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깨달음과 열반은 다른가?

수선님 2021. 2. 12. 13:03

깨달음과 열반은 다른가?

 

불교평론에 발표표된 김나미님의 '깨달음과 열반의 상관관계' (불교평론 2011 봄호)라는 글은 이전에 홍사성님이 쓴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가 (불교평론 2004년 봄호)’, ‘깨달음에 대한 몇 가지 오해, 그리고 진실 (불교평론 2009년 6월)’ 과 호진스님이 쓴 책 '성지에서 쓴 편지 (2010년 도피안사)’에서 거론된 내용들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이들은 하나같이 한국불교의 깨달음지상주의가 불교의 목표인 열반을 외면하며, 단지 열반에 이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깨달음에 집착하여 여러 가지 병폐를 낳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과연 깨달음과 열반은 다른가?'

 

나에게 누가 묻는다면 나는 '같다'.라고 답할 것이다.

또한 누가 깨달음과 열반은 다른가?라고 묻는 다면 '다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깨달음에는 종류가 많은데 어떤 깨달음이냐에 따라서 열반과 같거나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깨달음이 열반과 같은가?

 

초전법륜경에서는 8정도를 실천하면 고요로,지혜로,깨달음으로,열반으로 인도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즉, 고요,지혜,깨달음,열반은 동의어로 나타나고있다.

 

여래는 중도를 철저하고 바르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으로(upasamāya), 최상의 지혜로(abhiññāya), 바른 깨달음으로(sambodhāya) 열반으로(nibbānāya) 인도한다.

 

잡아함경에서는 수다원과를 얻은 자는 삼보리로 향한다고 나타난다. '결정코 삼보리로 향한다'는 것은 '반드시 바른 깨달음으로(sambodhāya) 나아간다' 는 뜻으로 열반에 도달한다는 의미이다. 김나미님은 이 경전을 인용하고서도 '삼보리는 사과위 가운데 수다함과 수반되는 것임을 경전을 통해 알 수 있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만일 비구가 오근(五根)을 여실하게 관찰하고 나면, 삼결(三結)이 끊어진 줄을 알 것이다. 삼결인 신견, 계취견, 의견을 끊으면 수다원이라 한다. 그는 악취에 떨어지지 않고 결정코 삼보리(三菩提)로 향한다(若比丘於此五根如實觀察已於三結斷知 何等為三 謂身見戒取疑是名須陀洹 不墮惡趣 決定正向三菩提. 잡아함 26권, 648경

 

김나미님이 인용한 우다이경에서는 설명되는 4가지 樂은 모두 열반의 동의어이다.

그런데 김나미님은 "깨달음의 낙인 보리락(菩提樂)과 열반의 동의어인 적멸락(寂滅樂)이 다른의미"라고 구분하고 있다.

 

우다이여, 네 가지 즐거움이 있다. 무엇이 그 네 가지인가. 이른바 탐욕을 여읜 즐거움, 멀리 여읜 즐거움, 寂滅의 즐거움, 菩提의 즐거움이니라(優陀夷, 有四種樂, 何等為四, 謂離欲樂, 遠離樂, 寂滅樂菩提樂. 잡아함 17권, 485경 《우다이경優陀夷經》

 

그러나 위 4가지 즐거움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우다이경 자체에서도 확인 되고 있고 초전법륜경의 주석서에서도 확인되고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초전법륜 경(S56:11)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 멸함,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등은 모두 열반의 동의어들이다. 열반을 얻으면 갈애는 남김없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열반은 하나이지만 그 이름은 모든 형성된 것들의 이름과 반대되는 측면에서 여러 가지이다. 즉 남김없이 빛바램, 남김없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갈애의 소멸, 취착 없음, 생기지 않음, 표상 없음, 원함 없음, 업의 축적이 없음, 재생연결이 없음, 다시 태어나지 않음, 태어날 곳이 없음, 태어나지 않음, 늙지 않음, 병들지 않음, 죽지 않음, 슬픔 없음, 비탄 없음, 절망 없음, 오염되지 않음이다.”(DA.īi.801)

 

 

그렇다면 어떤 깨달음이 열반과 다른가?

 

김나미님은 일본의 불교학자인 다카사키 지키도(高崎直道)와 홍사성, 그리고 호진스님의 글을 다음과 같이 차례로 인용하여 깨달음이 열반과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이 처음부터 추구했던 것은 깨달음이 아니고 불사의 경지이며 열반이었던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보리(菩提), 깨달음은 열반에 이르는 수단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불교의 특색이 깨달음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마치 보리(菩提)가 최종 목적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특히 깨달음의 강조는 대승불교에서 깨달음의 보편화에 영향받고 있는 듯하다.”

 

 

“깨달음 자체가 불교 수행의 최종적 귀착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불교 수행의 목적은 놀랍게도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수행의 목적이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깨달음의 삶을 실천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은 불교의 궁극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라는 사실입니다. 깨달음은 수단이고 열반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학자들은 "깨달음과 열반에는 차이가 있다. 깨달음은 최종단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최종단계인 열반을 목적으로 수행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들이 이러한 견해를 갖게된 이유는 초전법륜경등에서 수다원과가 되는 과정만을 깨달음이라고 보기때문이다. 초전법륜경등에서는 '모든 일어나는 것은 사라지는 법이다'라고 깨달은 후에 다시 출가하여 수행하고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설하시어 마쳤을 때 꼰단냐 존자에게 청정한 때없는 진리의 눈이 뜨이게 되었다.

그것은 "무엇이든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조건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라는 진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일어난 것이다.......그때 세존께서는 감흥을 읊으셨다. '아,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구나. 아,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구나.' 이리하여 꼰단냐 장로는 그때부터 안냐 꼰단냐(Añña Kondañña)로 불리게 되었다. 진실로 안냐 꼰단냐는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없게 되었다. 그가 세존께 청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자 합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안냐 꼰단냐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호진스님은 안냐 꼰단냐(Añña Kondañña)의 안냐(Añña)가 여러 한문 경전에서 知,解,了達등으로 번역되었음을 설명하고 '이해(解)'의 뜻으로 보고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보고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고 열반은 체험의 영역"이라고 차별화 한다. 경전에는 분명히 꼰단냐가 깨달았는데도 부처님은 꼰단냐에게 '오너라, 비구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깨달음’에는 수다원과 부터 아라한과 까지 여러 단계의 깨달음이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모두 깨달음이라고 하는 하나의 용어로 표현하기에 생기는 혼란이다. 견도 수도 무학도 중에서 '견도의 깨달음' 혹은 '수다원의 깨달음'이라는 식으로 구분해 쓰면 해소되는 문제들이다. 또한 삼보리(sambodhi)나 안냐따(Aññāta)나 모두 깨달음으로 번역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들이기도 하다. 이런 점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깨달음과 열반은 다르다고 이해하고 심지어는 한국의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추구하고 깨달음을 수행의 목표로 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고 주장한다. 자신들이 깨달음에 대한 정의를 낮은 차원으로 끌어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의 근본적인 이유는 주석서 가 소실된 한문경전을 자신의 뜻대로 이해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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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글 )

 

 

깨달음에는 어떤 종류가 있고 각각의 깨달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깨달음의 수준에 따라 어떤 번뇌가 없어지고 어떤 번뇌가 남는가 하는 것은 A7:15 ,M2,M6등의 경전에서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10가지 족쇄와 그 족쇄를 소멸시키는 순서에 따라 성인4과를 설명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 방법은 불교의 수행단계를 설명하는 탁월한 방법으로 다른 종교나 사상에서는 찾아 볼 수없는 불교만의 독특한 가르침으로서 왜 부처님을 '법왕'혹은 '의왕'이라고 부르는지를 말해주는 증거라 할 것이다. 또한 이 가르침은 자신의 수행상태를 점검하는 기준이며, 스승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 가르침을 잘 이해 한다면 깨달음과 열반의 문제도 말끔하게 해소될 것이라고 본다. 다행이도 인터넷에서 글쓰는 일로 포교를 하고 계시는 진흙속의 연꽃님이 10가지 족쇄와 성인 4과를 이해하기 쉽게 도표로 만들어 놓았다.

 

존재를 윤회 하게 하는 10가지 족쇄(結, saṃyojana)

 

족 쇄

(結, saṃyojana)

수다원

(須陀洹, sotāpanna)

 

사다함

(斯陀含, sakadāgāmi)

아나함

(阿那含, anāgāmi)

 

아라한

(阿羅漢, arahatta)

 

구분

1

유신견

(有身見, sakkāya-diṭṭhi)

(personality-belief )

풀림

풀림

풀림

풀림

거친마음의 족쇄

(오상분결)

2

회의적 의심

(vicikicchā)

(sceptical doubt)

풀림

풀림

풀림

풀림

3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

(clinging to mere rules and ritual)

풀림

풀림

풀림

풀림

4

감각적 욕망(탐심)

(kāma-rāga)

(sensuous craving)

풀리지 않음

옅어짐

풀림

풀림

5

적의(진심)

(paṭigha)

(ill-will)

풀리지 않음

옅어짐

풀림

풀림

6

색계에 대한 집착

(rūpa-rāga)

(craving for fine-material existence)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미세한 마음의 족쇄

(오하분결)

7

무색계에 대한 집착

(arūpa-rāga)

(craving for immaterial existence )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8

자만

(māna)

(conceit)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9

들뜸

(uddhacca)

(restlessness)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10

무명

(無明 avijjā)

(ignorance )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도표에서 보듯이 예류자(sotāpatti)는 유신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의심의 세 가지 족쇄가 완전히 풀린 사람이다. 이것이 첫번째 깨달음이다. 번뇌를 구분할 때 '보아서 없애는 번뇌(견혹)'와 '닦아서 없애는 번뇌(수혹)'으로 구분하는데 수다원과 에서 소멸하는 3가지 족쇄는 '보아서 없애는 번뇌(견혹)'이다. 이것은 마치 어두운 방에 불을 켜면 그 순간에 어둠이 사라지듯이 '견혹'을 없애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즉시 수다원과의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수다원과의 깨달음을 다른식으로 표현한다면 '성스러운 8정도'의 하나인 '성스러운 正見'을 얻은 것이다.

 

마지마 니까야 M73번 경에서 왓차곳따는 수다원의 지위에 오른 우바새가 얼마나 되는지를 묻는데, 부처님은 재가자중에서도 수다원에 오른 제자가 무수히 많다고 답변한다. ‘흰 옷을 입고 감각적 쾌락을 수용하지만(kāmabhogino)’이라는 표현은 재가자로서 결혼생활을 하는 우바새를 말하고 ‘가르침을 따르고, 훈계를 받아들이고, 의심에서 벗어나, 의혹을 제거했고, 두려움 없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3가지 족쇄를 소멸시켜 성스러운 정견을 얻은 수다원의 지위를 말한다.

 

“왓차여, 나의 제자로서 흰 옷을 입고 감각적 쾌락을 수용하지만(kāmabhogino), 가르침을 따르고, 훈계를 받아들이고, 의심에서 벗어나, 의혹을 제거했고, 두려움 없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사는 우바새가 백 명이 아니고, 이백 명이 아니고, 삼백 명이 아니고, 사백 명이 아니고, 오백 명이 아니고, 그 보다 훨씬 많다.”

 

다시 도표에서 보듯이 일래자(sakadāgami)는 이 세 가지가 완전히 다 풀렸을 뿐만 아니라 감각적 욕망과 적의의 두 가지 족쇄가 아주 엷어진 사람이다. 그리고 불환자(anāgami)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완전히 다 풀려나간 사람이다. 그런데 이 두단계의 성인에게는 특별한 오도송이 없다. 왜 일까? 그것은 이들이 소멸시킨 감각적 욕망과 적의라는 두 가지 족쇄가 '닦아서 없애는 번뇌(수혹)'이기 때문이다. 탐욕과 성냄은 무지처럼 단번에 없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번뇌들은 닦음을 필요로 하고 닦음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닦음으로서 성취되는 일래자와 불환자는 견도,수도,무학도중에서 수도의 단계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도표에서 보듯이 아라한(arahan)은 열 가지 모든 족쇄를 다 풀어버린 사람이다. 8정도를 닦아 10가지족쇄(견혹과 수혹)을 모두 없애면 고요,지혜,깨달음 그리고 열반을 얻은 것이다. 더 배울것이 없어 무학도라 이름한다. 초전법륜경에서는 8정도를 실천하면 고요,지혜,깨달음,열반에 이른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아라한의 깨달음은 열반과 동의어이다.

 

-끝-

 

 

 

 

 

 

[출처] 깨달음과 열반|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