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끝없이 포기하는
일입니다.
1. 행복의 걸림돌, ‘나쁜 놈’
1000명의 제자가 스승의 설법을 듣는다면 그 가르침의 핵심을 파악하는 제자는 100이라고 한다. 가르침의 핵심을 파악한 100명의 제자 중에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은 10명이라고 한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10명의 제자 중에 가르침의 본질에 이르는 자는 1명이라고 한다. 스승은 바로 이 한 명의 제자를 위해서 법을 설한다고 한다.
도를 구하는 자는 소의 털처럼 많지만, 도를 성취하는 자는 소의 뿔처럼 귀하다. 모든 사람들이 고통은 싫어하고 행복을 원하지만. 불행한 사람은 소털처럼 많아도 행복에 이른 자는 소의 뿔처럼 귀한 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이 한결같이 원하지만 행복하지 못하고 고통과 불행만이 생겨난 것은 무슨 연유일까? 많은 대답이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행복을 구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보살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중생의 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파괴되지 않을 진실한 행복을 원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을 깨뜨리고 대승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말에 ‘나쁜 놈’이란 말이 있다. 그 말의 직설적 의미는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나뿐’에서 유래됐음직하다.
이웃들로부터 ‘나뿐 놈’으로 손가락질 받으며 고통과 윤회의 오염된 싸이클에서 끝없이 헤매일 것인가, 기쁨과 축복이 꽃피어나는 보살의 길을 닦아갈 것인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대, 진실로 행복을 원하는가?
‘행복의 완성자’, ‘자비의 완성자’ 관세음보살을 우러러 명상하라. 관음의 형상은 대승불교의 보살들이 받들어 행할 바를 온몸으로 설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화한 미소와 행복한 표정, 사랑의 눈매, 그리고 보석염주와 영락장엄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꾸밈새가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승불교운동은 재가불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신앙운동이었다. 그래서 원시불교에서의 수행의 목표요. 공경의 대사인 아라한을 뒷전으로 물리치고 화려한 보관을 쓰고 비단 옷자락을 휘날리며 보살이 부각되었다.
그것은 대중의 마음은 행복을 추구하지. 고행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지장보살과 같은 예외도 존재하지만. 그래서 대승의 보살은 대중과 함께 살면서 가장 행복하게, 가장 열심히, 가장 올바르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비(悲). 지(智), 행(行), 원(願)의 네 가지 덕목은 보살이라고 불리우는 한국의 신도들이 받들어 행해야 될 행복의 법칙이다. 관음의 자비, 문수의 지혜, 보현의 행원, 지장의 서원을 통해서 완전한 인격, 완전한 행복을 성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4대 보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보살, 관세음보살은 어떤 마음의 이치를 닦아 행복을 완성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2. 관음의 전생 이야기
인도 남쪽에 조그만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에 장나(長那)라고 하는 부자가 예쁜 부인을 얻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한 가지 근심은 몇 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는데 하루는 부인이 제단을 차리고 옥동자를 점지해 달라고 천지신명께 정성으로 기도를 모셨다. 그 인연공덕인지 바로 태기가 있어 잘생긴 아들을 낳고 삼 년을 지나 또 한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두 아들, 조리와 속리가 10살과 7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홀연히 병이 들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후 장나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후처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듬해 흉년이 들어 들판의 곡식을 하나도 수확하지 못하게 되자 장나는 집안 살림을 새 부인에게 맡기고 보물을 가지고 식량과 바꿔 오기 위해 이웃나라로 먼 길을 떠났다.
혼자 남게 된 새 부인은 ‘내가 장차 자식을 낳게 되면 저 아이들이 큰 장애가 되겠구나’ 생각하고는 뱃사공을 매수하였다. 뱃사공은 뱃놀이를 구실삼아 두 아이를 싣고 멀리 무인도에 내려 놓고는 돌아와 버렸다.
조리와 속리, 어린 두 형제는 온 섬을 헤매이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서 서로 부둥켜 안고 쓰러졌다.
아우 속리가 새 엄마와 뱃사공한테 속아서 비참하게 죽기 되는 운명을 한탄하였다. 형이 아우를 위로하며 타일렀다.
“나도 처음에는 세상을 저주하고 사람들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니. 차라리 우리가 다음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이 고통의 체험을 인연으로 우리와 같이 비운(悲運)에 우는 사람들을 구원해주자.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고 구원해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위로받고 구원받는 길인 것을 엄마에게서 배우지 않았니?”
형의 말을 듣고 있던 아우도 차츰 밝은 표정이 되어 하늘을 우러러 보며 거룩하고 크나큰 서원을 세웠다.
“우리는 여기서 죽더라도 내생에는 성현이 되고 보살이 되어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인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해주자. 또 세상에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게 의복과 양식을 주고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자…….”
하는 등의 서른 두 가지의 서원을 세우고 어린 두 형재는 서로 얼싸안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숨져갔다.
두 형제는 얼굴에는 조용하고 맑은 미소가 어리어 있었다고 한다. 이 섬의 이름이 보타락가산이며 형은 관세음보살이 되고 동생은 대세지보살이 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설화가 역사적 사실인가 아닌가를 묻는 것은 중생의 어리석음이다. 설화에서는 설화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위의 설화는 인간의 진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어하고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범인들의 과거를 보면 한결같이 성장과정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 상처난 마음들이 끔찍한 범죄행위로까지 발전해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인간의 마음을 깊이 통찰한 대승의 불자들은 갖가지 사회악과 끔찍한 범죄, 청소년 탈선 등이 일찍이 자비의 마음으로 사랑의 손길을 펼치지 못한 자신의 허물임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3. 수녀들의 환속 이유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들지 않는 불교의 출가 수행자와는 달리 가톨릭의 수도자는 입회하기도 조건과 정차가 수행자와는 달리 카톨릭의 수도자는 입회하기도 조건과 절차가 까다롭지만 다시 환속하기에도 몇 가지 절차가 따라야 하고 교황청에 오른 호적까지 정리되어야 한다.
서울의 모 수녀원에서 조사된 자료에 보면 수녀생활을 그만두고 환속하는 이유를 내용별로 분류해 놓았는데 그 중 첫번째는 ‘인정받지 못해서’라고 한다.
남녀노소 신분을 떠나서 자기의 위치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의기소침해 있기 마련이다. 공부하고 기능을 익히는 일도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 아닌가?
이 같은 인간의 진실에 눈뜬 자는 어떠한 말과 행동, 마음을 지녀야 할지가 분명해 진다. 행복의 완성과 관세음보살은 바로 자신의 불행을 원망하지 않고 그 같은 불행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발원한다. 도움을 바라기보다는 먼저 도움의 손길을 베풀고 관심의 대상이 되기보다 상대방에게 진실한 관심을 가져 줌으로써 자비와 행복의 완성을 실천한 것이다.
탄트라의 가르침에서는 “자기를 넘어뜨린 자를 딛고 일어서라” 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통하여 중생들의 불행과 슬픔을 깨달아 구제하겠다는 열망을 의미한다.
4. 삶! 끝없이 포기하는 일
티베트불교의 수행법에도 구도자는 먼저 단단한 철갑으로 둘러싸인 이기적인 자아를 쳐부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과정을 진지하게 수행하지 않고서는 무한공덕의 바다인 대승에의 입문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끝없는 윤회의 삶을 통하여 인연 있는 부모 형제들이 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나와 남, 나의 가족과 남의 가족을 구별하지만 본질적으로 남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만나는 모든 이웃들은 바로 전생의 어머니 아닌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 생명의 진실을 일깨우는 명상법이 있다. 여기 이기적인 마음을 이타적인 마음으로 전환시켜주는 자비의 명상법이 있다.
조용한 시간을 이용, 고요히 정좌한 후 윤회의 삶속에서 끝없이 고통받는 중생의 세계를 깊이 명상한다.
정좌한 자신의 왼쪽 무릎 아래로 어머니의 형제들이 앉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안쪽으로는 친구들이 있다. 다시 오른쪽 무릎 아래에는 아버지의 형제들을, 그 안쪽으로는 스승들을 모신다. 그리고 양 무릎 사이 가운데에는 자기가 가장 미워하고 증오하는 원수를 앉게 한다.
그리고 원수를 포함한 지금 인연 맺어진 모든 이웃들이 나의 전생의 어머니였음을 명상한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희생했음을 명사하고 어머니들의 고통을 내가 대신 받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을 일으킨다.
숨을 들이쉴 적에 어머니들의 괴로움이 한 줄기 검은 연기가 되어 콧구멍으로 들어와 가슴 한가운데 있는 자기만을 위하는 검은 마음을 짓이겨 버리는 모양을 명상한다.
다시 숨을 내쉬면서 자신이 이제껏 쌓은 복과 덕을 어머니들에게 바치고자 하는 원을 일으킨다. 그때 내쉬는 숨을 따라 희고 밝은 빛이 무릎 아래 어머니들을 비추면 아픈 사람은 건강해지고 불행한 사람은 행복해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관상한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뿌리깊은 중생병인 이기적인 자아의식을 변화시키지 못하고서는 그 어떤 수행도 진전이 없다.
초기불교의 기본수행법인 수식관과 자비관의 이상적인 조화를 통하여 대승의 마음을 일으킨다.
한국의 선 수행자들이 피나는 정진속에 자기 체험의 세계를 맛보지만 그 체험이 생활속에 지속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것은 서원이 부족하고 자비심의 계발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원고를 쓰는 중에 전화가 울린다. 서울의 아는 보살님이다. 한 사람의 주부로서 자식과 남편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어려움을 말한 그는 “사는 일이 끝없이 포기하는 일 같아요”한다. “그렇습니다. 삶은 바로 끝없이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정작 포기해야 할 것은 포기하지 못하고 포기 안 해도 좋은 것들만 포기하는 경향이 있지요. 물질과 인간에 대한 포기는 자기회피의 몸짓일 수도 있습니다. 대원(大願)을 일으킨 불자는 사사로운 자기 감정과 사사로운 자기 욕망을 포기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포기하는 일이 돼야 합니다.”
불교 최상의 가치는 이욕(離欲), 즉 자기 욕구와 자기 욕망을 벗어난 청정환희의 세계를 깨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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