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대종사의 인욕사상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인욕사상의 형성 배경
1. 시대적 배경
2. 사상적 배경
Ⅲ. 인욕사상으로서 무아의 인욕
1.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서의 원(願)
2. 자실인의(慈室忍衣)의 삶
Ⅳ. 맺음말
1. 들어가는 말
청담스님(1902∼1971)은 한국 근·현대 불교사의 중심에서 대승보살도의 살아있는 실증을 행동으로 보이신 인욕선인(忍辱仙人)이었다. 청담대종사께서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해야 할 인생일대사(人生一大事)를 부처님의 정법심인(正法心印)을 체득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하자”라는 서원으로 25세(1926년) 5월 17일에 경상도 옥천사(玉泉寺)로 출가하여 석전 박영호 스님을 은사로 득도 수계하셨다. 스님께서는 동년 10월 26일 서울 개운사의 대원불교 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대강백 박한영 스님 문하에서 경·율·론 삼장을 두루 섭렵하고 1930년 5월 17일 수료하셨다. 그후 스님은 불가의 전통에 따라 당대 최고의 선지식(善知識)인 덕숭산 만공선사의 회상에서 수행, 금강산을 거쳐 묘향산 보현사 설영대(雪靈臺)에서 목숨을 건 인욕 용맹정진 끝에 “예로부터 모든 불조(佛祖)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어찌 현학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길가에 고탑(古塔)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하리”라는 오도송으로 만공선사로부터 견성(見性)을 인가받고, 올연(兀然)이란 불명을 전수받았다.
견성한 후(1934년)부터 스님의 일대사(一大事)는 청정승가와 부처님의 정법을 수호하고 정통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일대사를 위하여 지혜와 덕과 용기를 보임하는 기간을 1954년 6월까지 묘향산 설영(雪靈), 설악산 봉정(峰頂), 문경 봉암사(鳳巖寺), 경남 고성 청량산 문수암(淸凉山文殊庵) 등에서 수선결사하며 인욕 용맹정진으로 선기(禪機)를 다듬으셨다.
한일합방(1910) 이후 일제(日帝)의 왜색불교에 의해 정법(正法)으로부터 일탈(逸脫)하여 왜곡되고 있던 교단을 ‘청정승가’로 세우는 것이 스님의 본원(本願)이고 자비행(慈悲行)이었다. 스님은 1954년 8월 선학원에 전국비구승 대회를 소집, 불교 정화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면서 “난잡한 요정으로 변해 버린 불교사찰이 청정도량으로 정화될 때까지 목숨을 다 바쳐 싸우자”고 비장한 결의를 표명하셨다. 스님의 원력은 전국 방방곡곡을 뒤흔들어 사찰마다 교단정화의 횃불이 타올랐다. 만난(萬難)을 극복하고 이듬해 어느 정도 정화운동의 성과가 나타나자, 1955년 8월에 두 차례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조계종 종헌을 통과시켜 중앙기구의 임원을 선출했다. 같은 해 8월 20일 승려대회에서 설석우(薛石友)스님을 종정으로, 청담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청담대종사는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으로 1955년 8월 28일 취임하여 순교단을 조직하여 11월 5일 태고사(太古寺)를 접수하여 조계사(曹溪寺)로 개칭하고 난장판이 되어버린 종단을 본 궤도에 올려놓는 일에 진력을 다했다. 그런 활동의 공덕으로 1962년 4월 10일에 통합종단이 형성되어 교단정화불사는 일단락이 되게 되었다.
그 후 청담 스님은 교단정화가 정법수호라는 기치아래 열반할 때(1971년 11월 15일)까지 교단의 개혁에 전념하였다. 청담스님의 교단정화운동은 비구승측이 대처승측으로부터 사찰을 접수하는데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청정승가를 세워 청정법륜을 굴리는 운동이었다. 이런 청정법륜의 실천을 궁행한 스님의 삶은 질곡의 고뇌와 좌절도 수없이 많았겠지만 그때마다 불퇴전의 신심으로 참회로써 인욕정진하여 한 마음의 자성청정한 지혜를 밝혀 만난(萬難)을 극복하는 구도의 여정이었다.
스님은 인연따라 중생이 원하는 곳이라면 언제나 어디서나 한 순간도 쉴 틈도 없이 실로 초인적인 전법활동을 펴시어 불교에 대한 인식을 사회에서 업그레이드 시켜 깨달음의 사회화를 실천한 인욕선인이었다. 청담대종사는 ‘청정승가’와 ‘정법수호’에 어떤 어려움, 어떤 수모, 어떤 고통도 기꺼이 잘 견디어 내고, 어떤 경우에도 신경질을 부리거나 화를 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조선조 5백 년 동안 쌓인 배불정책의 묵은 때를 없애고, 40여년이 넘도록 일제(日帝)에 의해 진행된 왜색불교를 청산하여 한국불교의 청정가풍을 세우기 위한 청담 스님의 노력은 수많은 질시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오직 인욕선인의 정신으로 밀고 나갔다.
이러한 청담스님의 노력은 조계종 종단을 본궤도에 올려놓았고, 한국불교를 세계문화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만약 불교정화운동 때 청담스님의 그 철저한 인욕사상이 없었다면 아마도 불교정화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청담스님 인욕의 실천은 정화운동을 위해, 하나에서 열까지 참고 견디고, 견디고 참아내면서 인욕바라밀로 시종일관 끝까지 실천하여 결국 정화운동성공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청담대종사 대원력의 인욕정신이 오늘의 대한불교 조계종을 있게 한 것이다. “만일 정화운동 때 청담스님이 그 처절한 인욕을 실천하지 않았더라면 자체 내에서 분열과 반목이 일어나 정화운동은 실패했을 것이다”라는 어떤 후학의 이 한마디 증언이 청담스님이 얼마만큼 철저한 인욕보살이었는가를 예시하고 있다. 교단에서는 대종사님을 상(相,lakṣana)이 없으시고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진심(瞋心, krodha)을 내지 않는 인욕 보살로 칭송되고 있다.
그래서 논자는 본고에서 청담대종사 인욕사상의 형성배경과 내용을 구명하고자 하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다. 본 논문에서는 청담문도회에서 편집한 ?청담대종사전서(靑潭大宗師全書)? 권1-8과 초기 대승불교의 불전을 중심으로 청담 대종사의 인욕사상을 고찰하면서 이 시대의 진정한 선지식의 사상과 정신을 배우고 익히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II. 인욕사상의 형성배경
1. 시대적 배경
우리나라 역사에서 근대라 함은 조선조의 고종(高宗)시대(1864∼1906)로부터 일제강점시대(1910∼1945)까지를 말한다. 본고에서는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인욕사상 형성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면 먼저 일제강점기의 교단상황을 개괄적으로 탐구해 보자.
조선조 중엽 이후 말기에 이르기까지 공부한 스님(學人)들을 수좌(首座: 참선을 주로 하는 스님)와 강사(講師: 간경 강학하는 스님)라 하였는데, 이들 공부하는 스님들은 가급적이면 세속의 시끄러움을 피하여 조용한 산사(山寺)에서 공부에만 전념하였으므로 이들을 이판승(理判僧)이라 하였다. 반면에 사암의 살림을 도맡아 여러 잡무에 힘쓰면서 수좌와 강사들이 공부에 열중할 수 있도록 도왔는데 이러한 절일을 맡아보는 스님(寺務僧)을 사판승(事判僧)이라 하였다.
이들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스님들은 당시 양반 유생과 위정자들의 횡포에 짓눌리고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교단을 잘 지키고 불법(佛法)을 길이 전할 수 있게끔 유지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다. 현재 전하는 자료에 의하면 당시의 이판승과 사판승은 다툼이 없었고 반목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 장점을 살려서 상부상조하여 불화가 없었다. 그러한 화합승단형성의 두 주역인 이판스님과 사판스님의 조화가 깨뜨려지기 시작한 것은 개화 이후 신교육을 받은 소위 유식한 지식승들이 승단업무를 주관하는 사판성이 주류로 바뀌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의 사찰령(寺刹令)에 의해 30본사(나중에 31본사)제가 시행된 뒤로부터 주지들의 권한과 위상이 높아지면서 사찰 및 교단업무를 관장하는 사판승들이 관료화되어 갔었다고 한다. 그들은 고관과 부유층 같은 생활을 하였고 처자를 거느린 승려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 교단의 속화(俗化)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에 이르러 사판과 이판의 관계는 종전과는 정반대로 교단 불화의 위험수위에까지 이르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을 만들어 전국의 사찰을 30본산으로 구획 짓고 이 땅의 불교를 조선선교양종(朝鮮禪敎兩宗)이라고 하였다. 이 연합사무소 역시 30본산의 연합 사무만을 집행하였을 뿐이지 전국사찰과 모든 승려를 총괄 통제하는 기능과 권한은 없었다. 그러다가 신진 승려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자체 내의 자각에 의하여 1922년 1월에 중앙통제기구로써의 ‘조선불교선교양종 중앙총무원(朝鮮佛敎禪敎兩宗 中央總務院)’이 각황사에 설치되었다. 많은 본사 주지들이 이에 반대하여 따로 ‘조선불교선교양종 중앙교무원’을 또한 각황사에 다 1922년 5월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같은 사찰에 두 개의 종무기관인 ‘중앙총무원’과 ‘중앙 교무원’이 각각 사무실을 열고 간판을 내걸었으므로, 그들은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여 다툼이 계속되었다. 1925년에 양측은 서로 타협하여 하나로 뭉쳐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 교무원’을 성립시켰는데, 이로써 일제하의 한국불교 교단은 비로소 하나가 된 중앙통제의 종무기구를 이룩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종명이 ‘조선선교양종(朝鮮禪敎兩宗)’이라는 것이 선명치 못하다고 하여 좀 더 선명한 종명과 종지(宗旨) 그리고 유기적이고도 통제적인 강력한 새로운 체제의 필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총본산(總本山) 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1941년 봄 태고사(太古寺)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종명을 조계종이라 하여 그 때까지의 선교양종이라는 모호한 종명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1941년 4월에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 사법(朝鮮佛敎曹溪宗總本寺太古寺寺法)’(16장 130조)의 인가를 얻어 조계종을 출범시켜, 그 해 6월에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주지를 겸한 초대 종정에 한암중원(漢岩重遠) 스님을 추대하고, 실무집행부서로 종무총장 아래 서무부․교무부․재무부를 두었다. 이어 종회법(宗會法)과 승규법(僧規法) 등을 제정 완비함으로써 새로운 단일 종단 조계종이 창립되었고 이에 의해 총본산 태고사를 중심으로 전국의 사찰과 스님들이 총 결속을 하게 되었다.
이런 교단의 상황에서 태평양전쟁(1941. 12. 8~1945. 8. 14)의 막바지에 이르러 일본은 우리 국민의 생존권과 언어 문자까지도 빼앗고 한반도 안의 초목마저도 전쟁용의 희생물로 몰고 갔다. 그래서 이 땅의 불교는 종교적 자주성과 신행(信行)의 자유 자율성을 잃고 전시체제에 휘말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해방을 맞게 된 불교계에서는 그동안 일제의 사찰령에 묶여 있었던 식민지적 불교잔재를 청산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해 10월에 전국승려대회를 열고 사찰령과 조계종총본사사법(曹溪宗總本寺寺法) 등을 폐지하고 새로운 조선불교 교헌(朝鮮佛敎 敎憲)을 제정하였다. 새 교정(敎正)에 영호(映湖) 박한영 스님을 추대하고 중앙총무원장 및 여러 부서를 재정비했다.
일본의 잔재를 없애기 위하여 불교계에서는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조계종명을 바꾸어 ‘조선불교’라 표방하고 종정(宗正)도 교정(敎正)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불교계도 ‘조선불교’라는 간판을 ‘대한불교’로 고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 해 4월에 교정(敎正)이었던 석전영호(石顚映湖)스님이 입적하여 그 뒤를 이은 만암(曼庵)스님에 의해 다시 조계종이라 일컫고 교정도 종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조계종이 비록 일정(日政)하인 1941년에 성립되었지만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던 종명이며 현재 한국 선가의 실질적 중흥조인 서산대사(西山大師)도 조계퇴은(曹溪退隱)이라 하였고 그 제자 사명당(四溟堂)도 조계종유(曹溪宗遺)라 자칭한 사실들로 미루어 유추해 보건대 전통성을 지닌 종명이라고 할 수가 있다. 조계종은 41년 이후 한때 왜색을 피해 잠시 종명을 쓰지 않았지만 오늘에 이르기 까지 계속되어 60년도 이후 종단의 난립이 있기 전까지는 줄곧 단일 종단으로 이어져 왔었다.
위에서 일제강점기의 교단상황과 그 기구를 정화(淨化)대상적 측면에서 고찰해 보았다. 부처님을 신봉(信奉)하는 교단은 화합이 생명이므로 불화와 분쟁이 있으면 승가(僧家, saṃgha)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불교사는 전래(傳來)로부터 신라말(新羅末)에 이르기까지 ‘삼승귀일(三乘歸一)의 일불승(一佛乘)의 가르침을 신봉해 왔기 때문에 무종무파(無宗無派)의 한 교단을 존속시켜 왔었다. 고려의 불교가 복국우세(福國祐世) 소재초경(消災招慶)의 기양불사(祈禳佛事) 전담하는 국가 예속의 기관으로 전락해 갔다고는 하지만 처음에 사대적(事大的) 중국(宋)의 종파경향 불교를 도입하면서도 신라의 일승 통불교적(一乘通佛敎的) 특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중국 그대로의 종파개념을 쓰지 않고 전문수업적 용어인 업(業:華嚴業․瑜伽業․律業 등)을 썼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 막바지에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가 풀리어(1895년; 고종 32년) 도시와 일반 민간에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불교계가 가장 먼저 한 일이 홍법의 도량을 마련한 일이었다. 전국 수사찰(首寺刹)격인 원흥사를 세워(1899) 중앙통제적인 기구를 구성하여 홍법교화(弘法敎化)라는 대승불교 본연의 이타행 실천을 실현해야 하는 당면과제에 놓여있었다.
모처럼 단일 종단이 자주성을 잃고 비틀거릴 때 뜻있고 눈밝은 일부 스님들이 들고 일어나 새로 임제종을 남쪽에 세웠으나, 이미 나라를 빼앗긴 망국민이라 일제의 사찰령에 묶여 두 종단 모두 해체되었다. 또 본사(말사 중에서도 재산이 많은 절)의 주지들은 대지주처럼 부유로웠고 고관들처럼 권력도 따랐으며 개중에는 처첩을 거느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는 대부분의 일반 스님들까지도 속성명에 장가를 들었으나 절에서 목탁을 치고 가사 장삼을 입었을 때만 스님이지 일상생활은 속인과 다름이 없었다. 이런 승려 속화(俗化) 현상은 급변하는 사회현상과 자유주의적 풍조의 영향이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즈음에서 정화가 시급한 곳은 사찰이요 반드시 숙청이 되어야 할 대상은 승려들이라고 하겠다.
우리 조상들은 처음부터 사찰을 ‘수복멸죄(修福滅罪)하고 숭신불법(崇信佛法)하는 청정한 도량’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전법도생(傳法度生) 수선흥법(修禪興法)하는 삼보상주(三寶常住)의 청정 적정(寂靜)의 불찰(佛刹)이 부처님 팔아먹는 가게(商店)가 되고 명리(名利)의 도적이 머무는 소굴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업장이 두터운 중생계라 눈밝은 선각 선지식이 반드시 정화의 횃불을 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젊고 뜻있는 승려들 사이에서는 불교정화․중흥운동의 바람이 일고 있었고, 그 중흥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청담스님은 정통불교 수호의 기치를 들고 한국불교의 앞날을 위해 일할 동지를 구하는 과정의 인욕행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그 때의 고통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정도이다.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지만, 그때는 승려들이 무일푼으로 떠난다는 것이 거의 불문율로 되어 있었고, 그래서 동전 한 푼 지니지 않고 떠났던 나는 두세 달 동안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밤을 지새고, 때로는 머슴들이 거처하는 방에서 그들의 온갖 익살과 놀림에 태연히 대꾸해 가며 새우잠을 자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중에는 어떻게나 초라한 몰골로 변해 있었던지 가는 곳마다 마을의 아이들이 뒤따라오며 누더기 중이라고 놀려댔다. 사실 그 무렵의 나는 서울에서도 ‘누더기 수좌’라고 별명이 나 있었다. 그토록 헌 옷에 맨발로 다녔던 것이다.
위의 진술은 청담대종사의 젊은 수좌시절 교단정화 염원으로 불조(佛祖)의 정법을 수호하기 위한 가슴에 사무친 원력의 위법방구(爲法亡軀) 인욕행이다. 어느 누가 청담스님처럼 교단을 자기 몸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인욕행을 실천했던 분이 얼마나 될까. 이런 스님의 인욕행의 실천은 결실로 50여명의 젊은 승려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 들어 전국학인대회(全國學人大會)를 1928년 3월에 개최하게 되었다고 한다. 청담대종사는 그 모임을 한국불교정화운동의 시초인 동시에 정화불사(淨化佛事)의 출발점이라고 진술했다. 청담 대종사는 이운허 스님과 함께 조선불교학인대회를 발기하면서 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내 나이 27세이던가 나는 근세조선 오백년동안 천대받던 불교를 정화, 중흥시키자는 정통 불법수호(佛法守護)의 기치를 들고 전국학인대회(全國學人大會)를 열고 전국 40여개나 되는 강원(講院)을 찾아 행각의 길에 올랐다. ……그토록 많은 삼보정재(三寶淨財)가 일인독재(日人獨裁)의 착취와 억압 앞에 이름도 자취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 삼천년 정법(正法)과 불조(佛祖)의 혜명마저 깡그리 파괴될 때 나의 의분은 용솟음쳐 방관할 수 가 없어 난 많은 학인들을 거느리고 정법수호(正法守護)를 부르짖었다.
이러한 학인스님들의 중흥운동도 일경(日警)의 탄압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하여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일경들에겐 불교인들의 모임은 항일의 주체세력과 같았다. 이리하여 학인들의 중흥운동 기치는 소리 없이 내려지고 곳곳에 모였던 젊은 스님들은 다시 뿔뿔이 산간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청담스님은 그 운동이 일경의 탄압으로 깨어지고 난 후 교단정화를 후의 일로 미루고 수덕사의 만공(滿空)스님 문하에서 자기 마음의 정화(淨化)에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인욕정진을 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세수하는 일, 변소에 가는 일, 그리고 먹는 일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자리를 떠난 일이 없이 정진에 몸을 맡기었다. 무수한 시간이 지나갔으나 나는 동요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한 목적, 유일한 목적만이 내 앞에 있었다. 해탈하는 일, 그것이 바로 그 목적이었다. …… 나는 문 앞에 부동의 자세로 앉아있었다. 목이 마르고 괴로움과 불편함이 잊혀질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이윽고 그 괴로움과 불편이 사라져 갔다. 점점 무(無)의 경지로 들어갔다. 밥은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앉아 있어도 앉은 것 같지 않고, 오줌을 싸도 싼 것 같지 않았다. 나의 정좌(定座)는 밥이고 정좌이면서 곧 무(無)였다.
청담스님은 수도승으로서 참선 생활을 통해 우리 불교계의 정화작업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평생을 오직 누더기 하나로 오후 불식과 장좌불와 수행을 하시면서 한시도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여념이 없었다. 청담대종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직 불법의 실천이 전부였다. 스님은 한평생 인욕 참선정진은 물론 정화불사에 누가 뭐라고 해도 언짢은 기색을 보임이 없이 태연자약하신 모습으로 인욕보살(忍辱菩薩)의 행을 실천하신 큰 별이었다. ?금강경?의 논리로 요약하면 스님은 내외경계(內外境界)에 무주상(無住相)으로 실천하는 인욕선인(忍辱仙人)이었다.
스님의 인욕행은 외적 인욕행과 내적 인욕행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는 교단정화로 후자는 내적정화인 자성불(自性佛)을 실현하는 참선으로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스님의 인욕행은 내외불이(內外不二)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무아행(無我行)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 장에서 스님의 무아의 인욕행은 어떤 사상배경으로 형성되었는가를 고찰해보자.
2. 사상적 배경
일제강점기에 한국불교의 개혁을 주창하고 실천한 선각자들 중에서 대표로는 경허 성우(鏡虛 惺牛, 1846~1912), 용성 진종(龍城 震鍾, 1864~1940) 그리고 용운 봉완(龍雲 奉琓, 1879~1944)을 들 수 있다. 본 장에서는 이들 세 분의 불교혁신 운동의 사조(思潮)의 요체인 ?금강경?의 가르침이 청담스님의 인욕사상 형성 배경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유추아래 세 분의 혁신운동을 개괄적으로 탐구해 보자.
경허스님이 활동하던 시기는 구한말 일본강점기의 암울한 시기로써, 1878년 말 일본 정토진종의 오쿠무라 연신(奧村圓心)이 부산에 본원사(本願寺) 별원(別院)을 세워 일본불교가 침투해 오는 시기였다. 경허스님은 당시 불교계의 현실에 대하여 ‘정법 보기를 흙같이 하고, 혜명(慧命)의 계승을 아이들 장난처럼 생각한다’고 개탄하고 무엇보다도 정법(正法) 수호의 기치를 들었다. 그래서 스님은 1899년부터 1903년까지 5년간 해인사, 화엄사 그리고 범어사 등을 중심으로 사부대중 모두가 참여하는 정혜결사(定慧結社)운동을 전개하면서 선풍(禪風)을 진작시켰다. 이것은 보조 지눌(1158-1210) 이후 끊어졌던 선수행(禪修行)의 전통을 중흥시킨 것이다. 이로써 경허스님은 한국 근대사에서 ‘선의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다.
다음 용성스님에게 있어서 불교유신의 방법은 불교 본연의 진면목을 드러낼 수 있는 교의로써 ‘각(覺)’에 착안하여 1916년 서울 종로 대각사에서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하였다. 대각교의 종지(宗旨)는 붓다가 삼처전심(三處傳心)한 뜻이며, 수행은 화두참구(話頭參究)의 법이라고 하였다. 그의 대각교운동은 ‘선율겸행(禪律兼行)’의 구체적 실천이다. 그는 이것을 구세운동이라고 생각하고 1925년 서울 도봉산에서 ‘만일참선결사회(萬日參禪結社会)’를 창립하여 선율겸행(禪律兼行)을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시간 묵언으로 실천하였다. 또한 용성스님은 1921년 4월에 3장역회(三藏譯會)를 만들어 한문경전을 우리 한글로 번역하여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실천하기도 했다.
셋째로 용운스님은 그의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유신하자는 소리가 온 천하에 가득 차 있는데, 조선불교만 고요히 아무 소리가 없으니, 과연 무슨 징조인가?”라고 불교계의 동면(冬眠)을 우려하고 있다. 유신할 내용은 첫째, 승려의 교육강화이다. 둘째는 참선운동 전개의 대중화이다. 스님이 제안하여 1921년 남천화상(南泉和尙) 등에 의해 서울 안국동에 선학원(禪學院)이 건립되어 참선대중화를 실천하는 계가 되었다. 셋째, 포교의 활성화이다. 포교로는 불교지(佛敎誌)의 발간, 불교성전의 편찬과 보급, 포교당의 각 도시마다 건립, 그리고 한글대장경 번역 등이 중요한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선각자들은 불교지의 간행을 통한 문서포교에 힘썼다. 1919년 독립운동 이후 1924년 7월에는 ?佛敎?가 발간되어 10여년을 계속하다가 정간된 후, 1937년 3월 다시 속간되어 ?佛敎(新)?이라고 칭하여 해방 전까지 발행되었다. 그러나 ?佛敎?지를 제외하고는 대개 평균 10여 개월 간행되다가 종간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불교계가 얼마나 열악한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논자는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선각자 세 분의 불교혁신 운동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런 혁신운동이 청담태종사의 일대사인 ‘청정승가’ 확립과 ‘청법수호’ 의지를 다지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청담대종사는 25세(1926년)에 당시 불교학 최고 강원인 개운사(開雲寺)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대강백 박한영 스님의 지도아래 경‧율‧론 3장(藏)을 두루 섭렵하고 대교과를 1930년 5월에 졸업하였다. 스님은 그곳이 일생을 입지(立志)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준 곳이라고 진술했다. 스님께서는 이 사바세계에 피어나는 연꽃과 같이 청정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잇고 한국고유의 승풍(僧風)을 진작시키기 위한 인욕의 만행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누더기 옷을 걸치고 걸망에는 상비약과 삭발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머리가 긴 아기나 어른을 만나면 머리를 깎아 주고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일러주기도 했으며, 부스럼이나 상처가 난 사람을 만나면 약을 발라 주고 치료도 해주었다. 또 남의 집 처마 밑에서 한밤을 지새우며 인생무상을 되씹기도 하고 때로는 심해(深海)에 고요히 가라앉은 무딘 바위처럼 무뚝뚝한 시골 머슴들이 거처하는 사랑방에서 그들의 온갖 놀림을 받아가면서도 오히려 태연자약하게 대꾸해주며 한 구석진 곳에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혹독한 겨울 추위에도 맨발과 홑옷으로 지냈으나 가사장삼을 꼭 입고 다녔다.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이나 사시사철 언제나…. 근세 조선 5백년 동안 천대받던 ‘중놈’이지만 언젠가는 신라‧고려시대와 같은 찬란한 불교 중흥을 이루어 3천만 겨레 모두에게 숭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중놈이, 아니 삼계(三界)의 도사(導師)와 사생(四生)의 자부(慈父)가 되겠다는 나름대로의 굳은 각오와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은 청담대종사의 궁굴(窮屈)과 인고(忍苦)와 자약(自若)의 단련 속에서 형성된 인욕선인(忍辱仙人)의 이상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인욕 사상이 어떤 불전(佛典)에 설해지고 있는가를 사상사적인 시각에서 개괄적으로 탐색해 보자.
먼저 인욕(忍辱, kṣ?nti)의 어의를 알아본다. 인욕은 산스끄리뜨어로는 ‘kṣ?nti’, 영어로는 ‘forbearance'로 옮긴다. 인욕 어의(語義)의 통석(通釋)은 어떤 모욕이나 박해 또는 고뇌에도 견디어 참아 마음을 흩트리지 않고 평안하게 하여 본래의 면목(自性)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말로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재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은 우리 중생들에게 인욕을 수행의 필수요건으로 설하셨다. 이는 우리 범부나 중생이 살고 있는 사바세계(裟婆世界)의 뜻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사바’란 말의 산스끄리뜨어 ‘sah?'는 의역하면 ‘인토(忍土)’라고 한다. 우리 범부가 사는 이 세계는 인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를 말한다. 즉 사바세계란 중생들이 10악(惡)을 참고 견디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계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 범부들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곳곳에서 불화와 마찰이 생겨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다. 그래서 원효(元曉, 617-686)스님은 그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서 “세상 쾌락 저버리면 성인같이 공경 받고, 어려운 일 능히 행하면 부처님처럼 존중 받는다”고 인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가 인욕을 실천하면 할수록 세상이 주는 희비애락의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평화로운 마음상태를 얻어 구경엔 해탈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초기불전에서는 인욕을 어떻게 설하고 있는지 탐구해 보자.
?잡아함경? 제 40,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안락을 얻는 것은 인욕이 가장 뛰어난 방법이다.”
?잡아함경? 제 40, “아수라의 면전에서도 비방을 인욕할 수 있다.”
인욕은 너나 나나(彼我)의 안락을 얻을 수 있는 최상의 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아수라(阿修羅, Asura)라는 면전의 치욕도 참는다고 말함으로써 사회안녕과 질서를 위해 인욕 이상의 다른 길이 없음을 강조했다고 생각된다.
6바라밀(波羅密, p?ramit?) 이전에 3학과 8정도라는 수행덕목이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8정도(aṣṭ?nga-marga)를 3학(三學) 안에 요약하는 예는 흔히 볼 수 있다. 또 3학은 정․혜에 요약할 수 있다. 선정과 지혜는 수행자의 필수 요목이다. 이 기반에 계를 가해서 불도의 삼요목인 계․정․혜 3학이 성립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3학에서 6바라밀의 덕목이 유래했다는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증상계(增上戒) 등의 3학은 곧 이 6바라밀의 체성이라고 설한다.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에는,
3학을 포섭하기 위해서 여섯 가지의 바라밀을 설한다. 처음의 셋(보시, 지계, 인욕)과 둘(보시․지계)은 처음의 1, 즉, 계에 포섭되고, 뒤의 둘(정진, 선정)은 2, 즉, 정에 포섭되고, 나머지 하나(지혜)는 3, 즉, 혜에 포섭된다.
라고 하였다. 이것을 도해(圖解)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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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인욕(忍辱)을 지계(持戒)에 포함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설이다. ?해심밀경(解心密經)?에서는 인욕을 계학(戒學)에 포함시켰다. 또 ?해심밀경?에서는 유정(有情)을 요익(饒益)하기 위하여 보시와 지계 그리고 인욕을 설하고, 번뇌를 대치하기 위하여 정진과 정려와 지혜를 설했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6바라밀이 3학으로부터 이루어졌다고 영국의 Har-Dayal 교수는 주장했다.
바라밀(p?ramit?)의 성립은 대승의 시작이며, 대승은 바라밀의 조직으로써 그 사상의 특색을 나타낸다. 소승불교에서의 3학은 불도를 성취하는 중핵을 이루었으며, 대승에서는 6바라밀이 그 위치에 나아갔다. 이런 의미에서 대승의 흥기와 6바라밀의 성립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대승사상이란 바로 보살사상을 의미한다. 보살사상이란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그 목적으로 하며 불타이래의 사상을 총화한 것이다.
서력 기원을 전후해서 대승사상의 성립과 함께 6바라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성립의 과정에 있어서 보살은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 상호관계의 도(道)가 문제된다. 여기에 해당되는 덕목이 보시와 인욕이다. 6바라밀 중 보시와 인욕은 인간 상호의 관계에서 나타난 본생보살의 덕목에서 유래된 것이고, 지계․정진․선정․지혜 등은 개인의 내면적인 실천도로써 출가비구의 불가결의 수행덕목으로 성문도에서부터 온 것으로 생각함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6바라밀은 3학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 성문도와 본생사상이 결합된 결과로 보살사상의 극치이며 대승불교 수행의 절대불가결의 수행덕목으로 대두되었다. 초기 대승불교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은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 상호 관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6바라밀 중 보시․인욕의 덕목을 강조했다. 그러한 실천을 강조한 경전이 ?금강경?이다. 그러면 ?금강경?에 나타난 인욕사상을 고찰해 보자.
?금강경?의 「第十四 離相寂滅分」과 「第二十八 不受不貪分」에는 인욕사상을 설하고 있다. 그 내용의 대요(大要)를 알아보자. 인욕바라밀은 극도로 어려운 환경이나 굴욕스러운 상황을 끝까지 참아냄으로써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수행이다. 6바라밀 중 상(相, lakṣaṇa)을 떠나는(초월하는) 문제에 있어서 인욕이 중요한 방편으로 다음과 같이 대두된다.
그런데 다시 수보리여, 실로 여래에 있어서의 인욕바라밀은 참으로 인욕바라밀이 아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깔리왕(Kalingar?j?)이 나의 몸과 수족(手足)에서 살을 도려낸 그 때에도 나에게는 자기라는 생각(?tma-saṃjn?, 我相)도, 중생이라는 생각(sattva-saṃjn?, 衆生相)도, 영혼이라는 생각(jīva-saṃjn?, 壽者相)도, 개아라는 생각(pudgala-saṃjn?, 人相)도 없었으며 그리고 나에게 그 어떤 생각한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수보리여, 만약 그 때에 나에게 ‘자기’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하면 그 때에 나에게는 ‘원망하는 생각’이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수보리여, 나는 분명히 안다. 과거세(過去世)에 오백의 생애 동안 나는 ‘인욕을 설하는 자(kṣ?ntiv?din)'라는 이름의 선인(仙人, ṛsi)이었다. 그 때에도 역시 나에게는 ’자기‘라고 하는 생각이 없었고,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었고, 영혼이라는 생각이 없었고, 개아라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상(我相, ?tma-saṃjn?)‧인상(人相, pudgala-saṃjn?)‧중생상(衆生相, sattva-saṃjn?)‧수자상(壽者相, jīva-saṃjn?)을 초월하여 텅 비어 있는 상태에서 누구를 원망하고 무엇에 대하여 성을 낼 수 있겠는가? 위의 인용문은 부처님께서 전생에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서 수행하고 있을 때, 그 시대의 왕인 가리왕(歌利王, kalinga-r?j?)이 몸과 수족을 마디마디 잘라내었을 때 나와 너를 공(空, śūnya)으로 보았기 때문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4상(四相)에서 떠나 있으므로 이미 고(苦)의 상도 없는 것을 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육체의 고통도, 원망할 가리왕도, 심지어 고마워할 제석천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과거 오백생 동안에 수행한 인욕을 다 반야의 광명에 비추어 설하신 것이다. 그 때에도 사상(四相)이 없음으로 해서 이름하여 인욕바라밀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상(四相)을 떠나게 되면 그 어떠한 감정의 대상도 있을 수 없다. 참아낼 대상도 기뻐할 대상도 성낼 대상도 그 어떤 것도 초월하였으므로 실제로 참을 것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닌 것이고 단지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실체를 공(空)한 것으로 보면 상(相)으로부터 벗어나 복잡한 사회생활 속에서도 인욕행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공(空)의 지혜에 의해 인욕을 실천하면 모든 것은 집착이 없는 무아행(無我行)이 된다.
보살이 반야행(般若行)을 하면 자연히 복덕이 따르게 된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체법에 아(我)가 없음을 깨달은 지혜의 공덕은 그 어떤 물질적인 보시보다도 수승하다고 ?금강경?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선남자나 선여인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 만큼 되는 세계들을 칠보로써 채우고, 그것을 여래‧아라한‧정등각들께 보시했다고 하자. 다시 어떤 보살이 자아도 없고(無我) 생겨나지도 않음(不生)의 진리를 인욕(忍辱)하여 얻는다면, 후자가 그 일로 말미암아 참으로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은 공덕을 쌓은 것이 될 것이다.
일체법에 있어서 무아의 지혜를 체득한 보살은 그 어떤 물질적인 보시의 공덕보다 수승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과거 오백생 동안에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서 수행을 할 때 아(我)를 텅 빈 것(空)으로 보아 인욕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었다. 인욕의 경지가 깊어지면 단순하게 수행자로서 참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본성 자리를 굳게 지켜 일체의 분별에 흔들리지 않고 나지도 죽지도 않는 진리에 머물 수가 있게 된다고 한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청담스님은 근대 석학 박한영 스님으로부터 교학을 배우고, 만공스님 문하에서 선가(禪家)의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도리를 깨친 후 무아의 인욕선인의 경지를 체득하여 정법수호와 청정승가 확립에 위법망구의 인욕보살의 행을 실천하셨다.
Ⅲ. 인욕사상으로서의 무아의 인욕
1.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서의 원(願, praṇidhāna)
청담스님은 인간이 꼭 해야 할 일과 꼭 가야 할 길을 마음을 깨닫는 마음 찾는 공부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자기 마음을 깨치는 일이다. 이 마음을 깨쳤을 때가 곧 부처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마음을 깨달아서 많은 중생을 바로 이끌어주고, 복 받게 해주고 잘 살릴 수 있는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며, 우주를 다 내 마음대로 하자는 것이다.
청담스님은 “마음을 깨쳐서 아는 지혜는 연구하고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알아지는 지혜이고, 무소부지(無所不知)로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우주를 다 차지하고도 남는 그런 절대적인 법을 알려주는 것이 이 사구게(四句偈)를 설명해 주는 것이니, 그 공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고 주장하셨다. 그러면 청담스님께서 이 사구게를 지적한 것은 어떤 사구게일까? 그것은 ?금강경?의 제5「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 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하는 열여덟 자와 같은 글귀를 말한다. 청담스님은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금강경?의 네 구절만 배워서 읽고 남이 알아듣도록 해석해 준다면, ?금강경? 전부가 아니더라도 어느 한 구절 열여덟 자만이라도 설명해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복이야말로 우주를 다 차지하고도 남을 것이니 그 복은 10억 세계의 칠보를 보시한 복덕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다”고 하셨다. 그럼 이 사구게의 뜻은 “모든 형상은 다 변화하는 것이다. 모든 형상을 보되 인연의 법칙에 의해 잠시 머무는 것(假相)으로 참된 실상(實相)이 아닌 것으로 직관한다면 곧 진리를 보고 여래(如來)를 본다”는 것이다. 여래는 부처를 가리키는 말이고, 마음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니 그게 곧 ‘참나’이다. 이것은 ?금강경?의 제일 사구게로서 사구게 중의 사구게라고 한다. 이 사구게의 뜻을 바로 알게 되면 ?금강경? 전체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
모든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는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 하나하나 모두가 허망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근본은 공(空)인데 인연의 법칙에 의해 잠시 동안 형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인연이 다 되어 버리면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육신도 본래 텅 빈 것인데 연기(緣起)에 의해서 지․수․화․풍이 잠깐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인연이 흩어지면 다시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은 무상하며 덧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연의 도리를 아는 사람은 인생을 알고, 인생의 도리를 아는 사람은 인연의 도리를 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진리를 알 때 반야(般若, anuttara-samyak-saṃbodhi)가 드러난다고 한다. 반야는 바로 지혜이고 여래이다. 이렇게 될 때 ‘참된 나’를 보고 부처님도 보고 온 우주의 참모습이 드러나 지혜의 삶, 보살의 인생, 여래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남녀, 노소,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가 4상(相)을 초월하여 실천하기만 하면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다는 교설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과 수자상(壽者相)이 있다고 한다면 곧 보살이 아니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무아법(無我法, nirātmāno dharmā)에 통달한 자이면, 여래는 이 사람을 참된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Bodhisattva-mahāsattva)이라 말하느니라.
대승불교의 이상은 보살이며, 이는 소승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아라한(阿羅漢, Arhat)과 구별된다. 소승 부파불교의 대표적 학파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는 ‘아공법유(我空法有)의 입장을 취하여, 즉 사람은 공(空)하나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항구적으로 존속한다는 ’삼세실유법체항유(三世実有 法體恒有)’를 주장하였다. 위의 본문 주(註) 38)은 대승불교 운동가들이 대승운동을 전개할 당시, 인도의 모든 사상, 즉 정통파(ārtika)나 비정통파(nāstika)의 실재론적 견해를 논파하여 정론(正論)을 세우기 위해 4상(相)을 부정하고, 제법(諸法)은 자성(自性, svabhāva)없이 공(空)하며 이것이 제법의 실상이라는 것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경?은 보살됨의 조건이 무상(無相)의 실천 여부에 달려 있음을 규정하였던 것이다.
또한 주(註) 39)은 ?금강경?의 이상적 인간상인 보살마하살은 무아법(nirātmāno dharmā)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는데, ‘보살마하살’이란 바로 무아(無我, anātman)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금강경?은 초기불교 중요한 근본 교설 가운데 하나인 무아(無我)를 무상(無相)으로 재해석하여 당대의 인도 모든 사상의 단견(短見)들을 타파하면서 회통한 새로운 보살승(菩薩乘, Bodhisattvayāna) 운동의 종지를 내세운 것으로 파악된다.
이제까지 설명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등은 대승불교 운동가들이 보살승(菩薩乘) 사상의 기저를 내걸고 활동할 당시 인도의 모든 사상, 즉 정통파나 비정통파들의 단견(短見), 그리고 더 나아가 불교 내의 혁신까지도 꾀하며 진정한 대승(大乘)의 종지를 세우려한 것임을 주지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 “일체의 모든 상을 여윔을 곧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 조선조 초기의 고승 함허득통(涵虛得通) 스님이 편찬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서 육조혜능(六祖慧能) 스님도 “중생과 불성에는 본래 차이가 없지만 연(緣)에 4상(相)이 있으므로 무여열반에 들어가지 못한다. 4상이 있으면 곧 중생이요, 4상이 없으면 곧 부처님이다. 미혹하면 불(佛)이 곧 중생이요,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님이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이런 4상의 부정은 초기불교의 무아관을 계승하여 대승흥기 당시 인도 불교계 안팎의 인격이나 영혼을 실체적 존재로 인정하는 듯한 사조의 단견을 혁파·회통하기 위하여 4상을 무상으로 해석한 것인데,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공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산스끄리뜨 경전의 4상(相)에 대한 원문의 순서가 아(我)·인(人)·중생(衆生)·수자(壽者)의 순서가 아닌, ‘아(我, ātman)·중생(衆生, sattva)·수자(壽者, jīva)·인(人, pudgala)의 순서로 되어있음을 주 32)의 산스끄리뜨 원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런 보살승 운동은 그 당시 매우 새롭고도 혁명적인 대중운동으로써 모든 사상을 회통시킬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의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대승(大乘)의 정신은 보살(菩薩)의 정신이요, 보살정신이 바로 반야 사상이며, 반야 사상은 바로 4상(相)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청담스님께서는 깨치신 안목에서 인욕에 대한 주(註) 33)을 해석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셨다.
참는 것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500생 동안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계실 적에 가리왕에게 사지백해(四肢百骸)를 찟길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참을 줄 알아야 하고 또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전단(栴檀)이라는 하늘나라의 고약을 가지고 와서 찢어진 육신을 완전하게 치료해 줄 그때에도 조금도 기쁜 마음을 내지 않으셨던 것처럼 참는 것 없이 참아야 합니다. 이렇게 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의 경지에 도달하면 단순한 참음이 아니라 마음의 참바탕 자리를 튼튼하게 지키고 일체의 객관경계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참나”의 진리를 체득했다는 뜻을 가진 인(忍)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득성어인(得成於忍)의 ‘인(忍)’은 어긋나고 모순되고 거슬리는 경계를 잘 참고 성내지 않으며 ‘좋다·싫다’는 생각이 없어서 갚음이 없는 것을 말하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생멸이 없는 진리에 머물러서 그 마음이 도할양무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청담스님께서는 ?Gītā?의 “‘이상적 인간상 즉, 스티따쁘라갸(sthitaprajnā, 견고한 지혜인)’이 애증(愛憎)·미추(美醜) 등의 이원(二元)적 감정을 초월하여 사사무애행(事事無碍行)을 한다”는 것처럼, “마음이 공(空)해 있어서 아공·법공·구공(我空·法空·俱空)이 드러나 있게 되니까 이 몸뚱이를 탁 잊어버리면 전신을 송곳으로 쑤시고 불에 그슬려도 하나가 뜨거운 줄 모르는 겁니다. 마음이 무심경계(無心境界)에 들어가서 생각이 없으면 경계가 침범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도 침범 못하고 불도 불 행세를 못합니다”고 당신의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서의 경지를 설하였다. 스님은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 상호 관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인욕의 덕목을 중시·강조하면서 당신 수좌(首座)시절의 인욕행(忍辱行)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에게 만법이 무아(無我, anātman)인 도리를 깨쳤습니다. 나만 무아가 아니라 만법이 다 무아이기 때문에 성불할 수 있는 도리를 깨쳤습니다. 인욕하는 것도 처음에는 힘이 들지만 이것도 자꾸 노력을 하고 무아의 도리를 닦아 나가면 도가 높아짐에 따라 힘 안 들이고 잘 됩니다. ……성나는 것만 참는 것이 아니라 아픈 것도 참아야 하는데, 몸을 톱으로 켜고 칼로 찌르더라도 아픔이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법력이 아직 그렇게 되지는 못했지만 말만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발심한 불자입니다.
내가 한 30년 전에 맨발로 짚신만 신고 다니며 방에 불도 안 때고 안국동 선학원(禪學院)에서 한동안 인욕공부를 하며 지낸 일이 있습니다. 요사이 추위는 30년 전 추위에 비하면 훨씬 덜 춥습니다. 그 때 장안에는 선학원에 장사 중이 하나 나왔다고 떠들썩한 일이 있었지만 나는 그 때 몸뚱이를 내버리고 인욕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대로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청담스님은 인욕을 “욕되는 걸 참을 뿐만 아니라 남이 날 나쁘다고 입으로 욕을 하든지 매로 때리든지 칭찬을 하든지 마음에 움직임이 없이 전부 참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는다는 것은 억지로 참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참는다는 생각 없이 참는 것이 정말 참는 것입니다”고 인욕 정신에 대하여 스님의 해석을 하였다. 이런 논거는 주(註) 32)의 해석에 대한 청담스님의 다음의 정견(正見, samyagdṛṣṭi)을 통해서 논증된다.
“그 때 인욕선인 시절의 내가 온 몸을 찢기어 죽어가면서도 그 가리왕에게 대해 조금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내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 때 이미 나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그 때 배까지 갈라서 창자를 끄집어낼 때 내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다면 그 즉시 원한이 일어나고 성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 때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아상이 있으면 아픕니다. 우리가 당장 코를 벨 때, 참으려 해도 눈을 찡그리게 됩니다. 참을 수 없이 아플 때 안 찡그릴 수 있습니까. 팔이며 다리를 떼어놓을 때, 그렇게까지는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
그래서 육조대사께서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전부 제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그림자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림자라는 것보다도 있는 채로 내 마음이고 전부 허공입니다. 그러니까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어서 모든 상이 상 아닌 겁니다. 이런 무심(無心)으로 참는 게 정말 참는 것입니다.
스님은 이러한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서 “공(空, śūnya)사상에 입각한 실천적 윤리로서 ?금강경?에서 주장하고 있는 구류중생(九類衆生)들을 제도한다는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원(願, praṇidhāna)을 세웠다.
개인의 길에서 종정(宗正)이라는 것은 거추장스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의 길에서는 언제나 정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함께 세상에 태어났다는 인연 때문에 사해대중들을 깨우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것이 아니다. 차라리 불교는 사해대중의 구제에 더 큰 뜻이 있을지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득도를 한 다음 우루베라 촌에서 내려왔고, 의상(義湘, 625-702)스님도 고국 신라로 돌아왔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그들이 왜 내려왔고 돌아왔는가’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누구에게로 돌아왔는가? 그의 나라로, 그의 형제들의 곁으로 온 것이다. 우리가 이곳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떤 사실 앞에도 우선하는 일이다.
우리들은 한국인이다. 많은 한국인의 구제가 오늘의 한국불교의 명제이다. … 인간교육의 목표는 단순히 애국자를 배출한다거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아니며, 또 대중들을 천당으로 인도하는데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죄악과 번뇌와 고통 속에 잠긴 인간을 참인간이게 하는 것 그들로 하여금 죄악과 번뇌를 버리고 진정한 안락을 누리게 하도록 하는 것, 지혜롭게 하는 것, 자비로운 협조자이게 하는 것, 그것이 불교의 참뜻인 것이다. 그것을 원효(元曉, 617-686)는 오직 “자리(自利)와 타리(他利)를 염원하고 보리(菩提), 즉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이러한 불교의 대명제 앞에서 한국불교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매일의 신문들이 활자화하고 있듯이 내분·탈퇴·불만·파문·반대·타락의 일변도가 아닌가? …… 다만 한국불교가 대중을 구제하고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나의 ‘유신 재건론’이라는 것이다.
청담스님과 같이 누가 한국불교를 그의 피와 살로 느꼈던가? 한국불교의 이상, 한국불교의 고민, 한국불교의 비극, 한국불교의 위대성이 청담스님의 사상과 생활 속에 나타나 있다. 청담스님은 마치 마하뜨마 간디(1869-1948)가 인도의 독립운동을 하면서 “나는 신(神)을 실현하고자 하는 구도자다. 신(神)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은 신을 그의 피조물 속에서 보고, 그것과 하나로 되는데 있다. 이는 오직 온 인류에 대한 봉사에 의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온 인류 중에서도 우선 인도국민에 대해서 봉사하기로 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은 남을 구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남을 구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먼저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신념과 같이 지장보살의 원력(願力)으로 성불을 한 생 미루는 각오로 청정승가와 정법수호하는 정화불사(淨化佛事)에 한평생을 모두 바쳤다.
2. 자실인의(慈室忍衣)의 삶
한일 합방(1910년) 이후 우리 불교계의 지도층은 이권과 명예욕의 아수라판을 벌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 근대 한국불교승단에서 막행(莫行)․막식(莫食)하며 처자를 거느린 비법승배(非法僧輩)들이 종권에 등단하고 교계를 혼탁케 하므로 한국고유의 승풍(僧風)과 불조(佛祖)의 혜명을 잇기 위해 청담스님은 정화불사에 앞장서게 되었던 것이다.
청담스님(1902-1971)은 교단 정화불사를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것이라 하여 민족과 불교를 불이(不二, advaita)적 세계로 보고 민족 속에 내재하고 있는 애국심을 불교 속에 정화심(淨化心)으로 승화(昇華) 시키고자 하였다.
청담스님은 마치 초기 대승불교운동가들이 부파불교도들의 소승적 수행태도를 파사현정(破邪顯正)하여 초기불교의 근본정신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운동과 같이 수행풍토를 정립하기 위하여 순교정신으로 한국불교의 정화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러한 피나는 정화불사는 전국 사찰의 90%의 형성이 이루어져 이로써 정화불사는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통합종단이 형성된 이후 종단 구성원은 무사안일주의, 문중 파벌주의, 화합(和合)의 미명 아래 고개를 쳐드는 대처승 무리들의 현대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모든 풍조는 16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투쟁해 온 청담스님의 정화이념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교단 내에 산문 중심 내지 화동파 등 분파현상이 나타나고 계율정신이 희박해져서 지계(持戒)를 의식하지 않고 막행막식하는 승려들이 나타나 세간의 비난이 곳곳에서 들렸다. 그래서 청담스님은 정화정신이 퇴보하고 있는 것에 깊은 상심에 빠져 ‘정화종단(淨化宗団)이 망화종단(亡化宗団)되어간다’고 한탄하시면서 1969년 7월 5일 열린 제 20차 임시 중앙종회에 종단의 유신재간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종회는 청담스님의 유신재건안을 깊이 새겨보지도 않은 채 거의 묵살시켜 버렸다. 그러한 연유로 청담스님은, “이 모든 사태를 나 스스로의 잘못으로 여기고 뼈저린 참회의 마음으로 종단을 떠나 불교 현대화․정화불사의 기치를 또다시 들게 됨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소명하고 있다.
‘정화’란 먼저 교단을 정화하여 안으로 ‘수도승단(修道僧團)․정법불교(正法佛敎)’를 확립하고, 밖으로 새로운 교화운동을 일으키어 ‘인간개조(人間改造)․도의 재건(道義再建)․사회정화(社會淨化)’의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조국재건(祖國再建)의 터전을 마련하고, 나아가서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정화가 발기(發起)된 뒤 10여 년간, 여러 가지 장애로 이념대로 구현되지 못하던 중, 7년 전에 정화이념을 근본으로 하여 통합종단(統合宗團)이 이룩되었으나, 그 뒤에 정화재건의 근본이념과는 달리 승풍(僧風)과 질서를 바로잡지 못한 채 앞으로의 전망과 방향은 흐리고 현재에 와서는 더욱이 혼미(昏迷)하여 전진보다 퇴영(退嬰)이 있을 뿐이니, 이를 보고 개탄치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나 자신이 정화의 횃불잡이로서, 조계종원로로서 그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로서는 장로(長老)의 명분이 무척 부끄럽기만 했다. …허수아비 종도(宗徒)나 장로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그 종단 권외로 물러서는 것이 명분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기에, 종단에서 탈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현 조계종단 테두리를 벗어날지언정 ‘조계종지(曹溪宗旨)’와 불조(佛祖)의 교지(敎旨)에서 이탈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국불교의 역사적 과업을 등진다는 것은 아니다. 이 몸으로서 한국불교의 재건에 이바지할 길이 있다면 이차돈(異次頓)의 사신(捨身)과 보우대사(普雨大師)의 순교(殉敎)를 사양치 않을 것이다. 이 몸은 이미 부처님께 바친 것, ‘백골이 진토되고 넋이야 있건 없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하던 포은 선생의 애국심(愛國心)이나 나의 애종심(愛宗心)은 서로 닮은 점이 있으리라.
이런 청담스님의 애종우교(愛宗憂敎)하는 마음을 그 누가 진의를 알 수 있으며, 그렇게 실천할 수 있을까. 1969년 8월 12일에 발표한 조계종과의 결별을 선언한 ‘조계종탈퇴성명’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청천벽력이었다. 이 소식은 종도(宗徒)들 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도 크게 놀라며 한국불교와 조계종을 걱정하는 관심의 우려의 소리가 높았었다.
이런 우려의 여론으로 종단의 정화주체세력들은 단결하여 청담스님을 1970년 7월 종회에서 다시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선출했다. 그때 스님은 ‘종단만 잘 되게 한다면 조계사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시 총무원장이 된 청담스님은 실로 의욕적으로 종단의 정화불사의 3대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승려교육의 현대화, 역경사업의 현대화, 포교사업의 현대화로 청정승가(淸淨僧伽)의 기풍(氣風)을 진작시키는 불사(佛事)에 열반(1971년 11월 15일)할 때 까지 혼신의 열정을 불태웠다. 청담스님의 생애는 정말 한 마디로 ‘자실인의(慈室忍衣)’의 삶이었다.
청담스님의 ‘자실인의’의 정화실천은 곧 구세행(救世行)이었다. 스님의 구세행은 단적인 예로 노구로 1971년 11월 원주 1군 사령부 군 법당 준공식에서 한신 육군대장을 비롯한 장병과 시민 등 천 여명의 청법대중들에게 ‘육신은 유한하나 법신은 영원하다’는 법문을 사자후 하시고, 그날 서울로 돌아오시다가 열반한 것으로 예증된다. 이와 같이 청담스님은 마치 부처님이 ‘길’에서 태어나 ‘길’을 묻다가 ‘길’을 깨달아 중생들에게 ‘길’을 안내하다가 ‘길’에서 열반하신 것과 같이 일평생 ‘무아의 인욕선인’으로서 보살의 원행(願行, praṇidh?na)의 삶을 실천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스님의 ‘자실인의’의 보살원행(菩薩願行)이 어디서 유래했을까? 논자는 그것을 ?금강경?의 「묘행무주분 제4」의 가르침으로 유래하였더라도, 청담스님적인 독특한 구상과 방식과 특색이 작용된 것으로 본다. 그럼 그 내용의 가르침을 알아보자.
보살은 마땅히 법에 머무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라. 이른바 색(色)에 머물지 않는 보시(布施)며, 소리(聲)․냄새(香)․맛(味)․느낌(觸)과 법(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여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相)에 머무르지 말 것이니라.
……(중략)…… 수보리야! 보살이 상(相)에 머물지 않고 행하는 보시의 복덕도 또한 이와 같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마땅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하느니라.
보시는 대승불교흥기 당시로부터 현재까지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 상호관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6바라밀 중 인욕과 더불어 절대불가결의 수행덕목으로 강조되었다.
보시의 가장 본질적인 정신자세는 상(相, lakṣaṇa), 즉 겉으로 나타난 모습에 집착함 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와 너가 존재하는 보시가 아니라 나와 너를 근원적으로 초월하는 무아(無我, an?tman)의 보시(布施, d?na)를 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금강경?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apratiṣṭhito d?na)는 ‘인도의 모든 윤리적 실천은 형이상학적 깨달음에서 유래한다“는 전통적 인도사상 패러다임의 전형이다. 따라서 ?금강경?의 공(空) 사상의 인식은 4상(相)의 부정으로, 실천적 윤리관은 무주상보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청담대종사의 인욕사상의 구조는 ’인욕선인의 원(願, praṇidh?na)’으로부터 ‘자실인의(慈室忍衣)의 삶’을 실천한 것으로 분석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자실인의(慈室忍衣)’의 어원과 사상의 내용을 개괄적(槪括的)으로 탐색해 보자.
‘자실인의(慈室忍衣)’의 어원은 ?묘법연화경?의 「법사품」에 나온다. 「법사품」에서 “약왕아,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여래가 열반한 뒤에 사부대중을 위해 이 ?법화경?을 설하고자 하는 자는 어떻게 설해야 할 것인가”를 묻고 다음과 같이 설해야 된다는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이 선남자·선여인은 여래의 방에 들어가서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사부대중을 위하여 널리 이 경을 설할지니라.
여래의 방이란 것은 모든 중생 가운데 대자대비한 마음이요, 여래의 옷이란 것은 온화하고 욕됨을 참는 인욕의 마음이요, 여래의 자리란 것은 일체법이 공(空)함이 그것이니라. 이러한 가운데 안주한 연후에야 게으름을 내지 않는 마음으로 모든 보살과 사부대중을 위하여 널리 이 법화경을 설할지니라.
법(法, dharma)을 설하는 자, 즉 법사(法師, dharma-bhāṇaka)는 ‘일체법이 공(空)함’을 인식하고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는데 유화인욕(柔和忍辱)의 마음으로 설하라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금강경?의 「대승정종분 제3」에서 설하는 내용 즉 주(註) 51)과 「불수불탐분 제28」에서 설하는 내용 즉 주(註) 33)을 합하여 전진(前進)적으로 회통하여 명료하게 설하신 것으로 사료된다. 법사는 부처님(如來)을 대신해서 법을 설하는 자이므로 삼계(三界, trayo-dhātavaḥ)를 집(室)으로 인식하여 집의 구성원들인 구류중생(九類衆生)을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정신으로 유화인욕(衣)의 마음으로 진리를 설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법사품」의 말미에 “만일 이 법사를 친근히 하면 속히 보살도를 얻을 것이며, 이 법사 따라 잘 수순하여 배우면 갠지스의 모래알 만큼 많은 부처님을 친견하리라”고 ‘자실인의(慈室忍衣)’를 강조하고 있다. 여래의 가르침의 목적은 모든 중생을 부처님(佛)과 동일한 깨달음으로 인도함에 있다. 성문·연각·보살이라는 삼승(三乘)의 수행자가 제각기 수행을 함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성불의 길로 나아가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 「방편품」의 취지이며, 이것을 ‘唯有一乘法·無二亦無三’으로 표현하고 있다. ?반야경?은 대승, 즉 보살승을 성문·연각의 二乘과 병립시킨 ‘三乘’의 입장을 취한데 대하여, ?법화경?은 성문 등의 二乘이 방편이며 이것들도 궁극적으로는 대승의 一乘(一佛乘)으로 귀일한다고 설하고 있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반야경?과 ?화엄경?이 보살도를 중심으로 하여 점차 대승을 이론화하고, 그에 따라 부파의 아비다르마적 세계로 접근해 가는 경향을 취한데 대하여” 철저한 ‘一乘’ 사상으로 귀일(歸一)시켰다.
인간은 누구나 불성에서 보면 (一切衆生悉有佛性) 다 같이 한 몸이라는 관념이 떠오르게 된다(萬人一体觀). 모든 중생은 한 몸이기 때문에 자기와 같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眞諦). 그러므로 모든 생명을 자비의 마음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비는 우리 정신의 집, 마음의 집, 우주의 집이다. 우리는 인욕 바라밀의 수행을 통해 죽는 날까지 자비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 청담스님은 설법제일인 부루나 존자(富樓那尊者)의 자세로 정화불사를 했기 때문에 큰 업적을 쌓았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는 청담스님의 ‘자실인의(慈室忍衣)’ 삶을 통하여 곤란이나 난관에 부딪혔을 때 모든 것을 삼세인연의 법칙으로 생각하고 회광반조(廻光返照)·참회(懺悔)하여 증오를 사랑으로, 실패를 성공으로 극복(忍辱)하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Ⅳ. 맺음말
청담대종사(1902-1971)는 ‘인간의 일대사(一大事)를 견성성불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하자’는 원(願, praṇidhāna)으로 25세(1926년) 5월 17일 경상도 옥천사(玉泉寺) 석전 박영호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스님께서는 출가한 후 교계의 대강백인 박한영 스님으로부터 경·율·론 삼장을 수학하셨고, 당대 최고의 선지식인 덕숭산 만공선사 문하에서 자성(自性)을 발견하는 참선에 목숨을 건 인욕정진 끝에 견성(見性)을 인가받고, 올연(兀然)이란 불명을 전수받았다.
견성한 후(1934년)부터 열반할 때(1971.11.15)까지 스님의 일대사는 정법수호(正法守護)로 청정승가(淸淨僧伽)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부처님을 신봉(信奉)하는 교단은 화합이 생명이므로 불화와 분쟁이 있으면 승가(僧伽, saṃha)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일제강점기(1910-1945)의 교단의 본사나 재산이 많은 절의 말사(末寺) 주지들은 대지주처럼 부유로워 고관들처럼 권력이 따라 속성명에 장가를 들고 그 중에는 일부가 처첩을 거느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는 대부분의 일반스님들까지도 장가를 들어 절에서 목탁을 치고 가사 장삼을 입었을 때만 스님이지 일상생활은 속인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이 즈음에 정화가 시급한 곳은 사찰이요 반드시 숙청되어야 할 대상은 속화(俗化)된 승려들이라고 하겠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담스님은 정통불교 수호의 기치를 들고 한국불교의 앞날을 위해 일할 동지를 구하는 과정의 인욕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 때의 고통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정도이다.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지만, 그때는 승려들이 무일푼으로 떠난다는 것이 거의 불문율로 되어 있었고, 그래서 동전 한 푼 지니지 않고 떠났던 나는 두세 달 동안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밤을 지새고, 때로는 머슴들이 거처하는 방에서 그들의 온갖 익살과 놀림에 태연히 대꾸해 가며 새우잠을 자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중에는 어떻게나 초라한 몰골로 변해 있었던지 가는 곳마다 마을의 아이들이 뒤따라오며 누더기 중이라고 놀려댔다. 사실 그 무렵의 나는 서울에서도 ‘누더기 수좌’라고 별명이 나 있었다. 그토록 헌 옷에 맨발로 다녔던 것이다.
위의 진술은 청담대종사의 수좌(首座)시절 교단정화염원으로 정법수호를 위한 가슴에 사무친 원력의 위법망구의 인욕행이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청담스님께서는 ‘전국학인대회’를 1928년 3월에 개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스님께서는 한국불교정화운동의 시초인 동시에 정화불사(淨化佛事)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불교의 개혁을 주창하고 실천한 선각자들 중에서 대표로는 경허 성우(鏡虛 惺牛, 1846-1912), 용성 진종(龍城 震鍾, 1864-1940) 그리고 용운 봉완(龍雲 奉玩, 1879-1944)을 들 수 있다. 이들 세 분의 불교혁신 운동의 사조(思潮)가 청담스님의 인욕사상 형성 배경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 사조의 요체(要諦)는 ?금강경?에 나타난 인욕사상이다.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인욕사상은 「제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과 「제28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에 나타나 있다. 그러면 그 내용을 알아보자.
api tu khalu punaḥ Subhūte yā Tathāgatasya kṣāntipāramitā saivāpāramitā. tat kasya hetoḥ? yadā me Subhūte Kalinga rājā‘ṅgapratyangamāṃsāny acchaitsīt, tasmin samaya ātmasaṃjna vā sattvasaṃjnā vā jīvasaṃjnā vā pudgalasaṃjnā vā nāpi me kācit saṃjnā vā asaṃjnā vā babhūva. tat kasya hetoḥ? sacen me Subhūte tasmin samaya ātmasaṃjnāabhaviṣyad vyāpādasaṃjnāpi me tasmin samaye’bhaviṣyat. sacet sattvasaṃjnā jīvasaṃjnā pudgalasaṃjnābhaviṣyad, vyāpādasaṃjnāpi me tasmin samaye’bhaviṣyat.
tat kasya hetoḥ? abhijānāmy ahaṃ Subhūte’tīte’dhvani pancajātiśatāni yad ahaṃ kṣāntivādī ṛṣir abhūvam. tatra api me na ātmasaṃjnā babhūva, na sattvasaṃjnā na jīvasaṃjnā na pudgalasaṃjnā babhūva. ; 須菩提야 忍辱波羅蜜을 如來가 說非忍辱波羅蜜일새 何以故오 須菩提야如我昔爲歌利王에 割截身體하야 我於爾時에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이라 何以故오 我於往昔節節支解時에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應生瞋恨일러니라 須菩提야 又念過去於五百世에 作忍辱仙人하야 於爾所世에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이라 ;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제14」, ?금강반야바라밀경 오가해설의? 권상(HB7) pp. 62c-63b.
위의 가르침의 요체는 우리가 자신의 실체를 공(空,śūnya)한 것으로 보면 상(相)으로부터 벗어나 복잡한 환경 속에서도 인욕행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상(四相)을 공(空)으로 보면 그 어떠한 감정의 대상도 있을 수 없다. 참아낼 대상도 기뻐할 대상도 성낼 대상도 그 어떤 것도 초월하였으므로 실제로 참을 것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닌 것이고 단지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인 것이다. 이 공(空)의 지혜에 의해 인욕을 실천하면 모든 것은 집착이 없는 무아행(無我行)이 된다. 부처님께서도 과거 오백생 동안에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서 수행을 할 때 아(我)를 텅 빈 것(空)으로 보아 인욕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체법에 아(我)가 없음을 깨달은 지혜의 공덕은 그 어떤 물질적인 보시보다도 수승하다고 ?금강경?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yaś ca khalu punaḥ Subhūte kulaputro vā kuladuhitā vā gaṅgānadivālukāsamāṃl lokadhātūn saptaratnaparipūrṇān kṛtvā Tathāgatebhyo’rhadbhyaḥ samyaksam- buddhebhyo dānaṃ dadyāt, yaś ca bodhisattvo nirātmakeṣv anutpattikeṣu dharmeṣu kṣāntiṃ pratilabhate, ayam eva tato nidānaṃ bahutaraṃ puṇyaskandhaṃ prasaved aprameyam asamkhyeyam. ; 須菩提야 若菩薩이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로 持用布施어든 若復有人이 知一切法無我하야 得成於忍하면 此菩薩이 勝前菩薩의 所得功德이니 ;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제28」, ?금강반야바라밀경 오가해설의? 권하(HB7) p. 94b.
인욕의 경지가 깊어지면 단순하게 수행자로서 참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본성 자리를 굳게 지켜 일체의 분별에 흔들리지 않고 나지도 죽지도 않는 진리에 머물 수가 있게 된다고 한다. 청담스님은 근대 석학 박한영 스님으로부터 교학을 배우고, 선대의 불교혁신운동 영향과 만공스님 문하에서 선가(禪家)의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도리를 깨친 후 무아의 인욕선인(忍辱仙人)의 경지를 체득하여 정법수호로 청정승가 확립에 위법망구의 인욕보살의 행을 실천하였다.
청담스님은 “마음을 깨쳐서 아는 지혜는 연구하고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알아지는 지혜이고, 무소부지(無所不知)로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우주를 다 차지하고도 남는 그런 절대적인 법을 알려주는 것이 이 사구게(四句偈)를 설명해 주는 것이니, 그 공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고 주장하셨다. 그러면 청담스님께서 이 사구게를 지적한 것은 어떤 사구게일까? 그것은 ?금강경?의 제5「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 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하는 열여덟 자와 같은 글귀를 말한다. 청담스님은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금강경?의 네 구절만 배워서 읽고 남이 알아듣도록 해석해 준다면, ?금강경? 전부가 아니더라도 어느 한 구절 열여덟 자만이라도 설명해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복이야말로 우주를 다 차지하고도 남을 것이니 그 복은 10억 세계의 칠보를 보시한 복덕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다”고 하셨다. 그럼 이 사구게의 뜻은 “모든 형상은 다 변화하는 것이다. 모든 형상을 보되 인연의 법칙에 의해 잠시 머무는 것(假相)으로 참된 실상(實相)이 아닌 것으로 직관한다면 곧 진리를 보고 여래(如來)를 본다”는 것이다. 여래는 부처를 가리키는 말이고, 마음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니 그게 곧 ‘참나’이다. 이것은 ?금강경?의 제일 사구게는 사구게 중의 사구게라고 한다. 이 사구게의 뜻을 바로 알게 되면 ?금강경? 전체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대승(大乘)의 정신은 보살(菩薩)의 정신이요, 보살정신이 바로 반야 사상이며, 반야 사상은 바로 4상(相)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청담스님께서는 깨치신 안목에서 인욕에 대한 주(註) 33)을 해석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셨다.
참는 것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500생 동안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계실 적에 가리왕에게 사지백해(四肢百骸)를 찟길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참을 줄 알아야 하고 또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전단(栴檀)이라는 하늘나라의 고약을 가지고 와서 찢어진 육신을 완전하게 치료해 줄 그때에도 조금도 기쁜 마음을 내지 않으셨던 것처럼 참는 것 없이 참아야 합니다. 이렇게 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의 경지에 도달하면 단순한 참음이 아니라 마음의 참바탕 자리를 튼튼하게 지키고 일체의 객관경계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참나”의 진리를 체득했다는 뜻을 가진 인(忍)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득성어인(得成於忍)의 ‘인(忍)’은 어긋나고 모순되고 거슬리는 경계를 잘 참고 성내지 않으며 ‘좋다·싫다’는 생각이 없어서 갚음이 없는 것을 말하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생멸이 없는 진리에 머물러서 그 마음이 도할양무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청담스님께서는 ?Gītā?의 “‘이상적 인간상 즉, 스티따쁘라갸(sthitaprajnā, 견고한 지혜인)’이 애증(愛憎)·미추(美醜) 등의 이원(二元)적 감정을 초월하여 사사무애행(事事無碍行)을 한다”는 것처럼, “마음이 공(空)해 있어서 아공·법공·구공(我空·法空·俱空)이 드러나 있게 되니까 이 몸뚱이를 탁 잊어버리면 전신을 송곳으로 쑤시고 불에 그슬려도 하나가 뜨거운 줄 모르는 겁니다. 마음이 무심경계(無心境界)에 들어가서 생각이 없으면 경계가 침범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도 침범 못하고 불도 불 행세를 못합니다”고 당신의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서의 경지를 설하였다. 스님은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 상호 관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인욕의 덕목을 중시·강조하면서 당신 수좌(首座)시절의 인욕행(忍辱行)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에게 만법이 무아(無我, anātman)인 도리를 깨쳤습니다. 나만 무아가 아니라 만법이 다 무아이기 때문에 성불할 수 있는 도리를 깨쳤습니다. 인욕하는 것도 처음에는 힘이 들지만 이것도 자꾸 노력을 하고 무아의 도리를 닦아 나가면 도가 높아짐에 따라 힘 안 들이고 잘 됩니다. ……성나는 것만 참는 것이 아니라 아픈 것도 참아야 하는데, 몸을 톱으로 켜고 칼로 찌르더라도 아픔이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법력이 아직 그렇게 되지는 못했지만 말만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발심한 불자입니다.
내가 한 30년 전에 맨발로 짚신만 신고 다니며 방에 불도 안 때고 안국동 선학원(禪學院)에서 한동안 인욕공부를 하며 지낸 일이 있습니다. 요사이 추위는 30년 전 추위에 비하면 훨씬 덜 춥습니다. 그 때 장안에는 선학원에 장사 중이 하나 나왔다고 떠들썩한 일이 있었지만 나는 그 때 몸뚱이를 내버리고 인욕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대로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청담스님은 인욕을 “욕되는 걸 참을 뿐만 아니라 남이 날 나쁘다고 입으로 욕을 하든지 매로 때리든지 칭찬을 하든지 마음에 움직임이 없이 전부 참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는다는 것은 억지로 참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참는다는 생각 없이 참는 것이 정말 참는 것입니다”고 인욕 정신에 대하여 스님의 해석을 하였다.
청담스님의 인욕행은 외적 인욕행과 내적 인욕행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는 교단정화로, 후자는 내적정화인 자성불(自性佛)을 실현하는 참선으로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스님의 인욕행은 내외불이(內外不二)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무아행(無我行)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청담스님의 ‘자실인의(慈室忍衣)’ 삶을 통하여 우리는 어려움과 역경에 부딪혔을 때 모든 것을 삼세인연의 법칙으로 회광반조(廻光返照)·참회(懺悔)하여 증오를 사랑으로, 실패를 성공으로 극복(忍辱)하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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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潭大宗師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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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청담스님(1902-1971)은 마치 부처님이 ‘길’에서 태어나 ‘길’을 묻다가 ‘길’을 깨달아 중생들에게 ‘길’을 안내하다가 ‘길’에서 열반하신 것과 같이 일평생 ‘무아의 인욕선인’으로서 보살의 원행(願行, praṇidh?na)의 삶을 실천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스님의 ‘자실인의’의 보살원행(菩薩願行)이 어디서 유래했을까? 논자는 그것을 ?금강경?의 「묘행무주분 제4」의 가르침으로 유래하였더라도, 청담스님적인 독특한 구상과 방식과 특색이 작용된 것이다.
스님은 이러한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서 “공(空, śūnya)사상에 입각한 실천적 윤리로서 ?금강경?에서 주장하고 있는 구류중생(九類衆生)들을 제도한다는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였다.
청담스님의 인욕행은 외적 인욕행과 내적 인욕행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는 교단정화로, 후자는 내적정화인 자성불(自性佛)을 실현하는 참선으로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스님의 인욕행은 내외불이(內外不二)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무아행(無我行)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청담스님의 ‘자실인의(慈室忍衣)’ 삶을 통하여 우리는 어려움과 역경에 부딪혔을 때 모든 것을 삼세인연의 법칙으로 회광반조(廻光返照)·참회(懺悔)하여 증오를 사랑으로, 실패를 성공으로 극복(忍辱)하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주제어 : 공(空), 무아행(無我行), 인욕보살(忍辱菩薩), 사사무애(事事無碍)
약호표
CD : 靑潭大宗師全書(卷數, 페이지數)
Gītā : The Bhagavadgītā
HB : 韓國佛敎全書(卷數, 페이지數, 段)
TD : 大正新修大藏經(卷數, 페이지數, 段)
Venerable Chung-dam's Forbearance Thought
Sun-Keun Kim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work is a study of Venerable Chung-dam's forbearance Thought. Just as Buddha who was born in 'the Way', found 'the Way' while asking about 'the Way', guided all sentient beings to 'the Way', and passed away in 'the Way', Venerable Chung-dam(1902-1971) lived his whole life practicing 'Boddhisattva's respectful conducts(praṇidhāna)'. Then, where did his Boddhisattvic praṇdhāna of 'making home of compassion and wearing cloths of forbearance(慈室忍衣)’ originate from? I consider it as not only to have originated in The Practice of Perfections', chapter four of The Diamond Sūtra, but also to have been influenced by the unique ideas, methods and features of Venerable Chung-dam of his own.
As 'a sage of forbearance’, Venerable Chung-dam practiced "the conducts for the benefit of all sentient beings preached in The Diamond Sūtra as practical ethics based on the philosophy of Emptiness(śūnya, 空)".
Venerable Chung-dam's practice of forbearance consist of internal and external applications. The former was performed through purification of religious order; the latter through Zen meditation in which the self-nature Buddha is realized as a way of internal purification. His practice of forbearance can be interpreted as a practice of non-self which signifies no difference between inside and outside as well as phenomenon without hindrance on each other.
Meditating on Venerable Chung-dam's life of 'making home of compassion and wearing cloths of forbearance(慈室忍衣)’, we should accustom ourselves to the habits of reflecting and self-examining everything according to the law of causal relations in the three worlds. Which it will lead us to transform hatred to love and failure to success even when it is against all odds
Key words: Emptiness, practice of non-self, Boddhisattva of forbearance, phenomenon without hinderance on each other
[출처] 청담대종사의 인욕사상|작성자 만남 창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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