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결어結語
위에서 引用인용한 經論경론에서 밝힌 바, 法법에는 本來본래 頓漸돈점이 없고 根機근기의 利鈍이둔으로 頓漸돈점이 생기는 것이며 또한 修證수증에도 深淺심천이 있는 것이니 頓悟漸修돈오점수라 하여 誤謬오류일 수 없고, 無染汚修行무염오수행을 力說역설하는 意味의미에서의 頓修돈수이니 頓悟頓修돈오돈수가 그릇됨이 아니며, 다만 先悟後修선오후수의 隨機說法수기설법일 뿐이다.
위에서 인용한 경론에서 밝힌 바, 법에는 본래 돈점頓漸이 없습니다. 다만 근기가 날카롭고 둔함으로 돈점이 생기는 것이며, 또한 닦고 증 하는 수증修證에도 깊고 옅은 심천深淺이 있는 것이니 돈오점수라 하여 그릇됨이 될 수가 없고, 점차나 차서나 고하를 논하지 않는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을 역설하는 의미에서의 돈수이니 돈오돈수가 그릇됨이 아니며, 다만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수기설법隨機說法일 뿐입니다.
역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것은 불조佛祖의 통설通說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무슨 큰일을 할 때는 이론적인 체계가 먼저 앞서야 하겠지요. 그래야 여러 가지 거기에 따르는 합리적인 행동을 취할 수가 있듯이 공부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이해를 해야 올바른 수행修行을 할 수가 있습니다. ‘경經은 필요가 없다, 불립문자不立文字敎 교외별전外別傅이라’ 하여 문자와 분별을 여의고 실참실구實參實究로 정진을 할 때도 먼저 공부 방법에 대한 이론적인 체계가 확립 되어야 바른 신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닦는 방법은 여러 방법이 있는 것인데, ‘나한테는 어떤 것이 맞는 것인가’ 하는 것도 역시 자기 나름대로 확신이 서야 용기 있는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항시 의심하는 가운데서는 용기가 안 나옵니다. 의심은 다만 제일의제第一義諦, 본래적인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의심해서 참구參究하는 것이지 그 외의 상대적인 의심은 우리 공부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됩니다.
부처님 경전 가운데는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여 모두를 다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화엄경』에도 보십시오. 일진법계一眞法界 현상을 그렇게 소상히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부처님 말씀이 다 필요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고 또는 역대조사 스님들이 모두가 다 필요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고구정녕으로 체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휴지같이 버릴 것이 아니라 차용해 가지고 스스로 자기 공부하는 길을 밝혀야 합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분별 시비나마, 참다운 반야지혜가 아니라 분별하는 지혜로 해서라도 우리가 납득이 가야합니다. 이른바 이론적인 체계가 서야 합니다.
그런데서 선오후수先悟後修란, 먼저 견성오도를 다 해가지고 닦는다는 의미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분별 시비하는 해오解悟를 먼저 해놓고서 닦아야 흐트러짐이 없이 바로 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삼세제불의 정설입니다.
석존께서 유성출가踰城出家하여 설산에서 닦을 때는 선오후수가 못 되었겠지요. 그때는, 육사외도六師外道를 방문해서 별별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더러는 발가바Bhargava 외도한테 가서 고행苦行법도 배운 것이고 또는 아라다 카라마Arada Kalama한테 가서 무소유처無所有處까지 올라가는 선정도 배운 것이고 또는 우다카 라마푸타Udraka-Ramaputta한테 가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삼계의 꼭대기에 올라가는 선법도 배웠으나 모두가 다 참다운 깨달음에 이르는 법이 아니었기에, 그들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석가모니 전에 정말로 명안종사明眼宗師가 있어서 ‘그대는 어떻게 공부해야 한다.’ 고 했을 때는 6년 고행이 다 걸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석존께서는 선수후오先修後悟라, 먼저 닦고 나중에 깨닫는 공부 방식인 것이고, 석존 뒤에는 석존께서 모든 방법을 다 분명히 밝혀 놓으신지라 그 말씀 따라서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됩니다. 선오후수는 각 경론의 정설이기 때문에 돈오돈수나 돈오점수 모두가 다 선오후수라는 자리에서, 즉 말하자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법문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6조 스님의 돈오돈수에 대한 말씀도 깨달은 뒤에 닦을 필요가 없다는 돈수가 아니라 깨달아서 자타自他 시비是非의 차별이나 높고, 낮고, 깊고, 옅음 등의 분별심은 끊어졌으나 아직 번뇌의 습기는 남아 있기 때문에, 분별시비에 집착하지 않는 무념수행無念修行 곧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돈오돈수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곧 『단경』에서 ‘그대들이 만약 일체종지를 성취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달達해야 하느니라.’는 말씀이나 남악회양 선사와의 거량에서 ‘닦음과 증득함이 없지 않으나 염오하지 않는 것 즉, 차별과 시비를 두지 않고 상에 걸리지 않는 것’이란 대답에 6조 스님께서는 ‘이 염오하지 않는 수행은 모든 부처가 보호하고 긍정하는 바요. 그대도 그렇고 나 또한 그렇다’고 한 말씀에서 그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돈오점수라는 개념도 중국의 징관(澄觀 ?~839) 스님이 비로소 사용했다고 하나 종밀(宗密 780~841) 스님도 말씀하였고, 『화엄경』을 비롯한 대승경론의 뜻이 대체로 돈오점수의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고, 보조 스님의 돈오점수설도 이미 6조 스님의 돈오돈수설을 수용한 불교 일반의 수증론修證論이라 생각됩니다.
나아가 돈오돈수가 성불成佛일 것인가? 하는 문제도, 대소경론에서 말씀한 묘각성불妙覺成佛이란 삼명육통三明六通과 일체종지-切種智를 갖춘 불가사의한 무량공덕을 원만히 성취하였다고 하는데, 단박에 물론 깨달았다고 해서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겠습니까? 부처님 이후 얼마만의 선지식들이 이러한 원만성불의 자리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인가? 이러한 점도 생각해 볼 일입니다.
또한 깨달음이 해오解悟가 되었거나 증오證悟가 되었거나 지극히 수승한 근기가 아닌 보통 근기로는 깨달음이 바로 구경각究竟覺인 묘각 성불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깨달음에도 심천이 있으며, 깨달은 뒤에도 습기를 착실히 닦아야 한다는 돈오점수설이 그릇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돈오돈수설이나 돈오점수설이나 표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취지는 동일하고, 중생 교화의 배경이나 시절 인연에 따라서 말씀하신 수기설법隨機說法으로 어떠한 것도 그르다고 비판 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닦음도 올바른 닦음이 되고 성불에 이르는 첩경捷徑이 되는 것입니다.
[출처] 원통불법의 요체(10)|작성자 미타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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