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然 일연
三國遺事 「塔像」 삼국유사 「탑상」
가섭불이 좌선했던 돌
[해제]
신라불교의 핵심이었던 황룡사가 오래 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황룡사 자리가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이 그곳에서
앉아 선정 수행하였던 돌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수록한 편이다. 일연은
그 근거로『옥룡집(玉龍集)』과「자장전(慈藏傳)」등을 들었다. 이에 맞추어
황룡사가 궁궐을 짓다가 사찰로 바뀐 창건 연유를 말하고, 일연 자신이 직
접 황룡사를 찾아가 가섭불이 수행하였다는 돌을 살펴 보고 현상을 기록하
였다. 그리고 신라 불교의 오랜 인연을 증명하기 위해『아함경』과 같은 불
교 경전에 따라 겁(劫)의 시간과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시간을 살펴 보고,
이를 고려의「역대가」와『대일역법』같은 기록이나 중국의『찬고도』에서
말하는 개벽(開闢) 등의 시간과 비교하여 불교의 시간 관념이 가장 오래됨
을 말하고 불교의 우월성을 확인하고 있다.
[역주]
가섭불이 좌선했던 돌
『옥룡집(玉龍集)』1)과 자장전(慈藏傳)2)과 여러 집에서 전해오는 기록에
모두 이렇게 전한다.
“신라 월성(月城)3) 동쪽 용궁(龍宮)의 남쪽에 가섭불(迦葉佛)4)이 좌선했
던 돌5)이 있는데 그 땅은 전불(前佛) 시대의 절터이고, 지금의 황룡사(皇龍
寺) 땅이니 일곱 개 절6)의 하나이다.”
국사(國史)7)를 살펴보면, 진흥왕(眞興王)8) 즉위 14년인 개국(開國)9) 3년
(553) 계유년 2월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을 짓자 황룡(皇龍)이 그 땅에 나
타나서 왕이 이상하게 여기고 고쳐서 황룡사(皇龍寺)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좌선했던 돌은 불전의 뒤쪽에 있다. 예전에 한번 뵈었더니 돌의 높이는
대여섯 자쯤 되고 둘레는 겨우 세 발10)이며, 깃대처럼 섰는데 꼭대기는 평
평하였다. 진흥왕이 절을 창건한 이래 두 번 화재를 겪어 돌이 갈라진 곳이
있었으므로 절의 승려가 쇠를 붙여 보호하였다.
이런 찬이 있다.
불교가 쇠잔해져 햇수를 적을 수 없는데,
다만 좌선했던 돌만이 의연히 남았구나.
뽕나무 밭은 몇 번이나 푸른 바다가 되었는데,
애처롭게도 우뚝 서서 자리 옮기지 않았구나.
몽고 병란 이후11)에 불전과 탑이 타버리고 이 돌도 파묻혀 거의 땅과 같
이 평평해졌다.
迦葉佛宴坐石12)
玉龍集及慈藏傳, 與諸家傳紀皆云.“ 新羅月城東, 龍宮南, 有
迦葉佛宴坐石. 其地卽前佛時伽藍之墟也. 今皇龍寺之地, 卽
七伽藍之一也.” 按國史, 眞興王卽位十四開國三年癸酉二月,
築新宮於月城東, 有黃13)龍現其地. 王疑之, 改爲皇龍寺. 宴坐
石在佛殿後面, 嘗一謁焉, 石之高可五六尺來, 圍僅三肘, 幢立
而平頂. 眞興創寺已來, 再經災火, 石有拆裂處, 寺僧貼鐵爲
護. 乃有讚曰, 惠日沈煇不記年, 唯餘宴坐石依然. 桑田幾度成
滄海, 可惜巍然尙未遷. 旣而西山大兵已後, 殿塔煨燼, 而此石
亦夷沒, 而僅與地平矣.
1)『옥룡집(玉龍集)』:고려시대에 유행하던 도참서(圖讖書)의 하나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의 여러 종류의 도참서들이 도참설의 개창조로 여겨진 도선(道詵,
827~898)에게 가탁하여『도선비기(道詵秘記)』·『도선밀기(道詵密記)』등으로
불려 전해졌다. 도선은 옥룡사에 35년간 주석하였기 때문에 도참서들이『옥룡
기(玉龍記)』나『옥룡집』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2) 자장전(慈藏傳):자장(慈藏)의 전기로는『속고승전(續高僧傳)』권24 자장전,『삼
국유사』의「대산오만진신(台山五萬眞身)」편 인용의 ‘산중고전(山中古傳)’,「자장
정율(慈藏定律)」편의 근거자료,『법원주림(法苑珠林)』권64 자장조 등이 있으나,
이들 자료에는 본문의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삼국유사』권3「황룡사장
륙(皇龍寺丈六)」편과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편에는 위에서 말한 기록들
에 보이지 않는 내용이 쓰여 있다. 특히「황룡사장륙」편에는 오대산에서 문수가
자장에게 부촉하면서 이 가섭불이 좌선했던 돌이 있다고 언급하였다.(後大德慈
藏西學, 到五臺山, 感文殊現身授訣. 仍囑云, “汝國皇龍寺, 乃釋迦與迦葉佛 講演之地,
宴坐石猶在, 故天竺無憂王, 聚黃鐵若干斤 泛海 歷一千三百餘年. 然後乃到而國, 成安
其寺, 蓋威緣使然也.”) 따라서 ‘가섭불연좌석’편의 기록이 실린 자장전은 별개의
국내자료였을 것이다.
3) 월성(月城):경북 경주시 인왕동(仁旺洞)에 있는 101년(파사왕 22)에 축조한 신
라의 왕성. 반달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반월성(半月城) 또는 월성이라 부른다. 성
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남천이 흐르는 자연지형을 그대
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
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임해전으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 있다. 성 안에 많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빙고가 있다.
4) 가섭불(迦葉佛):석가모니불을 포함하여 과거에 이미 성불한 일곱 부처 중의 한
부처. 과거 7불은 첫째 비바시불(毘婆尸佛, Vipaśyin), 둘째 시기불(尸棄佛,
Śikhin), 셋째 비사부불(毘舍浮佛, Viśvabūm3 ), 넷째 구류손불(拘留孫佛,
Krakucchanda), 다섯째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Kanakamuni), 여섯째 가섭
불( Kāśyapa), 일곱째 석가모니불( Sākyamuni)이다. 이중 첫 번째부터 세 번째
까지는 과거 장엄겁에 성불한 부처이고, 네 번째 부처부터 현재 현겁에 성불한
부처이다.
5) 연좌(宴坐)는 좌선을 말함. 연좌석(宴坐石)은 좌선했던 돌을 가리킴.
6) 신라 도성 내에 있었다는 과거불 시대의 가람 일곱 곳인데 이곳에 모두 절을 지
었다.『삼국유사』권3 흥법「아도기라(阿道基羅)」편에서 이 7곳이 금교(金橋) 동
쪽의 천경림(天鏡林, 興輪寺), 삼천기(三川歧, 永興寺), 용궁(龍宮) 남쪽(皇龍寺),
용궁 북쪽(芬皇寺), 사천미(沙川尾, 靈妙寺), 신유림(神遊林, 天王寺), 서청전(婿請
田, 曇嚴寺)이라고 하였다.
7) 국사(國史):『삼국사기』를 말한다. 인용부분은 『삼국사기』권4 진흥왕 14년조
로서, 본문은 “봄2월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해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도록 하였
다. 황룡이 그 땅에 나타나 왕이 의아하게 여기고 궁궐을 고쳐 절을 만들고 이름
을 황룡사라고 하였다.”(春二月, 王命所司, 築新宮於月城東. 黃龍見其地, 王疑之, 改
爲佛寺, 賜號曰皇龍.)이다.
8) 진흥왕(眞興王):신라 제24대 왕. 재위 540~576.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삼맥종
(三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 지증왕의 손자로, 법흥왕의 아우 입종갈문왕(立
宗葛文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이며, 왕비는 박씨로 사도부
인(思道夫人)이다. 백제의 땅이었던 한강 유역의 요충지를 획득하고, 백제 성왕
을 전사시켰다. 이어 대가야를 평정하고, 창녕에서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에 이
르는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다. 화랑제도를 창시하여 젊은 인재를 국
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9) 개국(開國):신라 진흥왕 때의 연호. 551~567년.
10) 세 발:일주(一肘)는 가운데 손가락 끝에서 팔 끝까지의 길이로서 세 자이다. 삼
주는 세 발이다.
11) 서산대병(西山大兵)은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의 침공을 말한다. 특히 고종 25년
(1238)년의 침공 때는 경주까지 공격하여 황룡사구층탑을 불태웠다.
12)『삼국유사』탑상편 원문 대본은 韓6 p.313b1~339c9.
13) 원본의 皇은 黃이 맞다.
『아함경(阿含經)』14)을 보면, 가섭불은 현겁(賢劫)15)의 세 번째 부처로서,
사람의 수명이 2만 세일 때에 세상에 출현한다고 한다. 이것에 근거하여 증
감법으로 계산하면, 매번 성겁(成劫)16)의 처음에는 모두 수명이 한 없이 길
었는데, 점차 줄어서 수명이 8만 세일 때에 이르면 주겁(住劫)17)의 처음이
된다. 이로부터 다시 백 년에 1년씩 줄어 수명이 10세일 때에 이르는 것이
1감(一減)이며, 다시 늘어나 사람의 수명이 8만 년인 때에 이르면 것이 1증
(一增)이다. 이와 같이 하여 20감 20증이 되면 1주겁이 된다. 이 1주겁 중에
천불(千佛)이 세상에 출현하는데, 지금 본사(本師) 석가모니불(釋迦牟尼
佛)은 네 번째 부처이다. 네 부처는 모두 제9감 중에 나타난다. 수명이 100
세인 석가세존으로부터 2만세인 가섭불에 이르기까지는 2백만여 년이며,
현겁의 처음 제1존인 구류손불(拘留孫佛)18) 때까지가 또 수만 년이다. 구
류손불 때부터 위로 겁의 처음 수명이 한없이 길 때까지는 또 얼마나 되겠
는가? 석가세존으로부터 지금 지원(至元)19) 18년(1281) 신사년까지는 벌써
2천 2백 30년이니,20) 구류손불로부터 가섭불 때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는 수만 년이 된다.
按阿含經, 迦葉佛是賢劫第三尊也, 人壽二萬歲時, 出現於世.
據此以增減法計之, 每成劫初, 皆壽無量歲, 漸減至壽八萬歲
時, 爲住劫之初. 自此又百年, 減一歲, 至壽十歲時, 爲一減,
又增至人壽八萬歲時, 爲一增. 如是二十減二十增, 爲一住劫.
此一住劫中, 有千佛出世, 今本師釋迦, 是第四尊也. 四尊皆現
於第九減中. 自釋尊百歲壽時, 至迦葉佛二萬歲時, 已得二百
萬餘歲, 若至賢劫初第一尊拘留孫佛時, 又幾萬歲也. 自拘留
孫佛時, 上至劫初無量歲壽時, 又幾何也. 自釋尊下, 至于今至
元十八年辛巳歲, 已得二千二百三十矣, 自拘留孫佛, 歷迦葉
佛時, 至于今, 則直幾萬歲也.
14)『아함경(阿含經)』:불교 경전 가운데 아함부에 속하는 소승(小乘) 경전. 주요 사
상은 사제(四諦)와 연기(緣起)로 요약할 수 있다. 아함경에는『장아함경(長阿含
經)』·『중아함경(中阿含經)』·『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잡아함경(雜阿含經)』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이 곳에서 인용한 내용은『장아함경』에서 전거를 찾을 수
있다.『장아함경』 권1에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출현시기와 인간의 수명 등을 설
하고 있다. 제1 비바시불(毘婆尸佛)은 과거 91겁시에 사람의 수명 8만세 때 출현
하며, 제2 시기불(尸棄佛)은 과거 61겁, 사람 수명 7만세 때에, 제3 비사바불(毘
舍婆佛)은 과거 31겁, 사람 수명 6만세 때에, 제4 구류손불(拘樓孫佛)은 현겁(賢
劫), 사람 수명 4만세 때에, 제5 구나함불(拘那含佛)은 현겁, 사람 수명 3만세 때
에, 제6 가섭불(迦葉佛)은 현겁, 사람 수명 2만세 때에, 제7 석가불(釋迦佛)은 현
겁, 사람 수명 100세 때에 출현한다고 하였다.
15) 현겁(賢劫): bhadra-kalpa. 삼겁(三劫)의 하나. 겁(劫, kalpa)이란 음역어인
겁파(劫波), 갈랍파(羯臘波) 등의 약칭이다. 본래 ‘분별(分別)’의 뜻을 가진 말로
서 ‘극대(極大)의 시한(時限)’을 가리키는 말이다. 겁의 종류는 경전마다 차이가
있다. 현겁은 현재주겁(現在住劫)을 말하며, 현겁(現劫)이라고도 한다. 천불현성
(千佛賢聖)의 많은 현인이 출현하므로 현겁(賢劫)이라고 한다. 이 겁에는 1천 불
이 세상에 나타나서 중생을 구제하는데, 구류손불, 구나함불, 가섭불, 석가불 등
이 현겁에서 이미 성불한 과거불이다. 사람의 수명이 8만 4천세에서 1세로 감소
하였다가(減) 다시 증가하는(增) 1감1증을 1소겁(小劫)이라 하고, 그 시간은『구
사론』등에 의하면 1680만 년이라 한다. 이 1소겁을 20차례 되풀이하는 동안 세
계가 성립되는(成劫) 중겁(中劫)의 시간이 된다. 다음 20겁 동안 머물러 있고[住
劫], 다음 20겁 동안 무너지고[壞劫], 다음 20겁 동안 텅 비어[空劫] 있다. 이 성·
주·괴·공겁을 다 지나는 것을 1대겁(大劫)이라 한다. 과거의 대겁을 장엄겁(莊
嚴劫), 현재의 대겁을 현겁, 미래의 대겁을 성수겁(星宿劫)이라 한다.
16) 성겁(成劫):사겁(四劫)의 하나. 사겁은 성겁(成劫)·주겁(住劫)·괴겁(壞劫)·공
겁(空劫)이다. 이중에서 성겁은 세계가 파괴되어 없어진 후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다 세계가 생기고 인류가 번식하는 기간이다. 이 세계가 완전히 파괴된
후 정업(情業)의 증상력(增上力)으로 미풍이 생기고, 풍륜·수륜·금륜이 생기
며, 금륜 위에 수미산·칠금산·사대주가 생겨 사람들이 살 곳이 생기고 사천왕
천·도리천 등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17) 주겁(住劫):사겁의 하나 . 사겁 중에서 주겁은 중생들이 사는 여러 차별의 세계
인 기세간(器世間)과, 부처가 교화할 대상인 중생들의 세계인 중생세간(衆生世
間)이 평온하게 지속되어 인류가 세계에 안주하는 기간이다.
18) 구류손불(拘留孫佛): Krakucchanda-buddha. 과거 7불 중 네 번째 부처이며,
현겁 천불의 첫 번째 부처이다. 사람들의 수명이 4만세 때에 출현하며 시리사나
무 아래서 성도하여 한번에 4만명의 제자를 교화한다고 한다.
19) 지원(至元):원(元)나라 세조(世祖) 때의 연호. 1264~1294년. 고려 원종 5년~충
렬왕 20년.
20) 이로부터 역으로 계산하면 ‘석가세존으로부터’는 서기전 949년을 기준으로 한
것이 된다. 이는 부처가 입멸한 해를 기준으로 한(佛滅紀元) 것이다. 이 연대가
중국과 우리나라 등 북방불교에서 사용해 온 전통 불기(佛紀)이다. 그러나 지금
은 1956년 세계불교도대회의 결의에 따라 전세계 불교계가 공통으로 남방 전래
설에 따른 서기전 544년설을 사용한다.
우리 고려의 명사인 오세문(吳世文)21)이 「역대가(歷代歌)」를 지어, 금
(金)나라 정우(貞祐)22) 7년(1219) 기묘년으로부터 거꾸로 셈하여 4만 9천 6
백여 년에 이르면, 반고(盤古)23)가 천지개벽한 무인년이 된다고 하였다. 또
연희궁(延禧宮)24) 녹사(錄事)25) 김희령(金希寧)이 지은『대일역법(大一曆
法)』에서는 개벽한 상원(上元) 갑자(甲子)26)년으로부터 원풍(元豊)27) 갑자
(甲子, 1084)년까지를 1백 93만 7천 6백 41년이라고 하였다. 또 『찬고도(纂
古圖)』28)에는 개벽에서 획린(獲麟, 서기전 477)29)에 이르기까지를 2백 7십 6
만년이라고 하였다. 여러 경을 보면, 가섭불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가
이 연좌석의 수명이 된다고 하였으니 오히려 겁의 처음에 개벽할 때로부터
의 시간이 어린아이 정도가 된다. 세 가지 설이 오히려 이 어린아이 돌의 나
이에도 미치지 못하니, 개벽의 이야기에는 한참 멀 뿐이다.
有本朝名士吳世文, 作歷代歌, 從大金貞祐七年己卯, 逆數至
四萬九千六百餘歲, 爲盤古開闢戊寅. 又延禧宮錄事金希寧
所撰大一曆法, 自開闢上元甲子, 至元豊甲子, 一百九十三萬
七千六百四十一歲. 又纂古圖云, 開闢至獲麟, 二百七十六萬
歲. 按諸經, 且以迦葉佛時至于今, 爲此石之壽, 尙距於劫初開
闢時爲兒子矣. 三家之說, 尙不及玆兒石之年, 其於開闢之說,
疎之遠矣.
21) 오세문(吳世文):고려 의종~고종 때의 인물. 의종 6년(1152)에 생원시에 합격하
였으며, 명종 때 벼슬이 동각시학(東閣侍學)에 이르렀다.
22) 정우(貞祐):금(金)나라 선종(宣宗) 때의 연호. 1213~1217년. 그런데 정우는 5년
에 끝나므로, 정우 7년은 흥정(興定) 3년이며 고려 고종 6년에 해당한다.
23) 반고(盤古):천지가 생겨날 때 나타났다는 중국의 전설적인 신. 세계가 혼돈 상
태에 있을 때 태어나 반고가 자라나면서 하늘과 땅도 점점 멀리 떨어져 1만 8천
년이 지나 지금과 같은 하늘과 땅이 되었다고 한다.
24) 연희궁(延禧宮):고려 명종(明宗, 1170~1197 재위)이 장공주를 연희궁주에 봉하
였다. 이와 관련된 관청으로 생각된다.
25) 녹사(錄事):고려시대 각 관부의 이속(吏屬)으로 두었던 관직. 대개 7~9품에 해
당하였다.
26) 상원(上元) 갑자(甲子):시대 변화의 큰 단위로 잡는 세 묶음의 육십갑자. 180년
이면 도수가 다 하여 근본에 돌아온다고 한다. 그중 첫째 갑자의 60년을 상원,
그 다음 60년을 중원(中元), 그 다음 60년을 하원(下元)이라고 한다.
27) 원풍(元豊):송(宋)나라 신종(神宗) 때의 연호. 1078~1085년. 고려 문종 32년~선
종 2년.
28) 찬고도(纂古圖):중국에서 상고의 역사를 말하는 책 중에 개벽에서 획린까지를
276만년으로 말하는 것은 원명포(元命苞)나 건착도(乾鑿度)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後漢書』 권12 律歷志)
29) 획린(獲麟):춘추시대 애공(哀公) 14년(서기전 477)에 봄에 “서쪽으로 사냥을 갔
다가 기린을 잡았다”(西狩獲麟)고 한 데서 유래하는 것으로 서기전 477년을 가
리킨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정리하면서 이 기사에서 마쳤으므로 절필(絶筆)
의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천지가 개벽한 때로부터 『춘추』의 끝까지 곧 인류
상고의 역사를 의미한다.
요동성의 아쇼카왕탑
[해제]
당의 도선(道宣)이 쓴 『집신주삼보감통록』에 나오는 요동성의 아쇼카왕
탑을 소개한 글이다. 고구려왕이 발견하고 확인한 이 아쇼카왕탑은 흙으로
만든 삼층탑으로 그 안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된 명문이 나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왕은 후에 목조 칠층탑을 만들었으나 오래 되어 썩었다고 하였다.
또한 요동에는 고구려 후기에 오래된 불상도 있었음을 고구려와 당 전쟁
에 참가한 중국의 설인귀(薛仁貴)의 말을 빌려 기록하였다. 이러한 사실들
이 정확히 언제 이루어진 것인지 분명히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연대 고증이
뒤따랐고, 천하에 팔만 사천탑을 만들었다는 아쇼카왕의 조탑 설화를 들어
이들이 사실임을 확인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역주]
요동성의 아쇼카왕탑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30)에 이렇게 수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31) 곁에 있는 탑32)은 옛날 노인들이 전하여 말
하기를, “옛날 고구려의 성왕(聖王)33)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이 성에 이르
렀는데, 오색구름이 땅을 덮고 있는 것을 보고 가서 구름 속을 찾아보니 한
스님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는) 다가가면 문득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다시 나타났다. 곁에 삼층으로 된 흙으로 만든 탑이 있었는데 위는 가
마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았으나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가서 찾아
보았으나 다만 거친 풀만 있을 뿐이었다. 한 길 파보았더니 지팡이와 신발
이 나왔다. 또 팠더니 명문이 나왔는데 위에 산스크리트어[梵語]34)로 된 글
이 있었다. 시종하던 신하가 알아보고 ‘이것은 불탑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자세히 묻자 대답하기를, ‘한(漢)나라에 있던 것인데 그 이름은 포도
(蒲圖)35)〈본래 휴도왕(休屠王)36)이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쓴 금인(金人)37)이라고 하였
다.〉38)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39) 그로 인하여 믿음이 생겨 칠층 목탑을
세웠는데, 뒤에 불법이 비로소 전해지자 전말을 모두 알게 되었다. 지금 다
시 높이가 줄어들어 목탑이 썩어서 무너졌다. 아쇼카왕(阿育王)40)이 통일
한 염부제주(閻浮提洲)41)에는 곳곳에 탑을 세웠던 것이니 이상할 것이 없
다.42) 또 당나라 용삭(龍朔)43) 연간에 요동의 왼쪽에서 전쟁이 있을 때, 행
군(行軍)44) 설인귀(薛仁貴)45)가 수(隋)나라 왕이 토벌했던 요동의 옛 땅에
이르러 산에 있는 불상을 보았는데, 텅 비고 쓸쓸하여 왕래가 끊어졌다. 노
인에게 물으니 “이것은 선대에 나타난 것입니다.”고 하니, 곧 그대로 그려
서 서울로 돌아왔다.46) 〈모두 우자함(右字函)47)에 있다.〉라고 하였다.
전한(前漢)48)과 삼국(三國)의 지리지(地理志)49)를 살펴보면 요동성은 압
록강의 바깥에 있어 한(漢)의 유주(幽州)50)에 속한다. 고구려의 성왕(聖王)
은 어느 임금인지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동명성제(東明聖帝)51)라고 하는
데, 아닌 것 같다. 동명왕은 전한(前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에 즉위하여 성제(成帝) 홍가(鴻嘉) 임인년(서기전 19)에 승하(昇遐)52)
하였다. 그때는 한나라에서도 패엽(貝葉)53)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외
의 제후의 신하가 벌써 범어로 된 글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부처를
포도왕이라 칭하였으니, 아마 전한 때에 서역(西域)54)의 문자를 혹시 아는
사람이 있어서 범어로 된 글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옛 전승을 살펴보면,55) 아쇼카왕이 귀신의 무리에게 명하여 9억 명의 사
람들이 사는 곳마다 탑 하나를 세우게 하였는데, 이같이 하여 이 염부제 세
상56) 안에 8만 4천 개의 탑을 세우고 큰 돌 안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지금
곳곳에서 상서로움이 나타남이 한 둘이 아니니, 대개 진신사리란 감응을
헤아리기 어렵다.
찬한다.
아쇼카왕의 보탑은 세상에 두루 퍼졌는데,
비에 젖고 구름에 덮여 이끼로 얼룩졌네.
그때의 나그네 안목을 상상해보면
몇 사람이나 신에 제사 지낸 무덤을 가리켰을까?
遼東城育王塔
三寶感通錄載. 高麗遼東城傍塔者, 古老傳云,“ 昔高麗聖王,
按行國界, 次至此城, 見五色雲覆地, 往尋雲中, 有僧執錫而
立. 旣至便滅, 遠看還現. 傍有土塔三重, 上如覆釜, 不知是何.
更往覓僧, 唯有荒草. 掘尋一丈, 得杖幷履, 又掘得銘, 上有梵
書. 侍臣識之云 “是佛塔.” 王委曲問詰, 答曰, “漢國有之, 彼
名蒲圖王〈本作休屠王祭天金人.〉.” 因生信, 起木塔七重, 後佛法始
至, 具知始末. 今更損高, 本塔朽壞. 育王所統一閻浮提洲, 處
處立塔, 不足可怪.
又唐龍朔中, 有事遼左, 行軍薛仁貴, 行至隋主討遼古地, 乃見
山像, 空曠蕭條, 絶於行往. 問古老云,“ 是先代所現.”, 便圖
寫來京師〈具在右57)函.〉
按西漢與三國地理志, 遼東城在鴨綠之外, 屬漢幽州. 高麗聖
王, 未知何君. 或云東明聖帝, 疑非也. 東明以前漢元帝建昭二
年卽位, 成帝鴻嘉壬寅升遐. 于時漢亦未見貝葉, 何得海外陪
臣, 已能識梵書乎. 然稱佛爲蒲圖王, 似在西漢之時, 西域文字
或有識之者, 故云梵書爾.
按古傳, 育王命鬼徒, 每於九億人居地, 立一塔, 如是起八萬
四千於閻浮界內, 藏於巨石中. 今處處有現瑞非一, 蓋眞身舍
利, 感應難思矣.
讚曰 育王寶塔遍塵寰, 雨濕雲埋蘚纈斑. 想像當年行路眼, 幾
人指點祭神墦
30)『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당의 불교사가(佛敎史家) 도선(道宣, 596~667)이 인
덕(麟德) 원년(664)에 쓴 책.『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感通錄)』또는『감통
록(感通錄)』이라고도 한다. 3권으로 되어 있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후한(後
漢)에서 저자가 살던 당나라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탑·절·불상·경전·승려에
게 나타난 150여 건의 감통 관련 사적과 기록을 모은 책이다. 본문에 인용된 부
분은 위『삼보감통록』권상의 잡명신주산천장보등연20(雜明神州山川藏寶等緣
二十, 목록 이름. 내용에서는 雜明神州山澤所藏)과 권중의 당요구산붕자연출상연
50(唐遼口山崩自然出像緣五十)에서 가져온 것이다.
31) 요동성(遼東城):중국 요녕성(遼寧省) 요양(遼陽) 부근에 있던 고구려 성. 한(漢)
나라 때 요동군의 군치(郡治)인 양평현(襄平縣)이 있다. 요하 일대에서 가장 견
고한 고구려의 요새로서 수나라 대군의 침공 때도 맹렬한 공격을 막아냈던 요
새였다.
32) 평안남도 순천군 용봉리 방촌에서 발견된 요동성총(遼東城塚)에는 요동성의 모
습을 그린 벽화가 있는데 성 바깥에 탑을 묘사하였다. 이 그림은 사다리 모양으
로 기단을 그렸으며, 그 위에 문을 단 탑신과 지붕의 모습이 2층까지 남아 있다
(원래의 층수는 윗부분 마멸로 알 수 없다). 사다리 또는 층계를 묘사한 부분과 등
불을 단 기둥 같은 것도 그려서 전체적으로 목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본 항목
에서 말하는 요동성 목탑은 요동성총의 탑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33) 성왕(聖王):고구려에서 성왕(聖王)으로 칭해진 왕으로는 동명성왕(東明聖王,
재위 서기전 37~서기전19)과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81~413)의 예가 있다. 동
명성왕은 시기적으로 불교가 수용되기 훨씬 전이라서 거리가 멀고, 광개토왕은
시기적으로 그에 해당된다. 그러나 성왕이란 일반적으로 왕을 칭송하는 말이
므로 반드시 광개토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글의 후반부에 “후에 불법이
들어오면서” 라고 한 것을 보면 성왕은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소수림왕
이전의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4) 범어(梵語)는 인도의 고대어인 산스크리트어.
35) 포도(蒲圖): buddha를 한자로 번역한 여러 말 중의 하나. 일반적으로 불타(佛
陀)라는 역어가 가장 널리 쓰였지만 부도(浮屠), 불도(佛圖), 포도, 휴도(休屠)라
고도 썼다.
36) 휴도왕(休屠王):휴도는 buddha를 한자로 번역한 여러 말 중의 하나로서 불
타(佛陀)를 말한다. 한역 초기에 쓰였다. 그래서 부처를 가리키는 말인데 때로는
승려를 지칭하는 데도 쓰였다. 불교가 중국에 수용되기 전에 흉노를 정벌하고
불상을 들여온 사실을 기록한『사기(史記)』흉노열전(권110)의 “흉노를 쳐서…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지낸 금인을 얻었다(擊匈奴, 得胡首虜騎萬八千餘級, 破得休
屠王祭天金人)”는 기록이나『한서(漢書)』곽거병(霍去病)열전(권55)에 “휴도가
하늘에 제사지낸 금인을 가져왔다(收休屠祭天金人)”는 기록의 휴도왕 또는 휴
도는 흉노의 왕을 가리킨다. 그러나 휴도는 승려나 불타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
였다.『위략(魏略)』서이전(西夷傳)에 “박사 제자 경헌이 대월지국 사자 이존으
로부터 휴도경을 구전해 받았다(哀帝元壽元年, 博士弟子景憲, 受大月氏王使伊存
口傳休屠經.)”는 부분의 휴도경이란 불경을 말하기 때문에 휴도는 불타를 가리
킨다. 이곳의 일연 세주는 포도를 불타로 파악하지 않고 휴도왕으로 생각한 데
서 붙인 주이므로 불탑을 말하는 이 부분의 맥락과는 맞지 않는다.
37) 금인(金人):부처. 또는 불상을 말한다.
38) 이 부분의 주는 『삼보감통록』에는 없는 것으로 『삼국유사』에서 붙인 것이다.
『삼국유사』는 이 주를 앞의 ‘포도왕’ 뒤에 붙여 “한나라에 있던 것인데 그 이름
은 포도왕입니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불탑에 대한 문답으로 이루
어진 문맥으로 볼 때 위에 제시한 번역문과 같이 “한나라에 있던 것인데 그 이
름은 포도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로 인하여…”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휴
도왕이 하늘에 제사지낼 때 쓴 금인(金人)이란『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곽
거병전(藿去病傳)과『한서(漢書)』 김일제전 등에 보이는 말로서, 한의 곽거병이
흉노를 정벌하고 ‘금인(金人)’을 노획한 사실을 말한다. 이는 전한 때 전쟁을 통
해 중국에 불상이 전래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삼국유사』의 주는 이
것을 불탑을 말하면서 인용하고 있다.
39) 주8)에서 말한 것처럼 ‘왕(王)’을 세주의 앞에 두는 것보다 뒤에 붙여 해석하는
것이『삼보감통록』의 원뜻과 문맥상의 흐름에 타당하다.
40) 원문의 육왕(育王)은 아쇼카왕( Aśoka, 阿育王)을 말한다. Aśoka를 아육왕(阿育
王)이라 음역하고 무우왕(無憂王)이라 의역한다. 서기전 268~232년경 재위. 인
도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왕.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를 보호한 왕. 즉위 초에는 폭
정을 일삼았으나 영역을 크게 넓히고 불교에 귀의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진리
를 애호하고 박애정신을 가진 이로써 인도 역사에서 번영의 시대를 연 왕이다.
불교계의 전승에는 왕의 재위 기간동안 전국에 8만 4천 개의 절과 탑을 세웠고
제3차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통치 영역 내는 물론 외국에까지 불법을 전도
하였으며, 불적지 곳곳에 마애법칙을 새긴 석주(Aśoka’s pillar)를 세우고 바위에
새겨 정법(正法)을 선포하였다. 그중 일부는 지금도 남아 있어 불교 유적의 명확
한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석주에는 특별 사면을 행하고 살생을 금하며 보시를
행하고 길 옆에는 나무를 심고 우물을 파는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 때문에
불교계에서는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한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추앙되었다.
41) 염부제주(閻浮提洲):염부제는 Jambu-dvīpa의 음역어. 수미산의 남쪽에 있는
대륙. 섬부제주(贍部提洲)·염부제비바주(閻浮提鞞波洲)·예주(穢洲)·예수주(穢
樹洲) 등으로도 쓴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인간 세상을 동·서·남·북의 넷으로
나눌 때 남쪽의 땅을 말한다. 여기에 16 대국, 500 중국, 10만 소국이 있다고 하
며, 부처가 출현하는 것은 오직 이 남염부제뿐이라 한다. 원래 인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후에 인간 세계를 말하게 되었다.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흔히 남
섬부주(南贍部洲)라고도 한다.
42) 이 대목은『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感通錄)』권상의 20 잡명신주산택소
장(雜明神州山澤所藏)에 나오는 내용이다.(大52 p.409a24~b4. 二十 雜明神州山澤
所藏 高麗遼東城傍塔者, 古老傳云, 往昔高麗聖王, 出見案行國界, 次至此城, 見五色雲
覆地, 即往雲中, 有僧執錫住立. 既至便滅, 遠看還見. 傍有土塔三重, 上如覆釜, 不知是
何. 更往覓僧, 唯有荒草. 掘深一丈, 得杖并履, 又掘得銘, 上有梵書. 侍臣識之云, 是佛
塔. 王委曲問, 答曰, 漢國有之, 彼名蒲圖. 王因生信, 起木塔七重, 後佛法始至, 具知始
末. 今更損高, 本塔朽壞. 斯則育王所統一閻浮洲, 處處立塔, 不足可怪.) 몇 글자의 차
이가 있다.
43) 용삭(龍朔):당(唐) 고종(高宗)의 연호. 661~663년. 신라 문무왕1~3년.
44) 행군(行軍):『삼국사기』권7 문무왕 11년(671)에 의하면, 설인귀가 신라 문무왕
에게 보낸 편지에 스스로를 ‘행군총관설인귀(行軍摠管薛仁貴)’라 칭하고 있어
그가 행군총관의 직책을 가진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과
일치하는 시기(661~663경)에 그가 이미 행군총관의 직책에 있었는지는 다른 곳
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행군~’은 전쟁 시 임시로 주어서 군대를 지휘하게 한 직
책이었다.
45) 설인귀(薛仁貴):당(唐)나라 장수. 강주(絳州) 용문(龍門: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피산현(稗山縣)) 사람이다. 태종·고종 때 거란·돌궐을 토벌하고,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자 검교안동도호(檢校安
東都護)로 취임했다. 문문왕 11년(671) 계림도행군총관(鷄林道行軍總管)으로 신
라를 침공하였으며, 675년 신라의 천성(泉城)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다시 침략했으나 소부리(所夫里)의 기벌포(伎伐浦)에서 패했다. 681년 과주자사
(瓜州刺史)·대주도독(代州都督)으로 임명되었다. 뒤에 본위대장군(本衛大將軍)
으로 임명되고 평양군공(平陽郡公)에 봉해졌다.
46)『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感通錄)』권중 당요구산붕자연출상연50(唐遼口
山崩自然出像緣五十)을 그대로 옮겼는데 몇 글자 차이가 있다. 大52 p.423a8~11.
(五十 唐龍朔中, 有事遼左, 行軍將薛仁貴, 行至隋主, 討遼古地, 乃見山像, 空曠蕭條,
絕於行往. 討問古老, 云是先代所現. 便圖寫, 傳本京師云云.)
47) 약자함(若字函):『삼보감통록』이 들어 있는 고려대장경의 함(函)을 말하는 것인
데, 대장경은 함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름을 천자문의 글자 순서대로 매겼다. 그
런데 지금 전하고 있는 고려대장경에서『삼보감통록』은 약(若)자함이 아닌 우
(右)자함에 들어있다. 약자함은 283번째이고 우자함은 465번째이다. 따라서 ‘우
함(右函)’의 잘못된 글자로 보아야 한다.
48) 서한(西漢):전한(前漢, 서기전 206~서기8). 한(漢)은 약 400년에 걸쳐 존속했는
데, 전한과 후한(서기 25~219) 사이에 외척 왕망(王莽)이 잠시 나라를 세워 신
(新, 서기 8~25)이라 하였다. 전한은 수도가 장안(長安)이었고, 후한은 낙양(洛
陽)이었다. 수도의 위치에 따라 전한은 서한(西漢), 후한은 동한(東漢)이라 한다.
49)『한서(漢書)』와『삼국지(三國志)』의 지리지를 말하나,『삼국지』에는 지리지
가 없다.『한서』지리지에 “요동군은 유주에 속한다(遼東郡 秦置 屬幽州 戶五萬
五千九百七十二 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 縣十八)”고 하였다. 우리나라의『삼국
사기』권37 지리지에는 “한서의 지에서 요동군은 낙양에서 3600리 떨어져 있다
고 하였다(漢書志云 遼東郡 距洛陽三千六百里)”라고 하였다.
50) 유주(幽州):지금의 산동성·하북성·요녕성 일대. 전한의 유주는 요동군·낙랑
군·현도군 등 10여군을 관할하였다.
51) 동명성제(東明聖帝):고구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
52) 승하(升遐):임금 등 높은 사람이 죽은 것을 높여 이르는 말.
53) 패엽(貝葉):패다라엽(貝多羅葉 )의 약칭. 패다라수(貝多羅樹, pāttra)의 잎을 말
한다. 이 잎은 크고 두꺼워 옛날 인도에서 종이가 많이 쓰이기 이전에 불경을 새
기는데 쓰였다. 또 서사(書寫)하기에 가장 적합한 식물을 다라수(多羅樹 tāla)
라 한다. 다라수의 잎은 길고 재질이 조밀하여 서사용에 적합하다. 잎을 잘 말려
적절한 크기로 잘라 침이나 칼 철필 등 날카로운 재질로 잎의 면에 경전 글을 새
기고 그을린 다음 그 위에 먹을 묻혀 닦아 내면 잎 면에 새겨낸 자국이 남아 읽
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만든 경전을 패엽경(貝葉經)이라 한다.
54) 서역(西域):넓은 의미로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말하고, 좁은 의미로는 대개 지
금의 신강성 천산남로 지방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인도를 말한다. 역사적으로
서역은 일정한 범위가 정해진 것은 아니다. 불교사에서는 인도에서 육로로 불
교가 전해진 지역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 초기인 서기전 3세기에는 대월지
국(大月氏國) 통치하의 대하(大夏)와 아프가니스탄 일부, 카슈미르, 안식국(安
息國) 범위에 있던 페르시아 북부, 강거국(康居國) 범위에 있던 소그디니아 등
의 여러 나라를 말한다. 불교와 관련 있는 나라들은 파미르고원 서쪽의 월지국
(투르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 북부), 안식국, 강거국(투르키스탄 북부, 시베
리아 남부), 간다라, 계빈국(카슈미르), 파미르고원 동쪽의 호탄, 쿠차, 카슈가르,
투르판 등을 말한다.
55)『삼보감통록』 서두의「초명사리표탑(初明舍利表塔)」에 부처가 걸행을 할 때 어
린애가 길가에서 놀다 부처를 위해 흙으로 음식을 만들어 부처에게 공양하였
는데 그 인연으로 부처 입멸 후 1백년에 왕으로 태어나 귀신들을 시켜 8만 4천
탑을 만들게 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권상 大52 p.404a19~25.昔如來行
乞 有童子戱於路側 以沙土爲米麪 逆請以土麪奉 佛因爲受之 命侍子以爲土漿 塗佛住
房 足遍南面 記曰 此童子者 吾滅度後一百年 王閻浮提空中地下四十里內 所有鬼神並
皆臣屬 開前八塔所獲舍利 於一日夜役諸鬼神造八萬四千塔 廣如衆經 故不備載) 또
법림(法琳)이 편찬한 『파사론(破邪論)』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권상 大52
p.484c1~4. 東天竺國有阿育王 收佛舍利 役使鬼兵散起八萬四千寶塔 遍閻浮提 我此
漢地九州之內 並有寶塔” 이 아쇼카왕 불탑 건립 이야기는 여러 불전에 널리 보이
는 내용이기 때문에 본문의 ‘고전(古傳)’ 이 어떤 책을 가리키는지는 구체적으
로 알 수 없다.
56) 원문의 염부계(閻浮界)는 염부제주 곧 수미산 남쪽에 있는 인간이 사는 세상을
말한다.
57) 원문의 若은 右의 오자
금관성의 파사석탑
[해제]
옛 금관가야의 수도였던 김해 지방에 있던 석탑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
금도 일부가 남아 있는 이 석탑은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는 재료인데다
형태도 특이하여 다른 나라에서 만든 것이라는 견해가 있어 왔다. 이 편에
서는 가야의 첫째 왕인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이 가야에 올 때인 42
년에 고향인 서역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가야 남방
불교 전래설에 대한 논란이 있어 인정하기 어려우며 석탑의 형태도 인도의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찬자 일연도 이때의 불교 도입 사실을 인정하
지 않고 452년의 사찰 창건을 덧붙여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와 관련하여 허황옥이 가야에 올 때 생겨났던 일화와 유적들을 아울러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 기사는 일연이 삼국 중심으로 불교를 이해할 때
가야의 불교 역시 삼국과 연관 관계 속에서 전래와 유포 시기를 고려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다.
[역주]
금관성의 파사석탑
금관주(金官州)58) 호계사(虎溪寺)59)의 파사석탑(婆娑石塔)60)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金官國)61)이었을 때, 세조(世祖) 수로왕(首露王)62)의 비 허
왕후(許皇后)63) 황옥(黃玉)이 후한(後漢)64) 건무(建武)65) 24년(48) 무신년
에 서역(西域)66) 아유타국(阿踰陁國)67)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령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으로 향하다가 파도의 신[波神]의 노
여움에 방해를 받아 가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에게 아뢰니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갈 것을 명하였다. 그제서야 순조로이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해안에 와서 정박하였다. (배에) 붉은 돛과 붉은 깃발과 주옥(珠玉)의 아름
다움이 있어 지금 (그곳을) 주포(主浦)68)라고 하고, 처음 산등성이 위에서
비단바지를 벗던 곳69)을 능현(綾峴)70)이라 하며, 붉은 기가 처음 해안에 들
어온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한다.71)
수로왕이 맞아들여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 되었다.72) 그러
나 그 때에 해동에는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 그 지방 사람들이 믿고 따르지 않았으므로 『가락국기
(駕洛國記)』73)에 절을 세웠다는 글이 없다.74)
제8대 질지왕(銍知王)75) 2년(452) 임진년에 이르러 그 곳에 절을 지었
다.76) 또 왕후사(王后寺)77)를 창건하였는데 〈아도(阿道)78)와 눌지왕(訥祗王)79)
의 시대이니 법흥왕(法興王)80) 이전의 일이다〉 지금도 (허황후의) 복을 빌고 있다. 아
울러 그럼으로써 남쪽 왜구를 진압하였으니 본국(本國) 본기(本記)81)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사각 5층탑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이하다. 돌에 약간 붉은 얼룩 빛
이 있고 그 재질이 매우 부드러운데,82) 이 지방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본
초(本草)』83)에서 말하는 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증험한다고 한 것이 이것
이다. 금관국은 가락국이라고도 한다. 『가락국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찬한다.
탑 실은 붉은 돛대 깃발 가벼운데
해신에게 비노니 노한 파도 멈추소서.
어찌 언덕에 이르러 황옥만을 도왔으리
천고에 남쪽 왜구의 성낸 고래도 막으리라.
金官城婆娑石塔
金官虎溪寺婆娑石塔者, 昔此邑爲金官國時, 世祖首露王之妃,
許皇后名黃玉, 以東漢建武二十四年戊申,84) 自西域阿踰陁國
所載來. 初公主承二親之命, 泛海將指東, 阻波神之怒, 不克而
還, 白父王, 父王命載玆塔. 乃獲利涉, 來泊南涯. 有緋帆茜旗
珠玉之美, 今云主浦, 初解綾袴於岡上處曰綾峴, 茜旗初入海
涯曰旗出邊. 首露王聘迎之, 同御國一百五十餘年. 然于時, 海
東未有創寺奉法之事. 蓋像敎未至, 而土人不信伏, 故本記無
創寺之文.
逮第八代銍知王二年壬辰, 置寺於其地. 又創王后寺〈在阿道訥祇
王之世, 法興王之前.〉, 至今奉福焉. 兼以鎭南倭, 具見本國本記.
塔方四面五層, 其彫鏤甚奇, 石微赤斑色, 其質良脆, 非此方
類也. 本草所云, 點鷄冠血爲驗者, 是也. 金官國, 亦名駕洛國.
具載本記.
讚曰 載厭緋帆茜旆輕, 乞靈遮莫海濤驚. 豈徒到岸扶黃玉, 千
古南倭遏怒鯨.
58) 금관주(金官州):경상남도 김해시를 말한다. 가야의 왕도로서 처음에 가락국(駕
洛國) 또는 가야(伽倻)라고 하고 후에 금관국(金官國)이라 하였는데 신라 법흥
왕 때 신라에 합쳐져 금관군이라고 하였고 문무왕 때 금관소경(金官小京, 『삼국
사기』지리지에는 金海小京)을 두었다가 고려 성종 때 금주(金州)가 되었다.(『高
麗史』권57 地理志 金州) 이처럼 지리지 자료에는 금관주라는 명칭은 없다. 그런
데『삼국유사』가락국기편 세주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 문인(文人)이 지은
것이라고 되어 있어, 일연 당시에 금관주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59) 호계사(虎溪寺):경상남도 김해군에 있던 절. 김해부 중심을 흐르던 호계(虎溪)
근처에 있던 절로 생각된다. (“호계:부성(府城) 복판에 있다. 물의 근원이 분산(盆
山)에서 나오며, 남쪽으로 강창포(江倉浦)에 들어간다. 강창포 부 남쪽 6리 지점에 있
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32 金海都護府 山川)
60) 파사석탑(婆娑石塔):파사는 너울거리는 모양이나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를 말한다. 또 산스크리트어인 vasa를 번역한 말로 쓰였는데, 그 의미는
머문다는 뜻이다.
61) 금관국(金官國):가야 연맹의 초기 중심 국가였던 금관가야. 김해 지방에 있었
다. 532년에 신라에 병합당하였다.
62) 세조(世祖) 수로왕(首露王):가야의 시조 수로왕. 가야 지방에 9간이 사람들을
이끌고 살고 있었는데, 구지봉의 신탕이 있은 후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땅이 드
리워져 내려와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그 끝에서 금합에 든 황금색 알 여섯 개를
얻었다. 다음날 합을 열어 보니 여섯 아이로 변해 있어 공경하다가 보름날 와에
추대하고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수로(首露)라고 이름하고 다른 사람들
도 각기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삼국유사』권2 駕洛國記) 이 기록에
는 서기 42년에 즉위하여 199년에 158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하였다.
63) 허왕후(許皇后):가야 시조 수로왕의 비. 본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성은 허(許)씨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인데 부왕과 모후가 꿈에 상제(上帝)로부
터 하늘이 내려보낸 수로의 배필을 삼게 하라고 하여 배를 타고 와서 가야에 이
르렀다고 한다.(『삼국유사』권2 駕洛國記) 이 기록에 따르면 서기 48년에 가야에
와서 왕비가 된 때가 16세였으며, 189년에 157세로 죽었다고 하였다.
64) 원문의 동한(東漢)은 후한(後漢, 25~219)을 말한다. 한(漢)은 약 400년에 걸쳐 존
속했는데, 전한(서기전 206~서기 8)과 후한 사이에 외척 왕망(王莽)이 잠시 나라
를 세워 나라 이름을 신(新, 서기 8~25)이라 하였다. 전한은 수도가 장안(長安)이
었고, 후한은 낙양(洛陽)이었다. 수도의 위치에 따라 전한은 서한(西漢), 후한은
동한(東漢)이라 한다.
65) 건무(建武):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연호. 25~56년. 신라 유리왕 2~33
년에 해당한다.
66) 서역(西域):넓은 의미로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말하고, 좁은 의미로는 대개 돈
황 서쪽의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북을 돌아 서쪽으로 인도로 가는 지역을 말한
다. 여기서는 인도를 가리킨다. 4-2 주54 참조.
67) 아유타국(阿踰陁國):인도 강가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 Ayodyā)에 비정하기
도 하고, 중국 남부지방으로 보기도 한다.
68) 주포(主浦):김해 남쪽에 있던 포구.(“주포:부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명월산(明月山)에서 나오며,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金海都護府 山川)
69) 허왕후가 금관국에 닿아 수로왕을 만나기 전에 별포 나루터에 배를 매고 육지
로 올라와서 높은 언덕에서 쉬고는 입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폐백 삼아 산신
에게 바치고 수로왕에게 갔다고 하였다.(『삼국유사』 권2 가락국기)
70) 능현(綾峴):김해 남쪽에 있는 고개.(“능현:부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신증동국
여지승람』권32 金海都護府 山川)
71) 이상의 기록은『가락국기』(『삼국유사』권2 기이)와 거의 일치한다. 다만『가락국
기』에는 파도의 신 이야기가 없을 뿐이다.
72) 수로왕이 즉위한 것이 42년이고 왕비를 맞은 것이 48년이다. 왕비가 먼저 189년
에 죽었고, 왕은 199년에 죽었다.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은 142년이 되고, 수로
왕의 재위 연수는 158년이 된다.
73) 원문의 본기(本記)는『가락국기』를 말한다.
74) 여기에서 수로왕대의 허왕후 불교전래 가능성은 자연히 부정된다.『삼국유사』
고기에는 수로왕이 불교를 믿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이는『관불삼매경』에 의
거한 이야기이다.
75) 질지왕(銍知王):가야 제8대왕 재위 450~492년.
76)『삼국유사』권2 가락국기에는 질지왕이 시조모 허황후의 명복을 빌고자 하여
452년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결혼한 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라고 하였다고 한
다. 본문의 글에서 “절을 지었다. 또 왕후사를 창건하였는데”라고 한 것은 하나
의 절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락국기』에는 또 질지왕이 사자를
보내어 절 근방의 평전(平田) 10결을 측량하고 삼보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삼게
했다고 하였다.
77) 왕후사(王后寺):김해 장유산(長遊山)에 있던 가야 때의 절.(“왕후사:옛 터가 장
유산에 있다. 수로왕 8대손 질지왕이, 그때에 장막치고 합혼하던 곳에다가 절을 세우
고 왕후사라 하였는데, 뒤에 절은 파하고 장원으로 만들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金海都護府 古蹟)
78) 아도(阿道):신라 미추왕 또는 눌지왕 때의 인물로 신라불교의 최초 전래자. 아도(阿
度)·아두(阿頭)라고도 한다. 아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아도본비(我道本碑)」
(『삼국유사』권3 阿道基羅)에 의하면, 고구려인인 어머니 고도령(高道寧)과 고구려에
사신으로 온 조위인(曺魏人) 아굴마(我堀摩) 사이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어머니의 권
유로 출가하여 16세에 위나라로 가서 현창화상(玄彰和尙)에게서 공부한 뒤 19세에
귀국하였고 미추왕 2년(263)에 신라로 가서 왕성의 서리(西里)에 머물면서 대궐에 들
어가서 불교를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꺼려하자 일선현(一善縣) 모례(毛禮)의 집에 숨
어 살았다. 264년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들었는데 무당과 의원이 치료를 하였
으나 효험이 없자 아도가 대궐로 들어가 병을 치료하였다. 왕이 소원을 묻자 천경림
에 절을 세워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라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고
창건한 것이 흥륜사(興輪寺)이다. 그곳에서 불법을 강연하였으며, 모례의 누이인 사
씨(史氏)도 출가하여 삼천기에 영흥사(永興寺)를 지었다. 미추왕이 죽자 사람들이 해
치려 하였으므로 다시 모례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든 다음 문을 닫고 들
어가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미추왕 때의 아도 이야기는 후일 신라
불교 수용 이후 생겨난 설화로 보고 있다.『삼국사기』에는 아도가 신라 소지왕 때 시
자 3인을 데리고 일선군 모례의 집에 와서 있다가 몇 년 뒤 병 없이 죽었고, 그의 시자
3인이 경률을 강독하여 가끔 믿는 이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는 묵호자와 이차돈 사이
의 일이다. 그런데 372년에 고구려에 온 순도에 이어 374년에 아도가 고구려에 왔다
고 하고 375년에 그를 위해 이불란사를 지어 주석하게 했다고 한다.(『삼국사기』 권18
소수림왕4년·5년 ;『삼국유사』권3 順道肇麗) 이를 고려하면 여러 시기에 여러 명의 아
도가 고구려와 신라에 있은 셈이 된다. 따라서 아도는 어느 특정인을 가리키는것이
아니라 삭발한 승려의 형상이 아이의 머리(兒頭)와 같은 데서 붙인 승려의 일반 지칭
으로 보기도 한다.
79) 눌지왕(訥祗王):신라 제19대왕. 재위 417~458. 성은 김씨. 아버지는 내물마립간이
고, 어머니는 미추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이며, 비는 실성이사금의 딸이
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최초로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왕호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삼국유사』에서는 마립간이 실제로는 내물왕 때 이미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에 처음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눌지왕은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고자 볼모 정책에 변화를 꾀하였다. 438년 우차법(牛車法)을 제정하였고 455년 고구
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와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어서 백제를 도왔으며, 재위
기간에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선산 지역에서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80) 법흥왕(法興王):신라 제23대 왕. 514~540년 재위. 성 김(金)씨. 이름은 원종(原
宗). 지증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朴氏)이다. 비(妃)는
보도부인(保刀夫人) 박씨. 517년에 병부(兵部)를 설치하여 군사권을 확립하고,
520년에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으며 521
년에 양(梁)나라와 국교를 열었다. 527년에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531
년 상대등 벼슬을 새로 두어 국사(國事)를 총괄하여 맡도록 하였다. 532년에 본
가야(本伽倻:金官國)를 병합하여 금관군(金官郡)을 설치하고 낙동강 유역을 확
보하였으며 536년에 연호를 건원(建元)이라 하였다.
81) 본국본기(本國本記):『가락국기』를 말함.
82) 파사석탑은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수로왕비릉 앞에 남아 있다. 4각형의
지대석 상면에 높직한 굄대가 있어 그 위에 여러 개의 부재(현재는 6석임)를 받
고 있는데, 각 부재의 측면과 하면 등에서 다양한 조각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전체적으로 파손과 마멸이 심하여 원래의 형태를 짐작하기 어렵다. 석재가
붉은 반점이 많은 독특한 재질이다.
83)『본초(本草)』:신농(神農)씨가 지었다고 하는 3권의 책.『신농본초(神農本草)』라
고도 한다. 약재(藥材) 365종을 상·중·하 삼품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양대와
당대에 계속 증보되었고, 명대에 이시진(李時珍)이 총정리하여 1871종을 52권
의 책으로 묶어 『본초강목(本草綱目)』을 펴냈다.
84) 원본의 ‘甲申’은 ‘戊申’의 잘못
고구려의 영탑사
[해제]
고구려 후기의 고승으로 열반학에 뛰어났던 보덕(普德)이 영탑사(靈塔
寺)라는 절을 창건한 이야기이다. 보덕에 관한 기사는 권3 흥법「보장봉로
보덕이암(寶藏奉老普德移庵)」편에 자세하다. 이 기사는 보덕이 고구려에서
활동할 때의 한 상황을 보여준다. 평양성에 살면서 산중의 법회에 초청되
어 열반경을 강론하기도 하고 평양 인근의 산에서 선관(禪觀)을 수행했다
는 것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준다. 영탑사 창건에는 팔각칠층탑이 매
개가 되고 있는데, 이와 같은 탑 외형은 고구려 특유의 형식이다.
[역주]
고구려의 영탑사
승전(僧傳)85)에 이르기를, “보덕(普德)86)스님은 자(字)는 지법(智法)이
고 고구려 용강현(龍岡縣)87)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상세한 것은 아래 본
전88)에 보인다.
항상 평양성(平壤城)89)에 살았는데 산방(山房)90)의 늙은 스님이 와서 경
전을 강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사는 굳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가서
『열반경(涅槃經)』91) 40여 권을 강론하였다. 자리가 파하고 평양성의 서쪽
대보산(大寶山)92)에 가서 바위 굴93) 밑에서 선관(禪觀)을 닦았다. 신인(神
人)이 와서 청하기를, “이곳에서 사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고 지팡이
를 앞에 놓고 땅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밑에 8각 7층 석탑94)이 있습
니다.”라고 하였다. 파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로 인해 절95)을 세워 영탑
사(靈塔寺)라고 하고 그곳에 살았다.
高麗 靈塔寺
僧傳云,“ 釋普德, 字智法, 前高麗龍岡縣人也.” 詳見下本傳.
常居平壤城, 有山方老僧, 來請講經. 師固辭不免, 赴講涅槃經
四十餘卷. 罷席, 至城西大寶山, 穴下禪觀. 有神人來請,“ 宜
住此地.” 乃置錫杖於前, 指其地曰,“ 此下有八面七級石塔.”
掘之果然. 因立精舍, 曰靈塔寺, 以居之.92)
85) 승전(僧傳):본문의 승전(僧傳)이 어느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삼국유사』권3
흥법 보장봉로보덕이암(寶藏奉老普德移庵)에는 보덕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승
전(僧傳)’과 ‘본전(本傳)’에 있다고 하여 여러 종류의 보덕전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도 보덕이 입전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현전『해동고승전』에는 보덕전이 보이지 않는다.
86) 보덕(普德):고구려 보장왕 때의 승려. 고구려 말 열반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집권 후 도교를 진흥하고 불교를 억압하자 백제 영역인 전
주의 고대산(孤大山)으로 망명하였다. 신라의 원효와 의상이 중국에 유학하려
다 보덕에게 열반을 배웠다.(『삼국유사』권3 흥법 寶藏奉老普德移庵 ; 『大覺國師文
集』권17 孤大山景福寺飛來方丈禮普德聖師影, 韓4 559a 참조)
87) 용강현(龍岡縣):『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52 용강현 건치연혁
에 의하면 용강현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에 생긴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보
덕이 용강현인이라 한 것은 고려시대의 지명으로 지칭한 것이어서, 승전이 고
려시대 찬술임을 알게 한다. 용강현은 지금의 평안남도 용강군이다.
88) 아래 본전이란 탑상편 앞에 수록된『삼국유사』권3 흥법편의 보장봉로보덕이암
(寶藏奉老普德移庵)편을 말한다.
89) 평양성(平壤城):평양시 일원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도성(都城). 둘레 약 23㎞.
현재 내성(內城)·북성(北城)·중성(中城)·외성(外城, 羅城) 등 네 개의 성과 문
지(門址)·건물지 등이 남아 있다. 이 성은 대동강이 굴곡을 지어 흐르는 북쪽에
있으며, 고구려시대에 처음 쌓았고 고려 초에 다시 고쳐 쌓았으며, 조선시대에
도 계속 고쳐 현재에 이른다.
90) 산방(山房):원문에는 산방(山方)이라 하였으나 산방(山房)을 말한다.
91)『열반경(涅槃經)』:원래의 이름은『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으로 소승 경전과
대승 경전이 있다. 소승『열반경』은 주로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부처의 입멸
(入滅)을 전후한 행적을 설하였다. 이에 대해 대승『열반경』은 보다 철학적·종
교적인 의미가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는 부처의 최후 설법을 통해 불신(佛身)의
상주(常住), 열반의 의미,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성론(佛性論) 등
을 밝히고 있다. 한역본(漢譯本)으로는 동진(東晉) 법현(法顯)의 『대반니원경(大
般尼洹經)』6권과 북량(北凉) 담무참(曇無讖)의『대반열반경』40권이 있고, 남송
(南宋) 때 혜관(慧觀)·혜엄(慧嚴) 등이 담무참의 번역을 법현의 것과 대조·수정
한『대반열반경』36권이 있는데 이것을 ‘남본’(南本)이라고 한다. 후세의『열반
경』에 대한 연구는 대개 남본을 기초로 했다. 본문에서 ‘40여 권’이라고 한 것은
40권본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92) 대보산(大寶山):평양시에 있는 산. 평양 서쪽 37리에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51 平壤府 山川) 대보산은 중국 남북조 시기의 명승으로 열반에 뛰어났던 영
유(靈裕, 518~605)가 대주성굴(大住聖窟)을 파고 선을 닦았던 것과 연관성이 거
론되기도 한다.
93) 이 바위굴을 주92에서 말한 대주성굴(大住聖窟)과 연관짓는 경우가 있다. 영유
가 조성한 대주성굴은 노사나불·미륵불·아미타불의 3존불과 35불·7불 및 세
존 입적후 전법 성사(世尊去世傳法聖師) 24승상 등으로 구성되었다.
94) 8각 7층 석탑:삼국시대의 탑 중에서 고구려에서만 특히 8각 석탑이 많이 만들
어졌다. 백제나 신라의 경우는 4각탑이 일반적이다. 금강사지(金剛寺址)나 정릉
사(定陵寺)에서 확인되는 탑의 터는 모두 8각 형태를 하고 있다.
95) 원문의 정사(精舍)는 절을 말한다. 정사는 정려(精廬)라고도 하며 지혜와 덕성
을 정련하는 집, 곧 사원을 말한다. 원어로는 여러 가지를 정사로 번역하여, 아
라마( ārāma, 阿藍摩)를 정사로 번역하기도 하고, 상가라마( sam3 ghārāma, 僧伽
藍)를 정사로 번역하기도 한다.
황룡사의 장륙상
[해제]
신라에서 국가적으로 중시하던 신라삼보(新羅三寶)의 첫번째로 꼽히던
황룡사의 장륙존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를 위해 황룡사의 창건과 완공
과정도 소개하고 끝부분에 다른 자료를 들어 황룡사의 역대 주지도 소개
하고 있다. 황룡사가 가섭불이 좌선하던 과거불 시대까지 올라가는 유래가
오랜 사찰임을 표방하듯이 황룡사 장륙상 역시 그러했다. 인도의 아쇼카왕
이 석가삼존상을 조성하기 위해 애썼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하자 인연 있는
곳에 가 닿기를 서원하며 황철과 황금 등을 배에 실어 보냈다. 이 배가 울
주 앞바다에 닿았고, 진흥왕은 그 재료와 모본을 가져다가 단번에 조성해
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쇼카왕 때는 불상이 만들어지기 이전이어서 실제
사실이 아니다. 그렇지만 일연은 아쇼카왕이 불멸 후 1백 년 만에 태어나
불상을 조성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설화를 곁들이고 있다. 조
성 당시의 기록이 잘 전승된 듯 불상에 들어간 구리와 금의 양을 정확하게
제시한 것도 이채롭다. 장륙상에서 눈물이 흘러 진흥왕이 돌아갈 조짐을
보였다는 표현에서는 왕실과 황룡사와의 깊은 연계를 읽을 수 있다. 일연
은 실제 답사를 통해 황룡사의 현상을 확인하고 몽고의 침공으로 절이 불
타고 불상도 녹아버린 사실까지 기록하고 있다.
[역주]
황룡사의 장륙상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96) 즉위 14년(553) 계유년 2월에 대궐97)을
용궁(龍宮)98) 남쪽에 세우려는데 황룡(黃龍)이 그곳에 나타났으므로 고쳐
서 절로 삼아 황룡사(皇龍寺)99)라 하였다.100) 기축년(진흥왕 30, 569)에 이
르러 주위에 담을 둘렀으며, 17년 만에 마쳤다.101)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 남쪽에 큰 배 한척이 와서 하곡현(河曲縣)102) 사
포(絲浦)에 정박하였다.〈지금의 울주(蔚州) 곡포(谷浦)이다.〉조사해보니 첩문(牒
文)103) 이 있었는데 “서천축(西天竺)104)의 아쇼카왕105)이 황철(黃鐵)106) 5
만 7천근과 황금 3만푼〈별전에 철 40만 7천근과 금 1천냥이라고 하였는데 잘못인 듯
하다. 혹은 3만 7천근이라고 하였다〉을 모아서 석가삼존상을 주조하고자 하였는
데 완성하지 못하고 배에 실어서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인연이 있는 나
라에 가서 장륙존의 모습을 이루소서.’ 라고 하고 또 1불 2보살107)상의 모
본도 실었다.”라고 쓰여 있었다.
고을의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 아뢰자 왕명으로 그 고을 성 동쪽에 탁 트
인 밝은 곳108)을 골라 동축사(東竺寺)109)를 창건하고 삼존상을 모셔와 안
치하게 하였다. 금과 철은 서울로 실어 날라서 대건(大建)110) 6년(진흥왕
35, 574) 갑자년 3월[절의 기록에는 계사년(진흥왕 34, 573) 10월 17일이라 하
였다]에 장륙존상(丈六尊像)111)을 주조하였는데, 단번에112) 이루어졌다. 무
게가 3만 5천 7근이고 들어간 황금이 1만 198푼이었다.113) 두 보살상에는
철 1만 2천근과 황금 1만 136푼이 들어갔다. 황룡사에 안치하였는데 다음
해 장륙존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려내려 땅을 한 자나 적셨으니, 왕
이 돌아가실 조짐이었다.114) 혹은 불상이 진평왕(眞平王)115) 때에 조성되
었다고도 하는데 잘못이다.116)
皇龍寺丈六
新羅第二十四眞興王 卽位十四年癸酉二月, 將築紫宮於龍宮
南, 有黃龍現其地, 乃改置爲佛寺, 號皇117)龍寺. 至己丑年, 周
圍墻宇, 至十七年, 方畢.
末幾, 海南有一巨舫 來泊於河曲縣之絲浦〈今蔚州谷浦也.〉 撿看
有牒文云,“ 西竺阿育王, 聚黃鐵五萬七千斤, 黃金三萬分〈傳云,
鐵四十萬七千斤, 金一千兩, 恐誤. 或云, 三萬七千斤.〉, 將鑄釋迦三尊像,
未就, 載舡泛海而祝曰,‘ 願到有緣國土, 成丈六尊容’, 幷載
模樣一佛二菩薩像. 縣吏具狀上聞, 勅使卜其縣之城東爽塏之
地, 創東竺寺, 邀安其三尊.”
輸其金鐵於京師. 以大建六年 甲午三月〈寺中記云, 癸巳十月十七
日〉, 鑄成丈六尊像, 一鼓而就. 重三萬五千七斤, 入黃金一萬
一百九十八分. 二菩薩入鐵一萬二千斤, 黃金一萬一百三十六
分. 安於皇龍寺, 明年像淚流至踵, 沃地一尺, 大王升遐之兆.
或云, 像成在眞平之世者, 謬也.
96) 진흥왕(眞興王):신라 제24대 왕. 재위 540~576. 백제의 땅이었던 한강 유역의
요충지를 획득하고, 백제 성왕을 전사시켰다. 이어 대가야를 평정하고, 창녕에
서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에 이르는 땅을 새로 개척하였다. 4-1 주8) 참조.
97) 원문의 자궁(紫宮)은 자미궁(紫微宮)을 말하는데, 자미(紫微)는 북두칠성의 북
쪽에 있는 별자리로서 천제(天帝)가 거처하는 곳이다. 따라서 천자의 대궐을 의
미한다.
98) 용궁(龍宮):『삼국사기』(권4 진흥왕 14년)에는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했는데 황룡이 그 곳에 나타나 절로 만들어 황룡사라고 하였다 한다. 용궁
과 월성이 같은 것인지 명확하지 않은데, 황룡사가 그 남쪽과 동쪽이라고 다르
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99) 황룡사(皇龍寺):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었던 절로 현재 터가 남아 있다.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이 절은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과
거 7불이 주석했다는 경주 일원의 일곱 사찰의 유적지)의 하나로서 규모나 사격(寺
格)에서 신라 제일의 사찰이며,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서도 그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진흥왕 14년(553)에 새 궁궐을 월성 동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黃龍)
이 나타났으므로 이를 고쳐 황룡사라 하고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 이어
574년에는 장륙상을 완성하고 584년에 금당이 이루어졌으며 645년에 구층목
탑이 세워졌다. 장륙상과 구층탑이 신라 삼보로 꼽힐 만큼 신라불교의 상징이
었다. 중문(中門)·목탑·금당(金堂) 등 주요 건물의 초석과, 금당 뒤쪽으로 강당
자리와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있다.
100)『삼국사기』의 기록과 약간 다르다. “14년 봄2월에 왕이 담당 부서에 명하여 월
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했는데 황룡이 그 곳에 나타났다. 왕이 의아하게
여겨 고쳐서 절로 삼고, 이름을 내려 황룡사라고 하였다.” (『삼국사기』권4 진흥
왕 14년(553) 十四年 春二月, 王命所司, 築新宮於月城東, 黃龍見其地. 王疑之, 改爲佛
寺, 賜號曰皇龍.)
101) 17년만인 569년에 마쳤다는 것은 황룡사의 담장을 두르는 일까지 마쳤다는 것
을 말한다.『삼국사기』에는 566년에 일이 끝났다고 하였다. “27년 황룡사를 짓
는 일이 끝났다.” (『삼국사기』권4 진흥왕 27년(566) 皇龍寺畢功) 그러나 실제 창건
불사는 계속되어 574년에 장륙상, 584년에야 금당이 완성되었다.
102) 하곡현(河曲縣):지금의 울산광역시. 본래 신라의 굴아화촌(屈阿火村)이었는데,
파사왕 때 현을 두었고 경덕왕 때 하곡(河曲) 혹은 하서(河西)라 하였다.(“파사왕
때 굴아화촌(屈阿火村)을 빼앗아 현을 두었으며, 경덕왕이 (하곡(河曲)으로) 이름
을 고쳤다. 지금의 울주(蔚州)이다.”『삼국사기』권34 잡지 3 河曲一作西縣, 婆娑王
時, 取屈阿火村, 置縣, 景德王改名, 今蔚州) 고려 태조 때 흥려부(興麗府)가 되었다
가 뒤에 지울주사(知蔚州事)가 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22 蔚州 建置沿革)
103) 첩문(牒文):공문서의 일종으로 하급 관사에서 상급 관사로 보고하는 문서.
104) 서천축(西天竺):인도를 동·서·남·북·중의 다섯 지역으로 나누어 오천축이라
한다. 서천축은 서부 인도를 말한다. 서천축의 아쇼카왕이라 하였는데, 아쇼카
왕은 동인도에 속하는 마가다국을 중심으로 전 인도를 통일한 왕이어서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
105) 아쇼카왕 Aśoka왕.:아육왕(阿育王)이라 음역하고 무우왕(無憂王)이라 의역한
다. 서기전 268~232년경 재위.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왕.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를 보호한 왕. 즉위 초에는 폭정을 일삼았으나 영역을 크게 넓히고 불교에
귀의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진리를 애호하고 박애정신을 가진 이로써 인도 역
사에서 번영의 시대를 연 왕이다. 불교계의 전승에는 왕의 재위 기간에 전국에
8만 4천 개의 절과 탑을 세웠고 제3차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통치 영역 내
는 물론 외국에까지 불법을 전도하였으며, 불적지 곳곳에 마애법칙을 새긴 석
주(Aśoka’s pillar)를 세우고 바위에 새겨 정법(正法)을 선포하였다. 그중 일부는
지금도 남아 있어 불교 유적의 명확한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석주에는 특별 사
면을 행하고 살생을 금하며 보시를 행하고 길 옆에는 나무를 심고 우물을 파는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 때문에 불교계에서는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한 전
륜성왕(轉輪聖王)으로 추앙되었다.
106) 황철(黃鐵):니켈로 이루어진 광물로 누런 빛의 금속성 광택이 나고 불투명하
다. 여기에서는 구리를 말한다.
107) 보살: bodhi-sattva. 보리살타(菩提薩陀)로 음역하고, 줄여서 보살(菩薩)이라
하며 개사(開士) 등 여러 표현으로 한역한다. bodhi는 부처님의 지혜라는 의
미를 지니고 있으며, sattva는 생명 있는 존재인 유정(有情)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유래하여 보살은 위로는 지혜로써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자
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以智上求無上菩提, 以悲下化衆生] 유정으로 정의한다.
이를 도중생(度衆生), 각유정(覺有情) 등으로 번역한다. 성문(聲聞)·연각(緣覺)
과 함께 삼승의 하나이다. 보살은 여섯 가지 바라밀(波羅蜜)을 수행하여 미래에
불과를 성취하는 수행자이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원만하게 갖추어 용맹
하게 깨달음을 구하는 대승의 이상적인 수행자이다. 대승불전에서 각 부처마다
그의 교화를 돕는 2인의 보살을 묶어 1불2보살을 구성하고, 조형적으로 이런 불
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여기서도 이 불보살상의 구성을 말한다.
108) 상개(爽塏):앞이 탁 틔어 밝은 땅. 고조(高燥), 높고 메마른 데란 말이니 높고 깨
끗하다는 뜻이다.
109) 동축사(東竺寺):경남 울산시 동부동 마골산 정상에 위치. 진흥왕 34년 창건. 왼
편에 미포(尾浦), 오른편에 염포(鹽浦)가 내려다 보인다.
110) 대건(大建):남조(南朝) 진(陳) 선제(宣帝) 때의 연호. 569~581년. 신라 진흥왕
30~진평왕3년.
111) 장륙존상(丈六尊像):1장 6척(一丈六尺)의 불상. 부처의 등신상(等身像)의 크기
이다. 여러 경전에 의거하면, 부처시대에 보통 사람의 키는 약 8척이었는데 부
처는 그 두 배였으므로 장륙(丈六)이라고 하였다. 보통 입상(立像)은 1장 6척의
장륙상으로, 좌상(坐像)은 8척으로 만든다.
112) 원문의 일고(一鼓)는 진군할 때 처음에 북을 한 번 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는 ‘단번에’ 라는 뜻으로 쓰였다.
113) 『삼국사기』의 기록과 동일하다. “35년 봄 3월에 황룡사의 장륙상을 주조하여 이
루었는데, 구리 무게가 3만 5천 7근이고, 도금한 무게는 1만 1백 98푼이었다.”
(『삼국사기』권4 진흥왕 35년 三十五年 春三月, 鑄成皇龍寺丈六像. 銅重三萬五千七
斤, 鍍金重一萬一百九十八分.)
114) “36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는데 황룡사 장륙상에서 눈물이 나와 발꿈치까지 흘렀
다.” (『삼국사기』권4 진흥왕 36년(575) 三十六年 春夏旱, 皇龍寺丈六像 出淚至踵.)
115) 진평왕(眞平王):신라 제26대 왕. 재위 579~632년. 휘 백정(白淨). 진흥왕(眞興
王)의 손자이며 동륜(銅輪)태자의 아들. 숙부 진지왕이 화백회의에서 폐위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54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의 재위로 대내외적인 안정
을 이루었다. 초기에 위화부(位和府)·선부서(船府署)·조부(調府)·승부(乘府)·
예부(禮部) 등의 핵심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 관서를 설치하여 관청 체계를
조직화하고 부서간의 분업체제를 확립하고 말기에는 왕궁 업무를 맡는 내성(內
省)을 두고 관원을 증원하는 등 지속적인 제도 정비를 통해 독자적인 왕권을 확
립하였다. 즉위 6년(584)에 건복(建福)으로 개원(改元)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시
용함으로써 대외적인 자주성을 과시하고 통일왕조 수와 당과 빈번한 외교관계
를 수립하고 원광(圓光)·담육(曇育) 등의 명승을 중국에 보내어 수학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문물을 수용하였다. 진흥왕대의 영역 확장 이후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잘 막아냈다. 딸인 선덕왕(善德
王)이 왕위를 계승하여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116) 이곳 본문과『삼국사기』에서는 진흥왕 35년(574)에 장륙존상이 완성되었다고
하였는데, 일연은 이 부분에서는 진흥왕 다음의 진평왕 때 조성되었다는 견해
를 소개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오늘날 불상 양식으로 볼 때 아
육왕상 양식이라고 부르는 불상이 조성되는 시기가 7세기 중반부터 라는 점을
들어 조성 시기를 늦추어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신라의 보물로 불리던 황룡
사장륙상의 조성을 절 창건 백년 이후로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는 황룡사
장륙상을 아쇼카왕의 연기에 연결시켜 미화하려는 데서 나온 설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117) 원본에는 ‘黃’이나 신라의 금석문 등 모든 관계 자료에는 ‘皇’이라고 나온다.
다른 본에 이르기를, “아쇼카왕은 서천축 대향화국(大香華國)118)에서
부처가 세상을 떠난 후 100년 만에 태어나 부처의 진신에 공양할 수 없음을
한탄하여, 금과 철을 몇 근 모아서 세 번이나 불상을 조성하였으나 성공하
지 못하였다. 그 때 왕의 태자만이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왕이 그 까
닭을 물었더니 태자가 아뢰기를, ‘혼자 힘으로는 이루지 못하는 것이니 벌
써 안 될 줄 알고 있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그렇다고 여겨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다. 남염부제(南閻浮提)119)의 열여섯 개의 대국(大國)과 오백
개의 중국(中國)과 일만 개의 소국(小國)과 팔만 개의 취락(聚落)120)을 두루
돌아다니지 않은 데가 없었는데 모두 주조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마지막으
로 신라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주조하여 불상을 완성하
니 상호(相好)121)가 모두 갖추어졌다. 아쇼카를 번역하여 무우(無憂)라고
한다. 나중에 대덕 자장(慈藏)122)이 중국에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123)에
이르러 문수(文殊)보살이 현신(現身)으로 감응하여 비결을 주며 부탁하기
를, ‘그대의 나라의 황룡사는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하던 곳으로 앉아 수
행하던 돌이 아직도 있다. 그 때문에 인도의 무우왕(無憂王, 阿育王)이 구
리 약간 근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천 3백여 년을 지난 후에 그대의 나라
에 이르러 (불상을) 완성하여 그 절에 모신 것이니, 대개 위덕(威德)의 인연
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별기(別記)의 기록과 부합된다.〉
불상이 완성된 후에 동축사의 삼존상도 황룡사로 옮겨 모셨다.
절의 기록에 이르기를, “진평왕(眞平王)124) 6년(584) 갑진년에 금당(金
堂)이 조성되었으며, 선덕왕(善德王)125)대에 절의 초대 주지는 진골(眞
骨)126) 환희(歡喜) 스님이며, 제2대 주지는 자장(慈藏) 국통(國統)127)이며,
다음은 국통 혜훈(惠訓)이며, 다음은 상률(廂律) 스님이다.128)” 라고 하였
다. 이번 전쟁의 화재129)가 있은 후 장륙존상과 두 보살상이 모두 녹아버렸
고 작은 석가상만이 아직 남아 있다.
찬한다.
티끌세상 어딘들 참 고향 아니랴만,
향화의 인연은 우리나라가 으뜸이라.
아쇼카왕이 손대기 어려웠음이 아니요,
월성의 옛터를 찾아왔을 뿐이라.
別本云, “阿育王在西竺大香華國, 生佛後一百年間, 恨不得供
養眞身, 化金鐵若干斤, 三度鑄成無功. 時王之太子獨不預斯
事, 王使詰之, 太子奏云,‘ 獨力非功, 會知不就.’ 王然之, 乃
載舡泛海. 南閻浮提十六大國 五百中國 十千小國 八萬聚落,
靡不周旋, 皆鑄不成, 最後到新羅國. 眞興王鑄之於文仍林, 像
成, 相好畢備. 阿育 此翻無憂. 後大德慈藏西學, 到五臺山,
感文殊現身授訣. 仍囑云,“ 汝國皇龍寺, 乃釋迦與迦葉佛 講
演之地, 宴坐石猶在, 故天竺無憂王, 聚黃鐵若干斤 泛海 歷
一千三百餘年. 然後乃到而國, 成安其寺, 蓋威緣使然也.” 〈與
別記所載不同〉. 像成後, 東竺寺三尊 亦移安寺中.
寺記云, 眞平六年甲辰, 金堂造成, 善德王代, 寺初主眞骨歡喜
師, 第二主慈藏國統, 次國統惠訓, 次廂律師云. 今兵火已來,
大像與二菩薩皆融沒, 而小釋迦猶存焉.
讚曰 塵方何處匪眞鄕, 香火因緣最我邦, 不是育王難下手, 月
城來訪舊行藏
118) 대향화국(大香華國):고대 인도의 대국이었던 마가다국( Magadha, 摩揭陀國)
의 별칭. 강가강 남쪽에 있는 성의 왕궁에 꽃이 많았기 때문에 쿠스마푸라성
(Kusumapura, 拘蘇摩補羅城)이라 한 것을 번역하여 향화궁성(香花宮城)이라 불
렀다.(『대당서역기』권8) 마가다국의 왕성은 후에 파탈리푸트라성( Pataliputra,
波吒釐子城)으로 이름을 고쳤다.
119) 남염부제(南閻浮提):남염부주(南閻浮洲). 염부제는 Jambu-dvīpa의 음역어.
수미산의 남쪽에 있는 대륙. 섬부제주(贍部提洲)·염부제비바주(閻浮提鞞波
洲)·예주(穢洲)·예수주(穢樹洲) 등으로도 쓴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인간 세상
을 동·서·남·북의 넷으로 나눌 때 남쪽의 땅을 말한다. 여기에 16 대국, 500 중
국, 10만 소국이 있다고 하며, 부처가 출현하는 것은 오직 이 남염부제뿐이라 한
다. 원래 인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후에 인간 세계를 말하게 되었다.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흔히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도 한다.
120) 열여섯, 오백, 일만, 팔만은 경전에 나오는 염부제에 있는 나라를 총칭하는 말이다.
121) 상호(相好):부처님의 32상(相)과 80호종(種好)의 모습을 말한다. 부처의 육신
이 갖추고 있는 특수한 용모 중에서 크게 드러나 있어 쉽게 알 수 있는 모습을
32상이라 하고, 미세한 것이어서 알아보기 어려운 것을 80종호 또는 80수형호
(隨形好)라 한다. 이 둘을 합쳐 상호라 부른다. 부처가 과거 백 대겁 동안의 오랜
기간에 수행하면서 좋은 일을 하였기에 금생에 32상 80종호를 성취하였다고 한
다. 불교의 이상적인 군주인 전륜성왕도 32상은 갖추지만 80종호는 불보살만이
갖출 수 있다고 한다.
122) 자장(慈藏):신라시대의 승려. 성은 김씨. 속명은 선종랑(善宗郎). 진골 무림(茂
林)의 아들이다. 638년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오대산(五臺山)을 순례하고
문수보살의 진신을 감응하여 가사와 사리를 받았다. 이어 종남산(終南山) 운제
사(雲際寺)에서 수행하고 도선(道宣)과 교유하였으며 643년 대장경과 여러 불
구(佛具)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분황사 주지로 있으면서 궁중과 황룡사에서 『섭
대승론』 『보살계본』등을 강론하고 대국통(大國統)의 직책을 맡아 승니(僧尼)의
규범과 승통(僧統)을 통괄하여 계율의 엄정한 준수와 실천 그리고 지방 사찰의
검열과 장엄 법식의 제도화 등을 추진하였다. 황룡사 구층탑의 창건을 건의하
여 645년에 완성하고,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하고 진신사리를 봉안하며 금강계
단(金剛戒壇)을 세웠다. 649년에는 왕에게 상주하여 중국의 제도를 따라 신라에
서 처음으로 관복을 입게 했으며,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만년에
는 서울을 떠나 강릉(江陵)에 수다사(水多寺)를 짓고, 뒤에 태백산에 석남원(石
南院, 지금의 淨岩寺)를 세웠다. 후대에 율종의 종조로 추앙되었다.
123) 오대산(五臺山):중국 산서성(山西省) 태원시(太原市) 오대현(五臺縣)에 있는 오
대산을 말한다.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가 높이 솟았는데 뾰족하지 않고 평평하
여 오대라고 이름하였고, 높고 서늘하여 청량산이라고 불렀는데,『화엄경』보살
주처품(菩薩住處品)에 동북방에 청량산(淸涼山)이 있고 여기에 문수보살이 상
주한다고 한 구절에 따라 문수보살이 거처하는 성지로 신앙되었다. 중국 불교
사상 사대영산(四大靈山)의 하나이다. 오대 중에서도 가장 높은 북대가 가장 손
꼽히는 기도처이다. 후한 때부터 산악숭배신앙의 성지로 여겨졌으며, 북위 때
이후 불교 성지로서 이름을 떨쳐 화엄경을 연구하는 이들이 오대산에 들어가
수행하였다. 8세기 후반에 불공(不空)이 금각사를 창건하여 오대산을 밀교의 성
지로 다듬었고, 이어 화엄종의 징관(澄觀)이 대화엄사에서 활동하며 오대산을
화엄성지로 재확인하였으며 이후 청대에 이르기까지 열렬한 신앙의 중심지가
되니 한국과 일본의 승려들도 순례가 이어졌다.
124) 진평왕(眞平王):신라 제26대 왕. 재위 579~632년. 54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의
재위로 대내외적인 안정을 이루었다. 원광(圓光)·담육(曇育) 등의 명승을 중
국에 보내어 수학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문물을 수용하였다. 4-5 주
115) 참조.
125) 선덕왕(善德王):신라 제27대 왕. 재위 632~647년. 성 김(金)씨, 이름은 덕만(德
曼). 진평왕(眞平王)의 맏딸로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 진평왕이 후
사가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추대되어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634년(선덕왕 3)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고치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였고,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구휼사업에 힘쓰는 등 선정을 펴기 위해
노력하고 백제와 고구려의 계속되는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당나라의 문물을 수
용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첨성대를 쌓고 자장의 건의에 따라 황룡
사 구층탑을 건립하였다. 김춘추와 김유신 등의 협력으로 통치를 수행하였으나
비담과 염종 등 구귀족의 반란 와중에 죽었다.
126) 진골(眞骨):신라 귀족의 첫째가는 신분. 신라에서는 귀족을 처음에는 성골에서
1두품에 이르는 8 등급으로 구분하다가 진골·육두품(六頭品)·오두품·사두품
등으로 구분하였다. 이는 태어난 혈통에 따라 그 신분을 구분하고 정치 사회적
활동에 제한을 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는 관직, 사는 집의 크기, 장신구의 종류
등 여러 분야에 제한을 두었다. 진골은 왕족인 김씨와 전왕족, 왕비족 등이 속했
으며 행정 부서의 장관직과 17관등체계에서 5등급 이상의 최고 관등에 오를 수
있었다.
127) 국통(國統):신라시대의 최고 승관직. 일명 승통(僧統) 또는 사주(寺主)라고도
하였다. 국통의 직은 진흥왕 12년(551)에 고구려에서 망명해온 혜량(惠亮)을 임
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국통 밑에는 대도유나(大都維那)와 대서성(大書省) 등
의 승관이 있어 국통을 보조하여 승정을 집행하였으며, 각 주의 승정을 맡았던
주통과 군통 등도 국통의 지시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128) 선덕왕대에는 진골출신이 황룡사 사주가 되었으며, 황룡사 사주가 신라 불교교
단의 수장인 국통을 겸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29) 이번 전쟁이란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 병란으로 황룡사가 화재를 입은 것
을 말한다.
황룡사의 구층탑
[해제]
황룡사 장륙상과 함께 신라 삼보의 하나인 황룡사 구층탑에 대한 이야기
이다.「자장전」을 중심으로 사중 기록을 보충하여 구성하였다. 자장이 중
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감응을 받고 신인(神人)을 만나 구층탑을
세우고 팔관회를 베풀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왕실이 평안하며 외적이 해
치지 못할 것이라는 부촉을 받아 신라에 돌아와 탑의 조성을 건의하고 백
제의 공장을 초청하여 만들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탑의 찰주기(刹柱
記)를 인용하여 규모를 기록하고, 구층탑의 조성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하였음을 말하였다. 아울러 고구려가 심라를 침공하려다 신라에 황룡사 장
륙상과 구층탑과 천사옥대의 삼보가 있음을 알고 침공을 중지했다고 하였
다. 또 『동도성립기』나 『삼국사기』 등을 인용하여 황룡사탑의 창건에 관련
된 연유를 보완하여 제시하고 황룡사탑이 창건 이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
지를 벼락으로 입은 피해를 보수한 내용을 중심으로 고려시대에 이르기까
지 기록하고 마지막 몽고의 침공으로 불탄 사실까지 밝혔다. 국가적 노력
을 들여 만든 거대한 구조물이 뜻깊은 연유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며, 그렇
기 때문에 불력(佛力)이 깃든 이들 불상과 탑과 같은 장엄물, 곧 불법이 신
라를 보호해 주었음을 말하고자 한 이야기이다.
[역주]
황룡사의 구층탑
신라 제27대 선덕왕(善德王)130)이 즉위하여 5년인 정관(貞觀)131) 10년
(636) 병신년에 자장(慈藏)132) 법사가 중국에 유학가서133), 오대산(五臺
山)134)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135)에 감응하여 법을 받았다.〈자세한 것은 본
전(本傳)136)에 보인다.〉문수보살이 또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 국왕은 인도의
크샤트리아 종족의137) 왕으로서 이미 부처로부터 수기(授記)138)를 받았으
므로, 특별한 인연이 있어 동이(東夷)139)나 공공(共工)140)의 오랑캐족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해서 사람들의 성품이 거칠고 어그러져서 삿
된 견해를 많이 믿어 때때로 천신(天神)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라에 다문(多聞)141)비구가 있기 때문에 군신들이 편안하고 백성들이 화
평한 것이다.”라 하고는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자장은 이가 대성(大
聖)의 변화임을 알고 피눈물을 흘리며 물러났다.
중국의 태화지(太和池)142) 가를 지나는데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와
서 묻기를, “어찌하여 여기에 왔는가?” 하였다. 자장이 답하기를, “보리(菩
提)143)를 구하고자 왔습니다.” 하였다. 신인이 예배하며 다시 묻기를, “그
대의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 하였다. 자장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는 북으로 말갈(靺鞨)과 남으로 왜인(倭人)과 인접하였고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여, 이웃의 노략질이 횡횡하니 이것이 백
성들의 근심입니다.” 하였다. 신인이 이르기를,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
가 왕이 되어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가 노리는 것이
다.144) 마땅히 빨리 신라로 돌아가라.” 라고 하였다. 자장은 “고향에 돌아
가면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신이 말하기를, “황룡사(皇龍
寺)의 호법룡(護法龍)은 나의 맏아들로 범왕(梵王)145)의 명령을 받아 가서
그 절을 지키고 있다. 신라에 돌아가서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146)이 와서 조공하며 왕실이 영원히 편안할 것이다.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147)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해
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서울 근처148) 남쪽 해안에 절
한 채를 만들어 나의 복을 빌어준다면 나 또한 은덕을 갚을 것이다.” 하고는
말을 마치고 옥을 바치고는 갑자기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절의 기록149)에
이르기를 종남산(終南山)150) 원향선사(圓香禪師)의 처소에서 탑을 세울 까닭을 받았다고
한다.〉
정관(貞觀)151) 17년(643) 계묘년 3월152) 16일에 당나라 황제153)가 내려준
불경·불상·가사·예물을 가지고 귀국하여, 탑을 세울 일을 왕에게 아뢰었
다. 선덕왕이 신하들에게 문의하니 신하들이 아뢰기를, “백제에 장인을 청
한 후에야 가능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으므로 보물과 비단으로 백제에 청
하였다. 장인은 아비지(阿非知)154)라고 하는데 왕명을 받고 와서 나무와 돌
을 다루었다. 이찬(伊湌)155) 용춘(龍春)156)〈용수(龍樹)라고도 한다〉이 일을 주
관하였는데157) 소장인(小匠人) 200인을 거느렸다. 처음 찰주(刹柱)158)를 세
우는 날에 아비지는 꿈에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의
심이 생겨 일손을 멈추었더니, 갑자기 땅이 크게 흔들리며 어둠 속에서 한
노승과 한 장사(壯士)가 금당의 문에서 나와 찰주를 세우고는 승려와 장사
모두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았다. 아비지는 이에 뉘우치고 그 탑을 완성하
였다.
皇龍寺九層塔
新羅第二十七善德王卽位五年, 貞觀十年丙申, 慈藏法師西學,
乃於五臺感文殊授法〈詳見本傳〉. 文殊又云, 汝國王是天竺刹利
種王, 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然以山川崎
嶮, 故人性麤悖, 多信邪見, 而時或天神降禍. 然有多聞比丘,
在於國中, 是以君臣安泰, 萬庶和平矣. 言已不現. 藏知是大聖
變化, 泣血而退.
經由中國太和池邊, 忽有神人出問, “胡爲至此?” 藏答曰, “求
菩提故.” 神人禮拜, 又問, “汝國有何留難?” 藏曰, “我國北連
靺鞨, 南接倭人, 麗濟二國, 迭犯封陲, 隣寇縱橫, 是爲民梗.”
神人云,“ 今汝國以女爲王, 有德而無威, 故隣國謀之, 宜速歸
本國.” 藏問,“ 歸鄕, 將何爲利益乎?” 神曰,“ 皇龍寺護法龍,
是吾長子, 受梵王之命, 來護是寺. 歸本國, 成九層塔於寺中,
隣國降伏, 九韓來貢, 王祚永安矣. 建塔之後, 設八關會, 赦罪
人, 則外賊不能爲害. 更爲我於京畿南岸, 置一精廬, 共資予
福, 予亦報之德矣.” 言已, 遂奉玉而獻之, 忽隱不現〈寺中記云,
於終南山圓香禪師處, 受建塔因由〉.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 將唐帝所賜經像袈裟幣帛而還國, 以
建塔之事聞於上. 善德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 乃以寶帛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來, 經營
木石, 伊干龍春〈一作龍樹〉幹蠱, 率小匠二百人.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滅亡之狀, 匠乃心疑停手, 忽大地震動, 晦冥之
中, 有一老僧一壯士, 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 皆隱
不現. 匠於是改悔, 畢成其塔.
130) 선덕왕(善德王):신라 제27대 왕. 재위 632~647년. 634년에 분황사(芬皇寺)를 창
건하였고,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첨성대를 쌓고 자장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였다. 4-5 주125) 참조.
131) 정관(貞觀):당(唐)태종 때의 연호. 627~649년. 진평왕49~진덕왕3년.
132) 자장(慈藏):신라시대의 승려. 636년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오대산의 문
수보살을 만나보고 가사(袈裟)와 사리를 받았다.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
寺)에서 도를 닦고 화엄종의 두순(杜順)과 계율종(戒律宗)의 도선(道宣)에게 배
운 뒤, 643년 장경(藏經) 1부와 불구(佛具)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대국통(大國統)
이 되어 승니(僧尼)의 규범과 승통(僧統)을 통괄하였고, 황룡사 9층탑 창건을 건
의, 645년에 완성하였다. 4-5 주122) 참조.
133) 자장의 유학 시기를 636년으로 보는 견해는『삼국사기』에서 비롯한다. 이는 선
덕왕 인평(仁平) 5년을 선덕왕 즉위 5년과 동일시한 데 따른 착오로 보인다. 가
장 확실한 신라 당시 자료인「황룡사구층목탑찰주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記)」와
『속고승전(續高僧傳)』 권24 자장전 등에 638년에 입당하였다고 한 기록이 확실
하다.
134) 오대산(五臺山):중국 산서성(山西省) 태원시(太原市) 오대현(五臺縣)에 있는 오
대산. 청량산이라고 한다. 중국 불교사상 사대영산(四大靈山)의 하나이다. 8세
기 후반에 불공(不空)이 금각사를 창건하여 오대산을 밀교의 성지로 다듬었고,
이어 화엄종의 징관(澄觀)이 대화엄사에서 활동하며 오대산을 화엄성지로 재확
인하였다. 4-5 주123) 참조.
135) 문수보살(文殊菩薩): Mañjuśrī. 문수사리(文殊師利) 또는 만수실리(曼殊室利)
로 음역하며, 묘덕(妙德), 묘길상(妙吉祥)으로 의역한다. 보현보살(普賢菩薩)과
함께 석가여래(釋迦如來)의 협시보살로서 지혜(智慧)를 담당하여 오른손에 지
검(智劍), 왼손에 청연화(靑蓮華)를 가지고 사자(獅子)를 타고 있는 것으로 묘사
되는 경우가 많다. 부처와 같이 32상(相) 80종호(種好)의 덕상(德相)을 갖추었다
고도 하며(『문수반니원경(文殊般泥洹經)』), 동자(童子)로 지칭되어(『화엄경(華嚴
經)』입법계품(入法界品)) 문수를 동자상(童子像)으로 조성 봉안하는 경우도 많
다. 문수보살이 오대산에 거주한다는 것은『화엄경』 에 나온다.(60화엄 권29 菩
薩住處品. 大9 p.590a03~05. 東北方有菩薩住處, 名清涼山, 過去諸菩薩常於中住. 彼現
有菩薩, 名文殊師利, 有一萬菩薩眷屬, 常為說法.)
136) 본전(本傳):『삼국유사』권4 자장정율(慈藏定律)편을 말한다.
137) 원문의 찰리(刹利)는 ks3 atriya의 음역어인 찰제리(刹帝利)의 약어이다. 원래는
토지의 주인이라는 의미로서, 인도 고대의 사성제도(四姓制度) 가운데 두 번째
계급으로 정치와 군사를 담당하던 왕족과 무사층을 지칭한다. 여기서는 카필라
성의 왕족이었던 석가모니족을 뜻한다. 선덕왕의 부왕인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
(白淨), 어머니는 마야(摩耶)부인으로 그 사이에서 출생한 선덕왕이 석가족 왕
족이라는 의미이다. 진평왕의 아우들도 정반왕의 아우들과 이름이 같다.
138) 수기(授記): vyākarana. 수결(授決)·기별(記別)·기별(記莂)이라고도 한다. 본
래 경전을 12가지로 구분할 때 교설을 분석하거나 문답 등의 방식으로 교리를
해설하는 것을 말하였는데, 의미가 바뀌어 제자에게 깨달은 것이나 다음 세상
에서 태어날 곳을 알려준다는 뜻으로 쓰였다. 후대에는 미래세의 깨달은 과보
와 성불한 명호(名號)를 미리 알려주는 의미로만 사용되었다.
139) 동이(東夷):중국이 옛부터 주변 국가를 인식하는 관점이 자신들만이 중화(中
華)이고 나머지는 모두 오랑캐라고 생각하여 동쪽은 이(夷), 서쪽은 융(戎), 남
쪽은 만(蠻), 북쪽은 적(狄)이라는 말로 불렀다.
140) 공공(共工):중국 요순시대 사흉(四凶)이라 했던 공공(共工), 단주(丹朱), 곤(鯤),
삼묘(三苗)의 하나.
141) 다문비구(多聞比丘):경전과 교설을 많이 듣고 익혀 공부하는 비구. 비구를 두
종류로 나누어 말할 때 경전을 즐겨 외우고 널리 기록을 찾아 힘쓰지만 수행은
병행하지 않는 비구를 다문비구라 하고, 경전과 교학에는 능통하지 못하지만
전심으로 수행에 열중하는 비구를 과천(寡淺)비구라 한다. 석가의 십대제자 중
에서는 석가의 설법 기간 중 후반 동안 항상 시봉하였던 아난존자를 다문 제일
제자로 꼽는다.
142) 태화지(太和池):자장이 구층탑 건립의 기별을 받았다는 못으로 중국 오대산 중
대에 위치한 옥화지(玉花池)로 추정하기도 한다.
143) 보리(菩提): bodhi의 음역어. 깨달음(覺)·지혜(智)·앎(知)·도(道) 등의 의미
이다. 세간의 번뇌를 끊고 열반의 지혜를 얻는 것을 말한다. 부처·연각·성문이
각각 얻은 깨달음의 지혜를 말하는데, 이 세 가지 종류의 보리 중에서 부처의 보
리는 위 없고 끝이 없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하며,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등으로 한역한다.
144)『삼국사기』에는 당나라 황제가 여왕의 무력함을 지적한 말이 실려 있다. (『삼국
사기』권5, 선덕왕 12년 帝曰,爾國以婦人爲主, 爲鄰國輕侮, 失主迎寇, 靡歲休寧. 我
遣一宗支, 與爲爾國主, 而自不可獨王, 當遣兵營護, 待爾國安, 任爾自守, 此爲三策.)
145) 범왕(梵王):범천왕(梵天王). 범어 Brahma의 음역. 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천주(天主)로 제석천(帝釋天)과 함께 부처를 좌우에서 모시는 불법 수호의 신이다.
146) 구한(九韓):구이(九夷). 즉 9개 다른 나라를 말한다.
147) 팔관회(八關會):불교의식의 하나로서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팔계(八戒) 곧 생
명 있는 것을 죽이지 않고[不殺生], 남이 주지 않은 것을 훔치지 않고[不偸盜],
음행하지 않고[不邪淫], 거짓말하지 않고[不妄語], 술을 마시지 않고[不飮酒], 꽃
다발로 자신을 꾸미지 않고[不以華鬘裝飾自身], 노래하고 춤추지 않고[不歌舞觀
聽], 높고 화려한 자리에 앉거나 눕지 않고[不坐臥高廣華麗床座], 때가 아닌 때
먹지 않는[不非時食] 것을 지키는 의식. 중국 남북조 이전부터 팔관회 의식이 있
었으며, 당대에 들어와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도입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고유의 습속 및 신앙과 합친 형태로 이루어졌다.
148) 원문에 경기(京畿)라 하였는데, 서울을 중심으로 한 가까운 주위의 땅을 말한다.
149) ‘절의 기록(寺中記)’에 나오는 내용이「황룡사구층목탑찰주기」에 있어 이 찰주
기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이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만든 절의 기록일 수도
있다. “왕 12년 계묘에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남산의 원향선사(圓香禪師)
에게 인사하자, 선사가 말하기를 ‘내가 관심(觀心)으로 공의 나라를 보니 황룡
사에 구층탑을 지으면 해동의 모든 나라가 그대의 나라에 항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권3, p.367)「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王之十二年
癸卯歲, 欲歸本國, 頂辭南山圓香禪師. 禪師謂曰, 吾以觀心, 觀公之國, 皇龍寺建九層
窣都波, 海東諸國, 渾降汝國.
150) 종남산(終南山):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서안(西安) 곧 예전 장안(長安)의 남쪽
40km 거리에 있는 높이 2604m의 산으로 남산(南山)이라고도 한다. 진령산맥
이 동서로 달리는 중에 있으며 일대의 취화산(翠華山), 남오대(南五臺), 규봉산
(圭峰山), 여산(驪山) 등을 모두 포괄하여 말한다. 당대 불교의 중심지로 도선(道
宣), 지엄(智儼), 종밀(宗密) 등 수많은 고승들이 수행하였고 많은 사원이 있어
계율종, 화엄종, 법상종, 정토종, 선종 등이 성행했던 수당대 중국불교의 중심지
였으나 지금은 유적만 남아 있는 곳이 많다.
151) 정관(貞觀):당(唐) 태종(太宗) 때의 연호. 627~649년. 진평왕49~진덕왕3년.
152) 원문에는 3월이 없이 바로 날짜만 있는데,『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왕 12년 3
월에 자장이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153) 당(唐) 황제를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태종(太宗, 재위 627~649)을 말한다.
154) 아비지(阿非知):황룡사구층탑을 건립한 백제의 건축 기술자.「황룡사구층목탑
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에는 아비(阿非)라고 하였다.
155) 이찬(伊湌):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위. 이간(伊干)이라고도 한다.
156) 용춘(龍春):신라 태종(太宗)의 아버지.
157) 원문의 간고(幹蠱)는 아버지의 일을 아들이 이루어낸다는 뜻으로, 일을 잘 처리
하는 역량을 말한다.
158) 찰주(刹柱):탑의 중심 기둥. 목탑을 세울 때 기단 중심의 심초석(心礎石) 위에
세워 탑의 중심을 유지하게 하는 중심기둥이다.
찰주기(刹柱記)159)에 이르기를, “철반(鐵盤)160) 위의 높이는 42자이고 그
아래는 183자이다.”라고 하였다.161) 자장은 오대산에서 받은 사리 백과를
찰주 안과 통도사(通度寺)162) 계단(戒壇)과 태화사(太和寺)163) 탑에 나누어
봉안하여 태화지(太和池) 용의 요청에 부응하였다.〈태화사(太和寺)는 아곡현(阿
曲縣) 남쪽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蔚州)이며 역시 자장법사가 창건한 곳이다.〉
탑을 세운 후에 천지가 태평하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
한 도움이 아니겠는가.
뒤에 고구려왕이 신라를 정벌하고자 하였는데 (누군가) 아뢰기를, “신라
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무
엇을 말하는가?” 하였더니,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구층탑과 진평왕(眞平
王)164)의 천사옥대(天賜玉帶)165)입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계획을 중지하
였다. 주(周) 나라에 구정(九鼎)166)이 있어서 초(楚)나라167) 사람들이 감히
북쪽을 엿보지 못하였다고 한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찬한다.
귀신들이 삼가 도와서 서울을 진압하니,
눈부신 단청에 나는 듯한 기와로다.
높이 올라 굽어보니 어찌 구한만 항복하리오,
천지가 특별히 태평함을 비로소 알겠네.
刹柱記云,“ 鐵盤已上高四十二尺 已下一百八十三尺.” 慈藏以
五臺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 幷通度寺戒壇 及大和寺塔,
以副池龍之請.〈太和寺在阿曲縣南, 今蔚州, 亦藏師所創也.〉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靈蔭乎.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 不可犯也.” “何謂
也?”“ 皇龍丈六 幷九層塔 與眞平王天賜玉帶.” 遂寢其謀. 周
有九鼎, 楚人不敢北窺, 此之類也.
讚曰 鬼拱神扶壓帝京, 輝煌金碧動飛甍. 登臨何啻九韓伏, 始
覺乾坤特地平.
159) 찰주기(刹柱記):탑을 세울 때 중심이 되는 찰주를 받치는 받침돌인 심초석(心
礎石) 안에 공간을 만들어 탑의 조영과 관련된 기록을 넣어 둔다. 실제로 황룡사
탑 심초석 안에서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가 발견
되어 이들 기록의 사실성을 확인해 주었다.
160) 철반(鐵盤):탑의 상륜부의 노반(露盤). 노반은 탑 위에 있는 기둥 모양의 장식
인 상륜(相輪)의 가장 아랫 부분을 말한다.
161) 찰주기 원문과 내용은 같다. (「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권3, 368쪽, 鐵盤已上 高七步, 已下高卅步三尺.)
162) 통도사(通度寺):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영취산에 있는 절. 부처의 진신사리
가 봉안된 계단이 있는 불보(佛寶)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
다. 자장(慈藏)이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선덕왕 15년(646)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아 많은 사람들을 득도케
하였다. 현재 계단이 남아 있고 여러 유적이 많은 대찰이다.
163) 태화사(太和寺):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반탕골에 있었던 사찰. 여기에서 장대
석 등이 발견되었다. 중국 태화지 용의 기별에 따라 자장이 친라 때 창건한 절로
서 조선 초까지 유지되고 있었으나 지금은 주택지로 바뀌었으며, 현재의 태화
사는 최근 사찰이다.
164) 진평왕(眞平王):신라 제26대 왕. 재위 579~632년. 54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의
재위로 대내외적인 안정을 이루었다. 원광(圓光)·담육(曇育) 등의 명승을 중국
에 보내어 수학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문물을 수용하였다. 4-5 주115)
참조.
165) 천사옥대(天賜玉帶):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허리띠. 진평왕 즉위년에
천사(天使)가 궁전의 뜰에 내려와서 상제가 전해주라는 옥대(玉帶)를 가져와 받
았다. 왕은 사직과 종묘에 지내는 국가 제사에 이 옥대를 매고 집전하였다.(『삼
국유사』권1 기이 天賜玉帶)
166) 구정(九鼎):하(夏)나라 우(禹)임금이 구주(九州)에서 쇠를 거두어들여 구주를
상징하는 9개의 솥을 만들었는데, 두 개의 손잡이와 세 개의 발이 달렸다고 한
다. 하(夏)·은(殷)·주(周) 삼대를 전하면서 천자의 보물로 여겨졌다.
167) 초(楚)나라:중국 전국시대 큰 나라의 하나. 지금의 호북성 지방을 중심으로 자
리잡은 나라로서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 불리는 여러 나라 중에서도 강성하여
진나라와 쌍벽을 이룰 정도였으나 결국 진에게 멸망하였다.
또 해동의 이름난 현자인 안홍(安弘)168)이 지은『동도성립기(東都成立
記)』169)에 이르기를, “신라 제27대에 여왕이 군주가 되어 비록 도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九韓)이 침공하였다. 만약 용궁(龍宮)170)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운다면 이웃 나라의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1층은 일
본171),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172), 5층은 응
유(鷹遊)173),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단국(丹國)174), 8층은 여적(女狄)175),
9층은 예맥(穢貊)이다.”라고 하였다.
또 국사(國史)와 절에 전하는 옛 기록을 살펴보니, “진흥왕(眞興王)176)
계유년(553)에 절을 창건하였으며, 그 후 선덕왕대인 정관 19년(645) 을사
년에 탑이 완성되었다. 32대 효소왕 즉위 7년인 성력(聖曆) 원년(698) 무술
년 6월에 벼락을 맞아〈절에 전하는 옛 기록에서는 성덕왕(聖德王)177)대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성덕왕대에는 무술년이 없다.〉33대 성덕왕대 경신년(720)년에 다시 완
성하였다. 48대 경문왕(景文王)178)대 무자년(868)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
았으며, 같은 왕 때 세 번째로 중수하였다.179) 고려 광종(光宗)180) 즉위 5년
계축년(953) 10월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현종(顯宗)181) 13년(1021) 신
유년에 네 번째로 다시 완성하였다. 또 정종(靖宗)182) 2년 을해(乙亥, 1035)
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다시 문종(文宗)183) 갑진년(1064)년에 다섯 번
째로 다시 완성하였다. 또 헌종(獻宗)184) 말인 을해년(1095)에 다섯 번째로
벼락을 맞았으며, 숙종(肅宗)185) 병자년(1096)에 여섯 번째로 다시 완성하
였다. 또 고종(高宗)186) 16년(1238) 무술년 겨울의 몽고병란187) 때 탑과 절
과 장륙존상과 건물이 모두 불탔다.”고 하였다.
又海東名賢安弘撰東都成立記云,“ 新羅第二十七代 女王爲
主, 雖有道無威, 九韓侵勞. 若龍宮南皇龍寺 建九層塔, 則隣
國之災可鎭,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
羅, 第五層鷹遊,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狄, 第九
層穢貊.”
又按國史及寺中古記,“ 眞興王癸酉 創寺, 後善德王代 貞觀
十九年乙巳, 塔初成. 三十二孝昭王卽位七年 聖曆元年戊戌
六月霹靂, 〈寺中古記云, 聖德王代, 誤也. 聖德王代 無戊戌.〉 第三十三
聖德王代庚申歲, 重成. 四十八景文王代戊子六月, 第二霹靂,
同代第三重修. 至本朝光宗卽位五年癸丑十月, 第三霹靂, 顯
宗十三年辛酉, 第四重成. 又靖宗二年乙亥, 第四霹靂, 又文
宗甲辰年, 第五重成. 又獻宗末年乙亥, 第五霹靂, 肅宗丙子,
第六重成. 又高宗二十六年戊戌冬月, 西山兵火, 塔寺丈六殿
宇皆災.”
168) 안홍(安弘):『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안함전에 실린 안함(安含, 579~640)과 동
일인으로 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안함은 이찬 시부(詩賦)의
손자로서 진평왕 23년에 수나라로 유학 가서 5년 만에 비마라진제·농가타 등
과 함께 귀국하였다. 저술에 참서(讖書) 1권이 있는데 이를 『동도성립기(東都成
立記)』로 보는 견해가 있다.
169)『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안홍(安弘)이 찬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견
해가 상반되고 있다. 구한(九韓)의 명단에 고구려와 백제가 누락된 대신 당말
오대의 국명들이 보인다는 점과 고려 때 쓰인 동도(東都)라는 표현 때문에 나말
여초 시기에 지은 것을 안홍에게 가탁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구한의 구체
적인 명단이 후대적 윤색이라는 점에서 안홍의 진찬으로 보기도 한다.
170) 용궁(龍宮):『삼국사기』권4 진흥왕 14년(553)에는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했는데 황룡이 나타나 왕이 고쳐서 절로 삼고 황룡사라고 하였다고 하였
다. 이곳에서 말하는 용궁 남과 비교된다.
171) 일본(日本):일본이라는 명칭은 7세기 후반부터 쓰였다.『신당서(新唐書)』권
220 동이 일본조에는 왜(倭)가 함형(咸亨) 원년(670)에 사신을 중국에 보내어 국
호를 왜(倭)에서 일본(日本)으로 변경하였음을 알려왔다고 한다.
172) 탁라(托羅):『삼국유사』권1 마한조에 탁라(乇羅)라 나온다. 탁라는 탐라(耽羅)
라고도 하였으니, 고려시대에 제주도를 지칭하였다.
173) 응유(鷹遊):위치 미상. 백제의 별칭이라는 견해도 있다.
174) 단국(丹國):거란(契丹)을 말한다.
175) 여적(女狄):여진(女眞)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76) 진흥왕(眞興王):신라 제24대 왕. 재위 540~576. 한강 유역의 요충지를 획득하
고 대가야를 평정하였으며, 창녕에서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에 이르는 영역을
새로 개척하였다. 4-1 주8) 참조.
177) 성덕왕(聖德王):신라 제33대 왕. 재위 702~737년. 성은 김(金)씨. 이름은 본래
융기(隆基)였으나 뒤에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신문왕의 둘째아들로 효소왕의
아우이다.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추대되었다. 처음 왕비는
성정왕후(成貞王后)였으나 성덕왕 15년에 왕궁에서 내보내고 소덕왕후(炤德王
后)를 새로 맞이하였다. 성덕왕은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왕권 강화를 위해 노
력하였다. 717년에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孔子)와 제자들의 초상화를 대학에
두어 유학을 장려하고, 당나라와의 외교 문서를 전담하는 통문박사(通文博士)
를 714년에 설치하였으며, 재위 기간동안 당나라에 사신을 약 43회 파견하였다.
722년에는 정전(丁田)제를 실시하였고, 732년에는 발해를 치려다 눈으로 길이
막혀 중단하였으나 이때 패강(浿江:大同江) 이남의 땅을 판도로 하였다.
178) 경문왕(景文王):신라 제48대 왕. 재위 861~875. 성 김(金)씨. 이름은 응렴(膺廉).
아버지는 계명(啓明), 할아버지는 희강왕(僖康王)이다. 헌안왕에게 아들이 없어
사위로서 즉위하였다. 신라 하대에 계속된 왕위 계승 분쟁에서 다소 소상 상태
를 유지하며 이후 아들이 정강왕과 헌강왕, 딸이 진성여왕으로 즉위하여 왕위
계승의 안정을 가져왔다. 중앙귀족의 모반과 지방 반란을 평정하고 당과 긴밀
한 유대를 가져 안정을 꾀하였으나 재위 중 천재지변이 많아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웠다. 이때 중수한 황룡사탑의 기록이 심초석에서 발견되어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179)『삼국사기』에 실린 황룡사탑 피해 기록은 성덕왕 17년(718) 탑이 흔들리고, 경
문왕 8년(868) 6월에 탑이 흔들려 11년에 탑을 개조하여(十一年 春正月 王命有司
改造皇龍寺塔) 13년에 9층 22장 높이로 완성하였고(十三年 秋九月 皇龍寺塔成九
層 高二十二丈), 경애왕 4년에 탑이 북쪽으로 기울었다는 것들이다.
180) 광종(光宗):고려 제4대 왕. 재위 949~975. 『고려사』에는 정종 4년(949)에 화재
(권53 五行志)
181) 현종(顯宗):고려 제8대 왕. 재위 1010~1031.『고려사』에는 현종 3년(1012) 개수
(권4 世家 顯宗)
182) 정종(靖宗):고려 제10대 왕. 재위 1034~1046.
183) 문종(文宗):고려 제11대 왕. 재위 1046~1083.
184) 헌종(獻宗):고려 제14대 왕. 재위 1094~1095. 『고려사』에는 헌종 원년(1095)에
화재, 보수(권10 世家 獻宗 ; 권53 五行志)
185) 숙종(肅宗):고려 제15대 왕. 재위 1095~1105.
186) 고종(高宗):고려 제23대 왕. 재위 1213~59.
187) 원문의 서산병화(西山兵火)는 몽고의 침공과 이에 대한 고려의 항쟁을 말한다.
황룡사의 종과 분황사의 약사상과 봉덕사의 종
[해제]
통일신라 번영기의 불교문화를 상징하는 8세기 중반의 거대한 조영물인
황룡사 대종과 분황사의 약사상과 봉덕사의 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편
이다. 현존하는 봉덕사종의 4배나 되는 크기인 황룡사종은 크기를 상세한
단위까지 기록하고 조성 주체인 경덕왕과 시주자와 제작 장인을 말하였다.
분황사 약사상 역시 정확한 규모와 제작자를 적었다. 봉덕사종은 경덕왕이
부왕 성덕왕을 위해 제작하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다음 혜공왕
때 완성하여 성덕왕을 위한 사찰인 봉덕사에 봉안하였음을 적었다. 황룡사
종과 분황사 약사상은 경덕왕이 조성하였고, 봉덕사종 역시 경덕왕의 의지
로 혜공왕 때 이루어졌다. 이들 조영물의 조성 주체인 경덕왕(景德王)은 신라
중대 왕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왕권 강화를 위해 관제정비와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들 조영물의 조성은 이와 같은 정책 추진을 장엄물로
나타내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세 가지 조영물은 이 시기 왕실이
중시하던 불교의 중심 사찰이 이들 세 사찰임을 알려준다. 현존하는 봉덕사종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뛰어난 예술적 및 과학적 역량으로 우수한 장엄물을
제작할 수 있었고 종명(鐘銘)에서 보듯이 수준 높은 문화적 역량이 이들
조영물에 모두 집약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다. 특히
제작자들을 명시함으로써 공장의 위상이 당대에 상당히 높았고 이런 여건에서
우수한 제작물이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알게 한다. 같은 경덕왕 대에 조영이
시작된 불국사와 석불사를 그 창건 연유에 따라 권5 효선(孝善)편에 따로
마련한 것과 합쳐 살펴 보면 신라 문화의 정수를 이 한편에 모두 모아 놓은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역주]
황룡사의 종과 분황사의 약사상과 봉덕사의 종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188)이 천보(天寶)189) 13년(754) 갑오년에 황
룡사(皇龍寺)의 종(鐘)190)을 주조하였는데, 길이가 1길 3치이고 두께가 9치
이며 무게는 497,581근이었다. 시주는 효정(孝貞)191) 이찬(伊湌)192)과 삼모
부인(三毛夫人)193)이고, 장인(匠人)은 이상택(里上宅)194) 하전(下典)195)이었
다. 숙종(肅宗)196)때에 다시 새로운 종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6척 8촌이었다.
이듬해 을미년(755)에 분황사(芬皇寺)197)에 약사여래동상(藥師如來銅
像)을 주조하였는데 무게가 306,700근이었고 장인은 본피부(本彼部)198)의
강고(强古) 나마(奈麻)199)였다.
또 황동 12만근을 희사하여 부왕인 성덕왕(聖德王)200)을 위하여 큰 종 하
나를 주조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아들 혜공왕(惠恭王)201) 건운
(乾運)202)이 대력(大曆)203) 경술년(770) 12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공인들
을 모아 완성하여 봉덕사(奉德寺)204)에 봉안하였다.205) 이 절은 효성왕(孝
成王)206)이 개원(開元)207) 26년 무인년(738)에 부왕인 성덕왕의 복을 받들
기 위하여 창건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명(鐘銘)에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
大王神鐘之銘)’이라고 하였다.〈성덕왕은 경덕왕(景德王)의 아버지인 흥광대왕(興
光大王)이다. 종은 본래 경덕왕이 아버지를 위하여 시주한 금으로 만든 것이기에 성덕종
(聖德鐘)이라고 부른다.〉조산대부(朝散大夫)208) 겸 태자사의랑(太子司議郞)209)
한림랑(翰林郞)210) 김필월(金弼粤)211)이 왕명을 받들어 종명을 지었는데
글이 번거로워 기록하지 않는다.212)
皇龍寺鐘 芬皇寺藥師 奉德寺鐘
新羅第三十五景德大王, 以天寶十三甲午, 鑄皇龍寺鐘, 長一
丈三寸, 厚九寸, 入重四十九萬七千五百八十一斤. 施主孝貞
伊湌三毛夫人, 匠人里上宅下典. 肅宗朝, 重成新鐘, 長六尺
八寸.
又明年乙未, 鑄芬皇藥師銅像, 重三十萬六千七百斤, 匠人本
彼部强古乃末.
又捨黃銅一十二萬斤, 爲先考聖德王, 欲鑄巨鐘一口, 未就而
崩. 其子惠恭大王乾運, 以大曆庚戌十二月, 命有司鳩工徒, 乃
克成之, 安於奉德寺. 寺乃孝成王開元二十六年戊寅, 爲先考
聖德大王奉福所創也. 故鐘銘曰, 聖德大王神鐘之銘〈. 聖德乃景
德之考, 興光大王也. 鐘本景德爲先考所施之金, 故稱云, 聖德鐘爾.〉 朝散大
夫 兼太子司議郞 翰林郞 金弼粤 奉敎撰鐘銘, 文煩不錄.
188) 경덕왕(景德王):신라 제35대 왕. 재위 742~765. 성 김(金). 이름 헌영(憲英). 성
덕왕(聖德王)의 아들이고, 효성왕(孝成王)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덕태후(炤德
太后)이다. 비(妃)는 삼모부인(三毛夫人) 김씨(金氏)와 경수왕후(景垂王后) 김씨
(金氏)이다. 왕권 안정을 위해 한화정책(漢化政策)을 근간으로 하는 제도개혁을
단행하여 757년에 녹읍을 부활하고 9주(州)·5소경(小京)·117군(郡)·293현(縣)
을 정비하여 지명을 한식(漢式)으로 고쳤으며 이어 관청과 관직의 이름을 한식
으로 고쳤다. 불교의 중흥에도 노력하여 754년에 황룡사종을 주조하고, 불국사
(佛國寺)와 석불사(石佛寺, 石窟庵) 및 굴불사(掘佛寺) 등을 창건하였고, 각 사찰
의 수축과 탑과 불상 등 불교 조영물의 제작에 힘썼다.
189) 천보(天寶):당(唐) 현종(玄宗) 때의 연호. 742~756년. 경덕왕1~15년.
190) 이 종은 현존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기록에 따르면 50만 근에 가까운 대종으로
서 현재 남아 있는 12만 근의 봉덕사종보다 4배 이상 큰 종이었다.
191) 효정(孝貞):생몰년 미상. 신라의 진골 귀족. 성덕왕 13년(714) 정월 위문(魏文)
에 이어 이찬으로서 행정의 수반인 중시(中侍)가 되어 718년 퇴임할 때까지 4년
간 역임하였다.
192) 이찬(伊湌):신라 17관등 중 제2관등.
193) 삼모부인(三毛夫人):이찬(伊湌) 김순정(金順貞)의 딸이며, 경덕왕의 첫째 왕비
로서 후사가 없어 출궁당하였다. 경덕왕대 왕권강화에 따른 정치 세력간의 알
력으로 인한 일로 추측된다.
194) 이상댁(里上宅):『삼국유사』권1 기이 진한편에 나오는 부유한 39개 금입택(金
入宅) 중의 하나이다.
195) 하전(下典):신라시대의 관직으로 궁중 직속의 벽전(壁典)·자원전(莿園典)의
하급 관직으로 간옹(看翁)을 보좌하였다. 이 기록에서 보는 것처럼 귀족들의 사
적인 직책으로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196) 숙종(肅宗):고려 제15대 왕. 재위 1095~1105.
197) 분황사(芬皇寺):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황룡사와 마주보고 있는 절. 선덕왕
3년(634)에 창건되었다. 신라에 옛 부처 때의 인연 있는 일곱 절터 중의 하나로
꼽혔던 중요한 절이다. 자장이 귀국하자 머물게 했던 절이며, 7세기 중반에 원
효가 활동하며 『화엄경소』를 지었던 절이다. 원효의 사후 아들 설총이 원효의
상을 빚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현재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보광전(普
光殿)과 승당(僧堂)·종각(鍾閣) 등이 있으며, 국보 제30호인 분황사모전석탑 외
에 원효의 비인 화쟁국사(和諍國師)비편, 석정(石井) 등이 있다. 경덕왕 때인 755
년에 36만근의 거대한 동제 약사여래상을 주조하여 봉안하였고 이름난 화가 솔
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는 등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문화 유
적이 있던 유서 깊은 절이다.
198) 본피부(本彼部):신라시대 경주의 중심 세력인 6부 중의 하나이다. 현재 경주시
인왕동 일대를 포함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199) 운문의 내말(乃末)은 나마(奈麻)이다. 신라 17관등 중의 제11 관등이다.
200) 성덕왕(聖德王):신라 제33대 왕. 재위 702~737.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유학을 장려하고, 재위 기간에 사신을 당나라에 약 43
회 파견하였다. 정전(丁田)제를 실시하였고,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신라의 판
도로 확정하였다. 4-6 주177) 참조.
201) 혜공왕(惠恭王):신라 제36대왕. 재위 765~780. 성 김씨, 이름은 건운(乾運). 경
덕왕의 큰 아들로 어머니는 만월부인(滿月夫人) 김씨(金氏)이다. 경덕왕 사후 8
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강력한 왕권의 견제 아래 있던 진골귀족 세력들
이 정치 일선에 등장해 정권쟁탈전을 전개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였다.
그래서 혜공왕의 재위 16년 동안에 많은 정치적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그 속에
서 혜공왕과 왕비는 시해되었다.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 이어온 무열왕계 직계
의 왕위 계승 속에 안정된 왕권을 지속하던 중대(中代) 가 끝나고 이후 하대(下
代)가 시작되어 신라 사회는 혼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202) 건운(乾運):혜공왕(惠恭王)의 이름.
203) 대력(大曆):당(唐) 대종(代宗) 때의 연호. 766~779년. 혜공왕2~15년.
204) 봉덕사(奉德寺):신라 효성왕 2년(738)에 왕이 돌아간 아버지 성덕왕(聖德王)을
위하여 건립하였다. 왕실 사원의 관리를 위한 봉덕사성전(奉德寺成典)이 설치
되었다.(『삼국사기』권37 직관지 奉德寺成典)
205) 이 성덕대왕신종은 원래 봉덕사에 있었으나, 이 절이 수몰된 후 1460년에 영묘
사(靈妙寺)로 옮겼다.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봉덕사종은 신
라 혜공왕이 주조한 종으로 구리 무게가 12만근인데 종 소리가 백여 리까지 들
렸다. 후에 절이 북천에 잠기자 천순(天順) 4년(세조 6, 1460)에 영묘사로 옮겼
다.” (“奉德寺鍾, 新羅惠恭王鑄鍾, 銅重十二萬斤, 撞之聲聞百餘里. 後寺淪於北川, 天
順四年, 移懸于靈妙寺.”『신증동국여지승람』권21, 경주 고적)
206) 효성왕(孝成王):신라 제34대 왕. 재위 737~742. 성 김씨, 이름은 승경(承慶). 성
덕왕의 둘째아들.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 비는 혜명부인(惠明夫人) 김씨.
전 왕인 성덕왕 때에 정상화된 당나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한층 강화하고 도덕경
등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였다. 아우 헌영(憲英, 뒤의 경덕왕)을 태자로 책봉하여
왕실의 안정을 꾀하고 후궁의 아버지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207) 개원(開元):당(唐) 현종(玄宗) 때의 연호. 713~741년. 성덕왕12~효성왕5년.
208) 조산대부(朝散大夫):당나라와 고려에서 사용하던 문산계이다. 당에서는 종오
품하(從五品下)이고, 고려에서는 종5품 하계(下階)로서 전체 29등급 중 제13계
였다.
209) 태자사의랑(太子司議郞):당나라 정육품상(正六品上)의 직관이다. 신라 시대에
는 태자의 궁전과 관속(官屬)으로 752년(경덕왕 11)에 동궁아(東宮衙)에 상대사
(上大舍) 1인, 차대사(次大舍) 1인을 두었다. 고려시대 문종 때 마련된 직제에 따
르면 1068년(문종 22)에 종1품의 태사(大師)·태부(大傅)·태보(大保) 각 1인, 종
2품의 소사(少師)·소부(少傅)·소보(少保) 각 1인, 정3품의 빈객(賓客) 4인, 정4
품의 좌·우서자(左右庶子) 각 1인, 정4품의 좌·우유덕(左右諭德) 각 1인, 종4품
의 시강학사(侍講學士)·시독학사(侍讀學士) 각 1인, 정5품의 좌·우찬선(左右贊
善) 각 1인, 정5품의 중사인(中舍人)·중윤(中允) 각 1인, 종5품의 세마(洗馬)·전
내(典內) 각 1인, 정6품의 문학(文學)·사의랑(司議郎) 각 1인, 시독사 1인을 두었
다. 이로 미루어 신라시대 태자궁의 직책으로 추정할 수 있다.
210) 한림랑(翰林郞):신라시대의 관직. 통일신라시대에 왕명을 문서로 작성하고 왕
의 자문에 응하던 한림대(翰林臺)의 우두머리 관직이다. 신라의 한림대는 당나
라의 한림원(翰林院)을 모방하여 경덕왕대에 종래의 통문박사(通文博士)를 개
칭한 것으로, 한림랑·한림대조(翰林待詔)·한림서생(翰林書生) 등의 관원이 있
었다. 이 관직에는 문장과 학문에 능한 사람들이 주로 임명되었다. 특히 한림대
의 최고 관직인 한림랑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당대의 문사(文士)들로써
충당하였고, 6두품 출신이 이 관직에 많이 진출하였다. 880년 경에 한림대가 서
서원(瑞書院)으로 개명됨에 따라 한림랑은 서서원학사(學士)로 바뀌어 신라 하
대 문한기구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211) 김필월(金弼粤):생몰년 미상. 신라 중대의 문인. 명문에서는 ‘김필오(金弼奧)’라
고 판독된다. ‘김필해(金弼奚)’라고도 쓴다.
212) 봉덕사종은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고 실질적으로는 중대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경덕왕대에 계획되었다가 혜공왕 7년에
완성되었다. 봉덕사는 성덕·효성·경덕·혜공왕대에 걸친 왕실의 원찰(願刹)
이다. 명문의 내용을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종소리야
말로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신기(神器)임을 역설하였
다. 둘째는 성덕왕의 공덕을 찬양하고 그 공덕을 종에 담아 영원히 기리며 종소
리와 더불어 나라가 평화롭고 백성들이 복락을 누리기를 바라는 발원를 담았
다. 셋째는 이런 사업을 추진한 성덕왕의 아들인 경덕왕의 효성과 덕을 찬양하
였다. 넷째는 사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경덕왕이 돌아가자 그 아들인 혜공왕이
이어서 완성하였는데, 이는 혜공왕의 효성과 덕망의 소치라고 찬양하였다. 다
섯째는 종이 완성되자 그 감격과 신비로움 및 종의 효용성을 서술하고 종소리
와 함께 온 누리가 복락을 누릴 수 있기를 빌었다. 이어 4자구의 사(詞)가 있다.
끝으로 주조에 참여한 13인의 관직과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그중 김옹(金邕)과
김양상(金良 相)은 왕권 반대 세력이었으며, 김양상은 혜공왕 13년 왕에게 당시
정치에 대하여 극론하고 780년에 반란을 일으켜 집권한 선덕왕(宣德王)이다.
영묘사의 장륙상
[해제]
영묘사는 선덕왕 때 신라 제일의 예술가로 꼽히는 양지(良志)가 불상을
조성한 사찰이고, 이 이야기는 권4 의해 「양지사석」편에 수록되어 있다. 여
기서는 경덕왕 때 그 불상을 개금한 사실과 그 비용을 기록하였는데 전승
에 따라서는 그것이 처음 조성할 때의 비용이라고 전해옴을 아울러 알려
준다. 일연이 기록을 중시하는 태도를 잘 살필 수 있는 편이다.
[역주]
영묘사의 장륙상
선덕왕(善德王)213)이 영묘사(靈妙寺)214)를 창건하고 불상을 조성한 인연
은 양지(良志) 법사전215)에 자세히 실려 있다. 경덕왕(景德王)216) 즉위 23년
(759)에 장륙존상을 개금하였는데 비용으로 조(租) 23,700석이 들었다.〈양지
전에는 불상을 처음 만들 때의 비용이라고 했다.217) 지금 둘 다 기록해 둔다.〉
靈妙寺丈六
善德王創寺, 塑像因緣, 具載良志法師傳. 景德王卽位
二十三年, 丈六改金, 租二萬三千七百碩〈. 良志傳, 作像之初成之
費. 今兩存之.〉
213) 선덕왕(善德王):신라 제27대 왕. 재위 632~647. 분황사(芬皇寺)와 영묘사(靈
廟寺)를 창건하였고, 자장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였다. 4-5 주
125) 참조.
214) 영묘사(靈妙寺):영묘사(靈廟寺)라고도 쓴다. 과거불 시대의 인연이 있는 일곱
절터의 하나로 꼽히는 절로서 신라 선덕왕 때 창건되었다. 현재 정확한 절터는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경주시 성진리 서천가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 곳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근래에 현 흥륜사에서 ‘영묘(靈廟)’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
되면서 현지의 향토사가들은 이곳을 영묘사지로 추정하고 있다. 영묘사는 신라
때 왕실에 의해 건립된 사원에 설치된 일반 관부로 불교계에 대한 승정기구로
서의 통제적 기능과 왕실의 원당(願堂)으로서의 봉사(奉祀) 기능을 하던 성전사
원(成典寺院)이 설치된 주요 사찰이었다.(『삼국사기』권38 직관지 상 成典寺院)
215)『삼국유사』권4, 양지사석(良志使錫)편에 있다. “영묘사의 장륙삼존상·사천왕
상·전각과 탑의 기와, 사천왕사탑 하부의 팔부신장상, 법림사의 주불 삼존상·
좌우금강신상 등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와 법림사 두 절의 편액도 썼
다. 또 일찍이 벽돌을 다듬어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을 만들어
탑에 안치하고 절에 모셔 공경을 다하였다. 영묘사의 장륙존상을 만들 때 선정
에 들어 삼매로써 대하는 것을 만드는 방법으로 삼았다. 그래서 온 성안의 남자
와 여자들이 다투어서 진흙을 날랐다.”(靈廟丈六三尊 天王像 幷殿塔之瓦, 天王寺
塔下八部神將, 法林寺主佛三尊 左右金剛神等, 皆所塑也. 書靈廟 法林二寺額. 又嘗彫
磚造一小塔, 竝造三千佛. 安其塔置於寺中, 致敬焉. 其塑靈廟之丈六也, 自入定, 以正
受所對, 爲揉式. 故傾城士女爭運泥土.)
216) 경덕왕(景德王):신라 제35대 왕. 재위 742~765. 왕권 안정을 위해 한화정책(漢
化政策)을 시행하고 9주(州)·5소경(小京)·117군(郡)·293현(縣)을 정비하였다.
754년에 황룡사종을 주조하고, 불국사(佛國寺)와 석불사(石佛寺)와 굴불사(掘佛
寺) 등을 창건하였다. 4-7 주188) 참조
217) 양지사석편에서는 이곳의 기록과는 거꾸로 조성비용이 개금 비용이라는 설을
세주로 소개하였다.(“상을 만들 때 비용은 곡식 2만 3천 700석이 들었다.〈혹은 개
금 할 때의 조(租)라고도 한다.〉” (『삼국유사』권4, 양지사석 像初成之費, 入穀二萬
三千七百碩.〈或云, 改金時租〉)
사불산과 굴불산과 만불산
[해제]
이 편은 신라 조형 예술의 다양한 모습을 전해 주고 있다. 대승사 창건
의 연유가 된 사방불은 진평왕 때의 이야기이고 백률사 밑에서 파낸 굴불
사 사방불은 경덕왕 때의 이야기이다. 시기는 다르지만 모두 왕이 이들 조
영물의 확인자이며 발견자인 주체로 그려져 있다. 사방불은 부처의 관념을
공간적으로 확대하여 일어난 것으로, 이들이 신라 국토에 나타나고 땅 속
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들 사방에 주재하는 부처가 신라에 살고 있다는
불국토(佛國土) 사상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불산(대승사) 사방불
은 현재 남아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어떤 존상을 새겼는지 확인할 수 없지
만 굴불사 사방불은 경전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사방불이 아닌 신라 특유의
사방불을 새긴 것으로 그 내용은 당시 신라에서 가장 성행하던 신앙을 반
영한 것이었다. 이 역시 신라 불국토 신앙의 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를 조형물로 확인해 주는 것이 이 편에 수록된 이야기이다. 이에
비해 만불산은 신라 조형 예술의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다. 만불산은 중국
의 『두양잡편(杜陽雜編)』과 같은 여러 기록에 같은 내용으로 실려 있어 그
대체적인 사실성이 인정된다. 이는 불국 세계를 축소하여 한마당에 구현한
빼어난 조영물이었다. 불국 세계를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구상하고, 그대로
조형으로 이루어낸 역량이 당대 신라 조형 예술의 수준을 분명하게 알려
준다. 한 길이나 되는 커다란 크기에 만불의 형상을 조성하고 바람에 따라
종이 울리게 만들었다는 사실적인 묘사가 인상적이다. 이 우수한 조영물
은 중국에서도 화제의 대상이었다. 이를 통해 경덕왕 때인 8세기 중반에 신
라와 당 사이에 활발한 불교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덕왕 때는
신라 조형 예술의 정수인 불국사와 석불사 그리고 봉덕사종 등이 만들어진
시기로서, 이런 역량이 중국에도 알려지고 찬탄의 대상이 되었음을 말해주
는 자료이기도 하다.
[역주]
사불산과 굴불산과 만불산
죽령(竹嶺)218) 동쪽 100리쯤에 우뚝 솟은 산이 있다. 진평왕(眞平王)219) 9
년(587) 정미년220)에 갑자기 커다란 돌이 있어 4면이 1길이나 되고 사방여
래(四方如來)221)가 새겨져 있었는데, 모두 붉은 비단에 싸여 하늘에서 이
산의 정상에 떨어졌다. 왕이 이를 듣고 가서 우러러 보고는 예경하여 마침
내 바위 곁에 절을 창건하고 편액을 대승사(大乘寺)라고 하였다. 『법화경
(法華經)』222)을 외우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비구에게 절을 맡아주기를
청하여, 깨끗이 하고 돌을 공양하며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 산을 역덕산(亦德山) 혹은 사불산(四佛山)이라고 한다. 비구가 죽어 장
사지냈더니 무덤 위에 연꽃이 생겨났다.223)
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竹嶺東百許里, 有山屹然高峙. 眞平王九年丁未224), 忽有一大
石, 四面方丈, 彫四方如來, 皆以紅紗護之, 自天墜其山頂. 王
聞之, 命駕瞻敬, 遂創寺嵓側, 額曰大乘寺. 請比丘亡名誦蓮經
者主寺, 洒掃供石, 香火不廢. 號曰亦德山, 或曰四佛山. 比丘
卒旣葬, 塚上生蓮.
218) 죽령(竹嶺):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大崗面)의 경계
에 있는 소백산맥의 고개로 고대 교통로의 요충지이다. (『삼국사기』권2 아달라
이사금 5년에 “봄 3월에 죽령을 열었다.[春三月 開竹嶺]”고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
람』에서는 충청도 단양과 경상도 풍기의 경계로 소개하고 있다. 권14 단양군 및 권25
풍기군)
219) 진평왕(眞平王):신라 제26대 왕. 재위 579~632년. 54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의
재위로 대내외적인 안정을 이루었다. 원광(圓光)·담육(曇育) 등의 명승을 중
국에 보내어 수학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문물을 수용하였다. 4-5 주
115) 참조.
220) 원문에는 진평왕 9년 갑신년이라 하였는데, 진평왕 9년은 정미년(587)이고 갑
신년은 진평왕 46년(624)이 된다. 간지를 중시하던 옛 전통을 고려하면 ‘갑신년
(624)’이 가능성이 있으나 주224)에 제시한『호산록』의 기록도 588년이라 하고
있어 ‘9년(587)’에 의미를 두어 587년으로 한다.
221) 사방여래(四方如來):사방불(四方佛). 여기서 말하는 사방불은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사불산 정상에 현존하고 있다. 대승사(大乘寺) 윤필암(潤筆庵)에서 산을
올라가면 나온다. 높이 약 295cm, 너비 약 150cm로 동·서면에는 좌상(坐像)이,
남·북면에는 입상(立像)이 새겨져 있다. 마멸이 심하여 불상의 원래 모습은 거
의 알아보기 어려우며 윤곽선만 겨우 남아 있다. 이 중 상태가 비교적 좋은 동면
불좌상의 양식을 8세기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경우 이곳의 기록과 차이가 생기
게 된다.
222) 원문의 연경(蓮經)은『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곧『법화경(法華經)』을 말한다.
223) 일연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천책(天頙)은 사불산(四佛山)을 유람하고『신라
고기(新羅古記)』를 인용하여 사방불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상주 산양현 북쪽
에 자못 높은 산이 있어 봉우리들이 중첩되었는데 동쪽으로는 죽령과 이어져
화장산을 대하고 있으니 이것이 사불산인데 공덕산이라고도 한다. 신라고기를
살펴 보니 진평왕 건복(원문의 建元은 建福의 잘못) 5년, 수나라 개황 8년 무신
년(588)에 갑자기 사방이 한 길쯤 되는 돌이 있어 네 면에 사불을 새겼는데 오
색 구름 가운데 하늘로부터 날아와 디른 봉우리에 봉안되었다. 왕이 이를 듣고
매우 기이하다고 여겨 그 산에 가서 살펴보고는 예경하여 마지 않았다. 이에 그
곁에 절을 짓고 대숭사라고 하고는 법화를 강경하는 이를 청하여 비구 망명 스
님이 향화를 받들었다. 망명스님은 이에 날마다 부지런히 향화를 받들어 불상
에 정례하고 법화경을 독송하였다. 용맹정진으로 수련한 지 전후 몇 년이 지나
입적하니 제자들이 암석 간에 매장하였는데 뒤에 연꽃이 무덤 위에 피어났다.
이로부터 사방 사람들이 지팡이를 들고 누차 찾아 불상에 예경하고 신령한 자
취를 찾는 자가 개미나 벌이 바삐 오가듯 하였다.(『湖山錄』卷下, 遊四佛山記, 韓6
p, 206c13~207a5. “尙州山陽縣北, 有山頗高, 重峯疊巘, 東連竹嶺, 挹華藏(山名), 是名
曰四佛, 或曰功德山. 按新羅古記, 眞平王建元五年 隋開皇八年戊申, 忽有一石, 方一丈
許, 四面刻四方佛, 在五色雲中, 自天飛來, 安於別峰. 王聞之, 極以爲異, 幸其山而驗之,
珎敬不已. 乃創寺其側, 號曰大乘, 請誦法華, 比丘亡名典香火. 亡名於是, 日勤香火, 頂
禮尊像, 口誦雄詮. 猛進修鍊者, 首尾凡若于年, 比及泥洹, 弟子輩窆于岩石間, 後有蓮
花, 發於塚上. 自此四方之人, 披棒累爾, 禮尊像尋靈迹者, 蟻往蜂還.”)
224) 원문은 ‘甲申’이나 주224)의 자료에 견주어 ‘丁未’로 교감함
또 경덕왕(景德王)225)이 백률사(栢栗寺)226)에 행차하여 산 아래에 이르
자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파보라고 명하였더니 커다란 돌이 있는
데 사면에 사방불(四方佛)227)이 새겨져 있었다. 이로 인해서 절을 창건하고
굴불사(掘佛寺)228)라고 이름하였다. 지금 잘못 전하여 굴석사(掘石寺)229)
라고 한다.
又景德王遊幸栢栗寺, 至山下, 聞地中有唱佛聲, 命掘之, 得大
石, 四面刻四方佛. 因創寺, 以掘佛爲號. 今訛云掘石.
225) 경덕왕(景德王):신라 제35대 왕. 재위 742~765. 왕권 안정을 위해 한화정책(漢
化政策)을 시행하고 9주(州)·5소경(小京)·117군(郡)·293현(縣)을 정비하였다.
754년에 황룡사종을 주조하고, 불국사(佛國寺)와 석불사(石佛寺)와 굴불사(掘佛
寺) 등을 창건하였다. 4-7 주188) 참조
226) 백률사(栢栗寺):법흥왕 14년(527)에 불교의 전파를 위하여 순교한 이차돈(異次
頓)의 목이 날아가 떨어진 곳에 세웠다고 하는 절. 헌덕왕 9년(817) 이차돈을 추
모하여 세운 석당(石幢)이 국립경주박물관에 남아 있다. 4-12-2 주311) 참조.
227) 사방불은 온 세계에 부처가 두루한다는 생각에서 동 서 남 북 사방의 불국토에
각각 부처를 대비하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 따라 다른데 흔히 동방 아촉불(阿閦
佛), 남방 보생불(寶生佛), 서방 아미타불, 북방 미묘성불(微妙聲佛)이나 불공성
취불(不空成就佛)을 들지만, 실제로 신라의 사방불로 조각된 된 예는 동방 약사
불(藥師佛), 서방 아미타불, 남방 석가불(釋迦佛), 북방 미륵불(彌勒佛)을 새긴
경우가 많다. 굴불사 사방불은 경북 경주시 동천동 굴불사지에 현존하는데, 큰
바위가 대지에 우뚝 솟아 사면에 부처를 새긴 형태로서 높이는 약 3.5m이다. 동
면에 약사여래좌상, 서면에 아미타여래입상과 관음보살 세지보살, 남면에 석가
로 추정되는 여래입상과 두 보살입상, 북면에 미륵으로 추정되는 부조 보살입
상과 선각 11면 6비(臂) 관음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양식상 편년은 이곳에
서 말하는 경덕왕대와 부합된다.
228) 굴불사(掘佛寺):이 절터에 대해서는 종합보고서가 있다.(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
구소,『掘佛寺 遺蹟發掘調査報告書』, 1986)
229) 굴석사(掘石寺):굴불사지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청동 금고(金鼓)에 명문이 있는
데, “고려 숙종 13년(1183)에 경주 북산 굴석사에 둔다(大定二十三年癸卯四月日
東京北山屈石寺排入重七斤次知造前副戶長李伯兪棟梁道人孝英大匠義誠)”는 기록
을 보아 고려시대에는 굴석사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일연은 지금 잘
못 전하여 굴석사라고 한다 하였다.
왕은 또 당(唐) 대종(代宗)230) 황제가 불교를 매우 존숭한다는 것을 듣
고 장인에게 명하여 5색 모포를 만들고, 또 침단목(沈檀木)을 조각하고 맑
은 구슬과 아름다운 옥으로 꾸며 높이가 1길 남짓 되는 가산(假山)을 만들
게 하여 모포 위에 놓았다. 산에는 가파른 바위와 괴이한 돌과 개울과 동굴
이 있고, 칸을 나눈 한 구역마다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고 여러 나
라의 산천의 형상이 있었다. 미풍이 창으로 들어오면 벌과 나비가 훨훨 날
고 제비와 참새가 날아 춤추니 얼핏 보아서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가운데에는 10,000개의 부처를 봉안했으니 큰 것은 사방 1치가
넘었고 작은 것은 8,9푼이었다. 그 머리는 어떤 것은 큰 기장만하고 어떤 것
은 콩알 반쪽만했다. 나발(螺髮)과 육계(肉髻)231), 백호(白毫)232), 눈썹과 눈
이 선명하여 상호(相好)233)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단지 비슷하게는 가능
해도 자세히는 말할 수 없다. 이로 인하여 만불산(萬佛山)이라 불렀다.234)
다시 금과 옥을 새겨 수실이 달린 번(幡)과 천개(天蓋)235)와 망고236)와
치자237)와 꽃과 과일과 많은 구슬로 장엄한238) 누각과 대(臺)와 전각과 승
당과 정자를 만들었는데 모두 크기가 비록 작으나 기세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앞에는 둘러 있는 비구의 형상 1,000여 구가 있고 아래에는 자마
금(紫摩金)239)으로 만든 종 3개가 있는데 모두 종각과 포뢰(蒲牢)240)가 있
으며 고래모양으로 종치는 방망이를 삼았다. 바람이 불어 종이 울리면 둘
러 있는 스님들은 모두 엎드려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였고 은은하게
염불하는 소리241)가 있었으니 만불산의 형상의 중심242)이 종에 있었다. 비
록 만불(萬佛)이라 불렀으나 그 실상을 다 기록할 수는 없다.
완성되자 사신을 보내어 바쳤다. 대종이 이것을 보고 감탄하여, “신라 사
람의 기교는 하늘의 조화이지 인간의 기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구광선(九光扇)243)을 바위 사이에 덧붙이고 이로 인하여 불광(佛光)이라
하였다. 4월 8일에 양가(兩街) 승도(僧徒)244)에게 칙명을 내려 내도량(內道
場)245)에서 만불산에 예불하게 하고 불공삼장(不空三藏)246)에게 명하여 밀
교 경전을 1,000번 외어서 경축하게 하니 보는 자가 모두 그 정교함에 탄복
하였다.
찬한다.
하늘은 만월을 꾸며 사방불을 마련하고,
땅은 백호247)를 솟구쳐 하룻밤 사이에 열었네.
교묘한 솜씨로 번거롭게 만불을 새기니,
불법을 천지간248)에 두루 퍼지게 하리라.
王又聞唐代宗皇帝優崇釋氏, 命工作五色氍毹, 又彫沈檀木與
明珠美玉, 爲假山, 高丈餘, 置氍毹之上. 山有巉嵓, 怪石澗穴,
區隔每一區內, 有歌舞伎樂列國山川之狀. 微風入戶, 蜂蝶翶
翔, 鷰雀飛舞, 隱約視之, 莫辨眞假. 中安萬佛, 大者逾方寸,
小者八九分. 其頭或巨黍者, 或半菽者. 螺䯻白毛, 眉目的㿨,
相好悉備. 只可髣髴, 莫得而詳. 因號萬佛山. 更鏤金玉爲流蘇
幡蓋, 菴羅薝葍花果, 莊嚴百琁249)樓閣, 臺殿堂榭 , 都大雖微,
勢皆活動. 前有旋遶比丘像千餘軀, 下列紫金鐘三簴, 皆有閣
有蒲牢, 鯨魚爲撞. 有風而鐘鳴, 則旋遶僧皆仆, 拜頭至地, 隱
隱有梵音, 盖關捩在乎鐘也. 雖號萬佛, 其實不可勝記. 旣成,
遣使獻之. 代宗見之, 嘆曰, “新羅之巧, 天造非人巧也.” 乃以
九光扇, 加置嵓岫間, 因謂之佛光. 四月八日, 詔兩街僧徒, 於
內道場, 禮萬佛山, 命三藏不空, 念讚密部眞詮千遍, 以慶之,
觀者, 皆嘆伏其巧.
讚曰 天粧滿月四方裁, 地湧明毫一夜開. 妙手更煩彫萬佛, 眞
風要使遍三才.
230) 대종(代宗):당(唐)의 제8대 왕. 재위기간 762~779년.
231) 나발(螺髮)과 육계(肉髻):부처의 머리. 머리카락이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이라 하여 나발(螺髮)이라 부르고, 머리 가운데 살이 솟은 부분을 육계(肉
髻)라고 부른다. 육계는 머리 위에 높고 넓고 평평한 부분을 말하는데 이는 대인
(大人)의 상이다. 보살일 때 지계와 보시 등 십선법 외에 중생을 교화하고 한없
는 연민을 가슴에 담아 모든 중생들이 정법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큰 서원을
내서 이루어었기에 이런 좋은 모습을 받는다고 한다.
232) 원문의 백모(白毛)는 백호(白毫)를 말한다. 백호는 부처님의 32상 가운데 하나
로 두 눈썹 사이에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이 오른쪽으로 말려 있는 것을 말한다.
백호는 죽 펴면 한 길이 되나 놓으면 도르르 말려 하얀 진주와 같은 밝고 선명한
형태가 되는데, 마치 태양의 한 가운데와 같은 것으로 여기에서 광명이 모든 국
토로 퍼져 나간다고 한다. 중생들이 이 광명을 만나면 업장을 없애고 몸과 마음
이 안락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32상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상이라 한다.
233) 상호(相好):상(相)은 laks3an3 a이다. 부처의 육신이 갖추고 있는 수려한 용모 중
에 분명하여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32상이 있다. 호(好)는 vyañjana이다. 부
처의 육신의 모습 중 세세하여 보기 어려운 것으로 80종의 수형호(隨形好)라 부
르는 80종호(種好)가 있다. 이 양자를 합친 말이 상호(相好)이다. 32상은 전륜성
왕도 갖추고 있다고 하며, 80종호는 불보살이 갖추는 모습이라고 한다. 부처가
과거 백 대겁 동안 특히 상호업(相好業)을 수행하였으므로 이런 상호를 성취하
였다고 한다.
234) 이 만불산 이야기는 당대 소악(蘇鶚)이 편찬한『두양잡편(杜陽雜編)』에 거의 같
은 내용으로 실려 있다. 이후 뛰어난 공예품을 거명하는 데 소개되어 중국의 여
러 책에 같은 내용이 실렸다.
235) 유소번개(流蘇幡蓋)는 수실이 달린 번과 천개를 말한다. 불전을 장식하는 장엄
물들이다.
236) 암라(菴羅): āmra. 망고를 말한다. 암몰라(菴沒羅), 암마라수(菴摩羅樹) 암라
수(菴羅樹) 등으로 음역하고 나수(奈樹)라고 의역한다. 인도 각 지역에서 나는
과일로 겨울에 피는 작은 꽃은 많으나 5,6월에 익는 과일은 많이 맺히지 않는다.
인도 과일의 대표로 많이 거론된다.
237) 담복(薝葍):치자를 말하는데, 좋은 꽃의 비유로 많이 쓰인다. 현겁 천불의 부처
의 이름 중에도 있다.
238) 원문에는 ‘백보(百步)’라 하였는데,『두양잡편(杜陽雜編)』의 내용 등을 고려할
때 ‘백선(百琁)’이라고 해야 의미가 맞는다. 백 개의 구슬, 즉 많은 구슬로 장식
한 누각을 말한다.
239) 원문의 자금(紫金)은 자마금(紫摩金)을 말한다. 자마금은 자색을 띤 순수한 황
금으로 품질이 가장 좋은 황금을 이른다.
240) 포뢰(蒲牢):해변에 사는 짐승으로 고래를 두려워하여 고래에 물리면 크게 운다
고 한다. 그래서 종이 잘 울리게끔 포뢰의 모양을 종 위에 만들어 놓고 고래모양
을 한 방망이로 종을 치게 하였다.
241) 범패(梵唄): bhāsā. 곡조를 붙여 경전을 읽고 찬탄하여 읊고 부처의 덕을 노래
로 칭송하는 것을 말하며, 성패(聲唄)·경패(經唄)·성명(聲明) 또는 범음(梵音)
이라고도 한다. 패(唄)는 패닉(唄匿) 또는 바사(婆師)라고도 하는데, 찬탄 또는
그치게 한다는 의미이다. 범패는 주로 세 가지로 쓰였는데, 하나는 강경을 하는
전후에 강경의식으로서 쓰였고, 하나는 아침 저녁에 공부할 때 쓰였으며, 또 하
나는 대중들을 교화하는 도량참법(道場懺法)에 쓰였다.
242) 원문의 관려(關捩)는 기축(機軸)과 같은 말로 어떤 활동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곳을 말한다.
243) 구광선(九光扇):아홉 가지 빛을 내는 부채.
244) 양가(兩街) 승도(僧徒):양가에 소속된 모든 승려를 말한다. 당대에는 국가에서
승려를 관리하는데 처음에 홍려시(鴻臚寺)에 속하게 하였고 다음에 숭현서(崇
玄署)에 속하게 하였다가 측천무후 때(694) 전국의 승려를 사부(祠部)에 속하게
하였고 현종 때인 747년에는 양가공덕사(兩街功德使)에 소속시켰다가 나중에
다시 사부로 돌렸다. 헌종 때는 양가공덕사 아래 승록(僧錄)을 두었고 788년에
는 다시 좌우가 대공덕사가 승적을 관장하도록 하는 등 변화를 거듭하다 마지
막에는 다시 양가공덕사에 맡겼다. 이 만불산이 이야기되는 대종(762~779) 때
는 양가공덕사 시기이므로 여기서의 양가는 양가공덕사 아래에 소속된 승관과
승려를 말한다.
245) 내도량(內道場):대내(大內) 곧 궁중 안에 설치된 도량이라는 뜻. 왕이 사적으로
만든 절로서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불사를 담당하였다. 특히 당대 대
종 때 성행하여 항상 백 여 명의 승려들이 궁중에 불상을 진설하고 경전을 염송
하였다고 한다.
246) 불공삼장(不空三藏):북인도 출신으로 중국의 밀교를 정립한 승려. 삼장(三藏)
이란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의 삼장을 말하며 이에 정통한 사람을
삼장이라 한다. 불공은 금강지(金剛智)의 제자로서 『금강정경』 계통의 밀교를
전수받고 741년에 금강지가 죽자 743년 인도와 스리랑카에 가서 보현(普賢) 아
사리를 만나 최신의 밀교를 전해 받았으며 범본 500부를 입수하여 746년 장안
으로 돌아왔다. 이후 여러 번 궁중에 초대받아 현종(玄宗)과 백관에게 관정을
주고, 비를 오게 하고 그치게 하는 법을 실행하였으며 현종으로부터 지장(智藏)
이란 이름을 받았다. 755년 안녹산의 난 때 숙종(肅宗)을 위해 반적 진압의 수법
을 행했고, 756년 장안의 대흥선사(大興善寺)에 들어가 호국 수법을 행했으며
760년에도 대흥선사에서 군흉복멸(群兇僕滅)을 위한 관정도량(灌頂道場)을 열
었다. 또 763년 대종(代宗) 때 나라를 위해 관정도량을 설치하고 의식의 항구화
를 청하는 등 일관되게 국가의 평안을 비는 데 힘을 다했다. 그리하여 대종 영태
(永泰) 원년(765) 스승 금강지 삼장과 불공에게 각각 관위와 호가 수여되었다.
또 오대산에 금각사(金閣寺)를 조성하여 문수보살 신앙을 고양시키고, 771년 스
스로 번역한 밀교 경전 77부 101권의 목록을 바쳐서 대장경에 편입하는 책명을
받았다. 같은 해 대흥선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247) 원문의 명호(明毫)는 백호(白毫)를 말하니, 사방불을 가리킨다.
248) 원문의 삼재(三才)는 천(天)·지(地)·인(人)을 말하므로, 천지간을 가리킨다.
249) 원문의 ‘步’는 의미상 ‘琁’으로 교감함.
생의사의 돌미륵상
[해제]
경주 남산 삼화령(三花嶺)에 봉안되었던 미륵상의 조성 연기 설화이다.
생의(生義)라는 승려가 꿈 속에서 알려주는 대로 땅 속에서 불상을 파 내
어 봉안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불상 조성의 한 유형으로서 땅 속에서 파내
절을 창건하는 형태이다. 또 그렇게 창건한 절 이름을 승려의 이름을 따라
지어 불렀던 유형의 예도 함께 보여주는데, 이 역시 신라 불교 설화에서 자
주 볼 수 있다. 특히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석조 미륵삼존상이 이
삼화령 석조 미륵상이라고 추측되어 관심의 대상이 된 기록이다. 이 미륵
상은 7세기 신라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빼어난 조형물로서 특징적인 젊은
외모를 지향하는 큰 얼굴과 온화한 미소 등으로 이름난 걸작품으로서, 이
설화는 그 유래를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역주]
생의사의 돌미륵상
선덕왕(善德王)250) 때 생의(生義)스님은 항상 도중사(道中寺)에 살았다.
꿈에 한 스님이 (그를) 끌고 남산251)으로 올라가서 풀을 묶어 표시를 하게
하고 산 남쪽 골짜기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묻혔으니 스님께
서는 꺼내어 고개 위에 안치해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꿈을 깨어 도반252)
들과 함께 표시해놓은 자리를 찾아 그 골짜기에 이르러 땅을 팠더니 돌로
만든 미륵253)이 나와서 삼화령(三花嶺)254) 위에 안치하였다. 선덕왕 13년
(644) 갑진년255)에 절을 짓고 살았는데, 뒤에 이름을 생의사(生義寺)라고
하였다. 〈지금 성의사(性義寺)라고 잘못 부른다. 충담(忠談)256) 스님이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 공양하는 것이 바로 이 부처이다.257)〉
生義寺石彌勒
善德王時, 釋生義, 常住道中寺. 夢有僧引上南山而行, 令結
草爲標, 至山之南洞, 謂曰,“ 我埋此處, 請師出安嶺上.” 旣覺,
與友人尋所標, 至其洞掘地, 有石彌勒出, 置於三花嶺上. 善德
王十三年甲辰歲, 創寺而居, 後名生義寺. 〈今訛言性義寺, 忠談師每
歲重三重九, 烹茶獻供者, 是此尊也.〉
250) 선덕왕(善德王):신라 제27대 왕. 재위 632~647. 분황사(芬皇寺)와 영묘사(靈廟
寺)를 창건하였고, 자장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였다. 4-5 주125)
참조.
251) 남산:경주시 남쪽에 있는 남산을 말한다. 경주시 남쪽에 금오산과 고위산의 두
봉우리를 잇는 산으로 남북 8km 동서 4km의 타원형을 하고 있다. 신라 4 영지
의 하나로 곳곳에 유적이 많다. 동 남 서쪽에 모두 34개의 골짜기가 있는데 각
각 수십 개씩의 절터와 석탑·석불·마애불 들이 산재해 있다. 신라시조인 박혁
거세의 탄생지로부터 불교 수용 이후에는 수많은 불교 유적이 만들어져 이곳에
불국 세상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252) 도반:함께 도를 닦는 벗
253) 현재 경주박물관에 보관된 석조삼존불로 알려져 있다. 미륵불(彌勒佛)은
Maitreya. 미륵은 브라만 집안에서 출생하여 뒤에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부처님
보다 먼저 입멸하여 보살로서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하며 도솔천(兜率天)에 살
고 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여러 중생을 제도하고자 처음 발심할 때 고기를 먹
지 않겠다고 하여 이로 인해 자씨(慈氏)보살로 부른다. 석존께서 미륵에게 부처
가 되리라고 수기하였는데 그 수명이 4천 세(인간의 시간으로는 약 57억 6천만
년)가 될 때 장차 도솔천에서 이 땅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
고 삼회(三會)에 걸쳐 설법하여 각각 96억, 94억, 92억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런 경설에 따라 미륵신앙은 미륵보살이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미륵상생 신앙과, 미륵이 부처가 되어 이 땅에 내려와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미륵하생 신앙의 두 가지 신앙이 있게 된다. 미륵신앙은『미륵상생경(彌
勒上生經)』·『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의 세 경전이
중심이 된다.
254) 삼화령(三花嶺):『삼국유사』 권2 기이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편과 권5 효선 빈
녀양모편에 삼화령이 보인다. 특히 빈녀양모에서 남산의 포성적을 삼화술(三花
述)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이곳은 경주시 남산의 고개로 삼존석불이 있었다
고 한다. 이 고개의 위치에 대해 남산 남쪽이라는 견해와 북쪽이라는 견해가 있
으나 확실치 않다.
255) 원문에는 12년이라 하였는데, 고려시대에 기록한 일연의 유년기원으로 치면 12
년이 되고, 신라시대의 즉위년기원으로 치면 13년이 된다.
256) 충담(忠談):생몰년 미상.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 안민가(安民歌)와 찬기파랑가
(讚耆婆郞歌)를 지었다.(삼국유사』 권2 기이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257) 같은 내용이『삼국유사』권2 기이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편에 있다. “스님은
매년 삼월삼짓날과 중구일에 차를 달여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에게 올렸다.(僧
每重三重九之日,烹茶饗南山三花嶺彌勒世尊.)”
흥륜사의 벽화 보현보살
[해제]
신라 최초의 절인 경주 흥륜사에 있던 보현보살 벽화에 대한 이야기이
다. 신라 말인 경명왕(景明王) 때 흥륜사의 남문과 회랑이 소실되어 921년
에 이를 중건하였다. 그런데 이 보수 공사는 제석천이 하늘에서 내려와 10
일 동안 머물며 이적을 보이자 사람들의 시주가 쌓이고 장인이 저절로 와
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 공덕을 기려 제석천의 모습을 벽화로 그려 이 세
상을 지켜주기를 요청하자 제석천이 자신이 아니라 보현보살상을 그려 공
양하면 좋으리라고 하여 보현상을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일연은 이 현장
을 찾아보고 그때까지 보현보살상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신라 말기의
혼란 상황 속에서 사찰을 보수하기 위한 어려움을 제석천의 도움을 빌려
이루었다고 설화화한 내용으로서 신라 말의 제석신앙과 보현신앙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신라 최초의 절로서 금당에 미륵을 모셨던 흥륜사가 제석
신앙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려 준다. 경루가 왼편에 있다고 한 점으로 보
아 금당 좌우에 경루와 고루를 배치한 가람 구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다
른 편과는 달리 이 편에서는 자료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역주]
흥륜사의 벽화 보현보살
신라 제 54대 경명왕(景明王)258) 때 흥륜사(興輪寺)259)의 남문260) 및 좌
우 회랑이 불에 탔는데 수리되지 않고 있어 정화(靖和)와 홍계(弘繼) 두 스
님이 인연을 모아 수리하려고 하였다. 정명(貞明)261) 7년(921) 신사년 5월
15일에 제석천(帝釋天)262)이 절의 왼쪽 경루(經樓)263)에 내려와 열흘 동안
머물자, 전각과 탑, 풀과 나무, 흙과 돌 등이 모두 기이한 향기를 풍기고 오
색 구름이 절을 덮었으며 남쪽 연못에서는 물고기와 용이 기뻐 뛰어올랐
다.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보고 전에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하면서 구슬과
비단과 곡식을 시주하니 산더미처럼 쌓이고, 장인이 스스로 와서 며칠 걸
리지 않아 완성하였다. 공사가 끝나 천제(天帝)264)가 돌아가려 하자 두 스
님이 말하기를, “제석천께서 만약 천궁으로 돌아가시려 한다면, 청컨데 성
스러운 모습을 그려 지극한 정성으로 공양하여 제석천의 은혜에 보답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로 인하여 진영(眞影)265)을 남겨서 길이 인간 세
상을 지켜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제석천이 말하기를, “나의 원력은 저 보
현보살(普賢菩薩)266)이 두루 현묘한 교화를 내리는 것만 못하니, 이 보살상
을 그려서 경건하게 공양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
다. 두 스님이 가르침을 받들어 보현보살을 벽 사이에 경건하게 그렸는데,
지금도 그 보살상이 남아 있다.
興輪寺壁畫普賢
第五十四景明王時, 興輪寺南門及左右廊廡, 災焚未修, 靖和
弘繼二僧, 募緣將修. 貞明七年辛巳五月十五日, 帝釋降于寺
之左經樓, 留旬日, 殿塔及草樹土石, 皆發異香, 五雲覆寺, 南
池魚龍, 喜躍跳擲. 國人聚觀, 嘆未曾有, 玉帛粱稻施積丘山,
工匠自來, 不日成之. 工旣畢, 天帝將還, 二僧白曰,“ 天若欲
還宮, 請圖寫聖容, 至誠供養, 以報天恩, 亦乃因玆留影, 永鎭
下方焉.” 帝曰,“ 我之願力, 不如彼普賢菩薩遍垂玄化, 畫此菩
薩像, 虔設供養, 而不廢宜矣.”二僧奉敎, 敬畫普賢菩薩於壁
間, 至今猶存其像.
258) 경명왕(景明王):신라 제 54대 왕. 재위 917~923.
259) 흥륜사(興輪寺):경상북도 경주시 사정동에 있던 신라 최초의 절. 절터가 사적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에 불법을 전한 아도(阿道)가 창건하였다고 전해
져서, 경주에 있는 불교와 오랜 인연이 있던 일곱 개의 절 가운데 첫 번째로 꼽
혔다. 서천교(西川橋)의 동쪽에 있는 천경림(天鏡林)이 그 자리였다고 한다. 실
제로는 527년 이차돈의 순교 이후 법흥왕이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5년(544)에
완성되었다.(『삼국사기』권4 眞興王 5년 2월 “흥륜사가 완성되었다(興輪寺成)”) 그
리고 다음 달에 사람들이 출가하여 부처를 받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삼국유사』
에는 아도가 처음 천경림에 절터를 잡았는데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이차돈의 순
교가 있던 법흥왕 정미년(527)에 처음으로 터를 닦고 을묘년(535)에 천경림을
크게 채벌하여 역사를 시작하였는데, 기둥과 들보의 재목은 모두 그 숲에서 가
져다 썼고 주춧돌과 석감도 다 갖추어 진흥왕 때 완성하였다고 하였다.(『삼국유
사』권3 흥법 阿道基羅 天鏡林 分註 및 原宗興法猒髑滅身) 이에 덧붙여 미추왕 3
년(264)에 고구려에서 온 아도가 성국공주(成國公主)의 병을 고쳐 주었는데, 그
보답으로 왕이 사찰 건립을 허락하여 흥륜사를 세웠고, 아도가 띠를 엮어 집을
짓고 이곳에 머물면서 불법을 강설하여 때때로 하늘에서 꽃이 떨어졌다고 하였
다(『삼국유사』권3 흥법 아도기라 我道本碑 인용). 이처럼 아도나 이차돈 등 신라
불교 전래자로부터 사찰 창건 연유가 시작되었기에 헌덕왕 9년(817)에 흥륜사
의 영수(永秀)선사가 이차돈의 무덤에 예불할 향도(香徒)를 결성하고 그를 기리
는 단을 만들어 법회를 열었다. 또 노장들이 이차돈이 죽은 날인 8월 5일에 사
(社)를 만들어 흥륜사에 모였다고 한다. 이어 신라 불교의 전래와 발전에 큰 발
자취를 남긴 열 분을 기리는 상을 흥륜사 금당에 만들어 봉안하였으니 아도(我
道)·위촉(猒髑)·혜숙(惠宿)·안함(安含)·의상(義湘)·표훈(表訓)·사복(蛇巴)·
원효(元曉)·혜공(惠空)·자장(慈藏)이 그들이다. 흥륜사는 경주 사람들의 모임
의 장소로도 유명했으니 신라 풍속에 2월 8일부터 15일까지 서울의 남자와 여
자들이 흥륜사 전탑을 돌면서 그것을 복회(福會)로 삼았다고 하고, 김현(金現)
이 호랑이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 절의 탑돌이 복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삼국유사』권5 감통 金現感虎). 불국사와 석불사를 창건한 김대성이 재상 집에
환생했다는 설화도 흥륜사에서 육륜회(六輪會)를 베풀려고 보시를 구하러 다니
던 개사(開士) 점개(漸開)에게 시주하여 얻은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삼국유
사』권5 효선 大城孝二世父母) 현재 사적 제15호로 지정된 절터에는 1980년대에
새로 세운 흥륜사가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영묘사(靈廟寺)라고 새겨진 기왓조
각이 발굴되어 이 터는 선덕왕 때 창건한 영묘사터로 보아야 하며, 현재 경주공
업고등학교 터가 흥륜사터라고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260) 흥륜사 문은 몇 차례 재난을 당해『삼국사기』에도 실려 있다. (권5 太宗 4년 “흥륜사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興輪寺門自壞)” ; 권7 文武王 11년 4월 “흥륜사 남문이 흔들렸다
(震興輪寺南門)”)
261) 정명(貞明):후량(後梁) 말제(末帝)의 연호. 915~921년. 신덕왕 4년~경명왕 5년
에 해당.
262) 제석천(帝釋天): Śakra-devānām indra.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라고
음역하여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 줄여 부르기도 하며 천제석(天帝釋) 또는 천
주(天主)라고 하기도 한다. 수미산 정상 도리천의 천주(天主)로서 사천왕과 32
천을 통솔하면서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을 보호하며 아수라의 군대를 정
벌한다는 하늘의 임금이다. 본래 힌두교의 인드라신으로서 불교에 들어와 제석
천이라 불렀다. 경설에 따르면 제석천은 원래 마가다국의 브라만으로서 보시와
같은 공덕을 쌓아 마침내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나 도리천 곧 33천의 천주(天
主)가 되었다고 한다. 불교에 들어와서는 범천(梵天)과 함께 불교를 지키는 주
신이 되어 수미산 정상의 도리천 선견성(善見城)에 거주하며 십대천자의 시위
를 받는다고 한다. 한 달에 여섯 차례 육재일(六齋日)에 사천왕과 태자와 시자를
데리고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의 선악과 옳고 그름을 살펴 사람들이 효도나 보
시나 재계행을 하지 않으면 수명을 줄이고 반대로 열심히 정진하면 수명을 늘
린다고 한다. 석존이 성도한 다음에는 수호신이 되어 석존이 돌아가신 모친을
위해 도리천에 설법하러 올라가자 제석천은 보개를 들고 시종하였다 한다.
263) 경루(經樓):불경을 보관하던 누각. 대체로 절의 중심 전각 좌우에 북을 매다는 누
각인 고루(鼓樓)와 대칭으로 세워 가람배치의 주요한 요소의 한 가지를 이룬다.
264) 천제(天帝):앞서 말한 제석천(帝釋天)의 다른 말.
265) 원문의 영(影)은 얼굴을 그린 그림, 곧 진영(眞影)을 말한다.
266) 보현보살(普賢菩薩): Samantabhadra. 부처의 행원(行願)을 대변하는 보살. 문
수보살(文殊菩薩)과 함께 석가모니불을 협시(脇侍)하는 보살로서 많은 보살 중
에 가장 보편적이고 중심되는 보살이다.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부처의 왼편
에서 여러 부처의 지덕(智德)과 혜덕(慧德)과 증덕(證德)을 맡고, 보현보살은 코
끼리를 타고 부처의 오른쪽에서 이덕(理德)과 정덕(定德)과 행덕(行德)을 맡아,
이 둘이 합쳐 부처의 이지·정혜·행증을 원만하게 갖추게 된다. 이 때문에 문수
와 보현보살은 일체 보살의 상수로서 부처의 교화를 돕고 선양한다. 보현보살
은 신상과 공덕이 일체처에 두루 미쳐 순일하고 기묘하며 선하기 때문에 보현
이라고 한다.『법화경』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에는 보현보살이 육아
백상(六牙白象)을 타고 법화의 행자를 수호한다고 한다.『화엄경』보현행원품
(普賢行願品)에는 보현보살의 10가지 광대한 행원을 설하고 있는데, 그것은 여
러 부처를 예경하고(禮敬諸佛), 여래를 칭찬하고(稱讚如來), 널리 공양을 닦고
(廣修供養), 업장을 참회하고(懺悔業障), 공덕을 기쁘게 따르고(隨喜功德), 법륜
을 굴려주시기를 청하고(請轉法輪), 부처께서 세상에 머물기를 청하고(請佛住
世), 항상 부처를 따라 배우고(常隨佛學), 항상 중생에 따르며(恆順衆生), 멀리 모
두 회향하는(普皆迴向)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임종시에 보현보살의 인도로 극락
세계에 왕생한다고 한다. 이 십대원이 모든 보살행의 표본이 되기에 보현보살
을 대행(大行) 보현보살이라고 한다.
세 곳의 관음상・중생사
[해제]
세 곳의 관음상(三所觀音)이란 관음보살 신앙으로 이름난 세 절의 관음
상 곧 중생사(衆生寺)와 백률사(栢栗寺)와 민장사(敏藏寺)의 관음상을 말
한다. 관음신앙은 현세에서의 고난이나 바라는 바를 들어준다는 현세구원
의 신앙으로 사람들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신앙의 하나이다. 따
라서 ‘삼소관음(三所觀音)’이 제목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세 절의 관음상
모두를 그 내용으로 합쳐 모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삼소관음’의 제목
뒤에「중생사」를 다시 제목으로 내세우고,「백률사」와「민장사」는 따로 각
각의 제목으로 내세웠다. 그래서「삼소관음 중생사」의 내용은 중생사에 관
한 한 가지 내용뿐이다. 그러므로 이 편만의 제목은「중생사」라고 붙이는
것이 타당하다. 만약 본래대로「삼소관음」을 제목으로 하려면「중생사」「백
률사」「민장사」를 소제목으로 하여 내용을 병렬시켜야 적절한 구성이 된
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여「삼소관음」에 의미를 두어 편제목은 12-1, 12-2,
12-3으로 하기로 한다.
삼소관음의 첫 번째 중생사편은 이 절에 관음상을 조성해 모신 연유와,
이 관음상이 영험이 많았음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말하고 있다. 중생사
관음상을 조성한 사람은 중국에서 뛰어난 영감으로 십일면관음 그림을 그
렸던 이로서, 그가 신라에 와서 중생사 관음상을 조성하였다고 하였다. 그
리고 나말여초의 역사적 인물로서 고려 초기 유학을 대표하는 인물인 최
승로(崔承老)의 부모가 이 관음상에 기도하여 낳았으며 또 난리 중에 관음
의 보호를 받았다는 설화를 실었다. 이어 고려 전기에 이 관음상이 김해에서
시주를 모아 왔다는 영험과, 절문에 불이 났는데 관음상이 저절로 법당에서
나와 난을 피했다는 영험, 그리고 고려 중기에 어떤 스님이 이 절의 주지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자 신통력으로 이를 막아주었다는 설화를 계속해서 실었다.
관음상 조성 사실은 신라의 고전을 근거로 하였고, 신앙 영험은 마을 사람들
에게 전해 오던 기록을 인용하였다. 이 중생사 관음상편은 현실구제적인
관음신앙이 후삼국기의 신라 사회에서 환영받았고, 고려에 들어서도 이런
양상은 계속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 자료를 토대로 신라 십일면관음의
양상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본문의 기록은 중국 관음화가 십일면관음일 뿐이지
중생사 관음상이 십일면관음상이라고 확정하기 어려워 일반 관음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후반에 수록된 여러 신앙 사례도 일반 관음 신앙의 예를 잘 보
여준다.
[역주]
세 곳의 관음상-1 중생사(衆生寺)
신라의 옛 전승에 이렇게 말하였다.
“중국의 천자에게 총애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에 짝할 만한
이가 없었다. 그래서 ‘고금의 그림에도 이와 같은 사람은 드물다’고 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에게 명하여 진영을 그리도록 하였다.〈화공은 전승에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혹은 장승요(張僧繇)267)라고 하는데 그는 오(吳)나라 사람이
다. 양(梁)나라 천감(天監)268) 연간에 무릉왕국(武陵王國)269)의 시랑(侍郞)270) 직비각(直
秘閣) 지화사(知畵事)271)가 되고 우장군(右將軍)272)과 오흥태수(吳興太守)273)를 역임하
였으니,274) (이 천자는) 중국의 양나라 진(陳)나라275) 시기의 천자일 것이다. 그런데 전해
지기를 당(唐)나라276)의 황제라 하였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개 중국을 당이라고 하
기 때문이다. 어느 때의 제왕인지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둘 다 기록해둔다.〉 그 화공이
칙명을 받들어 그림을 그렸는데 잘못하여 붓을 떨어뜨려 배꼽 아래에 붉은
점이 찍혔다. 고치려고 하였으나 고칠 수가 없어서 속으로 의심하기를, 붉
은 사마귀277)는 틀림없이 날 때부터 생긴 것이 아닌가 하고 일을 마치고 이
를 바쳤다. 황제가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상은 실제와 아주 비슷한데, 배
꼽 아래의 사마귀는 속에 감추어진 것인데 어떻게 알고 그것까지 그렸는
가?’ 라고 하였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감옥278)에 가두고 형벌을 주려 하는
데 승상이 아뢰기를, ‘그 사람은 마음이 바른 사람이라고들 말하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황제는 ‘그가 현명하고 정직하여 내가 어제
꿈꾼 형상을 틀림 없이 그림으로 그려내면 용서하겠다.’고 하였다. 화공이
이에 십일면관음상(十一面觀音像)279)을 그려 바치니 꿈에 본 것과 들어맞
아서 황제는 이에 의심을 풀고 용서해주었다. 화공이 풀려나와 박사 분절
(芬節)280)과 약속하여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신라에서는 불법을 공경하고
신앙한다 하니 그대와 함께 바다로 배를 타고 그곳에 가서 함께 불사를 닦
아 널리 신라를 이롭게 한다면 또한 이익되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함
께 신라281)에 이르러 이 절의 대비상(大悲像)282)을 만들었다.283) 사람들이
우러러 공경하고 기도하여 복을 얻은 것이 다 적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고 하였다.
三所觀音 衆生寺
新羅古傳云.“ 中華天子有寵姬, 美艶無雙. 謂‘古今圖畵, 尠
有如此者.’ 乃命善畵者寫眞,〈畵工傳失其名. 或云張僧繇, 則是吳人也.
梁天監中爲武陵王國侍郞直秘閣知畵事, 歷右將軍吳興太守, 則乃中國梁陳間之
天子也. 而傳云唐帝者, 海東人凡諸中國爲唐爾. 其實未詳何代帝王, 兩存之.〉
其人奉勅圖成, 誤落筆, 汚赤毁於臍下. 欲改之而不能, 心疑赤
誌必自天生, 功畢獻之. 帝目之曰, ‘形則逼眞矣, 其臍下之誌,
乃所內秘, 何得知之幷寫?’ 帝乃震怒, 下圓扉, 將加刑. 丞相
奏云,‘ 所謂伊人其心且直, 願赦宥之.’ 帝曰,‘ 彼旣賢直, 朕
昨夢之像, 畵進不差則宥之.’ 其人乃畵十一面觀音像呈之, 協
於所夢, 帝於是意解赦之. 其人旣免, 乃與博士芬節約曰,‘ 吾
聞新羅國敬信佛法, 與子乘桴于海適彼, 同修佛事, 廣益仁邦,
不亦益乎.’ 遂相與到新羅國, 因成此寺大悲像. 國人瞻仰, 禳
禱獲福, 不可勝紀.”
267) 장승요(張僧繇):6세기 초에 활동한 중국 양(梁)나라의 오(吳)지방(지금의 강소
성 소주) 출신의 이름난 화가. 도교와 불교의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생각이 샘
솟는 듯하고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다. 특히 양 무제(武帝)가 많은 사원을 세울
때 그 벽화를 도맡아 그렸다. 금릉의 안락사(安樂寺)에 용을 그리고는 눈동자를
안 그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이를 그리면 용이 날아가버리기 때문이라고 하여
사람들이 믿지 않자 이내 눈동자를 그렸고 순식간에 용은 벽을 뚫고 날아갔다
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고사를 남긴 인물이다. 서역에서 전래된 입체적 화법
인 요철화(凹凸畵)와, 필묵(筆墨) 대신 청록(靑綠)으로 번지게 그리는 몰골법(沒
骨法)을 창시하였다고 전해지는 불화의 대가로 첫손 꼽히는 인물이다. 문수보
살상(文殊菩薩像) 십륙나한상(十六羅漢像) 천왕상(天王像) 등이 전해졌다고 하
나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없다.
268) 천감(天監):양(梁) 무제(武帝)의 연호, 502~519년. 지증왕 3년~법흥왕 6년.
269) 무릉왕국(武陵王國):무릉왕(武陵王)은 양(梁) 무제(武帝)의 여덟째 아들 소기
(蕭紀)이다. 천감(天監) 13년(514)에 무릉군왕(武陵郡王)으로 봉해졌으며, 익주
자사가 되어 촉(蜀)에 가서 부강하게 만들었다. 무제가 죽은 후 촉에서 자립하
여 황제로 자칭하고 연호를 대정(大正)이라고 하였다. 태청(太淸) 5년(551) 형
원제(元帝)를 습격하였으나 그 사이에 촉 땅은 서위(西魏)의 수중에 들어갔으
며, 553년 원제의 군사에 패하여 죽었다. 이 기록이 실린 『역대명화기』에 따르면
천감 연간 곧 소기가 무릉군왕에 봉해진 뒤 5년 사이에 장승요가 그의 휘하에서
시랑직을 비롯한 관직을 역임한 것이 되는데 연대가 명확하지 않다. 또한 일반
적으로 장승요가 무제의 불사에 참여하여 여러 사원에 불화를 그린 것으로 알
려진 것과도 차이가 있다.
270) 시랑(侍郞):중앙 부서의 차관직.
271) 직비각(直秘閣) 지화사(知畵事):직비각은 비각(秘閣)의 담당 관직. 북송(北宋)
대에 숭문원에 비각을 설치하여 도서 문자 서화 등을 관장하도록 하였고 그 관
직으로 직비각과 비각교리를 두었던 예로 미루어 양대에도 비슷한 역할을 하였
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승요가 그림에 뛰어났으므로 서화 등을 관장한 직책이
어울린다. 지화사 또한 그림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던 관직으로 생각된다.
272) 우장군(右將軍):좌장군과 함께 설치한 관직.
273) 오흥태수(吳興太守):지금의 중국 절강성(浙江省) 호주(湖州) 지방에 설치했던
오흥현(吳興縣)의 태수.
274) 원문의 “張僧繇, 則是吳人也. 梁天監中爲武陵王國侍郞 直秘閣 知畵事, 歷右將
軍 吳興太守.” 구절은 장언원(張彦遠)이 지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 나
오는 구절을 ‘吳中人也’를 ‘則是吳人也’로 한 글자 바꾸었을 뿐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275) 양진(梁陳):양(梁)나라는 502~557년, 진(陳)나라는 557~590년간 존속하였다.
276) 당(唐):618~906년까지 존속.
277) 원문의 지(誌)는 사마귀 지(痣)와 같다.
278) 원문의 원비(圓扉)는 주(周)나라 때의 감옥인 둥글게 만든 환토(圜土)의 문을 말
한다. 따라서 감옥을 일컫게 되었다. 환비(圜扉)와 같이 쓰인다.
279)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관음의 다양한 구제력을 형상화시킨 변화관음의 하나.
전면의 3면은 자비로운 모습으로 선한 중생을 보고 자애로운 마음을 일으키는
대자를, 좌측 3면은 성내는 모습으로 악한 중생이 보고 슬퍼하는 마음을 내는 대
비를, 우측 3면은 흰 어금니(白牙)를 드러낸 모습으로 청정한 업을 보고 보기 드
문 찬탄을 내서 불도에 나아가기를 권하는 것을, 후면 1면은 크게 웃는 모습으로
선악의 잡다한 중생이 보고 괴이한 웃음을 내서 악을 고쳐 도에 향하는 것을, 그
리고 정상 1면은 여래의 모습으로 부처의 과보를 상징하도록 표현하기도 한다.
11면을 본면 위에 7면, 그 위에 3면, 다시 그 위에 불면 1면을 나타내기도 하고, 3
중의 3면과 부처 모습의 4중으로 나타내기도 하여 일정한 표현법은 없다.
280) 분절(芬節):그림 분야를 맡고 있던 관리로 생각되나 자세히는 알 수 없다.
281) 원문의 인방(仁邦)을 ‘군자의 나라’라고 풀이하기도 하나, 인의예지신(仁義禮智
信)을 오방(五方)에 비정하여 인(仁)을 동방으로 보므로 여기에서는 ‘동쪽나라’
신라를 가리킨다.
282) 대비상(大悲像):관음상. 관음의 무한한 서원력을 대자대비(大慈大悲)로 표현한
것이다. 자비(慈悲)란 모든 불보살이 일체중생을 제도하려는 끝없이 크고 넓은
자비심을 말한다. 일체 중생을 자애롭게 여겨 즐거움을 주는 것을 자(慈)라 하
고,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함께 느끼고 불쌍하게 여겨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을
비(悲)라 하여 중생을 거두어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주는 것을 자비라 하
였다. 그중에서도 무분별한 마음으로 일으키는 절대 평등의 자비를 대자대비라
하여 관음의 무한한 중생 구제력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283) 이 화공(畵工)이 앞서 중국에서 십일면관음상을 그려 바쳤다 하였으므로 흔히
십일면관음으로 여겨 왔으나, 본 기록에는 십일면관음을 조성하였다고 보아야
할 명확한 근거가 없다. 그리고 최승로의 득남 설화와 같은 영험 사례들은 오히
려 일반관음의 영험으로 생각되므로 일반관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 대비상이 회화인지 조상인지도 명확한 언급은 없으나,『삼국유사』본 내용의
바로 다음인「백률사」편에 영험이 자못 많은 백률사의 대비상도 혹은 중국의
신장(神匠)이 중생사 대비상을 만들[塑] 때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고도 하였으므
로 중생사의 관음상이 소상(塑像) 곧 조상(造像)인 것을 알 수 있다.「중생사」에
나오는 ‘사자좌 아래에 감추었다(藏諸猊座下)’라는 표현도 조상임을 알려준다.
신라 말 천성(天成) 연간284)에 정보(正甫)285) 최은함(崔殷諴)286)이 오래
도록 자손이 없어 이 절의 관음상287) 앞에 가서 기도하여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288) 석 달이 채 못 되어 백제의 견훤(甄萱)289)이 서울을 습격하여 성
안이 크게 혼란하였다. 최은함이 아이를 안고 와서 말하기를, “이웃나라의
군대가 갑자기 이르러서 일이 다급합니다. 어린 자식이 짐이 되어 모두 화
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진실로 관음대성(觀音大聖)290)께서 주신 아이
라면 원컨대 큰 자비의 힘으로 감싸 길러주셔서 우리 부자가 다시 서로 만
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 한탄하며 세 번
울고 세 번 고하고는 포대기에 싸서 관음상 사자좌291) 아래에 감추고 머뭇
거리며 갔다. 반 달이 지나 적들이 물러가서 와 찾아보니, 피부가 새로 목
욕한 듯하고 몸이 어여쁘며 젖 냄새가 아직도 입에 남아 있었다. 안고 돌아
와서 길렀더니 장성하여 총명함과 슬기로움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이
가 최승로(崔丞魯)292)로서 지위가 정광(正匡)293)에 이르렀다. 최승로는 낭
중(郎中)294) 최숙(崔肅)을 낳고 최숙은 낭중 최제안(崔齊顔)295)을 낳아 이
로부터 후손이 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최은함은 경순왕(敬順王)296)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서 명문(名門)이 되었다.
羅季天成中, 正甫崔殷諴, 久無胤息, 詣玆寺大慈前祈禱, 有娠
而生男. 未盈三朔, 百濟甄萱襲犯京師, 城中大潰. 殷諴抱兒來
告曰, “鄰兵奄至, 事急矣. 赤子累重, 不能俱免. 若誠大聖之所
賜, 願此大慈之力, 覆養之, 令我父子, 再得相見.” 涕泣悲惋,
三泣而三告之, 裹以襁褓, 藏諸猊座下, 眷眷而去. 經半月寇退,
來尋之, 肌膚如新浴, 貌體嬛好, 乳香尙痕於口. 抱持歸養, 及
壯聰惠過人, 是爲丞魯, 位至正匡. 丞魯生郎中崔肅, 肅生郎中
齊顔焉. 自此繼嗣不絶. 殷諴隨敬順王, 入本朝, 爲大姓.
284) 천성(天成):후당(後唐) 명종(明宗)의 연호, 926~929년. 경덕왕3~경순왕3년.
285) 정보(正甫):고려 초기에 쓰이던 관계. 성종 14년에 향직(鄕職) 5품의 위계로 됨.
『고려사』에는 최승로의 관계가 향직 4품인 원보(元甫)라고 하였다.(『고려사』권
93 열전 제6 「崔承老」 “仕新羅至元甫”)
286) 최은함(崔殷諴):최승로(崔承老)의 부친.고려사』에는 최은함(崔殷含)으로 표
기하고 있다. “신라에서 벼슬하여 원보(元甫)에 이르렀다. 오래도록 후사가 없
어 기도하여 최승로를 낳았다”(『고려사』권93 열전 제6「崔承老」“仕新羅至元甫,
久無嗣禱而生承老.”)
287) 원문의 대자(大慈)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한 관음보살을 이르는 말. 자비(慈悲)
란 관음 만이 아니라 모든 불보살이 일체중생을 제도하려는 자비로운 마음을
말하는 것으로 끝없이 크고 넓은 자비심을 말한다. 원래 자비란 일체 중생을 자
애롭게 여겨 즐거움을 주는 것을 자(慈)라 하고,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함께 느
끼고 불쌍하게 여겨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을 비(悲)라 하여 중생을 거두어 괴로
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주는 것을 자비라 하였다. 자비 중에서도 차별을 멀리 떠
나 무분별한 마음으로 일으키는 절대 평등의 자비를 대자대비라 한다. 여러 불
보살 중에서도 관음보살의 중생 구제력이 가장 두드러져 대지(大智) 문수보살,
대행(大行) 보현보살에 견주어 관음을 대자대비보살로 부른다.
288) 아들을 낳게 해주는 것은 관음의 대표적인 구제력 중의 하나이다.『법화경』「관
세음보살보문품」에 따르면, 관음이 고뇌 받는 중생에게 해탈을 주는 내용으로
현실적인 7가지의 어려움이나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에서 구제와 더불어
생남생녀(生男生女)를 들고 있다.
289) 견훤(甄萱):후백제(後百濟)의 왕. ?~936. 신라 경애왕(景哀王) 4년 11월 신라 왕
경을 침공하여 왕을 스스로 죽게 하고 왕의 족제(族弟)를 세워 경순왕(敬順王)
으로 삼다.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 경애왕 4년 및『삼국사기』권50 열전 견훤)
290) 관음대성(觀音大聖):관음보살. Avalokiteśvara. 관음은 관세음(觀世音)의 줄인
말로 또는 관자재(觀自在)보살이라고도 한다.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
다.『법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설한 것과 같이 고난에 처한 중생들이 그 이
름을 부르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고난에서 구제해준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
되어 사람들에게 가장 친근한 신앙의 하나가 되었다. 경전에서는 물에 빠지거
나 불이 났을 때 등등의 현실적 고난과 자식을 낳게 해주는 것과 함께 탐진치 삼
독의 번뇌에서 해탈하게 해 주는 역할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또『화엄경』
입법계품에는 선재동자가 순례 중에 관음이 사는 남방의 보타락가산(補陀洛迦
山)을 찾아 보살도를 묻고 있어 관음신앙이 성행한 나라마다 자신의 국토에 관
음이 사는 보타락가산을 설정하였으니 우리나라의 낙산 등이 그것이다. 또한
관음은 대세지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을 돕는 협시보살의 역할로 중생들이 극락
에 왕생하는 것을 돕기도 한다. 밀교시대에 이르러 관음의 폭넓은 구제력을 상
징하는 여러 변화관음들이 등장하였다. 손이나 팔 또는 눈이 천 개, 만 개에 이
르는 다양한 관음 곧 천수천안관음이나 십일면관음 또는 준제관음·여의륜관
음·불공견삭관음 등이 변화 관음이 나타나니 그 대표적인 것을 33관음으로 헤
아리기도 한다.
291) 원문의 예좌(猊座)는 사자좌(獅子座)를 말한다. 곧 부처가 앉는 자리로서 불보
살상을 봉안하고 올려 놓는 자리를 말한다. 여기서는 관음상이 봉안된 자리를
가리킨다.
292) 최승로(崔丞魯):927~989.『고려사』에는 최승로(崔承老)로 표기하고 있다. 고려
초기의 문신. 경주에서 출생해 935년(태조 18) 신라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투
항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들어왔다. 어릴 때부터 총명해 12세에 태조 앞에
서『논어』를 읽어 태조는 원봉성학생(元鳳省學生)이 되게 하고 선물을 내렸다.
일찍부터 문장과 학문 계통의 관직 생활을 한 것으로 생각되며, 982년(성종 1)
에는 정광(正匡)으로 행정의 요직을 맡았다. 그 해 6월에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는 봉사를 올리도록 하자 고려 초기 다섯 왕의 치적평(治績評)을 비롯한 28
조에 달하는 시무(時務)를 올려 북쪽 국경의 확정과 불교의 폐단 억제 및 제반
사회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혀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정치사상을 제시하였다.
성종은 이에 공감하여 새로운 국가체제 정비에 반영하였다. 983년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가 되고 988년에는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이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293) 정광(正匡):고려 초기에 태봉의 관제를 따라 설치한 관등. 계위는 2품으로 재상
에 해당하였다. 충선왕대에는 문산계 정2품의 계위였다.
294) 낭중(郎中):고려 상서육부(尙書六部)의 정5품 관직.
295) 최제안(崔齊顔):고려 초기의 문인. ?~1046. 최승로의 손자이며 최숙의 아들.
1020년(현종 11) 거란에 사신으로 다녀 오고 1030년에 중추사(中樞使), 1034년
(덕종 3)에 호부상서에 이어 정종이 즉위하자 이부상서가 되었다. 1036년 상서
좌복야중추사(尙書左僕射中樞使)가 되고 1043년(정종 9)에 문하시랑 동내사문
하평장사 판상서호부사(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判尙書戶部事)가 되고 뒤에
태사 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고려 태조의 신서훈요(信書訓要)가
불에 타 없어졌는데, 최제안이 이를 최항(崔沆)의 집에서 찾아내 조정에 바쳤다
고 한다.(『고려사』권93 열전「崔承老」 “初太祖信書訓要 失於兵燹 齊顔得於崔沆家藏
以進 由是得傳于世.”)
296) 경순왕(敬順王):신라의 마지막 제56대 왕, 재위 927~935년.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 문성왕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이
고,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왕비는 죽방부인(竹房夫
人) 박씨이다. 고려에 항복한 뒤에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 다시 결혼
하였다. 927년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난
다음,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경순왕의 의중은 견훤보다 왕건 쪽으로 기울었
다. 931년 왕건과 만났는데 왕건이 휘하 군병들에게 범법하지 못하게 하여 신라
인들의 환심을 샀다. 935년 경순왕은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게 하였다.
이 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다. 왕건은 그를 태자보다 위인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하고 녹(祿) 1,000석을 주어 우대하였다.
또 통화(統和)297) 10년(992) 3월에 절의 주지인 성태(性泰)스님이 보살
상 앞에 꿇어 앉아 혼자서 말하기를, “제가 이 절에 오래 머무르며 부지런
히 향화를 올리기를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절에 토지에서 나는
것이 없어 향을 피우고 제사 지내는 것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장차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사직하려 합니다.” 하였다. 이날 졸다가 꿈을 꾸니 관음대
성이 이르기를, “대사는 아직 머물러 있고 떠나가지 마시오. 내가 연화(緣
化)298)를 하여 재의 비용을 충당하겠소.” 라고 하였다. 성태스님이 기뻐하
며 감득하고 마침내 머물며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13일이 지나서 갑자
기 두 사람이 말과 소에 짐을 싣고 문 앞에 이르렀다. 절의 스님이 나가서
“어디서 왔는지요?” 하니, “우리는 금주(金州)299) 사람들인데 전에 한 스님
이 우리에게 와서 ‘나는 동경(東京)300) 중생사에 머무른 지 오래 되었는데
공양 올리기가301) 어려워 시주를 구하러 이곳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습
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시주를 거두어 쌀 여섯 섬과 소금 넉 섬을 얻
어서 싣고 왔습니다.” 라고 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이 절에는 시주 다닐
사람이 없는데 당신들이 아마도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스님이 저희들을 데리고 와서 이 신현정(神見井) 가에
이르러 말하기를, ‘절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제가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
다.’ 하여 우리들이 뒤좇아 온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절의 스님이 그 사람
들을 인도하여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그 사람들이 관음대성을 우러러 보고
절하며 서로 말하기를, “이분이 시주 왔던 비구의 모습입니다.” 하고 놀라 감
탄해마지 않았다. 그래서 가져오는 쌀과 소금이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또 어느 날 저녁에 절문에 불이 나서 동네 사람들이 달려와 구하였다. 법
당에 올라가 관음상을 보니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는데 다시 보니 벌써 뜰
가운데에 서 있었다. 밖으로 꺼낸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모두들 알지 못
한다고 하므로 그제야 관음대성의 영험한 위력임을 알았다.
又統和十年三月, 主寺釋性泰, 跪於菩薩前, 自言,“ 弟子久住
玆寺, 精勤香火, 晝夜匪懈, 然以寺無田出, 香祀無繼. 將移他
所, 故來辭爾.” 是日, 假寐夢, 大聖謂曰,“ 師且住無遠離, 我
以緣化充齋費.” 僧忻然感悟, 遂留不行. 後十三日, 忽有二人,
馬載牛駄, 到於門前. 寺僧出問, 何所而來. 曰“我等是金州
界人, 向有一比丘到我云, ‘我住東京衆生寺久矣. 欲以四事之
難, 緣化到此.’ 是以歛施隣閭, 得米六碩, 塩四碩, 負載以來.”
僧曰, “此寺無人緣化者, 爾輩恐聞之誤.” 其人曰, “向之比丘,
率我輩而來, 到此神見井邊曰, ‘距寺不遠, 我先往待之,’ 我輩
隨逐而來.” 寺僧引入法堂前, 其人瞻禮大聖, 相謂曰, “此緣化
比丘之像也,” 驚嘆不已. 故所納米塩. 追年不廢.
又一夕, 寺門有火災, 閭里奔救. 升堂見像, 不知所在, 視之已
立在庭中矣. 問其出者誰, 皆曰不知, 乃知大聖靈威也.
297) 통화(統和):요(遼) 성종(聖宗)의 연호. 983~1011년. 고려 성종2~현종2년.
298) 연화(緣化):인연에 따라 사람들을 착한 일을 하고 불도에 들도록 권유하는 일.
특히 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권하여 법의 인연을 맺도록 하는 동시에 절을 짓
는 등 사찰의 불사에 시주하도록 주선하는 일 또는 그 사람.
299) 금주(金州):지금의 경상남도 김해(金海). 가야의 수도로서 법흥왕 때 신라에 통
합된 후 금관군(金官郡)이라 하다가 문무왕 때 금관소경, 경덕왕 때 김해소경으
로 바뀌었다. 고려에 들어 태조 때 김해부(金海府)라 하고 성종 때 금주로 고쳤
다.(『고려사』권57 지리지 金州. “太祖二十三年改州府郡縣名爲金海府, 後降爲臨海
縣, 又陞爲郡. 成宗十四年改爲金州安東都護府, 顯宗三年更今名. 元宗十一年以防禦
使金晅平密城之亂, 又拒三別抄有功, 陞爲金寧都護府, 忠烈王十九年降爲縣, 三十四
年陞爲金州牧. 忠宣王二年汰諸牧復爲金海府.)
300) 동경(東京):신라의 서울이었던 경주. 고려 때 경주를 동경, 평양을 서경이라 하
여 서울인 개경과 함께 삼경, 양주인 남경과 함께 사경이라 불렀다.(『고려사』 권
57 지리지 東京留守官慶州 “本新羅古都…太祖十八年敬順王金傅來降國除爲慶州.
二十三年陞爲大都督府…成宗六年改爲東京留守.”)
301) 사사(四事):공양의 네가지, 즉 의복·음식·침구(臥具)·의약(醫藥)을 말한다.
부처나 스님들 곧 승단의 일상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네 가지를 말한다. 혹은 의
복·음식·탕약(湯藥)·방이나 집(房舍)를 말하기도 한다.
또 대정(大定)302) 13년(1173) 계사년에 스님 점숭(占崇)이 이 절의 주지
가 되었다. 글자를 몰랐으나 성품이 순수하여 부지런히 향화를 올렸다. 한
스님이 그의 거처를 빼앗으려고 츤의천사(襯衣天使)303)에게 호소하기를,
“이 절은 나라에서 은혜를 빌고 복을 받드는 곳이니 마땅히 글을 알고 읽을
수 있는 이를 가려 맡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천사는 그렇다고 여겨 그 사
람을 시험하고자 소문(疏文)을 거꾸로 주었다. 점숭이 바로 손으로 펴며 물
흐르듯 읽어나가니 천사는 마음 속에 새겨두었다. 물러나와 방 가운데 앉
아서 다시 읽어보도록 하니 점숭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천사가 말하
기를 “스님304)은 진실로 관음대성이 보호하는 분입니다.”라 하고는 끝내 빼
앗지 않았다. 그때 점숭과 함께 머무르던 사람인 처사305) 김인부(金仁夫)가
향리의 노장들에 전하여 글로 써서 전하였다.
又大定十三年癸巳間, 有僧占崇, 得住玆寺. 不解文字, 性本純
粹, 精勤火香. 有一僧, 欲奪其居, 訴於襯衣天使曰, “玆寺, 所
以國家祈恩奉福之所, 宜選會讀文疏者主之.” 天使然之, 欲試
其人, 乃倒授疏文. 占崇應手披讀如流, 天使服膺, 退坐房中,
俾之再讀, 崇鉗口無言. 天使曰,“ 上人良由大聖之所護也. 終
不奪之. 當時與崇同住者, 處士金仁夫, 傳諸鄕老, 筆之于傳.
302) 대정(大定):금(金) 세종(世宗)의 연호, 1161~1189년. 고려 의종 15~명종 19년.
303) 츤의천사(襯衣天使):미상. 츤의는 내의로 춥거나 그런 일이 있을 때 입는 옷을
말한다. 승려들이 기본적으로 입는 삼의(三衣) 외에 두 겨드랑이를 덮고 가슴과
왼쪽 어깨 그리고 허리 아래까지 이르는 장방형의 내의를 승기지(僧祇支) 엄액
의(掩腋衣) 또는 엄액츤의(掩腋襯衣)라고 한다. 그러나 츤의천사는 승기지를 갖
추어 입은 천사인지 어떤지 분명히 알 수 없다.
304) 원문의 상인(上人)은 덕이 높은 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305) 처사(處士):세상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사는 이, 거사(居士)라고도 한다. 곧 출
가하지 않고 불도(佛道)에 힘쓰는 이를 말한다.
세 곳의 관음상・백률사
[해제]
이 백률사편은 바로 앞의 중생사(衆生寺)편과 다음의 민장사(敏藏寺)편
과 함께 관음의 영험 내용을 담고 있는 「세 곳의 관음상(三所觀音)」 항목의
하나이다. 신라 불교 수용기에 이차돈의 순교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백률사에 관음상이 있어 영험이 많았음을 소개한 내용이다. 백률사 관음상
은 중국인이 만들었다고도 하는데 도리천에 왕래했다는 설화가 전해질 만
큼 이름난 관음상이었다. 효소왕 때 국선(國仙)인 부례랑(夫禮郞)이 강원
도 북쪽 해안에 놀러갔다가 이민족에게 붙들려 가고 뒤따라 궁궐 창고에
보관하던 신적(神笛) 만파식적(萬波息笛)과 현금(玄琴)도 없어졌는데, 부
례랑의 양친이 백률사 관음상에 빌어 잃어버린 보물과 함께 돌아왔다는 이
야기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널리 알려졌던 현실구제적인 관음신앙의 모습
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 편의 기록은 관음 영험에 이어 국왕이 영
험을 보인 백률사에 비단과 토지를 시주하였고 백성들의 조세를 면제해주
고 국선과 부례랑 일가족에게 관작을 봉해 주었던 사실을 싣고 있어 당시
사회에서 차지하던 국선의 비중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사원의 주지를 봉
성사(奉聖寺)로 이적하고 국선을 수행하여 찾고자 애썼던 안상(安常)을 대
통(大統)으로 삼았다는 내용도 있어 당시 승관(僧官)의 운용 실상을 살필
수 있는 단편적인 자료가 된다. 마지막에는 만파식적의 이적 사례를 부기
하고 대표적인 화랑의 낭도에 대한 이야기를 곁들이고 있다. 특별한 자료
는 명기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상에서 전하기를’, ‘어떤 본에
는’, ‘별도의 전기’ 등을 들어 비교하고 있어 여러 기록을 토대로 새로 엮은
것으로 생각된다. 백률사에는 관음상 외에 신라시대의 우수한 대형 동조
약사여래입상이 제작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역주]
세 곳의 관음상-2 백률사
계림(鷄林)306)의 북쪽 산을 금강령(金剛嶺)307)이라 하는데, 산의 남쪽에
백률사(栢栗寺)308)가 있다. 절에는 관음상 하나가 있는데 언제 처음 만든
것인지는 모르나 영이함이 자못 많았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중
국의 뛰어난 장인이 중생사(衆生寺)309) 관음상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
다.”라고 한다. 민간에서 전해지기를 “이 관음대성이 일찍이 도리천(忉利
天)310)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법당에 들어갈 때 밟았던 돌 위에 발자국이
남아 지금까지 닳지 않았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부례랑(夫禮郞)을 구
해 돌아올 때 보인 자취이다.”라고 한다.
栢栗寺
鷄林之北岳, 曰金剛嶺. 山之陽, 有栢栗寺, 寺有大悲之像一軀,
不知作始, 而靈異頗著. 或云,“ 是中國之神匠, 塑衆生寺像時
竝造也.” 諺云,“ 此大聖, 曾上忉利天, 還來入法堂時, 所履石
上脚迹, 至今不刓.” 或云,“ 救夫禮郞還來時之所視迹也.”
306) 계림(鷄林):경주의 신라 왕성인 월성(月城) 가까이에 있는 숲으로 신라 사람들
이 신성하게 여기던 성소이다. 본래 시림(始林)이었는데 이곳에서 닭이 우는 소
리를 듣고 가서 나뭇가지에 걸린 금빛 함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서 김씨의 시조
인 김알지(金閼智)가 태어았다는 설화를 간직한 곳이어서 시림이라는 이름을
계림(鷄林)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후에 신라의 국호로도 쓰이게 되었다.(『삼국
사기』권1 탈해니사금 9년 3월 “王夜聞, 金城西始林樹間, 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 掛樹枝, 白雞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櫝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
容奇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聰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 姓金氏, 改始林名雞林, 因以爲國號.”)
307) 금강령(金剛嶺):경주 북쪽의 금강산. 금강산은 신라의 영험한 곳 네 곳 중 하나로
중시되었다.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기 위한 이차돈의 순교 때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가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고, 이에 따라 머리가 떨어진 곳 혹은 금강산 서쪽
고개에 장례지냈으며 좋은 곳을 찾아 자추사(刺楸寺)를 지었다고 한다. 이 산의
기슭에는 굴불사(掘佛寺) 터와 사면석불이 있고 산 중턱에 백률사가 있다.
308) 백률사(栢栗寺):경주시 동천동 금강산에 있는 절. 법흥왕 14년(527)에 불교의
전파를 위하여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했을 때, 그의 목을 베자 흰 우유가 솟았
고, 잘린 목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졌는데, 목이 떨어진 곳이 금강산
으로 지금의 백률사 자리였다고 한다. 그곳에 장사 지내고 터를 잡아 다음해인
법흥왕 15년(528)에 사람들이 절을 세우니, 그 절이 자추사(刺楸寺)로서 곧 백률
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헌덕왕 9년(817)에 이차돈의 순교를 기리는 이들
이 모여 만든 예불향도(禮佛香徒)들이 ‘이차돈순교비’라고도 하는「백률사석당
(栢栗寺石幢)」을 건립하였다. 이 석당은 탑신이 남아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
고 있다. 또한 백률사에는 8세기 중반의 우수한 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이
만들어져 역시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전단관음상이 조선 초까지 전
해져 1412년(태종 12)에 개경사(開慶寺)로 이안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경주
부윤이 중수하기도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고, 1600년경에 경주 부
윤(府尹) 윤승순(尹承順)이 중건하고 대웅전을 중창하였다. 현재는 대웅전 요사
채 선원 등이 남아 있다.
309) 중생사(衆生寺):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던 절. 이 글의 바로 앞 편인 『삼국유사』
권3 탑상「삼소관음 중생사」편에 이 절에 얽힌 설화가 전해진다. 중국 오(吳)나
라의 한 화공(畵工)이 이 절에 관세음보살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많은 영험이 있
었고, 신라 말에 최은함이 이 보살상에 기도를 올린 후 최승로(崔承老)를 얻었다
고 한다. 이외에도 고려시대에 이 절의 주지 성태(性泰)가 시주를 받지 못해 절
운영이 어려워질 것을 걱정하자, 이 보살상이 금주(金州) 사람들의 시주를 구해
주었다고 하고, 또한 법당에 화재가 나자 보살상이 스스로 절 마당으로 옮겨와
재난을 피하는 영험을 보였다고 한다.
310) 도리천(忉利天): Trāyastrimśa. 욕계 6천의 제2천. 33천으로 번역된다. 원래 인
도 신화에 나오는 산이었는데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수미산(須彌
山)이 우뚝 솟아 있고 수미산을 중심으로 주위에 여덟 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
다가 둘러 싸고 있어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고 한다. 일곱 번째의 산 바깥으로 짠
바다가 있고 그 바깥으로 철위산(鐵圍山)이 있어 수미산의 사대주를 이루는데
그 중의 남쪽인 염부제주(閻浮提洲)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 위에 사천왕천
이 있고 그 위 곧 수미산 정상에 도리천이 있다고 한다. 도리천은 제석천(帝釋
天)이 주인이 되어 사방에 팔천을 거느리고 있어 삼십삼천이라고도 부른다.
천수(天授)311) 3년(692)312) 임진년 9월 7일에 효소왕(孝昭王)313)이 대현
(大玄) 살찬(薩湌)314)의 아들 부례랑을 받들어 국선(國仙)315)으로 삼았다.
(부례랑은) 천 명의 낭도를316) 거느렸는데, 안상(安常)317)과 특히 친하였다.
천수 4년(693) 〈곧 장수(長壽) 2년이다〉계사년 봄 3월에 낭도를 데리고 금란(金
蘭)318)에 놀러 갔는데 북쪽 바닷가319) 경계에 이르러 오랑캐320)에게 붙들
려 갔다. 문객들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돌아왔는데 안상만이 뒤쫓아
갔으니 이것이 3월 11일의 일이다. 효소대왕이 이를 듣고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며 말하기를, “선왕321)께서 신적(神笛)을 얻어 나에게 전해주어 지금
현금(玄琴)과 함께 내고(內庫)에 간직해 두었는데 무슨 연유로 국선이 갑
자기 적의 포로가 되었는가. 어찌해야 좋은가?”라고 하였다.〈현금(玄琴)과 신
적(神笛)의 일은 다른 전에 갖추어 실었다.322)〉그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
庫)323)를 덮어 왕이 또 크게 놀라 검사해 보도록 하였더니 천존고 안의 현
금과 신적 두 보물이 없어졌다. (왕이) 이르기를, “짐을 어찌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324) 지난 번에는 국선을 잃고 또 현금과 신적을 잃었는가.” 하
고는 천존고를 지키던 관리 김정고(金貞高) 등 5인을 감옥에 가두었다. 4월
에 나라에 현상을 모집하기를, “현금과 신적을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한 해
의 조세를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5월 15일에 부례랑의 양친이 백률사의 관음상 앞에 가서 며칠 저녁에 걸
쳐 기도하였더니, 갑자기 향탁(香卓) 위에 현금과 신적 두 보물이 있고 부
례랑과 안상 두 사람이 관음상 뒤에 와 있었다. 양친이 크게 기뻐하여 그
연유를 물었더니 부례랑이 말하기를, “제가 붙들려가서 저 나라의 대도구
라(大都仇羅) 집안의 목장지기가 되어 대오라니(大烏羅尼) 들판에서 방목
하고 있었습니다.〈어떤 본에는 도구(都仇) 집안의 노비가 되어 대마(大磨) 들판에서
방목하였다고 한다.〉갑자기 한 스님이 나타났는데 용모와 거동이 단정하였습
니다. 손에 현금과 신적을 들고 와서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고향을325) 그
리워합니까?’ 하기에 저도 모르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임금과 어버이를
그리워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스님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나를 따라 오시오.’ 하여 마침내 데리고 바닷가에 이르러
또 안상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신적을 쪼개어 둘로 나누어 두 사람에게 주
어 각각 한 쪽씩 타게 하고, 자신은 현금을 타고 둥둥 떠서 돌아오는데 잠
깐 사이에 이곳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모든 사실을 왕에게 아뢰니 왕은 크게 놀라 부례랑을 맞이하게 하
고 현금과 신적도 궁에 들여오게 하였다. (왕은) 각각 50냥짜리 금과 은 다
섯 개의 그릇 두 벌과 마납(磨衲)가사326) 다섯 벌과 대초(大綃)327) 3천 필과
토지 만경을 절에 시주하여 (대비상의) 자애로운 은덕에 보답하였다. 나라
안에 크게 사면하고 사람들에게 관작(官爵) 3급을 주었으며 백성들의 조세
를 3년간 면제하였다. 절의 주지는 봉성사(奉聖寺)328)에 옮겨 지내게 하였
다. 부례랑을 대각간(大角干)329)에 봉하고〈신라의 재상 벼슬 이름이다.〉부친
대현 아찬을330) 태대각간(太大角干)331)에, 모친 용보(龍寶)부인을 사량부
(沙梁部)332) 경정궁주(鏡井宮主)에 봉하였으며, 안상대사는 대통(大統)333)
으로 삼았다. 천존고 관리 5인은 모두 방면하여 각각 관작 5급을 주었다.
天授三年壬辰九月七日, 孝昭王奉大玄薩湌之子夫禮郞爲國
仙, 珠履千徒, 親安常尤甚. 天授四年〈卽長壽二年〉癸巳暮春之
月, 領徒遊金蘭, 到北溟之境, 被狄賊所掠而去, 門客皆失措而
還, 獨安常追迹之, 是三月十一日也. 大王聞之, 驚駭不勝, 曰
“先君得神笛, 傳于朕躬, 今與玄琴, 藏在內庫, 因何國仙, 忽
爲賊俘, 爲之奈何.” 〈琴笛事, 具載別傳.〉 時有瑞雲覆天尊庫, 王
又震懼, 使檢之, 庫內失琴笛二寶. 乃曰,“ 朕何不吊, 昨失國
仙, 又亡琴笛.” 乃囚司庫吏金貞高等五人. 四月募於國曰, “得
琴笛者, 賞之一歲租.”
五月十五日, 郞二親就栢栗寺大悲像前, 禋祈累夕, 忽香卓上
得琴笛二寶, 而郞常二人, 來到於像後. 二親顚喜, 問其所由
來. 郞曰,“ 予自被掠, 爲彼國大都仇羅家之牧子, 放牧於大烏
羅尼野, 〈一本作都仇家奴, 牧於大磨之野.〉 忽有一僧, 容儀端正, 手
携琴笛, 來慰曰,‘ 憶桑梓乎,’ 予不覺跪于前曰,‘ 眷戀君親,
何論其極,’ 僧曰, ‘然則宜從我來,’ 遂率至海壖, 又與安常會,
乃批笛爲兩分, 與二人, 各乘一隻, 自乘其琴, 泛泛歸來, 俄然
至此矣.” 於是具事馳聞, 王大驚使迎, 郞隨琴笛入內. 施鑄金
銀五器二副各重五十兩, 摩衲袈裟五領, 大綃三千疋, 田一萬
頃, 納於寺, 用答慈庥焉. 大赦國內, 賜人爵三級, 復民租三年.
主寺僧, 移住奉聖. 封郞爲大角干,〈羅之冢宰爵名〉 父大玄阿湌
爲太大角干, 母龍寶夫人爲沙梁部鏡井宮主. 安常師爲大統.
司庫五人皆免, 賜爵各五級.
311) 천수(天授):당(唐) 무측천(武則天)의 연호. 690~691년, 신문왕 10~11년.
312) 천수(天授)연호는 691년까지 사용하였으므로 692년은 장수(長壽) 원년에 해당
한다. 효소왕 원년.
313) 효소왕(孝昭王):신라 제32대 왕. 재위 692~702년. 성 김, 이름은 이홍(理洪)·이
공(理恭). 신문왕의 장자. 어머니는 흠운(欽運)의 딸인 신목왕후(神穆王后) 김씨.
691년(신문왕 11)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692년에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
위 초반에 의학교육기관인 의학(醫學)을 설립하여 의학박사를 두었으며, 695년
에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을 둠으로써 이전의 동시전(東市典)과 함께
왕경의 물화 유통이 원활해졌다. 을 쉽게 하였다. 698년에 일본의 사신을 접견
하고 69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양국과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유지하였다. 700년에는 왕자가 없어 왕위계승과 연관된 분란이 일어나기도 하
였다.
314) 살찬(薩喰):사찬(沙飡)·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간(沙干)이라고도 한다.
신라 17관등의 제 8관등이다. 육두품 이상이 받을 수 있는 관등이다.
315) 국선(國仙):화랑을 말한다. 『삼국사기』에서는 모두 화랑이라고 하였으나 『삼
국유사』에서는 화랑(花娘)이라는 한번의 표기 외에는 모두 국선의 명칭을 썼
다.(「彌勒仙花」등) 조선시대의 인식도 비슷한 경향을 보여 준다.(安鼎福 『東史綱
目』권3상 진흥왕 37년 “花郞亦曰國仙”)
316) 원문의 주리(珠履)는 구슬로 만든 신으로 대개 상객(上客)이 신는다. 흔히 ‘주리
삼천’은 빈객이 많음을 말하는 것과 같이 여기서 말하는 ‘주리천도’는 낭도가 많
음을 말한다.
317) 안상(安常):화랑 부례랑과 함께 활동한 승려. 화랑의 활동에는 승려가 함께 하
여 지도적 역할을 맡았음을 알려주는 예이다.
318) 금란(金蘭):강원도 통천(通川). 이곳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동해안 일대는 화랑
들의 중요한 유람지 중의 하나였다. 진흥왕 때 설원랑(薛原郞)을 국선으로 봉하
여 이가 화랑국선(花郎國仙)의 처음이었기에 명주(溟州)에 비를 세웠다는 것도
이런 사실을 알려준다.(『삼국유사』권3 탑상「彌勒仙花」)
319) 원문의 북명(北溟)은 북쪽 바닷가로 볼 수도 있고, 실제 화랑들이 자주 유람하
던 명주(강릉) 북쪽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내용상으로는 같은 지역을 가리킨다.
320) 원문의 적적(狄賊)은 말갈을 가리킨다. 이 설화가 이루어진 바로 그 시기에(692
년) 발해가 건국되었으므로 이 말갈은 발해와 연관을 갖는 세력이라 할 수 있다.
321) 선왕은 효소왕의 부왕인 신문왕(神文王)을 말한다. 신문왕 2년에 신적을 얻었
다.(『삼국유사』권2 기이「萬波息笛」)
322) 신적(神笛)에 대해서는 권2 「만파식적」에 내력이 실려 있으나 현금(玄琴)은 관
련 기록이 없다. 신적은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감은사를
창건하고 참배하던 중에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대나무를
얻어 이것으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하리라는 용의 말에 따라 이것
을 가지고 와서 피리를 만들어 천존고에 보관하였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 비가 오고 비가 개이며 바람이 멎고 파도가 가라
앉는다 하여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323) 천존고(天尊庫):신이한 능력을 가진 만파식적을 만들어 보관한 신라 왕성 월성
(月城)의 수장고. (『삼국유사』권2 기이「萬波息笛」)
324) 원문의 불적(不吊)은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325) 상재(桑梓):뽕나무와 가래나무, 곧 고향집이나 고향을 이른다.
326) 마납가사(摩衲袈裟):마납은 법복(法服)의 한 가지로 금빛 나는 좋은 가사를 말
한다. 마(磨)는 금색 빛의 좋은 비단이다.
327) 대초(大綃):비단의 한 종류.
328) 봉성사(奉聖寺):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던 절.『삼국유사』에는 경주의 봉성사 외
에 밀양에도 보양(寶壤)에 의해 고려초에 봉성사가 창건되었다고 한다.(『삼국유
사』권4 의해「보양이목). 경주 봉성사의 절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문왕 5년(685)
에 밀교고승 혜통(惠通)이 신문왕이 병이 난 것을 고쳐주면서, 왕의 전생에 재
상으로서 양민인 신충(信忠)을 잘못하여 노예가 되게 하여 생긴 원망이라 하
고 그를 풀려면 신충을 위해 절을 창건하도록 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삼
국유사』권5「혜통항룡」)『삼국사기』에도 신문왕 5년 3월에 창건되었다고 하였
다.(『삼국사기』권8 신문왕 5년 3월 “奉聖寺成”) 이 봉성사에는 성전(成典)이 설치
되었는데, 7개 성전사원 중에서도 사천왕사 다음으로 꼽히는 중요한 사원이었
다.(『삼국사기』권38 직관 상)
329) 대각간(大角干):17관등의 제1관등인 각간(角干) 위에 시설한 비상위직. 나마와
대나마 등의 관등에도 중위(重位)직을 두어 관등제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노력
이 있었는데, 대각간 관등은 최고위 세력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태종
7년(660)에 백제를 패망시킨 공로를 인정하여 김유신에 대각간을 수여한 기록
이 있다.(『삼국사기』권38 직관지상 대각간)
330) 앞에서는 사찬(제8관등)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아찬(제6관등)으로 나온다. 아
찬은 육듀품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관등이다.
331) 태대각간(太大角干):17관등 위에 시설한 비상위직. 문무왕 8년(668)에 고구려
를 패망시킨 김유신의 공로를 인정하여 태대각간을 수여하였다.(『삼국사기』권
38 직관지상 태대각간)
332) 사량부(沙梁部):삼국시대 신라 왕경(王京)을 구성하고 있던 6부의 하나.『삼국
사기』에 의하면, 유리이사금 9년(32년) 종래의 육촌(六村) 중의 하나이던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을 개명하여 이에 최씨(崔氏) (삼국유사에는 정씨(鄭氏)라 하
였음) 성(姓)을 배정하였다고 한다. 6부는 연합하여 사로국(斯盧國)을 형성하였
는데, 사량부는 그 가운데 양부(梁部)와 더불어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6세기
초반 사량부의 장은 갈문왕(葛文王)이 겸임하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태조 23
년(940)에 남산부(南山部)로 개칭되었다.
333) 대통(大統):정법전(政法典)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신라 승관의 하나.
최고위 승직인 국통(國統)에 이은 상위 중앙 승관. 대통은 『삼국사기』의 직제에
는 나오지 않는 직명이나 「황룡사목탑찰주기(皇龍寺木塔刹柱記)」에는 국통 다
음에 대통이 열거되어 있고 정법화상과 겸직이 가능한 직책으로 나타나, 대통
이 국통에 이은 상위직임을 알 수 있다. 정법전에는 국통을 정점으로 대통 판정
법사(判政法事, 政法和尙) 대서성(大書省) 소서성(小書省) 대사(大舍) 사(史)의
중앙 승관과 주통(州統) 군통(郡統)의 지방담당 승관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
다. 정법전의 기능은 왕실의 불교 사업을 감독 지도하고 승려들에 대한 예우나
초빙 등을 연계하는 등의 일을 맡아 보았다.
6월 12일에 혜성(彗星)이 동쪽에 나타났다. 17일에는 다시 (혜성이) 서쪽
에 나타났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현금과 신적의 상서에 대해 작위를
봉하지 않아 일어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적의 칭호를 책봉하여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더니 혜성이 곧 없어졌다. 후에도 신
령스러운 이적이 많으나 글이 번거로워 싣지 않는다.
세상에서 안상을 영랑(永郞)334)의 뛰어난 낭도라 하나 자세히 알 수 없
다. 영랑의 낭도로는 진재(眞才)나 번완(繁完) 등의 이름만 알려졌는데 이
들 또한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자세한 것은 별도의 전기가 있다.〉
六月十二日, 有彗星孛于東方, 十七日, 又孛于西方. 日官奏
曰,“ 不封爵於琴笛之瑞.” 於是冊號, 神笛爲萬萬波波息, 彗乃
滅. 後多靈異, 文煩不載.
世謂安常爲俊永郞徒, 不之審也. 永郞之徒, 唯眞才 繁完等知
名, 皆亦不測人也. 〈詳見別傳〉
334) 영랑(永郞):술랑(述郞)·남석랑(南石郞)·안상랑(安祥郞)과 함께 신라 사선(四
仙) 중의 하나로 꼽힌 대표적인 화랑이다. 금강산 등 동해안 방면의 유람을 많이
하여 그의 이름이 담긴 유적이 있기도 하다. 영랑호(永郞湖) 같은 것이 그 예이
며 금강산 삼일포(三日浦)에는 ‘영랑도남석행(永郎徒南石行)’이라 바위에 새겨
진 글씨가 있다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45 高城三日浦, 安軸,「三日浦記」) 울
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서석(書石)의 명문에 ‘술년 6월 2일 영랑 성업
(戌年六月二日永郎成業)’이라 한 것이 보이고 있어, 영랑이 화랑으로서의 수련기
간을 마친 것을 기념한 각문(刻文)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세 곳의 관음상・민장사
[해제]
이 민장사편은 앞의 중생사(衆生寺)편과 백률사(栢栗寺)편과 함께 관음
의 영험 내용을 담고 있는「세 곳의 관음상(三所觀音)」항목의 마지막 편이
다. 경덕왕 때 바다에서 장사하는 장춘(長春)이 풍랑으로 실종되자 그 모친
이 민장사 관음상에 기도하여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이다. 이 신앙 사례
는 관음신앙의 주 경전인『법화경』보문품에 나오는 현실구제 신앙의 전형
적인 보기를 보여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왕이 절에 토지와 선물을 주었다
는 기록을 부가하였는데, 이는 일반민들의 불교 신앙 영험에 대해 국왕이
관심을 갖고 대한 일면을 보게 하는 대목이다. 또한 민장사는 귀족 민장이
집을 절로 만든 것이라는 기록에서 신라 사원 건립의 중요한 유형의 한 예
를 여기서도 확인하게 되며, 그렇게 건립된 사원은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되
어 널리 이용할 수 있었음을 알게 하는 자료이다. 인용 자료는 따로 밝히지
않았다.
[역주]
세 곳의 관음상-3 민장사
우금리(禺金里)의 가난한 여인 보개(寶開)에게 장춘(長春)이라는 아들
이 있었다. 바다 장사꾼을 따라 갔는데 오랫동안 소식335)이 없었다. 어머니
가 민장사(敏藏寺)의 [이 절은 민장 각간(角干)336)이 집을 내놓아 절로 삼은
것이다.] 관음상 앞에 가서 7일 동안 정성으로 기도하였더니 장춘이 갑자
기 돌아왔다. 그 이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서 회오리바람이 불
어 배가 부서져 동료들이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저는 널판 한쪽
을 타고 오(吳)지방337) 바닷가에 닿았습니다. 오지방 사람들이 저를 데려
다 들판에서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고향에서 온 듯한 이상한 스님이 은
근히 위로하고 저를 데리고 함께 가는데 앞에 큰 개천이 나오자 스님이 저
를 겨드랑이에 끼고 뛰어 넘었습니다. 정신이 희미한 가운데 우리말 소리
와 곡하며 우는 소리가 들려서 살펴보니 벌써 여기에 와 있었습니다. 해 질
무렵 신시338)에 오지방을 떠났는데 이곳에 이르니 겨우 술시339) 초가 되었
습니다.” 라고 하였다. 곧 천보(天寶)340) 4년(745) 을유년 4월 8일의 일이었
다. 경덕왕(景德王)341)이 이 말을 듣고 토지를 절에 시주하고 또 재물과 선
물을 바쳤다.
敏藏寺
禺金里貧女寶開, 有子名長春. 從海賈而征, 久無音耗. 其母就
敏藏寺[寺乃敏藏角干, 捨家爲寺.]觀音前, 克祈七日, 而長春忽
至. 問其由緖曰,“ 海中風飄舶壞, 同侶皆不免, 予乘隻板, 歸
泊吳涯. 吳人收之, 俾耕于野. 有異僧如鄕里來, 弔慰勤勤, 率
我同行, 前有深渠, 僧掖我跳之. 昏昏間如聞鄕音與哭泣之聲,
見之乃已屆此矣. 日晡時離吳, 至此纔戌初.” 卽天寶四年乙酉
四月八日也. 景德王聞之, 施田於寺, 又納財幣焉.
335) 원문의 음모(音耗)는 음신(音信)과 같은 말로 먼 곳에서 전하는 소식이나 편지
를 말한다.
336) 각간(角干):이벌찬(伊伐飡)·이벌간(伊伐干)·우벌찬(于伐飡)·각찬(角粲) 등이
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주다(酒多)라 하였다. 진골(眞骨)만이 하는 벼슬로, 신라
17관등제와는 별도로 제정되었다.
337) 오(吳)지방:중국 강소성 지방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양자강 일대의 중국 동
남방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오라는 이름의 나라도 여럿 있어서, 중국 춘
추 전국 시대에 십이 열국 가운데 주나라 문왕의 백부 태백(太白)이 세운 오나
라가 양자 강 하류 지역을 영유하였는데 서기전 473년에 월(越)나라의 구천(句
踐)에게 멸망하였다. 삼국 시대 오나라는 222년에 손권이 건업(建業)에 도읍하
고 강남에 세운 나라이다. 오대십국 가운데 902년에 양행밀(楊行密)이 양주에
도읍하고 회남(淮南) 강동(江東)에 세운 오나라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당 중기
에는 오나라가 없으므로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보아야 한다.
338) 포시(晡時):신시(申時)를 말함. 오후 3시부터 5시 사이.
339) 술시(戌時):오후 7시부터 9시 사이.
340) 천보(天寶):당 현종(玄宗)의 연호. 742~756년. 경덕왕1~15년.
341) 경덕왕(景德王):신라 제35대 왕. 재위 742~765. 왕권 안정을 위해 한화정책(漢
化政策)을 시행하고 9주(州)·5소경(小京)·117군(郡)·293현(縣)을 정비하였다.
754년에 황룡사종을 주조하고, 불국사(佛國寺)와 석불사(石佛寺)와 굴불사(掘佛
寺) 등을 창건하였다. 4-7 주188) 참조
전후하여 가져온 사리
[해제]
석가모니에 대한 불교신앙의 주요한 대상인 진신 사리(舍利)의 수용과
신앙, 부처 어금니의 수용과 신앙의 구체적인 모습, 불경을 들여온 이야기
들을 모은 편이다. 중국에서 부처의 진신사리를 가져온 사실을 중심으로
엮었으므로 제목을 「전후하여 가져온 사리」라고 하였다. 진흥왕 때부터 사
리가 중국에서 들어왔음을 기록하고, 선덕왕 때 자장이 가져온 통도사 진
신사리에 대한 이야기가 전반부 사리신앙 이야기의 핵심을 이룬다. 고려에
들어 여러 사람들이 사리와 연관된 행적을 남겼다. 광종 때 황룡사탑이 벼
락에 맞았을 때 통도사 사리함에 얼룩이 생겨난 것을 시작으로, 몽고 침공
기인 고종 때 직접 사리함을 열어 보고 사리가 4과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
시 봉안하였는데 원 간섭기에 들어 원의 사신들이 참배하니 변신사리가 사
리함 바깥에 생겨났다는 이야기이다. 다음으로 부처 어금니에 대한 신앙도
오랜 기간 동안 광범위하게 열려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라 의상대사가 도
선에게 부탁하여 제석궁에서 어금니를 빌려왔고, 문성왕 때는 중국에 간
사신이, 그리고 고려 예종 때 역시 중국에 간 사신이 어금니를 가져와서 이
것은 궁궐에 봉안해 두었다고 한다. 예종 때는 송에서 바다에 띄워 보낸 부
처 어금니를 구해 와서 역시 궁궐 안에 전각을 세워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어금니는 몽고 침공으로 강화로 조정을 옮길 때 챙기지 못하였다가, 담당
관리들을 조사하여 다시 찾아내고 겹겹이 쌓인 사리함을 확인한 후 불아전
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이런 내용은 당시 궁궐 기도승인 각유(覺猷)로부터
얻어 기록하였음을 밝혔다. 그리고 불경은 진흥왕 때의 유사와 명관에서
시작하여 선덕왕 때의 자장, 흥덕왕 때의 구덕, 문성왕 때의 원홍, 신라말의
보요, 고려 태조 때의 묵화상, 예종 때의 혜조, 선종 때의 대각국사 등이 차
례로 가져온 사실을 기록하였다. 자료로는 『삼국사기』와 일반 전승 기록,
고기, 혜심의 시, 당시 상황을 직접 담당했던 승려의 기록, 팽조적의 시 등
다양한 여러 기록을 활용하였다. 마지막 부분에는 일연의 제자인 무극(無
極)이 의상이 부처 제석궁에서 어금니를 빌려왔다는 사실을 고증하기 위
해 부석본비(浮石本碑)의 단편적인 기록을 들어 대조하였는데, 여기에 제
시한 의상의 생년을 비롯하여 입당을 시도한 해, 입당한 해, 신라에 돌아온
해, 입적년은 의상 전기를 구성하는데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된다. 무극은 의
상비와의 대조를 통해 의상이 빌려온 부처 어금니는 빌려온 기한이 차서
다시 천궁으로 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1284년에 부처 어금니와 낙산사
수정염주에 국왕과 여러 사람들이 예배하였다는 사실도 부가하였다. 무극
의 추기는 고려 후기의 사리신앙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알려줌과 동시에
지금 보는 『삼국유사』가 무극의 일부 수정을 거쳐 간행되었음을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역주]
전후하여 가져온 사리
국사(國史)342)에 말하였다. “진흥왕(眞興王)343) 태청(太淸)344) 3년(549)
기사년에 양(梁)나라의 사신 심호(沈湖)가 사리 몇 과를 보내왔다.345) 선덕
왕(善德王)346) 때인 정관(貞觀)347) 17년(643) 계묘년에 자장(慈藏)348)법사
가 부처의 머리뼈와 부처의 어금니와 부처의 사리 백 과와 부처가 입었던
붉은 비단에 금박이 찍힌 가사 한 벌을 가지고 와서, 사리는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탑(皇龍寺塔)349)에, 다른 하나는 태화사(太和寺)350) 탑에, 또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通度寺)351) 계단(戒壇)352)에 두었는데 그 나머
지는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계단은 2단으로 상단의 가운데에 엎어놓은
가마솥과 같은 덮개돌을 두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예전에 우리나라353)에 차례로 두 안렴사(按
廉使)354)가 있어 계단에 예배하고 돌뚜껑을 들어 경배하였다. 먼저는 긴 이
무기가 함 속에 있었고, 나중에는 큰 두꺼비가 돌의 배부분에 웅크리고 있
었다. 이로부터 함부로 (돌을) 들지 못하였다.”
근래에 들어 상장군(上將軍)355) 김이생(金利 生)356)과 시랑(侍郞)357) 유
석(庾碩)358)이 고종(高宗) 때에 왕명을 받들어 강동(江東)359)을 지휘하였
는데, 장절(仗節)360)을 가지고 절에 이르러 돌을 들고 예배하고자 하였다.
절의 스님들은 지난 일을 들어 난감해 하였으나 두 사람이 군사를 시켜 억
지로 들어냈다. 안에는 작은 돌함이 있고 함 속에는 유리통을 두었는데, 통
속에는 사리가 다만 네 과만 있었다. 서로 돌려보며 첨례하고 예경하였는
데 통에는 조금 상하여 금이 간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이 마침 가지고 있
던 수정함 하나를 시주하여 함께 간직하게 하고 이 일을 기록해두니, 강화
도로 서울을 옮긴 지361) 4년째인 을미년(1235)이었다.
고기(古記)에 “(사리) 백 과를 세 곳에 나누어 두었다.”라고 하였는데, 지
금은 네 개 뿐이라 한다. (사리가) 숨고 나타남이 사람에 따라 많고 적으니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또 사람들이 “황룡사탑이 불타던 날 돌뚜껑의 동쪽면에 처음으로 큰 얼
룩이 생겨나 지금까지 남아 있다.”라고 한다. 곧 요나라 응력(應曆)362) 3년
(953) 계축년이고 우리나라363) 광종(光宗)364) 5년으로 탑의 세 번째 재난이
었다.365)
조계산(曹溪山)366)의 무의자(無衣子)367)가 시를 지어 남기기를 “황룡사
탑 재난 당했다고 듣던 날, 한 면 연이어 타버려 틈도 보이지 않았다.”368)고
한 것이 이것이다.
지원(至元)369) 갑자년(1264) 이래로 원나라의 사신과 본국의 사신들이
370) 다투어 와서 보고 예배하고 사방에서 스님들이371) 모여들어 참배하는
데 혹은 (돌뚜껑을) 들어 보고 혹은 들어 보지 않았다. 진신사리 4과 이외에
변신(變身) 사리372)가 부서져 모래처럼 되어 돌함 바깥에 드러났는데 이상
한 향기가 짙게 풍기며 며칠을 그치지 않을 때가 가끔 있었으니 이것은 말
세(末世)373)에 한 지방에서 생겨난 기이한 일이었다.
前後所將舍利
國史云, “眞興王太淸三年己巳, 梁使沈湖送舍利若干粒. 善德
王代貞觀十七年癸卯, 慈藏法師所將佛頭骨 佛牙 佛舍利百粒
佛所著緋羅金點袈裟一領, 其舍利分爲三, 一分在皇龍塔, 一
分在太和塔, 一分竝袈裟在通度寺戒壇, 其餘未詳所在.” 壇有
二級, 上級之中, 安石蓋如覆鑊.
諺云,“ 昔在本朝, 相次有二廉使, 禮壇擧石鑊而敬之. 前感脩
蟒在函中, 後見巨蟾蹲石腹. 自此不敢擧之.”
近有上將軍金公利生, 庾侍郞碩, 以高廟朝受旨, 指揮江東, 仗
節到寺, 擬欲擧石瞻禮. 寺僧以往事難之, 二公令軍士固擧之.
內有小石函, 函襲之中, 貯以瑠璃筒, 筒中舍利只四粒. 傳示瞻
敬, 筒有小傷裂處. 於是庾公適蓄一水精函子, 遂奉施兼藏焉,
識之以記, 移御江都四年乙未歲也.
古記稱,“ 百枚分藏三處”, 今唯四爾. 旣隱現, 隨人多小, 不
足怪也. 又諺云, “其皇龍寺塔災之日, 石鑊之東面, 始有大斑,
至今猶然.” 卽大遼應曆三年癸丑歲也, 本朝光廟五載也, 塔之
第三災也. 曹溪無衣子留詩云, “聞道皇龍災塔日, 連燒一面示
無間,” 是也. 自至元甲子已來, 大朝使佐, 本國皇華, 爭來瞻
禮, 四方雲水, 輻湊來參, 或擧不擧. 眞身四枚外, 變身舍利碎
如砂礫, 現於鑊外, 而異香郁烈, 弥日不歇者, 比比有之, 此末
季一方之奇事也.
342) 국사(國史):『삼국사기(三國史記)』를 말하는데 여기 인용한 기록과 글자에 차이
가 있다.
343) 진흥왕(眞興王):신라 제24대 왕. 재위 540~576. 한강 유역의 요충지를 획득하
고 대가야를 평정하였으며, 창녕에서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에 이르는 영역을
새로 개척하였다. 4-1 주8) 참조.
344) 태청(太淸):양(梁) 무제(武帝)의 연호. 547~549. 신라 진흥왕 8~10년.
345) “(진흥왕 10년) 봄, 양나라에서 사신과 입학승 각덕에게 불사리를 보냈다. 왕은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서 맞이하게 하였다.(春 梁遣使與入學僧覺德 送
佛舍利 王使百官 奉迎興輪寺前路)”(『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진흥왕(眞興王) 10
년)
346) 선덕왕(善德王):신라 제27대 왕. 재위 632~647. 분황사(芬皇寺)와 영묘사(靈
廟寺)를 창건하였고, 자장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였다. 4-5 주
125) 참조.
347) 정관(貞觀):당 태종(太宗)의 연호. 627~649년. 신라 진평왕 49년~진덕왕 4년.
348) 자장(慈藏):신라시대의 승려. 636년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오대산의 문
수보살을 만나보고 가사(袈裟)와 사리를 받았다.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
寺)에서 도를 닦고 화엄종의 두순(杜順)과 계율종(戒律宗)의 도선(道宣)에게 배
운 뒤, 643년 장경(藏經) 1부와 불구(佛具)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대국통(大國統)
이 되어 승니(僧尼)의 규범과 승통(僧統)을 통괄하였고, 황룡사 9층탑 창건을 건
의, 645년에 완성하였다. 4-5 주122) 참조.
349) 황룡사탑(皇龍寺塔):선덕왕 12년(643)에 자장의 주청으로, 용춘(龍春)의 주선
하에 백제의 장인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해다 2년 뒤에 완성한 목조 구층탑이
다. 탑 높이 183자에 상륜부 42자에 이르는 대탑으로 자장이 중국 오대산에서
얻었다는 사리를 봉안하였다. 이웃 나라의 위험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한다는 인
연에 따라 건립된 신라 호국의 상징이다. 황룡사 장륙상(丈六像)과 진평왕의 천
사옥대(天賜玉帶)와 함께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존숭되었다. 창건 이후 여
러 차례 파손된 것을 중수하였으며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군의 방화로 소
실되어 지금은 그 기단만 남아 있다.(『삼국유사』 권3 탑상 「皇龍寺九層塔」)
350) 태화사(太和寺):경남 울산시 태화동 반달골에 있던 절. 자장(慈藏)이 중국 오대
산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얻고 다시 태화지(太和池) 주변을 지나는데 신인(神
人)이 나타나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나라가 평안할 것이라는 감응을 받고,
이어 탑을 세운 후 팔관회를 열어 죄인을 사면하고 신인 자신을 위해 서울 남쪽
에 절을 세워줄 것을 말하였다. 자장이 이에 따라 세운 절로서 태화지(太和池)의
이름을 따서 태화사라 하였다. 9세기경에 조성된 종형(鐘形) 12지신상부도가 출
토되었다. 고려말 충숙왕대까지 남아 있었으나 그 후 조선 전기 이전에 폐사되
었다.
351) 통도사(通度寺):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靈鷲山)에 있는 절. 646
년(선덕왕 15)에 자장(慈藏)이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사리(舍利)·가
사(袈裟)·대장경(大藏經) 등을 금강계단(金剛戒壇)에 봉안하고 창건하였다. 이
에 따라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계단(戒壇)이 있는 불보(佛寶)사찰로서 한국
불교의 첫손 꼽히는 종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다. 계단은 지
금도 남아 있으며 계단 앞에 세운 불상이 없는 대웅전을 비롯한 대광명전 등 넓
은 사역에 수많은 전당이 세워져 있는 대찰로서 문화재도 많다.
352) 계단(戒壇):수계(授戒) 의식을 거행하고 계를 설하기 위해 마련한 단(壇). 계장
(戒場)에 평지의 조금 높은 곳에 토단(土壇)을 쌓아 만든 것으로 건물을 만들지
않고 야외에 만들어 결계(結界)를 표시함으로써 이루어진다.『석씨요람(釋氏要
覽)』에 따르면 인도에서 기원정사에 처음으로 계단을 건립했다고 하며, 나란타
사의 계단은 평지에 사방 1장 정도에 높이 2자 되는 담장을 쌓고 담장 안에 좌기
(坐基)를 마련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삼국시대에 처음 계단이 건립
된 후 많은 계단이 만들어졌는데, 667년에 도선(道宣)이 장안 교외의 종남산 정
업사(淨業寺)에 정식으로 제정한 계단을 설립하였다. 이 계단은 3층으로 하층 2
장 9척 8촌, 중층 2장 3척, 상층 7척 너비에 높이는 하층 3척, 중층 4척 5촌, 상층
2촌으로 총 7척 7촌이었다 하는데 도선은 이를『계단도경(戒壇圖經)』에 상세하
게 기록하였고 이 제도에 따라 전국에 계단이 건립되었다. 765년에는 임단대덕
(臨壇大德) 10인을 두어 수계할 때 주재하는 삼사칠증(三師七證)의 제도가 만들
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장이 처음 통도사에 건립하였고, 이후 신라 말에는
부석사 화엄사 등에 관단(官壇) 즉 국가의 공적인 계단이 설치되어 승려들의 수
계의식을 시행하였다.
353) 여기서의 우리나라는 고려를 말함.
354) 안렴사(按廉使):고려시대 각 도(道)에 파견된 지방관. 고려 전기부터 두었던 안
찰사(按察使)를 충렬왕 2년(1276) 관제개정에 따라 안렴사(按廉使)로 바꾸었다.
이후에도 여러 번 변화가 있었고, 1388년(창왕 즉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
使)로 개정되면서 도(道)의 장관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기록을 보면 이미 1276년
이전에 안렴사라는 명칭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355) 상장군(上將軍):고려시대 중앙군의 최고지휘관. 2군6위(二軍六衛)에 1명씩 두
어 모두 8명이었으며, 품계는 무관의 최고직인 정3품이다.
356) 김이생(金利 生):고려 고종 때의 무신. 고종 13년(1226) 금(金)의 우가하(于哥下)
가 의주 정주 등지를 침범하자 압록강을 건너 적의 석성을 공파하고 이듬해에
는 동진(東眞)의 군대가 침입하자 화주성(和州城)을 수성하여 낭장(郎將)에서
자문지유(紫門指諭)가 되었다. 1235년 안동인(安東人)이 동경(東京)으로 진격할
때 상장군으로 동남도지휘사(東南道指揮使)에 임명되어 이를 저지하였다.
357) 시랑(侍郞):고려시대 상서육부(尙書六部)의 차관직인 정4품 관직. 이부(吏部)·
예부(禮部)·공부(工部)에는 각 1명씩 있었고, 병부(兵部)·호부(戶部)·형부(刑
部)에는 각 2명씩 두었다.
358) 유석(庾碩):고려 고종대의 강직한 청백리. 고종 3년(1216) 급제하여 내시에 적
을 두어 합문통사(閤門通事) 사인(舍人)을 지내고 충청 전라의 안찰사를 지냈으
며 고종 22년(1235) 9월에 안동인이 몽고병을 끌어들여 동경을 공략하려 할때
김이생을 따라 동남도지휘부사가 되어 막아냈다.
359) 강동(江東):낙동강의 동쪽을 말함.
360) 장절(仗節):왕명을 받은 장군이나 외국에 가는 사신에게 신표로 주는 깃발을
가리킨다.
361) 강화도로 서울을 옮긴 지:1231년(고려 고종 18년)에 시작된 몽고의 침공에 대항
하여 1232년(고종 19)에 고려 조정이 수도를 강화(江華)로 옮긴 것을 말한다.
362) 응력(應曆):요(遼) 목종(穆宗)의 연호. 951~968년. 고려 광종 2~19년.
363) 우리나라:일연이 살았던 고려시대를 말한다.
364) 광종(光宗):고려 제4대 왕. 재위 949~975년.
365)『삼국유사』권3 탑상「황룡사구층탑」에는 황룡사탑이 선덕왕 12년(643)에 착수
하여 645년에 완성되었고, 효소왕 7년(698)에 벼락을 맞아 성덕왕 19년(720)에
중수하였으며, 경문왕 8년(868)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아 세 번째 수리하였으며.
고려시대 들어와 광종 5년(954)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아 현종 12년(1021)에 수리
하였으며, 정종 1년(1035)에 벼락으로 파손된 것을 문종 18년(1064)에 다섯번째
로 수리하였으며, 헌종 1년(1064)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아 숙종 1년(1096)에 여
섯 번째 수리 한 후, 고종 25년(1238) 몽고병의 침입으로 황룡사 가람 전체가 불
타 버렸을 때 함께 소실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의 일은 세 번째 맞은 벼락이다.
366) 조계산(曹溪山):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승주읍·주암면에 걸쳐 있는 산. 송광
산(松廣山)이라고도 한다. 1200년(신종 3)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수행결사(修行結社)인 정혜사(定慧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修禪社)라 불
렀다. 1205년에 희종이 새로운 선풍을 제창하던 지눌을 위해 송광산을 조계산
으로 고쳤다. 여기서는 무의자 혜심이 주석하던 조계산에 있는 송광사를 가리
킨다.
367) 무의자(無衣子):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 성은 최씨, 나주 출
신. 신종 4년(120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모친
의 사망 이후 조계산 수선사의 지눌(知訥)에게 머리를 깎고 제자가 되었다. 1210
년 지눌을 이어 수선사의 제2세 사주(社主)가 되어 수선사를 크게 확장하고 간
화선법을 계승·진작시켰다. 저술로는『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30권,『심요(心
要)』1편,『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1편,『무의자시집(無衣子詩
集)』2권,『금강경찬(金剛經贊)』1권,『선문강요(禪門綱要)』1권,『조계진각국사어
록(曹溪眞覺國師語錄)』1권 등이 있다.
368) 혜심의 시는「제통도사계단(題通度寺戒壇)」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것으로 여기
인용한 구절 앞에 “석존의 사리는 높은 계단을 진정하고, 엎어진 솥 가운데엔
불 자욱이 있구나.(釋尊舍利鎭高壇 覆釜腰邊有火瘢)”이라는 구절이 있어 절구를
이룬다.(『無衣子詩集』권상 韓 6 p.54하)
369) 지원(至元):원 세조(世祖)의 연호. 1264~1294년 사용. 고려 원종 5년~충렬왕
20년.
370) 원문의 황화(皇華)는 사신을 말한다
371) 원문의 운수(雲水)는 스님을 말한다. 스님들이 구도하기 위해 훌륭한 스승을 찾
아 일정한 곳을 정하지 않고 구름 가듯이 물 흐르듯이(行雲流水) 인연을 따라 이
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데서 나온 말이다.
372) 변신(變身) 사리:원래의 사리인 진신사리가 여러 개의 사리로 나누어 나타나는
분신(分身) 사리를 가리킨다.
373) 말세(末世):말법(末法) 시대, 곧 정법이 끊어져서 불법이 쇠퇴한 시대를 말한
다. 불교에서는 교법(敎法)과 수행과 증과(證果)가 갖추어졌느냐 그렇지 않으냐
에 따라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의 삼시(三時)로 나누는데, 석가가
입멸한 뒤 불법이 유지되어 가르침이 있고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고 그래서 불
과를 증득할 수 있는 시대를 정법시대라 하고, 가르침과 수행자는 있으나 대부
분 불과를 증득하지 못하는 시대를 상법시대라 하며, 가르침은 있으나 수행할
수 도 불과를 증득할 수도 없는 시대를 말법시대라 한다. 시간에 대해서는 이설
이 많은데 대체로 석가입멸 후 500년을 정법 시대로, 그 다음 1000년을 상법 시
대, 그 뒤의 1만 년을 말법의 시대로 구분한다.
당나라 대중(大中)374) 5년(851) 신미년에 중국에 간 사신 원홍(元弘)이
부처 어금니를 가져왔다.375) 〈지금은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 신라 문성왕 때이다.〉
후당 동광(同光)376) 원년(923) 계미년이고 우리나라 태조(太祖)377) 즉위 6
년에 중국에 갔던 사신 윤질(尹質)이 가져온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은378)
지금 북숭산(北崇山) 신광사(神光寺)379)에 있다. 송나라 선화(宣和)380) 원
년(1119) 기해년381)〈예종(睿宗) 15년〉에 조공하러 간 사신 정극영(鄭克永)382)
과 이지미(李之美)383) 등이 가져온 부처 어금니는 지금 내전(內殿)에 모셔
둔 것이 이것이다.384)
唐大中五年辛未, 入朝使元弘所將佛牙.〈今未詳所在. 新羅文聖
王代〉 後唐同光元年癸未, 本朝太祖卽位六年, 入朝使尹質所
將五百羅漢像, 今在北崇山神光寺. 大宋宣和元年己亥385)〈睿
廟十五年〉, 入貢使鄭克永李之美等所將佛牙, 今內殿置奉者,
是也.
374) 대중(大中):당 선종(宣宗)의 연호. 847~859년. 신라 문성왕 9년~헌안왕 3년.
375)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그대로 나온다.(권11 문성왕 13년 “入唐使阿湌元弘, 䝴
佛經幷佛牙來. 王出郊迎之.”)
376) 동광(同光):오대 후당 장종(莊宗)의 연호. 923~925년. 고려 태조 6년~8년.
377) 우리나라 태조(太祖):고려 태조 왕건(王建). 고려 제1대 왕. 재위 918~943. 후삼
국시대에 궁예(弓裔) 하에서 세력을 키워 918년 고려를 건국하고, 935년 투항해
온 신라를 합병한 후에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378)『고려사(高麗史)』에는 923년에 “6월 계미일에 복부경 윤질이 양나라에 사신
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오백나한상을 바치자, 명하여 해주 숭산사에 두게 하였
다.(夏六月癸未, 福府卿尹質, 使梁還獻五百羅漢畫像, 命置于海州嵩山寺.)”(『고려사』
권1 세가 태조 5년)고 한다. 숭산사는 숭산에 있는 절이라는 뜻으로 신광사를 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백나한은 부처의 대표적인 제자 5백인을 말한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으로서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여 세간의 공양을 받을 수 있는 이
를 말한다. 석가가 입멸한 후 수제자인 대가섭이 석가의 재자들을 모아 경전을
편찬하려 할 때 모인 5백인에서 비롯되어, 오백나한상을 그림이나 조상으로 봉
안하고 이를 숭배하는 신앙이 나한신앙이다.
379) 신광사(神光寺):황해도 벽성군 북숭산(北崇山)에 있던 절. 고려 태조 6년(923)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해에 중국 후량에서 오백나한상을 가져와
봉안한 이래 나한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문종 7년(1053)에 나한재(羅漢齋)
를 열었고, 숙종 7년(1102)에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열었다. 충숙왕 복위3년
(1334) 원 순제(順帝)가 원찰로 중건하여 대찰이 되었다. 1677년 화재로 전소되
었으나 다음해 중건하였고 1705년에 나한전을 세웠다.
380) 선화(宣和):북송 휘종(徽宗)의 연호. 1119~1125년. 고려 예종 14년~인종 3년.
381) 기해년:원문에는 기묘로 되어 있으나 예종 15년은 기해년이므로 기해가 맞다.
382) 정극영(鄭克永):1067~1127. 고려시대 문신. 최유청(崔惟淸)의 매부이며, 한안
인(韓安仁)의 외종제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예종 13년(1118) 이
지미(李之美)와 함께 송에 사신으로 가서 문명을 떨쳤으며(『고려사』권14 예종
13년 6월 무인 “御宴親殿置酒, 餞入宋使鄭克永李之美, 召諸王宰樞侍宴.”), 1122년
인종 즉위 후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어 『예종실록』 편수관(編修官)이 되었다.
한안인 사후 유배되었다가 이자겸이 몰락한 후 동경유수사(東京留守使) 위위시
판사(衛尉寺判事) 한림학사 지제고(知制誥)를 지냈다.
383) 이지미(李之美):고려 문신. 이자겸(李資謙)의 아들. 예종 13년(1118) 정극영(鄭
克永)과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권적(權適) 등을 제과(制科)에 합격시켜
준 것과 조서(詔書)를 내려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다.(『고려사』권14 예종
13년 8월 무오 “遣鄭克永李之美如宋, 謝賜權適等制科, 還國御筆詔書. 王親製表文手
書.”) 인종 2년(1124) 이자겸이 공신호(功臣號)를 받을 때 비서감 추밀원부사로
임명되었다. 인종 4년(1126) 판추밀원사로 척준경(拓俊京)의 거사에 이자겸 일
파와 함께 붙잡혀 합주(陜州)에 유배되었다가 1129년 왕의 사면령에 따라 형제
들과 함께 한 곳에 모여 살도록 허락되었다.
384)『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정극영 등이 송에 사신으로 간 것은 예종 13년(즉위
년 기원으로는 14년, 1118) 8월로서 이곳의 1119년이라는 기록과 1년의 차이가
있다. 송의 황제가 보내준 불아(佛牙)와 불두골(佛頭骨)을 외제석원에 두었다가
예종 15년 5월에 불골(佛骨)을 궁중에 들여와 산호정(山呼亭)에 두었다고 한다.
385) 정덕본에는 ‘己卯’로 되어 있으나 예종 15년은 기해년이므로 ‘己亥’로 교감한다.
이렇게들 전해 온다. “옛날에 의상(義相)386)법사가 당나라에 가서 종남
산(終南山)387) 지상사(至相寺)388)의 지엄(智儼)389)존자가 있는 곳에 이르렀
다. 인근에 도선(道宣)390) 율사가 있어 항상 하늘의 공양을 받아 매번 공양
할 때마다 하늘의 부엌에서 음식을 날라왔다. 하루는 도선율사가 의상대사
를 공양에 초청하여, 의상이 가서 자리잡은지 오래되었으나 하늘의 공양이
때가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고 의상이 빈 발우채로 돌아간 다음에야 천사
(天使)가 이르렀다. 도선율사가 묻기를 ‘오늘은 무슨 일로 늦었습니까?’ 하
니, 천사가 말하기를 ‘온 골짜기에 신병(神兵)이 가득 차서 막아 지키고 있
어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율사는 의상대사가 신(神)의
호위를 받고 있음을 알고 그 도력(道力)이 뛰어남에 승복하였다. 그 공양구
를 남겨두었다가 다음날 다시 지엄과 의상 두 사람을 공양에 초청하여 그
까닭을 말하였다. 의상대사가 조용히 도선에게 말하기를, ‘율사께서는 이
미 천제(天帝)의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일찍이 들으니 제석궁(帝釋宮)391)
에 부처의 40개 치아 중에 어금니 하나가 있다 하는데, 우리들을 위해서 인
간 세상에 내려 주기를 요청하여 복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율사는 후에 천사와 함께 그 뜻을 상제(上帝)에게 전하니 상제는 7일 기한
으로 보내주었다. 의상대사가 예경을 마치고 나서 대궐에 모셨다.”
뒤에 송 휘종(徽宗)392) 때에 이르러 좌도(左道)393)를 숭상하였는데 그때
나라 사람들이 도참(圖讖)394)을 퍼뜨려 말하기를, “금인(金人)이 나라를 패
망시킨다”고 하였다. 황건(黃巾)의 무리395)들이 일관(日官)을 움직여 간하
자, (일관이) 아뢰기를, “금인이란 불교를 말하니 장차 나라에 이롭지 못함
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의론하여 장차 불교를 파멸하고 승려를 파
묻으며 경전을 불태우고, 따로 작은 배를 만들어 부처 어금니를 실어 바다
에 띄워 인연 있는 곳에 흘러가 닿게 하려고 하였다. 이때 마침 우리나라
사신이 송나라에 도착해 이 이야기를 듣고 천화용(天花茸)396) 50령(領)과
저포(紵布) 300필로 배를 호송하던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몰래 부처 어금
니를 받고 빈 배만 띄워 보냈다. 사신 등이 부처 어금니를 가지고 와서 왕
에게 아뢰니 이에 예종(睿宗)397)은 크게 기뻐하여 시원전(十員殿) 왼편의
작은 전각에 봉안하고 항상 전각 문에 자물쇠를 채워두고 밖에는 향등을
달았는데, 매번 친히 행차하는 날에는 전각을 열고 예경하였다.
相傳云, “昔義湘法師入唐, 到終南山至相寺智儼尊者處. 隣有
宣律師, 常受天供, 每齋時天廚送食. 一日律師請湘公齋, 湘至
坐定旣久, 天供過時不至, 湘乃空鉢而歸, 天使乃至. 律師問,
今日何故遲. 天使曰, 滿洞有神兵遮擁, 不能得入. 於是律師知
湘公有神衛, 乃服其道勝. 仍留其供具, 翌日又邀儼湘二師齋,
具陳其由. 湘公從容謂宣曰, ‘師旣被天帝所敬. 嘗聞帝釋宮有
佛四十齒之一牙, 爲我等輩, 請下人間, 爲福如何?’ 律師後與
天使, 傳其意於上帝, 帝限七日送與. 湘公致敬訖, 邀安大內.”
後至大宋徽宗朝, 崇奉左道, 時國人傳圖讖曰, “金人敗國.” 黃
巾之徒, 諷日官, 奏曰,“ 金人者, 佛敎之謂也, 將不利於國家.”
議將破滅釋氏, 坑諸沙門, 焚燒經典, 而別造小舡, 載佛牙, 泛
於大海, 任隨緣流泊. 于時適有本朝使者至宋, 聞其事, 以天花
茸五十領 紵布三百疋, 行賂於押舡內史, 密授佛牙, 但流空舡.
使臣等旣得佛牙來奏, 於是睿宗大喜, 奉安于十員殿左掖小殿,
常鑰匙殿門, 施香燈于外, 每親幸日, 開殿瞻敬.
386) 의상(義相):625~702. 신라 화엄종의 개창자. 이곳을 비롯한『삼국유사』에서는
주로 ‘의상(義湘)’의 표기를 썼지만 ‘의상(義相)’의 표기가 맞는 것으로 생각된
다. 황복사에서 출가한 후 당에 유학하여 지엄에게서 화엄을 배우고『일승법계
도(一乘法界圖)』를 지어 일(一)과 다(多)가 걸림 없이 거듭 전개되는 법계연기
사상을 정립하였다. 귀국한 후 부석사(浮石寺)를 비롯한 여러 절을 세우고 많은
제자들과 화엄사상을 연마하고 정진하며 화엄종을 펴 나갔다. 한편으로 교단에
서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을 선도하여 사람들이 불교 신앙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하였다. 제자들이 확장하여 창건하고 운영한 화엄십찰은 통일신라 불
교계의 중추를 이루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일승법계도』
외에『아미타경의기』가 저술로 알려졌고,「백화도량발원문」등 의상의 사상을
담고 있다고 알려진 저술이 몇 개 있지만 저술은 많지 않다. 제자로는 지통(智
通)·진정(眞定)·도신(道身)·표훈(表訓) 등 여러 뛰어난 제자가 있다.
387) 종남산(終南山):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서안(西安) 남쪽에 있는 높이 2604m의
산. 당대 불교의 중심지로 도선(道宣)·지엄(智儼)·종밀(宗密) 등 수많은 고승들
이 수행하였고 계율종 화엄종 법상종 정토종 선종 등이 성행했던 수당대 중국
불교의 중심지였다. 4-6 주150) 참조.
388) 지상사(至相寺):중국 섬서성 서안시 장안구 남쪽의 종남산에 있던 절로 수대에
정연이 창건하였다 한다. 지엄(智儼)이 이곳에 주석하여 법림(法琳)과 지정(智
正)을 따라 화엄을 배워 화엄종의 토대를 닦은 곳이며, 이 때문에 지엄을 지상대
사(至相大師)로 부르기도 한다. 의상과 법장이 이곳에서 지엄에게 화엄을 배웠
다. 근래에 복원하여 사찰 규모를 갖추었다.
389) 지엄(智儼):602~668. 중국 화엄종의 제2조로 지상대사(至相大師) 또는 운화존
자(雲華尊者)로 불린다. 신라의 의상과 중국의 법장의 스승으로서 화엄종의 창
시자로 추앙되는 두순(杜順)을 따라 두순의 제자인 달(達)법사에게 배우고 법상
(法常)과 지정(智正)에게 교학을 연마하였다. 화엄경을 차례대로 해석한 『수현
기(搜玄記)』, 화엄사상의 요체를 담은 『공목장(孔目章)』 『오십요문답(五十要問
答)』등을 저술하여 중국 화엄종의 기반을 이루고 그를 이어 법장이 대성하도록
하였다.
390) 도선(道宣):596~667. 남산율종(南山律宗)의 창시자이자 불교사학(佛敎史學)의
대가. 15세 때 일엄사(日嚴寺)의 율사 혜군(慧頵)을 사사하여 출가하고 20세에
대선정사(大禪定寺)의 지수(智首)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계율 연구에 매진하여
일엄사에서 숭의사(崇義寺)를 거쳐 종남산 방장곡(倣掌谷)에 은거하였다. 『사분
율행사초(四分律行事鈔)』와『사분율갈마(四分律羯磨)』등을 저술하여 계율의 권
위자가 되었다. 645년 현장(玄奘)의 번역사업에 필수(筆受)·윤문(潤文)으로 참
가하였고, 이해에『속고승전(續高僧傳)』의 초고를 저술하고 이어『사분비구니
초(四分比丘尼鈔)』,『계본(戒本)』, 『석가방지(釋迦方志)』 등을 저술하였다. 658년
에 서명사(西明寺)가 창건되자 상좌(上座)로서 교단을 지도하고 664년에 종남
산 정업사(淨業寺)에 들어가『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집신주삼보감통록(集
神州三寶感通錄)』,『집고금불도논형(集古今佛道論衡)』,『광홍명집(廣弘明集)』등
의 저술에 전념하고 667년에 계단(戒壇)을 창설하고『계단도경(戒壇圖經)』을 지
어 후세 계단의 모범을 이루었다.
391) 제석궁(帝釋宮):제석천(帝釋天)이 머무는 도리천(忉利天)의 천궁(天宮)으로 욕
계(欲界) 6천(天) 중의 두 번째이다. 도리천은 삼십삼천이라는 뜻인데,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데 중앙의 선견성(善見城)에 제석천(帝釋天)이 있고 사방에 8성
씩이 있어 모두 33이 되므로 삼십삼천(三十三天)이라 한다. 제석천은 32천과 바
로 아래에 있는 사천왕을 통솔하여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을 보호하며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한다고 한다.
392) 휘종(徽宗):중국 북송의 8대 황제. 재위 1100~1125. 6대 신종의 아들, 7대 철종
의 아우. 처음에는 신종의 황후였던 향태후(向太后)의 섭정하에 신법당과 구법
당을 조화시킨 정치가 시행되었으나, 태후가 죽고 친정을 시작하자 채경(蔡京)
등 총신을 임용하여 국정을 떠맡기고 궁정과 정원 등 토목사업을 크게 일으켜
호사스러운 경제 운영으로 농민들의 반발을 사 하북 절강 등지에서 농민봉기
가 일어났다. 1120년에 금(金)과 동맹을 맺고 요(遼)를 함께 공략하였으나 군정
이 부패하여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1125년에 금이 요를 멸망시키고 공격해
오자 도교를 깊이 신봉하여 자신을 도군황제(道君皇帝)라 하고 흠종(欽宗)에게
양위한뒤 남쪽으로 도망갔다가 1127년에 서울인 변경이 함락되어 황족들과 함
께 포로가 되어 북방에 끌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문화
재를 수집하고 화가들을 모아 한림 도화원(圖畵院)을 확충하고『선화화보(宣和
畵譜)』『선화서보(宣和書譜)』등을 편찬해 냈다. 자신이 시와 문장과 글씨와 그
림에 뛰어난 예술가로서 특히 그림은 전문가의 경지에 이르렀고 글씨는 수금서
(瘦金書)라는 독보적인 서체를 이루었다.
393) 좌도(左道):본래 유교에서 그 종지에 어긋나는 다른 가르침을 말하는데 여기서
는 도교(道敎)를 말한다.
394) 도참(圖讖):미래의 일, 특히 인간생활의 길흉화복(吉凶禍福) 등에 대한 징조 또
는 예언, 그리고 그것을 말하고 있는 놓은 예언서. ‘도’는 앞으로 일어날 일의 징
조나 암시를 말하며, ‘참’은 상징적 언어로 장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것이
다. 일정한 기호나 대상물 또는 은밀하고 상징적인 언어가 앞으로 일어날 미래
의 어떤 일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고방식에 따라 앞날의 좋고 나쁨을 예언
하는 것을 말한다.
395) 황건(黃巾)의 무리:도교의 신도. 도교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 후한대에 장각(張
角)이 황건적을 일으켰는데 여기에 참여한 태평도(太平道)들이 황색으로 표시
하였고 태평도가 훗날 도교의 모체가 되었다.
396) 천화용(天花茸):용은 뛰어난 품질의 버섯을 말하는 것으로 송화(松花)와 같고
생기고 흰색의 향기가 많이 나는 버섯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눈과 같은 아
름다운 하늘의 꽃인 천화를 수놓은 옷을 말한다.
397) 예종(睿宗):고려 제16대 왕. 재위 1105~1122. 숙종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명의
태후(明懿太后) 유씨(柳氏). 일찍부터 뜻이 깊고 침착하며 도량이 넓고 학문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윤관(尹瓘) 등이 여진을 정벌하
게 하고 함흥평야 일대에 9성을 설치하였다가 1년만에 여진에게 되돌려주었다.
국학(國學)에 전문 강좌인 칠재(七齋)를 설치하고 양현고(養賢庫)를 두어 관학
의 진흥을 꾀하고, 청연각(淸淵閣)과 보문각(寶文閣)을 짓고 유학을 크게 일으
켰다.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여 빈민들의 치료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예의상
정소(禮儀詳定所)를 설치하고 송에서 음악을 들여와 궁중음악 아악(雅樂)을 이
루었다.
임진년(1232)398) 서울을 옮길 때399) 내관(內官)들이 바쁘게 허둥대다가
잊어버리고 거두어 챙기지 못하였다. 병신년(1236) 4월에 이르러 왕실 원
당인 신효사(神孝寺)400)의 온광(蘊光)스님이 부처의 어금니에 경례하고
자 하여 왕에게 아뢰니 왕이 내신(內臣)에게 두루 궁중을 찾아보게 하였으
나 찾지 못하였다. 그때 어사대(御史臺)401) 시어사(侍御史)402)인 최충(崔
沖)403)이 설신(薛伸)404)에게 명하여 급히 여러 알자방(謁者房)405)에 불렀
으나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신(內臣) 김승로(金承老)가 아뢰기를, “임
진년에 서울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紫門日記)406)를 살펴보십시오.” 하니 이
에 따랐다. 기록에 “입내시(入內侍)407) 대부시경(大府寺卿)408) 이백전(李白
全)409)이 불아함(佛牙函)을 받았다.”고 되어 있었다. 이백전을 불러 추궁하
니 대답하기를, “집에 돌아가서 제 기록을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집에 가서 살펴보고 “좌번 알자(左番謁者)410) 김서룡(金瑞龍)이 불
아함을 받았다.”는 기록을 가져다 바쳤다. 김서룡을 불러 물어보니 대답이
없었다. 또 김승로가 상주한 대로 임진년부터 지금 병신년까지 5년 동안 어
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411)의 상수(上守)들을 잡아 가두어 심문하
였으나 이렇다 할 결론이 나지 않았다. 3일이 지난 밤중에 김서룡의 집 담
장 안에 물건을 던지는 소리가 나서 불을 밝혀 살펴보니 불아함이었다. 함
은 본래 안쪽 한겹은 침향합(沈香合)이고 다음 겹은 순금합이며 그 다음 겹
은 백은함이고 그 다음 겹은 유리함이며 그 다음 겹은 나전함으로 각각의
폭이 맞았는데 지금은 다만 유리함 뿐이었다. 기뻐하여 가지고 궁궐에 들
어가 전하였다. 관리들이 논의하여 김서룡과 어불당과 경령전의 상수를 모
두 죽이고자 하니, 진양부(晋陽府)412)에서 아뢰기를, “불사(佛事) 때문에 사
람들이 많이 다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여 모두 (죽임을) 면하였다. 다
시 왕명을 내려 시원전(十員殿) 안 뜰에 특별히 불아전(佛牙殿)을 만들어
안치하도록 하고 장사(將士)들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길일을 택하고 신효사(神孝寺)의 상방(上房)413) 온광(蘊光)을 청하여 일
행 30인을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와 재(齋)를 설하여 경례하게 하였다. 그날
입직(入直)한 승선(承宣)414)인 최홍(崔弘)415)과 상장군 최공연(崔公衍) 및
이영장(李令長)과 내시(內侍)와 다방(茶房)416) 등이 시원전(十員殿) 뜰에
시립하여 차례대로 머리에 이고 공경하였다. 불아함의 구멍 사이에 사리가
수도 없이 많았다. 진양부에서 백은합에 넣어서 봉안하였다. 그때 왕이 신
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불아를 잃어버린 이래 스스로 네 가지 의문이 생
겼소. 첫째 의문은 천궁(天宮)의 7일 기한이 다 차서 하늘로 올라갔는가 하
는 것이고, 둘째 의문은 나라가 이처럼 어지러운데 불아는 신성한 물건이
니 인연 있는 평온한 나라로 옮겨 갔는가 하는 것이고, 셋째 의문은 재물을
탐낸 소인배가 함을 훔쳐내고 (불아는) 도랑에다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것
이고, 넷째 의문은 진귀한 물건을 훔쳤으나 스스로 내놓을 계책이 없어 집
안에 숨겨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넷째 의문이 맞았소.” 하고
는 소리 내어 크게 우니 뜰에 가득한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헌수(獻
壽)417)하고 이마를 태우며 팔을 태우는 자418)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이 사실 기록을 당시의 내전(內殿) 분수승(焚修僧)419)이던 전의 기림사
(祇林寺)420) 대선사(大禪師)421)인 각유(覺猷)422)에게서 얻은 것인데, 직접
눈으로 본 것이라고 하며 내게 기록하도록 하였다.
또 경오년(1270)423)에 강도(江都)를 떠나던 난리가 혼란이 극심하여 (피
난 오던) 임진년보다도 더하였는데 시원전(十員殿) 감주(監主)인 선사 심
감(心鑑)이 위험을 무릅쓰고 (불아를) 가지고 나와서 도적의 난424)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이 궁궐에 알려져 그 공을 크게 상 주고 이름난 절로 옮
겨 주었으니 지금은 빙산사(氷山寺)425)에서 살고 있다. 이것 역시 그에게
직접 들은 것이다.
至壬辰歲移御次, 內官悤遽中, 忘不收檢. 至丙申四月, 御願堂
神孝寺釋蘊光, 請致敬佛牙, 聞于上, 勅令內臣遍檢宮中, 無得
也. 時栢臺侍御史崔沖, 命薛伸, 急徵于諸謁者房, 皆未知所
措. 內臣金承老奏曰,“ 壬辰年移御時, 紫門日記推看.” 從之.
記云,“ 入內侍大府卿李白全受佛牙函”云. 召李詰之, 對曰,
“請歸家更尋私記.” 到家檢看, 得“左番謁者金瑞龍佛牙函准
受”記來呈. 召問瑞龍, 無辭以對, 又以金承老所奏云, 壬辰至
今丙申五年間, 御佛堂及景靈殿上守等, 囚禁問當, 依違未決.
隔三日, 夜中, 瑞龍家園墻裏, 有投擲物聲, 以火檢看, 乃佛牙
函也. 函本內一重沈香合, 次重純金合, 次外重白銀函, 次外重
瑠璃函, 次外重螺鈿函, 各幅子如之, 今但瑠璃函爾. 喜得之,
入達于內. 有司議, 金瑞龍及兩殿上守皆誅, 晋陽府奏云,“ 因
佛事, 不合多傷.” 人皆免之. 更勅十員殿中庭, 特造佛牙殿,
安之, 令將士守之.
擇吉日, 請神孝寺上房蘊光, 領徒三十人, 入內設齋敬之. 其日
入直承宣崔弘, 上將軍崔公衍李令長, 內侍茶房等, 侍立于殿
庭, 依次頂戴敬之. 佛牙區穴間, 舍利不知數. 晋陽府, 以白銀
合貯而安之. 時主上謂臣下曰,“ 朕自亡佛牙已來, 自生四疑,
一疑, 天宮七日限滿而上天矣, 二疑, 國亂如此, 牙旣神物, 且
移有緣無事之邦矣, 三疑, 貪財小人, 盜取函幅, 棄之溝壑矣,
四疑, 盜取珍利, 而無計自露, 匿藏家中矣, 今第四疑當之矣.”
乃放聲大哭, 滿庭皆洒涕獻壽, 至有煉頂燒臂者, 不可勝計. 得
此實錄, 於當時內殿焚修前祇林寺大禪師覺猷, 言親所眼見,
使予錄之.
又至庚午出都之亂, 顚沛之甚, 過於壬辰, 十員殿監主禪師心
鑑, 亡身佩持, 獲免於賊難. 達於大內, 大賞其功, 移授名刹,
今住氷山寺. 是亦親聞於彼.
398) 임진년:고종 20년(1232). 전해에 시작된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도로 수
도를 옮겼다.
399) 1232년에 강화로 서울을 옮긴 것을 말함.
400) 신효사(神孝寺):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토성리에 있던 절. 묵사(墨寺)라고도 한
다. 여기의 기록에 의해 1236년 이전에 창건된 왕실의 원당임을 알 수 있다. 이
후 충렬왕이 중창하고 1282년부터 1308년까지 18차례 방문하고, 이 절에서 선
제(先帝)와 공주(公主) 등의 제사를 지내고 우란분재를 열었으며 왕이 이곳에서
죽었다. 이후 충선왕·충혜왕·충정왕·공민왕 등이 대대로 선왕을 위한 도량을
열었다.
401) 원문의 백대(栢臺)는 어사대(御史臺)의 별칭. 한나라 때 어사부(御史府)에 백수
(栢樹)를 심던 것에서 유래한다.
402) 시어사(侍御史):고려시대 어사대(御史臺)의 종5품 관직. 감찰사시승(監察司侍
丞)의 전신. 대관(臺官)으로 시정의 잘잘못과 풍속의 교정, 규찰 및 탄핵의 임무
를 맡은 벼슬.
403) 최충(崔沖):고려 문종조의 문신인 최충(984~1068)과는 다른 인물. 여기서는 미상.
404) 설신(薛伸):『고려사』에 설신(薛愼)이 나오는데 비슷한 시기로 같은 인물이 아
닌가 한다. 설신(薛愼, ?~1251)은 고려의 문신. 설공검(薛公儉)의 아버지로 1232
년 시어사(侍御史)로서 몽고에 사신으로 가서 과중한 공물 요구에 대한 고려측
의 입장을 전하였으나 고려에 침공한 살리타이(撒禮塔)를 따라 몽고 지도부에
억류되었다가 처인성(處仁城)에서 살리타이가 죽자 풀려났다. 훗날 관직이 추
밀원부사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405) 알자방(謁者房):알자들이 모이는 기관. 알자(謁者)는 고려시대 내알사(內謁
司)·내시부(內侍府)에 두었던 관직으로 내알사는 종5품, 내시부는 종7품이었
다. 알현을 청하는 사람, 또는 빈객을 주인에게 안내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왕명의 전달과 궁중 음식물의 감독, 왕이 사용하는 문필의 공급, 대궐문과 전각
의 수직과 열쇠의 관리, 궁궐 뜰의 청소와 포설 등에 관한 일을 하였다.
406) 자문일기(紫門日記):궐내일기(闕內日記). 자문은 고려시대 궁궐문을 말하며, 궁
궐의 뜻으로 쓰인다.
407) 내시(內侍):고려의 내시는 국왕을 측근에서 시종하는 문관. 문종 때는 국가에
공로가 있고 재능을 겸한 권문세가의 자제나 유사가 등용되었다. 내시의 직능
은 근시로서의 원래 직분인 제반의식의 집행과 어가를 수행하는 일과 함께 유
학자적 자질을 바탕으로 왕에게 경서를 강의하거나 왕의 명령을 기초하고 국
가기무를 관장하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국왕의 근시직으로
문무관과 더불어 고려지배 관료층의 중핵을 이루었다. 고려 후기 원간섭에 따
른 관제의 변동으로 천민출신자나 군공을 세운 자들도 내시에 속하게 함으로써
질적인 저하와 양적인 증가를 가져오고 공민왕대에 내시부라는 환관의 공식기
구가 생겨나면서 궁내직과 함께 궁궐수비를 담당하는 성중관 관인층으로 흡수
되었다.
408) 대부시경(大府寺卿):고려시대 대부시(大府寺)의 종3품 관직. 대부시는 고려시
대 궁중에 필요한 재화를 저장하고 공급하던 관청으로 재화의 저장과 상세의
징수도 맡았다.
409) 이백전(李白全):고려 무신집권기 내시(內侍)를 지낸 문신.
410) 좌번 알자(左番謁者):내시부(內侍府) 소속 관원 중에 좌번(左番)에 속한 내시.
411) 경령전(景靈殿):고려시대 정궁(正宮)인 연경궁(延慶宮) 내에 있던 전각. 구정
(毬庭) 근처에 있었다. 태조 및 사조(四祖:임금의 4대 선왕)의 어진(御眞) 및 신
위(神位)을 좌소우목(左昭右穆)의 원칙에 따라 봉안한 궐내의 진전(眞殿)으로,
이 곳의 제사는 대사(大祀)로 분류된다.
412) 진양부(晋陽府):고려시대 최씨무신정권의 최우(崔瑀)가 신종 6년(1234)에 천도
의 공으로 진양후(晉陽侯)에 봉해지면서 얻게 된 부(府)로 당시 정권담당자이던
최우의 집정부를 말한다.
413) 상방(上房):위쪽에 있는 절, 절 안에서 가장 높은 주지를 말한다.
414) 승선(承宣):고려 때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중추원(中樞院) 소속의 정3품 관
직. 백관(百官)이 국왕에게 올리는 모든 문서를 접수하고 검토하여 왕에게 전달
하고, 왕명을 받아 하달하였으며, 이를 대변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승지(承
旨)로 개편되었다.
415) 최홍(崔弘):고려 후기의 관리. 1220년(고종 7) 의주별장 한순(韓恂) 등이 일으
킨 반란을 평정하러 출동한 김취려(金就礪)의 휘하에서 민심을 진정시키지 위
해 활동한 기록이 있다.(『고려사』권103 열전 金就礪 “就礪遣判官崔弘錄事朴文挺,
諭以禍福, 繼遣大將軍趙廉卿將軍朴文賁, 以兵五千討之.”)
416) 다방(茶房):고려시대에 차와 술·소채·과일·약 등의 일을 주관하기 위하여 설
치되었던 관서로 국가적 행사에 거행된 진다의식(進茶儀式)을 다방의 관원들이
맡았다.
417) 헌수(獻壽):장수를 비는 뜻으로 술잔을 올리는 것.
418) 이마를 태우며 팔을 태우는 자:참회 의식으로 이마나 팔에 촛농에 불을 붙여
태우는 의식을 말한다.
419) 분수승(焚修僧):궁궐에서 향을 사르며 기도하는 승려.
420) 기림사(祇林寺):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함월산(含月山)에 있는 절. 643
년(선덕왕 12) 천축국(天竺國)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 임정사(林井寺)라고 하
다가 원효(元曉)가 확장, 중수하고 기림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부처님 생존 때
에 세워졌던 인도의 대표적인 사원인 기원정사(祈園精舍)에서 따온 말이다. 일
제치하의 31본산시대에는 월성군 일대를 관장하는 본사였으나 지금은 본사 불
국사의 말사로 되어 있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중심으로 약사전과 응진전 그
리고 앞쪽에 진남루(鎭南樓)가 있다. 대적광전 구역과 조금 떨어져 명부전과 관
음전 등이 있다.『삼국유사』에는 신문왕이 문무왕을 기릭 위해 감은사에 행차하
여 기림사 근처에서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권2 기이「萬波息笛」“王宿感恩寺.
十七日, 到祗林寺西溪邊, 留駕晝饍.”)
421) 대선사(大禪師):고려시대 선종 승려의 최고 법계(法階). 선종의 승과에 합격한
자는 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선사(禪師)
의 품계를 거쳐 대선사가 되었다.
422) 각유(覺猷):『삼국유사』「낙산이대성」에도 1258년 기림사 주지로서 선종 노숙
(老宿) 대선사로 나온다. (권4 탑상「洛山二大聖 觀音 正趣」“至戊午十月, 本業老宿
祗林寺住持大禪師覺猷奏曰,”)
423) 경오년:원종 11년(1270) 원과 강화를 맺으면서 무신정권이 끝나고, 왕정이 복
귀되면서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나온 해이다.
424) 도적의 난:1270년 고려가 몽고에 대해 복속관계(服屬關係)에 들어갈 때 출륙환
도(出陸還都)를 거부하면서 일어난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말한다.
425) 빙산사(氷山寺):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에 있던 절. 신라 때 선덕여왕
이 비구니들을 위해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려 때 사적은 이곳의 기록 외에는 알
려져 있지 않으며 1407년(태종 7) 사찰 정리 때 88개 자복사찰(資福寺刹)의 하나
로 꼽혔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폐사가 되어 서원이 절터에 들어서기도 하였다.
현재 절터에 나말여초의 조성으로 보이는 보물 제327호 빙산사지 오층모전석
탑이 남아 있다. 절터의 북쪽 기슭에 옛부터 유명한 빙혈이 있어 빙산이라는 이
름이 생겨났다.
진흥왕 때인 천가(天嘉)426) 6년(565) 을유년에 진(陳)나라의 사신 유사
(劉思)와 명관(明觀)스님이 불교 경전과 논서 1700여 권을 가져왔다.427) 정
관(貞觀) 17년(643)에 자장법사가 삼장(三藏)428) 4백여 함을 실어 와서 통
도사에 안치하였다. 흥덕왕 때인 태화(太和)429) 원년(827) 정미년에 유학
승인 고구려(계통의) 구덕(丘德)스님이 불경 몇 함을 가져와서 국왕과 여
러 절의 스님들이 흥륜사(興輪寺)430) 앞길에 나가 맞이하였다.431) 대중(大
中)432) 5년(851, 문성왕 13)에 중국에 간 사신 원홍(元弘)이 불경 몇 축을 가
져왔다.
신라 말에 보요선사(普耀禪師)가 두 번 오월(吳越)에 가서 대장경을 가
져왔으니 (그는) 곧 해룡왕사(海龍王寺)의 개산조(開山祖)이다. 송 원우(元
祐)433) 갑술년(1094)에 어떤 사람이 진영에 찬을 붙였다.
“위대하다 초조시여, 드높다 그 모습이여.
두 차례나 오월에 가서, 대장경의 공을 이루셨네.
보요라 호를 내리고, 왕명이 네 번이나 내렸네.
만일 그 덕을 묻는다면, 밝은 달에 맑은 바람이로다.”
또 대정(大定)434) 중에 한남(漢南) 관기(管記)435) 팽조적(彭祖狄)이 시를
남겼다.
“수운 난야(蘭若 )436)에 부처님 계시니, 더구나 신룡(神龍)이 한 지경을
보호하네.
마침내 명찰은 누가 이와같이 얻을까, 처음 전한 불교[像敎]437)가 남방
에서 왔구나.”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옛날 보요(普耀)선사가 처음 남월(南越)438)에서
대장경을 구해 돌아오는 길에 해풍이 갑자기 일어나 작은 배가 파도 사이
에서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선사가 말하기를, ‘생각컨대 신룡이 경전을 머
물게하려 함인가’ 하고는 마침내 주문을 외며 정성스레 빌어 용까지 함께
받들어 돌아오니 이에 바람이 멎고 파도가 고요해졌다. (경전을) 가지고 본
국에 돌아와 산천을 두루 다니며 안치할 곳을 찾았는데, 이 산에 이르러 갑
자기 상서로운 구름이 산 위에서 일어남을 보고 제자인 홍경(弘慶)과 함께
절을439) 세웠다. 그런즉 불교가 동쪽으로 전래된 것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한남 관기 팽조적이 적는다.”
절에는 용왕당이 있어서 자못 영이(靈異)가 많은데 (이 용은) 그때 경전
을 따라 와 머문 것으로서 지금도 남아 있다.
眞興王代天嘉六年乙酉, 陳使劉思與釋明觀, 載送佛經論
一千七百餘卷. 貞觀十七年, 慈藏法師載三藏四百餘函來, 安
于通度寺. 興德王代大和元年丁未, 入學僧高麗釋丘德, 䝴佛
經若干函來, 王與諸寺僧徒, 出迎于興輪寺前路. 大中五年, 入
朝使元弘, 䝴佛經若干軸來.
羅末普耀禪師, 再至吳越, 載大藏經來, 卽海龍王寺開山祖也.
大宋元祐甲戌, 有人眞讚云, 偉哉初祖, 巍乎眞容. 再至吳越,
大藏成功. 賜銜普耀, 鳳詔四封. 若問其德, 白月淸風.
又大定中, 漢南管記彭祖逖留詩云, “水雲蘭若住空王, 況是神
龍穩一場. 畢竟名藍誰得似, 初傳像敎自南方.” 有跋云, “昔普
耀禪師, 始求大藏於南越, 洎旋返次, 海風忽起, 扁舟出沒於波
間. 師卽言曰,‘ 意者神龍欲留經耶’, 遂呪願乃誠, 兼奉龍歸
焉, 於是風靜波息. 旣得還國, 遍賞山川, 求可以安邀處, 至此
山, 忽見瑞雲, 起於山上, 乃與高弟弘慶, 經營蓮社. 然則像敎
之東漸, 實始乎此. 漢南管記彭祖逖題.” 寺有龍王堂, 頗多靈
異, 乃當時隨經而來止者也, 至今猶存.
426) 천가(天嘉):진(陳) 문제(文帝)의 연호. 560~565년. 신라 진흥왕 21~26년.
427)『삼국사기』권4 진흥왕 26년에 같은 기록이 나온다.(“陳遣使劉思與僧明觀來聘,
送釋氏經論千七百餘卷.”)
428) 삼장(三藏): trī-pitaka. 불교의 모든 전적을 합쳐 부르는 말. 부처가 설한 경전
을 모은 경장(經藏), 부처가 제정한 교단 생활 규정인 율의(律儀)를 모은 율장(律
藏), 불전의 뜻을 풀이하고 논의하여 후인들이 조직화하고 체계화한 해석을 모
은 논장(論藏)으로 구성되었다.
429) 태화(太和):당 문종(文宗)의 연호. 827~835년. 신라 헌덕왕 2~10년.
430) 흥륜사(興輪寺):경상북도 경주시 사정동에 있던 신라 최초의 절. 신라에 불법
을 전한 아도(阿道)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경주에 세운 오래 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있던 일곱 개의 절가운데 첫 번째로 꼽히며 천경림(天鏡林) 자리에 있었
다고 한다. 527년 이차돈의 순교 이후 법흥왕이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5년(544)
에 완성되었다. 신라 불교의 전래와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열 분을 기리는 상
을 흥륜사 금당에 만들어 봉안하였다. 4-11 주260) 참조.
431)『삼국사기』권10 흥덕왕 2년에 같은 기록이 나온다.(“三月 高句麗僧丘德入唐, 䝴
經至. 王集諸寺僧徒, 出迎之.”)
432) 대중(大中):당 선종(宣宗)의 연호. 847~859년. 신라 문성왕 9년~헌안왕 3년.
433) 원우(元祐):북송 철종(哲宗)의 연호. 1086~1093년. 고려 선종 3~10년. 원우는 8
년(1093)으로 끝나고 이듬해 갑술년에 소성(紹聖)으로 개원하여, 원우 갑술년은
소성 원년이 되어야 한다.
434) 대정(大定):금(金) 세종(世宗)의 연호. 1161~1189년. 고려 의종 15년~명종 17년.
435) 관기(管記):기록을 담당하는 관직, 서기(書記). 아취가 있고 식견이 있으며 문
장에 뛰어난 이를 뽑아 발탁하였다고 한다.
436) 난야(蘭若 ):아란야(阿蘭若). aranya를 음역한 말. 산림(山林) 또는 황야(荒野)
로 번역한다. 출가한 사람이 수행하고 거주하기에 적합한 고요한 장소를 말하
므로 원리처(遠離處) 또는 적정처(寂靜處)라고도 번역하였다. 마을에서 떨어져
조용한 곳에 있는 작은 절을 주로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437) 불교[像敎]:불교를 정법·상법·말법의 3시기로 구분할 때 부처가 입적한지 5
백년 후에 전개되는 상법(像法)의 시대에 알려진 불법을 총칭하는 말이다. 곧
불법, 불교로 때로는 불상과 교법을 함께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438) 남월(南越):옛 백월(百越)이 있던 지금의 광동 광서성 지역을 말하지만, 여기서
는 남쪽의 오월(吳越)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오월(895~978)은 오대십국 시대
의 십국의 하나로 항주에 도읍하고 절강성 일대를 영역으로 장기간 존속하였는
데, 특히 5대왕인 전숙(錢俶, 錢弘俶)은 수많은 사원을 건립하고 천태 등 고승들
을 우대하여 교학을 진흥하였으며, 8만4천 동탑(錢弘俶塔)을 만들어 곳곳에 널
리 퍼지게 하여 해외에까지 전파되었다.
439) 원문의 연사(蓮社)는 절을 말한다. 중국 동진 때 고승 혜원(慧遠)이 여산(廬山)
의 동림사(東林寺)에서 많은 승려와 일반 사람을 모아 염불 수행을 이끌었는데,
이 절에 있는 연못에 흰 연꽃이 많이 피어 백련사(白蓮社)라고도 하였다. 이후
승속의 수행 모임을 백련결사(白蓮結社) 또는 연사(蓮社)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천성(天成)440) 3년(928) 무자년에 묵화상(黙和尙)이 후당(後唐)441)
에 가서 역시 대장경을 가져 왔다.442) 우리나라 예종(睿宗, 1105~1122) 때
에 혜조(慧照)국사가 왕명을 받들어 중국에 공부하러 가서 요본(遼本) 대
장경(大藏經)443) 3부를 사 왔는데444), 한 본은 지금 정혜사(定惠寺)445)에 있
다.[해인사(海印寺)446)에 한 본이 있고 허참정(許參政) 댁에 한 본이 있다.]
대안(大安)447) 2년(1086, 선종 3년) 우리나라 선종(宣宗) 때에 우세(祐世)
승통(僧統)448) 의천(義天)449)이 송나라에 가서 천태(天台)의 교관(敎觀)을
많이 가져 왔다. 이밖에 책에 실리지는 않았으나 고승이나 신자450)들이 왕
래하며 가져온 것이 자세히 적지 못할 정도이다.451) 불법의 동방 전래가 양
양하였으니 경사로운 일이다.
찬한다.
중국의 달과 동이(東夷)의 바람은 서로 떨어져 아득한데,
전법하고452) 입멸한 지453)는 이천 년이 되었네.
해외에 흘러 전해가니 진정 경하로운 일일세,
동국454)과 인도455)가 모두 한 하늘 아래라.
又天成三年戊子, 黙和尙入唐, 亦載大藏經來. 本朝睿廟時, 慧
照國師奉詔西學, 市遼本大藏三部而來, 一本今在定惠寺. [海
印寺有一本, 許參政宅有一本.] 大安二年, 本朝宣宗代, 祐世僧
統義天入宋, 多將天台敎觀而來. 此外方冊所不載, 高僧信士,
往來所䝴, 不可詳記, 大敎東漸, 洋洋乎慶矣哉.
讚曰 華月夷風尙隔烟, 鹿園鶴樹二千年. 流傳海外眞堪賀, 東
震西乾共一天.
440) 천성(天成):후당 명종(明宗)의 연호. 926~930년. 고려 태조 9~13년.
441) 후당(後唐):중국 당 이후 오대십국 시대의 나라. 923~936년. 후량(後粱)에 이
어 건국하여 강북을 통일하고 4대 14년 동안 있다가 후진(後晋)에 멸망당하
였다.
442) 『고려사(高麗史)』에 “신라 승려 홍경이 당나라 민(閩)지방에서 배를 타고 대장
경 한부를 싣고 예성강에 도착했다. 왕은 친히 그를 맞이하고, 제석원에 두었
다.(新羅僧洪慶, 自唐閩附航, 載大藏經一部, 至禮成江. 王親迎之, 置于帝釋院.)”고
하였다.(『고려사』(권1 태조 11년 8월.) 이글 에 의하면 고려사에서 말한 홍경(洪
慶)이 묵화상(黙和尙)이 아닌가 한다.
443) 요본(遼本) 대장경(大藏經):거란(契丹) 대장경을 말한다. 983년에 완성된 송의
개보판(開寶版) 대장경을 범본(範本)으로 흥종(興宗, 1031~1055)대에 국가적 사
업으로 진행하여 도종(道宗) 청녕(淸寧) 5년(1059)에 완성하였다. 정확성이 뛰
어나 당시 조판되고 있던 고려 초조대장경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444)『고려사』에는 예종 2년(1107)에 고려에서 거란에 대장경을 보낸 기록이 있
다.(『고려사』권12 예종 2년 정월 경인 “遼遣高存壽, 來賀生辰, 仍賜大藏經.)
445) 정혜사(定惠寺):충지(冲止)가 1278년에 선원사(禪源寺)에서 수선사(修禪社)로
거란본대장경을 옮긴 일이 있는데, 이 시기는『삼국유사』의 편찬 시기와 일치한
다. 그러므로 여기의 정혜사(定惠寺)는 정혜사(定慧社)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
다. 정혜사(定慧社)는 수선사(修禪社, 지금의 송광사)이다.
446) 해인사(海印寺):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
계종 제12교구 본사이며 조계종의 총림이며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봉
안한 법보사찰(法寶寺刹)이다.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이 대규모로 중창하여 현재의 규모를 이룬 화엄십찰의 하나이다. 고려 태조의
복전(福田)이었던 희랑(希朗)이 이곳에서 화엄의 사상을 펼쳤다. 고려 후기에
재조(再雕)하여 강화 선원사(禪源社)에 보관하던 대장경을 조선 정종 때(1398)
해인사로 옮겨 지금까지 그대로 잘 보관하고 있다. 세조 때 장경각(藏經閣)을 개
수하는 등 역대로 중건을 거듭하여 말사 75개와 부속 암자 14개를 거느린 법보
총림으로서 한국불교의 큰 맥을 이루고 있다. 경내에는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응진전 구광루 등 많은 건물이 있고, 주요 문화재는 국보이자 세계문화
유산인 대장경판과 장경판전, 보물인 석조여래입상과 원당암 다층석탑, 반야사
원경왕사비, 목조희랑대사상, 사간 장경 등이 있다.
447) 대안(大安):태안(太安)이라고도 한다. 요 도종(道宗)의 연호. 1085~1094년 사용.
고려 선종 2년~11년에 해당.
448) 승통(僧統):승려의 관직[僧官] 및 지위(法階)의 하나. 고려시대에는 승통이 교
종(敎宗)의 최고 법계로 사용되었다. 국가에서 주관하는 승과(僧科)인 교종선
(敎宗選)의 대선(大選)에 합격하면 대덕(大德)대사(大師) 중대사(重大師) 삼중대
사(三重大師) 수좌(首座) 승통에 이르게 된다.
449) 의천(義天):1055~1101. 고려시대 고승. 문종(文宗)의 제4왕자로 11세에 영통사
(靈通寺)에서 경덕국사 난원(爛圓)에게 출가하여 불교와 유교 및 역사와 제자백
가를 두루 배웠다. 13세에 승통이 되고, 1085년에 송에 가서 1년 남짓 동안 60여
명의 제종의 고승을 만나 여러 교학을 논의하고 전적을 구하였다. 귀국 후 흥왕
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3
권을 펴내 1,010부 4,740권의 목록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그동안 수집한 경서
를 간행하여 대장경을 잇는 교장(敎藏) 편찬사업을 이룸으로써 고려불교 교학
의 수준을 드높였다. 1097년 국청사(國淸寺)가 완성되자 초대 주지가 되어 천태
교학을 강의하여 천태종(天台宗)이 개창되었다. 의천은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제창하여 화엄종을 기반으로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시도하고 그 실현 방안으로
천태종의 창립을 통한 선종의 통합을 시도하는 교단 개편운동을 추진하였다.
450) 원문의 신사(信士)는 신자를 말함. 출가하지 않고 불법을 배우고 실천하고자 애
쓰는 이를 말한다.
451) 위의『삼국유사』기록 외에『고려사』에 실린 대장경 유통 기록은 성종 10년
(991)에 한언공이 송판 대장경을 수입한 기록(『고려사』권3 成宗 10년 4월 경인
“韓彦恭還自宋, 獻大藏經. 王迎入內殿, 邀僧開讀, 下敎赦.), 문종 17년(1063)에 거란
이 대장경을 보내온 기록(『고려사』권8 文宗 17년 3월 병오 “契丹送大藏經, 王備法
駕, 迎于西郊.), 문종 37년(1083)에 송에서 대장경을 보내온 기록(『고려사』 권9 文
宗 37년 3월 기축 “命太子, 迎宋朝大藏經, 置于開國寺, 仍設道場.), 예종 2년(1107) 거
란에 대장경을 보낸 기록이 있다.(『고려사』권12 예종 2년 정월 경인 “遼遣高存壽,
來賀生辰, 仍賜大藏經.)
452) 전법하고:원문의 녹원(鹿園)은 석가가 성도 후 처음 설법한 녹야원(鹿野苑,
Mr3 gadāva)을 말한다. 부다가야에서 성도 후 그동안 함께 수행하던 5비구를 찾아
사르나트에 가서 그들을 위해 처음으로 설법한 곳이 사슴 동산(鹿野苑)이었다.
그래서 녹야원을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라 한다.
453) 입멸한 지:원문의 학수(鶴樹)는 석가가 입적한 쿠시나가라(拘尸那揭羅, Kuśi
nagara)를 말한다. 석가가 쿠시나가라의 나이란자나강가에 있던 사라나무가 줄
지어 서 있는(娑羅雙樹) 곳에서 입적하였는데, 그때 이 숲의 나무가 모두 말라
흰색으로 변해 마치 흰 학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하여 이를 학림(鶴林)이라 하
게 되었다. 그래서 석가의 열반지(涅槃地)를 학림이라 한다.
454) 동국:원문의 동진(東震)에서 진(震)은 동방을 나타내는 괘를 말하는 것으로 동
국(東國) 곧 우리나라를 말한다.
455) 인도:원문의 서건(西乾)에서 건(乾)은 북서(北西)방을 나타내는 괘로서 서천축
(西天竺) 곧 인도를 말한다.
이 책에 기록된 의상전(義湘傳)456)을 살펴 보면457) “영휘(永徽)458) 초에 당
나라에 들어가 지엄을 배알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부석본비(浮石本碑)459)
에 의하면 “의상은 무덕(武德)460) 8년(625)에 태어나 어린 나이461)에 출가
하였다. 영휘(永徽) 원년(650) 경술년에 원효(元曉)462)와 함께 중국에 들어
가고자 하였으나 고구려에 이르러 어려움이 있어 돌아왔다. 용삭(龍朔)463)
원년(661) 신유년에 당나라에 가서 지엄에게 배웠다. 총장(總章)464) 원년
(668)에 지엄이 세상을 떠나자 함형(咸亨)465) 2년(671)에 의상은 신라에 돌
아왔다. 장안(長安)466) 2년(702) 임인년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78세였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의상이) 지엄(智儼)과 함께 도선(道宣)율사 처소에
서 공양을 받고 천궁(天宮)의 불아(佛牙)를 요청한 것은 신유년(661)에서
무진년(668)까지의467)의 7, 8년 사이의 일이다. 우리 나라 고종(高宗)이 강
도(江都)에 들어간 임진년468)(1232)에 천궁의 7일 기한이 찬 것인지 의심
한 것은 잘못이다. 도리천(忉利天)469)의 하루 밤낮은 인간 세상의 1백 년에
해당하니470) 의상대사가 처음 당에 간 신유년(661)으로부터 고종 임진년
(1232)에 이르기까지는 693년471)이 된다. 경자년472)(1240)에 이르러 비로소
700년473)이 차니 7일 기한은 이미 차버렸다. 강도에서 나온 지원(至元)474) 7
년(1270) 경오년까지는 730년475)이 된다. 만일 천제(天帝)의 말과 같다면 7
일 후에 천궁에 돌아갔어야 하니, 선사 심감(心鑑)이 강도(江都)를 나올 때
갖고 나와 바친 것은 아마 진짜 불아가 아닐 것이다. 이해 봄 강도 출륙 전
에 궁궐에 여러 종파의 고승들을 모아 놓고 불아와 사리를 빌고자 정근을
간절히 하였는데 한 매도 얻지 못하였으니 7일 기한이 차서 천궁으로 올라
가버린 것 같다. (지원) 21년(1284) 갑신년476)에 국청사(國淸寺)477) 금탑(金
塔)478)을 보수하고 왕과 장목왕후(莊穆王后)479)가 묘각사(妙覺寺)480)에 행
차하여 대중을 모아 낙성을 경찬하였다. 위의 불아는 낙산사(洛山寺)481)의
수정염주와 여의주와 함께 왕과 신하 및 대중이 모두 첨례하고 받들어 예
배한 뒤에 함께 금탑 안에 넣었다. 나 또한 이 모임에 참여하여 이른바 부
처 어금니라는 것을 직접 보았는데 길이가 세 치 쯤 되며 사리는 없었다.
무극(無極)482)이 적는다.
按此錄義湘傳云,“ 永徽初入唐, 謁智儼”. 然據浮石本碑,“ 湘
武德八年生, 丱歲出家. 永徽元年庚戌, 與元曉同伴欲西入, 至
高麗, 有難而廻. 至龍朔元年辛酉, 入唐就學於智儼. 總章元
年, 儼遷化, 咸亨二年, 湘來還新羅. 長安二年壬寅, 示滅, 年
七十八.” 則疑與儼公, 齋於宣律師處, 請天宮佛牙, 在辛酉至
戊辰七八年間也. 本朝高廟入江都壬辰年, 疑天宮七日限滿者,
誤矣. 忉利天一日夜, 當人間一百歲, 且從湘公初入唐辛酉, 計
至高廟壬辰, 六百九十三歲也. 至庚子年, 始滿七百年, 而七日
限, 已滿矣. 至出都至元七年庚午, 則七百三十年. 若如天言,
而七日後還天宮, 則禪師心鑑出都時, 佩持出獻者, 恐非眞佛
牙也. 於是年春出都前, 於大內集諸宗名德, 乞佛牙舍利, 精勤
雖切, 而不得一枚, 則七日限滿, 上天者幾矣. 二十一年甲申,
修補國淸寺金塔, 國主與莊穆王后, 幸妙覺寺, 集衆慶讚訖. 右
佛牙, 與洛山水精念珠如意珠, 君臣與大衆, 皆瞻奉頂戴, 後幷
納金塔內. 予亦預斯會, 而親見所謂佛牙者, 長三寸許, 而無舍
利焉. 無極記.
456) 의상전(義湘傳):영휘 초년에 당나라에 가서 지엄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 의상
전은『삼국유사』권4의「의상전교(義湘傳敎)」를 말한다.
457) 이 이하는 일연의 제자 무극(無極)이 추가로 기록한 부분이다.『삼국유사』에 무
극이 추록한 부분은 이밖에 권4「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한 군데 더 있다.
458) 영휘(永徽):당 고종(高宗)의 연호. 650~655년. 신라 진덕왕 4년~무열왕 2년.
459) 부석본비(浮石本碑):의상의 전기를 기록한 비로 의상이 세운 신라 화엄(華嚴)
종찰(宗刹)인 부석사(浮石寺)에 세워졌던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9세기
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곳에 인용된 단편적인 기록에서 보는 것처럼
의상의 전기를 기록한 가장 기본적인 자료였으나 일찍이 망실되어 현재까지 전
체적인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다.
460) 무덕(武德):당 고종(高宗)의 연호. 618~626년. 신라 진평왕 40~48년.
461) 원문의 관세(丱歲)는 머리를 두 가닥으로 땋아 늘어뜨린 어린애의 머리, 곧 어
린 나이를 말한다.
462) 원효(元曉):617~686. 신라의 고승. 속성은 설씨. 경산에서 태어나 여러 스승을
찾아 배웠고 중국에 가서 새로운 불교를 배우고자 하였으나 도중에 그만 두었
다. 당시 신라에 소개된 대부분의 경론을 탐구하여 하나하나에 대한 대체적인
의미를 평가한 종요(宗要)류의 저술을 펴내고, 더욱 관심이 가는 경론에 대해서
는 상세한 주석서를 썼다. 이들 경론을 총괄적인 관점에서 파악한 『십문화쟁론』
을 저술하여 상호 대립적이 아닌 화합의 새로운 불교관을 펼쳤다. 여러 저술 중
에서도 핵심적인 것은『기신론소』와『금강삼매경론』에서 체계화한 일심(一心)
사상으로서, 이는 신라불교의 가장 탁월한 성과로 평가된다. 요석궁주와 결혼
하여 설총(薛聰)을 낳고 이후 직접 사람들을 만나 아미타불을 알려 주는 등 대
중 교화에 매진하였다. 9세기 초에 그를 기리는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가 세워
졌고, 고려 숙종 때 화정(和靜)국사로 추앙되기도 하였다. 주요 저서에는 앞의
세 저술 외에『화엄경소(華嚴經疏)』·『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법화종요(法
華宗要)』·『이장의(二障義)』·『판비량론(判比量論)』 등 80여 종이 있다.
463) 용삭(龍朔):당 고종(高宗)의 연호. 661~663년. 신라 문무왕 1~3년.
464) 총장(總章):당 고종(高宗)의 연호. 668~669년. 신라 문무왕 8~9년.
465) 함형(咸亨):당 고종의 연호. 670~673년. 신라 문무왕 10~13년.
466) 장안(長安):당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연호. 701~704년. 신라 효성왕 10년~성덕
왕 3년.
467) 신유년에서 무진년까지의:의상이 중국에 가 있던 661년부터 668년 사이.
468) 임진년:고종이 몽고의 침공을 피해 강화에 천도한 고종 19년(1232).
469) 도리천(忉利天): Trāyastrim3 śa. 욕계 6천의 제2천. 원래 인도 신화에 나오는 산
이었는데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수미산(須彌山)이 우뚝 솟아 있고
수미산을 중심으로 주위에 여덟 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가 둘러 싸고 있어 하
나의 세계를 이룬다고 한다. 일곱 번째의 산 바깥으로 짠 바다가 있고 그 바깥으
로 철위산(鐵圍山)이 있어 수미산의 사대주를 이루는데 그 중의 남쪽인 염부제
주(閻浮提洲)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 위에 사천왕천이 있고 그 위 곧 수미
산 정상에 도리천이 있다고 한다. 도리천은 제석천(帝釋天)이 주인이 되어 사방
에 팔천을 거느리고 있어 삼십삼천이라고도 부른다.
470) 도리천(忉利天)에서는 수명이 1천 세인데 인간 세상(人世)의 1백 년이 도리천의
하루 낮밤[一晝夜]에 해당한다. 사천왕천(四天王天)은 나이 5백 세~인간세상 50
년이 1일, 야마천(夜摩天)은 나이 2천 세~2백 년이 1일, 도솔천(兜率天)은 나이 4
천 세~4백 년이 1일, 낙변화천(樂變化天)은 나이 8천 세~8백 년이 1일 ; 타화자
재천(他化自在天)은 나이 1만6천 세~ 1천6 백년이 1일이라고 한다.
471) 693년:의상이 입당한 661년부터 고종이 강화로 천도한 1232년까지는 572년(만
571년)이지 693년이 아니다. 120년 곧 두 주갑(周甲)을 잘못 계산한 것이다.
472) 경자년:고려 고종(高宗) 24년.
473) 700년:앞의 계산과 마찬가지로 고종 경자년(1249)까지는 589년이 되며 지원
(至元) 경오년(1270)까지는 610년이 되어 역시 두 주갑(120년)을 잘못 계산한
것이다.
474) 지원(至元):원 세조(世祖)의 연호. 1264~1294. 고려 원종 5년~충렬왕 20년.
475) 의상이 입당한 661년부터 강도(江都)에서 출륙(出陸)한 1270년까지는 610년(만
609년)이다.
476) 21년(1284) 갑신년:지원(至元) 21년, 충렬왕 10년.
477) 국청사(國淸寺):개성 교외인 개풍군 중서면 여릉리에 있던 절. 선종 6년(1089)
에 의천(義天)이 주도하여 인예태후(仁睿太后)의 지원을 받아 착공하였는데 중
간에 일시 중지되었다가 숙종 2년(1097)에 낙성을 보았다. 낙성되자 의천이 이
곳에서 천태를 강설하여 천태종을 개창하고 천태종의 근본 사찰이 되었다. 인
예태후의 영정을 모신 원찰로서 태후의 발원으로 조성된 황금 13층석탑이 1104
년(숙종 9)에 봉안되었다. 몽고의 침공으로 불탄 후 충선왕 원년(1309)에 무외국
통(無畏國統)을 보내 금당을 중수하고 석가여래삼존을 봉안하도록 하여 1315년
에 낙성하였다.
478) 금탑(金塔):국청사를 완성하고 숙종 10년(1105)에 인예태후가 발원하였던 황
금 13층탑을 만들어 봉안하였다.(『고려사』 권12 숙종 10년 3월 계묘 “王如國淸寺,
置仁睿太后願成金塔.”) 그런데 이 즈음의 금탑에 대한 기사는 충렬왕 11년에 왕
이 흥왕사의 금탑을 찾아 예배하였다는 기사가 있어 이를 잘못 본 것인지 알
수 없다.(『고려사』권30 충렬왕 11년 12월 병진 “王及公主幸興王寺, 拜金塔, 遂幸妙
蓮寺.”) 이곳의 기록에 따르면 국청사 금탑을 보수하고, 묘각사에 가서 부처 어
금니놔 낙산사 보주를 금탑 안에 넣었다고 되어 있어, 묘각사에도 금탑이 있는
것이 된다.
479) 장목왕후(莊穆王后):고려 제25대 충렬왕의 비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원 세조(世祖)의 공주로 충선왕(忠宣王)의 어머니.
480) 묘각사(妙覺寺):경기도 개성시 영평문 밖에 있었던 절. 태조 4년(921)에 창건되
었으며, 고려 말에 국왕이 자주 행차하고 원에 간 상왕의 환국을 비는 기도가 이
루어지기도 하였다. 이후 고려말 조선초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481) 낙산사(洛山寺):오대산 동쪽 바닷가 오봉산(五峰山)에 있는 절. 신라 의상이 이
곳에 관음진신(觀音眞身)이 상주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7일 동안의 기도 끝에
수정염주를 얻고 다시 7일간의 기도 끝에 여의보주를 얻은 후 진신을 친견(親
見)한 이래 관음 근본도량이 되었다. 본래『화엄경(華嚴經)』에서 관음보살이 보
타락가산(普陀洛迦山)에 상주한다는 내용에 따라 ‘낙산(洛山)’의 이름을 따온 것
이다. 이 기록에 이어 등장하는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는 이때 의상이 기도하여
함께 얻었다는 유물로서, 이것이 고려 말기에 실제로 궁중에 전승되었던 것을
확인해주는 자료이다.
482) 무극(無極):고려후기 승려. 1251~1322. 이름은 혼구(混丘), 또 청분(淸玢). 호는
무극노인(無極老人), 시호는 보감국사(寶鑑國師). 10세에 무위사로 출가하고 후
에 일연의 제자가 되었다. 1289년 이후 운문사 내원당 연곡사 보경사의 주지를
역임하고 충렬왕 때 대선사(大禪師), 충선왕 때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 충숙왕
때(1313) 왕사(王師)가 되었다. 그후 은퇴하여 영원사(瑩原寺)에 머무르다 말년
에 송림사(松林寺)로 옮겨 입적하였다. 영원사에 탑비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무
너지고 일부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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