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는 복잡하리만큼 다양한 종족들이 공존하므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수백 종에 이른다. 현재 공식적으로 채택된 언어만도 16종이나 된다고 한다. 이미 부처님 당시에도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고급 언어인 산스크리트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의 속어, 즉 방언이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부처님은 이들 중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여 대중을 교화하였을까? 현존하는 불전(佛典)의 언어를 범어(梵語)라고 한다. 범어란 산스크리트어이다. 그러나 불교문헌의 경우 그 주된 언어인 산스크리트에 약간의 속어적인 요소가 뒤섞여 있으므로 단순히 범어라 하지 않고 불교범어라 한다. 어쨌든 이러한 연유로 해서 부처님도 자신의 심오한 교설을 가르치는 데에 표준어인 산스크리트를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부처님은 젊은 시절, 상류층의 자제로서 산스크리트로 전해지는 종교, 철학의 내용을 습득하는 등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으므로, 산스크리트에 통달했을 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실제 설법을 함에 있어서는 고급 언어인 산스크리트를 완전 무시하고 대중의 언어, 즉 속어를 사용하였다고 하다.
아함경 속에는 부처님이 불교의 경전을 산스크리트의 고형(古形)인 베다어로 변경하는 일에 관하여 반대의 의향을 술회한 내용이 있다. 소위 지식인만이 독점하는 특수한 고급 언어로는 다수의 시민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은 설법함에 있어 지식인보다는 일반 대중의 이해를 도모코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원래의 불교가 취하는 근본입장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불교가 일찍이 인도에서 자비, 구제, 평등, 서민의 종교로서 큰 호응을 얻으며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를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이후의 초기 불전은 속어로써 편찬되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생존시에 교화하며 유행(遊行)했던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던 언어는 거의가 마가다어였다. 아마 당시 세력을 떨치던 최강국이 마가다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도 이 마가다어로써 제자나 신도들과 문답했고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마가다어는 대중어, 즉 속어의 일종이다. 인도에서는 속어를 고급어인 산스크리트에 대응하여 프라크리티라 한다. 이 말은 '자연의' '풍속'이라는 뜻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입멸한 후 그의 가르침은 실제에 있어서 팔리어〔巴利語〕로 전래되었다.
팔리란 언어학적인 명칭이 아니며, 그 근원지도 확실하지 않고, 문자도 없다. 이는 단지 대중어의 특수한 형태 중 불교성전의 통용어일 뿐이다. 이 언어는 불교의 영향으로 당시의 공식법령과 문서에서 사용된 흔적이 있다. 한편 부처님의 설법언어인 마가다어가 현존하는 팔리어 문헌 속에 어느 정도 잔존해 있다 하는데, 이는 그 두 속어의 차이가 서로 용인될 수 있을 정도로 거의 유사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달리 생각해 보면, 부처님이 사용했던 마가다어의 형태를 어느 정도 보존함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그 경전에 권위를 부여하려 했음인지도 모른다. 후대에 불전이 산스크리트를 사용할 때도 게송, 즉 가타(G th )의 부분에서는 팔리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팔리어는 가타어라 불리기도 한다. 팔리어로 된 원전이 성립된 시기는 부처님이 입멸한 후로부터 아쇼카왕이 생존했던 시기까지의 약 100년 또는 200년 동안이라 한다. 이 시기는 부파불교시대에 해당된다.
이후 불전은 주로 산스크리트어에 의해 전래되기에 이른다. 산스크리트는 불교가 사용한 대중어를 점차 잠식해 간 것이다. 당시의 비문들을 통해 살펴보면, 처음에는 거의 순전한 속어가 널리 사용되다가 여러 속어들이 뒤섞여 사용되고, 여기에 산스크리트가 섞여 산스크리트의 사용이 빈번해지며, 급기야는 오로지 산스크리트만이 사용된다.
이 산스크리트의 사용은 전문적인 논서들과 대승경전의 등장과 그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 다시 말하면 비교적 간명한 초기경전들에선 대중적인 언어가 쓰였다가, 논의와 기술(記述)이 보다 고차적인 불전에 이르러서는 산스크리트라는 고급언어가 쓰인 것이다. 이는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 탓이었을 것이다. 기원 이전의 몇 백 년부터 인도에는 산스크리트를 사용하는 전통종교인 브라만교의 부흥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응당 비정통종교인 불교를 비판하고 우월함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도전에 처한 불교는 이에 적극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그들이 사용하는 산스크리트로써 그들의 도전에 응답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의 사용은 당시의 전반적인 경향이었으므로, 불교가 이를 사용한 것은 대중에 수순하여 가르침을 전한다는 본래의 입장을 상황에 따라 적용한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종교적 경쟁관계가 언어의 사용을 변경케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끝으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언어의 사용이 곧 문자의 사용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불교에 있어서 문자로써 성전을 기록하는 일은 상당히 후대에 있었다. 앞에서(제22문) 말한 대로 인도인의 뛰어난 암기력은 굳이 문자에 의한 기록의 필요성을 요하지 않았고, 기록한다는 자체가 성전의 권위를 그만큼 감소시키는 일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불교성전이 최초로 기록된 것은, 팔리어에 기원을 둔 싱할리(스리랑카의 고유 언어)의 문자에 의한 것이며, 그 시기는 기원전 80년이라 한다. 물론 그 정확성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현존하는 것으로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법구경』이라 한다. 아쇼카왕의 숱한 비문이 당시의 다양한 문자를 생생히 보여 주고 있으므로,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불교에서도 적어도 그 시대부터 문자에 의한 기록의 가능성은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中村 元, 三枝充悳,『バウシダ佛敎』(→ 문 14), pp. 66, 70∼72.
Athur A. Macdonell, A History of Sanskrit Literature(2ed.;Delhi:Motilal Banarsidass, 1971), pp. 19∼22.
Junjir Takakusu, The Essentials of Buddhist philosophy(→ 문 13), p. 46.
☞ 출처 : 조계사 : http://www.ijogyesa.net/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유사 - (2) 탑상(塔像) (0) | 2020.10.01 |
---|---|
삼국유사 - (1) 탑상(塔像) (0) | 2020.10.01 |
[불자가 꼭 알아야 할 100가지] 불교를 실천하는 세가지 길, 삼도 (0) | 2020.09.06 |
[불자가 꼭 알아야 할 100가지] 인과응보 (0) | 2020.09.06 |
[불자가 꼭 알아야 할 100가지] 윤회와 업 (0) | 2020.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