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가 본 세상살이1_ 물질의 소유
탐욕 경계할 뿐
소유 부정하지 않아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꼭이요~”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는 들판 위에 빨간 상의를 입은 여배우가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소리친다. 속까지 후련한 이 멘트는 그해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CF카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때 속물적인 느낌 때문에 ‘돈’이라는 말을 쉽게 내뱉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 돈은 개인의 역량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었다. 1997년 IMF이후 대량해고가 발생했다.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의 씨앗은 사방으로 흩어져 우리 주변에 수풀처럼 자라났다. 불안은 생존이란 명분아래 나눔보다 소유를, 이웃보다 개인을 강조하게 만들었다. 이제 앞집에 누가 사는지 관심조차 없다. 나의 빈곤은 온전히 내 책임이므로, 소유에만 관심을 둔다. 이 와중에 불교는 ‘무소유(無所有)’를 논한다.
무소유는 물질적 소유를 부정한다기보다 ‘탐욕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풀(Full)소유’에 대한 비난은 재물의 크기와 비례하지 않는다. 물론 물질적 소유를 줄이는 것은 무탐(無貪)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상황에 따라 다르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부대중은 출가(出家)와 재가(在家),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한다. 출가의 경우는 출세간적 삶이 비교적 수월하지만 재가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요즘 세상에서 자본은 곧 권력이다. 이런 세상에서 재가불자가 소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다[無所有]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중생은 소유를 통해 불안에서 벗어난다. 또한 생산·분배·소비의 과정에서 타인과 소통한다. 사회 속에서 소유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생존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유의 결핍은 삶 속에서 경험하는 괴로움 그 자체다. 당장 먹을 것이 없다면 무탐의 교설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흔히 붓다가 무소유를 강조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붓다는 소유를 강조했다. 기본적으로 음식을 소중히 여겼고, 괴로움을 만드는 근본원인을 가난에서 찾았다. 다만 소유와 분배는 윤리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유해야 할까? 붓다가 제안하는 ‘재물을 얻는 정당한 방법’, ‘재물을 사용하는 방법’, 그리고 ‘적절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살펴보자.
재물을 얻는 정당한 방법
“고귀한 제자는 근면한 노력으로 두 팔의 힘으로 이마의 땀으로, 얻고 모으고 벌어들여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소유한다.” 〈앙굿따라니까야〉
노력 없이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일확천금을 기대해서는 안 되고, 동시에 재물을 모으며 다른 중생에게 피해를 줘선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또 붓다는 재물을 모으는 과정을 꿀벌과 개미에 비유했다.
“벌들이 일하는 것처럼 부지런히 재물을 모으면, 개미집이 쌓아지듯 재물이 쌓인다. 이처럼 열심히 재물을 모아 가족에 유익하게 사용해야 한다.” 〈앙굿따라니까야〉
정당한 소유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벌이 꽃에 상처를 주지 않고 꿀을 모으듯, 벌이 꽃의 수정을 도와주듯, 열심히 모으되 상대를 다치게 하지 말고 오히려 이롭게 하라고 가르쳤다.
개미가 조금씩 집을 쌓아올리듯 꾸준한 노력으로 재물을 모으면 비난받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남긴다면 정당한 방법이 아니다. 소유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요소로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취하는 방법과 나누는 과정을 통해 칭찬받을 수도 비난받을 수도 있다는 가르침이다.
“재물은 어리석은 자를 해치지만, 지혜로운 자는 해치지 못한다. 어리석은 자는 재물에 대한 갈애로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해친다.” 〈담마빠다〉
반면에 잘못된 소유의 방법도 있다. 붓다는 다른 사람의 두려움을 이용해 점을 봐주거나, 예언하거나, 다른 사람의 탐욕을 이용하는 사기, 다른 사람의 위기를 이용하는 고리대금 등은 정당하지 못한 방법이라고 규정했다.
재물을 잘 사용하는 방법
정당하게 모은 재물은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붓다에 따르면, 먼저 자신을 위한 지출은 자신의 행복을 돕는다. 그리고 부모-배우자-자식의 순으로 재물을 사용한다. 이처럼 집안에서의 사용이 첫 번째이고, 친구와 동료 등을 위한 사용은 그 다음이다. 세 번째는 재해를 대비하는 지출이다. 붓다는 재물의 손실을 막는 것도 재물의 적절한 사용이라 보았다. 네 번째는 헌공(獻供)이다. 헌공은 친지·손님·조상·국가·종교를 위해 물건을 바치는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올바른 수행자를 위한 보시다.
“여기 훌륭한 가문의 자식은 정당하게 얻어진 재산으로 부모를 존경하고 공양한다. 존경받고 공양받은 부모는 선한 마음으로 ‘오래 살아라.’하면서 자식을 축복한다. 부모에게 축복받는 훌륭한 가문의 자식은 번영만을 기대할 뿐 퇴보하지 않는다.” 〈앙굿따라니까야〉
따라서 소유한 재물의 사용은 존경심과 더불어 수여자를 행복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으로 재물을 사용할 때, 상대 역시 축복을 기원해준다. 결과적으로 소유물의 사용은 물질의 분배를 넘어 나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성장하게 된다.
재물을 유지하는 방법
분배는 개인과 사회의 안정과 성장을 추구한다. 붓다는 재가불자에게 윤리적 경제원칙을 주장했다. 개인의 윤리적 역할이 국가와 사회발전에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자율적인 보시를 장려하면서도, 잘못된 방식으로 축적 혹은 소수에 의한 부의 집중을 견제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확인하고, 사람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조건으로 가계의 경제관리에 중점을 두었다.
재가자의 소유와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대표적 초기경전은 〈싱가로와다 숫따〉이다. 경전은 고용주와 고용인의 적절한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장자의 아들이여, 주인은 이러한 다섯 가지 경우를 통해 아랫방향인 하인이나 일꾼을 보살펴야 한다. 첫째 능력에 맞게 일을 안배하고, 둘째 음식과 임금을 지불하고, 셋째 병이 들면 보살펴주고, 넷째 맛있는 것은 함께 나누고, 다섯째 적당한 때에 휴식을 취하게 해야 한다. …… 하인이나 일꾼은 이런 다섯 가지 경우를 통해 주인을 섬겨야 한다. 첫째 먼저 일어나고, 둘째 늦게 자고, 셋째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넷째 일을 잘 처리하고, 다섯째 (주인의) 명성을 날리게 하고 칭송해야 한다.” 〈디가니까야〉
붓다는 고용주나 고용인 중 어느 한쪽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원만한 상호관계를 제안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고용인의 불만은 전체의 사기를 깎아내리고 업무의 효율을 떨어뜨리며 생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고용주의 욕심은 고용인의 부패와 실수를 유도할 수 있다. 따라서 생산을 담당하는 고용인의 만족은 중요하다.
고용주는 고용인을 위해 근무시간 조절과 휴가·의료 등을 지원해야 한다. 또한 업무를 적절하게 할당하고, 연령·성별·체력 등도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윤리적 상호관계를 통해 정당하고 안정된 소유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재물은 모으고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함께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재산 유지를 위해 개인이 주의해야 할 부분도 있는데, 여섯 가지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이다. 첫째 곡주와 과일주 등에 취하는 것, 둘째 때 아닌 때 거리를 배회하는 것, 셋째 노래나 춤 등의 놀이거리를 찾아다니는 것, 넷째 노름에 미치는 것, 다섯째 악한 친구를 사귀는 것, 여섯째 게으름과 나태함에 빠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감각적 욕망과 게으름의 주원인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위험성을 보다 심각하게 부추기는 것은 나쁜 친구다.
붓다는 재산유지를 위해 재가불자의 소비 형태 역시 고민했다. 특히 지출은 수입보다 적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유한 재물을 호수(湖水)에, 수입과 지출을 입수구와 배수구에 비유한다면, 술·도박·나쁜 친구·문란한 이성관계 등에 빠지는 것은 배수구의 유출량을 늘려 결국 호수를 메마르게 하는 것이다. 지출이 수입보다 늘어나면 빚을 지게 되고, 빚은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 된다.
“재가불자가 얻을 수 있는 네 가지 행복이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소유의 행복, 향유의 행복, 빚 없음의 행복, 허물없음의 행복이다.” 〈앙굿따라니까야〉
과거나 현재나 삶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수입과 지출의 균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균형을 위해 탐욕에 대한 조절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경제논리에서 ‘좀 더’ 누리기 위해 중생들은 탐욕을 동력으로 삼는다. 그렇게 불어난 탐욕은 물질적 소유[재물]와 정신적 소유[만족] 사이의 균형을 깨뜨린다. 결국 빚으로 연결돼 불안의 먹이로 전락하고 만다. ‘소욕지족(少欲知足)’이라는 말처럼 탐욕을 줄이고 만족하지 않는다면 소유의 행복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붓다는 이처럼 경제문제에 적극적이었다. 따라서 불교가 돈이나 자본에 비현실적이라거나, 초월적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비폭력으로 정당하게 재물을 구하고, 자신과 가족·친지들을 기쁘게 하며, 탐욕을 조금 내려놓는다면 소유의 만족은 따라온다. 그렇게 되면 함께 나누고 공덕을 쌓는 일만 남는다. 그리고 공덕은 다시 만족을 키워줄 것이다.
“보시와 나눔의 과보를 안다면, 그들은 보시하지 않고서는 먹지 않을 것이다. 인색으로 더럽게 물든 마음을 붙잡지 못할 것이다. 가령 최후의 한 입, 최후의 한 모금이라도 나누지 않고서는 먹지 않을 것이다.” 〈이따부따까〉
붓다는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보시를 강조한다. 함께 나누는 일이 얼마나 크고 선한 과보를 만드는지도 설명한다. 나눔은 소유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다. 재물이 나뉘는 과정을 통해 만족뿐만 아니라 사랑[慈愛]도 확장된다. 불교의 소유에는 자신과 타인을 돌보고 정신적 성장을 돕는, 물질적 소유[재물]와 정신적 소유[만족]가 함께한다. 개인과 사회가 함께하는 소유는 우리 모두를 진정한 부자로 만들 수 있다. 정당하게 얻어 함께 나눈다면 풀소유도 환영이다.
참고로 본고는 필자의 논문 〈소유, 행복의 터전인가 굴레인가〉 중 ‘붓다의 소유’ 일부를 보완했음을 밝힌다.
정준영
―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이자 명상지도자. 스리랑카 국립 켈라니아대학교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얀마·스리랑카·태국·미국·캐나다 등에서 수행했다. 저서로 〈위빠사나〉·〈다른사람 다른명상〉·〈있는 그대로〉 등이 있다. ggbn@ggbn.co.kr
[출처] 붓다가 본 세상살이1_ 물질의 소유|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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