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라집(鳩摩羅什) 傳
구마라집(鳩摩羅什)은 중국말로 동수(童壽)라 하며 천축국(天竺國)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구마라집의 조부(祖父) 구마달다(鳩摩達多)는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남에게 구속받지 않았다. 무리 가운데 매우 뛰어나 명성이 나라 안에 높았다. 아버지 구마염(鳩摩炎)은 총명하고도 아름다운 지조가 있었다. 곧 재상의 지위를 이으려고 할 즈음에 사양하고 출가하여 동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구자국(龜玆國) 왕은 그가 영화로움을 버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를 매우 존경하고 사모하여 몸소 교외(郊外)에 나가 영접하고, 청하여 그를 국사(國師)로 삼았다.
구자국왕에게는 누이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갓 스무 살이었다. 사려 깊고 이치를 잘 알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눈을 거쳐 간 것은 능숙하게 하고, 한 번 들은 것은 듣자마자 곧 외웠다. 또 몸에 붉은 사마귀가 있었다. 관상법에 의하면 슬기로운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다. 여러 나라에서 그녀에게 장가를 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곳이든 가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구마염(鳩摩炎)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하였다.
구자국왕은 구마염을 핍박하여 그녀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후 구마라집을 잉태하였다. 구마라집이 뱃속에 있을 때의 일이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신통한 깨달음과 빼어난 이해력이 평소의 배나 더하는 것을 자각하였다. 작리대사(雀梨大寺)에 뛰어난 승려들이 많은데다, 도를 깨달은 승려가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다. 곧 왕실의 귀부인들과 덕행이 있는 여러 비구니들과 함께, 여러 날 동안 공양을 베풀고 재를 청하여 법문을 들었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갑자기 저절로 천축어(天竺語)에 능통하게 되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도 반드시 깊은 이치를 끝까지 다 궁구해 내니, 대중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그 곳에 달마구사(達摩瞿沙)라는 아라한이 있어 말하였다. “이것은 필시 슬기로운 자식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리불(舍利佛)이 뱃속에 있을 때의 증험(證驗)을 설법하였다. 구마라집이 출생한 뒤에 그녀는 곧 예전의 천축어를 도로 잊어버렸다. 얼마 후 구마라집의 모친은 즐거이 출가하기를 원하였다. 남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다시 아들 하나를 더 낳았다. 불사제바(弗沙提婆)라고 불렀다. 뒤에 성(城)을 나가 돌아다니면서 구경하였다. 무덤 사이에 마른 해골이 여기저기 흩어져 굴러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에 괴로움의 근본을 깊이 사유(思惟)하여 출가하기로 결심하였다. 만약 머리를 깎지 못한다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엿샛날 밤에 이르자 기력이 실낱같이 쇠약해졌다. 자칫하면 다음 날 아침까지도 이르지 못할 듯했다. 이에 남편이 두려워 출가를 허락하였다. 그녀는 아직 삭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전히 음식을 먹지 않았다. 즉시 사람을 시켜 삭발을 해 주니 그제야 음식을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계(戒)를 받았다. 선법(禪法)을 좋아하여 애오라지 정진하고 나태하지 않아, 초과(初果)를 배워 터
득했다.
구마라집도 나이 일곱 살에 어머니와 함께 출가하여 스승에게 불경을 배웠다. 하루에 천 개의 게송을 암송하였다. 한 개의 게송이 32자이니, 모두 3만 2천 글자인 셈이다. 비담(毘曇)을 암송한 뒤에, 스승이 그 뜻을 전수하였다. 즉시 통달하여 그윽한 이치를 펴지 않음이 없었다.
당시 구자국 사람들은 구마라집의 어머니를 왕의 누이로서 대우하였다. 이 때문에 재물로서 공양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 이를 피하여 구마라집을 이끌고 떠났다. 구마라집의 나이 아홉 살에 어머니를 따라 신두하(辛頭河)를 건너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렀다. 이름난 덕을 지닌 법사인 반두달다(槃頭達多)를 만나니,
바로 계빈왕(罽賓王)의 사촌 아우이다. 깊고 순수하여 큰 기량이 있었다. 재주가 있고 총명한데다 아는 것이 넓어 당시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삼장(三藏)과 구부(九部)를 해박하게 익히지 않음이 없었다. 아침부터 낮까지는 손수 천 개의 게송을 쓰고, 낮부터 밤까지는 천 개의 게송을 외웠다. 이름이 여러 나라에 퍼져서 멀거나 가깝거나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구마라집은 계빈국에 이르러 곧 그를 스승의 예로써 존숭하였다. 그에게서 『잡장(雜藏)』·『중아함경(中阿含經)』·『장아함경(長阿含經)』 4백만 글자를 배웠다. 반두달다(槃頭達多)가 매양 구마라집의 신통함과 빼어남을 칭찬하자, 마침내 명성이 왕에게까지 전해졌다. 왕은 즉시 구마라집을 궁중으로 초청하여, 외도의 논사들을 모아 놓고 서로 공격하여 힐난하게 하였다. 논쟁이 처음 벌어질 때에, 외도들은 구마라집의 나이가 어리다고 깔보아 말투가 자못 불손하였다. 구마라집이 틈을 타 기세를 꺾었다. 외도들이 기가 죽어 부끄러워 말을 못했다. 왕은 더욱 공경하고 특별히 대우하여, 날마다 말린 거위고기 한 쌍, 멥쌀과 밀가루 각각 세 말, 소(酥) 여섯 되를 주었다. 이것은 외국(外國)에서는 상등(上等) 공양에 해당한다.
구마라집이 머물던 사찰의 주지도 이에 비구 다섯 명과 사미 열 명을 보냈다. 비로 쓸고 물 뿌리는 일을 맡겨, 구마라집의 제자같이 하게 하였다. 그를 존경하여 숭배함이 이와 같았다. 나이 열두 살이 되자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끌고 구자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러 나라에서 높은 벼슬로 그를 초빙하였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월지국(月氏國)의 북쪽 산에 이르렀다.
그 산에는 한 나한(羅漢)이 있었다. 나한은 구마라집을 보자 남달리 여겨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항상 이 사미를 지켜 보호해야만 한다. 나이 서른다섯 살이 될 때까지 계율을 깨뜨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키고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이 우바굴다(優婆掘多)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계율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면 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재주가 밝고 슬기가 찌르는 법사(法師)가 될 뿐일 것이다.”
구마라집이 나아가 사륵국(沙勒國)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우를 이마로 모셨다. 마음속으로 ‘발우의 형태는 굉장히 큰데 어찌 이리도 가벼울까?’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무거워졌다. 감당할 수가 없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곧 발우를 내려놓고 말았다.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었다. “어린 제 마음에 분별(分別)함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발우에 가벼움과 무거움이 깃들었을 따름입니다.”
마침내 사륵국에 일년 간 머물렀다. 그 해 겨울 아비담(阿毘曇)을 암송하였다. 「십문품(十門品)」과 「수지품(修智品)」 등 여러 품에 대해 묻고 배운 것이 없었지만, 두루 그 절묘함을 통달하였다. 또 『육족론(六足論)』에 관한 모든 물음에 대해서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었다.
사륵국에 희견(喜見)이라는 삼장(三藏) 사문이 있었다. 그는 왕에게 말하였다. “이 사미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왕께서는 이 사미를 청하여 최초로 설법의 문을 열도록 하셔야 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첫째, 온 나라 안의 사문들이 구마라집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힘써 공부하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둘째, 구자국 왕은 필시 ‘구마라집이 우리나라 출신인데, 저들이 구마라집을 존경한다는 것은 곧 우리나라를 존경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와서 우호를 교환할 것입니다.”
왕은 곧 그것을 허락하였다. 즉시 큰 모임을 베풀었다. 구마라집을 청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 『전법륜경(轉法輪經)』을 강설하도록 하였다. 과연 구자국왕은 지위가 높은 사신을 파견하여 두터운 우호에 보답하였다.
구마라집은 설법하는 여가에 외도의 경전들을 탐색하였다. 『위타함다론(圍陀含多論, vedasastra)』을 잘 익혀서, 글을 짓고 묻고 답하는 따위의 일에 매우 밝았다. 또 사위타(四圍陀)의 전적들과 5명(明)의 여러 논(論)들을 널리 읽었다. 음양·성산(星算: 天文曆數)까지 모두 다 극진히 연구하여 길흉에도 미묘하게 통달하였다. 그의 예언은 부절(符節)을 합한 것과 같이 딱 들어맞았다. 성품이 소탈하고 활달하여 자잘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으니, 수행자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자연스런 마음으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당시 사거왕자(莎車王子)와 참군왕자(參軍王子), 형제 두 사람이 나라를 버리고 사문이 되었다. 형은 자를 수리야발타(須利耶跋陀)라 하고, 아우는 자를 수리야소마(須利耶蘇摩)라고 하였다. 수리야소마는 재주와 기량이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오로지 대승으로써 교화하였다. 그의 형과 여러 학자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구마라집도 역시 수리야소마를 존숭하고 받들었다. 가까이 하여 좋아함이 더욱 지극하였다. 수리야소마는 뒤에 구마라집을 위하여 『아뇩달경(阿耨達經)』을 설해 주었다. 구마라집은 스승에게서 “음(陰)·계(界)·제입(諸入)은 모두 공(空)하고 무상(無相)하다”는 설법을 들었다. 괴이쩍게 여겨 질문하였다.
“이 경에는 다시 무슨 뜻[義]이 있기에, 모든 현상을 있는 족족 모두 파괴해 버립니까?”
수리야소마는 답하였다.
“안(眼) 등의 모든 현상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구마라집은 이미 ‘안근(眼根)이 존재한다’고 집착하였다.
수리야소마는 ‘인과로써 이루어진 것일 뿐 실체는 없다’는 데에 의거하였다.
이 때문에 대승과 소승을 깊이 궁구하여 밝혀, 서로 주고받는 문답이 오랜 시일 동안 계속되었다.
구마라집이 비로소 이치의 돌아감을 알고는 마침내 오로지 대승 경전을 힘써 공부하였다. 이에 탄식하였다.
“내가 옛날에 소승(小乘)을 배운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황금을 알지 못한 채 놋쇠를 가지고 가장 훌륭한 것으로 여긴 것과 같구나.”
그러고는 대승에서 중요한 것들을 널리 구하여, 『중론(中論)』·『백론(百論)』 두 논과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을 외웠다.
얼마 후 어머니를 따라 나아가 온숙국(溫宿國)에 이르렀다. 바로 구자국의 북쪽 경계였다. 당시 온숙국에는 한 도사(道士)가 있었다. 신묘한 말솜씨가 빼어나서 명성을 여러 나라에 떨쳤다.
그는 제 손으로 왕의 큰 북을 치면서 스스로 맹세하여 말하였다.
“논쟁으로 나를 이기는 자가 있으면 내 목을 잘라서 사죄하겠다.”
구마라집이 이른 뒤에 둘이 서로 다른 논쟁을 벌여 따졌다. 도사는 헷갈리고 얼이 빠져 불교에 머리를 조아리고 귀의하였다. 이리하여 구마라집의 명성이 파미르 고원 동쪽에 가득하였다. 명예가 황하[중국] 밖에서는 널리 퍼졌다.
구자국왕은 몸소 온숙국까지 가서 구마라집을 맞이하여 구자국으로 돌아왔다. 널리 여러 경들을 강설하니, 사방의 먼 지방에서 존숭하고 우러러 아무도 그를 대항할 자가 없었다.
그 당시 한 왕녀(王女)가 비구니가 되었다. 자를 아갈야말제(阿軻耶末帝)라고 한다. 그 비구니는 많은 경전들을 널리 보았다. 특히 선(禪)의 크나큰 요체를 깊이 알았으며, 이미 2과(果: 사다함과)를 증득했다고 하였다. 그 비구니는 구마라집의 법문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이에 다시 큰 모임을 마련하고, 대승 경전의 심오한 이치를 열어줄 것을 청하였다.
구마라집은 이 법회에서 모든 현상이 다 공하여 내가 없음[皆空無我]을 미루어 변론하였다. 음(陰)이나 계(界)는 임시 빌려 쓴 이름이지 실제가 아님[假名非實]을 분별하였다. 당시 모인 청중들이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여 슬프게 느끼며, 깨달음이 뒤늦었음을 한탄해 마지않았다.
구라마집의 나이 스무 살에 이르자 왕궁에서 구족계를 받고, 비마라차(卑摩羅叉)에게 『십송률(十誦律)』을 배웠다. 얼마 후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구자국을 하직하고 천축국(天竺國)으로 갔다. 구자국왕 백순(白純)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나라는 얼마 안 되어 쇠망할 것입니다. 나는 이곳을 떠납니다. 천축국에 가서 3과(果: 아나함과)를 증득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이별에 임하여 구마라집에게 말하였다.
“대승 경전의 심오한 가르침을 중국에 널리 떨치도록 하여라. 그것을 동쪽 땅에 전하는 것은 오직 너의 힘에 달려 있을 뿐이다. 다만 너 자신에게만은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니, 어찌 하겠니?”
구마라집은 대답하였다.
“부처님의 도리는 중생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몸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반드시 불법의 큰 교화를 널리 퍼뜨려 몽매한 세속을 깨닫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는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구마라집은 구자국에 체류하여 신사(新寺)에 거주하였다. 후에 절 곁의 오래된 궁중에서 최초로 방광경(放光經)』을 얻었다. 즉시 책장을 펼쳐서 읽으려고 할 때에, 마라(魔羅, Mara)가 와서 경문을 가렸으므로 종이만 보일 뿐이었다. 구마라집은 이것이 마라의 소행인 줄 알고는, 서원하는 마음을 더욱 견고히 하자 마라가 사라지고 글자가 나타났다. 인하여 『방광경』을 익히고 암송하였다.
다시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어째서 이러한 것을 읽는 것인가?”
구마라집이 대답하였다.
“너는 바로 작은 마라이다. 속히 떠나라.
나의 마음은 대지와 같아 굴러가게 할 수 없다.”
구자국의 신사(新寺)에 머무른 2년 동안 널리 대승의 경론들을 외우며, 그 비밀스럽고 심오한 뜻을 꿰뚫었다.
구자왕은 구마라집을 위하여 금사자(金師子)의 법좌(法座)를 만들었다. 중국의 비단으로 자리를 깔아, 구마라집으로 하여금 법좌에 올라 설법하도록 하였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저의 스승님도 대승을 깨치지 못했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가 스승님께 교화를 하고자 합니다. 이 곳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스승인 반두달다(槃頭達多)가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구자국에 이르렀다. 왕이 말하였다.
“대사께서는 어찌 이리도 먼 길을 방문하셨습니까?”
반두달다가 대답하였다.
“첫째는 제자 구마라집의 깨달음이 범상(凡常)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둘째는 대왕께서 불도(佛道)를 널리 편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신령스런 나라로 달려온 것입니다.”
구마라집은 스승의 방문으로 인해 본디부터 품던 회포를 풀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덕녀문경(德女問經)』을 설법하여 모든 현상이 대부분 인연(因緣)·공(空)·가(假) 임을 밝혔다. 예전에 스승과 함께 모두 믿지 못하던 것이기 때문에 우선 그것을 강설한 것이다.
스승은 구마라집에게 말하였다.
“너는 대승에 대하여 무슨 특별한 현상을 보았기에 그렇게도 숭상하려고 하는가?”
구마라집이 대답하였다.
“대승은 심오하고도 맑아, 모든 존재하는 현상이 모두가 공(空)하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러나 소승은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쳐서 구분하여, 여러 가지 빠뜨려 잃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스승이 말하였다.
“네가 말한 ‘모든 것은 다 공하다[一切皆空]’는 것은 심히 두려워할 만하구나. 어떻게 유법(有法)을 버리고 공(空)을 좋아할 수 있단 말이냐. 꼭 그 옛날 미치광이와 같구나. 그 미치광이가 실을 잣는 이에게, 실을 잣되 최대한으로 가늘면서도 보기 좋게 해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실 잣는 이가 정성을 기울여 먼지처럼 가늘게 실을 자았다. 미치광이는 그것도 오히려 굵다고 원망하였다. 실 잣는 이는 크게 노하여 허공을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가는 실입니다.’라고 하니, 미치광이는 ‘그렇다면 왜 보이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실 잣는 이는 ‘이 실은 너무 가늘어 우리 중의 솜씨 좋은 장인(匠人)조차 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미치광이는 크게 기뻐하였다. 보이지 않는 그 실로 베를 짜 달라고 베 짜는 이에게 부탁하였다. 베 짜는 이도 역시 실 잣는 이를 그대로 흉내 내었다. 그들은 모두 많은 상(賞)을 받았지만, 그러나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너의 현상이 공하다는 것도 역시 이것과 같구나.”
그러나 구마라집은 계속해서 비슷한 것끼리 연관지어[連類] 진술하였다.
서로 문답을 주고받은 지 한달 남짓 지나자, 스승이 마침내 믿고 받아들였다.
스승은 감탄하여 말하였다.
“ ‘스승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것을 도리어 제자가 그 뜻을 열어 준다’고 하는 것을 바로 여기에서 증험하는구나.”
이에 스승은 구마라집에게 스승의 예를 올리고 말하였다.
“화상(和上)은 바로 나의 대승의 스승이고, 나는 화상의 소승의 스승이오.”
서역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구마라집의 신통함과 빼어남에 엎드려 복종했다. 매년 강설할 때에는 왕들이 법좌 옆에 꿇어 엎드렸다. 구마라집으로 하여금 그 위를 밟고 오르게 하니, 그를 소중히 대우함이 이와 같았다.
이미 구마라집의 도는 서역에 퍼지고, 그의 명성은 동쪽 황하에까지 미쳤다. 그 당시 부견(符堅)이 관중(關中)에서 외람되이 천자라고 일컬었다[僭稱]. 외국(外國)의 전부왕(前部王)과 구자왕(龜玆王)의 동생이 모두 와서 부견에게 조회하였다. 부견이 두 왕을 알현하였다. 이 두 왕이 부견에게 진언하였다.
“서역에는 진기한 물건들이 많이 산출됩니다. 청컨대 군사를 이끌고 가 평정하여 속국이 되기를 요구하십시오.”
부견의 건원 13년(377) 정축년 정월에 태사(太史)가 아뢰었다.
“어떤 별이 외국의 분야(分野)에 나타났습니다. 덕이 높은 슬기로운 사람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보좌할 것입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짐이 들으니, 서역에는 구마라집이 있고, 양양(襄陽)에는 사문 석도안(釋道安)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들이 아니겠는가?”
즉시 사신을 파견하여 그들을 찾았다. 17년 2월에, 선선왕(鄯善王)과 전부왕(前部王) 등이 또다시 부견에게 군사를 청하여 서역을 정벌하자고 달래었다. 건원 18년(382) 9월, 부견은 효기장군(驍騎將軍) 여광(呂光)과 능강장군(陵江將軍) 강비(姜飛)를 파견하였다. 전부왕(前部王)과 거사왕(車師王) 등을 거느리고
군사 7만 명을 이끌어서 서쪽으로 갔다. 구자국(龜玆國)과 언기국(焉耆國) 등 여러 나라를 정벌하였다.
출발에 임하여 부견은 여광을 건장궁(建章宮)에서 전별하면서 여광에게 말하였다.
“대저 제왕은 천명에 응하여 다스리고 창생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어찌 그 땅을 탐하여 정벌하는 것이겠는가. 바로 도의를 품는 사람[懷道] 때문에 정벌하는 것이다. 짐은 들으니, 서역에는 구마라집이라는 이가 있어 불법을 깊이 이해하고 음양을 익숙히 잘 알아 후학들의 으뜸이 된다고 한다. 짐이 깊이 생각하건대 어질고 밝은이들은 나라의 큰 보배이다. 만약 구자국을 정복하거든 곧바로 역말을 급히 달려 구마라집을 후송하라.”
여광의 군대가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에 구마라집은 구자왕 백순에게 진언했다.
“구자국의 국운은 쇠하였습니다. 반드시 강한 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해 뜨는 곳의 사람들이 동방으로부터 오면 삼가 공손히 받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칼날에 대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백순은 구마라집의 진언에 따르지 않고 전쟁을 하였다. 마침내 여광이 구자국을 격파하여 백순을 죽이고, 백순의 동생 백진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여광은 구마라집을 사로잡은 뒤, 아직 그의 지혜와 국량을 측량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나이가 어린 것만 보고 곧 평범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를 희롱하여 강제로 구자국의 왕녀를 아내 삼도록 하였다. 구마라집은 버티며 수락하지 않았으나, 사양하면 할수록 더욱더 괴롭혔다.
여광이 말하였다.
“도사의 지조라고 해봤자 당신 아버지보다 나을 것이 없지 않은가. 어찌 그리도 한사코 사양하는 것인가?”
구마라집에게 독한 술을 마시게 하고, 여자와 함께 밀실에 가둬 버렸다. 구마라집은 핍박을 당하는 것이 이미 지극하므로 마침내 그 절개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여광은 또 구마라집을 소에 태우기도 하고, 사나운 말에 태워 떨어뜨리기도 하였다. 구마라집은 항상 인욕의 마음을 품어 일찍이 안색이 달라지는 일조차 없었다. 여광은 부끄러워 그만두었다. 여광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도중에 군사를 산 밑에 주둔시켰다.
장졸들이 이미 휴식하자, 구마라집이 진언하였다.
“이 곳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낭패를 당할 것입니다. 군사를 언덕 위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여광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밤이 되자 과연 큰비가 내려 갑자기 홍수가 났다. 수심이 몇 길이나 되고,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여광은 그제야 그를 비밀스럽고 남다르게 여겼다.
구마라집은 여광에게 진언하였다.
“이 곳은 흉망한 땅이므로 모름지기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돌아올 운수를 미루어 짐작하건대 마땅히 속히 돌아가야만 합니다. 중도에 반드시 머무를 만한 복된 땅이 있을 것입니다.”
여광은 구마라집의 진언을 따랐다.
양주(凉州)에 이르러 부견이 요장(姚萇)에게 시해 당했다는 것을 들었다. 여광의 삼군(三軍)은 상복을 입고 양주성 남쪽에서 크게 곡하였다. 이리하여 여광은 관외(關外)에서 참칭(僭稱)하고, 연호를 태안(太安)이라 칭하였다. 태안 원년(385) 정월, 고장(姑臧)에 큰바람이 불었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상서롭지 못한 바람입니다. 반드시 간특한 반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평정될 것입니다.”
갑자기 양겸과 팽황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으나, 얼마 안 있어 모두 죽어 사라졌다. 여광의 용비(龍飛) 2년(396)에, 장액(張掖) 임송(臨松)의 노수호(盧水湖)에서 저거남성과 사촌아우 저거몽손이 모반하여, 건강 태수(建康太守) 단업(段業)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여광은 서자(庶子)인 진주자사(秦州刺史) 태원공(太原公) 여찬(呂纂)을 파견하여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논하였다.
“단업 등은 까마귀떼처럼 규율이 없고, 여찬에게는 위세와 명망이 있으므로, 형세로 보아 반드시 이길 것이다.”
여광이 구마라집에게 상의하니,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이번 출행을 관찰해 보건대 아직 그 이로움을 발견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여찬은 합리(合梨)에서 크게 패하였다. 갑자기 또 곽형(郭馨)이 난리를 일으켰다. 여찬은 대군을 내버리고 몇몇 군사들만을 데리고 귀환하다가, 다시 곽형에게 패배 당하였다. 겨우 자신의 몸만 벗어날 수 있었다.
여광의 중서감(中書監) 장자(張資)는 문필(文筆)이 있고 온화하며 아담하였다. 여광은 그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장자가 병이 들자, 여광은 널리 병을 낫게 할 훌륭한 의사를 구하였다. 외국의 도인 라차(羅叉)가 말하였다.
“장자(張資)의 병을 낫게 할 수 있습니다.”
여광은 기뻐하여 그에게 매우 많은 금품을 하사하였다.
구마라집은 라차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았다. 장자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라차의 병은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한갓 번거롭게 재물을 낭비할 뿐입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은 알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구마라집은 오색실로 새끼를 만들어 매듭을 짓고 태워서 잿가루를 물속에 던졌다.
“만약 재가 물에 떠올라도 도로 새끼 모양이라면 병은 나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 재가 모여 물 위에 떠올랐다. 원래의 새끼 형태가 되었다. 이윽고 라차의 치료는 효험이 없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장자는 세상을 떠났다. 얼마 후 여광도 죽었다. 여광의 아들 여소(呂紹)가 왕위를 이었다. 수일이 지나자 여광의 서자 여찬이 여소를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연호를 함녕(咸寧)이라 일컬었다.
함녕 2년(400), 돼지가 머리 셋 달린 새끼를 낳았다. 용이 동쪽 곁채의 우물 속에서 나와 대전 앞에 몸을 서렸으나,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찬은 이것을 아름다운 상서로 여겨 대전을 용상전(龍翔殿)이라 불렀다. 얼마 후 또 검은 용이 당양(當陽)의 구궁문(九宮門)에서 승천했다.
여찬은 이 구궁문을 용흥문(龍興門)이라 개칭하였다.
구마라집이 상주하여 아뢰었다.
“요즈음 물 속에 잠겨 있는 용[潛龍]이 출몰하고 돼지도 괴이한 일을 보입니다. 용은 음한 생물로서 드나드는 일정한 때가[出入有時]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자주 나타나는 것은 재앙이 있을 징조입니다. 반드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모반하는 변괴가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사욕을 극복하고 덕을 닦아, 하늘이 보여주는 타이름에 보답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찬은 구마라집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전에 여찬이 구마라집과 바둑을 두었다. 여찬이 구마라집의 바둑돌을 희롱하며 죽이고 말하였다.
“오랑캐 놈의 머리를 벨 것이다.”
구마라집은 말하였다.
“오랑캐 놈의 머리는 베지 못할 것입니다. 오랑캐 놈이야말로 사람의 머리를 벨 것입니다.”
이 구마라집의 말에는 의미가 담겨 있으나, 여찬은 끝내 깨닫지 못하였다. 여광의 아우 여보(呂保)에게는 여초(如超)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여초의 어렸을 적의 이름이 호노(胡奴)였다. 뒤에 과연 여찬의 목을 베고, 자기 형 여륭(呂隆)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당시 사람들이 비로소 구마라집의 예언을 증험하였다.
구마라집이 양주(凉州)에 체류한 지 수 년이 되었다. 여광 부자가 도를 널리 펴지않는 까닭에,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아 두고도 선양하고 교화할 방법이 없었다. 부견(苻堅)은 이미 세상을 떠나 구마라집과 끝내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요장(姚萇)이 관중(關中)을 참칭하고 소유하였다. 그도 역시 구마라집의 높은 명성을 듣고, 마음을 비워서 오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여러 여씨들은 구마라집이 지혜로운 계책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요씨들을 위해 도모할까 두려워하여, 동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요장이 죽고 아들 요흥(姚興)이 자리를 잇자,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정성을 다해 요청하였다. 요흥의 홍시 3년(401) 3월, 궁중의 광정(廣庭)에 연리지(連理枝)가
나고, 소요원(逍遙園)의 파가 변하여 난초가 되었다. 이것을 아름다운 상서로 여겨 슬기로운 사람이 들어올 것이라고 하였다.
5월에 이르러 요흥이 농서공(隴西公) 요석덕(姚碩德)을 파견하여 서쪽으로 여륭을 정벌하게 하였다. 여륭의 군대를 크게 깨뜨리자, 9월에 여륭이 표문을 올리고 항복하였다. 비로소 구마라집을 맞이하여 관중(關中)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 해 12월 20일에 장안(長安)에 도착하였다.
요흥이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여 구마라집은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마주 대하여 이야기하노라면 머무르는 것이 오래 걸려 하루 해가 지나갔다. 미묘한 것을 연구하여 극진한 데까지 나아가니, 한 해를 다 보내도록 싫증나는 줄 몰랐다.
불법이 동방에 전해진 것은 후한 명제(明帝) 때에 비롯되었다. 그로부터 위(魏)와 진(晋) 시대를 경과하면서 경론(經論)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지겸(支謙)과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해 낸 경론들은 대부분 문자에 막혀서, 뜻을 도가의 경전에서 빌려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요흥은 어려서부터 불법승 삼보를 공경하여, 경론을 결집하리라 날카롭게 뜻을 세웠다.
구마라집이 장안에 이른 뒤에 요흥은 그에게 청하였다.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에 들어오게 하여 여러 경전들을 번역해 냈다.
구마라집은 이미 경전들을 거의 다 암송하고, 경문의 뜻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더욱이 중국말에도 빼어나 말소리도 유창하였다. 이전에 번역한 경전들을 살펴보니, 경문의 뜻이 지나치게 잘못된 곳이 많았다. 이전에 먼저 번역한 경전들이 바른 의미를 잃은 이유는 범본(梵本)과 대조하여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요흥은 사문 승략(僧䂮)·승천(僧遷)·법흠(法欽)·도류(道流)·도항(道恒)·도표(道標)·승예(僧叡)·승조(僧肇) 등 8백여 명을 시켜, 구마라집에게 뜻을 묻고 배우게 하여 다시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번역하였다.
구마라집은 범본(梵本)을 가지고, 요흥은 이전에 번역한 경전을 들고, 서로 대조하고 교정하였다. 옛 번역을 새로운 번역어로 바꿔 놓으니, 뜻이 모두 원만하게 소통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마음으로 흡족하여 기뻐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요흥은 불도가 깊고 오묘하며, 그 착함을 실천하여 삼계의 고통을 벗어나는 좋은 나루이자,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칙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요흥은 뜻을 9경(經)에 의탁하고, 마음은 12부(部)에 노닐었다.
『통삼세론(通三世論)』을 지어 인과(因果)의 가르침을 밝혔다. 왕공(王公) 이하 모두가 그의 풍모를 흠모하고 찬탄하였다. 대장군 상산공(常山公) 요현과 좌군장군 안성후(安城侯) 요숭 등은 모두 인연과
업을 독실하게 믿었다. 여러 번 구마라집을 장안 대사(長安大寺)로 청하여 새로 번역한 경전을 강설하였다.
계속해서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십주경(十住經)』·『법화경(法華經)』·『유마힐경(維摩詰經)』·『사익경(思益經)』·『수능엄경(首楞嚴經)』·『지세경(持世經)』·『불장경(佛藏經)』·『보살장경(菩薩藏經)』·『유교경(遺敎經)』·『보리경(菩提經)』·『제법무행경(諸法無行
經)』·『보살가색욕경(菩薩呵色欲經)』·『자재왕경(自在王經)』·『십이인연관경(十二因緣觀經)』·『무량수경(無量壽經)』·『신현겁경(新賢劫經)』·『선경(禪經)』·『선법요(禪法要)』·『선법요해(禪法要解)』·『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십송률(十訟律)』·『십송비구계본(十訟比丘戒本)』·『보살계본(菩薩戒本)』·『대지도론(大智度論)』·『성실론(成實論)』·『십주론(十住論)』·『중론(中論)』·『백론(百論)』·『십이문론(十二門論)』 등 3백 여 권을 번역해냈다.
어느 것이나 모두 신묘한 근원을 환하게 드러내고, 그윽한 이치를 발휘하였다. 당시 사방에서 교리를 공부하는 이들이 만 리를 멀다 하지 않고 모여들었다.
구마라집의 성대한 업적의 위대성은 오늘날까지도 모두 다 우러러보는 바이다. 용광사(龍光寺)의 석도생(釋道生)은 지혜로운 앎이 미묘한 경지에 들어가고, 현묘한 의미를 문자 밖까지 이끌어 내 놓을 정도의 인물이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언어가 본뜻을 어그러뜨릴까 염려하여, 관중(關中)에 들어가 구마라집에게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은 많은 경전들을 배워 꿰뚫었다. 석가 부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펼치는 중요한 임무를 맡은 불교계의 동량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당시는 성인께서 가신 지가 아득히 멀고 오래되어, 의문스러운 내용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 구마라집에게 자문을 구한 내용이 「혜원전(慧遠傳)」에 보인다.
과거에 사문 승예(僧叡)는 재능과 식견이 높고 밝았다. 항상 구마라집을 따라다니며 옮겨 베끼기를 담당하였다. 구마라집은 매양 승예를 위하여 서방의 말투를 논하고, 범어와 한자(漢字)의 같고 다름을 살피고 분별하여 말하였다.
“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대단히 중시한다. 그 오음(五音)의 운율이 현악기와 어울리듯이, 문체와 운율도 아름다워야 한다. 국왕을 알현할 때에는 국왕의 덕을 찬미하는 송(頌)이 있다.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범문(梵文)을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는 것이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장의 양식이 아주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구마라집은 예전에 사문 법화(法和)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준 적이 있었다.
마음 산(山)에서 밝은 덕을 길러
그 향내 일만 유연(由延)까지 퍼지고
오동나무에 외로이 깃든 슬픈 난새
청아한 울음소리 구천(九天)에 사무치네.
心山育明德 流薰萬由延
哀鸞孤桐上 淸音徹九天
커다란 게송 10게를 지었으니, 게송에서의 글의 비유가 모두 이러했다. 구마라집은 평소 대승을 좋아하여, 대승을 널리 펴는 데에 뜻을 두었다. 항상 한탄하였다.
“내가 붓을 들어 대승아비담(大乘阿毘曇)을 짓는다면 가전연자(迦旃延子)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지금 이 중국 땅에는 학식이 깊은 사람이 없어 여기에서 날개가 부러졌으니 무엇을 더 논하겠는가?”
이와 같이 한탄하면서 쓸쓸히 그만두었다. 오직 요흥)을 위하여 『실상론(實相論)』 두 권을 지었다. 아울러 『유마경(維摩經)』에 주를 내었다. 말을 내어 문장을 이룬 것은 깎아 내어 고칠 것이 없었다.
문장의 비유는 완곡하고 간명하여, 그윽하고 깊숙하지 않음이 없었다. 구마라집의 사람됨은 맑은 정신이 밝고 투철하며, 남에게 굽히지 않는 성품이 남달랐다. 또한 임기응변하여 깨달아 아는 것은 무리 가운데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돈독한 성격으로 인자하고 후덕하였다. 차별 없이 사람들을 두루 사랑하
였다. 자신을 비우고 사람들을 잘 가르치며 종일토록 게으름이 없었다.
진나라 임금 요흥이 항상 구마라집에게 말하였다.
“대사의 총명과 뛰어난 깨달음은 천하에 둘도 없습니다. 만일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시어 법의 씨앗이 될 후사가 없어서야 어찌 되겠습니까?”
그리하여 기녀(妓女) 열 명을 억지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이 이후로부터는 승방(僧坊)에 머물지 않고 따로 관사를 짓고 살았다. 모든 것을 풍부함이 넘칠 정도로 공급받았다. 매양 강설할 때에는 먼저 스스로 설하였다.
“비유하면 더러운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다. 오직 연꽃만을 취하고 더러운 진흙은 취하지 말라.”
예전에 구마라집이 구자국에 있을 때, 비마라차(卑摩羅叉) 율사(律師)에게 계율을 배웠다. 뒤에 비마라차가 관중(關中)에 들어왔다. 구마라집은 그가 왔다는 것을 듣고 기쁘게 맞이하여 스승을 공경하는 예를 극진히 하였다.
비마라차는 구마라집이 핍박당한 사실(파계한 사실)을 아직 몰랐다.
어느 날, 구마라집에게 물었다.
“그대는 중국 땅에 지중한 인연이 있네. 법을 전수 받은 제자는 몇 명이나 되는가?”
구마라집은 대답하였다.
“중국 땅에는 아직 경장과 율장이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경과 여러 논(論)들은 대부분 제가 번역해냈습니다. 3천 명의 학도들이 저에게 법을 배웁니다. 그렇지만 저는 업장에 깊이 얽매여 있어서 스승으로서의 존경은 받지 못합니다.”
또 비구 배도(杯渡)가 팽성(彭城)에 있었다.
구마라집이 장안(長安)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곧 탄식하였다.
“그대와 내가 장난처럼 이별한 지 어언 3백여 년이다. 그렇건만 이 생에서는 아득히 기약이 없구려. 더디지만 내생에서나 만날 수 있을 뿐이라오.”
구마라집이 아직 임종하기 전 어느 날, 약간 온몸이 상쾌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이에 곧 입으로 세 번 신주(神呪)를 외웠다. 게다가 외국 제자들에게도 이 주문을 외우게 하여, 병을 나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문의 효력이 미치지 않아, 한층 더 위독해졌음을 알았다.
이에 구마라집은 병을 참으면서 대중 승려들과 이별을 고하며 말하였다.
“불법을 인연으로 서로 만났거늘 아직 내 뜻을 다 펴지 못하였다. 이제 세상을 뒤로 하려니, 이 비통함을 무슨 말로 다하겠는가. 나는 어둡고 둔한 사람인데도 어쩌다 잘못 역경을 맡았다. 모두 3백여 권의 경과 논을 역출하였다. 오직 『십송률(十誦律)』 한 부만은 미처 번잡한 것을 깎아내어 다듬지 못하였다.
『십송률』의 근본 뜻을 보존한다면 반드시 크게 어긋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번역한 모든 경전들이 후세까지 흘러가서 다 같이 널리 퍼지기를 발원한다. 지금 대중 앞에서 성실하게 맹서한다. 만약 내가 번역하여 옮긴 것에 잘못이 없다면, 화장한 후에도 내 혀만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위진(僞秦: 前秦) 홍시(弘始) 11년(409) 8월 20일 장안(長安)에서 돌아가셨다. 이 해는 바로 진(晋)나라 의희(義熙) 5년(409)이다. 곧바로 소요원(遡遙園)에서 외국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였다. 장작이 다 타고 시신이 다 타 없어졌건만 오직 그의 혀만은 재가 되지 않았다.
후에 어떤 외국 사문이 와서 말하였다.
“구마라집이 암송한 것 중 열에 하나도 번역해 내지 못했다.”
과거 구마라집은 일명 구마라기바(鳩摩羅耆婆)였다. 외국의 이름짓는 법은 대부분 부모의 이름을 근본으로 삼는다. 구마라집의 아버지는 구마염(鳩摩炎)이었고, 어머니의 자(字)는 기바(耆婆)였기 때문에 둘을 취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구마라집이 죽은 때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같지 않다.
혹자는 홍시(弘始) 7년(405)이라 하기도 하고, 혹자는 8년, 혹자는 11년이라고도 한다. 고찰해 보건대, 칠(七)자 와 십일(十一)자는 혹 글자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경록(譯經錄)』의 전(傳) 속에도 1년으로 된 것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세 가지 주장의 어느 쪽에도 부화뇌동할까 두려워 딱히 바로잡을 도리가 없다.
<끝>
[출처] 구마라집(鳩摩羅什) 傳 |작성자 관문
'불교와 인문과학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달음이란? - 인지와 감성의 해체- 동국대(경주) 불교학과 김성철 (0) | 2020.12.06 |
---|---|
일상과깨침 / 김성철 (0) | 2020.11.08 |
밀교에 대한 소고 (0) | 2020.10.11 |
서산대사의 선사상 (0) | 2020.10.11 |
『절요』를 통해 본 보조 지눌의 사상 (0) | 2020.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