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온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탐욕을 완전히 없애며, 어떤 번뇌도 일으키지 않아 마음이 바르게 해탈하면 이것이 비구의 ‘현법열반’
“지혜로써 제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해서 자아에 대한 고정관념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은 있다·없다, 영속한다·단멸한다 는 견해의 그물에 걸리고 만다. 삼매나 선은 그 자체로써는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지혜로써 해탈·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
향법경(向法經)
[원문]
(二七) 如是我聞: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 有異比丘來詣佛所, 頭面作禮, 각住一面, 白佛言: “如世尊說法次法向, 云何法次法向?” 佛告比丘: “善哉! 善哉! 汝今欲知法次法向耶?” 比丘白佛: “唯然, 世尊!” 佛告比丘: “諦聽! 善思! 當위汝說. 比丘! 於色向厭·離欲·滅盡, 是名法次法向; 如是受·想·行·識, 於識向厭·離欲·滅盡, 是名法次法向.” 時, 彼比丘聞佛所說, 踊躍歡喜, 作禮而去.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어떤 비구가 부처님께 찾아와 부처님 발에 머리 숙여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서서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을 따르고 법으로 향하는 것[法次法向]’을 말씀하시는데, 어떤 것을 법을 따르고 법으로 향하는 것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네가 지금 법을 따르고 법으로 향하는 것을 알고 싶으냐?”
비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사유하라. 내 너를 위해 설명하리라. 비구여, 색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탐욕을 떠나며, 완전히 없애는 곳으로 향하면, 이것을 이름 하여 법을 따르고 법으로 향하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수·상·행·식에 대해서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탐욕을 떠나며, 완전히 없애는 곳으로 향하면, 이것을 이름 하여 법을 따르고 법으로 향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그때 그 비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 뛰면서 예배하고 물러갔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제1권 제27경(<대정장> 2, p.5c)이다. 이 경의 핵심 내용은 오온(五蘊)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탐욕을 떠나며 완전히 없애는 곳으로 향하면, 이것을 ‘법을 따르고 법으로 향하는 것[法次法向]’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오온에 대한 염오(厭惡, nibbida)·이욕(離欲, viraga)·소멸(消滅, nirodha)이야말로 ‘법을 따르고 법으로 향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경의 주제어는 ‘법차법향(法次法向)’이다. 이 ‘법차법향’을 중국의 학자들은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이른바 법차(法次)란 법의 순서를 말하는데, 마치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에 선후의 순서가 있듯이 모든 법[諸法]에는 순서가 있기 때문에 법차(法次)라고 한다. 법향(法向)이란 법의 취향(趣向)을 말하는데, 곧 열반법(涅槃法)을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유위법(有爲法)은 생사(生死)의 법(法)으로써 생사(生死)를 향한다. 반면 열반법(涅槃法)은 생사를 떠나기 위해 열반을 향해 매진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법차(法次)와 법향(法向)을 합하면, 법의 선후 순서에 따라 열반법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이다.
한역의 법차법향(法次法向)은 빨리어 dhammanudhammapatipanna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법을 따라 법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아홉 가지 출세간법(lokuttara-dhamma)들과 일치하는 법(anuloma-dhamma)인 예비단계의 길[道, patipada]을 실천한다는 뜻이다. 아홉 가지 출세간법이란 네 가지 도(道)와 네 가지 과(果)에 열반을 추가한 아홉 가지를 말한다.
한편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 22:39 Anudhamma-sutta(隨法經)이다. 이 경의 이름을 전재성 박사는 ‘법답게’로 옮겼고, 각묵스님은 ‘이르게 하는 법 경’이라고 번역했다. 이 경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법에 따라 법을 실천하면 그는 법과 일치하게 된다. 그는 색(色)을 대단히 싫어하여 떠나야 하며,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을 대단히 싫어하여 떠나야 한다. 그는 색·수·상·식을 철저하게 알고, 색·수·상·행·식에서 벗어나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에서 벗어난다고 나는 말한다.(SN Ⅲ, pp.40-41)
위 경전의 내용은 비구들이 법에 따라 법을 실천하면 법과 일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을 혐오하여 떠나야 하며, 색·수·상·식을 철저하게 알면 색·수·상·행·식으로부터 벗어나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철저하게 한다(parijanati)’는 것은 세 가지 통찰지(parinna)를 철저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해탈한다(parimuccati)’는 도의 순간(magga-kkhana)에 일어나는 버림의 통찰지(pahana-parinna)로 해탈한다는 말이다.(SA.ii.267) 바꾸어 말하면 통찰지는 아라한이 괴로움의 진리(苦聖諦)를 통탈하는 것을 뜻하고, 해탈은 아라한이 번뇌들을 다 멸진함에 의해서 재생(다시 태어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열반경(涅槃經)
[원문]
(二八) 如是我聞: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 有異比丘來詣佛所, 頭面禮足, 각住一面, 白佛言: “世尊! 如世尊所說, 得見法涅槃, 云何比丘得見法涅槃?” 佛告比丘: “善哉! 善哉! 汝今欲知見法涅槃耶?” 比丘白佛: “唯然, 世尊!” 佛告比丘: “諦聽! 善思! 當위汝說.” 佛告比丘: “於色生厭·離欲·滅盡, 不起諸漏, 心正解脫, 是名比丘見法涅槃; 如是受·想·行·識. 於識生厭·離欲·滅盡, 不起諸漏, 心正解脫, 是名比丘見法涅槃.” 時, 彼比丘聞佛所說, 踊躍歡喜, 作禮而去.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어떤 비구가 부처님께 찾아와 부처님 발에 머리 숙여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서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현법열반(現法涅槃)을 얻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비구가 현법열반을 얻습니까?”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네가 지금 현법열반에 대해 알고자 하느냐?”
비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사유하라. 내 너를 위해 설명하리라.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여, 색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탐욕을 소멸하며, 완전히 없애고, 어떤 번뇌도 일으키지 않아 마음이 바르게 해탈하면, 이것을 비구의 현법열반이라 한다. 이와 같이 수·상·행·식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탐욕을 소멸하며, 완전히 없애고, 어떤 번뇌도 일으키지 않아 마음이 바르게 해탈하면, 이것을 비구의 현법열반이라 하느니라.”
그때 그 비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 뛰면서 예배하고 물러갔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제1권 제28경(<대정장> 2, pp.5c-6a)이다. <한파사부사아함호조록>에서는 이 경의 이름을 <현법열반경(見法涅槃經)>이라고 번역했다. 이 경의 핵심 내용은 오온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탐욕을 소멸하며 완전히 없애고, 어떤 번뇌도 일으키지 않아 마음이 바르게 해탈하면, 이것을 비구의 현법열반(現法涅槃)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한역 원문의 “세존! 여세존소설, 득현법열반, 운하비구득현법열반(世尊! 如世尊所說, 得見法涅槃, 云何比丘得見法涅槃?)”을 <한글대장경>에서는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법을 보아 열반한다[見法涅槃]’고 말씀하시는데, 어떤 것이 비구가 법을 보아 열반하는 것입니까?”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득현법열반(得見法涅槃)’이라는 대목은 ‘현법열반(現法涅槃)을 증득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견(見)은 현(現)과 같은 글자이므로, 현(見)으로 읽어야 한다. 현법(現法, ditthadhamma)이란 현세(現世), 즉 금생(今生)을 가리킨다. 따라서 현법열반은 금생에 적정해탈(寂靜解脫)을 얻는 것을 말한다.
한글 번역문의 ‘어떤 번뇌도 일으키지 않아’ 는 ‘불기제루(不起諸漏)’를 번역한 것이다. ‘누(漏)’는 번뇌(煩惱)의 다른 이름이며, 누설(漏泄)과 누락(漏落)의 두 가지 뜻이 있다. 탐진(貪瞋) 등 번뇌는 하룻밤 사이에 육근문(六根門)으로 인해 새 흘러내려 그치지 않으므로 누(漏)라 하고, 또한 번뇌는 사람들로 하여금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게 하므로 누(漏)라 한다. 일체는 번뇌가 있는 법이므로 유루법(有漏法)이라 한다.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不起諸漏]이란 곧 여러 가지 종류의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현법열반이란 현세에서 열반을 얻는다는 뜻이다. 현법열반은 오온을 싫어하고 오온에 대한 탐욕을 여의며 오온에 대한 애착과 번뇌를 멸하여, 다시는 모든 누(漏)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바르게 해탈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 22:116 Kathika⑵이다. 이 경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는 [비구], 법을 설하는 [비구]’라고들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해서 법을 설하는 [비구]가 되고, 어떤 것이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 [비구]이며, 어떤 것이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증득한 [비구]입니까?”
“비구들이여, 만일 색(色)을 염오하고 색(色)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색(色)을 소멸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면 그를 ‘법을 설하는 비구’라 부르기에 적당하다. 만일 색(色)을 염오하고 색(色)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색(色)을 소멸하기 위해서 도를 닦으면 그를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 비구’라 부르기에 적당하다. 만일 색(色)을 염오하고 색(色)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색(色)을 소멸하였기 때문에 취착 없이 해탈하였다면 그를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증득한 비구’라 부르기에 적당하다. 만일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도 이와 같다.”(SN Ⅲ, p.164)
위 경전에 나오는 “‘지금 여기[現法]에서 열반을 실현하는(ditthadhammanibbanappatta)’이란 것은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얻음(nibbana-ppatta)을 말한다.”(SA.ii.34) 이것은 아라한 혹은 무학(無學, asekha)의 경지를 드러낸 것이다. ‘지금 여기’로 옮김 dittha(現)-dhamma(法)를 중국에서는 현법(現法)으로 직역했으며, 서양에서는 ‘here and now’로 번역하고, 한국에서는 ‘지금 여기’로 정착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에서 말하는 현법열반(現法涅槃, ditthadhamma-nibbana)은 <범망경(梵網經, Brahmajala-sutta)>(DN1)에서 말하는 구경현법열반(究竟現法涅槃, parama-ditthadhamma-nibbana)과는 전혀 다른 개념임을 유의해야만 한다. <범망경>에서 말하는 현법열반론자(現法涅槃論者, ditthadhamma-nibbanavada)들의 견해는 어떤 존재론적 자아가 있어서 그 자아가 이런 삼매 혹은 선의 경지를 구족하여 머문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자아에 대한 견해, 초기불교에서 거듭 강조하는 유신견(有身見)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지혜로써 제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해서 자아에 대한 고정관념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은 있다·없다, 영속한다·단멸한다는 견해의 그물에 걸리고 만다. 삼매나 선은 그 자체로써는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지혜로써 해탈·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한마디로 <범망경>에서 말하는 현법열반론은 단멸론에 속한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열반을 실현한다는 현법열반과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구경현법열반이라는 개념은 전혀 다른 것임을 유의해야만 한다.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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