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깨달음의 거울

수선님 2021. 3. 14. 13:22

☆ 깨달음의 거울 ☆


1.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2.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오심은 마치 바람도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 격이다.

3. 그러나 법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도 온갖 기질이 있으므로 여러 가지 방편을 벌이지 않을 수 없다.

4. 굳이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서 마음이라 부처라 중생이라 했으나 이름에 얽매여 분별을 내면 안 된다. 당체(當體)가 바로 그것이니, 한 생각이라도 움직이면 곧 어긋난다.

당체: 바로 지금의 이 본체(마음바탕)

5.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三處傳心]은 선지(禪指)가 되고, 한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三處傳心(삼처전심) :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마음법을 전한 세 번의 경우. 즉 첫째,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양보하여 앉으신 것과, 둘째,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신 것과, 셋째 사라쌍수 아래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보이신 것이 그것이다.

6.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 팔리면 <세존께서> 꽃을 드시고 <가섭존자가> 빙그레 웃은 일이 모두 교의 자취만 될 것이고, 마음에서 얻으면 세간적인 온갖 언어가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가 될 것이다.

7. 내가 한 마디 할까 한다. 생각 끊고 반연 쉬고 일 없이 우뚝 앉아 있으니, 봄이 오매 풀이 저절로 푸르구나.

8. 교문(敎文)에서는 오직 한 마음 법(一心法)만을 전하고, 선문(禪門)에서는 오직 견성하는 법만을 전했다.

9. 그러나 모든 부처님께서 경으로 말씀하신 것은, 먼저 모든 법을 가려 보이시고 나중에 가서는 모든 것이 필경 공한 이치를 설하신 것이며, 조사들의 가르침은 <말의> 자취가 마음자리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의 근원에서 드러나게 한 것이다.

10. 부처님은 활등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들은 활줄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걸림없는 법이란 바로 한 맛에 돌아감이다. 이 한 맛의 자취마저 떨쳐버려야 비로소 조사가 보인 한 마음을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뜰 앞의 잣나무 화두는 용궁의 장경에도 없는 것' 이라고 한 것이다.
뜰 앞의 잣나무 화두 :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이에 조주 스님이 답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니라" 하였다.

11.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먼저 부처님의 실다운 가르침으로써, 변치 않음과 인연 따름의 두 가지 이치가 곧 자기 마음의 성품과 모습이고, 단박깨침과 점차 닦음의 두 문이 자기 행의 시작과 끝임을 잘 분간한 뒤에, 교의 뜻을 놓아버리고 오직 자기 마음의 현전하는 일념을 가지고 선지를 자세히 참구하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소위 생사를 벗어나는 살길인 것이다.

12. 무릇 공부인은 반드시 활구(活句)를 참구해야 하며, 사구(死句)를 참구해서는 안 된다.

13. 자기가 참구하는 공안에 대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기를 마치 닭이 알을 품는 것과 같이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하고, 주린 사람이 밥 생각하듯 하며,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 하고 어린아이가 엄마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꿰뚫을 때가 있으리라.

14. 참선을 함에는 반드시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큰 신심이고, 둘째는 큰 분심이며, 셋째는 큰 의심이다.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아무 소용없이 되고 말 것이다.

15. 일상 속에서 생활하면서 오직 '개에게 불성이 없다 하는 화두를 들되, 오나 가나 이 화두를 들고 오나 가나 이것을 의심하여 이치의 길이 끊어지고 뜻 길이 사라져 아무 재미도 없고 마음이 답답할 때가 바로 그가 신명을 던질 곳이며, 또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될 대목이다.

16. 화두는 들어 일으키는 자리에서 알아맞히려 해서는 안 되고, 생각으로 헤아려서도 안 되며, 또한 모르면서 깨닫기를 기다려서도 안 된다. 생각할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 생각하면 마음이 더 갈 곳이 없어, 마치 늙은 쥐가 쇠뿔 속으로 들어가 오갈 데 없듯 곧 <사랑분별이> 끊어지는 것을 볼 것이다. 또한 이리 저리 따지고 맞춰 보는 것은 식정이고, 생사를 따라 흘러가는 것도 식정이며, 두려워하고 갈팡질팡 하는 것도 또한 식정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 병통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이 속에서 빠졌다 솟았다 하고 있을 뿐이다.

17.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된 소에게 다짜고짜 달려드는 것과 같아서, 주둥이를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 곳에 목숨을 떼어놓고 한번 뚫어보면 몸뚱이째 들어가고 만다.

18. 공부는 악기의 현을 고르듯이 하여 팽팽하고 느슨함이 알맞아야 한다.
너무 애쓰면 집착하기 쉽고, 놓고 잊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지게 된다. 또렷또렷하면서도 아주 면밀해야 한다.

19. 공부가 걸어가면서도 걷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는 줄 모르게 되면, 이때 팔만사천 마군의 무리가 육근중 앞에 지키고 있다가 마음을 따라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무슨 상관이 있으랴.
육근문 : 바깥의 육진 경계를 받아들이는 안이비설신의의 여섯 가지 감각의 문.

20. 일어나는 마음은 천마이고 일어나지 않는 마음은 음마이며,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것은 번뇌마이다. 그러나 나의 정법 중에는 본래 그런 일이 없다.

21. 공부가 타성일편을 이루기만 하면, 비록 금생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안광낙지시에 끌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타성일편 : 의정이 한 덩어리를 이루어 공부가 끊임없이 되는 상태.
안광낙지 : 눈빛이 땅에 떨어짐. 즉 마지막 눈을 감는것.

22. 참선하는 이는 항상 이렇게 돌이켜보아야 한다.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높은 것을 알고 있는가?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 더러운 이 육신이 순간순간 썩어가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의 목숨이 숨 한번에 달린 것을 알고 있는가? 일찍이 부처님이나 조사 같은 이를 만난 적이 있었던가? 높고 거룩한 법을 듣고서 희유하다는 마음을 내었던가? 공부하는 곳을 떠나지 않고 <공부인으로서의>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 곁에 있는 사람들과 쓸데없이 잡담이나 하며 지내지 않는가? 분주히 시비를 일삼고 있지는 않은가? 화두가 어느 때나 똑똑히 들리고 있는가? 남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도 화두가 끊임없이 되는가? 견문각지시에 타성일편이 되는가? 자기를 돌아보아 관함에 부처와 조사를 붙잡을 만한가? 금생에 기필코 부처님의 혜명을 이을 수 있겠는가? 앉고 눕고 편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이 육신으로 윤회를 벗어날 자신이 있는가? 팔풍의 경계를 당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는가?

이것이 참선하는 이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수시로 점검해야 할 도리이다. 옛 어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몸 금생에 못 건지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서 건질 것인가!
네 가지 은혜 : 부모와 나라와 스승과 시주의 은혜
팔풍의 경계 : 우리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여덟 가지 현상. 이로움·쇠약해짐·헐뜯음·높이 기림·칭찬함·비웃음·괴로움·즐거움

23. 말을 배우는 사람들은 말할 때에는 깨친 듯하다가도 실지 경계에 당하게 되면 그만 아득하게 된다. 이른바 말과 행동이 서로 틀리는 것이다.

24. 생사를 막아내려면 이 한 생각을 탁 깨뜨려야 비로소 나고 죽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25. 그러나 한 생각을 깨친 뒤에라도 반드시 밝은 스승을 찾아가 안목이 바른지를 점검 받아야 한다.

26. 옛 어른이 말씀하기를 "다만 자네의 눈 바른 것만 귀하게 여길 따름이지, 자네의 행실은 보려고 하지 않네"라고 하였다.
이것은 위산 스님이 그의 제자 앙산 스님에게 한 말이다.

27. 바라건대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깊이 믿어, 스스로 굽히지도 말고 높이지도 말아야 한다.

28. 마음을 모르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무명만을 도와줄 뿐이다.

29. 수행의 핵심은 오직 범부의 생각을 떨어지게 할 뿐, 따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있을 수 없다.

30. 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만 자기 성품을 더럽히지 말라. 바른 법을 찾는 것이 곧 삿된 것이다.

31. 번뇌를 끊는 것은 이승이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큰 열반이다.

32. 모름지기 마음속을 비우고 스스로 비추어보아, 한 생각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 사실은 일어남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

33. 죽이고 도둑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다 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 일어나는 곳이 비어 없는데 무엇을 다시 끊을 것인가.

34. 환인 줄 알면 곧 여읜 것이라 더 방편 지을 것이 없고, 환을 여의면 곧 깨친 것이라 단계를 밟을 것도 없다.

35. 중생이 나는 것 없는 가운데서 망령되게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 꽃이 생겨났다 없어지는 것을 보는 것 같다.

36. 보살이 중생을 건져 열반에 들게 했다 할지라도 사실은 열반을 얻은 중생이 없다.

37. 비록 이치는 단박에 깨칠 수 있다 해도, <오랜> 습은 단번에 없애지지 않는다.

38. 음란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 같고,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으며, 도둑질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새는 그릇에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 같고, 거짓말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똥으로 향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은 비록 많은 지혜가 있더라도 다 악마의 길을 이룰 뿐이다.

39. 덕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의 계율을 무시하고 삼업을 조심하지 않으며, 마음이 해이하여 게으르고 남을 업신여기며, 따지고 시비하는 것을 일삼고 있다.

40. 만약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한다는데, 하물며 청정한 지혜의 열매를 바랄 수 있겠는가.

41. 생사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끊고 애욕의 불꽃을 꺼버려야 한다.

42. 걸림없는 청정한 지혜란 다 선정에서 나온다.

43. 마음이 정(定)에 들면 세간의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든 현상을 밝게 알 수 있다.

44. 어떤 현실을 당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나지 않음[不生]이라 하고 나지 않는 것을 생각 없음(無念)이라 하며, 생각이 없는 것을 해탈이라 한다.

45. 도를 닦아 열반을 얻는다면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마음이 본래 고요한 것임을 알아야 이것이 참 열반이다. 그러므로 '제법이 본래부터 항상 그대로 적멸한 모습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46.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수대로 나누어 주라. 한 몸처럼 가엾이 여기면 이것이 참 보시이다.

47. 누가 와서 해롭게 하더라도 마음을 거두어 성내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한 생각 성내는 데에 백만 가지 장애의 문이 열린다.

48. 참는 행이 없으면 육도만행도 이루어질 수 없다.

49. 본바탕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으뜸가는 정진이다.

50. 진언을 외는 까닭은, 현생의 업은 다스리기 쉬워 자기 힘으로도 고칠 수 있지만, 전생에 지은 업은 없애기 어렵기 때문에 진언의 신비한 힘을 빌리려는 것이다.

51. 예배는 공경함이며 굴복시킴이다.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52. 염불이라 하지만 입으로 하면 송불이고 마음으로 할 때 비로소 염불이 된다.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에 무슨 소용이 될 것인가.

53. 경을 듣는 것은 귀를 거치는 인연도 있게 되고, 따라 기뻐하는 복도 짓게 된다. 물거품 같은 이 몸은 다할 날이 있지만 진실한 행동은 헛되지 않는다.

54. 우습다, 이 몸이여.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나오고, 백 천 가지 부스럼 덩어리를 한 조각 엷은 가죽으로 싸놓았구나. 또한 가죽 주머니에는 똥이 가득 담기고 피고름 뭉치라, 냄새나고 더러워 조금도 탐하거나 아까워할 것이 없다. 더구나 백년을 잘 길러준대도 숨 한번에 은혜를 배반하고 마는 것을.

55. 누구든지 임종할 때에는 이렇게 관찰해야 한다. 즉, 오온이 다 빈 것이어서 이 몸에는 '나'라고 할 것이 없고, 참 마음은 모양이 없어 오고 가는 것도 아니다. 날 때에도 성품은 난 바가 없고, 죽을 때에도 성품은 가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맑고 고요하여 마음과 경계가 일여하다. 오직 이와 같이 관찰하여 단박 깨치면 삼세에 얽매이지 않게 될 것이니, 이런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뛰어난 자유인이다. 부처님을 만난다 해도 따라갈 마음이 없고, 지옥을 보더라도 무서운 마음이 없다. 오직 스스로 무심하면 법계와 같이 될 것이니 이것이 요긴한 대목이다. 그러므로 평상시의 공부는 원인이고 임종 할 때는 그 결과인 것이다. 수도인은 잘 살펴야 한다. <부다피아> _()_ 

 

 

 

 

 

 

 

 

 

 

              

[출처] 깨달음의 거울|작성자 한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