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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노적사 주지 종후 스님 “난 아직, 시주한 물 한 방울도 소화할 힘 없어”

수선님 2021. 4. 11. 12:17

북한산 노적사 주지 종후 스님

“난 아직, 시주한 물 한 방울도 소화할 힘 없어”

 

1977년 노적사 주지 맡아
35년간 묵묵히 중창 불사

 

부처님 진신 사리 7과 봉안
적멸보궁으로 도량 대 일신

 

북한산은 그 규모가 크지 않지만 명산으로 꼽힌다. 이채로운 건 백운봉을 중심으로 펼쳐진 30여 개의 큰 봉우리가 저마다 확실한 이름을 갖고 있다는 사실. 북한산성의 축성기록을 담은 ‘북한지’ 덕이다. 조선 숙종 당시 팔도 도총섭을 지낸 성능 스님이 저술한 ‘북한지’에 기록된 봉우리는 약40여개. 일부는 그 위치가 명확하지 않지만 사실, 북한산만큼 봉우리 이름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드물다.


명산을 중심으로 도성 곳곳에 부처님 말씀이 퍼지기를 기원했던 것일까? 석가봉, 승가봉, 문수봉, 미륵봉, 원효봉, 의상봉 등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이름들이 즐비하다. 바람 한 점도 부처님 말씀 한마디요 가피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노적봉(露積峯)은 이름 자체에 불법의 대의가 함축돼 있어 눈길을 끈다. 노적(露積)이란 감로(甘露)가 가득하다는 뜻일 터. 감로란 불법의 법미(法味)이며 묘미(妙味)이니 풀이하면 중생을 구제하는 데 다시없는 가르침이 한 데 모여 있는 곳이란 의미일 것이다.


그 노적봉 바로 아래 노적사가 자리하고 있다. ‘북한지’에 따르면 원래 노적사의 옛 이름은 진국사(鎭國寺)였다. 성능 스님이 세운 명찰이었는데 훗날 화재로 인해 석축만 남아 내려왔었다. 1960년 무위 스님과 재가불자들이 힘을 합쳐 불사를 한 후 ‘노적사’라 이름 했다고 한다. 당시의 작은 노적사를 지금의 명찰로 중창 한 스님은 현 주지 종후 스님.


노적사 곳곳에는 종후 스님의 손길이 배어있다. 대웅전을 비롯해 나한전과 동인당을 신축했으며 요사채 증개축과 함께 미륵부처님과 약사여래부처님도 봉안했다.

 

2001년 전통사찰로 지정된 노적사는 네팔에서 이운해 온 부처님사리 7과를 봉안해 2009년 적멸보궁으로 일신했다. 부처님 진신사리는 네팔 팔탄타쉬지하초사에 있던 사리다. 이 사리에 대한 명확한 고증을 위해 기증서 및 봉안에 대한 내용을 별도의 비를 세워 기록했다.


거대한 행사를 하거나 템플스테이 지정사찰이 아닌 관계로 불자들에게도 다소 낯선 사찰로 인식되어 있지만 북한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이나 서울 근교에 살고 있는 불자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이다. 등산객 한 사람, 외국인 한 사람에게도 쉬어 갈 공간을 내어주고, 물 한 잔도 정성을 다해 전하는 노적사의 마음 때문이다.


종후 스님이 노적사 주지로 취임한 건 1977년. 당시 노적사는 암자에 가까운 작은 사찰이었다. 종후 스님 취임 전까지 20년도 채 안 되는 세월 동안 10번의 주지가 바뀌었다. 그만큼 절 살림이 어려웠다는 반증이다. 그럼에도 지난 35년 동안 묵묵히 노적사를 지키며 불사를 해 온 종후 스님이다, 웬만한 원력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오늘 그 원력을 듣고자 북한산을 올랐다. 그 원력 이면에 배인 종후 스님의 마음 한 조각을 얻어 보기 위함이다.
“규모는 커졌지요. 하지만 옛 노적사가 더 운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책이 아니라 겸손이다. 또 한 편으로는 기존의 운치를 살리며 규모를 늘리려 했던 세심함도 읽혀진다. 노적사와 인연이 무엇보다 궁금했다. 법주사 선방에서 화두만 들고 정진했던 수좌가 어떤 연유로 이곳 노적사로 오게 된 것일까.


“노적사 전 주지 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은 이제 하산할 터이니 노적사를 보살펴달라고요.”


처음엔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주지를 맡는다는 게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불국사 조실이었던 월산 스님 상좌였으니 공부에 더 매진하고 싶었던 건 당연지사. 두 달 후 다시 연락이 왔다. 그런데 그 스님의 일언이 종후 스님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상구보리만 하고 하화중생은 안 하시는가. 보살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나만 이롭고자 고집하는 것도 맞지 않다고 생각했지요. ‘자기를 이롭게 하면서 남도 이롭게 하는 것은 허공을 나는 새의 두 날개와 같다’하지 않습니까. 결심했습니다.”


‘새의 두 날개’는 ‘발심수행장’에 새겨진 일구다. 종후 스님은 계초심학인문, 발심수행장, 자경문이 함께 담긴 ‘초발심자경문’ 가르침 그대로 사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월산 스님을 뵙고 전후연유를 말씀드렸다.


“주지하면 못 써! 공부 해.”


몇 번을 간청 드렸지만 ‘불가’라는 답만 들었을 뿐이다. 어느 날, 종후 스님은 월산 스님 앞에서 연등을 만들게 됐다. 종후 스님은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당시를 회고했다.


“앞에 있던 연등을 발로 ‘툭’ 찼어요. 큰 스님께서 아무 말씀 없이 보시더군요. 저도 퉁명스런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지요.”


‘제발 보내 주십사’하는 무언의 항변이었던 것. 불호령만 떨어져도 다행, 몽둥이찜질도 각오했을 터.


“그토록 가야겠으면 가라. 그 대신 정말 잘해야 한다. 잘해야 해. 주지한다고 공부 게을리 하지 마라. 후회한다.”
노적봉에 운무가 가득했다. 운무 한 줌은 노적사에도 가라앉았다. “상쾌했습니다. 내려앉은 이슬 하나하나가 다 부처님 말씀이요, 원효 스님 말씀이라 생각하니 환희심이 절로 나더군요.” 숙연이다. 절 살림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고민해도 앞길이 막막했을 터인데 환희심이라니 말이다.


종후 스님은 지금까지도 큰 일 아니고는 산문 밖을 나서지 않는다고 한다. ‘중요한 일이 아니거든 절 문밖을 나가지 말라’는 ‘계초심학인문’의 뜻을 지키고 있음이다. 절에서 기도하고, 정진하며 형편 닿는 대로 불사를 진행했다. 묵묵히 보낸 세월이 35년이다. 성능, 무위 스님의 원력이 종후 스님에 의해 다시 한 번 활짝 핀 것이다. 지금 시작하고 있는 종각불사만 회향하면 일은 다 해 마친 것일까?


“종각은 종각일 뿐입니다. 제 할 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불사가 더 남아있는 것일까. 소소한 불사야 있겠지만 큰 불사는 이제 다 끝난 거 아닌가. “시주받은 물 한 방울도 아직 소화할 힘이 없습니다.”


‘이번 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한다면 시주받은 한 방울의 물이라도 제대로 소화해 내기 어려운 법’이라는 자경문 일언이다. 종후 스님은 다시 월산 스님과의 일화를 회상했다. 출가 후 얼마 안 돼서 월산 스님이 종후 스님에게 명을 내렸다. “금강경 다 외워라.”두 달 만에 외웠다. 그런데 월산 스님은 얼만큼 외웠는지, 제대로 외웠는지 점검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참다못한 종후 스님은 월산 스님에게 고했다.


“큰 스님, 금강경 다 외웠습니다.” “그래. 내 앞에서 한 번 외워봐라.” 자신 있게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딱 막혔다. 월산 스님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안 틀리고 외워라.” 분명히 다 외웠는데 월산 스님 앞에만 서면 막히니 종후 스님도 답답할 노릇이었다.


“당시엔 저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요. 큰 스님의 법력 앞에서 제가 주눅 들었다고 봐야겠지요.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합니다.”


종후 스님의 금강경일화는 계속 이어졌다. 어느 날 월산 스님 앞에서 다 외워보였다. ‘이젠 금강경도 끝났구나’ 하는데 월산 스님의 일언이 떨어졌다. “일합상을 말해 보라!” 종후 스님은 꽉 막혔다.

 

월산 스님 ‘일합상’ 물음에
‘답’ 하려 지금도 새벽 정진

 

원효-의상 스님 숨결 생생한
북한산에 ‘선원’ 불사 원력


일합상(一合相)! 금강경 30분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 대목에 나온다. ‘하나로 합쳐진 모습을 이치로 보면’이라 해석하기도 하고, ‘하나로 된 이치의 모습’으로도 해석한다.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미세한 티끌로 만든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티끌을 모아 놓은 것이 많지 않겠느냐? (…중간 생략…)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대천세계는 곧 실물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므로, 이를 일러(시명. 是名) 세계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계가 실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곧 하나로 합쳐진 모습에 집착하는 것이 있겠지만, 여래께서 말씀하신 하나로 합쳐진 모습은 곧 어떤 실물로써 하나로 합쳐진 모습이 아니므로 이를 일러 하나로 합쳐진 모습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다. 수보리야 하나로 합쳐진 모습이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다만 범부들이 그 현상을 탐내고 집착할 뿐이다.’(원순 스님 번역 참조)


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굳이 쉽게 풀자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이름뿐이니 집착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실상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는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과 깊은 관계가 있지요. 그럼에도 지금 월산 큰 스님께서 ‘일합상’을 일러보라 하면 딱히 무어라 할지….”


종후 스님은 지금도 새벽예불을 올린 후에는 금강경을 독송한다고 한다. 그 ‘일합상’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치를 모르는 게 아닐 것이다. 법회 때마다 금강경을 설하는 종후 스님이 그 속에 배인 문자와 이치를 모르겠는가.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더 정진의 길을 걸어야 할 나그네다.’


“월산 큰 스님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말씀 말입니다. 후회는 않습니다. 아쉬울 뿐이지요. 하지만 후회와 아쉬움의 차이란 손바닥 하나 아닙니까. 바랑 하나 메고 운수납자의 길을 떠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마음 한 자락을 노적사에 펴 놓고 싶은 것일까. 종후 스님은 노적사에 선원을 개원하고 싶어 한다. 벌써 노적사 인근의 터도 봐 두었다. 국립공원이니 ‘허가’가 문제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꼭 하고 싶습니다. 원효, 의상 스님도 이 산에서 수행하셨습니다. 서울 인근에 머물고 있는 수좌 스님들이 먼 길을 떠나지 않고도 북한산에서 정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북한산에는 원효 스님이 참선 수도했다는 덕암사와 원효암이 있다. 원효 스님은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의상 스님을 불러 의상봉에 있는 석굴에 안내했다. 이후 원효 스님은 원효봉에서, 의상 스님은 의상봉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참선했다고 한다. 계곡 하나를 두고 말이다.


종후 스님의 원력과 마음 한 자락이 뚜렷해진다. 기도도량의 역할과 함께 통일기원의 염원을 담은 노적사에 선원을 개설해 한 시대를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고 싶은 것이다. 종후 스님의 원력이 이뤄져 선원이 개원된다면 석가봉, 미륵봉, 문수봉, 원효봉, 의상봉에서 전하는 감로가 이 곳 노적사에 차곡차곡 쌓여 또 다른 큰 봉우리를 이룰 것이다. 그 날을 기대하니 환희심이 절로 난다. 사부대중이 기원해 보자.
옷섶에 녹음을 스치고 온 바람 한 점이 깃든다. 청량하다.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종후 스님은 1942년 전북 완주에서 출생했다. 1964년 입산해 1967년 법주사에서 월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 한 후 동화사, 해인사 강원을 거쳐 불국사 강원을 졸업했다. 법주사 선원에서 정진했던 스님은 1977년 노적사 주지를 맡아 지금까지 주석하고 있다. 중앙종회의원, 동국대 불교대학원 동림회 회장, 포교승가회 초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경실련, 경불련, 평불협 이사를 맡아 불교시민운동과 남북교류 등에 크게 기여했다. 조계종 포교원 공로상을 수상한 스님은 ‘불교사상의 바른 이해’, ‘노적사의 봄’ 등의 저서를 내놓았다.

 

 

 

 

 

 

 

[출처] 북한산 노적사 주지 종후 스님 “난 아직, 시주한 물 한 방울도 소화할 힘 없어” |작성자 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