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 인지와 감성의 해체
동국대(경주) 불교학과 김성철
1. 쌓는 것은 지식, 허무는 것은 지혜
“학문을 하면 나날이 늘어나고, 도를 닦으면 나날이 줄어든다(為學日益,為道日損).” 노자 ?도덕경?의 가르침이다.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체험할 때 우리의 지식은 늘어난다. 박학다식을 지향하는 것이 학문의 길이다. 그러나 깨달음의 길은 그 방향이 정반대다. 선천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든, 세간의 교육을 통해 배운 것이든 모두 비우고 버릴 때 우리에게 지혜가 생긴다. 지식은 쌓아서 이룩되는 반면에, 지혜는 허물어서 만난다.
앎의 영역에서 지식은 양적(量的) 개념이고 지혜는 질적(質的) 개념이다. 지식을 의미하는 ‘알 지(知)’자 밑에 날 일(日)변이 붙으면 ‘지혜 지(智)’자가 된다. 지식은 그저 아는 것일 뿐이지만 지혜는 태양(日)처럼 밝은 앎이다. 새벽에 해가 뜨면서 삼라만상이 보다 뚜렷하게 보이듯이, 지혜의 세척을 거쳐야 지식은 보다 분명해진다. 삼라만상이 그러하듯이 지식은 다양하지만, 태양빛이 그러하듯이 지혜는 단일하다.
2. 반야의 지혜와 색즉시공
인도(印度)인들은 지식을 즈냐(jñā)라고 불렀고, 지혜를 쁘라즈냐(prajñā)라고 불렀다. ‘jñā’라는 단어 앞에 ‘뛰어남’을 의미하는 접두어 ‘pra’를 덧대어 만든 말이다. 중국의 번역가들은 쁘라즈냐를 반야(般若)라고 음역하였다. 반야는 ‘가장 뛰어난 앎’을 의미한다.
궁극적 지혜인 반야를 발견한 중국의 혜능 스님은 “원래 아무 것도 없다(本來無一物).”고 노래하였다. 원래 없다는 반야의 조망은 공(空)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텅 비었다는 뜻이다.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가장 짧은 불전(佛典)인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이러한 반야의 핵심을 가르친다. 형상도 공하고, 느낌도 공하고, 생각도 공하고, 의지도 공하고, 마음도 공하다. 깨닫고 보니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것이 사상누각과 같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반야심경?에서는 “형상이 공하다.”는 조망을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표현한다. “재색(才色)을 겸비했다.”거나 “색스럽다.”라는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색이란 말은 미모나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의미한다. 수 년 전 영화의 제목으로 사용된 ‘색즉시공’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색즉시공의 원래 의미와 아무 관계가 없다. 색즉시공이란 말은 “모든 형상은 실체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3. 형상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공하다
간단한 예를 들어 색즉시공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막대기를 보고서 “참으로 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막대기가 ‘긺’이라는 형상을 갖는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 막대기가 원래, 항상 길기 때문에 ‘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니다. 어떤 짧은 막대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그 막대기에 대해 ‘길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만일 더 긴 막대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그 막대기에 대해 ‘짧다’는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다. 동일한 길이의 하나의 막대기인데도,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가에 따라 그 길이가 길게 생각되기도 하고 짧게 생각되기도 한다. 그 막대기는 원래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다. 이런 조망을 한문으로 ‘비장비단(非長非短)’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막대기든 원래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다. 그 어떤 막대기든 그 길이에 실체가 없다. 즉 모든 막대기의 길이는 공하다. 이것이 “형상은 공하다.”는 조망의 한 예이다.
큼과 작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방에 처음 들어가 “방의 크기가 참으로 크다.”는 생각이 들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그 방의 크기가 원래 크기 때문이 아니라, 방에 들어가기 전에 작은 방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쁨과 못생김도 마찬가지다. 잘남과 못남도 마찬가지다. 부유함과 가난함, 머리가 좋음과 나쁨, 건강함과 허약함, 빠름과 느림 등등 모두 상대적 비교를 통해 떠오르는 생각들일 뿐이다. 원래 큰 방도 없고, 원래 작은 방도 없는데 우리의 인식에 큰 방과 작은 방이 동시에 출현한다. 하나는 생각 속에 염두에 두고 있던 작은 방이고 다른 하나는 눈앞에 보이는 큰 방이다. 우리의 생각을 구성하는 그 어떤 개념들도 홀로 발생한 것은 없다. 반드시 대립쌍과 함께 발생한다. 이렇게 상대적 비교를 통해 발생하는 과정을 불교전문용어로 ‘연기(緣起)’라고 부른다. 얽혀서[緣] 발생한다[起]는 의미이다. 형상만 공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 등 모든 것이 공하다. 실체가 없다. 세상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4. 공을 체득한 선승의 깨달음
공에 대한 조망이 깊어질 때 세상이 무너진다. 그 전까지 실재한다고 생각했던 세상만사가 모두 사상누각과 같은 것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도덕경?에서 노래하듯이 줄어들고 줄어들어서 결국 세상의 끝인 무(無)와 만나는 것이다[損之又損 以至於無爲].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최초로 판사에 임용되었다가 홀연 출가하여 구도자의 삶을 살았던 효봉 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海底燕巢鹿胞卵 바다 밑 제비 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火中蛛室魚煎茶 타는 불 속 거미집에 물고기가 차를 달이네
此家消息誰能識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白雲西飛月東走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
물고기가 사는 바다 밑에 공중을 나는 제비의 집이 있고, 그 집에서 포유류인 사슴이 알을 낳아 품고 있으며, 활활 타는 불 속에서는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가 거미줄을 치고 앉아 녹차 물을 끓이고 있다는 말이다. 언어가 무너지고, 세상이 무너져 있다.
과거 선승들의 문답 역시 기상천외하다.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 마른 똥 막대기다!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오신 목적은? → 뜰 앞의 잣[측백]나무다!
개에게도 부처의 성품이 있는가? → 없다!
제자는 부처의 자비와 지혜에 대해 물었다. 부처의 위대함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스승은 의외의 답변을 한다. “마른 똥 막대기다[乾屎橛]!” 부처에 대한 모독이다. 지독한 우상파괴적 발언이다.
달마는 인도 왕자 출신의 승려로 중국에 건너와 선종을 개창한 성인이다. 제자는 이런 달마 스님이 중국에 온 목적[達磨西來意]에 대해 물었다. 장황한 답을 기대했는데, 스승은 의외로 뜰 앞의 측백나무[庭前柏樹子]를 가리킨다.
?열반경?이라는 불전에서는 모든 생명체에게 부처의 성품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이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개[犬]에게도 불성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자는 개와 같은 짐승이 갖춘 불성이 무엇인지 물었다. 스승은 ?열반경?의 가르침을 뒤엎으며 ‘무(無)’라고 답한다.
도대체 상식적인 대답이 하나도 없다. 그야말로 ‘선문답(禪問答)’이다. 지금이야 이런 선문답들이 전문수행자들의 ‘상식’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선승들의 답변 하나 하나가 모두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답의 공통점은 질문자의 의도가 스승에 의해 묵살되고 있다는 점이다. 스승의 충격적 답변으로 인해 제자의 세계관이 무너지면서 스승의 깨달음이 제자에게 전수된다. 일종의 ‘내림굿’이다.
5. 눈도 없고, 죽음도 없고, 시간도 없다
1) 눈도 없고 시각대상도 없다
앞에서 공(空)에 대해 설명하면서 긺과 짧음, 큰 방과 작은 방, 예쁨과 못생김, 잘남과 못남, 부유함과 가난함, 머리가 좋음과 머리가 나쁨, 건강함과 허약함, 빠름과 느림 등과 같은 생각들이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개념들 모두가 비교를 통해 떠오르는 것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공사상에서는 그런 상대적 개념들뿐만 아니라 우리 생각의 토대가 되는 모든 개념들이 실체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반야심경?에서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없고, 생각도 없다[無眼耳鼻舌身意].”고 가르치며, 깨달은 선승(禪僧)들은 심지어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고 토로한다.
눈이든, 귀든, 코든, 삶이든, 죽음이든 우리 생각의 토대가 되는 이런 모든 개념들은 이 세상에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한 것들이다. 서로 서로 얽혀서 발생한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실체가 없고 공하다. 마치 꿈을 꿀 때 모든 일들이 실재하는 것 같지만, 원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세상만사 역시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하다. 잠에서 깨어남으로써 그 전까지의 꿈이 허구였음을 알듯이, 세상만사가 축조되는 원리인 연기의 법칙에 대해 숙달할 때 우리는 세상만사가 꿈과 같은 허구임을 알게 된다. 공함을 알게 된다.
불교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 ‘공(空)의 조망’과 공의 근거인 ‘연기(緣起)의 법칙’에 대해 논리적으로 가르치는 분야가 중관학(中觀學)이다. 중관이란 “중도(中道)를 관찰한다.”는 뜻인데, 여기서 말하는 중도란 가운데의 그 무엇이 아니라 ‘양 극단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양 극단이란 흑백논리의 양 극단이다. 형식논리의 양 극단이다. 중관이란 일종의 ‘순수이성비판’이다. 우리의 ‘따지는 능력(Reason)’에 대한 비판이다. 중관의 비판은 그 자체가 궁극이다. 이를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부른다. 흑과 백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破邪] 그 자체가 궁극적 깨달음을 드러낸다[顯正]는 의미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며 생활한다. 불전에서는 이런 체험을 일으키는 지각기관을 순서대로 안근(眼根), 이근(耳根), 비근(鼻根), 설근(舌根), 신근(身根), 의근(意根)라고 부르며, 그 각각의 대상을 색경(色境), 성경(聲境), 향경(香境), 미경(味境), 촉경(觸境), 법경(法境)이라고 부른다. 우리 몸에서 눈을 제거하면 시각의 세계 전체가 사라지기에 눈은 시각 세계에서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감관의 이름에 ‘뿌리 근(根)’자를 붙인 이유다.
이 세상은 이러한 여섯 가지 지각기관과 여섯 가지 지각대상의 열두 가지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십이처(十二處)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 이 열 두 가지 이외의 것은 없다. 봄의 영역은 이 가운데 ‘눈[眼根]’과 ‘시각대상[色境]’이 만나서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눈으로 시각대상을 본다거나 눈에 시각대상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눈도 실재하지 않고, 시각대상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중관학의 전범(典範)인 ?중론(中論)?에서는 눈이 실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눈이란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 ?중론?, 제3장, 제2게 -
내 눈을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내 손도 보이고, 나의 콧등도 보이지만 아무리 보려 해도 내 눈만은 보이지 않는다. 요리용 칼날로 두부도 자르고, 감자도 자르지만 칼날 그 자체만은 자를 수 없으며, 손가락으로 모든 사물을 다 가리키지만 손가락 그 자체만은 가리킬 수 없는 것과 같이, 눈에 온갖 사물들이 보이지만 눈 그 자체만은 보이지 않는다. 나의 눈이 있는 줄 알고 살았는데, 그런 내 눈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내 눈이 없다.
혹자는 거울에 비추어 보면 내 눈의 존재가 확인된다고 반박할지 몰라도, 거울에 비친 눈은 진정한 눈이 아니다. 눈에 비친 시각대상이다. 불교용어로 표현하면 안근이 아니라 색경이다. 또 혹자는 손가락으로 만져보면 나에게 눈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할지 몰라도 손가락에 만져지는 눈동자의 감촉은 열두 가지 영역 가운데 촉경에 속할 뿐 안근은 아니다. 안근은 ‘보는 힘’을 의미하는데, 이런 보는 힘은 손가락에 만져지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의 눈도 진정한 눈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눈 역시 거울에 비친 나의 눈과 마찬가지로 시각대상인 색경의 영역에 속한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는 힘’으로서의 안근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눈이 없다[無眼 …].”는 경문에 대한 중관학의 논증이다. 이렇게 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눈에 비친 시각대상에 대해서도 시각대상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다. 눈이 있어야 시각대상이 있을 수 있는데 눈이 없기에 시각대상도 없다. 긴 것이 있어야 짧은 것이 있을 수 있는데, 긴 것을 배제하면 어떤 막대기에 대해 “짧다.”고 이름 붙일 일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눈도 없고, 시각대상도 없다는 조망을 터득했다고 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 전까지 시각대상인 줄 알았던 눈앞의 풍경이 ‘대상성(對象性)’을 상실한다는 말이다. 공성의 조망을 통해 시각의 세계에서 눈과 시각대상이라는 개념이 증발한다. “눈으로 시각대상을 본다.”는 말 역시 이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만든 허구다. 상기한 ?중론? 인용문에서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라고 반문하는 이유가 이에 있다.
이렇게 우리가 체험하는 ‘시각의 세계’에 원래 ‘눈[眼根]’이랄 것도 없고 ‘시각대상[色境]’이랄 것도 없으며 ‘무엇을 보는 일[眼識]’도 없는데 우리는 그런 한 덩어리의 시각의 세계에 분별의 선을 그어 “눈으로 시각대상을 본다.”고 생각을 하고 말을 한다. ‘눈’이 있다고 설정하게 되면 ‘시각대상’과 ‘보는 작용’이 출현한다. 그 세 가지 모두 원래는 없는 것들인데 우리의 생각 속에서 서로 얽혀서[緣] 발생[起]하는 것이다. 연기(緣起)하는 것이다. 비단 눈이나 시각대상, 보는 작용뿐만 아니라 이 세상 만물이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선긋기’를 통해 연기한 것들이다. 이 세상 만물은 모두 생각이 만든 것으로 원래 단 하나도 실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공(空)하다. 모든 것은 연기한 것들이기에 모든 것은 공하다.
2)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앞에서 눈과 시각대상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중론?에 의거해서 설명해 보았다. 긴 것과 짧은 것, 큰 방과 작은 방 등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과 시각대상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철저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중론?이라는 문헌에 의거할 때 “눈도 없고 … 시각대상도 없다.”는 ?반야심경?의 경문이 비로소 이해된다. 우리는 갖가지 개념들을 소재로 삼아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런 개념들에 대한 고착의 정도는 천차만별이다. 긺이나 짧음, 큼이나 작음과 같은 개념에 대해서는 고착의 정도가 약한 반면, 눈과 시각대상과 같은 개념들에 대해서는 고착의 정도가 강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 가운데 고착의 정도가 가장 강한 것이 ‘삶’과 ‘죽음’일 것이다. 많은 철학자, 종교인들이 ‘권력과 금력을 지향하는 동물적 생존’ 이상의 삶을 추구하는 이유가 바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깨달은 선승들은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고 선언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있고, 언젠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죽음을 자각할 때 우리는 종교에 의지하게 되고 철학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한 ‘살아 있음’의 정체를 추구한 대표적 철학자들이 하이데거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이었다. 자연과학이나 과거의 철학은 존재하는 개개의 것들, 즉 ‘존재자’를 탐구하였는데 실존주의자들은 존재(Sein) 그 자체를 탐구하였다. “도대체 왜 세상 만물은 없지 않고 있는가?”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평생 품고 다녔던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나는 지금 살아 있다. 그리고 언젠가 죽을 것이다. 나는 지금 존재한다. 그리고 언젠가 나의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 왜 나를 포함한 모든 생명은 죽어야 하는가?
그런데 이런 의문을 해결하고자 할 때 불교의 접근방식은 독특하다. 의문에 대해 답을 내려 하지 않고, 의문이 타당성 여부를 점검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에서 보듯이 우리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승이 좋은 이유는 죽음 후의 세계가 두렵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지금 없지 않기 때문이다. 탄생하기 전에 나는 없었고, 죽음 후에 나는 없을 것이라는 점만이 우리 생각으로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탄생 전의 ‘무(無)’와 죽음 후의 무(無)를 염두에 두고서 우리는 지금 존재한다[有]고 생각하고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 보자. 탄생 전의 무(無)를 내가 만난 적이 있는가? 죽음 후의 무를 내가 만날 수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탄생 전의 무는 나와 대면한 적이 없고, 죽음 후의 무 역시 나와 대면할 수가 없다. 그런데 마치 ‘탄생 전의 무’와 ‘죽음 후의 무’를 내가 체험했거나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서, 지금의 이 순간에 대해 ‘유(有)’라거나 “살아있다.”고 규정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탄생 전의 무를 체험한 적이 없고, 죽음 후의 무 역시 체험할 수가 없다. 따라서 지금 체험하는 이 순간이 ‘유’일 것도 없고, ‘삶’일 것도 없다. ‘무’를 체험한 적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기에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유’를 체험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나는 지금 살아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확고하게 살아있어야 나의 죽음이 있을 수 있는데, 지금 살아있는 것도 아니기에 죽을 것도 없다. 삶도 원래 없고 죽음도 원래 없다. 삶과 죽음 모두 우리의 생각이 만든 이름일 뿐이다. 죽음을 염두에 두기에 지금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지금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죽을 것을 두려워한다. 긴 것과 짧은 것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緣起)한 것이듯이 삶과 죽음 역시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한 개념일 뿐이다. 삶도 공하고 죽음도 공하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죽음에 대해 이상의 논의와 유사한 내용의 글을 남기고 있다. ?논리-철학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죽으면 세계는 바뀌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기는 하지만(6.431),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체험되지 않는다(6.4311).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다른 저술 어디에서도 죽음에 대해 이 이상 논의하지 않는다. 누구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신의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선승의 토로가 비트겐슈타인을 통찰보다 더 깊은 이유는 그 바탕에 ‘연기(緣起)의 법칙’이 깔려 있다는 점에 있다. 큰 방과 작은 방이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한 것이듯이, 삶과 죽음 역시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한 것이다. 석가모니에 의해 발견된 연기의 법칙에서는 불교의 종교성은 물론이고 세계관, 윤리, 실천, 수행론 모든 것이 연역된다. 삶과 죽음이 원래 없다는 선승의 통찰은 연기법에 근거하여 도출되는 불교적 세계관에서 하나의 작은 조각일 뿐이다.
하이데거의 경우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는 점에서는 불교적 수행과 그 출발을 같이 하지만 종착점은 다르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는 ‘존재감’을 더 강화시키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모든 것이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고 사는 사람을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라고 불렀다. 라이프니츠와 같은 철학자가 현존재로서 살아간 사람이며 고흐나 세잔느와 같은 예술가의 그림에서도 ‘존재’에 대한 자각을 읽을 수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유(有)와 무(無)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유를 더욱 강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불교적 수행에서는 유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와 무에 대한 의문을 해소시킨다. 유와 무,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생각 모두가 허구임을 자각함으로써 존재에 대한 의문을 해소시키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의문이 허구의 의문이었음을 폭로한다. 지금의 우리는 살아 있다고 할 것도 없다. 따라서 죽을 것도 없다. 긴 것도 없고 짧은 것도 없으며, 큰 방도 없고 작은 방도 없으며, 눈도 없고 시각대상도 없듯이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3)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체득하고자 할 때 어떤 심오하거나 난해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방법은 단순 명료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 시간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정체에 대해 그저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 가지 시간대로 구성되어 있다. 흘러 지나간 것은 과거(過去)이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미래(未來)이며, 지금 존재하는 것이 현재(現在)이다. 세 가지 시간대를 부르는 한자어에 그 의미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면 이러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실재하는지 하나하나 검토해 보자.
우리는 과거를 만난 적이 있는가? 과거를 대면한 적이 있는가? 내 면전에 과거가 놓인 적이 있는가? 결코 그런 적이 없다. ‘흘러간 것’이 과거이기에 항상 현재 속에 사는 내가 과거와 대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과거 그 자체는 체험되지 않는다. 과거는 내 면전에서 존재한 적이 없다.
미래 역시 마찬가지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는 시간대이기에 우리는 미래를 대면할 수가 없다. 미래를 만날 수가 없다. 미래 역시 내 면전에 존재할 수가 없다.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 없기 때문에, 과거의 성현들은 “오직 현재에 충실하여라!”는 격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들 성현의 말씀처럼 과거와 미래는 없고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인가? 현재는 지금 이 순간을 가리킨다. 필자에게는 자판(字板)을 두드리는 바로 지금의 이 순간이 현재이고, 독자에게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이 순간이 현재이다. 그러면 바로 이 순간인 현재는 그 길이가 얼마일까? 지금 이 순간의 몇 초 정도에 대해 현재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현재의 길이가 1초 정도 될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초침의 소리를 ‘똑~딱’이라고 흉내 낼 때, ‘똑’ 하는 순간에 ‘딱’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며, ‘딱’하는 순간에 ‘똑’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가 된다. 따라서 ‘똑~딱’ 하고 발화하는 시간 전체가 현재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더 짧게 ‘똑’이라는 한 글자를 발화하는 순간을 현재라고 규정할 수도 없다. ‘똑’이라는 소리를 ‘또~옥’이라고 풀을 때 ‘또’ 하는 순간에 ‘옥’은 미래이고 ‘옥’ 하는 순간에 ‘또’는 과거가 된다. 현재의 길이는 0.1초일 수도 없고, 0.01초일 수도 없고 … 0.00001초일 수도 없다. 그 어떤 시간도 다시 과거와 미래로 양분되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는 증발하고 만다. 현재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틈에 끼어 있을 곳이 없다! 이런 조망을 ?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미 가버린 것은 가고 있지 않다. 아직 가지 않은 것도 역시 가고 있지 않다.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서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은 가고 있지 않다.
- ?중론?, 제2장, 제1게 -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 없으며, 현재는 과거와 미래 틈에 끼어 있을 곳이 없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성되어 있는데, 과거와 미래와 현재 각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금강경?에서는 이런 통찰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과거의 마음도 포착할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포착할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포착할 수 없다.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금강경?, 제18 一切同觀分)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염두에 두고서 과거를 떠올리고, 과거와 미래를 염두에 두고서 현재를 떠올리며, 과거와 현재를 염두에 두고서 미래를 떠올린다. 이 모두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체험’의 세계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되어 있는 시간 역시 실재하지 않는다.
6. 모든 개념에는 테두리가 없다
긺과 짧음, 큼과 작음, 예쁨과 못생김, 잘남과 못남, 눈과 시각대상,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 등은 실체가 없다. 이런 개념들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 속에는 이런 개념들을 떠올릴 수 있어도, ‘체험’의 세계에서 이런 개념들에 대응하는 고정불변의 사태(fact)나 사물(thing)을 만날 수가 없다. 생각 속에 떠오른 것이 모두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 속에서는 ‘토끼의 뿔(兎角)’도 떠올릴 수 있고, ‘거북이의 털(龜毛)’도 떠올릴 수 있지만 체험의 세계에는 이 모두가 실재하지 않는다. 긺과 짧음 …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과 같이 실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고정관념이 허구임을 자각하게 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화엄학(華嚴學)의 조망이다. 화엄학이란 ?화엄경?에 근거한 절대긍정의 사상이다. 앞에서 소개했던 ?반야심경?에서는 이 세계에 대한 절대부정의 통찰을 노래하는 반면, ?화엄경?에서는 절대긍정의 통찰을 노래한다. 절대부정의 통찰에서는 모든 것이 다 공하지만[一切皆空], 절대긍정의 통찰에서는 하나를 들면 그대로 모든 것에 해당한다[一卽一切]. 화엄적 조망으로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개념을 예로 들어 그 ‘테두리[外延, 범위]’가 실재하는지 검토해 보자.
‘이마’에는 테두리가 없다. 이마 한 가운데가 이마인 것은 분명하지만, 주변으로 갈수록 이마의 의미가 흐려진다. 이마와 관자놀이의 경계부가 어디인지 확정할 수 없다. 코도 마찬가지고, 귀도 마찬가지고, 입술도 마찬가지다.
‘아침’에는 테두리가 없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가 아침인지 단정할 수 없다. ‘점심’에는 테두리가 없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가 점심인지 단언할 수가 없다. ‘정오’라는 개념의 경우는 ‘태양이 상공의 정 중앙에 뜰 때’라는 약속이 되어 있기에 테두리가 있다. 그러나 약속은 생각이 만든 것일 뿐이며 체험의 세계인 자연(自然)에는 그 어떤 약속도 없다.
모든 개념은 테두리가 없기에 곰곰이 생각하면 그 외연이 무한히 확장된다. 그 어떤 개념이라고 해도 그 범위가 무한하다는 조망을 화엄학에서는 “하나가 곧 모든 것이다(一卽一切).”라거나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一中一切).”고 표현한다. 이제 몇 가지 개념을 예로 들어 그 외연에 대해 검토해 보자.
‘우주’에는 테두리가 없다. 푸른 하늘 저 먼 곳을 우주라고 부르지만,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곳도 우주가 아닐 수 없다. 내 뱃속도 우주이고 지구의 내부도 우주다. 이 세상에 우주 아닌 곳이 없다. 모든 곳이 우주다.
‘시계’라는 개념 역시 테두리가 없다. 시침과 분침이 있어야 시계인 것만은 아니다. 디지털시계도 있고 모래시계도 있다. 1분 1초도 틀리지 않아야 시계인 것만은 아니다. 하늘의 달도 시계, 별도 시계, 해도 시계다. 달의 모양을 보면 날짜를 알 수 있고, 위치를 보면 시간을 알 수 있다. 별과 해의 위치를 보면 시간을 알 수 있다. “시계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모든 것이 시계가 아닐 수 없다. 내 육체도 시간을 나타낸다. 나이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이 방도 시간을 나타낸다. 준공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시간을 나타낸다. 나의 컴퓨터, 전화기, 책, 볼펜 내 주변에 시계 아닌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시계다.
‘욕심’ 역시 테두리가 없다. 식욕도 욕심이고 성욕도 욕심이고 명예욕도 욕심이고 재물욕도 욕심이지만, ‘공부를 잘 하려로 하는 것’ 역시 욕심이다. ‘바르게 살고 싶은 것’도 욕심이고 ‘차카게 살고 싶은 것’도 욕심이다. 남에게 베풀고자 하는 것도 욕심이고, ‘깨달으려고 하는 것’도 욕심이다. 나쁜 욕심도 있고 좋은 욕심도 있지만, 이 세상에 우리의 욕심이 개입되지 않은 일은 없다. 고개를 들어도 들고 싶은 욕심 때문이며, 수업 중 졸아도 자고 싶은 욕심 때문이며, 자다가 깨도 깨고 싶은 욕심 때문이며, 심지어 ‘욕심을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역시 욕심에 속한다. 일거수일투족 욕심 아닌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욕심이다.
‘물질’에는 테두리가 없다. 모든 것이 물질이다. 서구의 유물론자들의 통찰이다.
‘마음’에는 테두리가 없다. 그래서 불전에서는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들었다(一切唯心造)”거나 ‘오직 마음만 있을 뿐(唯識)’이라고 가르친다.
‘시작’에는 테두리가 없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의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산하대지, 우주만물의 모습이 모두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어떤 것은 시작하지 않고 어떤 것은 지금 시작하고 있고 어떤 것은 앞으로 시작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이 시작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천지창조의 순간이다. 모든 것이 ‘시작’하는 순간이다.
‘종말’에는 테두리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은 종말을 고하고 있다. 나의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산하대지, 우주만물의 모습 모두 찰나찰나 완전히 종말을 고하고 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천지종말의 순간이다.
지금 이 순간이 천지창조의 순간이면서 지금 이 순간이 천지종말의 순간이다. 창조의 순간이 종말의 순간이다. 창조가 종말이다. 시작이 끝이다. 언어가 무너진다. ‘창조’나 ‘종말’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진다.
“모든 것이 살[肉]이다.”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은 모두 내 망막의 살이다. 시각의 세계는 모두 내 망막의 살이다. 나에게 무엇이 보일 때, 사실은 그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동공을 통해 들어온 빛이 망막의 스크린에 그린 무늬를 보고 있는 것이다. 밖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 안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아무리 너른 대양을 바라본다고 해도 그 모두가 내 눈동자 속의 돈짝 크기의 망막을 보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돈짝만하다. 나는 내 망막의 살을 보고 있다. 피가 흐르고 신경이 통하는 내 살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귀에 들리는 소리는 소리가 아니라 내 고막의 진동이다. 들리는 소리 모두는 내 고막의 살의 느낌이다. 냄새도 그렇고 맛도 그렇고 감촉도 그렇고 모두 나의 살의 느낌이다. 나는 나의 살로 이루어진 바다에 빠져 있다. 갑갑하다. 너른 세상에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하니 내 살의 감옥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살이다.
“모든 것이 과거다.”, “모든 것이 현재다.”, “모든 것이 미래다.”
“모든 것이 과거다.” 밤하늘에 보이는 북극성은 사실은 과거 몇 백 년 전의 북극성의 모습이라고 한다. 빛의 속도 때문이다. 북극성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별과 심지어 태양이나 달의 모습도 모두 과거의 모습들이다. 빛이 지구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엄밀히 보면 이뿐만이 아니다. 나에게 보이는 코앞의 물건도 사실은 엄밀히 말하면 과거의 모습이다. 그 물건에 반사된 빛이 나의 눈까지 도달하는데 다만 얼마라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각정보가 신경망을 타고서 나의 대뇌 후두엽의 시각중추에 도달하려면 다시 약간의 시간이 경과해야 한다. 들리는 소리도 그렇고 냄새도 그렇고 맛도 그렇고 감촉도 그렇고 지금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은 과거의 것들이다. 모든 것이 지나간 과거의 일들이다. 모든 것이 과거다.
“모든 것이 현재다.” 지금 나에게 느껴지는 것은 모두 현재 이 순간 느끼고 있는 것들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물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과거의 일들이었는데 나의 감관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현재의 일들이다. 보이는 것이든, 들리는 것이든, 생각하는 것이든 모두가 현재 이 순간의 일들이다. 모든 것이 현재다.
“모든 것이 미래다.” 지금의 북극성의 모습은 아직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아직 내 눈에 도달하지 않았다. 아직 오지[來] 않은[未] 것을 우리는 미래(未來)라고 부른다. 지금 이 순간의 모든 별의 상태는 아직 나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의 해의 모습도, 달의 모습도 아직 나의 감관에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빛의 속도 때문이다. 모두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들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책상 위의 볼펜의 모습도, 컵의 모습도 그리고 이 순간 내 손가락을 자극한 키보드의 촉감 자체도 아직 나에게 오지 않고 있다. 빛의 속도와 신경의 전달속도 때문이다. 모든 것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들이다. 모든 것이 미래다.
나에게 지각된 외부 사물의 모습은 그 사물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과거의 모습들이지만 내 감관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현재의 느낌들이다. 아울러 지금 이 순간의 외부 사물의 상태는 아직 나에게 느껴지지 않기에 모두 미래의 일들이다. 모든 것이 과거이고 모든 것이 현재이고 모든 것이 미래이다. 과거가 현재이고, 현재가 미래이고, 미래가 과거이다. 언어가 무너지고 생각이 무너진다.
이 뿐만이 아니다. “모든 것이 기호다.”, “모든 것이 부처님이다.”, “모든 것이 기(氣)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것이 밥이다.”, “모든 것이 똥이다.”, “모든 것이 나의 뇌(腦)다.”“모든 것이 미술이다.” (이들 개념이 해체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독자 스스로 연구해 보기 바람)
이상 몇 가지 개념들에 대해 화엄적인 절대긍정의 조망을 적용해 보았다. 모든 곳이 우주이고, 모든 것이 시계이며, 모든 것이 욕심이고, 모든 것이 물질이고, 모든 것이 마음이며 … 모든 것이 살이고 … 모든 것이 미래이다.
그런데 여기서 논의를 한 단계 더 진전시키면 앞의 ?반야심경?에서 노래하듯이 절대부정의 조망 역시 가능하다. 예를 들어 모든 곳이 우주라면 모든 곳에 대해 우주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다[無, 空]. 우주 아닌 것이 있어야, 그것과 대비하여 이곳은 우주라고 명명할 수 있는 법인데 우주 아닌 것이 없기에 우주라는 말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시계라면 이 모든 것에 대해 시계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다[無, 空]. 시계 아닌 것이 있어야 어떤 것을 시계라고 부를 수 있는데, 시계 아닌 것이 없다면 시계라는 말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 모든 것이 마음이라면 모든 것에 대해 마음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다[無, 空]. … 모든 것이 미래라면 미래랄 것도 없다[無, 空]. 이것은 절대긍정의 조망에 의거한 절대부정의 조망으로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것은 우주랄 것도 없고, 시계랄 것도 없고, 욕심이랄 것도 없고 … 현재랄 것도 없고, 미래랄 것도 없다.” 이상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반야의 절대부정 |
세속적 분별 |
화엄의 절대긍정 |
무(無), 공(空) |
우주 |
모든 것(一切) |
무(無), 공(空) |
시계 |
모든 것(一切) |
무(無), 공(空) |
욕심 |
모든 것(一切) |
무(無), 공(空) |
물질 |
모든 것(一切) |
무(無), 공(空) |
마음 |
모든 것(一切) |
무(無), 공(空) |
시작 |
모든 것(一切) |
무(無), 공(空) |
종말 |
모든 것(一切) |
무(無), 공(空) |
살 |
모든 것(一切) |
무(無), 공(空) |
과거 |
모든 것(一切) |
무(無), 공(空) |
현재 |
모든 것(一切) |
무(無), 공(空) |
미래 |
모든 것(一切) |
우리 생각의 토대가 되는 몇 가지 개념들을 예를 들어서 그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해 보았지만,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들은 ‘체험의 세계’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반야적인 절대부정의 조망에서는 모든 것은 실재하지 않으며 공하지만, 화엄의 절대긍정의 조망에서는 모든 개념들 하나하나가 모든 것에 적용 가능하다. 그런데 선승(禪僧)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조망을 토로한다. 선승들의 수행 소재인 화두(話頭)로도 사용되는 선문답의 경지이다. 이에 대해 논리적으로 해명해 보자. 다음과 같은 간단한 증명식은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될 것이다.
A = C
B = C
∴ A = B
여기서 보듯이 만일 A가 C이고, B도 C라면 A는 B일 것이다. 이런 간단한 증명식을 위의 표에 정리된 화엄과 반야의 조망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주가 모든 것이고, 시계가 모든 것이며, 욕심이 모든 것이고 … 미래가 모든 것이라면, 우주가 시계이고 시계가 욕심이며 욕심이 물질이고 … 살이 과거이고 … 현재가 미래이다.” 언어와 생각이 모두 무너져 있다. 이는 앞에서 소개했던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 마른 똥 막대기다!”,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오신 목적은? → 뜰 앞의 잣[측백]나무다!”라는 파격적 선문답과 다를 게 없다. 분석의 끝에서 생각의 궁극에서 우리는 이러한 파격과 만난다. 이 때 “바다 밑 제비 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에 물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라는 효봉 스님의 오도송이 마음에 와 닿는다.
노자 ?도덕경?에서 가르치는 ‘위도일손(為道日損: 도를 닦으면 나날이 줄어든다)’의 궁극이다. 덜어내고 덜어내어 도달하는 궁극인 ‘무위(無為)’의 경지이고(損之又損,以至於無為) 불교에서 가르치는 인지의 궁극이다. 인식의 끝이다. 존재의 끝이다. 인식의 죽음이다.
7. 죽었다가 살아나기
인식의 끝, 존재의 끝, 인식의 죽음 …. 절망이고 절멸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생각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나는 누구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죽음이란 무엇일까?”, “우주란 무엇일까?”, “세상은 누가 창조했을까?”, “내생은 있는가?” … 등등, 모든 종교적 철학적 의문들은 우리의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지금까지 분석해 보았듯이 우리의 생각은 실재와 무관하게 작동한다. 우리에게 떠오르는 종교적 철학적 의문들은 ‘나’, ‘삶’, ‘죽음’, ‘우주’, ‘세상’, ‘창조’, ‘내생’ 등과 같은 개념들을 조합하여 만든 허구의 의문들이다. 생각의 속임수다. 반야학을 통해 절대부정의 통찰을 체득하고 화엄학을 통해 절대긍정의 통찰을 체득할 경우 더 이상 생각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으로 깨달음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인식의 끝, 인식의 죽음은 반쪽짜리 열반이고 반쪽짜리 해탈일 뿐이다. 아직 ‘감성’의 문제가 남아 있다. ‘정서’의 문제가 남아 있다. 감성과 정서 모두, ‘정신’이 아니라 ‘육체’의 문제다. 식욕, 성욕, 재물욕, 명예욕, 교만, 분노, 질투, 원한 등등 감성의 찌꺼기가 아직 남아 있는 이상, 반야와 화엄의 파격을 통해 ‘깨달음의 희열’이 아니라, ‘해체의 절망’만 느껴질 수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가(禪家)의 전통에서는 “견성 후에 습기(習氣)를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습기는 습관이고, 버릇이고, 감성적 경향이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줄이고 줄여야[또는 덜어내고 덜어내야](損之又損) 할 것은 우리의 고정관념뿐만이 아니다. 재물욕, 명예욕, 성욕, 식욕과 같은 욕망, 분노, 질투, 교만 등 우리의 감성도 모두 덜어내고 덜어내야 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해 맺혔던 한(恨)이 다 풀어질 때, 인지적 해체와 감성적 해체가 함께하는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인지와 감성이 모두 해체된 수행자에게는 “죽어도 좋아!”라는 확신이 생긴다. 지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다. 이 세상에 대해 미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성자를 ‘아라한(阿羅漢: Arhat)’이라고 부른다. 아라한은 ‘응당 공양할만한 분’, ‘번뇌의 적을 죽인 분’이란 뜻이다.
그러나 수행자가 감성의 정화 없이 인지(認知)의 해체에서 멈출 때 ‘모든 가치판단이 상실된 폐인’이 될 수 있다. 선(善)과 악(惡)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났다는 자만심에서 악을 행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공에 대해 전문적으로 해명하는 ?중론(中論)?에서는 이런 수행자의 인생관을 공견(空見: 공의 세계관)이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공(空)이란 모든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부처님들께서 가르치셨다.
그러나 공견(空見)을 갖는 자는 구제불능이라고 말씀하셨다. (?중론?, 제13장 제8게)
공은 이념(Ideology)가 아니다. 공은 우리의 생각을 해체하는 테크닉이다. 의식적이든 은연중에든 우리가 갖고 있던 모든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도구다. 그런데 공의 가르침을 추구하는 많은 수행자는 공을 이념으로 오해한다. 공을 하나의 이념으로 삼을 경우, 모든 가치판단이 상실된다. 공의 세척을 거칠 경우 선과 악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지고, 중생과 부처, 윤회와 열반과 같은 불교 교의에 대한 고정관념조차 사라진다. 올바른 수행자는 과거의 고정관념이 사라진 것으로 만족하지만, 잘못된 수행자는 고정관념이 사라진 상태에 대해 다시 새로운 고정관념을 갖는다. ‘고정관념이 사라진 상태에 대해 다시 새로운 고정관념을 갖는 것’이 바로 공견(空見)이다. 공(空)을 세계관[見]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불전에서는 공견을 ‘악취공(惡取空: 공을 잘못 포착함)’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낙공(落空: 공에 떨어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견에 붙들린 수행자는 나락과 같은 절망의 삶을 살게 된다. 가치판단을 상실한 폐인과 같이 살아간다. 공견의 증상은 ‘막행막식’이다. 가리지 않고 행동하고 가리지 않고 먹고 마시는 무애행(無碍行)이 공견의 증상이다.
과거 동아시아나 티벳의 불교계에 처음 공사상이 전해졌을 때 이렇게 공견에 빠진 수행자가 많이 나타났지만, 시야를 넓혀 보면 근대 이후 지금까지 서구의 철학자, 문인, 예술가들 중에도 공견에 빠진 삶의 모습을 보인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공이란 이성적 추구의 극한에서 발견된다. 이성적 추구의 극한에서는 모든 이론이나 세계관이 해체되는 법이다. 불교의 공사상은 서양철학의 해체주의에 대비된다. 이성(理性)의 극한을 추구했지만 감성을 다스리는 수행의 문화가 없었기에, 서구의 많은 문화인들이 결국 공의 나락에 떨어진 것이다. 서구 문화를 그대로 수입하여 추종하고 흉내 내고 있는 우리 문화계의 경우도 이는 마찬가지다. 예술가라면 무언가 행동이 특이해야 하고, 문인(文人)이라면 두주불사(斗酒不辭)해야 한다는 ‘통념’이 널리 퍼져 있다는 점에서 우리 문화계에 ‘공견’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공의 진리를 체득하여 선과 악을 초월한 경지는 ‘악을 행하고도 그 잘못을 무시하는 뻔뻔함’이 아니라, ‘너무나 선(善)하기에 선하게 살겠다는 생각조차 내지 않는 순수함’이다. 예를 들어, 공자(孔子) 나이 칠십이 되어 겨우 체득했다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마음에서 내키는 바가 세속의 잣대를 넘지 않는다)’의 경지가 선악을 초월한 경지이다. 너무나 선하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그 어떤 생각이 떠올라도 그것이 세속의 윤리에 어긋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인류의 대성인 공자님이 나이 칠십이 되어서야 겨우 체득한 것이 ‘선과 악을 초월한 경지’인 것이다. 그 분의 인격 전체가 절대선(絶對善)이 되었기에 선과 악을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이 칠십의 공자님은 “차카게 살자!”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공을 체득한 사람의 베풂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베풂’이다. ‘내’가 베풀었다는 생각도 없고, 누구를 ‘도왔다’는 생각도 없다. ?금강경?에서는 이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명명한다. ‘티[相]가 나지 않는 베풂’이라는 뜻이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오른 손이 한 일을 오른 손도 모르게 하는 베풂’이다. 내가 베풀고도 나 스스로에게도 베풀었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열반경?에서는 ‘어머니가 다친 자식을 치료하고 돕는 것’을 이러한 베풂의 예로 든다. 다친 자식을 도운 어머니에게 “내가 자식에게 베풀었다.”는 생각이 떠오를 리가 없다. 베풀고 나서 느껴지는 ‘뿌듯함’이나 ‘흐뭇함’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베푼 후에도 조바심만 나고 슬플 뿐이다. 이러한 베풂이 ‘나도 모르는 베풂’이고 ‘무주상보시’이며 ‘오른 손이 한 일을 오른 손도 모르는 베풂’이다.
?중론?에서는 공의 위험성에 대해 다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잘못 파악된 공(空)은 지혜가 열등한 자를 파괴한다.
마치 잘못 잡은 뱀이나 잘못 행한 주술(呪術)과 같이. (?중론?, 제24장 제11게))
독사를 잡을 때 목을 틀어잡아야 하는데 꼬리를 잡을 경우 독사에게 물려 사망하고 만다. 공도 이와 마찬가지다. 오해하여 공견을 가질 바에는 아예 습득하지 않는 것이 낫다. 공은 마치 주문(呪文)과 같다. 잘 암송할 경우 질병도 고치고 부귀영화도 얻지만,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에서 보듯이 잘못 암송할 경우 패가망신하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의 불교계도 그랬지만 현재 우리 사회는 물론이고, 전 세계의 문화계에 이러한 공견이 너무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 갖추고 있는 두 가지 앎, 즉 ‘인지(認知)’와 ‘감성(感性)’ 가운데 인지만 해체되고 감성은 해체되지 않은 상태가 바로 ‘공견’의 상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공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해체의 나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신의 거친 감성을 다스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윤리, 도덕적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재물욕, 명예욕, 권력욕, 음욕, 식욕 등 세속적 욕망을 통제하고, 분노와 질투와 교만 등 거친 감성을 제어하면서 항상 고결하게 생활하고 항상 남을 도우며 살아갈 때, ‘공의 나락에 떨어져 가치판단을 상실했던 수행자’는 서서히 되살아난다. ‘세속적 복덕(福德)’의 힘으로 소생(蘇生)하는 것이다. 기사회생(起死回生)하는 것이다.
8. 해체 이후의 적극적 삶 - 이타(利他)와 분별
공의 나락에 떨어졌다가 소생한 수행자는 ‘공의 인지(認知)’를 체득했기에 ‘삶과 죽음’의 번민에서 벗어나 있고 ‘복덕의 감성’이 함께하기에 ‘티 나지 않는 베풂’과 ‘선악을 초월한 절대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불전에서는 그런 인격체를 대심범부(大心凡夫), 보살마하살이라고 부른다. 인지든, 감성이든 나에게 고통이 없기에, 그를 움직이는 동인(動因)은 자신의 감성이 아니라 남의 고통이다. 대자비(大慈悲)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또 절대부정의 반야와 절대긍정의 화엄을 통해 무한해체의 조망, 공(空)의 조망을 체득하긴 했으나 그러한 조망은 현실 속에서 반드시 하나의 분별로 나타난다. 절묘한 분별로 나타난다. 매 상황 속에서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가르는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나타난다. 불교용어로 이를 묘관찰지(妙觀察智)라고 부른다. ‘절묘하게 관찰하는 지혜’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지금 자판을 두드리는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는 ‘필자’로 생각된다. 그러나 내가 항상 필자인 것은 아니다. 학생들에게는 ‘선생’이고, 아들에게는 ‘아버지’이고, 부인에게는 ‘남편’이고, 조카에게는 ‘삼촌’이고, 길 위의 행인에게는 ‘아저씨’이고, 아프리카 밀림의 배고픈 사자에게는 기름진 ‘음식’이고, 바퀴벌레에게는 무서운 ‘괴물’이다. … 지금 나열한 ‘필자, 선생, 아버지, 남편, 삼촌, 아저씨, 음식, 괴물 …’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나의 원래 이름이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이 나의 이름이 될 수가 있다. “그 어떤 것도 나의 원래 이름이 아니다[空, 無].”라는 조망은 반야적인 절대부정의 조망이고, “그 모든 것이 나의 이름이 될 수가 있다[一卽一切].”는 조망은 화엄적인 절대긍정의 조망이다.
그런데 이렇게 절대부정과 절대긍정의 조망이 나의 진상이긴 하지만, ‘학생’ 앞에 서게 되면 나는 아버지도 아니고, 필자도 아니고 반드시 ‘선생’이 되고, ‘아들’ 앞에 서면 ‘아버지’가 된다. 마치 긴 것과 비교하여 짧은 것이 있듯이, 학생과 마주대할 때에는 선생이 되고, 아들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매 상황 속에서 나의 정체가 연기(緣起)하는 것이다. 반야의 절대부정이나 화엄의 절대긍정과 같은 무차별의 조망은 결코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무차별이 아니라 차별의 세계이다. 심지어 ‘공’이라는 말도 현실에서는 하나의 분별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분별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공(空)의 진리를 체득한 보살마하살은 무분별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절묘한 분별을 내어 현실을 재단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깨달음에서는 분별적 인지(認知)와 애증의 감성(感性) 모두를 해체하지만,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모습은 ‘이타(利他)의 감성’과 ‘절묘한 분별’이다. 이를 ‘자비’와 ‘지혜’라고 부른다.
[출처] 깨달음이란? - 인지와 감성의 해체- 동국대(경주) 불교학과 김성철|작성자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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