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장경'에 나오는 육조 혜능(慧能ㆍ638~713)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가섭존자, 아난존자로 이어져 28대 달마대사가 선종의 초조가 되었지요.
그래서 초조 달마로부터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까지 부처님으로부터 33대까지 이어집니다.
조계종이라는 말은 혜능대사가 머물던 조계산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조계종은 혜능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혜능 대사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모시면서 늦은 나이에 결혼도 못하고 나무를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외지로 나무를 팔러 가는데 어느 수행자의 경전 독송이 들리는데 "응당 어느 곳에 마음을 머물 것이냐."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 혜능은 귀가 열려서 '그 경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니 금강경이라 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 경을 봤으면 좋겠다.' 하니 홍인 대사에게 가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가기 위해 남들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가 평생 살수 있도록 해놓고 홍인 대사를 찾아가 인사하니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혜능이 "남쪽에서 왔습니다." 라고 하니 "그곳은 오랑캐가 사는 곳인데 어찌 부처가 되려 이곳에 왔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살아가는데는 지역이 따로 있겠지만 불성은 오랑캐고 남쪽, 동쪽이 따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혜능의 대답에 홍인은 '아 이놈이 보통이 아니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혜능은 '방아나 찧어라.'는 홍인의 말을 따라 팔 개월 동안 열심히 방아를 찧었습니다.
한편 홍인대사는 나이가 들어 법을 전해줄 사람을 찾기 위해 깨달은 바를 글로서 내놓도록 지시 하니 많은 수행자들이 우리를 가르치는 분이 신수 대사이니 그분 밖에 없다며 미루니 신수 스님께서 어쩔 수 없이 글을 지어서 방을 붙여놓는데 그것이 바로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몸은 바로 보리수요
心?明鏡臺(심여명경대) 마음은 곧 밝은 거울이라네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勿使?塵埃(물사야진애) 때묻지 않도록 하세
이 글은 벽에 붙여놓아 수행자들이 보고 이대로만 실천하면 삼악도는 면하겠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지요. 몸이 보리수고 마음이 맑은 거울이니 거울에는 먼지와 때가 끼지 않게 때때로 닦고 털어 물들지 않게 살아가라는 내용을 해놓고 많은 사람들이 읽고 외우고 그대로 수행하라 지시하니 사람들은 그것이 답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방아를 찧던 육조대사는 글을 읽을 줄 몰라 도반에게 읽어달라고 하여 듣고는 이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글을 써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아니오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거울 또한 거울이 아니라네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何處?塵埃(하처야진애) 어느 곳에 티끌이 일겠는가
깨달음에는 본래 형식이 없고 맑은 거울 또한 형식이 없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먼지와 티끌이 있을 수 있나, 하는 글을 써서 신수대사의 글 옆에 붙여놨습니다.
홍인 스님이 보시고는 '이것이 진짜 깨달은 것이다'라고 생각했지만 행자 입장에서 보면 오해할까봐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고 혜능을 찾아갔습니다.
홍인은 주장자로 땅을 세 번 내리치고 혜능에게 물었습니다. "방아는 다 찧었느냐?"
"다 찧었는데 아직 까불지 못해서 알맹이를 못 찾고있습니다." 혜능은 대답했습니다.
혜능은 그날 밤 삼경에 홍인에게서 법을 전수받게 됩니다.
육조 혜능대사가 행자(行者)의 신분으로서 오조 홍인대사에게서 법을 받아서 한밤중에 달아났습니다. 거기 있으면 무슨 해를 입을지 모르므로 의발(衣鉢)을 받아서 한밤에 도망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진혜명 스님이 혜능대사를 잡으러 나섰습니다. 대유령(?庾嶺)에서 대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혜능대사는 진혜명 스님의 우락부락함을 보고 가사와 발우를 바위 위에 올려놓고 몸을 숨겼습니다. 진혜명 스님이 바위 위에 올려놓은 가사와 발우를 가져가려고 하니 꿈쩍도 하지 않아 크게 놀랐습니다.
"노행자여 내가 뒤따라 온 것은 이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법을 배우려고 왔으니 얼른 나와 주십시오."하고 간청을 했습니다.
이에 혜능대사가 "네가 이미 법을 위하여 왔을진대, 이제 모든 반연(攀緣)을 다 쉬고 한 생각도 내지 마라. 너를 위하여 말하리라." 하고 숨은 곳에서 나와서 진혜명 스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것도 생각하지 말고 악한 것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러한 때 어떤 것이 너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냐?"
하니, 진혜명 스님이 그 말에 크게 깨쳤다고 합니다.
홍인스님이 육조에게 말하길
有?來下種(유정래하종) 뜻이 있는 곳에 씨가 내리니
因地果還生(인지과환생) 원인이 있는 곳에 결과가 나타난다.
無?旣無種(무정기무종) 뜻이 없으면 씨도 없나니
無?亦無生(무성역무생) 성품이 없으면 태어남도 없다.
바로 그런 시절인연을 도래해서 인연이 닿으면 그때 법을 피우라는 부촉을 홍인 스님이 육조 스님에게 내려서 그렇게 떠나가고 있다가 나중에 법을 피웠지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응당 머문 곳 없이 그 마음을 낼 지어다" 했는데 저희는 어떤 마음을 내야 할 것인가.
그래서 네 가지 마음을 항상 가져야합니다.
첫째, 관대심, 항상 넓고 큰마음으로 수행하여 사홍서원에 있듯이 중생 모두를 분별없이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야합니다.
둘째, 제일심, 으뜸가는 마음과 관대한 마음으로 중생을 제도하되 차별상을 두지 않고 남김없이 무여열반에 들게해야겠다는 제일가는 마음을 내야합니다.
셋째, 상심, 끊임없이 정진하여 중도에서 머물지 않고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고도 제도했다는 상을 내지 않는 것이 항상 된 마음입니다.
넷째, 부전도심, 뒤바뀌지 않는 마음입니다. 생각을 거두어서 옳은 생각을 했는데 어느 경계가 들어서면 다른 생각으로 바뀌고 번뇌망상에 빠지지 않는 것이죠. 네 가지 모양 자리에 걸리지 않는 마음. 아상, 중생상, 인상, 수자상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른 마음속에서 차별상을 내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런 마음을 가졌을 때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아까 말한대로 교수 스님인 신수스님과 노행자로 있었던 혜능과의 차이를 보면 신수 스님은 번뇌망상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털어내는 수행에 매진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혜능스님은 도전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습니다. '본래무일물' 이라고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번뇌망상이 있겠느냐. 견성은 점차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일순간으로로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혜능 스님의 영향을 많이 받아 조계종은 화두 들고 전진하며 일심 정진하고 성불을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수행을 함께 하는 것이 불교인데 믿음으로 끝나는 것 아니라 끊임없이 수행정진 해서 다겁생으로 많은 수행을 통해 어느날 몰록 깨달음을 갖는 입장을 함께 취해야합니다.
요즈음 마음을 많이 이야기하죠. 화엄경에서도 '일체일심조' 라고 나오는데 그것을 적용해서 세상을 살아가면 모두 즐겁고 편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갈등 속에서 고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 아까 말한대로 네 가지 마음에 머물러라.
육조스님의 교훈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입니다. '무일물'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 때가 끼고 먼지가 묻느냐는 내용처럼 우리는 진리 당체에 의지해서 자기를 돌아보고 찾는 일에 게으르지 않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또한 육조 혜능스님께서 주장한 것은 '자성삼보' 인데 내 마음 안에 삼보가 있다는 것입니다. 삼보는 불,법,승인데, 삼보는 밖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항상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상대적 경계가 끊어진 자리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너와 나의 분별 의식 없는 상태가 부처이기에 불보입니다. 공명정대하고 정정당당하게 살아가는 마음은 법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인 법을 지키는 것이기에 법보입니다.
항상 청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승보입니다.
우리는 보살의 세 가지 속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첫째, 불보살을 속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보살의 원력대로 실천하는 삶입니다.
둘째, 일체 중생을 속이지 않는 삶. 나와 더불어 함께 하고 있는 인연 있는 모든 분을 통털어 사람뿐 아니라 축생까지도 속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불보살 가르침대로 실천이 안 되는 것은 중생심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웃과 친척을 속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조스님께서는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또한 교학에 있어서 계정혜의 삼학도를 해석에 있어서, 신수 스님은 계행은 계를 통해서 몸이 청정하고 선정을 통해서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마음을 밝힌 다음에 무명이 아닌 지혜를 밝혀서 본래 존재의 실상을 깨달아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육조스님께서는 마음이 올곧은 것이 계요, 마음이 본래 산란하지 않은 것이 정이다.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본래 산란하지 않고 본래 어리석지 않는 것이 바로 혜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번뇌망상이 일어난다고 하는 그 자체가 없는 상태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육조스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불교에 전해져서 조계종이 만들어졌고 소의 경전을 금강경으로 받들며 한순간에 바로 깨닫는 길인 '돈오돈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요즘 설악산에 단풍이 곱다합니다. 두 달만 있으면 한해가 마감되는데 하루하루를 헛되지 않고 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단풍을 보며 아름답다고 하듯 우리의 모습도 날이 가고 나이가 들수록 아름답고 자비롭고 넉넉한 덕을 가지고 있고 모습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낙엽의 모습을 아릅답다고 하듯이 우리도 황혼에 접어들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해야합니다.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새로운 생을 맞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쫒기듯 살아가지 말고 우리가 가져가는 것은 지은 업만 가져가는 것이니 소홀 했던 것을 챙겨서 가을을 맞이하면서 열심히 살아야합니다.
오늘 저희는 육조스님의 사상을 받들어 우리 종단이 이어가듯이 금강경을 중심으로 해서 그 사상을 보이고 네 가지 마음에 머물면서, 육조스님이 강조했던 '심지무비 자성계(心地無非 自?戒)' 마음에 거리낌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자기 자성계라는 사실을 알고 성실하고 헛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벽암록에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올 오늘이다'. 오늘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름답고 멋지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많은 세월 속에서 별일 아닌 것에 신경 쓰고, 남의 일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자신은 챙기지도 못하면서.
어느 조사는 헛되게 사는 것이 도둑질이라고 했습니다.
이 가을에 매일 기도와 정진으로 수행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을 살피고 분수껏 살아 결실의 계절로 만들 것을 간절히 부탁하면서 제 말씀 마칩니다.
성불하십시오.
[출처] 육조 혜능스님의 가르침 '심지무비 자성계(心地無非 自?戒)'|작성자 알아차림
'지혜의 공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아’인데 왜 윤회가 가능할까? (0) | 2020.11.22 |
---|---|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0) | 2020.10.11 |
육바라밀-지혜 (0) | 2020.10.01 |
불교에 있어서 ‘관(觀)’의 의미는 특별하다. (0) | 2020.09.06 |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0) | 2020.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