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불교 경전의 결집 과정과 논쟁점 / 조준호

수선님 2021. 2. 28. 13:08

불교 경전의 결집 과정과 논쟁점 / 조준호

상좌불교, 무시할 것인가 포용할 것인가

 

1.들어가는 말

오래된 불교 문헌에 의하면 인도불교사에 있어 불멸(佛滅) 후 네 차례에 걸친 석가모니 붓다의 말씀에 대한 편집 또는 편찬회의가 있었다. 이 가운데 상좌불교(Theravāda)의 빠알리(Pāli) 전승 문헌에는 세 차례가 언급된다. 불멸 후 처음으로 라자가하(Rājagaha)에서 500 아라한에 의한 제1차 결집, 불멸 100년 후 웨살리(Vēsalῑ)에서 계율상의 문제가 쟁점이 된 제2차 결집, 이후 모리야[Sk. Maurya] 왕조의 아소까 왕 때 적주비구(賊住比丘) 축출이라는 교단 정화적 차원의 제3차 결집이 그것이다.

본고는 기획 주제에 따라 빠알리 전승의 문헌에서 전하는 세 차례의 결집까지를 살펴보는 것이 그 범위이다. 물론 빠알리 전승이 아닌 한역된 산스끄리뜨 계통의 다른 불교부파의 문헌에서는 쿠샤나 왕조의 카니시까 왕 때 교법의 해석상의 이견(異見)을 정리할 목적으로 열린 제4결집도 인도불교사에서 이야기된다.

본고에서는 상좌불교 또는테라와다의 제3차 결집까지를 범위로 결집 개최의 논쟁점을 중심으로 결집의 역사적 의의를 중점적으로 논의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시 이러한 논의는 현재 또는 미래사회에 있어 불교 경전의 새로운 결집을 위한 형식과 내용에 대한 시사점을 고민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2.결집(結集: Saṁgīti)이란

결집(結集)이라는 말은 빠알리 또는 산스끄리뜨의 Saṁgīti라는 말의 한역이다. 어원적으로 Saṁgīti는 ‘노래하다’ ‘합창하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 Saṁgāyati(sam+gāyati)에서 명사화된 말이다. Saṁgīti는 Saṁgayana라는 말과 동의어인데 현재 빠알리 전통의 불교권에서는 일반적으로 Saṁgīti보다는 Saṁgayana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Saṁgīti에 대한 한역은 결집 이외에 합송(合誦), 집법(集法) 등송(等通) 등으로 옮겨졌다.

영어로는 Rehearsal, Song, Proclamation, Chorus, Music 그리고 Council 등으로 옮겨지나 주로 Council이라는 말이 많이사용된다. 결집은 경전 편찬회의라고 할 수 있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장소에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모여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을 종합하고 교정하는 편집 과정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확인된 불설은 참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합창하는 공인의 절차를 말한다.

즉, 불교 교단 내에서 공식적인 회합을 통해 당시에 유통되었던 불설(佛說)을 만장일치로 승인하는 합법적인 정전화(正典化) 절차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초기경전에 의하면 결집은 이미 석가모니 붓다 재세 시에 부촉되고 또한 부분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디가 니까야(Dīgha Nikāya)의 Pāsādika Sutta에 의하면 붓다의 제자들은 자이나교의 지도자 니간타 나따뿟따(Nigaṇṭha Nātaputta)가 임종하자 자이나 교단이 둘로 갈라져 자이나의 법(法)과 율(律)의 문제로 분규가 일어나고 있음을 붓다에게 보고한다. 이에 붓다는 자이나교의 분규를 교훈 삼아자신이 설한 법을 모두가 평등하게 함께 모여 의미(attha)에서 의미를, 자구(字句: vyañjana)에서 자구를 서로 비교해 보고 함께 합송(合誦)해야지 자이나 교단처럼 분규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계속해서 결집의 목적은 세상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청정행(淸淨行)의 가르침이 계속 이어지고 오래 머무를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설해진다.

다음으로 같은 니까야의 Saṁgīti Sutta는 경명 자체가 ‘결집경(結集經)’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경과 같이 이 경에서도 자이나교의 마하위라(Mahāvīra) 임종 후의 교단 분규를 교훈 삼아 불설이 온전히 보존되어 후세에 전하도록 사리뿟따의 지도에 의한 결집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정법(正法)으로서 230여 가지의 불설을 법수(法數)로 재정비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이 결집은 붓다의 감독 아래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리고 경의 마지막은 붓다의 인가로 마감하고 있다. 이 경에 상응하는 한역 아함은 바로 장아함의 《중집경(衆集經)》이다. 즉 중집(衆集)은 Saṁgīti에 대한 한역으로 합송을 위한 대중집회의 의미로 옮긴 것이다. 이 경전은 붓다 재세 시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결집을 보여 주는 것으로 불멸 후 회의체 성격의 결집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설을 법수에 따라 재정비하였던 원시적인 의미의 결집에서 다시 더 발전적인 차원으로 전개되었던 것은 불설에 대한 구분교(九分敎)와 십이분교(十二分敎)적인 정리이다. 이는 이미 초기경전 자체에서 불설을 형식과 내용적인 면으로 범주화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 같은 구분교와 십이분교는 당연히 수기설법(隨機說法)하였던 붓다의 면모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현재와 같은 경전의 체계로 결집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아마 구분교와 십이분교와 같은 형식과 내용으로 불설이 수지 독송되었을 가능성을 나타낸다. 그러던 것이 현재와 같은 Pañca Nikāya(五部)나 사아함(四阿含)으로 재정비되다가 결국 삼장(三藏; Ti-Piṭaka)의 기본 틀에 따라 방대한 양의 불설이 완성되고 종결되었을 것이다.

3.불설(佛說)의 유통 방식

석가모니 재세 시 불설(佛說)의 유통 방식을 알 수 있는 경전이 있다. 다섯 니까야(Nikāya) 가운데 마지막인 꾸다까 니까야(Kuddhaka Nikāya)의 우다나(Udāna; 自說語)와 위나야 삐따까(Vinaya Piṭaka; 律藏)에 나타난다. 우다나는 쿠다까 니까야의 15개 경전 가운데 하나로 대체로 초기경전 가운데에서도 그 성립 시기가 빠른 것으로 이야기된다. 불설의 유통 방식을 잘 보여 주는 우다나의 《소나경(Soṇa Sutta)》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붓다 재세 시 마하깟짜나(Mahākaccāna)) 장로는 불교 발상지에서 멀리 떨어진 서인도의 아완띠(Avanti)에서 전법을 하고 있었다. 그때 소나 코티칸나라는 우바새가 마하깟짜나 장로를 스승으로 모시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는 고요한 곳에서 홀로 선정에 잠겨 있다가 출가하고픈 생각이 일어나 스승이 있는 곳으로 가서 출가를 허락해 주기를 소원한다. 하지만 마하깟짜나 장로는 일생 동안 오직 하루에 한 끼만을 먹고 홀로 지내야 하는 청정행은 결코 쉽지 않은 것으로 일단 재가자로서 하루 한 끼의 식사와 홀로 지내는 청정행을 실천해 보도록 권유한다.

이에 소나는 출가하려던 생각을 단념하고 스승의 가르침대로 살다가 다시 출가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 스승에게 말씀드렸으나 이전과 같은 대답을 듣는다. 그래서 소나는 출가하려던 생각을 단념하다가 어느 때 다시 출가를 허락해 주기를 스승에게 청할 때에야 마하깟짜나 장로는 결국 우바새 소나 코티칸나의 출가를 허락한다. 하지만 당시 아완띠는 불교 발상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비구가 거의 없었다. 마하깟짜나 장로는 3년간 여기저기에서 10인의 비구승을 모아 소나 장로에게 구족계를 주었다. 왜냐하면 구족계는 삼사칠증(三師七證)의 10명의 비구가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출가하여 수행을 하던 소나 비구는 어느 때 그의 직접적인 스승으로부터 전해만 듣던 석가모니 붓다를 직접 친견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이에 소나는 붓다를 친견할 수 있는 여행을 다시 허가해 주기를 그의 스승에게 청한다. 마하깟짜나 장로 또한 소나의 소원을 기특하게 여기고 허락하자 소나는 아완띠로부터 먼 여행을 시작하여 사위성에 머물고 있는 붓다가 계신 곳에 이른다. 이때 붓다는 시자인 아난다를 시켜 멀리서 온 손제자(孫弟子)에게 모든 가능한 편의시설을 제공하도록 부촉한다.

아난다는 소나를 붓다와 가까이 머물도록 소나를 챙겨 준다. 이때 붓다는 밤 깊도록 밖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승방에 들어가자 소나 또한 붓다를 따라 들어간다. 그리고 붓다는 새벽에 일어나 소나에게 그동안 배운 법을 설해 보도록 하자 소나는 주저하지 않고 긴 게송을 독송한다. 이때 붓다는 소나가 자신의 가르침을 틀리지 않고 잘 기억하여 암송을 해내자 대단히 기뻐했다고 한다.

이때 멀리서 온 소나가 마하깟짜나 장로로부터 전해들은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은 다름 아닌 현존하는 《숫따니빠따(Sutta Nipāta)》의 제4장인 〈앗타까악가〉이다. 현재에도 이 경은 꾸다까 니까야의 15개 경전 가운데 하나로 초기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층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문헌성립사를 다루는 현대 학자들에 의하면 이구동성으로 이 경의 제4장과 제5장은 언어나 내용 면으로 볼 때 불교 최고(最古)의 경전이라 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붓다 재세 시부터 불설(佛說)은 이미 일정한 형태로 편집 정리되어 출가와 재가 사회에 널리 유통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현재와 같이 필기구가 용이하지 않는 사회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듣고 이를 일정한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여러 사람들이 수지독송(授持讀誦)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숫따니빠따》의 제4장의 불설(佛說)은 석가모니 붓다의 10대 제자로 이야기되는 다문(多聞)의 마하깟짜나 장로 또한 기억을 통해 아완띠 국에서 소나 비구에게 송출(誦出)했고 다시 소나 비구는 붓다를 친견하는 자리에서 불설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일정한 형식과 내용을 갖춘 최초의 불설은 이미 석가모니 붓다의 출세(出世) 기간에 유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종의 불교 경전의 원형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초기경전에 이미 출가자들이 불설에 대한 암송 정도를 경쟁하는 장면이 여러 곳에 나타난다. 이러한 불설의 원형은 다시 제자들이 분업식으로 수지독송하는 방법으로 나아갔다. 초기경전에는 Vinayadhara(持律師) 와 Dhammadhara(持法師)라는 말의 사용으로 나타난다. 즉 dhara는 ‘갖고 있는’ ‘마음에 새기고 있는’의 의미를 가진 말로 Vinayadhara는 교단의 수칙을 분업적으로 그리고 전문적으로 맡아서 암송하여 전하는 사람을, Dhammadhara는 붓다의 철학적 실천적 가르침을 마찬가지로 암송하여 전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 Dhammadhara는 교단 수칙이 아닌 경전(sutta)을 주로 전문적으로 분업적으로 수지독송했던 사람들이다. 이러한 전문적이고 분업적인 암송 전수자 집단의 존재는 후대 아소까 왕의 비문(碑文)에서도 증명된다. 아소까 비문에서는 Suttantika는 ‘경(經)을 수지(授持)한 사람’ Dhammakathika는 ‘경을 구송(口誦)하는 설법사(說法師)’ 그리고 Peṭakin은 ‘율장(律藏)이나 경장(經藏)을 가진 사람’, Panca-nekāyika라 하여 ‘다섯 니까야를 가진 사람’ 등의 용례가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전문적인 불설 전수자 집단의 명칭에 이어 바나까(Bhāṇaka, 通誦者)라는 전문용어가 다시 등장한다. 이전보다 더 세분화된 암송 전문 집단으로 예를 들면, 초기경전의 주석서(Aṭṭhakathā)에 의하면 경장인 다섯 니까야에 있어 디가 니까야(Dīgha Nikāya)를 전문적으로 암송하여 전수하는 집단을 디가 바나까(Dīgha-bhāṇaka)라고 이름 부르며 맛지마(Majjhima), 상윳따(Saṁyutt), 앙굿따라(Aṅguttara)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섯 번째인 꾸다까 니까야(Kuddhaka Nikāya)는 각각의 15개 경전에 따라, 예를 들면 자따까 바나까(Jātaka-bhāṇaka)나 담마빠다 바나까(Dhammapada-bhāṇaka) 등으로 각각 호칭되었다.

흥미롭게도 bhāṇaka라는 말은 대승경전에서도 법사(法師 : Dharmabhāṇaka)라는 말로 나타난다. 이는 시기적으로 대승경전의 성립 시기와 초기경전의 주석서의 성립 시기가 관련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을 의미할 것이다. 예를 들면, 《법화경》에 사용되는 법사(法師)라는 말은 대승경전을 수지하여 전승하는 사람을 말한다. 흔히 사람들은 필기구가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 인도에서 가르침을 기억하여 암송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것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생각 외로 그것은 그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불교 이외의 다른 인도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많은 분량의 경전을 순전히 암송에 의존하여 유통시키고 전승시켰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요즘의 상상력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소위 삼장법사(三藏法師)란 삼장을 통틀어 암송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고 이러한 전통이 버마(Burma)에도 이어져 인도 유학시 같이 공부했던 버마 스님[Bhikkhu Ottara]에 의하면 1970년도만 해도 버마에는 8명의 삼장법사가 있었고 2000년도에는 3명이 생존해 있다고 했다. 이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된 법계(法階)라고 한다. 그 스님 또한 많은 경전을 암송하고 있어 필자가 임의로 선택한 경전을 암송해 볼 것을 주문하면 거침없이 틀리지 않고 독송하는 것에 경탄해 마지않은 적이 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문헌학자들에 의하면 불교 경전을 포함하여 다른 고대 문헌에 있어 이 암송으로 전해져 오던 형태가 더욱더 정확하다고 한다. 오히려 필사하면서부터 오자와 탈자 등이 많이 발생하여 이러한 여러 판본이나 필사본을 비교하여 교정하는 것이 현재 문헌학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미 석가모니 붓다 시대부터 일정한 형식과 내용을 갖춘 불설의 원형이 성립되어 전승되다가 제1차 결집과 같은 종합적인 공인 절차를 통해 합법적인 정전화(正典化)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2차 결집에서와 같이 단일한 불교 교단이 최초로 상좌부와 대중부로 갈라지는 근본분열을 통해 각 부파마다 각기 독자적인 불설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이후 두 개의 부파에서 18개 내지 20여 개로 다시 지말 분열한 초기불교 부파마다 독자적인 삼장(三藏)을 소지하고 있었음은 인도를 찾은 중국의 구법승의 여행기에도 보고되어 있다. 이 가운데 현재까지 가장 완전한 형태로 전승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현재 논의의 대상인 상좌부의 삼장이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종교인 불교가 그것도 오랫동안 구전(口傳)된 형태로서의 경전이 현재와 같은 정도로 전해지고 있음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다른 종교나 사상에 비하면 너무나도 충실한 전승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설이 일점일획도 변화 없이 고정되어 전승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현재에 있어 빠알리 삼장을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다른 부파의 경전들을 비교해 보면 부파 간의 입장에 따른 가감첨삭(加減添削)과 같은 재편집이 끊임없이 있어져 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평소 불설이야말로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다고 생각한다. 불설은 화석화되어 전승된 것이 아니라 부파 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변화 과정을 겪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대승불교의 경전은 이러한 인도불교의 경전관(經典觀)이 정점에 이른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불교 경전의 성립과 역사

제1차 결집과 제2차 결집에 대한 문헌적인 연구는 루이 드 라 발레 뿌생(Louis Dela Vallee Pou-ssin)과 두트(N. Dutt) 그리고 국내에서는 호진 스님 등의 논의가 정교하다. 제1차 결집과 제2차 결집은 율장(Vinaya-Piṭaka)에서 교단(敎團) 생활의 규칙을 설하고 있는 건도부(犍度部, Khandaka)의 끝부분에 부수된 2장에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제3차 결집은 스리랑카 전승의 《디빠방사(Dīpavaṁsa; 島史)》 《마하방사(Mahā-vaṁsa; 大史)》 그리고 《사마타빠사디까(Samatapāsādikā)》에 나타난다. 《사마타빠사디까》는 율장의 주석서적인 성격으로 동아시아는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로 한역되어 내려오고 있다. 여기서는 결집에 관한 기존의 여러 연구 결과물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다시 재구성해 본다.

1) 제1차 결집(Paṭhama saṁgīti)

제1차 결집은 붓다가 열반에 든 해에 라자가하(王舍城)에 500명의 비구가 모인 가운데 행해졌다고 한다. 때문에 ‘왕사성 결집’이나 ‘오백집법(五百集法)’이라 불린다. 제1차 결집을 전하는 문헌은 율장은 물론 경장의 경(經)과 논서 그리고 율장의 주석 문헌 등에 나타난다. 예를 들면, 경으로는 《비니모경(毘尼母經)》 《반니원경(般泥洹經)》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 《가섭결경(迦葉結經)》 《아육왕경(阿育王經)》 등이고, 율장으로는 Vinaya-Piṭaka 《사분율(四分律)》 《오분율(五分律)》 《십송율(十誦律)》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근본설일체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毘奈耶雜事)》 《대사(大事; Mahāvastu)》 그리고 논서로는 《대지도론(大智度論)》 《분별공덕론(分別功德論)》 등이다. 율장의 주석 문헌으로는 《사마타빠사디까(Samatapāsādikā)》와 이에 대한 한역본으로 《선견율비바사》 등이다.

제1차 결집을 언급한 각 문헌들의 성립 시기는 경장의 경우 대체적으로 빠알리의 수따삐따카(Sutta-piṭaka; 經藏)나 한역 아함경(阿含經) 이후로 볼 수 있고, 율장의 경우 초기불교 범위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율장과 경전은 초기불교 전통의 여러 부파 소전(所典)이다. 나아가 논서는 흥미롭게도 용수(龍樹)의 저술로 알려진 초기 대승경전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의 주석서에 제1차 결집이 나타난다. 이 외에도 스리랑카 불교 역사서인 《디빠방사(Dīpavaṁsa; 島史)》 《마하방사(Mahāvaṁsa; 大史)》나 중국 구법승의 여행기인 《법현전(法顯傳)》이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등에서도 나타난다. 이렇게 역사서나 인도를 여행했던 구법승들의 기록에도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인도 불교에 있어 제1차 결집에 관한 전승의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각각의 문헌들에 따라 이야기 구성이 전적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여기서는 빠알리 소전인 율장(Vinaya-Piṭaka)의 《소품(Cullavagga)》에 나타난 결집 기사를 중심으로 결집 과정을 재구성해 본다.

먼저 제1차 결집을 결행하게 된 계기는 나이 들어 출가한 수밧다(Subhadda)의 망언으로 출발한다. 마하가섭(摩訶迦葉, Mahakasspa)은 제자들과 함께 유행하는 도중에 한 외도로부터 석가모니 붓다의 반열반(般涅槃) 소식을 듣게 된다. 함께한 비구들 대부분이 붓다의 반열반을 슬퍼했지만 수밧다 비구는 다음과 같은 충격 발언을 한다.

“존자들이여, 이것으로 충분하다. 울지도 슬퍼하지 마시오. 우리는 드디어 대사문(大沙門)으로부터 벗어났다. 우리는 이제까지 대사문으로부터 ‘이것은 하라, 이것은 하지 마라’와 같은 말을 들을 때 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하고, 좋아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마하가섭은 이 같은 말을 듣고 내심 붓다 이후의 교단 상황에 대해 염려를 하게 되고 ‘결집’을 단행하여 교단의 기강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붓다의 장례식을 마치자 곧바로 모든 대중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결집의 당위성을 긴박하게 호소하였다고 한다.

“존자들이여, 우리는 마땅히 법(法)과 율(律)을 결집해야 합니다. 비법(非法)이 정법(正法)을 가리고 드세지기 전에, 계율이 아닌 것이 계율을 가리고 드세지기 전에, 비법을 설하는 자가 힘을 얻고 정법을 설하는 자가 힘을 잃기 전에, 계율이 아닌 것을 설하는 자가 힘을 얻고 계율을 설하는 자가 힘을 잃기 전에 결집을 합시다.”

이때에 자리에 모인 모든 대중은 마하가섭의 호소에 찬동하여 본격적인 결집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결집 개최를 위한 적절한 장소는 당시 최고 강국이었던 마가다의 수도인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가 선정되었다. 이유는 많은 대중이 일정 기간 함께 머물 수 있는 적당한 곳이라는 것이다. 최대 강국의 수도답게 물자가 풍부한 곳이어서 음식물과 생활필수품을 쉽게 공급받을 수 있는 요충지였다. 그리고 다시 왕사성에서도 칠엽굴(七葉窟, Sattapaṇṇiguhā)이 특정한 장소로 더 좁혀졌다.

칠엽굴은 왕사성 가까이에 있는 웨바라(Vebhāra: 毗訶羅) 산 정상의 커다란 두 개의 동굴을 말한다. 이곳은 초기경전에 먼 유행길에 있는 비구들의 거처로도 나타나며, 붓다도 종종 머물던 장소로 반열반 전에 시자 아난다에게 붓다로 하여금 이 세상에 1겁을 더 머물러 주시기를 청하도록 하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칠엽굴은 큰 도시 가까이 있어 탁발이 용이했던 점과 함께, 특별히 결집 장소로 채택된 또 다른 이유는 오래 머물면서 필요한 물품의 구입이 가능했고, 산과 동굴이어서 외부와 차단할 수 있는 독립공간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즉 오랫동안 결집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이곳을 찾아 다시 지리적 상황을 살펴보아도 경사가 급한 산 중턱에 두 동굴 밖이 멀리 트여 있어 전망이 좋다. 이 결집을 굴외결집에 반해 굴내결집(窟內結集)이라 하지만 500명의 인원이 동굴 내에 머물기는 비좁은 장소처럼 느껴지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후대 율장 주석서나 스리랑카 역사서는 당시 결집을 후원하였던 마가다의 왕인 아자따삿뚜(Ajātasattu; 阿闍世)가 칠엽굴 밖에 설치해 준 회의장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고 한다.

결집 장소가 결정되자 다시 40일 뒤에 마가다 국의 칠엽굴에 집결(集結)하기로 하고 마하가섭과 아누룻다의 인도하에 장례식 장소인 꾸시나라의 말라(Malla) 국을 떠났다. 당시 교단의 제도는 3개월 안거(安居 ; Vassa) 기간이 있었다. 인도에서 안거는 비가 부정기적으로 계속되는 몬순 기간에 출가자들이 유행하지 않고 일정한 장소에 머물며 수행하는 기간이다. 때문에 결집 시기와 기간을 안거 기간으로 말하는 것은 당시 교단 상황으로 볼 때 적절하다. 그리고 마가다 지역의 몬순 기간은 대략 6월부터 9월에 걸친 3개월 동안이다. 이는 불교사에서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불기(佛紀)의 시작이 바로 그것이다. 즉 불기의 첫 해는 위대한 스승과 함께하지 못한 첫 안거의 해부터 산정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결집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으로 500명의 아라한이 선출되어 후에 500결집이라고도 한다. 마하가섭이 사회자가 되고 이발사 출신 우파리(優波離, Upali) 존자가 율(律, Vinaya)을, 아난다(阿難, Ananda)가 경(經)에 해당하는 법을 암송하여 그 내용이 불설(佛說)임을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마하가섭이 먼저 우파리에게 어느 장소에서, 누구에게, 어떠한 이유로, 계율이 제정되었는지를 질문하면 이에 답변으로 송출한 것이 바로 Pātimokha(波羅提木叉, 戒本)라는 율(律)이다. 마찬가지로 아난다에게 붓다가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설하였는가를 묻는 것에 대해 아난다는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여 송출한 것이 경(經, Sutta)이다. 붓다가 계(戒)를 주고 삭발할 때 이발사 출신인 우파리가 맡았기 때문에 계율을 많이 들을 수 있었고, 아난다의 경우 오랫동안 붓다를 시봉하면서 설법을 많이 들을 수 있어 각각 율과 경을 송출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우파리와 아난다에 의해 송출된 율과 경은 참가한 아라한들에게 진위의 심의를 거친 후 참가자 전원이 합송하는 형식을 거쳤기에 결집의 다른 말이 합송인 것이다. 즉 saṁgīti는 당시에 유통되었던 불설을 참가한 500명의 아라한 전체가 합창하는 것으로 율과 경을 교정하여 공인한 정전화(正典化) 작업이었음을 의미한다. 상좌부의 율장(Vinaya-Piṭaka)을 포함한 초기불교 전적은 이때 결집된 것이 현재의 율장과 경장[Pañca Nikāya]이라고 한다. 제1차 결집이 끝난 후 부수적으로 아난다의 5가지 과실에 대한 문책이 마하가섭에 의해 거론되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붓다가 직접 불멸 후 만약 교단이 원한다면 소소계(小小戒)를 버려도 좋다는 유언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묻지 않은 점. 둘째, 부처님의 가사를 밟은 허물.셋째, 여성을 먼저 조문하게 하여 눈물자국을 붓다의 유체에 남기게 한 허물. 넷째, 1겁 동안 머물기를 청하지 않은 점. 다섯째, 여성 출가를 허락하도록 한 점 등이다. 모두 아난다에 의해 참회와 함께 나름의 변호가 수용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같이 마하가섭에 의한 아난다의 문책은 아난다가 아라한이 아니기에 결집에 참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까스로 아라한 경지를 성취하고 참석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붓다의 반열반 후의 교단의 상황을 보여 주는 재미있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난다가 문제시되는 분위기는 제1차 결집이 경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또한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붓다의 마부 출신으로 출가하여 포악한 성격 때문에 화합하지 못했던 찬나(Channa; 車匿)에 대한 제재 조치이다. 붓다의 유훈에 따라 찬나는 범단벌(梵檀罰; Brahma-daṇda)이 적용되자 이후 참회하고 개과천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역사적인 사실이든 아니면 뒤늦게 만들어진 이야기이든 붓다와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 불멸 후 힘의 이동을 보여 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아난다와 찬나는 붓다와 가까이 있었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행실에 있어 교단 구성원들이 비난을 사는 일이 있었을 것이고 이를 불멸 후 교단의 기강 차원에서 정리한 것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하가섭의 주도로 이루어진 결집이 끝났을 때, 뒤늦게 뿌라나(Purāna) 존자가 500명의 비구들과 함께 다끼나기리(Dakkhi-ṇāgiri)로부터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당도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결집이 끝난 상황이어서 마하가섭 주도의 결집을 수용할 것을 제의했지만 뿌라나는 붓다로부터 직접 들은 가르침이 있다며 결집의 수용을 거부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은 굴외결집(窟外結集)이라 하여 미처 참여하지 못한 비구들이 나중에 도착하여 굴 밖에서 따로 왓시까(Vassikā; 婆師迦)를 중심으로 결집을 행했다고 한다. 이 같은 이야기는 교단의 위계적 주도권을 넘겨달라는 데와닷따의 요구를 거부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고 붓다의 마지막 유훈인 자등명(自燈明)·법등명(法燈明)의 가르침으로 볼 때에도, 붓다의 교단은 위계적 차원의 단일한 교주나 후계자를 인정하지 않았던 상황에 연유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마하가섭 주도의 결집이 결코 대표성을 갖는다고 보지 않으려는 집단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제2차 결집(Dutiya saṁgīti)

제1차 결집에 이어 제2차 결집은 율장(Vinaya-Piṭaka)의 《소품(Cullavagga)》과 함께 《사분율(四分律)》 《오분율(五分律)》 《십송율(十誦律)》 《비모니경》과 율장의 주석 문헌인 《사마타빠사디까》와 역사서인 《디빠방사》 《마하방사》 등에도 나타난다. 제2차 결집은 제1차 결집 때보다 많은 수의 700 아라한이 참여했기에 ‘칠백집법(七百集法)’ 또는 ‘칠백결집(七百結集)’이라고 하고 결집 장소가 웨살리였기에 ‘웨살리 결집’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도 제1차 결집과 같이 율장의 《소품》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2차 결집은 불멸 후 대략 100년 후, 시수나가(Sisunāga) 왕조의 깔라소까(Kālāsoka) 왕의 치세 때에 일어난 일로 이야기된다. 계기가 된 것은 계율에 철저한 서인도 출신의 야사(耶舍; Yasa)라는 비구가 동인도의 웨살리(Vesali)로 유행할 때 그곳 비구들이 재가자들로부터 편법으로 금은(金銀)을 보시받는 광경을 목격하고서 정사(正邪)의 시비(是非)를 따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즉 그들은 물을 담은 구리 그릇을 비구 승가의 중앙에 두고 금은을 받고서 야사에게도 분배받을 것을 권유했지만 야사는 계율상 비법(非法)이라고 거부하고 비판했다. 더 나아가 야사는 재가자에게 계율을 들어 금전을 보시하지 못하도록 말렸다. 그러자 웨살리 비구들은 오히려 야사를 힐난하고 그에게 적법하지 않게 하의갈마(下意竭磨)를 적용하려 하였다. 이에 야사는 그들에게 계율상 하의갈마를 받은 비구는 수반(隨伴) 비구를 동행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들어 자신에게 수반 비구를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웨살리의 재가신자들에게 “나는 비법(非法)을 비법이라고 하며, 법을 법이라고 하며, 율이 아닌 것을 율이 아닌 것이라고 하며, 율을 율이라고 한다.”고 하며, 금은에 대한 비법을 말하였다. 이에 재가자들은 웨살리 비구들보다는 야사의 진정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웨살리 비구들은 분개하며 야사에게 거죄갈마(擧罪竭磨)를 다시 행하려고 하였다. 이 같은 시시비비로 인해 궁지에 몰린 야사는 서인도 등의 다른 비구들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결국 교단의 구성원 사이에 큰 쟁점으로 발전하게 되어 웨살리에 동인도와 서인도 등지로부터 700명의 비구들이 모여 율에 대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간으로는 8개월이 소요되었고 그 결과로 경과 율을 결집하는 제2차 결집이 결행되게 된 것이다.

당시 고명한 장로들을 중심으로 양측에 4명의 단사인(斷事人)을 각각 선출하였고, 사회는 레바타(Revata) 장로가 맡아 갈마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레바타(Revata) 장로가 십사(十事)의 항목 하나하나를 묻는 데에 대해 삿바까미(Sabbakami)장로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계율상 문제가 된 십사(asavatthuṇi)의 각 항목마다 설명을 한 후에 율에 저촉되는 근거를 심의하는 방식이었다. 십사의 내용은 전하는 문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율의 해석을 둘러싼 대립과 논쟁이 일어난 사실은 분명하다. 실제로 금은의 수수뿐만 아니라 동인도의 비구가 관행처럼 계율을 저촉했던 다른 비법을 포함한 십사는 선정된 장로들의 심의 끝에 결국 모두 불법(不法)으로 판정하였다.

여기서 비법으로 판정 받은 십사는 다음과 같다. 첫째, 뿔로 만든 용기에 소금을 축적하는 것, 둘째, 정오가 넘은 뒤라도 해 그림자가 손가락 두 마디를 넘기기 전에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 셋째, 한 번 탁발해서 충분한 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다른 마을에 들어가 새 음식을 탁발하는 것, 넷째, 동일한 계(界; sīma)에서 따로 포살을 행하는 것, 다섯째, 교단의 문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 참석하지 않은 비구의 동의를 예상하여 먼저 결정한 후 나중에 온 비구에게는 사후 승낙을 구하는 것, 여섯 번째, 붓다나 아사리(阿闍梨, ācariya)의 관행을 자기도 행하는 것, 일곱 번째, 식사 후에 소유·석밀을 또다시 우유에 타서 마시는 것, 여덟 번째, 아직 술이 안 되었다고 생각된 발효한 야자즙을 마시는 것, 아홉 번째, 테두리가 없는 헝겊을 방석으로 쓰는 것, 마지막 열 번째는 금은을 보시받는 것 등이다.

이러한 십사(十事)에 대해 비법(非法)이라고 판정하였으나 금은을 받았던 비구들은 불만을 품고 1만 명이 모여 또 다른 큰 규모의 결집(Mahasangiti)을 행하였다고 스리랑카 불교역사서인 《디빠방사(Dīpavaṁsa)》 《마하방사(Mahāvaṁsa)》는 전한다. 이로 인해 그때까지 단일한 교단이 최초로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분열되었고, 이를 인도불교사에서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고 한다.

이처럼 제2차 결집은 주로 계율상의 문제가 중심이었고 그 가운데 금은을 보시받아 배분하는 것이 가장 큰 쟁점이었다. 기본적으로 출가 비구의 계율정신이 무소유(無所有)에 바탕하고 있는 입장에서 출가자가 재가자로부터 금은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러한 보시물을 개인 소유 재산으로 삼는 행태로까지 율을 저촉하자 이에 대한 바른 계율에 대한 수지를 종용한 사건이었다. 이는 현재 한국 불교의 출가사회에 있어서도 관행화된 사안이라서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그렇지만 현대 학자들 가운데는 십사 논쟁은 시대 변화에 따른 계율 해석과 적용이라는 점을 들어 대중부를 진보적으로 그리고 계율을 엄격하게 고수하려 했던 상좌부를 보수적인 것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3) 제3차 결집(Tatiya saṁgīti)

인도불교사에서 제3차 결집은 제1, 2차 결집과 달리 율장(Vinaya-Piṭaka)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율장 성립이 이루어진 한참 후의 일이어서 제1차 결집이나 제2차 결집과 달리 율장 본문 등에 싣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신 율장의 주석 문헌인 《사마타빠사디까(Samatapāsādikā)》와 역사서인 《디빠방사》 《마하방사》 등에 나타난다. 제3차 결집은 모리야 왕조의 수도인 빠탈리뿌따(Pataliputta; 華氏城)에서 이루어졌기에 ‘화씨성결집(華氏城結集)’이라 하거나 1,000명의 아라한이 참여하였기에 ‘천인집법(千人集法)’ 또는 ‘일천결집(一千結集)’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도 《사마타빠사디까》와 역사서인 《디빠방사》 《마하방사》 등에 나타난 바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결집의 계기가 된 것은 불멸 후 대략 200년 후 모리야 왕조의 아소까(Asoka; 阿育王) 왕 때로, 불교를 깊이 신앙하게 된 왕은 불교 교단에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많은 절과 탑을 세우고 승려를 잘 공양하자 6만의 외도가 들어와 7년 동안이나 포살(布薩 : Uposatha)과 자자(自恣 : Pavarana)를 시행하지 않는 등 교단이 크게 타락하였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왕은 당시의 고승인 목갈리뿌따 띠사(Moggaliputta-Tissa; 帝順)와 상의하여 교단 정화를 위한 결집을 단행하였다고 한다.

당시 많은 수의 외도(外道)들이 불교 승려로 가장하고 교단 내에 머물면서 교단의 화합을 깨뜨리고 있었다. 이러한 비구를 적주비구(賊住比丘; theyyasaṁvāsaka)라고 하는데, 적주비구란 진실한 수행에는 마음이 없고 이득이나 생존의 방편으로 또는 불교를 도둑질하기 위해 불교 교단에 출가한 자를 말한다. 즉 승복은 입고 있으되 출가자 본연의 생활을 하지 않고 생존 수단으로 위장 출가한 자를 말한다. 왕은 그들을 축출하기 위해 목갈리뿌따 띠사를 중심으로 교설의 확정과 승가의 화합을 도모하는 방안을 세우도록 하였다.

이에 목갈리뿌따는 천 명의 아라한 승려를 선출하여 스스로 상수(上首)가 되어 결집을 행하였는데, 아소까 왕 즉위 18년에 시작하여 9개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결집 과정은 모든 비구 상가를 소집하여 왕이 참관하는 가운데 교리문답을 통해 적주비구를 색출했다 한다. 면전에서 불교의 대요를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써 비구들 가운데 불교의 참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외도의 신앙이나 영혼론 등과 혼돈하여 답하는 자를 색출한 것이다. 이때 왕명에 의해 결집을 거부하는 몇몇 사문들은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려 6만의 비구가 적주비구로 판정되어 불교 교단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일종의 교단정화작업(佛敎淨化作業) 차원이었다. 불교 교단이 자체적으로 정화 능력이 없을 때 왕권이 불교 교단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인도불교사의 첫 사례로 간주할 수 있다. 이렇게 적주비구를 정화하고 100명의 아라한에 의해 삼장(三藏)을 합송하는 결집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교단정화작업 차원의 결집으로 가장 중요한 결과물은 논장(論藏; Abhidhamma-piṭaka) 7론 가운데 《논사(Kathāvatthu)》라고 한다. 《논사》의 내용은 당시 비구들에게 교리문답을 통해 심사를 했던 것으로 당시의 이단적인 견해를 종합적으로 비판 정리하고 있는 논서이다. 이로써 제3차 결집에 이르러 경(經)과 율(律)과 함께 논(論)도 결집되어 삼장이 완성되고 확정되었다고 한다.

제3차 결집 이후 회의의 결정에 따라 아직 불교가 미치지 않은 인도 아대륙과 해외에 포교사 파견이 이루어졌다 한다. 이는 현재 발견된 아소까의 마애법칙(磨崖法勅) 제13장에도 아소까 왕이 인도 변경지와 다른 나라에 불교 전도단을 파견한 비문이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아소까가 불교 교단의 화합에 힘을 기울였던 사실은 현재 남아 있는 비문 가운데 사르나뜨, 산찌, 꼬삼비에서 화합중(和合衆, samagga saṁgha)이 되지 못하고 교단의 분열 현상이 일어나자 승가를 파괴하는 일을 경고하는 문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5. 결집의 의의

빠알리 문헌에 나타나는 결집의 역사는 이상과 같다. 그리고 본격적인 불교 경전의 문자화는 빠알리 전승의 경우 B.C.E. 1세기경 스리랑카에서 이루어졌고, 아대륙의 본토에서는 C.E. 1~2세기경의 까니시까 왕 때의 결집이라 한다. 훨씬 이전에 극히 부분적이지만 불교 경전과 관련한 문자는 이미 아소까 왕의 비문에서 증명된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 규모와 정도를 알 수 있는 어떠한 자료가 없다. 다만 대승경전이 B.C.E. 1세기와 C.E. 1세기에 즈음하여 출현하였고, 대승경전의 유통이 문자화된 경전의 사서(寫書)를 강조하고 있는 점은 초기불교권에서 이미 문자화가 상당히 진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된 바가 없지만 앞으로 상당히 기대가 되는 분야이다.

다시 빠알리 불교 전통에 의하면, 모리야 왕조의 아소까 왕 시대의 ‘제3차 결집’ 이후 천여 년이 경과한 12세기경, 스리랑카의 바락까 왕의 지시에 의해 ‘제4차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후에는 19세기 중반, 영국 식민지하의 버마(Burma)에서는 불법의 소멸을 막기 위해 1868년부터 4년간 경전을 돌에 새기는 석경(石經)의 결집이 ‘제5차 결집’으로 그리고 다시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54년부터 3년간에 걸쳐 ‘제6차 결집’이 개최되었다. ‘제6차 결집’의 삼장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책으로 출간되어 유통되고 있으며, 불교 발상지인 인도에서 인도 문자(Devanagari)로 다시 빠알리 삼장을 출간하는 데 저본이 되어 현재 날란다에디션(Nalanda Edition)으로 불리며 유통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결집이란 불설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편찬하는 일로서 교법(敎法)의 합송(合誦)을 의미하며, 대중집회에서 공인된 성전을 같이 외움으로써 불설(佛說)로서 위치를 갖는 것이다. Saṁgīti의 한역이 결집으로 옮겨진 것은 ‘불설을 묶어 모은 것’을, 합송은 ‘인정된 불설을 공인하는 의미에서 다 함께 독송하는 것’을, 그리고 집법(集法)은 ‘불설의 모음’을, 등송(等通)은 ‘평등한 위치에서의 수지독송’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빠알리 상좌부 전승의 결집을 전체적으로 평가해 보면, 제1차 결집은 경장(經藏)과 관련된 문제에 중점이 놓여 있다 할 것이다. 교단의 수칙인 계율 조항의 문제보다는 교조의 부재를 통해 불설의 유실에 대한 염려와 함께 사람마다 제각기 잘못된 이해로 인한 혼란과 분규를 방지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는 서로 간에 상충된 교리적 이해로 분규가 일어난 자이나교의 선례를 교훈 삼고 있음을 초기경전이 이미 말하고 있다. 따라서 붓다의 직제자들은 불멸 후 급선무로 스승의 가르침부터 정리하여 교단을 지속적으로 안정시킬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제1차 결집은 경전을 구술한 아난다와 관련한 신상의 문제가 또한 크게 논란이 된 이유일 것이다.

다음으로 제2차 결집은 율장(律藏)과 관련된 문제에 초점이 놓여 있다. 이는 십사(十事)와 같은 계율상의 문제가 쟁점이 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3차 결집은 삼장 가운데 추가되어 성립한 논장(論藏)과 관련된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결집은 교단정화라는 차원에서 적주비구의 축출과 함께 쟁점이 된 것은 당시 여러 부파의 217가지 이설(異說)에 대한 상좌부의 비판적 검토를 보여 준다. 그래서 논장(論藏; Abhidhamma-piṭaka)의 7론 가운데 《논사(Kathāvatthu)》는 제3차 결집의 교리적 측면에서의 교단 정화에 대한 결과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로써 빠알리 전승의 상좌부 전통의 결집은 율장과 경장 그리고 논장이 추가되어 최종적으로 삼장이 완성된다.

빠알리의 상좌부가 전하는 인도불교사의 삼장 결집의 완성은 제3차 결집으로 끝난다. 하지만 다른 부파인 설일체유부의 소전에 의하면 이후 또 다른 결집이 있었다. 즉 중앙아시아 신장 지역에서 흉노(匈奴)에 쫓겨 인도로 이주한 쿠샤나 왕조의 호불왕인 까니시까(Kaniska) 왕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제4결집은 흥미롭게도 제3차 결집에 완성한 삼장에 대한 주석서 성립이라는 일련의 맥락을 보여 준다.

불교에 귀의한 까니시까 왕은 경론의 교설이 같지 않음을 보고 협존자(脇尊者) 파르스바(Parsva)에게 문의한 결과 불교 교단 내에 여러 부파가 있고 각 부파마다 그 교의를 달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파르스바와 상의하여 이설(異說)을 통일하고자 카슈미르의 환림사(環林寺)에서 결집을 행하였다고 한다. 세우(世友)를 상수(上首)로 하여 삼장 가운데 먼저 경장(經藏)의 주석인 우파데샤(Upadesa) 십만 송을 결집한 후 다시 율장(律藏)의 주석인 비나야비바샤(Vinaya-vibhasa) 십만 송과 마지막으로 논장(論藏)의 주석인 아비달마비바샤(Abhidarma-vibhasa) 십만 송을 완성했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이 제4차 결집은 삼장(三藏)에 관한 결집이 아니라 삼장에 대한 주석에 관한 결집이라는 의미가 있다. 다시 정리하면 제1차 결집은 삼장 가운데 율장과 함께 경장이 중심이 된 결집이었고, 제2차 결집은 율장이 쟁점이 된 율장과 경장의 결집이었으며, 제3차 결집은 논장의 추가로 삼장이 완성된 결집이다. 그리고 제4차 결집은 삼장에 대한 주석서 성립이라는 불교전적의 순차적인 정합성을 보여 준다.

이상과 같이 살펴볼 때 일차적으로 결집은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의 유실 방지와 왜곡 방지가 목적이다. 이로써 교단이 안정되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제2차 결집과 제3차 결집은 시간이 흐름과 함께 발생한 계율과 교법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처방이었다.

궁극적으로 불제자들에 있어 결집은 진리로 간주한 불설을 오랫동안 보존하고 계속 전수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들은 불교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진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스승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전수는 지상과제였다. 이 같은 확신은 불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교 경전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계승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따라 대단히 지능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

초기 교단은 암송을 통해 많은 경전을 전문적인 집단으로 분업하여 보존하고 전수하는 데 열과 성의를 바치는 집요한 힘을 발휘했고, 이후 이러한 결집의 정신에 따라 경전 보존이 더욱 견고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심사숙고하여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였다. 예를 들면, 남아시아에서 동남아시아 그리고 동아시아 불교권의 패엽경, 목판경, 석경 그리고 동판에 불설을 새기는 것은 물론 복장이나 석탑 안에 불설을 안치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동아시아 불교사에 있어 대대적인 대장경 간행과 결사(結社)라고 하는 신앙 또는 수행의 쇄신 운동이 바로 인도불교사의 결집 정신이 이어지고 있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조준호 /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동국대 및 인도 델리대 불교학과 석사·박사. BK(Brain Korea) 21 불교사상연구단과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역임. 저서로 《우파니샤드 철학》과 《불교−종교문화적 그리고 사상적 기원에 대한 비판적 검토》 《실천불교의 이념과 역사》(공저), 주요 논문으로 〈대승의 소승폄하에 대한 반론〉 〈초기불교에 있어 止 觀의 문제〉 〈무명(無明)과 공(空): 욕망의 비실재성에 대한 불교적 통찰〉 등이 있다. 본지 편집위원.

 

 

 

 

 

 

 

[출처] 불교 경전의 결집 과정과 논쟁점 / 조준호|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