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법담법화

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16>

수선님 2021. 5. 9. 12:20
한국불교신문 제 627호(2014년 8월 30일자) 아함경 강의

 

연기(緣起)에 대해 잘 사유하고 관찰하면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에 대해서도 싫어하는 마음을 내

붓다는 차라리 몸에 대해서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고 집착할지언정 식(識)에 대해서 나와 내 것이라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이 몸은 그래도 10년 20년 30년 나아가 100년까지 머무르다가 소멸하지만, 마음[心]과 뜻[意]과 식(識)은 밤과 낮, 시시각각으로 생겼다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마치 원숭이가 숲 속에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갈 때 하나를 놓고 다른 한 나무 가지를 잡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마음과 뜻과 식도 또한 다른 것이 생기고 소멸한다는 것이다

 

무문경(無聞經)

 

[원문]
(二八九) 如是我聞: 一時, 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 爾時, 世尊告諸比丘: “愚癡無聞凡夫於四大身厭患․離欲․背捨而非識. 所以者何? 見四大身有增․有減․有取․有捨, 而於心․意․識, 愚癡無聞凡夫不能生厭․離欲․解脫. 所以者何? 彼長夜於此保惜繫我, 若得․若取, 言: ‘是我․我所․相在.’ 是故愚癡無聞凡夫不能於彼生厭․離欲․背捨.
愚癡無聞凡夫寧於四大身繫我․我所, 不可於識繫我․我所. 所以者何? 四大色身或見十年住, 二十․三十, 乃至百年, 若善消息或復小過. 彼心․意․識日夜時刻, 須臾轉變, 異生․異滅. 猶如獼猴遊林樹間, 須臾處處, 攀捉枝條, 放一取一. 彼心․意․識亦復如是, 異生․異滅.”
“多聞聖弟子於諸緣起善思惟觀察, 所謂樂觸緣生樂受, 樂受覺時, 如實知樂受覺; 彼樂觸滅, 樂觸因緣生受亦滅․止․清涼․息․沒. 如樂受, 苦觸․喜觸․憂觸․捨觸因緣生捨受, 捨受覺時, 如實知捨受覺; 彼捨觸滅, 彼捨觸因緣生捨受亦滅․止․清涼․息․沒. 彼如是思惟: ‘此受觸生․觸樂․觸縛, 彼彼觸樂故, 彼彼受樂, 彼彼觸樂滅, 彼彼受樂亦滅․止․清涼․息․沒.’ 如是, 多聞聖弟子於色生厭, 於受․想․行․識生厭, 厭故不樂, 不樂故解脫, 解脫知見: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가란다죽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고 배움이 없는 범부들은 사대(四大)로 된 몸에 대해서 싫어하고 근심하며 탐욕을 여의고 등져버리지만 식(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사대로 된 몸에서는 더함이 있고 줄어듦이 있으며 취함이 있고 버림이 있음을 보지만, 마음[心]과 뜻[意]과 식(識)에 대해서 어리석고 배움이 없는 범부들은 능히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탐욕을 여의어 해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것을 보호하고 아끼면서 나[我]라고 하는 것에 매달려, 얻거나 취하는 것이 있으면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내 것이다. 둘 다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배움이 없는 범부들은 그것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탐욕을 여의어 등져버리지 못한다.
어리석고 배움이 없는 범부들은 사대로 된 몸에 대해서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고 얽매일지언정 식(識)에 대해서 나와 내 것이라고 얽매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대로 된 몸에서는 10년을 머무르고 20년 30년 나아가 백 년 동안 머무르다가도 결국 소멸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많기도 한 것을 보지만, 마음과 뜻과 식은 밤과 낮, 시시각각으로 잠깐 사이에 변하고 옮겨 다른 것이 생기고 다른 것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마치 원숭이가 숲 속에서 놀 때, 잠깐 사이에 여기저기로 나무 가지를 옮겨 잡으며 하나를 놓고 곧 다른 한 나무 가지를 잡는 것과 같나니, 그 마음과 뜻과 식도 또한 그와 같아서, 다른 것이 생기고 또 다른 것이 소멸하느니라.
많이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모든 연기(緣起)에 대해서 잘 사유하고 관찰한다. 즐거움과의 감촉[樂觸]을 인연해 즐겁다는 느낌이 생겨 즐겁다는 느낌을 깨달았을 때, 즐겁다는 느낌의 깨달음을 사실 그대로 안다. 그 즐거움과의 감촉이 소멸하면 즐거움과의 접촉을 인연하여 생긴 느낌도 또한 소멸하고 그치며, 맑고 시원해지며, 쉬고 사라지느니라. 즐겁다는 느낌에서와 같이 괴로움과의 접촉[苦觸]․기쁨과의 접촉[喜觸]․근심과의 접촉[憂觸]도 마찬가지이며, 평정과의 접촉[捨觸]을 인연하여 평정하다는 느낌이 생겨 평정한 느낌을 깨달았을 때, 평정한 느낌의 깨달음을 사실 그대로 안다. 그 평정과의 접촉이 소멸하면 그 평정과의 접촉을 인연하여 생긴 평정하다는 느낌도 또한 소멸하고 그치며, 맑고 시원해지며, 쉬고 사라지느니라. 그는 이와 같이 사유한다.
‘이 느낌과 접촉은 즐거움과의 접촉과 접촉에 얽매임을 일으킨다. 이러저러한 즐거움과 접촉하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즐거움을 느끼고, 이러저러한 즐거움과의 접촉이 소멸하면 이러저러한 즐겁다는 느낌도 또한 소멸하고 그치며, 맑고 시원해지고 쉬고 사라진다.’
이와 같이 많이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색(色)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수(受)․상(想)․행(行)․식(識)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낸다. 싫어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解脫)하며, 해탈지견(解脫知見)이 생겨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梵行)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을 이미 다 마쳐 다시 후세에서는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 사실 그대로 아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권12 제289경(「대정장」 2, p.81c)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12:61 Assutavā-sutta(SN Ⅱ, pp.94-95)이다. 이 경의 제목인 ‘무문(無聞)’은 배우지 못한 자, 즉 우치무문범부(愚癡無聞凡夫)에서 뽑은 것이다. 니까야에서는 ‘배우지 못한(assutava) 범부(putthujjana)’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아가마에서는 어리석음(愚癡)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었다.
이 경의 경우는 니까야와 아가마의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다만 연기(緣起)에 대한 구체적인 관찰의 내용이 다르게 설명되고 있다. 니까야에서는 연기의 공식을 설명하고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반면 아가마에서는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은 물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가를 관찰하라고 설해져 있다.
또한 이 경을 설한 장소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 경을 니까야에서는 사왓티의 아나타삔디까의 원림(급고독원)에서 설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아가마에서는 왕사성 가란타죽원에서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경의 핵심은 범부들은 인간의 존재인 오온(五蘊) 가운데 육체, 즉 사대(四大)는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싫어하고 탐욕을 여의고 등져버리지만, 식(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온 가운데 물질에 속하는 색(色)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임을 알겠는데, 수(受)․상(想)․행(行)․식(識) 중에서 특히 식(識)은 변하지 않는 자아(自我)라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차라리 몸에 대해서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고 집착할지언정 식(識)에 대해서 나와 내 것이라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은 그래도 10년 20년 30년 나아가 100년까지 머무르다가 소멸하지만, 마음[心]과 뜻[意]과 식(識)은 밤과 낮, 시시각각으로 생겼다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마치 원숭이가 숲 속에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갈 때 하나를 놓고 다른 한 나무 가지를 잡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마음과 뜻과 식도 또한 다른 것이 생기고 소멸한다는 것이다. 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라고도 부르는 이것에 대해서 싫어할 수 없고, 탐욕을 여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이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움켜쥐고 내 것으로 삼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여기에 대해서 싫어할 수 없고 탐욕을 여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위 경전에 의하면, 범부들은 심(心)․의(意)․식(識)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움켜쥐고 내 것으로 삼고 집착하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먼저 이 경에 나오는 ‘배우지 못한 범부’에 대해서 주석서에서는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배우지 못한(assutava)’이란 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십팔계(十八界), 조건(緣)의 형태, 염처(念處) 등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을 말한다. 즉 법(法)에 대한 들음[聞]이 없는 사람을 ‘배우지 못한’이라고 일컫는다.

범부(puthujjana)는 두 가지 뜻으로 풀이된다. 첫째는 많고 다양한 번뇌 등을 산출하는 등의 형태에 의해서 범부라고 불린다. 그리고 성스러운 법을 등지고 저열한 법에 빠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포함되기 때문에 범부라고 불린다. 둘째는 계행과 배움 등의 공덕을 갖춘 성자들로부터 분리된 사람이라고 해서 범부라고 불린다. 이와 같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것은 다른 두 가지 어원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빨리 주석가들은 첫 번째 해석을 더 중시하고 있다.

이 경에 나오는 심(心, citta)․의(意, mano)․식(識, vaññāṇa)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 니까야에서는 “cittaṁ iti pi mano iti pi vaññānaṁ iti pi”로 나타나는데, 각묵 스님은 이것을 “마음[心]이라고도 마노[意]라고도 알음알이[識]라고도”라고 번역했다. 「청정도론」에서도 “심(心)․의(意)․식(識)은 같은 뜻이다.”고 해석했다.
이와 같이 심(心)․의(意)․식(識)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니까야에서는 각각 다른 문맥에서 나타난다. 비구 보디(Bhikkhu Bodhi)의 해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식(識, vaññāṇa)은 눈․귀․코․혀․몸․뜻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대상을 아는 것으로 쓰이고 있다. 또한 한 생과 다음 생을 통해서 개인적인 동일성을 유지하는 의식의 잠재적인 흐름을 뜻하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둘째, 의(意, mano)는 몸(kāya)과 말(vaci)과 더불어 의도적 행위를 하는 세 번째 문으로 나타나며(意行, 意業),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六內入處, ajjhattika āyatana] 혹은 감각기능[根, indriya] 가운데 마지막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의(意, mano)의 감각장소는 다른 다섯 감각장소가 받아들인 대상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역할도 하지만, 정신적인 현상(dhamma)들을 자신의 대상으로 가지는 특수한 감각장소 혹은 감각기능이다.
셋째, 심(心, citta)은 개인적인 경험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생각이나 의도나 감정의 주관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마음은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도, 훈련되어야 하는 것으로도, 해탈해야 하는 것으로도 언급되고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 「하나의 모음」의 제1장에서부터 제6장까지의 수십 개의 짧은 경들에서 주제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비구들이여,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법도 이렇듯 빨리 변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마음이다”(A1:5:8) 또는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 마음은 객으로 온 번뇌들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A1:5:9) 등이다. 그러나 후기불교에서는 심(心)․의(意)․식(識)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달라진다.
위에 인용한 니까야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이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움켜쥐고 내 것으로 삼고 집착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이것은 내 것이다(etaṁ mama)’라는 것은 갈애에 의한 거머쥠(taṇhā-gāha)이다. 이것은 백여덟 가지 갈애의 생각(taṇhā-vicarita)을 말한다. ‘이것은 나다(esohamasmi)’라는 것은 자만에 의한 거머쥠(māna-gāha)이다. 이것은 아홉 가지 자만을 말한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eso me attā)’라는 것은 견해에 의한 거머쥠(diṭṭhi-gāha)이다. 이것은 육십 두 가지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그러나 많이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연기(緣起)에 대해 잘 사유하고 관찰한다. 연기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즉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행(行)이 있고, 행을 조건으로 식(識)이 있으며,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면 식이 소멸하고,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이러한 연기에 대해 잘 사유하고 관찰하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에 대해서도 싫어하는 마음을 낸다. 싫어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解脫)하며, 해탈지견(解脫知見)이 생겨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梵行)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을 이미 다 마쳐 다시 후세에서는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 사실 그대로 알게 된다.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16> - 한국불교신문

연기(緣起)에 대해 잘 사유하고 관찰하면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에 대해서도 싫어하는 마음을 내 붓다는 차라리 몸에 대해서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고 집착할지언정 식(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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