간은 서로 모습은 다를지언정 그 가치에 있어서는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셋째, 제법은 상즉상입하여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관계에 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서로 거듭되는 연관관계 속에서 서로 의존하며 존재하고 있다. 내가 먹은 쌀 한 톨을 예로 들어 보면 나는 이 쌀 한 톨을 매개로해서 농부와 연관되어 있고, 쌀을 운반해 준 운전수와 연관되어 있고, 밥을 지어준 어머니와 연관되어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쇠사슬의 고리가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이 서로가 거듭거듭 연결된 관계 속에서 의존하며 존재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이와 같이 3가지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는 법계연기사상은 절대평등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법계연기사상은 수직사관(垂直史觀)이 아니라 수평사관(水平史觀)이다.
이와 같은 법계연기사상이 최초로 형성된 것은 두순(杜順)의 3관(三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두순은『법계관문(法界觀門)』에서 법계(法界) 즉, 이 온 누리를 진공문(眞空門)ㆍ이사무애문(理事無碍門)ㆍ주변함용문(周遍含容門)의 3으로 나누고 있고, 지엄(智儼)은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등의 10현문(十玄門)으로 설명하고 있고, 법장(法藏)은 6상원융(六相圓融)으로 설명하고 있다. 6상이란 총상(總相)ㆍ별상(別相)ㆍ동상(同相)ㆍ이상(異相)ㆍ성상(成相)ㆍ괴상(壞相)을 말한다.
신라 의상(義湘)은 연기6문(緣起六門)에 의해서 법계연기(法界緣起)를 설명하고 있고, 징관(澄觀)은 사법계(事法界)ㆍ이법계(理法界)ㆍ사리무애법계(事理無碍法界)ㆍ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의 4종법계(四種法界)로 나누고 있으며,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가 곧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법계연기사상은 현상적으로는 서로 서로 다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평등하여 같다고 보는 사상으로써 남과 북, 동과 서, 흑과 백, 혹은 종교간의 이념 등으로 나뉘어 갈등하고 있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모두가 하나로 될 수 있는 사상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⑤ 정토사상(淨土思想)
― 청정한 불국토는 어디에 있는가
화엄교학은 철학적이며 논리적이고 자력적인 사상인데 반해서, 미타정토(彌陀淨土)교학은 종교적이고 신앙적이며 타력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듯한 양대사상이 과연『화엄경』에서 양립(兩立)할 수 있을까.
『화엄경』에는 염불(念佛) ㆍ염불삼매(念佛三昧)ㆍ본원(本願)ㆍ왕생(往生)ㆍ정토(淨土)ㆍ서방극락세계(西方極樂世界)ㆍ아미타불(阿彌陀佛)ㆍ무량수(無量壽)ㆍ무량광(無量光) 등의 용어들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들은 과연
㉮ 미타정토사상적인 의미로 설해지고 있을까.
㉯미타정토사상적인 내용으로 설해지고 있다면 화엄경의 어디에 어떤 형태로서 설해지고 있을까.
㉱ 화엄교가들은 사상적으로는 화엄경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신앙적으로는 왜 미타정토신앙을 수용하고 있을까.
라고 하는 등의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이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화엄경』에서 말하는 부처의 뜻(佛身義), 정토의 뜻(淨土義), 염불의 뜻(念佛義)을 살펴 본 후, 그것이 미타정토교에서 말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① 먼저,『화엄경』에서의 주불(主佛)은 비로자나불이고, 미타경전에서의 주불은 아미타불이다. 비로자나불은 온 법계에 두루한 광명(光明遍照)라는 뜻이고, 아미타불은 무량한 수명(無量壽)ㆍ무량한 광명(無量光)이라는 뜻이다. 이 점에서 보면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은 그 용어는 서로 다르지만 의미는 서로 같다고 할 수가 있다. 또 이 2 붓다가 성불하게 된 인연을 살펴보면, 비로자나불은 구원겁(久遠劫)전에 많은 공덕을 닦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하고 수많은 중생들을 교화한 공덕으로 정각을 이루었다고 한다. 즉, 상구보리(上求菩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 하는 보살행의 실천에 의해서 비로자나불이 되었다고 한다.
아미타불의 경우도 법장(法藏)이라는 비구가 구원겁전에 48가지의 원을 세워 실천한 공덕으로 성불했다고 한다. 48대원도 역시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하겠다는 보살의 원행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 2 붓다는 성불의 인연이 모두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화엄의 교가들은 자나(遮那)와 미타(彌陀)의 불이(不二)를 말하고 있다.
② 둘째, 정토(淨土)란 무슨 뜻인가. 정토라는 말은, 정(淨)이 동사로 쓰이는 경우와 형용사로 쓰이는 경우에 따라서 2가지의 뜻이 있다. 동사로 쓰이는 경우의 정토는「토(土) 즉 국토를 깨끗하게 하다」라는 뜻이 되고, 형용사로 쓰이는 경우는 「깨끗한 국토 즉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이 된다.
『화엄경』에서의 정토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써 연화장장엄세계(蓮華藏莊嚴世界)가 바로 그것이다. 줄여서 연화장세계 혹은 화장세계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화장(華藏)세계는 구원겁 전에 비로자나불이 닦은 원(願)과 행(行)에 의해서 건립되었다고 하며, 아미타불의 극락정토 또한 법장(法藏) 비구의 원(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점에서 보면 화장(華藏)과 극락(極樂)은 서로 같다. 다만 그 정토(淨土)의 위치만 서로 다를 뿐이다.『화엄경』에서 말하는 화장정토(華藏淨土)는 특정한 장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방(十方)의 불국토 어디에나 있지만 미타정토는 사바세계가 아닌 타방(他方)에 있다고 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즉, 미타정토는 이 사바세계로부터 10만 억 국토나 떨어진 서방(西方)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장정토와 미타정토(彌陀淨土)는 그 소재의 위치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
정토의 위치가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 갈 수 있는 실천행 또한 서로 다른 것으로 설하고 있다. 화장세계에 갈 수 있는 방법으로는 보살행이 제시되고 있는 반면 미타정토에 가는 왕생(往生)의 길은 구족10념(具足十念)이나 칭명염불(稱名念佛)이 제시되고 있어 서로 다르다.
화장정토와 미타정토의 장엄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요약해서 "중보(衆寶)장엄"이라는 점에서 같다. 즉, 갖가지의 보배로서 꾸며져 있다는 점에서 화장정토와 미타정토는 서로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화장정토와 미타정토는 다른 점도 있지만 같은 점도 적지 않다. 그래서 화엄교가들은 화장(華藏)과 극락(極樂)의 불이(不二)를 주장하기도 한다.
③ 셋째, 염불(念佛)의 뜻은 같은가 다른가.『화엄경』에서의 염불은 말 그대로「부처님을 생각한다」고 하는 자력적인 지관의 념(觀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미타정토교학에서의 염불은 아미타불의 이름을 소리내어 부르는 타력적인 칭명염불(稱名念佛)이다.『화엄경』에서의 염불은 붓다의 지혜나 공덕 혹은 모습(相好)을 관(觀)하는 자력적인 염불인 데 반해 미타정토교학에서의 염불은 구족10념(具足十念), 또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④ 그러면『화엄경』에는 미타정토적인 사상은 없을까.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화엄경』의 불신의 뜻(佛身義)ㆍ정토의 뜻(淨土義)ㆍ염불의 뜻(念佛義) 등은 미타정토교학에서의 그것들과 유사한 점이 적지 않으며, 불신의(佛身義) 내지 정토의(淨土義)에 국한해서 보면 그 내용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교의(敎義)에서 보면 이 2사상은 자력교(自力敎)와 타력교(他力敎)라고 하는 점에서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이다.
사실『60화엄경』이나『80화엄경』에는「현수보살품(賢首菩薩品)」과「심왕보살문아승지품(心王菩薩問阿僧祗品)」의 2곳을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도 미타정토사상적인 내용이 설(說)해 지고 있지 않다.
이 2곳의 내용도 구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이 사바세계와 극락세계에서 시간의 장단(長短)의 비교, 또는 염불삼매에 의해서 사후에 붓다 앞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 등 지극히 단편적이다.
그러나『40화엄경』의 마지막 권인 제 40권에는 미타정토사상이 구체적으로 설해지고 있다. 보현보살의 10대원(十大願)이 설해 지고 있는데, 그 마지막 원(願)인「보개회향원(普皆廻向願)」에 미타정토사상이 구체적으로 설해지고 있다. 이것은 미타정토사상이 성행할 때 반야(般若)가『문수사리발원경(文殊舍利發願經) 등에 의해서 구상한 것으로 생각된다.
화엄경(華嚴經) 해설(解說)
제1강 화엄학의 범주와 사상 개요
1. 화엄학의 범주
화엄사상을 담고 있는《화엄경》은 한국불교의 수행과 신앙형태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경이다. 불교의식에도 화엄사상이 무르녹아 있다. 특히 한국선의 이해는 화엄사상의 공부 없이는 완전하지 못할 정도이다. 지금도《화엄경》은 불교전문강원인 승가대학에서 이력과정의 마지막 대교과에서 배우는 과목이다. 아무튼 불교, 특히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화엄경》의 위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아니하리라 본다.
'화엄사상의 세계'에서 앞으로 다루게 될 화엄학의 범주는 대강 다섯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화엄사상은《화엄경》의 중심사상이다.《화엄경》에서는 우리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며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도록 교설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첫째로《화엄경》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둘째는《화엄경》을 소의로 하여 체계화한 화엄종의 화엄사상이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 화엄종을 대성시킨 현수법장(643∼712)의 화엄사상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전후로 영향을 받고 준 화엄가들의 화엄사상이 있다.
셋째는 한국화엄사상이다. 한국화엄사상은 의상(625∼702)과 의상의 뒤를 이은 의상계 화엄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넷째는 화엄교사(華嚴敎史) 부분이다.《화엄경》이 편찬·유통되며 화엄종과 화엄사상이 형성되어간 역사적인 점도 살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화엄에 의하여 수학하고 증득해 가는 수증론(修證論) 부분도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이론과 실천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으니 사상 속에 수행과 증득의 면이 함께 들어 있다.
따라서 본 '화엄사상의 세계' 강의에서는《화엄경》을 개설하고, 화엄교사를 약설하며, 중국과 한국의 화엄사상을 고찰함과 동시에 수증의 방편을 살펴나가게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화엄경》과 화엄사상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할 예정이다.
이에 기존의 연구업적에 의거하여 몇 가지 측면에서 화엄사상의 개요를 먼저 소개해 두고, 앞으로 그러한 화엄사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볼까 한다.
2. 화엄사상의 개요
1) 경의 사상을 이해하는 방법
경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사용된 몇 가지 방법을 먼저 보기로 한다. 우선 경전 이해의 전통적인 방법은 경의 제목을 통해서 그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다.
청량징관(738∼839)의《화엄현담》에서는 '대방광불화엄경' 7자에 각각 10가지씩 의미를 붙여서 총 70가지로《화엄경》의 제목을 설명하고 있다.《화엄경》은 '대방광불화엄(大方廣佛華嚴)'을 설하는 경이니, 경을 능전(能詮)이라 하고 대방광불화엄을 경에 담긴 내용, 즉 소전(所詮)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화엄경》은 대방광하신 부처님의 세계를 보살의 갖가지 만행화로써 장엄함을 설하고 있는 경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또 경의 내용을 통틀어서 그 대의가 무엇인가 하는 데 주목해 왔다. 조선시대 묵암최눌의〈화엄품목〉에는《화엄경》의 대의를 '만법을 통섭해서 일심을 밝힌다〔統萬法明一心〕'라고 하였다. 그후 전문강원에서 이 대의를 그대로 수용하여 경을 이해하는 방편으로 사용해 왔다.
화엄종에서는 종지를 세우고 있다. 의상은〈법성게〉에서 법성(法性)으로 화엄세계를 노래하였고, 법장은《탐현기》에서 '인과연기 이실법계(因果緣起 理實法界)'를 주창하고 있다. 이들 방법을 종합해서《화엄경》의 중심사상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2) 화엄경의 중심사상
(1) 여래출현(如來出現, 如來性起)
《화엄경》의 중심사상으로서는 첫째로 '여래출현'을 들 수 있으니, 여래출현은 다른 번역으로 '여래성기'이다.《화엄경》은 '대방광불'을 설하는 경이다. 대방광이란 부처님의 체·상·용을 표현한 말이다. 범어로는 방광을 Vaipulya(바이풀리야)라 하여 하나의 붙은 말이나, 한역에서는 '방'과 '광'에 각각 따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 원력과 자비, 신통과 위신력 등이 무한히 크고 반듯하고 너르다는 것을 담고 있다.
이처럼 부처님의 자각, 깨달음의 내용을 펴고 있기에《화엄경》을 정각의 개현경(開顯經)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이라기보다 부처님을 설한 경이라 하여《불화엄경(Buddh vata saka)》이라고도 하였다.
경전 성립사적으로 볼 때《화엄경》은 대승보살에 의하여 대승불교운동이 한창 일어나던 시대에 편찬된 초기대승경전이다.《대방광불화엄경》이라는 화엄대경(華嚴大經)은 서력 기원후 3,4세기경 중앙아시아 지방에서 편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화엄경》자체내에서는 경이 설해진 곳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보리수나무 아래이며, 설해진 시기는 성도하신 직후라고 설하고 있다. 이는《화엄경》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교설한 것임을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엄경》의 대방광불은 온 우주 법계에 충만한 변만불(遍滿佛)로서 모든 존재가 비로자나부처님의 화현 아님이 없다. 개개 존재가 고유한 제 가치를 평등히 다 갖고 있으니, 여래의 지혜인 여래성품이 그대로 드러난 존재인 것이다. 이를 여래성기(如來性起) 또는 여래출현(如來出現)이라고 한다.
화엄가들은 화엄교주를 융삼세간(融三世間)·십신구족(十身具足)·삼불원융(三佛圓融)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부른다. 화엄세계는 법신·보신·화신이라 불리는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의 삼불이 원융한 비로자나불의 세계이다.《화엄경》에는 처음에 마가다국 붓다가야에서 정각을 이루신 석가모니부처님이 출현하신다. 그런데 이 석가모니부처님이 바로 비로자나부처님이시며, 비로자나는 노사나로도 번역되고 있다. 이러한 부처님을 삼불원융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 한 것이다.
또한 화엄의 비로자나부처님은 세간에 두루해 계시는 변만불(遍滿佛)이다. 화엄가들은 일체 존재를 편의상 불·보살과 같은 깨달은 존재인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과 아직 못 깨달은 존재인 중생세간(衆生世間)과 그들 정보가 의지해 있는 기세간(器世間)의 삼종세간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그 삼세간은 역시 각기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여 융삼세간이라 일컫는 것이다.《화엄경》에서는 부처와 보살, 보살과 중생,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아니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체 존재가 비로자나 아님이 없으니, 기세간 역시 여래출현의 모습인 것이다. 이를 융삼세간불이라 한다. 의상은 이를《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에서 합시일인의 반시(槃詩)로 나타내고 있다.
《화엄경》에서는 일체를 열이라는 숫자로 보이고 있으니 열은 원만수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십불(十佛)로 말씀되고 있다. 이러한 십불이 구족한 무애세계가 대방광불의 세계인 것이다.〈법성게〉에서도 화엄세계를 '십불보현대인경'이라 읊고 있으며, 십불의 모습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화엄세계는 모든 존재가 비로자나불의 화현 아님이 없다.《화엄경》은 우리 범부 중생이 그대로 부처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의상은 이를 법성성기(法性性起)로서 옛부터 부처〔舊來佛〕라 하였다.《화엄경》은 불세계를 교설한 것이니, 부처님 세계는 옛부터 본래 부처인 중생의 원력에 의해 이땅에 구현됨을 밝혀준 것이다.
(2) 일승보살도(一乘菩薩道)
《화엄경》의 중심사상으로서 둘째는 일승보살도이다. 화엄이란 꽃으로 장엄하는 것이니 보살행이라는 꽃으로 불세계를 장엄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에는 부처님께서는 광명으로만 보이시고 언설을 통해서는 문수(文殊)·보현(普賢)보살을 위시한 보살들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한 보살들이 부처님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부처님의 세계가 보살행을 통하여 장엄되며 우리 중생에게 펼쳐지고 있다. 보살이 설하고 있는 그 보살행을 행함으로써 우리 범부 중생이 바로 부처의 삶을 살게 됨을 보이고 있다.
범부와 보살과 부처가 다른 점은 발심에 있다. 중생이 본래 부처이지만, 그러나 중생과 부처는 또 확연히 다르다. 중생은 자기가 바로 부처인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로 부처인 줄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래서 신심과 발심이 필요한 것이다. 신심이란 자기가 부처인 줄을 확실히 믿는 것이며, 이를 정신(淨信)이라고 한다. 이러한 청정한 신심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원력이 깊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정신만 성취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게 되니 곧 발심(發心)하게 되는 것이다. 발심한 중생이 보살이다. 보살이란 보리살타(Boddhi Sattva)의 준말이니 깨달을 중생 또는 깨달은 중생〔覺有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화엄에서는 발심만 하면 바로 정각을 이룬다고 한다. 처음 발심할 때가 바로 정각을 성취하는 때이다〔初發心時便成正覺〕. 그러므로《화엄경》에서 시설하고 있는 발심보살의 보살행은 성불로 향해가는 인행(因行)이라기보다 정각후의 과행(果行)이며 부처행〔佛行〕인 것이다. 인·과가 둘이 아닌 인과교철(因果交徹)의 인행이며 과행이다. 다시 말해서 비로자나부처님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구현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화엄경》에서의 보살행이다.
《화엄경》의 보살계위는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등각(等覺)·묘각(妙覺)의 42위(四十二位)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보살계위를 52위 또는 53위 및 57위 등으로 설정하는 것과 다르다.《팔십화엄》에서는 신(信)은 십신(十信)의 계위로 나타나지 아니하니, 신은 모든 보살도를 받치고 있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42계위의 맨 첫단계인 초발심주에서 발심하여 여래가에 태어난 발심보살의 보살행은 하나하나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앞단계라기보다 낱낱이 나름대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이타행이며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면인 것이다.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역참한 53선지식의 낱낱 해탈문도 모두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완전한 해탈문이며, 선재의 구법은 구체적으로 불세계를 구현시켜 나가는 여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사상을 보살사상으로 규정짓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십지행을 대표로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보살도를 말함에 있어서〈십지품〉을
〈입법계품〉 못지않게 중시해 왔던 것이다.
(3) 법계연기(法界緣起)
온갖 세계와 중생은 다 비로자나부처님의 현현이며, 보살행으로 불세계가 구현되고 있음을, 화엄교가들은 또한 십현육상(十玄六相)의 사사무애(事事無碍) 법계연기(法界緣起)로 설명하기도 한다. 일체의 제법은 서로서로 용납하여 받아들이고〔相入〕 하나 되어〔相卽〕 원융무애한 무진연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화엄종의 대성자인 현수법장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화엄종의 종취로서 인과연기 이실법계를 주창하고 있다. 인과연기는 사(事)이고, 이실법계는 이(理)로서 이와 사가 둘이 아니며, 따라서 사와 사가 걸림없는 사사무애의 일진법계(一眞法界)이다. 이 일진법계의 체는 물론 일심(一心)이다.
불교를 불교이게 한 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을 한 마디로 말하면 연기의 진리를 든다. 연기에 맞으면 불교이고 연기에 어긋나면 불교가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교는 연기의 진리를 교설하고 있는 것이다. 연기란 '연하여 함께 일어난다'라는 의미인 프라티티야삼우트파다(prat tyasamutp da)의 역어이다. 모든 존재는 어느 것이나 그럴 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긴 것, 즉 말미암아 생긴 것이니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 此起故彼起 此滅故彼滅〕'라는 연기의 이법은 모든 존재의 발생과 소멸에 적용할 수 있는 까닭에 보통 연기의 기본공식이라 일컫고 있다.
세존께서는 십이연기〔無明·行·識·名色·六入·觸·受·愛·取·有·生·老死〕의 순관과 역관을 통하여 무명을 멸하고 생사의 모든 괴로움을 탈각하셨다고 한다. 이 연기의 진리는 후에 여러 가지로 그 설명방식이 변천되어 왔다. 업감연기(業感緣起)·뢰야연기(賴耶緣起)·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그리고 법계연기(法界緣起) 등이 그것이다. 화엄의 세계는 법계 전체가 비로자나법신의 현현인 것이니, 여래성연기의 여래출현이기에 법계연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2강 화엄경의 편찬과 유통
1. 인도·서역의 화엄경 편찬
《화엄경》은 화엄부의 대표적인 경전으로서 '대방광불화엄경'의 준말이다.《화엄경》의 원 범명은 알 수 없으니 원본인 범본이 Dasabhumika(다사부미카)라고 불리는〈십지품〉과 Gandavyuha(간다뷰하)라고 불리는〈입법계품〉외에는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엄의 제목에 대해서는 현재 크게 세 가지로 재번역되고 있다. 즉 Maha-Vaipulya-Buddha-Ga a-Vy ha S tra(마하 바이풀리야 붓다 간다 뷰하 수트라, 대방광불화엄경), Buddh vata saka(붓다바탐사카, 불화엄경), Avata saka S tra(아바탐사카 수트라, 화엄경) 등이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경의 한역본으로는 60권·80권·40권으로 된《육십화엄》·《팔십화엄》·《사십화엄》등 3부《화엄경》이 있다. 이중《사십화엄》은〈입법계품〉만의 별역이다. 이중《육십화엄》과《팔십화엄》을 화엄대경(大經)이라고 부른다.
《육십화엄》은 동진시대에 불타발타라에 의해 418∼420년에 번역되었고 교정을 거쳐 421년에 역출되었다. 이를 진본(晋本)이라 하고 또는 화엄대경 중 먼저 번역되었다 하여 구경(舊經)이라고도 부른다.《팔십화엄》은 대주(大周, 695∼699)시대 실차난타에 의해 역출되었으니 이를 주본(周本) 또는 신경(新經)이라 한다.《사십화엄》은 당(唐, 795∼798)의 반야다라가 역출하였으며 정원본《화엄경》으로 불리고도 있다.
그러나《육십화엄》이나《팔십화엄》은 처음부터 대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화엄경》을 구성하고 있는 각품이 별행경(別行經 또는 支分經)으로 먼저 성립되어 있었으며, 그 지분경을 모아 어떤 의도하에 조직적으로 구성한 것이 웅대한 화엄대경인 것이다.
화엄부 경전으로는 《화엄경전기》에 《도사경》 1권(지루가참 역, 178∼189)·《보살본업경》(지겸 역, 222∼228)·《여래흥현경》4권(축법호 역, 291) 등을 위시하여 36부 150권의 지분경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경은 그 역출 시기(2세기~10세기)로 보아, 용수(N g rjuna, 150∼250) 이전까지〈십지품〉·〈입법계품〉등을 비롯하여 상당수가 이미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용수보살이《십지경》에 대한 주석을 한 데서도 당시에《십지경》이 크게 유통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품으로 구성된, 현《화엄경》과 같은 대경의 조직은 대략 250년에서 350년대의 편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입법계품〉등의 성립은 남방인도에서라고 생각되나 대경인《화엄경》의 편성은 우전(于 )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 지방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대승불설비불설 논쟁이 한동안 크게 일어나 있었다. 대승경전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내용이 입으로 전래되어 오다가 문자화된 아함부 경전과는 다르니, 대승경전은 모두 불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승비불설에 대해 대승불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니 대승경전이 비록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글자 그대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새로운 문자로 다시 편찬한 경전이기에 불설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화엄부 경전 자체 내에서도 경의 설처(說處)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보리도량이며, 설한 시기도 성도 직후로 되어 있다.《팔십화엄》에는 시성정각(始成正覺)이라 하고,《육십화엄》에도 시성정각이며 세친(世親)이 지은《십지경론》의 저본이 된《십지경》에는 제이칠일(第二七日)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천태교판에서도 이를 최초 삼칠일이라고 하였다. 즉, 아함경을 12년간, 방등경을 8년, 반야경을 21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법화경을 8년간 설하시고,《화엄경》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최초 삼칠일, 즉 21일 동안 말씀하신 경이라는 것이다〔阿含十二方等八 二十一載談般若 終說法華又八年 華嚴最初三七日〕.
그러나 이것은《화엄경》의 역사적 성립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화엄경》의 사상적 특징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화엄경》은 부처님의 세계를 드러낸 것임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2. 화엄경의 유통과 주석 ― 인도·서역
《화엄경》의 유통과정을 보면 법장의〈화엄경전기〉에는 서역에서 전해졌다〔西域相傳〕고 하였고,〈용수전〉에는 용수보살이 바다에 들어가 용궁에서 가져왔다는 용궁장래설이 있다. 즉 용수보살이 용궁에 들어가 보니 3본《화엄경》이 있는데, 상본과 중본《화엄경》은 그 양이 방대하여 외우기 불가능하였다고 한다. 그 상본《화엄경》은 십삼천대천세계 미진수게송과 일사천하 미진수품이 있었다고 한다(이 내용은 우리가 아침에 예불하기 전에 치는 쇠송 염불문에도 들어 있다). 용수보살은 하본《화엄경》십만게 사십팔품을 외워서 세상에 유통시켰으며 지금 전해지는 한역된 삼대부는 그 중 약본
《화엄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은 용수 이전부터 있었던《화엄경》을 용수가 비로소 크게 유통시켰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용궁이란 용을 토템으로 하는 종족에게서 유통되고 있었음을 뜻하기도 하고 남해지방에서 가져온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용수보살은《화엄경》을 주석하여《대부사의론》100권을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이는〈입법계품〉에 해당하는《불가사의해탈경》에 대한 주석이다. 용수보살은《십지경》에도 주석을 하였으나 남아 있지 않고〈십지품〉의 일부인 초지와 제이지가 구마라집(鳩摩羅什) 역출의《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娑論)》으로 유통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용수보살의 화엄보살도 사상을 읽을 수 있다. 용수의 화엄사상은 이외에도 그가 지은《대지도론(大智道論)》을 비롯해《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대승이십송론(大乘二十頌論)》·《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보리심이상론(菩提心離相論)》등에서 발견된다.
4세기(320∼400) 혹은 5세기(400∼480)경에 활약한 것으로 보이는 세친(Vasubandhu)보살은《십지경론》을 지어《십지경》을 크게 유통시켰다. 이《십지론》은 중국에 전래되어 화엄종의 선구인 지론종의 소의가 되었으며, 여기서 보이는 육상설은 화엄 육상원융론의 기초가 되었다. 이렇게 용수와 세친은《대승기신론》의 저자로 알려진 마명(A vaghosa, 50∼150)과 함께 화엄조사로 숭앙받게 되었다.
마명보살은 용수보살보다 100년경 앞선 50∼150년경에 사셨던 분으로 여겨지는데, 이때의 마명보살이《대승기신론》을 지었다고 볼 수 없는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다. 원효의《대승기신론소》·
《별기》에만 해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원효는《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을 특징짓기를, 인도 대승불교사상의 양대 조류라 할 수 있는 중관과 유식의 양 사상을 회통시킨 것이라고 보았다. 중관이 파하기만 하고 세울 줄 모르며, 유식이 세울 줄만 알고 파할 줄 모르는 데 비해,《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은 세우고 파함이 무애하고〔立破無碍〕 열고 닫음이 자재하다〔開合自在〕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은 중관이나 유식사상보다 먼저 성립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기에 세친과 용수보살보다 앞서 살았던 마명보살이 여래장사상이 담긴《대승기신론》을 지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마명보살이《대승기신론》의 저자였기에 후에 화엄종조로 받들어 모셨던 일은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위와 같이《화엄경》은 역사적으로 4세기경에 현재의 대경으로 편성되었으나 각 품들의 최초 성립은 용수 이전에 이미 이루어져 있었던 초기 대승경전에 속하며, 대승적 깨달음의 세계를 개현한 경전 가운데 핵심적이고 대표적인 경에 속하는 것이다.
또, 용수보살의 저서로 되어 있는 것 중에〈화엄경약찬게〉가 있다.〈화엄경약찬게〉는 갖추어서는 '대방광불화엄경 용수보살약찬게'이며 줄여서 단지 '약찬게'라고만 부르고도 있다.〈약찬게〉는
《팔십화엄》의 조직과 구성을 간략히 엮어 놓은 게송으로서 현 한국불교교단에서 널리 독송되는 대표적인 염불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팔십화엄》의 유통은 이〈화엄경약찬게〉의 수지독송에 힘입은 바도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약찬게〉의 저자가 용수보살로 되어 있으나 이는 몇 가지 점에서 재고할 여지가 많다.
첫째로〈약찬게〉의 소의경전인《팔십화엄》의 유통과 용수보살과는 연대에 차이가 있다.〈약찬게〉가《팔십화엄》을 소의로 한 것은 '삼십구품원만교(三十九品圓滿敎)'라든지 '육육육사급여삼 일십일일역부일(六六六四及與三 一十一一亦復一)' 등〈약찬게〉내용을 보면 명확하다.《팔십화엄》은 39품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9회에 배대한 것이 육육 등(六六 云云) 품이기 때문이다.
용수보살은 2, 3세기에 활약하였고 화엄대경은《육십화엄》까지도 용수보살보다 후에 3, 4세기경의 편성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팔십화엄》은 용수보살 시대보다 뒤에 편찬된 것이다. 따라서《팔십화엄》의 구성을 간략히 엮은〈약찬게〉가 2, 3세기에 활약하였던 용수보살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둘째로〈약찬게〉의 저자가 용수보살이라면 번역한 이가 있어야 하는데 역자를 알 수 없다. 셋째로〈약찬게〉가 한국에서만 그 문헌이 유통됨을 볼 수 있으며 그것도 가장 오래된 판본이 용성천오(龍星天旿)가 광서(光緖) 11년(1885)에 편찬한《화엄법화약찬총지(華嚴法華略纂摠持)》이다. 그 가운데〈약찬게〉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상으로 볼 때〈약찬게〉는 우리나라에서 지어진 것이 용수보살에게 가탁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제3강 화엄경의 구성 조직
1. 경의 구성과 회처의 상징
《화엄경》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먼저《화엄경》의 구성 조직을《팔십화엄》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팔십화엄》의 구성 조직을 도시하면 다음〈표 1〉과 같다.
〈표 1〉《팔십화엄》(7처 9회 39품의 설주와 교설내용)
여기서 처(處)란 이 경을 설한 장소를, 그리고 회(會)란 경을 설한 모임을 말한다. 경의 설처는 지상에 세 곳이고 천상에 네 곳이며, 보광법당에서는 세 번 설해지고 있으므로 7처 9회이다. 현재 사찰에서 즐겨 독송하는〈화엄경약찬게〉에도《팔십화엄》의 구조가 약술되어 있다. 그 가운데 '육육육사급여삼 일십일일역부일(六六六四及與三 一十一一亦復一)'이라 함은 바로 39품을 9회에 배대한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팔십화엄》은 일곱 장소에서 아홉 번 모임에 의해 39품이 설해지고 80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초회 6품의 설주는 보현보살로서 삼매에 입정하고 출정한 후에 부처님 세계〔佛自內證境〕를 설하고 있다. 제2회는 문수보살이 설주가 되어 신(信)을 설하고 있다. 제3회는 법혜보살이 십주법문을, 제4회는 공덕림보살이 십행법문을, 제5회는 금강당보살이 십회향을, 그리고 제6회는 금강장보살이 십지법문을 설하고 있다. 이 4회는 모두 천상에서 설하고 있으므로 천궁 4회라고도 불리니, 삼현·십성(三賢十聖)의 끝없는 향상도를 보인 것으로 십지 보살행이 그 대표가 된다.
다음 제7회는 다시 보광명전에서 등각과 묘각의 계위에 해당하는 정각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으니, 주로 보현보살이 설하고 있다. 보살도의 종극은 또한 정각과 일치함을 거듭 지상의 보광명전에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제8회 역시 보현보살이 설하고 있으니, 보살도를 총괄하고 있다.
끝으로 마지막 제9회는 전편 8회와 대비하여《화엄경》후편으로서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제9회의〈입법계품〉은 그 내용상 전편에서 보인 불자내증경과 보살도 및 구경지를 선재가 출현하여 재현시키고 있다.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게서 발심하고 53선지식을 역참하여 보현행에 머물게 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설주와 설처 그리고 교설내용 등에 의하여《화엄경》전체의 내용을 보면, 보현보살이 설주가 되어 보리수 아래와 보광명전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설하는 보현경전계, 문수보살이 설주가 되어 중생에게 신심을 일으키는 문수경전계, 천궁 4회에서 향상되는 보살도를 설하는 십지경전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십주·십행·십회향의 삼현은 십지에 포섭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화엄경》은 여래의 과해(果海)를 보현보살을 통해서 보인 보현경전계와 중생을 발심케 하는 신(信)을 설하는 문수경전계 및 보살도의 전개를 보인 천궁 4회의 십지경전계로 분류되고도 있다.
그런데 중생에게 신을 설하는 단계인 문수보살의 설법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설하는 장소인 보광명전에서 설해지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부처 종자이기에 부처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으니 인과교철(因果交徹)의 화엄세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주초발심(住初發心)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중생이 신심을 원만 성취할 때 발심하여 보살이 되는데 그 발심을 하는 자리가 십주초인 초발심주이다. 이 초발심주에서 처음 발심하여 보살이 되는 때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때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후에 펼쳐지는 보살행은 정각후의 이타행이니 인과불이(因果不二)의 불국토장엄행이다.
나아가 경에서는 부처와 중생의 체성이 다르지 않다고 한다. 이처럼 중생은 누구나 자심이 곧 불지임을 깊이 믿는 것을 정신(淨信)이라 하니 이는《화엄경》에 보이는 특이한 신심의 양상이다. 중생이 본래 부처와 다르지 아니함을 믿고 본래의 모습대로 살고자 발심하여 보살이 되면 곧 중생의 본래모습인 부처로서 살게 되는 것이다. 경에 다양하게 펼쳐지는 보살행은《화엄경》의 말씀이 중생들, 바로 이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닫게 해 준다고 하겠다.
법장과 의상이 소의로 한《육십화엄》에서는,《팔십화엄》과 대동소이하나〈보왕여래성기품〉에 초점을 맞추어 여래출현의 성기(性起)를 중시한 점이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경이 설해진 회처를 보면,《팔십화엄》처럼 지상-천상-지상으로 되어 있다. 처음 석존 성도의 장소인 적멸도량·보광법당에서 출발하여 점차 6욕천 중 도리천·야마천·도솔천·타화자재천으로 상승하였다가 다시 지상인 보광법당으로 내려오고 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최고의 설처인 타화자재천궁에서 맨 마지막으로 설해진 것이〈성기품〉이라는 것이다.
설주인 보살의 상징에 의해서도 불과를 드러낸〈성기품〉이 두드러진다. 경은 전체적으로 보현보살〔佛自內證境〕 → 문수보살〔信〕 → 제보살〔住·行·向·地〕 → 보현보살〔佛果行인 菩薩道〕을 통하여 설해지고 있다. 보현보살은 전후 네 번에 걸쳐 설주로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보현보살행품〉과〈성기품〉에서 설주인 것은 한층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양품이 속해 있는 타화자재천궁회의 타품들은 금강장보살이 설한 십지경전계인 까닭이다. 십지의 구극인 불과는 보현보살을 통하여 설해짐을 의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보현보살은 불자내증경·불과·불과행용 등 통틀어 불경계를 드러내는 보현경전의 설주가 되고 있다.
따라서 여래출현(여래성기)의 사상을 가지고 문수경전과 보현경전을 결합하고 그 사이에 십지경전을 체계지운 것이《화엄경》구성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문수와 보현에 의해서 비로자나로서의 여래의 현현임을 보인 것은 명백한데, 거기에 십지경전을 체계지운 것은 이 양자를 시종으로 하는 보살도의 체계도 여래출현의 입장에서 조직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는 곧《화엄경》에서의〈성기품〉의 위치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60권《화엄경》이 이러한 의도로 편찬된 것을 잘 파악하여 구축한 것이 의상계 화엄가의 화엄성기사상이라 하겠다.
2. 화엄경 약찬게
이러한《팔십화엄》의 구성 조직은〈약찬게〉에도 담겨 있다. 약찬게문은 마지막 제목을 제하면 110구 770자이다.《팔십화엄》을 간략히 엮고 있는 이〈약찬게〉의 체제와 내용을 보자.
귀경송이다. 이는 화장세계의 비로자나 진법신과 보신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 등 일체 여래와 시방삼세의 모든 대성에게 귀의한다는 것이다. 이 귀경게에서는 화엄정토가 화장세계인 것과 화엄의 주불이 법신 비로자나불인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 비로자나불이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과 다른 분이 아님도 시사하고 있다.
화엄교학에서는 삼불이 원융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경주(經主)로 모시니,〈약찬게〉에도 그러한 화엄교학에서의 불신관이 엿보이고 있는 것이다.
설경인연력(說經因緣力)이다. 여기서는 해인삼매력에 의하여 전법륜됨을 말하고 있다.
운집대중이다. 보현보살을 위시한 모든 보살대중과 39류의 화엄성중을 열거하고 있다. 이들이 곧 세주라 불리는 분들이니 그 대표되는 세주의 이름이 보이는 것이다. 각 회의 설주보살 또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입법계품〉의 근본법회에 모인 대중과 지말법회의 문수보살 설법처인 복성 동방 사라림에 모인 대중들도 보이며, 선재동자의 선지식들도 운집대중으로 언급되어 있다.
선재의 선지식이다. 문수보살에서 비롯되어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53선지식이 출현한다.
경의 설처와 품명이다.
유통송이다. 이 경을 믿고 수지하면 초발심시에 문득 정각을 이루어서 화장세계에 안좌하니, 그 이름이 비로자나불이라 한다.
〈약찬게〉의 독송은 중생이 보살행을 통하여 자신의 본래 모습인 부처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정각을 이룬다고 하는 수행의 길이 된다.〈약찬게〉의 지송은 특히 화엄성중의 보호를 갈구하는 대중신앙의 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약찬게〉는 한국식 화엄지송경이자 다라니의 역할을 해온 것이라 하겠다.
제4강 화엄경의 내용 -초회 6품
초회 6품에서는 특히 다음 사항을 주목하게 한다.
6성취와 그 가운데 청법대중의 특징은 무엇인가?
《화엄경》의 교설인연, 달리 말해서 화엄교설의 내용이 무엇인가?
설주는 교설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삼매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연화장세계, 즉 화엄정토는 어떠한 세계이며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화엄교주인 비로자나불은 어떻게 해서 비로자나불이 되셨는가?
1. 세주묘엄품
먼저 초회 6품 중 첫품인〈세주묘엄품〉은 처음 법보리장회의 서품이면서《화엄경》전체의 서분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법보리 도량에서 정각을 이루시자 신통력으로 도량에는 모든 장엄이 조화되어 빛났다.
보현보살을 위시한 보살대중과 집금강신을 비롯한 39류 화엄성중 등 총 40중이 권속들과 함께 부처님 회상에 모여왔으며, 그들을 세주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은 각기 성취한 해탈문의 경계에서 본 부처님 세계를 게송으로 찬탄하여 불세계를 장엄하였으므로 첫품을〈세주묘엄품〉이라 하였다.
2. 여래현상품
세주들이 마음 속으로 40가지 질문을 일으키니 부처님께서 광명을 놓으셔서 답해 주고 계신다. 이를 여래현상이라고 한다. 그 질문 내용을 보면,
제불지(諸佛地) 제불경계 제불가지(加持) 제불소행(所行) 제불력 제불무소외 제불삼매 제불신통 제불자재 제불무능섭취(諸佛無能攝取) 제불안(眼) 제불이(耳) 제불비(鼻) 제불설(舌) 제불신(身) 제불의(意) 제불신광(身光) 제불광명 제불성(聲) 제불지(智) 세계해 중생해 법계안립해 불해(佛海) 불바라밀해 불해탈해 불변화해 불연설해 불명호해 불수량해(이상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세계에 대한 질문이며, 다음은 보살경계에 대한 질문이다.) 일체보살서원해 일체보살발취해 일체보살조도해 일체보살승해(乘海) 일체보살행해 일체보살출리해 일체보살신통해 일체보살바라밀해 일체보살지해(地海) 일체보살지해(智海)이다.
그러자 세존께서 그들의 생각한 바를 아시고, 입과 치아 그리고 미간백호로 광명을 놓으셨다. 광명을 입고 보살대중들이 모여오고 백호상에서 출현한 보살들이 부처님의 공덕을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여래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 주는 게송 중에서
부처님께서 법계에 충만하시어 佛身充滿於法界
널리 모든 중생들 앞에 나타나시니 普現一切衆生前
연을 따라 나아가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시되 隨緣赴感靡不周
항상 이 보리좌에 앉아 계시도다. 而恒處此菩提座
라는 게송은 법당 앞 주련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여래현상의 경계인 것이다.
그리고 이후《화엄경》의 교설은 전체적으로 이상의 40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되겠다. 따라서《화엄경》의 교설은 불·보살 경계임을 대방광불화엄이라 한 것을 알 수 있다.
3. 보현삼매품
《화엄경》에서는 각 회의 설주들은 제2회를 제외하고는 다 삼매에 들었다가 깨어나서 설법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 삼매에 들어간 것은 일체 부처님의 위신력과 비로자나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과 보살 각자의 선근력(善根力) 등에 의해 가능하다고 한다. 처음 보현보살의 경우도,
선재선재라, 선남자여, 그대가 이 일체 제불 비로자나여래장신 보살삼매에 능히 들었도다. 불자여, 이것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함께 그대에게 가피하심이며, 비로자나여래의 본원력인 까닭이며, 역시 그대가 닦은 모든 부처님의 행원력인 까닭이니라.
라고 하여, 보현보살이 행원을 닦았기에 부처님의 가피와 서원에 힘입어서 삼매에 들 수 있었음을 설하고 있다. 보현보살은 삼매 속에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로부터 온갖 지혜를 얻는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 모인 대중들 역시 보현보살과 함께 삼매에 들어서 설법을 들을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다.
보현보살을 비롯한 각 보살들은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써 도량과 모인 대중들을 관찰하고 부처님 법을 설하고 있다.
이러한 온갖 법문을 내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며
또 모든 여래의 위신력을 받들어 구족히 말하리라.
보살들이 보살과 중생들을 위해 설법함이 다 부처님의 위신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주변의 모든 장엄도 부처님의 신통이다. 부처님과 보살의 신통은 또 비로자나부처님이 모두 나타내신 것이며, 그 한없는 신통을 볼 수 있는 것 또한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서이다.
뿐만 아니라 경에서는 보살이 원을 일으켜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행도, 그리고 그 보살행에 의하여 중생이 교화받음도 다 부처님의 힘임을 보이고 있다.
보살은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서 시방세계 중생을 위할 수 있는 것이다. 보살이 발심하여 보살이 된 것도 부처님의 힘이다. 보살이 원을 세워 지혜와 자비를 충만케하여 중생을 위하여 보살행을 한 것도 곧 비로자나부처님이 본래 세우신 서원의 힘이며 일체 부처님께서 가피해 주시는 위신력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보현보살이 일체 부처님의 가피력과 비로자나여래의 본원력과 보현보살 자신의 행원력으로 일체 제불 비로자나여래장신 삼매에 입정하여 지혜를 얻고 출정한다. 이 보현보살의 입·출정 내용에서 우리는《화엄경》에서 보이는 자력과 타력이 둘이 아닌 세계를 만날 수 있다.《화엄경》은 보살의 수행과 중생의 신앙 즉 자력과 타력이 둘이 아니고, 보살의 수행 역시 자력과 타력이 둘이 아님을 보이고 있다.
4. 세계성취품
이 품은 보현보살이 세계해의 10사(十事)를 10종으로 설한 것이다.
보현보살이 대중들에게 세계해가 이루어진 인연을 위시하여 세계해의 의지하여 머무름·형상·체성·장엄·청정방편·부처님 출현·겁의 머무름·겁의 변천·차별없는 일 등, 세계해의 십사를 다시 10종으로 설하였다. 예를 들면 세계해가 이루어진 인연도 10종이 있다고 하니, 여래의 위신력과 중생의 업행과 보살의 원행 등으로 세계가 성취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5. 화장세계품
보현보살이 다시 화장세계의 장엄을 말하였다. 이 화장장엄세계해는 비로자나부처님께서 지난 세계해의 미진수겁 동안 보살행을 닦을 때에 낱낱 겁마다 부처님을 친근하고 큰 서원을 닦아서 깨끗하게 장엄한 것이다. 화장장엄세계해는 풍륜이 받치고 있는 향수해의 큰 연꽃 가운데에 있다. 장엄세계의 온갖 경계는 낱낱이 세계해 티끌수의 청정한 공덕으로 장엄한 까닭이다.
6. 비로자나품
보현보살이 비로자나불의 과거생 인연을 설하고 있다.
지난 옛적 승음세계에 일체공덕산수미승운 부처님이 출현하셔서 큰 광명을 놓아 중생을 조복하시니, 그 도성의 대위광태자가 부처님의 광명을 보고 예전에 닦은 선근의 힘으로 즉시 10종 법문을 증득하였다.
즉 일체 제불의 공덕륜삼매, 일체 불법의 보문다라니, 반야바라밀, 대자, 대비, 대희, 대사, 대신통(방편), 대원, 변재문 등이다.
그후 대위광태자는 여러 부처님을 친견 공양하며 법문을 듣고 장차 부처되리라는 수기를 받고 비로자나여래가 되었다고 한다.
이상을 요약해서 다시 부연해 보면,
첫째,〈세주묘엄품〉에서의 청법대중은 보현보살을 위시한 보살대중과 화엄성중들로서 이들은 세주라고 불리고 있다.《화엄경》에서는 회처를 달리할 때마다 수많은 청법대중이 다시 모여온다.
둘째,〈여래현상품〉에서는《화엄경》이 교설되는 인연이 설해지고 있다. 세주들이 가만히 40가지 질문을 드리고 있으니, 이를 크게 둘로 나누면 불세계와 보살세계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여 여래께서 광명으로 출현하시니 이것이 여래현상이며, 이에 대한 언설을 통한 보살들의 재설명이 화엄교설의 내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셋째, 초회 설주인 보살의 설법 능력은 삼매를 통해서 얻어지고 있으며 이 삼매는 자타불이력(自他不二力)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제불의 위신력과 비로자나불의 본원력 그리고 보현보살 자신의 행원력에 의해서이다.
넷째, 이 세계가 성취된 인연을 비롯한 세계해의 갖가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온갖 인연 중 부처님의 신통과 보살의 원행과 중생의 업행에 의해 일체 세계가 이루어짐을 밝히고 있다.
다섯째, 화엄정토인 연화장세계를 보이고 있다.
여섯째, 화엄교주인 비로자나불의 본생 수행법을 설하고 있다.
제5강 화엄경의 내용 -제2회 6품
제2회 6품에서는 신(信)에 대해서 교설하고 있다. 문수보살의 특수한 지혜에 의해서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을 성취케 해주는 법회인 것이다. 이 말씀을 만남에 있어서도 다음 몇 가지를 염두에 두게 한다.
무엇을 믿는가? 믿음의 대상,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어떤 의심을 떨쳐 버려야 믿음이 생기는가?
어떤 의심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믿음을 성취할 수 있는가?
믿는 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즉, 신(信)의 공용(功用)이 무엇인가?
7. 여래명호품
첫째, 무엇을 믿는가? 부처님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이 한량없음을 믿게 하고 있다. 먼저 제2회의 첫품이고 전체로서는 제7품인〈여래명호품〉에서는 부처님의 신업 경계가 한량없음을 보이고 있다.
세존께서 보광명전에서 신통을 나투시니 시방세계의 부처님 세계에 있는 보살들이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모여들었다. 동방 부동지불의 금색세계에 있는 문수사리보살을 비롯한 각수(覺首)·재수(財首)·보수(寶首)·덕수(德首)·목수(目首)·근수(勤首)·법수
(法首)·지수(智首)·현수(賢首) 등 9수(九首)보살들이 시방세계 티끌수만큼 많은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데 나아왔다.
그때 문수사리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말씀하였다. 부처님의 국토, 부처님의 출현 등이 헤아릴 수 없으니, 부처님께서 중생의 좋아함과 욕망이 같지 아니함을 아시고 알맞게 법을 설하여 조복하시기 때문이다. 여래는 사바세계에서 중생들로 하여금 제각기 알고 보게 하시므로 여래의 명호도 헤아릴 수 없음을 자세히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하시는 일이 한량없어서 부처님의 명호도 한량없는 것이다.
8. 사성제품
〈사성제품〉에서는 문수보살이 사바세계를 비롯하여 시방세계에서의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를 10가지씩 갖가지로 달리 설하니 모두 중생들의 마음에 좋아함을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조복하게 함인 것이다. 부처님의 구업(口業)세계가 한량없음을 뜻한다.
예를 들면 사바세계에서는 죄가 고성제(苦聖諦)이고 핍박·변해 달라짐〔變異〕·반연·모임〔聚〕·가시〔刺〕·뿌리를 의지함〔依根〕·허망하게 속임〔虛?〕·종기자리〔癰瘡處〕·어리석은 행〔愚夫行〕이 고성제이다.
고의 집성제〔苦集聖諦〕는 계박(繫縛)·멸괴(滅壞)·애착〔愛着義〕·망령된 생각〔妄覺念〕·취입(趣入)·결정(決定)·그물〔網〕·희론(戱論)·따라다님〔隨行〕·전도근(顚倒根)이다.
고의 멸성제〔苦滅聖諦〕는 무쟁(無諍)·티끌을 여읨〔離塵〕·적정(寂靜)·무상(無相)·무몰(無沒)·무자성(無自性)·무장애(無障碍)·멸(滅)·체진실(體眞實)·자성에 머무름〔住自性〕이다.
고의 멸에 이르는 도성제〔苦滅道聖諦〕는 일승·취적(趣寂)·이끌어 인도함〔導引〕·구경무분별·평등·짐을 벗음〔捨擔〕·나아갈 데 없음〔無所趣〕·성인의 뜻을 따름〔隨聖〕·선인행(仙人行)·십장(十藏) 등으로 교설되고 있다.
9. 광명각품
〈광명각품〉에서는 세존께서 두 발바닥으로 광명을 내어 시방 일체 세계를 비추시니 그 가운데 있는 것들이 모두 다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문수보살과 9수(九首)보살 등 시방세계 보살들이 나타나 게송으로 부처님 세계를 찬탄하였다. 부처님의 의업(意業)세계가 한량없음을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초회에서는 부처님께서 미간백호로 광명을 놓으셨으니 이는 깨달음의 세계를 보이기 때문이고, 여기서 발바닥으로 광명을 내시는 것은 신심이 불과에 오르는 바탕이 되기 때문으로 본다.
10. 보살문명품
〈보살문명품〉에서는 신심을 성취케 하기 위해 문수보살과 9수보살들이 문답을 통해 의심을 파하여 제하고 있다.
이 보살들의 10가지 문답은 십심심(十甚深)이라고 불리고 있다. 즉, 각수보살은 연기심심을 보이고, 재수보살은 교화심심을, 보수보살은 업과심심을 보이는 것이니, 이를 통해서 중생의 현실을 잘 파악하도록 하고 있다. 또 덕수보살은 설법심심, 목수보살은 복전심심, 진수보살은 정교(正敎)심심으로 불교화의 모양을 보이고 있다. 법수보살은 정행심심, 지수보살은 조도심심에 의해 교화에 의한 수행을 보이며, 현수보살은 일승심심, 문수보살은 불경계심심으로 구경불과의 불가사의함을 바로 알도록 설한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청정한 신심〔淨信〕을 개발토록 하였다.
이러한 보살들의 문답을 몇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문수보살이 각수보살에게 물었다. 마음의 성품〔心性〕은 하나인데 어찌하여 갖가지 차별을 보는가? 각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다.
법의 성품 본래 남이 없지만 法性本無生
시현하여 남이 있으니 示現而有生
이 가운데 능히 나타냄도 없고 是中無能現
또한 나타난 물건도 없도다. 亦無所現物
부처님의 교법은 하나인데 중생들이 보고 어찌하여 즉시에 온갖 번뇌의 속박을 끊지 못하는가?
마치 나무를 비벼 불을 구함에 如鑽燧求火
불붙기 전에 자주 쉰다면 未出而數息
불기운도 따라서 없어지나니 火勢隨止滅
게으른 자 역시 그러하도다. 懈怠者亦然
〈근수보살〉
부처님 말씀처럼 만약 중생이 정법을 받아 지니면 일체 번뇌를 끊을 수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정법을 받아 지니되 끊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어떤 사람이 남의 보물을 세어도 如人數他寶
스스로는 반전도 없는 것같이 自無半錢分
법을 닦아 행하지 아니하면 於法不修行
많이 들은 것만도 그러하도다. 多聞亦如是
〈법수보살〉
불법 가운데는 지혜가 제일인데 여래께서는 무슨 까닭에 중생을 위하여 보시를 찬탄하고 혹은 내지 지혜를 찬탄하며 자비희사를 찬탄하시는가?
인색하면 보시를 찬탄하고 ?者爲讚施
금지함을 깨뜨리면 계를 찬탄하고 毁禁者讚戒
성 잘내면 인욕을 칭찬하고 多瞋爲讚忍
나태하면 정진을 찬탄하시도다. 好懈讚精進
〈지수보살〉
부처님께서는 오직 한길로써 벗어나 여읨〔出離〕을 얻으셨는데 지금보니 어찌하여 모든 부처님 국토에 있는 온갖 일이 여러 가지로 같지 아니한가?
문수여, 법이 항상 그러하여 文殊法常爾
법왕은 오직 한 법뿐이니 法王唯一法
일체 걸림없는 사람은 一切無 人
한길로 생사에서 벗어나니라. 一道出生死
〈현수보살〉
이 게송은 원효대사가 대중 속으로 회향하러 들어가면서 읊었다는 유명한 게송이다.
끝으로 여러 보살들이 문수보살에게 말씀하였다. 우리들이 아는 것을 말하였으니, 묘한 변재로 여래께서 소유하신 경계를 말씀해 주소서.
여래의 깊은 경계는 如來深境界
그 양이 허공과 같아서 其量等虛空
일체 중생들이 들어가되 一切衆生入
실로 들어간 바가 없도다. 而實無所入
〈문수보살〉
11. 정행품
보살이 어떻게 하면 신(身)·구(口)·의(意) 3업이 수승하게 할 수 있는지 지수보살이 문수보살에게 질문하였다. 이에 문수보살이 답하고 있다. 보살이 마음을 잘 쓰면〔善用其心〕 온갖 승묘한 공덕을 얻어 부처님도에 머물며 제2도사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에 140원(願)을 일으키도록 권하고 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원만 소개해 본다.
보살이 집에 있을 때에는 菩薩在家
마땅히 이같이 원하라 當願衆生
중생들이 집 성질이 공함을 알아 知家性空
그 핍박을 면하여지이다. 免其逼迫
보시를 할 때에는 若有所施
이같이 원하라 當願衆生
중생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一切能捨
마음에 애착이 없어지이다. 心無愛着
머리털과 수염을 깎을 때에는 체除鬚髮
이같이 원하라 當願衆生
중생들이 번뇌를 아주 버리고 永離煩惱
마침내 적멸하여지이다. 究竟寂滅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할 때는 自歸於佛
이같이 원하라 當願衆生
중생들이 불종자를 잇도록 紹隆佛種
위없는 뜻을 낼 지어다. 發無上意
스스로 가르침에 귀의할 때는 自歸於法
이같이 원하라 當願衆生
중생들이 경장에 깊이 들어가 深入經藏
지혜가 바다와 같게 하여지이다. 智慧如海
스스로 스님들께 귀의할 때는 自歸於僧
이같이 원하라 當願衆生
중생들이 대중을 통솔하고 다스리되 統理大衆
모든 것에 장애가 없어지이다. 一切無
잠에서 처음 깰 때는 睡眠始寤
이같이 원하라 當願衆生
중생들이 온갖 지혜 깨닫고서 一切智覺
시방세계를 두루 살펴지이다. 周顧十方
불자들이 이같이 마음을 쓰면 온갖 뛰어나고 묘한 공덕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한다.
12. 현수품
문수보살이 청정행의 대공덕을 말하고 나서 다시 보리심의 공덕을 보이려고 현수보살에게 수행공덕을 말하게 하였다. 이에 현수보살이 신심의 공덕과 공능을 게송으로 설하고 있다.
신심은 도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라 信爲道元功德母
모든 선한 법을 길러내며 長養一切諸善法
의심의 그물 끊고 애정 벗어나 斷除疑網出愛流
열반의 위없는 도 열어 보이도다. 開示涅槃無上道
믿음은 썩지 않는 공덕의 종자 信爲功德不壞種
믿음은 보리수를 생장케 하며 信能生長菩提樹
믿음은 수승한 지혜 증장케 하고 信能增益最勝智
믿음은 온갖 부처 시현하도다. 信能示現一切佛
이상의 내용을 부연해 보면,
첫째, 믿음의 대상과 내용은 부처님의 신업과 구업과 의업의 경계가 한량없음이다. 이에 대해서〈여래명호품〉과〈사성제품〉그리고〈광명각품〉에서 설하고 있다.
둘째,〈보살문명품〉에서 믿음을 성취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의심을 밝히고 있다.
셋째, 믿음을 성취하기 위해 마음을 잘 쓰도록 하며, 140원을 세우도록 한다. 이 원으로 자신의 신·구·의 삼업을 잘 다스려 나가면 제2도사가 될 것이라고 한다.
넷째, 믿음의 공용이 다양하게 교설되고 있다.
이러한 믿음은《화엄경》에서 모든 보살도를 튼튼히 받쳐주는 기초가 된다. 이 신심이 만족하면 그때가 바로 부처되는 때이므로 이를 신만성불(信滿成佛)이라 한다.
제6강 화엄경의 내용 -해인삼매
〈현수품〉에는 신심이 원만 성취되면 얻어지는 신심의 공능으로서 삼매가 설해져 있다.《화엄경》의 총정인 해인삼매도 교설되어 있다.
이 해인삼매는 어떠한 삼매이며, 어떻게 모든 삼매 중 으뜸인 것으로 부각되어 갔는가. 그리고 해인삼매를 얻게 되면 어떤 덕용(德用)이 있으며, 그 삼매에 들어갈 수 있는 인연은 무엇인가.
〈현수품〉에는 신심이 원만 성취되면 얻어지는 신심의 공능으로서 10종 삼매〔圓明海印三昧門·華嚴妙行三昧門·因陀羅網三昧門·手出廣供三昧門·現諸法門三昧門·四攝攝生三昧門·窮同世間三昧門·毛光覺照三昧門·主伴嚴麗三昧門·寂用無涯三昧門〕가 보이며, 그 첫째로《화엄경》의 총정(總定)인 해인삼매에 대하여 교설되고 있다.
석존의 깨달음은 명상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명상은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그 가운데 삼매는 대승경전의 말씀이 교설되는 주요 방편문으로 부각되었다. 원시경전에서도 4선 8정(四禪八定)이나 삼삼매 등 중시되지 않은 바 아니나 대승경전에서는 무량한 삼매가 수없이 나타난다. 특히 부처님의 깨달음을 전하고 있는 모든 교설이 삼매에 들고 나서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중 해인삼매는《화엄경》의 총정(總定)으로까지 주시되고 있다. 입·출정 후에 설해지는 다른 경전과는 달리《화엄경》은 해인삼매 속에서 설해진 것으로 주지되고 있다.
삼매는 sam dhi(사마디)를 음사한 것으로 삼마지(三摩地)로 음역되고도 있다. 그러나 그외에도 삼마제·삼마발제·사마타·삼마혜다·타연나·디야나·선나 등으로 음사되고 있다. 의역으로서는 흔히 심일경성(心一境性)의 상태로서 정(定)이라 번역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사(正思)·등지(等持)·지(止)·등인(等引)·정려(精慮)·사유수(思惟修)·정정(正定) 등으로 번역되는 많은 용어가 정(定)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서는 지혜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그 자체가 지혜까지도 포용된 의미를 지니기도 하면서, 삼학(三學)의 하나로 매우 중시되어 왔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일체 모든 삼매의 근본이며 그 삼매를 다 포섭한다는 해인삼매는 경에서 해인삼마지(海印三摩地)·해인정(海印定)·대해인삼매(大海印三昧)라고도 불리고 있는데, 이는 S garamudr Sam dhi(사가라무드라 사마디) 또는 S gara Sam ddhi(사가라 삼릿디)의 음사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면 경전에 나타난 해인삼매의 전반적인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해인삼매의 용례
해인삼매는《화엄경》이외의 다른 경전에도 물론 보인다. 예를 들면《대집경》,《대보적경》등 많은 경전에 설해져 있으며 화엄가들도 이 경전들을 인용하여 해인삼매를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해인삼매는《화엄경》의 세계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삼매로 간주되고 있다. 해인삼매는〈현수품〉·〈십지품〉·〈여래출현품〉·〈입법계품〉등에서 교설되고 있다.
2. 해인삼매의 의미
해인삼매는 대해(大海)에 비유하여 붙여진 삼매의 이름이다. 그러면 해인삼매를 큰 바다에 비유하여 명명한 그 구체적 비유의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바다에 모든 영상이 다 나타나는 것처럼 일체 색상이 보리심해 중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으므로 해인삼매라 한다.
섬부주의 모든 유정 등 색류가 다 바다 가운데 영상을 나투므로 이름이 대해인 것과 같이, 이 같은 유정의 일체 심색(心色)과 음성 등 모든 영상이 다 보리심해 중에 나타나므로 해인삼마지라 한다
둘째, 모든 물〔水〕의 흐름이 다 대해에 들어가는 것처럼, 한량없는 일체 제법이 다 해인삼매 중에 들어가므로 해인이라 한다.
대해수가 무량하여 그 양을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이 일체 제법도 그 양을 헤아릴 수가 없으며, 또 일체 중류(一切衆類)가 대해 가운데 다 들어가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처럼 일체 법을 인함이 모두 제법해인에 들어가며 이 해인 중에서 일체 법을 보게 된다.
셋째, 대해에 모든 용왕·신중이 머물며 진귀한 보배가 숨겨져 있는 것과 같이, 이 삼매도 일체 법 및 법선교(法善巧)가 갈무리된 곳이므로 해인삼매라 한다.
이러한 해인삼매는 의상뿐 아니라 법장, 징관을 위시하여 화엄가들이 매우 중시하였으니 해인삼매를《화엄경》의 총정으로까지 부각시키고 있다.《화엄경》전체가 바로 해인삼매 속에서 설해진 말씀이라는 것이다.
《화엄경》이 의지하고 있는 해인삼매는 십불(十佛)의 해인이고 석가불해인이며 정각해인이고 제불여래응공등정각보리며 무상보리해(無上菩提海)이다. 그래서 해인은 진여본각이며 일체지·대지(大智)·증분내증(證分內證)·여래성기심(如來性起心)이다. 응화하되 나투는 바가 없어 보리의 무심돈현(無心頓現)이 해인삼매인 것이다.
해인삼매가 모든 삼매를 섭수하는 것처럼《화엄경》의 해인삼매 또한 제경의 해인삼매를 섭수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3. 해인삼매의 대용(大用)
해인삼매를 체(體)로 하여 일어나는 해인삼매의 상(相)·용(用)은, 해인삼매를 왜 해인삼매라 하는지를 가리키는 해인삼매의 의미와 별개인 것은 아니다. 해인삼매는 여래지(如來智)로 일체 색상을 인현(印現)할 뿐만 아니라 또한 여래지를 의지하여 만상을 몰록 나투는 업용이 있다. 그러한 작용이 있어서 그 같은 의미를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해인삼매의 수승한 묘용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기로 한다. 화엄부의 제 문헌에서는 해인삼매의 대용(大用)이라는 용어 대신에 업용(業用)·덕용(德用)·승용(勝用) 등의 말도 자주 보인다.
《화엄경》에서는 보살행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제불보리의 경지에서 불행(佛行)으로 나투어지고 있다.
〈현수품〉에서는 현수보살이 10종삼매의 업용을 게송으로 찬탄하고 있는데, 처음에 해인삼매의 대용을 게송으로 찬탄하고 있다. 해인삼매의 대용을 크게 다섯으로 구분해 보기로 한다.
부처로 시현하고 법장을 설한다.《화엄경》의 해인삼매는 불보리정각(佛菩提正覺)해인이다. 어디든 부처 없는 국토에 시현하여 정각을 이루고, 법을 알지 못하는 국토에서는 묘법장을 설한다.
일념경에 시방에 두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달빛 그림자가 두루하지 않음이 없는 것같이 무량방편으로 군생을 교화한다. 분별도 없고 무념인지라 한 찰나에 시방세계에 두루 다녀 무공용(無功用)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
일체시 일체처에서 8상을 나툰다. 시방세계 가운데 염념이 시현하여 성불하고 정법륜을 굴리며 열반에 들고 내지 사리를 나누어 중생 위해 보인다.
성문·연각 등 삼승교를 열어 삼승문으로써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 무량겁 동안 무량중생을 제도함에 있어 근기에 따라 성문·연각 등 삼승 방편문을 시설하기도 한다.
중생들의 좋아함을 따라 모든 모습으로 다 시현한다. 혹은 남자로 혹은 여자로 나타나고 갖가지 몸을 그 좋아함을 따라서 다 보게 한다.
중생의 형상, 행업과 음성도 한량없어서 이를 따라 일체를 다 나툰다. 이러한 모든 불사가 곧 해인삼매의 위신력이다. 제불보리가 널리 일체 중생의 심념(心念)과 근성(根性)과 욕락을 나투되 나투는 바가 없으니 정각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찰나찰나마다 중중무진세계에 일체 모습으로 시현하여 끝없는 중생을 다 제도하는 것이 바로 해인삼매의 위신력에 의한 해인삼매의 수승한 덕용이라는 것이다.《화엄경》에서는 한 세계에 한 부처로 시현하는 것이 아니라, 중중무진으로 응현하는 것이다. 만법이 다 해인병현(海印炳現)이요, 해인돈현(海印頓現)이 다 불현(佛現)이다. 시현해도 시현함이 없는 무심돈현이요, 응화해도 응화함이 없는 무공용행이다. 무량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 법 설함을 시설한 것은 사바세계에서의 교화방편은 음성 설법이 중요함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4. 해인삼매에 드는 인연
해인삼매가 불가사의한 경계인 만큼, 해인삼매에 들어갈 수 있는 인연 또한 헤아리기 어려우리란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그래서인지 경에서 명확하게 해인삼매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두드러지게 제시한 곳은 오히려 드문 것 같다.
《대집경》에서는 제일 먼저 다문(多聞)을 강조하고 있다. 만약 보살이 많이 듣기를 바다와 같이 하면 지혜를 성취하여 항상 부지런히 법을 구하리라고 한다. 다문을 성취한 후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며 그 설법선근으로 해인삼매에 회향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정진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대보적경》에서도 모든 법문을 잘 수행함으로써 해인삼매를 얻는다고 함은 같다. 이처럼 법문을 듣고 설법함이 해인삼매를 얻는 주된 방편으로 강조되어 있는데, 이는 화엄에서도 마찬가지다.《대방광총지보광명경》에서는 해인삼매가 입으로 좇아 나온다〔海印三昧口中生〕고까지 역설되고 있다.
《화엄경》에서는 각 회마다 설주보살이 삼매에 들어 지혜를 얻고는 출정한 후에 설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삼매력으로 설법한 모든 것이 해인삼매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설주보살들의 입정인연도 간과할 수 없다고 하겠으니, 보현보살을 위시하여 설주되는 보살이 삼매에 들 수 있음은 3종인연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시방 일체 제불의 가지력(가피력), 둘째는 비로자나여래의 본원력(위신력), 셋째는 보살이 일체 제불의 행원력을 닦은 선근공덕력 또는 지혜력에 의해서이다. 보살들이 닦은 행원(선근공덕력)은 입정의 인(因)이며, 주불과 제불의 본원력 가피력은 연이 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항상 제불보살을 친근해야 해인삼매를 구족 성취하게 됨도 경에서는 보이고 있다.
〈현수품〉에서는 해인삼매 등 10삼매의 대용은 발심수행한 수승한 덕의 하나로서 설해진 것이다. 그런데 발심은 신심에 의해서 가능하니 발심성불은 신만성불인 것이다. 그 신심은〈정행품〉의 140원을 성취한 정신(淨信)을 말한다. 따라서 입정은 행원의 광대한 공덕행인 보현행덕으로 가능하며, 그 보현행덕은 무방대용인 과(果)와 둘이 아닌 인행(因行)인 것이다.
〈현수품〉에는 해인삼매 외에 아홉 삼매에 대한 설명도 보인다. 그 중 화엄삼매와 방망삼매(方網三昧)에 대해서만 잠깐 언급해 보면, 우선 화엄삼매이다. 해인삼매가 만상이 다 나타나는 진여본각으로 설명되었다면 화엄삼매는 널리 보살만행을 닦아서 보리를 증득하는 것이다. 해인삼매가 불과무애라면 화엄삼매는 보살만행으로서의 바라밀행이다.
다음 방망삼매(方網三昧)는 동서 등의 방위나 육근과 육경, 남녀 노소, 비구 비구니, 중생과 부처, 미진과 일체처 등을 막론하고 온갖 곳에서 입정 출정함이 걸림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현수품〉에서는 동방에서 바른 정에 들어가 서방에서 정으로 좇아 나오며, 서방에서 바른 정에 입정하여 동방에서 정으로 좇아 나온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안근에서 입정하여 색진에서 출정하며, 색진에서 입정하여 안식에서 출정한다.
또 동자신에서 입정하여 장년신에서 출정하며, 장년신에서 입정하여 노년신에서 출정하며, 노년신에서 입정하여 선녀신에서 출정하며, 선녀신에서 입정하여 선남신에서 출정하며, 선남신에서 입정하여 비구니신에서 출정하며, 비구니신에서 입정하여 비구신에서 출정하며, 비구신에서 입정하여 학무학에서 출정하며, 학무학에서 입정하여 벽지불에서 출정하며, 벽지불에서 입정하여 여래신에서 출정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많은 삼매가 신심의 덕용으로 교설되어 있는 것이다.
제7강 화엄경의 내용 -제3회 6품
제3회 6품은 수미산정의 제석천궁전에서 법혜보살에 의하여 십주법문이 설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주목하게 하는 점으로서는
첫째, 보살의 주처이다.
십주의 자리는 어디이며 십주보살행은 어떠한 것인가?
둘째, 발심의 인과 연은 무엇이며,
초발심시변정각의 경계는 무엇인가?
셋째, 무엇이 범행인가? 화엄의 관행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13. 승수미산정품
먼저 제3회 첫품인〈승수미산정품〉은 세존께서 보리수 아래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수미산에 오르셔서 제석천의 궁전으로 향하신 것으로 시작된다. 제석천왕이 멀리서 보고 궁전을 장엄하고 사자좌를 놓고 부처님을 맞이하였다. 부처님께서 결가부좌하시니 시방세계에서도 그와 같았다. 이는 하나가 곧 일체〔一卽一切〕인 경계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14. 수미정상게찬품
부처님의 신력으로 법혜(法慧)보살을 비롯한 일체혜·승혜·공덕혜·정진혜·선혜(善慧)·지혜(智慧)·진실혜·무상혜·견고혜보살 등 10혜보살이 십불세계에서 부처님 계신 데 이르렀다.
보살의 돌림자가 모두 지혜 혜(慧)인 것은 지혜가 보살행의 바탕이 됨을 의미한다. 지혜가 없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하겠다.
그때 세존께서 두 발가락으로 광명을 놓아 수미산 꼭대기를 비추시니 제석천 궁전안의 부처님과 대중들이 그 속에 나타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법혜보살을 위시한 모든 보살들이 그 경계를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우리들은 지금 부처님께서 我等今見佛
수미산정에 계심을 보며 住於須彌頂
시방에서도 모두 그러하니 十方悉亦然
여래의 자재한 힘이로다. 如來自在力
온갖 법이 나지도 않고 一切法無生
온갖 법이 멸하지도 않나니 一切法無滅
만약 능히 이같이 알면 若能如是解
부처님께서 항상 현전하시리라. 諸佛常現前
온갖 법들이 了知一切法
자성이 없는 줄 알지니 自性無所有
이렇게 법의 성품 안다면 如是解法性
곧 노사나불을 뵈오리라. 卽見盧舍那
이 게송은 자장법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 기도하고 받은 게송이다.
15. 십주품
법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보살무량방편삼매에 들었다가 일어나서 보살이 머무는 주처를 설하였다. 보살이 머무는 곳이 넓고 커서 법계와 허공과 같다. 보살은 삼세의 여러 부처님 집에 머물며〔住三世諸佛家〕, 이 보살이 머무는 곳에 10가지〔十住〕가 있다고 한다. 10주는 초발심주(初發心住)·치지주(治地住)·수행주(修行住)·생귀주(生貴住)·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정심주(正心住)·불퇴주(不退住)·동진주(童眞住)·법왕자주(法王子住)·관정주(灌頂住)이다.
(1) 초발심주(初發心住)는 보살이 처음 발심하는 자리이다. 발심의 인이 되는 10법과 발심의 연, 그리고 초발심주에서 닦는 10법을 차례로 교설하고 있다.
먼저 발심의 10인은 보살이 부처님의 형모가 단엄하심을 보고 발심하며, 내지는 중생들이 심한 고통 받음을 보거나, 혹은 부처님의 광대한 불법을 듣고 보리심을 내어 온갖 지혜를 구한다.
초발심주의 소연(所緣)인 여래의 10가지 수승한 지혜는 일체지로서 10지 또는 10력을 가리키는 10종지력(十種智力)이다.
처비처지(處非處智)이니, 옳고 그른 도리가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선악업보지(善惡業報智)이니, 과거·현재·미래에 선업과 악업으로 받는 과보가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제근승열지(諸根勝劣智)이니, 근기가 예리하고 둔함을 아는 지혜이다.
종종해차별지(種種解差別智)이니, 갖가지 이해를 아는 지혜이다.
종종계차별지(種種界差別智)이니, 여러 가지 경계를 아는 지혜이다.
일체지처도지(一切至處道智)이니, 온갖 곳에 이르러 갈길을 아는 지혜이다.
제선해탈삼매지(諸禪解脫三昧智)이니, 모든 선정·해탈·삼매의 때묻고 깨끗함이 일어나는 시기와 시기 아님을 아는 지혜이다.
숙명무애지(宿命無碍智)이니, 온갖 세계에서 지난 세상에 머물던 일을 기억하는 지혜이다.
천안무애지(天眼無碍智)이니, 천안통의 지혜이다.
삼세누보진지(三世漏普盡智)이니, 누진통의 지혜이다. 모든 번뇌가 다한 자리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보살이 부처님의 공덕을 배우며, 중생의 귀의할 곳이 되는 등 10가지 법 배우기를 권하고 있다.
(2) 치지주(治地住)는 심지(心地)를 다스리는 자리이다. 10심으로 자기 마음자리를 다스리니, 보살이 중생들에게 10가지 마음을 낸다. 이른바 이익심·대비심·안락심·안주심·연민심·섭수심·수호심·동기심(同己心)·사심(師心)·도사심(導師心) 등이다.
(3) 수행주(修行住)에서는 10가지 행으로 일체 법을 관찰하여 수행한다. 즉 온갖 법이 무상·고·공·무아·무작(無作)·무미(無味)·이름 같지 않음〔不如名〕·처소가 없음〔無處所〕·분별을 여읨〔離分別〕·견실하지 않음〔無堅實〕을 관한다.
(4) 생귀주(生貴住)는 부처님 교법으로부터 나서 귀한 자리이다. 보살이 성인의 교법으로부터 나서 10가지 법을 성취하여 마음이 평등함을 얻는다. 10가지 법이란 영원히 부처님의 처소에서 퇴전하지 아니하며, 깊이 청정한 신심을 내며, 법을 잘 관찰하며, 중생과 국토와 세계와 업행과 과보와 생사와 열반을 잘 아는 것이다.
(5)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는 보살이 선근을 닦아 방편을 구족하는 자리이다. 보살이 닦는 선근은 모두 온갖 중생을 구호하며 내지 열반을 증득하게 하려는 것이다.
(6) 정심주(正心住)는 마음이 안정하여 움직이지 않는 자리이다. 보살이 부처님을 찬탄하거나 훼방하는 등 10가지 법을 듣고도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한다.
(7) 불퇴주(不退住)는 보살이 부처님이 있다거나 없다는 등 10가지 법을 듣고도 마음이 견고하여 퇴전하지 아니하는 자리이다.
(8) 동진주(童眞住)란 동자와 같이 순진한 자리이다. 보살이 10가지 업에 머무는 자리이다. 즉 몸의 행〔身行〕과 말의 행〔語行〕과 뜻의 행〔意行〕이 잘못됨이 없고, 마음대로 태어나고, 중생의 갖가지 하고자 함〔欲〕과 해(解)와 계(界)와 업(業)과 세계의 성괴를 알고, 신통이 자재하고 다니는 데 걸림이 없다.
(9) 법왕자주(法王子住)는 법왕의 소행을 아는 왕자의 자리이다. 10가지 법을 잘 아니, 중생의 수생(受生)과 번뇌의 일어남과 습기가 상속함과 행하는 방편과 무량법과 위의와 세계차별과 전·후제(前後際)의 일과 세제(世諦)를 연설함과 제일의제 연설함을 잘 아는 것이다.
(10) 관정주(灌頂住)는 왕자가 관정식에서 왕위에 취임하는 것같이 보살이 10가지 지혜, 즉 일체종지를 얻어 주(住)의 최고 자리에 앉는다.
이러한 십주행은 십지행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다 십지에 포섭된다. 별행경에서는《십주경》,《십지경》은 함께 번역되어 쓰이고도 있다.
16. 범행품
〈범행품〉에서는 특히 염의 출가자를 위한 보살행으로서 10종의 관행법이 설해지고 있다.
정념천자가 법혜보살에게 말하였다.
"불자여, 온 세계의 모든 보살들이 여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물든 옷을 입고 출가하였으면 어떻게 해야 범행이 청정하여 보살의 지위로부터 위없는 보리의 도에 이르리이까?"
법혜보살이 이러한 정념천자의 질문을 받고 출가자가 범행을 닦아 위없는 보리도에 이르는 10가지 법을 설하고 있다. 즉 보살이 범행을 닦을 때에 10가지 법으로 반연을 삼고 뜻을 내어 관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10가지 법이란 몸〔身〕과 몸의 업〔身業〕·말〔語〕·말의 업〔語業〕·뜻〔意〕·뜻의 업〔意業〕·불(佛)·법(法)·승(僧)·계(戒)이다. 이에 대하여 무엇이 범행인가 관찰하도록 한다.
예를 들면 만일 몸이 범행이라면 범행이란 냄새나는 것이며, 부정한 것이며, 내지 송장일 것이다. 만일 신업이 범행이라면 범행이란 앉는 것, 눕는 것, 가는 것 등일 것이다. 만일 말이 범행이라면 범행이란 음성·입술·고저 등일 것이며, 만일 말의 업이 범행이라면 범행이란 인사·칭찬·헐뜯는 것일 것이며, 내지 만일 계가 범행이라면 범행이란 계단 아사리 삭발 걸식 등일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면 몸에 취할 것이 없고 닦는 데 집착할 것이 없고 법에 머무를 것이 없으며 업을 짓는 이도 과보를 받는 이도 없을 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범행인가? 범행은 어디서 왔으며, 누구의 소유인가? 이렇게 관찰하면 범행이란 법은 얻을 수 없으며, 삼세의 법이 다 공적하며, 뜻에 집착이 없으며, 내지 부처님 법이 평등함을 아는 까닭에 청정한 범행이라 한다.
만일 보살들이 이렇게 관행하여 모든 법에 두 가지 견해〔二解〕를 내지 아니하면 온갖 부처님 법이 빨리 현전해서 처음 발심할 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며, 온갖 법이 마음의 성품임을 알며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른 이를 말미암아 깨닫지 아니하리라고 한다.
여기서도 부처님의 처비처지(處非處智) 등 10법을 닦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17. 초발심공덕품
보살이 처음 보리심을 일으킨 공덕은 헤아릴 수 없어 부처님만이 아실 것이니, 발심함으로써 마땅히 부처가 될 것이기 때문임을 법혜보살이 제석천왕의 질문에 따라 점증적으로 설하고 있다.
18. 명법품
십바라밀(十波羅蜜)로 보살행을 청정하게 하고 있다.
법혜보살이 정진혜보살의 질문에 의해 보살로 하여금 10가지 바라밀법으로 행하는 일이 청정케 함을 설하고 있다.
십바라밀은 이 명법품에서만 설한 것이 아니라《화엄경》의 보살행 전체를 십바라밀로 포섭할 수 있다. 따라서 화엄보살행을 다 포섭하는 십지보살행도 역시 십바라밀로 묶어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10행에서 다시 한 번 언급하기로 한다.
제8강 화엄경의 내용 -제4회 4품
제4회 4품에서는《화엄경》의 유심설과 보살의 십바라밀행에 특히 주목하게 된다.
19. 승야마천궁품
세존께서 보리수 아래와 수미산 꼭대기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야마천궁으로 향하셨다. 야마천왕이 멀리서 보고 즉시 보연화장 사자좌를 만들고 맞이하였다. 천왕은 지난 세상 부처님 계신 데서 선근 심은 것을 생각하고 불공덕과 야마천궁의 길상함을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20. 야마궁중게찬품
상주안불 친혜(親慧)세계의 공덕림(功德林)보살을 위시하여 시방불세계의 수많은 보살들이 부처님 계신 곳에 모여들자, 세존께서 두 발등으로 광명을 놓아 시방세계를 비추셨다. 여기에 모여든 보살이 수풀 림(林)자가 돌림자가 된 것은 보살의 공덕행이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쌓임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공덕림보살을 위시한 열 분의 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게찬하였다. 이중에 정진림보살이 부처님의 차별없는 평등한 대지혜를 말씀하는 내용 가운데 수를 헤아리는 비유가 나온다. 이는 후에 화엄교학에서 상입상즉을 설명하는 '수십전유(數十錢喩)'로 체계화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법계연기설에서 살피기로 한다.
그보다 여기서는 각림보살의 게송을 살펴보겠다. 그 10게송은 유심게(唯心偈)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각림보살은《육십화엄》에서는 여래림보살로 번역되어 있다.
유심게에서는 마치 그림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다고 하여, 마음을 화가에 비유하고 있다. 후반부 다섯 게송만 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이 화가와 같아서 心如工畵師
모든 세간을 그려내나니 能畵諸世間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五蘊實從生
무슨 법이든 짓지 못함이 없도다. 無法而不造
마음과 같아 부처도 그러하고 如心佛亦爾
부처와 같아 중생도 그러하니 如佛衆生然
마땅히 알라, 부처와 마음이 應知佛與心
그 체성 모두 다함이 없도다. 體性皆無盡
마음이 모든 세간 짓는 줄을 若人知心行
아는 이가 있다면 普造諸世間
이 사람 부처를 보아 是人卽見佛
부처의 참성품 알게 되도다. 了佛眞實性
마음이 몸에 있지 않고 心不住於身
몸도 마음에 있지 않으나 身亦不住心
불사를 능히 지어 而能作佛事
자재함이 미증유로다. 自在未曾有
만일 어떤 사람이 若人欲了知
삼세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三世一切佛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 應觀法界性
모든 것 오직 마음이 지어냄이로다. 一切唯心造
《화엄경》의 대의를 '통만법 명일심'이라고 이해한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일심 또는 유심사상은《화엄경》의 핵심 내용의 하나가 된다.《화엄경》의 일심사상은 이 유심게와〈십지품〉의 제6현전지 그리고〈여래출현품〉의 10종 성기심(性起心)이 그 주요 소의처가 된다.
〈십지품〉에서는 삼계에 있는 것이 오직 한마음〔三界所有 唯是一心〕이라 하고 있다.〈여래출현품〉에서의 마음은 여래심이며 여래성기심이다. 여래심은 10종으로 교설되어 있다.
이곳〈야마궁중게찬품〉의 유심게에 보이는 일심은 오온과 세간을 만들어내는 일심이다. 위의 두 번째 게송은《육십화엄》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음과 같아 부처도 그러하고 如心佛亦爾
부처와 같아 중생도 그러하니 如佛衆生然
마음과 부처와 중생 心佛及衆生
이 셋이 차별이 없다. 是三無差別
그리고 마지막 게송의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는 '마땅히 마음이 모든 여래를 짓는 줄 관하라〔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고 되어 있다. 여기서의 일심은 부처를 만드는 마음이므로 진심이다. 따라서〈야마궁중게찬품〉에서의 마음은 표면적으로는 진(眞)과 망(妄)에 통한다.
《화엄경》은 마음을 내세우는 모든 종파의 소의경전이 되어왔다. 마음을 망심으로 이해한 유식의 제8아뢰야식에 의한 뢰야연기와 진망화합심(眞妄和合心)인 여래장심에 의한 여래장연기의 소의경전도 되고 있다. 그러나 화엄종에서는《화엄경》의 일심을 여래장 자성청정심과 여래성기심으로 이해하여 여래성기심인 진여심이 그 체성이 되는 법계연기를 체계화시켰다.
그리하여 화엄가들은 이 일심을 연기해서 나타난 일체 존재인 일진법계의 체로 보고, 만덕을 구족한 일심이며 원융한 일심이며 만유를 다 포섭하는 일심으로 보았다.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의 일심은 무애평등의 일심인 것이다.
마지막 게송인 '일체유심조'는 우리나라에서《화엄경》의 수많은 게송 가운데 제일 으뜸가는 게송으로 수지되어 왔다. 아침 쇠송에 '화엄경제일게 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華嚴經第一偈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어서 이 게송은 지옥고를 타파한다는 뜻에서 쇠송에서는 파지옥진언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에서도《청량소초》에 의하면《찬령기》에 소개되어 있는 전설적인 얘기와 함께 잠시 수지하여도 능히 지옥고를 파한다고 하였다. 즉, 문명(文明) 원년에 왕명간(王明幹)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소에 착한 일을 한 것 없이 병환으로 죽게 되어 두 사람에게 인도되어 지옥문 앞에 끌려갔다. 지옥문 앞에 한 스님이 있음을 보았는데 지장보살이라 하였다. 그 스님이 왕씨에게 게송 하나를 외우게 하였는데 바로 이 일체유심조 게송이었다. 그리고 이 게송을 외우면 지옥고까지 배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왕씨가 이 게송을 외우고 들어가 염라왕을 만나보니 염라왕이 묻기를 무슨 공덕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왕씨가 답하기를 오직 한 사구게만 수지하였다고 하고 좀전에 있었던 일을 말하니 염라왕이 더 살다오라고 내보냈다. 왕씨가 이 게송을 외울 때 외우는 소리가 들리는 곳에 있었던 사람이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었다고 한다. 왕씨가 3일 만에 소생하여 이 게송을 기억해서 외웠다. 그리고 공관사(空觀寺)의 승정(僧定)법사에게 이 일을 말하니 법사가 그 게송이 바로《화엄경》의〈야마궁중게찬품〉에 나오는 이 게송임을 밝혀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일체유심조 게송은《화엄경》신앙의 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야마궁중게찬품〉에 이어서〈십행품〉이 나온다. 그러므로
〈십행품〉의 10행은 일체유심조의 경계임을 추정할 수 있다.
21. 십행품
공덕림보살이 선사유삼매에 들었다가 깨어나 보살의 10가지 행을 말씀하였다. 즉 즐거운 행〔歡喜行〕·이로운 행〔饒益行〕·어김이 없는 행〔無違逆行〕·굽힘이 없는 행〔無屈撓行〕·어리석거나 어지러움이 없는 행〔無痴亂行〕·잘 나타나는 행〔善現行〕·집착이 없는 행〔無着行〕·얻기 어려운 행〔難得行〕·법을 잘 설하는 행〔善法行〕·진실한 행〔眞實行〕 등 십행(十行)이다.
이 십행에서는 특히 보살의 십바라밀행을 차례로 교설하고 있다. 십주에 머무른 보살이 자타를 이롭게 하는 만행을 일으키니 십행이 교설되고 있다. 이 보살행은 일체유심조의 경계이면서, 십바라밀이 근본이 되어 모든 행을 포섭하고 있다. 이처럼 공덕림보살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보살행은 바로 공덕을 쌓아가는 공덕행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화엄의 보살도는 십바라밀에 다 포섭된다. 십주의 갖가지 보살행은 십바라밀을 체로 하며, 십행은 십바라밀 그 자체이며, 십회향 역시 초회향이 바라밀행이며 다른 회향에서도 바라밀행이 그 기저가 되고 있다. 십지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의 토대 위에 일불승(一佛乘)적 보살도가 가장 잘 시설되면서 십바라밀행이 펼쳐지며, 아울러 각지에 십바라밀을 차례로 치우쳐 닦도록 역설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엄대경 전편의 내용을 선재라는 구법자를 등장시켜 다시 한 번 재현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입법계품〉의 보살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선재동자가 구법한 선지식의 해탈법문도 십바라밀에 배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보살계위에서의 보살행과 선재의 구법행은 십바라밀로 포섭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 십바라밀은《팔십화엄》에서는 단나바라밀(檀那波羅蜜, Danaparamita)·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 Silaparamita)·찬제바라밀( 提波羅蜜, Ksantiparamita)·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 Viryaparamita)·선나바라밀(禪那波羅蜜, Dhyanaparamita)·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naparamita)·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 Up yaparamita)·원바라밀(願波羅蜜, Pra idh naparamita)·역바라밀(力波羅蜜, Balaparamita)·지바라밀(智波羅蜜, J naparamita)로 언급되어 있다. 이는 또 단바라밀(檀波羅蜜)·시바라밀(尸波羅蜜)·인바라밀(忍波羅蜜, 提波羅蜜)·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선바라밀(禪波羅蜜)·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원바라밀(願波羅蜜)·역바라밀(力波羅蜜)·지바라밀(智波羅蜜)로 표기되고도 있다.
그리고 이는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방편·원·력·지바라밀로 번역되어 상용되고 있다. 대승의 육바라밀에 중생교화의 입장에서 사종의 바라밀을 더하여 10이라는 원만수로 모든 보살행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화엄경》에서는 이 십바라밀에 대해서는 총설하기도 하고 따로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교설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십지품〉에서 다시 언급되겠으나, 여기서는 우선 십행계위에 있는 보살들의 십바라밀설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십행품〉에서는 십행계위에 있는 보살들이 닦아가는 주 수행법으로서 십바라밀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십주위에 해당되는〈명법품〉에서도 보살들로 하여금 행하는 일이 청정케 하는 10가지 법으로서 십바라밀을 설하였다.
제9강 화엄경의 내용 -십바라밀
보살의 십행은 일체유심조의 경계이므로 중생이 본성대로 사는 것이 십행이다. 그 구체적 내용이 십바라밀로 전개되고 있다.
(1) 환희행(歡喜行)에서는 보시바라밀을 구족하여 중생을 즐겁게 한다. 보시행은 곧 즐거운 행이니 보살이 이 행을 닦을 때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하고 즐겁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를 경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즐거운 행인가.
불자들이여, 보살이 큰 시주가 되어서 가진 것을 모두 베풀되 그 마음이 평등하여 뉘우치거나 아낌이 없으며, 과보를 바라지 않으며, 이름이 남을 구하지 않으며, 이양을 탐하지도 않는다. 다만 일체 중생을 요익되게 하며, 제불의 본래 수행하신 바를 학습하고 청정케 하며 증장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불자들이여, 보살이 이 행을 닦을 때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하고 애락하게 한다.
그래서 빈궁한 곳이 있으면 원력으로써 부호의 집에 왕생하여 시여해서 가난한 이들을 기쁘고 만족하게 한다. 수없는 중생들이 와서 구걸하더라도 보살은 물러나거나 겁내지 않고 더욱 자비심을 증장시킨다. 중생들이 와서 구걸하는 것을 보고 더욱 기뻐하며 생각하기를, "나는 좋은 이익을 얻고 있다. 이 중생들은 나의 복전이고 나의 좋은 벗이다. 구하지 않고 청하지 않았으되 찾아와 나를 불법 가운데 들게 하니, 내가 이제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우고 닦아서 일체 중생의 마음을 어기지 아니하리라" 한다.
이처럼 보살은 중생들을 자신의 복밭〔福田〕이라 생각하고, 찾아와서 구하면 기뻐하며 시여하라는 것이다. 복전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특히 비전(悲田)과 은전(恩田)과 경전(敬田)을 들 수 있다.
보살은 만약 한 중생이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지 않겠다고 원한다. 그리고 보시함에 있어서 분별상이 없다. 보살은 이처럼 중생을 이롭게 하지만 '나〔我〕'라는 생각 등 4상이 전혀 없다. 자기 몸도 보지 않고, 보시하는 물건도 보지 않고, 받는 이의 복밭도 보지 않으니 삼륜이 청정하다.
이와 같이 보살은 중생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해주기 위하여 자기에게 있는 선근과 모든 재물을 다 희사하되 집착함이 없는 것이다. 자기도 환희롭고 중생들도 환희롭게 일체를 베푸는 것이 보시며, 보시함에 집착이 없는 행이 바라밀인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상에서 보시가 무슨 의미이며, 무엇을 보시하며, 어떻게 보시하며, 왜 보시하며, 보시하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보시바라밀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보시란 다른 이에게 베풀어주는 것이다. 뭘 베푸는가 하면 선근과 재물 등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베푼다. 환희까지도 베푼다. 어떻게 베푸느냐면 무집착으로 베푼다. 분별심이 없이 사상이 없이 베풀기 때문에 삼륜이 청정한 것이다. 왜 베푸느냐면 자신도 기쁘고 남도 즐겁게 하기 위해서이다. 언제까지인가 하면 만약 한 중생이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겠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함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됨을 보이고 있다.
(2) 요익행(饒益行)에서는 지계바라밀로 중생을 이롭게 한다.
경에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교설하고 있다.
불자들이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을 이롭게 하는 행인가. 보살은 청정한 계율을 지니어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 위세를 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청정한 계율을 굳게 지녀서 부처님께서 찬탄하시는 평등한 정법을 얻으려고 한다. 보살은 욕심으로 인해 한 중생도 괴롭히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끝내 중생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는다.
요익행의 보살은 중생들이 오욕에 탐착하며 거기서 헤매느라고 자유롭지 못하므로 중생들로 하여금 위없는 계율에 머물도록 하며, 그리하여 일체지에서 물러나지 않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무여열반에 들게 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제도하고 남도 제도하며, 스스로 해탈하고 남도 해탈케 하며, 스스로 열반에 들고 남도 열반에 들게 한다.
이 지계바라밀 역시 중생들이 본성대로 사는 중생의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이처럼 보살은 자신만 제도해서는 보살이 아니다. 다른 중생들로 하여금 보시하고 계를 지니도록 해주어야 보살이다. 그래서 그 중생들도 다시 다른 중생들로 하여금 보시하고 계를 지니도록 해 주어야 바라밀행이 되는 것이다. 십바라밀 모두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을 위해서 중생들이 십바라밀행을 할 수 있도록까지 하여야 바라밀행이 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3) 무위역행(無違逆行)에서는 인욕바라밀로 중생을 어기지 않는다. 사물의 이치를 수순하고 인내하여 중생을 어김이 없음이다.
보살은 항상 참는 법을 닦아 겸손하고 공경하여,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남도 해치지 않는다. 중생에게 법을 말하여 그들이 모든 나쁜 것을 여의고 항상 참고 견디며 화평하게 살도록 한다.
보살은 이와 같이 참는 법을 성취할 때 남으로부터 온갖 나쁜 말을 듣거나 심지어 생명이 위태롭게 될지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면, 보살은 생각하기를, 이 몸은 공적(空寂)하여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으며, 괴롭고 즐거움이 모두 없는 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공한 것을 내가 이해하고 남들에게 널리 말하여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나아가게 한다.
(4) 무굴요행(無屈撓行)에서는 정진바라밀로 도에 정진하여 퇴굴함이 없어 굽히지 않는다. 보살은 성품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알므로, 한 중생이라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정진을 한다.
오로지 모든 번뇌를 끊기 위해 정진을 하고, 모든 의혹의 근본을 뽑기 위해 정진을 하며, 익힌 버릇들을 제거하기 위해 정진하며, 모든 중생계를 알기 위해 정진한다.
보살은 자신의 힘으로써 중생들을 영원히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며, 모든 세계에서 일체 중생에게 끝까지 무여열반을 얻게 한다. 이것이 네번째의 굽히지 않는 행이다.
(5) 무치란행(無痴亂行)에서는 선정바라밀로 정혜가 바르고 밝아서 어리석음과 어지러움이 없다. 보살은 바른 생각을 성취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으며 미혹이 없다. 생각이 바르므로 세간의 모든 언어를 잘 알고 출세간법의 말을 할 수 있다. 보살은 수많은 세월을 지내도 정법을 잊지 않고 항상 기억한다.
보살은 잠깐 동안에 수없는 삼매를 얻어 갖가지 소리를 듣더라도 마음이 산란치 않고, 삼매가 점점 더 깊어지게 한다. 예를 들면 사람을 몹시 두렵게 하는 소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 소리, 마음을 기쁘지 않게 하는 소리, 귀를 시끄럽게 하는 소리 등도 보살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 못한다. 모든 음성을 사유 관찰하여 그 성질을 잘 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청정한 생각에 편안히 머물러 일체지에서 물러나지 않고 마침내 무여열반을 성취하게 하리라.' 이것이 다섯째의 어리석음과 어지러움을 떠난 행이다.
(6) 선현행(善現行)에서는 반야바라밀로 경계와 지혜가 훤출히 밝아 잘 나타난다. 보살은 몸으로 짓는 업이 청정하고, 말로 짓는 업이 청정하고, 생각으로 짓는 업이 청정하여, 얻을 것 없는 데에 머물러서 얻을 것 없는 몸과 말과 생각의 업을 보인다. 이 세 가지 업이 모두 없는 것인 줄 알며, 허망함이 없으므로 얽매임도 없다.
실제와 같은 마음에 의지하여 한량없는 마음의 바탕을 알며, 세간을 초월하여 의지할 데가 없다. 분별을 떠나 속박이 없는 법에 들어갔고, 가장 뛰어난 지혜의 진실한 법에 들어갔고, 세간에서는 알 수 없는 출세간법에 들어갔으니 이것이 보살의 선교방편으로 생기는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보살은 또 이렇게 생각한다. '이 중생이 성숙되지 못하고 조복되지 못했는데 그냥 버려두고 나만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 그러니 내가 먼저 중생을 교화하면서 무량겁을 두고 보살행을 닦아, 성숙하지 못한 이를 먼저 조복하게 하리라.' 이것이 여섯째의 잘 나타내는 행이다.
(7) 무착행(無着行)에서는 방편바라밀로 중생을 포섭하되 집착이 없다. 보살은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순간마다 무수한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면서도 그 세계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
순간순간 많은 부처님을 뵙지만 부처님께 집착하는 마음이 없고, 보살행을 행하면서도 부처님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
보살은 법계에 깊이 들어가 중생을 교화하면서도 중생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보살은 이와 같이 집착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 안에 있으면서도 마음에 장애가 없어 부처님의 보리를 알고, 법의 계율을 증득하고,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머문다. 보살행을 닦고, 보살의 마음에 머물고, 보살의 해탈법을 생각하면서도 보살이 머무는 데에 물들지 않고 보살의 행하는 데에 집착하지 않고, 보살도를 청정하게 하여 보살의 수기를 받는다.
보살은 중생을 위해서 시방세계의 낱낱 국토에서 무량겁을 지내면서 교화하고 성숙하게 할 것이며, 이 한 중생을 위해서 하듯이 일체 중생을 위해서도 그와 같이 할 것이다. 끝까지 이 일을 위해 싫어하거나 고달픈 생각을 내어 그냥 버려두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8) 난득행(難得行)에서는 원바라밀(願波羅蜜)로 대원을 성취하여 얻는다.
보살은 얻기 어려운 선근 내지 부처님과 성격이 같은 선근 등을 성취하였다. 보살이 모든 행을 닦을 때 불법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이해를 얻고, 부처님 보리에서 가장 넓고 큰 이해를 얻는다. 보살의 서원에는 조금도 휴식이 없고, 모든 겁이 다하여도 지치거나 게으름이 없으며, 온갖 고통에도 싫은 생각을 내지 않으며, 대승의 소원을 항상 버리지 않는다.
보살은 중생이 있는 것 아닌 줄 알지만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중생의 수효에 집착하지 않는다. 한 중생을 버리고 많은 중생에게 집착하지도 않고, 많은 중생을 버리고 한 중생에게 집착하지도 않는다. 중생계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다하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으며, 중생계를 분별하지도 않고 둘로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계와 법계가 같은 데에 깊이 들어가 중생계와 법계가 둘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을 위해 보살도를 닦으면서 그들로 하여금 안온한 피안에 이르러 위없는 보리를 이루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여덟째의 얻기 어려운 행이다.
(9) 선법행(善法行)에서는 역바라밀(力波羅蜜)의 힘으로 법을 설한다. 보살은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시원한 법의 못이 되어 바른 법을 거두어 지녀 부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한다.
보살은 일체 중생의 집이 되니 모든 선근을 기르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돌아갈 곳이 되니 큰 의지처를 주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스승이 되니 진실한 법에 들어가도록 하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등불이 되니 그들에게 업보를 환히 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홉째의 법을 잘 말하는 행이니, 보살이 이 행에 머무르면 일체 중생을 위해 시원한 못이 되어 모든 불법의 근원을 다하게 된다.
(10) 진실행(眞實行)에서는 지바라밀(智波羅蜜)로 진실한 행을 이룬다.
보살은 진실하고 참된 말을 성취하여 말한 대로 행하고 행한 대로 말한다. 보살은 삼세 부처님들의 진실한 말을 배우고, 부처님들의 종성에 들어가고, 부처님들과 선근이 같고, 여래를 따라 배워서 부처님과 같은 지혜가 성취되어 보살행을 버리지 않는다.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모두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다.
보살은 이와 같은 증상심을 다시 일으킨다.
내가 만약 일체 중생에게 무상 해탈도에 이르게 하지 못하고 먼저 위없는 보리를 이룬다면, 이것은 내 본래 소원을 어기는 일이니 마땅치 않다. 그러니 반드시 일체 중생에게 위없는 보리와 무여열반을 먼저 얻게 한 후에 성불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이 내게 청하여 발심한 것이 아니고, 내가 중생에게 불청객이 되어 일체 중생에게 선근을 쌓아 일체지를 이루게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상의 십행위에서 보살이 십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그 바탕에 제법존재가 무상하고 공임을 철저히 인식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모든 부처님도 그림자 같으며, 보살행이 꿈과 같고, 부처님의 설법은 메아리 같은 줄 관하기 때문이다.
22. 십무진장품
〈십무진장품〉에서는 신(信)의 무진장을 비롯하여 계장(戒藏)·참장(懺藏)·괴장(愧藏)·문장(聞藏)·시장(施藏)·혜장(慧藏)·염장(念藏)·지장(持藏)·변장(辯藏) 등 10가지 다함없는 무진장행을 설하여 보살들로 하여금 필경에 무상보리를 성취케 한다.
장(藏)은 출생과 함장의 뜻이 있으니 만덕을 포섭함과 묘용을 출생함이 무진함을 나타낸다.
이 십무진장행으로써 앞에서 말한 10행의 법을 이루어 무진케 하고, 다음에 올 십회향의 법을 이뤄서 나아가게 한다.
제10강 화엄경의 내용 -제5회 3품
제5회의 주요 내용은 10회향법문이다.
23. 승도솔천궁품
세존께서는 다시 위신력으로 보리수 아래 내지 야마천궁을 떠나지 않고서 도솔천으로 향하셨고, 도솔천왕에 의해 설법처가 마련되었다.
24. 도솔궁중게찬품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금강당보살을 위시하여 당(幢)자가 돌림자인 견고당·용맹당·광명당·지당·보당·정진당·이구당·성수당·법당보살 등 10보살들이 수많은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데 이르렀다. 이 제5회의 설주는 금강당보살이니 금강은 지혜를, 당은 지혜를 바탕으로 한 자비의 기치를 말한다.
그때 세존께서 두 무릎으로 광명을 놓아 시방법계를 두루 비추며 신통을 나투셨다. 10대보살이 차례로 게송으로 부처님 세계를 찬탄하였다. 아래 게송은 금강당보살이 찬탄한 게송 가운데 하나이다.
색신이 부처 아니며 色身非是佛
음성 또한 그러하나 音聲亦復然
색신과 음성을 떠나서 亦不離色聲
부처님 신통력을 보는 것도 아니다. 見佛神通力
《금강경》에서는
만약 색으로 나를 보거나 若以色見我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以音聲求我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요 是人行邪道
여래를 볼 수 없다. 不能見如來
라고 하였으나,《화엄경》에서는 법신이 색신을 통해서 중생 앞에 나타나시는 것이다.
《금강경》오가해의 종경송에 보면, "보신(報身) 화신(化身)은 참되지 않고 마침내 허망한 인연이요, 법신이 청정하여 광대함이 끝이 없다. 천강에 물이 있으면 천강의 달이요, 만리에 구름없음에 만리의 하늘이다"라고 하였다. 법신이 응·화신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보살이 중생들에게 회향하는 모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몸으로 나투어진다고 하겠다. 우리는 석가모니불도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로 모시고 있다.
25. 십회향품
금강당보살이 보살지광삼매에서 일어나 보살로 하여금 부처님의 회향을 닦아 배우도록 하였다. '회'는 돌리는 것〔轉〕이고 '향'은 나아가는 것〔趣〕이다. 십회향은 다음과 같다.
(1) 일체 중생을 구호하면서도 중생이라는 생각을 떠난 회향(救護 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回自向他〉
이는 자신을 돌려서 타인에게로 향하게 한다는 회자향타(回自向他)로 요약되고 있다. 보살에게 선근이 있을지라도 만일 일체 중생을 요익되게 하고자 하지 않으면 회향이라 할 수 없다.
여기서 보살이 보시바라밀을 행하고, 지계바라밀을 맑히고, 인욕바라밀을 닦고, 정진바라밀을 일으키고, 선정바라밀에 들어가고, 반야바라밀에 머물러 대자·대비·대희·대사 등 사무량심으로 무량 선근을 닦아 두루 중생을 이롭게 하고 일체지를 얻게 한다. 보살마하살이 선근을 닦을 때, '이 선근으로 일체 중생을 두루 이롭게 하여 모두 청정케 해서 마침내는 영원히 고통을 떠나게 하여지이다'라고 회향한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선근으로 이와 같이 회향하여, 일체 중생에게 평등하게 이익을 주며 마침내 모두 일체지를 얻게 한다.
(2) 깨뜨릴 수 없는 회향(不壞廻向)〈回小向大〉
불괴회향은 깨뜨릴 수 없는 믿음을 얻어 안주하여 그 선근을 중생에게 광대히 회향하는 것이다. 비록 선근이 적으나 널리 중생을 포섭하여 환희심으로써 광대히 회향한다.
보살은 부처님 계신 데서 깨뜨릴 수 없는 믿음을 얻으니 모든 부처님을 다 받들어 섬기기 때문이다. 보살들과 내지 처음 한 생각을 내어 일체지를 구하는 이에게서까지 깨뜨릴 수 없는 믿음을 얻으니 모든 보살의 선근을 서원하고 닦으면서 지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불법에서 깨뜨릴 수 없는 믿음을 얻으니 수호하고 머물러 지니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에게 깨뜨릴 수 없는 믿음을 얻으니 인자한 눈으로 평등하게 보고 선근으로 회향하여 널리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와 같은 깨뜨릴 수 없는 믿음에 안주할 때 보리심을 더욱더 자라게 하며, 부처님들의 지으신 일을 따라 배운다.
(3) 모든 부처님과 동등한 회향(等一切諸佛廻向)〈回自己因行 向他因行〉
모든 부처님께서 회향하시는 도를 따라 배워 중생을 이롭게 하는 회향이다. 보살이 모든 선근으로써 부처님께 회향해 마치고 다시 이 선근으로써 일체 보살에게 회향하고 내지 중생에게 회향한다.
보살은 모든 부처님께서 회향하는 도를 배울 때 모든 색과 내지 법의 육진경계가 아름답거나 추함을 보더라도 애증을 내지 않아 마음이 자재하며, 허물이 없어 청정하며, 기쁘고 즐거워서 근심 걱정이 없으며, 마음이 부드러워 여러 감관이 상쾌하다.
보살이 이와 같은 안락을 얻었을 때 또다시 발심하여 부처님들께 회향한다. 즉, '내가 지금 심은 선근으로 부처님의 낙이 더욱 늘어나게 하여지이다' 한다. 이런 선근으로 부처님께 회향하고 다시 이 선근으로 보살에게 회향한다. 즉, 원이 채워지지 않는 이는 가득 채워지게 하고, 마음이 맑지 못한 이는 청정하게 한다.
보살이 선근으로써 이같이 보살에게 회향하고는 다시 일체 중생에게 회향한다. 일체 중생이 심은 선근이 아무리 적더라도 한 순간에 부처님을 보고 법을 듣고 스님들을 공경하여지이다고 원한다.
따라서 이상의 셋을 중생회향이라 한다.
(4) 모든 곳에 이르는 회향(至一切處廻向)〈回因向果〉
보살이 선근 공덕의 힘으로 모든 곳에 이르는 회향이다. 보살이 선근을 닦을 때 선근 공덕의 힘으로 모든 곳에 이르러지이다고 한다. 이 선근이 모든 여래의 처소에 두루 이르러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내지 온갖 공양거리로 공양하여 한량없고 끝이 없는 세계에 충만하여지이다고 한다.
(5) 다함이 없는 공덕장 회향(無盡功德藏廻向)〈回劣向勝〉
보살이 모든 선근을 회향하여 불국토를 장엄하는 회향이다. 범부와 이승의 복을 수희하여 무상보리에 회향한다.
보살은 모든 업장을 참회하고 일으킨 선근과, 삼세 모든 부처님께 예경하고 일으킨 선근, 모든 부처님께 설법해 주시기를 청하여 일으킨 선근,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광대한 경계를 깨닫고 일으킨 선근, 모든 부처님과 중생의 선근을 모두 따라 기뻐해서 일으킨 선근들이 있다. 보살은 이와 같은 선근 등을 모두 회향하여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한다.
(6) 모두 평등한 선근에 들어가는 회향(入一切平等善根廻向)〈回比向證〉
온갖 보시 등을 통하여 견고한 일체 선근에 수순하는 회향이다. 보살의 견고한 일체 선근을 따르는 회향이란 보살의 그 위덕이 널리 퍼지어 중생을 구제함을 말한다. 그리하여 많은 권속이 있어 다른 이들이 저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온갖 보시를 구족하게 행하며, 부처님의 정법을 보호·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고초라도 달게 받으며, 법을 구할 때 한 글자를 위해서라도 모든 소유를 죄다 버리며, 항상 바른 법으로 중생들을 교화하여 선행을 닦고 악행을 버리게 하며, 중생들이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을 보면 자비심으로 구원하여 죄업을 버리게 한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보시할 때 잘 거두는 마음을 내어 회향한다. 이른바 색을 잘 거두어 견고한 일체 선근에 수순하며, 수·상·행·식을 잘 거두어 견고한 일체 선근에 수순한다.
따라서 이 셋을 보리회향으로 묶을 수 있다. 이하는 실제회향이다.
(7)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따라주는 회향(等隨順一切衆生廻向)〈回事向理〉
이는 보시 등의 선근을 쌓아 모아서 평등하게 일체 중생을 수순하는 회향이다. 보살은 가는 데마다 모든 선근을 쌓아 모은다. 크고 작은 선근을 비롯하여, 모든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을 기르는 선근이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선근으로 일체 중생이 모든 험난한 곳을 떠나 일체지를 얻어지이다고 회향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회향할 때 모든 공덕이 청정하고 부처님의 평등을 얻는다.
(8) 진여인 모양의 회향(眞如相廻向)〈回差別行向圓融行〉
진여상과 같이 보살이 항상 선한 마음으로 선근을 회향하는 것이다. 선근으로 항상 원만하고 걸림없는 신(身)·구(口)·의(意) 삼업을 성취하여 대승에 안주하고 보살행을 맑게 닦아지이다고 원한다. 보살이 항상 선한 마음으로 회향하기를 진여가 모든 곳에 두루하여 끝이 없듯이, 선근의 회향도 모든 곳에 두루하여 끝이 없고자 한다.
진여가 끝까지 청정하여 온갖 번뇌와 함께 하지 않듯이, 선근의 회향도 일체 중생의 번뇌를 없애고 청정한 지혜를 원만케 한다.
(9) 집착도 속박도 없는 해탈회향(無縛無著解脫廻向)〈回世向出世〉
집착과 속박이 없는 해탈한 마음으로 회향하는 것이다. 보살은 모든 선근을 존중한다. 부처님께 예경하고, 합장 공양하고, 탑에 정례하고, 부처님의 설법을 청하는 데 마음으로 존중하나니, 이런 여러 가지 선근에 모두 존중하여 수순한다.
보살은 여러 선근으로 집착과 속박이 없는 해탈한 마음으로 보현의 광대한 정진을 일으킨다. 부처님들이 보살로 계실 때 닦으시던 회향과 같이 회향한다. 모든 부처님들의 회향을 배우며, 모든 부처님들의 회향하시는 길을 따른다. 세간과 세간법을 분별하지 않으며, 중생을 조복하거나 조복하지 않음을 분별하지 않으며, 자신과 타인을 분별하지 않는다.
(10) 법계와 평등한 무량회향(等法界無量廻向)〈回順理事向所成事〉
이는 법보시를 비롯하여 모든 청정한 법으로 법계와 평등한 한량없는 회향을 말한다. 보살마하살은 법사의 자리에 있으면서 법보시를 널리 행한다. 큰 자비심을 일으켜 중생들을 보리심에 편히 있게 하며, 중생들을 위해 깨뜨릴 수 없는 견고한 선지식이 되어 선근이 자라서 성취하게 한다.
법보시한 선근으로써 회향하여 보현의 한량없고 끝없는 보살의 행과 원을 원만하게 성취하며, 허공과 법계의 모든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며, 일체 중생들에게도 이와 같이 끝없는 지혜를 두루 성취하여 모든 법을 알게 한다.
이상과 같이 10종회향은 십바라밀이 체가 된다. 그리고 삼처회향(三處廻向)으로 묶을 수 있으니 중생회향·보리회향·실제회향이다. 자기만행을 돌이켜서 삼처에 향하는 것이다. 사찰에서는 상단을 향하여 항상 '삼처에 회향하여 다 원만하여지이다〔廻向三處悉圓滿〕'이라 축원하고 있다.
원효대사는《화엄경》을 이〈십회향품〉까지만 주석한 후 절필하고는 회향하러 중생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원효가 주석한《화엄경》은 물론《육십화엄》일 것이다.《육십화엄》은〈십회향품〉이〈금강당보살십회향품〉으로 되어 있다. 이 십회향은 원의 성격이 강하여 십회향원으로 일컬어지고도 있다.
제11강 화엄경의 내용 -제6회 십지품
제6회는 십지법문을 설하는〈십지품〉한 품이다. 따라서 이〈십지품〉은 다른 회에서 설법좌가 마련되는 부분까지〈십지품〉내에 함께 교설되어 있다.
26. 십지품
십지사상은 인도 대승불교사상사의 전개과정에서 뺄 수 없는 주맥이 되고 있는 사상이 아닌가 여겨지고도 있다.
십지사상이 마하바스투의 십지에서《대품반야경》의 십지로, 이것이 다시《보살본업경》의 십지를 거쳐《십지경》의 십지로 완성되며, 그것이 유가행자에 의해 보살행으로 실천화되는 것으로 전개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십지사상을 본생십지·반야십지·본업십지·화엄십지·유가행십지로 크게 나누어 보기도 한다.
《화엄경》의〈십지품〉에서는 앞에서 제3회 4회 5회 등에서 살펴본 십주와 십행과 십회향을 통틀어 포섭하는 십지보살행이 시설된다. 이 십지보살행은 화엄이 일승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십지법문은 타화자재천궁에서 이루어진다. 금강장보살이 보살대지혜광명삼매에 들었다가 십지를 설했으니 여기서 지(地)란 지혜의 지이다. 십지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환희지(歡喜地:기쁨에 넘치는 지위)
이구지(離垢地:번뇌의 때를 벗은 지위)
발광지(發光地:지혜의 광명이 나타나는 지위)
염혜지(焰慧地:지혜가 매우 치성한 지위)
난승지(難勝地:진제와 속제를 조화하여 매우 이기기 어려운 지위)
현전지(現前地:지혜로 진여를 나타내는 지위)
원행지(遠行地:광대한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지위)
부동지(不動地:다시 동요하지 않는 지위)
선혜지(善慧地:바른 지혜로 설법하는 지위)
법운지(法雲地:대법우를 비내리는 지위)
(1) 환희지(歡喜地)
환희지는 10가지 원을 성취하며, 보시섭(布施攝)과 보시바라밀로 기쁨에 넘치는 지위이다.
만약 보살이 선근을 깊이 심고 모든 행을 잘 닦고 내지 광대한 지혜를 내면 자비가 앞에 나타나서 범부의 처지를 뛰어나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서 여래의 집에 태어난다. 이때가 환희지에 머무는 때이다.
여래의 집에 태어난다〔生如來家〕는 말씀은《화엄경》에서 여러 번 보인다. 그것은 앞의 초발심주와 이곳 초지, 그리고 제4지에서도 보이고 있다. 이것은 비심(悲心)이 점점 증대됨에 그 차이가 보인다.
보살이 환희지에 머물면 모든 두려움이 다 사라지며 10가지 큰 원을 성취한다. 그 십대원은 일체 부처님께 공양하는 원 불법을 수호하는 원 법륜 굴리기를 청하는 원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는 원 중생을 교화하는 원 세계를 잘 분별하는 원 불토를 청정히 하는 원 항상 보살행을 떠나지 않는 원 보살도를 행하여 이익을 주는 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원이다.
이를 청량징관은 공양원(供養願)·수지원(受持願)·전법륜원(轉法輪願)·수행이리원(修行二利願)·성숙중생원(成熟衆生願)·승사원(承事願)·정토원(淨土願)·불리원(不離願)·이익원(利益願)·성정각원(成正覺願)으로 이름하고 있다.
보살이 환희지에 머물러 이렇게 큰 서원을 내니, 만일 중생계가 끝나면 이 원도 끝나려니와 중생계가 다할 수 없으니 이 원의 선근도 다함이 없다고 한다.
《화엄경》의 원으로서는 앞에서 140원, 10회향원을 보았고, 이곳 초지에서 10대원을 만났는데 앞으로〈여래출현품〉에서도 여래성기원이 설해지고 있다. 의상은 이러한 원을 들면서 원에 의해 부처가 된다고 해서 10불 중에 원불을 말씀하고도 있다. 이외에도《사십화엄》에서는 보현보살의 10대행원을 설하고 있다.
이 십대원 중 제7원에서는 '일체 국토가 한 국토에 들어가고 한 국토가 일체 국토에 들어간다'는 상입(相入)으로 체계화되고도 있다.
그런데 특히 제4원이 화엄교학에서 대단히 중시되고 있다.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총상(總相)·별상(別相)·동상(同相)·이상(異相)·성상(成相)·괴상(壞相)으로 닦기를 원하는 이 원은 후에 육상원융설로 체계화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제4원의 내용이다.
또 원을 일으키되 일체 보살행이 넓고 크고 한량없어서 무너지지 않고 잡되지 않으며 모든 바라밀을 거두어서 모든 지를 깨끗이 다스리며, 총상·별상·동상·이상·성상·괴상의 있는바 보살행을 다 여실히 설하여 일체를 교화해서 그로 하여금 받아 행하여 마음이 증장을 얻게 하여지이다.
보살이 육상으로 모든 바라밀행을 설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닦아 마음이 증장케 하는 원을 일으킨다. 이는 후에 육상원융설로 체계화되면서 화엄교학의 골격이 되고 있다. 육상원융에 대해서는 후에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 환희지에서는 또 보시섭과 보시바라밀로 기쁨에 넘치는 지위로 되어 있으니, 여기서는 단지 보시바라밀을 중심으로 한 제바라밀을 동상 내지 괴상으로 닦아지이다고 발원한 것을 간단히 살펴보겠다.
화엄보살도는 총상이며, 보시바라밀 내지 지바라밀 각각은 별상이다. 십바라밀의 모든 연이 서로 위배되지 아니하여 보살도의 전체 모습이 되는 것이 동상이며, 보시바라밀 등 각 바라밀이 각기 다른 양상을 띠고 있음은 이상이다. 성상은 모든 바라밀에 의해 보살도의 공용이 이루어지며, 괴상은 보시바라밀은 보시바라밀의 공덕이 있고 내지 지바라밀은 지바라밀의 공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상원융적으로 볼 때 보시바라밀이 곧 화엄보살도이다. 보시바라밀이 없으면 온전한 보살도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보시바라밀이 지계바라밀 내지 지바라밀과 다르며 주(住)·행(行)·향(向)·지(地) 각위에 보시바라밀부터 차제로 닦아가도록 시설되어 있기는 하나, 또 반드시 보시바라밀을 다 닦아 마친 후에 지계바라밀을 닦고 보시와 지계를 다 닦아 마친 후에 다시 인욕바라밀 내지 지바라밀을 닦아가서 보살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십바라밀이 각각 차별하여 하나가 아니면서도 무애원융하다. 보시바라밀이 자기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모든 바라밀을 포섭하여 보살도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원융수행법이 이루어지기에 초발심 때에 정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처음 발심을 하는 자리인 초발심주에서는 보시바라밀을 치우쳐 닦도록 시설하고 있다. 보시바라밀이 주(主)가 되고 여타바라밀은 반(伴)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초발심주에서 또한 초발심시에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육십화엄》에서는 초발심시변정각이라고 하였다. 이는 보시바라밀로 정각을 이루고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불종성을 이어가게 한다고도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전개되는 모든 보살계위에서의 제바라밀행은 화엄보살도가 그러하듯이 부처님 세계의 갖가지 장엄이라 하겠다.
(2) 이구지(離垢地)
이구지는 십선업도(十善業道)를 행하고 애어섭(愛語攝)과 지계바라밀로 모든 번뇌의 때를 여의는 지위이다. 10가지 깊은 마음을 일으켜 제2지에 들어간다. 즉, 정직한 마음〔正直心〕·부드러운 마
음〔柔軟心〕·참을성 있는 마음〔堪能心〕·조복한 마음〔調伏心〕·고요한 마음〔寂靜心〕·순일하게 선한 마음〔純善心〕·잡되지 않는 마음〔不雜心〕·그리움 없는 마음〔無顧戀心〕·넓은 마음〔廣心〕·큰 마음〔大心〕이다.
이구지보살은 성품이 일체 악업을 멀리 여읜다.
성품이 저절로 일체 살생을 멀리 여의어서, 칼 등의 살생도구를 두지 아니하고, 원한을 품지 아니하고, 일체 중생에게 항상 이익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낸다. 보살은 중생이라는 생각을 내면서 거치른 마음으로 살해하는 일이 없다.
성품이 훔치지 않는다. 보살이 자기의 재산에 만족함을 알고 다른 이에게는 인자하고, 다른 이에게 소속한 물건에는 남의 것이라는 생각을 내어 훔치려는 마음이 없고, 풀잎 하나라도 주지 않는 것은 가지지 않는다.
성품이 사음하지 않는다. 보살이 자기의 아내에 만족함을 알고 다른 처를 구하지 않는다. 다른 이의 처첩이나, 다른 이가 보호하는 여자에게 탐하는 마음도 내지 않는다.
성품이 거짓말하지 않는다. 보살이 항상 진실한 말과 참된 말과 시기에 맞는 말을 하고, 꿈에서라도 거짓말 하려는 마음이 없다.
성품이 이간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보살이 이간하는 마음이 없고 해치려는 마음도 없다. 이간하는 말은 실제거나 실제가 아니거나 말하지 아니한다.
성품이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 이른바 해롭게 하는 말, 거치른 말, 남을 괴롭히는 말, 남을 성내게 하는 말 등은 모두 버린다. 항상 윤택한 말, 부드러운 말, 뜻에 맞는 말, 여러 사람이 기뻐하는 말, 몸과 마음이 희열한 말을 한다.
성품이 번드르한 말을 하지 않는다. 보살은 언제나 잘 생각하고 하는 말, 시기에 맞는 말, 진실한 말, 의로운 말, 법에 맞는 말을 좋아한다. 보살은 웃음거리로라도 항상 생각하고 말한다.
성품이 탐욕부리지 않는다. 보살이 남의 재물이나 다른 이의 생활용품에 탐심을 내지 않고 원하지 않고 구하지 않는다.
성품이 성내지 않는다. 보살이 일체 중생에게 항상 자비한 마음을 낸다.
또 성품에 삿된 소견이 없다. 보살이 바른 길에 머물러서 불·법·승 삼보에 결정한 신심을 낸다.
보살이 이와 같이 10가지 선한 법〔十善業道〕을 행하여 항상 끊임이 없다.
이 보살이 4가지로 거두어 주는 법〔四攝法〕중에서는 사랑스러운 말〔愛語〕이 치우쳐 많고, 십바라밀 중에서는 지계바라밀이 치우쳐 많으니, 다른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을 따르고 분수를 따를 뿐이다.
소승계와 대승보살계, 또는 사계(事戒)와 이계(理戒)는 차이가 있다. 소승계인 사계는 표업만 범계가 되나 대승보살계는 무표업 또한 범계가 된다. 예를 들면 소승계는 직접 살생을 하지 않으면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보살계는 마음으로 생각만 해도 파계가 된다. 그것은 보살은 성품 자체가 살생과는 전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또 보살은 일체 중생이 살생을 하지 않도록까지 해 주어야 살생계를 지키는 것이 된다.
(3) 발광지(發光地)
발광지는 10법, 특히 삼법인을 관하고 이행섭(利行攝)과 인욕바라밀로 지혜의 광명이 나타나는 지위이다.
보살이 제3지에 머물고는 모든 유위법의 실상을 관찰한다. 즉 유위법은 무상하고, 괴롭고, 부정하고, 안온하지 못하고, 파괴하고, 오래 머물지 못하고, 찰나에 났다 없어지고, 과거에 생한 것도 아니고, 미래로 가는 것도 아니고, 현재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법을 관찰하면 모든 유위법에 대하여 싫어함이 배나 더하여 부처님 지혜로 나아간다. 보살은 이와 같이 여래의 지혜가 한량없이 이익함을 보고, 모든 유위법은 한량없이 걱정되는 줄을 보므로, 일체 중생에게 10가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낸다.
보살이 발광지에 머물면 4선과 4무색정에 머물고 한량없는 신통력을 얻는다. 사섭법 중에는 이행섭이 수승하니, 십바라밀 중에는 인욕바라밀이 수승하니, 다른 것을 닦지 아니함은 아니지만, 힘을 따르고 분수를 따를 뿐이다.
제12강 화엄경의 내용 -십지보살행
(4) 염혜지(焰慧地)
염혜지는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을 닦고 동사섭(同事攝)과 정진바라밀로 지혜가 매우 치성하는 지위이다. 보살이 이 염혜지에 머물면, 지혜로써 여래의 가문에 태어난다. 삼십칠조도품은 다음과 같다.
사념처(四念處):관신부정(觀身不淨)·관수시고(觀受是苦)·관심무상(觀心無常)·관법무아(觀法無我)
사정근(四正勤 혹은 四正斷):이생악령단(已生惡令斷)·미생악령불생(未生惡令不生)·이생선령증장(已生善令增長)·미생선령생(未生善令生)
사여의족(四如意足, 四神足):욕(欲)·정진(精進)·심(心)·사유(思惟)
오근(五根):신(信)·진(進)·염(念)·정(定)·혜(慧)
오력(五力):신(信)·진(進)·염(念)·정(定)·혜(慧)
칠각분(七覺分):택법(擇法)·정진(精進)·희(喜)·의( )·사(捨)·정(定)·염(念)
팔정도(八正道):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
(5) 난승지(難勝地)
난승지는 진제와 속제를 조화하여 이기기 어려운 지위이니,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와 선정바라밀을 주로 닦는다.
난승지에서는 또 보살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세간의 기예를 모두 익힌다.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이면 모두 열어 보여서 점점 위없는 불법에 머물게 한다.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문자와 산수와 약방문과 글씨와 시와 노래와 춤과 풍악과 연예와 웃음거리와 재담 등을 다 잘하며, 나무와 꽃과 약초들을 계획하고 가꾸는 데 묘리가 있고, 금·은·마니·진주·유리·보배·옥·보석·산호 등의 있는 데를 다 알아 파내어 사람들에게 보이며, 산수가 좋고 나쁜 것을 잘 관찰하여 조금도 틀리지 아니한다.
(6) 현전지(現前地)
현전지는 세간 출세간의 일체 지혜가 다 나타나는 지위이니, 십이연기〔無明·行·識·名色·六入·觸·受·愛·取·有·生·老死〕를 관하고 반야바라밀을 성취한다.
이상에서 시설된 수행법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하겠다. 근본불교시대부터 소승불교시대까지 시설된 기본적이고 중요한 수행방편이었던 것이다. 이곳〈십지품〉에서는 일심에 입각하여 일승적으로 재해석되어 십지보살도의 내용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7) 원행지(遠行地)
원행지는 광대한 진리세계에 이르는 지위이니 십바라밀〔布施· 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方便·願·力·智〕을 구족하고 특히 방편바라밀을 치우쳐 닦는다. 십바라밀을 그 주된 수행덕목으로 삼고 있는 제7원행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 보살은 생각마다 항상 능히 10가지 바라밀을 구족한다. 왜냐하면 생각마다 대비로 으뜸을 삼고 부처님 법을 수행하여 부처님 지혜에 향하는 까닭이다.
있는바 선근을 부처님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중생에게 베풀어 줌이 단나바라밀(檀那波羅蜜)이요, 일체 번뇌의 열을 멸함이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이요, 자비로 으뜸을 삼아 중생을 해롭히지 않음이 찬제바라밀( 提波羅蜜)이요, 수승하고 선한 법을 구하여 만족해 싫어함이 없는 것이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이요, 온갖 지혜의 길이 항상 앞에 나타나서 일찍이 산란하지 않음이 선나바라밀(禪那波羅蜜)이요, 모든 법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을 능히 인정하는 것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요, 한량없는 지혜를 능히 출생함이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이요, 상상품의 수승한 지혜를 구함이 원바라밀(願波羅蜜)이요, 모든 마군들이 능히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 역바라밀(力波羅蜜)이요, 일체 법을 실제와 같이 요달해 아는 것이 지바라밀(智波羅蜜)이다. 불자여, 이 십바라밀은 보살이 생각마다 모두 구족하니라.
(8) 부동지(不動地)
부동지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 동요하지 않는 지위이니 원바라밀을 치우쳐 닦는다. 마음과 뜻과 식으로 분별하는 생각을 여의어서 집착할 바가 없음이 마치 허공과 같으며, 일체 법의 성품이 허공과 같음에 들어서 다시는 남이 없는 법에 들게 된다.
이 부동지에서는 무공용각혜(無功用覺慧)로 일체지지의 경계를 관하며, 중생의 좋아함을 따라서 갖가지 몸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한다. 이렇게 해서 나타내 보이는 부처님 몸은《화엄경》의 다른 품에서 보이는 십불설과 함께 후에 화엄교학에서는 이종십불설로 나타나게 된다. 이 점도 다음에 고찰하기로 한다.
(9) 선혜지(善慧地)
사무애지〔法·義·辭·樂說〕를 얻어 대법사가 되어 설법하는 지위이니 역바라밀이 가장 수승하다.
(10) 법운지(法雲地)
대법우를 비내리는 지위이니, 지혜바라밀이 가장 수승하다.
경에서는 이상의 십지경계를 바다의 10종 이익에 배대하여 다시 한 번 보이고 있다. 큰 바다의 10가지 이익은 다음과 같이 설해지고 있다.
차례로 점점 깊어진다.
송장을 받아두지 않는다.
다른 물이 그 가운데 들어가면 모두 본래의 이름을 잃는다.
모두 다 한맛이다.
한량없는 보물이 있다.
바닥까지 이를 수 없다.
넓고 커서 한량이 없다.
큰 짐승들이 사는 곳이다.
조수가 기한을 넘기지 않는다.
큰 비를 모두 받아도 넘치지 않는다.
십지보살의 행도 그와 같다.
환희지는 큰 서원을 내어 점점 깊어지는 까닭이다(십대원).
이구지는 모든 파계한 송장을 받지 않는 까닭이다(십선업).
이구지에서는 보살이 성품 자체에 일체 나쁜 것이 없어서 나쁜 업은 일체 지을 생각조차 없으므로 십선업도를 닦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바다가 송장이나 나쁜 오물을 속에 담겨 두지 않고 밖으로 내보내는 공덕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도 우리의 마음 속에 일체 번뇌를 담고 있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화가 날 때 속으로 화를 참고 있다면 이는 속에 번뇌를 담고 있는 것이 되겠다. 그렇다고 남에게 화풀이를 해서 화를 해소시키라는 것은 아니다. 화 자체에 자성이 없어서 아예 화낼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 이치가 터득이 안 돼서 그래도 화가 난다면 자비관을 닦아가도록 경에서 교설하고 있다.
발광지는 세간에서 붙인 이름을 여의는 까닭이다(삼법인).
세간의 유위법을 잘 관찰하면 그 유위법이 좋아할 것이 아닌 줄 알게 되므로 가치관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염혜지는 부처님의 공덕과 맛이 같은 까닭이다(삼십칠조도법).
보리를 돕는 수행법은 어떤 것을 닦든지 다 부처님 세계에 도달되는 일승 수행법이 된다.
난승지는 한량없는 방편과 신통과 세간의 보배들을 내는 까닭이다(사성제). 이 난승지는 이기기 어려운 단계를 넘어서는 자리이다. 세간지와 출세간지가 하나 되어서 중생을 위해 갖가지 방편을 시설하고 있는 자리이다. 모든 고통을 여의고 열반세계로 인도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현전지는 인연으로 생기는 깊은 이치를 관찰하는 까닭이다(12연기). 우리 존재는 모두 상의상관의 인연 속에 있다. 이 연기의 진리는 불교의 근본진리로서 그 순역관을 통해서 생사의 고통을 해결하고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 이 또한 다 마음에 의해서 생겨나는 깊은 도리를 관찰하는 자리이므로 바다가 깊고 깊어서 바닥까지 다다를 수 없는 데 비유되고 있다.
원행지는 넓고 큰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를 잘 관찰하는 까닭이다(10바라밀). 모든 바라밀로 부처님의 광대한 세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부동지는 광대하게 장엄하는 일을 나타내는 까닭이다(무생법인).
선혜지는 깊은 해탈을 얻고 세간으로 다니면서 사실대로 알아서 기한을 어기지 않는 까닭이다(사무애변).
법운지는 모든 부처님 여래의 큰 법의 비를 받으면서 만족함이 없는 까닭이다(대법우).
그래서 끝없는 원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경에서는 이상의 십지보살 행과로서〈십정품〉내지〈이세간품〉의 11품에서 등각과 묘각의 경계를 설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보살도는《화엄경》이 일승보살도를 펼치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게 한다. 십지보살도는 회삼귀일에 바탕한 일승보살도로서 보살도의 정화로 간주되어 왔던 까닭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초지는 원을 세우는 자리이니 대승보살은 원이 없으면 보살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원을 세우는 것은 기본적인 보살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제2지에서의 십선업도(十善業道)는 근본교설에서는 십선업으로서 재가불자의 윤리 도덕에 해당하는 항목으로 여겨졌던 것이, 대승불교도들이 지키는 십선계(十善戒)로서 대승적 의미가 부여되었고, 다시《화엄경》에서는 제2지 보살이 닦는 수행덕목으로 들어오고 있다.
제3지에서는 삼법인에 해당하는 일체 법을 관찰한다.
제4지에서 닦는 삼십칠조도품은 소승불교시대에 종합된 수행덕목이다. 대승은 소승을 비판하고 일어났던 것임을 볼 때《화엄경》이 일승설이기에 이 37조도품 역시 보살의 수행방편으로 다시 해석되어 수용된 것이라 하겠다.
제5지에서 닦는 사성제는 처음 대승불교가 일어났을 때는 대승에서 자리매김하기를, 성문승이 주로 닦아가는 수행법이고 이 사성제를 통해서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되는 수행법이다.
제6지의 십이연기를 관하는 것은 소승에서 연각이 닦아가는 수행법으로서 역시 아라한과까지 도달된다고 한 실천법이다.
다시 말해서 삼승(三乘)이라고 할 때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을 말하는데, 성문승·연각승은 소승이고 보살승은 대승이다. 처음 대승불교가 일어날 때는 보살은 성문·연각과는 다르다고 하고, 대승은 소승을 비판함으로써 일어났던 것이다. 성문·연각은 아라한 정도의 깨달음밖에 성취할 수 없고 보살은 6바라밀행을 닦아서 부처가 될 수 있는 자로 보았다. 그때 성문과 연각이 닦는 대표적인 수행법이 사성제와 십이연기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화엄경》에서는 이 두 수행법이 제5지와 제6지 계위의 보살이 닦는 수행법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보살의 바라밀행은 다음 제7지 보살이 닦는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10바라밀이 교설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화엄경》십지보살도는 회삼귀일에 바탕한 일승보살도로서 보살도의 정화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이상의 모든 바라밀에 관한 교설을 총합해 보자. 다음과 같이 십바라밀을 약설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기에게 있는 선근과 내외의 모든 가진 것을 중생에게 베풀어 주어 마음이 만족하게 하되 집착하는 바가 없음이 단나바라밀이다.
일체 번뇌의 열을 멸하고, 부처님의 계법을 청정하게 지니어 범계하지 아니하면서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아만을 영원히 여의는 것이 시라바라밀이다.
부처님 인욕에 머물러 자비를 으뜸으로 삼아 중생을 해롭게 하지 않으며 온갖 나쁜 것을 모두 참으면서 여러 중생에게 마음이 평등하여 흔들리지 않음이 찬제바라밀이다.
수승하고 선한 법을 항상 닦아서 게으르지 아니하고 퇴전치 아니하며 용맹한 세력을 제어할 이 없고 모든 공덕에 만족함이 없는 것이 비리야바라밀이다.
온갖 지혜의 길이 항상 앞에 나타나서 바르게 생각하는 힘으로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한 경계를 생각하고 온갖 삼매문에 들어가는 것이 선나바라밀이다.
한량없는 모든 법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을 사실대로 관찰하고 분별하여 실상인을 얻으며 온갖 지혜의 지혜문에 들어가서 영원히 휴식함을 얻음이 반야바라밀이다.
한량없는 지혜를 능히 출생하여 중생을 교화함에 그들의 즐겨함을 따라 몸을 나타내며 일체 행하는 법에 물들지 아니하고 탐착하지 아니함이 방편바라밀이다.
끝까지 일체 중생을 성취하며, 일체 세계를 장엄하며, 일체 부처님께 공양하며, 장애없는 법을 통달하며, 법계에 가득한 행을 수행하며, 여래의 지혜를 증득하니 보현의 큰 서원을 만족하여 마음이 동요하지 아니함이 원바라밀이다.
온갖 자재한 신통을 나타내는 심심력(深心力)·심신력(深信力)·대비력·대자력·총지력·변재력·바라밀력·대원력·신통력·가지력 등 갖가지 힘을 갖추어 중생들을 널리 제도함에 모든 이론(異論)과 마군들이 능히 깨뜨릴 수 없는 것이 역바라밀이다.
일체 법을 실제와 같이 알며 모든 중생이 여래와 더불어 성품이 같은 줄 알아 모든 부처님 법에 두루 들어가는 것이 지바라밀이다.
이러한 십바라밀을 구족하여 대비를 으뜸으로 삼고 부처님 지혜에 향하는 것이다.
제13강 화엄경의 내용-제7회 11품
제7회 11품에서는 십지보살행을 지나 깨달음의 경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화엄경》에 보이는 깨달음은 등각과 묘각을 시설해 놓은 것으로 파악된다. 마지막의〈여래출현품〉과 제8회 설법의〈이세간품〉이 묘각의 경계이고 그 이전은 등각의 경계이다. 보살인행을 거쳐 과위로서의 단계를 등각이라고 한다면, 인행에 상대한 과위가 아니라 부처님의 본래의 깨달음의 세계를 묘각이라 한다.
보살이 깨달음을 얻으면 나타나는 경계는 품명에서 그 내용을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27. 십정품
10가지 삼매를 설하고 있다. 삼매에 의해서 보살이 모든 세계에 두루 들어가되 세계에 집착하지 아니하며, 모든 중생계에 두루 들어가되 중생에 취하는 것이 없다.
28. 십통품
타심통이나 누진통과 같은 10가지 신통을 보이고 있다.
29. 십인품
무생인을 비롯하여 10가지 지혜의 경계인 10가지 인(忍)을 말한다. 이 무생법인은 앞에서 제8 부동지보살이 증득한 경계이기도 하다. 제8지에 오르면 불과에 오른 것과 같은 경계로 간주함은 앞에서 본 대로이다. 그러면 무엇이 무생법인인가?〈십인품〉에서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보살이 조그만 법의 남도 보지 않고 사라짐도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지 않으면 사라짐이 없고, 사라짐이 없으면 다함이 없고, 다함이 없으면 때를 여의고, 때를 여의면 차별이 없고, 차별이 없으면 처소가 없고, 처소가 없으면 적정하고, 적정하면 탐욕을 여의고, 탐욕을 여의면 지을 것이 없고, 지을 것이 없으면 원함이 없고, 원함이 없으면 머무를 것이 없고, 머무를 것이 없으면 가고 옴이 없기 때문이다.
남이 없는 법은 불생불멸의 깨달음의 지혜 경계임을 알 수 있다.
30. 아승지품
세존께서 일백낙차라는 수에서 불가설불가설전(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제곱)을 극수로 하는 큰 수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아승지도 그 큰 수의 이름 중에 하나로 나온다.
불보살의 덕용은 광대무변하여 이 큰 수와 같이 크거나, 그보다도 더 크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31. 여래수량품
심왕보살이 부처님 세계의 수명을 말씀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이 계시는 사바세계의 한 겁이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세계에서는 낮하루 밤하루라고 하며 이렇게 수많은 부처님 세계의 수명이 다 다름을 보인다.
이 부처님들의 수명은 그 세계의 근기에 따라서 장단이 자재한 불덕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시간적으로 일즉다(一卽多)의 상즉(相卽)경계라 할 수 있다.
32. 보살주처품
시방의 보살주처를 말하였다. 예를 들면 동북방에 청량산이 있으니 지금은 문수사리보살이 그의 권속 일만보살과 함께 그 가운데 있으면서 법을 연설한다는 것이다.
이〈보살주처품〉에 보이는 보살과 그 주처는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는 화엄신앙도량을 추정케 하는 경증(經證)이 되고 있다.
33. 불부사의법품
연화장보살이 부처님의 국토 등 부처님 과덕이 불가사의함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34. 여래십신상해품
여래께서 가지신 32가지의 거룩한 모습 내지 티끌 수만큼 거룩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35. 여래수호광명공덕품
여래에게 갖추어져 있는 잘생긴 모습을 세존께서 말씀하시고 있다. 여기서는 화엄수행의 특징적인 모습의 하나인 일단일체단(一斷一切斷)의 내용도 담겨 있다. 이 점 또한 화엄교학을 살필 때 언급하겠다.
36. 보현행품
보현보살의 평등한 인행을 말하였다.
화엄에서는 부처님 세계를 중생 앞에 펼쳐 보이는, 인과가 둘이 아닌 인행이며 과행을 보현행으로 대표짓고 있다.
그 동안 살펴온 말씀 중에 보현보살이 설주가 된 교설이 많았는데, 이곳 제7회 11품도 주로 보현보살이 설하고 있다. 이 11품 중에는 다른 모임에서와 달리 세존과 심왕보살과 연화장보살이 설하시는 품도 있다. 그러나 주로 보현보살에 의해 설해지고 있다.
보현보살의 보현은 덕이 법계에 두루 미치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편행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보현행품〉에서는 특히 성내는 마음을 배격하고 있다.
불자여, 나는 어떤 법의 허물이라도 보살들이 다른 보살에게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보다 큰 것을 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다른 보살에게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100만 가지 장애되는 문을 이루게 되는 까닭이다.
보살이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100만 가지 장애되는 문을 일으킨다고 하니 일장일체장(一障一切障)의 도리이다. 화내는 것은 대부분 자기자신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 화냄에 의해서, 따라 일어나는 장애의 첫째로 보리를 보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보살행을 빨리 만족하려면 10가지 법을 부지런히 닦아야 하며, 그래서 청정함을 구족하며, 지혜를 구족하며, 두루 들어감에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두루 들어감에 있어서 "일체 세계가 한 모공에 들어가고 한 모공이 일체 세계에 들어간다", "일체 중생의 몸이 한 몸에 들어가고 한 몸이 일체 몸에 들어간다" 하는 등, 일입일체(一入一切) 일체입일(一切入一)의 상입(相入)세계가 두드러지게 교설되고 있다. 후에 화엄가들은 이 도리에 대해 그 까닭을 밝히는 등 깊이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이〈보현행품〉은 다음의〈여래출현품〉과 함께 화엄가들에 의하여 법계연기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전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점도 다음에 살피기로 한다.
37. 여래출현품
〈여래출현품〉은 여래의 과덕을 보이고 있으니,《육십화엄》에서는〈보왕여래성기품〉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는 여래출현, 즉 여래성기의 화엄세계를 드러낸 것이다. 화엄성기사상은 법계연기와 함께 화엄사상의 2대 측면으로 간주되고 있다. 법계연기가 연기의 측면에서 볼 때 화엄세계를 드러내는 대표격인 사상이라면, 화엄성기는 타 종파나 교학과 대비되는 측면에서 화엄을 대표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이는 특히 선과의 교섭에서 선과 화엄의 통로가 되고 있다. 그래서 후에 선과 교를 회통시키는 교선일치나 선교일치를 주창하는 데 있어서 교 전체를 대표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성기(性起)의 의미는 여래출현 출생 생여래가 여래성의 시현, 여래종 등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경에서는 성기묘덕보살, 즉 문수보살이 여래께서 출현하시는 10가지 상(여래의 출현하는 법·여래의 몸·음성·마음·경계·행·성정각·전법륜·반열반·견문 친근 선근)을 질문하고, 보현보살이 답하고 있다.
(1) 여래출현법
첫째, 여래출현법은 헤아릴 수 없으니 한 가지 인연이 아니라 무량법으로 출현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현보살이 거듭 이 뜻을 밝히기 위해 게송을 읊고 있다. 그 중에 우리 불교교단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게송 하나를 보자.
만약 부처경계 알고자 하면 若有欲知佛境界
그 뜻을 맑히기 허공과 같이하며 當淨其意如虛空
망상과 모든 집착 멀리 여의고 遠離妄想及諸取
마음이 향하는 바가 걸림없도록 하라. 令心所向皆無
조선시대 설잠은《화엄석제》에서 이 게송을 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2) 여래신
여래의 법신 역시 10가지 비유로 교설하고 있다. 그 중 여래법신의 2대 특징으로는 허공과 광명의 비유이다. 허공으로는 여래의 존재양상을 보이고, 광명으로는 법신의 작용과 덕상을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것을 성(性)과 기(起)로 보고도 있다. 이 여래신의 모습 중에 다섯번째 생맹(生盲)의 비유는 특히 주목되는 경계이다.
여래의 지혜 해는 날 때부터 신심의 눈이 없는 생맹 중생까지도 이롭게 하여 선근을 길러 성취케 하니, 지혜 햇빛을 보지는 못하더라도 그 이익은 얻는다.
이 말씀은 화엄세계가 다 비로자나법신의 출현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워하는 이들을 깨우쳐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3) 여래의 음성
여래의 음성은 중생들의 좋아하는 마음을 따라 환희케 한다는 말씀과 더불어 10종으로 교설되고 있다.
제14강 화엄경의 내용-여래출현·제8회 이세간품
여래출현의 10종법 가운데 이어서 네번째 여래심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4) 여래심
여래심은 바로 여래성기심으로서 여래출현에 있어서 특히 중요시되어온 교설 부분이다. 이 역시 10종심이 있음을 보이며 이 마음은 지혜와 같이 쓰이고 있다. 여래의 마음을 모두 볼 수는 없으나 다만 지혜가 한량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여래의 마음 또한 10가지로 교설되어 있는데 그 첫째는 여래의 지혜는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허공이 모든 물건의 의지가 되지만 허공은 의지한 데가 없으니, 여래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모든 세간지와 출세간지의 의지가 되지만 여래의 지혜는 의지한 데가 없다.
이렇게 비유로 여래의 지혜를 차례로 설하고 있다.
그 중에 열번째 마음은 특히 주목되어온 여래의 지혜이다. 그것은 여래의 지혜는 이르지 못하는 데가 없다는 무처부지(無處不至)의 여래심이다.
여래의 지혜는 이르지 못하는 데가 없다. 왜냐하면 한 중생도 여래의 지혜를 갖추어 가지지 않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허망한 생각과 뒤바뀐 집착으로 증득하지 못하니, 만일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온갖 지혜가 곧 앞에 나타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유로서 큰 경책을 들고 있다. 이를 미진경권유(微塵經卷喩) 또는 진함경권유(塵含經卷喩)라 부르고 있다.
이 미진경권유는 분량이 삼천대천세계와 같은 경권이 있어 삼천세계에 있는 일이 모두 쓰여 있으나, 이 큰 경책이 한 티끌 속에 있어서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며, 한 작은 티끌속과 같이 모든 작은 티끌 속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지혜가 밝은 사람이 청정한 천안을 구족하여 이 경책이 작은 티끌 속에 있어 이익이 되지 못함을 보고 꾸준히 노력하는 힘으로 저 티끌을 깨뜨리고 이 경책을 내어서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즉시 방편을 내어서 작은 티끌을 깨뜨리고 이 큰 경책을 꺼내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이익을 얻게 하였으며, 한 티끌과 같이 모든 티끌을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래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한량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일체 중생을 두루 이익되게 하는 것이 중생들의 몸속에 갖추어 있지만, 어리석은 이의 허망한 생각과 집착으로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이익을 얻지 못한다.
여래께서 청정한 지혜눈으로 법계의 모든 중생을 두루 관찰하고 말씀하시기를 "이상하고 이상하다. 중생들이 여래의 지혜를 구족하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가. 내가 마땅히 성인의 도를 가르쳐서 허망한 생각과 집착을 영원히 여의고 자기의 몸속에서 여래의 광대한 지혜가 부처와 같아서 다름이 없음을 보게 하리라" 하시고, 곧 저 중생들로 하여금 성인의 도를 닦아서 허망한 생각을 여의게 하며 허망한 생각을 여의고는 여래의 한량없는 지혜를 얻어서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한다.
이처럼 보살은 마땅히 여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무처부지의 여래심은 화엄가들에게 매우 중요시되어 왔던 부분이다. 우선 티끌 속에 경권이 들어 있다고 해서 여래장사상의 전거가 되었다. 그런가하면 여래장사상을 바탕으로 한 법계연기사상의 전거도 된다. 특히 미진을 깨뜨리고 경권을 꺼내어 이익을 준다는 측면에서 이는 여래성기의 출처가 되어, 매우 주목을 받은 여래출현의 경계인 것이다.
고려시대의 보조국사 지눌도〈여래출현품〉의 이 대목을 보고 불심(佛心)과 불어(佛語)가 하나인 줄을 깨닫고 너무 기뻐서《화엄경》을 머리에 이고 눈물을 흘렸다고 자술하고 있다. 이 여래심의 여래출현상은 선교일치의 경증이 되고 있는 것이다.
(5) 여래경계
여래의 경계란 여래의 지혜가 활동하는 경계이니, 곧 중생계를 떠나 있지 않다. 그래서 모든 세간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이다.
보살은 마땅히 마음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임을 알며, 마음의 경계가 그지없고 한량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이러하게 생각하고 분별함으로써 이러이러하게 한량없이 나타나는 까닭이다〔如是如是思惟分別 如是如是無量顯現〕. 이 경계 역시 일체유심조의 화엄세계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6) 여래의 행
여래의 지혜가 중생에게 응하는 것은 행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여래행은 보살의 공덕행으로 나타난다. 여래행은 걸림없는 행이며, 진여의 행이 여래의 행이다.
그러나 진여가 생하지도 움직이지도 일어나지도 않듯이, 여래행 또한 불생(不生)·부동(不動)·불기(不起)이다. 기이불기(起而不起)인 것이다. 여래행은 시간의 범주를 초월하므로 현재에 활동하되 불기(不起)인 것이다. 이것이 성기(性起)인 것이다.
(7) 여래의 성정각
여래의 지혜와 행의 근거가 곧 보리(菩提)이다. 부처님의 보리는 바다와 같아서 모든 중생의 마음과 근성과 욕망을 두루 나타내면서도 나타내는 것이 없다. 부처님의 보리는 모든 글자로도 표현할 수 없으며, 모든 음성으로도 미칠 수 없으며, 모든 말로도 나타낼 수 없으나 마땅함을 따라서 방편으로 열어 보인다.
부처님의 보리는 허공과 같아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거나 이루지 못하거나 늘어나고 줄어듦이 없다. 보리는 모양도 없고 모양 아님도 없으며 하나도 없고 여러 가지도 없는 까닭이다.
보살마하살은 자기의 마음에 생각생각마다 항상 부처가 있어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을 알아야 한다.
(8) 여래의 전법륜
여래는 마음의 자유자재한 힘으로써 일어남도 없고 굴림도 없이 법륜을 굴리니, 모든 법이 항상 일어남이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그러나 글자와 온갖 말로써 법륜을 굴리니, 여래의 음성은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까닭이다.
일체 중생의 갖가지 말이 다 여래의 법륜을 떠나지 않았으니, 왜냐하면 말과 음성의 실상이 곧 법륜이기 때문이다.
(9) 여래의 반열반
보살이 여래의 열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근본 성품을 알아야 한다. 진여의 열반처럼 여래의 열반도 그러하여, 열반은 생겨나는 일도 없고 벗어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 생겨남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면 멸함이 없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여래의 열반을 보이고 있다.
여래는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내게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사모함을 내게 하려고 열반함을 보이신다. 그러나 여래는 참으로 세상에 출현하심도 없고 열반하심도 없다. 왜냐하면 여래는 청정한 법계에 항상 계시면서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열반함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해가 떠서 세간에 두루 비치되, 깨끗한 물이 있는 그릇에는 그림자가 나타나서 여러 곳에 두루하지만 오거나 가는 일이 없으며, 그릇이 깨지면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10) 견문·친근·선근
경에서는 보살이 여래의 정등각을 보고, 듣고, 친근하여 심은 선근이 모두 헛되지 않은 줄을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깨달음의 지혜를 내는 까닭이며, 내지 온갖 훌륭한 행을 이루는 까닭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여러 좋은 비유로 부처님을 뵙고 말씀을 듣고 가까이 모신 선근공덕이 다함이 없음을 보이고 있다.
먼저 금강 비유를 들고 있다. 장부가 금강을 조금만 삼켜도 소화가 되지 않고 몸을 뚫고서 밖으로 나오니, 금강은 육신에 섞여서 함께 있지 않는 까닭이라고 한다. 이처럼 여래께 조그만 선근을 심어도, 모든 유위행과 번뇌의 몸을 뚫고 지나가서 무위의 가장 높은 지혜에 이르니, 이 선근은 유위행과 번뇌와 함께 머물지 않는 까닭이다.
또, 가령 마른 풀을 수미산처럼 쌓았더라도 그 가운데 겨자씨만한 불을 던지면 모두 다 타고 마니, 불은 능히 태우기 때문이다. 그처럼 여래에게 조그만 선근을 심어도 모든 번뇌를 태워 버리고 필경에 무여열반을 얻는다.
그리고 설산에 있다는 진귀한 선견이란 약나무의 비유를 들어서 여래도 약왕이라 일컫고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함을 말하고 있다. 여래의 육신을 보는 이는 눈이 깨끗하고, 여래의 이름을 듣는 이는 귀가 깨끗하고, 여래의 계행 향기를 맡는 이는 코가 깨끗하고, 여래의 법을 맛본 이는 혀가 깨끗하여 광장설을 갖추어 말하는 법을 알고, 여래의 광명에 닿은 이는 몸이 깨끗하여 필경에 위없는 법신을 얻고, 여래를 생각하는 이는 염불하는 삼매가 청정하여진다.
뿐만 아니라 만일 중생이 여래께서 지나가신 땅이나 탑에 공양하더라도 역시 선근을 갖추어서 모든 번뇌와 근심을 멸하고 성현의 즐거움을 얻는다.
그리고 가령 어떤 중생이 부처님을 보거나 들으면서도 업에 덮여서 믿고 좋아함을 내지 못하더라도, 역시 선근을 심게 되어 헛되지 않을 것이며, 내지 필경에는 열반에 들게 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이같이 여래께서 계신 데서 보고 듣고 친근하면 그 선근으로 모든 나쁜 법을 여의고 착한 법을 구족하리라 원하고, 견문 친근하여 선근을 쌓도록 강조하고 있다.
38. 이세간품
제8회는〈이세간품〉한 품으로 보광명전 부처님 처소에서 보현보살이 불화엄삼매에 들었다가 일어나 보혜보살의 200가지 질문을 받고 한 물음에 10가지씩 모두 2,000가지의 대답을 한 것이다. 즉, 신·십주·십행·십회향·십지·등각·묘각 등 모든 지위를 포섭한 일체 보살행을 다시 한 번 총괄적으로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의지(依支)인가로 시작해서 무엇이 보살의 행이며, 선지식이며, 내지는 어찌하여 여래 응공 정등각께서 반열반하심을 보이셨는지를 설하고 있다. 모든 보살도를 총괄하면서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계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세간이라는 의미는 세간을 떠난다, 세간을 여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세간이 무엇이며 여읜다는 것은 어떠한 경계인가 하는 것을 짚어보게 한다. 그에 대해서 화엄가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그것을 종합해서 한 마디로 말하면 이세간이란 처렴상정(處染常淨)을 말하니 동사섭으로 중생계에 있으나 물들지 않는 경계이다. '처세간여허공 여연화불착수(處世間如虛空 如蓮花不着水)'라고 한 연꽃경계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이세간품〉다음에 오는,《화엄경》의 마지막 품인〈입법계품〉에서 법계(法界)에 들어간다고 함도 다시 들어갈 법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제15강 화엄경의 내용-제9회 입법계품
제9회 역시 한 품인〈입법계품〉으로 이루어져 있다.〈입법계품〉은《화엄경》의 마지막 품으로서 품수는 39품 중 한 품이지만, 그 분량은 권수(62∼80)로나 페이지수(대정장 10, pp. 331∼446)로 볼 때 총《화엄경》분량 중 약 4분의 1에 해당되는 방대한 양이다.
〈입법계품〉의 별행경은 다른 대부분의 화엄부 경전보다 일찍 성립된 품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선재동자의 구법을 통해 전편의 내용이 재현되는 형식이 취해지고 있다. 문수보살에게서 발심한 선재동자가 보살의 가르침대로 선지식을 역참하여 보살도를 배우고, 보현보살의 원과 행을 성취함으로써 법계에 들어간다는 줄거리이다. 선재의 구법 여정이나 선지식의 해탈법문은 화엄의 보살도를 말해 주는 주요 자료가 된다.
〈입법계품〉도 근본법회와 지말법회로 나눌 수 있다. 근본법회에서는 세존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 대장엄중각에서 사자빈신삼매에 드신 후 설법하시는 내용이다. 그 자리에 보현의 행과 원을 성취한 보살과 성문들과 세주와 함께 계시는데 보현보살과 문수사리보살이 우두머리가 되었다.《화엄경》청법대중 가운데 성문들이 보이는 곳은 이 근본법회뿐이다.
지말법회는 그 자리에 있던 문수사리동자가 부처님께 공양올리고는 남쪽으로 인간세계를 향함에서부터 시작된다. 문수보살이 복성의 동쪽 장엄당 사라숲에 머물며 법계를 두루 비추는 수다라를 말씀하니 복성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그 중에 선재동자도 함께 있었다.
문수보살은 선재가 어머니 태에 들 때부터 집안에 금은보화가 가득 쌓이기 시작하였으므로 부모와 친척들이 선재라는 이름을 지어줄 만큼 복많은 이였음을 알았다. 또 이 동자가 과거의 여러 부처님께 공양하며 선근을 많이 심었고 선지식을 항상 친근하였으며 삼업에 허물이 없고 지혜로 불법을 깨달을 수 있는 근기임을 알았다.
문수보살이 이렇게 선재를 관찰하고는 선재와 대중들을 위하여 모든 부처님법을 연설하였다. 선재는 자재한 지혜와 변재로 부처님법을 설하는 문수보살의 법문을 듣고 발심을 하게 된다.
선재는 자신의 모습이 부처님과는 너무나 다른 점을 발견하고 반성을 하였다. 선재가 생각하기를, 자신은 어리석고 교만하며 탐내고 성내는 마음이 많아서 생사 고통의 성 속에 갇혀 있음을 깨닫고 해탈의 문을 찾는 길을 걷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그 길을 가르쳐 주길 문수보살에게 청하였다.
문수보살은 선재가 과거에 심은 선근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길을 가고자 한다고 칭찬하며, 온갖 지혜를 구족하는 첫째 인연은 선지식을 친근하고 공양하는 것이니, 그 일에 고달픈 생각을 내지 말라고 하였다.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게 여쭈었다.
보살은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행을 닦으며, 어떻게 보살행에 나아가며, 어떻게 보살행을 행하며, 어떻게 보살행을 깨끗이 하며, 어떻게 보살행에 들어가며, 어떻게 보살행을 성취하며, 어떻게 보살행을 따라가며, 어떻게 보살행을 생각하며, 어떻게 보살행을 더 넓히며, 어떻게 보현의 행을 빨리 원만케 합니까?
이에 문수보살이 한량없는 부처님을 뵙고 원력을 성취하면 보살행을 구족하게 되며, 모든 세계 모든 겁 동안 보현행을 닦아 행하면 보리도를 성취하리라고 한다. 그러려면 지혜가 있어야 하고, 온갖 지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가서 법문을 들어야 한다고 하면서 선지식의 여러 방편에 허물을 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고는 남쪽으로 승낙국을 찾아가 묘봉산에 있는 덕운비구를 만나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고 닦으며 내지 보현행을 빨리 원만히 할 수 있는지 묻도록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선재동자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에 따라 선지식을 찾아 길을 떠난다. 여기서 선지식을 찾아나서는 선재는 세간의 복이 많은 이로서 선근과 신심이 있었기에 문수보살을 만났고, 강한 의지로 발심하여 해탈도를 구하는 수행자로서의 보살이 되어 선지식을 친견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재는 덕운비구 선지식을 만나 해탈법문을 들었다. 덕운비구는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지혜의 광명으로 두루 보는 법문
〔憶念一切諸佛境界 智慧光明普見法門〕을 얻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덕운비구 선지식은 대보살들의 지혜로 청정하게 수행하는 문이야 어떻게 알겠는가 하며, 남쪽 해문국에 있는 해운비구를 찾아가서 보살행을 물으라고 한다. 해운비구는 광대한 선근을 일으키는 인연을 분별하여 말해 줄 것이라고 하였다.
선재동자는 덕운비구 선지식으로부터 염불(念佛)해탈문을 얻고는 덕운비구의 가르침대로 다시 해운비구를 찾아 길을 떠난다. 이렇게 해서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선지식을 친견하여 해탈문을 성취하게 된다. 문수보살로부터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선재가 찾아간 선지식을 우리는 53선지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선재는 선지식을 54번 만나며, 만난 선지식 수도 54분이다. 그런데 문수보살을 두 번 만나고 한 곳에서는 두 선지식을 함께 만나기 때문에 53선지식이라 일컫고 있다.
이렇게 선재가 역참한 선지식을 보면 우선 보살이 다섯(문수·관음·정취·미륵·보현보살)이다. 그리고 비구 5(덕운·해운·선주·해당·선견비구), 비구니 1(사자빈신비구니), 우바이 4, 장자 9, 거사 2, 천신 1, 여신 10, 천녀 1, 바라문 2, 선인 1, 왕 2, 선생 1, 동자 3, 동녀 2, 뱃사공〔船師〕 1, 외도 1, 유녀(狀女) 1, 싯닫타 태자비 1, 태자모 1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선재가 선지식과 만남으로 해서 도달되는 지위는《화엄경》전편에서 말하는 42계위와 대비시키고 있다. 처음 문수보살은 신위에 해당하며, 덕운비구는 10주초의 초발심주이며 차례로 배대하여 태자비였던 구바녀가 제10지에 배대된다. 그리고 등각에 10분, 미륵보살은 묘각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마지막 제53 보현보살은 전보살도와 불과행위를 총망라하는 자리이다.
법장은《탐현기》에서 문수가 선재로 하여금 여러 곳을 순력하여 선우(善友)를 구하게 한 것에 다음과 같은 8가지 뜻이 있음을 들고 있다.
궤범이 되기 때문이다. 선재는 법을 구하는 묘한 모범을 이루고, 선지식은 법을 설하는 좋은 규범을 보여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이러한 자취를 모범으로 삼아서 행하게 하는 것이다.
행연(行緣)이 수승하기 때문이다. 범행을 이루는 데는 선지식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견만(見慢)을 타파하기 때문이다. 신학(新學)보살인 선재로 하여금 법을 구하는데 여러 부류의 선지식을 만남으로 해서 스스로의 교만을 깨뜨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세마(細魔)를 여의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에 매여 하나만 고수한다면 후행(後行)이 증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집착하는 허물도 있는 까닭이다.
행(行)을 이루기 때문이다. 선재가 한 법문을 얻어서도 수행할 수 있는데 그렇게 널리 구하는 것은 보살행과 선우의 행과 법을 구하는 행 등을 성취하는 것이다.
지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선지식에 의탁함으로써 신(信) 등의 다섯 가지 지위의 차별된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선재의 지위는 신위의 선지식을 만나면 신위이며, 주에 있으면 주위이니 한 몸으로 오위(五位)를 거친다. 있는 곳에 따라서 곧 그 지위가 일체에 두루하기 때문에 보현의 지위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불법이 깊고 넓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모든 선지식은 비록 지위가 법운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나는 오직 이러한 하나의 법문만 알고 있을 뿐이다. 어찌 모든 보살의 한량없는 보살의 경계를 요달하겠는가'라고 하며 다른 선지식을 찾아가 보살도를 배우도록 일러주고 있다. 선재 또한 비록 지위가 등각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사오나 어떤 것이 보살행이며 보살도인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며 선지식에게 보살도를 묻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연기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선재는 선지식과 더불어 하나의 연기를 이루니 능입과 소입이 두 가지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식 외에 선재가 없으므로 하나가 곧 일체임을 드러내서 선재가 모든 지위를 거침을 밝힌다. 또 선재 외에 선지식이 없으므로 일체가 곧 하나임을 나타내어서 여러 지위가 선재에게서 이루어짐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거둠과 펼침이 자재하며 서로 원융하여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서 그 특기할 만한 점을 화엄의 만수인 10가지만 찾아보려 한다.
(1) 선재가 선지식을 만나 발심할 수 있었던 것은 선근이 있었기 때문이며, 주체적인 자각이 배제될 수 없다.
선재가 문수보살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는 복성에 사는 수많은 우바새·우바이, 동남·동녀들이 있었다. 그러나 선재가 가장 선근이 깊었기에 문수보살이 부처님 세계를 말씀하실 때 당시의 자신의 모습이 부처님과 너무나 다름을 느끼고 참회를 하며 부처님을 닮고자 발원하였던 것이다.
(2) 선지식들의 해탈법문은 그들의 이름, 처소, 신분 등과 밀접하게 연계됨을 발견할 수 있다.
(3) 총 54분의 선지식 가운데 여성이 21분(비구니, 우바이, 여신, 천녀, 동녀, 유녀, 태자비, 태자모)이나 되는 것이다. 이는 비남비녀(非男非女) 역남역녀(亦男亦女)라 할 수 있는 보살은 여성 선지식에 넣지 않은 숫자이다.
그리고 십지 계위는 모두 여성 선지식에 해당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십지는《화엄경》에서 화엄보살도를 총괄하며 화엄의 일승보살도를 대표하는 계위이다. 그 자리는 특히 비심(悲心)이 증대된 자리이다. 따라서 여성이라는 특징적인 모습을 통해 화엄의 일승보살도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같이 화엄세계에서는 숫자적으로나 해탈경계로나 남녀의 차별적인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 여성에게 자비·청정·수순중생의 덕이 수승하며, 생불(生佛)하는 특징적인 장점까지 있음을 오히려 부각시키고 있다. 그것은《화엄경》에서의 여성 선지식은 여래의 행덕을 드러내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4) 선재가 선지식과 만남으로 해서 도달되는 지위는《화엄경》전편에서 말하는 화엄보살도의 계위인 42계위와 그 속에서 수행하는 10바라밀에 차례로 배대되어 있다.
처음 문수보살은 신위에 해당하며, 덕운비구는 10주초의 초발심주이며, 차례로 배대하여 태자비였던 구바녀가 제10지에 배대된다. 그리고 등각에 10분, 미륵보살은 묘각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마지막 제53 보현보살은 전보살도와 불과행위를 총망라하는 자리이다.
(5) 이들 선지식의 계위는 법계로 향해가는 점차적인 단계가 아니라 일위일체위이다. 선재는 각 선지식에게서 모두 해탈문을 증득하며 선지식은 일위일체위의 일승보살 계위를 다양한 방편으로 교설하고 있는 것이다. 문수보살로부터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보살의 수행계위를 두루 지나는 선재의 지위는 일체에 두루하기 때문에 보현의 지위와 같다.
(6) 인과불이의 보살도를 보여 준다. 그것은 선재가 문수·미륵·보현보살을 만나는 여정에서 특히 더 보여 주고 있다.
선재동자가 비로자나장엄장 대누각에서 미륵보살을 만나 미륵보살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것을 칭찬받고 보리심 공덕에 대한 설법을 들었다. 그리고 미륵보살이 누각에 나아가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니 문이 열렸다. 그리하여 누각의 갖가지 장엄과 불가사의한 자재로운 경계를 보고 해탈문에 들어갔다.
그런데 미륵보살이 다시 손가락 튕기는 소리를 듣고 삼매에서 일어나니 누각의 장엄이 다 사라졌다. 그리하여 미륵보살이 다시 문수보살에게 가서 보살행을 배우도록 권하는 것이다.
그때 선재동자는 미륵보살이 가르쳐준 대로 110성을 지나서 보문국의 소마나성에 이르러 문수보살을 뵙기를 희망하였다. 이때 문수보살이 멀리서 오른손을 펴 110유순을 지나와서 선재동자의 정수리를 만지며 말씀하였다.
"선재동자가 만약 신근(信根)을 여의었다면 조그만 공덕에 만족하고 행원을 일으키지 못하며, 선지식의 거두어 주고 보호함도 받지 못하며, 여래의 생각하심도 되지 못했을 것이며, 내지 두루 증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선재를 칭찬하였다. 그러고는 선재로 하여금 보현행원을 성취할 결심을 굳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선재가 일심으로 보현보살을 만나려고 정진하여 드디어 보현보살을 만나서 보현의 자유로운 신통을 보게 되었다. 그때에 선재동자는 보현의 행과 원의 바다를 믿어서 보현보살과 평등하고 내지 부처님의 해탈자재도 모두 평등하였다.
그때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공덕바다가 한량없음을 게송으로 말씀하였다.
세계 티끌 수 같은 마음 헤아려 알고 刹塵心念可數知
큰 바다 물을 마셔 다하고 大海中水可飮盡
허공을 측량하고 바람맬 수 있으나 虛空可量風可繫
부처님의 공덕은 말로 다할 수 없도다. 無能盡說佛功德
이 게송 또한 기도시 항상 하는 염불문으로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게송이다.
이처럼 선재는 처음 문수보살에게서 시작하여, 미륵보살에게서 불과에 들고 다시 문수를 만나 보현행원에 머무르는 것으로 일단 그 여정이 끝난다. 따라서 이는 인과 과가 둘이 아닌 경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7) 선재 역시 초발심에 해탈하여 법계에 들었으며〔入法界〕계속해서 선지식들을 만나 무수한 해탈문을 증득함으로써 펼쳐 보이는 중중무진한 화엄일승보살도는 불세계를 장엄하는 행이다.
(8) 선재나 선지식 모두 여래출현의 존재이다.
(9) 이외에도 무진법계연기나 화엄성기 등, 후에 체계화된 화엄사상이나 수증법이 이들 선지식의 해탈경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즉, 해인삼매, 일중다·다중일, 일즉다·다즉일, 동체·이체의 상즉·상입, 일엄·일체엄의 보엄·보문, 일단일체단·일성일체성, 융삼세간불의 화엄경계가 선재가 여성 선지식들을 만나는 여정에서 적나라하게 교설되고 드러나 있는 것이다.
(10) 이러한 모든 선지식의 해탈경계와 보살도는 보현보살의 행과 원에 포섭되며 10대원으로 대표된다. 이 보현보살의 10종 대원은《사십화엄》의〈보현행원품〉에만 나타나는 원이다.
제16강 화엄경의 내용-보현행원품
지금까지《팔십화엄》의 전체 구성과 그 내용을 대강 살펴보았다. 이제《팔십화엄》에는 없으나 우리 주변에〈보현행원품〉으로 널리 지송되는 보현보살의 10종 대원 부분을 잠깐 살펴보겠다.〈보현행원품〉이란〈입법계품〉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나 좁게는《사십화엄》에만 있는 보현보살의 10종 행원 부분만 일컫기도 한다.
이 보현보살의 10종 행원은 40권《화엄경》의 제40권에서 보현보살에 의해 설해지고 있다.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수승한 공덕을 찬탄하고 나서 모든 보살과 선재동자에게 말씀하였다.
선남자여, 여래의 공덕은 가령 시방에 계시는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불가설불가설 불찰극미진수 겁을 지내면서 계속 말씀하시더라도 다 말씀하지 못하시느니라. 만약 이러한 공덕문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마땅히 10가지 넓고 큰 행원을 닦아야 하느니라.
10가지라 함은 무엇인가.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이다〔禮敬諸佛願〕.
둘째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다〔稱讚如來願〕.
셋째는 널리 공양하는 것이다〔廣修供養願〕.
넷째는 업장을 참회하는 것이다〔懺悔業障願〕.
다섯째는 남이 짓는 공덕을 기뻐하는 것이다〔隨喜功德願〕.
여섯째는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請轉法輪願〕.
일곱째는 부처님께 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하는 것이다〔請佛住世願〕.
여덟째는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것이다〔常隨佛學願〕.
아홉째는 항상 중생을 수순하는 것이다〔恒順衆生願〕.
열째는 지은바 모든 공덕을 널리 회향하는 것이다〔普皆廻向願〕.
그리하여 어떻게 예배하고 공경하며 내지 회향해야 하는지 묻는 선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1) 예경제불원
진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을 내가 보현행원의 원력으로 눈앞에 대하듯 깊은 믿음을 내어서 청정한 몸과 말과 뜻의 업을 다하여 항상 예배하고 공경하되 낱낱 부처님 계신 곳마다 무진 몸을 나투어 무진 부처님께 두루 예배하고 공경하는 원이다. 그리고 허공계와 중생계가 다하도록 나의 예배하고 공경함이 다함이 없기를 원한다.
즉,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면 나의 예배하고 공경함도 다하려니와 중생계 내지 중생의 번뇌가 다함이 없으므로 나의 예배하고 공경함도 다함이 없어 생각생각 상속하여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다.
(2) 칭찬여래원
진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무수한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수승한 지견으로 찬탄하며 미래세가 다하도록 계속하고 끊이지 아니하여 법계에 두루한다.
(3) 광수공양원
시방삼세 부처님께 내가 보현행원의 원력으로 깊고 깊은 믿음과 분명한 지견을 일으켜 여러 가지 으뜸가는 공양구로 항상 공양한다는 원이다.
모든 공양 가운데는 법공양이 가장 으뜸이 된다고 한다. 이른바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양이며,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공양이며, 중생을 섭수하는 공양이며, 중생의 고를 대신 받는 공양이며, 선근을 부지런히 닦는 공양이며, 보살업을 바라지 않는 공양이며,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이다. 여러 가지 꽃이며 음악이며 의복이며 향이며 기름 등 갖가지 공양구로 공양하여 얻은 공덕은 일념동안 닦은 법공양 공덕에 비할 바가 못된다고 한다.
(4) 참회업장원
업장을 참회한다는 것은 보살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과거 한량없는 겁으로 내려오면서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몸과 말과 뜻으로 지은 악한 업이 한량없고 가이없어, 만약 이 악업이 형체가 있는 것이라면 끝없는 허공으로도 용납할 수 없으리니, 내 이제 청정한 삼업으로 일체 불보살전에 두루 지송으로 참회하되 다시는 악한 업을 짓지 않고 항상 청정한 계행의 일체 공덕에 머물러 있으오리다" 하는 것이다.
(5) 수희공덕원
모든 부처님께서 처음 발심하실 때로부터 일체지를 위하여 부지런히 복덕을 닦되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기를 극미진수 겁을 지내고 낱낱 겁마다 일체 난행고행으로 바라밀문을 원만히 하며 이와 같이 보리를 증득하며 내지 열반에 드신 뒤에 사리를 분포하실 때까지의 모든 선근을 내가 다 함께 기뻐하며, 일체 중생들이 짓는 공덕을 모두 함께 기뻐하며, 일체 유학 무학 보살들이 무상정등보리를 구하는 넓고 큰 공덕을 내가 모두 기뻐하는 것이다.
(6) 청전법륜원
모든 부처님께 몸과 말과 뜻으로 가지가지 방편을 지어서 설법하여 주시기를 은근히 권청하는 것이다.
(7) 청불주세원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장차 열반에 드시려 하실 때와 모든 보살과 성문·연각과 일체 선지식에게 두루 권청하되 "열반에 들지 마시고 무진겁토록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여 주소서" 하고 원하는 것이다.
(8) 상수불학원
이 사바세계의 비로자나여래께서 처음 발심하실 때로부터 정진하여 물러나지 아니하시고 보리수하에서 대보리를 이루시던 일이나 내지 열반에 드시는, 이와 같은 일체를 내가 다 따라서 배우기를 지금의 세존이신 비로자나불과 같이 하는 것이다.
(9) 항순중생원
시방세계 중생들을 내가 다 수순하여 받아 섬기며 공양하기를 부모와 같이 공경하며 부처님과 같이 받든다는 원이다. 병든 이에게는 어진 의원이 되고 어두운 밤중에는 광명이 되어 평등히 일체 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보살이 일체 중생을 수순하면 곧 모든 부처님을 수순하며 공양함이 되며, 만약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심이 나게 하면 곧 일체 여래로 하여금 환희하시게 함이다. 어떠한 까닭인가?
모든 부처님께서는 대비심으로 체를 삼으시는 까닭에 중생으로 인하여 대비심을 일으키고 대비로 인하여 보리심을 발하고 보리심으로 인하여 등정각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넓은 벌판 모래밭 한가운데 있는 큰 나무가 만약 그 뿌리가 물을 만나면 줄기나 꽃이나 과실이 모두 무성하는 것과 같이 생사광야의 보리수왕도 역시 그러하다. 일체 중생으로 나무뿌리를 삼고 여러 불보살로 꽃과 과실을 삼으니 대비의 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면 즉시에 여러 불보살의 지혜의 꽃과 과실이 성숙된다. 만약 보살들이 대비의 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 까닭이다.
(10) 보개회향원
처음에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으로부터 중생을 수순하는 것까지의 모든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남김없이 회향하는 원이다. 중생들이 항상 안락하고 일체 병고는 영영 없기를 원한다. 악한 일을 하고자 하면 하나도 됨이 없고 착한 업을 닦고자 하면 다 속히 성취하여 일체 악취의 문은 닫아버리고, 인간에나 천상에나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을 열어 보이며, 모든 중생이 그 지어 쌓은 모든 악업으로 얻게 되는 모든 괴로움은 대신 받아서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해탈케 하여 마침내 무상보리를 성취하게 하는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그 닦은 공덕을 회향하니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보살의 이 회향은 다하지 아니하여 생각생각 상속하고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다.
이〈보현행원품〉의 총결분에는 이 10가지 보현행원이 널리 구족하고 원만하게 하기 위한 말씀으로 되어 있다. 이 십대원은 원 중에 으뜸이라 하여 원왕(願王)으로 일컬어지며,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원왕을 수지독송하면 일체 장애가 없음이 마치 공중의 달이 구름 밖으로 나온 것 같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여 마침내 생사에서 벗어나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되리라고 한다. 보현보살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원하오니 이 목숨 다하려 할 때 願我臨欲命終時
모든 업장 모든 장애 다 없어져서 盡除一切諸障碍
찰나중에 아미타불 친견하옵고 面見彼佛阿彌陀
그 자리서 극락세계 얻어지이다. 卽得往生安樂刹
이 원은 화엄교주가 비로자나부처님이시지만 아미타부처로 출현하실 수도 있는 사상적 배경이 된다고 하겠다. 우리나라 화엄십찰이라고 불리는 사찰에서도 비로자나부처님 대신 아미타부처님을 모셔 놓은 곳이 적지 아니함도 까닭이 있다고 하겠다.
이〈보현행원품〉의 맨 마지막 게송 역시 위 내용과 맥락을 같이하여 우리 교단내에서 회향할 때 널리 염송되어지는 게송이다.
내가 지은 수승하온 보현행의 我此普賢殊勝行
가없는 수승한 복 회향하오니 無邊勝福皆廻向
바라건대 고해중의 모든 중생이 普願沈溺諸衆生
속히 무량광불찰에 왕생하여지이다. 速往無量光佛刹
제17강 화엄경의 중국 전래와 연구
이제부터는 중국과 한국에서 체계화된 화엄사상을 그 교사부분과 함께 살펴보자. 우선《화엄경》의 중국 전래와 화엄경 연구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1. 화엄경의 전래와 번역
《화엄경》의 편찬과《화엄경》을 소의로 한 교학적 체계의 성립과는 사뭇 다르다.《화엄경》은 인도에서 이루어졌으나 화엄교학은 중국과 한국 등에서 체계화되었으니, 곧 화엄종의 성립에 의해서이다.
처음 중국의 화엄교학 형성에 기반이 되었던 것은《육십화엄》이다. 이《육십화엄》의 범본을 중국에 전래한 이는 월지국의 지법령이다. 그는 우전에서 3만 6천게의 범본을 구하여 장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법령은 계빈국 삼장 불타발타라〔覺賢〕를 만나《화엄
경》을 중국말로 번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불타발타라가 처음 장안에 도착했을 때 구마라집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구마라집(鳩摩羅什) 문하와 대립이 생겨 여산에 있는 혜원의 처소로 갔다. 그곳에서 1년 정도 머물렀다가 412년에 하산하여 형주로 갔다. 건강의 도량사에 있었을 때 번역 요청을 받아 418년에《육십화엄》의 번역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불타발타라는 경전에 통달했을 뿐 아니라 선과 율로도 이름을 날렸다고 전한다.
이《육십화엄》의 번역장에서 받아적는 필수를 맡았던 분으로 법업(法業)이 있다. 법업은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화엄경》을 이해한 자라고 전해진다.《화엄경전기》에서 법장은 "화엄대교의 출발은 법업에서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법업은《화엄경지귀》2권을 짓기도 하였다.
이처럼 중국에 있어서《화엄경》의 강포는《육십화엄》의 역장에 참예한 동진의 법업으로 효시를 삼는다. 그 이래 화엄의 강포에 참예한 자가 많았다. 불타발타라 이후도 그 이전처럼 화엄의 별행경이 많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역시 중국 화엄교학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 경으로서《팔십화엄》과《사십화엄》의 번역이 주목된다.
《팔십화엄》의 전역은 측천무후의 지원을 받아서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화엄경》의 범본이 우전국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측천무후가 칙령을 내려 사신을 보내어 십만게송의 범본을 구해오게 하였다. 그리고 실차난타(實叉難陀)로 하여금 대변공사(大遍空寺)에서 번역하게 하였으니 695년이었다. 4년에 걸쳐서 번역이 이루어졌다. 그때 측천무후가 서문과 품의 제목을 썼다고 전해지는데 서문은《팔십화엄》과 함께《신수대장경》10권의 첫페이지에 수록된 것을 볼 수 있다. 이《팔십화엄》번역장에서 법업이 필수를 맡았다.
《사십화엄》의 번역은 이로부터 96년 뒤에 계빈국 삼장 반야에 의해 번역되었다.《육십화엄》이 번역된 지 278년 뒤에《팔십화엄》이 번역되었으니,《육십화엄》이 번역된 때부터 헤아린다면 374년 뒤이다. 남인도 오다국왕이《화엄경》범본을 당나라 조정에 보낸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필수를 맡은 분은 원조(圓照)이며 청량징관도 역장에 참예하였다고 한다.
이러한《화엄경》의 번역 외에 중국 화엄교학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십지경론》의 번역을 빠뜨릴 수 없다. 이《십지경론》의 번역에 의해 화엄을 원교로 내세운 지론종이 성립되고 지론종의 혜광(惠光)을 거쳐 두순 → 지엄 → 법장에 이르러 화엄종이 대성되고 화엄교학이 체계화된 것이다.
2. 중국 화엄종의 성립
(1) 중국 화엄오조설
중국 화엄종조로는 전통적으로 법순두순(法順杜順, 557~640)→ 지상지엄(至相智儼, 602~668) →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 → 청량징관(淸凉澄觀, 738~839) →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로 이어지는 화엄오조설이 있다.
화엄종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징관의《화엄경소》에서였다. 그리고 화엄조사설은 종밀의《주법계관문》에서 처음 세우고 있다. 그러나 화엄종의 대성자 법장이 그의《화엄경전기》에서 이미 그 기초는 다져 놓았음을 볼 수 있다.
이 두순초조설 외에 지엄초조설 또는 지정초조설이 거론되고도 있다. 지엄이《화엄경》을 배운 스승은 지정(智正, 559∼639)이라는 점과 두순의 화엄관계 저술이 진찬이 아니라는 의문 때문이다. 아무튼 법장이 화엄종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법장대에 이르러 화엄종이 대성되었음에는 이견이 없다.
(2) 화엄칠조설
중국 화엄종도 그 연원은 인도에서 찾을 수 있으므로 중국 화엄오조에다 마명과 용수보살을 모셔서 화엄칠조설을 신봉해왔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용수는《화엄경》을 크게 유통시켰으며,
《화엄경》의 별행경인《십지경》을 주석한《십주비바사론》을 짓기도 했다. 마명을 모신 것은 마명을《대승기신론》의 저자로 보았던 것이니,《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은 중국에서 이룬 법계연기의 기초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국 화엄종에서는 마명과 용수, 그리고 중국의 화엄오조를 합해서 칠조를 내세운 것이다.
(3) 화엄십조설
칠조에다 세친보살과 문수와 보현보살을 합해 화엄십조설을 말하기도 한다. 세친은《십지경》에 의거하여《십지경론》을 지었으니, 화엄교학의 성립과 발달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다른 세 보살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 두 보살은《화엄경》에 출현하시는 양대보살이다.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분 중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있을 수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이 두 분은 경전상의 이상적인 보살마하살이라 해야 할 것이다.
중국과 한국을 통틀어 말한다면 지엄 다음에는 의상을 자리매김하여야 한다는 설도 있다. 법장은 스승인 지엄의 입적시까지 거사로 있었으며 의상보다 20년 정도 연하이다. 그런데 의상은 귀국하여 한국 화엄종의 초조가 되었으므로 중국 화엄종은 법장에 의해 확립되었다고 본다.
3. 화엄종 성립의 배경
지엄은 12세 때 두순을 따라가 달법사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계속 두순의 인도를 받았음이《화엄경전기》에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화엄경》을 배운 것은 같은 지상사(至相寺)에 기거했던 지정으로부터였다. 지정은 혜광(惠光) → 도빙(道憑) → 영유(靈裕) → 정연(靜淵)으로 계승되는 지론종(地論宗) 남도(南道)파에 속했다. 법장 역시 지론종 남도파의 사상적 영향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화엄종의 성립을 살핌에 있어 지엄·법장과 관련 있는 당시의 종파상황을 헤아려보지 않을 수 없다.
법장 당시 유심에 대한 이해가 각기 다름에 따라 여러 종파가 형성되었다.《화엄경》의 유심설에 바탕을 둔 세친의 유식사상이 중국에 전파된 것은《십지경론》의 번역에 의해서이다. 즉, 보리유지와 륵나마제 등이 세친의《십지경론》을 번역함에 의해 지론종이 일어났다. 진제가 무착의《섭대승론》을 번역하여 섭론종이 흥기하였으며, 이어서 현장이 호법 등의《성유식론》을 번역함에 의해 자은법상종이 형성되었다.
지론종은 남도와 북도의 2파가 있으니《십지경론》을 번역함에 있어서 륵나마제는 정식설〔法性生一切法〕의 입장을 취했는데 혜광에 의하여 남도파로 형성되었다. 보리유지는 망식설〔黎耶生一切法〕을 주장하였는데 도총에 의하여 북도파로 계승되었다.
남·북도라 함은《속고승전》에서 낙양 아래에 남북으로 난 두 길이 있었는데 도총은 북도에서 4인을, 혜광은 남도에서 도빙 등 10인을 지도하였다는 데서 보인다.
그런데 후에 지론종 북도는 같은 뢰야망심을 주장하면서도 제9 무구식(無垢識)을 설정한 섭론종에 흡수되고 섭론종은 다시 법상종과 합해진다.
반면 지론종 남도계는 혜광 문하가 크게 번성하였는데 그 아래 도빙(道憑)·담준(曇遵)·법상(法上)이 유명하다. 담준의 제자에 담천이 있어 법상종을 세우고, 법상 문하에 정영사 혜원(523∼592)이 있었다. 혜원은《대승의장》을 편찬하였으며, 이 혜원의 사상 또한 화엄종의 교학체계가 형성됨에 있어서 그 기초가 되었다. 도빙의 제자에 정연이 있고 정연의 뒤를 이은 지정대에 이르러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화엄종의 지엄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지엄과 법장 당시는 제가들이 심(心)의 분류 및 아뢰야식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였다. 망식설과 정식설은 뢰야연기와 진여연기의 대립을 야기시켰으니 이는 당시의 어려운 문제였다. 법장은 이러한 대승연기설을 종합하고 통일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당시 스승인 지엄과 동시대인으로서 교세를 떨치고 있었던 현장의 법상종 사상을 초극할 수 있는 원리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에 법장은 초월적 입장에 있는 법상 유식설에서 자료를 가져와, 이를 지론 남도의 정식설과 기신론의 진여수연설에 근거하여 공의 원리로 대립을 화해시켰다. 즉, 법장이 법계연기사상을 확립하는 데 있어 진여사상에 앉아 유식가에서 자료를 섭취하여 공의 논리에 의해 구성 변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화엄종의 유심설은《화엄경》을 소의로 하면서도 융성하였던 당시 중국불교의 유심사상의 흐름을 염두에 두고 체계화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법장의 체계는 그의 스승인 지엄의 시도를 거쳤음은 물론이다. 법장은 지엄의 뒤를 이어서 별교일승 법계연기설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법장을 위시한 화엄종의 이러한 입장은 화엄교판에서도 잘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화엄종의 성립이 같은 유심적 측면을 중시한 다른 종파와는 그 성립시기에 있어서 크게 다름을 보게 된다. 화엄종은 소의경전인《화엄경》의 번역 후에도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이루어짐을 발견하게 된다.《육십화엄》이 5세기 초에 번역되었는데 7세기의 지엄이나 법장 때에 와서야 교리가 체계화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소의 전적이 번역되면서 바로 종파가 형성되었던 타 종파들과는 크게 다르다. 유심을 핵심으로 한 사상을 천명하고 있는 종파들이 소의 논서의 번역이 이루어지자마자 형성되는 데 비해, 화엄종은 몇 세기가 흘러서야 종파의 형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화엄종이《화엄경》자체를 소의로 한 데 비해 다른 종파는 경의 주석서가 번역된 것에 크게 힘입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화엄종의 성립이 다른 종파에 비해 그처럼 시간적인 격차가 컸던 이유는 무엇일까? 화엄종조로 모셔진 분 외에《화엄경》과 인연이 닿았던 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화엄경전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화엄경》의 세계를 사상적으로 체계화시키기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제18강 화엄경의 연구
1. 화엄오조의 생애와 저서
《화엄경》을 연구하여 저술을 하고 화엄교학을 일구어 간 분들은 화엄종조들이 주를 이룬다. 화엄조사들은《화엄경》의 주석 외에도 화엄사상의 선양에 기여한 많은 전적을 남겼다. 그 가운데서 5조의 주요저술을 그 생애와 함께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이러한 화엄관계 저술은 화엄교학을 이해하는 주요자료가 된다.
(1) 법순두순(法順杜順, 557∼640) - 화엄행자
두순의 휘는 법순이며 제심(帝心)존자라고도 한다. 속성은 두(杜)씨이고 옹주 만년현 출신으로서 18세 때 인성사의 승진(僧珍)에게 출가하였다. 승진은 산야에 살며 청빈하게 정업을 닦은 수행자로 알려져 있다. 두순도 스승과 함께 전국을 다니며 미타염불을 권유하고 정토를 찬탄하며 오회문(五悔文)을 지어 스승의 사풍을 전하였다고 한다.
두순은《속고승전》에는 감통편에 소개되어 있는 신승(神僧)이다. 그는 평소에 신이로운 일을 많이 행하고, 입적 후에도 한 달이 지나도록 살빛이 선명하였으며 3년간이나 유해가 마른 채로 흩어지지 않고 주위에 향기가 퍼졌다고 한다. 그의 명성은 궁중에까지 알려져서 태종으로부터 제심이라는 호를 받았다고 한다.
스님은 항상《화엄경》을 지송하고 경에 의해 선관을 닦아 보현행을 체득한 화엄행자로 여겨진다. 제자인 반현지에게도 항상《화엄경》을 지송하고《화엄경》의 말씀에 의지하여 보현행을 닦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스님의 제자로는 반현지 외에 지엄이 유명하고 지엄을 키운 달법사,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나 이씨의 아들이 있었음이 전한다.
스님의 화엄관계 저서로는《오교지관(五敎止觀)》과《법계관문(法界觀門)》이 알려져 있다.《오교지관》은 화엄오교판의 연원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이는 두순의 찬술이 아니며,《오교지관》이 법장이 지은《유심법계기》의 초고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소(小)·시(始)·종(終)·돈(頓)·원(圓) 오교의 입장에서 5문의 관법내용을 구별하고 전체가 화엄삼매에 들기 위한 관문으로 조직하고 있다.《유심법계기》의 오문에 상당하는 오교의 조직은 지엄에게서도 아직 명확하지 않은데 그 이전 법순에게 있었을 리가 없으며, 이는 법장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다음《법계관문》1권 또한 찬자에 대해서 근년에 여러 학설이 있다. 법장의〈발보리심장〉에 그 전문이 인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법계관문》의 내용은 진공관, 이사무애관, 주변함용관의 법계삼관을 설한 것이다. 이는 사사무애 십현연기의 근저가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법계연기관을 고찰할 때 살피기로 한다.
홍각범(洪覺範)의《임간록(林間錄)》하권에는 두순의〈법신송(法身頌)〉이 전해진다.
(2) 지상지엄(至相智儼, 602~668) - 화엄교학의 기초자
지엄에 대해서는 제자인 법장이 지은《화엄경전기》의〈지엄전〉에 잘 전하고 있다. 지엄은 속성이 조씨이고 부(父)는 경(景)이며 감숙성 천수 출신이다. 지엄은 현장이 출생한 해와 같은 602년에 태어나서 현장보다 4년 뒤인 668년에 입적하였다. 12세 때 57세인 두순을 따라 출가한 뒤 두순의 수제자였던 달법사에게 맡겨 키워졌고 14세 때에 수계를 받았다.
지엄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인도승으로부터 범문도 배우고 여러 법사에게서 《섭대승론》 · 《사분율》 · 《실론》 · 《십지경》·
《열반경》등을 배웠다고 한다. 지엄은 남북조에서 수당에 걸친 중국불교의 흐름을 대부분 접하였을 정도로 불교의 여러 교학에 통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저서에 여러 경론이 풍부하게 인용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지엄은 점차《화엄경》연구에 몰두하여 화엄을 중심으로 한 교학을 형성해 갔다. 지엄은 자신이 소의처로 삼을, 평생 나아갈 교학을 선택하려고 장경 앞에 서서 절한 후 서원을 세우고 잡은 것이《화엄경》이었다고 한다. 그후《화엄경》의 탐구가 그의 생활의 중심이 되어 갔다. 지엄은 곧 같은 지상사에 주석했던 지정(559∼639)에게서《화엄경》강의를 들었으며, 장경의 주석서를 보다가 혜광의《화엄경소》를 접하고는 '별교일승 무진연기'의 화엄세계를 납득하게 되었다. 그후 어느 낯선 스님으로부터 "일승의 뜻을 알려고 한다면 십지중 육상의를 가벼이 말라"는 가르침을 듣고 두 달간 깊이 참구한 끝에 일승의 진의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화엄경》의 주석서를 지었으니 그것이《수현기》이다. 그때 지엄의 나이 27세라 한다.
지엄 문하에 의상·법장·혜효·반현지 등이 있다. 지엄이 청정사의 반야대가 기우는 꿈을 꾸고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알았을 때 혜효도 그와 비슷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특히 의상은 해동화엄초조가 되고 법장은 지엄의 뒤를 이어 중국 화엄종의 3조가 된 분으로 주목된다.
지엄의 저서는 20여 부가 있으며 뜻은 풍부하면서도 문장은 간결하여 그 정신을 이해하는 자가 적다고 법장은 말하고 있다. 그 중에 진찬이라 인정받는 것은 7부이다. 화엄관계 저서로는 다음의 저술이 중시된다.
《수현기(搜玄記)》5권:《육십화엄》의 주석서로서《수현기》가 있음은 이미 보았다.
《화엄경공목장(華嚴經孔目章)》4권:《육십화엄》에 대해 144개의 문항〔章門〕을 시설하여, 소승·삼승·일승의 차별을 설하여 일승화엄의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는 지엄의 62세 이후 만년작으로서 지엄사상의 원숙함을 보여 준다.
《오십요문답(五十要問答)》2권:화엄학의 중요한 이치를 53가지 문답형식으로 설명하였다. 소승·삼승과 일승화엄의 교설을 비교하고 화엄이 구경대승임을 설한 것이다. 58세 이후의 저술로 보이며《공목장》에서 이《오십요문답》을 인용하고 있다.
《일승십현문(一乘十玄門)》1권:십현연기문을 설한 것인데《화엄경》의 내용을 교리적으로 조직하고 있다. 이《일승십현문》은 두순이 설한 것을 지엄이 찬술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법장의《화엄오교장》이《일승십현의》와 유사하며, 지엄 찬술인 것에 대해서도 이설이 있다. 이에 대한 의심은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義天)의《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서 비롯되며 이《일승십현문》의 지엄 찬술에 대해 이설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지엄의 전기에 의하면 앞서 말한 것처럼 지엄이 일승의 진의를 알게 되어《수현기》를 짓게 되었다고 하였으나,《수현기》에서는《일승십현문》에 대한 설명이 극히 간략하다. 따라서 일승십현에 대한 보강 설명이 필요한데 다른 저서에서는 이 요구가 채워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일승십현문》이《수현기》를 전후한 시기에 저작된 지엄의 저술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이의 진찬여부는 좀더 많은 고찰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육상장》:간략하지만 지엄의 육상원융관이 보이는 중요한 글이다.
(3)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 - 화엄교학의 대성자
법장의 전기자료는 최치원의《법장화상전》, 염조은(閻朝隱)의
〈강장법사지비(康藏法師之碑)〉를 비롯하여 20여 종이 있다. 속성은 강씨이며 강거국인이다. 법장은 일찍이 불승을 깨닫고자 맹세하고 지엄으로부터《화엄경》강의도 들으며 문지라는 호도 받았으나, 지엄이 입멸한 2년 후인 28세 때 태원사에서 득도하였다. 32세 때 측천무후의 주선으로 십대덕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현수라는 호를 사사받았다고 한다.
법장이《화엄경》을 강론할 때 신이로운 상서로움이 보였다는 기록도 많이 전한다. 법장은 문지라는 호처럼 많은 화엄관계 전적을 남겨 중국 화엄교학을 크게 융성시켰던 것이다. 약 30부 100여 권의 저술 가운데 화엄관계 저술에 대하여 몇 가지 언급해 본다.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20권:《육십화엄》의 주석서이다.《탐현기》는 법장이 45세에서 53세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니, 법장의 화엄사상이 원숙해질 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젊었을 때 지은 저술에 보이는 설과 차이나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 한 예가 십현연기설이다. 이《탐현기》에 보이는 십현은 신십현이라 하고, 34세경에 지은《화엄오교장》에 보이는 십현설은 고십현이라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탐현기》는 완성되기도 전에 신라에 유통되었다. 신라에서 유학간 승전(勝詮)을 통하여 의상에게 보냈던 것이다.
이《탐현기》의 구성 조직은 처음에 서문(귀경서와 총서)이 있고 다음에 10문을 열어《화엄경》을 해석하고 있다.
제1문에서는《화엄경》이 교설된 까닭을 여래성기품설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심은 무량인연이 있는 것이니 이에 의해 총별로 설명한 것이다.
제2문에서는 부처님 교설을 10가지로 분류하면서《화엄경》은 대승경이면서도 모든 부류를 다 포함하는 포괄적인 경이기도 함을 서술하고 있다.
제3문에서는 교를 세운 차별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까지 유통되던 교판 가운데 10가지 설을 소개하며, 화엄교판인 오교십종판을 밝히고 있다.
제4문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익을 입힐 근기를 구분하고 있다.
제5문에서는 능전교의 체를 열 가지로 분별하고 있다. 그것은 말이나 글에서부터 내지는 해인삼매에 의해 나타나는 문 등을 말하고 있다.
제6문에서는《화엄경》의 종취를 밝히고 있다. 이에 10설을 소개하고 있다. 말이 나타내는 것이 종(宗)이고 종이 돌아가는 곳이 취(趣)라고 한다. 이에 '인과연기 이실법계'도 말해지고 있다. 대방광은 이실법계이고 불화엄은 인과연기로 설명함도 여기에 보인다.
제7문에서는 경의 갖춘 제목을 10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제8문에서는《화엄경》의 전래와 번역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제9문에서는 의리분제를 역시 10문으로 드러내고 있다. 십현연기를 설한 것이다.
제10문에서는 경문을 따라 해석하고 있다.
법장은 이《탐현기》에서 자신의 화엄경관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으며, 그 내용은 주요한 화엄교학으로 주목되어 왔다.
《화엄문의강목(華嚴文義綱目)》1권:《육십화엄》8회에 대한 경문과 내용의 골자를 설명한 것이다.
《화엄경지귀(華嚴經旨歸)》:지귀란 종지 귀취를 말하니《화엄경》의 대강을,《화엄경》의 설처·설시·교주·청법대중·교화의식 등 10문으로 나누어 간략히 말하고 있다.
《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2권:의상의 강의를 지통이 받아적은 추동기의 내용과 흡사한 부분이 많아서 그 진찬이 의심되기도 한다.
《금사자장(金獅子章)》1권:측천무후에게 장생전 뜰앞의 금사자로 비유하여 화엄교관을 나타낸 것이다.
《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4권:여래장심을 기본으로 하는 유심(唯心)의 입장에서 사사무애관을 설하고 있다.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5권:법장 이전의 화엄관계 연구의 역사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4권:법장의 저작 가운데 후세에 가장 많이 읽혀진 것 중 하나로서 화엄학 연구의 입문서이자 필독서로 간주되는《화엄오교장》이 있다.
《화엄오교장》은 화엄종의 교판론인 오교판에 근거하여 화엄학의 체계를 조직한 입교개종(立敎開宗)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이는 화엄학 개론임과 동시에 화엄종의 입장에서 본 불교개론으로 일컬어진다.《화엄오교장》의 찬술연대는 세 가지 설이 있으나 약 34세 때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화엄오교장》은 제목과 이본이 많다. 이본으로는 초본(草本)·송본(宋本)·연본(鍊本)·화본(和本) 등이 있다. 10문의 순서만으로 본다면 초본이 화본이며, 연본은 송본과 같다. 제호로는 연본과 화본이 같다.
《화엄오교장》은 신라에 있어서도 이본의 문제가 있었음이 고려시대 균여의《석화엄교분기원통초》에 상술되어 있다.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편지인〈기해동서(奇海東書)〉에 따르면 법장이 자신의 저술도 보내면서 그 잘잘못을 가려줄 것을 청했다. 의상은《일승교분기(화엄오교장)》를 검토하고 나서《화엄오교장》의 순서를 일부 바꾸어서 전후의 의로가 통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정정본은 초본이고, 정정하지 않은 본은 연본이라 일컬어졌다. 일본의 화본은 신라의 초본과 일치한다.
《화엄오교장》의 제목으로는 8종이 있다. 송본의 제목은 화엄일승교의분제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송대의 진수정원이 종밀의
《원각경대소초》를 전거로 해서 제호한 것이다. 그런데 법장이 직접 사용한 제호는〈기해동서(寄海東書)〉에는 '일승교분기'라고 하고 자신의 저작인《화엄경전기》에는 '화엄교분기'라 하고 있으므로 화엄일승교분기가 원의에 가깝다. '화엄오교장'이라 함은 최치원이 지은〈법장전〉을 따른 것이다.
《화엄오교장》의 구성은 다음 10문으로 조직되어 있다.
제1문은 일승과 삼승의 관계와 동별이교(同別二敎)를 말하고 있다. 화엄은 별교일승에 속한다.
제2문은 일승과 삼승의 교의와 섭익(攝益)을 밝히고 있다.
제3문은 법장 이전 10가의 교판을 소개하고, 화엄교판 확립의 자료로 삼고 있다.
제4문은 화엄종의 입교개종을 선언한 것이다. 전 불교를 오교십종으로 분류하고 화엄종을 최고위에 둔 것이다.
제5문은 승(乘)과 교(敎)의 관계를 밝힌 것이다. 화엄이 일체 모든 교를 융섭하는 일대 원교임을 서술하고 있다.
제6문은 교가 설해진 시기를 논한 것으로서《화엄경》이 성도후 최초설법임을 말하고 있다.
제7문은 교에 전후의 차별이 있음을 보이고 있다.
제8문은 별교일승과 삼승교와의 상위점을 논하고 있다.
제9문은 소전차별(所詮差別)에서는 소승·삼승·일승의 심식·수행 등 10가지를 화엄오교판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화엄 별교일승의 가르침이 최고임을 논증하고 있다.
제10문은 의리분제(義理分齊)이니 화엄교학의 핵심인 법계연기를 설명하고 있다. 의상이 이 제9문과 제10문을 교체하였다.
이외에《화엄삼보장》2권,《의해백문》1권,《유심법계기》1권,《발보리심장》1권,《화엄삼매장》등도 알려져 있다. 법장이 55세 때 의상에게 보낸〈기해동서〉도 간과할 수 없다.
법성게(法性偈) 강론(講論)
▶ 의상스님께서 지엄화상의 입적 3개월전에 저술한 이 법계도는 화엄경의 사상을 한편의 시로 압축한 것이다. 가운데 부분의 法자에서 시작, 글자 사이의 붉은 줄을 따라 7자씩 읽어가면 法자 바로 아래에 있는 佛자에서 끝나도록 되어 있다. 법계도는 좌측과 같이 전체적으로 배치되어 하나의 圖印 형태를 띠고 있다.
法性圓融無二相 법과 성품은 원융하여 두가지 모양이 없나니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이 움직임이 없어 본래부터 고요하다
無名無相絶一切 이름없고 모양도 없어서 온갖 경계가 끊겼으니
證智所知非餘境 깨달은 지혜로만 알 뿐 다른 경계 아니로다
眞性甚深極微妙 참된 성품 깊고 깊어 지극히 미묘하나
不守自性隨緣成 자기 성품 지키잖고 인연따라 이루더라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중에 일체있고 일체 중에 하나있으니
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
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세계 머금었고
一切塵中亦如是 일체의 티끌 속도 또한 다시 그러해라
無量遠劫卽一念 끝이 없는 무량겁이 곧 일념이요
一念卽是無量劫 일념이 곧 끝이 없는 겁이어라
九世十世互相卽 구세 십세가 서로서로 섞였으되
仍不雜亂隔別成 잡란없이 따로따로 이뤘어라
初發心時便正覺 처음 발심 하온 때가 정각을 이룬 때요
生死涅槃相共和 생사와 열반이 서로 서로 함께 했고
理事冥然無分別 이와 사가 그윽히 조화하여 분별할 것 없으니
十佛普賢大人境 열 부처님 보현보살 큰 사람의 경계더라
能仁海印三昧中 부처님의 해인 삼매 그 가운데
繁出如意不思義 불가사의 무진법문 마음대로 드러내며
雨寶益生滿虛空 보배의 비로 생명을 이롭게 한 일 허공에 가득 차니
衆生隨器得利益 중생들이 그릇따라 갖은 이익 얻음이라
是故行者還本際 이 까닭에 수행자들은 마음자리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파息妄想必不得 망상을 쉬지않곤 얻을 수 없네
無緣善巧着如意 인연 짓지않는 좋은 방편으로 마음대로 잡아쓰니
歸家隨分得資糧 마음자리에 돌아가매 분수따라 양식 얻네
以陀羅尼無盡寶 이 다라니 무진법문 끝이 없는 보배로써
莊嚴法界實寶殿 온 법계를 장엄하여 보배궁전 이루고서
窮坐實際中道床 영원토록 법의 중도 자리에 편히 앉아
舊來不動名爲佛 억만겁에 부동함을 이름하여 부처라하느니라.
1. 화엄사상의 극치
일승원교 화엄사상(一乘圓敎 華嚴思想)은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도리를 밝힌다. 모든 법의 덩치(體)와 꼴(相)을 구명(究明)하고 주인(主)과 손님(伴)이 주인될 때도 있고 주인이 손님될 때도 있어 주객이 구분없고 걸림(無碍)없음을 연설하며 결과(果)와 꼴(相)이 두루 갖추었음을 보이고 있다.「사사무애」란 다른 대로 존재하는 사물(事物)들이 아무런 걸림도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결과적인 꼴(果·相)」이란 말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로서 그 깨달음 속에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러한「일승원교」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것이「연으로 일어나는 열가지 진리」십현연기(十玄緣起)와「여섯꼴의 둥글둥글한」상태를 나타냄이란 것이다.
(가) 신십현과 고십현의 연기론
우주간에 나타나 있는 사사물물(事物) 만상전체(萬象全體)가 둥글고 원만하여 걸림없는 관계에 있음을 열가지 관점에서 설한 것이 십현연기무애문(十玄緣起無碍門)이란 법문인 것이다. 그런데「십현문」에는 두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지엄선사의 일승십현문(一乘十玄門)이다. 법장스님의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에 실린 십현문(十玄門)의 명칭에 어긋남이 있다. 전통적으로 앞의 것을 고십현(古十玄) 뒤에것을 신십현(新十玄)이라고 불러왔다. 가장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고십현」의 아홉째「유심회전선성문(唯心回轉善成門)」인데「신십현문」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심(唯心)이나 일심(一心) 또는 진여심(眞如心)등을 우주만법(宇宙萬法)의 실체(實體)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니 범하지 말라고 법장스님이 일부러 없앴다고 전한다. 그러면「신십현」에 기초해서 의심되는 실마리를 풀어보자.
(제1)「동시구족상응문」이란 무엇인가?
십현문의 총설(總說)이며 나머지 9문까지는 별설(別設)이라고 한다. 이제부터 「제1문」의 의미를 들것 같으면 우주만유(宇宙萬有)는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상즉상입(相卽相入)해서 연기(緣起)하는 것으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삼세현상(三世現相)은 반드시 동시에 서로 응하며 과거에도 현재와 미래를 구족하였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또한 동일하게 과거 현재 미래를 구족히 하여 앞과 뒤, 시작과 끝의 분별이 없이 서로 구족히 응하여 마침내 한덩치(一體)의 관계를 지어서 연을 일으켜 나타난다.(緣起現顯)는 것이다. 한 예를 들면 금으로 만든 금사자가 있다면 금과 사자가 동시에 성립하여 두루 구족한 것과 같다. 즉 바닷물 한방울에도 백천강물의 맛이 갖추어 있는것과 같다는 법문이다.
(제2)「광협자재무애문」이란 무엇인가?
「고십현」의「제장순잡구덕문」에 해당하는 법문이다.「제장순잡구덕」의 현상(現相)을 설하는 것으로서 인연으로서 일어나고(緣起)있는 모든 법은 순수한 것과 잡박한 것이 섞여 있으나 그러나 순수한 것은 순수한 대로 잡된 것은 잡된대로 곧 금은 금대로 은은 은대로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제자리(本位)에 의지하여 있다. 이것이 동시일념(同時一念)으로「광협」이 자재하여 걸림없는 것을 설하는 법문이다.
(제3)「일다상용부동문」이란 무엇인가?
현상세계의 일체사물의 작용(作用)에서 무진연기(無盡緣起)를 설한다는 것이다. 이 우주간 모든 존재를 상호역학관계(相互力學關係)에서 보게되면 하나(개체)는 전체에 들고(一入多) 전체는 개체에 들어있어(多入一) 걸림없이 자재한다. 그러면서도 각각 나름대로의 개성을 잃지않고 본래의 면목(面目) 곧 금은 금모습 빛이있고 은은 은모양의 빛을 보유하고 본분에 의지하면서 개성과 전체가 혼란되지 않는 것이 마치 한방에 일천등불의 광명이 비취되 서로서로 걸림없는 것과같이 상입무애(相入無碍)의 소식을 전하는 법문이다.
(제4)「제법상즉자재문」이란 무엇인가?
연기(緣起)는 공(空)과 유(有)에 바탕하여 상즉(相卽)함을 열게된다. 일즉일체(一卽一切) 하나가 일체법을 통섭하고 일체법이 하나에 통섭되어 두루걸림 없는 것을 설하는 것이니 마치 금으로 만든 금사자의 팔이나 다리 4지와 털한개라도 다 사자의 전체인 것과 같다. 이를 다시 말하면 적은 영주가 대한민국에 통섭되고 대한민국이 곧 적은 영주를 통섭하는 다시 말하면 한분의 대통령이 많은 국민을 통섭하고 많은 국민들이 하나의 대통령에게 통섭되는 것과 같아서「자재원융」하다는 법문이다.
(제5)「은밀현요구성문」이란 무엇인가?
고십현법문에서 설하는「비밀은현구성문」에 해당한다. 모든「연기법」은 각각 은(隱)과 현(顯)의 관계가 있어서 파악이 된다. 은(隱)이란 말은 숨는다는 것이고「현」이란 말은 늘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1)가 들어나면 많은(多)것은 숨고 많은(多)것이 들어나면 하나(1)는 숨는다. 상즉(相卽)이란 것이 겉(表)이되면 상입(相入)이란 것은 속이되고 또 상입(相入)이란 것이 겉이되면「상즉」이 속이되는 것이다. 법장스님은 이 법문을 설명하기 위해 금사자의 예를 들었다. 마치 금으로 만든 사자를 바라보는 것과 같아서 사자로만 보면 사자만 있고 금은 숨는다. 금으로만 보면 사자는 숨는것과 같은 것이다. 사물(事物)을 파악하는 법이 두가지가 있다. 안에서 내다보는 법과 밖에서 들여다 보는 법이 그것이다. 인생의 진실도 마찬가지로 숨은것과「들어남」의 두가지 측면이 있다. 한쪽만 고집해서는 진실을 놓친다. 그러지 아니해야만 진실에 접근한다는 법문이다.
(제6)「미세상용안립문」이란 무엇인가?
모든 연기법(緣起法)은 크고 작은 것을 해치지 않고 더욱이 한법문(一法門)안에서 동시에 구족하게 들어남을 설하고 있다. 개체(一)가 능히 전체(多)를 포함하고「전체」가 능히 개체를 거두는 것이 마치 겨자씨 한알속에 수미산(須彌山)을 용납하고 한티끌속에 대천세계를 수용하면서 티끌만치도 현상태를 파괴하지 않고 각각 그 분수를 지켜 서로 수용하고 서로 안립(安立)한다. 얼핏보면 잡되고 무질서한 외양(外樣)을 갖추고 있더라도「속알」은 침범할 수 없는 스스로의 질서가 엄존(儼存)한다는 것을 알리는 법문이다.
(제7)「인다라망법계문」이란 무엇인가?
이 우주간에 모든 존재가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얽히고 설켜서 즉입(卽入)하는 관계를 들어낸다는 말씀이다.「인다라망」이란「인드라신」곧 제석하늘을 지칭(指稱)하는 것으로서 제석궁전을 장엄한 그물이란 말씀이다. 그 보배그물은 보배구슬로 낱낱이 광채를 내면 무수한 보배 부슬빛이 서로서로 비추어서「중중무진」한 것과 유사(類似)하게 세계의「사사물물」도 서로 융합융통(融合融通)하며 끝없는 큰광명에 휩싸여서 걸림없다는 법문을 설한 것이다.
(제8)「탁사현법생해문」이란 무엇인가?
이 우주간의 모든 연기법(緣起法)이 개체(一)가 전체(多)이고, 전체(多)는 곧 개체(一)로서「중중무진」으로 상즉(相卽)하며 상입(相入)하되 주인과 손님이 분명하여 참으로 설명을 다할 수 없고 참으로 어떻게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경계를 말씀하신 것이다.「탁사현법」이란 속이 항상 사법(事法)에 의탁하여 다함없는 법문을 들어낸다는 말씀이다. 한떨기 꽃에서 화엄법계(華嚴法界)의 진상(眞相)을 느껴본다는 것이 여덟째 구절의 법문이다. 현상에 의탁하여 진리를 들어내려는 발상(發想)은 후에 밀교(密敎)에서 결실을 맺는다.「만다라」가 부처님의 생명임을 강조하는「밀교」는 화엄사상의「탁사현법」을 발전시킨 법문이다.
(제9)「십세격법이성문」이란 무엇인가?
시간적 관점에서 무애의 도리를 논설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다 또 과거 현재 미래의「삼세」를 설정(說定)하면(3×3=9) 9세(九世)가 된다. (과거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 미래 식으로) 이 9세를 통합하는 절대적 현재를 추가해서 십세(10世)가 된다. 이 십세가 동시에 나타나「연기」를 이룩함이 화엄사상으로 본 시간의 진상이다. 아홉째 법문구절의 성립근거는 화엄경에서 설하는 과거겁(劫)이 미래겁으로 들어 간다든가 한점 티끌에 넓이 3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세계(佛刹)를 나툰다는 상즉원융(相卽圓融)의 사상이다. 현재의 한 사건에 과거 현재 미래의 전부가 비추어 나타난다는 관법(觀法)에 기초하고 있다는 법문이다.
(제10)「주반원명구덕문」이란 무엇인가?
「고십현(古十玄)」의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을 없애고 그 자리를 대신메운 법문이다. 우주간에 현성(現成)하고 있는 모든 존재는 어느것도 홀로 일어나지 않는다. 단독자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이란 글자(人)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다른 한쪽이 없으면 일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짝이 필요하다. 한사람의 명배우가 있기 위해서 주위에 많은 조연(助演)이 필요한 것처럼 북극성(北極星) 곁에 뭇별들이 둘러있어 빛나는 것처럼 그물코 한 개만 들면 그물전체가 따라 오는 것 같으니 주인과 손님(主伴)이 두루 분명하여 만가지 공덕(功德)을 갖추었다는 법문이다.
이제까지 간략하게 나마 십현문(十玄門)의 하나 하나의 법문을 살펴 보았다.「십현문」은 처음에 지엄선사가 일승십현문(一乘十玄門)에서 논설했다. 그것을 법장대덕스님이 체계화(體系化)하고 조직화(組織化)해 놓은 것이다. 이 법문은 화엄사상의 극치(極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화엄사상의 배후에는 깊은 종교적 체험도 깔려있다. 이러한 무진연기(無盡緣起)는 실천적 체험적으로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수행(修行)이 선행(先行)되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여기서 수행이란 말은 「발심(發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마지막 10번째의「십세격법」에서 설하는 법문을 좀더 알기쉽게 풀어보면 10세(世)의 논법은 화엄오교(五敎章)가 선택한 독특한 방식이다.
이렇게 3×3=9인데 이 전체를 일세(一世)로 통괄하면 10세(世)가 된다.
어째서 이러한 특이한 분석을 하고 있는가? 시간을 잘게 짜개면 무한에 이른다. 이 무한의 시간을 일세(一世)가 통합하고 있다. 통괄하면 영원히 현재인 일세(一世)가 되고 짜개면 무한 시간임을 밝히고자 하는 법문이다.
시간성(時間性)은「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포착하면 하나이다. 자연과학적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직선구조(直線構造)를 갖고 있지만 불교적 시간은 영원의「지금 그리고 여기」만이 존재한다. 옛날에도 그런 현재가 있었다. 그것이 과거이다. 앞으로도 그만한 현재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미래이다. 그러나 과거는 벌써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있는 것은 다만 현재뿐이다. 다만 시간은 존재에 빌붙어 사는 우연성을 지닌다. 존재가 있어 시간이 있다. 시간이 있어 존재가 제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변화를 통해서만 시간이 무엇인가가 알려지는 것이다.
(나) 여섯꼴의 둥근이야기(六相圓融論)
여섯꼴(六相)의 둥근이야기란 무엇인가? 무진연기(無盡緣起)의 실상(實相)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앞에서 설명한 십현연기(十玄緣起)와 함께 중요한 가르침법문이 육상원융(六相圓融)이다. 여섯꼴(六相)은 화엄경속에 있는 명칭으로서 그것으로써 철학적 논리(論理)를 전개(展開)한 논리가 세친보살(世親)의 십지경론(十地經論)이란 것이다. 지론종(地論宗)의 남도파(南道派)인 정영사(寺)의 혜원법사는 세친보살의「십지경론」을 받아들여 여섯꼴(六相說)을 설명 형성(形成)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혜원법사의 학설을 더욱 발전시킨 사람이 화엄종에 제2조 지엄선사이고 법장대덕스님에 이르러서 여섯꼴(六相說)설명은 완전히 조직된 모양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첫째 여섯꼴(六相)이란 무엇인가?
육상(相)이란 총(전체)과 별(개체)(總·別)이 한쌍이고 동(같고)과 이(다름)(同·異)가 한쌍이고 성(이루고)과 괴(무너짐)(成·壞)가 세쌍으로서(3)서로 대립되는 개념을 말한다. 이들이 서로서로 원융둥글하여 걸림없는 관계에 놓여있어 하나에 다른 다섯이 포함되면서도 여섯꼴이 나름대로의 제모습을 잃치않으므로 법계연기(法界緣起)가 성립한다는 법문이다.
둘째「총상과 별상」이란 무엇인가?
화엄5교장에서는 이것을 집(家)에다 비유하여 해설하고 있다. (1) 총상(總相)은 전체로서의「집이라고 또는 국가라고 한다면」 (2) 별상(別相)은 집의 각 부분적인 기둥, 헛가래 주초 창문등, 국가로 말하면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에 각부장관 국장, 과장실장, 청장 등이다.「총상」은 전체적 통일을 말하고 「별상」이란 부분적인 천차만별(千差萬別)의 차이를 가르친다. 곧(하나속에 만덕을 갖춘다)가「총상」이고「개체」속에도 개체개체를 갖춘다는 것이「별상」이다. 다시말하면 하나가 축이되어 여럿을 포괄하고 있다는 뜻, 곧 집을「총상」으로 한다면 그 집을 구성하고 있는 기둥, 헛가래, 주초돌, 창문, 기와등이「별상」이 된다. 차별된 현실세계에서 보면 일체가「별상」으로 보이고 통일전체에서 보면 일체가 한꺼번에「총상」으로 들어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전체로 보면「총상」이고 눈, 귀, 코, 입에 포인트를 맞추어 보면「별상」이 된다. 그러나 이들은 떨어질수 없다. 그래서 둥글원융하다고 하는 법문이다.
세 번째 동상(同相)이란 무엇인가?
「동상」이란 : 사람으로 말하면 그 형태를 구성하고 있는 눈, 코, 귀, 입, 손, 발등이 함께 인체구성에 참가함을 뜻한다. 여러의미가 서로 어긋나거나 틀리지 않아 함께 하나라는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서로 차이나는 종종의 물상(物相)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점에서「동상」이라 하는 법문이다.
네 번째「이상(異相)」이란 무엇인가?
「성상」과는 달리 기둥은 기둥, 헛가래는 헛가래, 기와는 기와, 주초돌은 주초돌, 창문은 창문이라 서로 고집해서 본래의 자리에 머물자고 한다면 합칠방도가 없어 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미 지은 집이라도 각각 제대로 고집하여 분쟁이 일어난다면 그 집은 와르르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이「괴상」이다.「여러뜻이 각각 자법(自法)에 주착(主着)하여 옮기지 않는다.」그래서「괴상」이 성립된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제자리 맡은 자리랄까 개체의 입장이랄까 뭐 어떤 그런 입장에서 사태를 보고 처리함이 괴상이란 법문이다.
이렇게 하여 여섯꼴(六相) 가운데 총상, 동상, 성상(總·同·成相)은 모두 같은 시점에서 논의되고 또 별상 이상 괴상(別·異·壞相)도 공통된 관점에서 파악되고 있다.「총·별·동·이·성·괴」라는 반대개념이나 대립개념으로 사물을 설명하는 것이 육상원융(여섯꼴 둥근) 법문이다. 이「여섯둥근모양」도「화엄사상 법계연기」의 진실상을 설명하려는 것이지만 이 사상의 배경에는 실천적 요구가 깔려있다. 다시 말하면 초발심(初發心)을 할때가 바로 화엄경의 방편품에서 설하는 정각(正覺)이라든가 일행이 일체행(一行一切行)이고 일단이 일체단(一斷一切斷)이라는 수행론(修行論)을 떠나서는 화엄의 지극한 경지가 꿈꾸어 질 수 없는 까닭이다. 화엄사상 또한 종교적 신앙적 실천의 논리화(論理化)라는 사실을 놓아 버려서는 아니된다.
이상(以上)에서 열거한 내용을 다시 간추려 요약해보면 먼저「십현문」은 모든법이 걸림(無碍)없음을 제시한 것으로「사사물물」이「상즉상입」하여 있는 것을 말씀한 법문이고 이 여섯(六相) 둥근모양은 여섯꼴의 걸림없음을 제시한 것이다.
「총」과「동」과「성」은 평등상(平等上)에서 본것이요「별」과「이」와「괴」는 차별상으로부터 본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평등과 차별의 둘이「원융무애」한 것이「사사무애」의 묘리(妙理)라고 하겠다. 그러므로「총(總)」을 여이고 별상이 없으며 동상을 여이고「이상」이 없으며 성상을 여이고는 괴상이 없는 법이다.
이 육상중에「평등무차별」한 것을 원융문(門)이라 이르고 차별된 것을 행포문(行布·行列뜻)이라고 이르는바 이 원융중에 행포가 들어있고 행포중에 원융이 들어 있어서 서로 곧 들고 나서(相卽相入) 여기서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묘한 이치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다) 법성문(法性門)이 열린다.
석가세존님의 49년간 가르치신 경전말씀을 결집한 후 이를다시 다섯단계로(5敎) 분류 조직하였으니 첫 번째가 소승교(小乘敎)이고 두 번째가 대승시교(大乘始敎)이다. 세 번째가 대승종교(大乘終敎)요 네 번째가 대승돈교(大乘頓敎)이며 그리고 다섯 번째가 대승원교(大乘圓敎)이다. 이중에 화엄경을 일승원교(一乘圓敎)라고도 칭하여 가장 경중에 수승한 경전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 경전사상(經典思想)의 조직된 내용을 대별(大別)하면 대개 네가지 법계관(法界觀) 곧 세계관과 둥글고 묘한 여섯꼴(六相圓融)과 그리고 열가지 법문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있어 참으로 깊고 묘하고 넓고 높은 교리(敎理)로써 그 종지(宗旨)를 삼고 화엄교종을 창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리로는「법계연기」와「사사무애」와「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의 우주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화엄사상의 일심연기(一心緣起)와 업감연기(業感緣起)의 뜻을 원효대사는 다음같이 노래를 하였다.
① 산하대지(山河大地)와 사생고락(死生苦樂)이 내마음의 조작이라 콩심어 콩이나고 팥뿌려 팥거두니 인과응보(因果應報)가 내뒤를 따르는양 몸가는데 그림자요 소리에 울림이라 업보의 끄는힘이 황소보다 더 세어라 눈깜박 한숨결에 마음에 이는 생각 아뿔사 천만겁에「생사고락」씨가되니 어허 두려운지고 인과응보(因果應報) 두려워라.
② 그러나 인과있어 범부(凡夫)도 성인(聖人)되고 천지(天地)가 넓다해도 선(善)을 위해 있아오며 터럭같이 작은「선」도 잃어짐이 없을네라. 방울방울 물이 모여 큰다바를 이루듯이 날마다 작은공덕 쌓아 큰 공덕되니 하잘 것 없는몸이 무상보리(無上菩提) 이루는 법 여덟가지 바른길을 밟아 적선(積善)함이로다. 어허 고마운지고 인과응보 고마워라…고 읊으시었다.
이렇듯 우리들의 작은 한가지 착한 행업이라도 그대로 만선만행(萬善萬行)이 되며 우리들의 조그마한 악한행위 또한 그대로 만악(萬惡)의 지옥을 짓는다는 업감연기를 설하였다.
공사상(空思想)을 연설한 반야 600부의 방대한 사상의 축소판(縮小版)의 경전이 260자로 이룩된「반야심경」이라면 의상조사의 법성게(法性偈)는 전부가 7언 30구절 210자(七言三十句二百十字)로 구성된 육십화엄경(六十)의 축소판의 화엄경이라 할 수 있다.
이 법성게의 깊고넓은 뜻을 이해하려면 화엄경의 전문연구를 적어도 10년은 해야 할 것이다. 이 법성게는 분량으로 가장 작은 글이지만 그속에 함축되어 있는 이치는 바다와 같아서 범부들의 식견(識見)으로는 도저히 측량하기 어려운 화엄경의 핵심판(核心)이다. 그래서 이 법성게의 뜻을 마치 수박겉 핥기라도 이해를 돕기위해 먼저 그 참고지식으로 앞에서 화엄철학의 중요한 십현연기(十玄緣起)와 여섯꼴론(六相圓融論)을 들어 설명한 바 있지만 더 알기쉽게 할 목적으로 화엄철학중의 유사한 네가지 법계관(四法界觀)의 요지(要旨)를 강론하는 바이다.
(라) 화엄철학의 요지
화엄철학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란 소설(所說)에 의거하여 이루어진 학설이요 법문이다. 인간들이 살고 죽고하는 이 세계가 이루어진 인연(因緣)과 이루어진 세계는 서로 걸림없는 사사무애의 우주론을 전개하는데 앞에서 인용한 원효성사의 법어송의 일단과 같이 우리들의 한가지 착실한 행위는 그대로 만가지의「선행」으로 변현(變現)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가 완성되면 일체가 완성되고(一成一切成) 하나의 진리만 깨치면 일체의 진리를 얻는(一證一切證)다는 철학을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화엄철학의 연혁을 참고 삼아 대략 살펴보면 인도에서는 천친보살(天親)이 십지론(十地論)을 지어서 화엄사상의 일부분을 부연하여 화엄종지 선양(宣揚)에 도움을 하였고 중국에서는 동진안제(東晋安帝) 때에 삼장법사 각현(三藏法師 覺賢)스님이 60화엄경을 번역출판한 이래로 자주 연설하신바 있었고 다시 수나라말 두순대사(杜順大師)를 비롯한 여러 대덕스님께서 화엄종의 기강(紀綱)을 확립하였다. 그후 지엄선사를 거쳐서 현수법사에게 이르러 크게 융성하였고 다음으로 철양증관법사와 규봉종밀선사(淸凉證觀法師·宗密禪師)에 이르러 더욱더 선양되었다.
그 후 한국에 들어와서는 신라의 원효성사와 의상조사에 이르러 화엄종이 크게 떨쳐 흥성하였다. 불교에서는 우주삼라만상의 사물과 체상(體相)이 어떻게 하여 성립되었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저 바라문교에서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어떤 조물주(造物主)나 창조신(神)이 있어서 천지만물을 만들어 냈다는 것도 또는 자연론(自然論)을 주장하는 학자가 말하듯 천지만물은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들을 불교에서는 모조리 부인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우주만유(宇宙萬有)의 생성기멸(生成起滅)의 모든 꼴들이 오직 업감연기(業感緣起)나 법계연기(法界緣起)로서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시간적 계기(繼起)의 인과(因果)와 공간적 존재(存在)의 인과(因果)에 의한 곧 인연화합(因緣和合)으로서의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진리가 곧 현상세계(現相)이며 현상세계가 곧 진리자체로서 그 묘용(妙用)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하여 체(體), 상(相), 용(用)이 곧 진리(理)와 현실(事)이 무애 걸림없는 법계연기로서「우주삼라만상」이 형성(形成)된 것이라고 교시(敎示)하신다. 또 불교에서는 우주만유는 우리들의 일심중(一心中)에서 출발하여 있게 되었다고 하는바 이 핵심법문이 화엄철학의 중심골자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화엄론에서는「일심법계(一心法界)」가 만유(萬有)를 총괄하고 있다고 한다. 비유로써 말하면「심수(心水)」가 깨끗하면 삼라만상이 그속에 나타난다. 마치 큰바다가 청정하면 우주만상이 그 가운데 다 나타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一心法界는 總該萬有하야 心水淇然하면 森羅萬象이 實現其上하나니 此如大海澄淸하면 天邊萬象이 不問細大하고 皆現其中) 이것이 바로 화엄철학의 「우주관」이다.
(마) 4법계관이란 무엇인가?
화엄철학에서는 우주만법(萬法)을 관찰하는데 4단계의 방법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일반에서「진리」라고 하는말을 화엄사상에서는 「법계(法界)」라고 말한다. 법(法)은 「사물」이란 의미와「진리」라는 의미가 동시에 들어있다. 이러한 4법계는 사물의 세계와 진리의 세계와의 관계를 설한 가르침이다. 4법계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첫째(1)은 사법계관(事法界觀)이요
둘째(2)는 리법계관(理法界觀)이다.
셋째(3)은 이사무애법계관(理事無碍法界觀)이요
넷째(4)는 사사무애법계관(事事無碍法界觀)이다.
첫 번째「사법계관(事)」이란 무엇인가?
사(事)법계관이란 현실의 세계 곧 천차만별(千差萬別)된 사실의 세계라고도 하며 철학적인 용어(用語)로는 현상 곧 객관세계(客觀世界)라고 부른다. 이 현상세계로부터 우주삼라만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삼라만상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사람은 사람대로 모양이 다 다르고 짐생은 짐생대로, 산은 산대로, 강은 강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꽃은 꽃대로, 바위는 바위대로, 돌은 돌대로 각각 다른 특수한 차별상을 가지고 있어 바다는 깊고 얼음은 차고 불은 뜨겁고 새는 날고 뱀은 기고…등등의 모양과 성질 온갖것을 상대하며 경험하는 세계 곧 현상세계가 그대로 사법계관(事)이란 법문이다.
둘째번 이법계관(理)이란 무엇인가?
「이법계관」이란 이성의세계(理性世界) 곧 공(空)의 세계이다. 다시말하면 본체(本體)의 세계란 뜻이다. 교리(敎理)의 입장에서 말하면 오교중(五敎中)에 해당된다.「공시교」란 중관(中觀) 또는 공간(空間)불교를 말하는 것이다. 공간불교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과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삼라만상 모든 존재의 근저에는 그야말로 천태만상(千態萬象)이요 형형색색(形形色色)으로 한폭의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는 그야말로 금강산이다. 그래서 사법계관(事)이란 차별된 삼라만상을 생긴 그대로 보고 생각하며 이해하고 인식(認識)하는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지금 존재하는 사물(事物) 전체를 우리가 바라보고 느낀다. 곧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고기는 띄고 산은 높고 나무는 푸르다. 그런데 이것들은 반드시 공성(空性)이 내포(內包)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삼라만상을 표면적 차별로 본다면 남자, 여자, 아이, 어른, 소, 개, 돼지, 말, 구렁이, 뱀 내지 온갖 짐승, 산천초목, 바다, 강 등이 각양각색으로 다 다르지만 이면적(裏面的)인 무차별성(無差別性), 차별성을 떠나서 보편성(普遍性) 또는 평등성(平等性)으로 본다거나 현상세계에 대한 이법계(理) 곧 실체적세계(實體的)나 초경험적세계(경험하지 못한세계)의 입장에서 볼 것 같으면 소나무와 홍도화는 비록 다르지만 식물(植物)이란 입장에서는 다같은「식물」이요 사람이나 개는 같지 않지만 동물(動物)이란 입장에서는 동일한 동물이다. 또 생물학상(生物學上)으로 보면 사람이나 개나 소나무나 홍도화는 다같은 생물(生物)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주만유가 평등하다는「이법계」의 안목으로 본다면 하늘이나 땅이 한뿌리(天地同根)이요 만물(萬物)이 일체(한덩치)(萬物一體)이다. 이와같이「이법계」의 평등한 진리로 보는 것이「이법계관」이란 법문이다.
셋째번「이사무애법계관」이란 무엇인가?
이사무애법계관이란 사법계(事)에서 말한바 현상세계와「이법계」에서 말한 본체계가 따로 뚝 떨어졌거나 구분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라 둥글고 묘하여 걸림없다. 고로 현상세계가 곧 진리세계이고, 진리세계가 곧바로 현상세계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평등이 곧 차별이고 차별이 곧 평등이란 말이다. 이 말뜻을 알기쉽게 비유하면 물이 곧 파도이고 파도가 곧 물(水不離波·波不離水)이다. 물과 파도는 둘인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둘이 아닌 것이다.
이와같이 걸림없는 진리를 관찰하면 현상세계가 곧 진리세계이고 진리세계가 곧 현상계인 것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말씀하시되 불변진여(不變眞如)와 수연진여(隨緣眞如)가 있다. 한 예를 들어보면「이법계」와「현상계」가 서로 관철(貫徹)하고 있음을 알린다. 곧「이법계」가「현상계」의 근저를 관통(貫通)하고 있다는 것이다.「진리는 곧 공(空)이다」(理卽空)↔(사물(事)→현상세계↔공의세계(空)로 이(理)와 사(事)의 관계가 원융하고 묘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현상계중에 본체계가 있어 원융하고 묘하여 걸림없음을 관찰하는 것을 곧「이사무애법계관」이란 법문이다.
넷째번「사사무애법계관」이란 무엇인가?
사사무애법계관이란 현상세계와 본체계의 원융하고 묘하여 걸림없다는 것이니 현상계의 우주만유와 형형색색의 천차만별이로되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서로서로 걸림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본체계와 현상계가 걸림없음으로 현상계가 또한 본체계와 걸림없는 것이다. 또 이것을 알기쉽게 비유하면 물과 파도는 걸림이 없다. 또 파도와 파도끼리도 아무런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현상계의 걸림없는 이치를 관찰하는 것이 곧「사사무애법계관」이란 법문이다. 이「사사무애」의 학설에 의하여 일심법계(一心法界)의 교설(敎說)을 세운 것이 곧 화엄경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이를 좀더 말한다면「사사무애법계관」은「이사무애법계관」을 거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사(事)법계는「이사무애법계」를 거치지 않고도 보이는 상식(常識)의 세계로서 현실적 대상은 같으나 사(事)법계와 전혀달리 나타나는 세계가 곧「사사무애법계관」이다. 사(事)법계에서는 산과 물이 따로따로 분리 되었다. 거기에 사람이 끼더라도 산따로 물따로 사람따로여서 동상(同相)연결의 고리를 찾지 못한다. 그러나「사사무애법계관」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사람이 산도되고, 산이 사람도 되고, 산이 물도되고, 물이 산도되고, 사람이 물도되고, 물이 사람도 된다. 이렇게 서로 통하여 맺어진다. 이런 세계를 깨닫기 위하여「이사무애법계관」을 먼저 통과한 다음에「사사무애법계」로 들어가게 된다. 인심(人心)과 사물(事物)이 이「법계」에서는 오로지 하나가 된 세계 그 세계에는 너는 송장이나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식의 분별이 도무지 의미를 잃고마는 것이된다. 이 소식은 걸림없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를 유물론적(唯物論的)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가 없다. 오직 인간의 진리를 깨달아야만「사사무애」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내가 곧 꽃이요, 산이요, 물이요, 불이요, 바람이고 바위며 나무이니 곧 바로 나의 세계이다.
이에대한 잔소리를 더해보면「일과일들」이 모두「한진리」의 표현이라면 그 일에 대하여 겁낼 것 없이 자세히 그 이치를 관찰하면 무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물과 얼음 수증기는 각기 다른 것이지만 그 근본원리는 H2O이므로 이 도리를 아는 이는 얼음이 없으면 물을 냉장고에 넣고 물이 필요하면 얼음을 녹이면 되고 수증기를 보고 싶으면 물을 열(熱)에 가하면 된다. 몰라서 그렇지 이미 다 안 이상에는 겁낼 것도 없고 걸릴 것도 없다.「자성」을 확실히 깨달은 사람은 사람이지만 때를따라 바위도 되고, 사람도 되고, 짐승도 되고, 나무도 되고, 물도 되고, 불도 되고, 산도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제불보살이 신통변화(神新通變化)로서 무량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기대용(大機大用)이다. 마음을 크게 깨달은 사람은 거기 작용에 걸릴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화엄철학에서 말하는 것은 그대로「진리」아닌 것이 없다. 소승불교(小乘)에서는「사법계(事)」상에서 교설을 세운것이기 때문에 예를들면 성내는 것이 가장 나쁜 것이다 하였는데 이 화엄사상에서는 성내는 것이 곧 진리의 표현이라 하였다. 대관절 이게 무슨 말이냐? 그런데 어린손자가 연장을 들고 할아버지의 상투를 자꾸 친다면 그때 할아버지는 큰소리로「이놈 할아버지 상투를 치는놈은 나쁜 놈이다」하며 화를 낸다. 그러면 그 손자는 다시는 할아버지의 상투를 치지 않게 된다. 그런데 그 손자가 귀하다 하여 그대로 가만히 놓아두면 할아버지 상투를 치는 재미에 나중에는 사람을 치고 가산재물을 치는 악인이 된다. 그러므로 이런때는 성내는 것이 진리가 될 수도 있다. 탐욕심도 마찬가지의 이치다.「아함경」이나 방등경에서는 탐심을 내는 것이 큰병통이라 하였는데 화엄경사상에서는 탐욕심이「진리」라고 설하고 있다.
옛날 어느절 스님한분이 신도가 돈만 주면 좋아라 하였다. 돈을 아무리 주어도 누구에게 돈한푼 빌려주는 일이없고 돈이 그손에만 일단 들어가면 어디다 숨겨두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신도들은「스님이 어디 마누라가 또 생겼나, 자식을 낳았나, 아니면 다 먹어치우나, 어디가서 노름을 하나」하고 비밀히 조사해봐도 그런일이 전혀없었다. 그러나 그 스님에게 돈을주면 너무도 천진난만하게 돈을 헤아리고 감추어 두기 때문에 신도들은 더 돈을 갖다주었다. 그런데 세월이 약 20년이 지났는데 어느날 갑자기 천지가 캄캄해 지더니 큰바람이 불기시작하고 장대같은 소낙비가 막 쏟아진다. 삽시간에 한동네가 물바다가 됐다. 집도 살림살이도 길도 논밭도 모두 다 잃었다. 그때는 정부에서도 어찌할 대책이 없었다. 이때에 이 스님이 차곡차곡 모아둔 큰 돈통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그 돈을 받아다가 집을짓고 살림살이를 장만 하였다. 신도들은 그제서야「스님이 돈에미친 스님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홍수(洪水)가 날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이 아닌가」하고 모두들 칭송이 자자 하였다. 이런때는「탐욕심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점은 성내고 않내고 탐심내고 안내고 하는데 있는 것이다. 개인이익을 위해서 성내고 탐내는 것이 아니라 온 중생을 위해서 탐욕을 냄으로 그것은 진리가 되는 것이다. 만일 개인 자신만을 위해서 욕심을 내고 성내고 했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 삿된 도적놈이 되고만다. 음치도 마찬가지다. 색좋아하는 사람치고 어리석지 않는 사람이 없으므로 음치(淫痴)라고 한다. 그런데 화엄경의 53선지식중에「바슈밀녀」같은 이는 매음(賣淫)으로서 중생을 깨우쳐 옳은사람이 되게한다 아니하였든가.「광액도아」는 소잡다가 불교를 깨달았다. 그러므로 살생 도적질 간음은 작용(作用)여하에 따라 간음 살생이 아니라 적극적인 보살행이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대승시교의 법상종(法相宗)이나 삼론종(三論宗)은 「이(理)법계상에서 교설을 세운 것이고 그리고「대승종교」에서는「이사무애법계」상의 교설에까지만 추진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화엄원교에 와서는「사사무애법계관」을 설하여 불교철학상 최고봉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사사무애」를 주장하는「일심법계」에는 무진연기(無盡緣起)가 들어있는 것이니 대승불교의 오묘한「진리」는 곧바로 여기서 더욱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고 할 것이다.」
2. 일승화엄법계도
「화엄일승법계도」를 또는 약칭하여「법계도」라고도 한다. 이 법계도장(章)에는 지은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않다. 다만 이 책 끝에 인연으로 생겨나는 모든 것에는 주인이 따로있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하여「법계도 지은이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그 이유를 설명했을 뿐이다. 이렇기 때문에 뒷날 이책의 지은이를 당나라의 지엄선사 혹은 현수대사(賢首大師) 또는 진승(珍崇)대사라고 하는등의 설이 생겨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均如대사가 밝힌것과 같이 이책 지은이가 의상조사란 것은 의심할 것 없다. 균여대사는 그의「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에서 최치원선생(崔致遠先生)이 지은 의상전(義湘傳)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인용하여 이 책을 지은이가 의상조사임을 밝히고 있다.
「참고: 의상조사가 그 스승 지엄선사의 문하에서 화엄경을 수학할 때 마다 꿈속에 형상이 매우 기이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의상조사에게 네자신이 깨달은 바를 글로 지어서 사람들에게 베풀어줌이 마땅하다고 했다. 또 꿈에 선재동자(善財)가 총명약(聰明藥 십여제(10餘劑)를 주심을 받았다. 그리고 또 꿈에 청의동자(靑衣)가 세 번째로 비결(秘訣)을 주는 것을 받았다. 그 스승 지엄선사는 이꿈 이야기를 듣곤 신인(神人)이 주는 신령스러운 것을 받았음이 나에게는 한번 있었는데 그대에게는 세 번이구나 널리 수행하여 그 통보(通報)를 곧 표현하도록 하라」고 했다. 명(命)을 따라 그 터득한바 깊고 묘한 경지를 순서에 따라 부지런히 써서 대승장(大乘章) 열권을 엮었고 그 스승님께 잘못된 곳을 지적해 주기를 청했었다. 지엄선사는 그 글뜻은 매우 아름다우나 말은 오히려 옹색하다고 했었다. 이에 물러나 번거롭지 않고 어디에나 걸림없게 했었다. 바꾸어 글뜻을 세우고 그윽함을 숭상했다고 말할 수 있으니 대계 스승이 지은 탐현분재지의(探玄分齊之義)를 존중한 것이다. 지엄선사와 의상조사는 함께 불전(佛前)에 나아가 지은「대승장」그것을 사루면서 부처님의 뜻에 계합함이 있다면 원컨대 타지말기를 바랍니다고 서원하였다. 불에타고 남은 나머지에서 210자를 얻었다. 의상조사로 하여금 그것을 줍게해서 다시 불전에 올리고 간절히 서원을 말하면서 그것을 맹렬한 불길속에 다시 던졌다. 마침내 그것은 타지 않았다. 지엄선사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칭찬 하였다. 의상조사는 그것을 연결하여 게송(偈頌)이 되게하려고 몇일동안을 문을 걸고 지냈다. 마침내 삼십(三十)구절을 이루니 삼관(三觀)의 깊고 오묘한 뜻을 포괄하고 여섯꼴의 원융(6相圓融)과 열가지 진리문(10玄門)의 아름다움을 들어내었다. 이처럼「법계도」는 의상조사 자신이 스스로 깨달은 바(自內證)를 지어 기록한 것이고, 그 스스로 깨달은 바(自內證)는 완전히 부처님의 뜻에 계합한 것이기에 참으로 만고불휴(萬古不朽)의「지음」이라 하겠다.「법계도」가 이루어진 것은 그 스승 지엄선사가 열반하시기 몇 달전인 총장원년(總章元年, 단기 3003년) 7월이었다. 이것은 이 책의 끝에 밝혀져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의상조사는 이「법계도」의 첫머리에 이것을 짓게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혀놓았다. 「이(理)에 의거하고 교학(敎學)에 근거하여 간략한 반시(盤詩)를 만들어 이름에만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그 이름마저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되돌아 가게 하고저 함이었다」고 의상조사가 지은「반시」란 이백열자(210자)로 된 간결한 시(詩) 법성게(法性偈)를 오십사각(五十四角)이 있는 도인(圖印)에 합쳐서 만든 것으로 곧 법계도(法界圖)이다. 이것을 삼국유사에서는「법계도서인(法界圖書印)」이라고 하였고, 이밖에 화엄일승법계도장(華嚴一乘法界圖章) 또는「화엄법계도」, 「일승법계도」,「법계도장」법성도(法性圖), 해인도(海印圖)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특히 이것을「해인도」라 할 때 거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흔히 마음을 바다에 비유한다. 바다는 깊고도 넓다. 그리고 바다는 한없는 보배를 간직하고 있으며 만상(萬像)을 비추기도 한다. 마음의 바다 또한 이와 같다. 마음의 바다에 진실한 세계가 비추기를 바랄 때 거기에 불고있는 바람을 잠재워야 한다. 바람이 자면 파도 또한 자는법 파도가 잠든바다 거기에 진실한 세계가 나타나고 그 세계를 일러「해인」이라 한다.
번뇌(煩惱)의 바람이 잠든 마음의 바다, 그것을 해인삼매(海印三昧)라 이름하고「해인삼매」를 따라 진리세계는 그 모습을 들어낸다. 의상조사는 이름에만 집착하는 무리들에게 보여주고자 한 세계는「해인삼매」를 쫓아 나타나게 되는「가지가지의 꽃으로 장엄된 일승의 진리다운 세계의 모습이 화엄일승법계도」이다.「법계도」를 "해인도"라고도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법계도"를 직관적(直觀的)으로 밖에는 깨달(證得)을 수 없는, 스스로 깨달음(自內證)의 내용을 상징하는 하나의 표정으로 사용 되었다. 의상조사가 그의 제자들중에서 공부가 다된 사람에게 그 깨달음을 인증하는 증표(證表)로서「법계도」를 수여하던 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의상조사는 그 근기(根機)가 낮은 사람들에게 대한 배려(配慮)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법계도"를 지은다음 다시 약소(논문)을 지어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놓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의상조사 자신의 해설과 후대의 주석서(주를내고 해석한 것)를 참고 하면서「법계도」의 내용을 구경하기로 하자.
의상조사의 논문인 도인(圖印)의 뜻에 대한 전체적인 해석과「도인장」의 모양에 대한 개별적인 풀이의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가) 해인의 큰 뜻을 다 밝힘(總釋印意)
「해인」의 큰뜻을 밝힘에서는 도장이란 형식을 취하여「법계도」를 짓게된 까닭을 밝힌다. 곧「교법(敎法)」이 포괄하는 삼종(三種)의 세간(世間)을 「해인삼매」를 쫓아 들어내어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해인삼매」에 들었을 때 나타나는 삼종의 세간은 ①기세간(器世間), ②중생세간 그리고 ③지정각세간(智正覺)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특히「법계도」는 백지(白紙)위에 붉은 도장의 길과 검은 글씨를 써서 만들었는데 이는「삼종세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대기(大記)에서는 다음같이 설명하고 있다.
「백지(白紙)란 기세간(器世間)을 표현한 것이다. 백지에는 본래 염색이 되어있지 않다. 먹으로 경전을 찍으니 검고 주사(朱砂)로 점을 찍으니 붉다. "기세간"도 이와 같다. 깨끗하거나 더러운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지않다. 중생이 처하면 더러움에 물들고 성현군자가 처하면 밝고 깨끗하다. 그러므로 검은 글자는 중생세간을 나타낸다. 검은 글자는 모두다 검고 하나 하나는 다 같지않다. 중생도 또한 이와 같다. 무명번뇌가 모두 자신을 어둡게 덮고있고 온갖 차별을 나타낸다. 그런가 하면 붉게 그린 길(줄)은 "지정각세간"을 나타낸다. 붉게그린 한길(줄)은 처음부터 끝까지 끊어짐이 없이 모든 글자들 속에서 연속된 교리를 그 빛과 색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부처님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아 넓고 크고 평등하여 두루 중생의 마음에 미친다. 십세(10世)가 서로 응하여 둥글고 차게 밝게 비춰준다. 이런 까닭에 이「도장」은 삼종(三種)의 세간을 다 비추고 있다. 계속하여 대기(大記)에서는 백지와 검은 글자와 붉은 줄이 상호관계 속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것과 같이 세가지 세간이 서로 융통하고 포섭하여 혼연히 한 덩어리를 이루지만 그러면서도 들고 나는 문이 각각 달라 분명하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세간(世間)이란 말은 세계란 말로 이해해도 괜찮다.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두가지가 다 시간과 공간에 의해 한계(限界)지어진 경계를 의미한다. 세(世)란 시간을! 간(間)이나 계(界)는 공간(空間)을 뜻한다. 원의범 박사에 의하면 인도말로는 세간이나 세계가 한뜻으로 다 로카(loka)로 통한다고 들었다. 어쨌든 대기(大記)의 풀이를 주의 깊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물질세계(기세간·器世間)와 인간세계(중생세간·衆生世間) 그리고 정각(正覺)에 의한 부처님세계가 별개의 것이 아니면서 각각 따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 해인모양에 대한 풀이(別解印相)
도장모양에는 다시 인장(印章)에 내재(內在)한 글의 양상(印文相)과 자상(字相) 그리고 문의(文義)를 구분해서 해설하고 있다.
인문상(印文相)해설에는 인장(印章)에 내재(內在)한 글의 양상이 문답형식으로 해설되고 있다. 의상조사 자신의 해설을 함께 묶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문(印文)이 다만 하나의 길로 되어있는 것은 여래(如來)의 한말씀(一音)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그 길이 번거롭게 많은 굴곡을 나타내고 있는 까닭은 중생들의 근기(根器)가 같지않기 때문이니 삼승분교(三乘分敎)가 이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하나의 길에 시작과 끝이 없음은 부처님의 선교방편(善巧方便)에는 일정한 방편이 없고 상대(相對)하는 중생세계에 알맞게 융통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일승원교(一乘圓敎)에 해당한다. 사면(四面)이 사각(四角)으로 되어 있는 것은 사섭법(四攝法)과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나타낸 것이다. 이 인문(印文)은 삼승(三乘)에 의하여 일불승(一佛乘)을 드러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 시문풀이(명자상·明字相)
시문(時文)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데 그것은 수행(修行)하는 방편을 나타내는 것이니 원인(因)과 결과(果)가 다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가운데 많은 굴곡이 있음은 삼승(三乘)의 근기(根器)에는 차별이 있고 꼭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첫글자와 끝글자가 중심(中心)에 와있느냐 하면 인·과(因·果)의 두자리가 법성가내(法性家內)의 진실한 공덕과 대용(大用)을 표현함인데 그「법성」이 중도(中道)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도인(圖印)의 전체적인 해석과 아울러 인문(印文)과 시문(詩文)의 양상을 밝혔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법계도」는 깊고도 넓은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3. 법성게의 한글말씀과 본문
(가) 깨달은분(證得分)
①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둥글고 둘이아닌 법성의 모습이여
②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고요뿐 동작없는 삼라의 만상이여
③ 무명무상절일체(無明無相絶一切)
이름도 꼴도없고 일체가 다없거니
④ 증지소지여경(證智所知非餘境)
불보살 아니고는 이 경계를 뉘알소냐
강론 (1)구절부터 (2) (3) (4)구절까지 합론
이 법성게는 위에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신라시대 의상조사께서 지으신 게송으로서 7언(七言) 30구절 이백열(210) 글자로 화엄경사상을 통째로 표현한 철학적이요 종교적인 시구(詩句)이다. 그래서 이 게송은 무릇 세계적으로 찬송받는 명시(名詩)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법성게는 형상세계의 우주삼라만상과 본체계(本體界)의 심성(心性)이 어떻게 연기(緣起)하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경전이다.
먼저 법성게(法性偈)란 제목부터 그 출처가 화엄경의 어느 품중에서 나왔는가를 살펴 보기로 한다.
화엄경 야마천궁 게찬품 각림보살 찬송중(華嚴經 夜磨天宮 偈讚品 覺林菩薩 讚頌中)에 이런 사구게(四句偈)가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과(過) 현(現) 미래(未來) 삼세간(三世間)의 모든 부처님 경계를 알고저 할진데 마땅히 화엄법계의 성질을 관찰하여라. 우주간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짓는다.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였다. 이 네귀글중에 넷째줄「응관법계성」의 구절중에 있는 계(界)자를 빼고, 법성(法性) 두자를 발취하여 제목(題目)으로 지은것이「법성게」가 아닌가 생각한다.(이것은 필자의 사견임).
그리고 화엄경중에 게찬품송이 한량없이 많은데 어찌하여 특히 이 「유심사구게」만을 「대방광불화엄경, 제일게」라 하여 칭송하는 소이가 무엇일까?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화엄법계성(法界性)을 통하여 관찰하니 천지만물일체는 자기 심성이 짓는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셨다네.
이 법성게는 일심(一心)과 현상(現相)을 표리(表理)로 하여 연기(緣起)를 설하고 있다.
법성(法性)이란「법」자는 곧 「다르마」라는 불교에서는 대단히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의상조사는 이 부분의 해석을 생락하고 있다. 스스로 깨달음(自內證·자내증)의 내용을 천명하는 부분이기에 설명이 필요없는지 모른다.
후학(後學)들을 위하여 상기원문(上記)을 다시 직역하여 두는바 원문과 대조 참고하기 바란다.
① 법성은 원융하여 두모양이 없다.
「법성」이란 심색(心色)을 말한다. 만유(萬有)의 본덩치로서 진여(眞如)법계(法界)라고도 한다.「원융」이란 마음덩치를 말함이니 현실(事과 진리(眞理)가 차별이 없이 둥글둥글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무이상」이란 상대성(相對性)을 말한 것이다. 심성(心性) 자체가 넓고 크고 무변하여 걸림이 없다. 곧 비유하면 허공이 넓고 커서 가시없고 크기에 상대가 없어서「둘이 없다」는 뜻이다.
② 모든법이 움직임이 없이 본래 적적하다.
「제법」이란 우주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事物)을 말씀하는 것이다.「부동」이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사상(四相)이 없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곧 천지만물이 무상(無常)하여 생(生)이 있으면 멸(滅)함이 있어 모든 사물은 변하지만 그러나「제법의 성」은 상주불멸(常住不滅)하고 항상 적적하다는 뜻이다.
③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어 일체가 끊어졌다.
「무명」인데 명(名)이란 사람들이 무슨 대상에 이름을 붙인것이지 그 자체는 본래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무상」이란 모양이라는 뜻을 말씀한 것인데 모양이란 본래부터 진실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④ 증지와 소지가 다른 것이 아니다.
「증지」란 후득지(後得智)를 뜻하고 수도(修道)로 증득(證得)하는 지혜를 말한다.「소지」란 근본지혜를 뜻함이니 일체중생이 본래부터 부처님성품을 갖고 있는것이「근본지혜」이다.「비여경」은 근본지혜와「후득지」가 다른 것이 아니란 뜻이다. 마치 황금이 채굴되기 전에는「근본지혜」요 채굴된 후에는「후득지혜」에 비유한다.
그런데 법성게기(法記)에는 다음같이 풀이하고 있다.
묻는다 : 무엇이 「법」인가?
답한다 : 인분(因分)을 빌어 나타낸 것이다. 만약 억지로 지적하라 한다면「네몸과 마음이 그것이다」하였다.
법(法)이라고 하는것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나 대체로 보면 규범(規範)이란 의미와 임지(任持)란 의미가 있다. 규범이란 말은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인간윤리(人間倫理)와 인간지혜(人間智慧) 그리고 인간의 온갖 생활복덕을 발생케하는 것이고,「임지」란 말은 그 자신이 어떠한 기본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니 곧 사람들에게 큰 깨달음의 눈을 열어주는 기연(機緣)을 지어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법(法)이란 것은 다 훌륭하고 좋은 것만을 이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법」에는 어떠한 것이든지 다 그 가운데 들어간다. 다시 말하면 내적존재(內的存在)거나 외적존재(外的存在)거나 착한것이나 악한것이나 깨끗한 것이나 더러운 것이거나간에 모두를 다 포함할 수 있는것이「법」이다.
이러한「법」의 세계를 곧 법성게의 내용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주위에 벌어져 있는 세계가 곧「법계성」이란 것이다.
이 법계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성품이 무질서 하거나 난잡하거나 흐트러져 있는 세계가 아니다. 거기에는 통일성이 있고, 조직이 있어서 하나도 무용(無用)한 것이 없고 부족한 것이 없는 오로지「하나」의 세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계는「一心」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법성게는 거의 전부가 일심법계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심법계를 떠나서는 어떠한 것이든지 이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일심법계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법성게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법기(法記)에 묻기를 무엇이 성(性)인가?
답한다 : 원융 곧 둥글둥글 한 것이 성이다.
묻는다 : 그러면 어떤 것을 둥글둥글(원융)한 것이라고 하는가?
답한다 : 무이상(無二相) 곧 둥글고 둘이 아닌 모습이기 때문이다.
묻는다 : 그러면 하나인 까닭에 무이(無二)라고 하느냐 둘이면서도 무이(無二)란 말이냐?
답한다 :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무이(無二)이고, 두 모습(二相)이 곧 무이(無二)이다.
그러므로 화엄론(華嚴論)에 말씀하기를 일심법계가 우주만유를 총괄하여 있는지라 마음의 물이 담연하면 우주삼라만상이다. 만상이 다 그가운데 나타난다. 다시 비유하면 마치 큰바다물이 맑고 깨끗하면 허공도 해와 달도 별도 구름도 내지 크고 작은 모든 물상이 다 그 가운데 나타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한「법계성(法界性)」에는 두모습(無二相)이 없다는 것이다.
자! 여러 법성자(法性子)들이여, 이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끝이없는 허공을 바라보자! 모양없는 허공을! 허공의 성질이 하나냐 둘이냐? 태양도 달도 별도 지구도 사람도 짐승도 모든 삼라만상이 다 허공성(虛空性) 중에서 돌아가고 있드시「일심법계」중에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만상을 다 포함하고 있지만 조금도 걸림없음이 마치 허공과 같은 것임. 그래서 처음도 끝도없는 일심법계 곧 법성(法性)은 두모양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일심법계에 있는 모든만상은 서로 서로 걸림없고 평화롭고 고요하여 동요가 없다는 것이 제법이 부동하여「본래적」이란 말이다.
법기에 묻기를 무엇을 제법이라 하느냐?
답한다 : 법성(法性)이 그것이다.
묻는다 : 어째서 부동(동작없다)이라 하는가?
답한다 : 원융 곧 둥글기 때문이다.
묻는다 : 어째서 본래적(삼라의 바탕)이라 하는가?
답한다 : 무이상(無二相)(둘이 아닌꼴)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알기쉽게 비유하면「두모양 없음과 모든 법」이 물이라면 물은 때로 구름, 증기, 비, 안개, 우박, 눈, 서리등등의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한다. 그러나 물의 본성(本性)인「에너지(H2O)」즉 산소, 수소, 습기만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구름, 물, 증기, 비, 안개, 우박, 눈, 서리등이 곧 물의 고향으로 되돌아 가게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모양(無二相)이 없음이란 마치 물과 같고 모든법(諸法)이란 비, 눈, 구름, 우박, 안개와 같은 것이다. 고요하다(본래적, 本來寂)함도 또한 구름, 비, 안개, 눈, 우박등이 곧 물이 되는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남자나 여자나 그 생김새, 모양은 각각 다르지만 그러나 남자 여자의 몸으로 생기기 이전 그「에너지(H2O)」곧 흙, 물, 불, 바람, 공기등은 인간남녀의 구별이 없이 남녀의 두 꼴이 없듯 오직 일심법계는 변동이 없어 항상「고요」본래적 하다는 말이다.
또 다시 말하면「전기는 뜨겁다」하면「전기는 차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전기에 온풍기를 꼽으면 더운김이 나지만 전기에 선풍기를 꼽으면 찬바람이 나기 때문이다. 또「전기는 움직인다」하면「전기는 움직이지 않는다」고도 대답할 수도 있고, 「전기는 움직이지 않는다」하면「전기는 움직인다」고도 말할 수 있으니 움직이는 장치에 전기를 넣으면 역시 전기는 고정되어 있다. 그렇다고 전기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전기는 언제나 전기로되 그 작용을 따라 이와같이 천차만별의 차이를 낼수가 있다. 전기의 본성(本性)이 원융하여 두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는 두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두 모양을 나타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전기본성은 어느 곳 어떻게 흘러가던지 변동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이와같이 모든법은 본래부터 고요하여 변동하지 않는 것이라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 곧 법성자리에는 원래 법성(法性)이니 진여(眞如)니 무슨 제법(諸法)이니 하며 이름을 지어 붙일도리가 없는 것이다.
예를들면「어린이」의 이름을 짓는다. 진리니 개똥이니 뭐니하고 부르게 되면 그 어린이는 그 이름으로 자신을 삼고마는 것이되듯 만일「법」에 진여니 법성이니 하고 무슨 이름이 붙게되면 벌써 법성자체(法性自體)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법성자리」에는 그 명상이 다 끊어졌다는 것이다.
「법성계기」에 묻기를 본래적(本來寂)한 곳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는가?
답한다 :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무명(無名) 곧 이름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묻는다 : 어째서 무명(無名)인가?
답한다 : 무상(無相)이 곧 꼴이 없기 때문이다.
묻는다 : 어째서 무상(無相)인가?
답한다 : 절일체(絶一切) 곧 모든 것을 여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일체의 유위성(有爲性)과 조작성(造作性)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다시 예를들면「불(火)」이라든지「물(水)」이라든지 바람이라는 그 이름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생활용법(生活用法)에 따라서 그 이름을 붙혀 부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억지로 무엇이라고 이름을 지어 부를 뿐이다. 즉 부처님이니 중생이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극락이니 예수니 공자이니 귀신이니 하며 칭하는 것은 하나같이 가명(假名)에 불과한 것이다.
꼴모양도 마찬가지다. 원래 법성자체(法性自體)에는 人法이 공(空)하여 아무런 꼴이 있는 것이 없지만 미개한 인연을 따라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니 불상(佛像)이니 예수님상이니 개상이니 소상이니 무슨 지옥 아귀 축생등 사성육범(四聖六凡)내지 천태만상이 우리의 눈앞에 벌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모든상(諸相)」이 진짜모습이 아니라 필경에는 전부가 헛되고 망령되어 진실함이 없는(虛妄無實) 가짜모습(假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착한사람, 악한사람이란 이름이나 모양(名相)이 따로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악한마음을 내서 악한 행동을 하면 나쁜별명이 붙고 도적질을 자꾸하면 저놈은 도적놈 같다는 인상을 받게된다. 그러나 반대로 착한 마음을 일으켜서 착한 행동을 하게되면 따라서 악명인 도적놈이란 인상이 지워지는 것이니 이것이 곧 절일체, 모든 것이 다 끊어 없어진 소식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의 서문을 지으신 함허득통선사가 이르기를「여기에 한물건이 있으되 이름이나 모양이 다 끊어졌으나 옛과 지금에 통한다」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성 곧 진리는 우리들의 불완전한 말씀으로나 지식으로나 생각으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이르기를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 하였다. 즉 어떤 말씀으로나 생각자리가 딱 끊어진 극단적인 표현을 하였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들 무명업식(無明業識)에 가리워진 것을 해탈못하고 있는 구박범부(垢縛凡夫)로서 어찌감히 불심(佛心)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법성게기」에 여기에는 수증(修證)도 여이었다고 한 것이다.
묻는다 : 실제로 수증(修證)이 없는가?
답한다 : 실제로 없다.
묻는다 : 그러나 성인(聖人)도 수증(修證)을 구하는 것인데 어떻게 수증(修證)을 하는가?
답한다 : 만일 가르칠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분(敎分)이기 때문이요 오직 대장부는 일심자리를 잘 깨달아야 할뿐 별다른 경계가 없다.
묻는다 : 이 수분(修分)중에 일체제법(一切諸法)이 갖추어져 있는가 없는가?
답한다 : 갖추어져 있다면 변계비법(遍計非法)도 갖추고 있는가?
답하다 : 무엇을 갖추고 무엇을 갖추지 않는다는 말인가?
말하자면 한가지 물건에도 보편적인「법」이 아닌 것이 없으니 무엇을 갖추겠는가? 동작업는 변계비법(遍計非法)은 곧 만족한 법이다. 어찌 그것을 갖추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지엄선사가 말씀하였다.
묻는다 : 일승(一乘)중에 무슨법이 없겠는가?
답한다 : 비법(非法)이 없다.
묻는다 : 무슨법이 없지 않겠는가?
답한다 : 비법(非法)이 없지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하면 공중에 전기의 성질이 가득하고 바닷물에는 짠맛이 가득하여 분명히 있지만 일체의 이름이나 형상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뜻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이름과 형상이 없기 때문에 본래 없다고 말하나 분명히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물건도 없어서 마음도 부처도 법도 스승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다. 그러나 지극히 크고 신령하여 그야말로 부사의(不思議)한 경계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깨친 사람 아니고는 뉘가 알소냐 한 것이다.
(나) 연기의 체성(緣起體性)
⑤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묘하고 깊고깊은 극미한 진성이여
⑥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제자리 벗어나듯 세계를 나툼이여
강론 (5)구절에서 (6)구절까지 합론
깨달은 분은 일체를 여이었으므로 오직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근기(根機)가 낮은 사람들에게는 깨달음의 경지를 직접 가르쳐 줄 수 없다. 이런까닭에 한걸음(一步)를 양보하여 그런 소식을 보여주고자 앞에서의 법성(法性)을 이제부터는 진성(眞性)이란 말씀으로 바꾸어 설명하게 된다.
⑤ 진성이 매우깊고 지극히 미묘하다.
「진성」이란 가짜성품의 상대한 말씀이니 불생불멸(不生不滅)한 진실성(眞實性)이란 뜻이다. 「극미묘」란「극」은 절대로서 더이사 위가 없다는 뜻이고「미」는 우리인간들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아주 적은 것을 뜻하고「묘」는 말할 수 없이 훌륭하다는 뜻이다. 다시말하면 우리눈으로는 볼 수 없는 티끌속에 3천대천세계가 들어있는 극히「극미묘」란 말이다.
⑥ 자성을 지키잖고 연을따라 이룬다.
여기에 자성(自性)이란 심성 자성이 아니고 만물상(萬物相)의 자성 곧 연성자성(緣成自性)을 뜻한다. 원각경에「마니보배」에 다섯빛깔을 비추면 비추는대로 5색(色)이 나타난다. 이에 어리석은 사람은 구슬 자체에서 5색이 난다고 한다. 이 맑은구슬은 자체상(自體相)이 없으므로 다른물체의 형상을 나타낸다. 사람의 자성도 또한 이와같아 자체상이 공하였으므로 말미암아 구슬이 5색을 비추듯 거울이 물상을 비추는 것과 같이 자기자성은 따르지않고 밖으로 물색연(物緣)만 따라 이룬다. 또다시 법기(法記)에는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였다.
「맹인(盲人)이 비단짜는 법을 배우려고 함에 먼저 지도하려는 기술선생님이 맹인에게 자료와 도구일체를 거두어 모아오도록 했으나 맹인이 새끼줄을 가지고 온다」라는 비유를 새끼로써 비단을 짜겠다고 덤비는 이 맹인과도 같이 더구나 8식(識)의 망령된 생각(妄心)으로 달음(證入)에 들려는 사람을 위해 임시로 진성(眞性)이란 이름을 빌려 그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계속해서 심심극미묘(甚深極微妙)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매우깊다」는 것은 진성(眞性)에 들어가는 관문(門) 즉 화엄세계(華嚴世界)가 매우깊고 또 미륵누각(樓閣)이 하도깊고 깊다는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화엄세계가 깊고깊다는 것은 하나하나의 티끌중에서 법계(法界)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티끌에 관련시켜 그안과 밖을 찾아도 다 얻을수가 없는 것이다. 또 미륵누각이 심심하다는 것은 미륵보살이 손가락 한번튕겨 누각의 문을 활짝연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그 문으로 들어가자 삼세(三世)와 자신과 법(法)과 여러좋은 친구(도반)들을 갑자기 다 만나본 까닭이다.
극미묘(極微妙)란 것은 이변(二邊)에 치우치지 않되 그 두 극단을 여인것도 아닌 중도(中道)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 진성(眞性)이야말로 이름과 형상이 없으되 옛과 지금을 꿰뚫었으며 육합(六合)을 에워싸고 하늘과 사람과 지구(天地人)의 주인공(主人公)이 되고 만법(萬法)의 王이 됨이라 탕탕무애하여 비롯함이 없고 천지보다 먼저있고 천지보다 뒤에있어 끝이없다. 이「진성」곧 참성품에서는 너와 나와 천지가 한 근원이요 너와 나와 만물과 한덩치로다.
이 진성 곧 참성품이야말로 성현들에 있어서도 더하지 않고 범부에 있어서도 덜하지 아니하며 살거나 죽거나함이 없고 모나거나 둥글거나 길거나 짧거나 크거나 작거나 한 모양과 이름이 모두 하나에도 걸림이 없다.
그러나「진성」이 하늘에 있으면 능히 하늘이 뒤고 사람에 있으면 능히 사람이 되고 지구(땅)에 있으며 능히 땅지구가 된다고 하였다. 金은 본래가 金일지라도 단련하지 아니하면 진금이 되지못하지만 일단 한번 진금만 되면 다시는 변하지 아니함과 같이「진성」곧 참성품자리도 그와같다 하였다. 그러므로 진성이 깊고도 미묘하여 연(緣)을 따라 일체만법(一切萬法)을 성취한다 하였다. 천지, 사람, 세계, 옛과 지금 모든 것이 오직 마음(唯心造)이 지은 것이고 아는(식. 識)것으로 이룬 것이다.
「진성」은 넓고 크고 갓이없고 깊고깊어 밑이 없어서 허공으로도 비유하지 못하거던 어찌 하늘이 덮거나 땅에 실을 수 있으랴. 항상 고요한 체성(體性)은 지극히 공허하여 다함이 없어 옮겨가지 아니하고 늘 밝은 묘용(妙用)은 지극히 신령하여 변하지 아니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갓없는 허공이 깨친사람 마음에서 생긴 것이 비유하면 한쪽각 구름이 허공에 뜬것과 같다」고 하였다.「참마음」진성은 크고 반대로 허공은 적은 것이며 또 허공은 크고 세계는 적다는 말씀이다.
이 묘하고 밝은마음 진성이 심히깊고 미묘하여 제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아 일체사업(一切事業)을 성취하지만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진성」의 본능(本能)이라고 할 것이요 또「진성」은 본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밝아서 어두운 마음으로 화하나니 이것이 곧 무명(無明)이 되는 것이다.
비유하면 청정한 바닷물이 외면상으로 보면 항상 머물고 동하지 않는 것 같지만 속으로 미세히 잠복하여 흘러 머물지 아니한 것과 같아서「진성」이 미세한 인연(因緣)을 따라 발생하는 것도 이와같다 할 것이다. 미세하게 요동하는 것을「아뢰야식」이라 한다. 이미 앞에서 유식의 예를 들었지만 이 식(識)이 움직임에 속으로는「진성」을 은폐(隱蔽)하고 밖으로는 일만형상을 연기(緣起)하나니 이것은 허공 세계 일체형상이 성립되기전에 오직「진성」이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변체(變體)된 것을 말한 것이다. 이「아뢰야식」을 세상 사람들은 아는이가 없고 오직 부처님만이 대적광삼매(大寂光三昧)에서 발명하신 것이다. 허공중에 허공중에 미세한 티끌이 항상 요요부주(不住)하지만 평시에는 보이지 않다가 밝은아침 햇살이 문틈으로 비추오면 가는 티끌이 낱낱이 보이는 것 같아서「대적광삼매」를 증득하여야만「아뢰야식」이 요요부주함을 보는 것이다. 이「아뢰야식」의 본체는 맑아서 허공과 같으므로 맑은식(淨識)이라고도 하며 또 모든 형상을 내는고로 심왕식(心王識)이라고도 한다. 이 「아뢰야힉」이 아득하고 비어서 허공이 되고 또 움직이며 유주하는 까닭에 모든 空氣가 되는 것이다.
이「아뢰야식」이 모든 공기의 원소와 유정무정(有情無情)의 종자(씨)를 머금어 있는 까닭에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하고, 또 달리 익히는 성질이 많은 까닭에 이숙식(異熟識)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비유한다면 태양이 떠 올라오면 허공과 우주만상이 모두 밝은 광명으로 변현(變現)하였다가 해가지면 우주전체가 어두운 밤이 되는것과 같이「진성」이 「아뢰야식」으로 변화하는 것도 이와같다. 허공중에 어두운 기운이 여러 가지 분자(分子)를 발생한다. 이 공기파동이 변하므로서 한량없는 세계가 건랍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진성」이 심심미묘하여「연기변화」가 끝없음을 인하여 무수한 세계와 유정동물(有情動物)이 계기연속 하는것인데 어찌 하나님의 창조설이나 어떤 자연설의 미신에 현혹당하거나 집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제법(諸法)이 무엇을 인하여 있으며 무엇으로 인하여 없어지는 것일까? 또 4대(大)를 예로들어 보자. 티끌이 모여 합치면 땅이되고 티끌이 흩어지면 지구는 없어진다. 지구의 성질이 있거나 없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시방세계가 허공에 가득하여 인연을 따라 세계국토를 이루고 인연이 흩어지면 없어지는 것이다.
또 물의 인연은 어떠한가. 능엄경에 이와같은 말씀이 있다. 방저(蚌渚)라는 구슬을 달여 견주어 달빛을 받으면 맑은 물이 흘러나오고 방저구슬을 치워버리면 물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물이 달에서 오는것도 아니다. 만일 물이 달에서 온다고 할 것 같으면 방저구슬이 없어도 물이 항상 달빛있는 곳곳마다 흐를것이요 또 만일 방저구슬에서 물이 흘러 나온다고 할 것 같으면 달빛이 방저구슬에 비추지 아니해도 방저구슬에서 항상물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을 보면 연(緣)이 모음으로 물흐름이 있고「연」이 흩어지면 물흐름이 없는 것이다 내지 천하 여러나라의 사람마다「방저구슬」을 가져 달광명을 비추면 방저구슬 가진곳에는 다 물이 흘러 나올것이니 이것은 처소 시간도 없는 것이다. 그 물의 성품이 법계에 가득하여 이름과 형상이 없으나 다만「연」을 따라서 있고「연」을 따라서 없는 것이다. 물은 그러하려니와 불도 그러하다. 성냥가치나 당황을 뜯어보아도 불을 볼 수 없는데 성냥을 딱 그으면 불이 번쩍 일어나고 확불어 끄면 불이 온데간데 없어진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있기도하고 없기도하며 생하고 멸할 뿐이다.
불의 성리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시간 공간이 없어서 다만「연」을 따라 불이있고 불이 없는 것이로되 그 불의 본성은 있고없는 것이 아니다. 불과같이 바람도 그러하다. 한사람이 부채를 부치면 바람이 나고 동일 동시에 세계사람이 다 부채를 부치면 동시에 바람이 일어나나니 바람성품은 처소도 시간도 명상도 없으나 온법게에 가득하여 인연 합친곳에 일어나고 인연이 흩어진 곳에는 없어지는 것이다. 또 매월당 김시습법사(梅月當 金時習法師)는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의 법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풀이 하였다.
일체법(法)은 본래로 성(性)이 없다. 모든성질은 본래 머무름이 없다.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곧 주체(主體)가 없으므로「연(緣)」을 따라 걸림이 없다.「연」을 따라 걸림이 없으므로 자성(自性)을 고수할 수 없고 시방세계를 이룩한다.「자성」이란 제법(諸法)이 무상(無相)하고 본래 맑고 깨끗한 본체(本體)가 그것이다.
이것을 좀더 알기쉽게 또 비유하면 전기(電氣)는 허공에 가득하되 이름과 형상이 없고 과거 현재 미래의 옛과 지금이 없으나 전파(電波)가 연(緣)을 따라서 전등불로도 켜고, 전보도 치고, 전화도 하고, 라디오도 듣고, 텔레비전도 보고, 무선통신(無線通信)으로 몇백만리 밖에서도 서로 수화기를 귀에 대고 온갖 이야기를 할 수 있듯이 우리의 본래진성(本來眞性)이 법계에 충만하여 다만「연」을 따라 일체를 성취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수연성(隨緣成)」에 대하여 한마디 더하고 넘어가야 겠다. 예를들면 봄가고 가을되고 낮가고 밤되는것과 꽃피고 열매맺는 것이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고 모두 인연에서 되는 것이다. 가을되고 겨울되는 것은 해가 하지(夏至)날로부터 남쪽으로 점점 내려감을 따라 양기가 점점 약해짐으로 음기(陰氣)가 점점 더 성해서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는 것이다. 다시 동지(冬至)날로부터 해가 점점 북쪽으로 올라감을 따라 태양기운이 점점 뜨거워지므로 인하여「음기」가 점점 약해지기 때문에 봄되고 여름이 되는 것이다. 어떤 하나님의 신통이나 귀신의 술법이 아니다.
꽃피고 잎피고 열매맺는 것은「양기」가 오면 피는 것이고,「양기」가 가면 지는것이니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하는일이 아니다. 아무리 땅과 물과 증기가 있더라도 따뜻한 양기를 받지못하면 꽃피고 열매맺을 수 없는 법이니 어찌 인연이 아니랴.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이「연」을 쫓아 생하고 연을 따라 멸한다고 하셨다. 다시 성냥불을 그어 불을 켜고 보자. 이불이 나뭇가지와 성냥과 약과 딱 긋는것과 그리고 사람의 손과 여러 가지 인연으로 불이 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천지 세계 만상이 모두 인연을 떠나 자연히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또 그릇에 물을 떠놓고 보라. 허공에 달이 그릇가운에 비추는데 그 물을 쏟아버리고 보자. 방금 보이던 달이 어디로 갔는지 달이 없어 안보이고, 달은 있지만 물이 없어 안보이는 것인가? 그러므로 인연이 합치면 나타나는 것이고 인연이 흩어지면 그만인 것이다. 달이 없어 안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가 인연따라 나고죽고 하지만 그들의 본「진성」은 나고 죽고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없다. 마치 사람의 그림자가 물가운데 나타나면 그 그림자가 사람을 따라 굴신동작을 하다가 사람이 그 곳을 떠나 다른곳에 가서 자신을 거울에 비추면 그 형체와 동작이 조금도 다를것이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인간의 심식(心識)이 부모의 인연화합을 따라 이 육체에 의해 나타났다가 이 육에의 인연이 흩어지면 다른곳으로 떠나가는 것이다.
벌레는 푸른숲을 의지하여 나는것도 있으니 풀을 여이고는 벌레가 없을 것이다. 풀과 인연이 화합되어 생기는고로 벌레빛이 푸르다. 소똥이나 대추나 소락등은 벌레가 아니지만 소똥이나 대추나 소락의 인연화합에 의하여 벌레가 생기는고로 소똥벌레는 빛이누르고 대추버레는 빛이 붉으며 소락벌레는 흰것이니 모두가 인연따라 희고, 검고, 누루고, 붉은 것이다.
능엄경에 아난과 세존과의 대화가 나온다. 종소리가 들여왔다. 세존께서 아난에게 묻는다.
아난아「이 종소리가 어디서 나느냐?」
「종에서 납니다」
아난아「종을 치는 방망이가 없어도 저절로 종소리가 나겠느냐?」
「제가 생각해보니 종소리가 방망이에서 납니다」
「방망이에서 종소리가 아무리 난다고 하더라도 사람에게 듣는 귀가 없다면 그리도 소리가 나겠느냐?」
그러고 생각해보니「아 종소리는 귀에서 납니다」
「귀로 종소리를 들었다 할지라도 이것이 종소리라고 분별하는 생각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아난.「예. 그렇습니다. 생각이 없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종소리는 생각에서 납니다.」
「그러면 그 생각은 어디에 매여 있느냐?」
아난「예.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있다면 어디에 마음이 있느냐?」
아난이 마음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실체가 없었다.
아난이 세존께 여쭈었다.
「마음은 실체가 없습니다.」
아난아「그럼 허공가운데서 종소리가 나는구나.」
이것인「진성」곧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다. 진성(眞性)은 인연(因緣)이고 묘유(妙有)는 존재이다. 우주간의 모든 존재는 인연속에서 난다는 말이다. 종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손과 방망이와 귀와 생각과 마음이 서로 어울려서 묘한 소리가 존재하나니!
(다) 다라니의 진리와 작용(理作用)
⑦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하나에 모두있고 많은속에 하나있어
⑧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곧 전체이고 전체곧 개체이다.
강론 (7)구부터 (8)구까지 합론
⑦ 하나가운데 많은수가 있고 많은수 가운데 하나가 있다.
「일중일체」란 (一)로부터 千만수가 벌려져 나간다는 뜻이고「다중일」은 千만수가 본래는 (1)로부터 벌어져 나왔으니 千만이 아무리 많다해도 도루 하나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그래서 화엄경의 진리가 넓고 크다. 하나 일체 차별상이 없으므로 크고 적은 모양이 없다.
⑧ 하나가 많은데서 즉(卽)하고 많은 것이 곧 하나에서 속했다.
「즉(卽)」이란 「한뭉치」라는 뜻이다.「하나」라 했지만 실로 하나라는 명상(名相)도 없다.「진기」에는 이렇게 풀이한다. 위의「일중일체」등의 2구절은 연(緣)을 따라 이루어짐을 나타내 그 뜻을 분명히 하였다.
첫구절의「일중」이란「인과의 도리」를 여는 문(門)이다. 다시말하면 하나를 얻으면 열(10)을 얻고 열(10)을 얻으면 결정코 하나(1)를 얻으며 원인(因)을 얻으면 곧 결과(果)를 얻고「결과」를 얻으면 또 씨(因)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열가지(10) 연(緣)은「원인」이 되며 이루어진 하나는「결과」이다. 이 원인과 결과는 곧 일시중(一時中)에 있으되 이 두 지위(二位)는 움직이지(不動)않는다. 이러한 까닭에「인과도리문(因果道理門)」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그것」이요「그것이 곧 이것」이니 서로가 장애되지 않고 또 서로가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덕용자재문(德容自在門)이라 한다.
이 두구절의 듯이 달리 해석되고 있는 것은 하나는 중(中)으로 다른 하나는 즉(卽)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진기(眞記)에서는 이것은 중문(中門)과 즉문(卽門)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중문」과「즉문」을 도신장(道身章)에서는 물결에 비유하여 풀이했다.
이에 따르면 이쪽의 물결이나 저쪽의 물결이나 그것은 다 한강물위에 일어난 물결이다. 동쪽바람이 일으킨 물결과 서쪽바람이 일으킨 물결은 물론 그 형태가 같지않다. 그러나 한물결은 또다른 물결없이 물결일수가 없다. 동쪽바람에 의한 물결이나 서쪽바람에 의한 물결이나 그것은 모두 바람이라는「연」을 따라 생멸(生滅)하는 것 뿐이다.
이와같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것도 그 홀로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상대적인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유지되고 있다. 이를 더 알기쉽게 비유하면 빈방안에 촛불을 하나켜고 이 촛불하나로부터 백천만개의 촛불로 나누어 켜면 하나인 촛불이 백천만개를 이루나니 그 촛불이 낱낱이 다르지 아니한것과 같이 하나가 전체가 되고 전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육도사생(六道四生)의 차별이 다중(多中)하나 그 진성(眞性)은 다르지 아니하여 다만 업력차별로 각각 다를지언정 그「진성」은 매양 불이(不二)가 되어 결국 일체중생이 다 진성을 깨치면 한덩치를 이루는 것이다.
이를 또 알기쉽게 더 비유하면 수은(水銀) 한 병을 가져다가 방안에 퍼드리면 백천개가 될 것이다. 이를 다시 한곳에 쓸어 모으면 하나가 되듯 세계 일체중생이 다「진성」을 깨친다면 한덩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 모든 성인이 모두 한덩치가 되었다가 퍼뜨려 놓으면 여러 불보살이 되고, 과거 모든 성현이 모두 하나로부터 여럿이 되어 나온 것이다.
또한 예를 들어보자. 어느 시골에 살고있는 부모가 있어 아들 삼형제를 두었다. 맏아들은 중국에서 살고, 둘째는 일본에서 살고, 셋째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 사랑 깊은 부모심중에는 중국에 있는 자식이든, 일본에 있는 자식이든, 미국에 있는 자식 전부를 포함하고 있는것과 같은 것이다. 아들 삼형제를 부모 가슴속에 품고 있으나 그렇다 해서 그 부모의 신체가 더 커진것도 아닌 것과 같다. 그리고 부모의 자식사랑하는 마음은 三人자식 전부가 가고있지만 그 부모가 살고있는 위치를 옮기지 않고 신체도 감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있으면서 부모의 마음전체가 중국에 있는 자식, 일본에 있는 자식, 미국에 있는 자식에게 보내고 있으니 이것이 곧(一)이 일체(一切)에 주편하는 관계이다.
이러한「연기」의 도리를 전제로 하고「하나」와「전체」와의 관계를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면 이 구절의 의미는 분명해질 것이다.
(라) 현상계의 관련법
⑨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한티끌 작은속에 세계를 머금었고
⑩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낱낱의 티끌마다 우주가 다들었네.
강론 (9)구절부터 (10)구절까지 합론
⑨ 한티끌 작은속에 十方세계를 머금었다.
티끌이라고 작은것이 아니고 시방이라 하여 많은 것이 아니다. 모든법이 분별상(分別相)이 없기 때문이다.
⑩ 낱낱티끌마다 또한다시 이와같다.
낱낱티끌이라 한 것은 많은 티끌중의 하나하나에도 모두 시방세계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이상에서는 덩치의 성질을 말씀하시고 다음으로는 공간(空間)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를 다시 강론하면 이 두구절(2句節)의 뜻을 비유하면 티끌이 산이고 산이 티끌이라는 말이 된다. 많은 티끌을 모으고 모으면 태산이 되고 태산을 낱낱이 부수워 놓으면 티끌이 되고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티끌이 곧 산이요 산이 곧 티끌이다. 물방울도 하나를 놓고보면 한물방울이 되지만 여러개를 모아놓고 보면 강물이 된다. 그러므로 강물과 방울물은 즉(卽)해 있는 것이다.「도신장」에서는 이 구절에 관한 문답이 다음같이 수록되어 있다.
의상조사가 말씀하시기를「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이란 뜻은 다 꼭같이 머무름이 없는 까닭에 그렇다」고 하셨다.
이에 대하여 원사(元師)가「미진(微塵)은 적은데 소(小)에 머무름이 없고, 시방세계(十方世界)는 큰데(大)에 머무름이 없습니까?」하고 물었다. 의상조사는 한가지「량(量)이다」고 답했다. 원사(元師)는 또「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티끌(塵)은 작고 시방세계는 크다고 합니까?」하고 물었다. 의상조사는 다음같이 답했다.
「미진(微塵)과 시방세계(十方世界)가 각각 자성(自性)이 없고 다만 무주(無住)할 따름이다. 티끌은 작고 시방세계는 크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야 할때와 장소에서 그러는 것 뿐이다. 이것이 작기 때문에 작다고 하고, 크기 때문에 크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크다는 것 조차도 알지 못하는 근기로 하여금 그것을 알게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 뿐이다. 이는 언제나 한결같이 티끌은 작은 자성(自性)이요 세계는 큰 자성(自性)인 것은 아니다. 또 티끌이 크고 세계가 작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도리(道理)는 골고루 한결같이 머무름이 없는 것 그것이 곧 실상이다.
이를 다시 알기쉬운 예를들면 솜씨가 비록 작지만 낙낙장송(落落長松)이 그 가운데서 나오고 고기알이 비록 작지만 거기에서 나온 고기가 커서 장강대해(長江大海)에 헤엄치며 파도를 일으키는 고래가 있는가 하면 매알이 작으나 창공을 훨훨나는 송골매가 나오나니 참으로「일미진중함시방」의 소식이로구나」
위의 한결같은 설명의 결론적인 머무름이 없는 것 그것이 곧 도리의 실상(實相)이라한 의상조사가 말씀은 중요하다. 이 말씀은 실재론적(實在論的)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마) 시간성의 분별(時間性分別)
⑪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한없는 긴시간도 눈깜박 일념이고
⑫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
찰나의 한생각도 끝없는 긴겁일세
⑬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삼세와 구세십세 응킨 듯 한덩인 듯
⑭ 잉불잡난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그러나 따로따로 뚜렷한 만상이여
강론 (11)구부터 (12) (13) (14)구까지 합론
⑪ 한량없는 먼시간도 한생각에 달려있고,
⑫ 한생각 한량없이 먼시간에 미처있다.
「무량겁」이란 아승지겁을 뜻함이다. 그러나 아승지겁이 비록 멀다하나 그 또한 한생각에 달렸으니 가직하고 멀다는 뜻이 없다는 것이다.
⑬ 구세와 십세가 서로 한뭉치다.
⑭ 이것이 서로 섞여도 어지럽지 않고 각각 이룬다.
이는 한량없는 중생들 마음이 우주간에 꽉차 있지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섞여도 어지럽지 않고 각각 따로 이룬다는 뜻이다. 여기 11구에서 14구절까지는 시간성(時間性)에 관련지어 진리를 설하는 대목이다.
겁(劫)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아주 어마어마하게 오랜 긴시간 세월을, 그리고 일념(一念)이란 가장 순간적인 눈깜박할 사이도 못되는 찰나의 시간을 두고 말한다. 사방 60리되는 성안에 개자씨를 가득 채워놓고 우리현재 인간시간으로 백년만에 한번씩 그 성중에 와서 개자씨 한알씩을 집어내가서 완전히 그 성안을 비우게 될 때를 일개자겁(一芥子劫)이라 한다. 그것을 현재 우리인간의 시간으로 따진다면 몇백억만년이 될 것이다. 몇백억만년씩 되는「겁」이 한량없이 많은「겁」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는 것을 무량원겁(無量遠劫)이라 한다. 그렇게 오랜시간이 곧 한생각이다 하였다.
이것을 좀더 알기쉽게 다음같은 비유를 들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친구를 따라 카바레를 갔다. 아름다운 선녀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유혹에 빠져 날새는줄 몰랐다. 친구녀석이 등을 두들기며「야! 어서가자. 출근시간이 되었다.」
「뭐 벌써 그렇게 되었어」하고 자리를 떴다. 그는 그 자리를 뜨면서 그의 파트너에게 어디서 몇시에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는 퇴근시간에 부랴부랴 달려가서 정한 장소에서 기다렸는지 아직 그가 나오지 아니하였다. 어찌나 몸이 달았던지 일초가 여삼추(一秒如三秋)였다. 1분 2분이 가고 3분 5분이 지난뒤에 만나서 벌컥 화를 내면서 10년도 더 기다렸다 하면서 팔짱을 끼고갔다. 같은 시간인데도 어제밤 시간은 14시간이 벌써라는 말로 표시되었는데 여기서는 5분이 십년으로 표현 되었다. 길고 짧은 것이 모두가 마음이요 환경이다.「극락세계의 일주야의 시간」이 현재 우리인간세계의 시간으로 따지면「일억팔천만년」이 된다고 한다. 그래 마음에 한 생각을 일으켜 멀고 먼 시간관념을 일으키면 일념속에 무량겁이 형성되고 무량겁속에서도 한생각없이 지내면 일념이 곧 무량겁이 된다.「초초분분」의 생각이「시시일일(時日」을 이루고「시시일일」의 생각이「월월녀년(月年)」을 이루고「월월년년」의 생각이「겁겁의 세월」을 형성하는 것이므로 이렇게 하여「9세10세」가 서로 즉하여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깊고 묘한 철학인가? 만일 거기에 생각이 끊어진다면 시간도 겁도 없을 것이니 시간과 공간 또한 모든 것이 일심(一心)의 소현인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시간에 속아사는 사람, 공간에 속아사는 사람이 얼마나 가련한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시간의 단위를 과거, 현재, 미래의 3세로 나눈다. 9세란 3세마다 각각 그속에 3세가 있다고 생각하여 시간의 단위를 아홉으로 세분한 것이다. 과거의 과거(1), 과거의 현재(2), 과거의 미래(3), 현재의 과거(4), 현재의 현재(5), 현재의 미래(6), 미래의 과거(7), 미래의 현재(8), 미래의 미래(9) 이렇게 9세인데 이 전체를 일세(一世)로 통괄하면 10세(十世)가 된다.
어째서 이런 특이한 분석을 하고 있는가, 시간을 잘개 쪼개면 무한에 이른다. 이 무한의 시간을 일세가 통합하고 있다. 통괄하면 영원의 현재인 일세(一世), 쪼개면 무한임을 설하는 것이「무량원겁즉일념」이다.
지엄선사는 의상조사에게 9세의 도리를 다음과 같은 예로서 설명한 일이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지붕위에 올라가 있고 아들과 손자가 밑에서 기와를 나르는데 자기가 그 중간에서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있는 것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과거이다. 과거이기에 오직 한자리 일뿐이다. 아버지는 과거의 현재며 현재의 과거이다. 그러므로 두지위가(二位)된다. 중간몸인 나는 과거의 미래요 현재의 현재며 미래의 현재이므로 삼위(三位)를 갖추고 있다. 아들은 현재의 미래요, 미래의 현재인 까닭에 두 위를 갖춘다. 손자는 미래이므로 오직 일위(一位)뿐이다. 이들중에서 기와를 날라주는 사람을 본위로 생각하면 나머지 8세는 간단해진다. 그러므로 현재의 현재이다.
꿈속에 다섯사람 그들을 통괄해 보면 어느 한편에 치우침이 없다. 그러므로 이 두사람에게는 두가지 뜻이 다 있다.
이와같이 총(總)과 별(別)로써 때(時),「법」을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살아있는 것을 결코 현재 여기만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현 존재란 현재와 동시에 과거도 미래도 함께 살고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절된 시간 즉, 9세에 통일을 주고 영원한 순간의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 다시 한번 위의 구절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요약하여 비유하면 과거 무량겁으로 부터 오늘까지라도 성냥을 딱 그으면 불이 번쩍 일어난다. 미래억천만년후라도 성냥을 딱 그으면 불이 날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오늘 불씨는 과거무량겁전의 불씨인 것과 같다. 이를 다시 말하면 불은 마찰력 즉 인연상대에 의하여 전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전기는 본래 우주간에 가득한 것으로서 이것을 사용하는 인연상대에 따라 전화 등 백천가지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간의 영원과 순간속에서 우주간의 삼라만상이 그 형용체상을 갖추기전 그 성질이 법계에 가득하여 서로 잡란치 아니함이 마치 백천등불을 한방안에 켰으되 여러등불이 서로 잡란치 아니한 것과 같이 단절된 시간. 곧 9세에 통일을 주고 시간의 영원성과 순간성에 걸림없이 우리생명의 본원(本源이 영원무궁(永遠無窮)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였다.
이를 다시 더 뒤풀이 한다면 청산에서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잠들고 있는 바위들에게는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그리고 미래마저 없다. 여래(如來)는 안다. 과거도 현재, 그리고 미래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여래」는 시간이 아니다. 영원에 살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현재다. 현재는 결코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 끼어있는 그 가상 공간이 아니다. 사전에 찾아보면 현재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현재란 과거와 미래사이에 끼어있는 그 가상공간(假想空間)이다.」그러나 이것은 결정한 의미에서의 현재는 아니다. 무슨 현재가 이런가. 그것은 이미 과거다.「현재」라고 부르는 그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로 흘러가 버렸다. 존재의 외각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므로 현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미래라고 부르는 그 순간 그 미래는 현재가 되면서 곧 과거쪽으로 흘러가 버린다. 이런 현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재가 아니다. 미래와 과거사이의 현재란 과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고 미래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의 진행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재란 어떤 것인가?「여래」는 알고 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마저도 없다는 것을! 거기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부처님은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영원의 차원이다. 이 영원의 차원에서는「지금여기」가 있을 뿐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그대신「지금여기」가 있을 뿐 영원 그 자체로 부처님이 있을 뿐이다.
(바) 수도의 단계(修道段階)
⑮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첫발심 했을때가 부처를 이룬때요
(16)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생사와 열반경계 바탕이 한몸이니
강론 (15)구부터 (16)구절까지 합론
⑮ 마음을 처음 일으킬 때 문득 부처님.
화엄경의 이치는 시작과 끝이없고 깨침과 못깨침이 없어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본래 차별이 없는 이치이니 모든중생이 본래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16)생사와 열반이 서로 바탕이 한몸이다.
이는 一心이 주인임을 가르친다. 그리고 위의 2구절은 수도(修道)의 단계에 의한 법의 분별을 설한다.「법기」에는 다음같이 기록되었다.
「문」어째서「구세십세호상즉」다음에「처발심시변정각」이라고 말하였는가?
답한다 : 증분(證分) 곧 깨달은 분의「법성」은 불가득(不可得), 가히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법성을 진성(眞性)으로 바꾸어서 지금까지 설해왔다. 일체의 법에는 무자성(無自性) 즉 그 스스로의 고유성이 없다. 하나의 티끌에도 또 무량겁(無量劫)에도 그 자성은 없다. 이것이 진성(眞性)이다. 이러한「진성을 확실히 깨닫는 것, 그것을 초발심(初發心)이라고 한다.」
이와같이 발심(發心)하는 까닭에 곧 그 결과를 만족시키게 된다. 따라서 열반에 머무를 때 생사(生死), 죽고 삼에 노닐며 생사(生死) 죽고삶에 노닐 때 항상 열반에 머물게 된다. 이때문에「생사열반상공화」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생사(生死)이고 무엇이「열반」인가?「진기」에는 이렇게 기록하여 있다.
「생사(生死)는 곧 너의 몸이요 열반도 곧 너의 몸이다」라고 했다. 이말씀은 우리들 각자와 무관한 개념이거나 어떤 다른 대상으로서의「생사」와「열반」이 있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이에 대해「도신장(道身章)」에는 우리들 인간은 옛적부터 이미「부처님」이다. 그러나 발심과 더불어 그것을 알게된다. 마치 꿈속에 뛰어 다닌다. 그러나 꿈은 깨면 허무할 뿐 아침에 깨어나서야 꿈에 뛰어 다닌 것이 바로 누워있었던 것임을 알게된다고 풀이한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와서 물었다.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그런데 조주스님은「없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그 스님은 그대로 곧 도(道)를 통달하였다 한다. 이것이「초발심시변정각」의 소식이다.
그런데 그 깨달음을 얻지못한 사람들은 의심을 자아내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불성(佛性)이 있고 심지어 산천, 초목, 돌바위까지도 다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조주스님은「불성」이 없다고 하였는지?
인생의 몸은 물거품과 같고 마음은 바닷물과 같아서 물거품은 없어지더라도 물은 항상 있는것과 같이 몸은 없다가 다시 있기도 하고 있다가 없어지기도 한다. 허공의 구름은 항상 일어나고 멸하나 허공은 언제나 텅 비어서 동하지 않는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대오온(四大五蘊)의 본질은 곧 금강계(金剛界)라 하셨으니 금강은 생멸(生滅)이 없다는데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생사(生死)와 열반」이 둘이면서 둘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바닷물이 청정하게 보임으로 그 물이 아주 맑은줄로 알지만 그 물에는 반드시 짠맛이 있는 것이다. 또 허공이 텅비어 보임으로 아주 비인 허공인줄로 알겠지만 그 허공의 본원(本源)에는 대각성(大覺性)이 곧「열반성」이 있다는 것이다.
중생들은 무엇이나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주 없는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불은 뜨겁고 물은 젖는다. 고추는 매우며 소태는 쓰다. 이 형색등이 다 자기의 성질이 있으나 그냥두고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형색이 있는 물건도 그냥두고는 그 성질을 알수 없거든 하물며 일체만물이 형체없는 기운으로부터 생겨나고 형체없는 기운은 형체없는「아뢰야식」의 업종자(業種子)로부터 생겨나며 형체없는「아뢰야식」은 일체명상(名相)이 없는 대원각성(大圓覺性) 곧 열반성은 어떤 말씀으로나 생각으로서는 표현할 수 없어서「일체명상」이 없음으로 있고, 없는 것이 마치 전기가 우주에 가득하나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허공에 구름이 일어나고 멸하고 바람이 일고 그치며 자구만물이 허공을 의지하여 가지고 변태무쌍 하지만 그러나 허공은 언제나 동하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바닷물이 곧 파도요 파도가 곧 물이다. 물과 파도는 둘이 아닌 것과 같이 마음밖에 따로 부처없고 부처밖에 별로 마음이 없다. 이와같이 생사(生死)와 열반이 둘이 아닌 소식이다.
임제스님이 모처럼 발심하여 황벽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발심이란 최초로 자기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내가 누구인가 어디서부터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생각해보니 앞길도 막막하고 뒷길도 막막하였다. 아버지의 아버지도 아버지이고, 아버지의 아버지도 아버지이며, 어머니의 어머니도 어머니이고, 어머니의 어머니도 어머니여서 캐고 들어가도 결국은 한 아버지 한어머니라 차라리 하나님이라 해버리고 마는 것이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고 결국 하나님은 누가 낳은 자식이란 말인가? 계란속에서 닭이 나오고 닭속에서 계란이 나와 계란이 곧 닭이요 닭이 곧 계란이라 구분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면 아버지가 아들같고 아들이 곧 아버지 같아 전혀 구분할 수 없게된다. 이런 경지에 들어가서 3년을 꼬박앉아 찾고 찾았는데도 결말이 나지 아니 하였다. 입승스님이 가만히 뒤에서 보니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저 사람을 어떻게 좀 도와야지…」생각하고 가서 물었다.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고 앉았오?」
「참선하고 있습니다.」
「문답을 한번이라도 해보았오.」
「무엇을 알아야 물을것이 있지요?」
「하기야 그렇기는 하겠지오마는 위의를 갖추고 황벽스님에게 찾아가서 불법(佛法)의 적적대의(寂寂大意)를 한번 문의하여 보십시오.」
「그럴까요.」
그거야 별로 어려울것이 없는 것 같았다. 임제스님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가사 장삼을 입고 위의를 갖추어 황벽스님에게 찾아가 넙죽이 절을 하였다.
황벽스님이 물었다.
「무엇하러 왔느냐?」
「불법의 적적대의가 무엇입니까?」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황벽스님은 들고있던 주장자로 30방을 내리쳤다. 한두방도 아니고 30방망이를 맞고나니 등어리가 누구러 지는 것 같았다.
「도대체 이게 웬일인가? 내가 무슨행동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물음을 잘못했다는 말인가?」잔뜩 의아심을 품고 내려오니 입승스님이 물었다.
「뭐라고 하십디까?」
「뭐는 뭡니까? 말도 마십시오. 죽을고비를 겪었습니다.」
「그래요. 거 참 안되었군요. 그렇지만 그 이유를 모르고서는 안되니 내일한번 더 가보십시오.」
임제스님은 그 까닭을 알 필요가 없다 생각하고 그 이튿날 또 의의를 단정히 갖추고 전날과 꼭같이 물었다. 그랬더니 또 다짜고짜로 30방망이를 내리친다. 키가 8척에 육덕이 좋은 임제스님이기는 하지만 선머슴 매치듯 30방망이를 맞고나니 정신이 핑돌았다.
「저 영감이 미쳤나 왜 나를 이렇게 때리나…?」하고 속이 상당히 부르트기는 하였지만 아직 그 내력을 모르는 이상 그냥 반기(反旗)는 들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이유를 알만한 틈을 준다면 혹 한번 화를 내볼 여지가 있는데 전혀 짬을 얻지 못한데다가 또 무슨 말을 했다가 다시 또 더 맞지나 않을까 겁이나서 도망치다시피 뛰쳐나왔다. 임제스님은 무척 분했다. 코를 씩씩거리고 눈물을 흘리며 나오니 또 입승스님이 묻는다.
「무슨 말씀이 없던가?」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등어리에 피가 맺히도록 맞았습니다.」
「거 참 이상도 하네. 이유없이 매를 때릴 리가 없는데… 삼세번이니 내일 한번 더 가보게…」
그리하여 임제스님은 3번째 황벽스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황벽은 여지 없었다. 여전히 30방망이를 내리친다. 연3일 90방망이를 맞고나니 아주 정이 뚝 떨어진다.
「이런 노가다판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냐?」
하고 그는 바로 지대방으로 들어가서 짐을 챙겼다. 입승스님이 왔다. 이제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무엇 하는가?」
「짐을 챙깁니다. 가야지요. 이런 절에서 어떻게 삽니까?」
「이런 쑥맥 가르쳐 주어도 알지 못하니 별 수 없군.」하고 혀를 찼다.
「이절 하고는 인연이 없으니 가야지 그러나 3년동안 밥만 얻어먹고 떠나게 되었으니 큰스님에게 인사나 드리고 가게…」
하고 입승스님이 곧바로 황벽스님께 나아가 길을 잘 인도하여 주시도록 간청하였다.
「임제가 떠난다고 합니다. 바른길을 인도하여 주십시오.」
황벽스님은 아무말씀 하지않고 있다가 임제가 와서 절하자.
「어디로 갈것인가?」
물었다. 임제는 화가난 듯 말했다.
「집없이 떠나는 사람이 정한 장소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북쪽 대우(大愚)스님에게 찾아가라.」
정작 갈곳이 없어 떠난다고는 했지만 매우 걱정하였는데 마침 길을 인도하여주니 매를 때리긴 하였어도 고마웠다. 몇일을 걷고 걸어서 겨우 대우스님이 계신곳에 나아가니 대우스님께서 보고 물었다.
「어데서 왔느냐?」
「황벽스님 절에서 왔습니다.」
「그래 황벽스님께 무슨법을 물었더냐?」
「3년 좌선중에 3일동안 90방망이만 맞았습니다.」
하고 매우 언짢아 하는 기색이었다. 그런데 그 스님은 노바심절(老婆心切)이 그토록 친절하던가? 하였다. 임제스님은 그말아래 당장 깨닫고 말하였다.
「황벽스님의 법문이 몇품어치 되지 않는군요.」
「뭐 이놈. 황벽스님 법문이 몇푼어치 되지 않는다고…」하면서 대우스님이 임제스님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자 임제스님은 형형한 눈빛으로 대우스님을 바라보고 큰 주먹으로 대우스님의 옆구리를 세 번「쾅, 쾅, 쾅」하고 내리친다. 대우스님은 큰소리로 말하였다.
「너 이놈, 누구에게 주먹질이냐 어서가서 황벽스님께 감사하라.」
하는 수 없이 임제스님은 그곳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모르지만 멱살을 잡힌체 대우스님의 옆구리만 세 번 쥐어박고 돌아왔다. 황벽스님께 문안드렸다.
「스님 돌아왔습니다.」
「응, 그래 올 줄 알았다.」
스님께서는 이미 올 줄알고 계셨기 때문에 조금도 대수럽지 않게 생각 하였다.
「그래, 대우스님께서 뭐라고 하더냐?」
「스님께서 그렇게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더냐」고 하시면서
「노파심절이 지나치시다 하셨습니다.」
「뭐, 그놈의 늙은이가 입이 싸가지고 그만…」
하면서 황벽스님께서 화를 벌컥 내었다.
「내 이놈 오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가만두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한대 때려주지…」
「뭐 그때까지 기다리실 것 있습니까?」
하고 임제스님은 황벽스님을 한 대 갈겨댔다.
황벽 스님이 화를 벌컥내면서
「야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손찌검을 하느냐?」
하니 황벽스님께서 일어서면서
「여기가 바로 호랑이 굴이다. 호랑이 굴속에 들어와서 호랑의 수염을 건드리는구나」
그때 임제스님 벌떡 일어나「어흥 어흥」하고 호랑이 흉내를 내면서 황벽스님을 잡아 먹을 듯이 달려 들었다. 황벽스님은 급히 자리를 피하면서 소리소리 질렀다.
「애들아, 이 미친중을 법당으로 끌고 가거라」
하며 법상을 차리고 대중을 모와 법을 전하니 이것이 황벽선사의 이심전심(以心傳心), 곧 초발심(初發心)이다.
자기를 깨닫고 세상을 구하는 일, 이것을 화엄사상에서는 초발심(初發心)이라 하고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 한다.
(사) 총론
(17)이사명연무변분(理事冥然無分別)
있는듯 이사분별 그러나 걸림없고
(18)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비로자나 보현보살 대인의 경계로세
강론 (17)∼(18)까지 합론
위의 두구절은 연기분(緣起分) 이의 결론에 해당한다.
이(理)와 사(事)가 밝아서 따로 분별이 없다.
이(理)는 심성(心性)이고 사(事)는 현상계의 뜻이다.
십불의 보현은 大人의 경계로다.
앞에서 설하신 바가 비록 많다고는 할망정 이(理), 사(事) 곧 진리와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 까닭에 이와 같은 결론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理)와 사(事)란 무엇인가?
「법기」에서 밝힌바와 같이 생사(生死) 곧 나고 죽음과「생사」없는 영원한 평화 곧 열반의 성질(性)없음을 이(理)라 하고, 성질(性)없는 생사(生死)와 열반이 곧 사(事)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연기(緣起)는 성질(無性)없음이 곧 이(理)라 하고 성업(無性)는 연기(緣起)는 곧 사(事)란 말이다.「진기」에서는 진리(理)라는 부처님의 내향심(內向心)이므로 십불(十佛)이 곧 진리(理)에 해당하고 사(事)는 부처님의 외향심(外向心)이므로「보현보살의 경계」가 곧 이것이라고 했다.
십불(十佛)이란 부처님의 실상을「화엄경에서 열가지로 설명한 것이요, 따로히 열분의 부처님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보현보살은 부처님의 외향심(외향심(外向心)의 화현(化現)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십불(十佛)이란 부처님의 깨달음 지혜의 상징이라면 보현보살이란 부처님의 자비로운 덕행(德行)의 상징으로 이해하면 괜찮을 것이다. 지혜와 자비 그것은 둘이 아니니기 때문에 이치(理)와 현실(事) 또한 둘이 아니다. 이 이치(理)와 사실(事)에 대한 설명은 앞에서 여러번 되풀이 하였기 때문에 다음장으로 넘어가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아) 도장 모양의 비유
(19)능인해인삼매중(能人海印三昧中)
세존님 해인삼매 그속에 나툼이여
(20)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
쏟아진 여의보배 그속이 부사의여
(자) 이익 얻음
(21)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허공을 메워오는 거룩한 진리비는
(22)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중생들 그릇따라 온갖원 얻게하네.
강론 (19) (20) (21) (22)까지 합론
(19)능인세존께서 해인삼매중에서
(20)여의주(如意珠) 부사의법(不思議法)을 한량 없이 나타낸다.
「여의」란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진리요「부사의」는 형언할 수 없는 묘한 법을 말한다.
(21)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배를 허공에 가득히 비오듯 내린다.
(22)중생의 그릇을 따라 이익을 얻게한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대소승의 3근(根)이 나누어지고 차별상이 생긴다는 뜻이다. 중생을 교화 제도하는 부처님을 뜻한다.
이 능인(能人)이 해인삼매(海印三昧)로 나와 어떻게 중생들을 이익하게 하는지 의상조사의 설명을 듣기로 하자.
도장(印)이라고 한 것은 비유로써 이름한 것이다. 왜냐하면 큰바다는 지극히 밝고 맑아 밑바닥까지 다 드러나 보일 정도이다. 하늘에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아수라(阿修羅)무리와 싸울때에 모든 병사의 무리들이 그속에 분명히 드러나는 모습이 꼭「도장(印)」에 글씨가 나타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해인(海印)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번」이란 번성하다는 뜻이다. 마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까닭이다. 날출(出)이란 용출무진(涌出無盡) 곧 연기(緣起)가 끝없이 솟아나와 그칠줄을 모른다는 뜻이다. 여의(如意)란 비유로써 이름한 것이니 여의보 임금님(如意寶王)은 불심의 보배를 비오듯 뿌려 중생을이롭게 함이 연(緣)을 따라 무궁무진하다. 석가세존님의 선교방편(善巧方便)도 또 이와같아 49년간하신 일음설법(一音說法)이 시방삼세(十方三世)에 퍼저가면 중생계에 호응이 있어 나쁜마음을 없애고 착한 마음을 일으켜 중생세계를 이롭게 하니 어디에서나 쓰는 곳에 따라 뜻과 같지 않음이 없기에 여의(如意)라고 한다. 또 진기(眞記)에는「어째서「해인삼매」가 다른이을 이익케 한다는 뜻이 첫머리에 왔는가 하면 다른이를 이익케(利他)하는 시방세계 부처님(十佛)이 깨달으신바「해인」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법기(法記)에는「해인」중에는 참된 자신의 이익(自利)과 다른이의 이익이 있다고도 하였다. 자리(自利)란 세상의 내면적 깊이를 깨닫는 것이고 이타(利他)란 말은 세상으로 넓이 뛰어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또 자리(自利)란 부처님의 마음이고 이타(利他)란 부처님의 교화방편으로 알면 될 것이다. 자리(自利)에 바탕두지 않은 이타(利他)를 수반하지 않는 자리(自利) 또한 마찬가지 이치이다.
이 뜻을 다시 말하면 허공에서 세차게 쏟아지는 보배의 소낙빗물도 자기가 가진 그릇만큼 밖에 더 못받는 법이다. 예를들면 한 대담을 그릇이면 한 대만큼, 한말담은 그릇이면 한말만큼 한섬담을 그릇이면 한섬만큼밖에…세상을 내다보는것도 자기안목이상은 더 바라보지 못하는 법이다. 이것이 곧「중생수기득이익」이란 법문이다.
(차) 수행법
(23)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행자여 돌아가라 진리의 고향으로
(24) 파식망상 필부득(息妄想必不得)
망상을 쉬고가라 헛길을 가지말라
(25)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교묘한 절대방편 그길로 찾아가라
(26)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自糧)
여의주 자량얻어 부처님 고향으로
강론 (23) (24) (25) (26) 구까지 합론
(23) 이론고로 수행하는 사람이 본원에 돌아가면
(24) 다못 망상을 쉬어야만 반드시 얻는 것은 아니다.
이사(理事)가 명연(冥然)해서 분별없은 자리에서 망상을 제거하고 얻는다면 이는 사상(事上)의 도리요 화엄종지에는 어긋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진망(眞妄)을 구별하는 경지가 아니다.
(25) 연이 없어도 교묘함으로「여의」를 잡게된다.
「무연(無緣)에 있어 다른 경전에서는 연법(緣法)과 숙연(宿緣)으로 인과(因果)과 성취되어 불과(佛果)를 성취한다.」했으나 법성게에서는 초발심시가 부처님되는 도리이니 연(緣)으로 성취하는 바가 아니라는 뜻이다.「선교」란 법성의 미묘법문을 말씀한 것이다.
(26) 본분따라 자량얻어 집으로 돌아가라.
「귀가」집으로 돌아가라함은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요「분」은 자기본분을 말한다.
위의 네구절은 수행방법(修行方法)을 가르쳐 보인 것으로 법기(法記)에는 다음같이 이 구절을 풀이하고 있다.
행자(行者)란 말은 모든 믿음을 가지고 보현보살의 수행법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가르친다.
본제(本際)란 말은 깨달은 마음(內證) 진리의 고향 해인(海印)이다.
「파식망상필부득」이란 구절은 두가지 아집(我執)을 망상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위에 말한바와 같은 진리의 고향「해인」의 경지에는 무아집(無我執) 곧 아상(我相)을 끊은 사람이라야 능히 도달할 수 있다. 만약「아집」을 남기면 도달할 수가 없다. 마치 바닷가의 우물에는 짠성품이 있기 때문에 먹어서 목마름을 가시게 할 수가 없다.
이와같은 의식(意識)의 인법이아(人法二我)는 말나식(末那識) 및「아뢰야식」의 바다에 숨겨있다가 다시 일어난다.「아뢰야 본식」은 바로 나의 뿌리고 그「말나식」은 바로 나의 줄기이다. 육식(6識) 및 전오식(前5識)은 모두 이 아집(我執), 법집(法)이 출입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사람이 수미산에 오르고자 하면 팔해(8海), 여덟바다를 말리고 난뒤에야 육지를 따라 가야만 수미산에 오를수가 있다.
이와같이 행자(行者)가 진리의 고향으로 뒤돌아 가고져 하면 점차로「8식망상」의 바다를 멈추게 하고나서야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삼승(三乘)의 뜻이다.
다시 말하면 본제(本際)란 의상조사가 말씀한「진리의 고향」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 진리의 고향으로 뒤돌아 가기 위해서 철저히 무아(無我)의 경지를 터득해야 한다.「나」에 집착하는 망상을 남겨둔체「진리의 고향」에 도달할 수 없다.「나」에 대한 집착과 내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이「아집 법집」이 두가지 집착을 이집(二執)이라고 한다. 이「이집」으로부터 자유로와 지는 길은 무연(無緣)해야 한다. 곧 어느 대상에도 의거함이 없어야 한다. 어떤 대상도 변함없는 고유성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귀가(歸嫁)란 말은「진리의 고향」으로 뒤돌아 가는 것이다.
또 자량(資糧)이란 말은 깨달음을 얻는 여러 가지 방편덕목(方便德目)을 말하는 것이다. 수행의 방편을 밝히는 위의「4구절」의 의미는「본제」곧 진리의 고향과 망상(妄想)이라는 두 낱말을 통해 분명해 질 것이다.
옛날 어떤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기 위하여 모여관에 들어갔다. 주인에게 문간방을 달라하여 일찍이 죽치고 앉아 들어오는 손님을 하나하나 점검하였다. 누가 무엇을 가지고 들어와서 어느방 어느곳에 놓고자나 살펴보는 것이다. 그런데 밤이 좀 이슥하여 한 노스님이 돈자루를 무겁게 짊어지고 들어왔다. 주인 마님이 반색을 하며 인사를 한다.
「아이고 스님, 스님께서 어찌 이렇게 나오셨습니까?」
「세금내러 가는 길이요.」
「안방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며 길을 인도하니 스님은 방으로 들어가자마다 돈 자루를 들어 벽장에 넣고 앉았다. 도둑놈은 안심하고「오늘은 내가 꿈을 잘 꾼 날이다.」생각하고 초저녁엔 편히 누었다가 밤중이 되어서 조심스럽게 찾아갔다. 손가락에 춤을 묻혀 창구멍을 뚫고보니 노스님은 그때까지 잠을 자지않고 앉았는데 금시금시 변화를 한다. 방금 황금 덩이 부처가 되었다가 다시 또 사람이 되었다가 계속하여 신통변화를 부린다. 한참동안 들여다 보고 있다가 생각을 돌리ㅕ 돌아왔다.
「옳지 내가 이렇게 남의 눈치를 피해가면서 도둑질을 할것이 아니라 저 신통만 배운다면 걱정없이 살겠다.」
생각하고 그날밤을 편히 잤다. 아침일찍 일어나서 스님을 찾아 뵙고 통성명을 하였다. 그리고 그뒤를 따라갔다. 산재를 넘을 무렵 큰소리로 스님을 부르며 달려갔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세금을 내러 가는 길이요. 왜 묻소?」
「예, 다른게 아니라 어젯밤 그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것이라니?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 있지 않아요. 그것」
「아니 그것이라니 알 수 없는 소리를 자꾸하면 어떻게 하나. 사실대로 말을 해보라구」
하며 스님께서 조금 언성을 높이자 도둑놈은 황송한 듯 사정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사실 저는 도둑놈인데 어젯밤 도둑질을 하러 갔다가 스님께서 황금부처가 되는 것을 보고 나도 이젠 도둑질을 그만두고 그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가르쳐 주어야지.」
「스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래 시키면 시키는데로 하겠느냐?」
「예, 하구 말구요. 사람이 금부처로만 변할 수 있다면 어떠한 고난도 참고 견디겠습니다.」
「꼭 그렇다면 오늘부터 집에 돌아가서 나무아미타불 금부처만 관(觀)하게…」하고 자세히 그 방법을 일러 주었다.
집에 돌아온 도둑놈은 아무 말도 없이 돌아앉아 벽만 바라보고 나무아미타불 금부처를 관했다. 그 마누라가 보니 이는 필시 정신이 돌지 않고서야 저럴수가 없다. 그전에는 돈을 벌어오면 지저라 볶아라 하고 먹고 놀고 자고 하였는데 먹는것도 자는것도 다 잊어버리고 앉았으니 뭐가 끼이지 않고서야 저럴 리가 없다.
「여보, 당신 거기서 무엇을 찾고 있어요.」
「금부처를 찾고있어.」
「뭐라구요. 금부처는 절에가서 찾아야지 집에서 무슨 금부처를 찾아요.」하고 야단쳤다. 그러나 저러나 남자는 아는체도 하지않고 그저 앉아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돈은 벌어다 주지않고 금부처만 찾으면 장땡인가」
중얼 거렸다.
「가만히 있어. 금부처만 찾으면 돈은 저절로 뭉탱이로 벌리게 될테니까」하고 앉아 있으니 마누라의 잔소리 때문에 공부가 제대로 안되었다. 그래서 그는 골방으로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앉아 있었다. 몇일후에 마누라가 궁금하여 찾아왔다. 그런데 사람이 없어져 버렸다. 사방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골방안을 들여다 보니 골방안에 누른 금부처가 한분 앉아 있었다. 깜짝놀라 문을 벌떡 여는 바람에 도둑놈은 그만 도통을 하였다. 순간 금부처님은 간곳없고 남편이 부스스 눈을 비비고 일어섰다.
「여보, 당신 어찌된 일이요?」
「아무것도 아니여. 금부처가 곧 나로구만」
金부처가 나와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고향가는 수행의 결과이다.
(카) 이익을 말함(결론)
(27) 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끝없이 쓰고쓰는 다라니 무진보로
(28)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한바탕 불국토에 법왕궁을 꾸미고서
(29)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宋)
중도의 해탈좌에 앉으면 깨달으리
(30)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예부터 그랬었네 부동이 부처였네
강론 (27) (28) (29) (30) 구절까지 합론
(27) 이 다라니가 무진보배가 된다.
(28) 실상의 불국토에 보배궁전 꾸미고서.
(29) 몸이 실제로 중도상에 앉았으니.
이는 유무양번(有無兩邊) 즉 세상만물이 무너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고집과 세상만사는 아주 허무하다는 고집을 초월하고 마음가는 곳과 말길이 끊어진 경계에 머문다는 뜻이다.
(30) 옛적부터 부동하는 것은 부처님이라 하네.
마지막 이 네구절은 수행(修行)의 이익을 밝히는 부분이다. 그 이익이란 본래부터 우리들 자신속에 간직되어 있는 참다운 나를 되찾아 가자는 것이다. 그 참다운「나」란 의상조사가 되돌아가기를 염원했던 이름마저도 없는 참된 곧「진리의 고향」이며 원효성사가 말씀하는 한마음고향(一心之源)이다. 이것은 곧 법성(法性)의 그 자리며 부처님의 세계이다.
「진기(眞記)」에서는 실보전(實寶殿)과 중도상(中道床)을 다음과 같이 풀이 하였다.
「실보전」이라? 부처님 세계의 바다이다.
「궁좌실제중도상」이란? 일승(一乘)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마침내 도달한「진리의 고향」 그것은 결코 어느 먼 하늘에 있는 별다른 세계가 아니다. 거기는 내 본래의 자리일 뿐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본래의 고향」으로 되돌아 간 것 뿐이다. 그래서「구래부동명위불」이라고 한 것이다.
진기(眞記)에는 이것을 비유하였다.
한사람이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꿈속에 삼십여개의 정거장을 거쳐 돌아 다녔다. 그 꿈을 깨고보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냥 누워자고 있지 않는가.
이처럼 근본인 법성(法性)으로부터 30구절을 거쳐서 다시「법성(法性)」에 왔지만 결국은 부동한 그 자리일 뿐이다.
세존께서 다음같은 설법을 하셨다.
아버지와 집을 버리고 나간 어린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낯선 타향 외국을 흐르고 흘러서 이미 30년이 지나갔다. 세월은 덧없이 지나가고 나이는 40고개에 들어 섰지만 그의 생활은 궁할데로 궁해서 사방으로 분주히 돌아 다니며 일자리를 구해 가까스로 입에 풀칠을 해가고 있었다.
한편 외아들을 잃어버린 그의 아버지는 깊은 근심에 잠겨 사방으로 소년의 간곳을 찾아 보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잡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도시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혹시 자기 아들이 들어 올는지도 모른다는 가냘픈 희망을 품고 화화생활중에서도 늘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재산은 몇백억 몇억조인지 수 많은 보배가 창고에 가득 차 있었고 많은 시봉하는 사람들게 떠받들리어 지냈다. 넓이 여러나라와 무역을 하여 그의 집은 손님과 상인들이 언제나 저자를 이루었고, 이익금도 막대했다. 그래서 항상 국왕에게 사랑을 받고 대신과 부호가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야말로 무엇 한가지 부족한 것이 없는 신세였다.
그러나 아무리 재산이 많고 세력이 있어도 간곳을 알 수 없는 아들을 생각하는 어버이의 마음은 세월이 감에따라 나날이 더해 갈 뿐이다.
이때 집을나간 그의 아들은 이나라 저나라, 이 도시 저 도시로 흘러 다녔다. 그의 발길은 이상스럽게도 고국으로 들어서서 고향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다하지 않은 부자의 인연 때문일까? 마침내 그는 자기 아버지인 장자의 집 문앞에 이르렀다.
그때 장자는 사좌상에 앉아 천하부귀를 자랑하고 있었다.
대문앞에 들어선 아들은 집이 크고 또 주인의 위엄이 있고 호사한 모양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이 사람은 나라의 왕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고 갑자기 겁이났다.
「내가 왜 이런곳을 왔을까? 여기는 나같은 사람을 고용할 집이 아니다. 어름하고 있다가는 강제로 붙들어다 일을 시킬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그 집을 급히 떠난다.
의좌에 앉아서 이 사나이를 바라보고 있던 장자는 어릴때의 모습을 생각해 보고 장성한 아들의 모습을 속으로 상상해 보다가 갑자기 이상한 충격을 받아 지금 대문밖에 서있는 저 사나이가 자기의 아들임을 깨달았다. 돌아서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내재산을 상속받을 사람을 찾아냈다. 이제 내소원은 이루어 졌다하고 생각한 장자는 곧 옆사람에게 명하여 아들을 뒤찾게 했다. 명령받은 사람들이 달려가서 아들을 붙잡았다. 아들은 깜짝놀라「까닭없이 나를 붙잡는 것은 죽이려는 것임이 틀림없다. 나는 왜 이런꼴을 당해야만 한단 말인가?」생각하고「나는 아무것도 나쁜짓을 하지 않았는데 왜 잡습니까? 놓아 주십시요.」하고 울부짖다가 기절해서 쓰러졌다. 이 모양을 보고있던 아버지는 하인에게 일렀다.「이제 그 사나이를 빨리 정신을 차리게 하여라.」
장자는 자기 아들이 오랫동안 불우하게 지냈기 때문에 변한 모양을 보고 자기 아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지금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일러주어야 믿지 않을 줄 알았기 때문에 하인을 시켜 깨어난 아들에게「너를 놓아 줄것이니 이 집에서 우리와 함께 쓰레기도 치우고, 변소도 청소하고, 마루도 닦는거요. 품삯은 다른이의 갑절을 받을 수 있고.」아들은 이말 듣고 그런 일이라면 자기에게 알맞다 생각하고 두사람을 따라가서 품삯을 미리받고 청소부로 고용되었다. 그는 날마다 온집안 청소를 했다. 그 아버지인 장자는 이렇게 변해버린 자기아들의 모습을 볼수록 측은했다. 장자는 일부러 때가 낀 옷으로 갈아입고 청소기를 들고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말을 붙였다.
「부지런히들 일하는군」하며 장자는 한걸음 그의 아들에게 접근하여 말했다.
「이봐 젊은이. 너는 여기서 일해라. 품삯도 더 줄테니…. 나는 네가 보는바와 같이 늙었지만 너는 아직 젊다. 나는 오늘부터 너를 자식처럼 대하겠다.」이리하여 장자는 곧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아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로부터 장자는 아들에게 십년동안 집청소부를 시켰다. 십년이란 세월은 두사람의 마음을 융합시켜서 서로 아무런 거리낌이 없게 되었다.
「나는 이처럼 너를 믿고 있는 것이니 너도 내마음을 살펴서 모든일에 실수가 없도록 해다오.」
다시 얼마를 지난뒤 아들의 마음은 깨달은바 있어 장자는 곧 자기의 친아버지임을 알았다. 깨달은 줄을 아는 장자는 몹시 기뻐하면서 친척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여러분들, 내말을 들어주시오. 지금 여기 있는 이 사람은 내 피를 받은 외다을 아무게요. 나의 모든 재산은 죄다 이 아들에게 넘겨준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린다. 모든 재산의 출납은 또한 이 아들의 자유라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라오.」
장자의 오랜 소원은 이루어져서 그 둘이 부자간임을 명백히 했다.
이 설화의 내용을 비례하여 보면「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로써 법계를 장엄했듯 거부 장자가 중도상에 앉아보니 잃었던 핏줄이 부자상봉(夫子相逢)하고 가업(家業)을 전하였다. 본래불(本來佛)의 진면목(眞面目)이 여기에서 통하는 소식!
의상조사는「구래부동명위불」의 뜻을 요약해서 다음같이 풀이했다.
「가고가도 본자리에 있고, 오고와도 떠난 그 자리에 있다.(행행본처(行行本處)요 지지발처(至至發處)로다)」
지금까지 법성게(法性偈)를 중심하여 의상조사의 화엄사상을 대강 더듬어 보았다. 의상조사의「법계도」는 이백열자(210자)의 시문(詩文)을 4각(角)의 도장에 합친 하나의 인장(印章)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상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깊고도 묘하고 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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