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교를 모른다. ‘직지(直指)’는 더욱 모른다. 하지만 ‘직지’를 읽는 동안, 이상하게도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누군가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 마음을 다스린다며 소설이나 시는 물론 온갖 철학책과 심리학책을 찾아 떠도는 나였지만, ‘직지’를 마주하니 그 모든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인문학적 지식으로 ‘직지’를 이리저리 재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직지’는 나의 상처받은 마음을 재빨리 낫게 하는 진통제처럼 위로하는 게 아니라, “우선 진맥부터 해보자꾸나!” 하고 가만히 맥을 짚어주는 그 옛날 한의사 할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처럼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효과 빠른 진통제는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게 해주지만, 고통의 원인을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보는 것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증상이 사라지면 고통의 원인 찾기조차 멈춰버리는 우리의 근시안적 세상살이로부터 ‘직지’는 잠시 스스로를 봉인하길 요구한다.
너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편안함부터 매몰차게 내려놓아라. 너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있는가. 그러면 그 행복의 곳간 자물쇠를 일단 채워보아라. 편안함의 뿌리, 행복함의 뿌리를 살펴보면 그 밑에는 ‘단지 내 욕심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처럼 포장하는 나 자신’이 가로놓여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표어 속에는 그 꿈의 이기심이 은폐돼 있다.
은폐된 이기심
우리는 꿈을 꾸라고, 무엇이든 꿈을 꾸면 이뤄진다고 유혹하는 세상에서, 자기로부터 시작된 꿈이 아닌 미디어의 유혹으로부터 시작되는 꿈을 처음부터 자기 것인 양 오해하며 살아가곤 한다. 당장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온갖 쇼핑몰의 물건을 박스 째로 몇 개씩 사다 들이고, 포장도 제대로 뜯어보지 못한 채 ‘다음 쇼핑 목록’을 추가하곤 한다.
우리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표어에 사로잡혀 진정 제대로 된 꿈을 꾸는 법을 잊어버렸다. 꿈은 그런 것이 아니다. 꿈은 남이 다 따라 하는 ‘대세’ 속에서는 결코 일궈지지 않는다. 유행만 따라가다가는, ‘남 하는 건 다 해봐야지’라는 생각으로 살다가는, 결코 내 자신의 꿈을 발견할 수 없다.
자네가 여기에 온 다음부터 나는 일찍이 그대에게 마음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대가 차를 가지고 오면 내가 그대를 위하여 받아주었으며, 그대가 밥을 가지고 오면 내가 그대를 위하여 받아주었으며, 그대가 나에게 인사를 할 때는 내가 곧 머리를 숙였으니 어떤 점이 그대에게 마음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하는가.
-‘무비스님 직지강설’ 중에서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마음 한구석이 무척 뜨끔했다. 그 모든 자잘한 행동 눈빛 표정 모두가 ‘그대를 위해’ 지은 것들임을 깨닫게 된다면 어찌 깨닫지 못하겠는가. 책 한 권을 읽을 때 ‘가장 멋진 구절’을 고르고자 전전긍긍하고, 글 한 편을 쓸 때도 ‘되도록이면 아름다운 문장’을 써보겠다고 골머리를 앓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소중한 가르침은 어떤 눈부신 하이라이트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인생에는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이 없다. 모든 것이 발단이고, 모든 것이 절정이며, 모든 것이 결말이다. 이별은 사랑의 결말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의 시작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별함으로써 그 사람과의 더 커다란 인연을 만들어가는 도정의 시작일 수 있다.
생명의 탄생 또한 그렇다. 탄생은 시작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가 이별의 암시다. 우리는 탄생하는 순간 가장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을 예약해놓는다. 그 예약은 100% 지켜진다. 사랑하는 것들과 이별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은 없기에.
마음의 맥박
‘직지’는 이렇듯 지극히 짧은 문답 속에서 우리 삶의 전체를 꿰뚫는 ‘마음의 맥박’을 잡아보게 만든다. 내 가슴은 제대로 뛰고 있는가. 이미 오래 전에 멈춰버린 것은 아닌가. 내 사랑은 실은 나 자신을 위한 이기심이나 초라한 변명은 아니었던가.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면서 어떻게든 그 사랑의 동아줄을 앙칼지게 틀어쥐려는 소유욕은 아니었던가. 일에 대한 내 사랑이야말로 그렇지 않았던가. 일을 통해 나를 증명하려는 욕심이 모든 부주의를 정당화하지 않는가. 일을 한답시고, 내 곁의 사람들을 외롭게 하지는 않았는가.
삶의 매순간이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우리는 용맹정진해야 한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도 운명의 여신은 우리를 배신하기 일쑤다. 문제는 실패하지 않는 비결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에서도, 성공에서도 ‘사심’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모든 순간, 모든 곳에서 배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강의를 할 때만 열심히 듣고 시험을 볼 때만 열심히 공부한다면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의 몸짓 하나하나, 그 사람의 말투 하나하나에서 진심으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관계야말로 그 어떤 우정이나 사제관계보다도 돈독한 인연일 것이다.
어떤 이가 도를 물었다.
“무엇이 도입니까?”라고 하니
“눈앞에 무엇이 보이는가?”
“예, 스님과 병풍이 보입니다.”
“그래도 도를 모르겠는가?”
“예,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귀에는 무엇이 들리는가?”
“예, 빗소리가 들립니다.”
“그래도 모르겠는가?”
-‘무비스님 직지강설’ 중에서
모든 것이 제 나름의 도를 펼쳐 보이는데, 우리는 청맹과니처럼 눈이 있어도 보아내지 못한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에서 이치를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는 법. 그것이 도의 시작이니. 왜 이렇게 깨달음이 얻어지지 않는가, 고민하는 시간에 눈앞의 사물, 들리는 소리, 풍기는 향기 모두에서 그들만의 도를 발견해냄이 어떨까. 우리는 이미 가장 눈부신 깨달음의 길이 눈앞에 있는데, 익숙한 쾌락에 이끌려, 길들어버린 습관에 이끌려, 눈앞의 그 소중한 것들을 바라보는 감각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모든 것을 가르쳐줄 준비가 된 스승이 앞에 계셔도, 아름다운 병풍이 눈앞에 있어도, 창밖에 세차게 비가 내려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단순한 사실로 포착하기만 할 뿐 진정으로 ‘지각(知覺)’하지 못한다. 감각기관은 예민한 촉수를 동원해 우리가 느껴야 할 것, 보아야 할 것, 깨달아야 할 것의 힌트를 제시하지만, 우리는 그 힌트를 소 닭 보듯이 한다.
수초선사에게 운문선사가 물었다
“요즘에 어디에서 왔는가?”
수초선사가 말하였다.
“사도에서 왔습니다.”
운문선사가 물었다.
“여름에는 어디에 있었는가?”
수초선사가 말하였다.
“호남 보자사에 있었습니다.”
(…) “운문선사가 그대에게 세 차례 몽둥이를 때리겠다.”
다음 날 수초선사가 물었다.
“어제 화상에게 제가 세 차례나 몽둥이를 맞았는데 저의 허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운문선사가 말하였다.
“이 밥자루여, 강서와 호남에도 또한 그렇게 갔었구나.”
수초선사가 그 말에 크게 깨달았다.
-‘직지’ 중에서
그렇게 온갖 고행과 수행을 반복해도, 너는 왜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지. 운문선사의 꾸짖음이 못내 아프다. 세 차례나 몽둥이로 맞았으니, 수초선사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 꾸짖음이 아프면서도 은근히 키득키득 웃음이 나온다. 마치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다. “이 밥자루여”라고 수초선사를 한심스럽게 부르는 광경 또한 웃음을 자아낸다. 깨달음을 위한 투자는 아끼지 않으면서 정작 깨달음의 내용은 깨닫지 못하는 마음의 무지. 그 무지를 깨치지 않는 한 우리는 그저 밥을 축내는 ‘밥자루’일 수밖에 없으니.
깨달음의 ‘몸짓’을 아무리 추구해도 깨달음의 뿌리에 이르지 못하면 수행은 소용이 없다. 아무리 좋은 곳에 가도 아무리 위대한 스승을 만나도 효과가 없다. 그러하니 자꾸 어디론가 멋진 장소로 떠나서 무엇을 얻으려고 몸부림칠 필요는 없다. 수처작주(隨處作主). 당신이 머무는 곳, 스치는 곳, 기다리는 곳. 그 어디나 당신이 주인이 될 수만 있다면, 깨달음은 우리와 항상 함께할 것이다.
정여울 |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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