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師三藏法師傳)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3권

수선님 2020. 12. 6. 12:01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3권

 

3.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이란나국(伊爛拏國)까지

 

갈약국사국(羯若鞠闍國)에서 동남쪽으로 6백여 리를 가서 긍가강[殑伽河]을 건너 남쪽의 아유타국(阿踰陀國)1)[중인도]에 이르렀다. 여기는 절이 백여 개나 있었고 승려의 수는 천 명이나 되었는데 대승과 소승을 함께 배우고 있었다.

큰 성(城) 안에는 오래된 가람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벌소반도보살(伐蘇槃度菩薩)2)[당나라 말로는 세친(世親)이다. 옛날에 바수반두(婆藪槃豆)라 하였는데 천친(天親)이라 한역한 것은 잘못이다.]은 대․소승의 논(論)을 저술하고 대중을 위해 강의하였다고 한다.

1) 범어 ayudhā 또는 ayodhyā의 음역이다. 카노지 동남쪽의 Fatehpur지방을 가리키며, 

   그 도성(都城)에 대해서는 Oudh, Kākūpur, Fatepur 동남쪽 Aphui 등의 여러 설이 있다.

2) 중국어로는 세친(世親), 혹은 천친(天親)이라고도 한다. 북인도 건다라국 부루사부라 사람으로 

   4-5세기경의 학승으로 바라문족 출신이다. 그는 소승에서 5백 부, 대승에서 5백 부의 논(論)을 

   지어 천부논사(千部論師)라고 불린다. 형 무착(無着)의 권유로 대승에 귀의하여 크게 이름을 

   드날렸다.

 

성의 서북쪽으로 4~5리 되는 곳의 긍가강 언덕에 있는 큰 가람에 탑이 하나 있다. 높이 2백여 척으로 무우왕(無憂王)이 세운 것인데, 이곳은 부처님께서 옛날에 3개월 동안 설법하신 곳이다. 탑 옆에는 또 과거의 네 부처님[過去四佛]3)이 경행(經行)하시던 곳이 있다.

3) ①4방위에 각각 배치된 4불(佛)을 말하는 것으로, 동방의 아촉불(阿閦佛), 남방의 보상불(寶相佛), 

   서방의 무량수불(無量壽佛), 북방의 미묘성불(微妙聲佛) 등이다. ②밀교의 금강계(金剛界)의 4불로, 

   동방의 아촉불, 남방의 보생불(寶生佛), 서방의 아미타불(阿彌陀佛), 북방의 불공성취불(不空成就佛) 

   등이다. ③밀교의 태장계(胎藏界)의 4불로, 동방의 보당불(寶幢佛), 남방의 개부화왕불(開敷華王佛), 

   서방의 아미타불(阿彌陀佛), 북방의 천고뇌음불(天鼓雷音佛) 등이다. ④화신불(化身佛), 보신불(報身佛), 

   법신불(法身佛), 지혜불(智慧佛) 등을 꼽기도 한다.

 

성의 서남쪽으로 5~6리를 가면 오래된 가람이 있는데, 이곳은 아승가보살(阿僧伽菩薩:Asaṅga)이 설법하시던 곳이다.

아승가보살은 밤이 되면 도사다천(覩史多天)에 올라가 자씨(慈氏)4)보살에게 유가론(瑜伽論)․장엄대승론(莊嚴大乘論)․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5)을 받아 가지고, 낮에는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곳에서 대중을 위해 설법하였다고 한다.

 

아승가(阿僧伽)는 또한 무착(無着)이라고도 하는데 건다라국(健陀邏國) 사람이다. 부처님께서 입멸한 지 1천 년 후에 세상에 나와서 미사새부(彌沙塞部)로 출가하였고 뒤에는 대승을 믿게 되었다.

4) 자씨란 현겁(賢劫)에 출현하는 제5불(佛)의 이름으로, 미륵보살(彌勒菩薩)이나 미륵의 제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자존(慈尊)이라고도 한다. 미륵(彌勒)은 범어로 Maitreya인데, 번역하여 

   자씨(慈氏)라고 하는 것이다. 자(慈)는 성씨(姓氏)이고 이름은 아일다(阿逸多)인데, 이 이름은 

   무승(無勝)의 뜻이다. 무승이란 그의 덕이 수승하고 뛰어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5) 천친(天親)의 저작으로 후에 진제(眞諦)가 한역하였다. 『변중변론(辯中邊論)』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용은, 서로 대립하는 2변(邊)을 지양한 중도(中道)의 의의를 분별해서 논하는데, 중변이란 

   2변의 중간이라는 뜻이다. 모든 법은 자성이 없지만 무(無)라고는 할 수 없으며 이를 유변(有邊)이라고 

   한다. 또 모든 법은 무자성이므로 모두 공이며 이를 무변(無邊)이라고 한다. 중(中)과 변(邊)을 

   분별한다고 함은 이 2변과 중도를 분별해서 설하는 것이다. 이 불전은 모두 세친이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게송은 무착(無着)이 미륵(彌勒)으로부터 전수받아 세친에게 전한 것이고, 

   장행(長行) 즉 산문 부분만이 세친의 저술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우 세친(世親)보살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로 출가하고 뒤에 대승을 믿었다. 형제가 모두 현성(賢聖)의 그릇을 타고 났고 저술하는 데 재주가 있어 광범위하게 여러 논(論)을 저술하여 대승을 해석한 인도의 종장(宗匠)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대법(對法)』․『유식(唯識)』․『구사론(俱舍論)』 등이 다 그의 저술이다.

 

법사는 아유타국의 성적(聖跡)을 순례하고 나서 긍가강을 따라 80여 명과 함께 배를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 아야목거국(阿耶穆佉國)으로 가려고 했다. 1백여 리를 내려가다 보니 강의 양 언덕에 아수가(阿輸迦:Aśoka)6) 숲이 펼쳐졌는데 보통 깊고 울창한 숲이 아니었다.

그런데 밀림의 양쪽 기슭에서 10여 척의 도적이 탄 배가 나타나 노를 저으며 일시에 다가오자 법사가 탄 배에서는 놀라고 소동이 일어나 강물에 뛰어든 사람도 여러 명이나 되었다.

도적들은 드디어 법사가 탄 배를 끌고 강 언덕으로 가더니 모든 사람의 옷을 벗기고 보물이 있는 지를 수색하였다.

그런데 이 도적들은 평소에 돌가천신(突伽天神)7)을 섬기는 자들로서 해마다 가을이 되면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람 한 명을 골라, 그를 죽이고 피를 받아서 돌가천신에게 제사 지내며 복을 비는 관습이 있었다.

도적들은 모습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풍채가 당당한 법사를 보더니 서로 쳐다보고는 좋아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돌가천신에게 제사 지낼 때가 곧 다가왔는데도 아직 사람을 구하지 못했는데, 지금 이 사문은 형모(形貌)가 정숙하고 아름답다. 그를 죽여서 제사 지낸다면 어찌 길(吉)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법사가 말했다.

“나의 이 더럽고 천한 몸을 제사의 재물로 삼는다면 참으로 죽어도 아깝지가 않다. 그러나 내가 멀리서 찾아온 뜻은 보리수상(菩提樹像)과 기사굴산(耆闍崛山)8)을 예배함과 아울러 경법(經法)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이 뜻을 아직 이루지 못한 채 나를 죽인다면 그대들에게 불길할까 두려울 뿐이다.”

선상(船上)의 모든 사람들은 법사를 살려주자고 청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대신 죽기를 원했으나 도적들은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6) 아쇼카 나무의 음역으로, 번역하여 무수(無憂樹)라고 한다.

7) 범어 두르가의 음역으로, 의역하면 난근모(難近母)가 된다. 시바의 비(妃)이다. 

8) 중인도(中印度) 마갈타의 서울 왕사성(王舍城) 동북쪽 10리 지점에 있는 산으로 석가가 

   설법한 산이다. 기사굴산(耆闍堀山)은 범어의 음을 따서 부른 것이다. 보통 뜻으로 한역한 

   영취산(靈鷲山), 취봉(鷲峰), 영산(靈山)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때 도적의 괴수는 사람을 보내어 물을 길어오게 하고, 땅에 섬돌을 놓아 단(壇)을 설치한 다음 진흙을 발라서 곱게 해 놓았다. 그리고 법사를 단 위에 올려놓고 두 도적에게 칼을 뽑게 하여 곧 법사의 목을 치게 했으나 법사는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자 도적들은 모두 놀랐다.

법사는 이미 죽음을 면치 못할 것으로 알고 도적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재촉하지 말고 잠깐만 시간을 주어 나로 하여금 마음이 편하고 기쁘게 죽도록 해주기를 부탁하오.”

법사는 곧 마음을 다해 도사다궁(覩史多宮)의 자씨보살에게 이렇게 염원했다.

“내생에는 그곳에 태어나서 공경하고 공양 올리며『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강의 받아 묘법(妙法)을 듣고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 다시 이 세상에 와서 이 사람들을 교화하여 모든 악업을 버리고 선행을 행하도록 하고 널리 불법을 펴서 일체중생을 편안하고 이익 되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와 같이 시방(十方)의 부처님께 예배하고 정념(正念)으로 앉아 오직 자씨보살만을 생각했으며 다른 잡생각은 없었다. 그러자 마음은 어느덧 마치 소미로산(蘇迷盧山)에 올라 일천(一天)․이천(二天)․삼천(三天)을 넘어 도사다궁의 자씨보살이 있는 묘보대(妙寶臺)에 이르러 천중(天衆)에게 둘러싸인 것을 보는 듯하였다. 몸과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서 자신이 단 위에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고 도적이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동행한 모든 사람들만이 소리 내어 울부짖고 있는데 갑자기 흑풍(黑風)이 사방에서 불어 닥쳐 나무가 부러지고 모래가 휘날리며 강물은 격랑을 일으켜 배가 전부 전복되었다.

도적들은 크게 놀라서 법사 일행에게 물었다.

“저 사문은 어디서 온 사람이며, 이름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대답했다.

“지나국(支那國)에서 법을 구하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이 분이시다. 당신들이 만약 이 분을 죽인다면 한량없이 큰 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저 풍랑이 이는 것을 보아라. 천신(天神)은 이미 노하셨으니 지금 빨리 참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말에 도적들은 벌벌 떨며 모두가 참회하며 이마를 땅에 대고 법사에게 귀의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법사는 역시 무아(無我)의 경지에 있었으므로 이런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도적의 손으로 건드리자 비로소 눈을 뜨고 도적에게 말했다.

“죽일 때가 되었는가?”

도적이 말했다.

“감히 법사님을 해치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참회하오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법사는 그들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도적들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살인을 하거나 도적질을 하거나 혹은 삿된 신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하는 등의 착하지 못한 업(業)을 짓게 되면 미래에는 당연히 무간지옥[無間]의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이오. 번갯불 같고 아침 이슬 같은 짧은 인생에 어째서 아승기[阿僧企耶]9) 세월 끝없는 고통의 씨앗을 만들려 하시오?”

도적들은 즉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며 말했다.

“저희들은 망상(妄想)에 미혹되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으며 섬겨서는 안 될 것에 제사지내 왔습니다. 만약 법사님의 복덕(福德)으로 신불(神佛)을 감동시키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깨우침의 교훈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이후로는 즉시 도둑질을 일체 하지 않겠습니다. 원하건대 법사님께서 증명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서로 상의하여 모든 무기를 거두어 한꺼번에 강물에 던져버리고 빼앗은 옷가지와 재물을 각자 주인에게 돌려주고는 모두 5계를 받았다. 그랬더니 풍랑이 잠잠해졌다. 도적들은 기뻐하면서 법사에게 절을 하고 작별을 했다. 법사의 일행도 경탄하여 평소와는 달리 대했으며,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 일을 들은 사람도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법을 구하려는 지극함이 없었더라면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겠는가? 

9) 아승기(阿僧祇)를 말한다. 번역하여 무수(無數), 혹은 무앙수(無央數)라고 한다. 극히 오래고 

   먼 시간을 말한다.

 

여기서부터 다시 동쪽으로 3백여 리를 가서 긍가강을 건너 북쪽에 있는 아야목거국[중인도]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7백여 리를 가면 긍가강[殑伽河]의 남쪽에 있는 염무나하(閻牟那河)의 북쪽을 건너 발라야가국(鉢羅耶伽國)[중인도]에 이르게 된다. 

이 성(城)의 서남쪽에 있는 첨박가화(瞻博迦花)10) 숲 속에 탑이 있는데 무우왕이 만든 것으로 옛날에 부처님이 외도(外道)를 항복시킨 곳이라고 한다. 

그 옆에는 가람이 있는데 그곳은 제바보살(提婆菩薩)11)이『광백론(廣百論)』을 지어서 소승을 믿는 외도(外道)를 설복시킨 곳이다.

10) 금색화(金色花)라는 뜻이다.

11) 선천(聖天)이라는 뜻이다. 서기 170년에서 270년경에 생존한 인도의 논사이다.

 

성의 동쪽에 두 강이 서로 만나는 곳이 있고 그 서쪽에는 제사를 지낸 터인 선장(墠場)이 있다. 선장의 둘레는 14~15리이며 땅은 평평하다. 예로부터 모든 왕이나 호족들이 자비와 은혜를 베풀 때는 모두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여 이곳을 대시장(大施場)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계일왕(戒日王)도 역시 이 전통을 이어받아 5년 동안 재물을 모았다가 75일 동안 보시를 하되 위로는 삼보(三寶)로부터 아래로는 외롭고 곤궁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보시하였다.

 

여기서부터 서남쪽으로 가서 깊은 밀림에 들어서면 이곳에서는 맹수나 야생 코끼리가 많이 만나게 된다. 

 

이곳을 지나서 5백여 리를 더 가면 교상미국(憍賞彌國)[옛날에 구섬미(俱睒彌)라 한 것은 잘못이다. 중인도에 있다.]에 이른다. 

이곳에는 가람이 10여 군데 있고 승려는 3백여 명이 있다.

성안의 고궁(故宮)에 높이가 60여 척이나 되는 대정사(大精舍)가 있는데, 내부에는 전단(旃檀)에 조각한 불상(佛像)이 있고 그 위에 석개(石蓋)가 걸려 있다. 이것은 오타연나왕(鄔陀衍那王:Udayana)[당(唐) 나라 말로는 출애(出愛)라 한다. 옛날에 우전왕(優塡王)12)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이 만든 것이다. 

12) 우전(優塡)이라고 한다. 또는 우다연왕(優陀延王)․다연나왕(陀演那王)․다연나왕(陀衍那王)

    이라고도 한다. 원래 이름은 온다연나벌차(嗢陀演那伐蹉)라고 하며, 범어로는 Udayana-vatsa이다. 

    의역하여 일자왕(日子王), 또는 출애왕(出愛王)이라고 한다.

 

옛날에 여래께서 도리천(忉利天)에 계시면서 여름 동안 어머니를 위해 설법을 하셨는데, 왕은 여래를 사모하여 곧 목건련[目連]에게 솜씨 좋은 장인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서 부처님의 존안(尊顔)과 모습을 보게 하고 지상으로 돌아와서 자단(紫檀)에 불상을 조각하도록 부탁한 것이다. 

그 뒤 세존께서 지상으로 내려오셨을 때 그 불상이 부처님을 맞이했는데, 바로 그 불상이 이것이라고 한다.

 

성의 남쪽에 오래된 집이 있는데 이것은 구사라(瞿史羅:Ghosila)[옛날에 구사라(瞿師羅)라 한 것은 잘못이다.]장자가 살던 집이다.

또 성 남쪽 멀지 않은 곳에 오래된 가람이 있는데 그것은 구사라장자의 장원(莊園)이다. 그 가운데 탑이 있는데 높이가 2백여 척이나 되며 무우왕이 세웠다고 한다. 

또 성의 동남쪽에 있는 2층 누각은 세친(世親)이『유식론(唯識論)』을 저술한 곳이며, 그 동쪽의 암몰라(菴沒羅) 숲 속에 옛터가 남아 있는데 이곳은 무착보살이『현양론(顯揚論)』13)을 지은 곳이다.

13) 무착(無着)의 저술로 알려졌으며 후에 현장이 한역하였다.『성교론(聖敎論)』,『현양론(顯揚論)』

    으로도 불린다.『유가사지론』의 요점을 간추린 것으로서 유식의 법상(法相), 아뢰야식설, 

    3성설(性說) 등을 망라한 유식 불교의 개요서이다. 귀경송에 따르면 무착은 미륵보살로부터 

    유가사지론을 듣고 그 성스런 가르침을 현양하고자 하여, 유가사지론의 요점을 간추려 본 

    불전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무착이 지은 것으로 아려져 있으나, 사실은 게송만이 무착의 

    저술이고 석문(釋文)은 세친의 저술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비색가국(鞞索迦國:Viśaka)에 이르는데, 이곳에는 20여 개의 가람이 있고 승려가 3천 명이 있는데 소승 정량부(小乘正量部:Sammitīya)14)를 배우고 있었다. 

성의 동남쪽 길 왼쪽에 있는 큰 가람에서는 옛날에 제바설마(提婆設摩:Devaśarman) 아라한이『식신족론(識身足論)』을 지어서 ‘나도 남도 없다[無我人]’는 것을 설했으며, 구파(瞿波:Gopa)15) 아라한이『성교요실론(聖敎要實論)』을 지어 ‘나와 남이 있다[有我人]’는 것을 설파했는데, 이러한 법집(法執)으로 인해 마침내 심한 논쟁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또 호법(護法)16)보살이 7일 동안 소승의 논사(論師) 1백 명을 굴복시킨 곳이기도 하다. 

14) 소승 20부파의 하나이다. 독자부로부터 갈라져 나온 4부 중의 하나로, 교의는 대체로 

    독자부와 같고, 삼미저부론(三彌底部論)이 있다. 

15) 고피카의 음역으로 구이(俱夷), 혹은 구이(裘夷)라고 쓴다. 석가모니가 태자였을 때 제1부인의 

    이름이다. 수광(水光) 장자의 딸이다. 일설에서는 야수다라(耶輸陀羅)의 별명이라고 한다.

16) 유식(唯識)의 10대 논사 중 한 사람이다. 6세기 중엽에 남인도 달라비다국(達羅毘茶國) 

    건지성(建支城)의 대신(大臣)의 아들로 태어나 약관의 나이에 결혼하게 되었으나, 그 날 밤에 

    도망하여 출가하였다. 그 후로 대소승의 교법을 널리 익혀서 통달하였으며, 외도와의 논쟁을 

    통해서 그 명성이 높아졌다.『성유식론(成唯識論)』,『관소연론석(觀所緣論釋)』,

   『대승광백론석론(大乘廣百論釋論)』,『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을 비롯하여 많은 

    저작을 남겼다. 호법 논사, 호법보살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여래께서 6년 간 설법하신 곳이 있다. 거기에는 높이 70여 척이나 되는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이 나무는 옛날 부처님께서 치아(齒牙)를 소제한 다음 남은 가지를 버리자 거기에서 뿌리가 돋아나 지금 이렇게 무성해졌다는 것이다. 사견(邪見)을 가진 무리들이 자주 찾아와서 잘라 버리기도 했지만, 자르면 다시 살아나서 본래처럼 무성해진다고 했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실라벌실저국(室羅伐悉底國)[옛날에 사위(舍衛)17)라 한 것은 잘못이다.]에 이른다. 성의 둘레는 6천여 리가 되는데, 가람은 수백 개나 되고 수 천 명의 승려가 있는데 모두 정량부(正量部)를 배우고 있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계실 때 발라사나시다왕(鉢羅斯那恃多王:Prasenajit)[당(唐) 나라 말로는 승군(勝軍)이다. 옛날에 파사익(波斯匿)18)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이 도읍한 곳이다. 성안에는 왕전(王殿)의 옛터가 남아 있다. 

17) 석가가 설법하며 교화를 펼쳤던 북인도 교살라국(憍薩羅國)의 서울인 사위성(舍衛城)을 

    말하는 것으로, 기원정사(祇園精舍)가 있는 곳이다.

18) 석가모니 생존시 북인도 코살라왕국의 왕이다. 기원정사(祇圓精舍)를 지을 땅을 보시한 

    기타(祇陀) 태자와 부처의 수기를 받은 승만부인의 부친이며, 여러 명의 아내 중 이른바 

    무비(無比)의 보시를 한 말리카와 비사바카티야가 유명하다. 

 

그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도 옛터가 있고 거기에 탑이 서 있는데, 이곳은 승군왕(勝軍王)이 부처님을 위해 큰 강당을 지었던 곳이다. 

큰 강당 가까이 또 다른 탑이 있는데 이곳은 부처님의 이모 발라사발저(鉢羅闍鉢底:Prājāpatī)[당(唐) 나라에서는 생주(生主)라 한다. 옛날에 파사파제(波闍波提)라 한 것은 잘못이다.] 비구니의 정사(精舍)였다고 한다. 

가까운 동쪽에 탑이 있는데 이곳은 소달다(蘇達多:Sudatta)[당나라 말로는 낙시(樂施)라 한다. 옛날에 수달(須達)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의 옛 집터이다. 

집터 옆에 큰 탑이 있는데 이곳은 앙구리마라(鴦窶利摩羅:Angulimāla)[옛날에 앙굴마라(央崛摩羅)19)한 것은 잘못이다.]가 삿된 마음을 버린 곳이다.

19) 석가모니의 생존 당시의 제자이다. 본래 외도(外道)를 믿었던 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뒤에 그들의 손가락을 잘라서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다녔다고 한다. 석가모니를 

    만나서 교화되었고, 불도에 입문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성의 남쪽 5~6리 되는 곳에 서다림(逝多林:Jetavana)20)[당(唐)에서는 승림(勝林)이라 한다. 옛날에 기타(祇陀)라 한 것은 잘못이다.]이 있다. 이곳은 바로 급고독원(給孤獨園)21)인데 옛날에는 가람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미 폐허가 되었다. 

동쪽 문 좌우에는 각각 석주(石柱)가 서 있는데 높이는 70여 척이다. 이것도 무우왕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건물들은 붕괴되었고 오직 벽돌로 된 방 하나만 남아 있다. 

그 안에는 금상(金像)이 있는데, 이것은 옛날에 부처님께서 어머니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 설법하셨을 때 승군왕(勝軍王)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다가, 마침 출애왕(出愛王)이 전단(旃檀)에 불상을 새겼다는 말을 듣고 이 금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20) 급고독원(給孤獨園)의 기원정사(祗園精祇)를 말한다.

21) 기다수 급고독원(祇多樹給孤獨園)이며, 줄여서 기수원(祇樹園)․기원(祇園)이라고도 한다. 

    원래 파사닉(波斯匿)왕의 태자 기타(祇陀)가 소유한 원림(園林)이었으나, 급고독장자

    (給孤獨長者)가 그 땅을 사서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 석가에게 바치고, 태자는 그 

    수목을 바쳤으므로, 두 사람의 이름을 합하여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가람 뒤로 멀지 않은 곳에는 한 외도(外道)의 범지(梵志)22)가 여자를 살해하고 부처님을 비방했던 곳이 있다.

가람의 동쪽 백여 보 되는 곳에 큰 구덩이가 있는데, 이곳은 제바달다23)가 독약으로 부처님을 죽이려다가 산 몸 그대로 지옥으로 들어간 곳이다. 

그 남쪽의 큰 구덩이는 구가리(瞿伽梨:Kālika) 비구가 부처님을 비방하다가 산 채로 지옥에 들어간 곳이다. 

이 구덩이에서 남쪽으로 8백여 보 떨어진 곳에도 큰 구덩이가 있는데 이곳은 전차(戰遮:Ciñcā) 바라문(婆羅門) 여인이 부처님을 비방하다가24)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진 곳이다. 이 세 구덩이는 들여다봐도 밑이 보이지 않는다.

22) 속가의 바라문(婆羅門)과 일체 출가한 외도(外道)를 가리킨다.

23) 체바달다(禘婆達多)로도 적는다. 석가모니의 사촌 동생이며, 곡반왕(斛飯王)의 아들이다. 

    백반왕(白飯王) 또는 선각(善覺) 장자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출가하기 

    이전의 석가모니와 학술과 무예 등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야쇼다라를 아내로 맞는 경쟁에서 

    패배했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성도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다른 친척들과 함께 출가하여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석가모니의 위세를 질시하여 5백 명의 대중을 인솔하고 

    가야산에서 독자적으로 정사(精舍)를 운영하였으며, 아사세왕과 결탁하여 석가모니를 죽이고 

    마가다국의 교권을 장악하고자 기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이후의 교단에서는 

    석가모니를 거역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낙인 찍혔다. 일천제(一闡提)의 성불을 논할 때 제일 

    먼저 거론된다. 

24) 제바달다 때문에 발가락을 다친 일과 전차 바라문 여인의 비방을 받은 일은 석가가 생전에 

    겪었다는 아홉 가지 재난을 말하는 9난(難) 가운데 각각 하나가 된다. 9난은 9뇌(惱)․9횡(橫)․

    구죄보(罪報)라고도 한다. 9난이란 ①음녀 손타리(孫陀利)로부터 비방받은 일[孫陀利謗], 

    ②바라문인 전차란 여자로부터 비방 받은 일[遮女謗], ③제바달다(提婆達多) 때문에 넘어져 

    엄지발가락을 상한 일[調達推山], ④걸식하다가 나무에 다리를 찔리 일, ⑤비루리왕(毘樓璃王) 

    때문에 두통을 앓은 일, ⑥아기달다(阿耆達多) 바라문에게서 마맥(馬麥)을 받은 일[馬餌饒期], 

    ⑦찬바람으로 인하여 등병[背痛]을 앓은 일, ⑧성도(成道) 전의 6년 고행(苦行), ⑨바라문의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빌었으나 얻지 못한 일[乞食空鉢] 등을 말한다.

 

가람 동쪽으로 70여 보 되는 곳에 정사가 있는데, 높고 크며 안에는 불상이 동쪽을 향해 앉아 있다. 여래께서 옛날에 외도들과 논쟁을 벌인 곳이라 한다. 

동쪽 가까이에 천사(天祠)25)가 있는데 크기는 정사와 같다. 햇볕이 움직일 때 천사의 그림자는 정사에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정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이면 천사를 덮어버린다.

또 동쪽으로 3,4리 되는 곳에 탑이 있는데 이곳은 사리자(舍利子)가 외도와 더불어 논쟁을 벌였던 곳이다.

대성(大城)의 서북쪽으로 60여 리 되는 곳에 옛 성이 있는데 이곳은 사람의 수명이 2만 년인 현겁(賢劫) 사이에 가섭파(迦葉波:Kāśyapa)26) 부처의 아버지의 성이었다고 한다. 

이 성의 남쪽에 탑이 있는데 이곳은 가섭파 부처가 정각(正覺)을 이루고 나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났던 곳이다.

이 성의 북쪽에도 탑이 있고, 그 탑 안에 가섭파 부처의 전신 사리(全身舍利)가 있는데 이 모두가 무우왕이 건립한 것이라 한다.

25) 힌두교의 사당을 말한다.

26) 석가의 십대 제자의 한 사람인 마하가섭파(摩訶迦葉波)로 석가가 죽은 뒤 불교의 장로(長老)가

    된 사람이다.

 

여기서부터 동남쪽으로 8백여 리를 가면 겁비라벌솔도국(劫比羅伐窣堵國)[옛날에는 가비라위국(迦毘羅衛國)이라 하였다.]에 이른다. 이 나라의 둘레는 4천여 리이고,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인데 모두 황폐해졌다.

궁성(宮城)의 둘레는 15리이고 벽돌로 쌓아서 대단히 견고하다. 

그 안에는 정반왕(淨飯王)27)의 정전(正殿)이었던 옛터가 있는데, 그 위에 정사를 짓고 안에다 왕의 상(像)을 만들어 놓았다. 

27) 고대 중인도의 가비라위국의 왕으로 사자협왕(師子頰王)의 태자였으며 석가모니의 부친이다. 

    만년에는 불법에 귀의했으며, 석가모니를 비롯한 여러 불제자들의 간호를 받으며, 79세(일설에는 

    97세)에 타계했다. 

 

북쪽 가까이에도 옛 건물터가 있는데, 이곳은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침전(寢殿)이다. 이곳에도 정사를 짓고 그 안에는 부인의 상을 모셔 놓았다. 

그 옆에 또 정사가 있는데, 이곳은 석가보살이 모태(母胎)에 강림하신 곳이며 그 안에는 보살이 강림하는 상을 모셔 놓았다.

 

상좌부(上坐部)에서는 보살이 올달라알사다월(嗢怛羅沙茶月)28) 30일 밤에 모태에 강림하셨다고 하는데 이날은 우리 당나라의 5월 15일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 밖의 여러 부(部)에서는 이 달 23일이라고 하니, 이는 당나라의 5월 8일에 해당되는 것이다.

28) 인도의 4월을 말한다.

 

동북쪽에도 탑이 있는데, 이곳은 아사타(阿私陀)29) 선인(仙人)이 태자의 관상(觀相)을 보았던 곳이다. 성 좌우에는 태자가 많은 석가족들과 씨름을 했던 곳이 있다. 

 

또 태자가 말을 타고 성을 넘은 곳이 있고, 그 전에 4문(門) 밖으로 나와 노인과 병든 사람과 죽은 사람과 사문(沙門)을 본 뒤로 세상에 대한 무상을 느껴 수레를 되돌렸다는 곳이 있다.

29) 갓 태어난 석가모니의 미래를 예언했던 선인의 이름이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밀림을 헤치고 5백여 리를 가면 람마국(藍摩國)[중인도]에 이르게 되는데 사는 사람은 드물다. 

옛 성의 동남쪽에 벽돌로 쌓은 탑이 있는데 높이는 50여 척이다.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뒤 이 나라의 선왕(先王)이 사리(舍利)를 분배받아 귀국한 후 만든 탑으로 항상 빛을 내고 있다. 

그 옆에 용(龍)이 사는 연못이 있는데, 용은 때때로 사람으로 변신하여 경을 읽으며 탑 주위를 돌기도 하고 야생 코끼리가 꽃을 물고 와서 탑 앞에 공양을 올리기도 한다고 한다.

 

그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가람이 있는데, 사미가 절을 관리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어떤 비구[苾芻]30) 가 여러 도반들을 불러 모아 먼 길을 와서 탑에 예배했는데 마침 야생 코끼리가 꽃을 물어다가 탑 앞에 놓고는 상아로 풀을 베고 코로 물을 뿌리는 것을 보았다. 비구들이 보고는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한 비구가 문득 비구계[大戒]를 버리고 이곳에 머물러 공양하기를 원하면서 비구들에게 말했다.

“코끼리는 짐승인데도 오히려 탑을 공경하여 꽃 공양을 하고 청소까지 할 줄 안다. 나는 인간으로서 부처님께 귀의하여 출가까지 한 몸인데, 어찌 눈으로 황폐된 탑을 보고도 받들어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다른 비구들과 작별하고 홀로 남아서 오두막집을 짓고 연못을 만들고 꽃과 과일 나무를 심었다. 그렇게 더위가 추위를 겪으면서 1년 내내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일을 했다. 

이웃 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각각 재보(財寶)를 희사하여 함께 가람을 건립하게 하고 그 승려로 하여금 승무(僧務)를 관장하게 했다. 그로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와 마침내 이런 고사(故事)가 있게 된 것이다.

30) 비구(比丘)가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자에 대한 통칭이다. 서천축(西天竺)에 

    필추라는 만초(蔓草)가 있는데, 이 풀이 5덕(德)을 갖추었으므로 출가한 사람에 비유하여 

    필추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비추단(芘蒭壇)이라고 한 것은 필추를 다르게 쓴 

    것으로 스님의 자리라는 뜻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사미의 가람의 동쪽으로 큰 숲 속을 백여 리쯤 가면 탑이 있는데 이것도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이곳은 태자 싯달타가 성(城)을 넘어온 후 이곳에 이르러 보의(寶衣)와 천관(天冠)과 계주(髻珠)를 벗어 천탁가(闡鐸迦:Chandaka)[옛날에 차닉(車匿)31)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에게 건네주고 돌려보낸 곳이다. 그리고 머리를 깎은 곳에도 모두 탑이 있었다.

31) 출가하기 이전의 석가모니의 하인, 즉 싯달타 태자의 하인이었다. 태자가 성을 빠져 나와 

    출가할 때 태자의 백마를 끌고 따랐다. 남마촌(藍摩村)에서 태자와 작별하고 보관, 의대, 

    백마를 수호하여 성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출가하여 불제자가 되었으나, 스스로 왕족의 

    혈통인 체하며 다른 비구들을 멸시하여 악구차닉(惡口車匿), 악성차닉(惡性車匿)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숲 속을 벗어나면 구시나게라국(拘尸那揭羅國)에 이른다. 이 나라는 매우 황폐해져 있다. 

성안의 동북쪽 한 귀퉁이에 탑이 있는데 역시 무우왕이 건립한 곳이다. 이곳은 준다(准陀)32)[옛날에 순다(純陀)라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의 옛집이다. 

집안에 우물이 있는데 부처님께 공양드리기 위해 판 것이라 하며 지금도 물이 맑게 고여 있다.

32) 부처님께 전단수를 공양한 사람이다.

 

성의 서북쪽으로 3~4리를 가면 아시다벌저하(阿恃多伐底河)33)[당나라 말로는 무승(無勝)이라 한다. 옛날에 아리발제하(阿利跋提河)라 한 것은 잘못이다.]를 건너게 된다. 그리고 강기슭에서 조금 가면 사라림(娑羅林)34)이 나타나 는데 이 나무는 떡갈나무 비슷한 것으로서 껍질은 푸르고 잎은 하얗고 밝은 광택이 난다. 여기에 높이가 비슷한 네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여기가 바로 여래가 열반에 든 곳이다. 

이곳에 벽돌로 지은 정사가 있고 그 안에 여래의 열반상이 있는데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누워 있다. 

바로 옆에 높이 2백여 척이 되는 큰 탑이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사적을 새긴 석주(石柱)가 세워져 있는데 연월(年月)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33) 지금의 라부디강을 말한다.

34) 석가가 입멸한 사라쌍수의 숲을 말한다.

 

전하는 기록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80년을 사셨고, 폐사거월(吠舍月:Viśākha)35)의 후반 15일에 열반에 드셨다고 하니, 즉 중국의 2월 15일에 해당된다. 그러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부처님께서 가라저가월(迦剌底迦月)의 후반에 열반하신 것으로 되어 있으니 바로 중국의 9월 8일에 해당된다. 열반하신 때를 지금부터 1천2백 년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1천3백 년, 혹은 1천5백 년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9백 년을 넘었으나 아직 1천 년은 되지 않았다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여래께서 금관(金棺)에 앉아서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셨고, 손을 내밀어 아난(阿難)에게 묻기도 했으며, 발을 드러내어 가섭(迦葉)에게 보이고, 향목(香木)으로 몸을 태워 여덟 나라 왕에게 뼈를 나누어 주었다는 일들이 모두 이 탑에 기록되어 있었다.

35) 인도의 월력으로 2월을 말한다.

 

이곳에서부터 다시 숲 속으로 5백여 리를 가면 바라니사국(婆羅痆斯國)에 이른다. 이 나라의 둘레는 4천여 리가 되고 도성의 서쪽에는 긍가강이 흐른다. 강의 길이는 10여 리이고 폭은 5~6리이다. 가람이 30여 개나 되며 2천여 명의 승려가 소승일체유부(小乘一切有部)를 배우고 있었다.

 

바라니사국에서 강을 건너 동북쪽으로 10여 리를 가면 녹야가람(鹿野伽藍)에 이른다. 대관(臺觀)은 구름에 닿을 만큼 높이 솟았고 긴 회랑(回廊)은 사방으로 이어져 있다. 1천5백 명의 승려들이 소승 정량부(小乘正量部)를 배우고 있었다.

큰 담장 안에 높이 백여 척의 절이 있는데, 돌로 된 계단마다 벽돌로 만든 감실[龕]이 있으며, 1백 층이나 되는 돌계단에는 모두 황금불상을 숨겨 놓았다. 안에는 유석(鍮石)으로 만든 불상이 있는데 여래의 몸과 같은 크기로 부처님의 전법륜(轉法輪)36)의 모습을 나타내 놓았다.

이 절의 동남쪽에 높이가 백여 척이 되는 돌로 만든 탑이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그 앞에는 높이 70여 척의 석주(石柱)가 있는데 이곳은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법륜(法輪)을 굴리셨던 곳이다. 

그 옆에는 매달려(梅怛麗:Maitreya)[당나라 말로는 자씨(慈氏)라 한다. 옛날에 미륵(彌勒)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보살이 수기(受記)를 받았던 곳이 있다. 

서쪽에 탑이 있는데 이곳은 부처님께서 옛날에 호명(護明)보살이 되어 사람의 수명이 2만 년이 되는 현겁(賢劫) 중에 가섭파(迦葉波) 부처에게서 수기를 받으셨던 곳이다. 석가모니께서 수기를 받았던 곳의 남쪽에 과거의 4불(佛)이 경행(經行)한 유적이 있다. 여기에는 길이 50여 보, 높이 7척의 청석(靑石)으로 쌓아올린 단이 있으며 그 위에 4불이 경행하는 상을 만들어 놓았다.

가람의 서쪽에는 여래께서 목욕하셨던 연못이 있고 또 식기를 씻었던 못, 그리고 법의를 빨았던 못이 있는데 모두 신룡(神龍)이 수호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럽히지 못한다.

못 옆에 탑이 있는데 이곳은 부처님께서 보살행(菩薩行)을 수행하실 때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로 변신하여 사냥꾼에게 이빨을 빼드린 곳이다. 또 새의 몸이었을 때 원숭이와 흰 코끼리와 함께 니구율수(尼拘律樹)37) 아래서 맹세하여 장유(長幼)의 서열을 정하시고, 순행(巡行)하며 사람을 교화한 곳이다. 그리고 또 사슴왕[鹿王]이 되었던 곳과 교진여(憍陳如:Kaundinya) 등 다섯 사람을 제도하신 곳38)이기도 하다. 

36) 부처님의 교법을 법륜(法輪)이라 하고, 교법을 설하는 것을 전법륜이라 한다.

37) 니야그로다의 음역으로, 열대 지역이 산지인 교목의 일종이다. 무성한 가지와 잎은 열대의 

    폭염을 피하기에 좋은 그늘을 제공한다. 니구류(尼拘留)ㆍ니구류(尼拘類)ㆍ니구로다(尼俱盧陀)ㆍ

    무상(無常)ㆍ종광(從廣)ㆍ니구류수(泥拘類樹)ㆍ니구류원(尼拘類園)ㆍ니구다(尼拘陀)ㆍ니구다수

    (尼拘陀樹)ㆍ니구율다(尼拘律陀)ㆍ니구율다원(尼拘律陀園)이라고도 번역한다.

38) 석가세존이 성도한 지 삼칠일(三七日)만에 처음으로 법륜(法輪)을 굴리어 녹야원(鹿野苑)에서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 등 다섯 비구(比丘)를 제도한 일을 가리킨다.『잡아함경(雜阿含經)』 

    23에 나온다.

 

여기서부터 긍가강을 따라 동쪽으로 3백여 리를 가면 전주국(戰主國)에 이른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긍가강을 건너 백 4~5십 리를 가면 폐사리국(吠舍釐國)[옛날에 비사리(毘舍離)라 한 것은 잘못이다.]에 이르게 되는데 나라 둘레는 5천여 리이고 땅이 비옥하여 암몰라과(菴沒羅菓)와 무차과(茂遮菓:Moca)가 많다. 도성은 황폐해졌으나 옛터의 둘레는 60~70리나 되며, 주민은 매우 적다. 

궁성의 서북쪽 5~6리 되는 곳에 가람이 하나 있는데 그 옆에 탑이 있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옛날에 『비마라힐경(毘摩羅詰經)』을 설하셨던 곳이다. 

그 동북쪽 3~4리 되는 곳에 탑이 있다. 이곳은 비마라힐(Vimalakrt)의 집터인데 그 집터에는 지금도 영험이 많다고 한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돌을 쌓아 만든 집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무구칭(無垢稱)39)이 병이 들었을 때 부처님께서 설법해준 곳이다. 

이 옆에 보적(寶積:Ratnakāra)의 옛집과 암마라녀(菴摩羅女)40)의 옛집이 있다.

다시 북쪽으로 3~4리 되는 곳에 탑이 있는데 이곳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위해 구시나국(拘尸那國)으로 가시다가 따르던 천인(天人)과 잠시 서서 쉬셨던 곳이다.

그리고 서쪽에는 부처님께서 최후로 폐사리국(吠舍釐國)을 바라보시던 곳이 있다. 

그 남쪽에는 암마라녀가 장원(莊園)을 부처님께 바친 곳이 있다. 

또 부처님께서 마왕(魔王)에게 열반을 허락한 곳도 있다.

39) 유마(維摩)의 원어인 비말라키르티의 번역이다. 비말라(vimala)는 깨끗함, 때가 없음을 뜻하며, 

    일체 중생들의 자성이 청정함을 의미한다. 키르티(kīrti)는 명(名), 칭(稱)을 뜻하며, 마음이란 

    본래 형체가 없어서 오직 이름뿐임을 의미한다. 중인도 비야리성의 장자였던 유마는 재가자로서 

    대승 보살의 행업을 닦아 무생인(無生忍)을 얻었으며, 무애 자재한 변재로 유명하다. 유마 거사, 

    정명 대사 등으로 불린다. 

40) 암라파리(菴羅婆利)를 말한다. 부처님이 세상에 계시던 시절 비사리에 살던 기녀(妓女), 

    또는 비구니의 이름이다. 또한 빈비사라왕과 동침하여 기바(耆婆) 의왕(醫王)을 낳았다는 

    기록도 있다. 불법에 귀의한 뒤 부처님에게 암마라수원을 바친 일화로 유명하다. 그녀와 

    관련된 전생담을 비롯한 여러 설화가 경전에 들어 있다. 

 

폐사리의 남쪽 경계로부터 긍가강 쪽으로 건너 백여 리 되는 습폐다보라성(濕吠多補羅城)41)에 도착하여 법사는『보살장경(菩薩藏經)』을 얻었다.

41) 백성(百城)이라는 뜻이다. 폐사리국의 남쪽, 간가강 북쪽 백리라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확실치 않다. 

 

그리고 남쪽으로 긍가강을 건너면 마게타국(摩揭陀國)[옛날에 마가타(摩伽陀)라 한 것은 잘못이다.]에 이른다. 이 나라는 둘레가 5천여 리이며 풍속에 학문을 숭상하고 현인을 중히 여긴다. 가람은 50여 군데 있으며 승려는 1만여 명이고 대승을 배우고 있다.

 

긍가강의 남쪽에는 옛 성이 있는데 둘레가 70여 리이며 비록 황폐해졌으나 치첩(雉堞)만 남아 있다. 옛날에 사람의 수명이 무량했을 때에는 이곳을 구소마보라성(拘蘇摩補羅城:Kusumapura)[당(唐)에서는 향화궁성(香花宮城)이라 한다.]이라 불렀는데 왕궁에 꽃이 많아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사람의 수명이 수천 세(數千歲)였을 때에는 이 성의 이름을 파타리자성(波吒釐子城:Pādalīputra)

42)[옛날에 희련불읍(熙連弗邑)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이라 했는데 파타리나무가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42) 파타리는 범어의 음역(音譯)이고 자(子)는 의역(意譯)이다. 파타리는 담적색(淡赤色) 꽃이 

    피는 나무 이름이다. 파라리불다라(波羅利弗多羅), 파라리불(巴羅利弗), 파릉불(巴陵弗), 

    파린(波隣) 등으로 한역된다. 옛 성지(城址)는 지금의 Patna의 서북 교외에 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1백 년 만에 아수가왕(阿輸迦王)43)[당(唐)에서는 무우왕(無憂王)이라 한다. 옛날에 아육왕(阿育王)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이 나타났다. 왕은 빈비사라왕(頻毘娑羅王:Bīmbīsara)[당나라 말로는 영견(影堅)이라 한다.]의 증손으로 왕사성(王舍城)44)에서 이곳으로 천도해 왔으나 연대가 너무 오래되어 지금은 다만 옛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수백 군데의 가람이 있었으나 지금은 겨우 두세 군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옛 궁터의 북쪽 긍가강을 바라보는 곳에 천여 채의 집을 거느린 작은 성이 있다.

궁의 북쪽에 높이 수십 척이 되는 석주(石柱)가 있는데, 이곳은 무우왕이 난폭했던 즉위 초에 지옥을 만들어 놓은 곳이다.

법사는 이 작은 성에서 7일간 머물면서 성적(聖跡)을 순례하였다.

43) 인명으로 아쇼카 왕을 말한다. 한음(漢音)으로 아서가(阿恕伽) 또는 아수가(阿輸迦)이며 

    번역으로는 무우(無憂)이다. 서기전 321년경에 인도에다 공작왕조(孔雀王朝)를 창립한 

    전타굴타 대왕(旃陀掘多大王)의 손(孫)이다. 왕이 불문(佛門)에 들어온 뒤로 열렬한 도(度)가 

    비상하여 영내(領內) 각지에 팔만 사천 대사(大寺)와 8만 4천 보탑(寶塔)을 건립하였다. 

    무우천자(無憂天子), 아육왕(阿育王)이라고도 한다,

44) 고대 중인도(中印度) 마갈타국의 수도. 원어인 라자그리하를 음역하여 나열기(羅閱祇)라고도

    한다. 나열기성(羅閱祇城), 왕사(王舍)라고 부른다.

 

지옥의 남쪽에 탑이 하나 있는데, 즉 무우왕이 사람의 힘으로 만든 8만 4천의 탑 가운데 하나이다. 탑 안에는 여래의 사리 한 말이 모셔져 있는데 항상 신비한 광채를 내고 있다.

또 절도 있는데 그 절 안에는 여래께서 밟으셨던 돌이 있다. 그 돌 위에 길이 1척 8촌, 폭 6척인 부처님의 두 발자국이 남아있다. 두 발자국 밑에는 부처님의 32상(相)의 하나인 천복륜상(千輻輪相)이 있다. 열 발가락 끝에는 만자(萬字) 무늬와 떡과 고기 등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곳은 여래가 열반에 들기 위해서 폐사리를 출발하여 이곳에 이르러 강 언덕의 큰 바위 위에 서서 아난을 돌아보시며 “나는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금강좌(金剛座) OM NUM='45)와 왕사성에 남긴 발자국을 바라보고 싶다”고 말씀하신 곳이다.

이 정사의 북쪽에 높이 30여 척의 석주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 번이나 섬부주(贍部洲)를 불(佛)․법(法)․승(僧)에게 보시하고, 다시 세 번이나 진보(珍寶)로써 섬부주를 사들였다는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옛성의 동남쪽에 굴타아람마(屈吒阿濫摩:Kurkutārāna)[당나라 말로는 계원(鷄園)이라 한다.]가 있는데, 이는 승가람(僧伽藍)의 옛터로서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무우왕이 천 명의 승려를 불러다가 

4사(事)46)를 공양한 곳이 이곳이다.

법사는 이러한 성적(聖跡)을 무려 7일 동안 다니면서 예배하였다.

45) 석가모니가 성도할 당시 앉았던 보리수 아래의 자리를 말한다.

46) 의복ㆍ음식ㆍ침구ㆍ탕약의 네 가지를 말한다. 혹은 방사(房舍)ㆍ의복ㆍ음식ㆍ탕약이라고도 한다.

 

다시 서남쪽으로 6~7유순(由旬)을 가서 저라책가(低羅磔迦:Tilaśākya)라는 절에 이르렀다. 그 절에는 수십 명의 삼장이 있었는데, 법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나와 영접했다.

 

여기서부터 또 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서 보리수(菩提樹)에 이르렀다. 나무의 둘레를 벽돌로 쌓았는데 매우 높고 견고했으며, 동서는 길고 남북은 좁았다. 정문(正門)은 동쪽으로 니련선하(尼連禪河)

47)를 마주하고 있으며, 남문은 대화지(大花池)와 연접해 있고, 서쪽은 험준한 언덕으로 막혀 있다. 그리고 북문은 대가람48)과 통해 있는데 그 안에는 성적(聖跡)이 이어져 있다.

이러한 절이나 탑은 모두 왕과 대신과 부호와 장자들이 부처님을 흠모하는 마음에서 조성한 것으로 기에 각자의 이름을 남겨 놓았다.

중앙에 금강좌(金剛座)가 있는데, 현겁(賢劫) 초에 대지(大地)와 함께 솟아나 이루어진 것이다. 금강좌는 삼천대천(三千大千)세계의 중앙에 있으며, 아래로는 금륜(金輪)49)에 이르고, 위로는 땅이 가지런히 있는데 모두 금강(金剛)으로 만들어졌고 둘레는 백여 보가 된다. 금강이라는 것은 견고하여 부서지지 않으며 능히 세상의 만물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만약 부처님께서 이런 곳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이 땅에 머물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에 금강으로 자리를 만들지 않았다면 대지(大地)는 금강정(金剛定)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마귀를 항복받고 도를 이루려면 반드시 여기에 있어야 하며 만약 다른 땅에 있게 되면 땅은 곧 꺼져버린다. 그러므로 현겁(賢劫) 가운데의 천불(千佛)은 모두 금강좌에 앉았기에 이곳을 성도하는 곳[成道處]이라고도 하고 또는 도량(道場)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온 세계가 진동하고 흔들려도 이곳만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1~2백 년 지나오는 동안 중생의 복이 얇아져서 보리수 아래에 간다 해도 금강좌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47) 니련선(尼連禪)이라고도 한다. 범명은 Nairañjanā, 파리명(巴利名)은 Nerañjarā 혹 

    Nirañjarā이다. 또는 희련선하(希連禪河)․니련선나하(尼連禪那河)․니련연하(尼連然河)․

    니련하(泥連河)․희련하(熙連河)․니련선강(尼連禪江)․니련강수(尼連江水)․니련수(尼連水)

    라고도 한다. 의역하면 불락저하(不樂著河)라는 뜻이다. 항하(恆河)의 지류로 중인도 

    마게타국(摩揭陀國) 가야성(伽耶城)의 동쪽에 위치하며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48) 마하보리승가람(摩訶菩提僧伽藍), 즉 대각사(大覺寺)를 말한다.

49) 세계의 4륜(輪)의 하나이다. 제일 아래층인 공륜(空輪) 위에 풍륜(風輪)이 있는데, 그 위를 

    수륜(水輪)이라 하며, 다시 그 위에 금륜이 있다 한다. 그리고 이 금륜 위에 9산(山)과 

    8해(海)가 있으니 그것을 지륜(地輪)이라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모든 나라의 왕들은 두 관자재보살상(觀自在菩薩像)으로 남북 경계의 표시를 삼고서 동향(東向)으로 안치하였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보살상이 묻혀 보이지 않게 되면 불법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남쪽에 있는 보살은 이미 가슴까지 묻혀 버렸다.

보리수는 즉 필발라수(畢鉢羅樹:Pippala)50)이다. 부처님께서 계실 때에는 높이가 수백 척이 되었으나 자주 악왕(惡王)51)이 베어놨기 때문에 지금은 높이 5장(丈) 정도이다. 부처님께서 그 아래에 앉아 무상등각(無上等覺)52)을 이루셨기 때문에 보리수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무는 황백색이며, 가지나 잎은 푸르고 윤기가 돌며, 가을이나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여래의 열반일(涅槃日)이 되면 그 잎들이 갑자기 떨어졌다가 그날 밤이 지나면 다시 본래대로 되살아난다.

매번 열반일이 되면 모든 나라의 왕과 대신들은 보리수 아래에 모여 우유로 보리수를 닦고 등불을 켜고 꽃을 뿌린 뒤에 잎을 수거하여 간다고 한다.

50) 보리수의 이름인 핍팔라의 음역이다.

51)『서역기』에서는 아쇼카왕과 그 왕비, 시샹카왕을 들고 있다.

52)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약칭이다. 일체 진리를 깨달아 알아서 일체 사물을 이해하는 

    일종의 지혜를 말한다.

 

법사는 여기에 와서 보리수와 자씨보살이 만든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실 때의 상(像)에 예배하되, 지성으로 우러러보고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며 비애와 오뇌(懊惱)에 젖어 스스로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실 때에 이 몸은 어느 악도(惡道)에 빠져 헤매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제 상계(像季)53)가 되어서야 비로소 여기에 이르렀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죄업이 어찌 이다지도 깊고 무겁단 말인가?”

그리고 눈에서는 비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때마침 하안거(夏安居)가 끝난 때라서 승려들이 원근에서 몰려왔는데 수천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법사의 이런 모습을 보고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53) 상교(像敎)가 능이(陵夷)한 말세를 말한 것이다. 불멸(佛滅) 후 5백 년은 정법(正法)이라 하고 

    정법 후 1천 년은 상법(像法)이라 하는데, 법이 행할 때와 같다는 말이다. 계(季)는 상법의 

    계세(季世)를 가리킨다.

 

이곳은 1유선나(踰繕那)54)나 되는 지역이 성적(聖跡)으로 가득 차 있다. 법사는 여기서 8~9일 동안 머물면서 두루 예배하였다.

열흘째 되던 날 나란타사(那爛陀寺)55)의 대중들이 네 사람의 대덕(大德)을 보내서 법사를 맞이했으므로 그들과 함께 7유선나를 가서 나란타 절의 장원(莊園)에 이르렀다. 이곳 장원은 목련 존자(木蓮尊者)56)가 태어난 마을이었다. 

법사는 장원에서 식사를 했는데, 잠시 후에 2백여 명의 승려들이 천여 명의 신자를 데리고 깃발과 양산과 꽃과 향 등을 가지고 영접을 나와 법사를 에워싸고 칭송하며 나란타 절로 들어갔다. 이미 모든 대중들은 모여 있다가 법사와 서로 인사를 하였다. 인사가 끝나자 따로 마련된 맨 윗자리에 법사를 앉게 하고는 대중들도 제자리에 앉았다.

모두 자리에 앉고 나자 유나(維那)57)가 죽비(竹篦)를 치면서 선창(先唱) 했다.

“법사께서 이 절에 머무시게 되었다. 사중(寺中)의 모든 대중들이 사용하는 법물(法物)과 도구(道具)는 모두 공동으로 사용한다.”

그리고는 늙지도 젊지도 않고 경률(經律)을 잘 알며 위의가 바른 승려 20명을 골라 법사를 모시고 정법장(正法藏)을 참배하도록 했다. 정법장은 곧 계현 법사(戒賢法師)58)를 말하는데 대중들이 모두 존중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정법장이라 부르고 있다.

이렇게 법사는 대중을 따라가서 정법장을 알현했다. 뵙고 나서는 곧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 존경의 마음이 극진해졌다. 법사는 그들의 의식(儀式)에 따라 무릎과 팔꿈치로 걸어가서, 계현 법사의 발에 머리를 대고[鳴足頂禮] 문안드리며 찬탄하였다.

그러고 나자 정법장은 널리 자리를 펴고 법사와 여러 승려들을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자리에 앉자 법사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법사가 대답했다.

“지나국(支那國)에서 왔습니다. 스승에게 유가론(瑜伽論)을 배우고자 합니다.”

정법장은 이 말을 듣고 나자 눈물을 흘리며 제자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Buddhabhadra)[당(唐)에서는 각현(覺賢)이라 한다.]를 불렀다. 그는 법장의 조카로서 나이는 70여 살이며 경론에 해박하고 언변에 능했다. 법장이 그에게 말했다.

“자네가 사람들에게 내가 3년 전까지 병으로 고통 받던 인연을 말하는 것이 좋겠네.”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는 이 말을 듣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옛날의 인연을 말했다.

“화상(和上)께서는 옛날에 풍병(風病)에 걸렸었습니다. 매번 발작할 때마다 수족에 마치 불로 태우고 칼로 잘라내는 것과 같은 통증이 왔습니다. 갑 자기 발작했다가 금방 나아버리기를 무려 20여 년이나 했습니다. 지난 3년 전에는 고통이 너무 심해서 당신의 그전 몸뚱이에 혐오감을 느껴 음식을 끊고 자살하시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꿈을 꾸었는데 세 천인(天人)이 나타났습니다. 한 분은 황금색, 또 한 분은 유리색, 다른 한 분은 은백색이었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옷은 매우 가벼우며 밝았습니다. 세 천인이 화상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자신의 몸을 버리고자 하는가? 경전에는, 육신에 고통이 있다는 것을 말했지만 몸을 혐오하며 버리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대는 일찍이 전생에 국왕이 되어 많은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이러한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과거의 허물을 반성하고 지극정성으로 참회해야 할 때이다. 고통을 기꺼이 참고 부지런히 경론(經論)을 펴서 스스로 죄업을 없애야 하느니라. 지금 그대가 몸을 버린다 해도 고통은 끝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라.’

화상께서는 이 말을 듣고 지극정성으로 예배를 했습니다. 그러자 황금색 천인이 유리색 천인을 가리키며 화상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아는가? 이 분이 관자재보살이시니라.’

그리고는 은백색 천인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분은 자씨(慈氏)보살이시니라.’

계현 화상께서는 즉시 예배를 드리고 자씨보살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항상 보살님이 계시는 곳에 태어나기를 원하고 있사온데 소원대로 될지 모르겠습니다.’

천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대가 널리 정법(正法)을 전한다면 후세에는 마땅히 그곳에 태어날 것이니라.’

그러자 황금색 천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만수실리(曼殊室利)보살이다. 우리들은 그대가 부질없이 몸을 버리고자 하는 것을 보고는 그렇게 해서는 결코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여기 와서 권하는 것이다. 그대는 나의 말에 따라 정법(正法)인 유가론(瑜伽論) 등을 세상에 널리 알려서 아직 듣지 못한 곳까지 두루 펴도록 하여라. 그리 

하면 그대의 몸은 점점 편안해질 것이니라. 

그리고 그 일을 할 사람을 구하지 못할까 근심할 것은 없다. 지나국(支那國)에 한 스님이 있는데 그는 기꺼이 대법(大法)을 널리 유통시키기 위해 그대에게 와서 배우기를 바라고 있다. 그대는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오면 가르쳐 주도록 하라.’

정법장께서는 이 말을 듣고 나서 예배하며 말했습니다.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 세 천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는 화상의 병고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승려들은 참으로 드문 일이라며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법사는 이 이야기를 듣고 기쁨을 이기지 못해 다시 예를 올리며 말했다.

“만약 말씀한 바와 같으시다면 저는 힘을 다해 배우겠습니다. 원컨대 스승께서는 자비로써 받아주시어 가르쳐 주십시오.”

법장이 다시 법사에게 물었다.

“그대는 몇 년이나 걸려 이 길을 왔는가?”

법사가 대답했다.

“예, 3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리고 보니 옛날 법장이 꿈을 꾸었을 그 시기와 일치하였다. 법장은 여러 가지로 가르치고 깨우쳐 주어 법사를 기쁘게 해주었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의 정리를 나누고 난 다음 자리를 떠났다.

54) 유순과 같은 거리의 단위로, 약 7.3km에 해당한다.

55) 중인도 마갈타국(摩揭陀國)의 수도인 왕사성(王舍城)의 북쪽에 있던 절로, 시무염사

    (施無厭寺)라 번역한다. 서기 405년 이후에 지은 것으로, 7세기 초 현장(玄藏)이 인도에 

    유학할 무렵에는 인도불교의 중심지였으며, 이 절에서 많은 큰스님들이 배출되었다. 

    밀교를 중국에 전한 금강지(金剛智)․선무외(善無畏)는 모두 이 절에서 수학하고, 북송

    (北宋) 초엽에 중국에 온 법현(法賢) ․보타흘다(補陀吃多) 등도 이 절의 승려였다.

56) 마하목건련(摩訶目犍連)의 약칭이다. 부처님의 10대제자 중에서 신통제일(神通第一)로 

    알려졌다.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하여 시아귀회(施餓鬼會)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우란분(盂蘭盆)의 유래가 되었다.

57) 절의 모든 사무를 관장하는 승려를 말한다, 선가에서는 포살, 즉 계행(戒行)과 율의(律儀)를 

    관장하는 승려를 말한다.

58) 시라발타라(尸羅跋陀羅)라고 음역한다. 

 

유일왕원(幼日王院)으로 가서 불타발타라의 방이 있는 4층 누각으로 안내되었다. 

여기서 7일 동안 공양을 받고 다시 호법(護法)보살의 방 북쪽에 있는 상방(上房)에서 편히 쉬면서 여러 가지 물자를 공급받았다. 매일 섬보라(贍步羅) 과자 120매, 빈랑자(檳榔子)59) 20과(顆), 콩약과 20과, 용뇌향(龍腦香) 1냥을 받았다. 그리고 공대인미(供大人米) 1되도 받았는데 그 쌀은 콩보다 크고 밥을 지으면 향기가 나고 맛이 좋아 다른 쌀은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 쌀은 오직 마게다국(摩揭陀國)에만 있을 뿐 다른 곳에서는 없다고 한다. 그래서 국왕과 다문(多聞)의 대덕(大德)에게만 공급하기 때문에 공대인미(供大人米)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달에 기름 세 되를 공급하고, 연유[酥乳] 등은 날마다 충분하게 공급하였다. 청소부 한 사람과 바라문 한 사람을 딸려 주어 모든 승무(僧務)를 면제시켜 주었으며, 외출할 때에는 코끼리 수레를 타도록 했다. 

나란타 절의 주객(主客)을 합쳐 모든 승려들 가운데 이러한 대우를 받은 사람은 법사까지 합쳐서 한 열 사람 정도이다. 이렇듯 법사는 다른 나라에서 왔으면서도 이렇게 대단한 예우를 받았다.

59) 빈랑(檳榔)이란 중국 남부의 열대 기후에서 나는 열매로, 먹으면 기분이 맑아지고 좋아지는 

    각성 효과가 있다.

 

나란타 절이란 시무염사(施無厭寺)라는 뜻이다. 옛날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 가람의 남쪽 암몰라 동산 가운데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 나란타라는 이름의 용이 살고 있었다. 그 못 옆에 절을 세웠기 때문에 용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나란타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옛날에 여래께서 보살도를 닦고 있을 때, 대국(大國)의 왕이 되어 이 땅에다 도읍을 세웠다. 그리고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항상 물건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그 은혜를 생각하여 그곳을 시무염(施無厭)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땅은 원래 암몰라 장자의 정원이었으나 5백 명의 상인이 10억의 돈을 주고 사들여 부처님께 보시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곳에서 3개월간 머무시면서 설법하셨고 많은 상인들이 도과(道果)를 증득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이 나라의 선왕 삭가라아일다(鑠伽羅阿迭多:Sakāditya)[당나라 말로 제일(帝日)이라 한다.]는 부처님을 경모하여 이 가람을 지었다. 

왕이 죽은 뒤 그의 아들 불타국다왕(佛陀鞠多王:Buddhagupta)[당나라 말로 각호(覺護)라 한다.]은 부왕의 홍업(鴻業)을 이어받아 그 남쪽에 또 가람을 세웠다. 

그의 아들 달타게다왕(怛他揭多王:Tathāgata)[당나라 말로 여래(如來)라 한다.]에 이르러서는 그 동쪽에 다시 가람을 세웠고, 그의 아들 바라아질다(婆羅阿迭多:Bālāditya)[당나라 말로 유일(幼日)이라 한다.]는 또다시 동북쪽에다 가람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다음 왕은 성승(聖僧)들이 지나국(支那國)에서 찾아와서 그 절에 공양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에 환희심이 일어나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였고, 그의 아들 벌사라(伐闍羅)[당나라 말로 금강(金剛)이라 한다.]가 왕위를 계승하여 그 북쪽에다 또 가람을 세웠다. 

그 뒤로부터 중인도의 왕도 그 옆에 또 가람을 세웠다.

 

이와 같이 여섯 왕이 서로 이어오면서 각기 절을 세우고 또 벽돌로 둘레를 쌓아 하나의 절로 만들었다. 입구에 하나의 문을 세우고, 정원을 별도로 만들어 내부를 8원(院)으로 나누었다. 보대(寶臺)가 별처럼 줄지어 섰고 옥루(玉樓)가 산처럼 솟아 있으며 높고 큰 건물들이 연기와 노을 위에 솟아 있어서, 창에서 바람과 구름이 일어나고 처마 아래서 해와 달이 뜨고 진다. 거기에다 맑은 물이 유유히 흘러가고 그 위에는 청련(靑蓮)이 떠 있다. 곳곳에 갈니화수(羯尼花樹)가 꽃을 피웠고, 밖에는 암몰라 수림이 무성했다.

모든 사원(寺院)의 승방(僧房)은 다 4층으로 되어 있으며, 중각(重閣)의 용마루나 대들보는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두공(枓栱)과 기둥은 붉게 단청을 하였다. 큰 기둥과 난간은 갖가지 조각을 새겼으며 옥으로 된 초석에도 문양을 새겼고, 지붕의 기와는 빛을 받아 번쩍이고 서까래는 색실로 연결해 놓았다.

인도의 가람 수는 천만 개나 되었지만 장엄하고 수려함과 숭고함에 있어서 이 나란타 절이야말로 극에 달했다. 

 

이 절에는 주객(主客)을 합쳐 승려 수가 항상 1만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대승과 소승(小乘) 18부(部)60)를 겸하여 배우고 있다. 그리고 속전(俗典)이나 베다[吠陀] 등의 책과 인명(因明), 성명(聲明), 의방(醫方), 술수(術數)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갖추어 연구하고 있었다. 경론(經論) 20부(部)를 해득하는 자가 무려 1천여 명이나 되고, 30부를 해득하는 자는 5백여 명, 50부를 해득하는 자는 법사를 포함해서 1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오직 계현(戒賢) 법사만은 모든 경전에 통달했고, 덕이 높고 나이가 많아 대중들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절 안는 매일 백여 곳에서 강좌가 열렸고 학승들은 촌음을 아껴 배움에 임하고 있었다. 이렇듯 덕을 갖춘 대중이 사는 곳이라서 자연히 엄숙했고 건립 이래 7백여 년이 되었으나 한 사람이라도 과실을 범한 사람은 없었다. 

60) 인도에서 소승(小乘)의 부파인 18부류를 가리킨다.

 

국왕도 흠모하고 중히 여겨 1백여 읍(邑)을 희사하여 공양에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읍의 2백 호(戶)로부터 매일 갱미(粳米)와 연유 수백 섬씩을 진상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학인들은 힘들여 구하지 않아도 의복과 음식과 침와 탕약의 4사(事)가 절로 풍족하여 예업(藝業)을 성취할 수가 있었다. 이것이 모두 장원의 힘이라 하겠다.

 

법사는 나란타 절에서 편히 있을 수가 없었으므로 왕사성으로 가서 성적을 순례하였다. 

왕사의 옛 성을 여기서는 구사갈라보라성(矩奢揭羅補羅城)61)[당나라 말로 상모궁성(上茅宮城)이라 한다.]이라 부른다. 이 성은 마게타국 안에 있으며, 옛날의 군왕(君王)들은 대부분 그 안에서 살았었다. 이 땅에는 향기가 좋은 띠풀[茅]이 야생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사방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였는데 마치 깎아지른 듯이 험준하다. 서쪽으로 작은 길이 트여 있고 북쪽에는 대문이 있으며, 동서는 길고 남북은 좁다. 둘레는 150여 리이다. 

그 안에 다시 작은 성이 있는데 성터의 둘레는 30여 리이다. 갈니가수(羯尼迦樹)가 곳곳에 숲을 이루어 1년 내내 꽃이 피지 않는 날이 없으며 잎은 황금빛으로 빛난다.

궁성의 북문 밖에 탑이 있는데 이곳은 제바달다(提婆達多)가 미생원왕(未生怨王)62)과 호재(護財)라는 두 술에 취한 코끼리[醉象]를 풀어서 부처님을 해치려 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동북쪽에도 탑이 있는데 여기는 사리자(舍利子)가 아습바시(阿濕婆恃:Aśivajit) 비구의 설법을 듣고 도과(道果)를 증득한 곳이다.

그리고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크고 깊은 구덩이가 있는데 이곳은 실리국다(室利鞠多:Śrigupta)[당나라 말로 승밀(勝密)이라 한다.]가 외도의 삿된 말에 현혹되어 불구덩이를 만들고 독이 든 밥을 지어 부처님을 해치려 했던 곳이다. 

이 불구덩이 동북쪽의 산성(山城)의 모퉁이에 탑이 있는데 이곳은 시박가(時縛迦:Jivaka)[옛날에 기바(耆婆)63)라 한 것은 잘못이다.]라는 유명한 의사(醫師)가 여기에다 부처님을 위해 설법당을 세운 곳이다. 그 옆에는 아직도 시박가의 옛집이 남아 있다. 

61) 구왕사성 또는 상모궁성(上茅宮城)이라고도 한다. 구사는 제식용(祭式用) 자리를 만드는 

    풀로서 상모(上茅), 또는 길상초(吉祥草)라고 번역한다. 마가타국의 빈비사라왕 시대에

    번영했는데, 만년에 왕자 아사세왕은 그 북쪽에 신(新)왕사성을 만들었다. 구(舊) 왕사성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며 광활하다. 그러나 신왕사성은 더욱 광대한 평지에 건설되었다.

62) 아사세왕을 말한다.

63) 지바카의 음역으로 기바(祇婆)라고도 쓴다.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의왕(醫王)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의술로 이름 높았던 명의(名醫)이다. 덕차시라국의 명의였던 빈가라에게 

    7년 동안 사사받은 뒤 본국으로 돌아와, 왕사성에 머물면서 빈비사라왕과 부처님의 병을 

    치료했다. 불법에 귀의하여 깊은 신심을 지녔으며, 아사세왕을 불법으로 인도했다. 

 

궁성의 동북쪽으로 14~15리를 가면 길율타라구타산(姞栗陀羅矩矩山)64)[당나라 말로 취봉(鷲峰) 또는 취대(鷲臺)라고 한다. 옛날에 기사굴산(耆闍崛山)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에 이른다. 이 산은 봉우리로 이어졌는데 북쪽의 봉우리가 특히 높이 솟아 있으며 그 형상이 마치 독수리 같기도 하고 또는 높은 대(臺)와 흡사하므로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이 산의 샘과 돌은 맑고 기이하며 수림은 울창하였다.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대부분 이 산에 머물면서『법화경(法華經)』과『대반야경(大般若經)』 등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을 설하신 곳이다.

64) 영취산(靈鷲山)을 말한다. 구왕사성의 동북쪽에 있으며, 석존이 여러 가지 설법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산성의 북문에서 1리 쯤 가면 가란타죽원(迦蘭陀竹園)65)에 이르게 된다. 지금도 벽돌로 만든 방이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옛날에 그 안에 자주 머물면서 많은 계율을 제정하신 곳이다. 

죽원의 주인은 가란타라는 사람인데, 처음에는 이 죽원을 여러 외도(外道)에게 시주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뒤에 부처님을 뵙고 또 깊은 법을 듣고는 이 죽원을 여래께 드리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이때 지신(地神)이 그의 마음을 알고는 재앙과 기괴(奇怪)한 일을 나타내어 여러 외도를 놀라게 하여 그들을 쫓아내려고 하여 이렇게 말했다.

“가란타 장자는 이 죽원을 부처님께 보시하고자 한다. 너희들은 속히 물러가라.”

외도들은 분노를 품고 죽림에서 나가버렸다. 

이를 보고 장자는 대단히 기뻐하며 정사(精舍)를 세운 뒤 스스로 나아가 부처님을 초청했다. 부처님은 장자가 청하는 대로 그 보시를 받아들였다.

65) 죽림정사(竹林精舍)를 말한다. 구성(舊城)으로부터 신성(新城)으로 가는 길 왼편에 있다.

 

죽림 동쪽에 탑이 있는데 아사다설돌로왕(阿闍多設咄路王:Ajātaśatru)[당나라 말로 미생원(未生怨)이라 한다. 옛날에 아사세(阿闍世)라 한 것은 잘못이다.]이 세운 것이다. 여래가 열반에 든 뒤 여러 왕들이 사리를 분배할 때에 미생원왕도 사리를 받아 돌아와서 탑을 세우고 공양했던 것이다.

뒤에 무우왕(無憂王)이 발심(發心)하여 각지에다 많은 탑을 세우기 위해 이 탑 속에 있는 사리를 꺼내어 가면서 조금 남겨 놓은 것이 지금도 항상 빛을 내고 있다.

 

죽림 서남쪽으로 5~6리를 가면 산 옆에 또 다른 죽림이 있다. 그 안에 큰 석실(石室)66)이 있는데, 이곳은 존자 마하가섭파(摩訶迦葉波:Mahā- kahyāpa)가 여기에서 999명의 대아라한과 더불어 여래께서 열반한 뒤 삼장(三藏)을 결집했던 곳이다. 결집하는 날에 성중(聖衆)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 가섭이 대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대중 가운데 스스로 3명(明)67) 6통(通)68)의 지혜를 갖추고, 여래의 모든 법장(法藏)을 다 기억하여 틀림이 없는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각자 편한 대로 하시오.”

이렇게 해서 999명을 가리게 된 것이다. 당시 아난도 그곳에 있었는데, 가섭이 아난에게 말했다.

“그대는 아직 번뇌가 다한 사람이 아니다. 여기 남아 깨끗한 사람들을 더럽혀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자 아난은 부끄러워하며 나가버렸다. 그날 밤 부지런히 수행하여 삼계의 결박[三界結]69)을 끊고 아라한70)이 되어 돌아와 문을 두드리자 가섭이 물었다.

“그대는 삼계의 결박을 다 끊었는가?”

아난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가섭이 다시 물었다.

“만약 삼계의 결을 다 끊은 사람이라면 수고롭게 문을 열지 않아도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아난은 이에 문틈으로 들어와서 가섭의 발에 예배하였다.

그러자 가섭은 아난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는 그대가 모든 번뇌를 끊고 성스러운 과위를 증득하기를 바랐기에 그대를 쫓아냈던 것이다. 그대는 마땅히 나의 뜻을 알아 원망하지 말라.”

아난이 대답했다.

“만약 원망을 가졌다면 어찌 결박을 다 끊었다 하겠습니까?”

그리고는 절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날은 마침 초안거(初安居) 15일째 되는 때였다.

가섭이 아난에게 말했다.

“여래께서 항상 대중들 중에서 특히 그대를 칭찬하시며, 모든 법을 기억하고 있는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하셨다. 그대는 법좌에 올라가 대중들에게 소달람장(素怛纜藏)을 독송하라.”

소달람장이란 곧 일체경(一切經)이다.

아난은 이 명을 받고 일어나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산을 향해 예배를 드린 다음 법좌에 올라 경을 낭송하였고, 여러 승려들은 이 말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기록이 끝나자 다음에는 우파리(優波離:Upāli)71)에게 명하여 비나야장(毘奈耶藏)을 낭송하게 했다. 비나야장은 곧 일체계율(一切戒律)이다.

낭송이 끝나자 가섭파는 스스로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를 낭송했는데 이는 곧 일체논의(一切論議)이다.

이렇게 2~3개월의 안거를 보내는 동안 삼장의 결집을 마치고 그것을 패엽(貝葉)72)에 기록하여 널리 유통시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승려들은 서로 말했다.

“우리들이 이곳에 모여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었다. 오늘 법음(法音)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결집의 힘 때문이다.”

이 결집에는 대가섭73)이 승려 가운데 상좌(上座)74)였으므로 상좌부(上座部)75)라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66) 신(新)왕사성의 남쪽에 있는 남산(Baibhara)에 있는 대석굴(大石窟)을 말한다. 제1 결집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현존하는 석굴은 그렇게 크지는 않다. 

67) 부처와 아라한이 갖고 있는 세 가지의 신통을 말하는 것으로, 숙명통(宿命通)ㆍ천안통(天眼通)ㆍ

   누진통(漏盡通), 또는 숙주지증명(宿住智證明)ㆍ사생지증명(死生智證明)ㆍ누진지증명

    (漏盡智證明) 등이라고도 한다. 아라한의 경우에는 3명(明), 부처의 경우에는 3달(達)이라 

    하여 구분하기도 한다.

68) 부처와 보살과 아라한이 수행을 통하여 얻게 되는 여섯 가지의 신통력을 말한다. 6신통(神通)

    이라고도 한다. 곧 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ㆍ

    신족통(神足通), 또는 여의통(如意通)ㆍ누진통(漏盡通)을 말한다.

69) 삼계는 중생이 윤회하는 세 가지 영역의 세계이며 생명체가 머무는 세계 전체를 뜻한다. 

    생사 유전하는 미혹의 세계를 세 단계로 구분한 것이기도 하다.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

    무색계(無色界)를 말한다. 무한한 대해와도 같은 미혹과 고(苦)의 영역이므로 고해(苦海) 

    또는 고계(苦界)라고 불린다. 결(結)은 루(漏)라고도 하는데, 속신이 바로 이 결에 얽혀서 

    삼계에 머물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70) 수행의 완성자, 공양을 받기에 적합한 사람, 존경해야 할 수행자, 소승불교에서 수행의 

    최고 단계에 도달한 성자, 모든 번뇌를 끊어 열반에 든 최고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71) 우파리(優婆離), 우바리(優婆釐)라고도 쓴다. 석가모니의 10대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하층 

    계급인 슈드라 출신으로서 석가족(釋迦族)의 이발사였으나, 부처님이 성도한 후 고국에 

    갔을 때 출가하였다. 출가한 후로는 계율을 매우 엄중히 지켰으므로 ‘지계(持戒) 제일’ 

    또는 ‘지율(持律) 제일’이라고 불린다. 제1차 결집 당시에 율장 부분을 암송하였으며, 마하가섭, 

    아난타와 함께 ‘결집의 3인’으로 꼽힌다. 우파리(優婆利), 우파리(優波利) 등으로도 적는다. 

72) 고대 인도에서 종이 대신 사용하던 패다라 나뭇잎을 말한다. 불경을 이 패다라 잎에 쓴 것이 

    많으므로 불경을 통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73) 석존 입멸 직후 대가섭이 중심이 되어 5백여 명의 비구가 모여 약 7개월 동안 작업하여 불경을 

    만든 것을 말한다. 일명 5백 결집이라고도 한다.

74) 불교에서는 이 말을 세 가지 뜻으로 사용한다. ①출가의 법랍이 높은 사람에 대한 존칭이다. 

    ②덕행이 있는 승려에 대한 존칭이다. ③사찰 안에서 최고 직책을 맡은 승려, 즉 전 사찰의 

    수장을 뜻한다. 여기서는 앞의 2종의 뜻으로 쓰였다.

75) 지말(枝末) 부파의 근간이 되는 상좌부를 가리킨다. 교단이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파하고 나서, 

    상좌부에서 다시 여러 부파가 일어났으므로, 최초의 상좌부를 일컫는 말이다.

 

또 여기서 서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는 탑은 무우왕이 세운 것으로 이곳은 대중부(大衆部)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대가섭이 결집할 때에 참석하지 못했던 학자(學者)와 무학자[無學] 수천 명이 이곳에 모여 서로 이렇게 말했다.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다 함께 배웠는데 세존께서 열반에 드시자 우리들은 제외되어버렸다. 우리들이라고 법장을 결집하여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을 못하겠는가?”

그래서 다시 소달람장ㆍ비나야장ㆍ아비달마장ㆍ잡집장(雜集藏)ㆍ금주장(禁咒藏) 등을 별도로 모아 5장(藏)76)으로 만들었다.

이들 가운데는 범승(凡僧)과 성승(聖僧)이 함께 모여 있었으므로 이를 대중부(大衆部)라 하는 것이다.

76) 5종으로 교법을 분류한 것을 말하며, 그 기준에 따라 여러 가지 분류가 있다. ①경장(經藏)ㆍ

    율장(律藏)ㆍ논장(論藏)이라는 3장에 주장(呪藏)ㆍ보살장(菩薩藏) 등을 합한 것. ②경ㆍ율ㆍ논의 

    3장과 잡집장(雜集藏), 금주장(禁呪藏) 등. ③경ㆍ율ㆍ논의 3장과 잡장(雜藏), 보살장(菩薩藏) 등. 

    ④경ㆍ율ㆍ논의 3장과 반야바라밀다장(般若波羅蜜多藏), 다라니장(陀羅尼藏) 등이 있다. 

 

다음에 동북쪽으로 3~4리를 가면 갈라사길리혜다성(曷羅闍姞利呬多城)77) [당나라 말로 왕사성(王舍城)이라 한다.]에 이른다. 외곽은 이미 붕괴되었으나 내성(內城)은 아직도 솟아 있고 둘레는 20여 리로 사방에 문이 하나씩 있다.

처음에 빈비사라왕이 상모궁(上茅宮)에 있을 때 백성은 번성하여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므로 자주 화재를 만났다. 그래서 왕은 엄하게 제도를 만들어 만약 부주의로 실화(失火)를 하게 된 자가 있으면 한림(寒林)78)으로 이사하게 했다. 한림이란 그 나라의 풍습에 시체를 버리는 더러운 곳이다.

그런데 얼마 뒤에 왕궁에 갑자기 불이 나자 왕이 말했다.

“내가 백성의 주군으로서 자신이 죄를 범해 놓고 스스로를 벌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을 징계할 수도 없을 것이다.”

태자로 하여금 국정을 보게 하고 왕은 한림으로 옮겨 갔다.

77) 신왕사성을 말한다. 구성(舊城)으로부터 출발하여 죽림정사(竹林精舍)와 가란타지

    (迦蘭陀池)를 넘으면 곧 신왕사성의 성벽 터를 볼 수 있다.

78) 시다림(屍陀林)의 뜻을 옮긴 말로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 왕사성의 북쪽 지역에 있었던 

    시체 처리 장소이다. 시체를 버려 놓는 장소를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그때 이웃 나라의 폐사리왕(吠舍釐王)은 빈비사라왕이 성 밖에 나가서 산다는 말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그를 습격하려고 했다. 그러자 첩보원이 미리 알고 왕께 아뢰었으므로 왕은 곧 성을 쌓았다. 왕이 먼저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이름을 왕사성이라 했는데 즉 이것이 곧 신성(新城)이다. 뒤에 아사세왕이 왕위를 이어받아 이곳을 도읍으로 하였고, 무우왕 때에는 도읍을 파타리(波吒釐)79)로 옮기고 왕사성은 바라문에게 내 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성안에는 평민이 없고 오직 바라문 천여 호 만이 살고 있을 뿐이다.

궁성 안의 서남쪽 구석에 탑이 있는데 이곳은 수저색가(殊底色迦)[당나라 말로 성력(星曆)이라 한다. 옛날에 수제가(樹提伽)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장자의 옛집이 있는 곳이다. 그 옆에는 라호라(羅怙羅)[즉 부처님의 아들이다.]를 제도한 곳이 있다.

79) 지금의 인도 비하르 바트나의 서북 지역이다.

 

나란타 사원 서북쪽에 큰 정사(精舍)가 있는데 높이가 3백여 척으로 바라아질다왕(婆羅阿迭多王:Bālāditya)이 세운 것이다. 대단히 장엄하고 화려한데 그 안에 있는 불상은 보리수상과 같다.

이 정사의 동북쪽에 탑이 있는데 여래께서 옛날에 7일 동안 설법하셨던 곳이다. 서북쪽에는 또 과거의 네 부처님이 앉아 계셨던 자리가 있으며 그 남쪽에 유석(鍮石)으로 지어진 정사가 있다. 이 정사는 계일왕(戒日王)이 세운 것으로 아직 미완성이었으나 그 규모로 보아 높이 10여 장(丈)은 될 것 같다.

 

그리고 성 동쪽으로 2백여 보 되는 곳에 동(銅)으로 만들어 세운 불상이 있는데 높이 80여 척으로 6층의 중각(重閣)을 올려야 겨우 덮을 수가 있었다. 옛날 만주왕(滿胄王:Pūrṇavarman)이 지은 것이라 한다.

또 동쪽으로 몇 리를 더 가면 탑이 있는데 이곳은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성도(成道)하시고 왕사성을 향해 가시다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빈비사라왕이 백천 만 명의 군중과 함께 마중 나와 부처님을 뵈었던 곳이다.

 

그리고 동쪽으로 30여 리 쯤 가면 인다라세라구하산(因陀羅勢羅窶訶山)80)에 이른다. 이 산의 동쪽 봉우리에 있는 가람 앞에 탑이 있는데 승사(僧娑:Haṃsa)[당나라 말로 안(雁)이라 한다.]라고 한다. 옛날에 이 가람은 소승점교(小乘漸敎)를 믿었기 때문에 3정육(淨肉)81)을 먹었다고 한다.

어느 날 고기를 살 수가 없어 고기 검사를 담당하는 사람이 당황해 하며 손을 놓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하늘을 향하여 장난삼아 중얼거렸다.

“오늘은 스님들에게 공양할 것이 없습니다. 마하살타(摩訶薩埵)께서 고기를 베풀어줄 때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비구가 이 말을 마치자 기러기 떼를 앞에서 인도해가던 대장 기러기가 이 소리에 응하여 빙 돌면서 구름 높이 솟구치더니 스스로 몸을 던져 떨어졌다.

비구는 이것을 보고 놀랍고 두려워서 여러 승려들에게 이야기했다. 비구들은 이 말을 듣고 놀라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서로 이렇게 말했다.

“이 기러기는 보살이시다. 우리들이 어찌 사람으로서 감히 먹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여래께서는 가르침을 펴시어 점차로 계율을 지켜나가도록 하셨다. 그런데 우리들은 여래의 최초의 가르침을 구경(究竟)한 말씀인 듯 생각하며 어리석게도 고치지 않고 이렇게 살생을 저지르고 있다. 지금부터는 마땅히 대승에 따라 다시는 3정(淨)을 먹지 않기로 하자.”

그리고 영탑(靈塔)을 세워서 죽은 기러기를 그 안에 묻어 주고, 이 마음을 기록하여 영원히 전하여 빛내기로 하여 이 탑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80) 제석굴을 말한다.

81) 3정(淨)이라고도 한다. 세 가지 정육(淨肉), 즉 부처님이 병든 비구에게만 먹도록 허락한 

    세 가지의 고기를 말한다. ①자기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 ②자기를 위하여 죽인 

    것이란 말을 듣지 않은 것, ③자기를 위하여 죽인 것이 아닌가 의심되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곧 고기집에서 파는 것이나 저절로 죽은 것 따위의 고기를 말한다.

 

이런 등의 성적(聖跡)을 법사는 두루 다 순례한 뒤 나란타 절로 돌아와서 계현(戒賢) 법사에게 유가론의 강의를 청하였던 것이다. 강의에 동참하여 들은 사람은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강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어떤 바라문이 문 밖에서 울었다 웃었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는 동인도 사람입니다. 일찍이 포책가산(布磔迦山)의 관자재보살상 앞에서 왕이 되기를 발원했었습니다. 그러자 보살께서 제 앞에 나타나시어 저를 꾸짖으시기를 ‘너는 그러한 것을 바라지 말라. 나중에 모년 모월 모일에 나란타 절의 계현 법사가 지나국(脂那國)의 승려를 위해 유가론을 강의할 것이다. 너는 그곳에 가서 그 강의를 듣도록 하여라. 그 법을 듣는다면 후에 부처님을 뵐 수 있을 것인데, 무엇 하러 왕이 되려고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지나승이 오시고 계현 법사께서 강의하시는 것을 보니 옛날에 보살의 말씀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슬픔과 기쁨이 교차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계현 법사도 그로 하여금 강의를 듣도록 하였다.

15개월 만에 강의가 끝나자 계현 법사는 사람을 시켜 그 바라문을 계일왕(戒日王)에게 데려다 주었는데 왕은 그에게 3개의 읍을 봉지(封地)로 주었다.

 

법사는 나란타 절에 있으면서『유가론』을 세 번,『순정리론(順正理論)』을 한 번,『현양론(顯揚論)』과『대법론(對法論)』을 각각 한 번,『인명론(因明論)』과『성명론(聲明論)』과『집량론(集量論)』등의 논(論)은 각각 두 번,『중론(中論)』과『백론(百論)』은 각각 세 번씩 청강하였다.『구사론(俱舍論)』과『바사론(婆沙論)』과『육족아비담론(六足阿毘曇論)』등은 일찍이 가습미라(迦濕彌羅)의 여러 나라에서 청강했으므로 여기서는 의문 나는 것만을 배웠다.

 

법사는 바라문의 글[婆羅門書]82)도 겸하여 배웠다. 인도의 범서(梵書)는 이름을 기론(記論)이라고도 한다. 그 기원과 작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나 겁초(劫初)83)에 범왕(梵王)84)이 먼저 천인(天人)에게 전수(傳授)한 것으로써 범왕이 설했기 때문에 범서라고 한다. 그 글은 매우 광범위하여 백만 송(頌)이나 되며, 구역(舊譯)에 비가라론(毘伽羅論)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 음(音)은 바른 것이 아니다. 만약 바르게 말하자면 비야갈라남(毘耶羯剌諵:Vyākaraṇa)이고 중국말로 번역하면 성명기론(聲明記論)이다. 널리 모든 법을 상세히 기록했으므로 성명기론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82) 고대 인도의 문자를 말한다.

83) 의역하면 대시(大時)라고 한다. 연월일(年月日)로 계산할 수 없는 아주 긴 시간의 개념이다. 

    겁초라는 것은 겁이 만들어진 처음이란 뜻으로, 세계가 형성되던 초기의 시대를 말한다.

84) 대범천왕(大梵天王)을 말하는 것으로, 사바세계를 지키는 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왕이다.

 

옛날 성겁(成劫)85) 초에 범왕이 먼저 설하여 백만 송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 주겁(住劫) 초에 제석천(帝釋天)이 다시 줄여서 10만 송으로 하였다. 그 뒤 북인도의 건다라국(健馱羅國)의 바라문 도라읍(覩羅邑:Śālārura)에 사는 파니니선(波膩尼仙:Paṇini)이 또 줄여서 8천 송이 되었는데, 지금 인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85) 성주괴공(成住壞空)의 네 가지의 겁(劫)을 말하는 것이다. 성겁(成劫)은 세계(世界)가 

    이루어져서 인류가 살게 된 최초의 시대를 말하고, 주겁(住劫)은 이 세계가 존재하는 

    기간을 말하고, 괴겁(壞劫)은 이 세계가 괴멸하는 기간을 말하고, 공겁(空劫)은 괴겁

    다음에 이 세계가 완전히 없어졌을 때부터 다시 다음 성겁에 이르기까지의 중겁(中劫)을 

    말한다.

 

근래 또 남인도의 바라문이 남인도왕을 위해서 다시 줄여서 2천 5백 송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주변 여러 나라에서는 많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도의 박학(博學)한 사람들은 배우지 않는다.

이 책은 서역(西域) 여러 나라의 음자(音字)의 기본이다. 

그 세부(細部)를 나누어 도움을 주는 것으로 다시 기론약경(記論略經) 천 송(頌)과 또 자체(字體)에 3백 송이 있다. 그리고 자연(字緣)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간택가(間擇迦:Mandaka)라 하여 3천 송, 둘째는 온나지(溫那地:Unādi)라 하여 2천 5백 송이 있는데 이것은 자연(字緣:訶法)과 자체(字體:語根)를 나누어 분변한 것이다. 

그리고 8계론(界論) 8백 송이 있는데, 이 안에는 생략되거나 합해진 글자의 자연(字緣)과 자체(字體)가 들어있다.  

 

이러한 모든 기론(記論)들을 능동과 수동의 두 가지 예로 나누어 밝혔는데, 그 하나는 저언다성(底彦多聲)86)이라 하여 18변화가 있고, 또 하나는 소만다성(蘇漫多聲)87)이라 하여 24변화가 있다.

저언다성은 문장이 장려(壯麗)한 데에 쓰고 여러 일반 문장에는 아주 드물게 사용된다. 그러나 24변화라는 것은 일체 모든 문장에 공동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86) 동사변화를 뜻한다.

87) 명사변화를 뜻한다.

 

저언다성 18변화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반라삽미(般羅颯迷)88)이고 하나는 아답말니(阿答末泥)89)로서 각기 9변화가 있기에 합쳐서 18변화가 된다. 먼저 9변화는 모든 사물을 논하는 경우에 쓰이는데, 타동사[說他]에 3변화가 있고 자동사[自說]에 3변화가 있으며 각각의 3변화 가운데 단수[說一]․쌍수[說二]․복수[說多]의 세 가지가 있다. 양구(兩句)가 다 그렇지만 단지 그 소리가 다르기 때문에 29운(韻)으로 분류했을 뿐이다.

88) 타동사라는 뜻이다.

89) 자동사라는 뜻이다.

 

여기서 타동사[般羅颯迷]의 변화에 의하여 유(有)․무(無) 등의 모든 법에 대해 설명해 보겠다. 특히 유에 대해서 말하자면, 유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바파저(婆底:Bhavati), 둘째는 바파타(婆吒:Bhavathah), 셋째는 바반저(婆飯底:Bhavanti)이다. 2인칭의 세 가지는 첫째 바파사(婆斯:Bhavasi), 둘째 바파탁(婆矺:Bhavathah), 셋째 바파타(婆他:Bhavatha)이다. 1인칭[自說]의 세 가지는 첫째 바파미(婆彌:Bhavāmī), 둘째 바파화(婆靴:Bhavāvah), 셋째 바파마(婆摩:Bhavāmah)[셋째의 바파마는 사베다론(四吠陀論)의 설에 의한 것이다. 흔히 바파말사(婆末斯)라고 한다]이다. 

 

자동사[阿答末泥]의 9변화는 앞의 9변화 밑에 각각 비야저언(毘耶底言:Vyati)을 두고, 나머지는 위와 같다. 이것을 잘 알게 되면 문장의 기교는 훌륭하게 되고 또 매우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

 

소만다성의 24변화는 모두 8변화가 있는데, 그 8변화 가운데 하나하나 마다 각기 3변화가 있다. 말하자면 단수․쌍수․복수이므로 24변화가 되는 것이다. 그 24변화에는 그 하나하나마다 남성(男聲)․여성(女聲)․중성(中聲)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

 

8변화라는 것은 첫째 주격(主格)을 나타내고 둘째 대격(對格)을 나타내며 셋째 구격(具格)을 나타내고 넷째 위격(爲格)을 나타내며, 다섯째 종격(從格)을 나타내고 여섯째 속격(屬格)을 나타내고 일곱째 어격(於格)을 나타내고 여덟째 호격(呼格)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남성(男聲)인 ‘장부(丈夫)’를 8변화로 만들어 보자.

장부는 인도말로 포로사(布路沙:Puruṣa)라 하는데 주격(主格)의 3변화는 첫째 포로살(布路殺:Puruṣās), 둘째 포로소(布路筲:Puruṣāu), 셋째 포로사(布路沙:Puruṣās)로 변한다.

대격(對格)의 3변화는 첫째 포로삼(布路芟:Puruṣām), 둘째 포로소(布路筲:Puruṣāu), 셋째 포로상(布路霜:Puruṣāh)으로 된다.

구격(具格)의 3변화는 첫째 포로살나(布路鎩拏:Pruṣeṇa), 둘째 포로편(布路窆:Puruṣābhyām), 셋째 포로살비(布路鎩鞞:Puruṣāisr), 혹은 포로살희(布路鎩呬)라고도 한다.

위격(爲格)의 3변화는 첫째 포로하(布路廈:Puruṣāya), 둘째 포로사편(布路沙窆:Puruṣābhyām) 셋째 포로살운(布路鎩䪨:Puruṣebhyas)으로 된다.

종격(從格)의 3변화는 첫째 포로사타(布路沙哆:Puruṣāt), 둘째 포로살편(布路鎩窆:Puruṣābhyām), 셋째 포로살운(布路鎩䪨:Puruṣebhyas)으로 된다.

속격(屬格)의 3변화는 첫째 포로살사(布路鎩:Puruṣasya), 둘째 포로살편(布路鎩窆:Puruṣayos), 셋째 포로살남(布路鎩諵:Puruṣanam)으로 된다. 

어격(於格)의 3변화는 첫째 포로차(布路䐤:Puruṣe), 둘째 포로살유(布路殺諭:Puruṣayos), 셋째 포로살추(布路鎩縐:Puruṣeṣu)로 된다.

호격(呼格)의 3변화는 첫째 계포로살(系布路殺:he puruṣa), 둘째 계포로초(系布路稍:he puruṣāu), 셋째 계포로사(系布路沙:he puruṣās)로 된다.

대충 간략히 예를 들면 이와 같으며 나머지 모두를 기술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법사는 이러한 언어에도 모두 통달하여 인도 사람과 더불어 말을 자유로이 논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여러 부(部)를 깊이 연구하여 또 범어를 배우는데 거의 5년을 보냈다.

 

그 뒤 나란타 절에서 다시 이란나발벌다국(伊爛拏鉢伐多國:Irinapar- vata)으로 가다가 가포덕(迦布德:Kapota) 가람에 이르렀다. 이 가람의 남쪽 2~3리 되는 곳에 외딴 산이 있는데 바위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고 관목(灌木)들이 울창하며 샘이나 못물이 매우 맑고 꽃향기가 은은한 승지(勝地)였다. 이곳에는 영험한 묘(廟)가 매우 많은데 여러 가지 신기하고 기이한 일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 산속에 있는 절에는 백단(白檀)으로 조각한 관자재보살상이 있는데 그 위신(威神)이 특히 뛰어났다. 항상 수십 명이 그곳에 있으면서 7일 혹은 27일간 단식하면서 여러 가지 소원을 빌고 있다. 마음이 지극한 자에게는 곧 보살이 장엄(莊嚴)을 갖추고 위광(威光)을 빛내며 백단상(白檀像)에서 나와 그 사람을 위로하며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감흥을 얻은 사람이 수없이 많기 때문에 귀의하는 자들이 더욱 불어났다. 그래서 관음상에 공양하는 사람들은 여러 참배객들이 존상(尊像) 을 더럽힐 것을 염려하여 관음상에서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 쯤 떨어져 나무 울타리를 둘러놓았다. 그래서 예배하러 오는 사람은 모두 울타리 밖에서 하고 관음상에는 접근할 수 없도록 해 놓았다. 향이나 꽃도 울타리 밖에서 던져야 했다. 그래서 던진 꽃이 보살의 손에 얹히거나 어깨에 걸리게 되면 길상(吉祥)이기 때문에 소원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법사도 그곳에 가서 소원을 빌기 위해 여러 가지 꽃을 사서 줄로 엮어 화환을 만들어 관음상 앞에 이르러 지성으로 예찬한 다음 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고 세 가지 원을 세웠다.

‘첫째는 이곳에서 배움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편안하고 어려움이 없을 것 같으면 원컨대 제가 던지는 꽃이 존상의 손에 얹히게 하소서. 둘째는 제가 닦은 복혜(福慧)로 도사다궁(覩史多宮)에 태어나 자씨보살을 섬기는 것이 원이옵니다. 만약 뜻과 같이 될 수 있다면 원컨대 이 꽃이 존상의 양어깨에 걸치게 하소서. 셋째는 성교(聖敎)에는 중생계 가운데 일푼[分]의 불성(佛性)도 없는 자가 있다 하셨는데 저에게는 지금 불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불성이 있고 수행하여 성불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원컨대 이 꽃이 존상의 목에 걸리게 하소서.’

이렇게 기원하고 꽃을 멀찍이서 던졌는데 모두가 기원한 대로 되었다. 

 

법사는 기원한 것이 만족스럽게 되자 한없이 기뻐하였고, 곁에서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이나 절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도 이를 보고는 모두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기뻐하면서 말했다.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금생이나 미래에 만약 성도(成道)하시게 되면 오늘의 인연을 기억하시어 저희들을 먼저 제도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법사는 이곳을 떠나서 이란나국(伊爛拏國)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가람이 10여 개나 되며 4천여 명의 승려들이 거의가 소승의 설일체유부를 배우고 있다. 근래에 이웃나라의 왕이 이 나라의 왕을 폐위시키고 도성(都城)을 승려들에게 보시하고 그 안에다 두 개의 절을 세워 각각 천 명의 승려를 살게 했다. 

그 중에 두 사람의 대덕(大德)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달타게다국다(怛他揭多鞠多:Tathagatagupta)[당나라 말로 여래밀(如來密)이라 한다.]이고 또 한 사람은 찬저승하(羼底僧訶:Ksantisimha)[당나라 말로 사자인(師子忍)이라 한다.]이다. 모두가 살바다부(薩婆多部)에 능통했으므로 법사는 또 1년간 머물면서『비바사론(毘婆沙論)』과『순정리론(順正理論)』등을 배웠다.

 

이 나라의 대성(大城) 남쪽에 탑이 있는데, 부처님께서 옛날에 이곳에서 3개월 동안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하신 곳이다. 그 곁에는 또 과거 네 부처님의 유적이 있다.

이 나라의 서쪽 경계인 긍가강 남쪽으로 가면 작은 외딴 산에 이르는데, 부처님께서 옛날에 이곳에서 3개월 동안 안거하시면서 박구라(薄句羅:Bakkula) 약차(藥叉)90)를 항복시킨 곳이다.

이 산 동남쪽 바위 밑에 큰 돌이 있고 그 돌 위에 부처님께서 앉으셨던 자국이 있는데 길이는 5척(尺) 2촌(寸)이고 너비 4척 1촌이며 돌이 패인 깊이는 1촌 남짓하다. 또 부처님께서 군치가(桾稚迦:Kuṇdika)[즉 물병이다. 옛날에 군지(軍持)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를 놓았던 자국이 있는데 깊이가 1촌 남짓하며 8개의 화문(花文)이 새겨져 있다.

90) 약차(藥叉)․야차(夜叉)․야걸차(夜乞叉) 등으로 음역하고, 첩질귀(捷疾鬼)․용건(勇健)․능담(能噉) 

    등으로 한역한다. 원래 신성한 영적 존재, 초자연적인 존재를 의미하였는데, 나찰(羅刹)과 함께 

    나쁜 귀신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매우 포악스런 귀신의 종류이지만 불법을 지키는 사람은 적극 

    돕고 불법을 해치는 무리는 무참히 공격한다

 

이 나라 남쪽 경계의 밀림 속에는 큰 코끼리들이 많이 있는데 힘이 세고 대단히 크다.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3권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3권 3.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이란나국(伊爛拏國)까지 갈약국사국(羯若鞠闍國)에서 동남쪽으로 6백여 리를 가서 긍가강[殑伽河]을 건너 남쪽의 아유타국(阿踰陀國)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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