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깊이'를 역설했던 조직신학자, 지성인들을 위한 사도
“모든 종교의 심층에는 종교 자체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경지가 있다”
들어가며
1963년 영국의 성공회 신부 John A. T. Robinson이 쓴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에서 20세기 기독교 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로 루돌프 불트만, 디트리히 본회퍼와 함께 폴 틸리히를 꼽았다. 1990년대 미국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신학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신학자로 틸리히를 꼽았다. 필자의 경우도 성서 이해나 해석학 분야에서는 불트만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신학 사상에 있어서는 틸리히의 영향이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대학교 저학년 때 사촌형의 책꽂이에 꽂힌 틸리히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을 펼쳐보았다. 하얀 것은 종이고 까만 것은 글자라는 사실 이외에는 전혀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대학원 학생이 되었을 때 틸리히의 사상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내가 틸리히를 좋아하는 것을 본 어느 선배가 "틸리히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 있나?"하는 투로 나를 나무랐다. 나는 "틸리히 때문에 기독교를 떠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하는 말로 대답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였다면 틸리히는 실로 '지성인들을 위한 사도'였다.
캐나다에서 유학하며 불교를 전공할 때도 틸리히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틸리히 때문에 불교 사상을 더욱 친근하게, 더욱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유튜브에서 틸리히가 생전에 했던 두 시간 분량의 인터뷰를 다시 보았다. ‘과연’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틸리히의 삶
틸리히는 1886년 8월 20일 독일 동부의 조그마한 도시 슈타르체델Starzeddel에서 보수적인 루터교 목사였던 아버지와 자유주의적이었던 어머니 사이의 첫째로 태어났다. 밑으로 두 여동생이 있었다. 틸리히가 네 살 때 아버지의 임지인 인구 3천 명의 쇤플리스Schönfliess로 옮겨가 거기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열두 살 때 혼자서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로 가 한국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김나지움에 다녔다. 기숙사에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성경을 읽고, 그러면서도 학교에서 가르치는 인문주의적 사상에 매료되기도 했다. 1900년 아버지가 다시 베를린으로 옮김에 따라 틸리히도 15세에 베를린에 있는 학교로 옮기고 3년 후 18세에 졸업했다. 그가 17세 때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틸리히는 1904년 베를린 대학에 입학했다가 곧 튀빙겐 대학으로 옮기고, 1905~1907년에는 할레 대학에 다닌 후, 1911년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셸링Schelling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12년 할레 대학에서 역시 셸링 연구로 신학 전문직 학위를 취득, 루터교 목사로 안수도 받았다.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준 사상가들은 셸링 외에 니체, 헤겔,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등이었다. 1914년 9월 결혼한데 이어 10월부터 4년간 1차 세계대전 군목으로 복무해 제1급 십자훈장도 받았다. 제대 후 1919년에서 1924년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1924년부터 2년간 마르부르크 대학 신학 교수로 있으면서 그의 『조직신학』 체계의 틀을 잡았다. 그 이후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가르쳤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가르치는 동안 전국을 다니며 한 그의 강연이 나치 운동과 갈등을 빚게 됐고,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그 후 라인홀드 니버의 초청으로 미국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대학원으로 옮겼다.
1933년 47세의 나이에 새롭게 영어를 배우고, 그 이후 모든 저작을 영어로만 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영어가 서툴러 고생을 했지만, 영어로 말하거나 글을 쓸 경우 독일어보다 쉽고 부드럽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1933년 종교철학을 가르치기 시작, 1955년까지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철학적 신학 교수’로 알려졌고, 그 가까이 있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도 방문 교수로 철학 강의를 할 정도로 명강의를 했다. 그가 유니온 대학에 있을 때 영어로 쓴 『프로테스탄트 시대』 등의 논문 모음집, 『흔들리는 터전』 등의 설교 모음집, 특히 그의 대표작인 『조직신학』 제1권 등의 저작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이에 힘입어 1953년에는 영예로운 스코틀랜드 기포드 강연 강사로 초대되고, 1955년에는 하버드 대학교 신학대학으로 초빙되어 강의에 구애받지 않는 최우대 특별 교수가 되었다. 1962년까지 하버드에 있으면서 『조직신학』 제2권과 그 유명한 『신앙의 역동성』 등을 출판하였다.
1962년 시카고 대학으로 옮겨가 2년 동안 그 당시 시카고 대학 종교학의 대가 미르체아 엘리아데와 공동 세미나를 이끌면서 그와 학문적 교분을 두텁게 했다. 여기서 『조직신학』 제3권이 완성되었다. 1965년 10월 12일 저녁 시카고 대학 종교사학회에서 그의 동료들의 요청으로 ‘조직신학자를 위한 종교학의 의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거기서 그는 그가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그의 조직신학을 동양 종교를 포함하여 세계종교들의 통찰과 대화하면서 다시 쓰고 싶다는 그의 염원을 말하고, 이런 식으로 세계종교의 맥락 속에서 쓰이어지는 신학이 “신학의 미래를 위한 나의 희망”이라고 했다. 강연이 끝나고 오랫동안 박수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4시에 심장마비를 일으킨 그는 그 후 10일 만인 10월 22일 7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미국 인디애나주 뉴하모니에 있는 폴 틸리히 공원에 안치되었다. 조지아 하크니스는 틸리히를 두고, “미국 철학을 위해 화이트헤드가 있었다면 미국 신학을 위해 틸리히가 있다”는 말로 틸리히의 신학적 공헌을 찬양했다.
그의 가르침
틸리히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재해석하는데 일생을 바친 신학자였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가르침은 모두 ‘상징symbol’이었다. 그의 주저인 『조직신학』 목차만 보아도 ‘타락의 상징’, ‘그리스도의 상징’, ‘십자가의 상징’, ‘천국의 상징’ 등등의 용어가 등장한다. 타락, 그리스도, 십자가, 천국 등의 개념이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상징은 “그 자체를 넘어서는 다른 무엇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상징적인 개념들을 대할 때 우리는 그런 것들 자체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그것들이 가리키는 그 너머에 있는 의미를 찾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적 용어로 하면 이런 상징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그는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을 무시하고 어느 한때 인간의 필요에 부응하여 주어진 ‘과거’의 해석 자체를 붙들고 있겠다는 미국의 근본주의적 태도나 유럽의 정통주의적 자세는 ‘과거의 정황’에서 형성된 특수 해석 자체를 절대화하려 한다는 의미에서 ‘악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각 세대를 위해 그때그때 새롭게 해석하는 이른바 ‘응답하는 신학’으로서의 신학적 소임을 망각한 신학은 신학의 역할을 방기한 것이라는 뜻이다. 틸리히의 경우 그리스도교 상징을 해석하는 틀은 주로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었다.
그는 성경이나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에 나오는 이런 상징들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은 무의미하고 무모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성경을 심각하게 읽으려면 문자적으로 읽을 수 없고, 문자적으로 읽으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하였다. 틸리히가 영향을 받은 루돌프 불트만이 ‘비신화화’라는 용어로 신화의 재해석을 강조했다면 틸리히는 그 용어가 신화를 없애야 한다는 말로 오해될 소지가 있으므로 그 대신 ‘비문자화deliteraliz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한 셈이다. 신화나 상징은 호두가 깨어져야 그 속살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깨어져야’ 그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른바 “깨어진 신화broken myths”여야 신화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 셈이라는 뜻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종교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궁극 관심ultimate concern’이다. 그 궁극 관심의 대상은 결국 궁극적인 것, 곧 신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신’이라는 말도 상징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쓰는 ‘신’이라는 말 너머에 있는 궁극 실재로서의 신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신의 상징으로서의 신God as the symbol of God’이라든가 ‘신 너머에 있는 신God beyond God, God above God’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그는 궁극 실재로서의 신은 ‘상징적으로’ 표현하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틸리히는 물론 이런 상징들을 두고 ‘겨우 상징일 뿐인가?’ 하는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한다. 종교적 상징은 우리를 궁극 실재로 이끌어주는 필수 불가결의 신성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궁극 실재로서의 신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틸리히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신God과 신성Godhead을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은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 경험에서 이해된 대로의 신이고 신성은 언어나 상징체계 너머에서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궁극 실재라고 보았다. 이런 궁극 실재는 ‘하나의 존재a being’일 수가 없다. 궁극 실재가 ‘하나의 존재’라면 우리가 아무리 ‘위대하다’, ‘전능하다’, ‘전지하다’ 등의 현란한 수식어를 붙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존재들 중의 하나a being among others’로서 여전히 존재의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다른 존재와 특별하게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절대적이고 ‘조건 지워지지 않는’ 궁극 실재로서의 신은, ‘존재 자체Being-itself’라 하든가 ‘존재의 힘the Power of Being’ 혹은 ‘존재의 근거the Ground of Being’라 보아야 한다고 했다. 존재 자체 혹은 존재의 바탕으로서의 신은 ‘존재와 비존재’, ‘본질과 실존’ 등의 분별을 넘어서기 때문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믿고 있는 신은 결국 우상숭배나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셈이다. ‘존재의 근거’라는 용어는 가히 화엄 불교에서 말하는 ‘법계法界․dharmadhātu’를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틸리히는 스스로를 ‘경계인a man on the boundary’이라 하였다. 1960년 일본을 방문해서는 불교 사찰을 방문하고 선불교 스님들과 대화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때 받은 감명을 1961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행한 『그리스도교와 세계종교들과의 만남Christianity and the Encounter of the World Religions』이라는 강연을 통해 발표하고 그 후 작은 책자로 출판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와 불교에서 가르치는 니르바나를 비교하고, 종교 간의 관계는 ‘개종conversion’이 아니라 ‘대화dialogue’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명언으로 끝을 맺었다.
<모든 종교의 심층에는 종교 자체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경지가 있다. >
그는 시카고에서 한 마지막 강연에서도 비슷한 말을 되풀이했다. 틸리히는 신학자였지만, 이처럼 모든 종교의 심층을 꿰뚫어보고 우리를 그리로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생각하는 모든 종교인들을 위한 스승이라 하여도 지나칠 것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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