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아미타불 화두(話頭) / 청화 큰스님

수선님 2021. 2. 12. 12:16

아미타불 화두(話頭) / 청화 큰스님

 

 

사천왕(四天王)을 조성해서 회향 법회를 원만히 마쳤습니다.

조성한 목아(木芽)선생의 솜씨가 아주 훌륭합니다.

그래서 비록 성륜사가 절은 작아도,

사천왕만큼은 한국 어느 큰 절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걸작이 되었습니다.

잘 모르는 분들은 모두 다 일합상(一合相)으로 관찰해서 “나무아미타불”하면 됐지,

사천왕을 모실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 우리가 회의심을 가지면 공부에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제가 풀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보는 시각 이라는 것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있는 현상계,

즉 형이하학적인 세계 물질을 초월한 세계는 볼 수도 있고 말 할 수도 있지만,

물질을 초월한 세계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가령 원자 구조 이론(原子構造理論)은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빙빙 돌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 눈에 안 보이니까

 

전자 현미경으로 가까스로 감별하는 것이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중생 시야에 들어오는 대상은,

극히 우리 중생의 업장에 제한된 업에 여과되어서 나오는 정도를 보기 때문에

 

있는 사실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천왕도 역시 얼핏 생각할 때는 그렇게 생각이 될 것입니다.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하실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사천왕은 어떠한 존재인가,

사천왕은 우리 주변의 동,서,남,북을 지키는 하나의 천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불교가 눈에 보이는 세계만 가지고 얘기하면 아주 간단하겠습니다 마는,

눈에 안 보이는 세계가 너무많습니다.

 

부처님의 청정 불안(淸淨佛眼)으로 본다면,

 

우주를 모두 다 빠짐없이 볼 수 있습니다.

하여튼 조금도 흠절없고 부족없이 우주의 모든 것을 명확히 볼 수있는 것은

 

청정 불안에 한 해서만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중생이 생사 내왕하는 세계가 욕계 색계 무색계입니다.

욕심을 주로 하는 욕계가 있고,

욕심을 떠나버린 세계가 있고,

또는 욕심도 모든 물질적 욕망도 떠나 버린,

 

이른바 정신만 있는 무색계가 있습니다.

 

 

이 삼계를 우리 중생들이 자기 업장 따라서 윤회합니다.

그런데 욕계 내에도 천상이 여러가지 있습니다.

육욕천(六欲天) 이라는 그 천상만해도 여섯 층계의 하늘이 있습니다.

맨 처음의 낮은 단계가 오늘의 우리가 모시는 사천왕입니다.

 

사천왕은 동쪽에 지국천(持國天),남쪽에 증장천(增長天),

 

서쪽에 광목천(廣目天),북쪽에 다문천(多聞天), 이렇게 네 개의 천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천왕은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는 천상입니다.

 

수미산의 사방을 지키는 세계인 사주(四洲)가 있습니다.

사주는 천상이 아니라,

우리 지구같이 지성적인(地性的)인 땅, 지성을 못 떠나는 세계가 사주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나 이런 데는 남섬부주(南贍部洲)이고,

그리고 동쪽에 승신주(勝身洲),

여기는 우리 지구보다 업장이 가벼운 중생이 사는 세계입니다.

서쪽은 우화주(牛貨洲)인데,

지구 보다는 훨씬 맑은 존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은 구로주(瞿盧洲)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지구 가운데서 한국은 그야말로 조그마한 존재 밖에 안됩니다.

 

사대주 중에서 우리 지구 덩어리가 제일 작습니다.

업장도 제일 무거운 곳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조심 조심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도 다시 지구에 인도 환생합니다.

 

우리 생명은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습니다.

불생 불멸이라, 무시 이래로 우리 생명은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생명 자체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형이하학적인 존재이기 때문애,죽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금생에 생을 그만두면,태어나기 싫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지은대로 잘못살면 지옥도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런 도리를 안다면,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대로 가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욕 한마디 하면 욕 한마디 한 것,

 

남 미워하면 미워한 그대로 업으로 남습니다.

 

업(業)이란 따지고 보면 굉장히 지겹습니다 마는

 

한편으로 생각하면 고마운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나쁜 업을 지으면 그것에 상응 되어서 나쁜 곳에 태어나지 마는,

좋은 업을 지으면 좋게 태어납니다.

지금까지 가난하고 불행하더라도 당장 마음을 바로 먹고 바르게 행동을 한다면,

우리 업이 그냥 바뀌어 집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도인도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인간 존재라는 것은 항시 비약할 수 있습니다.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살았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 그때 잘못 산 우리 마음을 혁신시켜야 합니다.

마음을 혁신시키는 가장 훌륭한 작업이 신앙 아니겠습니까.

가령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염불을 하고, 또 화두를 의심할 때는 화두하고,

이런 것은 모두 우리 정신을 비약시키는 가장 좋은 지름길입니다.

 

욕계도 여섯 천상이 있어서 사천왕 그 다음에는 도리천(忉利天)이 있습니다.

부처님을 낳으신 어머니 마야부인도 맨 처음 돌아가시고는 바로 극락에 못갔습니다.

인간으로 해서 지은 바가 그렇게 많기 때문에 극락세계에 비약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인 아들한테 대한 간절한 애착 때문이었습니다.

설사 업장이 가볍다 하더라도,애착을 많이 품으면 분명히 못갑니다.

자기 재산에 대해서나 자기 처에 대해서나,

누구를 그리워 한다든가 또는 미워한다면,분명히 못갑니다.

 

영혼 천도도 그 내용은 집착을 다 풀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미움이나 사랑이나 모든 것을 풀어 버리고 아무런 미련없이

 

빨리 벗어나고 도약해서 영생의 극락세계로 가라는 그런 법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어머니같은 대성자를 낳으신 분도 아들에 대한 애착,

아들을 미처 키워보지도 못하고 이렛 만에 돌아가시는 간절한 그 마음으로 인하여

 

도리천 밖에 못 가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공부하시고 교화하실 때 한 여름동안에는 삼개월 동안 오로지

 

도리천에 올라가셔서 어머니를 비롯해서 도리천 천상 교화를 시키셨습니다.

부처님도 그렇게 효성이 지극한 분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실 때에도 도리천 어머니께서 염려가 되어서

 

천상 사람들을 거느리고 부처님 곽(墎)주변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관 가운데서 벌떡 일어나셔서

 

“어머니시여, 모두는 다 무상한 것입니다.

생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어야 되고 만나면 반드시 헤어져야 하는 것이니,

마음을 거두셔서 평정한 마음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소서”

하고 간절히 말씀드리니까 도리천에 다시 올라가셨습니다.

 

도리천 다음에 야마천(夜摩天)입니다.

야마천은 염라대왕이 있는 세계가 야마천입니다.

사왕천,도리천,야마천은 같은 천상 이지만

 

지구같은 오염된 영역을 미처 못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지거천(地居天)이라 합니다.

그리고 같은 욕계 천상도 도솔천 또는 화락천 또는 타화자재천은

 

땅덩어리의 오염된 기운을 벗어나서 지금 말로하면 성층권 밖이 되겠지요.

즉 성층권 밖의 공기가 오염이 안된 그런 천상이 공거천입니다.

아까 말한 지거천하고 합해서 욕육천입니다.여섯 하늘입니다.

 

여섯 하늘은 어떻게 해서 욕계천 이라고 하는가,

이것은 남녀가 이성간의 음탕한 욕심,

음식에 대한 욕심,

이런 욕심을 완전히 다 뿌리뽑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상당히 공부했다고 하더라도 뿌리를 못 뽑으면

 

욕계의 영역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진을 통해 인간의 기본적인 욕심을 떠나면

 

비로서 욕계를 벗어나서 색계에 태어납니다.

색계라는 것은 비록 물질 세계를 못 떠났지만 보통 물질세계가 아니라

 

이른바 광명으로 빛나고 있지마는 물질적인 욕망은 못 떠난 것이 색계이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정신만 가지고 느끼는, 색계를 벗어난 무색계가 있습니다.

무색계는 아예 물질적인 것이 없습니다.

욕심도 없고 진심도 더나고 순수한 정신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정신만 존재하지 무명심의 범위는 못 떠나 있습니다.

 

무명심은 무엇인가 하면 내가있고 네가있단 말입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존재에 대한 분별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못 떠나기 때문에 미처 무색계도 못 떠납니다.

그래서 욕계 색계 무색계를 온전히 떠나야 이른바 윤회를 벗어납니다.

 

우리 중생은 업을 지으면 지은대로 이른바 업의 카르마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공부를 좀 했다고 하더라도 아는 것은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는 것 그것으로는 윤회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실험적 증명을 해야 업을 벗어납니다.

 

우리 중생이 생사 내왕하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나누어 보면

 

이십팔천(二十八天)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십팔천을 다 뛰어넘어야 할 것인데 하나씩 하니씩 사왕천에 있다가

 

가까스로 한자리씩 도리천에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그러다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부처님이나 성인들의 가르침이 한없이 고마운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성인들의 가르침은 우리를 초월케 하고 도약을 시킵니다.

 

우리 중생들이 생사를 내왕하는 열 가지 경계가 있습니다.

열 가지 경계 가운데 제일 밑인 지옥,아귀,

 

아귀는 죽어서 가는 나쁜 귀신들이란 뜻입니다.

아귀 다음에 축생,수라,수라는 업장이 무거워서 싸움만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만도 못하지요.

다섯번째가 우리 인간세계입니다.

열 가지 경계 가운데 우리 중생이 다섯번째입니다.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이니까

 

우리도 무던히 좋은 일을 많이해서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계를 지키고 하품십선(下品十善)을 지키면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중품(中品)의 십선을 지키고 선정(禪定)을 닦아서

 

마음을 가지런하게 마음을 고요하게 닦는 공부를 하면 욕계 천상에 태어납니다.

그래서 중품,상품까지 올라가서 우리가 착한 일을 많이하면 깊은 선정에 듭니다.

 

삼매는 선정 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마음이 바른 정심(正心)에 입각해서 흐트러지지 않는 상태를 의미 합니다.

우리들은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해도 금방 산란스럽게 되지마는

 

참답게 삼매를 성취 할 때는 마음에 동요가 없습니다.

삼매에 들어 마음에 동요가 없어야 마음을 비로서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매에 못 들면 절대로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경로를 밟든지 간에 삼매에 들어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고요해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이

 

명경지수(明鏡止水)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밝은 거울이나 고요한 바닷물 같이 되어야 삼매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삼매에 들어야 우리 마음의 바탕이 보입니다.

항시 말씀드리지마는 우리 마음은 본래로 자성이고 불성이고 본래면목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우리 마음은 완전한 마음이 못됩니다.

참마음이 못되어 있고 지금 이 마음은 겉에 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의 그 근본 자리 본래 근원적인 마음은 바로 부처입니다.

불성입니다.

자성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래 면목은 바로 자성이요, 불성이요, 생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성이나 자성 자리에 못 가면 윤회를 거듭합니다.

그러기에 지옥이나 축생이나 아수라나 인간이나 이런 존재가 되는 것은

 

우리 마음이 본래 마음 그 바닥까지 사무치지 못하고 다 못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불성이란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광대 무변하여 끝도 가도 없는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의 바탕은 똑같이 다 불성이고 자성입니다.

성인들은 자성,불성을 바르게 깨달은 분들이며,

중생은 참 마음인 불성 자리에 가다 가다 못간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제 일로 덮이고 가리워져 있어서

 

지혜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지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 합니다.

그런 지옥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다행히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떠돌다가 나무 토막 만난 격입니다.

물론 엄격히 말하면 우연히도 아닙니다 마는

 

어쩌다가 우리가 다행히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부모님 한테 감사하고 모든 존재에 감사해야 됩니다.

저 같은 사람은 나이가 많아 지니까,

자기가 쓰는 이불하나도 치우기 힘듭니다.

하기야 손자가 있고 며느리가 있고 하면 되겠지만, 그런 신세는 못되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은 그야말로 불성이고 자성이고 참다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염불하는 것은 내 마음의 근본자리, 내마음의 근본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근본은 물질이라든가 어떤 무생물이 아닙니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이 있으니까 살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살다가 인연이 다 해서 마음이 떠나 버리면 몸뚱이 밖에 무엇이 남습니까.

물질만 남습니다.

물질 이라는 것은 사실은 실존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실체(實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은 잠시간 우리 마음에 덮인 업이 각 원소를 긁어 모아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존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행무상이라 하지 않습니까.

몸뚱이나 다른 물질이나 모두가 다 순간 순간 변화하여 무상하단 말입니다.

 

일반 중생들은 없는 것을 그대로 보지를 못하니까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중생의 병이 있습니다.

자기 재산이나 권세나 모두가 다 잠시 지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실존적으로는 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 가족을 위해서,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

허망한 자기 명예를 위해서,

소중한 자기 생명을 낭비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간단 명료합니다.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지가 않습니다.

우리 중생이 무명심 때문에 잘못살고,

무지무명을 못 떠나서 말로 생각으로 몸으로 스스로 업을 짓고,

자기가 한 대로 당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상을 보면,

 

부처님께서 오른손을 들고 계시는데, 이것은 무외시인(無畏施印)입니다.

중생의 공포를 덜어주시는 서원을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왼손을 아래로 하신 것은 여원인(與願印)입니다.

중생이 바라는 대로 다 주겠다는 부처님의 서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서원은 참 철저합니다.

 

부처님 한테서는 어떻게 그런 자비가 나오는가,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의 뿌리가 같습니다.

모두가 다 광대무변한 마음입니다.

광대무변한 마음인 것을 모르고 욕심을 내면, 그만큼 우리 마음이 좁아집니다.

옹졸해집니다.

좁아지면 얼굴도 찌푸려지고 동시에 우리 몸에도 해가 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느 면으로 보나,

우리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나, 가장 도움이 되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자기 건강이나 가족이나 사회를 위해서나, 정치를 위해서도 최상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이 본래 타고난 근본적인 성품은 이처럼 고귀하건만,

금싸라기 같은 불성 보배를 바로쓰지 못하고 인생을 허무한 곳에 쓰고 있습니다.

 

화두(話頭)란 것도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중국 송나라때 나왔습니다.

화두를 지금 놔야 한다는 당위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우리불자님들도 깊이 생각하십시오.

소홀히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화두를 자기 할아버지가 했다든가,금생에 자기 스승이 했다든가,

또는 전통적으로 우리 종단에서 했다든가 하는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인습적으로 묵수(墨守)해서 덮어놓고 따라갈 그럴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정보화 시대입니다.

정보화 시대는 지적인 정보를 가지고 정사(正邪)를 따져야 합니다.

비판해서 가려야 합니다.

화두라는 것은 중국 송나라때 대혜종고 스님이 비로소 정형화를 시켰습니다.

또 송나라 때도 다 화두를 한 것이 아니라,

대혜종고 스님 일파에서만 화두를 정형화시켜 유도했습니다.

그 당시도 저사(抵死)해서 화두를 반대한 스님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는 화두없이 잠자코 마음을 관조 하자는 조동종의 천동정각(天童正覺)이었고,

또 하나는 “기왕에 화두를 할 바에는 아미타불 넉자 화두를 해라” 하시고 나선 분은

 

대혜종고 스님과 같은 시대의 진헐청요(眞歇淸了)스님 이였습니다.

 

진헐스님은 “기왕에 화두를 할 바에는 아미타불 넉자 화두(四字名號)를 해라,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이기 때문에

 

또 우리 마음의 본래 자리를 깨닫는 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참선을 하는 것이니까,

기왕에 화두를 할 바에는 의심만 주로 하는쪽이 아니라

 

부처님을 일백퍼센트 신뢰하는 아미타불 화두를 하라”하면서, 아미타불 화두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송나라를 지나 명나라 때가 되었습니다.

 

명나라 때는 송나라 때보다 고승이 훨씬 많이 나왔습니다.

바로 화두를 한 그 파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화두를 반대했습니다.

고승들의 종파는 같은 화두파였는데, 그 분들은 다 화두를 반대했습니다.

운서주굉(雲捿株宏)스님 감산덕청(敢山德淸)스님 지욱우익(智旭우益)스님

 

자백진가(紫柏眞可)스님, 이 네분이 명나라 때 사대 고승입니다.

사대 고승이 다 한결같이 염불 쪽에다 역점을 두고서 불교를 창도하신 분이란 말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어찌하여 “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다”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송나라 때가 한국으로 치면 고려 때에 해당합니다.

당시 대혜종고 스님이 이끄는 세력이 제일 강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법을 배울 때 그 중 세력이 제일 강한쪽에 가서 배우려고 하겠지요,

그래서 그 화두하는 쪽에 가서 배워 왔습니다.

그때는 마침 한국은 고려 말엽으로 불교가 정치 세력과 밀착되어

 

신돈같은 사람이 나올 정도로 부패 타락했습니다.

 

새로운 정치세력인 이씨 조선이 서고,

이조 오백년 동안에는 고려때 불교의 잘못이나,

부패한 과보로 배불(排佛)이라,

유교인들에게 핍박을 당해서 스님들이 도성 안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불교가 발전 할수 있겠습니까.

중국은 원나라,명나라,청나라 때 불교가 가장 왕성했습니다.

불행히도 명나라 때 불교가 우리나라에 못들어왔습니다.

설상가상 으로 일제 강점기 삼십육년간 이나 또 팔일오 해방 이후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제대로 발전을 못했습니다.

 

어떤 스님네는 화두를 한번도 안해보고“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다”고 합니다.

한국 선방의 모습이 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선방에서도 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한 것도 아니고,

석가모니가 한 것도 아니고,

육조대사가 한 것도 아니고,

지금 참선의 교과서 같은 육조단경에도 화두란 말은 한마디 없습니다.

 

일체삼신 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이라, 우리 마음이 본래로 자성이고 불성입니다.

이러한 불성이 끝도가도 없이 꽉 차 있는 이 자리를 청정법신 이라고 하며,

이 자리가 내 마음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 청정법신 가운데는 만공덕(萬功德)이 차 있는데,

 

이것을 “자비다,지혜다”라고합니다.

이것을 보신(報身)이라고 합니다.

이 법신, 보신을 근거로 이루어 지는 것, 즉 현상적인 만유가 화신입니다.

이 모두가 다 우리 마음에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계발만 못하는 것이지, 우리한테 몽땅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글자 안 배워도 우리한테 다 들어 있어서,

이것을 불교 용어로 원만구족 이라 합니다.

다 들어있는 내 마음입니다.

학교 갈 수 없으면 안 가도 무방합니다.

우리한테 모두가 다 들어있기 때문에,

육조혜능스님같은 분도 대도인이고 육대조사지만,

 

일자무식 이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석가모니께서도 여러 가지 학문을 배우셨지만,

 

다 놔 버리고 육년 고행에 참선을 했지 않습니까,

오직 명상만 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석가모니만 못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석가모니께서 갖추고 계시는 지혜나 덕성을 다 갖추고 계십니다.

또한 방법도 쉽습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생각을 한 생각도 안 놓치고 나간다면, 그냥 삼매에 듭니다.

삼매에 들면, 삼매 가운데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 자리, 불성을 깨닫게 됩니다,

학문적으로 못 배웠다 하더라도 슬퍼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저 같은 팔십 노장이나 어린아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 같은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여불성은 더하고 덜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생사도 없이 영원히 죽지않고 불생 불멸하고,

 

불구 부정하여 오염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삶의 고뇌가 심해도 오염이 안됩니다.

그 불성은 바로 우주의 참다운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 중생의 눈에는 안 보이지만 불자님들이

 

일심정념(一心正念)으로 부처님 명호를 외운다면,

마음이 모아져서 차차로 얼굴도 빛나고 눈도 빛나고

 

부처님 광명도 볼 수 있습니다.

 

염불 회향문에 이런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광명반조(光明遍照)라,

천지 우주에는 오직 부처 광명으로만 충만해 있습니다.

부처님 광명이나 우리 마음의 본성이나, 모든 존재의 근본 모습은 한계가 없습니다.

끝도 가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차근차근 닦아 깨달아 가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서서히 광명이 찿아옵니다.

광명이 빛나면 우리 몸도 가벼워지고 마음도 가벼워지고 행복도 충만해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가르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요익(饒益)한 것을 우리한테 축복하는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광명이 우주에 두루 충만해 있어도, 우리 중생이 외면하면,

 

있는 것도 다 찾지 못합니다.

 

어린애가 어머니에게 졸라야 사탕도 사주고 젖도 주시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염불불환억(衆生念佛佛還憶)이라,

중생이 부처님을 간절히 그리워해야, 부처님도 중생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생각하고 이름을 부르고 하셔야 됩니다.

그것은 허망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고구정녕히 타일러 주신 것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어느 면으로 보나 닦기도 좋고 공덕도 빠르고 말입니다.

혜원대사(慧遠大師)가 말한 고공이수(高功易修)라, 공이 높고 또 닦기가 쉽단 말입니다.

 

극락세계란 것이 우리 근본 고향 이여서, 우리 중생은 누구나 근본적인 향수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향수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생명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그리움인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그리움이 있기 때문에, 그런 그리움에 편승해야 됩니다.

부처님한테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내 고향, 내생명의

근본자리, 즉 부처님을 간절히 그리워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모든 행복과 공덕이 약속된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싫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운 갈앙심으로 부처님을 간절히 부르십시오.

 

이 가을에 명상을 하셔야 됩니다.

이 서늘한 가을에 우리의 그리운 고향을 찾기가 제일 좋습니다.

가을은 정말 부처님께서 베풀어주신 참 은혜로운 시절 인연입니다.

이 서늘한 가을에 우리 생명을 낭비하지 마시고,

하기쉽고 공이 많은 염불로 본래면목 자리를 훤히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가을은 부처님을 부르는 계절입니다.

 

-청화 큰스님-

 

 

 

 

 

 

 

 

 

[출처] 아미타불 화두(話頭)를 / 청화 큰스님|작성자 monk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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