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무엇을 평상심이라 하는가?

수선님 2021. 5. 23. 11:26

무엇을 평상심이라 하는가?

불ㆍ보살의 마음이 평상심이란 말이다. 즉, 조작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고, 취하거나 버림이 없고, 끊어짐과 이어짐이 없으며, 범부도 성인도 없는 것이다(何謂平常心 無造作 無是非 無取捨 無斷常 無凡無聖).”라 했다. <마조어록>에 전하는 말이다.

   도심(道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의 청정한 마음이 곧 도(道)요, 깨달음이라는 가르침이다. 세상 사람은 도(道)라고 하면 특별한 것 또는 보통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기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도란 바로 범부가 일상생활 하는 그 마음을 여의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도란 바로 범부가 일상생활 하는 그 때 묻은 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번뇌가 없고, 일상생활 하나하나에 몰두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도라고 가르치고 있다. 적어도 이런 마음을 지키려면 불ㆍ보살 수준이어야 가능하다는 점도 깊이 새겨야 한다. 

 

   “평상심이 진리다.”라고 하는 이 말은 중국인 특유의 현실 긍정적 사고, 모든 철학이나 사상을 현실을 바탕으로 전개해 나가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중국인들은 인도 사람들처럼 철학적 사유가 적었을 뿐만 아니라 현실이나 사물을 떠난 이해를 싫어했다. 유학의 교과서 중,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사물을 바탕으로 앎을 지극히 하는 것)가 바로 중국인의 사유행태를 대표하는 말이다.

   도 따로 있고, 평상심이 따로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수행이 따로 있고 평상시의 생활이 따로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참으로 수행이 잘 된 사람은 평상시의 생활에 수행의 공덕이 나타나는 법이어야 한다. 수행할 때는 열심인 사람이 생활할 땐 게으름을 피우면 그건 앞뒤가 맞지 않는 삶이다.

 

   마조 선사의 선(禪)에서 불심(佛心), 즉 깨달은 자의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 평상심(平常心)이다. 평상심이라 하면 무언가 특별한 마음이 아니라 평상(平常)의 마음, 즉 일상적으로 매순간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평상심이 바로 도(道)라고 하면 일상(日常)의 매 순간순간의 마음 그대로가 모두 도(道)라는 것으로 이른바 일체개진(一切皆眞)이라는 뜻과 같다.

   그래서 마조 선사는 다시 “지금 가고, 머물고, 앉고, 누움에 있어서 때에 응해 사물을 접하는 것이 모두 도(道)이다.”라고 하고, 또 “도(道)는 곧 법계(法界)인데 무궁한 작용이 모두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처럼 평상의 순간순간의 마음이 모두 도(道)라고 하면서도 마조 선사는 또 평상심의 특징으로서 “무조작(無造作), 무시비(無是非), 무취사(無取捨), 무단상(無斷常), 무범성(無凡聖)”을 말했는데, 이 점에서 마조 선사가 말한 평상심은 범부의 일상적 마음은 아님이 분명하다. 즉, 깨달음을 통해 일원적 근원에로의 반본회귀(返本回歸)를 거치지 않은 범부들의 일상적 마음이 그대로 평상심은 아니라는 말이다.

   통속적인 평상심이란 갈등과 번민이 섞여 있는 마음, 온갖 욕망과 번뇌가 어우러진 마음이며, 탐욕과 성냄이 함께 한 마음, 미워하는 마음과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 물론 사랑하고 자비로운 마음도 평상심의 한 단면이다. 이와 같이 평상심이란 선과 악이 공존하며 깨끗함과 더러움이 뒤섞인 마음이다. 곧 진여(眞如)와 생멸(生滅)이 뒤엉킨 마음이 통속적인 평상심이다.

 

   마조 선사가 말한 평상심은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조작(造作)하고 시비(是非)하고 취사(取捨)하고 분별(分別)하는 것이야말로 중생심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마조 선사가 말하는 평상심은 이와 같은 조작, 시비, 취사, 분별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즉, 분별하는 이원적 중생의 마음이 아니라 진일원(眞一元)의 부처님 마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상심이란 옷 입고, 밥 먹고, 차 마시는 일상생활의 중생들이 발휘하는 분별심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바로 불ㆍ보살의 마음이다.

 

    제8 아뢰야식에 함장된 업(카르마/Karma)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에 의해 굴림을 당하는 굴절된 중생심이 아니라, 업(業)을 굴려, 번뇌를 굴려, 번뇌를 지혜로 활용하는 대원경지(大圓鏡智)의 마음이다. 아뢰야식을 굴려 대원경지를 이루면 부처요, 굴림을 당해 굴절돼 생사윤회를 하면 중생이다.

   이원적 중생의 마음이나 일원적 부처의 마음이나 그 마음은 일심(一心)일 뿐으로서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이 시비, 조작, 분별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의 마음은 분열돼 평등하지 못하고, 시비, 조작, 분별을 벗어나면 그 마음은 평등해 늘 하나의 마음이다. 다시 말하면 범부나 성인(聖人)이나 살아가는 일상은 꼭 같다. 다만 범부는 그 일상 속에서 시비, 조작, 분별하며 살아가고, 성인은 시비, 조작, 분별없이 살아간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마조 선사는 “삼계(三界)에서 헤아리는 마음만 없으면 된다.”라 하고, 또 “도(道)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오염되지만 말라. 어떤 것이 오염되는 것인가? 생사심(生死心)을 가지고서 조작하고 추구하는 것이 모두 오염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마조 선사가 평상심이 도라고 할 때의 평상심은 곧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할 때의 그 마음임이다. 즉, 이때의 마음은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마음이며, 만법(萬法)의 근원으로서의 마음이다.

 

   요컨대 마조의 일심법(一心法)에서 말하는 바의 마음이란, “모든 법(法)은 모두 마음의 법[心法]이며, 모든 이름은 모두 마음의 이름이며, 만법(萬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겨나왔으니 마음이 만법의 바탕이다.”라는 일체유심(一切唯心) ․ 만법근원(萬法根源)의 마음이며, 동시에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따로 마음이 없는’ 마음, 즉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인 깨달은 자의 마음이다.

   따라서 이 마음은 바로, “일체법(一切法)이 모두가 불법이니, 모든 법(法)이 곧 해탈이며, 해탈이란 곧 진여이니, 모든 법은 진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이 모두 불가사의한 작용이다.”라고 하든가, “모두가 현묘한 작용이고 모두가 스스로의 일이며, 참[眞]을 떠나서는 설 곳이 없으니, 서는 곳이 곧 참[眞]이다.”라고 하는 일체개진(一切皆眞) ․ 입처즉진(立處卽眞)의 일원적(一元的)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마조 선사가 직접 설파한 평상심이란 이렇다.

   “평소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부러 꾸미지 않고 이러니저러니 판단을 하지 않으며, 마음에 드는 것만을 좋아하지도 않고, 단견 상견(斷見常見)을 버리며, 범성(凡聖)을 구분하는 생각과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만큼 마조 선사가 말한 평상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의 평범한 의미가 이니다. 그리고 부처가 되는 길은, 교종(敎宗)이 자랑하는 불경에 대한 지적(知的)인 이해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종 전통에서 강조하는 좌선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저 평상시의 마음만 유지할 수만 있다면, 바로 그 순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을 민중에게도 열어젖힌 것처럼, 선종은 마조 선사를 통해 몇 몇 근기가 탁월한 스님들의 치열한 참선으로 축소됐던 부처가 되는 길을 진짜로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어젖혔다고 하겠다.

   이제 부처는 선방(禪房)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생활 도처에서, 예를 들어 6조 혜능 선사가 몸소 보여주었던 것처럼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르는 운수반시(運水搬柴)의 과정에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평상(平常)이란 말은 ‘일상생활’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중요한 단어이다. ‘평(平)’이라는 글자는 저울이 균형을 잡고 있는 순간, 혹은 물의 표면이 동요되지 않고 잔잔한 순간을 묘사하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평’이라는 글자는 흔들리는 저울이나 요동치는 물과는 대조적인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도를 이루려면 일희일비하는 분주한 일상생활에서 이런 고요하고 안정적인 마음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런 마음 상태가 지속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평범한 우리들과 깨달음에 이른 부처들 사이의 차이이다.

 

   그래서 ‘평상(平常)’이란 단어의 두 번째 글자 ‘상(常)’이 우리 눈에 강하게 들어오는 것이다. ‘상’은 ‘항상(恒常)’이란 말이나 아니면 ‘상례(常例)’라는 말에서처럼 ‘지속’을 의미하는 말이다.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를 때도, 제자들에게 몽둥이질을 할 때도, 최고 권력자를 만날 때도, 어느 경우나 ‘평’의 마음이 지속될 때 마침내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상시의 마음이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마조 선사가 말했을 때, 진정으로 공부해야 할 곳은 바로 ‘상’이라는 한 글자에 있었던 것이다.

 

 

 

 

 

 

 

[출처] 무엇을 평상심이라 하는가?|작성자 명신산업안전검사