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교설은 괴로움에 허덕이는 인간 존재
그 자체를 문제 삼아
“불교에서는 개인의 자아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러한 부정은 붓다 교설의 핵심적 요소인 무아(無我, anatta)의 이론에 담겨져 있다. 불교는 한마디로 무아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 무아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른바 ‘참나’, ‘진아(眞我)’, ‘일심(一心)’, ‘진여(眞如)’ 등을 존재론적인 실체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무아의 이론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사유경(正思惟經)
<원문> (二) 如是我聞: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 世尊告諸比丘: “於色當正思惟, 觀色無常如實知. 所以者何? 比丘! 於色正思惟, 觀色無常如實知者, 於色欲貪斷; 欲貪斷者, 說心解脫. 如是受·想·行·識當正思惟, 觀識無常如實知. 所以者何? 於識正思惟, 觀識無常者, 則於識欲貪斷; 欲貪斷者, 說心解脫. 如是心解脫者, 若欲自證, 則能自證: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 如是正思惟無常, 苦·空·非我亦復如是.” 時,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색에 대해서 바르게 사유하여 ‘색은 무상하다’고 사실 그대로 알라. 왜냐하면 비구들이여, 색에 대해서 바르게 사유하여 ‘색은 무상하다’고 관찰해 사실 그대로 알면 색에 대한 탐욕이 끊어지고, 탐욕이 끊어지면 이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 하기 때문이니라.
수·상·행도 마찬가지이며, 식에 대해서 바르게 사유하여 ‘식은 무상하다’고 관찰해 사실 그대로 알라. 왜냐하면 식에 대해서 바르게 사유하여 ‘식은 무상하다’고 관찰해 사실 그대로 알면 식에 대한 탐욕이 끊어지고, 탐욕이 끊어지면 이것을 심해탈이라 하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마음이 해탈한 사람은 만일 스스로 증득하고자 하면 곧 스스로 증득할 수 있으니, 이른바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느니라.
이와 같이 ‘무상하다’고 바르게 사유한 것처럼 ‘그것들은 괴로움이요, 공이요, 나가 아니다’라고 사유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그 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해석>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상윳따 니까야(Samyutta-nikaya, 相應部)>, 제22 칸다 상윳따(Khandha-samyutta, 蘊相應), 제2 아닛짜왁가(Aniccavagga, 無常品), 15 Yad anicca(1), 16 Yad anicca(2) 17 Yad anicca(3)이다.(SN Ⅲ, pp.22-23) 그러나 이것은 편찬자의 착오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앞의 12 Aniccam, 13 Dukkham, 14 Anatta와 마찬가지로 15 Yad aniccam, 16 Yad dukkham, 17 Yad anatta가 되어야 한다. 경의 내용이 anicca(無常), dukkha(苦), anatta(無我)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묵 스님은 이 부분을 번역하면서 ‘무상한 것 경(Yadanicca-sutta)’, ‘괴로움인 것 경(Yamdukkha-sutta)’, ‘무아인 것 경(Yadanatta-sutta)’라고 고쳤다.(각묵 옮김, <상윳따 니까야> 3권(울산: 초기불전연구원, 2009), pp.149-151)
이 <정사유경(正思惟經)>도 앞의 <무상경(無常經)>과 마찬가지로 15 Yad aniccam(無常), 16 Yad dukkham(苦), 17 Yad anatta(無我)라는 세 개의 경전을 하나로 합친 것이다. 세 경전의 내용이 모두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역 <잡아함경>의 “이와 같이 ‘무상하다’고 바르게 사유한 것처럼 ‘그것들은 괴로움이요, 공이요, 나가 아니다’라고 사유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그 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라는 부분은 <상윳따-니까야(相應部)>에는 없다.
이 경의 핵심 내용은 오온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나가 아니요, 공한 것이라고 사유하라. 이렇게 하는 것이 바른 사유이며, 이와 같이 바르게 사유하면 오온에 대한 탐욕을 끊고 심해탈(心解脫)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경은 오온의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통찰하여 오온에 대한 염오(厭惡, nibbida)·이욕(離欲, viraga)·해탈(解脫, vimutti)·해탈지견(解脫智見, vimutti-nanadassana)을 얻도록 설하고 있다.
이 경에서 말하는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사실 그대로 관찰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알고 봄’, 즉 ‘여실지견(如實智見, yathabutha-nanadassana)’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개인의 자아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러한 부정은 붓다 교설의 핵심적 요소인 무아(無我, anatta)의 이론에 담겨져 있다. 불교는 한마디로 무아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 무아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른바 ‘참나’, ‘진아(眞我)’, ‘일심(一心)’, ‘진여(眞如)’ 등을 존재론적인 실체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무아의 이론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뜨만(Atman)의 상주를 주장하는 상견론(常見論)도 문제지만, 아뜨만의 단멸을 주장하는 단멸론(斷滅論)도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붓다는 상견론과 단멸론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왜냐하면 조건 지어진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형성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붓다의 근본적인 관심은 오직 인간들이 당면한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것이었다. 붓다는 당시의 종교가나 사상가들이 제기한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와 같이 붓다의 중요 관심사는 처음부터 형이상학적인 문제보다는 현실적인 괴로움(苦, dukkha)에 대한 문제였다. 형이상학적인 문제란 세계의 기원, 지속 기간, 크기, 영혼의 본성, 사후 여래의 상태 등을 말한다. 이를테면, <전유경(箭喩經, Cula-Malunkya-sutta)>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 세계는 영원한가?
② 세계는 영원하지 않은가?
③ 세계는 유한(有限)한가?
④ 세계는 무한(無限)한가?
⑤ 영혼은 육체와 같은 것인가?
⑥ 영혼은 육체와 다른 것인가?
⑦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⑧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가?
⑨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가?
⑩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 안하지도 않는가?
이것은 말륭캬뿟따(Malunkyaputta)가 붓다께 답변을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당시 인도의 사상가들이 즐겨 논했던 주제였다. 이 질문들을 분석해 보면, ①과 ②는 세계의 시간적 한계에 관한 것이며, ③과 ④는 세계의 공간적 한계에 관한 것이고, ⑤와 ⑥은 영혼과 육체의 문제이며, ⑦⑧⑨⑩은 여래의 사후에 관한 문제이다.
이 열 가지 질문【한역(漢譯)에서는 14가지로 소개되어 있다】을 불교에서는 무기(無記, avyakata)라고 부른다. 무기는 ‘기술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 즉, ‘기술하는 것도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특정한 명제(命題)를 무기 테제(avyakata thesis)라 하고, 이러한 물음을 무기 질문(avyakata panha)이라 한다.
붓다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하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제들은 인간들이 당면한 괴로움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붓다의 모든 교설은 괴로움에 허덕이는 인간 존재 그 자체를 문제로 삼았다.
붓다는 인간들이 겪는 괴로움의 원인은 무지(無知)와 집착(執着)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것을 불교 용어로는 무명(無明, avijja)과 갈애(渴愛, tanha)라고 한다. 이러한 무지와 집착 때문에 어리석은 범부들은 ‘내가 있다’라거나 ‘이것이 나이다’라고 생각한다. 인간들은 본능적·맹목적으로 ‘나’라는 것은 변치 않는 존재로 믿거나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붓다는 인간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집착의 밑바닥에 놓인 ‘나(我)’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붓다는 ‘나(我)’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는 일체의 존재는 다양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라고 설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즉 자아(自我)가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붓다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나’라는 존재의 실체가 없음[無我]를 반복하여 설명했다.
이와 같이 ‘나’라는 존재의 실체가 없음, 즉 무아(無我)임을 증명하기 위해 동원된 교설이 바로 오온설(五蘊說)이다. 붓다는 이 오온의 분석을 통해 인간 존재는 ‘다섯 가지 요소의 모임’, 즉 오온(五蘊)에 불과할 뿐, 영원불변하는 자아(自我)는 없다고 단정했다.
이처럼 오온설은 인간 존재에 대한 붓다의 교설이다. 또한 오온설은 붓다의 전체 교설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매우 중요한 교설이다. 그런데 오온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각양각색이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현존하는 초기경전에서도 신(新)·고층(古層)에 따라 오온에 대한 해석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각 부파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그 의미가 확대 해석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붓다가 오온을 설한 본래 목적이 퇴색되거나 왜곡되기도 하였다.
빨리어 칸다(Khandha)는 어원적으로 ‘크기’, ‘부피가 큰 물체’를 뜻한다. 이 단어는 코끼리·사람·나무의 크기를 말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간혹 불교문헌에서 칸다(khandha)는 chapter(章)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율장의 칸다(Khandha, 건度)는 이러한 용례(用例)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단어는 단독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다른 단어와 결합하여 불교의 중요한 술어를 만든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온(五蘊)의 색온(色蘊, rupakkhandha)·수온(受蘊, vedanakkhandha) · 상온(想蘊, sannakkhandha) · 행온(行蘊, sankharakkhandha) · 식온(識蘊, vinnanakkhandha) 등이다.
이 빨리어 칸다(khandha)나 산스끄리뜨 스칸다(skhandha)를 한문으로는 ‘음(陰)’ 혹은 ‘온(蘊)’으로 번역했다.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쌓임’, ‘모임’, ‘집합’, ‘더미’라는 뜻이다. 일본학자들은 대부분 온(蘊, khandha)을 ‘모임(積集)’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최근에는 영문 서적이 우리말로 번역 소개되면서 ‘집합체’ 혹은 ‘집적체’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이것은 빨리어 칸다(khandha)를 영어 aggregate로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현재 오온(五蘊)이라는 술어는 ‘다섯 가지 쌓임’, ‘다섯 가지 모임’, ‘다섯 가지 집합체’, ‘다섯 가지 집적체’, ‘다섯 가지 복합체’, ‘다섯 가지 무더기’, ‘존재의 다발’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글 번역들은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뿐, 오온(五蘊)의 참뜻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오온(五蘊)’이라는 한문 술어나 빨리어 ‘panca-khandha’라는 원어를 병기(倂記)하여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온(蘊, khandha)이란 ‘모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모임’, 즉 오온(五蘊, panca-khandha)이란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가 모인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면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구성 요소란 무엇인가. 즉 색(色, rupa)·수(受, vedana)·상(想, sanna)·행(行, sankhara)·식(識, vinnana)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색(色, rupa)은 물질적인 형태, 즉 육체를 말한다. 수(受, vedana)는 고(苦)·낙(樂)·불고불락(不苦不樂) 등의 감수(感受) 작용을 말한다. 상(想, sanna)은 개념의 표상(表象) 작용을 말한다. 행(行, sankhara)은 형성하는 힘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특히 마음의 의지 작용을 말한다. 식(識, vinnana)은 식별작용, 즉 인식 판단의 의식작용을 말한다.
요컨대 오온(五蘊)은 색(色, 육체)·수(受, 감수작용)·상(想, 표상작용)·행(行, 의지작용)·식(識, 의식작용)을 일컫는다. 이와 같이 오온은 원래 우리의 몸과 마음 전체를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 오온(五蘊)의 의미가 점차 확대되어 우리의 심신(心身)뿐만 아니라 환경의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내외(內外)의 물질계와 정신계 일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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