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대종사의 수행관
- 목 차 -
Ⅰ.들어가는 말
Ⅱ.수행관의 형성배경
1)시대적 배경
2)사상적 배경
Ⅲ. 수행관의 내용
1)원력(願力)의 수행
2)참회(懺悔)의 수행
3)인욕(忍辱)의 수행
4)무상(無相)·무주(無住)의 수행
Ⅳ. 맺음말
I. 들어가는 말
청담(1902-1971) 대종사는 한국 근·현대 불교사의 중심에서 대승보살도의 살아있는 실증을 보이신 보살로 칭해지고 있다. 청담대종사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해야 할 일생일대사(一生一大事)인 부처님의 정법심인(正法心印)을 체득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하자”라는 서원으로 출가하여 선조(先祖)들의 수행관의 영향을 받아 마음철학을 정립하고 이를 전하시다가 일생을 마치셨다.
청담스님 수행관의 마음철학은 1700여년 한국불교 전통의 법등(法燈)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그 시대의 문제까지 회통하는 20세기 보살사상의 전형이다.
청담스님께서는 1902년 경남 진주시 수정동에서 태어나 암울한 일제치하와 격동과 혼란의 세월을 살아오셨다. 이 시기는 나라의 사정뿐만 아니라 불교계 역시 혼란한 상태에 빠져, 비록 해방은 되었지만 짙게 드리운 일본불교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청담대종사는 그 혼란한 소용돌이 속에서 이 땅의 불교, 정신문화 고양을 위해 동분서주하셨다. 때로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종회의장, 종정, 장로원장으로 여러 소임을 맡아 한국불교 전면에서 견인(牽引)의 역할을 하셨다.
스님께서는 입적(入寂)하실 때까지 종단의 도제양성·역경사업·전법포교 3대 사업을 위하여 진력하시며 한국불교의 등대지기 역할을 하셨다. 이러한 보살행은 스님의 올 곧고 청정한 수행정신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수행은 불교의 본질이며, 불교의 목표인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고 나아가 중생 교화가 가능하다. 수행 없이는 깨달음도 중생교화도 있을 수 없다. 수행은 불교의 정체성이다. 이러한 불교의 정체성을 20세기에 체현하신 분이 청담대종사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청담대종사의 수행관이 어떻게 유래되었으며, 형성된 내용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상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은 학구적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그 첫째는 청담대종사의 시대적·사상적 배경을 밝히는 작업이다. 둘째는 청담대종사의 삶에 나타난 수행관의 내용을 분석하는 작업이다. 셋째는 청담대종사의 수행관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시사점이 무엇인가를 고찰한다.
구체적인 연구방법은 청담문도회에서 편집한 『청담대종사 전서(靑潭大宗師 全書)』권 1-8과 초기 대승불교의 불전(佛典)을 중심으로 각 장(章)과 항목(項目)들의 주제가 요구하는 사상의 내용을 추려내고, 다시 이것을 분석, 비판, 종합하여 필자의 해석의 이론을 정립하여 청담대종사의 수행관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이 시대의 진정한 수행관의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하나의 지남(指南)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
II. 수행관의 형성배경
1)시대적 배경
우리나라 역사에서 근대라 함은 조선조의 고종(高宗)시대(1864∼1906)로부터 일제강점시대(1910∼1945)까지를 말한다. 본고에서는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수행관의 형성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면 먼저 일제강점기의 교단상황을 일별해 보자.
조선조 중엽 이후 말기에 이르기까지 공부한 스님(學人)들을 수좌(首座: 참선을 주로 하는 스님)와 강사(講師: 간경 강학하는 스님)라 하였는데, 이들 공부하는 스님들은 가급적이면 세속의 시끄러움을 피하여 조용한 산사(山寺)에서 공부에만 전념하였으므로 이들을 이판승(理判僧)이라 하였다. 반면에 사암의 살림을 도맡아 여러 잡무에 힘쓰면서 수좌와 강사들이 공부에 열중할 수 있도록 도왔는데 이러한 절일을 맡아보는 스님(寺務僧)을 사판승(事判僧)이라 하였다.
이들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스님들은 당시 양반 유생과 위정자들의 횡포에 짓눌리고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교단을 잘 지키고 불법(佛法)을 길이 전할 수 있게끔 유지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다. 현재 전하는 자료에 의하면 당시의 이판승과 사판승은 다툼이 없었고 반목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 장점을 살려서 상부상조하여 불화가 없었다. 그러한 화합승단형성의 두 주역인 이판스님과 사판스님의 조화가 깨뜨려지기 시작한 것은 개화 이후 신교육을 받은 소위 유식한 지식승들이 승단업무를 주관하는 사판성이 주류로 바뀌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의 사찰령(寺刹令)에 의해 30본사(나중에 31본사)제가 시행된 뒤로부터 주지들의 권한과 위상이 높아지면서 사찰 및 교단업무를 관장하는 사판승들이 관료화되어 갔었다고 한다. 그들은 고관과 부유층 같은 생활을 하였고 처자를 거느린 승려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 교단의 속화(俗化)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에 이르러 사판과 이판의 관계는 종전과는 정반대로 교단 불화의 위험수위에까지 이르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을 만들어 전국의 사찰을 30본산으로 구획 짓고 이 땅의 불교를 조선선교양종(朝鮮禪敎兩宗)이라고 하였다. 이 연합사무소 역시 30본산의 연합 사무만을 집행하였을 뿐이지 전국사찰과 모든 승려를 총괄 통제하는 기능과 권한은 없었다. 그러다가 신진 승려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자체 내의 자각에 의하여 1922년 1월에 중앙통제기구로써의 ‘조선불교선교양종 중앙총무원(朝鮮佛敎禪敎兩宗 中央總務院)’이 각황사에 설치되었다. 많은 본사 주지들이 이에 반대하여 따로 ‘조선불교선교양종 중앙교무원’을 또한 각황사에 다 1922년 5월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같은 사찰에 두 개의 종무기관인 ‘중앙총무원’과 ‘중앙 교무원’이 각각 사무실을 열고 간판을 내걸었으므로, 그들은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여 다툼이 계속되었다. 1925년에 양측은 서로 타협하여 하나로 뭉쳐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 교무원’을 성립시켰는데, 이로써 일제하의 한국불교 교단은 비로소 하나가 된 중앙통제의 종무기구를 이룩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종명이 ‘조선선교양종(朝鮮禪敎兩宗)’이라는 것이 선명치 못하다고 하여 좀 더 선명한 종명과 종지(宗旨) 그리고 유기적이고도 통제적인 강력한 새로운 체제의 필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총본산(總本山) 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1941년 봄 태고사(太古寺)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종명을 조계종이라 하여 그 때까지의 선교양종이라는 모호한 종명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1941년 4월에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 사법(朝鮮佛敎曹溪宗總本寺太古寺寺法)’(16장 130조)의 인가를 얻어 조계종을 출범시켜, 그 해 6월에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주지를 겸한 초대 종정에 한암중원(漢岩重遠) 스님을 추대하고, 실무집행부서로 종무총장 아래 서무부․교무부․재무부를 두었다. 이어 종회법(宗會法)과 승규법(僧規法) 등을 제정 완비함으로써 새로운 단일 종단 조계종이 창립되었고 이에 의해 총본산 태고사를 중심으로 전국의 사찰과 스님들이 총 결속을 하게 되었다.
이런 교단의 상황에서 태평양전쟁(1941. 12. 8~1945. 8. 14)의 막바지에 이르러 일본은 우리 국민의 생존권과 언어 문자까지도 빼앗고 한반도 안의 초목마저도 전쟁용의 희생물로 몰고 갔다. 그래서 이 땅의 불교는 종교적 자주성과 신행(信行)의 자유 자율성을 잃고 전시체제에 휘말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해방을 맞게 된 불교계에서는 그동안 일제의 사찰령에 묶여 있었던 식민지적 불교잔재를 청산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해 10월에 전국승려대회를 열고 사찰령과 조계종총본사사법(曹溪宗總本寺寺法) 등을 폐지하고 새로운 조선불교 교헌(朝鮮佛敎 敎憲)을 제정하였다. 새 교정(敎正)에 영호(映湖) 박한영 스님을 추대하고 중앙총무원장 및 여러 부서를 재정비했다.
일본의 잔재를 없애기 위하여 불교계에서는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조계종명을 바꾸어 ‘조선불교’라 표방하고 종정(宗正)도 교정(敎正)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불교계도 ‘조선불교’라는 간판을 ‘대한불교’로 고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 해 4월에 교정(敎正)이었던 석전영호(石顚映湖)스님이 입적하여 그 뒤를 이은 만암(曼庵)스님에 의해 다시 조계종이라 일컫고 교정도 종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조계종이 비록 일정(日政)하인 1941년에 성립되었지만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던 종명이며 현재 한국 선가의 실질적 중흥조인 서산대사(西山大師)도 조계퇴은(曹溪退隱)이라 하였고 그 제자 사명당(四溟堂)도 조계종유(曹溪宗遺)라 자칭한 사실들로 미루어 유추해 보건대 전통성을 지닌 종명이라고 할 수가 있다.
조계종은 41년 이후 한때 왜색을 피해 잠시 종명을 쓰지 않았지만 오늘에 이르기 까지 계속되어 60년도 이후 종단의 난립이 있기 전까지는 줄곧 단일 종단으로 이어져 왔었다.
위에서 일제강점기의 교단상황과 그 기구를 정화(淨化)대상적 측면에서 고찰해 보았다. 부처님을 신봉(信奉)하는 교단은 화합이 생명이므로 불화와 분쟁이 있으면 승가(僧家, saṃgha)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불교사는 전래(傳來)로부터 신라말(新羅末)에 이르기까지 ‘삼승귀일(三乘歸一)의 일불승(一佛乘)의 가르침을 신봉해 왔기 때문에 무종무파(無宗無派)의 한 교단을 존속시켜 왔었다. 고려의 불교가 복국우세(福國祐世) 소재초경(消災招慶)의 기양불사(祈禳佛事) 전담하는 국가 예속의 기관으로 전락해 갔다고는 하지만 처음에 사대적(事大的) 중국(宋)의 종파경향 불교를 도입하면서도 신라의 일승 통불교적(一乘通佛敎的) 특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중국 그대로의 종파개념을 쓰지 않고 전문수업적 용어인 업(業:華嚴業․瑜伽業․律業 등)을 썼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 막바지에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가 풀리어(1895년; 고종 32년) 도시와 일반 민간에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불교계가 가장 먼저 한 일이 홍법의 도량을 마련한 일이었다. 전국 수사찰(首寺刹)격인 원흥사를 세워(1899) 중앙통제적인 기구를 구성하여 홍법교화(弘法敎化)라는 대승불교 본연의 이타행 실천을 실현해야 하는 당면과제에 놓여있었다.
모처럼 단일 종단이 자주성을 잃고 비틀거릴 때 뜻있고 눈밝은 일부 스님들이 들고 일어나 새로 임제종을 남쪽에 세웠으나, 이미 나라를 빼앗긴 망국민이라 일제의 사찰령에 묶여 두 종단 모두 해체되었다. 또 본사(말사 중에서도 재산이 많은 절)의 주지들은 대지주처럼 부유로웠고 고관들처럼 권력도 따랐으며 개중에는 처첩을 거느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는 대부분의 일반 스님들까지도 속성명에 장가를 들었으나 절에서 목탁을 치고 가사 장삼을 입었을 때만 스님이지 일상생활은 속인과 다름이 없었다. 이런 승려 속화(俗化) 현상은 급변하는 사회현상과 자유주의적 풍조의 영향이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즈음에서 정화가 시급한 곳은 사찰이요 반드시 숙청이 되어야 할 대상은 승려들이라고 하겠다.
우리 조상들은 처음부터 사찰을 ‘수복멸죄(修福滅罪)하고 숭신불법(崇信佛法)하는 청정한 도량’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전법도생(傳法度生) 수선흥법(修禪興法)하는 삼보상주(三寶常住)의 청정 적정(寂靜)의 불찰(佛刹)이 부처님 팔아먹는 가게(商店)가 되고 명리(名利)의 도적이 머무는 소굴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업장이 두터운 중생계라 눈밝은 선각 선지식이 반드시 정화의 횃불을 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젊고 뜻있는 승려들 사이에서는 불교정화․중흥운동의 바람이 일고 있었고, 그 중흥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청담스님은 정통불교 수호의 기치를 들고 한국불교의 앞날을 위해 일할 동지를 구하는 과정의 수행의 한 단면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그 때의 고통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정도이다.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지만, 그때는 승려들이 무일푼으로 떠난다는 것이 거의 불문율로 되어 있었고, 그래서 동전 한 푼 지니지 않고 떠났던 나는 두세 달 동안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밤을 지새고, 때로는 머슴들이 거처하는 방에서 그들의 온갖 익살과 놀림에 태연히 대꾸해 가며 새우잠을 자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중에는 어떻게나 초라한 몰골로 변해 있었던지 가는 곳마다 마을의 아이들이 뒤따라오며 누더기 중이라고 놀려댔다. 사실 그 무렵의 나는 서울에서도 ‘누더기 수좌’라고 별명이 나 있었다. 그토록 헌 옷에 맨발로 다녔던 것이다.
위의 진술은 청담대종사의 젊은 수좌시절 교단정화 염원으로 불조(佛祖)의 정법을 수호하기 위한 가슴에 사무친 원력의 위법방구(爲法亡軀) 인욕수행이다. 어느 누가 청담스님처럼 교단을 자기 몸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인욕수행을 실천했던 분이 얼마나 될까. 이런 스님의 인욕수행의 실천은 결실로 50여명의 젊은 승려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 들어 전국학인대회(全國學人大會)를 1928년 3월에 개최하게 되었다고 한다. 청담대종사는 그 모임을 한국불교정화운동의 시초인 동시에 정화불사(淨化佛事)의 출발점이라고 진술했다. 청담 대종사는 이운허 스님과 함께 조선불교학인대회를 발기하면서 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내 나이 27세이던가 나는 근세조선 오백년동안 천대받던 불교를 정화, 중흥시키자는 정통 불법수호(佛法守護)의 기치를 들고 전국학인대회(全國學人大會)를 열고 전국 40여개나 되는 강원(講院)을 찾아 행각의 길에 올랐다. ……그토록 많은 삼보정재(三寶淨財)가 일인독재(日人獨裁)의 착취와 억압 앞에 이름도 자취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 삼천년 정법(正法)과 불조(佛祖)의 혜명마저 깡그리 파괴될 때 나의 의분은 용솟음쳐 방관할 수 가 없어 난 많은 학인들을 거느리고 정법수호(正法守護)를 부르짖었다.
이러한 학인스님들의 중흥운동도 일경(日警)의 탄압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하여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일경들에겐 불교인들의 모임은 항일의 주체세력과 같았다. 이리하여 학인들의 중흥운동 기치는 소리 없이 내려지고 곳곳에 모였던 젊은 스님들은 다시 뿔뿔이 산간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청담스님은 그 운동이 일경의 탄압으로 깨어지고 난 후 교단정화를 후의 일로 미루고 수덕사의 만공(滿空)스님 문하에서 자기 마음의 정화(淨化)에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수행정진을 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세수하는 일, 변소에 가는 일, 그리고 먹는 일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자리를 떠난 일이 없이 정진에 몸을 맡기었다. 무수한 시간이 지나갔으나 나는 동요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한 목적, 유일한 목적만이 내 앞에 있었다. 해탈하는 일, 그것이 바로 그 목적이었다. …… 나는 문 앞에 부동의 자세로 앉아있었다. 목이 마르고 괴로움과 불편함이 잊혀질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이윽고 그 괴로움과 불편이 사라져 갔다. 점점 무(無)의 경지로 들어갔다. 밥은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앉아 있어도 앉은 것 같지 않고, 오줌을 싸도 싼 것 같지 않았다. 나의 정좌(定座)는 밥이고 정좌이면서 곧 무(無)였다.
청담스님은 수도승으로서 참선 생활을 통해 우리 불교계의 정화작업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평생을 오직 누더기 하나로 오후 불식과 장좌불와 수행을 하시면서 한시도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여념이 없었다. 청담대종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직 불법의 실천이 전부였다. 스님은 한평생 참선정진은 물론 정화불사에 누가 뭐라고 해도 언짢은 기색을 보임이 없이 태연자약하신 모습으로 인욕보살(忍辱菩薩)의 행을 실천하신 큰 별이었다. ?금강경?의 논리로 요약하면 스님은 내외경계(內外境界)에 무주상(無住相)으로 실천하는 인욕선인(忍辱仙人)이었다.
스님의 수행은 외적 수행과 내적 수행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는 교단정화로 후자는 내적정화인 자성불(自性佛)을 실현하는 참선으로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스님의 수행은 내외불이(內外不二)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무아행(無我行)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 장에서 스님의 무아의 수행은 어떤 사상적배경으로 형성되었는가를 고찰해보자.
2)사상적 배경
청담스님(1902∼1971)에게 있어서 ‘마음’은 알파요 오메가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떠난 청담스님의 사상이란 없다. 청담스님의 궁극적 실재인 ‘마음’은 청담스님의 상징어이다. 청담스님은 유심사상(唯心思想, citta-mātratā)을 실천한 20세기의 보살이었다. 그러면 청담스님의 마음철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한다.
청담스님은 20세기 초반에 진주 호국사에서 박포명(朴圃明) 스님으로부터 ‘마음’이란 법문을 듣고 ‘마음’을 찾는 출가를 25세(1926년)에 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아래와 같이 술회했다.
목이 타 근처에 있는 호국사를 찾아가 물을 얻어 마셨다. 한참 꿀꺽꿀꺽 마시고 있는데 한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왜 사람은 물을 마셔야 하느냐?” 나는 미처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이 물을 마시고 싶다고 요구하기 때문이지….” “왜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찬 줄 아느냐? … 마음이 뜨겁다고 생각하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우리가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차다는 관념을 털어버릴 수만 있다면, 그것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저 돌멩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듯이 우리를 주관하고 있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인 것이야. … 마음에서 나를 발견할 때 우리는 생사를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부처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오욕을 벗어버리고 마음을 찾는 일인 것이야.”
청담스님은 박표명 스님으로부터 ‘마음’이란 법문을 들은 뒤부터 ‘가아(假我, jivātman)'의 망견(mithyādṛṣṭi)에서 ‘진아(眞我, paramātman)'를 발견하는 정견(正見, samyagdṛṣti)의 구도에 몰두했다.
청담스님은 진여(眞如, tathatā, suchness)를 찾기 위하여 걸망을 짊어지고 오늘은 이 하늘에서 내일은 저 골짜기로 바람처럼 떠돌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당시의 석학 박한영 스님이 계시는 안암동 개운사강원(開雲寺講院)이었다고 한다. 그 곳에서 청담스님은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박한영 스님으로부터 배워 마음의 눈이 열린다. 스님은 많은 경전 중에서도 ?능엄경(楞嚴經)?을 가장 깊이 탐구하였고, 오나 가나 그것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담스님은 ?능엄경?을 왜 수지독송 하였을까?
청담스님은 ?능엄경?이 ‘진아(眞我)를 찾는 납자로서 반드시 한 번은 찾아오는 유혹의 망심(妄心, prajnapti)을 퇴치하는 가장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경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능엄경?은 다른 경론에서 보다 마장(魔障)의 경계를 상세히 밝히고 있는 경전이다. 마장은 오음(五陰, panca-khandha)의 갖가지 망상 때문에 생긴 것이다. 수행자는 오음의 마장에서 해방될 때 자유인, 해탈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지는 각고의 수행과 명석한 깨달음이 있어야 얻어지는 것이다.
청담스님은 ?능엄경?사상의 영향으로 이 우주의 모든 현상은 다만 중생의 꿈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고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이 마음은 영원불멸의 실재이며, 절대자유의 생명이며, 우주의 핵심이며, 온 누리의 진리이며, 천지조화의 본체이며, 신의 섭리이며,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다.
그리고 인생도, 인류 문화 창조도 모두 이 마음의 환각으로 이루어진 꿈속의 꿈에 불과한 것이다. 이 엄청난 꿈 가운데서 정말로 꿈이 아닌 것은 오직 이 마음인 ‘나(眞我)’ 뿐이다.
청담스님은 ?능엄경?의 수지독송으로 자기 자심(自心)의 환각으로 환생환멸하는 꿈에서 깨어나 우주의 생명이요, 만물의 생명인 ‘마음’의 눈을 뜰 수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청담스님은 25세(1926년)에 당시 불교학 최고 강원인 개운사(開雲寺)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대강백 박한영 스님의 지도아래 경 ․ 율 ․ 론 3장(藏)을 두루 섭렵하고 대교과를 1930년 5월에 졸업하였다. 스님은 그곳이 일생을 입지(立志)하는 데 크게 도움을 받은 곳이라고 술회했다. 강원을 졸업한 스님은 서산대사가 ‘회교귀선(會敎歸禪)’을 설한 바와 같이 인간이 꼭 해야 할 일과 꼭 가야 할 길을 마음을 깨닫는 마음 찾는 공부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자기 마음을 깨치는 일이다. 이 마음을 깨쳤을 때가 곧 부처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마음을 깨달아서 많은 중생을 바로 이끌어주고, 복 받게 해주고 잘 실릴 수 있는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며, 우주를 다 내 마음대로 하자는 것이다.
청담스님은 덕숭산 정혜사 만공(滿空)스님의 지도로 32세에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위하여 세수하는 일, 변소에 가는 일, 그리고 먹는 일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참선하는 자리를 떠난 일이 없이 정진에 몰두했다고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는 문 앞에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목이 마르고 괴로움과 불편함이 잊혀질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이윽고 그 괴로움과 불편이 사라져갔다. 점점 무(無)의 경지로 들어갔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앉아 있어도 앉는 것 같지 않고, 오줌을 싸도 싼 것 같지 않았다. 하나의 정좌(定座)는 밥이고 정좌이면서 곧 무(無)였다.
이런 위법망구(爲法忘軀) 3년간 정진수행의 공덕으로 청담스님은 견성(見性)의 게송(偈頌)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예부터 모든 불조(佛祖)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어찌 현학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길가에 고탑(古塔)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리.
이렇게 청담스님(1902∼1971)은 근대 석학 박한영 스님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만공스님에게 선가(禪家)의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도리를 체득한 후 그의 유심사상(唯心思想, citta-mātratā)을 형성하여 20세기 한국의 보살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청담스님의 마음철학은 한국 전통의 선교겸수(禪敎兼修)를 통하여 형성된 것이다. 스님은 견성한 후 묘향산 설영(雪嶺), 설악산 봉정(峰頂), 문경 봉암사(鳳巖寺), 경남 고성 청량산 문수암(淸凉山 文殊庵) 등에서 수선결사하며 용맹정진으로 보림(保任)하며 선기(禪機)를 다듬었다.
이와 같이 청담 큰스님의 사상은 한국의 스님으로 한국불교의 문화적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한국불교는 전통적으로『금강경』·『화엄경』·『법화경』등을 주요경전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경전을 통해서 스님의 보살사상이 형성되었다고 인지된다. 그러면 다음 장에서 스님의 보살사상이 초기대승경전으로부터 형성된 내용이 무엇인가를 고찰한다.
III. 수행관의 내용
1)원력(願力)의 수행(修行)
청담 큰스님은 한 세기를 사시면서 불교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몸을 나투지 않으신 곳이 없었다. 도제양성의 현장에서, 포교의 현장에서, 역경의 현장에서, 불교혁신의 현장에서 스님은 항상 여실지견(如實知見, yathābhūta-jnāna-darśana)으로 보살도를 실천하셨다. 이런 보살도의 실천은 스님께서 중생을 위해 살고자했던 보현보살의 원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큰스님과 함께한 인연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부분 느끼는 심정일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보살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청담스님은 인욕보살로서 ?금강경?의 「대승정종분」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불을 한 생 미루더라도 중생제도를 위하여 원(願)을 세우는 것을 당위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함께 세상에 태어났다는 인연 때문에 사해대중들을 깨우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것이 아니다. 차라리 불교는 사해대중의 구제에 더 큰 뜻이 있을지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득도를 한 다음 우루베라 촌에서 내려왔고, 의상(義湘, 625-702)스님도 고국 신라로 돌아왔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그들이 왜 내려왔고 돌아왔는가’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누구에게로 돌아왔는가? 그의 나라로, 그의 형제들의 곁으로 온 것이다. 우리가 이곳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떤 사실 앞에도 우선하는 일이다.
우리들은 한국인이다. 많은 한국인의 구제가 오늘의 한국불교의 명제이다. … 인간교육의 목표는 단순히 애국자를 배출한다거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아니며, 또 대중들을 천당으로 인도하는데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죄악과 번뇌와 고통 속에 잠긴 인간을 참인간이게 하는 것 그들로 하여금 죄악과 번뇌를 버리고 진정한 안락을 누리게 하도록 하는 것, 지혜롭게 하는 것, 자비로운 협조자이게 하는 것, 그것이 불교의 참뜻인 것이다. 그것을 원효(元曉, 617-686)는 오직 “자리(自利)와 타리(他利)를 염원하고 보리(菩提), 즉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청담스님의 원력, 보살도, 애국심 등을 읽을 수 있다. 청담스님은 신라의 원효스님과 같이 20세기 한국의 보살로 화현(化現)한 것이다. 청담스님은 동체대비의 보살의 원력으로 한국불교 5백년 왜곡된 현실을 바로 세우는 정통성 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조계가풍(曹溪家風)을 세우는 데(1928∼1962) 전력투구했다. 청담스님에게 있어서 불교정화 운동은 보살도를 실천하는 한 단계였다. 스님이 출가하여 불법을 체득하기 위한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수행은 중생구제의 보살정신이었다. 스님의 중생구제 보살정신은 불교정화로 나타난 것이다. 그의 삶에 있어서 일관된 정화불사(淨化佛事)는 그의 정화이념인 ‘마음철학’으로부터 나왔다.
청담스님의 정화불사는 외적정화(外的淨化)와 내적정화(內的淨化)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외적불사는 교단정화로 청정승가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내적불사는 견성(見性, svayaṃprakāśa) 불사로 정법불교(正法佛敎)를 세우는 일이었다. 이 불사는 종단의 3대사업 즉 도제양성, 역경사업, 포교사업으로 불교교단을 대중화, 현대화하여 불조(佛祖)의 교지(敎旨)를 세우는 일로 발전했다.
청담스님은 우주의 원리인 마음자리를 한국불교에서처럼 이렇게 확실하고 분명하게 설명하는 불교가 현재는 이 지구상에 없다고 하시면서 그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일본이나 중국에 가서 들어보아도 종파불교(宗派佛敎)가 되어서 각각 설명방법과 수행양식이 달라서 한국불교와 같은 참된 부처님의 정신은 들어볼 수 없다. 동남아 소승불교도 각종(各宗) 각파(各派)마다 그 주장이 다르고 한 조각의 불교밖에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바삐 한국불교를 바로 세워서 도인(道人)이 많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 한국불교의 정신이 온 세계에 널리 퍼졌을 때 인류의 평화는 비로소 올 것이다. 나는 오늘의 세계를 지도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진리의 보고(寶庫)가 한국불교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육체가 내가 아닌 줄 알고, 마음자리가 나인 것을 강조하는 한국불교를 실천하고 전법하자.
청담스님은 한국불교의 우수성을 설하면서 한국불교를 바로 세워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도인(道人)을 많이 배출하도록 하는 불사(佛事)가 정화이념 실천의 골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청담스님은 한국불교의 찬란한 전통을 되살려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교단이 도인(道人)을 많이 배출하도록 불사하는 것이 당위라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혁이 한국불교의 내부에서 일어나야 한다. 불교란 세존(世尊)만을 모시고 개인의 영욕을 취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런 종교였다면 세존은 우루벨라촌의 보리수 아래에서 그의 정각(正覺)을 가짐으로써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세존은 그 정각을 가짐으로써 오히려 세속(世俗)으로 내려와 사해대중(四海大衆)들과 만났다. 그의 정각은 세속인을 깨우치고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데에 뜻이 있었다. 세존이 사해대중과 만났다는 사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존은 대중을 만나기 위해서 그의 정각을 가졌다. 그러므로 오늘의 불교 역시 오늘의 대중을 만나기 위해서 정각(正覺)을 가져야 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청담스님 정화이념의 실천에서 대승불교의 요체인 보살도(菩薩道)의 전형(典型)을 볼 수 있다. 청담스님은 이런 보살도의 정신을 가지고 20세기 한국의 보살 화신으로서 모든 중생들에게 보리심(菩提心)을 발할 것을 권하고, 인연 따라 조그마한 암자, 학생회, 교도소, 군부대 등 가릴 것 없이 그 몸을 안 나타낸 곳 없이(處染常淨) 보현행원(普賢行願)을 실천한 인욕보살(忍辱菩薩)이었다. 스님은 “단 한 사람이라도 제도 받지 않은 중생이 있는 한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으로 정법불교(正法佛敎)를 세우는 데 일생을 다 바치셨다.
청담스님과 같이 그 어느 누가 한국불교를 그의 피와 살로 느꼈던가? 한국불교의 이상, 한국불교의 고민, 한국불교의 비극, 한국불교의 위대성이 청담스님의 사상과 생활 속에 나타나 있다. 청담스님은 마치 마하뜨마 간디(1869-1948)가 인도의 독립운동을 하면서 “나는 신(神)을 실현하고자 하는 구도자다. 신(神)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은 신을 그의 피조물 속에서 보고, 그것과 하나로 되는데 있다. 이는 오직 온 인류에 대한 봉사에 의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온 인류 중에서도 우선 인도국민에 대해서 봉사하기로 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은 남을 구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남을 구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먼저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신념과 같이 지장보살의 원력(願力)으로 성불을 한 생 미루는 각오로 청정승가와 정법수호하는 정화불사(淨化佛事)에 한평생을 모두 바쳤다. 이런데서 스님의 원력에 의한 끊임없는 수행을 볼 수있다.
원력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이를 홍익(弘益)중생, 요익(饒益)중생이라 한다. 원력은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참여는 『화엄경』「보현행원품」에서는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면 나의 예배하고 공경함도 다하려니와, 중생계 내지 중생의 번뇌가 다함이 없으므로 나의 예배하고 공경함이 다함이 없어 생각 생각에 상속하여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느니라”라고 하여, 이와 같이 차례로 10대 행원을 설시(說示)하였다.
이와 같이 스님의 원력의 수행은 『금강경』의 「대승정종분」의 보살인식에서 『화엄경』 보현행원으로 체현하여 청담스님적인 독특한 구상과 방식과 특색이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참회(懺悔)의 수행
청담대중사의 사상적 근간(根幹)은 마음론과 참회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큰 스님에게 있어서 참회는 자성청정의 의식을 수행하는 것이다. 마음 속에 스며 있는 미세번뇌가 세척되고 탈각하여 마음 그것이 진여청정성이 되는 것이다. 큰 스님의 참회의 수행은 내적으론 자기의 자성청정의 마음을 찾는 것이었고, 외적으론 한국불교 정화운동을 통하여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스님의 참회수행은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도로 나타났다. 참회는 개인과 사회의 과거의 잘못된 업을 소멸시키는 수행법으로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선남자여, 업장(業障)을 참회한다는 것은 보살이 스스로 생각하기를,‘내가 과거 한량없는 것으로 내려오면서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몸과 말과 뜻으로 지은 악한 업이 한량없고 가이없어 만약 이 악업이 형체가 있는 것이라면 끝없는 허공으로도 용납할 수 없으리라. 내가 이제 청정한 세 가지 업으로 법계에 두루 찬 티끌세계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 대중 앞에 지성으로 참회하고 다시는 악한 업을 짓지 아니하고 청정한 계행의 모든 공덕에 항상 머물러 있으오리다.
이것은 보현보살의 10대행원 중 제4업장참회원으로, 오늘날 『천수경(千手經)』가운데 “我昔所造諸惡業 皆由無時貪瞋痴 從身口意之所生 一切我今皆懺悔”라는 계송으로 잘 독송되고 있다.
업장을 참회한다는 것은 시작도 알 수 없는 무시이래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삼독심(三毒心)으로 몸과 말과 생각으로 갖가지 악업을 지은 것을 반성하여 앞으로 다시는 짓지 아니하고 항상 청정한 계(淨戒)에 머물겠다고 발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악업의 씨앗인 삼독심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생겨 나온 것인가? 바로 ‘나’자신, 즉 본래의 ‘나’로부터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다. 내가 알게 모르게 지어놓고 또 갖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그 과보를 또 받아야 하는 그 업장을 내가 녹이는 것이 참회의 의의다.
여기서의 참회는 이참(理懺)이 아니라 사참(事懺)이다. 이치로 하는 참회가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참회이다. 보현행원은 관념적 차원에서의 보살행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참회하기란 쉽지 않다. 겉으로 드러내서 하는 참회의식의 대표적 예를 우리는 자자(自姿, pravāraṇa)에서 볼 수 있다. 안거(安居, varṣa)가 끝나는 날 그 동안의 지은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여 지적받는다. 이처럼 드러내어서 명시적으로 하는 참회를 발로참회(發露懺悔)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지은 모든 죄업장을 적나라하게 발로참회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그래서 발로참회가 아닌 새로운 참회방법이 예참(禮懺)이다. 예배를 통해서 참회하는 것이다. 부처님과 보살님께 발로참회한다는 것은 내 마음 속의 죄의식, 업장들을 그분들께 바치는 것이다. 그러면 내 마음 속은 텅비게 되어서 후련하고 편안해진다. 그리고 다시는 범치 않을 것을 맹세하는 것이다. 햇빛 앞에 어둠이 사라지듯이 참회에서 죄업은 소멸된다. 참회하면 즉시에 청정이 회복되는 것이다.
청담스님께서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정화운동을 위하여 백팔참회결사(結社)운동을 전개했다. 청담스님은 정화의 선봉장으로서 한국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인류평화, 중생제도를 위하여 도선사 주지로 1962년에 부임하셨다. 스님은 도선사가 한양 삼각산 전체에서 달걀 노른자 자리에 해당된다는 비유를 하시고 호국 참회불교를 제창하시면서 석불전의 참회기도 도량의 확보, 호국참회원의 신축 등과 더불어 호국참회 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스님께서는 호국참회원 건물을 구상하시면서 “이 건물은 불교문제를 비롯한 국가문제, 통일문제 등에 대해 전문 교수들의 연구실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승려들의 수련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법천화상 증언). 스님께서는 ‘호국참회원’ 설립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서울 장안의 시민을 비롯하여 남·북한 전국민이 개개인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의 업장을 일심으로 참회해야 한다. 참회를 통하여 우리 국민 개개인의 건강과 크고 작은 소원과 가정의 화평, 사회의 행복이 이루어지고, 분단된 남과 북의 조국이 하루 속히 평화통일을 실현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남북한의 전 국민이 일심으로 참회하지 않으면 잘 살 수 없고, 남북평화통일도 성취시킬 수 없다.
분단의 처절한 고통과 슬픔을 함께 절감하는 우리 국민 모두가 이런 불행을, 내 잘못, 내 탓으로 돌리는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겸허한 정신적 자세에서 진심으로 참회해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전세계 모든 인류가 이러한 참회결사운동에 적극 동참하여 성의 있고 진실된 참회를 함으로써 인류의 궁극적 최대 과제인 <잃어버린(상실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진영이니 공산진영이니 하는 세계의 양대 이념과 사상으로 물리적인 힘의 팽창과 대결로써 철저하게 경쟁하고 무장되어 있는 세계가, 대화합의 장으로 나갈 때 인류의 진정한 이상과 가치, 창조를 위하여 전쟁, 질병, 기아 등의 고통, 불행, 공포가 없는 인류의 평화, 행복을 실현시키는 지상낙원, 지상불국토를 건설할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여기 한국 삼각산 도선사의 호국참회도량이 근식(根識)이 우둔한 말법시대 중생의 십악업(十惡業)을 참회하여 혁범성성하는 그 중추적 참회결사의 발원지가 되어 참회의 물결이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나아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법천화상 증언)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스님께서는 개인의 죄복(罪福)의 문제와 개인 간의 원한의 문제를 인과응보의 원리로서 인식하시고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참회수행법을 주창하고 있다. 스님에게 있어서 참회수행은 개인 간의 문제를 넘어 민족과 국가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한 불교적 해결책이라고 진단하셨다. 그래서 스님께서는 말년에 도선사에 ‘호국참회원’을 설립하여 조국통일과 인류평화를 염원하는 도량을 건립하고자 하는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호국참회원 건립 취지문
귀의 삼보하옵고
천혜의 이 강토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하여 진 지 어언 천육백여년, 그간 끊임없는 역사와 전통을 지켜온 이 나라에 신문명 과학화를 부르짖는 조국 근대화 과업에 전진함은 다같이 희구하며 누구나 합심하여 추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일수록 모든 문화의 주체인 올바른 그 정신적 뒷받침이 절실히 요구되며, 타락하는 중생심을 바로 잡고, 부지불식간에 짓는 죄악을 지극한 참회로써 소멸하고, 우리 민족의 주체의식이였던 화랑정신을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삼각산 제일 성지인 이곳 도선사 경내에 뜻깊은 참회원을 건립하고 온 겨레의 호국참회도량으로 삼고저 하는 바입니다.
특히 조국의 중대한 이 시점에 만 중생을 인도하는 성직자나 모든 국민들이 다같이 한 뜻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미혹한 우리 중생들의 어버이시며 대자 대비하신 우리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의 큰 법등 아래 굳게 뭉쳐 매진하게끔 이끌어 갈 국가적인 호국 참회도량 건립을 완수함으로써 조국근대화 완수와 더불어 온 인류평화에 이바지하고저 하는 바입니다.
이 성스런 불사에 뜻 깊으신 여러분께서 많이 동참하시와 우리 자손 만대로 영겁에 무량한 복락을 누리게끔 다시금 앙원하오며 합장하나이다.
정미년(1967) 9월 10일
이 청담 합장
스님은 이곳에서 한국불교를 재흥시키려는 원력으로 실달학원을 설치하고 백팔참회도량 ‘호국참회원’을 1968년 11월 20일에 건립 낙성하였다. 스님께서는 호국참회원에서 불교중흥과 조국통일 성취를 위하여 참회를 통한 호국불교를 제창하는 대원력을 세우셨다.
도선사를 백팔참회 도량으로 명명한 것은 불공(佛供)을 스스로 발원할 수 있는 법요의 하나로 일반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침저녁의 예불시간에 백팔참회를 봉행하였으며, 모든 대중을 독려하기 위하여 스님은 한 시도 빠지지 않으시고 항상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심지어 스님께서는 지방출장을 가시게 되어 어쩌다 여관에 주무시게 되는 경우에도 예불시간이 되면 도선사 석불전을 향해 백팔참회를 하셨다고 한다. 가정의 대소사 발원을 하고 싶은 신도들이나 불공을 드리는 신도들에게 3,000배로 불공기도를 하도록 교화하셨다. 스님 자신은 감기나 중풍도 참회기도로 극복하셨다(법천화상 증언).
스님의 일생은 참회와 정진이었다. 스님께서는 항시 정진 속에서 ‘마음 닦기’를 강조했다. 그래서 ‘마음’이 스님의 브랜드요 법문의 모든 것이었다. 스님은 마음이 곧 부처 마음이기 때문에 이 밝고 깨끗한 마음을 찾기 위해서 자기(중생)의 잘못을 뉘우치는 참회를 끊임없이 하라고 하셨다. 스님께서는 태양의 밝은 빛은 어떤 한 두 사람을 위해 비추는 것이 아닌 것처럼 부처님이 가르쳐 보이신 빛과 길은 모든 중생들이 다 같이 그 빛을 따라 밟고 가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런 빛과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참회가 뒤따라야 한다고 설하셨다.
대승불교의 진면목은 현상적 참회인 사참(事懺)보다는 존재의 차원인 이참(理懺)에 있다. 먼저 사참을 행하고 더 깊이 살펴보아 이참까지 행하여야 한다. 이참은 죄를 지은자와 죄의 근본을 비추어 보아 죄의 죄상이 끊겼고, 죄를 진 업이 공(空, śūnyatā)한 것을 알아서 자성(自性, svabhāva)이 청정한 것을 요달하여 한 점의 허물도 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반야안(般若眼)으로 볼 때 실로 있는 것은 광명과 청정과 원만한 공덕(svayaṃprakāśa)뿐이다. 이런 빛을 나타날 때까지 사참(事懺)으로 죄의식을 털어버리는 것이 이참(理懺)이다. ‘이참 즉 열반(理懺卽涅槃)’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참회하여 자신의 마음을 맑히고 밝혀 우리의 생명에는 불보살의 공덕이 태양처럼 빛나고 있는 것을 믿어야 한다. 자신의 본성이 여래와 더불어 하나인 진여법성인 것을 깨달아 항상 청정광명이 넘치도록 하여야 한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청담스님의 참회수행은 『화엄경』보현행원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3)인욕(忍辱)의 수행
청담스님은 한국 근 ‧ 현대 불교사의 중심에서 대승보살의 실증을 보이신 인욕보살이었다. 인욕은 대승불교의 수행법인 육바라밀의 하나로서 불교수행법중의 하나이다. 청담스님에게 인욕보살의 별호가 붙여진 것은 스님이 주도하였던 정화불사의 혼란 속에서도 인욕의 실천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선학원의 전 이범행 원장은 스님의 인욕의 도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입증하였다.
선학원이 연락기지가 되어 불교정화를 할 때 따라다녀 본 바로는, 그때 대처측 신도와 권속인 젊은이들이 막대기를 들고 나와 때려도 안색 한번 변하는 일이 없이 그대로 맞고 참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일단 물러서면 이번에는 청담 큰 스님 차례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끝까지 물고 늘어져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며 상대방이 손을 들고 타협을 제의하여 해결이 날 때 까지 인욕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
남들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는 것도 당신께서는 굴하지 않는 신념으로 참고 견디며 밀고 나가 달성시키던 놀라운 저력, 그래서 육신이 떠나고 없는 지금도 많은 이들이 위대한 지도자였노라고 추앙하는 것이리라
이러한 정화불사 당시 인욕의 도행이 가능하였던 것은 그 이전 수행과정에 있어서 철저한 인욕의 수행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청담스님은 근대 석학 박한영 스님으로부터 교학을 배우고, 만공스님 문하에서 선가(禪家)의 불립문자(不立文子)의 도리를 깨친 후 무아의 인욕선인의 경지를 체득하여 정법수호와 청정승가 확립에 위법망구의 인욕의 도행을 실천하셨다. 그러면 이러한 교의의 근거가 어디 있는가?
초기 대승불교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은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 상호 관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6바라밀 중 보시․인욕의 덕목을 강조했다. 그러한 실천을 강조한 경전이 ?금강경?이다. 그러면 ?금강경?에 나타난 인욕사상을 고찰해 보자.
?금강경?의 「第十四 離相寂滅分」과 「第二十八 不受不貪分」에는 인욕사상을 설하고 있다. 그 내용의 대요(大要)를 알아보자. 인욕바라밀은 극도로 어려운 환경이나 굴욕스러운 상황을 끝까지 참아냄으로써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수행이다. 6바라밀 중 상(相, lakṣaṇa)을 떠나는(초월하는) 문제에 있어서 인욕이 중요한 방편으로 다음과 같이 대두된다.
그런데 다시 수보리여, 실로 여래에 있어서의 인욕바라밀은 참으로 인욕바라밀이 아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깔리왕(Kalingar?j?)이 나의 몸과 수족(手足)에서 살을 도려낸 그 때에도 나에게는 자기라는 생각(?tma-saṃjn?, 我相)도, 중생이라는 생각(sattva-saṃjn?, 衆生相)도, 영혼이라는 생각(jīva-saṃjn?, 壽者相)도, 개아라는 생각(pudgala-saṃjn?, 人相)도 없었으며 그리고 나에게 그 어떤 생각한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수보리여, 만약 그 때에 나에게 ‘자기’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하면 그 때에 나에게는 ‘원망하는 생각’이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수보리여, 나는 분명히 안다. 과거세(過去世)에 오백의 생애 동안 나는 ‘인욕을 설하는 자(kṣ?ntiv?din)'라는 이름의 선인(仙人, ṛsi)이었다. 그 때에도 역시 나에게는 ’자기‘라고 하는 생각이 없었고,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었고, 영혼이라는 생각이 없었고, 개아라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상(我相, ?tma-saṃjn?)‧인상(人相, pudgala-saṃjn?)‧중생상(衆生相, sattva-saṃjn?)‧수자상(壽者相, jīva-saṃjn?)을 초월하여 텅 비어 있는 상태에서 누구를 원망하고 무엇에 대하여 성을 낼 수 있겠는가? 위의 인용문은 부처님께서 전생에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서 수행하고 있을 때, 그 시대의 왕인 가리왕(歌利王, kalinga-r?j?)이 몸과 수족을 마디마디 잘라내었을 때 나와 너를 공(空, śūnya)으로 보았기 때문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4상(四相)에서 떠나 있으므로 이미 고(苦)의 상도 없는 것을 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육체의 고통도, 원망할 가리왕도, 심지어 고마워할 제석천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과거 오백생 동안에 수행한 인욕을 다 반야의 광명에 비추어 설하신 것이다. 그 때에도 사상(四相)이 없음으로 해서 이름하여 인욕바라밀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상(四相)을 떠나게 되면 그 어떠한 감정의 대상도 있을 수 없다. 참아낼 대상도 기뻐할 대상도 성낼 대상도 그 어떤 것도 초월하였으므로 실제로 참을 것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닌 것이고 단지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실체를 공(空)한 것으로 보면 상(相)으로부터 벗어나 복잡한 사회생활 속에서도 인욕행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공(空)의 지혜에 의해 인욕을 실천하면 모든 것은 집착이 없는 무아행(無我行)이 된다.
보살이 반야행(般若行)을 하면 자연히 복덕이 따르게 된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체법에 아(我)가 없음을 깨달은 지혜의 공덕은 그 어떤 물질적인 보시보다도 수승하다고 ?금강경?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선남자나 선여인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 만큼 되는 세계들을 칠보로써 채우고, 그것을 여래‧아라한‧정등각들께 보시했다고 하자. 다시 어떤 보살이 자아도 없고(無我) 생겨나지도 않음(不生)의 진리를 인욕(忍辱)하여 얻는다면, 후자가 그 일로 말미암아 참으로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은 공덕을 쌓은 것이 될 것이다.
일체법에 있어서 무아의 지혜를 체득한 보살은 그 어떤 물질적인 보시의 공덕보다 수승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과거 오백생 동안에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서 수행을 할 때 아(我)를 텅 빈 것(空)으로 보아 인욕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었다. 인욕의 경지가 깊어지면 단순하게 수행자로서 참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본성 자리를 굳게 지켜 일체의 분별에 흔들리지 않고 나지도 죽지도 않는 진리에 머물 수가 있게 된다고 한다.
청담스님께서는 깨치신 안목에서 위에서 인용한 인욕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참는 것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500생 동안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계실 적에 가리왕에게 사지백해(四肢百骸)를 찟길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참을 줄 알아야 하고 또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전단(栴檀)이라는 하늘나라의 고약을 가지고 와서 찢어진 육신을 완전하게 치료해 줄 그때에도 조금도 기쁜 마음을 내지 않으셨던 것처럼 참는 것 없이 참아야 합니다. 이렇게 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의 경지에 도달하면 단순한 참음이 아니라 마음의 참바탕 자리를 튼튼하게 지키고 일체의 객관경계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참나”의 진리를 체득했다는 뜻을 가진 인(忍)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득성어인(得成於忍)의 ‘인(忍)’은 어긋나고 모순되고 거슬리는 경계를 잘 참고 성내지 않으며 ‘좋다·싫다’는 생각이 없어서 갚음이 없는 것을 말하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생멸이 없는 진리에 머물러서 그 마음이 도할양무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청담스님께서는 ?Gītā?의 “‘이상적 인간상 즉, 스티따쁘라갸(sthitaprajnā, 견고한 지혜인)’이 애증(愛憎)·미추(美醜) 등의 이원(二元)적 감정을 초월하여 사사무애행(事事無碍行)을 한다”는 것처럼, “마음이 공(空)해 있어서 아공·법공·구공(我空·法空·俱空)이 드러나 있게 되니까 이 몸뚱이를 탁 잊어버리면 전신을 송곳으로 쑤시고 불에 그슬려도 하나가 뜨거운 줄 모르는 겁니다. 마음이 무심경계(無心境界)에 들어가서 생각이 없으면 경계가 침범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도 침범 못하고 불도 불 행세를 못합니다”고 당신의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서의 경지를 설하였다. 스님은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 상호 관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인욕의 덕목을 중시·강조하면서 당신 수좌(首座)시절의 인욕행(忍辱行)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에게 만법이 무아(無我, anātman)인 도리를 깨쳤습니다. 나만 무아가 아니라 만법이 다 무아이기 때문에 성불할 수 있는 도리를 깨쳤습니다. 인욕하는 것도 처음에는 힘이 들지만 이것도 자꾸 노력을 하고 무아의 도리를 닦아 나가면 도가 높아짐에 따라 힘 안 들이고 잘 됩니다. ……성나는 것만 참는 것이 아니라 아픈 것도 참아야 하는데, 몸을 톱으로 켜고 칼로 찌르더라도 아픔이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법력이 아직 그렇게 되지는 못했지만 말만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발심한 불자입니다.
내가 한 30년 전에 맨발로 짚신만 신고 다니며 방에 불도 안 때고 안국동 선학원(禪學院)에서 한동안 인욕공부를 하며 지낸 일이 있습니다. 요사이 추위는 30년 전 추위에 비하면 훨씬 덜 춥습니다. 그 때 장안에는 선학원에 장사 중이 하나 나왔다고 떠들썩한 일이 있었지만 나는 그 때 몸뚱이를 내버리고 인욕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대로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청담스님은 인욕을 “욕되는걸 참을 뿐만 아니라 남이 날 나쁘다고 입으로 욕을 하든지 매로 때리든지 칭찬을 하든지 마음에 움직임이 없이 전부 참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는다는 것은 억지로 참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참는다는 생각 없이 참는 것이 정말 참는 것입니다”고 인욕 정신에 대하여 스님의 해석을 하였다.
청담 큰스님은 ‘여래의 사자(使者)’라는 사명을 갖고 어떤 어려움과 역경에도 인욕하는 마음으로 중생교화를 하셨다. ‘여래의 사자(使者)’ 사상은 「법화경」제 10의 「법사품」에 나타나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불(佛)의 사도(使徒)란 보살을 가리키며 이는 ‘여래사(如來使, Tathāgata-dūta)라 부른다.
이어서 이 품(品)의 중심사상인 경전을 ‘널리 알리는 방법(弘經三軌)’을 제시한다. 즉 여래가 열반한 뒤에 사부대중을 위하여 이 법문을 설하려면 그는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이 법문을 사부대중에게 설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여래의 방이란 일체 중생 가운데 대자대비한 마음이요, 여래의 옷이란 부드럽고 온화하고 욕됨을 참는 인욕의 마음이고, 여래의 자리란 일체법공(一切法空) 즉 법공(法空)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소승불교 특히 상좌부에서 설법사(bhāṇka)는 성전 암송가로서 음악가의 일종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대승경전에 이르러 설법사는 보살이라고 칭하고 정법(正法)의 담당자로 했던 것이다. 대승경전이 정법을 호지(護持)하는 자를 법사(dharma-bhāṇaka)라고 부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법자(持法者), 法의 해설자라는 말을 사용하였던 것은 그들이 스스로 교법의 정통적인 전수자라고 나섰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정법(正法)의 호지와 설법에 의해 경전을 유포한 것이 법공양 혹은 법보시로서의 가치를 부여받고, 종교적 실천이라는 의미에서 보살도로 받아들여졌던 점일 것이다.
이와 같이 『법화경』의 「법사품」에서는 법사를 보살을 가리키며 ‘如來使, Tathāgata-dūta'로서 홍경삼궤(弘經三軌)를 실천한다. 청담큰스님께서는 『법화경』에 나타난 ‘如來使’와 같이 일생을 홍경삼궤(弘經三軌)를 실천하셨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스님의 ‘인욕’의 인식은 『금강경』으로부터, ‘인욕’의 실천은 『법화경』으로부터 유래(由來) 되었음을 알 수 있다.
4)무상(無相) ‧ 무주(無住)의 수행
무주란 집착이 없음을 뜻한다. 執着(집착)함이 없는 相(상)에서 상을 여의는 무상행(無相行)이다. 무상행(無相行)은 집착함이 없이 참여하여 스스로 이분법의 상(相, lakṣaṇa)을 여의는 행이다. 『금강경』의 「이상적멸분 제14」에서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여의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해야 한다.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소리와 냄새와 맛과 느낌과 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는 그 마음을 내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 「묘행무주분 제4」에서 “보살은 마땅히 법에 머무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라.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는 보시며, 소리(聲)․냄새(香)․맛(味)․느낌(觸)과 법(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여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相)에 머무르지 말 것이니라. <중략> 수보리야! 보살이 상(相)에 머물지 않고 행하는 보시의 복덕도 또한 이와 같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마땅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라고 했고, 「장엄정토분 제10」에서 “모든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Bodhisattva-mahāsattva)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색(色)에 머물어서 마음을 내지 말며, 마땅히 소리(聲)와 냄새(香)와 맛(味)과 느낌(觸)과 법(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머무는 바(집착함)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라고 하였다.
위에서 인용한 『금강경』의 교설을 청담스님은 자신의 패러다임으로 해석하고 구상하여 스님의 인격과 생활 속에 구현하여 무상행(無相行, aniketa-cārin)으로 나타냈다. 무상행은 마치 연꽃이 진흙에 머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큰스님은 수행자답게 아상(我相)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누구라도 높이 보고 비굴하거나 얕히 보고 교만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스님의 무상행을 보살의 행이라고 할 수 있다. 큰스님께서는 어디에 참여하여도 참여하는 일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스님은 자신의 뜻에 의해서 지위에 집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공로에도 집착하지 않으셨다. 스님께서는 오직 종단의 회합과 번영을 위해서 회향의 도행을 실천하셨다.
필자는 대학생 시절에 깊은 실의에 빠져 큰스님을 찾아뵙고 나의 상황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하였다. 큰스님은 나에게 ?금강경?을 주시면서 매일 수지·독송·사경하면 육체의 눈(眼)에서 불안(佛眼)이 열릴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금강경?의 사구게를 교시하였다.
“모든 형상은 다 변화하는 것이다. 모든 형상을 보되 인연의 법칙에 의해 잠시 머무는 것(假想)으로 참된 실상(實相)이 아닌 것으로 직관한다면 곧 진리를 보고 여래(如來)를 본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큰스님께서는 ?금강경?의 제일 사구게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해설해 주셨다. 그래서 필자는 인생의 이치나 일에 막힘이 있을 때 이 사구게를 염송하면서 생활한다. 이 사구게는 땅에서 엎어진 자가 땅을 딛고 일어서는 것과 같이 실의(失意)와 역경(逆境)을 지혜와 복덕으로 쌓는 계기로 삼게 하는 나의 경구(警句)가 되었다. 이 사구게는 내 삶의 등불이다. 이런 생명의 진리를 깨우쳐 준 큰스님의 사랑이 아직도 내 마음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나는 큰스님의 이런 자비스런 가르침의 은덕으로 수업수생(隨業受生)의 삶에서 수의왕생(隨意往生)의 삶을 사는 좌표를 확립할 수 있었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무상(無相)·무주(無住)의 인식과 실천은 「금강경」의 「대승정종분」제3과 「묘행무주분」제4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IV. 맺음말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수행은 불교의 본질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고 나아가 중생교화가 가능하다. 청담대종사의 수행관은 내적 수행과 외적수행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는 내적정화인 자성불(自性佛)을 체현하는 참선 실천으로, 후자는 교단정화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스님의 수행관은 내외불이(內外不二)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무아행(無我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스님의 삶에 나타난 수행관의 내용은 원력, 참회, 인욕, 무상‧무주의 수행으로 볼 수 있다. 원력의 수행은 『금강경』의 「대승정종분」의 보살인식에서 『화엄경』보현행원으로 체현하여 청담스님적인 독특한 구상과 방식이 적용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참회의 수행은 『화염경』「보현행원품품」제 4 참회업장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스님께서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정화운동을 위하여 백팔참회결사(結社)운동을 전개했다. 인욕수행의 인식은 『금강경』으로부터 실천은 『법화경』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인지된다. 무상·무주의 수행의 인식과 실천은 『금강경』의 「대승정종분」제3과 「묘행무주분」제4에서 유래되었음을 논자는 분석했다.
청담스님의 수행도는 안으로 본성(本性)인 마음을 찾아 (svayaṃprakāṣa) 정법심인(正法心印)을 체득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20세기 보살도의 전형이다. 20세기 한국불교사에서 청담스님과 같이 누가 한국불교를 그의 피와 살로 느끼면서 보살행을 한 분이 얼마나 될까? 오늘날 한국불교는 청담스님과 같은 보살도를 실천하는 수도자를 갈망하고 있다.
약호표
CD : 靑潭大宗師全書(卷數, 페이지數)
Gītā : The Bhagavadgītā
H : 韓國佛敎全書(卷數, 페이지數, 段)
T : 大正新修大藏經(卷數, 페이지數, 段)
Ⅴ. 참고 문헌
I. 原典類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설의? (H 7)
?大乘莊嚴經論? 권 제7 (T 31).
?大智度論? 권 제19 (T 25).
「묘장엄왕경본사품」 ?묘법연화경? (T 9).
「法師品」, ?妙法蓮花經? (T 9)
「방편품」 ?묘법연화경? (T 9).
「보현행원품」 「화엄경」 권 40 (T 10)
?三國遺事? 券 3.
?攝大乘論釋論? 권 제8 (T 31).
「惺牛 鏡虛集」 (H 11).
?잡아함경? 권 제40 (T 2).
?解心密經? 권 제4 (T 16).
靑潭大宗師全書?
靑潭大宗師全書?
靑潭大宗師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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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불교사상사 연구 上?, 서울, 한국불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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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마하뜨마 간디철학연구?, 서울, 불광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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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僧伽 본래의 歷史性과 韓國佛敎 敎團淨化運動의 史的 意義」, ?청담대종사와 현대한국불교의 전개?, 서울, 청담문화재단, pp. 1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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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수행은 불교의 본질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고 나아가 중생교화가 가능하다. 청담대종사의 수행관은 내적 수행과 외적수행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는 내적정화인 자성불(自性佛)을 체현하는 참선 실천으로, 후자는 교단정화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스님의 수행관은 내외불이(內外不二)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무아행(無我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스님의 삶에 나타난 수행관의 내용은 원력, 참회, 인욕, 무상‧무주의 수행으로 볼 수 있다. 원력의 수행은 『금강경』의 「대승정종분」의 보살인식에서 『화엄경』보현행원으로 체현하여 청담스님적인 독특한 구상과 방식이 적용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참회의 수행은 『화염경』「보현행원품품」제 4 참회업장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스님께서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정화운동을 위하여 백팔참회결사(結社)운동을 전개했다. 인욕수행의 인식은 『금강경』으로부터 실천은 『법화경』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인지된다. 무상·무주의 수행의 인식과 실천은 『금강경』의 「대승정종분」제3과 「묘행무주분」제4에서 유래되었음을 논자는 분석했다.
청담스님의 수행도는 안으로 본성(本性)인 마음을 찾아 (svayaṃprakāṣa) 정법심인(正法心印)을 체득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20세기 보살도의 전형이다. 20세기 한국불교사에서 청담스님과 같이 누가 한국불교를 그의 피와 살로 느끼면서 보살행을 한 분이 얼마나 될까? 오늘날 한국불교는 청담스님과 같은 보살도를 실천하는 수도자를 갈망하고 있다.
주제어 : 수행관, 자명성(自明性), 무아행(無我行), 원력(願力), 참회(懺悔), 인욕(忍辱), 무상(無相)
<Abstract>
Venerable Chung-dam's Viewpoint of the Self-cultivation
Kim, Sun-Keun
The purpose of this work is a study of Venerable Chung-dam's Viewpoint of the Self-cultivation. He is a Bodhisattva who laid the foundation of the Korean Buddhism succeeding the traditional Seon self cultivation. He is remained in our memory as a strict trainee and a merciful Bodhisattva.
The self-cultivation is the way to reach the enlightenment, the final end of Buddhism. It is possible for Buddhist to enlighten mankind after self enlightenment by the Seon. 'The mind' is the subject of the self-cultivation in Buddhism. Buddha's spiritualism was construed as Venerable Chung-dam's 'mind' on his own words.
His cultivation activity consists of internal and external activity in the mind. The cultivation activity of external mind was to establish a pure and undefiled Saṃgha as religious order purification. That of internal mind was to set up the established Buddhism as svayaṃprakǡṡa Buddhist service.
His practice of cultivation can be interpreted as a practice of non-self which signifies no difference between inside and outside as well as phenomenon without hindrance on each other. Venerable Chung-dam practiced " the conducts for the benefit of all sentient beings preached in The Diamond Sǔtra as practical ethics based on the philosophy of Emptiness (Ṡǔnyatǡ , animitta.)"
Key words : Viewpoint of the Self-cultivation,
svayaṃprakǡṡa, practice of non-self, praǹidhǡna, kṡamị, kṡǡnti, animitta
[출처] 청담대종사의 수행관|작성자 만남 창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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