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삼국유사 - (2) 탑상(塔像)

수선님 2020. 10. 1. 12:44

미륵선화와 미시랑과 진자스님

 

[해제]

신라 사회에서 큰 역할을 했던 화랑과 승려와의 관계를 알려주는 미륵선

화(彌勒仙花) 이야기를 싣고 있는 편이다. 화랑은 진흥왕 때 여자 원화(原

花)로 시작하였으나 둘 사이의 질투로 폐지하였고, 얼마 후에 남자 화랑국

선(花郞國仙)을 받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지왕 때 이르러 흥륜사의 진자

(眞慈) 스님이 미륵불이 화랑으로 세상에 태어나기를 빌었더니 웅천 수원

사에 가면 미륵선화를 만날 수 있으리라 하여 한 소년을 만나고, 서울에 돌

아와 미시(未尸)라는 이름의 그 아이를 찾아 미륵선화임을 확신하고 국왕

에게 추천하여 국선으로 삼았다는 이야기이다. 화랑이 미륵신앙과 관계가

있음을 말해 주는 풍부한 자료를 알려 주는 기록이다. 화랑과 미륵이 결합

된 미륵선화를 말하기 위해 전반부에서는 신라 화랑의 변화 그리고 선을

행하고 공경하며 오상 육예 등을 행하던 역할을 설명하였다. 후반부에서는

화랑이 미륵의 현신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경향을 미시랑을 통해 확인하고

국선이 예의와 교화에 뛰어나 풍류가 세상에 빛났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미시와 미르의 발음상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고려 때 사람들이

신선을 미륵선화라고 하고 중매하는 사람을 미시라고 하는 것들이 미륵보

살의 유풍이라고 하여, 고려 때까지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미륵의 여러 신

앙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인용 자료를 따로 제시하지는 않았고,『삼국사

기』와 같은 자료를 대조하며 설명하였다.

 

[역주]

미륵선화와 미시랑과 진자스님

 

   제24대 진흥왕(眞興王)483)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삼맥종(彡麥宗)이

며,〈혹은 심맥종(深麥宗)484)이라고도 한다.〉양(梁) 대동(大同)485) 6년(540) 경신

년에 즉위하였다. 큰아버지 법흥왕(法興王)486)의 뜻을 흠모하여 한 마음으

로 불교를 받들어 널리 절을 세우고 사람들을 출가시켜 스님이 되게 하였

다.487)

   또 천성이 고상하고488) 신선(神仙)489)을 매우 숭상하여 민가의 낭자(娘

子) 중에 아름답고 고운 사람을 뽑아서 원화(原花)490)로 삼았다. 이는 무리

를 모아 인물을 선발하고 그들에게 효도와 우애, 충성과 신의를 가르치려

한 것으로 이는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큰 요체였다. 이에 남모랑(南毛娘)

과 교정랑(姣貞娘)491)의 두 원화를 뽑아 무리 3,4백 명을 모았다.492) 교정랑

은 남모랑을 질투하여 술 자리를 크게 열어 남모랑에게 마시게 하고 취하

게 되자 몰래 북천(北川)493)으로 메고 가서 돌을 들어 묻어 죽이니 남모랑

의 무리들이 그가 간 곳을 몰라 슬피 울며 흩어졌다. 그 음모를 아는 사람

이 있어 노래를 지어 마을의 아이들에게 가르쳐 거리에서 노래 부르게 하

니, 그 무리들이 듣고서 그의 시체를 북천에서 찾고 교정랑을 죽였다. 이에

왕은 명을 내려 원화를 폐지하였다.

   몇 년이 지나 왕은 또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494)를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다시 명을 내려 좋은 가문의 남자 중에 덕행

(德行)이 있는 자를 뽑아 고쳐서 화랑(花郞)495)이라 하였다. 처음으로 설원

랑(薛原郞)496)을 받들어 국선(國仙)497)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국선(花郞國

仙)498)의 시초이다.499) 그래서 명주에 비를 세웠다.500)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고쳐 선을 행하게 하고, 윗 사람을 공경하고 아랫 사람에게 온

화하게 하니 오상(五常)501)·육예(六藝)502)·삼사(三師)503)·육정(六正)504)

이 그때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국사(國史)』에는 진지왕(眞智王)505) 대건

(大建)506) 8년(576) 병신년에 처음으로 화랑을 받들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사

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다.]507)

彌勒仙花 未尸郞 眞慈師

第二十四眞興王, 姓金氏, 名彡麥宗〈一作深麥宗〉, 以梁大同六年

庚申卽位. 慕伯父法興之志, 一心奉佛, 廣興佛寺, 度人爲僧

尼.

又天性風味, 多尙神仙, 擇人家娘子美艶者, 捧爲原花. 要聚徒

選士, 敎之以孝悌忠信, 亦理國之大要也. 乃取南毛娘姣貞娘

兩花, 聚徒三四百人. 姣貞者嫉妬毛娘, 多置酒飮毛娘, 至醉潛

舁去北川中, 擧石埋殺之, 其徒罔知去處, 悲泣而散. 有人知其

謀者, 作歌誘街巷小童, 唱於街, 其徒聞之, 尋得其尸於北川

中, 乃殺姣貞娘. 於是大王下令, 廢原花.

累年, 王又念欲興邦國, 須先風月道, 更下令, 選良家男子有德

行者, 改爲花郞. 始奉薛原娘爲國仙, 此花郞國仙之始, 故竪碑

於溟州. 自此使人悛惡更善, 上敬下順, 五常六藝, 三師六正,

廣行於代.[國史 眞智王大建八年庚申始奉花郞, 恐史傳乃誤.]

483) 진흥왕(眞興王):신라 제24대 왕. 재위 540~576. 백제의 땅이었던 한강 유역의

      요충지를 획득하고, 백제 성왕을 전사시켰다. 이어 대가야를 평정하고, 창녕에

     서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에 이르는 땅을 새로 개척하였다. 4-1 주8) 참조.

484) 종(宗)은 존칭어미이다. 삼맥은 사미(沙彌)의 음역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관련

     하여『삼국유사』권3 흥법「아도기라」항목의 주에 승려를 가리켜 우리말로 삼

     마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삼마 또한 삼맥과 통한다. 이때 삼마는 불교

     이전의 종교전문가를 가리키는 것이다. 울주 천전리(川前里)서석(書石) 기미년

     추각명(539)에 진흥왕은 심맥부지(深麥夫知)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485) 대동(大同):양(梁) 무제(武帝)의 연호. 535~546년. 법흥왕 22~진흥왕 7년.

486) 법흥왕(法興王):신라 제23대 왕. 514~540년 재위. 병부(兵部)를 설치하여 군사

     권을 확립하고,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527년에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본가야(本伽倻)를 병합하여 낙동강 유

     역을 확보하였다. 4-3 주80) 참조.

487)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삼국사기』권4 신

     라본기 진흥왕조에, 5년에 흥륜사를 완성하고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여 부처를 받들도록 하였으며(許人出家爲僧尼奉佛), 14년에 황룡사

     를 건립하기 시작하고 27년에는 기원사와 실제사를 건립하였으며,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한 마음으로 불법을 받들어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려 옷을 입고 스

     스로 백운이라 부르며 생애를 마쳤고 왕비 또한 이를 따라 비구니가 되어 영흥

     사에서 지냈다(王幼年卽位, 一心奉佛, 至末年祝髮, 被僧衣, 自號法雲, 以終其身. 王

     妃亦効之爲尼, 住永興寺.)라고 하였다.

488) 원문의 풍미(風味)는 느긋하고 고상하며 풍류적인 사람을 말한다.

489) 신선(神仙):신선은 원래 도가(道家)에서 불로장생(不老長生)의 기술을 얻어 변

     화자재(變化自在)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신선은 도가

     의 신선의 의미보다는 산천에서 유람하고 가무를 통해 종교적 행사를 하는 신

     라 고유의 수행 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화랑을 국선(國仙), 화

     랑도를 풍월도(風月道), 풍류도라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490) 원화(原花):『삼국사기』에는 원화(源花)로 되어 있다. 처음에 무리를 모아 유람

     하며 행의를 보아 천거하여 등용하고자 남모와 준정의 미녀 두 사람을 뽑아 무

     리 3백명을 모았는데 서로 투기하여 죽이기에 이르러 후에 미모의 남자를 꾸며

     화랑이라 하였다고 하였다.(“始奉源花, 初君臣病無以知人, 欲使類聚羣遊, 以觀其行

     義, 然後擧而用之. 遂簡美女二人, 一曰南毛, 一曰俊貞, 聚徒三百餘人. 二女爭娟相妬,

     俊貞引南毛於私第, 强勸酒至醉, 曳而投河水以殺之. 俊貞伏誅, 徒人失和罷散. 其後更

     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

     水, 無遠不至.『삼국사기』권4 진흥왕 37년 봄)

491) 교정랑(姣貞娘):『삼국사기』에는 준정(俊貞)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4 진흥왕

     37년)

492) 이 기사는 화랑도가 처음에는 두 개의 조직과 두 명의 화랑으로 이끌어졌음을

     보여준다. 특히 두 명의 여인들이 이끄는 화랑조직은 6부를 둘로 나누어 왕녀 2

     인으로 하여금 길쌈놀이를 이끌게 하였던 가배풍습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493) 북천(北川):신라 왕경의 북쪽으로 흐르는 강으로 지금의 경주 보문단지 쪽에

     서 중심가 북부를 돌아 흘러 형산강(西川)으로 들어간다. 알천(閼川)이라고도

     하였다.

494) 풍월도(風月道):화랑도(花郞道)를 말한다. 신라에서 화랑도를 말할 때 풍류(風

     流), 풍월(風月)의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는데, 예를 들면 최치원의 「난랑비서(鸞

     郞碑序)」에 화랑도를 말하면서 “나라에 깊고 오묘한 도가 있어 풍류라고 한다.

     가르침의 연원을 말하는 것은 선가 사서에 자세히 실려 있다.”(國有玄妙之道, 曰

     風流. 說敎之源, 備詳仙史.)라 한 것이라든지, 화랑 죽지랑(竹旨郞)에 관한 기사에

     서 ‘풍류황권(風流黃卷)’이라는 말을 쓴 것이라든지(『삼국유사』권2 기이 효소왕),

    『삼국사기』검군(劍君)전에서 ‘풍월지정(風月之庭)’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삼

     국사기』권48 열전 검군) 등이 그렇다. 원래 풍류는 산수 문학과 신선 취미를 말

     하는 것이었는데, 화랑도가 산수를 유람하고 가무를 하며 도를 닦는 행위를 이

     에 비교하여 사용하였던 말로 생각된다.

495) 원본의 랑(娘)은 랑(郞)의 잘못으로 생각된다. 바로 다음 줄에는 화랑(花郞)이

     라 하였다. 화랑은 신라시대의 청소년 조직으로서 군사집단으로서의 기능과 교

     육집단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조직은 진골귀족 출신의 화랑 1명과 지도 역할을

     맡는 승려와 일반귀족과 평민 출신의 다수의 낭도로 구성되어, 신라 사회의 활

     성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496) 설원랑(薛原郞):진흥왕 때 활동한 최초의 화랑. 설을 성씨로 보는 견해도 있지

     만 설씨는 진골이 아니기 때문에 화랑이 될 수 없고, 일반적으로 화랑을 부르는

     명칭이 죽지랑처럼 이름 두 자를 쓰고 있으므로 화랑 설원이라고 보아야 할 것

     이다. “사내기물악은 원랑의 무리가 만들었다.”(思內奇物樂, 原郞徒作也.『삼국사

     기』권32 악지 會樂 이하)는 기록의 원랑은 설원랑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497) 국선(國仙):화랑에 대해『삼국사기』에서는 화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삼

     국유사』에서는 화랑이라는 표현도 썼지만 국선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였다.

     김유신(金庾信)에 대해 각기 화랑과 국선으로 표현한 것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8세기 초 성덕왕 때 김대문(金大問)이 지은『화랑세기(花郞世記)』나 8세기

     후반 혜공왕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당 고음(顧愔)의『신라국기(新羅國記)』에

     는 화랑이라고 쓰고 있어 신라 당시에는 화랑이라는 표현이 주로 쓰였던 것으

     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화랑의 유풍을 언급하면서 선랑(仙郞)이나 국선이라

     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를 토대로 신라말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화랑과 신선

     사상이 윤색되어 국선이라는 표현이 나타났다고 보기도 하지만,『삼국유사』에

     보이는 국선의 표현이 신라의 화랑이라는 표현을 모두 바꾸어 부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신라 때부터 국선의 표현이 있었을 가능성도 많다.

498) 화랑국선(花郞國仙):‘화랑국선’이라고 합쳐 부른 말이라기보다는 화랑 또는 국

     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499) 『삼국유사』에서는 화랑의 제정을 진흥왕대라 하고 있으나『삼국사기』는 이를

     진흥왕 37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삼국사기』에서 이보다 먼저인 진흥왕 23년

     에 이미 이전에 벌써 화랑으로 봉해졌던 사다함(斯陀含)이 가야정벌에 종군한

     것으로 되어 있고,『삼국사절요』와『동국통감』에는 진흥왕 27년에 국선에 봉해

     진 백운(白雲)의 이야기가 나온다.『삼국유사』는 진흥왕 때 원화와 화랑의 제정

     사실을 차례로 서술하고 그 정확한 시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이 기사의 끝에서

     일연은 주를 달아 진지왕 즉위년(576년, 진흥왕 37년)에 화랑이 시작되었다는

     사전(史傳)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500) 명주(溟州):지금의 강원도 강릉지방. 화랑과 명주 지방과의 관계는 상당히 깊

     다.『삼국유사』권3 탑상 백률사 항목에 화랑 부례랑이 안상과 함께 금란(金蘭)

     에서 노닐다 북명(北溟)에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말의 문인인 이색(李穀)

     은『동유기(東遊記)』에서 총석정의 사선봉(四仙峯), 금란굴, 삼일포의 석굴과 사

     선정(四仙亭), 영랑호, 경포대, 한송정, 월송정 등의 땅이 화랑의 유람지라는 전

     설이 있다고 소개하고, 이 지역에 있었던 비(碑)들이 신라 때 화랑들이 세운 것

     이 아닐까 추측하였다. 이 외에도『동국여지승람』, 『지봉유설(芝峰類說)』 등에

     화랑과 명주지방과의 깊은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화랑의 유람지로서 알려지고

     있는 곳은 명주지방을 비롯한 동해안 각지(특히 금란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 금

     강산, 경주의 남산, 울주군 천전리 등이 있다. 화랑의 유람은 전사로서의 단련일

     뿐 아니라 수호신을 만난다든지 하는 종교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화랑의 유람

     지로 알려져 있는 금란굴과 삼일포 등은 그 지역사람들에게는 신령한 곳, 또는

     불보살이 거주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듯이 화랑의 유람지는 신령스러운 명승지

     라 할 수 있다.

501) 오상(五常):유교 윤리의 근본을 이루는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로 인

     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말한다.

502) 육예(六藝):고대 중국의 기본 교육 과목으로 예의(禮)·음악(樂)·궁술(射)·마

     술(御)·서도(書)·수학(數)을 말한다.

503) 삼사(三師):제왕을 보좌하는 최고 관직인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

      를 가리킨다.

504) 육정(六正):신하로서 지켜야 하는 6가지의 올바른 도리 또는 그것을 갖춘 바른

     신하로 성신(聖臣)·양신(良臣)·충신(忠臣)·지신(智臣)·정신(貞臣)·직신(直

     臣)을 말한다.

505) 진지왕(眞智王):신라의 제25대 왕. 재위 576~579. 성 김씨, 이름은 사륜(舍輪)

     또는 금륜(金輪). 진흥왕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사도부인(思道夫人). 비(妃)는

     오공(烏公)의 딸 지도부인(知道夫人).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이 572년(진흥

     왕 33)에 죽었기 때문에 진흥왕에 이어서 즉위하였다. 즉위하던 해(576년)에 거

     칠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여 국정을 맡겼고, 재위 4년 만에 정사가 어지럽고 주색

     에 빠졌다(政亂荒淫)는 이유로 화백회의의 결정에 따라 폐위되었다. 이후 동륜

     태자의 아들인 진평왕이 즉위하여 선덕왕과 진덕왕까지 이어갔으나 그 다음에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여 이후 왕계를 이어감으로써 무

     열왕계(武烈王系)의 시조가 되었다.

506) 대건(大建):진(陳) 선제(宣帝)의 연호. 569~582년. 진흥왕 30~진평왕 4년.

507)『삼국사기』에는 진지왕 즉위년이기도 한 진흥왕 37년 봄 항목에서 원화 제도

     에서 시작하여 중간의 폐지 그리고 막연히 그후(其後) 화랑을 창설하였다고 하

     였다.(『삼국사기』권4 진흥왕 37년 봄) 그리고 김대문의『화랑세기』, 최치원의

    「난랑비서」, 영호징의 『신라국기』에 나오는 화랑 기사를 열거한 후에 안홍의 귀

     국 사실을 수록하고 이어 8월에 왕이 돌아갔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따라서 진

     지왕 즉위년에 화랑을 창설했다는 이 기록이 『삼국사기』를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다.

 

   진지왕대가 되어 흥륜사(興輪寺)508)의 진자(眞慈)스님〈혹은 정자(貞慈)라고

한다〉이 매번 금당 주존인 미륵상509) 앞에 나가 소원을 빌며 맹세하기를 “원

컨대 우리 부처님께서510) 화랑이 되어 세상에 나타나시어 제가 항상 얼굴

을 가까이에서 뵙고 받들어 모시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511) 그 정성스

럽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독실해졌다. 어느날 저녁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대가 웅천(熊川)512)〈지금의 공주(公州)〉의 수

원사(水源寺)513)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514)를 볼 수 있으리라.”고 하였

다.515) 진자가 꿈에서 깨어 놀랍고도 기뻐서 그 절을 찾아 열흘 걸리는 길

을 가는데 한 걸음에 한번 씩 예를 올리며 갔다. 그 절에 당도하자 문 밖에

한 소년이 있었는데, 매우 곱고 어그러짐이 없고 어여쁜 눈매를 하고는 맞

이하였다. 작은 문으로 인도하여 맞이하여 객실에 다다르니 진자가 한편으

로 올라가고 한편으로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평소에 잘 모르는데

어찌하여 이같이 은근하게 대접합니까?” 하니 소년이 말하기를 “저도 서울

사람으로 스님이 먼 길을 걸어 오심을 보고 위로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조금 있다가 문을 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진자는 그저 우연한 일

일 뿐이라고 하여 크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다만 절의 스님에게 지난 밤

의 꿈과 이곳에 온 뜻을 이야기하였다.

   또 말하기를 “잠시 말석에516) 앉아 미륵선화를 기다리고 싶은데 어떻겠

습니까?” 하였다. 절의 스님이 진자가 뜻은 제멋대로이나 그 은근하고 정

성스러운 태도를 보고 말하기를,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예로부터 현인과 철인이 머물러 살아서 감응이 많은데 어찌 그 곳

에 가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진자가 그의 말을 따라 산 아래까지 갔더

니 산신령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으며 말하기를, “여기에 와서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하니 진자가 “미륵선화를 뵙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노

인이 말하기를, “저번에 수원사(水源寺)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뵈었는

데 다시 와서 무엇을 구합니까?”라고 하였다. 진자가 듣고는 땀이 나도록

놀라서 빨리 본 절로 돌아왔다.

   한 달 남짓 있다가 진지왕이 그 소식을 듣고는 진자를 불러 그 연유를 물

어 말하기를, “낭(郞)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하였다니 성인은 거짓말

을 하지 않을텐데 어찌 성 안에서 찾지 않소?” 하였다. 진자가 임금의 뜻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두루 마을을 다니면서 그를 찾았다. 한 남자 아이가

화장을 하고 장신구를 갖추고 용모가 수려하였는데517) 영묘사(靈妙寺)518)

의 동북쪽 길가의 나무 아래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519) 놀고 있었다.520)

진자가 그를 만나 보고 놀라 말하기를 “이가 미륵선화입니다” 하였다. 다가

가서 묻기를 “낭(郞)의 집은 어디에 있으며 성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다. 낭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의 이름은 미시(未尸)인데, 어려

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가마에 태우고 들어와서 왕에게 뵈니 왕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으로 삼았다.521)

   그가 자제들을 화목하게 하고 예의와 덕행으로 가르침이 보통과 달랐고

풍류(風流)가 세상에 빛났다. 거의 7년 쯤 되어 갑자기 간 곳이 없었다. 진

자가 슬퍼하여 그를 생각함이 매우 심했으나 그의 자비로운 혜택을 입었고

그의 맑은 교화를 친히 받들었기에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고칠 수 있어

서 정성껏 도를 닦았다. 만년에 그 또한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하였다.

及眞智王代, 有興輪寺僧眞慈〈一作貞慈也〉, 每就堂主彌勒像前,

發願誓言,“ 願我大聖化作花郞, 出現於世, 我常親近晬容, 奉

以周旋.” 其誠懇至禱之情, 日益彌篤, 一夕夢有僧, 謂曰, “汝

往熊川〈今公州〉水源寺, 得見彌勒仙花也.” 慈覺而驚喜, 尋其

寺, 行十日程, 一步一禮. 及到其寺, 門外有一郞, 濃纖不爽,

盼倩而迎. 引入小門, 邀致賓軒, 慈且升且揖曰,“ 郞君素昧平

昔, 何見待殷勤如此?” 郞曰,“ 我亦京師人也. 見師高蹈遠屆,

勞來之爾.” 俄而出門, 不知所在. 慈謂偶爾, 不甚異之, 但與

寺僧, 叙曩昔之夢興來之之意.

且曰, “暫寓下榻, 欲待彌勒仙花, 何如?” 寺僧欺其情蕩然, 而

見其懃恪, 乃曰, “此去南隣有千山, 自古賢哲寓止, 多有冥感,

盍歸彼居?” 慈從之, 至於山下, 山靈變老人出迎曰,“ 到此奚

爲?” 答曰,“ 願見彌勒仙花爾.” 老人曰,“ 向於水源寺之門外,

已見彌勒仙花, 更來何求?” 慈聞卽驚汗, 驟還本寺.

居月餘, 眞智王聞之, 徵詔問其由, 曰,“ 郞旣自稱京師人, 聖

不虛言, 盍覓城中乎?” 慈奉宸旨, 會徒衆, 遍於閭閻間, 物色

求之. 有一小郞子, 斷紅齊具, 眉彩秀麗, 靈妙寺之東北路傍

樹下, 婆娑而遊. 慈迓之驚曰,“ 此彌勒仙花也.” 乃就而問曰,

“郞家何在? 願聞芳氏.” 郞答曰,“ 我名未尸, 兒孩時爺孃俱歿,

未知何姓.” 於時肩輿而入見於王, 王敬愛之, 奉爲國仙.

其和睦子弟, 禮義風敎, 不類於常, 風流耀世. 幾七年, 忽亡所

在, 慈哀懷殆甚, 然飮沐慈澤, 昵承淸化, 能自悔改, 精修爲道.

晩年亦不知所終.

508) 흥륜사(興輪寺):경상북도 경주시 사정동에 있던 신라 최초의 절. 신라에 불법

     을 전한 아도(阿道)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경주에 세워진 오래 전부터 불교

     와 인연이 있던 일곱 개의 절가운데 첫 번째로 꼽히고 천경림(天鏡林)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527년 이차돈의 순교 이후 법흥왕이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5년

     (544)에 완성되었다. 신라 불교의 전래와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열 분을 기리

     는 상을 흥륜사 금당에 만들어 봉안하였다. 4-11 주260) 참조.

509) 미륵상:미륵불상. 미륵은 브라만 집안에서 출생하여 뒤에 부처님의 제자가 되

     어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하여 보살로서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하며 도솔천(兜

     率天)에 살고 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여러 중생을 제도하고자 처음 발심할 때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여 이로 인해 자씨(慈氏)보살로 부른다. 석존께서 미륵

     에게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였는데 그 수명이 4천세(인간의 시간으로는 약 57억

     6천만년)가 될 때 장차 도솔천에서 이 땅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

     불하고 삼회(三會)에 걸쳐 설법하여 각각 96억, 94억, 92억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런 경설에 따라 미륵신앙은 미륵보살이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

     나기를 기원하는 미륵상생 신앙과, 미륵이 부처가 되어 이 땅에 내려와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미륵하생 신앙의 두 가지 신앙이 있게 된다. 미륵신앙은 『미륵상

     생경(彌勒上生經)』·『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의 세

     경전이 중심이 된다.

510) 원문의 대성(大聖)은 흔히 부처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미륵불을 가리킨다.

511) 미륵불이 화랑으로 나타날 것을 기원하는 이 내용은 화랑과 불교와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김유신이 화랑 시절 자신의 낭도를 용화향도(龍華

     香徒)라고 불렀던 것과(『삼국사기』 권41 열전 金庾信) 함께 화랑과 미륵신앙과의

     연관성을 잘 보여준다.

512) 웅천(熊川):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한성(漢城)에 이은 백제의 두 번째 수도였

     다. 백제가 망한 뒤 당나라가 이 곳에 한때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는데 신라가

     이를 빼앗았고, 신문왕 6년(686)에 웅천주(熊川州)를 처음 설치하였다. 그 뒤 경

     덕왕 16년(757)에 지명을 모두 고칠 때 웅주(熊州)로 되었으나, 그 뒤에도 웅천

     주의 명칭은 계속 사용되었다. 757년 개편 당시 웅주는 1소경과 13개군, 29개현

     을 관장하였으며 주에 직속되는 현이 2개 있었다. 이곳은 백제의 중심 지역 중

     하나이므로 양국이 대립 상태에 있던 진지왕 때 신라 승려가 백제 사찰에 다녀

     가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견해가 있다.

513) 수원사(水源寺):충청남도 공주시 동쪽인 월성산에 있던 절.『신증동국여지승

     람』에 수원사(水原寺)라고 한 절이 이 수원사로 추정된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17 公州牧 佛宇) 이곳에는 절터가 남아 있지만 이 절터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통일신라시대 말기 이전의 유물이 없어 보다 넓은 범위에서 수원사의 자취를

     찾아야 한다고 한다.

514) 미륵선화(彌勒仙花):미륵은 미륵불 또는 미륵보살을 말한다. 선화는 화랑의 다

     른 이름이다. 따라서 이 미륵선화라는 명칭은 화랑이 불교와 도교의 복합적 사

     상 배경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화랑과 미륵과의 관계는 특히 밀접

     하여 많은 사례들을 남기고 있다. 죽지랑은 그 부모가 죽지령의 북쪽 봉우리에

     석미륵을 봉안하여 생겨났으며, 화랑에서 활동하던 월명이 미륵에게 도솔가를

     지어 이변을 사라지게 했으며, 김유신의 화랑도 이름이 미륵이 성불한다는 나

     무인 용화수(龍華樹)에서 딴 용화향도라고 하였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515) 신라 승려가 미륵의 화랑 현신을 백제 영역인 공주에서 찾았다는 이 이야기는

     백제의 미륵신앙이 성행하여 신라에까지 그 영험이 전해지자 신라인들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516) 원문의 하탑(下榻)은 말석(末席)이라는 뜻이다.

517) 남자 화랑이 화장을 하고 장신구를 다는 등 여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이 기사는 화랑이 샤먼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518) 영묘사(靈妙寺):영묘사(零妙寺)라고도 한다. 신라에 있었다는 과거불 시대 칠

     처가람(七處伽藍)의 하나로 꼽히는 절로서, 신라 선덕왕 때 창건되었다. 조선시

     대에 봉덕사가 폐사되자 봉덕사에 있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을 1460년

     에 이 절로 옮겨왔다고 하는데, 현재 정확한 절터는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경주

     시 성진리 서천가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 곳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근래에 현

     재 흥륜사라고 재건한 절터에서 ‘영묘(靈廟)’가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면서 현

     지의 향토사가들은 이곳을 영묘사지로 추정하고 있다. 영묘사는 신라 때 왕실에

     의해 건립된 사원에 설치된 일반 관부로 불교계에 대한 승정기구로서의 통제적

     기능과 왕실의 원당(願堂)으로서의 봉사(奉祀) 기능을 하던 성전사원(成典寺院)

     이 설치된 주요 사찰이었다.(『삼국사기』 권38 잡지 職官 상 成典寺院)

519) 원문의 파사(婆娑)는 이리저리 거닌다는 뜻이다.

520) 이는 미륵보살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정각(正覺)을 이룬다는 설화와 연관

     을 보이며, 고유의 수목신앙과의 연관도 생각된다. 세계의 중심이며 신의 세계

     와 교통할 수 있는 존재로서 세계수(Cosmic Tree)에 대한 신앙은 세계 각지에 퍼

     져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혁거세와 알지의 탄생이 나무와 관련이 있는 데서

     이런 연관성을 볼 수 있다.

521) 화랑의 개편 제정이 진흥왕대에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화랑과 미륵신앙의

     결합을 의미하는 설화가 여럿 알려진 것이 주목된다. 진흥왕과 진지왕대 왕실

     은 전륜성왕설화를 수용하여 왕권을 수식하고, 귀족의 자제들인 화랑은 미륵을

     상징하여 신라 불국토설을 이루어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진지왕은 귀족들

     에 의해 폐위당하고, 이어 즉위한 진평왕은 왕실을 석가족으로 수식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미(未)는 미(彌)와 소리가 서로 비슷하고 시(尸)

는 역(力)과 모양이 비슷하므로 이에 그 비슷한 것을 빌어서 수수께끼처럼

한 것이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라 이

땅과 인연이 있었으므로 때때로 나타나 보인 것이다. 지금 나라사람들이

신선(神仙)을 미륵선화라고 하며 무릇 사람들을 중매하는 사람522)을 미시

(未尸)라고 하는 것은 모두 미륵보살523)의 유풍이다. 길 가의 나무는 지금

견랑(見郞)이라 하고 또 우리 말로는 사여수(似如樹)라 한다. [인여수(印如

樹)라고도 한다.]

   찬한다.

   아름다운 자취 찾아 걸음마다 모습 우러르니

   도처에 심은 것이 한결같은 공덕일세.

   문득 봄이 가고 찾을 곳 없더니

   누가 알았으랴 잠깐 사이 상림524)이 붉을 줄을.

說者曰,“ 未與彌聲相近, 尸與力形相類, 乃託其近似而相謎

也.” 大聖不獨感慈之誠款也. 抑有緣于玆土, 故比比示現焉.

至今國人稱神仙曰彌勒仙花, 凡有媒係於人者曰未尸, 皆慈氏

之遺風也. 路傍樹, 至今名見郞, 又俚言似如樹[一作印如樹].

讚曰 尋芳一步一瞻風, 到處栽培一樣功. 羃地春歸無覓處, 誰

知頃刻上林紅.

522) 사람 사이의 중매자로 보기도 하고, 신과 인간 사이에서 매개하는 자로 보는 견

      해도 있다.

523) 자씨(慈氏)는 미륵보살을 말함. 미륵은 브라만 집안에서 출생하여 뒤에 부처님

     의 제자가 되어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하여 보살로서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하

     며 도솔천(兜率天)에 살고 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여러 중생을 제도하고자 처

     음 발심할 때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여 이로 인해 자씨(慈氏)보살로 부른다.

     석존께서 미륵에게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였는데 그 수명이 4천세(인간의 시

     간으로는 약 57억 6천만년)가 될 때 장차 도솔천에서 이 땅에 내려와 용화수(龍華

     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삼회(三會)에 걸쳐 설법하여 각각 96억, 94억, 92억 중생

     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런 경설에 따라 미륵신앙은 미륵보살이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미륵상생 신앙과, 미륵이 부처가 되어 이 땅에

     내려와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미륵하생 신앙의 두 가지 신앙이 있게 된다.

524) 상림(上林):지금의 섬서성 서안시(西安市) 서쪽에 있던 중국 진한(秦漢)시대의

     궁궐. 진 시황제가 처음 만들고 한 무제가 증축한 것으로 그 안에 정원 36개, 궁궐

     12개, 관(觀) 25개 등을 만들어 천하의 진귀한 동식물을 모아 두었다고 한다. 이를

     따라 천자의 정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신라의 궁궐을 말한다.

 

남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해제]

창원 지역에 있는 백월산에서 수도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두 성인에 대

한 이야기이다. 백월산은 바다 건너 중국의 연못에 비친 사자바위가 있다

는 특별한 산이라고 전해져왔다. 근처 마을에 살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두 사람은 성인이 되자 출가하여 수련하였다. 두 사람은 각각 처자를 데리

고 절에서 살면서 일하며 수련하고 지내다가 마침내 세상을 버리고 백월산

에 들어가 판잣집과 돌무더기집을 지어 살면서 각각 미륵불과 미타불을 구

하여 수행하였다. 그러기를 3년만에 아름다운 낭자로 화현한 관음의 시험

을 거쳐 청정한 수행을 강조한 달달박박보다 대중의 뜻을 따랐던 노힐부득

이 관음의 도움으로 먼저 미륵불로 현신성도하였고 달달박박도 뒤따라 미

타불로 현신성불하였다. 성불한 두 현인은 소식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법요를 설하고 하늘로 갔다. 709년 성덕왕 때 일어났던 이 일을 기리기 위

해 경덕왕이 757년부터 766년에 백월산남사를 창건하여 금당에는 미륵불

상을, 강당에는 미타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여 현신성도를 길이 기념하도

록 하였다.

이 이야기는 신라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던 현신성불에 관한

구체적인 신앙 시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일찍이 신라불교 초전부

터 강조해 온 신라불국토 신앙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특히 이

두 사람의 수행자가 출가하였다고는 하지만 처음에 처자를 데리고 일상생

활을 하면서 살았다는 표현은 신라사회에 생활불교가 자연스럽게 수용되

었던 상황을 말해준다. 엄격한 출가생활이 아닌 또 다른 출가자의 삶의 한

유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그리고 미륵과 미타를 구하여 수행하고

성불하였고 후일 금당과 강당에 미륵과 미타를 각각 봉안하였다는 것은 신

라 법상종의 신앙 경향과 같은 것이다. 720년 경의 감산사(甘山寺) 조상 사

례와 8세기 중반의 진표(眞表)의 신행 활동과 비교하면 이들보다 먼저 709

년에 성불 설화가 이루어지고 8세기 중반에 절이 창건되고 불상이 봉안되

어 감산사와 진표의 신앙 사례를 종합하여 보여주는 것과 같은 시점이 된

다. 다만 이 자료는 미륵과 미타의 현신성불에 관음이 결정적인 계기를 제

공한다는 점이 달라서 여러 신앙의 복합적인 양상을 확인해준다.

자료는 「백월산 양성 성도기」를 들고 있으며 곳곳에서 향전과 대비하여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노력을 보이고 있다. 일연은 끝부분에 자신의 의견

을 첨가하여 관음이 두 사람에게 아이를 낳는다는 상황 설정으로 내보인

실마리를 미묘한 뜻이라고 의미 깊게 해석하고 있다. 신라에서 미륵과 미

타와 관음이라는 대표적인 신앙의 복합 양상과 현실성도의 사례를 구체적

으로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역주]

남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백월산양성성도기(白月山兩聖成道記)」에는 “백월산(白月山)525)은 신라

구사군(仇史郡)526)〈옛날의 굴자군(屈自郡)이며 지금의 의안군(義安郡)이다〉의 북쪽

에 있다. 산봉우리가 기이하고 빼어났으며, 그 길이가 수백 리에 벋었으니

참으로 큰 진산(鎭山)이다.” 라고 하였다.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당나라 황제가 일찍이 못을

하나 팠는데, 매월 보름 전날이면 달빛이 밝아지면서 못 가운데에 산이 하

나 생겨났다. 바위가 사자와 같고 은은하게 꽃 사이로 비치는 그림자가 못

가운데에 나타났다. 황제가 화공에게 그 형상을 그리게 하고, 사신을 보내

천하에서 두루 찾게 하였다. (사신이) 해동(海東)에 이르러 이 산을 보니,

큰 사자바위(獅子岩)527)가 있었다. 산의 서남쪽 2보쯤 되는 곳에 삼산(三

山)이 있는데, 그 이름이 화산(花山)〈그 산은 몸체는 하나지만 봉우리가 셋이므로

삼산이라 한다〉으로 그림과 서로 비슷했다. 그러나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

어서, 신 한 짝을 사자바위의 꼭대기에 걸어놓고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었

더니 신발의 그림자가 역시 연못에 나타났다. 황제는 이를 이상히 여겨 산

이름을 백월산이라 지어서 내렸더니〈보름 전에 흰 달의 그림자가 나타나므로 그

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그 후에는 연못 가운데에 그림자가 없었다.”고 하였다.

南白月二聖人 努肹不得 怛怛朴朴

白月山兩聖成道記云, “白月山, 在新羅仇史郡之北〈古之屈自郡,

今義安郡〉. 峰巒奇秀, 延袤數百里, 眞巨鎭也.”

古老相傳云, “昔唐皇帝嘗鑿一池, 每月望前, 月色滉朗, 中有

一山, 嵓石如師子, 隱映花間之影, 現於池中. 上命畵工圖其

狀, 遣使搜訪天下. 至海東見此山, 有大師子嵓. 山之西南二

步許有三山, 其名花山〈其山一體三首, 故云三山.〉, 與圖相近. 然未

知眞僞, 以隻履懸於師子嵓之頂, 使還奏聞, 履影亦現池. 帝

乃異之, 賜名曰白月山〈望前白月影現, 故以名之.〉, 然後池中無影.”

525) 백월산(白月山):경상남도 창원시 북면과 동읍의 경계에 있는 산. 3개의 봉우리

     가 있어 삼산(三山) 또는 화산(花山)이라고 부르는데, 그중 동쪽 봉우리에 사자

     가 누워 있는 모습을 한 사자암(獅子岩)이 있다. 백월산은 창원도호부 북쪽 25

     리 지점에 있고, 사자암은 백월산 남쪽에 있는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수도

     하던 곳이라고 전해 왔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昌原都護府 山川 白月山 및

     古蹟 師子巖)

526) 구사군(仇史郡):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지역. 금관가야 지역이었으나 신라에

     병합되어 구사군 또는 굴자군(屈自郡)이 설치되었다. 통일신라 때는 757년(경

     덕왕 16)에 양주(良州) 관할 내의 의안군(義安郡)으로 이름을 바꾸어 칠제현(漆

     隄縣, 漆吐縣)과 합포현(合浦縣, 骨浦縣)과 웅신현(熊神縣, 熊只縣)의 3개 영현으

     로 구성되었다가 고려에 들어 1018년(현종 9)에 의안군과 3개의 영현이 모두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의 속군·속현이 되었고, 조선에 들어 1408년(태종 8)에

     의안현이 이름을 바꾼 의창현과 회원현을 합쳐 창원부(昌原府)가 되었다.(『삼

     국사기』권34 지리지 義安郡 ;『고려사』권57 지리지 金州 ;『신증동국여지승람』권

     32 昌原都護府)

527) 사자바위(獅子岩):창원도호부 북쪽 25리 지점에 있는 백월산의 남쪽에 있는 바

     위.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왔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昌原都護府 古蹟 師子巖)

 

   이 산의 동남쪽 3천 보쯤 되는 곳에 선천촌(仙川村)이 있는데, 그 마을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노힐부득(努肹夫得)〈득(得)은 등(等)이라고도 쓴

다〉이니 그의 아버지는 월장(月藏)이요, 어머니는 미승(味勝)이었다. 한 사

람은 달달박박(怛怛朴朴)인데 그의 아버지는 수범(修梵)이요, 어머니는 범

마(梵摩)였다.528)〈향전(鄕傳)에 치산촌(雉山村)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두 사람의 이름

은 신라말529)인데, 두 집에서 각각 두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높고 절개가 굳으라는 두 가

지 뜻에서 지은 것이다.〉두 사람은 모두 풍채와 골격이 범상하지 않았고 속세

를 초월하는 높은 생각이 있어 서로 벗으로서 잘 지냈다. 나이 모두 스물이

되자 마을 동북쪽의 고개 밖 법적방(法積房)에 가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

었다.

   얼마 후 서남쪽의 치산촌 법종곡(法宗谷) 승도촌(僧道村)에 옛 절이 있

는데 정신을 수련할 만하다는 말을 듣고, 같이 가서 대불전(大佛田)과 소불

전(小佛田) 두 마을에서 각자 살았다. 부득은 회진암(懷眞庵)에서 살았는

데, 혹은 양사(壤寺)〈지금의 회진동(懷眞洞)에 옛 절터가 있으니 이것이다〉라고 하

였다. 박박은 유리광사(琉璃光寺)530) 〈지금 이산(梨山) 위에 절터가 있으니 이것이

다〉에 살았다. 모두 처자를 데리고 와서 살면서, 산업을 경영하고 서로 왕래

하면서 정신을 수련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도 속세를 떠날 생각은 잠

시도 버리지 않았다. 육신과 세상의 무상함을 관조하고는 서로 말했다. “기

름진 땅과 풍년 든 해는 참으로 좋지만, 옷과 음식이 마음을 따라 생겨서

절로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고, 부녀와 집이 참으로 좋지만, 연

화장세계(蓮花藏世界)531)에서 많은 성인들과 함께 놀고 앵무새, 공작새와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하물며 불도를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

고 참된 것을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얻어야 함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니, 마땅히 얽히고 맺힌 번뇌532)를 벗어버

리고 위 없는 도(無上道)533)를 이루어야 한다. 어찌 풍진(風塵)534)에 빠져

서 세속의 무리들과 다름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드디어 인간 세상을 버리고, 장차 깊은 골짜기에 숨으려고 하였다. 어느

날 밤 꿈에 백호(白毫)535)의 빛이 서쪽에서부터 비추고, 빛 가운데서 금색

의 팔이 드리워 두 사람의 이마를 만져주었다. 잠을 깨어 꿈을 이야기하니

두 사람이 서로 꼭 같으므로 함께 오랫동안 감탄하였다.

   드디어 백월산 무등곡(無等谷)〈지금의 남동(南洞)이다〉으로 들어갔다. 박박

(朴朴)스님은 북쪽 고개의 사자암을 차지하고 판잣집 여덟자 방을 지어 살

았으므로 판방(板房)이라 하였다. 부득(夫得)스님은 동쪽 고개의 돌무더기

아래 물 있는 곳을 차지하고 역시 사방 여덟자 방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뇌

방(磊房)이라 하였다.〈마을에 전하는 기록에는 부득이 산 북쪽 유리동(瑠璃洞)에 살았

는데 지금의 판방이고, 박박은 산 남쪽 법정동(法精洞)의 뇌방에 살았다 하니 이 기록과는

서로 반대된다. 지금 살펴보면 마을에 전하는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각각 다른 암자

에 살면서, 부득은 부지런히 미륵불(彌勒佛)536)을 구하였고, 박박은 아미타

불(阿彌陀佛)537)을 예배하고 염송(念誦)하였다.

山之東南三千步許, 有仙川村, 村有二人. 其一曰努肹夫得〈一

作等〉, 父名月藏, 母味勝. 其一曰怛怛朴朴, 父名修梵, 母名梵

摩〈鄕傳云雉山村, 誤矣. 二士之名方言, 二家各以二士, 心行騰騰苦節二義名之

爾〉. 皆風骨不凡, 有域外遐想, 而相與友善. 年皆弱冠, 往依村

之東北嶺外法積房, 剃髮爲僧.

未幾聞西南雉山村法宗谷僧道村有古寺, 可以栖眞, 同往大佛

田小佛田二洞, 各居焉. 夫得寓懷眞庵, 一云壤寺〈今懷眞洞有古

寺基, 是也〉. 朴朴居瑠璃光寺〈今梨山上有寺基, 是也〉. 皆挈妻子而

居, 經營産業, 交相來往, 棲神安養, 方外之志, 未常暫廢. 觀

身世無常, 因相謂曰,“ 腴田美歲良利也, 不如衣食之應念而

至, 自然得飽煖也. 婦女屋宅情好也, 不如蓮池華藏千聖共遊,

鸚鵡孔雀以相娛也. 況學佛當成佛, 修眞必得眞. 今我等旣落

彩爲僧, 當脫略纏結, 成無上道. 豈宜汨沒風塵, 與俗輩無異

也?”

遂唾謝人間世, 將隱於深谷. 夜夢白毫光自西而至, 光中垂金

色臂, 摩二人頂. 及覺說夢, 與之符同, 皆感嘆久之.

遂入白月山無等谷〈今南洞也〉. 朴朴師占北嶺師子嵓, 作板屋八

尺房而居, 故云板房. 夫得師占東嶺磊石下有水處, 亦成方丈

而居焉, 故云磊房〈鄕傳云, 夫得處山北瑠璃洞, 今板房. 朴朴居山南法精洞

磊房, 與此相反. 以今驗之, 鄕傳誤矣〉. 各庵而居, 夫得勤求彌勒, 朴朴

禮念彌陁.

528) 여기서는 미륵불을 구하여 수도한 부득의 부모 이름은 월장(月藏)과 미승(味勝)

     이고, 아미타불을 구하여 수도한 박박의 부모 이름은 수범(修梵)과 범마(梵摩)

     라고 하였다. 경전에 의하면 미륵의 부모는 수범마(修梵摩)와 범마발제(梵摩拔

     提)이고(『彌勒大成佛經』), 미타의 부모는 월산전륜성왕(月山轉輪聖王)과 수승묘

     안(殊勝妙顔)이다(『鼓音聖王陀羅尼經』). 여기에는 경전과 반대로 되어 있다. 이

     편에 인용된 마을에 전하는 기록에는 이들이 수도하기 위해 거처하던 곳을 반

     대로 전하고 있어 기록이 전해 내려오면서 뒤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529) 원문에 방언(方言)이라고 한 것은 당시 신라말을 의미한다.

530) 유리광사(琉璃光寺):경상남도 창원시 백월산(白月山)에 있었던 절.

531) 연화장세계(蓮花藏世界): padmagarbha-lokadhātu. 화장세계(華藏世界), 화

     장계(華藏界)라고도 한다. 비로자나불이 과거에 발원하고 보살행을 닦아 성취

     한 청정장엄세계로서 공덕이 무량하고 광대장엄한 세계를 말한다. 이 세계는

     커다란 연꽃으로 되었는데, 그 속에 모든 국토와 만물을 간직하였기에 연화장

     세계라 한다.『화엄경』화장세계품에 의하면, 수미산 맨 위의 풍륜(風輪)에 향

     수해(香水海)가 있고 그 속에 커다란 연꽃이 있는데, 연화장세계가 그 연꽃 안

     에 있다고 한다. 주위로는 금강륜산(金剛輪山)이 둘러싸고 대지는 금강으로

     이루어져 견고하고 청정하며 평평하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장엄이 있다고 한

     다. 그리고 이 하나하나의 세계에는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가 있다고 한

     다. 연화장세계의 중앙 향수해에서 나는 대연화는 시방세계를 널리 비치는 중

     심이며 부처가 그 안에서 나고 중생이 그 사이를 가득 채워 그 장엄한 구조는

     크고 넓어 끝이 없다고 하였다. 또 『범망경』에 의하면 노사나불이 천개의 잎으

     로 된 연화대에 앉아 있는데, 천 잎 하나하나가 한 세계이며, 거기에 노사나불

     로부터 화현한 천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 앉아 있고, 다시 하나의 세계마다 백

     억의 나라가 있다고 한다.

532) 몸에 얽매인 것:전결(纏結)은 얽히고 맺힌 것 곧 번뇌를 말한다.

533) 위 없는 도(無上道):최상의 비할 데 없는 큰 도인 불도(佛道)를 말한다.

534) 풍진(風塵):바람과 티끌, 곧 어지럽고 시끄러운 세상을 말한다.

535) 백호(白毫): ūrn3 a-laks3 an3 a. 부처님의 상서로운 형상을 상징하는 32상 중의 하

     나로 두 눈썹 사이에 있는 빛나는 가는 털을 가리킨다. 펴면 길이가 한 길이나

     되며 놓으면 오른쪽으로 돌아 말려 소라모양처럼 되는데, 빛깔이 선명한 흰색

     으로 빛나고 깨끗하여 진주와 같다고 한다. 태양의 정중앙과 같아 광명을 발산

     하여 이를 백호광(白毫光)이라 부른다. 중생들이 이 빛을 만나면 모든 업장을 소

     멸하고 몸과 마음이 안락해진다고 한다.

536) 미륵불(彌勒佛): Maitreya. 미륵은 브라만 집안에서 출생하여 뒤에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하여 보살로서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하며

     도솔천(兜率天)에 살고 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여러 중생을 제도하고자 처음

     발심할 때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여 이로 인해 자씨(慈氏)보살로 부른다. 석

     존께서 미륵에게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였는데 그 수명이 4천세(인간의 시간

     으로는 약 57억 6천만년)가 될 때 장차 도솔천에서 이 땅에 내려와 용화수(龍華

     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삼회(三會)에 걸쳐 설법하여 각각 96억, 94억, 92억 중생

     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런 경설에 따라 미륵신앙은 미륵보살이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미륵상생 신앙과, 미륵이 부처가 되어 이 땅에

     내려와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미륵하생 신앙의 두 가지 신앙이 있게 된다. 미륵

     신앙은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미륵성불경(彌

     勒成佛經)』의 세 경전이 중심이 된다.

537)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a-buddha. 무량수불(無量壽佛). 서방 정토(西方淨

     土)에 있으면서 그를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중생들은 모두 서방정토에 태어

     나게 한다는 부처이다. 산스크리트어 원어에 두 가지가 있어 Amitāyus는 무

     한한 수명이라는 뜻으로 무량수(無量壽)로 번역되고, Amitābha는 한량없는

     빛이라는 뜻으로 무량광(無量光)으로 번역된다. 『무량수경』에 따르면 과거 오

     랜 옛날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시대에 한 국왕이 위없는 도심을 내서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이름을 법장(法藏)비구라 하고 부처 아래서 수행하여 48원을

     내고 공덕을 쌓아 아미타불이 되어, 여기서 10만억 불토 떨어진 서방에서 극락

     정토(極樂淨土)을 이루었다. 지금도 설법하고 있으면서 염불하는 이들을 서방

     정토로 왕생하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정토 신앙의 주인공이

     되었다. 중심 경전은 『무량수경(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

     경(阿彌陀經)』의 미타삼부경(彌陀三部經)이 있다.

 

   3년이 채 못된 경룡(景龍)538) 3년(709) 기유년 4월 8일은 성덕왕(聖德

王)539) 즉위 8년이었다. 날이 저물려고 하는데, 나이 스무 살쯤 되고 아름다

운 자태를 한 낭자가 난(蘭) 향기와 사향(麝香)을 풍기면서 갑자기 북암(北

庵)〈향전에는 남암이라고 하였다〉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시를

지었다.

   가는 길에 해가 지니 첩첩 산이 저물고

   길은 막히고 마을은 멀어 이웃도 없네

   오늘 암자에서 자고 가려 하오니

   자비하신 스님께서는 노하지 마소서

   박박은 “난야(蘭若 )540)는 청정함을 지키는 것을 일로 삼으니, 그대가 가

까이 올 곳이 아니오. 갈 길을 이곳에서 지체하지 마시오.” 하고는 문을 닫

고 들어가 버렸다.〈기록에서는 “나는 모든 잡념이 재처럼 식었으니, 혈낭(血囊)541)으로

나를 시험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낭자는 남암(南庵)〈향전에서는 북암이라고 하였다〉으로 가서 또 앞서와 같이

청했다. 부득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디에서 이 밤중에 왔소?” 라고 하였다.

낭자가 대답하기를, “맑고 고요하기가542) 태허(太虛)543)와 같은데, 어찌 오

고 가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대사께서 뜻과 서원이 깊고 장중하며

덕행이 높고 굳다는 것을 듣고 장차 보리(菩提)544)를 이루는 것을 돕고자

합니다.” 하고는 게송(偈頌)545) 한 수를 지었다.

   해는 저물고 산길은 첩첩인데

   가도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소나무 대나무 그늘은 더 깊고

   시냇물 소리는 오히려 새롭네

   묵기를 청함은 길을 잃음이 아니라

   높으신 스님께 길을 알려주려 할 뿐

   원컨대 제 청만 들어주시고

   또 누구냐고는 묻지 마소서

   스님은 이 말을 듣고 놀라 말하기를, “이곳은 부녀가 더럽힐 곳이 아닙니

다만 그러나 중생을 따르는 것도 또한 보살행(菩薩行)546)의 하나입니다. 더

구나 깊은 산골짜기에 밤이 어두우니 어찌 모른 체 할 수 있겠습니까?”라

고 하고는 이에 읍하여547) 맞아들이고 암자 안에 머물게 하였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행동을 가다듬으며 희미한 등불

이 비치는 방에서 편안하게 염불하고 있었다.548) 이윽고 밤이 끝나 가는데

낭자가 불러 말하기를, “제가 불행히도 마침 해산 기운이 있으니, 스님께

서 짚자리를 좀 준비해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부득은 불쌍히 여겨 거절하

지 못하고 불을 밝혀 은은하게 하였더니 낭자가 벌써 해산하고 또 목욕하

기를 청하였다. 부득은 마음 속에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하였으나 가엾

은 마음이 더욱 커져서 또 목욕통을 준비하여 낭자를 그 안에 앉히고 물을

끓여 목욕시켰다. 얼마 후에 통 안의 물에서 향기가 강하게 풍기고 물이 금

빛 물로 변하였다. 부득이 크게 놀라니, 낭자가 말하기를, “우리 스님께서

도 여기에서 목욕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부득이 마지못해 그 말에 따랐더

니, 문득 정신이 상쾌해지고 살결이 금빛으로 변하는 것을 깨달았다. 옆을

보니 문득 한 연화대(蓮花臺)549)가 생겨났고, 낭자는 거기에 앉기를 권하며

말하기를, “나는 관음보살(觀音菩薩)550)인데 (이곳에) 와서 대사(大師)가

대보리(大菩提)를 이루도록 도운 것입니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

았다.

   박박은 생각하기를, “부득이 오늘 밤에 반드시 계를 더럽혔을 것이니 내

가 가서 그를 비웃어주리라.” 하고 이르렀더니 부득이 연화대에 앉아 미륵

존상(彌勒尊像)이 되어 광명을 발하고 몸은 금빛551)으로 치장되어 있는 것

을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숙이고 예를 드리면서 말하기를, “어떻

게 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하니, 부득이 그 연유를 자세히 말하였다. 박박

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는 업장(業障)이 무거워 다행히 대성(大聖)을 만

나고도 도리어 만나지 못한 것이 되었네. 대덕(大德)은 지극히 인자하여 나

보다 먼저 뜻을 이루었으니, 부디 옛날의 약속을 잊지 말고 일을 부디 함

께 했으면 하네.” 하니 노힐이 말하기를, “통에 남은 물이 있으니 목욕할 수

있네.” 하였다. 박박도 목욕을 하였더니 또한 앞서처럼 무량수불(無量壽

佛)552)이 되었고, 두 존상이 서로 엄숙하게 마주 대하였다. 산 아래 마을 사

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참 드

물고 드문 일이다” 라고 하였다. 두 성인은 법요를 설해주고 온몸으로 구름

을 타고 갔다.

未盈三載, 景龍三年己酉四月八日, 聖德王卽位八年也. 日將

夕, 有一娘子年幾二十, 姿儀殊妙, 氣襲蘭麝, 俄然到北庵〈鄕傳

云南庵〉, 請寄宿焉. 因投詞曰,“ 行逢日落千山暮, 路隔城遙絶

四隣. 今日欲投庵下宿, 慈悲和尙莫生嗔.” 朴朴曰,“ 蘭若護

淨爲務, 非爾所取近. 行矣無滯此處.” 閉門而入〈記云, 我百念灰

冷, 無以血囊見試〉. 娘歸南庵〈傳曰北庵〉, 又請如前. 夫得曰,“ 汝從

何處, 犯夜而來?” 娘答曰,“ 湛然與太虛同體, 何有往來? 但

聞賢士志願深重, 德行高堅, 將欲助成菩提.” 因投一偈曰, “日

暮千山路, 行行絶四隣. 竹松陰轉邃, 溪洞響猶新. 乞宿非迷

路, 尊師欲指津. 願惟從我請, 且莫問何人.” 師聞之驚駭, 謂

曰,“ 此地非婦女相汚, 然隨順衆生, 亦菩薩行之一也. 況窮谷

夜暗, 其可忽視歟?” 乃迎揖庵中而置之.

至夜淸心礪操, 微燈半壁, 誦念厭厭. 及夜將艾, 娘呼曰,“ 予

不幸適有産憂, 乞和尙排備苫草.” 夫得悲矜莫逆, 燭火殷勤.

娘旣産, 又請浴. 弩肹慚懼交心, 然哀憫之情有加無已, 又備盆

槽, 坐娘於中, 薪湯以浴之. 旣而槽中之水, 香氣郁烈, 變成金

液. 弩肹大駭, 娘曰, “吾師亦宜浴此.” 肹勉强從之, 忽覺精神

爽凉, 肌膚金色. 視其傍忽生一蓮臺, 娘勸之坐, 因謂曰,“ 我

是觀音菩薩, 來助大師, 成大菩提矣.” 言訖不現. 朴朴謂, “肹

今夜必染戒, 將歸听之.” 旣至, 見肹坐蓮臺, 作彌勒尊像, 放

光明, 身彩檀金. 不覺扣頭而禮曰,“ 何得至於此乎?” 肹具叙

其由, 朴朴嘆曰,“ 我乃障重, 幸逢大聖, 而反不遇. 大德至仁,

先吾著鞭. 願無忘昔日之契, 事須同攝.” 肹曰, “槽有餘液, 但

可浴之.” 朴朴又浴, 亦如前成無量壽, 二尊相對儼然. 山下村

民聞之, 競來瞻仰, 嘆曰, “希有希有.” 二聖爲說法要, 全身躡

雲而逝.

538) 경룡(景龍):당나라 중종(中宗)의 연호. 707~709년. 신라 성덕왕 6~8년.

539) 성덕왕(聖德王):신라 제33대 왕. 재위 702~737년.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왕

     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유학을 장려하고, 재위 기간에 약 43회의 사신을 당

     나라에 파견하였다. 정전(丁田)제를 실시하였고,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신라

     의 판도로 확정하였다. 4-6 주177) 참조.

540) 난야(蘭若 ): aranya. 아란야(阿蘭若 )의 약칭. 출가한 사람이 수행하면서 거처

     하기에 적당한 궁벽하고 조용한 장소를 뜻하는 말로, 뜻에 따라 원리처(遠離處)

     또는 적정처(寂靜處)로 번역하기도 한다. 마을에서 1크로샤( krośa, 俱盧舍, 큰

     소의 울음이나 북 소리가 들리는 거리를 말함. 대략 약3600자 정도의 거리) 떨어

     져 수행에 적합한 공간을 말한다. 곧 출가인과 재가인이 출입하기에 편한 한적

     한 교외에 있는 사원을 말한다. 후대에는 일반적인 사원이나 정사를 아란야라

     고 하기도 하였다.

541) 혈낭(血囊):여자의 음문.

542) 원문의 잠연(湛然)은 맑고 고요한 모양을 가리킨다.

543) 태허(太虛):공허하고 정적한 경지, 곧 우주의 근원을 말한다.

544) 보리(菩提): bodhi. 각(覺)·지(智)·지(知)·도(道)라고 번역한다. 세상의 번뇌

     를 끊고 열반의 지혜를 성취하는 것으로, 부처와 연각(緣覺)·성문(聲聞) 등이

     과보에 따라 얻은 깨달음의 지혜이다.

545) 게송(偈頌): gāthā. 부처가 설한 법문을 서술 형식과 내용에 따라 분류한 9부

     교(九部敎) 또는 12부경(十二部經)의 하나인 가타(伽陀)를 번역하여 게(偈)라 하

     고, 풍송(諷誦)·게송(偈頌) 또는 고기송(孤起頌) 등으로도 번역한다. 넓은 의미

     로는 노래나 성가(聖歌)를 뜻하는데, 좁은 의미로는 교설의 단락이나 경문(經

     文)의 끝에 앞뒤 글과 관련있게 시로 읊어 매듭짓는 것을 말한다. 곧 운문(韻文)

     형태의 글을 말한다. 같은 운문이지만 중송(重頌, 祇夜)이 긴 문장의 내용을 거

     듭 운문으로 설한 것인데 비해 게송은 앞 문장을 그대로 다시 운문으로 읊는 것

     이 아니므로 고기송이라고 구분한다.

546) 보살행(菩薩行):위 없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대승 수행자인 보살이 위로는 깨

     달음을 얻기 위한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자비로 중생을 교화하여 수행하는

     모든 행동을 말한다. 6바라밀을 비롯한 여러 바라밀을 수행하여 미래에 불과

     (佛果)를 성취하려는 수행자가 행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원만한 행

     이다.

547) 읍(揖):손을 맞잡고 예의를 갖추는 인사를 말함.

548) 원문의 염염(厭厭)은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를 의미한다.

549) 연화대(蓮花臺):부처나 보살이 앉는 자리. 연꽃이 더러운 데서 나왔으나 더러

     움에 물들지 않고 청정한 덕을 상징하여 부처나 보살이 혼탁한 중생 세상에 살

     지만 청정한 것을 비유하여 그 자리를 말한다. 『범망경』 같은 경전에서 부처가

     연화대에 앉아 공덕이 한 없이 크고 장엄한 세상을 열어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550) 관음보살(觀音菩薩):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 고

     난에 처한 중생들이 그 이름을 부르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고난에서 구제해

     준다는 데서 유래하여 관음 신앙을 형성하였다. 『화엄경』의 내용에 따라 나라마

     다 우리나라의 낙산처럼 자신의 국토에 관음이 사는 보타락가산을 설정하였다.

     4-12-1 주290) 참조.

551) 단금(檀金)은 염부단금(閻浮檀金)의 약칭으로 금빛을 말한다. 염부단금(

     jambūnada-suvarna)은 향취산(香醉山)과 설산(雪山) 사이를 흘러 염부나무 사이

     를 지나는 강물에서 나는 사금(砂金)인데 이 사금은 윤택하고 적황색을 띠어 금

     가운데서 가장 귀하게 여긴다고 한다. 인도 신화에서 염부강은 강가강의 7개의

     지류 중의 하나라고 했으나 실제로 이 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염부단금은

     수미산 사대주 설화와 함께 상상 속의 이야기로 말해진다.

552) 무량수불(無量壽佛):아미타불(阿彌陀佛)을 번역하여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

     (無量光佛)이라 한다.

 

   천보(天寶)553) 14년(755)554) 을미년에 신라 경덕왕(景德王)555)이 즉위하

여556)〈고기(古記)에는 천감(天鑑)557) 24년 을미년에 법흥왕(法興王)558)이 즉위하였다고

했는데, 어찌 앞뒤의 뒤바뀜이 이보다 심할 수 있을까?〉이 사실을 듣고 정유년(757)

에 사신을 보내 큰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백월산남사(白月山南寺)559)라고

하였다. 광덕(廣德)560) 2년(764)561)〈고기에는 대력(大曆)562) 원년(766)이라 하였는

데 또한 잘못이다〉 갑진년 7월 15일에 절이 완성되었다. 다시 미륵존상을 빚어

금당에 모시고, 편액을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고 하였

다. 또 미타상을 빚어 강당에 모셨는데 남은 금물이 모자라서 두루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미타상에는 역시 얼룩진 흔적이 있다. 그 편액은 ‘현신성도

무량수전(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고 하였다.563)

天寶十四年乙未, 新羅景德王卽位〈古記云, 天鑑二十四年乙未法興卽

位, 何先後倒錯之甚如此?〉, 聞斯事, 以丁酉歲遣使, 創大伽藍, 號

白月山南寺. 廣德二年〈古記云, 大曆元年, 亦誤.〉甲辰七月十五日,

寺成. 更塑彌勒尊像, 安於金堂, 額曰, 現身成道彌勒之殿. 又

塑彌陁像安於講堂, 餘液不足, 塗浴未周, 故彌陁像亦有斑駁

之痕. 額曰, 現身成道無量壽殿.

553) 천보(天寶):당나라 현종(玄宗)의 연호. 742~756년. 신라 경덕왕 원년~15년.

554) 천보 14년 곧 755년은 신라 경덕왕 14년

555) 경덕왕(景德王):신라 제35대 왕. 재위 742~765. 왕권 안정을 위해 한화정책(漢

     化政策)을 시행하고 9주(州)·5소경(小京)·117군(郡)·293현(縣)을 정비하였다.

     754년에 황룡사종을 주조하고, 불국사(佛國寺)와 석불사(石佛寺)와 굴불사(掘佛

     寺) 등을 창건하였다. 4-7 주188) 참조

556) 천보 14년(755)은 경덕왕 14년이 된다. 그러므로 “천보 14년 을미년인 신라 경덕

     왕 14년에”라고 하여 14년을 보완하거나 “천보 14년 을미년에 신라 경덕왕이”

     라고 하여 즉위를 빼거나 해야 바른 표현이 된다.

557) 천감(天鑑):이 연호는 없는 연호이다. 양 무제가 사용한 천감(天監, 502~519) 연

     호를 잘못 쓴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경우 천감 24년이 아니고 14년이어야

     한다. 법흥왕(法興王)이 즉위한 해는 천감 13년인 514년이므로 천감 14년인 515

     년과 1년의 차이가 있지만,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으로 계산하면 차이가 없어

     진다.

558) 법흥왕(法興王):신라 제23대 왕. 재위 514~540년. 병부(兵部)를 설치하여 군사

     권을 확립하고,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527년에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본가야(本伽倻)를 병합하여 낙동강 유

     역을 확보하였다. 4-3 주80) 참조.

559) 백월산남사(白月山南寺):지금은 남백사(南白寺) 유적으로 불린다. 경남 창원시

     북면 북계리 백월산 북쪽 기슭에 있는데 삼층석탑과 마애불상 등 유적과 건물

     터가 남아 있다.

560) 광덕(廣德):당나라 대종(代宗)의 연호. 763~764년. 신라 경덕왕 22~23년.

561) 광덕 2년 곧 764년은 신라 경덕왕 23년

562) 대력(大曆):당나라 대종(代宗)의 연호. 766~779년. 신라 혜공왕 2~15년.

563) 신라시대에 법상종 사찰에서는 미륵불을 금당(金堂)에 모시고, 아미타불을 강

     당(講堂)에 모시는 것을 전통으로 하였다. 이후 고려시대 법상종 사찰에서도 이

     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현종(顯宗) 대 창건한 현화사(玄化寺) 등에서도 같은 가

     람배치를 보인다.

 

  논의하여 말한다. 낭자는 부녀의 몸으로 나타나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였

다564)고 할 수 있다.『화엄경(華嚴經)』565)에 보면, “마야부인(摩耶夫人)566)

선지식(善知識)567)이 십일지(十一地)568)에 살면서 부처를 낳은 것이 환해

탈문(幻解脫門)569)과 같다”570)고 하였다. 이제 낭자가 순산한 그 미묘한 뜻

선지식(善知識)567)이 십일지(十一地)568)에 살면서 부처를 낳은 것이 환해

탈문(幻解脫門)569)과 같다”570)고 하였다. 이제 낭자가 순산한 그 미묘한 뜻

도 여기에 있다.571) (그녀가) 지은 글을 보면 애절하고 부드러우며 사랑스

러워 완연히 하늘 신선의 취향이 있다. 아! 낭자가 중생에 따르는 것과 다

라니(陀羅尼)572)로 말하는 것을 알지 못했더라면, 이같이 할 수 있었겠는

가? 그 끝 구절은 마땅히 ‘맑은 바람이 한 자리함을 꾸짖지 마소서’ 라고 했

어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대개 세속의 말과 같이 하고 싶지 않

았기 때문이다.

   찬한다.

   푸른빛 바위 앞에 문 두드리는 소리

   누가 날 저문데 구름 사립문 두드리나

   남암이 가까우니 그곳으로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아서 내 뜰 더럽히지 마오

   이것은 북암을 기린 것이다.

 

   골짜기는 어두운데 어디로 가리

   남창(南窓) 자리에 머물다 가오

   깊은 밤에 백팔염주573) 부지런히 굴리니

   다만 소란하여 길손 잠 못 들까 하노라

   이것은 남암을 기린 것이다.

 

   십리 소나무 그늘에 오솔길 헤매어

   스님 찾아 시험하러 밤 절간574)에 왔네

   세 통에 목욕 끝나 날 밝으려 하니

   두 아이 낳아 놓고 서쪽으로 갔구나

   이것은 성인 낭자를 기린 것이다.

議曰, 娘可謂應以婦女身攝化者也. 華嚴經摩耶夫人善知識,

寄十一地生佛如幻解脫門. 今娘之桷産, 微意在此. 觀其投詞,

哀婉可愛, 宛轉有天仙之趣. 嗚呼! 使娘婆不解隨順衆生語言

陁羅尼, 其能若是乎! 其末聯宜云,‘ 淸風一榻莫予嗔.’ 然不

爾云者, 蓋不欲同乎流俗語爾.

讚曰, 滴翠嵓前剝啄聲. 何人日暮扣雲扃. 南庵且近宜尋去, 莫

踏蒼苔汚我庭. 右北庵.

谷暗何歸已暝煙, 南窓有簟且流連. 夜闌百八深深轉, 只恐成

喧惱客眠. 右南庵.

十里松陰一徑迷, 訪僧來試夜招提. 三槽浴罷天將曉, 生下雙

兒擲向西. 右聖娘.

564) 원문의 섭화(攝化)는 중생을 섭수(攝受)하여 교화(敎化)한다는 말이고 섭수는

     부처가 자비심을 가지고 일체 중생을 보호한다는 뜻이다.

565)『화엄경(華嚴經)』:『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Buddhāvatamsakamahāvaipulya-

     sūtra. 잡화경(雜花經)이라고도 한다.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

     전 중의 하나.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으로 석존이 깨달은

     지 이칠일째에 보리수 아래에서 비로자나불을 설주로 문수와 보현보살이 깨달

     은 내용을 설한 것이라 한다. 내용은 부처가 되는 인행(因行)과 과덕(果德)을 설

     한 것으로 십지(十地)를 비롯한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迴向)의 보살

     수행 계위를 중심으로 하고 후반부인 입법계품은 선재동자 보살행을 묻고자 53

     선지식을 찾아 구도 편력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를 통해 거듭되며 끝없이

     전개되는(重重無盡) 걸림 없는 연기(緣起)의 세계를 드러낸다. 이 경전의 내용

     을 바탕으로 지엄과 법장과 징관을 거치며 중국 화엄종이 형성되고 발전하여

     화엄사상은 중국 교학불교의 가장 빼어난 사상이 되었다. 현재 산스크리트어본

     은 전체가 알려지지 않고 십지품과 입법계품 등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전체

     적인 경전의 구성은 대체로 서역지방에서 종합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번역

     본은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동진시대에 번역한 60화엄과 실차난타(實叉難

     陀)가 당대에 번역한 80화엄, 반야(般若)가 당대 후반에 번역한 40화엄 등 세 가

     지가 있다.

566) 마야부인(摩耶夫人): Mahāmāyā. 석가모니의 모친. 카필라국 정반왕(Śuddhodana)

     의 비로 해산하기 위해 친정인 천비성으로 가던 중 부친 수보리의 별궁인 룸비

     니(Lumbini) 동산에서 휴식하다 왕자 싯달타를 낳고 7일 만에 죽었다. 죽은 후에

     도리천에 태어나서 석존은 훗날 어머니를 위해 도리천에 올라가 설법하였다고

     한다.『화엄경』 입법계품(60화엄 권57, 80화엄 권76)에 선재동자가 53 선지식을

     찾아 순례하는 도중에 41번째로 만난 이가 바로 마야부인이다.

567) 선지식(善知識): kalyānamitra. 정직하게 가르치고 덕행을 가졌으며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사람을 말한다. 지식(知識)·선우(善友)·승우(勝友)라고도 한다.

    『반야경』에서는 공이나 무상 등의 법을 설하여 사람들이 기쁘고 믿음을 내게

     하는 이를 말한다.『화엄경』에서는 선재동자가 구도행을 하는 도중에 만나는 53

     선지식을 말하는데, 위로는 불보살에서부터 아래로는 천이나 인간에 이르기까

     지 형태를 가리지 않고 중생이 악을 버리고 선을 닦도록 하여 불도에 이끄는 사

     람을 말한다.

568) 십일지(十一地):등각(等覺)을 말한다.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를 십신(十

     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迴向)·십지(十地)·등각(等覺)·묘각(妙

     覺)의 52위로 나눌 때(『보살영락경』에 따름.『화엄경』에서는 십신과 이 없고 등각

     과 묘각을 불지 하나로 말하여 41위가 됨.) 등각이 십지 다음이므로 이렇게 말한

     다. 등각(等覺)은 보살의 수행이 부처의 깨달음과 같다 하여 등정각(等正覺)이

     라고도 하는데, 실제로는 부처보다 한 단계 낮추어서 등각이라 한다. 여기서는

    『화엄경』에서 마야부인이 53선지식의 41번째에 등장하는 것과 연관시켜 말한

     것이다.

569) 환해탈문(幻解脫門):마야부인(摩耶夫人)이 성취한 법문.『화엄경』에는 53선지

     식이 각자 해탈문을 성취하여 이를 선재동자에게 설하고 있는데, 입법계품(80

     화엄 권76)에는 마야부인이 대서원과 지혜가 환술과 같은 해탈문(大願智幻解脫

     門)을 성취하여 일체 보살의 어머니가 된다고 하였다.

570) “불자여. 나는 이미 보살의 큰 원과 지혜가 환술과 같은 해탈문을 성취하였으

     므로 항상 여러 보살의 어머니가 되노라.”(佛子 我已成就菩薩大願智幻解脫門, 是

     故常爲諸菩薩母.『華嚴經』권76, 大 10-415c16. 60화엄에서는 智幻法門이라 함. 

    『華嚴經』권57, 大 10-764a19)

571) 낭자의 도움으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미륵불과 미타불이 된 것을 마야부인

     이 제불의 어머니가 된다고 한 것에 비긴 것이다.

572) 다라니(陀羅尼): dhāranī. 총지(總持)·능지(能持)·능차(能遮)로 번역된다. 무

     량한 불법을 모두 거두어 기억하여 지니므로 총지(總持)라고 하고, 악한 법을

     모두 막아주어서 능차(能遮)라고 한다. 법문의 한 글 한 뜻을 기억하여 일체법

     을 연상하게 함으로써 무량한 불법이 없어지지 않도록 한다. 다라니는 여러 가

     지 좋은 법을 지녀 악법을 막아주므로 보살이 중생을 위하고 교화할 때 반드시

     이 다라니를 얻어야 대중 가운데서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법을 설할 수

     있다고 한다. 후대에 들어 다라니의 형식이 주문과 비슷해져 혼동하므로 주문

     (呪)도 다라니로 함께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자구가 한 두 자인 것

     을 종자(種子), 짧은 것을 진언(眞言)이라 하고 긴 것을 다라니라고 한다.

573) 원문의 백팔(百八)은 염주 중에 긴 것으로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구슬

     로 구성된 염주를 말한다.

574) 원문의 초제(招提, catur-diśā)는 자투제사(柘鬥提舍) 또는 초투제사(招鬥提舍)

     라고 음역한 말의 줄임말이다. 사방(四方)·사방승(四方僧)·사방승방(四方僧房)

     등으로 의역한다. 사방에서 모여든 각 방의 여러 승려들이 고루 머물 수 있는 거

     처를 뜻한다. 그래서 승단(僧團)이 공유하는 물건을 대중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공양한다는 의미에서 초제승물(招提僧物)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

     서 연유하여 승려들이 머무는 곳, 곧 사원을 말한다.

 

분황사 천수관음상으로 눈먼 아이가 눈을 뜨다

 

[해제]

선덕여왕 때 지은 분황사는 신라의 유래 깊은 칠처가람 중의 하나인 중

요 사찰이다. 이 편은 이곳에 봉안된 천수관음상의 영험 설화 이야기이다.

경덕왕 때 경주 6부의 하나인 한기부에 사는 여인의 아이가 5살 때 눈이 멀

자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 천수관음에게 가서 아이에게「도천수관

음가(禱千手觀音歌)」를 노래하며 빌도록 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

기이다. 현실적인 고난의 현장에서 관음을 찾으면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

나 중생들의 바람을 들어준다는 관음신앙은 신라시대의 가장 일반적인 신

앙의 하나였다. 사람들이 삶의 한가운데서 만나는 갖가지 고난에서 벗어나

게 하고 자식을 낳게 해주며 삼독의 무명에서 해탈하도록 해주는 관음신앙

에 더하여 천수관음과 십일면관음 등의 변화관음이 등장하면서 관음신앙

의 면모는 더욱 다양해졌다. 이 분황사편은 그런 변화관음의 대표적인 예

를 보여준다. 천수관음은 손이 천 개이고 손마다 눈 하나를 가졌으니 눈도

천 개여서 특히 그 자비로운 구제력을 갈구하는 눈먼 이들의 신앙의 대상

이 되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 희명(希明)의 이름도 광명을

희구하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이 편에 실린 도천수대비가는『삼국유사』에

실린 향가 14수 중에서도 종교적 기원가로서의 구조를 두드러지게 갖추고

있는 대표작으로 평가되어 기도의 경건한 자세, 신격에 대한 칭명, 청원, 예

찬의 구조로 되어 있음이 밝혀졌다.『삼국유사』에는 이곳의 천수관음 외에

도 경흥이 병을 나았다는 십일면관음 등 변화관음에 대한 다른 신앙 사례

를 찾을 수 있다.

 

[역주]

분황사575) 천수관음상576)으로 눈먼 아이가 눈을 뜨다.

 

경덕왕(景德王)577) 때 한기리(漢歧里)578)에 사는 여인 희명(希明)의 아이

가 태어난 지 5년579) 되던 해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이

를 안고 분황사(芬皇寺)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려져 있는580) 천수관음(千

手觀音) 앞에 가서 아이에게 노래하며 빌도록 하였더니 마침내 눈을 뜨게

되었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581)

   무릎을 대며

   두 손바닥 모아들여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빌어 말씀도 드리노라

   천 개의 손의 천 개의 눈을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덜어

   둘 없어진 나라

   하나만은 줄까 하고 드리는도다

   아아, 나에게 끼치어 준다면

   어디에 쓸 자비의 뿌리일까

   찬한다.

   죽마 타고 파피리 불며 거리에서 놀더니

   하루 아침에 두 눈이 멀어버렸네

   관음대사께서 자비로운 눈 돌리지 않았다면

   버들가지 날리는 봄날582)을 몇 번이나 헛되이 지냈으리

芬皇寺千手大悲 盲兒得眼

景德王代, 漢歧里女希明之兒, 生五稔而忽盲. 一日其母抱兒,

詣芬皇寺左殿北壁畫千手大悲前, 令兒作歌禱之, 遂得明.

其詞曰

膝肹古召旀

二尸掌音毛乎支內良

千手觀音叱前良中

祈以支白屋尸置內乎多

千隱手叱千隱目肹

一等下叱放一等肹除惡支

二于萬隱吾羅

一等沙隱賜以古只內乎叱等邪阿邪也

吾良遺知支賜尸等焉

放冬矣用屋尸慈悲也根古

讚曰 竹馬葱笙戱陌塵, 一朝雙碧失瞳人. 不因大士迴慈眼, 虛

度楊花幾社春.

575) 분황사(芬皇寺):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절. 선덕왕 3년(634)에 창건되

     었다. 신라에 옛 부처 때의 인연 있는 일곱 절터 중의 하나로 꼽혔던 중요한 절

     이다. 자장이 귀국하자 머물게 했던 절이며, 7세기 중반에 원효가 활동하며『화

     엄경소』를 지었다. 경덕왕 때인 755년에 36만근의 거대한 동제 약사여래상을

     주조하여 봉안하였고 명화가 솔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는

     등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문화 유적이 있던 유서 깊은 절이다. 4-7 주197) 참조.

576) 천수관음상:천수관음(千手觀音)은 변화관음의 하나.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

     千眼觀世音菩薩)의 줄임말. 관음은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로서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설한 것과 같이 고난에 처한 중생들이 그 이름을 부르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고난에서 구제해 준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되어 사람들

     에게 가장 친근한 신앙의 하나가 되었다. 밀교시대에 이르러 관음의 폭넓은 구

     제력을 상징하는 여러 변화관음들이 등장하여 손이나 팔 또는 눈이 천 개, 만 개

     에 이르는 다양한 관음 곧 천수천안관음이나 십일면관음 또는 준제관음·여의

     륜관음·불공견삭관음 등이 변화 관음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십일면관음이

     나 천수관음이 사람들에게 널리 환영을 받아 많은 조상 예가 확인된다. 그림과

     조각 등 조상으로는 40개의 팔을 갖고 한 팔마다 한 개의 눈과 상징물을 들고 있

     으며, 이 한 개의 팔마다 25계를 갖추어 천 개를 이룬다고 한다. 이곳 희명의 예

     에서 보는 것처럼 천 개의 눈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눈먼 이들의 구도의 대상이

     된 경우가 많다.

577) 경덕왕(景德王):신라 제35대 왕. 재위 742~765 왕권 안정을 위해 한화정책(漢

     化政策)을 시행하고 9주(州)·5소경(小京)·117군(郡)·293현(縣)을 정비하였다.

     754년에 황룡사종을 주조하고, 불국사(佛國寺)와 석불사(石佛寺)와 굴불사(掘佛

     寺) 등을 창건하였다. 4-7 주188) 참조

578) 한기리(漢歧里):신라의 초기 중심 세력인 진한(辰韓) 6부의 하나인 금산가리촌

     (金山加利村). 신라 유리왕 8년(31) 한기부(漢歧部)로, 고려 태조때 가덕부(加德

     部)로 고쳤다.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천북면 동천리(東川里)설과 내동면 보문리

     (普門里) 설등이 있는데, 대체로 천북면 서부에서 현곡면으로 추정되고 있다.

579) 원문의 임(稔)은 벼가 익는 기간 곧 한 해를 뜻한다.

580)『삼국사기』열전 솔거(率居)전(권48)에는 신라의 가장 이름난 화가 솔거가 그린 그

     림으로 황룡사 벽화와 함께 분황사 관음상을 들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말하는 영

     험으로 이름난 천수관음이『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솔거의 관음상으로 생각된다.

581) 이 향가를「천수관음에게 비는 노래[禱千手觀音歌]」라고 한다. 그런데 이 노래

     의 지은이에 대해서 눈먼 5세 아이, 아이의 어머니인 희명, 또는 어느 승려 등이

     지은 기도문 등의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이곳의 기록을 우선 중시하고, 기원가

     로서의 일반성과 눈먼 아이가 관음상을 보고 있는 듯한 어법 등을 고려하여 어

     머니 희명이 널리 전승되던 기도가의 틀을 수용하여 고쳐 아이에게 노래로 부

     르게 했다는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관점에서 이 노래는 생활에

     서 우러난 소박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가장 절실하고 경건한 마음을 담은 기원

     의 노래라고 평가된다.

582) 원문의 사춘(社春)은 춘사(春社), 곧 입춘 후 5번째 무일(戊日)을 말하는 것으로,

     봄날을 뜻한다.

 

낙산의 두 성인-관음보살과 정취보살 그리고 조신

 

[해제]

관음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알려진 낙산에 얽힌 이야기를 모은 편이다.

낙산이라는 이름은 의상이 중국에서 돌아와 관음 진신이 해변 굴 안에 산

다는 말을 듣고 이름 붙인 것이라 하였다. 의상은 동해변 굴 안에서 진신을

친견하기 위한 기도를 한 끝에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받고 관음 진용을 친

견하여 절을 지으라는 부촉을 받아 낙산사를 창건하였다. 이어 원효가 관

음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왔으나 관음의 변화신을 알아차리지 못해 친

견하지 못하였던 이야기를 실었다. 다음에 굴산사를 창건한 신라말의 선사

범일이 중국의 연기 설화와 연관된 정취보살상을 강에서 얻어 낙산 위에

봉안하였다는 이야기를 실었다. 그리고 고려 때의 신앙 사례를 이어 들불

에도 두 성전이 화를 면했고, 몽고군의 침공 때는 땅 속에 파묻었다가 몽고

군이 물러간 후 명주성에 두었다가 서울 궁중으로 옮겨 보관하도록 하였다

고 한다.

이어 조신의 꿈 이야기를 실었다. 신라 때 영월에 있는 세달사의 장전이

명주에 있었다. 그 관리자로 파견된 조신(調信)이 지방 태수의 딸을 좋아하

여 낙산 관음에게 행운을 빌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관음을 원망하며 잠

깐 졸게 되었다. 그는 꿈 속에서 그리던 낭자를 만나 부부가 되어 자식 다

섯을 낳고 살았으나 살림이 곤궁해져 아이가 굶주려 죽고 고통을 당하였

다. 이에 즐거움은 곧 걱정거리의 디딤돌임을 깨닫고 헤어지는 순간에 꿈

을 깨고 보니 세상일에 탐내는 마음이 사라졌다. 조신은 직책을 그만두고

자신의 재산으로 정토사를 창건하여 선업을 닦았다고 한다. 일연은 이에

대해 논평하여 세상 사람들이 모두 즐거운 줄만 알고 애쓰는데 이는 꿈을

깨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하며 노래를 읊어 경계하였다. 내용으로 보면 제

목의 두 성인은 관음과 정취보살을 말하며, 조신은 그에 부가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편은 관음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신라 불국토

신앙의 일환으로 낙산에 관음진신 설화를 정착시킨 의상의 이야기를 실었

다. 신라통일기에 미타신앙과 함께 가장 보편적인 신앙이 되었던 관음신앙

의 왕성한 형세를 담은 이 설화는『법화경』보문품에 따른 현실구제의 일

반적 관음에『화엄경』보살주처품에 바탕한 관음주처를 확정한 데 그 의의

가 있다. 이어 신라말에는 선사 범일에 의해 정취보살 신앙이 추가되었는

데, 정취보살은『화엄경』입법계품에 선재동자가 순례하는 53선지식 가운

데 관음에 이어 등장하는 보살이다. 이는 정취보살에 대한 유일한 신앙 자

료이다. 그리고 관음진신 친견에 의상과 원효가 성공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차이를 보임으로써 종파적인 개념도 내재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조신 설화에서는 관음의 현실구제적인 신앙이 이루어지 않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러한 현실에서의 바람이 꿈에 지나지 않음을 나타냄으

로써 진정한 수행의 길을 열어 보인 데 이 편의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조신

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그가 사원 장원의 관리자를 지냈다는 점에서 신라

토지 운영 실상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료는 따로 전거를 제시하지

않았는데, 고본(古本)과 비교한 대목이 있어 낙산관음에 대한 몇 가지 전

승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낙산의 관음도량 설정에 대한 기록은 이 편

외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고려 익장(益莊)의 기록과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

 

[역주]

낙산의 두 성인583)- 관음584)보살과 정취585)보살 그리고 조신

 

   예전에 의상(義湘)586)법사(法師)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587) 관음보

살588)의 진신(眞身)이 이 해변 굴 안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때문에 낙

산(洛山)이라고 이름하였다. 대개 서역의 보타락가산(寶陁洛伽山)589)을 여

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하는데590), 백의대사(白衣大士)591)의 진신이

사는 곳이므로 이를 빌려 이름한 것이다.

   (의상법사가) 7일 동안 재계(齋戒)592)하여 새벽에 좌구(座具)를 물 위에

띄우자 천룡팔부(天龍八部)593)가 시종하여 굴 안으로 이끌고 들어가서 참

례하게 하였다. 공중에서 수정염주 한 벌을 내어주므로 의상이 받아가지고

물러났고, 또 동해 용이 여의보주 한 개를 주어서 법사가 받들고 나왔다.

다시 7일을 재계하여 (관음의) 진용을 보았다. (관음이) 말하기를, “자리 위

의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하였다. 법사가 말을 듣고 굴을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

서 솟아나서 금당을 짓고 상을 빚어 모시니, 원만한 모습과 고운 자질이 하

늘이 낸 듯하였다. 대나무는 다시 없어져서 이곳에 바로 진신이 머물고 있

음을 알았다. 그로 인해 절 이름을 낙산사(洛山寺)라 하고 법사가 받은 두

개의 구슬을 성전(聖殿)에 안치하고 떠났다.594)

   뒤에 원효(元曉)595) 법사가 뒤이어 와서 (관음 진신을) 우러러 예배596)

하고자 하였다. 처음에 남쪽 근교에 이르니 논에서 한 흰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가 장난삼아 그 벼를 달라고 하니 여인이 벼가 흉

년이라고 장난으로 대답하였다. 또 가다가 다리 아래 이르니 한 여인이 월

경대597)를 빨고 있었다. 법사가 물을 청하니 여인이 그 더러운 물을 떠주어,

법사가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그때 들판의 소나무 위에

파랑새 한 마리가 있다가 “그만 두어라 제호화상(醍醐和尙)598)이여!” 하고

부르고는 갑자기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소나무 밑에 벗은 신 한 짝만 있었

다. 법사가 절에 이르니 관음상 대좌 밑에 앞서 본 벗은 신 한 짝이 있어 그

제서야 전에 만난 성녀(聖女)가 진신임을 알았다.599)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이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렀다. 대사가 성굴(聖崛)에 들어가서

다시 진용을 보려 하자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갔다.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昔義湘法師, 始自唐來還, 聞大悲眞身住此海邊窟內, 故因名

洛山. 盖西域寶陁洛伽山, 此云小白華, 乃白衣大士眞身住處,

故借此名之.

齋戒七日, 浮座具晨水上, 龍天八部侍從, 引入崛內叅禮. 空中

出水精念珠一貫給之, 湘領受而退, 東海龍亦獻如意寶珠一顆,

師捧出. 更齋七日, 乃見眞容. 謂曰“ 於座上山頂, 雙竹湧生,

當其地作殿, 宜矣.” 師聞之出崛, 果有竹從地湧出, 乃作金堂,

塑像而安之, 圓容麗質, 儼若天生. 其竹還沒, 方知正是眞身住

也. 因名其寺曰洛山, 師以所受二珠, 鎭安于聖殿而去.

後有元曉法師, 繼踵而來, 欲求瞻禮. 初至於南郊, 水田中有一

白衣女人刈稻. 師戱請其禾, 女以稻荒戱答之. 又行至橋下, 一

女洗月水帛. 師乞水, 女酌其穢水獻之, 師覆棄之, 更酌川水而

飮之. 時野中松上有一靑鳥, 呼曰“休醍醐和尙!” 忽隱不現,

其松下有一隻脫鞋. 師旣到寺, 觀音座下, 又有前所見脫鞋一

隻, 方知前所遇聖女乃眞身也. 故時人謂之觀音松. 師欲入聖

崛, 更覩眞容, 風浪大作, 不得入而去.

583) 이대성(二大聖):관음(觀音)보살과 정취(正趣)보살을 말한다. 『화엄경』 입법계

     품에 선재동자가 보살행을 구하러 순력하는 중에 관음은 28번째, 정취는 바로

     다음인 29번째 보살로 등장하여 보살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584) 관음(觀音):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 고난에 처한

     중생들이 그 이름을 부르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고난에서 구제해준다는 데서

     관음신앙이 이루어졌다.『화엄경』의 내용에 따라 나라마다 우리나라의 낙산처럼

     자신의 국토에 관음이 사는 보타락가산을 설정하였다. 4-12-1 주290) 참조.

585) 정취(正趣):『화엄경(華嚴經)』입법계품(入法界品)에 선재동자가 여러 선지식

     을 순방하며 보살행과 보살도를 묻고 설법을 듣는 중에 관음보살에 이어 29번

     째로 정취보살을 찾는다. 동방(東方)의 정취보살이 이 땅의 금강산(金剛山) 꼭

     대기에 와서 관음의 처소에 이르렀는데, 선재가 관음의 법문을 듣고 나서 정취

     보살을 찾아 보문속행법문(普門速行法門)을 듣는다. (『화엄경』권51 입법계품, 大

     9 pp.718c5~719a18)

586) 의상의 이름은 의상(義相)이 맞는 것으로 생각된다. 625~702. 신라 화엄종의 개

     창자. 황복사에서 출가한 후 당에 유학하여 지엄에게서 화엄을 배우고 『일승법

     계도(一乘法界圖)』를 지어 일(一)과 다(多)가 걸림 없이 거듭 전개되는 법계연기

     사상을 정립하였다. 귀국한 후 부석사(浮石寺)를 비롯한 여러 절을 세우고 많은

     제자들과 화엄사상을 연마하고 정진하며 화엄종을 펴 나갔다. 한편으로 교단에

     서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을 선도하여 사람들이 불교 신앙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하였다. 제자들이 확장하여 창건하고 운영한 화엄십찰은 통일신라 불

     교계의 중추를 이루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일승법계도』

     외에『아미타경의기』가 저술로 알려졌고,「백화도량발원문」등 의상의 사상을

     담고 있다고 알려진 저술이 몇 개 있지만 저술은 많지 않다. 제자로는 지통(智

     通)·진정(眞定)·도신(道身)·표훈(表訓) 등 여러 뛰어난 제자가 있다.

587) 의상이 당에서 귀국한 것은『삼국유사』권4 의해 의상전교편에 의하면 함형(咸

     亨) 원년 경오년인 670년에 당 고종(高宗)이 신라를 치려고 하는 것을 김흠순이

     의상에게 알리고 신라에 귀국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588) 대비(大悲):관세음보살. 중생의 고뇌를 구제해 주므로 대비로 일컫는다.

589) 보타락가산(寶陁洛伽山): Potalaka. 관세음보살이 사는 곳으로 알려진 산. 의

     미로는 작은 꽃나무(小花樹)·작고 흰 꽃(小白華)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화

     엄경(華嚴經)』 입법계품에 관음이 보타락가라고 하는 해안의 아름다운 산에서

     상주하고 있어 선재동자가 이곳을 순력하고 대자비의 설법을 들었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관음의 상주처를 보타락가라고 해 왔는데, 인도에서는 남부 코모린

     갑 근처의 말라야산 동쪽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절강성 영파(寧波) 정해현(定海

     縣) 해중에 보타산(普陀山)과 낙가산(洛迦山)을 설정하였으며, 우리나라의 낙산

     이 이것이다. 60화엄에서는 광명산(光明山)이라 하고 80화엄에서 보달락가산

     (補怛洛迦山)이라 표기하였으며, 현장은『대당서역기』에서 포달락가(布呾洛迦)

     라 표기하였고 혜원의『신화엄경음의(新華嚴經音義)』에 소백화수산(小白花樹

     山)이라 하였다. 징관이『화엄경소(華嚴經疏)』에서 보달락가산(補怛洛迦山)을

     소백화수(小白華樹)라고 옮긴 이래 소백화(小白華) 또는 백화(白花)란 표현이

     많이 쓰였다.

590) 소백화(小白華):보타락가산(寶陁洛伽山, Potalaka)의 의역. 소백화(小白花)라

     고도 한다.

591) 백의대사(白衣大士):백의관음(白衣觀音). 관음의 변화 형태인 33관음의 하나이

     다. 흰 옷을 입고 입는 모습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592) 재계(齋戒):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금기(禁忌)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일을 말

     한다. 팔관재계(八關齋戒)에서 비롯된 말로서 원래는 재가자가 하루 밤낮 동안

     승단에 가서 출가 생활을 배우는 것을 가리킨다. 이후 매월 6일 동안 살생하지

     않고, 훔치지 않고, 음행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술 마시지 않고, 자신을 화

     려하게 꾸미지 않고, 춤추고 노래하거나 보지 않고, 크고 화려한 자리에 앉거나

     눕지 않고, 때가 아니면 먹지 않는 8가지 조목을 지키는 것을 말하였다.

593) 원문의 용천팔부(龍天八部)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인 천룡팔부(天龍八部) 곧

     팔부중(八部衆)을 말한다. 팔부중은 천(天, deva)·용(龍, nāga)·야차(夜叉,

     yaksa)·간다르바(乾闥婆, gandharva)·아수라(阿修羅, asura)·가루다(迦樓

     羅, garuda)·긴나라(緊那羅, kim3 nara)·마호라가(摩睺羅迦, mahoraga)이다.

594) 이 사실을 보다 상세하게 기록한 다른 전승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44, 襄

     陽 佛宇 洛山寺) 여기에 인용된 고려 익장(益莊)의 기록 중에 이 기사와 비교되

     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양주 동북쪽 강선역의 남쪽 마을에 낙산사가 있다. 절

     의 동쪽 몇 리 쯤 되는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가 백 척이 넘으며 만 섬을 실

     은 배가 들어갈 수 있고 그 아래로는 파도가 들고 나서 헤아리기 어려운 골짜기

     인데 세상에서 관음대사의 사는 곳이라 한다. 굴 앞에 50보 쯤 떨어져 바다 가운

     데 돌이 있어 위는 한 자리를 펼 만한데 수면으로 오르내린다. 옛날에 의상법사

     가 관음의 모습을 직접 보려고 돌 위에서 자리를 펴고 예배하였다. 정근한 지 이

     칠일이 지났으나 친견하지 못해 바다 가운데 몸을 던졌더니 동해용이 붙들어서

     돌 위에 올려 놓았다. 관음대성은 굴 안에서 팔을 뻗어 수정염주를 주면서, ‘내

     몸은 친견할 수 없다. 다만 굴 위에 가다가 쌍죽이 솟아나는 곳이 내 머리이니

     이곳에 불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면 좋을 것이다.’고 하였다. 용이 또 여의보주

     와 옥을 바치므로 법사가 받아오니 쌍죽이 솟아났다. 그곳에 불전을 짓고 용이

     바친 옥으로 불상을 만들어 봉안하였으니 곧 이 절이다.…수정염주와 여의주는

     이 절에 간직하여 보배로 전하도록 하였다.(襄州東北降仙驛之南里, 有洛山寺. 寺

     之東數里許巨海邊有窟, 其高可百尺, 其大可容萬斛之舟, 其下海濤常出入, 爲不測之

     壑, 世稱觀音大士所住處也. 窟前距五十許步, 海中有石, 上可鋪一席, 出沒水面. 昔新

     羅義相法師, 欲親覩聖容, 乃於石上, 展坐拜稽. 精勤至二七日, 尙未獲覩, 便投身海中,

     東海龍扶出石上. 大聖卽於窟中, 伸臂手授水精念珠曰, “我身未可親覩. 但從窟上, 行

     至雙竹湧出處, 是吾頂上, 於此可營一殿, 安排像設也.” 龍亦獻如意珠及玉, 師受珠而

     來, 有雙竹湧立. 乃於其地創殿, 以龍所獻玉, 造像安之, 卽玆寺也.…水晶念珠及如意

     珠, 藏於是寺, 傳寶之.)

595) 원효(元曉):617~686. 중국에 가지 않고 신라에 소개된 대부분의 경론을 탐구하

     여 하나하나에 대한 대체적인 의미를 평가한 종요(宗要)류의 저술을 펴내고, 더

     욱 관심이 가는 경론에 대해서는 상세한 주석서를 썼다.『십문화쟁론』으로 화합

     의 새로운 불교관을 펼쳤고,『기신론소』와『금강삼매경론』일심(一心)사상을 체

     계화하여 신라불교의 가장 탁월한 성과를 이루었으며, 후에는 대중 교화에 매

     진하였다. 5-7 주273) 참조.

596) 원문의 첨례(瞻禮)는 우러러보며 예배하는 것을 말한다.

597) 원문의 월수백(月水帛)은 월경대를 말한다. 월수는 월경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

     이고, 월수백은 월경 시 사용하는 천을 말한다.

598) 제호화상(醍醐和尙):우유를 정제하면 유(乳), 낙(酪), 생소(生酥), 숙소(熟酥), 제

     호(醍醐)의 5가지 단계의 제품이 나오는데, 이 중 가장 맛이 좋은 최상의 제품을

     제호라고 한다. 제호는 mand 3 3 a, 또는 sarpir-mand 3 3 a. 그래서 경전에서 열반이나

     불성(佛性) 또는 진실한 가르침 등 최상의 진리를 말할 때 제호에 비유하였다.

     중국 천태종(天台宗)에서는 천태 오교의 구분에서 최상의 가르침인 법화열반을

     제호에 비유하였다. 이에 연유하여 비교할 수 없이 좋은 맛, 곧 가장 숭고한 부

     처의 경지를 의미하거나 또는 불설(佛說)의 심원(深遠)함을 말한다.

599) 관음은 중생들의 바람에 따라 33신 등의 여러 응신(應身)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런 관음 응현(應現)이 여기서 말하는 낭자의 출현과 비슷한 모습을 말

     해 준다.

 

후에 굴산조사(崛山祖師) 범일(梵日)600)이 태화(太和)601) 연중(827~836)

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明州)602)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렀다. 왼쪽 귀

가 잘린 한 사미(沙彌)603)가 여러 스님들의 말석에 있다가 범일에게 말

하기를, “저도 고향 사람입니다. 집이 명주(溟州)604) 경내 익령현(翼嶺縣)

의605) 덕기방(德耆坊)에 있으니 대사께서 훗날 본국에 돌아가시거든 부디

저의 집을 이루어주소서.” 하였다. 두루 총림법석606)을 돌아다니고 염관(鹽

官)607)에게서 법을 얻었다.이〈일은 본전(本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608)〉회창(會

昌)609) 7년(847) 정묘년에 본국에 돌아와 먼저 굴산사(崛山寺)610)를 창건하

여 가르침을 전하였다. 대중(大中)611) 12년(858) 무인년 2월 15일 밤 꿈에

예전에 보았던 사미가 창 아래에 와서 말하기를, “예전에 명주 개국사에 있

을 때 조사와 약속하여 승낙을 받았는데 어찌 그리 늦어집니까?” 하였다.

조사가 놀라 깨어 수십 명을 데리고 익령 땅에 가서 그 (사미가) 살던 곳을

찾았다. 한 여인이 낙산 아랫마을에 사는데 그 이름을 묻자 덕기(德耆)612)

라고 하였다. 여인에게 한 아들이 있었는데 나이는 겨우 여덟 살로 항상 마

을 남쪽 돌다리 가에 가서 놀았다.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제가 함께 놀던

아이 중에 금빛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하여 어머니가 조사에게 이를 말

하였다. 조사가 놀라고 기뻐하며 그 아들과 함께 놀던 다리 밑에 가서 찾

아보니 물 속에 석불이 하나 있었다. 꺼내 보니 왼쪽 귀가 잘려 있었는

데 전에 보았던 사미와 비슷하니 정취보살(正趣菩薩) 상이었다. 이에 점

치는 찌를 만들어 집 지을 터를 점치니 낙산의 위쪽이 길하다 하므로 전

각 3칸을 짓고 그 상을 모셨다. 〈고본(古本)에는 범일의 일이 앞에 있고 의상과 원

효대사의 일을 뒤에 실었다. 그런데 살펴보니 의상과 원효 두 대사의 일은 당 고종(高

宗)613) 때이고 범일은 회창(會昌) 이후에 있으니 서로 170여 년이나 떨어져 있다. 그래

서 지금 앞의 것을 뒤로 하여 차례를 편집한다. 혹은 범일이 의상의 문인이라 하는데 잘

못된 것이다.〉

後有崛山祖師梵日, 大和年中入唐, 到明州開國寺. 有一沙彌

截左耳, 在衆僧之末, 與師言曰,“ 吾亦鄕人也. 家在溟州界翼

嶺縣德耆坊, 師他日若還本國, 須成吾舍.” 旣而遍遊叢席, 得

法於鹽官〈事具在本傳〉. 以會昌七年丁卯還國, 先創崛山寺而傳

敎. 大中十二年戊寅二月十五日, 夜夢昔所見沙彌到窓下, 曰

“昔在明州開國寺, 與師有約, 旣蒙見諾, 何其晩也?” 祖師驚

覺, 押數十人, 到翼嶺境, 尋訪其居. 有一女居洛山下村, 問其

名, 曰德耆. 女有一子, 年才八歲, 常出遊於村南石橋邊. 告其

母曰, “吾所與遊者, 有金色童子.” 母以告于師. 師驚喜, 與其

子尋所遊橋下, 水中有一石佛, 舁出之, 截左耳, 類前所見沙

彌, 卽正趣菩薩之像也. 乃作簡子, 卜其營構之地, 洛山上方

吉, 乃作殿三間安其像.〈古本載梵日事在前, 相曉二師在後. 然按湘曉二

師厼在於高宗之代, 梵日在於會昌之後, 相去一百七十餘歲. 故今前却而編次之.

或云, 梵日爲相之門人, 謬妄也.〉

600) 범일(梵日):810~889. 신라 말에 강릉 지방을 중심으로 선종의 문호를 연 사굴

     산문(闍崛山門)의 개창조. 일명 품일(品日). 속성은 김(金)씨. 조부는 명주도독

     (溟州都督) 술원(述元). 헌덕왕 16년(824)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를 받고 흥

     덕왕 6년(831)에 왕자 김의종(金義琮)을 따라 당나라에 가서 염관제안(鹽官齊

     安)의 법을 잇고 약산유엄(藥山惟儼)에게도 불법을 물었다. 회창 폐불을 만나 상

     산(商山)에 가서 육조탑(六祖塔)에 참배한 뒤 문성왕 8년(847)에 귀국하여 문성

     왕 12년(850) 백달산(白達山)에서 정진하다 명주도독 김공의 요청으로 굴산사

     에서 종풍을 떨쳤다. 이후 경문왕·헌강왕·정강왕들의 후대하겠다는 요청을 듣

     지 않고 40여년 동안 이 절에만 머물며 교화하다 진성왕 3년(889)에 입적하였

     다. 시호는 통효(通曉)대사.(『조당집(祖堂集)』 권17 참조) 문하에 낭원개청(朗圓

     開淸)과 낭공행적(朗空行寂) 등이 있다. 고려 후반에 나온 『선문보장록(禪門寶藏

     錄)』에 부처가 깨달은 다음에 조사를 찾아 미진한 부분을 마저 깨우쳤다는 ‘진

     귀조사설(眞歸祖師說)’이 그의 설로 전하고 있다. 사굴산문은 신라 말의 불교계

     를 선도한 선문 구산 중에서도 성주산문(聖住山門)과 함께 가장 형세가 컸던 대

     표적인 산문으로서, 고려에서도 선종의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여러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601) 대화(大和):태화(太和)로도 쓴다. 당(唐) 문종(文宗)의 연호. 827~836년. 흥덕왕

     2~희강왕 1년.

602) 명주(明州):당대(738년)에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에 설치한 지명인

     데 경내에 있는 사명산(四明山)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603) 사미(沙彌): śrāmanera.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비구가 되기

     전에 십계 곧 살생하지 않고, 훔치지 않고, 음행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술

     마시지 않고, 높고 넓은 상을 멀리 하고, 꽃 장식 등을 멀리 하고, 춤과 노래를 멀

     리 하고, 보물을 멀리 하고, 때가 아니면 먹지 않는 계행을 수행하는 7세부터 20

     세 사이의 남자 출가자를 말한다. 같은 단계의 여자인 사미니, 구족계를 받은 비

     구·비구니, 그리고 4 근본계와 6법을 배워 도심의 견고함을 평가받는 비구니되

     기 2년 전의 식차마나(式叉摩那, śiksamāna)와 함께 출가오중(出家五衆)을 이룬다.

604) 명주(溟州):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일대로 신라 구주(九州)의 하나. 본래 고구려

     의 하슬라(何瑟羅)였던 것이 신라 영역이 되어 선덕왕 때 소경(小京)을 설치하

     였다가 태종 때 말갈 땅과 연접한 중요 지역이라 하여 주(州)를 설치하고 군주

     (軍主)를 두었다. 경덕왕 16년에 명주로 고쳤으며 정선·동제·지산·동산 등 4

     개의 영현이 있었다. 명주도독 관할 하에 1주 9군이 있었고, 익령현(翼嶺縣)은

     그 중 수성군(守城郡)의 영현이었다.(『삼국사기』 권35 지리지 溟州)

605) 익령현(翼嶺縣):지금의 강원도 양양군. 본래 고구려의 익현현(翼峴縣)이던 것

     을 경덕왕 16년에 익령현으로 개칭하였다.(『삼국사기』권35 지리지 溟州) 명주 관

     내 수성군(守城郡)의 영현인데 1221년에 양주방어사(襄州防禦使)가 파견되었

     고,(『고려사』 권58 지리지 翼嶺縣) 1416년에 양양(襄陽)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606) 원문의 총석(叢席)은 총림의 법석을 이른다. 총림(叢林)은 pind 3 3 a-vana, 여러

     승려들이 함께 배우며 안거(安居)하는 곳으로 주로 선종의 사원을 말하였다. 인

     도에서 도성의 교외에 조용한 숲에 정사를 짓고 승려들이 머물도록 하여 난야

     나 총림이라고 불렀다. 총림은 승려들이 화합하여 한 곳에 거주하는 것이 나무

     가 모여 있는 총림과 같다고 비유한 데서 유래하였다. 후에는 교종 등의 사원에

     서도 선종을 본받아 총림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총림에서는 절의 모든 재산

     은 공적인 것이 되며 일정한 규정에 따라 사방에서 오는 승려를 받아들이고 직

     책도 승려들의 동의를 얻어 시행하였다.

607) 염관(鹽官):염관제안(鹽官齊安, ?~842). 당나라 말기의 선승. 항주(杭州)의 염

     관(鹽官) 해창원(海昌院)에 주석하여 염관이라는 호를 얻었다. 어려서 출가하여

     운종(雲琮)에게 머리를 깎고 지엄(智嚴) 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계율을 수학

     하였다. 후에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 법을 이었다. 원

     화(元和) 말년 절강성(浙江省) 월주(越州) 소산(蕭山) 법락사(法樂寺)를 중수하

     여 교화하였고, 해창원에 주석하자 사방에서 승려들이 모여 들어 이들에게 마

     조의 선풍을 고양하다 90여 세에 죽었다. 무종의 폐불 이후 불교를 부흥한 선종

     (宣宗)이 일찍이 제안의 법을 듣고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608) 범일의 본전은 『조당집(祖堂集)』 범일전을 말한다.『조당집』권17 명주굴산고통

     효대사(溟州崛山故通曉大師)전에 범일이 여러 지식을 만난 후 염관제안을 찾아

     제안이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말에 크게 깨달음을 얻어 6년 동안 부지런히 수

     학하였다고 하였다.

609) 회창(會昌):당(唐) 무종(武宗)의 연호. 841~847년. 문성왕 3~9년.

610) 굴산사(崛山寺):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일대에 있던 신라 말의

     선종 사원. 사굴산문(闍崛山門)의 본찰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이면서 보

     령 성주산문(聖住山門)의 성주사와 함께 쌍벽을 이루던 사원으로 신라 말에 범

     일(梵日)이 문성왕 12년(850)에 창건하였다. 광범위한 유역에 거대한 당간지주

     와 고려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승탑, 석불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사굴산문은 고

     려에 들어서도 큰 활동을 한 승려를 배출한 대표적인 산문이었다.

611) 대중(大中):당(唐) 무종(武宗)의 연호. 847~859. 문성왕 9~헌안왕 3년.

612) 낙산사 인근에 있던 마을 이름.

613) 고종(高宗):당(唐) 제3대 왕. 재위 649~683.

 

   후에 백 여 년이 지나 들불이 연이어 이 산에까지 이르렀는데 두 성전만

이 화재를 면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타버렸다.

   몽고대군이614) 침공한 이후 계축 갑인 연간(1253~1254)615)에 두 성인의

진용과 두 보주를 양주(襄州)616)성에 옮겨 들여왔다. 몽고군의 공격이 매

우 급하여 성이 함락되려 할 때 주지인 선사 아행(阿行)〈옛 이름은 희현(希玄)

이다〉이 은합에 두 구슬을 담아서 몸에 지니고 도망하려 하니 걸승(乞升)이

라는 절의 노비가 빼앗아 땅속에 깊이 묻으며 맹세하기를, “내가 만일 적

군에게 죽음을 면치 못하면 이 두 보주는 끝내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못하

여 아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내가 만일 죽지 않으면 마땅히 두 보주를

나라에 바치리라.”라고 하였다. 갑인년 10월 22일에 성이 함락되어617) 아행

은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나 걸승은 면하였다. 적병이 물러간 후 파내어 명

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618)에게 바쳤다. 그때 낭중(郎中)619) 이녹수

(李祿綏)가620) 감창사였는데 받아서 감창고(監倉庫)에 간직하고 교대할 때

마다 전해 받았다. 무오년(1258) 11월에 이르러 조계종(曹溪宗)621) 노숙(老

宿)622)으로 기림사(祇林寺)623) 주지인 대선사 각유(覺猷)624)가 아뢰기를

“낙산의 두 보주는 나라의 신령스러운 보배인데 양주성이 함락될 때 절의

노비 걸승이 성 안에 묻었다가 적병이 물러가자 감창사에 바쳐서 명주영

(溟州營)의 창고 안에 간직하였습니다. 지금 명주성도 위태로워 지키지 못

하게 되었으니 어부(御府)625)에 옮겨 둠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좋

다고 윤허하였다. 야별초(夜別抄)626) 10명을 뽑아 걸승을 데리고 가서 명주

성에서 가져와 내부(內府)627)에 들여 모셔 두도록 하였다. 그때 일한 10명

에게 각각 은 1근과 쌀 5섬을 주었다.

後百餘年, 野火連延到此山, 唯二聖殿獨免其災, 餘皆煨燼.

及西山大兵已來, 癸丑甲寅年間, 二聖眞容及二寶珠, 移入襄

州城. 大兵來攻甚急, 城將陷時, 住持禪師阿行〈古名希玄〉, 以

銀合盛二珠, 佩持將逃逸, 寺奴名乞升奪取, 深埋於地. 誓曰,

“我若不免死於兵, 則二寶珠終不現於人間, 人無知者. 我若不

死, 當奉二寶獻於邦家矣.” 甲寅十月二十二日城陷, 阿行不免

而乞升獲免. 兵退後掘出, 納於溟州道監倉使. 時郎中李祿綏

爲監倉使, 受而藏於監倉庫中, 每交代傳受. 至戊午十一月, 本

業老宿祇林寺住持大禪師覺猷奏曰, “洛山二珠, 國家神寶. 襄

州城陷時, 寺奴乞升埋於城中, 兵退, 取納監倉使, 藏在溟州營

庫中, 今溟州城殆不能守矣, 宜輸安御府.” 主上允可. 發夜別

抄十人, 率乞升, 取於溟州城, 入安於內府. 時使介十人, 各賜

銀一斤, 米五石.

614) 원문의 서산대병(西山大兵)은 고려를 침공한 몽고군을 말한다. 고종 18년(1231)

     에 제1차 침공이 있은 뒤 1235년에 있었던 제3차 침공에 전국적인 피해를 당하고

     1238년의 제4차 침공에 황룡사탑이 소실되었으며 제7차 침공까지 계속되었다.

615) 고종 40년(1253)과 그 이듬해. 이때 몽고군의 제5차 침공이 있었다. 금천 영흥

     철원을 함락하고 충주를 공격하는 등 많은 피해를 입혔다.

616) 양주(襄州):지금의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신라 익령현(翼嶺縣)을 1221년에 거

     란군을 격퇴한 공으로 양주방어사(襄州防禦使)로 승격시켰는데, 1257년에 몽고

     의 침공에 항복하여 덕녕감무(德寧監務)로 격하되었다가 1260년에 지양주사(知

     襄州事)로 복귀되었다. 양산(襄山)이라고도 하였으며 조선에 들어 1416년에 양

     양으로 고쳤다. (『고려사』권58 지리지 翼嶺縣)

617) 양주의 함락은『고려사』기록에서 1년의 차이가 있다. 세가(世家)에서는 고종

     40년 10월에 “몽고군이 양주성을 함락하였다”(『고려사』권24)고 하였고, 지리지

     (地理志) 익령현(翼嶺縣)에서는 “고종 41년에 강등하여 현령을 삼았고, 44년에

     적에게 항복하여 다시 덕녕감무(德寧監務)로 강등하였다”(『고려사』권58)고 하

     였다. 이곳의 기록은 지리지의 것을 채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618) 감창사(監倉使):고려시대 양계지방에 두었던 6품 내지 7품의 관직. 매년 봄 가

     을 두 차례에 걸쳐 정기적으로 파견되어 주로 창고와 조세의 관리 및 감독에 관

     한 임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감창사는 동서북면에 둔다. 명종 3년에 5도

     감창사를 두어 모두 권농사를 겸하게 하였다. 監倉使, 東西北面置之. 明宗三年, 五道

     監倉使, 皆兼勸農使.”『고려사』권77 百官志)

619) 낭중(郎中):고려 시대에 중앙 관부인 상서성(尙書省)과 상서 6부 등에 설치한

     정5품의 관직. 상서, 시잘 다음의 세 번째 관직이었다. 1257년에 정랑(正郞)으로

     개칭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다.

620) 이녹수(李祿綏):원외랑(員外郞)의 직책으로 고종 45년에 고려 가주(嘉州) 등에

     주둔한 여추달을 만나 교섭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다.(『고려사』 권24 세가 고종

     45년 7월 을묘 ; 경신)

621) 원문의 본업(本業)은 조계업(曹溪業), 곧 조계종을 말한다. 고려 때는 종파를 ‘업

     (業)’으로 불렀는데 일연 자신이 소속된 조계종을 이른 것이다.

622) 노숙(老宿):나이가 많아 경험이 풍부한 사람. 불교에서는 오랫동안 수행하여

     덕이 높은 스님을 말한다.

623) 기림사(祇林寺):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함월산(含月山)에 있는 절. 682년에

     신라 신문왕이 즉위한 다음해에 부왕인 문무왕을 위해 지은 감은사에 다녀 오

     다 용으로부터 옥대(玉帶)를 받았고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 근처에서 점심을 들

     었다고 한 기사가 있어(『삼국유사』 권2 기이 萬波息笛) 신문왕 이전에 창건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경북 동부 일대의 대찰로서 일제 시기에는 불국사를 말사로

     두었던 본사였다. 건칠보살좌상을 비롯한 소조삼존불상과 삼층석탑 등 많은 유

     물이 있고 대적광전의 소조 삼존불에서 출토된 많은 양의 오래된 전적과 유물

     등 매우 풍부한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

624) 각유(覺猷):고려 정부의 강화천도(1232) 당시에 내전(內殿)의 기도승으로 있던

     스님.

625) 어부(御府):임금의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626) 야별초(夜別抄):무신정권 이후 개경과 지방의 주요 주현에 두어 야간 경비를

     담당하게 하던 군대. 후에 좌우(左右) 이별초(二別抄)와 신의군(神義軍)의 삼별

     초(三別抄)로 확대되었다.

627) 내부(內府):궁중의 창고

 

   옛날에 신라시대에 세달사(世達寺)628)〈지금의 흥교사(興敎寺)629)〉의 장사(莊

舍)630)가 명주 나리군(㮈李郡)631)에 있었는데,〈지리지를 살펴 보니 명주에는 나

리군(㮈李郡)이 없고 나성군(㮈城郡)632)만 있는데, (나성군은) 본래 나생군(㮈生郡)으로 지

금의 영월(寧越)633)이다. 또 우수주(牛首州)634)의 영현에 나령군(㮈靈郡)635)이 있는데

본래 나이군(㮈已郡)이며 지금의 강주(剛州)636)이다. 우수주는 지금의 춘주(春州)637)이

다. 지금 나리군이라 하는 것이 어느 것인지 알 수 없다.〉본사에서 조신(調信) 스님

을 보내 지장(知莊)638)으로 삼았다. 조신이 장사(莊舍)에 와 있는 동안 태

수 김흔(金昕)의 딸을 좋아하여 깊이 매혹되었다. 여러 차례 낙산 관음 앞

에 나아가 몰래 기도하며 행운을 빌었으나 몇 년 사이에 그녀는 배필이 생

겼다. 다시 법당 앞에 가서 관음이 이루어주지 않음을 원망하며 날이 저물

도록 슬피 울다가 그리운 생각에 지쳐 잠깐 졸았다. 갑자기 꿈에 김씨 낭자

가 기뻐하는 얼굴로 문을 들어서서 활짝 웃으며639) 말하기를, “제가 일찍이

당신을 얼핏 보고 마음으로 사랑하여 잠시도 잊지 않았으나 부모님의 명에

쫓기어 억지로 다른 사람을 따랐습니다. 이제 부부가640) 되고자 왔습니다.”

하였다. 조신이 미칠 듯이 기뻐하며 함께 고향에 돌아왔다.

   40여 년을 살면서 자식이 다섯 명 있었다. 집은 단지 네 벽 뿐이고641) 나

물로도642) 끼니를 잇지 못하게 되자 마침내 곤궁643)에 빠져 서로 잡고 이끌

면서 사방으로 입에 풀칠하러 다녔다. 이렇게 하기를 10년만에 들판을 두

루 다니느라 옷이 갈갈이 찢어져644) 몸을 가리지 못하였다. 마침 명주 해현

령(蟹懸嶺)을 지나다가 열다섯살 난 큰 아이가 갑자기 굶주려 죽어 통곡하

면서 길에 묻었다.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우곡현(羽曲縣)645)〈지금의 우현(羽

縣)이다〉으로 가서 길가에 띠집을 짓고 살았다. 부부가 늙고 병들고 굶주려

일어나지도 못하니 열 살 난 여자아이가 돌아다니며 구걸하다가 동네 개에

게 물려 고통을 호소하며 앞에 누우니 부모가 슬퍼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

다. 부인이 어려워하여 머뭇거리며 눈물을 씻고 급히 말하기를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으며 옷도 많고 깨끗하였습

니다. 맛있는 음식 하나라도 당신과 나누어 먹고 몇 자 안되는 옷도 당신과

함께 한지 50년이 되어 정은 더없이 깊어졌고 사랑도 얽힐대로 얽혔으니

정녕 두터운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근년에 와서 늙고 쇠약해서 병은 해가

갈수록 깊고 배고픔과 추위는 날로 심합니다. 곁방살이에 마실 것 한 병도

남이 주지 않으니 수많은 문간에서 당하는 수모는 산더미처럼 크고 아이들

이 춥고 굶주려도 보살필 겨를도 없었으니 어느 여가에 사랑이 있어 부부

간에 사랑하는 마음을 즐기겠습니까? 젊은 얼굴과 예쁜 웃음은 풀잎의 이

슬과 같고 아름답던646)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가 되었습니다. 당

신은 내가 있어 짐이 되고 나는 당신이 있어 근심이 많습니다. 옛날의 즐거

움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바로 우환이 되는 디딤돌이었습니다. 당신과 내

가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뭇새가 함께 굶주리는데 어찌 짝 잃은

난새가 거울에서 짝을 부르는 지를647) 알겠습니까? 어려울 때 버리고 좋을

때 따르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일은 아니나 하고 안 하는 것은 사람 마음

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만나고 헤어짐도 운수에 달린 것이니 이제 헤어지

기로 합시다.” 라고 하였다. 조신이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 나누어 가려고 하는데 여인이 말하기를 “나는 고향648)으로 가겠으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하며 손을 놓고 나아가려 할 때 꿈을 깨었다.

   쇠잔한 등이 어스름하게 비치고 밤은 장차 새려 하였다. 아침에 보니 수

염과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정신이 멍하여 세상 일에 생각이 없고 힘든 삶

에 염증이 나서 마치 백년의 괴로움을 겪은 듯 하여 탐내는 마음이 얼음 녹

듯 사라졌다. 이에 부끄러운 마음으로 관음보살을 대하여 참회하여 마지

않았다. 해현(蟹峴)에 가서 아이 묻은 자리를 파내 보니 돌미륵이었다. 깨

끗이 씻어 이웃 절에 봉안하였다. 서울에 돌아와 지장 일을 사임하고 사재

를 기울여 정토사(淨土寺)를 짓고 착한 일649)을 부지런히 닦았다. 그 후에

어떻게 세상을 마쳤는지 모른다.

昔新羅爲京師時, 有世達650)寺〈今與敎寺也.〉之莊舍, 在溟州㮈李

郡. 〈按地理志, 溟州無㮈李郡, 唯有㮈城郡, 本㮈生郡, 今寧越. 又牛首州領縣

有㮈靈郡, 本㮈已郡, 今剛州. 牛首州今春州. 今言㮈李郡, 未知孰是.〉本寺遣

僧調信爲知莊. 信到莊上, 悅太守金昕公之女, 惑之深. 屢就洛

山大悲前, 潛祈得幸, 方數年間, 其女已有配矣. 又往堂前, 怨

大悲之不遂已, 哀泣至日暮, 情思倦憊, 俄成假寢. 忽夢金氏

娘, 容豫入門, 粲然啓齒而謂曰,“ 兒早識上人於半面, 心乎愛

矣. 未嘗暫忘, 迫於父母之命, 强從人矣. 今願爲同穴之友, 故

來爾.” 信乃顚喜, 同歸鄕里.

計活四十餘霜, 有兒息五. 家徒四壁, 藜藿不給, 遂乃落魄, 扶

攜糊其口於四方. 如是十年, 周流草野, 懸鶉百結, 亦不掩體.

適過溟州蟹縣嶺, 大兒十五歲者忽餧死, 痛哭收瘞於道. 從率

餘四口, 到羽曲縣〈今羽縣也〉, 結茅於路傍而舍. 夫婦老且病,

飢不能興, 十歲女兒巡乞, 乃爲里獒所噬, 號痛臥於前, 父母

爲之歔欷, 泣下數行. 婦乃難澁拭涕, 倉卒而語曰, “予之始遇

君也, 色美年芳, 衣袴稠鮮. 一味之甘, 得與子分之, 數尺之

煖, 得與子共之, 出處五十年, 情鍾莫逆, 恩愛綢繆, 可謂厚

緣. 自比年來, 衰病歲益深, 飢寒日益迫. 傍舍壺漿, 人不容

乞, 千門之恥, 重似丘山, 兒寒兒飢, 未遑計補, 何暇有愛悅夫

婦之心哉? 紅顔巧笑, 草上之露, 約束芝蘭, 柳絮飄風. 君有

我而爲累, 我爲君而足憂. 細思昔日之歡, 適爲憂患所階. 君

乎予乎, 奚至此極? 與其衆鳥之同餧, 焉知隻鸞之有鏡. 寒棄

炎附, 情所不堪, 然而行止非人, 離合有數, 請從此辭.” 信聞

之大喜, 各分二兒將行, 女曰, “我向桑梓, 君其南矣.” 方分手

進途而形開.

殘燈翳吐, 夜色將闌, 及旦鬢髮盡白. 惘惘然殊無人世意, 已厭

勞生, 如飫百年辛苦, 貪染之心, 洒然氷釋. 於是慚對聖容, 懺

滌無已. 歸撥蟹峴所埋兒塚, 乃石彌勒也. 灌洗奉安于隣寺. 還

京師, 免莊任, 傾私財, 創淨土寺, 懃修白業, 後莫知所終.

628) 세달사(世達寺):강원도 영월군 남면 흥월리 태화산(太華山)에 있던 절. 신라 말

     에 궁예(弓裔)가 태봉(泰封)을 건국하기 전에 신라 왕실에서 쫓겨나 출가하여

     머물렀던 절이다.(『삼국사기』권50 열전 궁예)

629) 흥교사(興敎寺):강원도 영월군 남면 흥월리 태화산(太華山)에 있던 절. 개성

     의 흥교사와는 다르다. 인종의 아들인 원경(元敬)국사 충희(沖曦)의 비가 세워

     져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흥교사는 태화산의 서쪽에 있다. 고려 승 충

     희의 비가 있는데, 충희는 인종의 아들이다. 비문이 떨어져 나가 구절을 읽을

     수 없고 단지 비 음기에 대사의 문인을 기록해 두었다. 보문각학사 최선이 왕

     명으로 비문을 지었다.(在大華山西, 有高麗僧沖曦碑. 曦仁宗之子, 碑文剝落, 讀不

     能句, 唯碑陰, 誌師之門人. 而寶文閣學士崔詵, 奉宣爲之文, 曰……故書國師門人凡

     二百二十一人于左云”(『신증동국여지승람』권46 寧越 佛宇) 전면과 음기의 일부분

     이『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수록되어 전한다.

630) 장사(莊舍):고려시대에 귀족이나 사찰 등에서 소유하던 농장.

631) 나리군(㮈李郡):지금의 강원도 나이군(㮈已郡)으로도 쓰며, 나령군(奈靈郡)이

     라고도 하였다. 고려 때는 강주(剛州)로 불렸다.『삼국사기』에는 “나령군은 본래

     백제의 나이군인데 파사왕이 취하였고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니 지금의 강주

     이다.(奈靈郡, 本百濟奈已郡, 婆娑王取之, 景德王改名, 今剛州.)라고 하였다.(『삼국

     사기』권35 지리지 朔州 奈靈郡)『고려사』에는 “순안현은 본래 고구려의 나이군

     인데 파사왕이 취하여고 경덕왕이 나령군이라 고쳤다. 성종 14년에 강주도단련

     사라고 불렀고 현종 9년에 내속하였으며 인종 21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

     령관을 삼았다.(本高句麗柰已郡, 新羅婆娑王取之, 景德王改稱柰靈郡. 成宗十四年

     稱剛州都團練使, 顯宗九年來屬, 仁宗二十一年更今名, 爲縣令官.)”(『고려사』 권57 지

     리지 경상도 順安縣)

632) 나성군(㮈城郡):지금의 강원도 영월군.『삼국사기』에 “나성군은 본래 고구려의

     나생군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니 지금의 영월군이다.(奈城郡, 本高句

     麗奈生郡, 景德王改名, 今寧越郡)”라고 하였다.(『삼국사기』권35 지리지 溟州 奈城

     郡) 여기의 기록과 ‘나’자 표기가 다르다.(『고려사』권56 楊廣道 寧越郡 참조. “寧越

     郡 本高勾麗奈生郡, 新羅景德王改奈城郡, 至高麗更今名.”)

633) 영월(寧越):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634) 우수주(牛首州):지금의 강원도 춘천. 통일신라 때는 삭주(朔州), 고려 때는 춘

     주(春州)라고 불렸다.『삼국사기』에 “삭주는 선덕왕 6년 당 정관 11년에 우수주

     가 되어 군주를 두었다. 혹은 문무왕 13년 당 함형 4년에 수약주를 두었다고 한

     다. 경덕왕이 삭주로 고쳤으니 지금의 춘주이다.(朔州 善德王六年 唐貞觀十一年,

     爲牛首州, 置軍主. [一云 文武王十三年 唐咸亨四年, 置首若州.] 景德王改爲朔州, 今

     春州.)”라고 하였다.(『삼국사기』 권35 지리지 溟州.『고려사』권58 지리지 春州 참조.

     “本貊國, 新羅善德王六年, 爲牛首州.”)

635) 나령군(㮈靈郡):주 631) 나리군 참조.

636) 강주(剛州):주 631) 나리군 참조.

637) 춘주(春州):주 634) 우수주 참조.

638) 지장(知莊):귀족이나 사찰이 소유하던 농장인 장사(莊舍)를 관리하던 사람.

639) 원문의 찬연계치(粲然啓齒)는 환하게 이가 드러나게 웃는 모양을 말한다.

640) 원문의 동혈지우(同穴之友)는 한 구덩이에 묻히는 친구로서 부부를 말한다.

641) 집이 네 벽 뿐[家徒四壁]이라는 것은 가난한 집을 말한다.

642) 원문의 여곽(藜藿)은 명아주와 콩잎으로 가난한 사람이 먹는 거친 식사를 가리

     킨다.

643) 원문의 낙탁(落魄, 영락할 탁)은매우 곤궁한 처지에 놓인 것을 말한다.

644) 원문의 현순백결(懸鶉百結)은 메추라기를 매달아 놓은 것처럼 떨어진 곳을 기

     운 누더기 옷을 말한다.

645) 우곡현(羽曲縣):우곡현(羽谷縣)이라고도 쓴다. 지금의 강원도 삼척군. 『삼국사

     기』에 “우계현은 본래 고구려의 우곡현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도

     그대로 쓴다.(羽谿縣, 本高句麗羽谷縣, 景德王改名, 今因之.)”라고 하였다.(『삼국사

     기』권35 명주 三陟郡 羽谿縣.『고려사』권58 지리지 양광도 羽溪縣 참조. “羽溪縣, 本

     高勾麗羽谷縣, 新羅景德王改今名, 爲三陟郡領縣. 顯宗九年來屬, 別號玉堂.”)

646) 원문의 지란(芝蘭)은 지초와 난초를 말하는데, 향기가 아름다운 꽃을 말한다. 그

     래서 지란을 약속했다는 것은 아름답던 약속을 뜻한다.

647) 원문의 척란지유경(隻鸞之有鏡)은 짝 잃은 난새가 제 그림자가 거울에 비치는

     것을 보고 제 짝을 생각해 울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상대방을 그리워하는

     것을 말한다.

648) 상재(桑梓):고향이나 고향집을 이르는 말한다. 옛날에 집 담 밑에 뽕나무와 가

     래나무를 심은 데서 유래한다.

649) 본문의 백업(白業)은 착한 일, 즉 선업(善業)을 말하는데 악업(惡業), 무기업(無

     記業)과 함께 삼성업(三性業)의 하나이다.

650) 원문의 ‘逵’는 ‘達’의 오자

 

   논의하여 말한다. 이 전기를 읽고 책을 덮어 놓고 미루어 생각하니 어찌

반드시 조신대사의 꿈만이 그러하겠는가? 지금 모든 사람이 인간 세상이

즐거운 줄만 알고 기뻐하며 애쓰지만 다만 깨닫지 못한 것일 뿐이다. 이에

사(詞)를 지어 경계한다.

   즐거움은 잠깐이라 마음은 벌써 한가롭고

   어느덧 근심 속에 얼굴 늙어 파리하구나.

   다시 조밥 익기를651) 기다리지 말라

   힘든 삶이 한바탕 꿈인줄 깨달으라.

   몸 다스리는 잘잘못은 먼저 마음을 참되게 하는 것

   홀아비는 미녀652) 꿈꾸고 도적은 창고 꿈꾼다.

   어찌하면 가을의 맑은 밤 꿈과 같을까

   때때로 눈 감고 청량세계 이르리.

議曰 讀此傳, 掩卷而追繹之, 何必信師之夢爲然. 今皆知其人

世之爲樂, 欣欣然役役然, 特未覺爾. 乃作詞誡之曰

快滴須臾意已閑, 暗從愁裏老倉顔. 不須更待黃粱熟, 方悟勞

生一夢間.

治身臧否先誠意, 鰥夢蛾眉賊夢藏. 何似秋來淸夜夢, 時時合

眼到淸凉.

651) 원문의 황량숙(黃粱熟)은 인생의 부귀공명이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황량몽

     (黃粱夢) 또는 한단몽(邯鄲夢)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때 노생이라는 젊은이가

     한단(邯鄲)의 주막에서 도사 여옹(呂翁)으로부터 베개를 빌려 잠이 들었다. 꿈

     속에 부귀영화를 누리며 80까지 잘 살았는데, 깨어 보니 주인이 짓던 메조밥이

     채 익지 않았더라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652) 원문의 아미(蛾眉)는 나방의 눈썹처럼 아름다운 미인을 말한다.

 

어산의 부처 그림자

 

[해제]

밀양의 만어산이 북인도 야건가라국에 있다는 부처의 그림자가 있는 곳

이라는 이야기를 여러 관련 기록과 견주어 살펴본 편이다. 만어산에 살고

있던 나찰녀가 인근의 가야 연못에 살던 독룡과 사귀어 비를 내리게 함으

로써 곡식이 익지 않게 하자 가야 왕이 부처에게 청하여 나찰녀의 해악을

그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첫 번째로 실렸다. 이어 고려 중기에 이곳에 만

어사를 창건하였는데, 이곳의 부처 그림자가 인도의 것과 같다는 글을 보

고 직접 찾아 보니 골짜기의 돌들이 쇳소리와 옥소리를 낸다는 것 등은 전

하는 이야기 일부가 사실이라고 확인하였다.

이어 이 설화의 전거로 『관불삼매경』의 내용을 들어 설명하였다. 동굴의

나찰들이 독룡과 어울려 난폭한 행동을 그치지 않자 왕의 부탁으로 부처가

용왕과 나찰들에게 삼귀오계를 설하였다. 용왕은 이를 듣고 나서 부처가

항상 머물기를 청하니 부처는 이에 석굴 안에 들어가 좌정하여 천 오백년

을 지내겠다고 하였다. 부처는 돌 속으로 들어가 밖으로 형상을 비쳐 보였

는데,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가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으며, 부처가

바위를 밟으면 금과 옥 소리가 났다고 한다. 그리고『고승전』과 법현의『불

국기』와 같은 대표적인 인도 여행기, 특히 현장의『대당서역기』에 나오는

나갈가라국에 있다는 부처의 그림자 설화를 상세히 소개하였다. 만어산의

부처 그림자가 인도에 있다는 유적과 상통성을 강조하며 신라 땅이 부처와

인연이 있다는 불연국토설(佛緣國土說)을 강조한 설화 중의 하나이다. 자

료로는『고기』와 고려 승려 보림의 견해 그리고 전거가 되는 불경과 구법

여행기를 들었다.

 

[역주]

어산의 부처 그림자

 

   고기(古記)에 말하였다.

   “만어산(萬魚山)653)은 옛날의 자성산(慈成山)인데, 또는 아야사산(阿耶

斯山)654)〈당연히 마야사(摩耶斯)라고 해야 한다. 한자로는 물고기이다.〉이라고 한다.

그 옆에 가라국(呵囉國)655)이 있었는데, 옛날에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

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곧 수로왕(首露王)이다.656) 그때 경

내에 옥지(玉池)가 있었는데, 그 연못에 독룡이 살았다. 만어산에는 다섯의

나찰녀(羅刹女)657)가 있어서 (용과) 왕래하며 사귀었기 때문에 때때로 번

개와 비를 내려 4년이 지나도록 오곡이 익질 않았다. 왕이 주술로 막으려

했으나 할 수 없어서 머리를 숙이고 부처님에게 설법해주기를 청하여 그후

나찰녀가 오계(五戒)658)를 받아 이후로는 해악이 없었다. 이 때문에 동해

의 물고기와 용이 변하여 골짜기를 가득 채운 돌이 되어 각기 종(鍾)과 경

쇠(磬)의 소리를 내게 되었다.”〈이상은 고기이다〉659)

   또 살펴보면 대정(大定)660) 20년(1180) 경자년은 명종 11년661)인데, 처음

으로 만어사(萬魚寺)662)를 창건하였다. 동량(棟梁)663)인 보림(寶林)이 글을

올려 아뢰었다.

   “산 속의 기이한 자취와 북천축(北天竺)664) 가라국(訶羅國)665)의 부처님

그림자에 관한 일은 서로 맞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산 옆

의 가까운 곳에 양주(梁州)666) 경계에 옥지(玉池)가 있는데, 이곳에 독룡이

살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둘째는 가끔 강변에서 구름이 일어나 산꼭대

기까지 이르는데, 구름 속에서 음악 소리가 나는 것이 이것입니다. 셋째는

부처 그림자의 서북쪽에 반석이 있는데 항상 물이 고여 끊이지가 않는데

이를 부처님이 가사(袈裟)를 빨던 곳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상은 모두 보림의 이야기이다.667)

   지금 친히 와서 보고 예를 드리니 역시 분명하여 믿을 만한 것이 두 가지

가 있다. 골짜기 안의 돌의 삼분의 이가 모두 금옥(金玉)의 소리를 내는 것

이 그 하나요, 멀리서 바라보면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보이지 않아 혹은 보

이고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이 그 하나이다. 북천축의 글은 뒤에 자세히 기록

했다.

魚山佛影

古記云.“ 萬魚山668)者, 古之慈成山也, 又阿耶斯山〈當作摩耶斯,

此云魚也〉. 傍有呵囉國, 昔天卵下于海邊, 作人御國, 卽首露王.

當此時, 境內有玉池, 池有毒龍焉. 萬魚山有五羅刹女, 往來交

通, 故時降電雨, 歷四年, 五穀不成. 王呪禁不能, 稽首請佛說

法, 然後羅刹女受五戒, 而無後害. 故東海魚龍, 遂化爲滿洞之

石, 各有鍾磬之聲.”〈已上古記〉

又按, 大定十二年庚子, 卽明宗十一年也, 始創萬魚寺. 棟梁

寶林狀奏所稱.“ 山中奇異之迹, 與北天竺訶羅國佛影事, 符

同者有三. 一山之側近地梁州界玉池, 亦毒龍所蟄是也. 二有

時自江邊雲氣始出, 來到山頂, 雲中有音樂之聲是也. 三影之

西北有盤石, 常貯水不絶, 云是佛浣濯袈裟之地是也.” 已上

皆寶林之說.

今親來瞻禮, 亦乃彰彰, 可敬信者有二. 洞中之石, 凡三分之

二, 皆有金玉之聲, 是一也. 遠瞻卽現, 近瞻不見, 或見不見等,

是一也. 北天之文, 具錄於後.

653) 만어산(萬魚山):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丹場面)과 삼랑진읍(三浪津邑)의 경

     계에 있는 높이 670m의 산.『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6 밀양의

     산천(山川)조에 “만어산은 부(府)의 동쪽으로 20리 거리에 있다”고 하였고, 다시

     불우(佛宇)조에 만어사는 만어산에 있다고 하였다. 또 만어산에 바로 이어 자씨

     산(慈氏山)이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 편에 나오는 자성산이 이와

     관련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654) 아야사산(阿耶斯山):이 편의 다음에 나오는『관불삼매해경』과 연관을 지으려

     면 아나사(阿那斯)가 되어야 한다. 그 뜻은 먹을 것이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阿

     那斯[譯曰無食處也],『翻梵語』권9, 大54-1043c19)

655) 가라국(呵囉國):가라(加羅) 또는 가락(駕洛)으로도 썼던 가야(加耶)를 말한다.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와 함께 각축을 벌이며 남해안과 낙동강 일대를 중심으

     로 활동했던 고대 국가로 서기 전후 무렵부터 김해지방과 고령지방이 중심이었

     으며 562년에 신라에 멸망하였다.『삼국유사』권2 기이「가락국기(駕洛國記)」에

     고려 때 정리한 가야의 역사가 실려 있다.

656) 김해에 전하는 수로왕신화(首露王神話)는『삼국유사』「가락국기」에 수록되어

     있다. 김해 지방을 다스리던 구간(九干)이 서기 42년에 구지봉에서 천신을 맞이

     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 6개에서 태어난 동자들이 6가야의 왕이 되었는

     데, 그중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수로로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여 대가락 또는 가

     야국이라 불렀다 한다.

657) 나찰녀(羅刹女): rāksasī 여성 나찰. 나찰(羅刹, rāksasa)은 본래 인도 토착 민

     족의 이름이었는데 아리아인이 인도를 정복하고 나서 악인의 대명사가 되어 악

     귀(惡鬼)를 모두 일컫는 이름이 되었다. 나찰은 검은 몸에 붉은 머리와 푸른 눈

     을 가진 모습이지만 나찰녀는 절세미인의 매력적인 여인으로 오직 사람의 피와

     살만을 먹는다고 한다. 스리랑카에는 나찰녀 나라가 있다고 전해 왔다. 나찰은

     공중을 날고 땅 위를 빨리 가는 등 신통력을 가져 포악하고 두려운 존재로 인식

     되었다. 그러나 불교 경전에서는 수호신이 되어 나찰천은 12천의 하나가 되고

     나찰녀도 수호신으로 등장하게 된다.

658) 오계(五戒):불교에 귀의하는 재가(在家) 신도가 지키는 다섯 가지의 계율. ①

     생명있는 것을 죽이지 말 것(不殺生), ②남이 주지 않은 것을 훔치지 말 것(不偸

     盜), ③음행하지 말 것(不邪淫), ④거짓말하지 말 것(不妄語), ⑤술을 마시지 말

     것(不飮酒).

659) 현재 만어산 안쪽 만어사 아래 골짜기에 크고 작은 돌이 가득 차 있는 돌너덜이

     있는데, 돌들의 모양이 마치 물고기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만어석(萬魚石)이

     라 하였으며, 이 돌을 두드리면 쇳소리가 나서 종석(鍾石)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전해오는 설화가 있다. 동해 용왕의 아들이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낙동강 건너 무척산의 스님에게 새로 살 곳을 알려달라고 부탁하자 스님은 가

     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 있는 곳이라고 일러주었는데, 왕자가 길을 떠나자 수많

     은 고기떼가 뒤를 따랐다. 왕자가 머물러 쉰 곳이 이곳 만어사였고 왕자는 돌로

     변해 미륵석이 되었으며 고기들은 크고 작은 고기 모양의 돌이 되었다. 만어사

     미륵전 안에 있는 커다란 돌이 미륵석이며, 만어사 아래 겹겹으로 깔린 돌너덜

     이 고기가 변한 만어석이라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26 밀양 古蹟) 조선 

     세종(世宗) 때 이 돌로 경쇠를 만들었으나 음률에 맞지 않아 폐기하였다고 한다.

660) 대정(大定):금(金) 세종(世宗)의 연호. 1161~1189년 사용. 고려 의종 15~명종

     19년. 그 대정 12년(1172)의 간지는 임진(壬辰)이고, 대정 연간의 경자년은 20년

     (1180)으로 고려 명종 11년에 해당한다. 명종 11년은 대정 20년 경자년과 일치

     한다. 따라서 원문의 대정 12년은 20년의 잘못이다.

661) 명종 11년:현재 고려시대 연표로 사용하는 유년칭원법에 따르면 명종 11년은

     1181년이다. 그러나 고려 당시에 사용하던 즉위년칭원법에 따르면 명종 11년이

     경자년이고 1180년이다. 따라서 여기서 사용한 11년은 고려시대의 즉위년칭원

     법에 따른 것이다.

662) 만어사(萬魚寺):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丹場面)과 삼랑진읍(三浪津邑)의 경계

     에 있는 높이 670m의 만어산 서쪽 기슭에 있는 절로 3층석탑(보물 466) 등의 유

     물이 있다. 절 아래에 돌너덜이 있는데, 동해 용왕의 아들이 고기떼와 함께 이곳

     에 이르러 왕자는 큰 미륵돌로 변하였고 수많은 고기들은 크고 작은 돌이 되어

     만어석이 되었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26 밀양 古蹟)

663) 동량(棟梁):마룻대(棟)와 들보(梁)가 될만한 훌륭한 인물, 즉 동량지재(棟梁之

     材)의 준말로 일가(一家) 또는 일국(一國)의 중임(重任)을 맡을 만한 사람을 말

     한다. 불법(佛法)을 바르게 이끌 인재를 뜻하는 말인데, 주로 사찰의 임무를 맡

     은 이를 일컫는 이름으로 쓰였다.

664) 북천축(北天竺):천축(天竺)은 한자문화권에서 인도를 부르는 명칭이다. 북천축

     은 북인도인데, 현장(玄奘)은 남파국(濫波國)에서 설다도려국(設多圖盧國)까지

     의 경역을 북천축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북쪽으로는 힌두쿠시산맥을 넘은

     지역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인더스강 상류를 포함한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

665) 가라국(訶羅國):『관불삼매해경』에 나오는 야건가라국(耶乾訶羅國). 우리나라

     가야와 같은 음으로 비유되어 쓰였다.

666) 양주(梁州):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梁山市). 낙동강 하류의 넓은 분지에 있어

     신라 초기 가야와 교섭이 잦았던 곳으로, 신라의 외곽을 방어하는 군사적인 요

     충지였다.

667) 보림의 이야기에서 말하는 세 가지 일치점 중에서 『대당서역기』 나갈라갈국의

     기사에서는 연못에 사는 용과 불영굴 근처의 부처님이 가사를 빨던 곳에 대한 이

     야기는 있지만 강변에서 피어오르는 구름과 그 속에서 들리는 음악소리는 없다.

668) 원문의 ‘山’은 ‘寺’의 오자

 

   가함(可函)669)의『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670) 제7권에 이런 글이 있다.

“부처가 나건가라국(那乾訶羅國)671) 고선산(古仙山)672) 담복화(薝葍

花)673) 숲의 독룡 곁에 푸른 연꽃이 핀 샘의 북쪽에 나찰 동굴 가운데의 아

나사산(阿那斯山) 남쪽에 이르렀다. 이때 그 동굴에 다섯 나찰이 있어 여룡

(女龍)으로 변화하여 독룡과 서로 통하고 있었다. 용(龍)은 다시 우박을 내

리고 나찰은 난폭한 행동을 하여 굶주림과 질병이 4년이나 계속되었다. 왕

이 놀라고 두려워 천지신674)에 빌며 제사드려도 아무런 도움됨이 없었다.

이때 총명하고 지혜가 많은 한 브라만675)이 있어 대왕에게 아뢰어 말하기

를 ‘카필라국[伽毗羅國]676) 정반왕(淨飯王)677)의 아들이 지금 도를 이루어

석가모니(釋迦牟尼)678)라고 부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마

음속으로 크게 기뻐하여 부처를 향해 예배를 올리며 말하기를, ‘오늘날 부

처의 빛679)이 이미 일어났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우리 나라에는 오시지 않

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여래가 여러 비구들에게 명하여 육신통(六神

通)680)을 얻은 자는 부처의 뒤를 따르게 하고 나건가라왕 불파부제(弗巴浮

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때 세존의 정수리에서 광명이 나더니 일만의

대화불(大化佛)681)로 변화하여 그 나라로 갔다. 이때 용왕과 나찰녀가 오체

투지(五體投地)682)하며 부처에게 계를 받기를 구하고, 부처는 곧 (그들을)

위하여 삼귀(三歸)683) 오계(五戒)를 설하였다.

   용왕이 다 듣고 나자 꿇어 앉아 합장하고 세존이 이곳에 항상 머무르기

를 청하였다. ‘부처께서 만약 계시지 않는다면 저는 나쁜 마음이 생겨 아뇩

보리(阿耨菩提)684)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때 범천왕(梵天王)685)이 다시

와서 부처에게 예를 올려 청하기를, ‘바가바(婆伽婆)686)께서는 미래 세상

의 모든 중생을 위해야 하기 때문에 오직 이 작은 용 하나만을 위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백천(百千)의 범왕687)이 모두 이와 같이 청하였다. 이

때 용왕이 칠보대(七寶臺)를 내어 여래에게 바치니 부처가 용왕에게 말하

기를, ‘이 자리는 필요 없으니, 그대는 지금 나찰의 석굴만을 가져다가 나

에게 시주하라.’라고 하니 용이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때 여래가 와서 용

왕을 위로하며 ‘내가 너의 청을 받아들여 네 굴 속에 앉아서 천오백년을 지

내겠다’라고 하고는 부처는 몸을 솟구쳐 돌 속에 들어갔다. (돌은) 마치 맑

은 거울과 같아져서 사람들이 얼굴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모든 용들이 나타

났으며, 부처는 돌 속에 있으면서 밖으로 비쳐 나타났다. 이때 모든 용들이

합장688)하고 기뻐하며, 그 곳을 나오지 않고 항상 부처를 볼 수 있었다. 이

때 세존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석벽(石壁) 속에 앉아 있었는데, 중생들

이 볼 때는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 천

인이 부처의 그림자에 공양하면 그림자도 또한 설법을 하였다.”689)

   또 말하기를, “부처가 바위 위를 밟으면 금과 옥의 소리가 났다”고 한다.

可函觀佛三昧經第七卷云.“ 佛到那690)乾訶羅國古仙山, 薝葍

花林毒龍之側, 靑蓮華泉北, 羅刹穴中, 阿那斯山南. 爾時彼

穴有五羅刹, 化作女龍, 與毒龍通. 龍復降雹, 羅刹亂行, 飢饉

疾疫, 已歷四年. 王驚懼, 禱祀神祇, 於事無益. 時有梵志, 聰

明多智, 白言大王,‘ 伽毗羅淨飯王子, 今者成道號釋迦文’.

王聞是語, 心大歡喜, 向佛作禮曰, ‘云何今日佛日已興, 不到

此國?’ 爾時如來勅諸比丘, 得六神通者, 隨從佛後, 受那乾訶

羅王弗巴浮堤請. 爾時世尊頂放光明, 化作一萬諸大化佛, 往

至彼國. 爾時龍王及羅刹女, 五體投地, 求佛受戒. 佛卽爲說

三歸五戒.

龍王聞已, 長跪合掌, 勸請世尊常住此間.‘ 佛若不在, 我發惡

心, 無由得成阿耨菩提.’ 時梵天王復來禮佛請,‘ 婆伽婆爲未

來世諸衆生, 故莫獨偏爲此一小龍.’ 百千梵王皆作是請. 時龍

王出七寶臺, 奉上如來, 佛告龍王.‘ 不須此臺, 汝今但以羅刹

石窟持以施我.’ 龍歎喜.〈云云.〉 爾時如來安慰龍王,‘ 我受汝

請, 坐汝窟中, 經千五百歲.’ 佛湧身入石. 猶如明鏡, 人見面

像, 諸龍皆見, 佛在石內, 映現於外. 爾時諸龍合掌歡喜, 不出

其地, 常見佛日. 爾時世尊結伽趺坐在石壁內, 衆生見時, 遠望

卽現, 近則不現. 諸天供養佛影, 影亦說法.” 又云, “佛蹴嵓石

之上, 卽便成金玉之聲.”

669) 가함(可函):『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은 몇 개의 경을 모아 함에 수납하였는데,

     이때 천자문의 글자 순서대로 함에 이름을 붙였다. 가함은 187번째 함이다.

670)『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Buddha-dhyāna-samādhisāgara-sūtra.『불설관불

     삼매해경(佛說觀佛三昧海經)』의 줄임말로『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또는

    『관불경(觀佛經)』이라고 부른다. 모두 10권으로 동진(東晋) 불타발타라(佛馱跋

     陀羅)가 398년에서 421년 사이에 번역하였다. 부처가 카필라국[伽毗羅國]의 니

     그로다[尼拘樓陀] 숲에서 부왕과 이모를 위해 관불삼매에 들어가서 깨달음을

     설한 내용으로서 12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도신화 등이 풍부하게 사용되고

     있다. 관불삼매란 한 마음으로 부처의 상호(相好)와 공덕을 생각하고 관찰하는

     선정(禪定)을 말한다.

671) 나건가라국(那乾訶羅國):뒤에 인용한『서역전』에는 나갈국,『대당서역기』에는

     나갈가라국으로 표기하였다.『관불삼매경』에 나건가라국으로 되어있다. 같은

     인용문에서 이 나라의 왕을 ‘나건가라왕’이라 하였으므로, 원문의 야건가라국

     은 ‘나(那)’의 잘못으로 생각된다.

672) 고선산(古仙山):『대당서역기』나『서역전』등의 불영(佛影)에 관한 묘사에서 그

     굴이 있는 산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고,『고승전(高僧傳)』 혜원전에는 고선인(古

     仙人) 석실(石室) 중에 독룡을 교화하기 위해 남긴 불영(佛影)이 있다고 하여 비

     슷한 서술을 보인다.

673) 담복화(薝葍花):치자나무 꽃.『관불삼매해경』에는 담복화(薝蔔花).

674) 원문의 신기(神祇)는 천신(天神)과 지기(地祇) 곧 천지신을 말한다.

675) 원문의 범지(梵志)는 브라만( brāhman3 a) 곧 바라문(婆羅門)을 말한다. 범지는

     범천(梵天)의 법을 구하여 청정무구한 곳에 머물고 범천에 낳기를 바라므로 범

     지라 한역한다. 또 일체 외도(外道)의 출가(出家)한 자를 범지라고도 한다.『대

     지도론(大智度論)』권56에 “범지는 일체 출가한 외도를 말한다. 그 법을 받들어

     쓰는 자가 있으면 또한 범지라고 한다.(大 25-461b2~3. 梵志者, 是一切出家外道.

     若有承用其法者, 亦名梵志.)”라고 하였다.

676) 카필라국[伽毗羅國]: Kapila-vastu. 석가의 탄생국. 현재 인도와 네팔에 각각

     카필라국이라는 유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더 알려진 네팔 카필라는 지금의 타라

     이(Tarai)의 틸라우라 코트(Tilaurakot) 지방에 해당한다. 석가모니 생존시에 슈라

     바스티[舍衛城, Śrāvastī]가 서울인 코살라국[憍薩羅, Kośalā]에 멸망하였다.

677) 정반왕(淨飯王): Śuddhodana. 카필라국의 왕, 석가의 아버지. 백정왕(白淨王)이

     라고도 한다. 사자협왕(師子頰王, Sim3 hahanu)의 큰아들로 인근 천비성(天臂城,

     Devadaha) 성주의 딸인 마야(摩耶, Māyā)과 마하파사파제(摩訶波闍波提,

     Mahāpajāpatī)를 왕비로 맞아 부처가되는 싯달타[悉達多, Siddhārtha]태자를 낳았

     다. 만년에 경건하게 부처에 귀의하여 불타와 제자들을 외호하는 자가 되었다.

678)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 석가문(釋迦文)이라고도 한다. 줄여서 석가

     (釋迦), 혹은 모니(牟尼)라고도 한다. 능인(能仁), 능인(能忍) 등으로 번역하고,

     높여서 석가세존(釋迦世尊) 혹은 석존(釋尊)이라고도 부른다. 샤캬( sakya)는

     종족(種族)의 이름으로 능(能)의 뜻이고, 무니( muni)는 존칭으로 현인(賢人)

     의 뜻이어서, 석가모니는 석가족의 현인이라는 뜻이 된다.

679) 부처의 빛:부처의 예지와 덕행과 자비가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깨뜨려 주는 것

     이 태양이 어둠을 없애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부처를 태양에 비유하는 말이다.

680) 육신통(六神通):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6가지의 신통력. 천안통(天眼通:육안

     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신통), 천이통(天耳通:보통 귀로는 듣지 못할 음성을 듣

     는 신통), 타심통(他心通: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유롭게 아는 신통), 숙명통(宿命

     通:지나간 세상의 생사를 아는 신통), 신족통(神足通:어떤 장소에나 뜻대로 갈 수

     있는 신통), 누진통(漏盡通:모든 번뇌를 소멸하고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는 것을 깨닫는 힘).

681) 대화불(大化佛):응신(應身), 변화신(變化身). 중생의 근기(根氣)에 따라 여러 가

     지 형상으로 변하여 나타나는 불신(佛身)을 말한다.

682) 오체투지(五體投地):불교에서 예배하는 법의 하나로 인도에서는 가장 공경하

      는 예법이다. 오체는 두 팔과 두 무릎, 그리고 머리를 말한다. 먼저 두 무릎을 땅

     에 꿇고 두 팔을 땅에 대고 그 다음에 머리를 땅에 닿도록 하는 절.

683) 삼귀(三歸):삼귀의(三歸依) 또는 삼귀계(三歸戒), 불(佛)·법(法)·승(僧) 3보

     (寶)에 귀의함을 말한다. 불교도가 되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의식으로 귀의에는

     구호한다는 뜻과 향하여 간다는 뜻이 있어, 삼보에 의지하고 구호를 청하여 영

     원히 일체의 괴로움을 벗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684) 아뇩보리(阿耨菩提):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asam

     yak-sambodhi)의 줄임말. 무상정변지(無上正遍知),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

     覺), 또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고 번역한다. 부처 깨달은 지혜를 말한다.

     이는 평등하고 원만하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깨달은 도가 더 없이 높으

     므로 무상(無上)이라 하고, 두루 미쳐 포함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정변지(正遍

     知)라고 한다. 대승의 보살행은 모두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이어서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다고 한다. 그리고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완성

     한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불타(阿耨多羅三藐三佛陀) 곧 무상정등각자(無上正等覺

     者)라 한다.

685) 범천왕(梵天王): Brahmā. 범천(梵天). 인도 신화의 창조신으로 브라만교 3대

     신의 하나. 불교에 수용되어 색계 초선천이 범천에 속하는데 범중천(梵衆天)·

     범보천(梵輔天)·대범천(大梵天)의 셋으로 나뉘며 통칭하여 범천이라 한다. 범

     왕(梵王)이라고도 하며 사바세계의 주인이라고도 한다. 제석천(帝釋天)과 함께

     정법(正法)을 옹호하는 신이 되어 부처에게 제일 먼저 설법하기를 청한다. 항상

     부처를 오른편에서 모시며, 손에는 흰 먼지털이(拂子)를 들고 있다고 한다.

686) 바가바(婆伽婆): Bhagavat. 부처를 부르는 호칭의 하나. 박가범(薄伽梵)이라고

     도 음역하며, 유덕(有德)·유대공덕(有大功德)·중우(衆祐)·세존(世尊) 등으로

     번역한다. 모든 덕을 갖추어 세상의 존중과 공덕을 받는 자라는 뜻이니 곧 부처

     의 존칭이다.

687) 범왕:범천왕. 주 685) 참조.

688) 합장:두 손을 합쳐 마음을 집중하고 공경하고 예배하는 뜻을 갖는 것. 본래 인

     도의 예법 중의 하나로 9단계 중의 4번째였는데, 불교에서 수용하여 사용하였

     다. 두 손을 합친다는 것은 신성한 오른손과 부정한 왼손을 합침으로써 진실한

     면목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불교에서의 합장은 마음 속으로부터의 경의

     를 드러내는 것과 함께 사리에 들어맞는 뜻을 나타낸다.

689) 경전의 중간 중간에서 인용하였고, 경전 원문과 인용문에 약간의 차이가 있

     다.『불설관불삼매해경(佛說觀佛三昧海經)』권7 大15 p.679b7~12 ; b14~23 ;

     b29~c1 ; c24~27 ; 680c3~5 ; c17~23 ; c26~28 ; 681a23~b4.

690) 원문의 ‘耶’는 ‘那’의 오자

 

 『고승전(高僧傳)』691)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혜원(惠遠)692)이 천축에 부처

의 그림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옛날에 용을 위해 남긴 그림자로 북천축 월

지국(月支國)693) 나갈가성(那竭呵城) 남쪽의 옛 선인(仙人)의 석실 안에 있

다〈고 한다.〉694)

   또 법현(法顯)695)『서역전(西域傳)』696)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나갈

국(那竭國)697)의 경계에 이르렀다. 나갈성(那竭城) 남쪽으로 반 유순(由

旬)698)되는 곳에 석실이 있는데, 박산(博山)699)의 서남쪽이며, 부처가 이 가

운데에 그림자를 남겨 두었다. 십여 보쯤 떨어져서 그것을 보면 부처의 참

모습과 같이 광명이 찬란하나 가까이 갈수록700) 점점 희미해진다.701) 여러

나라의 왕들이 화공(畵工)을 보내어 모사(模寫)하도록 하였으나 비슷하게

그릴 수 없었다. 나라 사람들이 전하기를 ‘현겁(賢劫)702)의 천불(千佛)이

모두 이곳에 그림자를 남길 것이다’고 하였다. 그림자의 서쪽으로 백보쯤

떨어진 곳에 부처가 이 세상에 있을 때 머리를 깎고 손톱을 자른 곳이 있

다.703)”〈고 한다〉

   성함(星函)704)의『서역기(西域記)』705) 제2권에는 이런 글이 있다.706) 

“옛날에 여래가 세상에 계실 때 이 용이 소를 치는 사람이 되어 왕에게 젖(乳)

과 낙(酪)707)을 공급하였는데, 진상하다가 잘못하여 꾸지람을 들었다. 마

음 속에 노여움과 원한을 품고는 금전으로 꽃을 사서 공양하며 솔도파(窣

堵婆)708)에 수기(授記)709)하기를, ‘나쁜 용이 되어 나라를 파괴하고 왕을 해

치게 해주십시오.’ 하고는 석벽(石壁)으로 가서 몸을 던져 죽었다. 마침내

이 굴에 살면서 대용왕(大龍王)이 되어 나쁜 마음을 일으켰다. 여래가 이것

을 알고는 신통력으로 이곳에 이르니, 용이 부처를 보고 드디어 악독한 마

음을 그쳐서 살생하지 않겠다는 계[不殺戒]710)를 받고 청하기를, ‘여래께서

항상 이 굴에 계서서 항상 저의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부처가

말하기를, ‘나는 장차 적멸(寂滅)711)할 것이므로, 너를 위해 그림자를 남기

겠다. 네가 만약 악독하고 분한 마음이 생기면 항상 내 그림자를 보고 악독

한 마음을 그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부처는) 정신을 집중시켜 홀로 석실

(石室)에 들어갔는데,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

다. 또 돌 위의 발자취를 칠보(七寶)712)로 삼았다.”〈고 한다.〉 이상은 모두 경

문(經文)인데 대략 이와 같다.

   해동(海東)의 사람들은 이 산을 아나사(阿那斯)713)라 불렀는데 마나사

(摩那斯)714)라 해야 한다. 이는 번역하면 물고기이다. 대개 저 북천축의 일

을 가져다 이렇게 부른 것이다.

高僧傳云, “惠遠聞, 天竺有佛影, 昔爲龍所留之影, 在北天

竺月支國那竭呵城南古仙人石室中.”〈云云〉 又法現西域傳云,

“至那竭國界, 那竭城南半由旬有石室, 博山西南面, 佛留影

此中. 去十餘步觀之, 如佛眞形, 光明炳著, 轉近715). 轉微. 諸

國王遣工摹寫, 莫能髣髴. 國人傳云,‘ 賢劫千佛, 皆當於此留

影.’ 影之西百步許, 有佛在時剃髮剪爪之地.”〈云云〉

星函西域記第二卷云, “昔如來在世之時, 此龍爲牧牛之士, 供

王乳酪, 進奉失宜, 旣獲譴嘖. 心懷恚恨, 以金錢買花供養, 授

記窣堵婆, ‘願爲惡龍, 破國害王.’ 卽趣石壁, 投身而死. 遂居

此窟爲大龍王, 適起惡心. 如來鑑此, 變神通力而來至此, 龍

見佛, 毒心遂止, 受不殺戒, 因請‘如來常居此穴, 常受我供.’

佛言,‘ 吾將寂滅, 爲汝留影. 汝若毒忿, 常觀吾影, 毒心當止.’

攝神獨入石室, 遠望卽現, 近則不現. 又令石上蹴爲七寶.”〈云

云〉 已上皆經文, 大略如此.

海東人名此山爲阿那斯, 當作摩那斯. 此翻爲魚, 蓋取彼北天

竺事而稱之爾.

691)『고승전(高僧傳)』:중국 양(梁)나라의 혜교(慧皎)가 지은 고승들의 전기. 14권.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후한(後漢) 영평(永平) 10년(67)부터 양(梁) 천감(天監) 18

     년(519)까지 453년 동안에 있었던 257명의 고승에 대한 전기와, 이름만 남은 500

     명의 승려를 수록하였다.

692) 혜원(惠遠):혜원(慧遠, 335~417). 중국 동진(東晋)의 스님으로 정토종의 초조이

     자 염불결사의 시작인 여산(廬山) 백련사(白蓮社)의 창시자이다. 중국불교를 확

     립한 도안(道安)의 반야 강의를 듣고 출가하여 반야공관을 익히고 여산 동림사

     에서 많은 제자들에게 법을 전하였다. 관중에 들어온 구마라집과 서신으로 토

     의하는 등 반야학 선양에 열중하고 402년에 승려는 물론 일반인도 참여하는 백

     련사를 창립하여 정토염불 수행을 제창하였다. 출가 사문은 국왕에 경례하지

     않아도 된다는「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지어 국가 권력에 대한 불

     교의 독자성을 주장하였다. 구마라집이 주도한 장안과 더불어 혜원은 여산에서

     남방불교의 중심을 이루며 활발한 종교활동을 하였다.

693) 월지국(月支國):서역에 있던 나라. 대월지국(大月氏國)으로 불렸는데, 인도 북

     부와 힌두쿠시산맥의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어 인도와 중국의 문화 교류에

     큰 역할을 하였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는데도 지대한 역할을 하여 지루가참

     (支婁迦讖) 등이 지겸(支謙) 등이 중국에 와서 역경승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축법호(竺法護)는 월지족의 후예로서 월지보살(月支菩薩) 또는 돈황보살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694)『고승전(高僧傳)』권 6 의해 석혜원(釋慧遠)전에 있는 내용이다.(大50 p.385b8~

     11. “遠聞, 天竺有佛影, 是佛昔化毒龍所留之影, 在北天竺月氏國那竭呵城南古仙人石

     室中, 經道取流沙, 西一萬五千八百五十里, 每欣感交懷志欲瞻覩.”)

695) 법현(法現)은 법현(法顯, 337~422). 동진(東晋) 때의 승려. 장안에서 돈황과 호탄

     을 거쳐 인도에 가서 6년 동안을 머물면서 불적(佛蹟)을 두루 찾아보고, 계율과

     범어를 배우고 스리랑카로 건너가 상선을 타고 해로로 귀국길에 올라 412년에

     산동성에 도착하였다. 뒤에 장안의 도량사(道場寺)에서 인도에서 가져온 많은

     경(經)과 율(律)을 번역한 뒤 입적하였다. 파미르고원을 넘은 최초의 중국 승려

     로서, 그가 저술한 여행기인『고승법현전(高僧法顯傳)』은『불국기(佛國記)』라고

     도 하는데, 현장의『대당서역기』와 더불어 인도와 서역 여러 나라의 실정을 전

     하고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696) 서역전(西域傳):『고승법현전(高僧法顯傳)』 또는 『불국기(佛國記)』의 다른 이름.

697) 나갈국(那竭國): Nagarahāra. 나갈라갈(那揭羅曷), 나건가라(那乾訶羅) 등으로

     도 부른다. 북인도에 있던 나라 이름으로 이 나라 안에 석존이 과거세에 연등불

     로부터 수기를 받았다는 곳에 세운 아쇼카왕의 석주가 있었고, 성 동남쪽에는

     석존의 정골(頂骨)을 봉안한 7층탑이 있었다고 한다. 현장의 『대당서역기』 권2

     나갈라갈국(那揭羅曷國)에 “람파국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면 큰 고

     개를 넘고 큰 강을 건너 나갈라갈국에 이른다”고 하였다.(大51 p.878b25~26) 이

     곳의 위치는 현재의 아프카니스탄의 동북부에 해당하고, Jalahabad를 중심으로

     하는 카불강 유역 남부의 땅으로 추정된다.

698) 유순(由旬): yojana. 유사나(踰闍那)·유선나(踰繕那)·유연(由延) 등으로도 번

     역한다. 인도에서 거리를 재는 단위이다. 소가 멍에를 걸고 하루 가는 거리를 말

     하는데,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는 제왕이 하루 행군하는 거리로서 40리라고

     하였다. 실제 길이에 대해서는 19.5km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699) 박산(博山):나갈라갈의 불영굴 근처 지명.

700) 원문에는 ‘멀수록(遠)’이라 하였으나 다른 기록이나 의미상 ‘가까이 갈수록(近)’

     의 오자로 생각된다.

701)『법현전』에는 ‘가까이 갈수록 희미해진다(轉近轉微)’이고,『관불삼매경』이나『대

      당서역기』모두 가까이서 보면 안보이고 멀리서 보면 보인다고 기록하였으므로,

     원문의 ‘전원전미(轉遠轉微)’는 ‘전근전미(轉近轉微)’의 잘못으로 생각된다.

702) 현겁(賢劫):과거의 대겁 장엄겁(莊嚴劫), 현재의 대겁 현겁, 미래의 대겁 성수겁

     (星宿劫)을 말하는 삼겁(三劫)의 하나이다. 겁은 ‘극대(極大)의 시한(時限)’을 가

     리키며, 경전에 따라 다르나『구사론』에 의하면 1680만년이라 한다. 현겁은 현

    재주겁(現在住劫)으로 현겁(現劫)이라고도 하며, 천불현성(千佛賢聖)의 많은 현

     인이 출현하므로 현겁(賢劫)이라고 한다. 4-1 주15) 참조.

703)『고승법현전』大51 p.858c25 ; p.859a3~8.

704) 성함(星函):『고려대장경』의 464번째 함을 가리킨다.

705) 『서역기(西域記)』:『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당(唐) 현장(玄奘)이 저술하고 제

     자인 변기(辯機)가 정리하여 646년에 완성한 12권의 책. 현장이 16년간에 걸쳐

     구법여행(求法旅行)하는 동안에 서역의 여러 나라 곧 지금의 중국 서부와 투르

     키스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그리고 인도 등의 110여 나라를 직접 보고 또

     28개 나라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견문한 것을 귀국하고 나서 태종(太宗)의 명으

     로 저술한 것이다. 불교의 대승과 소승의 각 부파의 전파와 신앙 실정을 비롯하

     여 지리·풍속·언어·전설·산업 등 다양한 내용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기술하

     였다. 다른 책에서 찾을 수 없는 이런 자료적 기술은 근대에 들어 인도 등지의

     불교 유적으르 발굴하는데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706)『대당서역기』권2 나갈라갈국(那揭羅曷國)조에 보인다.(大51 p.879a5~16) 이곳

    『삼국유사』의 인용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전체적 내용은 거의 같다. 그러나

     이곳에 마지막 구절로 인용된 “정신을 집중시켜 홀로 석실에 들어갔는데, 멀리

     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또 돌 위의 발자취를 칠보로

     삼았다(攝神獨入石室, 遠望卽現, 近則不現. 又令石上蹴爲七寶.)”는 부분은『대당서

     역기』에는 없다.

707) 낙(酪):소젖이나 양젖을 끓여 만든 음료.

708) 솔도파(卒堵婆): stūpa. 솔도파(窣堵波) 등으로도 음역하고, 탑파(塔婆)·탑

     (塔)이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에서는 반원을 엎어 놓은 형태의 무덤을 말했는

     데, 석존이 입멸한 후 기념물의 의미가 더해져 쿠샨왕조 때 벽돌로 만든 많은 탑

     이 만들어져 석존의 유골이나 소지품 또는 머리카락 등이 함께 묻혔다. 이후 탑

     을 중심으로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나 대승불교가 시작되었다. 여기 인용한

   『대당서역기』에는 이 탑이 석존이 수기를 받은 연등불의 탑이라고 하였다.

709) 수기(授記): vyākarana. 수결(授決)·기별(記別)·기별(記莂)이라고도 한다. 본

     래 경전을 12가지로 구분할 때 교설을 분석하거나 문답 등의 방식으로 교리를

     해설하는 것을 말하였는데, 의미가 바뀌어 제자에게 깨달은 것이나 다음 세상

     에서 태어날 곳을 알려준다는 뜻으로 쓰였다. 후대에는 미래세의 깨달은 과보

     와 성불한 명호(名號)를 미리 알려주는 의미로만 사용되었다.

710) 살생하지 않겠다는 계[不殺戒]:5계의 하나로 모든 중생의 생명을 없애지 말라

     는 계율이다.

711) 적멸(寂滅): vyupaśama. 생사를 벗어나 적멸한 무위의 경지에 들어감을 말한

     다. 이 경지에서는 미혹한 세계를 멀리 떠나 쾌락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소승에

     서는 열반을 가리키며, 승려들이 죽는 것을 적(寂)이라 하여 입적(入寂), 시적(示

     寂), 원적(圓寂)이라 표현하는 것은 적멸의 줄임말로 쓰인 것이다. 열반(涅槃,

     nirvāna)은 적멸(寂滅)·멸도(滅度) 등으로도 번역한다. 열반은 원래 불어 끄는

     (吹滅) 것이나 그 상태를 의미하였는데 후에는 번뇌의 불을 다 태워 없애서 깨

     달음을 완성한 경지를 뜻하게 되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말하게 되었다. 여

     기서의 뜻은 부처의 죽음을 가리킨다.

712) 칠보(七寶):세상에서 진귀하게 여기는 일곱 가지의 보물. 경전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대체로 금·은·유리·마노·수정·산호·진주 등을 말한다.

713) 아나사(阿那斯):『관불삼매경』에도 아나사라고 하였다. 그 뜻은 먹을 것이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阿那斯[譯曰無食處也],『翻梵語』권9, 大54 p.1043c19) 그러나 일

     연은 경전과 우리나라의 전승을 모두 따르지 않고 물고기라는 뜻의 ‘마나사’라

     고 해야 한다고 다시 강조하고 있다.

714) 마나사(摩那斯): manasvin. 마나사용왕은『법화경』을 설법하는 회좌에 청중으

     로 참여한 8대 용왕(龍王)의 하나이고,『화엄경』에서는 비를 내리는 용왕이다.

     그래서 자비로운 마음[慈心], 높은 뜻[高意]으로 번역되기도 하며,(『一切經音義』

     권27, 大54 p.447a5 摩那斯龍王[摩那意也, 斯慈也, 流出也, 言此龍王凡興雲, 再皆從慈

     心出也.]) 총명하고 지혜로운(聰慧) 또는 위엄을 갖춘(具威)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翻譯名義集』 권2 大54 p.1078c11. 摩那斯, 此云大身, 或云大意, 或云大力.)

715) 원문의 ‘遠’은 ‘近’의 오자로 생각됨.

 

오대산의 오만 진신

 

[해제]

평창 오대산에 불보살의 진신이 상주한다는 설화를 담은 편이다. 『삼국

유사』에는 이 「오대산의 오만 진신」편과 나란히 「오대산 보질도태자의 전

기(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편을 두어 오대산 진신신앙의 근거로 세우고 있

다. 이 두 편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오만진신」편은 태자들의 설화 이전

에 오대산 진신신앙이 비롯되었다는 자장의 이야기를 실었다. 자장이 중국

에서 문수를 친견한 설화와 귀국 후 원녕사에서의 문수 친견과 정암사 창

건 이야기를 싣고 신의가 자장이 머물던 곳에 암자를 지은 것이 월정사임

을 말하였다.

다음에 이 편의 주인공인 보천과 효명 두 왕자의 이야기를 자장 시대인

듯 시작하였다. 두 왕자가 하서부 지역을 유람하다가 은밀히 오대산에 들

어가 은거하였다. 두 왕자는 각각 암자를 짓고 수행하면서 함께 다섯 봉우

리에 올라 중대 비로자나불과 1만 문수를 비롯하여 동대 1만 관음, 남대 팔

대보살과 1만 지장, 서대 미타와 1만 세지, 북대 석가와 오백나한의 오만 진

신이 현신하여 예배하였으며 매일 아침마다 문수보살이 36가지 모양으로

나타나 두 왕자는 차를 올리고 수도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왕을 폐위시키

고 왕자들을 모시려 하였으나 보천은 사양하여 효명이 왕으로 즉위하였다.

705년에는 진여원을 짓고 화엄사를 결성하여 인근 고을에서 비용을 보조

하게 하고 장원을 만들었다. 보천은 50년 동안 수행하여 하늘에서 와서 법

을 듣고 차를 올릴 만큼 많은 이적을 보였으며 문수보살은 성도할 것이라

는 기별을 주었다. 보천은 죽기 전에 나라에 오대는 진신이 상주하는 곳이

니 동대에 관음방과 원통사, 남대에 지장방과 금강사, 서대에 미타방과 수

정사, 북대에 나한당과 백련사, 중대에 진여원과 화엄사를 두고, 자신이 수

행하던 보천암은 화장사와 법륜사로 고쳐 오대의 본사로 삼고 하원에 문수

갑사를 두어 도회소로 삼아 향화를 받들면 온 나라가 평안할 것임을 말하

고 대대로 잊지 않고 행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비해 「태자전기」편은 앞머리의 자장 이야기가 없고 곧바로 보질도

(寶叱徒, 寶川)와 효명 두 왕자가 하서부에서 놀다가 오대산에 들어가 각각

암자를 짓고 살며 오대의 오만 진신과 문수 36변신에 예배 공양하였다고

하였다. 나랏사람들이 왕으로 모시려 하였더니 보천은 울며 사양하여 효

명을 데려다 왕위에 올렸고, 효명은 즉위 10년만에 진여원을 창건하였으며

보천은 50년 동안 수도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태자전기」에 있는 내용은 「오만진신」편에 보다 상세하게 모든

내용이 들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두 편이 보천을 서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

으므로 서로 다른 자료에 의거하여 엮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판단에 따

라 이 책에서는 「오대산 보질도태자의 전기」편은 다시 싣지 않고 「오대산

의 오만 진신」편만 싣고, 관련 내용은 각주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자료로는

자장 관련 기사는 산중의 고전(古傳)을 들었고 보천과 효명 왕자의 기사는

전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신라역사와 직접 관련있는 기사이기 때문에 관련

대목에서는 『삼국사기』를 이끌어 상세한 주석을 달아 고증하였다.

이 오대산 진신 설화는 신라 불국토 신앙의 첫머리를 이루는 자장과 문

수보살 상주 신앙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는 화엄신앙에서 그 토대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오만진신 설화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관음・미타 지

장・석가의 오방신앙을 절과 결사(結社), 불보살과 독송 경전 그리고 예참

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으로 구성한 오방신앙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

한 신앙 형태는 밀교적 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따라서 오대산 오만진

신 설화는 화엄신앙에서 시작하여 밀교 신앙으로 변화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나라 오대산 신앙의 단초를 제공했던 중국의 오대산 신앙도 남

북조시대의 화엄에서 시작하여 당대의 징관이 이를 드높였고, 이어 불공이

밀교적으로 크게 확장시켜 왕성한 신앙 성지를 이룩하여 비슷한 변화 양상

을 보여준다.

이 편은 또한 역사적 사실인 태자의 왕위 계승과 연관이 있어 많은 관심

의 대상이 되어 왔다. 정신대왕의 태자 보천과 효명이라는 설화의 구성은

신문왕과 두 아들인 효소왕과 성덕왕으로 보고 그 즉위과정에서 나타났던

상황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오만진신의 출현 및 예배와 오대 사원의 건

립은 구분하여 파악해야 한다. 705년 진여원의 창건은 명확한 것으로 생각

되지만 나머지 오대 각 사원의 창건은 보천이 죽기 전에 당부한 사실을 적

은 것이므로 실제로 사원이 건립되었음을 말해주는 자료라고 보기는 어렵

기 때문이다.

 

위치       절          봉안 불보살     주간독송              야간예참      결사  

동대      관음방   관음상, 1만관음    금광명경, 인왕경,    관음예참      원통사

                                          천수다라니                                    

남대      지장방   지장상,             지장경, 금강경        점찰예참     금강사

                     8대보살 1만지장                                                   

서대      미타방   무량수상,           법화경                 미타예참     수정사

                     무량수 1만세지                                                    

북대      나한당   석가상,             불보은경, 열반경      열반예참     백연사

                     석가 5백나한                                                      

중대     진여원    문수상,             화엄경, 대반야경      문수예참     화엄사

                     비로자나 36문수                                                  

본사     보천암   비로자나삼존상     대장경                 화엄신중     법륜사

       →화장사                                                                        

도회소  하원                           화엄신중예참

         문수갑사                                                                       

보천이 제안한 오대산의 사원 구성과 결사

 

[역주]

오대산716)의 오만 진신

 

산중의 옛 전승[古傳]717)을 살펴보면 이 산이 부처님718)이 머무는 곳이

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719)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한

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五臺山)720)의 문수보살(文殊菩薩)721)의 진

신(眞身)을 보려고 선덕왕(善德王)722) 때인 정관(貞觀)723) 10년(636) 병신

년〈『당고승전(唐高僧傳)』724)에는 12년이라고 하였으나725) 여기서는『삼국본사(三國本

史)』에 따른다726)〉에 당나라로 들어갔다. 처음 중국 태화지(太和池)727) 가의

문수보살의 석상(石像)이 있는 곳에 이르러 7일 동안 경건하게 기도하였더

니 갑자기 꿈에 대성(大聖)728)이 네 구절의 게송을 주었다. 깨어나 기억해

보니 모두 범어(梵語)729)였기 때문에 전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문

득 한 스님이 붉은 비단에 금색 점무늬가 있는 가사(袈裟) 1벌과 바리 1구

(具)와 부처의 머리뼈 1조각을 가지고 법사 곁으로 와서 묻기를, “무슨 근

심이 있는가?”라고 하였다. 법사가 대답하기를, “꿈에 받은 네 구절의 게송

이 범음(梵音)이어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그것을

번역하여 말해주기를, “가라파좌낭(呵囉婆佐曩)은 일체법(一切法)을 다 안

다는 뜻이고, 달예치구야(達㘑哆佉嘢)는 자성(自性)은 무소유라는 뜻이고,

낭가희가낭(曩伽呬伽曩)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알았다는 것이고, 달예

로사나(達㘑盧舍那)는 곧 노사나불(盧舍那佛)를 뵙는다는 뜻이다730)” 라

고 하였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가사(袈裟) 등을 주며731) 부탁하여 말하기

를, “이것들은 본사(本師)이신 석가세존(釋伽世尊)의 도구(道具)이니 그대

는 잘 간직하시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그대 나라의 동북방732) 명주

(溟州)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 문수보살이 항상 머물고 있으니 그대

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 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법사는) 영험한 자취들을 두루 찾아 보고 장차 신라로 돌아오려 하는데

태화지의 용이 몸을 나타내어 재(齋)를 올려줄 것을 청하였다. (법사가) 7

일 동안 공양(供養)하였더니 (용이) 말하기를, “옛날 게송을 전한 노승(老

僧)이 문수보살의 진신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 절을 짓고 탑을 세울 것을

간곡히 부탁한 일은 별전(別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법사는 정관(貞觀) 17

년(643)733)에 이 산에 와서 진신(眞身)을 보려고 하였으나 3일 동안이나 날

이 흐리고 어두웠으므로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다시 원녕사(元寧寺)734)

에서 머물면서 이에 문수보살을 뵈니, (문수보살이) 말씀하시기를, “칡넝굴

이 우거진 곳으로 가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정암사(淨嵓寺)735)가 이곳이

다〈역시 별전(別傳)에 실려있다〉.736) 뒤에 두타승(頭陀僧)737) 신의(信義)는 범

일(梵日)738)의 제자인데 와서 자장법사가 쉬었던 곳을 찾아 암자를 세우고

살았다. 신의가 죽자 암자도 오랫동안 버려져 있다가 수다사(水多寺)739)의

장로(長老)740) 유연(有緣)이 중창(重創)하고 살았으니 지금의 월정사(月精

寺)가 이곳이다.741)

臺山五萬眞身

按山中古傳, 此山之署名, 眞聖住處者, 始自慈藏法師. 初法師

欲見中國五臺山文殊眞身, 以善德王代, 貞觀十年丙申〈唐僧傳

云十二年, 今從三國本史〉, 入唐. 初至中國太和池邊石文殊處, 虔祈

七日, 忽夢大聖授四句偈. 覺而記憶, 然皆梵語, 罔然不解. 明

旦忽有一僧, 將緋羅金點袈裟一領, 佛鉢一具, 佛頭骨一片. 到

于師邊問, “何以無聊?” 師答, “以夢所受四句偈, 梵音不解爲

辭.” 僧譯之云, “呵囉婆佐曩, 是曰了知一切法, 達㘑哆佉嘢,

云自性無所有, 曩伽呬伽曩, 云如是解法性, 達㘑盧舍那, 云卽

見盧舍那.” 仍以所將袈裟等, 付而囑云,“ 此是本師釋伽尊之

道具也, 汝善護持.” 又曰,“ 汝本國艮方溟州界有五臺山, 一萬

文殊常住在彼, 汝往見之.” 言已不現.

遍尋靈迹, 將欲東還, 太和池龍現身請齋. 供養七日, 乃告云,

“昔之傳偈老僧, 是眞文殊也.” 亦有叮囑創寺立塔之事, 具載

別傳. 師以貞觀十七年, 來到此山, 欲覩眞身, 三日晦陰, 不果

而還. 復住元寧寺, 乃見文殊云,“ 至葛蟠處.” 今淨嵓寺是〈亦

載別傳.〉. 後有頭陁信義, 乃梵日之門人也, 來尋藏師憩息之地,

創庵而居. 信義旣卒, 庵亦久廢. 有水多寺長老有緣, 重創而

居, 今月精寺是也.

716) 오대산(五臺山):강원도 평창군과 홍천군 일대에 걸쳐 있는 높이 1563m의 산.

     백두대간 중심 한복판에 자리잡고 우뚝 솟아 주봉우리인 비로봉을 비롯하여 상

     왕봉, 호령봉, 두로봉, 동대산 등 고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인 산과 같이

     뾰족한 봉우리가 솟은 느낌보다는 토산으로 이루어진 평평한 느낌의 봉우리가

     만들어진 다섯개의 대가 솟아 오대산으로 불린다. 중국의 오대산에 비겨 신라

     시대 자장에 의해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성지로 자리매김되었다. 중심 사찰인

     월정사(月精寺)와 상원사(上院寺), 석가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다고 하는 적멸

     보궁(寂滅寶宮) 외에, 북대 미륵암, 동대 관음암, 남대 지장암, 서대 수정암, 중대

     사자암의 암자들이 있다.

717) 고전(古傳):『삼국유사』의 이 다음 편인「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

     聖衆)」편에는 ‘절에 전해오는 고기[寺中所傳古記]’를 인용하고 있는데 양자는 같

     은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718) 원문의 진성(眞聖)은 참된 성자라는 뜻으로 진신(眞身) 곧 부처를 말한다.『대지

     도론』에는 “불신(佛身)에 진신과 화신(化身)이 있는데, 진신은 허공에 가득 차서

     시방에 광명을 두루 비추며 시방의 한없는 세계에 음성으로 설법하여 대중들이

     모두 함께 듣게 하고 어느 때 각자 들은 대로 알아 깨닫는다.”(『大智度論』 권30 大

     25 p.278a18~23. 佛眞身者, 遍於虛空, 光明遍炤十方, 說法音聲亦遍十方無量恆河沙等

     世界, 滿中大衆皆共聽法, 說法不息. 一時之頃各隨所聞而得解悟. )고 하였다.

719) 자장법사(慈藏法師):자장은 신라시대의 승려. 636년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

     서 오대산의 문수보살을 만나보고 가사(袈裟)와 사리를 받았다.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에서 도를 닦고 화엄종의 두순(杜順)과 계율종(戒律宗)의 도선

     (道宣)에게 배운 뒤, 643년 장경(藏經) 1부와 불구(佛具)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승니(僧尼)의 규범과 승통(僧統)을 통괄하였고, 황룡사 9

     층탑 창건을 건의, 645년에 완성하였다. 4-5 주122) 참조.

720) 오대산(五臺山):중국 산서성(山西省) 오대현(五臺縣)에 있는 오대산으로 청량

      산이라고 불렀는데,『화엄경』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의 내용에 따라 문수보살

     이 상주하는 성지로 신앙되었다. 중국 불교사상 사대영산(四大靈山)의 하나로

     북위 이후 화엄경을 연구자들이 많이 수행하였고 8세기 후반에 불공(不空)이

     밀교의 성지로 다듬었으며 이어 징관(澄觀)이 화엄성지로 재확인하였다. 4-5

     주123) 참조.

721) 문수보살(文殊菩薩): Mañjuśri. 문수사리(文殊師利) 또는 만수실리(曼殊室利)

     로 음역하며, 묘덕(妙德), 묘길상(妙吉祥)으로 의역한다. 보현보살(普賢菩薩)과

     함께 석가여래(釋迦如來)의 협시보살로서 지혜(智慧)를 담당하여 오른손에 지

     검(智劍), 왼손에 청연화(靑蓮華)를 가지고 사자(獅子)를 타고 있는 것으로 묘사

     되는 경우가 많다. 부처와 같이 32상(相) 80종호(種好)의 덕상(德相)을 갖추었다

     고도 하며(『문수반니원경(文殊般泥洹經)』), 동자(童子)로 지칭되어(『화엄경(華嚴

     經)』입법계품(入法界品)) 문수를 동자상(童子像)으로 조성 봉안하는 경우도 많

     다. 문수보살이 오대산에 거주한다는 것은 『화엄경』 에 나온다.(60화엄 권29 菩

     薩住處品. 大9 p.590a3~5. 東北方有菩薩住處, 名清涼山, 過去諸菩薩常於中住. 彼現有

     菩薩, 名文殊師利, 有一萬菩薩眷屬, 常為說法.)

722) 선덕왕(善德王):신라 제27대 왕. 재위 632~647년. 634년에 분황사(芬皇寺)를 창

     건하였고,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첨성대를 쌓고 자장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였다. 4-5 주125) 참조.

723) 정관(貞觀):당나라 태종(太宗)의 연호. 627~649년. 신라 진평왕 49~진덕왕 3년.

724)『당고승전(唐高僧傳)』:『속고승전(續高僧傳)』을 말하며 당전(唐傳)이라고도 한

     다. 당(唐) 정관 19년(645)에 도선(道宣, 596~667)이 찬술한 것으로 『고승전(高僧

     傳)』곧『양고승전(梁高僧傳)』에 수록된 이후의 남북조에서 초당에 이르는 승려

     들의 전기를 모아 엮은 책이다. 실제로는 665년까지 증보된 것으로 생각된다. 모

     두 30권에 10개 항목으로 본전(本傳) 414인, 부전(附傳) 201인의 전기를 엮었다.

725) 12년이라고 하였으나:“정관 12년(638)에 문인 승실 등 10여인을 이끌고 동쪽으

     로 서울에 이르렀다.”(『속고승전(續高僧傳)』권24 釋慈藏. 大50 p.639b13~14. 以貞

     觀十二年, 將領門人僧實等十有餘人, 東辭至京.)

726) 여기서 말하는『삼국본사』는『삼국사기(三國史記)』를 말한다. “자장법사가 당에

     법을 구하기 위해 들어갔다.”(『삼국사기』 권5 선덕왕 5년. 慈藏法師, 入唐求法.)

727) 태화지(太和池):중국 오대산 중대(中臺) 정상의 서북쪽에 태화천(太華泉)이 있

     다. “중대의 조금 가까운 서북쪽에 태화천이 있는데 둘레는 38보이다. 그 물은

     맑고 투명하게 비치는데 줄어들어 말라 붙은 적이 없으니 모두들 성인이 씻은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옥 가는 사람들은 향이나 꽃이나 재물로 공양한다.”(『古

     淸凉傳』권1 大51 p.1093b21~25. 中臺, 高四十里, 頂上地平, 周迴六里零二百步. 稍近

     西北, 有太華泉(亦名□池也), 周迴三十八步. 水深一尺四寸, 前後感者, 或深或淺不同.

     其水清澈凝映, 未嘗減竭, 皆以為聖人盥漱之處. 故往還者, 多以香花財賄投之供養.)

728) 대성(大聖):위대한 성자(聖者), 부처나 보살을 가리키는 말로서, 여기서는 문수

     보살을 가리킨다.

729)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 한자로 번역되지 않은 본래 인도의 경전에 쓰인 말.

730) 이 게(偈)의 내용인 “일체법을 모두 알아 자신의 성품이 무소유임을 알고 이

     와 같이 법성을 알면 곧 노사나를 본다(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

     見盧舍那.)”는 구절은 80권 『화엄경(華嚴經)』 권16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

     讚品)에 나오는 구절이다.(大10 p.82a6~7) 징관(澄觀, 738~839)이나 종밀(宗密,

     780~839)도 이 구절을 인용한 중요한 내용이다. 80화엄의 이 구절이 인용된 것

     은 이 편의 내용이 적어도 699년에 한역된 80화엄이 소개된 8세기 이후의 사정

     을 수용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 준다.

731)『삼국유사』의 이 편보다 앞에 수록된 권3「전후하여 가져온 사리[前後所將舍

     利]」편에서는 자장이 643년에 부처의 두골(佛頭骨), 부처의 어금니(佛牙), 부처

     의 사리(佛舍利) 1백과와 붉은 비단에 금점이 있는 가사(袈裟)를 받아와서, 그중

     에 사리는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탑에, 하나는 태화사탑에, 그리고 또 하

     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戒壇)에 안치하였다고 하였다.

732) 동북방:원문의 간방(艮方)은 팔괘(八卦) 가운데 하나로, 방위로 동북방을 가리

     킨다.

733) 정관(貞觀) 17년:신라 선덕왕(善德王) 12년. 자장이 당에서 귀국한 해임.

734) 원녕사(元寧寺):자장이 자신이 태어난 집을 희사하여 만든 절.(『삼국유사』권4

     의해「자장정율」)

735) 정암사(淨嵓寺):강원도 정선군 고한면 고한리 태백산에 있는 절. 자장이 창건

     하였다는 적멸보궁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있다. 보물 제410호인 수마노탑이 적

     멸보궁 뒤 산비탈에 세워져 있는데 자장이 당에서 가져온 마노로 만든 탑이어

     서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 한다. 자장은 갈반지(葛蟠地)라 한 이곳에 석남원(石南

     院)을 세우고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삼국유사』권4 의해「자장정율」)

    「대산월정사오류성중」조에서는 월정사로 말하고 있다.

736)「대산월정사오류성중」편에서는 자장과 신의 사이에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이

     곳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737) 두타승(頭陀僧):두타행(頭陀行)을 하는 승려. 두타란 dhūta의 음역으로 두다

     (杜多)라고도 쓰며, 기제(棄除)·수치(修治)·두수(抖擻) 등으로 번역한다. 의 식

     주 등 인간의 모든 집착과 번뇌를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승려들의 수행을 말

     한다. 보통 12두타라 하여 아랸야에 살고, 걸식하여 하루 한 끼만 먹으며, 헤진

     옷을 입는 등의 조항을 두었다.

738) 범일(梵日):810~889. 신라 말에 강릉 지방을 중심으로 선종의 문호를 연 사굴

     산문(闍崛山門)의 개창조. 일명 품일(品日). 속성은 김(金)씨. 조부는 명주도독

     (溟州都督) 술원(述元). 헌덕왕 16년(824)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를 받고 흥

     덕왕 6년(831)에 왕자 김의종(金義琮)을 따라 당나라에 가서 염관제안(鹽官齊

     安)의 법을 잇고 약산유엄(藥山惟儼)에게도 불법을 물었다. 회창 폐불을 만나 상

     산(商山)에 가서 육조탑(六祖塔)에 참배한 뒤 문성왕 8년(847)에 귀국하여 문성

     왕 12년(850) 백달산(白達山)에서 정진하다 명주도독 김공의 요청으로 굴산사

     에서 종풍을 떨쳤다. 이후 경문왕·헌강왕·정강왕들의 후대하겠다는 요청을 듣

     지 않고 40여년 동안 이 절에만 머물며 교화하다 진성왕 3년(889)에 입적하였

     다. 시호는 통효(通曉)대사.(『조당집(祖堂集)』 권17 참조) 문하에 낭원개청(朗圓

     開淸)과 낭공행적(朗空行寂) 등이 있다. 고려 후반에 나온 『선문보장록(禪門寶藏

     錄)』에 부처가 깨달은 다음에 조사를 찾아 미진한 부분을 마저 깨우쳤다는 ‘진

     귀조사설(眞歸祖師說)’이 그의 설로 전하고 있다. 사굴산문은 신라 말의 불교계

     를 선도한 선문 구산 중에서도 성주산문(聖住山門)과 함께 가장 형세가 컸던 대

     표적인 산문으로서, 고려에서도 선종의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여러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739) 수다사(水多寺):강원도 강릉에 자장이 세웠던 절. 고려 때 수다사라는 절이 선

     산과 해주에도 있었는데, 중국의 명화승인 오도자(吳道子)가 그렸다는 백의관

     음상이 있었다는 이승휴(李承休)의 기록도 있고(李承休,『動安居士集』行錄 권1),

     이규보(李奎報)나 김부의(金富儀) 같은 이들이 시를 지어 남기기도 하였다.

740) 장로(長老): sthavira. 지혜와 덕행이 높고 출가한 지 오래된 나이가 많은 비구

     (比丘)를 부르는 말. 선종(禪宗)에서는 배우는 이들을 맞아 가르치는 스승을 장

     로라고 하기도 한다.

741) 월정사(月精寺):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에 있는 절. 643년에 자장

     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초암(草庵)으로 시작하여 이후 여러 차례 중수

     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높이 15.2m의 화강암으로 만든 고려시대의 국보 제48호

     8각9층석탑이 본당 앞 뜰에 서 있다.『삼국유사』에 수록된 오대산 관련 기록은

     모두 자장이 이곳에 잠시 머물다가 정암사로 갔고, 그후 범일의 제자 신의가 암

     자를 창건하고 유연이 중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淨神大王)의 태자(太子) 보천

(寶川)742)과 효명(孝明) 두 형제가743)〈국사(國史)를 살펴보면 신라에는 정신(淨

神)과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3부자의 기록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의 아래 글에는 “신룡

(神龍) 원년(705)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神龍元年開土立寺)”고 쓰여 있으니 신룡(神龍)

은 성덕왕(聖德王)744) 즉위 4년 을사년이다. 왕의 이름은 흥광(興光)이고 본명은 융기(隆

基)이니 신문왕(神文王)745)의 둘째아들이다. 성덕왕의 형 효조왕(孝照王)746)은 이름이 이

공(理恭)(또는 이홍(理洪)이라고도 한다)인데 역시 신문왕의 아들이다. 신문왕 정명(政明)

은 자(字)가 일조(日照)이니 정신(淨神)은 아마 정명신문(政明神文)의 잘못인 것 같다. 효

명(孝明)은 효조(孝照)(또는 효소(孝昭)라고도 한다.)의 잘못이다. 기록에 “효명(孝明)이

즉위하고 신룡 연간에 땅을 골라 절을 세웠다”고 한 것은 역시 자세하게 말한 것이 아니다.

신룡 연간에 절을 세운 사람은 성덕왕이다.〉 하서부(河西府)747)에 이르러〈지금의 명

주(溟州)에 역시 하서군(河西郡)이 있는데 이곳이다. 또는 하곡현(河曲縣)748)이라고도 하

는데, 지금의 울주(蔚州)는 이곳이 아니다.〉세헌(世獻) 각간(角干)749)의 집에서 하

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큰 고개를 지나 각기 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이르러 여러 날 유람(遊覽)하였다. 갑자기 어느날 저녁에 형제 두 사람이

세속을 떠날 것을 은밀히 약속하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오대산으로 들어

가 숨었다.750)〈고기(古記)에는 “태화(太和)751) 원년 무신년 8월초에 왕이 산 속으로 숨

었다”고 하는데 이 글은 크게 잘못된 것 같다. 살피건대 효조왕(孝照王)(효소왕(孝昭王)이

라고도 한다)은 천수(天授)752) 3년(692) 임진년에 즉위하였는데 그때 나이 16세였고, 장

안(長安)753) 2년(702) 임인년에 죽으니 나이 26세였다. 성덕왕이 이해에 즉위하였는데 나

이는 22세였다. 만약 ‘태화(太和) 원년 무신년(648)’이라고 한다면 효조왕이 즉위한 임진

년(692)754)보다 45년이 더 앞서게 되며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755) 때가 된다. 이로써 이

기록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취하지 않는다〉. 시위(侍衛)하는 자들이 돌아

갈 곳을 알지 못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두 태자가 산 속에 이르니 푸른 연꽃이 갑자기 땅 위로 피어났다.756) 형

태자가 암자를 짓고 머무르니 이곳을 보천암(寶川庵)이라고 하였다. 동북

쪽으로 향하여 6백 여 걸음을 가니 북대(北臺)의 남쪽 기슭에서 역시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어 아우 태자 효명(孝明)도 암자를 짓고 머무르며 각기

부지런히 불법을 닦았다. 하루는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올라가 우러러 예배

하려고 하니 동대(東臺) 만월산(滿月山)에는 1만 관음보살(觀音菩薩)757)의

진신(眞身)이 나타나 있고, 남대(南臺) 기린산(騏驎山)에는 팔대보살(八大

菩薩)758)이 으뜸이 된 1만 지장보살(地藏菩薩)759)이, 서대(西臺) 장령산(長

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760)가 으뜸이 된 1만 대세지보살(大勢

至菩薩)761)이, 북대(北臺)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釋迦如來)가 으뜸

이 된 5백 대아라한(大阿羅漢)762)이, 중대(中臺) 풍로산(風盧山)〈지로산(地盧

山)이라고도 한다〉에는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763)이 으뜸이 된 1만 문수보살

(文殊菩薩)이 나타나 있었다. 이와 같은 5만 진신에게 일일이 우러러 예배

하였다.

   매일 이른 새벽764)에 문수대성(文殊大聖)은 진여원(眞如院)〈지금의 상원사

(上院寺)765)이다〉에 이르러 36가지 모양으로 변신하여 나타났다.766) 혹은 부

처의 얼굴 모양으로, 혹은 보주(寶珠) 모양으로, 혹은 부처의 눈 모양으로,

혹은 부처의 손 모양으로, 혹은 보탑(寶塔) 모양으로, 혹은 만개의 부처 머

리[佛頭] 모양으로, 혹은 만개의 등(燈) 모양으로, 혹은 금 다리[金橋] 모양

으로, 혹은 금 북[金鼓] 모양으로, 혹은 금종(金鐘) 모양으로, 혹은 신통(神

通) 모양으로, 혹은 금 누각[金樓] 모양으로, 혹은 금수레[金輪] 모양으로,

혹은 금강저(金剛杵)767) 모양으로, 혹은 금 항아리 모양으로, 혹은 금비녀

모양으로, 혹은 오색광명(五色光明) 모양으로, 혹은 오색원광(五色圓光) 모

양으로, 혹은 길상초(吉祥草) 모양으로, 혹은 푸른 연꽃 모양으로, 혹은 금

전(金田)768) 모양으로, 혹은 은전(銀田)769) 모양으로, 혹은 부처의 발 모양

으로, 혹은 번개나 천둥 모양으로, 혹은 여래가 솟아나오는 모양으로, 혹은

지신(地神)이 솟아 나오는 모양으로, 혹은 금 봉황[金鳳] 모양으로, 혹은 금

까마귀[金烏] 모양으로, 혹은 말이 사자를 낳는 모양으로, 혹은 닭이 봉황

을 낳는 모양으로, 혹은 청룡(靑龍) 모양으로, 혹은 흰 코끼리 모양으로, 혹

은 까치 모양으로, 혹은 소가 사자를 낳는 모양으로, 혹은 노는 돼지[遊猪]

모양으로, 혹은 푸른 뱀 모양으로 나타났다. 두 태자는 매번 골짜기 물을

떠서 차를 달여서 공양하였고 밤에는 각자의 암자에서 도를 닦았다.

   정신왕(淨神王)의 아우가 왕과 왕위를 다투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

위시키고770) 장군 네 사람을 보내 산에 가서 맞이하게 하였다. 먼저 효명암

(孝明庵)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니 오색 구름이 7일 동안이나 드리워 덮

었다. 나라사람들이 구름을 찾아 모여들어 의장771)을 배열하고 두 태자를

모셔 돌아가려 하였으나 보천(寶川)은 울며 사양하므로 이에 효명(孝明)을

모시고 돌아가 즉위하여 여러 해 동안 다스렸다.〈기록772)에 “20여 년간 재위하

였다” 라고 한 것은 대개 돌아갈 때 나이가 26세인 것을 잘못 말한 것이다. 재위한 것은 다

만 10년뿐이다. 또 신문왕(神文王)의 아우가 왕위를 다툰 사실은 국사(國史)에 기록이 없

으므로 알 수 없다〉

藏師之返新羅, 淨神大王太子寶川孝明二昆弟〈按國史, 新羅無淨

神寶川孝明三父子明文. 然此記下文云, 神龍元年開土立寺, 則神龍乃聖德王卽

位四年乙巳也. 王名興光, 本名隆基, 神文之第二子也. 聖德之兄孝照, 名理恭,

一作洪, 亦神文之子. 神文政明字日照, 則淨神恐政明神文之訛也. 孝明乃孝照,

一作昭, 之訛也. 記云“ 孝明卽位, 而神龍年開土立寺”云者, 亦不細詳言之爾.

神龍年立寺者, 乃聖德王也.〉, 到河西府〈今溟州亦有河西郡, 是也. 一作河曲

縣, 今蔚州, 非是也.〉, 世獻角干之家. 留一宿. 翌日過大嶺, 各領千

徒, 到省烏坪, 遊覽累日. 忽一夕昆弟二人, 密約方外之志, 不

令人知, 逃隱入五臺山〈古記云, “太和元年戊申八月初, 王隱山中,” 恐此

文大誤. 按孝照一作昭, 以天授三年壬辰卽位, 時年十六, 長安二年壬寅崩, 壽

二十六. 聖德以是年卽位, 年二十二. 若曰‘太和元年戊申’, 則先於孝照卽位

壬773)辰已過四十五歲, 乃太宗武烈王774)之世也. 以此知此文爲誤, 故

不取之.〉 侍衛不知所歸, 於是還國.

二太子到山中, 靑蓮忽開地上. 兄太子結庵而止住, 是曰寶川

庵. 向東北行六百餘步, 北臺南麓, 亦有靑蓮開處. 弟太子孝

明, 又結庵而止, 各懃修業. 一日同上五峯瞻禮次, 東臺滿月

山, 有一萬觀音眞身現在. 南臺騏驎山, 八大菩薩爲首, 一萬地

藏. 西臺長嶺山, 無量壽如來爲首, 一萬大勢至. 北臺象王山

釋迦如來爲首, 五百大阿羅漢. 中臺風盧山亦名地盧山, 毗盧

遮那爲首, 一萬文殊. 如是五萬眞身, 一一瞻禮.

每日寅朝, 文殊大聖到眞如院〈今上院〉, 變現三十六種形. 或時

現佛面形, 或作寶珠形, 或作佛眼形, 或作佛手形, 或作寶塔

形, 或萬佛頭形, 或作萬燈形, 或作金橋形, 或作金鼓形, 或作

金鍾形, 或作神通形, 或作金樓形, 或作金輪形, 或作金剛杵

形, 或作金甕形, 或作金鈿形, 或五色光明形, 或五色圓光形,

或吉祥草形, 或靑蓮花形, 或作金田形, 或作銀田形, 或作佛足

形, 或作雷電形, 或如來湧出形, 或地神湧出形, 或作金鳳形,

或作金烏形, 或馬産師子形, 或鷄産鳳形, 或作靑龍形, 或作白

象形, 或作鵲鳥形, 或牛産師子形, 或作遊猪形, 或作靑蛇形.

二公每汲洞中水, 煎茶獻供, 至夜各庵修道.

淨神王之弟與王爭位, 國人廢之, 遣將軍四人, 到山迎之. 先到

孝明庵前呼萬歲, 時有五色雲, 七日垂覆. 國人尋雲而畢至, 排

列鹵簿, 將邀兩太子而歸, 寶川哭泣以辭, 乃奉孝明歸卽位, 理

國有年〈記云, 在位二十餘年, 蓋崩年壽二十六之訛也. 在位但十年爾. 又神文

之弟爭位事, 國史無文, 未詳〉.

742) 보천(寶川):「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에서는 ‘보질도(寶叱徒)’라고 하였다.

743) 이 부분부터『삼국유사』의 다음 편인「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

     寶叱徒太子傳記)」(이하「태자전기」로 줄여 말함) 편의 내용과 중복된다.「태자

     전기」는 간략하게 두 태자가 오대산에 들어가 수도하며 오만진신에 예배하였

     고, 효명태자가 왕에 즉위하였으며 705년에 진여원을 개창하고 보질도태자는

     우통수를 마시며 50년을 수도하였다는 내용이다. 후반부 세 군데에 ‘운운(云云)’

     이라 하여 줄여 수록하였음을 밝혔다.

744) 성덕왕(聖德王):신라 제33대 왕. 재위 702~737년.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왕

     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유학을 장려하고, 재위 기간에 약 43회의 사신을 당

     나라에 파견하였다. 정전(丁田)제를 실시하였고,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신라

     의 판도로 확정하였다. 4-6 주177) 참조.

745) 신문왕(神文王):신라 제31대 왕. 재위 681~692년. 성은 김씨, 이름은 정명(政

     明), 자는 일초(日招)이다. 문무왕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이

     고 첫 왕비 김씨는 흠돌(欽突)의 딸인데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쫓겨나고 김

     흠운(金欽運)의 딸을 둘째 왕비로 삼았다. 신문왕대는 무열왕대부터 시작된 신

     라 중대 왕실의 강력한 왕권이 확립된 시기로서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인

     재교육과 양성을 목적으로 국학(國學)을 설립하고, 봉성사(奉聖寺)와 망덕사(望

     德寺)를 세우기도 하였다. 중앙관서의 업무와 영역이 확대된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정비가 이루어져 9주 5소경제도가 확립되었으며, 관료들의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세조(歲租)를 지급하여 관리들의 경제력 확대를 억제시키고 오묘제를

     시행하여 왕실의 위상을 드높였다. 두 왕비가 있었기 때문에 이름 정명과 관련

     하여 오대산태자설화의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746) 효조왕(孝照王):효소왕(孝昭王). 신라 제32대 왕. 재위 692~702년. 성은 김씨

     (金氏). 이름은 이홍(理洪) 또는 이공(理恭). 신문왕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김흠

     운(金欽運)의 딸 신목왕후(神穆王后)이다. 일반적으로 효소왕이라고 하지만 효

     조왕이라고도 썼음을 황복사탑(皇福寺塔)에서 나온 사리함 명문에서 확인할 있

     다.(“신문대왕께서 오계로 세상에 응하고 십선으로 백성을 다스리어 통치가 안정되

     고 공이 이루어져 천수 3년 임진년 7월 2일에 승천하셨다. 신목태후와 효조대왕이 받

     들어 종묘의 성스러운 영령들을 위하여 선원가람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神文大王,

     五戒應世, 十善御民, 治定功成, 天授三年壬辰七月二日乘天. 所以神睦太后 孝照大王,

奉爲宗厝聖靈, 禪院伽藍, 建立三層石塔.) 이 설화에서는 효명의 이름과 유사한 이

유로 신문-효소-성덕의 왕계에 연계되어 언급되고 있다.

            신문왕(神文王, 政明, 재위 681~692)

               │                   ┌ 효소왕(孝昭王, 理洪, 재위 692~702)

               │────────│

               │                   └ 성덕왕(聖德王, 隆基, 재위 702~737)

            신목왕후 김씨

747) 하서부(河西府):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원래 고구려의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

     슬라(何瑟羅)였던 것이 신라에 편입되어 하서주(河西州)로 불리다가 경덕왕 때

     명주(溟州)가 되었다. 고려 때도 명주라 하였으나 성종 2년부터 5년까지 하서부

     라 하였다가 다시 명주도독부가 되고 충렬왕 때 강릉부(江陵府)가 되었다.

748) 하곡현(河曲縣):지금의 울산광역시인 울주(蔚州)를 말한다. 울주는 본래 굴아

     화촌(屈阿火村)이었는데 경덕왕 때 하곡현으로 바꾸었다. 하곡현은 강릉의 하

     서부와는 다른 지명이지만『고려사』에서도 하곡현을 혹은 하서현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어서(권57 지리지 蔚州. “蔚州本屈阿火村, 新羅婆娑王取之置縣. 景德王

     改名河曲[一作河西], 爲臨關郡領縣. 高麗初更今名.”) 일연이 붙인 주석의 내용이

     정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749) 각간(角干):신라의 제1관등 이벌찬(伊伐飡)의 별칭. 최고위의 이 관등은 진골

     만이 받을 수 있다. 세헌이 지방 귀족으로서 이런 관등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진골 귀족이 지방에 갖고 있는 집으로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다.

750)「태자전기」에는 “태화 원년 8월 5일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751)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태화(太和) 연호 중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고려할

     만한 것은 당(唐) 문종(文宗) 때인 827~835년의 것과 신라 진덕왕 때인 647~650

     년의 것이다. 당 문종때의 경우나 진덕왕 때의 경우 모두 실제로는 그 원년은 정

     미년(丁未年)으로 무신년(戊申年)보다 일년 앞서지만, 계산법의 차이에서 말미

     암은 것일 수 있다. 일연(一然)은 진덕왕 때인 648년으로 보고 본문 내용을 이해

     하고 있다.

752) 천수(天授):주(周)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연호. 690년 7월~692년 4월 사용.

신라 신문왕 10~효소왕 원년.

753) 장안(長安):주(周)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연호. 701~704년 사용. 신라 효소

      왕 10~성덕왕 3년.

754) 원문에는 갑진년(甲辰年)으로 되어 있으나 임진년(壬辰年)이 옳다. 효소왕(孝昭

     王)이 즉위한 해는 임진년(692)이다.

755) 원문의 태종문무왕(太宗文武王)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잘못이다. 그런데

     효소왕(孝昭王) 즉위년에서 45년 전은 647년 진덕왕(眞德王) 원년인데, 전통적

     인 계산법에 따르면 648년 곧 태화 원년 무신년이 된다.

756)「태자전기」에서는 “형 태자가 중대 남쪽 아래 진여원 터 아래쪽의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초암을 짓고 살았다”고 하였다.

757) 관음보살(觀音菩薩):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

    『고난에 처한 중생들이 그 이름을 부르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고난에서 구제

     해 준다는 데서 유래하여 관음 신앙이 생겨났다. 『화엄경』의 내용에 따라 나라

     마다 우리나라의 낙산처럼 자신의 국토에 관음이 사는 보타락가산을 설정하였

     다. 4-12-1 주292) 참조.

758) 팔대보살(八大菩薩):8보살이라고도 한다. 정법(正法)을 지키고 중생을 수호하

     는 역할을 하는 여덟 보살을 말한다. 경전에 따라 보살의 명칭이 다르게 나타나

     일정하지 않은데,『팔대보살경(八大菩薩經)』에 따르면 문수(文殊)·보현(普賢)·

     관음(觀音)·지장(地藏)·미륵(彌勒)·허공장(虛空藏)·금강수(金剛手)·제개장

     (除蓋障)보살을 들고 있다.

759) 지장보살(地藏菩薩): Ksitigarbha. 석가여래의 부촉을 받아 석존이 입멸한 후

     미륵보살이 이 땅에 내려와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기까지의 무불(無佛)시대에

     지옥을 포함한 육도의 중생이 모두 성불하기를 서원한 자비와 연민의 보살이

     다.『지장십륜경(地藏十輪經)』에 조용히 참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대지와 같고

     고요하게 생각함이 깊은 것이 신비하게 감추고 있는 것과 같아 지장이라 한다

     고 하였다.(安忍不動, 猶如大地. 靜慮深密, 猶如祕藏. 故稱地藏.) 지장보살은 과거

     먼 옛날에 어느 나라의 왕이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온갖 악한 짓을 많이 하므

     로 중생들의 죄를 모두 없애 깨달음에 이르게 할 것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성불

     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내었다고 한다. 이 지장신앙이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지

     면서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고 그때서야 깨달음을 이루겠다(衆生度盡, 方證菩

     提.)”거나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맹세코 성불하지 않겠다(地獄未空, 誓不成

     佛.)” 라는 말이 생겨났다. 다른 보살들과는 달리 지장보살은 『대방광십륜경(大

     方廣十輪經)』에 따라 머리를 깎은 승려의 형상으로 만들어 모신다. 대체로 왼손

     에는 보주를 들고 오른손에는 육도를 상징하는 석장(錫杖)을 들고 있다.

760)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 Amitāyus, Amitābha. 아미타불(阿彌陀佛). 서방 정토

     (西方淨土)에 있으면서 그를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중생들은 모두 서방정토

     에 태어나게 한다는 부처이다. 산스크리트어 원어에 두 가지가 있어 Amitāyus는

     무한한 수명이라는 뜻으로 무량수(無量壽)로 번역되고, Amitābha는 한량없는

     빛이라는 뜻으로 무량광(無量光)으로 번역된다.『무량수경』에 따르면 과거 오

     랜 옛날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시대에 한 국왕이 위 없는 도심을 내서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이름을 법장(法藏)비구라 하고 부처 아래서 수행하여 48원을

     내고 공덕을 쌓아 아미타불이 되어, 여기서 10만억 불토 떨어진 서방에서 극락

     정토(極樂淨土)을 이루어 지금도 설법하고 있으면서 염불하는 이들을 서방 정

     토로 왕생하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정토 신앙의 주인공이 되

     었다. 중심 경전은『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

     彌陀經)』의 미타삼부경(彌陀三部經)이 있다.

761)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Mahā-sthāma-prāpta. 득대세(得大勢)·대정진(大精

     進)의 뜻. 아미타불의 오른쪽 보처(補處) 보살이다. 아미타불은 왼쪽의 관세음

     보살이 자비(慈悲)를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은 지혜(智慧)를 상징하며 돕는다. 대

     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일체를 널리 비추어 중생들이 지옥 등의 삼악도의

     고통에서 벗어나 위없는 힘을 얻게 한다. 이 보살은 걸어갈 때 시방세계가 모두

     진동하므로 대세지라고 이름한다.

762) 대아라한(大阿羅漢):아라한(阿羅漢)은 나한(羅漢)이라고도 한다. arhat. 일체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어 중생의 공양에 응할 만한 자격을 지닌 열반(涅槃)

     또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라 하여 응공(應供)·응진(應眞) 등의 이름으로 번역

     된다. 특히 소승의 성문(聲聞)이 수행하여 이르게 되는 수다원(須陀洹, 預流)·사

     다함(斯陀含, 一來)·아나함(阿那含, 不還)·아라한의 4과(果)의 마지막 단계를

     말한다. 즉 수행하여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말한다. 이런 뜻에서 석존의

     뛰어난 제자를 아라한이라고 생각하여 16나한, 500나한 등을 헤아리기도 한다.

763)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Vairocana. 모든 부처의 진신(眞身:육신이 아닌 진리

     의 상징)인 법신불(法身佛). 본래 태양의 뜻으로서 부처의 지혜가 끝이 없이 크

     고 넓어 한없는 세월 동안 공덕을 닦아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상징하므로

     법신이라 한다. 이런 뜻에 따라 변일체처(遍一切處)·변조(遍照)·광명변조(光明

     遍照)·대일변조(大日遍照)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특히 밀교에서는 비로자나

     불이 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다고 여겨 어둠을 없애고 두루 밝게 하는 뜻을 부

     여하여 중시한다.

764) 원문의 인조(寅朝)는 인시(寅時) 곧 새벽 3시~5시를 말하는 것으로 이른 새벽을

     뜻한다.

765) 상원사(上院寺):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에 있는 절. 여기서 말하

     는 것처럼 신라 때 진여원으로 창건되었다가 이름이 바뀌었다. 보다 아래쪽에

     자리잡은 지금의 월정사인 하원 문수갑사와 견주어 상원으로 이름하였다.

766)「태자전기」에는 “진여원 땅에는 문수대성이 매일 인시에 36 모양으로 변화하여

     나타났고, 양 태자는 함께 예배하고 매일 이른 아침에 우통수를 길어다 차를 끓

     여 1만 문수 진신에 공양하였다”고 하였다.

767) 금강저(金剛杵): vajra. 원래 고대 인도의 무기였는데 재질이 견고하여 각종

     물건을 격파할 수 있으므로 금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밀교에서 금강저를 번

     뇌를 없애는 보리심을 상징하는 도구로 상징하게 되면서 여러 존상들이 가지는

     지물이나 중요한 수행 도구가 되었다. 밀교의 수행자들은 금강저를 항상 갖고

     다니며 이 금강저가 어리석음과 번뇌 망상 같은 내적 문제나 외도와 같은 외적

     장애를 없애는 상징으로 삼았다. 그 형태가 몇 갈래로 나뉘었느냐에 따라 한 갈

     래인 독고저(獨股杵), 두 갈래(二股杵), 세 갈래(三股杵), 네 갈래(四股杵), 다섯

     갈래(五股杵) 등이 있다.

768) 금전(金田):금지(金地). 절 또는 절을 지을 땅을 말한다. 석존이 살아 있을 당시

     슈라바스티(舍衛國)의 수닷타(須達)장자가 석존을 위해 절을 지을 땅을 구하려

     하자 땅 주인인 제타(祇陀)태자가 금을 깔면 땅을 팔겠다 하여 정말 금을 깔았

     더니 태자가 그 연유를 듣고 땅을 기부하여 장자가 절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

     어 석존에게 공양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769) 은전(銀田):은지(銀地). 금지와 마찬가지로 절을 짓는 땅을 말한다.

770)「태자전기」에서는 정신태자의 아우가 신라에서 왕위를 다투다가 죽자 나라 사

     람들이 장군 4인을 보내서 효명태자를 모셔가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하였다.

771) 원문의 노부(鹵簿)는 천자가 거동할 때의 행렬에 쓰이는 의장을 말한다.

772) 기록:「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를 말한다. 여기에서 효명태자가 왕위에 있

     은 것이 20여 년이라고 하였다.

773) 원문의 ‘甲’은 ‘壬’의 잘못

774) 원문의 ‘文武王’은 ‘武烈王’의 잘못

 

   신룡 원년〈즉 당나라 중종(中宗)이 복위(復位)한 해이고 성덕왕이 즉위한지 4년이

다〉 을사년(705) 3월 초 나흗날에 처음으로 진여원(眞如院)을 지었다.775) 대

왕(大王)이 친히 여러 관료들을 거느리고 산에 이르러 전각을 짓고 아울

러 문수대성(文殊大聖)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불당 안에 모시고 지식(知

識)776) 영변(靈卞) 등 다섯명에게『화엄경(華嚴經)』777)을 오랫동안 읽도록

하여 화엄사(華嚴社)를 결성하였다. 길이 공양할 비용으로 매년 봄가을로

각각 산 근처 주현(州縣)에서 창조(倉租) 1백석과 정유(淨油) 1석(石)을 공

급하는 것을 항규(恒規)778)로 하였다.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천 걸음를 가

서 모니점(牟尼岾) 고이현(古伊峴)의 바깥에 이르는 시지(柴地)779) 15결

(結)과 밤나무 숲780) 6결과 위토전(位土田)781) 2결에 장사(莊舍)782)를 만들

어 두었다.

   보천은 항상 신령한 계곡의 물783)을 길어다 마셔서 만년에 육신이 공중

으로 날아 유사강(流沙江) 바깥 울진국(蔚珍國)의 장천굴(掌天窟)784)에 이

르러 머물며 수구다라니(隨求陁羅尼)785)를 외우는 것을 밤낮의 과업으로

삼았다. 굴의 신(神)이 몸을 나타내어 말하기를, “내가 굴의 신이 된 지 이

미 2천년이 지났는데 오늘 비로소 수구다라니의 참된 도리를 들었습니다.

보살계(菩薩戒)786) 받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계를 받고 난 다음날

굴 또한 형체가 없어졌다. 보천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20일을 머문 후 오대

산 신성굴(神聖窟)로 돌아왔다. 또 50년 동안 도를 닦으니,787) 도리천(忉利

天)788)의 신이 하루 세 번 법을 듣고, 정거천(淨居天)789)의 무리가 차를 달

여 공양하며, 40명의 성중(聖衆)이 공중에 10자나 떠올라 항상 호위하고,

가지고 있던 지팡이는 하루에 세 번 소리를 내며 방을 세 바퀴 돌아서, 이

것을 종(鐘)과 경쇠로 삼아 때에 따라 불도를 닦았다. 문수보살은 때로는

보천의 머리에 물을 부어 성도(成道)하리라는 기별(記莂)790)을 주었다.

以神龍元年〈乃唐中宗復位之年, 聖德王卽位四年也.〉 乙巳三月初四

日, 始開791)創眞如院. 大王親率百寮到山, 營構殿堂, 幷塑泥

像文殊大聖, 安于堂中, 以知識靈卞等五員, 長轉華嚴經, 仍結

爲華嚴社. 長年供費, 每歲春秋, 各給近山州縣倉租一百石, 淨

油一石, 以爲恒規. 自院西行六千步, 至牟尼岾古伊峴外, 柴地

十五結, 栗林792)六結, 坐位二結, 創置莊舍焉.

寶川常汲服其靈洞之水, 故晩年肉身飛空, 到流沙江外蔚珍國

掌天窟停止, 誦隨求陁羅尼, 日夕爲課. 窟神現身白云,“ 我爲

窟神已二千年, 今日始聞隨求眞詮. 請受菩薩戒.” 旣受已, 翌

日窟亦無形. 寶川驚異, 留二十日乃還五臺山神聖窟. 又修眞

五十年, 忉利天神三時聽法, 淨居天衆烹茶供獻, 四十聖騰空

十尺, 常時護衛, 所持錫杖一日三時作聲, 遶房三匝, 用此爲鐘

磬, 隨時修業. 文殊或灌水寶川頂, 爲授成道記莂.

775)「태자전기」에서는 “효명태자가 귀국하여 즉위하여 왕위에 있은 것이 20여 년이

     고, 신룡 원년(705) 3월 8일에 진여원을 세웠다”고 하였다.

776) 지식(知識):벗. 아는 것이 많다는 의미의 지식이 아니라 평소에 아는 사람, 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사람을 말한다. 나를 좋은 곳으로 이끄는 사람을 선지식(善

知識)이라 하는데, 이 선지식을 그냥 지식이라고도 한다.

777)『화엄경(華嚴經)』:『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Buddhāvatamsak

     -amahāvaipulya-sūtra. 잡화경(雜花經)이라고도 한다.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

     전 중의 하나이다.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으로 석존이 깨

     달은 지 이칠일째에 보리수 아래에서 비로자나불을 설주로 문수와 보현보살이 

     깨달은 내용을 설한 것이라 한다. 내용은 부처가 되는 인행(因行)과 과덕(果德)

     을 설한 것으로 십지(十地)를 비롯한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迴向)의 

     보살 수행 계위를 중심으로 하고 후반부인 입법계품은 선재동자 보살행을 묻고

     자 53선지식을 찾아 구도 편력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를 통해 거듭되며 끝

     없이 전개되는(重重無盡) 걸림 없는 연기(緣起)의 세계를 드러낸다. 이 경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지엄과 법장과 징관을 거치며 중국 화엄종이 형성되고 발전하

     여 화엄사상은 중국 교학불교의 가장 빼어난 사상이 되었다. 현재 산스크리트

     어본은 전체가 알려지지 않고 십지품과 입법계품 등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전체적인 경전의 구성은 대체로 서역지방에서 종합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번역본은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동진시대에 번역한 60화엄과 실차난타(實

     叉難陀)가 당대에 번역한 80화엄, 반야(般若)가 당대 후반에 번역한 40화엄 등

     세 가지가 있다.

778) 항규(恒規):일상의 규칙, 상례(常例).

779) 시지(柴地):땔나무를 채취하는 땅.

780) 원문의 ‘율지(栗枝)’는 ‘율림(栗林 )’ 곧 밤나무 숲의 잘못으로 추정된다.

781) 좌위(坐位):위토전(位土田). 그 땅에서 수확한 곡물을 제사를 지내는 등의 목적

     에 쓰기 위해 마련한 토지.

782) 장사(莊舍):농장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집.

783) 여기서는 ‘신령한 계곡의 물을 길어다 마셨다(汲服其靈洞之水)’라고 하였는데,

    「태자전기」에서는 ‘ 우통수를 길어(汲于洞水)’, ‘항상 우통의 신령한 물을 마셨다

     (常服于洞靈水)’라고 하였다. 조선초에 들어 오대산의 서대 아래 샘에서 솟는 물

     을 우통수(于筒水)라고 한다고 하고 그 우통수가 흘러 한강이 되었다고 하여(權

     近, 「五臺山西臺水精菴重創記」 『東文選』 권90) 지금까지도 한강의 발원수로서 알

     려져 있다. 여기서 汲服其靈洞之水→汲(服)于洞(靈)水→于筒水로의 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784) 장천굴(掌天窟):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에 있는 백련산(白蓮山)에 있는

     성류굴(聖留窟). 탱천굴(撑天窟)이라고도 하였다. 굴 안에 종유석이 불상 같은

     여러 형태로 자리잡고 있어 성류굴이라는 이름이 생긴 듯하다.

785) 수구다라니(隨求陁羅尼): Mahā-pratisāravidya-dhārani. 대수구다라니(大隨求

     陀羅尼), 수구즉득대자재다라니(隨求卽得大自在陀羅尼)라고도 한다. 일체의 죄

     장을 없애주고 악취(惡趣)를 제거하며 구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 복덕을 얻게 한

     다는 다라니이다. 경전은 당의 불공(不空, 705~774)이 번역한 『보편광명청정치

     성여의보인심무능승대명왕대수구다라니경(普遍光明淸淨熾盛如意寶印心無能勝

     大明王大隨求陀羅尼經)』, 보사유(寶思惟)가 번역한 『수구즉득대자재다라니신주

     경(隨求卽得大自在陀羅尼神咒經)』이 있다.

786) 보살계(菩薩戒):대승의 보살들이 지키는 계율로서 십중(十重)·사십팔경계

     (四十八輕戒)를 설한『범망경(梵網經)』율장품(律藏品)이 근거가 된다. 이는 종래

     의 교단이 출가자를 위한 비구계와 재가자를 위한 팔관계(八關戒)를 둔 것과 달

     리 출가와 재가를 포괄하는 새로운 대승의 계율을 제시한 것이다. 중국을 비롯

     한 동아시아의 불교계에서는 출가자를 위한 계율로서는 종래의 비구계를 사용

     하면서『범망경』의 보살계를 재가신자를 위한 계율로 하였다. 보살계 10중계는

     살생하지 말라(不殺戒), 주지 않은 것을 훔치지 말라(不偸盜戒), 음행하지 말라

     (不婬戒), 거짓말하지 말라(不妄語戒), 술을 사지 말라(不酤酒戒), 남의 잘못을 말

     하지 말라(不說過戒),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비방하지 말라(不自讚毁他戒), 아끼

     자 말라(不慳戒), 성내지 말라(不瞋戒),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不謗三寶戒) 이다.

787)「태자전기」에는 “보질도태자가 항상 우통의 신령한 물을 마시고 육신이 하늘에

     올라 유사강에 이르러 울진대국의 장천굴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다시 오대산

     신성굴에 돌아와 50년을 수도하였다”고 하였다.

788) 도리천(忉利天): Trāyastrimśa. 욕계(欲界) 6천(天)의 제2천. 33천으로 번역된

     다. 원래 인도 신화에 나오는 산이었는데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수

     미산(須彌山)이 우뚝 솟아 있고 수미산을 중심으로 주위에 여덟 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가 둘러 싸고 있어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고 한다. 일곱 번째의 산 바깥

     으로 짠 바다가 있고 그 바깥으로 철위산(鐵圍山)이 있어 수미산의 사대주를 이

     루는데 그 중의 남쪽인 염부제주(閻浮提洲)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 위에 사

     천왕천이 있고 그 위 곧 수미산 정상에 도리천이 있다고 한다. 도리천은 제석천

     (帝釋天)이 주인이 되어 사방에 팔천을 거느리고 있어 33천이라고도 부른다.

789) 정거천(淨居天): Śuddhāvāsa. 색계(色界) 제4선천(第四禪天)에 욕계의 번뇌를

     다 끊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성문 제3과인 아나함과(阿那含果, 不還果)를 얻은

     성자가 나는 곳이다. 무번천(無煩天)·무열천(無熱天)·선현천(善現天)·선견천

     (善見天)·색구경천(色究竟天)의 5천이 있으며, 색계천(色界天)의 가장 뛰어난

     곳이다.

790) 기별(記莂):제자가 증득한 것 또는 죽은 뒤에 날 곳을 가리켜 주는 것을 말하는

     데, 후에 미래세에 증과를 얻어 성불할 것을 예언하는 것만을 말하게 되었다. 그

     조건은 국토(國土)의 이름·부처 이름(佛名)·시절(時節)·겁의 이름(劫名)·권속

     (眷屬)·정법이 존속하는 기간(正法存續期間) 등의 여섯 가지를 말하는데, 경전

     에 따라 차이가 있다.

791) 원문에는 ‘改’인데 처음으로 다시 지었다[始改創]는 말이 맞지 않고, 보질도태

     자전기와 견주어 보아도(始開眞如院) 처음으로 지었다는 ‘開’가 맞는 것으로 생

     각된다.

792) 원문의 ‘技’는 ‘林’의 잘못인.

 

   보천은 입적(入寂)하려는 날 후일 산 속에서 행하여 나라에 도움이 될

일에 대한 글을 남겨 두었다. 다음과 같다.

   “이 산은 백두산(白頭山)의 큰 줄기로서 각 대(臺)는 진신(眞身)이 상주

(常住)하는 곳이다. 청색(靑色)은 동대(東臺) 북쪽 모퉁이 아래와 북대(北

臺) 남쪽 기슭의 끝에 있으니 관음방(觀音房)을 두어 원상(圓像)793)의 관

음보살(觀音菩薩)과 푸른 바탕에 1만 관음상(觀音像)을 그려서 봉안하고,

복전(福田)794) 5인이 낮에는 8권『금광명경(金光明經)』795)과『인왕반야경

(仁王般若經)』796)과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797)를 독송하고 밤에는 관

음예참(觀音禮懺)을 염송하여 원통사(圓通社)라고 이름하라. 적색(赤色)

은 남대(南臺)의 남쪽을 맡으니 지장방(地藏房)을 두고 원상(圓像)의 지장

보살(地藏菩薩)과 붉은 바탕에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으뜸으로 한 1만 지

장상(地藏像)을 그려서 봉안하고, 복전(福田) 5인이 낮에는『지장경(地藏

經)』798)과『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799)을 독송하고 밤에는 점찰예참(占察

禮懺)800)을 하여 금강사(金剛社)라고 이름하라. 백색(白色)은 서대(西臺)

의 남쪽 방향이니 미타방(彌陁房)을 두고 원상(圓像)의 무량수불(無量壽

佛)과 흰 바탕에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으뜸으로 한 1만 대세지보살

(大勢至菩薩)을 그려서 봉안하고, 복전(福田) 5인이 낮에는 8권 『법화경(法

華經)』801)을 독송하고 밤에는 미타예참(彌陁禮懺)을 염송하여 수정사(水精

社)802)라고 이름하라. 흑색(黑色)은 북대(北臺)의 남쪽 땅이니 나한당(羅漢

堂)을 두고 원상(圓像)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

(釋迦如來)를 으뜸으로 한 5백 나한(羅漢)을 그려서 봉안하고, 복전 5인이

낮에는 『불보은경(佛報恩經)』803)과 『열반경(涅槃經)』804)을 독송하고 밤에

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염송하여 백련사(白蓮社)라고 이름하라. 황색(黃

色)은 중대(中臺)의 진여원(眞如院)에 자리하니 소조(塑造)의 문수보살(文

殊菩薩) 부동상(不動像)805)을 봉안하고 뒷벽에는 노란 바탕에 비로자나불

(毗盧遮那佛)를 으뜸으로 한 36가지의 변화하는 모양806)을 그려서 모시고,

복전 5인이 낮에는『화엄경(華嚴經)』과『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807)을 독

송하고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염송하여 화엄사(華嚴社)라고 이름

하라.

   보천암(寶川庵)은 화장사(華藏寺)로 고치고 원상(圓像)의 비로자나(毗

盧遮那) 삼존과 대장경(大藏經)808)을 봉안하고, 복전 5인이 대장경을 늘 열

람하고 밤에는 화엄신중(華嚴神衆)809)을 염송하여, 매년 화엄회(華嚴會)를

백일 동안 베풀고 법륜사(法輪社)라고 이름하라. 이 화장사(華藏寺)를 오

대사(五臺社)의 본사(本寺)로 삼아서 견고하게 지키고 행실이 깨끗한 복전

에게 명하여 오래도록 향화(香火)810)를 받들게 하면 국왕(國王)이 장수하

고 백성이 편안하며 문무(文武)811)가 화평하고 온갖 곡식이 풍년이 들 것

이다. 또 하원(下院)에 문수갑사(文殊岬寺)812)를 더 두어서 오대사(五臺社)

의 도회소(都會所)813)로 삼아 복전 7인이 밤낮으로 항상 화엄신중예참(華

嚴神衆禮懺)을 행하게 하라. 위의 37인의 재(齋)에 드는 경비와 의복의 비

용은 하서부(河西府) 도내 8주(州)의 세(稅)로써 4가지 공양[四事]814)의 자

금으로 충당한다. 대대로 군왕(君王)들이 잊지 않고 좇아서 행하면 다행이

겠다.”815)

川將圓寂之日, 留記後來山中所行輔益邦家之事. 云, “此山乃

白頭山之大脉, 各臺眞身常住之地. 靑, 在東臺北角下, 北臺南

麓之末, 宜置觀音房, 安圓像觀音, 及靑地畵一萬觀音像, 福田

五員, 晝讀八卷金經, 仁王般若, 千手呪, 夜念觀音禮懺, 稱名

圓通社. 赤, 任南臺南面, 置地藏房, 安圓像地藏, 及赤地畵八

大菩薩爲首一萬地藏像, 福田五員, 晝讀地藏經, 金剛般若, 夜

占察禮懺, 稱金剛社. 白, 方西臺南面, 置彌陁房, 安圓像無量

壽, 及白地畵無量壽如來爲首一萬大勢至, 福田五員, 晝讀八

卷法華, 夜念彌陁禮懺, 稱水精社. 黑, 地北臺南面, 置羅漢堂,

安圓像釋迦, 及黑地畵釋迦如來爲首五百羅漢. 福田五員, 晝

讀佛報恩經, 涅槃經, 夜念涅槃禮懺, 稱白蓮社. 黃, 處中臺眞

如院, 中安泥像文殊不動, 後壁安黃地畵毗盧遮那爲首三十六

化形, 福田五員, 晝讀華嚴經, 六百般若, 夜念文殊禮懺, 稱華

嚴社. 寶川庵改創華藏寺, 安圓像毗盧遮那三尊及大藏經, 福

田五員, 長閱藏經, 夜念華嚴神衆, 每年設華嚴會一百日, 稱名

法輪社. 以此華藏寺爲五臺社之本寺, 堅固護持, 命淨行福田,

鎭長香火, 則國王千秋, 人民安泰, 文虎和平, 百穀豊穰矣. 又

加排下院文殊岬寺爲社之都會, 福田七員, 晝夜常行華嚴神衆

禮懺. 上件三十七員, 齋料衣費, 以河西府道內八州之稅, 充爲

四事之資. 代代君王, 不忘遵行, 幸矣.

793) 원상(圓像):여러 가지 좋은 상호를 두루 갖춘 불보살의 원만한 모습.

794) 복전(福田): Punya-Ksetra. 복덕을 낳을 수 있는 밭이라는 뜻. 부처나 승가 또

     는 부모를 공경하여 모시는 일이 복덕이나 공덕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마치 농부

     가 토지를 경작하여 수확물을 얻는 것과 같다 하여 밭에 비유하여 복전이라 한

     다. 곧 공양 또는 공양하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는 승려가 수행하고 사람들에

     게 법을 설하여 복덕을 받는 것을 비유하여 복전승을 가리킨다.

795)『금광명경(金光明經)』: Suvarnaprabhāsottama-sūtra. 참회행의 실천과 함께 호

     국안민과 왕도를 강조한 경전. 호국경전의 하나로 기우(祈雨) 등의 국가적 법회

     에 자주 강경되었다. 북량의 담무참이 번역한 4권본『금광명경』, 수의 보귀(寶

     貴) 등이 편집한 8권본(597 경)『합부금광명경』, 당 의정(義淨)이 번역한(703) 10

     권본『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등이 있다. 이 경전을 읽으면 국가가

     사천왕(四天王)의 수호를 받을 수 있다고 하여『법화경(法華經)』·『인왕경(仁王

     經)』과 함께 호국삼부경(護國三部經)으로 불린다.

796)『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인왕반야바라밀경(仁王般若波羅蜜經)』,『인왕경(仁

     王經)』이라고도 한다. 부처가 16대 국왕에게 나라를 보호하고 편안하게 하기 위

     해서는 불법을 수호하고 반야바라밀을 수지(受持)해야 한다고 설한 경으로서,

     이 경을 강설하면 재앙을 그치게 하고 복을 얻는다고 하여 국가적인 법회에 널

     리 사용되었다. 이를 인왕회(仁王會) 또는 인왕도량(仁王道場)이라고 한다. 축법

     호(竺法護)와 구마라집(鳩摩羅什)과 불공(不空)의 세 가지 번역이 있다. 『법화경

     (法華經)』·『금광명경(金光明經)』과 함께 호국삼부경(護國三部經)으로 불린다.

     797)『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 Mahākārun ikacitta-dhāranī.『천수천안관세음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千手千眼觀世音菩薩廣大圓滿無礙大悲心陀羅尼

     經)』,『천수경(千手經)』, 대비심다라니(大悲心陀羅尼), 대비주(大悲呪)라고도 한

     다. 천수관음의 공덕을 설하는 82구의 다라니로 이 다라니를 외우면 모든 죄업

     이 소멸한다고 하여 오랫동안 널리 활용된 다라니이다.

798)『지장경(地藏經)』:지장보살(地藏菩薩)의 근본 서원 공덕을 설한 경전. 당의 현

     장(玄奘)이 번역한『대승대집지장십륜경(大乘大集地藏十輪經)』, 보리등(菩提燈)

     이 한역했다고 하는『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의 지장삼부경(地藏三部經)을 주로

     말한다. 여기서는 점찰법회(占察法會)와 관련되어 있어서 여러 지장경 가운데

    『점찰선악업보경』으로 여겨진다.

799)『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Vajracchedikā-prajñāpāramitā-sūtra.『금강반야바

     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금강경(金剛經)』이라고도 한다. 인도에서 2세기에

     성립된 공(空)사상의 기초가 되는 반야경전으로 대승불교의 근본을 이루는 경

     전이다. 육조 혜능 이래 선종에서도 매우 중시되었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을 비

     롯하여 보리류지(菩提流支)·진제(眞諦)·달마급다(達磨及多)·현장(玄奘)·의정

     (義淨) 등의 번역본이 있다.

800) 점찰예참(占察禮懺):『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 의해 행하는 예참(禮

      懺).

801)『법화경(法華經)』:『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Saddharma-pundarīka sūtra. 대

     승 운동이 시작되어 부처의 참된 정신을 알기 위해 시나 비유 또는 상징 등의 문

     학적 형식을 사용하여 영원한 부처(久遠實成之佛)를 찬탄하고 석가의 성불 이래

     한없는 수명으로 갖가지 화신을 나타내 여러 방편으로 미묘한 법을 설하는 것

     을 내용으로 한다. 궁극의 목표가 삼승(三乘)을 한데 모아 일승(一乘)의 큰 수레

     로 일체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이다. 불교의 정수를 담고 있는 경전으로 존중

     되어 대승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널리 읽혀온 경전의 하나이다. 축법

     호(竺法護) 번역의『정법화경(正法華經)』10권, 구마라집(鳩摩羅什) 번역의『묘법

     연화경(妙法蓮華經)』7권, 사나굴다(闍那崛多)와 달마급다(達磨笈多) 공역의『첨

     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7권 등의 한역본이 있다.

802) 고려 때에도 오대산 서대의 수정암(水精菴)은 계속 암자의 형세를 유지하여 조선

     초(1404년)에 중수되기도 하였다.(權近,「五臺山西臺水精菴重創記」『東文選』 권90)

803)『불보은경(佛報恩經)』:『대방편불보은경(大方便佛報恩經)』7권. 부모에 대한 효

     도를 설한 경전. 부처가 영취산에 있을 때 외도들이 부처를 부모를 버리고 출가

     한 불효자라고 희롱하자 부처가 불교의 은덕의 의미를 설한 경전이다. 부처는

     여래는 무량한 생사 사이에 일체중생의 부모가 되며 일체중생은 또한 여래의

     부모가 되기 때문에 여래가 일체중생을 위하여 출가하여 수도하는 것은 일체의

     부모를 위한 보은의 행동이라고 설한다. 진정한 보은을 위해서는 대비심으로

     일체중생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설한다. 그 구체적인 예로 몸으로 부모의 재

     난을 구한 수사제(須闍提)태자 시절의 이야기나 부친의 병을 치료하였던 인욕

     태자 시절의 이야기 등 여러 본생담을 설하였다.

804)『열반경(涅槃經)』:『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ā-parinirvāna-sūtra. 소승

     경전과 대승 경전이 있는데 소승『열반경』은 주로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부

     처의 입멸(入滅)을 전후한 행적을 설하였고 대승『열반경』은 보다 철학적·종교

     적인 의미가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는 부처의 최후 설법을 통해 불신(佛身)의

     상주(常住), 열반의 의미,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성론(佛性論) 등을

     밝히고 있다. 한역본으로는 동진(東晋) 법현(法顯)의『대반니원경(大般尼洹經)』

     6권과 북량(北凉) 담무참(曇無讖)의『대반열반경』40권이 있다.

805) 부동상(不動像):부동(不動)은 여러 가지 번뇌에 미혹되지 않는 부동의 경지를

     말하며, 곧 보리심(菩提心)과 대적정(大寂定)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경지에 이

     른 보살을 부동지보살(不動地菩薩)이라고 하는데, 문수보살은 동방금색세계(東

     方金色世界)의 부동지불(不動智佛)의 제자였다.

806) 36가지의 변화하는 모양:문수보살이 36가지 모양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

     것을 말한다.

807)『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마하반야바라밀다경(摩訶般若波羅蜜多經)』. 최초

     로 대승(大乘)을 선언한 대승불교 초기에 성립된 경전이다. 한역(漢譯)된 경전

     만 해도 42종에 이르는데, 당나라 현장이 일부분을 새로 번역하고 여러 종류의

    『반야경』을 한데 모아 600권의『마하반야바라밀다경』으로 집성하였다. 이중에

     서『대반야경』이 4백권을 차지하며 나머지를 대품반야·소품반야·금강반야 등

     이 차지한다.

808) 대장경(大藏經):불교의 서적을 모두 한데 합쳐 이르는 말. 석가여래의 설교를

     기록한 경장(經藏), 모든 계율(戒律)을 모은 율장(律藏), 불제자들의 논설(論說)

     을 모은 논장(論藏)의 삼장(三藏)을 총망라한 불전. 중국 남북조시대까지는 일

     체경장(一切經藏) 등으로 불리다가 수당 이후 대장경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인

     도에서 이루어진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의 대장경 외에 한역(漢譯)과 티벳역

     그리고 서하어(西夏語), 몽고어, 만주어 대장경 등이 있다. 한역 대장경은 가장

     방대한 규모의 것으로서 송대에 처음 판각되기 시작하여 요·금·원·명·청에

     서 각각 대장경이 판각되었다. 고려 때 두 차례 판각된 고려대장경은 그 정확성

     이 가장 우수하다고 알려졌으며 현재 그 81258매의 경판이 해인사에 보존되어

     전하고 있다.

809) 화엄신중(華嚴神衆):『화엄경』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수호

     하고 보좌하는 신중(神衆)이다.『화엄경』60권본에는 34종류의 신중, 80권본에

     는 40종류의 신중이 등장한다. 9세기 중반 이후 신라 화엄종단 내에서 선종의

     대두에 대응하여 화엄종의 교리와 신앙을 강화하면서 화엄신중신앙이 크게 유

     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810) 향화(香火):향을 피운다는 뜻으로, 사찰에서 향을 피워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

     는 것을 말한다.

811) 문무(文武):문관과 무관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여기서는 나라의 정치를 뜻한

     다. 원문의 ‘문호(文虎)’는 고려 혜종(惠宗)의 이름인 ‘무(武)’를 피휘(避諱)해서

     쓴 것이다.

812) 문수갑사(文殊岬寺):지금의 월정사(月精寺).『삼국유사』탑상편의 끝 편인「오

     대산문수사석탑기(五臺山文殊寺石塔記)」에 현재도 월정사 대웅전 앞 뜰에 남아

     있는 8각9층석탑에 대한 이야기를 실으면서 절 이름을 문수사라고 하였다.

813) 도회소(都會所):모임의 중심이 되는 으뜸가는 곳.

814) 4가지 공양:부처와 승려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4가지를 공양하는 것, 곧 의복

     (衣服)·음식(飮食)·와구(臥具)·탕약(湯藥)을 말함. 혹은 와구 대신 방사(房舍)

     를 말하기도 한다.『무량수경』에는 일체 제불에게 항상 사사를 공양해야 한다고

     하였고,『우란분경소(盂蘭盆經疏)』에는 매년 승려들이 하안거 마지막 날 자신의

     잘못을 대중 앞에서 참회하는 자자일(自恣日)에 불 법 승 삼보에 사사를 공양한

     다고 하였다.

815) 도표는 생략

 

오대산 월정사의 다섯 성중

 

[해제]

오대산 월정사가 다섯 부류의 성중들이 머물고 있는 곳임을 알려주는 이

야기를 모은 편이다. 오대산의 다섯 성중에 대해서는 앞 편인 「오대산의 오

만 진신」편에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다섯 성중이란 오대산의 오대에 각

각 1만씩 상주하는 관음·지장·세지·나한·문수를 말한다. 이중 나한만 5

백이고 나머지는 모두 1만 성중이다. 이 편의 이야기는 오대산 신앙을 개설

한 자장의 행적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자장은 오대산에서 진신을 친견하고

자 기도하였으나 보지 못하고 묘범산에 옮겨가 정암사를 창건하였다고 한

다. 이어 효성이 지극한 신효거사가 자장이 머물던 곳에서 살며 다섯 성중

의 화신을 만났으며, 다음에 신라말 사굴산문의 조사인 범일의 제자 신의

가 암자를 짓고 살았고, 그 후에 수다사의 유연 장로가 살면서 큰 절이 되

었다고 하여 월정사의 개창과 발전을 차례로 서술하였다. 자료는 절에 전

해 오는 고기(古記)라고 밝혔다. 이 편의 제목은 오대산의 다섯 성중이지만

내용은 성중의 구체적인 이름조차 제시하지 않을 만큼 성중 이야기는 소략

하다. 대신 월정사의 개창과 이어 주석한 사람들의 연유를 비교적 상세하

게 밝혔으며 특히 자장 다음에 주석한 신효거사에 대한 이야기가 내용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월정사의 유래를 조명하기 위한 이야기이므로 마지

막에 풍수가의 말을 인용하여 나라 안에서도 가장 뛰어난 곳으로 불법을

오래 일으킬 곳이라고 부언하는 데서 고려 후기 사람들이 가졌던 절의 입

지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역주]

오대산 월정사(月精寺)816)의 다섯 성중817)

 

   절에 전해오는 고기(古記)를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장법사

(慈藏法師)818)가 처음 오대산에 와서 진신을 뵙고자 하여 산기슭에 띠집을

짓고 머물렀으나 7일 동안 진신을 뵙지 못하므로 묘범산(妙梵山)819)에 가

서 정암사(淨岩寺)820)를 창건하였다. 뒤에 신효(信孝) 거사(居士)821)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혹은 유동보살(幼童菩薩)822)의 화신(化身)823)이라고도

한다. 집이 공주(公州)824)에 있었는데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지성으로 효성

스럽게 하였다. 어머니가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았으므로 거사는 산으로

들로 고기를 구하러 나다니다가 길에서 다섯 마리의 학을 보고 활을 쏘았

는데 학 한마리가 깃털 하나를 떨어뜨리고 가버렸다. 거사가 그 깃털을 집

어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사람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그래서 고기

를 얻지 못하고 (자신의) 넙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에게 드렸다. 뒤에 출

가하여 자기 집을 내놓아 절로 만들었는데 지금의 효가원(孝家院)825)이다.

거사는 경주 경계지역에서 하솔(河率)826)에 이르러 사람을 보니 모두 사

람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머물러 살 뜻이 있어서, 길에서 나이든 부인을 보

고 살만한 곳을 물었다. 부인이 말하기를, ‘서쪽 고개를 넘으면 북향한 골

짜기가 있는데 그곳이 살만합니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거

사는 관음보살(觀音菩薩)827)이 가르친 것임을 알고828) 성오평(省烏坪)을

지나 자장이 집을 만든 곳으로 들어가서 살았다. 잠시 후 다섯 스님이 와서

말하기를, ‘그대가 가져온 가사(袈裟) 1폭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하니 거사는 어리둥절해 하였다. 비구가 말하기를, ‘그대가 집어서 사람을

본 깃털이 그것입니다.’ 라고 하자 거사는 이에 꺼내어 주었다. 스님이 깃

털을 가사의 빠진 폭 안에 놓으니 꼭 맞았다. 그것은 깃털이 아니라 베[布]

였다. 거사는 다섯 스님과 헤어진 후 비로소 이들이 다섯 성중(五類聖衆)의

화신임을 알았다.”

   이 월정사는 자장이 처음 띠집을 짓고 다음에 신효거사가 와서 살았으

며, 다음에 범일(梵日)829)의 제자인 신의(信義)830) 두타(頭陀)831)가 와서 암

자를 짓고 살았다. 뒤에 수다사(水多寺)832)의 장로(長老)833) 유연(有緣)이

와서 살면서 점차 큰 절이 되었다. 절의 다섯 성중과 9층석탑834)은 모두 성

인의 자취이다. 지세를 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국내의 명산 중에 이 땅이

가장 뛰어나서 불법이 오래 흥성할 곳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臺山月精寺 五類聖衆

按寺中所傳古記云, “慈藏法師初至五臺, 欲覩眞身, 於山麓結

茅而住, 七日不見, 而到妙梵山, 創淨岩寺. 後有信孝居士者,

或云幼童菩薩化身. 家在公州, 養母純孝. 母非肉不食, 士求肉

出行山野, 路見五鶴射之, 有一鶴落一羽而去. 士執其羽, 遮眼

而見人, 人皆是畜生. 故不得肉, 而因割股肉進母. 後乃出家,

捨其家爲寺, 今爲孝家院.

士自慶州界至河率, 見人多是人形. 因有居住之志, 路見老婦,

問可住處. 婦云, ‘過西嶺有北向洞, 可居.’ 言訖不現. 士知觀

音所敎, 因過省烏坪, 入慈藏初結茅處而住. 俄有五比丘到云,

‘汝之持來袈裟一幅, 今何在?’ 士茫然. 比丘云, ‘汝所執見人

之羽是也.’ 士乃出呈. 比丘乃置羽於袈裟闕幅中相合. 而非羽

乃布也. 士與五比丘別, 後方知是五類聖衆化身也.”

此月精寺, 慈藏初結茅, 次信孝居士來住, 次梵日門人信義頭

陀來, 創庵而住. 後有水多寺長老有緣來住, 而漸成大寺. 寺之

五類聖衆, 九層石塔皆聖跡也. 相地者云,“ 國內名山, 此地最

勝, 佛法長興之處.”云云.

816) 월정사(月精寺):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에 있는 절. 643년에 자장

     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자장이 창건할 때는 초암(草庵)을 얽어 머물렀으나 이

     후 여러 차례 규모가 커져 점차 큰 사찰로 자리잡았다. 높이 15.2m의 화강암으

     로 만든 국보 제48호 팔각구층석탑이 본당 앞 뜰에 서 있다.

817) 다섯 성중:다섯 가지 부류의 성중, 곧 오대산의 동·남·서·북·중의 오대에 상

     주한다는 관음·지장·세지·나한·문수보살의 진신을 말한다.

818) 자장(慈藏):신라시대의 승려. 636년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오대산의 문

     수보살을 만나보고 가사(袈裟)와 사리를 받았다.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

     寺)에서 도를 닦고 화엄종의 두순(杜順)과 계율종(戒律宗)의 도선(道宣)에게 배

     운 뒤, 643년 장경(藏經) 1부와 불구(佛具)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대국통(大國統)

     이 되어 승니(僧尼)의 규범과 승통(僧統)을 통괄하였고, 황룡사 9층탑 창건을 건

     의, 645년에 완성하였다. 4-5 주122) 참조.

819) 묘범산(妙梵山):『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정선군조를 보면 정암

     사(淨巖寺)가 정암산(淨巖山)에 소재한다고 되어 있다.

820) 정암사(淨岩寺):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태백산(太白山)에 있는 절. 자장

     이 창건하였다는 적멸보궁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있다. 보물 제410호인 수마노

     탑이 적멸보궁 뒤 산비탈에 세워져 있는데 자장이 당에서 가져온 마노로 만든

     탑이어서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 한다. 자장은 갈반지(葛蟠地)라 한 이곳에 석남

     원(石南院)을 세우고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삼국유사』권4 의해「자장

     정율」)『삼국유사』「대산오만진신」편에는 ‘정암사(淨嵓寺)’라 하였다.

821) 거사(居士):출가하지 않고 불도(佛道)에 힘쓰는 이.

822) 유동보살(幼童菩薩):유동보살(儒童菩薩)이라고도 쓰며 석가가 전생에 연등불

     (燃燈佛)을 공양하던 때의 보살이다. 연등불에게 연꽃을 공양하고 머리를 풀어

     연등불의 발이 진흙에 닿지 않게 한 공덕으로 미래세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

823) 화신(化身): nirmāna-kāya. 부처나 보살이 아직 수행 단계가 낮은 중생들을

위해 갖가지 형태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나타내 보이는 것을 말한다.

824) 공주(公州):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825) 효가원(孝家院):충남 공주시에 있던 절. 공주목에 효가리원(孝家里院)이라는

     역원이 있는데, 이와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17 공주목

     역원 효가리원)

826) 하솔(河率):하슬라(河瑟羅), 즉 강원도 강릉시의 옛 이름.

827) 관음보살(觀音菩薩):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 고

     난에 처한 중생들이 그 이름을 부르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고난에서 구제해

     준다는 데서 유래하여 관음 신앙을 형성하였다. 『화엄경』의 내용에 따라 나라마

     다 우리나라의 낙산처럼 자신의 국토에 관음이 사는 보타락가산을 설정하였다.

     4-12-1 주292) 참조.

828) 이것은 문수신앙의 근거지인 오대산의 월정사 창건에 관음이 관여하고 있음을 보

     여준다. 월정사를 중심한 오대산신앙에 관음신앙이 함께 섞여 있음을 의미한다.

829) 범일(梵日):810~889. 신라 말에 강릉 지방을 중심으로 신라 선문구산 중에서

     성주산문과 함께 가장 형세가 컸던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창조. 일명 품일(品

     日). 헌덕왕 16년(824)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를 받고 흥덕왕 6년(831)에 당

     나라에 가서 염관제안(鹽官齊安)의 법을 이었다. 문성왕 8년(847)에 귀국하여

     명주도독 김공의 요청으로 굴산사에서 종풍을 떨치며 40여년 동안 이 절에만

     머물며 교화하다 진성왕 3년(889)에 입적하였다. 4-19 주739) 참조.

830) 신의(信義):신라 말에 활동한 범일(梵日)의 제자.

831) 두타(頭陀): dhūta. 두타행(頭陀行)을 하는 승려. 두다(杜多)라고도 쓰며, 기제

     (棄除)·수치(修治)·두수(抖擻) 등으로 번역한다. 의 식 주 등 인간의 모든 집착

     과 번뇌를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승려들의 수행을 말한다. 보통 12두타라 하

     여 아랸야에 살고, 걸식하여 하루 한 끼만 먹으며, 헤진 옷을 입는 등의 조항을

     두었다.

832) 수다사(水多寺):강원도 강릉에 자장(慈藏)이 창건했던 절.

833) 장로(長老): sthavira. 지혜와 덕행이 높고 출가한 지 오래된 나이가 많은 비구

     (比丘)를 부르는 말. 선종(禪宗)에서는 배우는 이들을 맞아 가르치는 스승을 장

     로라고 하기도 한다.

834) 9층석탑:현재 월정사 대웅전 앞에 있는 8각9층탑. 국보 제48호로 높이 15.2m의

     이 탑은 고려시대의 탑 양식을 보인다. 이 탑상편의 마지막 편인「오대산문수사

     석탑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탑이 대웅전 등 다른 건물과 견주어 중심선상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남월산[감산사]

 

[해제]

성덕왕 때 김지성이 시주하여 개창한 감산사의 석조 미륵보살상과 아미

타불상 조상기를 소개한 편이다. 김지성은 통일신라가 가장 번영을 누리던

성덕왕 때 중아찬 관등으로 집사시랑을 지낸 인물이다. 육두품의 신분적

한계로 관직이 제한되었지만 한도 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지식인이

라고 할 수 있다. 조상기에는 김지성이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고 노장사상과

무착의 유식을 흠모하고 바랐는데 6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도덕경과 유식

을 깊이 연구하고 감산에 있던 땅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고 719년에는 돌아가

신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상을, 720년에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

불상을 조성하였다. 불상을 조성하고 부모 외에도 친척으로 생각되는 무열

왕의 여섯째 왕자 개원(愷元)을 비롯하여 형과 아우와 누이들, 전처와 후처,

법사 등 여러 사람과 국왕과 일체중생의 보리 증득을 기원하였다. 신라 법상

종의 특징적인 가람 구성은 금당에 미륵불, 강당에 미타불을 함께 봉안하는 

것인데, 이 감산사 불상은 금당에 미륵보살상을 봉안하고 동시에 아미타불상을 

조성하여 그 좋은 예를 보여주는 명확한 조성 기록이다. 이 편은 불상 뒷면에 

새긴 조성기를 인용하여 구성하였는데, 조상기의 서두에 나오는 김지성의 활

동과 지적 경향은 인용하지 않고 불상 조성과 관련 인원만 간추려 실었다. 이 

두 불상은 현재 남아있어 설총이 지은 것으로 생각되는 불상 조성기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편에 실린 구절은 판독상의 몇 글자가 차이는 있으나 불상 조성

기와 거의 일치한다. 두 불상은 1916년 경주 지방의 고적 조사를 실시할 때 

경주 내동면 신계리의 논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조각실에 

전시되고 있다. 미륵보살상은 높이 189.4cm, 너비 107.6cm이며, 아미타불

상은 높이206cm, 너비 109.1cm이다. 불상의 뒷면 광배에 새겨진 조상기는 

글자 크기 2.4cm의 행서체이다. 이 편을 통해 신라의 귀족들이 부모의 명복

을 비는 것과 같은 목적에서 토지를 희사하여 절을 창건하였던 사실과 함께 

관직에서 은퇴한 후에는『도덕경』이나 유가 법문을 깊이 연구하고 했던 

지식인의 말년 생활 경향을 알 수 있다. 또한 부모 모두 동해에서 유골을 

뿌려 장례지 내고, 망자를 위한 공덕으로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조성하는 

것이 첫손 꼽는 일이었음도 알 수 있다.

 

[역주]

남월산〈감산사라고도 한다〉

 

절은 서울835)의 동남쪽 20여리쯤 되는 곳에 있다.836) 금당(金堂)의 주불

인 미륵존상(彌勒尊像)837)의 화염무늬 광배(光背)838) 뒤에 이렇게 기록839)

하였다. “개원(開元)840) 7년(719) 기미년841) 2월 15일 중아찬(重阿喰)842) 김

지성(金志誠)843)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844)과 돌아

가신 어머니 관초리845)부인(觀肖里夫人)을 위하여 삼가 감산사(甘山寺)846)

한 절과 돌 미륵 1구를 조성하고, 겸하여 개원(愷元)847) 이찬(伊喰)848)과 아

우인 양성(良誠) 소사(小舍)849), 현도(玄度)스님과 누나 고파리(古巴里)850),

전처 고로리(古老里)851), 후처 아호리(阿好里)와 서형 급한(及漢) 일길찬

(一吉喰), 일당(一幢)852) 살찬(薩喰)853), 총경(聰敬) 대사(大舍)854)와 여동생

수힐매리(首肹買里)를 위하여 함께 이 좋은 일을 지었다.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 부인은 고인이 되어 동해 흔지(欣支)가에 (유골을) 흩었다855).”〈‘고

인이 되어(古人成之)’ 이하 글은 그 뜻을 잘 알 수 없으나 다만 옛글 그대로 적어둔다. 아래

도 같다.〉

南月山 〈亦名甘山寺〉

寺在京城東南二十許里. 金堂主彌勒尊像火光後記云.“ 開元

七年己未二月十五日, 重阿喰金志誠, 爲亡考仁章一吉干, 亡

妣觀肖里夫人, 敬造甘山寺一所, 石彌勒一軀, 兼及愷元伊喰,

弟良誠小舍, 玄度師, 姊古巴里, 前妻古老里, 後妻阿好里, 兼

庶兄及漢856)一吉喰, 一幢薩喰, 聰敬大舍, 妹首肹買里, 同營

玆善. 亡妣官肖里夫人, 古人成之, 東海欣支邊散也.”〈古人成之

以下, 文未詳其意, 但存古文而已. 下同.〉

835) 서울:신라시대 수도인 경주를 말한다.

836) 감산사지에는 발견된「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은 7세기 중엽 신라에서 직

     접 인도의 영향을 받고 수(隋)·당(唐)의 수법과 조화시켜 이상적 사실주의라는

     신라 특유의 불상 미술을 성립시킨 대표적인 양식으로 손꼽힌다. 현재 국립중

     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화염무늬로 처리된 광배에 장문의 기록이 새겨져

     있어 불상을 만든 유래와 연대를 명시하여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837) 미륵존상(彌勒尊像):감산사 미륵상은 미륵보살상이다. 미륵은 브라만 집안에

     서 출생하여 뒤에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하여 보살로서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하며 도솔천(兜率天)에 살고 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여러 중생을 제도하고자 처음 발심할 때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여 이로 인해

     자씨(慈氏)보살로 부른다. 석존께서 미륵에게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할 때 그 수

     명이 4천세(인간의 시간으로는 약 57억 6천만년)가 될 때 장차 도솔천에서 이 땅

     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삼회(三會)에 걸쳐 설법하여 각각

     96억, 94억, 92억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런 경설에 따라 미륵신앙은 미륵

     보살이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미륵상생 신앙과, 미륵이

     부처가 되어 이 땅에 내려와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미륵하생 신앙의 두 가지 신

     앙이 있게 된다. 이 감산사미륵보살상은 전체 크기 257cm, 불상 크기 183cm이

     며 국보 제81호이다.

838) 광배(光背):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 머리나 등 뒤에

     광명을 표현한 것. 원형이나 배 모양 등 여러 형태가 있고, 역할에 따라 머리 뒤

     에만 있는 두광(頭光), 몸 부분에 만든 만든 신광(身光), 전신을 둘러 표현한 거

     신광(擧身光) 등이 있다.

839)「감산사미륵보살조상기(甘山寺彌勒菩薩像造像記)」를 보면, 미륵보살상은 719년

     (성덕왕 18)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아울러 국왕과 당시 실력자였던 개원

     (愷元) 및 자신의 가족, 모든 중생들의 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조상

     기의 전체 내용은 앞 부분이 김지성이 관직에서 물러나 장자(莊子)·노자(老子)

     를 사모해서『도덕경(道德經)』을 즐겨 읽고, 진종(眞宗:불교)을 중히 여겨 유가

     법문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왕명을 받아 감산사를 창건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뒷부분은 여기에 실려 있는 내용과 같다.「조성기」의 찬(湌)을 찬(喰)으로 쓰는

     등 몇 글자가 다르거나 있고 없는 등의 차이는 있으나 그 차이가 내용에 변화를

     가져올 만큼은 아니다.

840) 개원(開元):당(唐) 현종(玄宗)의 연호. 713~741년. 신라 성덕왕 12~효성왕 5년.

841) 개원(開元) 7년(719) 기미년:성덕왕 18년

842) 중아찬(重阿喰):아찬은 신라 제6위의 관등으로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이다. 6두품은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으로 오를 수 없기 때문에 중아찬에

     서 사중아찬(四重阿湌)까지 첨가 설치되었다. 따라서 이 관등을 가진 사람들은

     6두품이라고 볼 수 있다.

843) 김지성(金志誠):감산사와 두 불상을 조성한 발원자. 미타상 조상기에는 김지전

     (金志全)으로 되어 있다. 신라 성덕왕 때의 관리로 중아찬의 관등에 올랐으며 67

     세에 집사부 시랑직에서 물러난 뒤, 감산사를 창건하고 아미타불과 미륵보살을

     조성해서 봉안하고, 감산사에서『유가론(瑜伽論)』과『장자(壯子)』등 을 읽으면

     서 만년을 보냈다.

844) 일길간(一吉干):신라 17관등 중 제7관등. 일길찬(一吉湌)이라고도 함.

845) 리(里):감산사의 두 조상기에 나오는 여인의 이름은 끝에 리자가 붙어있는데,

     이것은 후대의 택호(宅號)처럼 생가의 마을 이름이나 출가한 집의 마을을 가리

     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846) 감산사(甘山寺):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던 절. 719년(성덕왕 18) 2

     월 중아찬(重阿飡) 김지성(金志誠)이 감산에 있는 장전(莊田)을 희사하여 아버

     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과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의 명복을 빌고, 국

     왕과 그 일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창건 후 어머니를 위해서

     미륵보살상 1구를, 아버지를 위해서 아미타불상 1구를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1916년에 경주지방 고적을 조사할 때 경주 내동면 신계리의 논에 박혀 있던 미

     륵과 미타불상을 발견하여 감산사지임이 밝혀졌다. 현재 절터에는 감산사지삼

     층석탑이 남아 있다.

847) 개원(愷元):이 편의 끝에 붙인 주석과 같이 김개원은 태종 김춘추의 제6자이자

     문명왕후 문희의 소생으로 나온다. 무열왕 2년(655)에 이찬, 문무왕 7년(667)에

     고종의 명으로 요동 전쟁에 나가 대아찬이 되었으며 668년에는 김인문 등과 함

     께 대당총관으로 대총관 김유신을 따라 고구려 전쟁에 나섰다. 신문왕 3년(683)

     에 이찬, 효소왕 4년(695)에 상대등이 되었다. 불상 조성의 발원자 김지성은 당

     대 최고위 왕실 귀족인 김개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848) 이찬(伊喰):신라 17관등 중의 제2관등. 이척찬(伊尺飡)·이간(伊干)이라고도 한다.

849) 소사(小舍):신라 17관등 중의 제13관등. 사지(舍知)라고도 한다.

850) 고파리(古巴里):「감산사아미타불상조상기」에는 고보리(古寶里)로 되어있다.

851) 고로리(古老里):위 아미타불상 조상기에는 고로리(古路里)로 되어있다.

852) 일당(一幢):「감산사미륵보살상조상기」에는 일동(一憧)으로 되어있다.

853) 살찬(薩湌):신라 17관등 중의 제8관등. 사찬(沙湌)·사간(沙干)이라고도 한다.

854) 대사(大舍):신라 17관등 중의 제12 관등. 한사(韓舍)라고도 한다. 4두품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관등이다.

855) 古人 - 散之:이 부분은 이두식 표기이다. 攸友는 향찰로 바우 곧 바위라고 하며

     고인이 되자 동해 바윗가에 뼈를 흩뿌렸다는 뜻이라고 한다. 「감산사미륵보살

     상조상기(甘山寺彌勒菩薩像造像記)」에서는 ‘東海欣支邊散之’로 판독하였는데,

    「감산사아미타불상조상기(甘山寺阿彌陀佛像造像記)」에서는 이곳과 같이 ‘東海

     欣支邊散也’로 판독하였다. ‘동해 흔지 가에 (뼈를) 흩었다’로 해석된다.

856) 원문의 ‘漠’은 ‘漢’의 오기로 생각된다.「감산사아미타불상조상기」와「감산사미

     륵보살상조상기」에는 급한(及漢)으로 되어 있다.

 

   아미타불857)의 화염무늬 광배 뒤의 기록858)은 이렇다. “중아찬 김지전(金

志全)859)은 일찍이 상의(尙衣)860)로서 임금을 받들었고 또 집사시랑(執事

侍郞)861)이 되었는데 나이 67세에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지냈다. 국주

대왕(國主大王)과 이찬(伊喰) 개원과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 돌아

가신 어머니, 죽은 아우인 소사 양성, 현도스님, 죽은 아내 고로리(古路里),

죽은 누이 고파리(古巴里)를 위하고, 또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하여

감산의 장전(莊田)862)을 희사하여 절을 세우고, 또 석조 미타상 1구를 조성

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받들어 위하였다. 고인이 되어 동

해 흔지가에 (유골을) 흩었다.”〈왕실의 계보를 살펴보면 김개원(金愷元)은 태종(太

宗) 김춘추(金春秋)의 여섯째 아들인 개원 각간이니 문희(文姬)863)의 소생이다. 김지전은

인장일길간의 아들이다. 동해 흔지는 법민(法敏)864)을 동해865)에 장사 지낸 것인 듯하다.〉

彌陁佛火光後記云, 重阿喰金志全, 曾以尙衣奉御, 又執事侍

郞, 年六十七, 致仕閑居, 奉爲國主大王, 伊喰愷元, 亡考仁章

一吉干, 亡妃, 亡弟小舍梁誠, 沙門玄度, 亡妻古路里, 亡妹古

巴里, 又爲妻阿好里等, 捨甘山莊田, 建伽藍, 仍造石彌陁一

軀, 奉爲亡考仁章一吉干, 古人成之, 東海欣支邊散也.〈按帝系,

金愷元乃太宗春秋之第六子愷元角干也, 乃文姬之所生也. 金志全乃仁章一吉干

之子. 東海欣支, 恐法敏葬東海也.〉

857) 아미타불: Amitāyus. 무량수불(無量壽佛). 서방 정토(西方淨土)에 있으면서 그

     를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중생들은 모두 서방정토에 태어나게 한다는 부처

     이다. 산스크리트어 원어에 두 가지가 있어 Amitāyus는 무한한 수명이라는 뜻으

     로 무량수(無量壽)로 번역되고, Amitābha는 한량없는 빛이라는 뜻으로 무량광

     (無量光)으로 번역된다. 『무량수경』에 따르면 과거 오랜 옛날 세자재왕불(世自

     在王佛) 시대에 한 국왕이 위 없는 도심을 내서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이름을

     법장(法藏)비구라 하고 부처 아래서 수행하여 48원을 내고 공덕을 쌓아 아미타

     불이 되었다. 그는 여기서 10만억 불토 떨어진 서방에서 극락정토(極樂淨土)을

     이루어 지금도 설법하고 있으면서 염불하는 이들을 서방 정토로 왕생하도록 이

     끌어 주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정토 신앙의 주인공이 되었다. 중심 경전은

    『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의 미타

     삼부경(彌陀三部經)이 있다. 감산사 아미타불상은 불상 높이 174cm로서 국보

     제82호이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상기에는 720년에 만든 것으

     로 되어 있지만 747년에 이름을 고친 ‘집사시랑(執事侍郞)’이라는 관직이 나오

     는 것으로 보아 약 30년이 지나 발원자 김지성의 사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

     된다. 불상의 양식도 미륵보살상보다 후대의 것이라고 한다.

858)「감산사아미타불상조상기(甘山寺阿彌陀佛像造像記)」를 살펴보면, 미타상의 조

     성 연대는 720년(성덕왕 19, 경신)이다. 조상기의 내용은 미륵보살조상기와 비슷

     하며 중아찬 김지전(金志全)이 부모의 은덕과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절

     을 세우고 미타불상을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나마(奈麻)인 총(聰)이 왕명을

     받들어 조상기를 지었다고 되어 있어, 이 총은 설총(薛聰)으로 추정된다. 글자가

     마모되어 확인되지는 않지만 글씨는 승려인 경융(京融)과 대사(大舍)인 김취원

     (金驟源)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보살상조상기와 마찬가지로 몇 글자가 있

     고 없거나 다른 등의 차이는 있지만 의미상의 변화까지 보이는 것은 아니다.

859) 김지전(金志全):미륵보살 조상기에 나오는 김지성의 다른 이름.

860) 상의(尙衣):「감산사아미타불상조상기」에는 상사(尙舍)로 되어 있다. 상사는 궁

     중에서 음식, 의복 등을 관장하는 직책이다.

861) 집사시랑(執事侍郞):집사성의 장관인 중시에 이은 차관급 관리. 집사성은 국가

     기밀과 서정을 맡은 최고의 행정기관인데 651년(진덕여왕 5) 품주(稟主)를 개편

     한 것이다. 중시 밑에 전대등(典大等) 2인을 두었다가 747년(경덕왕 6)에 시랑

     (侍郞)으로 고쳤다(『삼국사기』 권38, 잡지 7, 직관 상). 따라서 집사시랑의 관직명

     은 김지성의 생존 기간과 어긋난다. 그래서 김지성은 719년 아미타상을 조성하

     기 시작한 얼마 후 돌아가고 30여년 뒤(747 이후)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

     양식으로 보아도 719년의 미륵상보다 얼마간 후대의 것이라고 한다.

862) 장전(莊田):전지(田地)와 그에 부속된 건물. 왕실 귀족 사원 등이 소유한 대규

     모의 토지와 그 경영에 필요한 부속건물을 전장(田莊)이라고 하는데 여기의 장

     전도 같은 의미의 용어로 생각된다.

863) 문희(文姬):문명왕후(文明王后).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비. 소판(蘇判) 김

     서현(金舒玄)의 딸이며,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이다. 무열왕과의 사이에 문무

     왕인 태자 법민(法敏), 각간(角干) 인문(仁問)·문왕(文王)·노차(老且)·지경(智

     鏡)·개원(愷元) 등을 낳았다.

864) 법민(法敏):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이름.

865)『삼국유사』권2 문호왕법민 및 『삼국사기』 권7 문무왕 21년 7월 조 등에 의하면

      681년 문무왕이 죽으면서 불교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에 따라 화장한 유

     골을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

     길리에 있는 대왕암(大王岩)이 수중릉(水中陵)으로 생각되는 이것이다.

 

천룡사

 

[해제]

경주 남산에 있던 천룡사의 연혁에 대해 설명한 편이다. 한 신도가 두 딸

을 위하여 이름을 따서 절을 지은 창건 유래를 소개하고, 『토론삼한집(討

論三韓集)』과 같은 지리서를 인용하여 이 절의 지리적 우상이 중요함을 역

설하였다. 여기에 중국 사신의 말을 빌려 강조한 것은 고려 시기의 사상적

경향을 짐작하게 한다. 이어서 고려초의 중신인 최승로의 손자 최제안(崔

齊顔)이 폐허가 된 절을 중창하고 당시의 상례대로 조정에서 주지를 임명

하는 대신에 절의 대중 중에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자를 뽑아 대대로 주

지를 맡도록 할 것을 조정의 허락을 받아 지방관의 공문으로 확인한 1040

년 작성의 문서를 인용하였다. 최제안은 이 문서와 원문을 절에 남기고, 죽

어서도 절을 보호하는 신이 되어 영험을 여러 차례 보였다고 할 만큼 절의

중창주이자 수호신으로 추앙되었다고 한다. 이 문서에서는 천룡사 이전에

지장사나 도선사 그리고 서경의 네 절 등 토지를 시주받아 자립한 사원에

서 이미 이와 같은 주지 자체 선출제를 시행하고 있다는 근거도 들고 있다.

고려 전기 귀족들이 사찰을 건립하고 그 운영에도 깊이 관여하던 상황을

잘 알려주는 자료이다. 동시에 일반 사원은 조정의 통제 속에 운영되었음

을 알게 한다. 또한 사원의 기본 구조가 전당과 회랑과 승방・부엌・창고 등

이며 불상은 석조와 소조를 아울러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많지 않은 고려

전기의 고문서 자료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최제안의 문서 외에 이 편

의 자료로서는『토론삼한집』과 사람들이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중에는 중국 사신의 언급도 들어 있다.

 

[역주]

천룡사

 

   동도(東都)866)의 남산(南山) 남쪽에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사람

들은 ‘고위산(高位山)’867)이라고 부른다. 이 산의 남쪽에 절이 있는데868) 우

리말로 고사(高寺)라고 하며 혹은 천룡사(天龍寺)869)라고도 한다.『토론삼

한집(討論三韓集)』870)에서는 “계림(鷄林)871)의 땅에는 객수(客水)872) 두 줄

기와 역수(逆水)873) 한 줄기가 있다.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에서 천재(天

災)를 잘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天龍寺)가 뒤집혀 무너지는 재앙이 올

것이다”고 하였다.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로는 “역수(逆水)는 주(州)의 남쪽에 있는 마등

오촌(馬等烏村)874)의 남쪽을 흐르는 물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天龍寺)에까지 이른다”고 하였다.875) 중국에서 온

사신 악붕귀(樂鵬龜)876)가 와서 보고는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며칠

안에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서로 전하는 말에 이르기를, “옛

날에 단월(檀越)877)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천녀(天女)와 용녀(龍女)라고 하

였다. 부모가 두 딸을 위하여 절을 짓고 딸의 이름으로 절 이름을 지었다.”

고 하였다. 땅이 특이하여 불도를 돕는 터전이었는데 신라말에 부서진 지

오래되었다.

   중생사(衆生寺)878)의 관음대성(觀音大聖)879)이 젖을 먹인 최은함(崔殷

諴)880)의 아들이 최승로(崔承魯)881)이고, 최승로가 최숙(崔肅)882)을 낳았

고, 최숙(崔肅)은 시중(侍中)883) 최제안(崔齊顔)884)을 낳았다.885) 최제안이

이 폐허가 된 절을 중수하고,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886)을 열고는 조

정의 허가서[朝旨]를 받았고, 신서(信書)와 원문(願文)을 절에 남겨 두었

다. (그는) 죽어서 이 절을 보호하는 신이 되어 영험한 이적을 여러 번 보였

다. 그 신서(信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단월(檀越)인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

事)887) 주국(柱國)888) 최제안(崔齊顔)이 씀.

   동경(東京) 고위산(高位山)의 천룡사가 파손된지 여러 해가 되어 제자

(弟子:제안 자신)가 특별히 임금의 수명이 하늘처럼 길고 백성과 나라가

평안하기를 발원하여 전당(殿堂)과 회랑, 승방과 부엌, 창고 등을 짓는 것

이 완성되었다. 이에 석조와 소조의 불상 몇 구를 갖추고 석가만일도량

을 열었다. 이미 나라를 위하여 세운 것이므로 관가에서 (이 절의) 주지(住

持)889)을 임명하는 것이 옳겠지만 (주지가) 바뀌어 교대할 때에 도량의 스

님들이 안심하기 어렵다. 그런데 토지를 시주받아 넉넉한 사원들을 살펴보

니, 공산(公山)890) 지장사(地藏寺)891)와 같은 곳은 납입전(納入田)892)이 2백

결이고, 비슬산(毗瑟山)893) 도선사(道仙寺)894)는 납입전이 20결이며, 서경

(西京) 사방의 산사도 각각 납입전 20결씩의 예가 있다. 모두 승직(僧職)895)

의 있고 없음을 논하지 않고 계율(戒律)을 갖추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

을 골라서 절의 대중의 여망에 따라 차례대로 주지(住持)가 되어 분향(焚

香)896)하고 수도(修道)함을 정해진 규칙으로 하였다. 제자(弟子)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우리 천룡사도 또한 절의 대중 가운데서 재능과 덕행이 함

께 뛰어난 승려를 골라 뽑아 동량(棟梁)897)을 겸하게 하고 주지(住持)로 임

명하여 길이898) 분향하고 수도하게 한다. 문서로 자세히 기록하여 강사(剛

司)899)에게 맡기니 지금의 주지부터 시작한다. 유수관(留守官)900)의 공문

을 받아서 도량의 여러 대중에게 보일 것이니, 각자 자세히 알아야 한다.

   중희(重熙)901) 9년 6월 일. 관직을 갖추어 앞과 같이 서명했다.

   중희(重熙)는 거란 흥종(興宗)902)의 연호로 이때는 우리나라903) 정종(靖

宗)904) 7년(1040) 경진년905)이다.

天龍寺

東都南山之南, 有一峯屹起, 俗云高位山. 山之陽有寺, 俚云高

寺, 或云天龍寺.

討論三韓集云, “鷄林土內有客水二條, 逆水一條. 其逆水客水

二源, 不鎭天災, 則致天龍覆沒之災.” 俗傳云, “逆水者, 州之

南, 馬等烏村南流川是.” 又“是水之源致天龍寺.” 中國來使

樂鵬龜來見云, “破此寺則國亡無日矣.” 又相傳云, “昔有檀越

有二女, 曰天女龍女. 二親爲二女創寺, 因名之.”

境地異常助道之場, 羅季殘破久矣. 衆生寺大聖所乳崔殷諴之

子承魯, 魯生肅, 肅生侍中齊顔. 顔乃重修其廢, 仍置釋迦萬日

道場, 受朝旨, 兼有信書願文, 留于寺. 其卒爲護伽藍神, 頗著

靈異.

其信書略曰.“ 檀越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柱國崔齊顔狀,

東京高位山天龍寺殘破有年, 弟子特爲聖壽天長民國安泰之

願, 殿堂廊閣房舍廚庫 已來興構畢, 具石造泥塑佛聖數軀, 開

置釋迦萬日道場. 旣爲國修營, 官家差定主人亦可, 然當遞換

交代之時, 道場僧衆不得安心. 側觀入田稠足寺院, 如公山地

藏寺入田二百結, 毗瑟山道仙寺入田二十結, 西京之四面山寺

各田二十結例. 皆勿論有職無職, 須擇戒備才高者, 社中衆望,

連次住持焚修, 以爲恒規. 弟子聞風而悅, 我此天龍寺, 亦於社

衆之中, 擇選才德雙高大德, 兼爲棟梁, 差主人, 鎭長焚修. 具

錄文字, 付在剛司, 自當時主人爲始, 受留守官文通, 示道場諸

衆, 各宜知悉. 重熙九年六月日. 具銜如前署.”

按重熙乃契丹興宗年號, 本朝靖宗七年庚辰歲也.

866) 동도(東都):고려시대의 경주에 대한 호칭. 신라가 고려에 귀부한 이후 신라의

     수도는 경주(慶州)가 되었고 성종(成宗) 대부터 동경(東京)으로 칭해지고 유수

     (留守)가 파견되었다. 이후 몇 차례 읍호의 강등이 있기는 하였지만 고려 전 시

     기를 통하여 개경(開京), 서경(西京)과 함께 삼경(三京)을 이루는 중요한 지역

     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813년에 작성된「단속사 신행선사비(斷俗寺 信行禪師

     碑)」에도 경주(慶州)를 가리키는 말로 동경(東京)이 사용되고 있어(“禪師 俗姓金

     氏, 東京御里人也.”) 신라시대에도 비공식적으로는 경주를 동경(東京)이라고 불

     렀던 것을 알 수 있다.

867) 고위산(高位山):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의 일부로서 가장 남쪽 봉우리. 해발

     494m.『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주부 산천(山川) 항목에 부(府)

     의 남쪽 25리 지점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경주 남산 남쪽의 성부산(星浮山) 아래에 있는 별도의 산으로 표시되어 있다. 일

     반적으로 ‘수리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고위(高位)’는 ‘수리’의 한역이라고 여

     겨진다.

868) 산의 남쪽에 절이 있는데:천룡사의 위치는 고위산(高位山)의 서남쪽이 된다.

869) 천룡사(天龍寺):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고위산(高位山) 천룡곡(天龍

     谷)에 있는 절.『동국여지승람』의 경주부 불우(佛宇) 항목에도 고위산(高位山)

     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1990년 동국대박물관에서 시행한 발굴조사에서 가

     정(嘉靖) 27년(1548, 조선 명종 3) 명(銘)의 기와 조각을 발굴하였으며 강희(康熙)

     27년(1688, 조선 숙종 14)에 간행된 『묘법연화경』에 ‘경주 부남 고위산 천룡사개

     간’란 간기(干記)가 나타나고 있어 조선시대 거의 전 기간에 걸쳐 상당한 규모

     를 유지한 채 존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까지도 절터에 삼층석탑의 탑

     재와 비의 대좌로 추정되는 머리가 잘린 귀부, 석조(石槽), 석등 대석, 맷돌, 불

     상 대좌, 주춧돌 등이 남아 있었는데 1990년의 발굴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제작

     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소여래입상 3점을 비롯하여 금동대좌, 금동소불두, 은

     제유희보살좌상, 팔면감실석조불좌상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최근에 옛

     터 북쪽에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하고, 폐탑의 석재를 중심으로 복원한 3층석탑

     이 남아있다.

870)『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어떤 책인지 알 수 없지만 이 글에 인용된 내용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유행한 풍수(風水)에 관련된 책으로 추정된다.

871) 계림(鷄林):경주의 다른 이름.『삼국유사』기이편「혁거세왕」편에 계림이 신라

     의 다른 이름임을 기록하고, 그 이름에 대한 유래로서 혁거세가 태어날 때 계룡

     (鷄龍)이 출현하였다는 것과 탈해왕대에 김알지가 출현할 때 숲(始林)에서 닭이

     울었기 때문이라는 두 가지의 전승을 소개하고 있다.(『삼국유사』권1 기이「新羅

     始祖 赫居世王」)

872) 객수(客水):다른 곳에서 흘러들어 온 물 줄기

873) 역수(逆水):지세의 방향과 거꾸로 흐르는 물. 천룡사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데, 이러한 물의 방향이 우리나라 하천의 일반적 흐

     름 방향인 북쪽(또는 동쪽)→남쪽(또는 서쪽)의 방향과 반대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흔히 이런 하천이 지나는 곳은 역향(逆鄕)이라고 하여 반역

     자가 나타난다고 하기도 하였다.

874) 마등오촌(馬等烏村):『삼국유사』 기이「혁거세왕」편에 의하면 원래 돌산고허촌

     (突山高墟村)인 육부의 사량부(沙梁部)에 속하며 이는 고려시대에 남산부(南山

     部)로 바뀌었다고 한다. 마등오촌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

     다. 남산부라는 이름에 주목하여 반월성에서 남산에 이르는 지역으로 보는 설,

     남천(南川)의 북쪽·서천(西川)의 동쪽·북천(北川)의 남쪽 지역으로 보는 설 등

     서로 다른 설이 많이 제시되어 있다.

875) 천룡사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는 옆의 와룡계와 틈수골과 합하여 기린내(麟川)로

     흘러드는데 이 기린내는 북쪽으로 흘러 경주의 서천(西川)에 합류한다.

876) 악붕귀(樂鵬龜):중국 당나라의 관료. 활대(滑臺) 출신으로 당 희종(僖宗) 때인

     881년에 한림학사 승지지제고(翰林學士承旨知制誥)가 되었고 뒤에 태자소보(太

     子小保)로 치사(致仕)하였다.『신·구당서』나『삼국사기』에는 그가 신라에 사신

     으로 왔다는 기록이 없지만『삼국유사』기이「문호왕법민」에는 사천왕사(四天

     王寺)를 지어 당군(唐軍)을 물리친 후 당 고종에게 황제의 축수(祝壽)를 위해 사

     찰을 건립했다고 얘기했을 때 그 실상을 알아보기 위해 예부시랑(禮部侍郞) 악

     붕귀를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전기의 학자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에도

     악붕귀가 우리나라의 좋은 지역에 진압지술(鎭壓之術)을 행했다는 기록이 있

     다.(『佔畢齋文集』권2「皇華集序」)

877) 단월(檀越): Dānapati. 시주(施主), 곧 보시를 행하는 사람. 보시는 육바라밀의

     하나로 자기가 소유한 것을 아낌없이 베푸는 행위로, 단월은 불교에 귀의한 신

     자로 절의 후원자를 뜻한다. 단월(旦越), 단나(檀那) 등으로 쓰기도 한다.

878) 중생사(衆生寺):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던 절. 중국의 이름난 화공이 신라에

     와서 만든 관음상이 있어 그 영험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고 한

     다.(『삼국유사』권3 탑상 「三所觀音衆生寺」)

879) 관음대성(觀音大聖):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 고

     난에 처한 중생들이 그 이름을 부르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고난에서 구제해

     준다는 데서 유래하여 관음 신앙이 형성되었다.『화엄경』의 내용에 따라 나라마

     다 우리나라의 낙산처럼 자신의 국토에 관음이 사는 보타락가산을 설정하였다.

     4-12-1 주292) 참조.

880) 최은함(崔殷諴):최승로(崔承老)의 부친.『고려사(高麗史)』에는 최은함(崔殷含)

     으로 표기하였다. 경주인으로 천성(天成) 연간인 926~929년에 고려에서 정보

     (正甫)를 지냈다.

881) 최승로(崔承魯):927~989.『고려사』에는 최승로(崔承老)로 되어 있다. 고려전기

     의 문신. 경주에서 출생해 935년(태조 18) 신라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투항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들어왔다. 어려서부터 태조의 총애를 받아 일찍부터

     문장과 학문 계통의 관직 생활을 하였고, 982년(성종 1)에는 정광 행선관어사 상

     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으로 행정의 요직을 맡았다. 이 해에 오조치적평(五

     朝治績評)과 시무28조를 올려서 당시 사회 문제 전반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였고

     이 내용이 고려전기 국가체제 정비에 반영됨으로써 이 시기를 대표하는 유학

     자로 평가되었다. 983년 문하시랑평장사가 되고 988년에 문하수시중이 되었다.

    『삼국유사』권3 탑상「삼소관음 중생사」편에는 최승로의 부친 최은함이 중생사

     관음상에게 빌어 늦은 나이에 최승로를 낳게 된 기사가 실려 있다.

882) 최숙(崔肅):고려 전기의 문신. 대광 내사령(大匡內史令) 최승로(崔承老)의 아들

     이며, 태사 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 최제안(崔齊顔)의 아버지이다. 관직은 문하

     시중에 이르렀다.

883) 시중(侍中):고려시대 종1품 수상직. 중서문하성의 최고 관직이다. 재상직의 통

     칭이며 관료로서는 유일한 종1품 실직으로서 명실상부한 수상직이었다. 판이

     부사(判吏部事) 등의 관직을 겸직하는 것이 상례였다.

884) 최제안(崔齊顔):?~1046. 고려 전기의 문신. 최승로(崔承老)의 손자이며 최숙(崔

     肅)의 아들이다. 1020년(현종 11)에 거란에 사신으로 다녀 오고 1030년에 중추사

     (中樞使), 1034년에 호부상서가 되었다. 1036년에 상서좌복야 중추사(尙書左僕

     射中樞使)가 되고 이듬해에 참지정사를 겸하였다. 1043년에 문하시랑이 되고 뒤

     에 태사 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거란의 침입으로 없어졌던 고려

     태조의 신서(信書)와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최항(崔沆)의 집에서 발견하여 후세

     에 전하게 하였다.

885) 여기에 기록된 최승로 가계는 『고려사』 최승로열전과 일치한다. 열전에는 최제

     안의 아들로 계훈(繼勳)이 있었고, 아버지의 공로로 특별히 8품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고려사』 권93 열전 崔承老) 그 이후의 자손에 대한 기

     록은 지금까지 묘지명 등에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

886)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만일도량(萬日道場)은 만일(萬日) 즉 약 30년에

     가까운 기간을 정하여 기도 혹은 설법을 행하는 법회로서, 석가만일도량은 석

     가불 신앙을 위한 법회를 만일 동안 계속하는 법회를 말한다.

887)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고려시대 내사문하성

     (內史門下省)의 정2품 벼슬. 문하시중(門下侍中)의 다음 관직으로 성종 때 처음

     두었으며 문종 때 내사문하성이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으로 바뀌면서 중서시

     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되었다.

888) 주국(柱國):고려시대 관리에 대한 포상제도인 훈계(勳階). 고려초에 상주국(上

     柱國)과 주국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관계(官階)나 관직의 높고 낮음과는 무관하

     게 수여되었다. 문종 때에 종2품으로 정하였고 충렬왕 이후에 없어졌다.

889) 주지(住持):원문의 주인(主人)은 주지를 뜻한다. 주지는 10세기 이후에 새롭게

     나타난 직제로서 원래 각 사찰의 자립적 행정기구였던 삼강(三剛)의 위에 자리

     잡고 그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고려시대의 경우 주지는 승과(僧科)를 거

     쳐 승계(僧階)를 가진 사람들로 임명되었고 국가에 의해 임명되는 것이 원칙이

     었지만 예외적으로 특정 문도(門徒) 내에서의 계승을 인정한 ‘부동사원(不動寺

     院)’ 등이 있기도 하였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신서(信書)도 천룡사(天龍寺)가 그

     러한 예외적 사찰로서 자체 문도 내에서 주지가 임명되도록 특혜받은 것을 증

     명하는 내용이다.

890) 공산(公山):팔공산(八公山). 대구광역시 북쪽과 경상북도 군위군, 영천군, 칠곡

     군, 경산군의 경계에 걸쳐있는 높이 1193m의 산으로 부악(父岳)이라고도 한다.

     신라시대에 국가적으로 중요한 오악(五岳)의 중악(中岳)으로 중시되었다.

891) 지장사(地藏寺):『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재의 대구광역시 수성구인 수성현

     (壽城縣)에 지장사가 있다고 되어 있다. 이 절에는 고려의 김황원(金黃元)이 쓴

     기문이 있었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26 대구도호부 佛宇) 수성현은 대구

     도호부의 남쪽에 12리에 있고 공산은 북쪽 17리에 있으므로 지장사는 실제로는

     공산과 떨어져 있는 셈이다.

892) 납입전(納入田):사찰에 납입한 토지. 사찰의 운영을 위하여 사람들이 기부한

     토지 곧 사원전을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이처럼 면세의 혜택을 누리는 사원전

     이 크게 확대되어 국가 재정을 어렵게 하기도 하였다.

893) 비슬산(毗瑟山):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옥포면·유가면과 경상북도 청도

     군 각북면에 걸쳐 있는 높이 1084m의 산으로 용연사와 유가사 소재 등의 많은

     사찰이 있다. 이 비슬산은 『삼국유사』 권5 피은 「포산이성(包山二聖)」에 나오는

     포산(包山)이기도 하며,『삼국유사』의 찬자 일연이 22년 동안 지내면서 공부한

     곳이기도 하다.

894) 도선사(道仙寺):경상북도 비슬산에 있던 절.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의 비슬

     산에 도성사(道成寺)가 있어서, 여기서 말하는 도선사와 같은 절이 아닌가 생각

     된다. 도성사는『삼국유사』에 관기(觀機)와도성(道成)이라는 두 수도자가 수행

     했던 이야기를 남기고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삼국유사』권5 피은「包山二聖」)

895) 승직(僧職):고려시대 승과(僧科)에 합격한 승려들에게 주는 승계(僧階). 각 사

     찰의 주지(住持) 이상의 승직은 승계를 가진 승려들만이 담당할 수 있었는데,

     그러한 승직을 담당할 자격이 있는지를 구분하는 의미에서 유직(有職)과 무직

     (無職)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 같다. 고려시대에 승과를 합격한 자에게 주는

     승계는 교종(敎宗)은 승통(僧統) - 수좌(首座) - 삼중대사(三重大師) - 중대사

     (重大師) - 대사(大師) - 대덕(大德)의 순이었고, 선종(禪宗)은 대선사(大禪師) -

     선사(禪師) - 삼중대사 - 중대사 - 대사 - 대덕의 순이었다. 그런데 문종 30년

     의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 규정에는 대덕(大德)에게 전시(田柴)를 지급하고 대

     통(大統)과 부통(副統)에게도 대덕에 못 미치는 전시를 지급하도록 하여 대통과

     부통도 승계였을 가능성이 있다.

896) 분향(焚香):제사나 예불(禮佛) 의식에서 향로에 불을 붙인 향을 넣고 향기로운

     연기를 피우는 일을 말한다.

897) 동량(棟梁):동량(棟梁:마룻대와 들보)이 될만한 훌륭한 인물, 즉 동량지재(棟

     梁之材)의 준말. 일가(一家) 또는 일국(一國)의 중임(重任)을 맡을 만한 사람으

     로, 여기서는 절에서 행하는 일들의 주요 담당자를 말한다.

898) 원문의 ‘진장(鎭長)’은 ‘오래도록’이라는 의미를 갖는 말로 고려, 조선시대의 토

     지와 노비 상속문서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

899) 강사(剛司):신라와 고려시대 사찰의 자치적 행정기관. 중국의 삼강(三綱)제에

     서 시작하였으나 신라와 고려에서는 명칭도 ‘삼강(三剛)’으로 표기하고 직책도

     3이 아닌 4 직책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원주(院主)·전좌(典座)·유나(維那)·

     직세(直歲)의 직책이 있었다. 이들은 국가가 임명한 승직 직책이 아니라 사원

     운영을 위해 사원 스스로 설치한 사직(寺職)이었다. 강사(剛司)는 삼강(三綱)의

     집무소를 의미하는 삼강사(三綱司)를 가리키는 말로 생각된다.

900) 유수관(留守官):고려시대 동경(東京), 서경(西京), 남경(南京)의 삼경(三京)에

     파견한 외관직. 유수는 3품 이상관으로 유수사(留守事)·유수사(留守使)·유수

     관(留守官) 등으로 불렸다.

901) 중희(重熙):요(遼)나라 흥종(興宗)의 연호. 1032~1055년. 고려 덕종 1~문종 9년.

902) 흥종(興宗):요나라 제7대 왕. 재위 1031~1055.

903) 우리나라:일연의 시대인 고려시대를 말한다.

904) 정종(靖宗):고려의 제10대 왕. 재위 1035~1046.

905) 경진년(1040)은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를 사용한 『고려사』를 따르면 정종 6년

     이 되지만, 즉위년 칭원법(卽位年稱元法)을 썼던 고려시대 당시의 기록으로는

     정종 7년이 된다.

 

무장사의 미타전

 

[해제]

   경주에 있던 절인 무장사의 창건 연기와 미타전의 건립 과정과 무장사의

지형에 관한이야기를 모은 편이다. 무장사는 원성왕의 부친이 숙부의 명복

을 빌기 위해 창건한 절이다. 소성왕의 왕비 계화왕후가 원성왕의 손자인

죽은 소성왕을 위하여 재산을 내어 미타상을 봉안하였다. 불법과의 오랜

인연을 강조하는 다른 신라 절과 마찬가지로 무장사도 절을 창건할 때 부

처가 탑이 있는 동남쪽 언덕에서 대중에게 설법하는 꿈을 꾸고 불법이 머

물 곳임을 알게 되었으며, 그래서 험준한 지형임에도 땅을 골라 훌륭한 자

리를 얻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원성왕의 부친이 창건했다는 기록과 달

리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병기와 투구를 이 절의 골짜기에 감추어 무

장사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다른 창건 연대의 민간 전승을 부기하고 있다.

   이 무장사의 아미타상은 그 조상비가 일부 발견되어 이 편에 인용된 기

록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무장사 아미타불상 조상비는 1760년(영조 38)에

당시 경주부윤으로 금석문에 밝았던 홍양호(洪良浩)가 내동면 암곡리 무

장사 절터에서 비 조각을 발견하여 처음 알려졌다. 그후 금석학자로 이름

난 김정희(金正喜)가 1817년에 다시 이 지역을 조사하여 비편 2개를 더 찾

아내 이를 『해동금석원』에 소개하였다. 다음에 일제시대에 무장사지를 발

굴 조사하여 귀부와 이수와 함께 몇 개의 비편이 더 발견되었다. 이 무장사

아미타불상 조상비는 김육진(金陸珍)이 비문을 짓고 왕희지체 글씨를 집

자하여 세웠는데, 이「무장사 미타전」의 내용 일부가 비의 내용과 일치하

고 있어 일연이『삼국유사』를 편찬할 때 비문을 참고하였던 것으로 생각된

다. 그런데『신증동국여지승람』의 무장사 기록에는 ‘옛비(古碑)가 있다’고

되어 있어(권21 慶州府 佛宇) 조선전기까지는 비가 온전한 모습이었던 것

으로 추정된다. 현재 무장사지에는 비의 대좌와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역주]

무장사의 미타전

 

   서울906) 동북쪽 20리쯤에907) 있는 암곡촌(暗谷村)908)의 북쪽에 무장사

(鍪藏寺)909)가 있다. 제38대 원성대왕(元聖大王)910)의 아버지인 대아간(大

阿干)911) 효양(孝讓)912) 곧 추봉 명덕대왕(明德大王)이 숙부인 파진찬(波珍

湌)을913) 추숭하기 위하여 세운 절이다. 깊은 계곡이 아득하고 험준하여 마

치 깎아 세운 듯하고, 그윽한 곳에 있어 저절로 맑은 마음914)을 생기게 하

니 마음을 쉬고 도(道)를 즐길 수 있는 신령스러운 곳이다.

   절의 위쪽에 옛날 미타전(彌陀殿)이 있었다. 소성(昭成)〈소성(昭聖)이라고

도 한다〉대왕915)의 왕비 계화왕후(桂花王后)916)가 대왕이 먼저 돌아가시므

로 왕비는 근심스럽고 불안하여917) 지극한 슬픔에 피눈물을 흘리며 마음

이 상하였다. 가만히 밝고 경사스런 일을 돕고 크게 명복을 빌고자 생각

하였는데, 서방에 아미타(阿彌陀)918)라는 대성인(大聖人)이 있어 지성으

로 귀의하면 잘 구원하여 와서 맞아 준다는 말을 듣고서, “이것은 진실된

말이니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라고 하고는 곧 6가지 화려한 예복을919)

바치고 구부(九府)920)에 모아둔 재물을 다 내어 이름난 장인을 불러 아미

타상(阿彌陀像) 1구를 만들게 하고921) 아울러 신중상(神衆像)922)을 함께

만들어 모셨다.923)

   그 전에 절에 한 노스님이 있었는데 한번은 어떤 진인(眞人)924)이 석탑

(石塔) 동남쪽에 있는 언덕 위에 앉아서 서쪽을 바라보면서925) 대중들에게

설법하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이곳은 틀림없이 불법이 머물 곳이구나’라

고 하고는 마음 속에 감추어 두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이곳은) 바위가 깎아지른 듯 험준하고 계곡의 물이 급하게 흘러서 장인

(匠人)들은 돌아볼 것도 없이 다 좋지 않은 곳이라고 하였다.926) 그러나 땅

을 개간하여 평탄한 곳을 얻으니 건물을 세울 만하여 마치 신(神)이 마련

해준 터 같아서 본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면서 좋다고 칭찬하지 않는 자

가 없었다. 근래에 이 미타전은 허물어지고 절만 남아 있다.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로는 태종(太宗)927)이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에 감추어서 무장사(鍪藏寺)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928)

鍪藏寺 彌陀殿

京城之東北二十許里, 暗谷村之北有鍪藏寺. 第三十八元聖大

王之考, 大阿干孝讓, 追封明德大王之爲叔父波珍湌追崇所創

也. 幽谷逈絶, 類似929)削成, 所寄冥奧, 自生虛白, 乃息心樂道

之靈境也. 寺之上方有彌陀古殿. 乃昭成〈一作聖〉大王之妃桂花

王后, 爲大王先逝, 中宮乃充充焉皇皇焉, 哀戚之至, 泣血棘

心. 思所以幽贊明休光啓玄福者, 聞西方有大聖曰彌陀, 至誠

歸仰, 則善救來迎,“ 是眞語者, 豈欺我哉.” 乃捨六衣之盛服,

罄九府之貯財, 召彼名匠, 敎造彌陀像一軀, 幷造神衆以安之.

先是寺有一老僧, 忽夢眞人坐於石塔東南岡上, 向西爲大衆說

法. 意謂‘此地必佛法所住也,’ 心秘之而不向人說. 嵓石巉崒,

流930)澗激迅, 匠者不顧, 咸謂不臧. 及乎辟地, 乃得平坦之地,

可容堂宇, 宛似神基, 見者莫不愕然稱善. 近古來殿則壞已, 而

寺獨在. 諺傳太宗統三已後, 藏兵鍪於谷中, 因名之.931)

906)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가리킨다.

907)『신증동국여지승람』의 무장사 기사에는 경주에서 동북쪽 30리 떨어진 암곡촌

     에 있다고 하였다.

908) 암곡촌(暗谷村):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암곡동(暗谷洞).

909) 무장사(鍪藏寺):경상북도 경주시 암곡동에 있던 절. 원성왕 때 세운 절이라 하

     나 이보다 훨씬 앞선 무열왕 때 삼국통일을 이루고 투구와 무기를 버려 절 이름

     을 무장사로 하였다는 일화를 결부시켜 전해 왔다. 현재 절터에는 아미타상을

     조성한 인연을 적은 비문인 보물 제125호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의 이수와

     귀부가 있고,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보관되어 있다. 아미타불조상비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모아 새긴 것인데, 1915년 파편 가운데 세 조각이 발견

     되어 절터가 무장사였음이 확인되었다. 또 절터에는 숲 사이에 방치되었던 탑

     재를 1963년에 복원한 보물 제126호 무장사지삼층석탑이 있으며, 석등의 옥개

     석과 미타전 자리의 초석도 남아 있다.

910) 원성왕(元聖王):신라 제38대 왕. 재위 785~798. 성은 김씨, 이름은 경신(敬信).

     내물왕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효양(孝讓), 비(妃)는 숙정부인(淑貞夫人) 김씨

     로 각간 신술(神述)의 딸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인 780년에 후에 선덕왕이 된 양

     상(良相)과 더불어 지정(志貞)의 난을 진압하고 혜공왕을 살해하여 양상이 왕위

     에 올라 하대(下代)사회를 여는데 기여하였다. 선덕왕이 즉위하자 상대등이 되

     었고 선덕왕 사후 무열왕계를 대표하는 김주원(金周元)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

     하여 785년에 즉위하였다.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여 유교에 능통한

     사람을 관리로 등용하고 왕과 태자를 중심으로 한 왕실 친족집단들이 요직을

     독점하고 이후의 왕위계승 역시 원성왕계 직계 내에서 이루어졌다.

911) 대아간(大阿干):신라 17관등의 제5 관등. 대아찬(大阿湌)이라고도 한다. 이 대

     아찬 이상의 관등은 진골 신분만이 받을 수 있다.

912) 효양(孝讓):원성왕의 아버지. 부인은 계오부인(繼烏夫人).『삼국유사』기이「원

     성대왕」편에서는 대각간(大角干)이라고 하였고,『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원

     성왕조에는 일길찬(一吉湌)이라고 하였다.

913) 파진찬(波珍湌):신라 17관등 중의 제4관등. 해간(海干)·파미간(波彌干)이라고

     도 한다.

914) 원문의 허백(虛白)은 허실생백(虛室生白)의 줄임말. 방이 비면 저절로 밝아진다

     는 뜻으로 마음이 비어 맑게 되면 도를 깨닫는다는 뜻으로서 맑은 마음을 말한다.

915) 소성대왕(昭成大王):소성왕(昭聖王, 또는 昭成王). 신라 제39대 왕. 재위

     799~800. 성은 김씨, 이름은 준옹(俊邕)이다. 원성왕의 큰아들인 인겸(仁謙)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씨 성목태후(聖穆太后)이고 비(妃)는 계화부인(桂花夫人)

     으로 숙명(叔明)의 딸이다. 원성왕의 장손으로서 790년에는 파진찬으로 재상이

     되었으며 791년에 시중에 임명되었다. 태자에 책봉된 아버지와 뒤이어 태자가

     된 숙부 의영(義英)이 죽자 795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798년에 원성왕이 죽자 왕

     위에 올랐다. 재위 2년째인 800년에 죽었다.

916) 계화부인(桂花王后):소성왕(昭聖王)의 왕비. 대아찬(大阿湌) 숙명(叔明)의 딸이

     고 신라 제40대왕인 애장왕(哀莊王)의 어머니이다.

917) 원문의 황황(皇皇)은 불안하여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918) 아미타(阿彌陀): Amitāyus, Amitābha. 무량수불(無量壽佛). 서방 정토(西方淨

     土)에 있으면서 그를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중생들은 모두 서방정토에 태어

     나게 한다는 부처이다. 산스크리트어 원어에 두 가지가 있어 Amitāyus는 무한한

     수명이라는 뜻으로 무량수(無量壽)로 번역되고, Amitābha는 한량없는 빛이라는

     뜻으로 무량광(無量光)으로 번역된다.『무량수경』에 따르면 과거 오랜 옛날 세

     자재왕불(世自在王佛) 시대에 한 국왕이 위 없는 도심을 내서 왕위를 버리고 출

     가하여 이름을 법장(法藏)비구라 하고 부처 아래서 수행하여 48원을 내고 공덕

     을 쌓아 아미타불이 되었다. 여기서 10만억 불토 떨어진 서방에서 극락정토(極

     樂淨土)을 이루어 지금도 설법하고 있으면서 염불하는 이들을 서방 정토로 왕

     생하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정토 신앙의 주인공이 되었다. 중

     심 경전은『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

     經)』의 미타삼부경(彌陀三部經)이 있다.

919) 왕비가 입는 6가지 옷:육의(六衣)는 왕후가 입는 여섯 가지의 예복(禮服)이다.

920) 구부(九府):주(周)나라 때에 재물을 관리하던 9개의 관청. 왕실의 재물을 관리

     하는 관청, 혹은 창고를 의미한다.

921) 비문에는 “구부의 정갈한 재물을 (다 내어) 이름난 장인을 불러 각각의 담당 관

     서에게 이 절에 오게 하여 받들어 아미타상 1구를(…九府之淨財, 召彼名匠, 各有

     司存就於此寺, 奉造彌陀像一…)”라고 되어 있어, 여기서는 내용을 대체로 따랐지

     만 일부는 줄여서 실었음을 알 수 있다.

922) 신중상(神衆像):신중(神衆)은 불교를 수호하고 모든 재난을 막아주는 신들로,

     불보살상 이외의 사천왕(四天王)이나 금강역사(金剛力士) 팔부중(八部衆) 등을

     가리킨다.

923) 이 아미타불상을 만들고 그 사정을 기록한 것이「무장사아미타불조상비(鍪藏寺

     阿彌陀如來造像碑)」이다. 이 비는 조선 영조 38년(1760)에 홍양호(洪良浩)가 경

     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 경주(慶州) 내동면(內東面) 암곡리(暗谷里)에서

     발견하였다가 다시 그 소재를 잃은 것을 순조(純祖) 17년(1817)에 김정희(金正

     喜)가 경주 일대를 뒤져 깨진 비석 두 부분을 다시 찾은 것으로, 청(淸)나라 사람

     유승간(劉承幹)이 편찬한『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부록에 처음 소개되었다.

     그 후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의 자료 조사 과정 중 무장사 터 부근에서 귀부와 이

     수 그리고『해동금석원』에 소개되지 않았던 다른 비 조각이 다시 발견되어 소

     개되었다.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중이다. 김육진(金陸 珍)이 문장을 짓

     고, 왕희지(王羲之)의 글자를 집자(集字)한 것으로, 빠진 곳이 많지만 이 기록과

     일치하는 곳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이 편의 기술이 비문을 일부 줄여 실

     었음을 알 수 있다.

924) 진인(眞人):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란 뜻으로 부처를 가리키는 말.

925) 서방극락은 미타가 상주하는 곳이라는 것과 연관시켜 볼 때 서방을 향하여 설

     법하였다는 것은 이 진인이 아미타불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926) 비문에는 “(바위가) 깎아지른듯 험준하고 계곡의 물이 급하게 흘러서 오직 바

     위가 가파르고 산은 썩은 땅이어서 장인들은 돌아볼 것도 없이 다 좋지 않은 곳

     이라고 하였다.(巉崒, 溪澗激迅, 維石巖巖, 山有朽壤, 匠者不顧 咸謂不祥.)”라고 하

     여 이 부분에서 일부 생략하여 실었음을 알 수 있다.

927) 태종(太宗):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신라 제29대 왕. 재위 654~661년. 생존기

     간은 603~661년이다. 아버지는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金龍 春)이고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인 천명(天明)부인이다. 왕비는 김서현(金舒玄)의 딸로서 김유신(金

     庾信)의 누이인 문명(文明)왕후이고, 그 사이에 문무왕과 김인문(金仁問) 등 여

     러 아들을 낳았다. 신라 사회가 무열왕에서부터 ‘상대(上代)’에서 ‘중대(中代)’로

     바뀐다. 무열왕대에 백제를, 그리고 이어 문무왕대에 고구려를 패망시키고 삼

     국통일을 이룩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후 대체로 무열왕의 적장자가 왕

     위를 계승하여 중대의 번영기를 누리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928)『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 무기와 투구를 골짜

     기 속에 감추었으므로 무장사라 이름지었다고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21

     경주부 佛宇 鍪藏寺)

929) 「무장사미타상조상비」에는 ‘類似’를 ‘累以’라고 판독하였다.

930) ‘流’는 비문에는 ‘溪’이다.

931) 현재 남아 있는 비 조각에서 확인되는 글자 중 이곳에 실린 것과 비교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逈絶 累以削成 所寄冥奧 自生虛白 碧澗千尋 □□□塵勞而滌 蕩寒……(이하 3

     행 중략)…

     …密藏 鬱陶硏精 寤寐求之 思所以幽贊冥休 光啓玄福者 西方……

     …府之淨財 召彼名匠 各有司存就於此寺 奉造阿彌陀佛像一……

     …見眞人於石塔東南崗上之樹下 西面而坐 爲大衆說法 旣覺……

     …巉崒 溪澗激迅 維石巖巖 山有朽壤 匠者不顧 咸謂不祥 及……

 

백엄사의 석탑과 사리

 

[해제]

   진주지방에 있던 백엄사에 5층석탑을 세우고 진신사리 42과를 봉안한

유래를 말한 편이다. 백엄사는 신라 때 귀족이 북택(北宅)을 희사하여 세운

절인데 중간에 폐사가 되었다가 효공왕 때인 906년에 중수하여 희양산문

의 개창조 봉암사 도헌의 제자였던 양부(陽孚)화상이 주지를 지내고, 이어

925년에는 양부의 제자인 긍양(兢讓)이 10년을 주지로 머물렀으며, 다음에

는 남원 백암수의 신탁(神卓)이 차례로 주지가 되어 살았다.

   1065년에는 주지인 수립(秀立)이 절의 상규(常規) 10조를 정하였는데,

그 첫 번째는 오층석탑을 새로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보(寶)를 세워 해마

다 공양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 밖에 이절의 창건주인 명신(明神) 엄흔과

백흔 두 사람과 근악의 세 사람을 위해 보를 세워 공양할 것, 그리고 금당

의 약사여래 앞에 있는 나무 발우에 초하루마다 공양미를 바꾸어 올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였다고 한다. 첫머리 부분에는 946년의 지방관이 작성한

문서를 인용하였는데, 여기에는 사찰의 소재지와 주지, 주지의 나이, 창건

연대 등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려주어, 고려 초기 사원 관리의 일면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어서 제시한 옛 전승에 따른 이야기들은 신라말에 기존의 폐사된 절을

중건하고 대대로 주지를 지냈던 기록을 알려 주며, 고려 초에 42과나 되는

많은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을 세웠던 사실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사원의

장엄물 조성과 창건주를 위한 기념 활동 그리고 사찰의 유지 등을 세세하

게 밝힌 규정이 각 사원에 따라 제정되어 사찰 생활의 구체적인 면모를 보

여준다는 점에서 이 기록의 의의는 크다.

 

[역주]

백엄사932)의 석탑과 사리

 

   개운(開運)933) 3년(946) 병오년 10월 29일에 강주(康州)934) 지역의 임도

(任道) 대감(大監)935)의 주첩(柱貼)936)에 이르기를, “백엄선사(伯嚴禪寺)는

초팔현(草八縣)〈지금의 초계(草溪)〉에 있는데, 그 절의 스님 간유(侃遊) 상좌

(上座)937)는 나이가 39세라고 하였고, 절이 처음 세워진 때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라고 하였다.

   다만 옛 전승[古傳]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앞 나라인 신라 때 북택청(北

宅廳)938) 터를 희사하여 이 절을 지었는데 중간에 오랫동안 폐사로 있다가

지난 병인년(906, 효공왕 10) 중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화상(陽孚和尙)939)

이 고쳐 지어 주지로 있다가 정축년(917, 경명왕 1)에 세상을 떠났다. 을유

년(925, 경애왕 2)에 희양산(曦陽山)940)의 긍양화상(兢讓和尙)941)이 와서 10

년을 머물다가942) 또 을미년(935, 고려 태조 18)에 희양산으로 돌아갔다.943)

그때 신탁화상(神卓和尙)이 남원(南原) 백암수(白嵓藪)에서 이 절944)에 들

어와 정해진 법에 따라 주지가 되었다.

   또 함옹(咸雍)945)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인 득오미정대사(得奧

微定大師) 수립(秀立)스님이 절의 상규(常規) 10조를 정하였다. 새로 5층

석탑을 세우고 부처 진신사리(眞身舍利) 42과를 맞아서 봉안하고, 사재로

보(寶)946)를 세워 해마다 공양할 것이 제 1조였다947). 이 절에서 불법을 지

키던 공경하는 스님인 엄흔(嚴欣)과 백흔(伯欣) 두 명신(明神)948)과 근악

(近岳) 등 세 분 앞으로 보(寶)를 세워 공양할 것〈사람들에게 전해오기를, “엄흔

과 백흔 두 사람이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어 그로 인해 이름을 백엄(伯嚴)이라 하고 이에

호법신(護法神)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과, 금당(金堂)의 약사여래(藥師如來) 앞

나무발우에 매달 초하루마다 쌀을 갈아드릴 것 등의 조목이 있었다. 나머

지의 조목은 기록하지 않는다.

伯嚴寺石塔舍利

開運三年丙午十月二十九日, 康州界任道大監柱貼云,“ 伯嚴

禪寺坐草八縣〈今草溪〉, 寺僧侃遊上座, 年三十九云, 寺之經始

則不知.” 但古傳云,“ 前代新羅時, 北宅廳基捨置玆寺,” 中間

久廢, 去丙寅年中, 沙木谷陽孚和尙, 改造住持, 丁丑遷化. 乙

酉年, 曦陽山兢讓和尙, 來住十年, 又乙未年, 却返曦陽. 時有

神卓和尙, 自南原白嵓藪, 來入當院, 如法住持.

又咸雍元年十一月, 當院住持得奧微定大師釋秀立, 定院中常

規十條. 新竪五層石塔, 眞身佛舍利四十二粒安邀, 以私財立

寶, 追年供養條, 第一. 當寺護法敬僧嚴欣伯欣兩明神, 及近岳

等三位前, 立寶供養條〈諺傳, 嚴欣伯欣二人, 捨家爲寺, 因名曰伯嚴, 仍

爲護法神〉, 金堂藥師前木鉢, 月朔遞米條等. 已下不錄.

932) 백엄사(伯嚴寺):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에 있던 절. 현재 이곳에는 신

     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381호 합천백암리석등과 석조여래좌상

     만이 남아 있다.

933) 개운(開運):후진(後晋) 출제(出帝)의 연호. 944~946년. 고려 혜종 즉위~정종 

     원년.

934) 강주(康州):지금의 경상남도 진주(晋州).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또는 居

     陁)이었는데 신라 문무왕이 정복하여 주(州)를 설치하였고 신문왕은 거타주를

     분할하여 진주총관(晋州摠管)을 설치하였으며 경덕왕이 강주(康州)로 고쳤다.

     혜공왕이 청주(菁州)라 고쳤다가 고려 태조가 다시 강주로 고쳤다.

935) 대감(大監):대감(大監)은 신라 때는 지방관서인 패강진전에 설치된 차관직으

     로 사지 이상 중아찬까지 임명하였던 직책이다. 고려 때는 촌락행정 담당자를

     가리킨다. 성종 6년(987)에 이루어진 군현 내부의 행정단위인 촌락에 대한 구조

     개편에서 이전 시기에 촌락행정 담당자인 촌주층이 배제되고, 대감(大監)·제감

    (弟監)을 촌장(村長)·촌정(村正)으로 바꾸어 그 역할을 대신하게 하였다. 946년

    의 문서인 여기서는 지방 촌락의 행정담당자를 말한다.

936) 주첩(柱貼):고려초 주첩(柱貼)은 호적(戶籍)과 관련된 공문서로 생각된다.(『삼

     국유사』권4 의해「보양이목」및 권5 신주「명랑신인」) 여기에는 사원의 현황 즉 사

     원 창건 연대와 승려의 인적사항을 기본으로 토지와 노비 및 건물 규모 등을 포

     함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의 주첩은 백엄사 간유(侃遊) 상좌가 절의 현

     황을 강주(康州) 대감(大監)에게 보고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일종의 공문서로서,

     당연히 절이 창건된 연대가 언급되어야 하는데 간유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고 보고하였다. 이 자료는 고려 초에도 국가가 촌락의 행정담당자에게 사원의

     현황을 파악하도록 하였음을 알려 준다. 고려는 국가행정체계 속에 사원을 포

     함시켰으며 지방관을 통해서 정기적으로 사원의 현황을 파악하였다.

937) 상좌(上座):원래는 삼강(三綱)의 가장 상위직으로 절을 대표하는 직책이었다.

     신라 후기에는 상좌가 절을 대표하는 직책으로 나오지만 고려초의 삼강직에서

     는 상좌가 나오지 않는다. 원주(院主)와 함께 주지직을 나타내던 직책으로 생

     각된다.

938) 북택청(北宅廳):북택(北宅)은 신라의 귀족을 나타내는 35 금입택(金入宅) 중의

     두 번째에 등장한다(『삼국유사』권1 기이 진한). 북택청은 북택에 딸린 건물의 일

     부분 또는 북택 전체로 생각된다.

939) 양부화상(陽孚和尙):?~917.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을 개창한 지증대사

     (智證大師) 도헌(道憲, 824~882)의 문인으로 강주 백엄사에 주석하였으며 봉암

     사의 정진 대사의 스승이 되었다.

940) 희양산(曦陽山):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가 있는 산. 신라시대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희양산문의 봉암사가 있는 산이다.

941) 긍양화상(兢讓和尙):878~956. 속성은 왕(王)씨, 본관은 공주. 시호는 정진(靜

     眞), 탑호는 원오(圓悟)이며 백암화상(伯巖和尙)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출가하

     여 남혈원(南穴院) 여해(如解)의 제자가 되었고, 또 서혈원(西穴院) 양부(陽孚)

     밑에서도 수행하였다. 899년(효공왕 3)에 당(唐)의 곡산(谷山)에 가서 도연(道

     緣)에게 진성(眞性)의 이치를 배우고 삼매(三昧)를 닦았다. 924년에 귀국하여 광

     주(廣州) 백암사(伯巖寺)에 머물면서 승려들을 지도했는데, 경애왕으로부터 봉

     종대사(奉宗大師)라는 호를 받았다. 그후 고려 태조와 광종에게 법요(法要)를

     가르쳐 존경을 받았고, 951년(광종 2)에 광종의 요청으로 개경의 사나선원(舍那

     禪院)에 있으면서 왕으로부터 증공대사(證空大師)라는 존호를 받았다. 봉암사

     에「정진대사탑비」가 남아 있다.

942) 긍양이 백엄사에 온 해가 정진대사의 비에는 927년이라 하였다.

943) 도헌은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 양부는 백엄사가 주 활동사찰이고, 긍양

     에게는 바로 봉암사가 그곳이다. 긍양에 이르러 지증대사비에서 보이는 북종선

     계통의 계보(도신-법랑-신행-준범-혜은-도헌-양부)와는 전혀 다른 남종선 계통

     의 새로운 계보가 봉암사에서 만들어졌다(육조혜능-남악회양-강서도일-창주신

     감-쌍계혜소-도헌-양부-긍양). 즉 도헌 이전의 계보가 북종계에서 남종계로 바

     뀌었다. 이는 계보의 수정과 함께 선사상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944) 고려시대에 사(寺) 안에 여러 개의 원(院)이 있기도 하였고 독자적으로 이루어

     진 원도 있었다. 여기서 원(院)이라고 한 것은 절에 처음 주지로 들어갈 경우 ‘입

     원(入院)’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 데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945) 함옹(咸雍):요(遼) 도종(道宗)의 연호. 1065~1074년. 고려 문종 19~28년.

946) 보(寶):신라나 고려 때 사찰에서 공익적인 여러 일을 하기 위해 기본 재원을 마

     련하여, 이를 활용한 돈이나 곡식 등을 사람들에게 빌려 주고 그 이자를 이용하

     여 사업을 추진하던 기관이다. 신라 때에는 진평왕(眞平王) 35년(613)에 원광(圓

     光) 법사가 설립했던 점찰보(占察寶) 등이 있고, 고려 때에는 장학 사업을 위한

     학보(學寶), 승려들의 면학을 위한 광학보(廣學寶), 팔관회를 거행하기 위한 팔

     관보(八關寶), 빈민 구제를 위한 제위보(濟危寶) 등 다양한 형태의 보가 많이 운

     영되었다. 대부분 불교적인 목적에서 세워졌지만 점차 일반에까지 확산되기도

     하였다.

947) 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탑이다. 그곳에 불사리가 안치되어 있기 때문이

     다. 따라서 이 탑에 대한 공양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하여 별도의 보(寶)를 세운

     다는 조목이 제 1조에 나옴은 당연한 것이다.

948) 명신(明神):사람이 신이 되어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존재.

 

영취사

 

[해제]

울산 지방에 있던 사찰인 영취사의 창건 설화를 담고 있는 편이다. 영취사

는 신문왕대 초인 683년에 재상 충원공이 동래 온천에서 목욕하고 돌아오다

매가 꿩을 쫓는 것을 보고 찾아갔더니 꿩이 새끼 두 마리를 감싸느라 우물

가운데서 피를 흘리며 있자 매도 측은한 듯 잡지 않았다. 그래서 점치는 사

람에게 그 땅에 대해서 물어보니 절을 세울만하다고 하여 왕이 관아를 옮기

고 영취사를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 재상의 판단과 왕에의 건의에 의해 관청

을 옮기고 절을 지을 수 있었던 사정을 알려주는 설화이다. 통일 이후 중앙

중심에서 점차 지방으로 사찰이 확산되어 가는데, 이 영취사 역시 서울이 아

닌 지방에 사찰을 창건해 가는 한 양상을 보여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자

료는 절에 전하는 고기를 인용하였는데, 신문왕을 ‘진골 제31주 신문왕’이라

고 표기하고 있어 중대 왕조에 대한 인식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역주]

영취사949)

 

절에 전해오는 고기(古記)950)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라(新羅) 진

골(眞骨) 제31대 신문왕(神文王)951)대 영순(永淳)952) 2년(683) 계미년〈본문

에 원년(元年)이라 함은 잘못이다〉에 재상(宰相)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萇山

國)953)〈곧 동래현(東萊縣)이니 내산국(萊山國)이라고도 한다〉에 있는 온천에서 목

욕하고 성(城)으로 돌아오다가 굴정역(屈井驛)954) 동지(桐旨) 들판에 이르

러 쉬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매를 놓아 꿩을 쫓고 있는 것을 보았다. 꿩이

날아서 금악(金岳)을 넘어 갔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공이) 방울소리를

듣고서 찾아가 굴정현(屈井縣) 관아 북쪽 우물가에 이르니 매는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가운데에 있는데, 물빛이 온통 핏빛이었다. 꿩은 두

날개를 벌려 두 마리의 새끼를 감싸 안고 있었으며 매도 그 모습이 측은한

듯 잡으려 하지 않았다. 공이 보고 측은한 느낌이 들어 그 땅을 점쳐 물으

니, “절을 세울 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왕에게 아뢰어 그 현

의 관아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땅에 절을 세우고 영취사라고 하였다.

靈鷲寺

寺中古記云,“ 新羅眞骨第三十一主神文王代, 永淳二年癸未

〈本文云元年, 誤〉, 宰相忠元公, 萇山國〈卽東萊縣, 亦名萊山國〉溫井沐

浴, 還城次, 到屈井驛桐旨野駐歇, 忽見一人放鷹而逐雉. 雉飛

過金岳, 杳無蹤迹. 聞鈴尋之, 到屈井縣官北井邊, 鷹坐樹上,

雉在井中, 水渾血色. 雉開兩翅, 抱二雛焉, 鷹亦如相惻隱, 而

不敢攫也. 公見之惻然有感, 卜問此地, 云“ 可立寺.” 歸京啓

於王, 移其縣於他所, 創寺於其地, 名靈鷲寺焉.

949) 영취사(靈鷲寺):경상북도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 있던 절. 현재 절

     터에 삼층석탑이 무너진 채로 남아 있다.

950) 고기(古記):사찰의 창건 유래와 역사를 중심으로 사찰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

     항을 기록한 문건.

951) 신문왕(神文王):신라 제31대 왕. 재위 681~692. 성은 김씨, 이름은 정명(政明),

     자는 일초(日招)이다. 문무왕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이고 첫

     왕비 김씨는 흠돌(欽突)의 딸인데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쫓겨나고 김흠운

     (金欽運)의 딸을 둘째 왕비로 삼았다. 신문왕대는 무열왕대부터 시작된 신라 중

     대 왕실의 강력한 왕권이 확립된 시기로서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인재교육

     과 양성을 목적으로 국학(國學)을 설립하고, 봉성사(奉聖寺)와 망덕사(望德寺)

     를 세우기도 하였다. 중앙관서의 업무와 영역이 확대된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

     정비가 이루어져 9주 5소경제도가 확립되었으며, 관료들의 녹읍(祿邑)을 폐지

     하고 세조(歲租)를 지급하여 관리들의 경제력 확대를 억제시키고 오묘제를 시

     행하여 왕실의 위상을 드높였다.

952) 영순(永淳):당 고종(高宗)의 연호. 682년 2월부터 683년 12월까지 사용되었다.

     683년 12월에 중종(中宗)이 즉위하여 홍도(弘道) 원년이 되었다. 따라서 영순 2

     년은 683년 계미(癸未)년이다.

953) 장산국(萇山國):옛날의 장산국(萇山國, 萊山國이라고도 함)을 신라가 차지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을 두었는데, 경덕왕이 동래(東萊)로 고쳤다고 한다.(『신증

     동국여지승람』권23 경상도 東萊縣) 이는『삼국사기』에서도 확인된다.(『삼국사기』

     권34 지리지 양주 東萊郡. “本居柒山郡, 景德王改名.”) 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장산(萇山), 장산사(萇山寺), 장산초등학교 등의 이름이 보인다.

954) 굴정역(屈井驛):『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본래 신라의 굴아화촌(屈阿火村)인데,

     파사왕(婆娑王)이 처음으로 현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하곡(河曲)이라 이름

     을 고쳐서 임관군(臨關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本新羅屈阿火村, 婆娑王始置縣,

     景德王改名河曲, 爲臨關郡領.)”라고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울산군 건치

     연혁) 그리고 굴아화촌의 세주에서 신라의 지명에 화(火)라고 부르는 것이 많은

     데, 화는 불(弗)이 바뀐 것이고 불은 또 벌(伐)이 바뀐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굴아화촌은 굴불현(屈弗縣)이다. 또 옛날 하곡현 터에 굴화역(堀火驛)이 있다고

     하였으니,(같은 책, 울산군 역원) 굴화역은 굴불역(堀弗驛), 또는 굴불역(屈弗驛)

     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굴정역(屈井驛)은 굴불역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유덕사

 

[해제]

유덕사의 창건 유래를 말하고 있는 편이다. 유덕사는 태대각간의 직위로

보아 문무왕 8년(668) 이후 어느 시기에 세워진 절로 보인다. 귀족이 자신

의 집을 희사하여 사찰로 만드는 것은 흔히 보는 일인데, 창건자의 이름을

따라 절 이름을 붙였다. 이와 같은 다른 사례도 찾을 수 있다. 나말여초의

대표적인 지식인인 최언위의 선조이기 때문에 비를 세워 역사를 남겼던 것

으로 생각된다. 간략한 내용으로 보아 이 비는 일연 당시에 이미 남아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대각간의 비상 고위직을 최씨에게도 수여했던 사

실을 알려주는 특이한 자료이다.

 

[역주]

유덕사

 

신라시대 태대각간(太大角干)955) 최유덕(崔有德)이 자신의 집을 희사하

여 절을 만들고 유덕사(有德寺)라고 이름하였다. 먼 후손인 삼한공신(三韓

功臣)956) 최언위(崔彦撝)957)는 최유덕(崔有德)의 진영(眞影)958)을 걸어 모

시고, 이어 비(碑)를 세웠다고 한다.

有德寺

新羅大大959)角干崔有德, 捨私第爲寺, 以有德名之. 遠孫三韓

功臣崔彦撝, 掛安眞影, 仍有碑云.

955) 태대각간(太大角干):17관등 위에 시설한 비상위직. 문무왕 8년(668)에 고구려

     를 패망시킨 김유신의 공로를 인정하여 태대각간을 수여한 적이 있다.(『삼국사

     기』권38 직관지상 태대각간)

956) 삼한공신(三韓功臣):고려 태조가 후삼국 통일에 참가한 공신에게 준 칭호. 940

     년에 신흥사(新興寺)에 공신당(功臣堂)을 두어 동쪽과 서쪽 벽에 삼한공신을 그

     려 넣었는데 특히 공신당에 그려진 이를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라 한다.

     태조 대의 공신은 3천 명이 넘는 정도로 생각되며, 이들은 통일전쟁에 직접 참

     여한 태조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태조에게 협력한 각 지방의 호족들까지도 포함

     되어 있었다. 이들에게는 직첩이 내려지고 후손에게 전승되어 특전을 받고 역

     분전(役分田) 등의 경제적 혜택도 주어졌다.

957) 최언위(崔彦撝):868~944. 신라·고려의 문신. 신지(愼之)·인연(仁渷)으로도 쓴

     다. 885년(헌강왕 11)에 당에 유학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909년 귀국하여 집사

     성시랑 서서원학사(執事省侍郞瑞書院學士)에 이어 병부시랑(兵部侍郞)이 되었

     다. 신라가 멸망하자 고려에 귀부하여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고, 문장에 대한

     일을 맡았으며, 관직이 대상 원봉성대학사 한림원령 평장사(大相元鳳省大學士

     翰林院令平章事)에 이르렀다. 최치원(崔致遠)·최승우(崔承佑)와 함께 ‘일대삼최

     (一代三崔)’로 불리었고, 그가 지은 선승(禪僧)들의 비문이 여럿 남아 있다.

958) 진영(眞影):조사(祖師)나 고승대덕(高僧大德)의 초상화.

959) 원문의 ‘夫’는 ‘大’의 잘못

 

오대산 문수사의 석탑기

 

[해제]

오대산 월정사에 있는 석탑과 관련된 영험 설화를 모은 편이다. 생김새

가 순박한 이 석탑은 동해에서 어부가 고기잡이를 하자 탑 그림자를 드리워

물고기들을 쫓아 방해하였고 어부는 화를 참지 못해 도끼로 석탑의 훼손하

였다. 이 탑은 중앙에서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본래 뜰 한가운데 두었더

니 영험이 없어 일관의 제안에 따라 위치를 옮긴 것이라 하였다. 기록은 은

자였던 오정석(吳廷碩)이 1156년에 지은 석탑기를 인용하였다. 이 편의 기

록은 중앙에서 빗겨난 탑의 위치와 모서리가 깨져 나간 점에 착안하여 현재

남아 있는 월정사 팔각구층탑이 치우쳐 있는데 대한 관심을 탑의 영험 설화

로 엮은 것으로 파악한다. 일연은 고려시대 조성으로 보아야 할 이 석탑을

신라시대 조성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런 영험 설화가 부처의 위신력으로 만

물을 이롭게 함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를 널리 알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

여 영험 신앙에 의의를 부여하는 관점을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

 

[역주]

오대산 문수사960)의 석탑기

 

   뜰 가장자리의 석탑은 아마 신라 사람이 세운 것 같다. 만든 솜씨가 비록

순박하고 정교하지는 못하지만 매우 영험이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그 중 한 가지 일을 여러 노인들로부터 들었는데 다음과 같다.

“옛날 연곡현(連谷縣)961) 사람이 배를 타고 가까운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는데, 갑자기 탑 하나가 배를 따라 오는 것을 보았다. 바다 동물들이 그

그림자를 보고 모두 반대방향으로 흩어져 사방으로 달아나니 이 때문에 어

부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림자를 찾아가 이르

러보니 바로 이 탑이었다. 그래서 도끼를 휘둘러 탑을 부수고 가버렸다. 지

금 이 탑의 네 귀퉁이가 모두 떨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놀라고 탄식해 마지않았으니 그 탑을 둔 것이 동쪽으로 약간 치우

쳐서 가운데에 놓이지 않은 것이 이상하였다. 이에 한 현판을 올려다 보니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비구 처현(處玄)이 일찍이 이 절에 살면서 문득 뜰 한 가운데로 옮겨 두

었더니 20여 년 동안 잠잠하여 아무런 영험이 없었다. 그러다가 일관(日

官)962)이 터를 구하러 이곳에 와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뜰 가운데는 탑

을 둘 자리가 못 되는데 왜 동쪽으로 옮기지 않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스님들이 곧 깨닫고 다시 옛 자리로 옮겼으니 지금 서 있는 곳이 그곳

이다. 나는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부처님의 위신력을 보

건대 자취를 나타내어 만물을 이롭게 함이 이와 같이 빠르다. 불자로서 어

떻게 침묵하고 말하지 않겠는가? 때는 정풍(正豊)963) 원년(1156) 병자년 10

월 일에 백운자(白雲子)964)가 쓴다.”

五臺山文殊寺石塔記

庭畔石塔, 蓋新羅人所立也. 制作雖淳朴不巧, 然甚有靈響, 不

可勝記. 就中一事, 聞之諸古老云.“ 昔連谷縣人具船沿海而

漁, 忽見一塔隨逐舟楫, 凡水族見其影者, 皆逆散四走, 以故漁

人一無所得. 不堪憤恚, 尋影而至, 蓋此塔也. 於是共揮斤斫之

而去. 今此搭四隅皆缺者, 以此也.”

予驚嘆無已, 然怪其置塔, 稍東而不中. 於是仰見一懸板云,

“比丘處玄曾住此院, 輒移置庭心, 則二十餘年間寂無靈應. 及

日者求基抵此, 乃嘆曰, ‘是中庭地, 非安塔之所, 胡不移東

乎?’ 於是衆僧乃悟, 復移舊處, 今所立者是也. 余非好怪者,

然見其佛之威神, 其急於現迹利物如此, 爲佛子者, 詎可黙而

無言耶! 時正豊元年丙子十月 日. 白雲子記.”

960) 문수사(文殊寺):현재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삼국유사』탑상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편에는 오대와 보천암에 각각 결사를 설치하고

     그 도회소로 삼으라는 문수갑사(文殊岬寺)로 나온다.『삼국유사』탑상「대산월

     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편에는 자장(慈藏)이 처음 초암을 만들어

     지냈고, 신효(信孝)와 신라말의 신의(信義)와 유연(有緣)이 이어 살며 점차 큰

     절로 되었다고 하였다.

961) 연곡현(連谷縣):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連谷面). 본래 고구려의 지산현

     (支山縣)이었는데 고려 현종 때 연곡현으로 고쳤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44 강

     릉대도호부 屬縣 連谷縣)

962) 일관(日官):천문을 관측하여 변이(變異)를 가리는 일을 담당한 관직.

963) 정풍(正豊):원래 정륭(正隆)인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아버지의 휘(諱)인 융

     (隆)을 피한 것이다. 정륭은 금(金) 나라 해릉왕(海陵王)의 연호. 1156년 2월~

     1161년 10월. 고려 의종 10~15년. 정륭 원년은 의종 10년, 1156년.

964) 백운자(白雲子):오정석(吳廷碩). 정확한 생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무신집권기

     에 문인으로 활동한 이인로(李仁老, 1152~1220)나 최자(崔滋, 1188~1260)보다 연

     배가 앞선 인물이다. 그는 무인정권이 들어서자 관직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한

     후 ‘백운자(白雲子)’라고 자처하고 ‘신준(神駿)’이라는 이름으로 산천을 두루 돌

     아다니며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시를 읊는 생활을 보냈다.

 

 

 

 

 

 

 

삼국유사 - (2) 탑상(塔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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